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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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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25일부터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동이 당혹스럽다. 무기력했던 “식물국회”가 다시 야성이 넘치는 “동물국회”가 되었다. 제1야당 의원들이 떼거지로 의장실에 몰려가서 남의 당의 사임과 보임을 허락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여자 의원을 앞세워 육탄전을 벌였다. 새로 사법개혁특별위원으로 보임된 채이배씨를 6시간 동안 의원실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또 국회 의안과에 들이닥쳐 여야 4당이 법률안을 제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문을 잠그고 묶고 자물쇠로 채웠다. 팔을 걸고 드러눕거나 줄지어 앉거나 인간띠를 만들어 회의장을 가로막았다.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며 비장하게 애국가를 불렀고, “헌법수호”를 외쳤다. 급기야 질서유지권이 발효되고 33년 만에 경호권이 발동되었다. 오랜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이다.

박근혜의 국회선진화법이 발목을 잡다

보는 이들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은 돌아온 “동물국회”가 아니다. 난동을 벌인 자들이 70-80년대 민주화세력이 아니라 수구세력이라는 점이다. 일제식민지 이래로 친일, 반공, 학살, 냉전, 반란, 유신, 고문, 공작으로 기득권을 이어온 자들의 입에서 “헌법수호,” “독재타도,” “불법야합,” “날치기” 등이 쏟아져 나오는 황당함이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 쇠노루발을 들고 당직자 앞에 나선 “나빠루”는 “결사항전”이라며 기염을 토했다. 전투력으로 치면 20년 전 민주당보다 한 수 위다. 무서울 때 목숨을 걸고 산전수전을 겪은 절실함과 저어함이 없다. 그냥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하룻강아지의 용맹일 뿐이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했던가.

민주당은 수구야당이 국회 폭력금지, 날치기 금지, 신속처리안건 지정 등을 규정한 국회법(일명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2년 새누리당이 19대 총선거에서 과반을 얻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만든 계략아니던가. 그런데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이 이제와서 “국회선진화법”을 스스로 어기고 있다. 여야 4당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는 일을 무력으로 훼방놓고 있다.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씨가 만들었다는 “걸작”이 이제는 걸림돌이 되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만든 법조차 어긴다

수구야당이 벌여놓은 난장판은 단순한 국회법 위반이 아니다. 어쩌면 최악으로 치닫는 수구세력의 운명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이문영(1986)은 포악한 통치자는 정권유지를 위해 악법까지 동원하지만 무리수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스스로 만든 (악)법조차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 끝간데 없이 해먹다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법에 의해서 처벌할 수 없게 되면, 집권자는 스스로 그 법을 버리고 새롭게 악법을 만든다. … 마침내 그것은 더욱 진전되어 집권자는 자신이 정한 악법을 집권자 자신이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340쪽).

“만일에 자신이 제정한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이 온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정권 스스로가 만드는 상황이다. 법은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 피치자인 국민에게 주는 신호는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호이다” (289쪽).

소정 선생님은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통치자(집권자)와 통치자의 폭력에 신음하는 국민을 상정했다. 수구야당은 제왕적 대통령이 경찰과 검찰을 접수하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와 언론을 장악하고, 이제는 입법부마저 노리고 있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강자의 엄살일 뿐이다. 촛불혁명으로 청와대 권력만 바뀌었을 뿐 입법, 사법, 행정, 언론, 재벌 권력은 그대로다. 삼성에 대한 검찰 조사와 언론 보도는 이 사회를 지배해온 얼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전히 기득권을 틀어쥔 수구세력은 적폐청산에 맞서 전방위에서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패악질에 신음하는 것은 여전히 국민과 이성과 상식이다.

“폭력에 기반을 둔 정권은 강한 것이 아니라 허약하기 때문이다. … 자기가 정한 법도 안지키기 때문에 이른바 시민적 불복종 운동으로 지칭되는 비폭력투쟁으로 붕괴가 된다”(1986: 297).

수구야당이 스스로 만든 국회법조차 무시하고 달려든 것은 기득권 세력이 자체 분열하면서 급속하게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다. 적폐청산이 진행되면서 잇속으로 뭉쳐있던 지배 세력이 서로 등을 돌려 각자도생을 모색하고 있다. 저수지의 뚝이 금가고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를 직감한 수구세력이 제 분에 못이겨 “헐크”가 된 것이다. 뜬금없이 “빨갱이 투사”로 변신한 야수가 난장판을 벌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울부짖는 까닭이다. 난동과 괴성은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허약한 속내를 숨기려는 몸부림이다. 진심과 합리성이 빠져있으니 그 메아리가 오래 갈 수 없다.

비폭력 준법투쟁으로 난동을 진압하라

그동안 수구세력이 보여준 태도와 언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청와대와 여당의 발목을 잡고 흠집을 내려는 계책으로 읽힌다. 국민들이 “좌파연합”을 과반으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야당이 동의한 공수처장이 어떻게 야당을 탄압하나? 대체 박근혜씨를 왜 풀어줘야 하나? 이성과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과대망상이다. 총선거에 사활을 건 수구 지도부의 부질없는 사술로 보인다.

여야 4당은 이럴 때일수록 더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괴물국회”도 이제 끝물이니 마지막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국민의 눈과 상식에 맞는 비폭력 준법투쟁으로 괴수의 발악을 진압해야 한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수구세력의 자해공갈에 말려들지 않도록 긴장하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시민사회도 냉철하게 잘잘못을 따지고 처절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때늦은 벚꽃이 서늘한 봄비에 맞아 화사하게 지는 날이다. 총선이 다가온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동물국회, 식물국회, 그리고 괴물국회. <최소주의행정학> 4(5): 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달 20일 문형배씨와 이미선씨를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했다. 이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지난 10일 두 후보자를 대상으로 인사청문회를 열었다. 여야는 이 후보자 내외가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거래한 사실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수구세력은 후보자의 재산내역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고 내부정보를 이용한 의혹이 있다고 했다. 금융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하고 후보자 내외를 검찰에 고발했다. 여당은 주식투자가 실정법 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법조계와 정의당은 이 후보자의 자질과 소수약자라는 점을 부각했다. 이 후보자는 본인의 주식을 처분했다고 밝혔고, 헌법재판관이 되면 남편의 주식도 전부 내다 팔겠다고 했다. 15일 발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할(28.8%)이 적격, 5할 이상(54.6%)이 부적격이라고 답했다. 이런 대결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누구의 눈높이를 말하는가?

누가 “국민의 눈높이”를 운운하면 나는 종종 그 “국민”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아전인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 후보자 내외의 전체 재산은 43억원이고 그 중 8할이 넘는 35억원을 주식으로 가지고 있다. 후보자 이름으로 된 주식은 약 7억원인데, 모두 남편이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판사로 재직하다가 법률회사의 변호사로 일해온 남편의 연봉은 약 5억원이라고 한다. 과연 이들의 재산불리기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일까? 손가락질을 당해 마땅한가?

한 가구의 재산이 40억원을 넘고 개인 재산이 9억원인 것은 보통 사람들의 눈을 벗어난다. 하지만 50대 내외가 판사이고 이름있는 변호사임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남편 연봉 전부를 한 10년 저금해서 이자나 챙긴 정도다. 시골 사람들도 다 어림으로 하는 셈법이다. 주식 대신에 서울 강남에 어지간한 아파트 두세 채를 사놓았더라면 크게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이재理財에 밝지 못한 내외다.

청문회에서 주식이 왜 이렇게 많냐는 푸념도 있었다. 부동산에 분산 투자하지 않고 주식에 몰아넣은 것은 분명 투기의 기본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주식보유량이 너무 많다거나 비중이 과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주식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과할 수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 보면 재력이 좀 있는 투자자일 뿐이고 재벌 총수의 눈으로 보면 티끌만도 못한 존재다. 그런데 왜 후보자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주식이 과하든 과하지 않든 실정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유재산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인가. 내외의 기본권을 짓밟는 폭력이다.

또 주식거래가 5천회에 이른다며 근무태도를 비난했다. 10년 동안 거래했다면 월평균 40여 차례 주식거래를 한 셈이다. 과연 근무시간에 업무를 제쳐두고 주식에 몰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직자가 업무에 전념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사람살이는 기계와 같을 수 없다. 자신들은 걸핏하면 국회를 뛰쳐나가 스스럼없이 딴짓을 하면서 후보자에게는 업무 외의 일(예컨대, 배우자에게 전화를 한다든가, 차를 마신다든가, 인터넷으로 송금을 하는)을 일절 해서는 안된다고 어거지를 쓰는 것은 아닌지. 주식거래에 눈이 팔려 엉터리로 재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수안 전 대법관은 “강원도 화천의 이발소집 딸이 지방대를 나와” 법관이 되었음을 환기시키고 남녀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법관 중 한 분이라고 했다.

수구세력에게 사유재산이란?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수구세력의 반응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이 주식거래를 비난하고 범죄로 몰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자나 깨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주의를 숭배하던 자들 아닌가? 사유재산을 반공산주의의 상징처럼 여기던 자들 아닌가? 얼마 전 사립유치원 비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사유재산을 빼앗는다며 비난했던 자들 아닌가? 2005년 사립학교법을 개정할 때도 사유재산을 지킨답시고 그리 난리를 친 자들 아닌가? 따지고 보면 부동산보다 주식시장에 투자한 것을 칭송해야 할 자들이 아닌가? 도대체 사유재산이 많다고, 주식에 “몰빵”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과연 보수고 시장주의자들인가? 자신의 사유재산은 눈꼽만치도 건들지 못하게 하면서 남의 재산에 대해 트집을 잡는 심보는 무엇인가? 보수도 뭐도 아닌 수구·냉전·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왜 수구세력은 이 후보자를 험악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먼저 이것은 그냥 화풀이다. 결국은 문재인을 헐뜯고 싶은 것인데 대놓고 못하니까 조국을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다. 조국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에 후보자를 거칠게 몰아붙여야 한다. 주식이 아니었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걸고 넘어졌을 것이다. 이 후보자 내외는 주식 때문에 이 곤욕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조국 때문에 애먼 매를 맞고 있다. 두번째는 수구세력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노무현씨에 대한 저주와 마찬가지다. 성골 진골도 아닌 “듣보잡” 주제에 언감생심 헌법재판관을 꿈꾸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지방대학을 나온, 그것도 멀쩡한 남자가 아닌 “치마” 판사아닌가? 아직 50줄도 안된, 이마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 아닌가? 돈을 좀 모았다고 족보를 사서 시답잖은 양반 흉내를 내는 쌍놈의 꼬락서니라니. 목불인견이다. 만일 이 후보자가 스카이를 졸업한 늙어빠진 “바지” 판사였다면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

이 후보자에 대한 수구세력의 언행은 과하다. 현행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위장전입도 없지 않은가? 지방대학을 나온 여자가 헌법재판관이 되면 안되는가? 주식투자로 재산을 묻어두고 여유있게 살면 안되는가? 같은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보라.

물론 주눅이 들었는지 후보자가 소신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남편에게 떠넘기는 모습은 아쉽다. 내외가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밝힌 대목도 씁쓸하다. 조폭의 매질에 못이겨 “삥”을 왕창 뜯긴 것은 아닌지. 청문회를 빙자하여 무고한 이를 꿇려놓고 무차별로 “말길질”을 해대는 모습이라니. 최소한 후보자의 인권과 재산권을 보장해주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씨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눈높이와 인사청문회의 폭력. <최소주의행정학> 4(4): 1.





지난 2월 야당대표가 된 황교안씨의 첫마디는 좌파정권의 폭정에 맞서 전투를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종북좌파들이 독재정권을 연장하는 꼴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경원씨도 지난 3월 원내대표 연설에서 대한민국이 좌파정권 3년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헌정농단” 정책에 집착하고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독재정권임을 수차례 언급했다. 또 해방후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고 주장하여 “토착왜구”라거나 “황나베”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정치인들의 입은 특히 4.3 보궐선거를 앞두고 더 거칠어졌다. 선거지원유세에 나선 오세훈씨는 노회찬이 돈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노회찬 정신을 깎아내렸다.


종북좌파의 독재정권이라고라?


정말 문재인 정권이 종북좌파인가? 수구세력들은 정적을 빨갱이라거나 사회주의라고 낙인찍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승만때부터 늘 해오던 짓이다. 현 정권이 국민들의 삶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북한을 떠받드는데만 혈안이 되었다고 비아냥 거렸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통째로 김정은의 손에 넘어간다고도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지령을 받는 정권이었으면 공산화는 벌써 수천 번은 되었을 것이다. 친일파를 포함한 반민족세력들이 남김없이 색출되어 3족이 도륙당했을 것이다. 과연 문재인, 노무현, 김대중이 어리석고 무능한 종북좌파라서 나라를 넘기지 못한 것일까? 친일파가 누구인지 몰라서 살려둔 것일까? 좌파독재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황씨나 나씨가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음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입나발이 터무니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수구세력들은 이 사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활하게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똑같은 빨갱이타령을 해댄다.


문재인 정권이 허구헌날 폭거를 저지르고 폭정을 일삼고 있는 독재체제인가? 정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처럼 포악했다면, 법도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토착왜구”들을 잡아다가 형틀에 매달아 물고物故를 냈을 것 아닌가? 북한에서 벌어졌던 숙청을 따라했다면, 그들을 인민재판에 줄줄이 세워 바로 총살했을 것 아닌가? 강자에게 달라붙어 호의호식을 해온 사람들은 폭정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해방 후 제주, 여수, 순천, 거창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빨갱이로 죽어갔는지 듣지 못한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의 말라버린 눈물을 보지 못한다. 그런 자들이 반성은 커녕 벌건 대낮에 나와서 헌정질서를 운운하고 독재와 폭정을 입에 담고 있으니… 과거 동족을 짐승처럼 사냥했던, 빨갱이란 불도장을 현란하게 휘둘렀던 폭력와 다를 바 없는 말폭력이다. 예나 지금이나 반칙과 흉계로 권력을 탐해온 자들의 더러운 주먹질이다.


수구세력의 끝간데 없는 말폭력에 상대 정치인들은 말포화로 맞대응한다. 예컨대, 민주평화당은 반민특위에 관한 나씨에 발언에 대해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정당, 매국정당, 5.18 광주시민들을 짓밟은 전두환의 후예, 국민학살 군사독재 옹호정당”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당은 오씨의 발언을 “일베 등 극우세력들이 내뱉는 배설 수준의 인신공격,” “망언이 일상화된 자유한국당색에 푹 빠져 이성이 실종된 채 망언 대열에 합류한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런 말폭력 대응은 갈등을 수습하고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지한 성찰도 없는 감정싸움에 휘말릴 뿐이고,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판짜기에 놀아날 뿐이다.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4일자 손석희씨의 <앵커브리핑>은 고요하지만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수구세력의 말폭력에 어찌 대응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손씨는 비열한 오씨의 비난은 “차디찬 일갈”로 접어두고 노회찬에 대한 소회를 담담히 풀어갔다.


“노의원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파문에 파문을 낳은 오씨의 “거리낌없이 던져놓은” 그 말 때문에 역설적으로 손씨는 노회찬에 대한 규정과 재인식을 생각해 냈다고 했다. 노회찬은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즉, 노회찬은 돈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 노회찬에게 ...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손석희씨는 마무리를 하면서 두 번씩이나 10초 가량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도 마음이 무너져 목이 메었을 것이다. 노회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사람들까지도 급소를 찔린 듯 꼼짝도 못하고 전율에 떨었을 것이다. 이것이 소정의 비폭력이자 최소주의다.


너무나 옳고 공감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적의 이성마저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2008: 66, 89, 491, 497, 615). 수구기회주의 세력이 날조뉴스와 말폭력으로 패악질을 저지른다고 해서 똑같이 대응해서는 안된다. 폭력의 대안이 또다른 폭력일 수는 없다(1986: 290). 물론 포악한 수구세력의 주먹질에 지레 겁먹고 말도 못하고 무작정 얻어맞기만 해서도 안된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 매를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한다(1991: 118). 다만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 되지 않게끔 조심해야 한다(1991: 322; 2001: 246). 감정을 절제하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1996: 56).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이다(1980: 384).


말폭력이 난무하는 요즘 진심이 담긴 탈상의 변이 오래 마음을 울리고 별처럼 빛나는 까닭이다. 우리에게 노회찬과 손석희가 귀한 까닭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수구세력의 말폭력과 손석희의 비폭력. <최소주의행정학> 4(3): 1.


올해가 己未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백 년이 된다. 백 년 전 오늘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을사늑약乙巳勒約(1905)과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를 거치면서 조선 민중을 옥죄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무장봉기가 아닌 철저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일제는 잔혹한 무력진압으로 맞섰다. 공식 집계만 해도 백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각지에서 참여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거나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제는 무단통치방식을 포기하였다. 헌법 전문에 나와 있듯이 3.1운동은 대한민국이란 물줄기의 발원지였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총독부 앞에 휘날리던 일장기를 끌어내린 자들은 독립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그들이 게양한 깃발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염원이 무산되면서 남과 북에서 그들만의 권력을 틀어쥐려는 무리들이 또다시 이 땅을 갈라내고 동족상잔의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4.3학살, 여순항쟁, 한국전쟁, 보도연맹학살은 그들만의 제단에 뿌려진 무고한 피였다. 이승만 일당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좌절시겼고, 단두대에 세워진 친일파를 풀어주는 대신에 그 자리에 정적을 끌어다 놓고 마구잡이로 “빨갱이칠”을 해댔다. 혹독했던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미군을 등에 업은 반민족·친일·기회주의자들의 폭정에 시달려야 했다. 3.1운동을 이은 4·19, 5·18, 6·29, 촛불혁명은 배신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처절한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끊임없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도도하게 흘러왔던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3.1운동은 아직도 진행중일는지 모른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백 년이 지났어도 이 나라 백성들은 여전히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자에게 맞서고 있다. 투쟁대상이 일본 제국주의와 동족의 피를 빨아먹은 친일파에서 “빨갱이칠”로 기득권을 이어온 수구·냉전·반공세력으로 바뀌었을 뿐 갈등 구조는 그대로다. 애초부터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아니라 이성과 상식과 양심이 기득권을 위해 배반과 변신을 거듭해온 수구기회주의 세력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義를 내팽개치고 利만을 쫓아온 강자의 폭력에 약자는 어떤 자세로 맞서야 하는가? 소정 선생님께서는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人道生存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하나,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첫번째 공약은 “일”에 관한 언급인데, 일본제국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에 의하여 핍박받고 있는 동포의 고유 권리를 찾는 거사라는 점을 말한다(1991: 329). 두번째는 육체의 종식으로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사람”의 책임과 운명을 말한다(1980: 358; 1991: 319, 329). 마지막은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라는 “방법”을 말한다. 한마디로 비폭력 평화 투쟁을 천명한 것이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먼저 질서를 존중하며,”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등은 철저한 비폭력 의지를 말한다(1996: 407).


소정의 초월윤리와 촛불집회


이문영(1991)은 사람·일·방법이란 범주와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으로 발전하는 초월윤리를 연결시켰다(48-49쪽). 공약삼장에서 보면 일(此擧)은 긍휼감으로 민족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사회윤리이며, 사람(一人)은 마지막 육체의 존재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기희생을 표현하며, 마지막으로 방법(行動)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라 할 수 있다(1991: 318-319).


출처: 이문영(1991: 162-170; 1996: 403-407)에서 재구성함.
방법사람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
신信예지禮智인仁의義
그리움한숨감동


공무원으로 치면 비폭력은 권력남용을 자제하는 일이고, 개인윤리는 법령을 준수하는 일이고, 사회윤리는 소외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일이며, 자기희생은 손해보면서까지 시민참여(예컨대, 공무원 노조)를 허용하는 일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도리와 사단四端으로 치면 각각 信(光名之心), 禮(辭讓之心)와 智(是非之心), 仁(惻隱之心), 義(羞惡之心)와 대응된다(1996: 403-407). 신信은 예지禮智에 앞서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덕목으로 비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개인윤리는 폭력이 멈춰진 뒤 합의를 모색하고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1996: 404). 또한 불쌍한 자를 긍휼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회윤리를 기대할 수 있으며, 사람으로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권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고 기꺼이 불이익을 당하는 자기희생이 가능하다(1996: 405, 437).


공약삼장은 지난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계속되었던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개인적으로 박근혜씨가 미워서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이게 나라냐”는 기본 질문을 한 것이다(일, 사회윤리). 민심을 억압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이었지만 남녀노소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많게는 하루에 이백만 명이 넘게 모였고, 당당하게 주권자의 의사를 시원스레 밝혔다(사람, 자기희생). 수백만 명의 함성과 발구름과 소등 시위는 구중궁궐에 포위되어 있는 박씨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겠지만, 백성들에게는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하는 축전祝典이었다.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참여한 개인발언은 민심 그대로였다. 방법으로 치자면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끝까지 질서가 유지되었으며, 폭력이 추방된 비폭력 운동이었다(방법, 비폭력과 개인윤리). 경찰이 벽을 치고 긴장을 조성한 면도 있었으나 시민들 스스로 폭력을 자제하고 질서를 외쳤으며 집회가 끝난 뒤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모범을 보였다. 총 23차에 걸친 집회에서 총 천 오백만 명이 참여했지만 폭력으로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계절”을 그리워하고, 이명박근혜라는 현실에 한숨짓고, 꿈꾸는 너와 나의 미래를 확인하며 감동했던 혁명이었다.


『맹자』의 설궁장과 최소주의


이문영(1980)은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힘과 권력남용으로 대표되는 官의 벌거벗은 힘이 부딪치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싶었다(vii쪽). 이런 대결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양 극단이지 일반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자들의 폭정(권력남용)도 극복해야 하지만 백성들의 난동 역시 자제되어야 한다. 꼭 필요할 때에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최소행동이 필요한 까닭이다.『孔孟』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의 설궁雪宮장은 이러한 소정의 최소주의에 맞닿아 있다.


“齊宣王見孟子於雪宮。王曰 賢者亦有此樂乎? 孟子對曰 有。人不得則非其上矣。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제선왕이 맹자를 설궁에서 만났다. 왕이 말하기를, 현자에게도 이러한 즐거움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그 윗사람을 비난합니다.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 위사람을 비난하는 자(백성)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지 않는 자도 잘못입니다” (『孔孟』 「梁惠王章句 下」4).


여기서 즐거움을 무엇을 말하는가? 이 장에 앞서 맹자는 왕이 백성과 더불어 음악, 사냥, 동산을 즐긴다면 왕노릇을 할 수 있다(與百姓同樂則王矣)고 했다. 현자(백성)도 왕과 마찬가지로 멋진 별장을 노니는 즐거움이 있다. 왕이 백성들과 더불어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백성들과 같이 동산을 이용하면 백성들은 왕의 즐거움을 같이 느낀다. 소정의 초월윤리로 치면 윗사람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는 물론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백성이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무엇인가? 왕의 동산에 들어왔다고 무조건 때려죽이거나 법에도 없는 일(예컨대, 벌금이나 형벌)을 강요하는 일은 없지만,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거나 (그들에게 예외를 허용하거나) 동산을 백성에게 개방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다. 최소한 비폭력과 개인윤리를 보여주지만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는 이르지 못한 경우다. 이 때 백성들이 왕의 동산이나 별장을 누리지 못해서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지나친 행동이며 과격이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난동이다. 그들이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성백효 2014: 110). 윗사람이 되어 권력남용을 안하고 법령에 나와있는 일만 하는 것은 물론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백성들에게 비난받고 매맞고 쫓겨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백성이 왕을 비난할 수 있을까? 왕의 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동산에서 사슴을 죽인 자를 살인죄로 다스리는 경우이다(성백효 2014: 101). 예컨대, 법에서 정한 살인죄도 모자라 7족에게도 죄를 묻는 패악질을 하는 경우다.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은 커녕 개인윤리나 비폭력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포악한 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리석은 독재자들은 무력만 믿고 끝간데 없이 폭정을 휘두르다가 스스로 무너진다(1986: 289, 297). 서로 더 해먹으려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치고 박다가 끝내는 자기들이 만든 법조차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비폭력은 물론 개인윤리조차 무너진 상황에서 백성의 원성과 죽창은 피할 길이 없다.


소정의 최소주의로 나아가라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초창기에 8할이 넘었던 대통령 지지율은 현재 절반에 머물고 있다. 개헌, 선거법개정, 적폐청산, 사법농단수사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불만이다.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현하려는 시도는 사회주의로 치부되고, 최저임금인상을 포함한 소득주소성장정책이 오히려 민생경제를 망치는 주범으로 몰린다. 북한에 속아 GP를 철수하고 한미훈련을 중단하고 안보를 포기했댄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립유치원, 미세먼지 등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호시탐탐 민심을 호리는 날조뉴스들이 넘쳐난다. 야당 대표는 총체적 난국에 처한 좌파정권의 폭정을 막겠다며 기염氣焰을 토한다.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현정권이 정치를 망치고 경제를 망치고 안보를 망치고 통일을 망쳤으면 하는 주술과 희망사항을 저주로 퍼붓고 있다. 작정을 하고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던 수구 야당과 언론의 모습 그대로다. 경제파탄과 불통과 퍼주기라고 또다시 헌나발을 불지만 “경포대”보다도 처참했던 이명박근혜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북미관계가 틀어져 장거리미사일이 하늘을 날던 시절만을 오매불망하고 있다.

과연 문재인 정권은 이런 비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가? 유시민씨의 말대로 모든 구악이 그대로인 채 대통령만 갑자기 바뀐 것 아닌가. 야당에서 “침대축구”를 하면 개헌이든 뭐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수구세력들이 사사건건 적폐청산을 가로막아왔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법령을 준수하는 민주정권의 “약점”을 최대로 악용해왔다. 시민사회도 그동안 짓눌렸던 욕망과 불만을 드러내고 자기 몫을 요구하고 있다. 그저 대통령이 알아서 뚝딱 만들어내라는 심산이다. 이 조급함과 이기심을 수구세력이 파고들고 있다.


오래도록 쌓여온 못된 관행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각자가 변화하는 고통과 손해와 혼란을 감내해야 한다. 의사에게 병을 당장 고쳐내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병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참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놀리면 화타가 명약을 줘도 병을 고칠 수 없다. 당장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윗사람을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감동은 아니어도 폭력을 휘두르고 법규를 무시하는 포악한 정권은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조급하게 굴지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과욕과 무책임한 난동은 음흉한 수구세력의 장단에 놀아나는 짓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신중하게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절박했던 3.1운동을 돌아보자. 광장에 모인 천만 촛불의 간절함을 상기하자. 利가 아닌 大義를 위한 실존의 몸부림아니었던가. 절실한 최소한의 요구를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


참고문헌

  • 성백효. 2014. 현토신역 부안설 맹자집주: 天. 경기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과 최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4(2): 1-2.




얼마 전 미얀마(Myanmar)에 출장을 다녀왔다. 양곤(Yangon)에 며칠 머물면서 짬을 내어 전통시장과 차이나타운을 둘러봤다. 21층 호텔방에서 맞은 아침은 감동이었다. 발 아래로 미얀마(버어마)의 상징이자 자랑이라는 쉐다곤탑(Shwedagon Pagoda)이 서 있고 멀리 흐르는 양곤 강에 배가 오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 시뻘건 해가 넘어가면서 무심한 강물이 만나는 두물길에 그려놓은 풍경화는 인상에 깊이 남았다. 호텔에서 바라본 양곤은 정말 아름다웠다.


다정한 남매와 저녁을 먹다


호텔에서 짐을 풀었을 때 2년 전에 졸업한 제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여자친구와 만달레이(Mandalay) 공항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나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행여 부담을 줄까 저어하여 일절 방문소식을 알리지 않았는데 뜻밖이었다. 양곤에 잘 도착했다고 적었더니, 그는 호텔방으로 전화를 걸어서 극구 저녁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언제나 밝고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다. 교정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지내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그는 정체가 심했다며 미안해 했다.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해졌지만 여전히 건강해보였다. 근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여동생을 데려왔다. 침착하고 수더분하고 당차게 보였다. 식당에서 그는 어떻게 야채와 고기를 고르는지, 어떻게 남비에 담궜다가 어느 양념장에 찍어먹는지 조심스레 알려줬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오랜 만에 만난 오누이가 다정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그는 지금 진학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와 연말에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저녁을 마친 뒤 차이나타운에서 산책을 했다. 설날 행사로 떠들썩한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던 여동생은 선물이라며 자스민차와 녹차를 사들고 돌아왔다. 은근한 마음이 전해진다. 새벽 일찍 출발을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안전운전을 신신당부했다. 어디 쯤인지는 몰라도 두세 시간 거리라고 했다. 다음 날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읽으며 나는 안심했다. 학교에 돌아와서 혹시나 해서 지도를 찾아봤다. 아뿔싸. 그는 양곤에서 700킬로 떨어진 만달레이 근처에 살고 있었다. 낙후된 도로 때문에 못해도 아홉 시간을 운전했을 그런 멀고 먼 거리였다.


쉐다곤탑에서 미얀마의 현실을 보다


현지 직원을 따라 양곤 시내 작은 언덕에 위치한 쉐다곤탑을 방문했다. 붓다의 머리카락 8개를 모신 신성한 곳이라고 했다. 호텔방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웅장하고 화려했다. 입구부터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6-10세기 경에 지어진 이후 계속 탑을 높게 개축해왔는데, 18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진 탑 꼭대기를 99미터로 높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탑이 벽돌로 세워졌는데 수많은 금박을 붙여 마무리를 했다는 점이다. 멀리서도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탑을 상상해 보라. 탑 꼭대기에는 귀한 보석을 박아놓고 망원경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금과 루비와 같은 보석이 많이 나는 나라에서나 할 수 있는 호사다.


탑은 긴 깔때기를 엎어놓은 형국인데, 가장자리에 다양한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서로 다른 부처상을 모셔놓았다. 사람들이 탑 주위로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성전을 둘러보게끔 해놓았다. 내 생일이라는 화요일 길목에 있는 부처상에 가서 소망을 담아 물을 서너 번 붓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탑 둘레를 거닐며 담소하거나, 바닥에 앉아 쉬거나, 혹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매년 많은 시민들이 기꺼이 시주를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이 탑을 갈고 닦고 꾸미고 있다고 했다. 어느 곳보다도 깨끗하고 단정하고 안전한 장소였다.


아마도 이 탑은 백여 개가 넘는 인종을 하나로 묶고 붓다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만들었을 터이다. 그 오누이처럼 사람들의 품성이 밝고 착한 것은 이런 까닭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금탑에 현혹되어 지배자의 통치이념에 순종하거나 고통받는 차안此岸을 외면하고 피안彼岸를 꿈꾸는 것같아 안타깝다. 바벨이란 도시에 세워진 탑을 보고 신이 노여워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소정은 “탑을 세우느라 동원된 국민들은 시간과 자원을 통치체제에 박탈당하며, 이 광장에서 탑을 보고 이를 건설한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탑의 건설을 지휘한 통치자를 숭배케 된다”(1991: 99-100)라고 적었다. 마찬가지로 이 쉐다곤탑을 보면서 사람들이 주권자 자신이 흘린 피와 땀을 망각하고 지배자인 왕과 식민지 총독과 군인정권의 치적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천년 양곤의 도로와 건물은 몇몇 현대식 건물을 제외하고는 신민지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조그마한 집과 가게들은 무너져 내릴까 위험해 보였다. 녹이 잔뜩 슨 철문으로 걸어 잠근 집과 아파트는 “우리”를 잊은 식민지배의 흔적이었다. 깨끗하고 안전한 곳은 쉐다곤탑이나 호텔 뿐인 것처럼 보였다. 도로 바닥은 고르지 못하고 요동치고 상하수도가 통하지 않아 냄새가 났다. 버스 위주의 대중교통은 부족하고 교통신호는 잘 지켜지지 않아 차행렬은 언제나 더뎠다. 어찌하여 쉐다곤탑에는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으면서 일상 생활을 개선하는데는 이리도 게으르단 말인가? 피안이 아닌 현실에서, 성지가 아닌 집과 거리에서 “쉐다곤탑”을 구현할 수는 없는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금덩어리 베개삼아 보석같은 세상을 꿈꾸며 행복하게 굶어죽을 것인가?


우리의 쉐다곤탑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도 어쩌면 서울 한복판에 “쉐다곤탑”을 세워놓고 멍하니 수구세력의 지배이념을 숭배하고 있는지로 모른다. 구한말 이래로 반공, 냉전, 반민족, 성장주의, 재벌주의 등이 우리 일상을 옥죄고 있다. 10대 교역국, 3만불시대면 뭐하나? 빨갱이면 사람도 아닌가? 북한과 잘 지내면 안되나? 한미동맹은 영구불변의 진리인가?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나? 최저임금을 올리면 기업과 경제가 망하나? 노조와 규제를 없애야 기업이 투자를 하나? 부자들이 종부세 더 내면 공산주의인가? 저 탑을 넘어야 답이 보인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미얀마 쉐다곤탑과 우리의 쉐다곤탑. <최소주의행정학> 4(1): 1.




바야흐로 적폐세력의 반격이다. 문정권이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값이 올랐다느니 하는 날조기사가 날이 갈수록 극성이다. 특히 유투비(YouTube)를 통하여 배포되고 재생산되는 날조기사는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위력을 더하고 있다. 급기야 김태우 특별감찰반원의 폭로는 어처구니없는 운영위원회로 이어졌고,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동영상은 여의도를 흔들고 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따지기도 전에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과 직권남용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어쨋든 문재인 정권이 한 짓은 이명박근혜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홀로 깨끗한 척 고상한 척 하면서 또 다른 적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수구냉전세력은 문재인 정권을 흔들어 대다가 여차하면 끌어내릴 꿈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지 않은가. 개헌이든 최저임금이든 사사건건 문정부의 정책기조에 시비를 걸고 나선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모두 개헌과 최저임금 인상을 공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제출된 청와대의 개헌안을 끝내 내팽개쳤고,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소득을 줄이고 경제를 망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을 비난하면서 뜬금없이 “출산주도성장”을 하자며 설레발이다. 쓸데없이 돈퍼준다고 반대할 때는 언제고... 수구세력의 패악질은 과거 노무현 정권시절을 연상시킨다. 그때는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몰아갔고 지금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로 주술을 걸고 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보수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수구냉전세력은 스스로 보수라고 칭한다. 우파라고 한다. 그 반대편에 선 세력을 좌파나 진보라고 부른다. 아예 종북세력이나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정치판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학계에서도 이런 진보-보수와 좌파-우파 분류법은 일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갈라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보거나 영점조준이 되지 않은 총을 쏘는 느낌이다. 이 땅에서 큰 소리를 내고 살아온 수구냉전세력이 정말 보수이고 우파라 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보수주의(conservativism)는 전통, 문화, 가치에 중점을 두고 권위, 질서, 안정을 지향한다. 자유주의(liberalism)은 인권과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다. 진보주의(progressivism)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지향이다. 우파는 재산권과 시장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capitalism)를 추구하고 좌파는 공동체의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socialism)에 친근하다. 이런 정치나 철학의 이념은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며, 그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기 어렵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이 땅의 보수는 이런 분류법으로 정의되기 어렵다. 교통방송(TBS)의 <장윤선의 이슈파이터>(2018. 6. 14)에 출연한 이해찬씨는 민주당과 수구세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이 진보 아닙니다. 민주당은 개혁세력이라고 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정강정책을 보면 유럽에 있는 진보당, 진보세력, 노동당이라든가 사민당, 거기보다 훨씬 정책이 보수적이잖아요. 자꾸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데, 우리당이 제가 보기에는 중도우파 정도 되는 겁니다… [현재] 보수는 보수가 아니고 수구세력이거든요. 말하자면 냉전체제하고 분단을 이용해서 내려온 수구세력아닙니까? 거기에다가 재벌들하고 유착되어있고…”


이해찬씨는 우리나라 정치세력의 지형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진보가 아니라 중도우파이고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수구세력이 보수가 아니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내 생각으로는 민주당은 중도우파이지만 보수와 자유와 진보의 색채까지 넓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요구를 소화해내는 데 힘겨워하고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최근 정의당같은 진보정당이 선전하면서 민주당의 고민과 부담은 다소 줄고 있다.


이 땅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수구세력들은 우선 언제나 힘있는 편에 선다. 일본이 득세할 때는 친일파로 설치다가 이제는 미국이 시키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며 성조기를 휘날린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독도영유권, 미국산 쇠고기, 일제 성노예(sex slave), 미군 THAAD 배치를 어찌 처리했는지를 되돌아 보라. 둘째, 의리義理가 아니라 그때 그때의 이득利得을 쫓는다. 그들의 합리이고 원칙이고 진리이고 정의이고 이념이다. 한마디로 기회주의다. 세째, 책임과 의무와 도덕은 상대방의 몫일 뿐이어서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파면되었어도 반성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자신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지 상대방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내로남불”은 사실 이들의 전매특허다. 마지막으로 사실이 아닌 자신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목숨처럼 달고 살아온 자신의 약점 그대로를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고 저주를 퍼붓는다. “이분법”이나 “싸가지”나 “경포대”라고 진보세력을 비난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빨갱이칠하고, 품격없는 언행으로 지탄을 받고, 고문과 사찰로 인권을 유린하고, 시장을 어지럽혀 경제를 망친 자들이 바로 수구기회주의세력이었다.


수구기회주의자의 패악질에 대처하는 법 


이러한 기회주의자들의 난동에 도덕성과 합리성으로 대응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애초부터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힘과 이득을 노리고 벌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이기 때문이다. 김태우씨의 폭로에 대해 청와대가 시시콜콜 해명한 일이 부질없는 까닭이다. 무슨 말을 하든 대화와 토론이 아닌 공연한 시비거리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똑같이 패악질로 대응하면 “그놈이 그놈”이라는 노림수에 걸려든다. 그래서 힘든 싸움이다. 따라서 냉철하게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냉정하게 응수해야 한다. 절대 흥분하지 말고 진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정적이 아닌 국민을 바라봐야 한다. 오랫동안 진보세력을 짓눌렀던 피해의식과 도덕결벽증을 떨쳐내야 한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말만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결국 소정의 최소주의가 답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8. 보수의 탈을 쓴 기회주의자의 패악질. <최소주의행정학> 3(12): 1.





선동렬 국가대표 야구감독이 11월 14일 전임감독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국가대표 야구선수단의 명예회복, 국가대표 야구 감독으로서의 자존심 회복,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영예 회복”을 위해서라고 했다. 선감독은 올해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선발과정에서 일부 선수에게 병역면제 특혜를 주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일부 야구팬들은 분노했고 비난을 쏟았냈다. 심지어는 야구대표팀이 은메달을 따길 바란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야구 대표팀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의혹과 비난은 잦아들지 않았다. 급기야 선감독은 지난 달 10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호통을 듣고 굴욕을 당했다. 23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는 야구대표팀 전임감독이 필요하지 않으며, 선감독이 경기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텔레비젼으로 야구경기를 본 것은 불찰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런 사퇴선언에 놀란 야구위원회와 정총재는 선감독을 붙잡는다고 소동을 벌이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과연 선동렬 감독은 그런 지탄을 받아 마땅한가?
 
선동렬은 영웅이고 전설이다
 
선감독은 지금까지 줄곧 야구인으로 살아왔고, 야구선수로서 야구감독으로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업적을 이뤄냈다. 그는 주요 대목마다 감동을 안겨준 영웅이었고 야구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에게 야구는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삶 자체였다. 선감독은 사퇴하는 것이 “야구에 대한 저의 절대적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고, 야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병역 특례에 대한 시대적 비판에 둔감했습니다. 금메달 획득이라는 목표에 매달려 시대의 정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공을 만지기 시작한 이래 저는 눈을 뜨자마자 야구를 생각했고, 밥 먹을 때도 야구를 생각했고, 잘 때도, 꿈속에서도 야구만을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선감독은 평생 한 우물만 팠고 끝내 일가를 이루었다. 뛰어난 그의 전문성과 업적은 선동렬을 영웅과 전설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즐거움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무등산 폭격기”와 “국보급 투수”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선감독의 재능과 헌신을 오래 기릴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제 성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확인과 증거도 없이 선감독을 깎아내리느라 여념이 없다. 전문가의 권위를 허물고 영웅을 만신창이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차범근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축구대표팀에서 물러났을 때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왜 우리는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는 것일까? 영웅을 영웅으로 지키고 대접하지 못하는 것일까?  
 
전문성을 모르는 바보들의 난동
 
선감독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는 야구팬이나 선감독을 국정감사장에 불러내어 호통치는 정치인이나 눈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 아무말이나 둘러대는 총재나 무책임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각자 기분에 따라, 자신의 처지에서 유리한 “정치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손혜원씨나 정운찬씨가 야구팬이라 하더라도 야구전문가라 할 수 없다. 선감독 앞에서는 오묘한 야구의 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불감증환자거나 바보천치일 뿐이다. 기껏해봤자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격이다. 바보는 자신이 바보임을 모른다. 그래서 단순무식한 용맹스러움은 서슴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선감독의 재능과 경험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물증이 아닌 심증으로 선감독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다. 문자가 틀렸다며 다짜고짜 공자의 뺨을 후려치고 있다. 이 패악질은 바보들의 난동이다. 
 
이른바 “야구팬”임네 하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비단 야구 뿐인가? 어느 선수가 득점을 하면 환호성을 지르다가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 야유를 보내고 삿대질을 한다. 선수가 그것도 못치냐며 힐난하고 그런 쉬운 공도 못잡냐며 분개한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어야 한다거나, 이 대목에서 누구를 구원투수나 대타로 기용해야 한다며 감독의 무능을 한탄한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한 성깔하는 팬들은 술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보호그물에 오르기도 한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면 아예 웃통벗고 경기장에 난입하여 소동을 피우는 자들도 있다. 철없는 자들의 난동질이다. 텔레비젼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제갈량의 혜안”으로 훈수질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가 활동으로 야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경기를 즐길 수 있다. 각자 좋아하는 선수나 야구단이 있고, 좋아하는 야구 기량과 전략이 있다. 야구 규칙을 모른다고 해서 야구를 보지 말란 법도 없다. 맞든 틀리든 각자 즐겁게 야구를 보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선호와 의견과 기대와 다르다고 해서 선수에게 삿대질을 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경기 중에 실수를 했다고 해도 선수와 감독에게 돌팔매질하는 것은 과하다. 야구에 관한 한 야구 전문가와 맞먹으려 달려드는 짓은 무례하고 어리석다.
 
관중의 훈수질은 자기만족을 위한 훈수질에 그쳐야 한다. 야구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야구를 해봤고 오랫동안 야구를 봐왔다 해도 프로야구 선수나 감독의 전문성에 미치지 못한다. 선수출신으로 오랫동안 야구 해설을 해왔던 허구연씨도 감독으로서 처참한 성적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하물며 야구를 눈으로 즐겨온 “야구광팬”임에랴… 한마디로 야구인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설령 자신의 생각과 달라서 동의하지 못한다 해도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전문성이 없는 전문가들의 시대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료제는 전문화된 관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관료제가 합리화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업무를 잘 나누고(division of labor), 그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을 데려와서 맡기고, 전업으로 최대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리도 보장해주고 급료를 지불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이런 전문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같지 않다. 전문가가 되려면 그 전문분야에서 철저한 훈련 (thorough training in a field of specialization)이 필요하고, 자격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선감독으로 치면 피땀흘리며 기량을 연마해 왔고, 각종 경기에서 빼어난 성적을 냈으며, 감독으로서도 여러차레 우승을 일구었다. 그의 야구 전문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전문성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많이 아쉽다. 전문성에 걸맞는 가치(가격)를 부여하고 권위(존경)를 세워주는 일에 인색하다. 어쩌면 인격을 가진 자연인으로서 혹은 주권자로서 누구나 동등하다는 생각이 지나쳐 전문성도 똑같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내용으로서 전문성보다는 절차로서 자격요건을 충족시키는데 몰입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래 전부터 박사학위가 넘처나는 사회다. 운전면허증을 따듯이 박사학위를 따는 사회다. 학력과잉 사회다. 길거리에 치는 것이 박사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그 많은 박사 중에 과연 얼마나 학위에 걸맞는 전문성을 갖추었을까? 박사는 많은데 진짜 박사는 드물다는 자조가 있다. 엉터리 박사를 확인할 방법도 절차도 마땅찮긴 하나, 행여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는 형국은 아닌지… 
 
요즘 방송에 여기 저기 출연하여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만가지 일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놓곤 한다.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법이면 법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인다. 사회자가 무슨 질문을 던지면 자동판매기처럼 술술술 답을 풀어낸다. 질문받은 분야를 공부하지 않아서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박학다식에 놀라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수준이 대체로 일반 상식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전문성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말재주나 자극적인 말장난으로 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한 우물만 깊이 파고 드는 전문가(specialist)가 아니라, 멀쩡한 외모와 화술로 여기 저기 그럴 듯하게 긁어주는(무책임한 “훈수질”과 “정치질”에 능한) 일반인(generalist)일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대중은 전문성을 구별해내기 힘들다. 여론을 조작하고 탄압한 정부에서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힘들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그나마 낫다. 하지만 민주 정부에서는 아무나 말을 쏟아내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골라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작정을 하고 뉴스를 날조하여 퍼트리는 경우에는 진실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힘겨루기가 된다. 지금 촛불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쉽게 값싸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얘기만 골라듣는 경향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누군가 날조뉴스를 생산하면 수구세력들이 유투비(YouTube), 전자우편, 모바일 메신저(카카오톡) 등에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다. 과거에 권력으로 여론을 찍어눌렀던 자들이 이번엔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면서 부르짖고 있다. 딱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우열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끝간데 없는 화력싸움만 벌이고 있다. 이 싸움은 대개 쪽수 많고 목소리 큰 무리가 이기게 되어 있다.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과대망상
 
모든 주권자들이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하고 각자의 인격이 차별없이 존중되는 것이 민주사회의 기본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에 차이가 있고 전문성에 차이가 있다. 누구나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쌓고 있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전문성을 서로 인정해줘야 한다. 선감독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자연인으로서, 주권자로서의 기본권리를 똑같이 누리고 있지만 야구라는 영역에서 선감독의 전문성은 독보적이다. 
 
그런데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전문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씨는 걸핏하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면서 일을 담당한 공무원의 전문성을 무시하곤 했다. 하다 못해 전봇대 하나 뽑는 일도 직접 챙긴 “이상사”였다. 박근혜씨도 일개 국장 하나 짜르라고 꼼꼼하게 지시하다가 망했다. 대통령이면 세상 만물을 다 아는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어떠한가? 기업의 총수는 어떠한가? 이들의 갑질은 전문성에 대한 몰이해로 시작해서 권한남용으로 끝난다.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우주의 이치를 깨우친 천재가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많다. 자신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먼저 공부를 하고 해당 전문가에 물어서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 한다. 손혜원씨가 야구팬이었다고는 하나 선감독이 정말 능력대로 선수를 선발했는지, 집에서 텔레비젼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적절한지, 야구우승이 어렵지 않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한참 지나친 언행이다. 도대체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드는가? 야구 경기를 좀 봤다고 야구 전문가가 된 것인 양 기고만장인 것은 과대망상일 뿐이다. 국회의원이라는 힘으로(국정감사장에 불러다가 아무 말이나 다 쏟아낸다는 점에서) 선감독의 권한과 전문성을 깔아뭉개는 짓이다. 누군가가 손씨에게 그림이나 치던 환쟁이가 어디서 감히 정치를 한다며 나대냐고 한다며 뭐라 대꾸할 것인가?

이래서 과대망상 정치인의 “갑질”은 선감독에게 곤혹 그 자체다. 자신은 야구를 말하고 있는데, 병역면제 책임을 묻고 비난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치인은 호기롭게 병역면제를 따지는데 선감독은 아는 것이 야구라서 야구 얘기만 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야구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어찌하여 정치를 물어놓고 맞네 틀리네 따지고 자빠졌으니…  국정감사에서 손혜원씨가 선감독을 다그친 대목을 살펴보자. 
 
“저는 선감독께서 지금부터 하실 일 두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과를 하시든지 사퇴를 하시든지… 지금 이렇게 끝까지 버티고 우기시면 계속 2020년까지 가기 힘듭니다.” “지금 1,200만 야구 팬들이요… 지난 한달 동안 20프로가 관객이 줄었습니다. 선감독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수를 소신껏 뽑아서] 우승했단 얘기하지 마십시오. 그 우승이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혜원씨는 세상 일을 손바닥 내려다보듯 하는 권능과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했을까? 누가 손씨에게 국가대표 야구감독을 그만두게 할 권한을 주었는가? 동경올림픽까지 감독직을 보장받은 선감독 아닌가? 특혜사실을 확인하거나 증거를 내놓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선감독이 버티고 우긴다고 단정하는 “용맹스러움”은 무엇인가? 선감독 때문에 야구 관객이 2할이나 줄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말 다들 야구우승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차기 대표팀감독으로 손씨를 추천하고 있다(우승이 그리 만만하다는 “여장군”이면 차라리 메이저리그 감독으로 모셔갈 일이다) 실력대로 소신껏 선수를 뽑았다고 강변하는 선감독은 완전히 낙담하는 얼굴이다. 
 
심증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병역면제시비는 명백한 증거가 필요하다. 선감독의 명성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병역면제가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병역면제가 야구 밖에서 시작된 일인 이상 야구장 밖에서 물증을 찾아야 했다. 예컨대, 선감독이 선수나 구단에게 언제 어디서 금품을 받았다거나 선수의 능력이 형편없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병역면제 혜택은 9명이 받았는데, 비난은 나이가 많은 오지환과 박해민에게 몰려있다. 병역면제를 기대하면서 일부러 경찰청과 상무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성적만 봐도 국가대표가 될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선수는 아니었다. 김수민씨의 말대로 수치로 표현된 1등만을 뽑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감독은 무엇을 하는가? KBO에서는 선동렬감독에게 동경올림픽까지 전권을 줬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선감독이 부여받은 권한과 전문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일까? 과대망상으로 선감독을 몰아붙인 손혜원씨나 유치찬란한 김수민씨나 정당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소신껏 뽑았다는 주장을 털끝만큼도 반박할 수 없었다. 손씨의 엉뚱하고 황당한 헛발질을 적어본다. 
 
“연봉을 얼마나 받으세요?”(황당한 선감독)“그리고 판공비는요?”(어이없어 웃는 선감독)“감독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 근무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까지 계십니까?”(야구감독이 교대근무하나?)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감독에게 감독이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게 멀쩡한 정신줄인가? 같은 방식으로 손씨에게 물어보면 어찌할까?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 뭡니까라고.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느냐고. 국민의 피와 땀을 세비로 몇 억씩이나 받아쳐먹고 출석은 제멋대로이고, 막말과 욕설을 쏟아내면서, 걸핏하면 국회를 파행으로 이끄는 이유가 뭐냐고. 판공비는 차지하더라도 특별활동비로 동료들 용돈을 챙겨주고 집에 가져가 생활비로 주는 이유는 뭐냐고. 
 
“정치야구인”의 기회주의 발언
 
정운찬 야구위원회 총재도 야구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야구전문가는 아니다. 경제학자로서 강단에 섰다가 잠깐 정치를 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정이라면 전임감독이 좋은지 나쁜지, 텔레비젼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입에 담지 않았어야 했다. 당장 쏟아지는 책임을 일단 회피하고 보겠다는 속내가 훤히 내비치는 발언을 삼가해야 했다. 
 
“선수선발은 원칙적으로 감독의 고유권한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간섭을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선수선발과정에서 여론이 여러가지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선감독에게 알리고 선발과정에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했었더라면, 또 선감독이 이것을 받아들였더라면… 저는 … 지금도 선수선발은 감독이 전적으로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그냥 선수선발은 감독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손혜원씨가 달변으로 밀어붙이니까 강단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이다. 세종시 원안을 밀어붙이면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막상 수정안이 부결되자 입씻고 슬그머니 자리에 눌러앉아 원안대로 추진했던 자 아닌가? 정말 거덜날 것이라고 믿었다면 자리를 내놓는 것이 순리요 상식이다. 나라를 거덜낼 사업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이 직접 추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국정감사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기회주의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 저는 전임감독제[를] 찬성안합니다 …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야구인들의 오랜 요청으로 전임감독을 두게 되었는데, 국정감사에서 총재가 전임감독이 필요없다고 말하면 어찌 되는 것인가? 탱크처럼 밀고 들어오는 손혜원씨의 주장대로 전임감독제를 폐지하자는 것인가? 
 
또 손혜원씨가 선감독이 집에서 TV로 경기를 본다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정운찬씨는 “저는 선동렬 감독이 불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장에 안가고 선수들을 살펴보고 지도하려는 것은 마치 경제학자가 시장 등 경제현장을 가지 않고 경제지표 가지고서 경제 분석하고 예측하고 정책대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대단히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말이었다. 전임감독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총장하고 총리하다가 어느 날 총재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야구전문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표팀 감독이 경기장에 가서 선수를 봐야 하는지, 텔레비젼으로 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지는 잘 모른다. 내가 총재였다면 “나는 모른다. 전임감독이 판단할 문제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야구는 정치가 아니라 경기다
 
도대체 전권을 부여받은 감독이 선수를 뽑고 경기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 왜 토를 다는가? 특별히 일이 없는 한 감독의 전문성을 인정해 주고 그의 판단을 존중해 줘야 한다. 선감독이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야구도 모르는 일가친척을 선수로 뽑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감독은 결과에 책임을 질 뿐이다. 
 
야구는 높은 전문성이 필요하다. 동네 야구라면 몰라도 아무나 야구 선수를 하고 야구 감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성이 있든 없든 아무나 몰려와서 감놔라 대추놔라 한다면 난장판일 뿐이다. 맞든 틀리든 민의를 받드는 것이 정치라지만 야구는 정치가 아니다. 경기 중에 실수를 저지른 선수를 빼라고 관중이 소리치면 감독은 당장 불러들여야 하는가? IT강대국답게 야구팬들의 실시간 반응이나 투표로 선수를 쓰고 작전을 결정해야 하는가? 유력 정치인이 누가 잘한다고 하면 그 선수로 교체해야 하는가? “야구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가? 이럴 양이면 뭐하러 감독을 두는가? 그냥 전화나 잘 받는 똘똘한 대학생을 데려다가 주문을 받도록 할 일이다. 예산도 아끼고 효율성이 높다. 아니면 선수들의 성적을 모두 수치화하여 그 수치대로 선수를 기용하면 성에 차겠는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치계산 결과에 따라 선수를 넣고 빼고 할 일이다. 그러면 경기에서 이기는가? 
 
그런데 경기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만인가? 이기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면 지는 것을 아예 없앨 일이다. 모두가 승자가 되도록 하면 된다. 굳이 많은 관중을 불러모아 야구, 축구, 농구 경기를 치러야 할 이유도 없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야구를 하고 그 경기를 지켜보는가?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하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구를 하는 즐거움과 보는 재미를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이기고 지는 것만을 따지는지도 모른다. 승패는 경기의 구성요소일 뿐인데, 이기는 것은 선이고 지는 것은 악으로 몰아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은 아닌지… 
 
선감독이 사퇴했으니 누가 그 뒤를 이을지 궁금해진다. 총재가 전임감독이 필요없다고 밝힌 마당에 대표팀 감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무슨 총알받이도 아니고 권한도 없이 책임만 짊어지는 자리아닌가? 가장 강력한 권한이 주어졌다던 전임감독도 비개비(비야구인)에게 속절없이 범죄자 취급을 당한 자리아닌가? 독배를 마시는 것 이상으로 비참하게 용도폐기될 줄을 뻔히 아는데 누가 나서겠는가? 인터넷에서는 벌써 대표팀 감독 하마평이 무성하다. 제일 설득력이 있는 것은 손혜원감독과 정운찬 코치다. 그들이 내뱉어 놓은 말에 따르면 어느 대회라도 어느 팀이 나오더라도 한국팀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아니겠는가.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일상이다.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와는 전혀 다르다. 지면 지는 것이고 이기면 이기는 것이다. 이기든 지든 어차피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난리들인가? 그냥 구미당기는 대로 경기 자체를 즐길 수는 없는가? 내가 응원하는 구단이나 선수가 아니라도 훌륭한 경기력에 박수쳐줄 수는 없는가? 철딱서니없는 일부 야구팬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들 알만 한 사람들이 똑같이 어거지를 쓰고 난동을 부린대서야 어디… 하물며 야구의 전문성이 없으면서 정치와 경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임에랴. 
 
따지고 보면 병역면제도 정치인들이 그때그때 여론에 따라(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만들고 바꿔왔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포함한 역대 정권에서 병역면제 혜택을 선심쓰듯이 베풀어 왔다. 국위를 선양한 것은 선수뿐만이 아니라며 BTS에게도 면제 혜택을 주자고 나선 자들도 정치인들이었다. BTS팬들의 말처럼 정치인들이 끼어들어 일을 망치고 있다. 선감독을 불러다가 호통을 칠 것이 아니라 국회 스스로 병역면제를 정치도구로 남용해온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했어야 할 일이다. 이제와서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덮어씌운단 말인가. 
 
그래도 선동렬은 영웅이다
 
우리에게 스포츠 영웅은 무엇인가? 힘들고 고통스런 일상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준 사람들이다. 김일 선수는 레스링으로, 홍수환은 권투로 국민들을 울고 웃게 했다. 축구에서는 차범근이 있었고 야구에는 선동렬이 있었고 농구에서는 이충희가 있었다. 최근에는 월드컵 4강을 이룬 축구대표팀이 있고, 피겨스케이팅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준 김연아가 있었다. 그 시대의 스포츠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영웅의 특징은 전성기가 길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공을 잊고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느 왕은 큰 공을 세운 자에게 반역이 아니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문서를 내렸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영웅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명백히 사회를 해치는 중죄가 아니라면 선처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孔孟』「梁惠王」下 4장은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不得而非其上者非也)”이라고 적고 있다. 작은 것까지 시시콜콜 따지면서 그들의 공을 깎아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어쩌면 영웅은 사회가 만들고 가꾸고 지켜주는 것이다. 사소한 일이나 분명하지 않은 일로 영웅을 끌어내려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사회는 영웅을 갖을 자격이 없다.

어쩌면 선동렬감독은 “정치”를 하지 못해서 그 곤욕을 치렀는지 모른다. 이른바 “올림픽 패러다임”에서 자의반 타의반 살아온 그였다. 야구밖에 모르는 전문가이자 외눈박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되었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했다. 선감독이 살아온 사회가 그랬다.  그런데 이제와서 “정치”를 왜 못했냐고 따지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퇴의 변이 아프게 느껴진다. 나는 선감독이 국정감사에서 사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영웅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달변은 아니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소신있게 뽑았다고 말을 이어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봤다. 선감독의 전문성과 업적에 걸맞는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사는 난동꾼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명랑해전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선 이순신을 기억하고 추앙한다. 선조는 왕위를 지켰는지는 몰라도 두고 두고 욕을 먹고 있다. 어쩌면 충무공은 죽어서 돌아왔기 때문에 더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이름값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물러난 차범근감독도 사람들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난동꾼이 아무리 시끄럽게 설쳐도 사람들은 영웅을 함부로 끌어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선동렬 감독도 지금은 참담하게 떠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영웅으로 오래 남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Weber, Max. 1978. Economy and Society: A Outline of Interpretive Sociology. Trans. Ephraim Fischoff et al., ed. Guenther Roth and Claus Wittich.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Chapter 11 Bureaucracy (pp. 956-963).

 
원문: 박헌명. 2018. 전문가주의를 망치는 바보들의 난동. <최소주의행정학> 3(11): 1-4.

 

 

지난해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인쇄된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미셨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글이라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평소에 볼 수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박근혜 탄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던 아버지여서 의아했다. 


“도울 김용욱”이라고라?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게 뭐야?”라고 내뱉었다. 김용옥 선생의 문장은 고사하고 잘 봐줘도 까까머리 중학생 수준이었다. 두서없는 문단 구성과 유치한 단어 선택이 딱 그러했다. 논리도 없이 박근혜씨 탄핵을 비난하는 내용은 가관이었다. 아버지의 의도가 읽혔다. 봐라, 박근혜를 비난하고 문재인을 지지했던 도올마저 이렇게 돌아섰으니 참으로 고소하다... 나는 바로 “이거 도올 선생님 글이 아니예요”라면서 어디서 받아왔는지를 여쭈었다. 우물쭈물하시는 동안 나는 다시 글을 살펴봤다. 허탈했다. 누군가 작성한 것을 퍼나른 것인데, 작성자와 퍼나른 자가 “도울 김용욱”이라고 적었다. 순간 의도성이 다분한 선수들이 공작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기용 기자의 <한겨레신문> 기사(2016.12.31)를 참조하라.  


이런 날조질은 도메인 이름을 선점하거나 마치 오타를 한 것처럼 비슷한 도메인 이름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키는 이름점거(Cybersquatting or typosquatting)와 구조가 같다. 예컨대, 고대와 관련없는 자가 korea.edu를 먼저 등록해놓고 흥정을 하거나  오탈자인 것처럼 kore.edu를 만들어 부주의한 방문자를 호도한다. 마치 실수를 한 것처럼 “도올”을 “도울”로 적어놓고 사람들이 도올 김용옥씨의 글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호린다. 유치하고 저열한 꼼수다. 적의 지지자의 입을 빌어 적을 치는 것이니, 지지자들의 사기를 꺾고 그들끼리 서로 다투게 만들고 끝내는 적을 무너뜨리는 전술이다. 꿩먹고 알먹고다. 전시에 사용되는 심리전으로서 흑색선전과 회색선전이다. 저열한 짓이지만 사려깊지 않은 대중을 낚는데 효과만점인 방법이다. 아버지께 이 글이 왜 엉터리인지를 설명하면서 나는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값이 올랐다?


또 하루는 외출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JTBC <뉴스룸>을 시청하고 있는 내게 한 마디 하신다. 마침 손석희씨가 문대통령에 관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문재인은 사상이 수상해.” “손석희, 저 xx는 거짓말이나 하고...”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나는 황당했다. 어째서 문재인이 수상하다는 거냐는 내 말에 “너도 사상이 이상해”라고 답하신다. 목소리에 격해진 감정이 실려있다. 그러더니 드디어 “요즘 쌀값이 왜 오른 줄 아남? 문재인이 북한에 쌀을 다 퍼다 줬댜!”라고 폭발하신다.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처절한 울분과 적개심이 이런 것일까? 도대체 누가 저 팔순 늙은이를 저리 만들었을까? 평생 쌀값은 커녕 콩나물값이 얼마인지 모르고 사신 분이 아닌가.


날조기사가 만들어지고 퍼지는 구조


얼마 전부터 <한겨레신문>는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연재물을 통하여 날조기사捏造記事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는지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김완, 박준용, 변지민 기자(2018.9.27)는 극우 기독교 세력이 이끄는 “에스더 기도운동”의 인터넷 게시판이 날조기사의 공장이자 진원지라고 밝혔다. 대표인 이용희 등이 날조기사를 만들면 이른바 “미디어 선교사”들이 인터넷에 퍼트리는 “인터넷 사역”을 맡았다고 했다. 난민, 동성애, 북핵, 문재인, 박원순 등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추천을 눌렀다고 했다. 이 기자들(2018.9.28)은 “정규재TV”와 “신의 한수”와 같은 극우 유투비(youtube) 개인방송이 날조기사를 퍼트리고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버지께서 매일 전자우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열심히 읽고 밤늦게까지 유투비를 보신 까닭을 이제는 알 듯하다. 언젠가 우연히 아버지의 우편함을 보았는데 하루에도 수십 개 편지가 보내져 왔고, 멋있는 그림이나 시나 격언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내용은 황당무계한 혐오, 저주, 분개로 일관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마도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유투비 방송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짜증날 정도로 집요하게 반복했다. 예컨대, 박근혜 탄핵이 부당한 20개 이유를 선언문 낭독하듯이 또박또박 읽어내렸다. 법과 논리와 무관하고 증거와 상식과 거리가 먼 황당한 격문에 가까왔다.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불경이나 성경 구절을 독송하는 식이다. 사실과 논증이 아니라 차라리 종교였다.  


이쯤 되면 누가 무슨 이유로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날조질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하다. 현 정권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세력이다. 적폐청산을 좌절시키고 정권을 망가뜨려 친일·독재·냉전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수구세력이다. 그 대상은 일반인 수준의 사리분별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쉽게 낚일 뿐만 아니라 일단 낚이면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박정희 신격화와 김일성 우상화와 같이 이들을 현혹하여 세뇌洗腦시킨 뒤, 포로나 노예처럼 붙잡아 놓고 통제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간첩들처럼 수많은 (젊은) 노인들이 똑같은 내용과 표현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주문을 외듯이 따라서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더가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을 찍으면 나라가 망하고 북한의 식민지가 된다”라고 지령을 내리면 마법에 걸린 어리석은 노예들은 어찌 할 것인가?


날조기사? 가짜뉴스?


날조기사는 흔히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부르지만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날조기사나 가짜뉴스나 유언비어나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날조기사는 일상에서 자연스레 벌어질 수 있는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라 정적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물어뜯으려는 악의가 담겨있다. 의도가 불순하고 폭력성이 강하다.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웹마실꾼들을 유혹하기 위한 미끼로 가짜뉴스를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둘째, 사소한 오해가 아니라 사실과 거짓을 그럴듯하게 찢고 째고 붙여서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유언비어와 다르다. 작정을 하고 적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치밀하게 짜놓은 흉계다. 세째, 그냥 뜬소문이 아니라 기사 형식으로 작성되어 사람들을 홀린다. 기사의 권위와 공신력을 빌어 뭘 모르는 사람들을 속여먹는 파렴치짓이다. 네째, 자연스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조직적으로 전투를 하듯이 퍼뜨린다. 이런 면에서 전시에 벌어지는 심리전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의를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적이며 사회의 암종이다. 항간에 떠도는 뜬소문과는 달리 나쁜 의도와 흠융한 내용과 비열한 방법으로 정적을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날조기사의 폐해弊害는 유언비어나 가짜뉴스에 비할 수 없이 크다.  


날조기사를 어찌할 것인가?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역할에 주목한 수구세력은 노무현을 저주하면서도 노사모의 온라인 활동을 모방했다. 다만 노사모의 정치의식, 토론, 열정, 헌신을 가슴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인터넷 사용 기술만을 머리로 베낀 것이 비극이었다. 마음만 급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글쇠판(keyboard)만 두드리다 보니 사달이 난 것이다. “십알단” 사건이나 국정원·경찰·국방부(기무사령부와 사이버사령부)가 협력한 여론조작과 대선개입사건이 그것이다. 모두 기사날조질과 구조가 같다.


이후 팟캐스트(podcast)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수구세력은 날조질을 유투비로 이어갔다. 기본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유투비는 팟캐스트보다 이용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유투비는 영상과 그림을 제공하고 팟캐스트는 라디오처럼 소리만 전달하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의 유투비 활동은 조직적이었고 현재 우세를 점하고 있다(한겨레신문, 2018. 9.28).


날조기사의 목표가 된 민주당은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위협한다고 했다. 날조질을 법으로 규제하겠다고 했다. 수구세력들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미국산 소고기수입 파동이나 촛불집회에서도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난무했다고 강변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날조기사를 규제하는 것은 “내로남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광우병 가능성을 보도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른 <PD수첩>은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최순실의 존재와 이명박의 다스는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과 거짓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날조기사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 


정보통신사업자의 면책 여부


정부규제는 날조기사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퍼뜨리는 과정에 집중된다. 유포과정에서 정보통신사업자(서비스제공자)의 역할과 책임을 어찌 정의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매체에 올려진 날조기사에 대한 사업자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으며, 사업자 스스로 검토하여 부적절한  내용물을 걸러내도록 할 수도 있다. 또한 부적절한 내용물을 사업자가 내리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사업자의 책임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물을 것이냐에 따라 규제 강도는 달라진다. 

첫번째 방법은 사업자에게 면책권(immunity policy)을 준다. 미국의 통신품위법(Communications Decency Act of 1996)에 따르면 통신사업자는 통신망에 올려진 정보내용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No provider or user of an interactive computer service shall be treated as the publisher or speaker of any information provided by another information content provider” (Section 230). 이 규정은 원래는 저작권(copyright)을 위반한 게시물을 사업자가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보면 서비스 제공자는 올려진 정보 내용이 남을 비방하거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임을 알고서도 삭제하지 않았다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Levmore and Nussbaum 2010: 24). 페이스북이나 유투비에 올려진 게시물은 사업자가 출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서비스 제공자가 알아서 정보 내용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미 구글(유투비)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부적절한 게시물을 걸러내고 있다. 하지만 날조기사를 포함한 유언비어와 저질 정보가 인터넷을 휩쓸면서 많은 사회문제를 초래하였다. 


세번째 방법은 피해자가 합당하게 항의하면 서비스 제공자가 해당 게시물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정책”(notice-and-takedown)이다. 미국의 Digital Milledium Copyright Act of 1998의 Section 512에 따르면 사업자는 저작권침해로 신고된 게시물을 신속하게 삭제하거나 접근불가 처리를 해야 한다. 이 조항 역시 저작권에 관한 것이지만 이 논리는 일반 게시물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44조에 사업자가 부적절한 게시물을 “끌어내리도록” 명시하고 있다.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침해를 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제44조의2). 사업자는 삭제·임시조치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즉시 삭제 신청인과 정보게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물론 어떻게 신청인과 게재인의 갈등을 관리할 것인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조기사 문제는 이 규정을 제대로 적용하면 해결될 수 있다. 


날조기사와 표현의 자유


날조기사를 규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Levmore and Nussbaum (2010)는 표현의 자유가 추구하는 가치를 진리 발견(discovery of truth), 자율성(autonomy), 민주 토론(democratic deliberation)으로 정리했다. Mill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틀릴 수 있는 존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면 진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결정할 자율성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다양한 의견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필수요소인 공개 논쟁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날조기사는 진리를 발견하는 노력이 아니라 진리를 흠집내고 땅에 묻는 일이다. 애초부터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남을 해코지하기 위해 사실을 위조했기 때문이다. 자율성을 발현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탐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또한 서로 간의 숙고와 토론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정적을 매도하고 저주하는 짓이다. 날조기사는 표현의 자유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나 객관성을 가진 기관이 엄정하게 사실 확인을 하면 날조기사를 판별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대통령이 치매라는 허무맹랑한 낭설임에랴...


자율성에 기반한 민의가 여론


소정은 자율성을 가진 사회집단의 건전한 압력으로 행정기구가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1981: vii). 즉 정당, 노조, 대학, 시민단체 등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날조기사는 자율성이 있는 백성의 뜻이 아니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의 작전이다. 민의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흉계다. 민의 난동이다.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아니라 사회부채(social debt)나 사회악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문제를 살펴서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참고문헌


Levmore, Saul, and Martha C. Nussabaum,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원문: 박헌명. 2018. ”도울 김용욱”과 날조기사 공작. <최소주의행정학> 3(10): 1-2.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2019. 4. 14. 11:41 | Posted by 못골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와 적폐 청산을 기치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올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기소되고 적폐세력들이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힘겨운 “여름나기”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지만 실업률은 2014년 이후 3%대에 머물다가 올해 4%대로 올라섰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9%대에서 얼마 전 10.5%를 찍었다(연합뉴스. 2018.6.15). 이른바 “취업절벽,” “결혼절벽,” “출산절벽” 등은 벼랑끝에 내몰린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득주도성장정책의 일환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정해졌으나, 한쪽에선 가파르게(10.9%) 오른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다른 쪽에서는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임금 항목이 늘어나 인상효과가 적다고 항변한다. 최근에는 아파트집 가격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상승하면서 정부가 주택관련 정책을 정비하고 보유세와 종합부동산세를 손질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종부세 강화에 분개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공시가격을 현실화하고 종부세를 더 올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연초까지 8할대 고공행진이었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6월까지 7할대, 8월까지 6할대로 떨어졌고 9월 현재 5할대로 내려앉았다. 민주당 지지율은 연초부터 6월까지 5할대를 유지하였으나 이후 4할 초반으로 내려앉았다.

요즘 분위기는 얼핏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때리기”를 떠올린다. 뜬금없는 “친문패권”에 이어 “제왕적 대통령,” “내로남불(문로남불),” “불통,” “독선,” “코드인사,”  “대북퍼주기,” “세금폭탄” ... 흘러간 유행가를 다시 듣는 식상함이 있다. 노무현 문재인은 코드인사라고 비난하면서 이명박근혜가 김기춘을 앉힌 것은 적합한 인사라고 말한다. 노무현 문재인이 주는 것은 “퍼주기”라고 쏘아붙이면서도 이명박근혜가 보낸 돈은 “통일대박” 투자라고 한다. 청와대에서 국민청원까지 받고 있는데도 불통이고 독선이면 이명박근혜는 대체 뭐라 해야 하나?

요즘 수구세력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말법은 이성과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컨대, 종부세 인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13 부동산 대책을 발표한 다음 날 김병준씨는 완벽한 실패라고 단언했다. 정책평가가 아니라 비난과 저주 그 자체다. 하물며 “마이너스의 손”이나 “광팔이 정권”과 같은 유치한 칭얼댐임에랴... 연극을 빙자해 육두문자로 노대통령을 욕보인 <환생경제>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난 해 읽었던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2007)와 <왕따의 정치학>(2017)을 다시 펼쳐 든 까닭이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의 정신줄은 별반 달라진 것같지 않다.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

참여정부시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고도 왜 노무현은 비난을 받았는가?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데 왜 노무현의 인기는 오르는가? 왜 진보언론마저도 유독 문재인을 가혹하게 구박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의 지지도가 견고하게 올라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기숙은 두 책을 통해 일관된 답을 주고 있다. 진보진영(진보정당, 시민사회, 진보언론)이 세력화하지 못하고 사분오열했고 수구세력과의 담론경쟁에서 밀려나서 국민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조기숙 2007: 9, 29, 48).

조기숙은 수구언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어 마법을 건다고 했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32쪽).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담론을 잘 표현하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마법의 유리벽”은 수구언론이 만든 담론 프레임이다. 이 유리벽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수구세력이 원하는 흉칙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춘다(22쪽). 일단 마법에 걸리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수구든 진보든,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남녀노소가 “노무현 때리기”와 “기승전—문재인”을 즐긴다. 현대정치에서 언론은 담론을 공론의 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힘센 수구언론이 “마법의 유리벽”을 만들어 낸다. “

이른바 “밤의 대통령이자 어둠의 마왕”이 부리는 이 마법은(42쪽) (1) 프레임 개발, (2) 확대재생산, (3) 기정사실화, (4) 국민들의 확신이라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꼬투리를 잡아 살짝 비틀어놓으면 다음 날 새누리당이 그걸 확대해서 공격했다. 그러면 저녁에 문화일보가 진보진영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의 인터뷰해서 살을 붙이고, 다음 날 오전이 되면 동아일보가 더 큰 문제로 확대했다. 한 이틀, 때로는 1-2주가 지나면 소위 진보언론이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보도했다”(87쪽).

첫째 단계에서 “조동문”(조선, 동아, 문화일보)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이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주술을 건다. 예컨대,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제왕적 대통령, 호남홀대 등이다(87, 310쪽).

둘째, 수구정당이 언론에 나온 얘기라며 공격을 하고, 수구언론이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교수, 연구원, 운동가와 같은 여론선도자(opinion leader)를 동원하여 판을 벌인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조간에 프레임을 만들면 그걸 받아 <문화일보>가 확대재생산하는 순환 홍보”라고 할 수 있다(33쪽). “어떤 쟁점에 대한 합리적인 찬반 토론을 통해 과학적으로 주장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언론이 주술을 만들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진보, 보수 진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 주술을 읊고 다닌다”(40쪽).

세째 단계에서 드디어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은 물론 진보정당마저도 마법의 세몰이에 넘어간다. 이 지경에 이르면 “조동문 프레임”이 기정사실화된다. 시민단체와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정부를 편든다는 어용시비가 두려워 수구세력의 부당한 비난을 눈감거나 무작정 맞장구를 치거나 수구세력보다 더 가혹하게 비난한다(45-47, 84쪽). 진보 언론인들의 “양심 결벽증”때문이다(조기숙 2017: 114-115). “노무현도 그렇고 문재인도 그렇고, 치명상을 입는 건 좌파언론이 우파언론의 왜곡보도를 확인사살할 때다”(조기숙 2017: 89).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유시민씨 역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다 때[리는]” 진보세력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또 열린우리당은 끌내는 자신을 옥죄는 줄도 모르고 나서서 참여정부에 흠집을 내고 서로 쌈박질을 해댔다. “영악한 보수언론은 진보진영의 낮은 변별력을 이용해 큰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물을 뿌렸다.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추방시킨 사람들은 바로 참여진영 인사들이다”(조기숙 2007: 206). 친노/비노/반노 프레임 공격에 맞서기보다는 스스로 친노를 해체했고, 문재인 역시 뜬금없는 “친문 패권”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일일이 대응하기] 귀찮아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먹잇감을 대주던 우리당이 통째로 보수언론에 잡아먹히게 된 것”(169쪽)이다. “진보진영은 사분오열했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제 발등 찍기에 바빴”고(48쪽) “열린우리당은 … 보수언론의 장단에 북치고 장구까지 친 것”(149쪽)이다. 조기숙은 “진정으로 뭘 반성해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보수언론의 주술을 그대로 따라 외면서 국민 앞에 반성한 것이 가장 큰 잘못”(167쪽)이라고 적었다.

마지막 단계는 일반 국민들도 홀려서 주문을 따라 왼다. 진보세력은 물론 진보 운동가, 교수, 언론, 정당까지 다들 그러니까 확신을 가지고 노무현과 문재인을 비난한다. 마법이 현실화된고 완성된다.

“조동문” 마법의 특성

생각을 덛붙이자면 수구세력의 마법은 우선 합리성과 관계가 없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구세력이 원하는 결론(비난과 저주)이 있을 뿐이다. 터무니없는 프레임이며 그저 신앙과 종교같은 믿음이다.

둘째, “마법의 유리벽”은 항상 나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원래의 뜻과 사실을 바꾸기 위해 단장취의, 맥락왜곡, 허위조작 등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조기숙(2007)은 “언론의 자의적 해석, 과잉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말꼬리 잡기, 말 뒤집기, 없는 말 만들어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적었다(22-23쪽).

세번째 특성은 차별화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정적을 끌어내려 짓밟는 반면 우군은 띄워주워 기득권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사실 수구세력의 전매특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옳은 말을 해도 몹쓸 말을 한 것처럼 매도하고, 이명박근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도 없었던 일로 넘어가거나 미화한다. 문재인은 항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찡그리지만 박근혜와 안철수는 후광이 비치고 해맑게 그려준다.

마지막으로 수구세력의 마법은 영원히 국민을 홀리고 속일 수는 없다. “마법의 유리벽”은 생각보다 깨지기 쉽다. 이치에 맞는 것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발이 오래 가지 못한다. 사실과 진실과 진심은 거짓과 왜곡과 눈속임으로 덮을 수 없다. 똑같은 것을 계속 써먹다 보면 내성이 생겨 잘 먹히지 않는다. 마약과 같은 셈이다. 참여정부 시절 수구세력은 “친노/비노”와 “세금폭탄”으로 재미를 봤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같다.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조동문”의  유리벽은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정치판에서 “마법의 유리벽”과 “왕따”가 위력을 발휘했지만 국민들은 끝내 노무현과 문재인을 버리지 않았다.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조동문” 마법력의 원천

왜 합리성이 없는 “조동문 프레임”이 먹히는 것일까? 참여정부가 담론 경쟁에서 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생각컨대, 첫째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이 그만큼 강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프레임 경쟁은 “쪽수”를 따지는 패싸움이나 세몰이에 가깝다. 경기규칙은 약육강식이다.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득권에 힘으로 맞서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현재 문재인은 “최순실정권”의 기저효과와 촛불혁명의 뒷배로 버티고 있다.

둘째는 수구세력이 능력이 탁월하고 영악하기 때문이다(조기숙 2007: 81-82). 기득권을 가진 만큼 인재들의 질이 높기 때문이다. 수구정당과 조동문 기자들의 능력이 진보정당과 한경오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이들의 조직력과 추진력은 정점을 찍었다. 사실 어설픈 프레임은 흥행하기 어렵다. 아주 그럴듯하게, 덜 혐오스럽게, 덜 유치하게 사실을 비틀고 색칠해야 한다. 인터넷 댓글 조작도 그렇지만 “기술자”들이 똑똑하고, 정교하고, 음흉해야 한다.

세째, 노무현과 문재인은 권력을 남용해서 수구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는 양심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선동정치를 하는 언론과 경쟁을 하려면 일정 부분 같은 전술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어떤 전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국민을 속이거나 감추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 한다”(116쪽). 이 사실을 수구세력이 잘 알고 역으로 공격한다.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에게는 참여정부를 편드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약(“어용 프레임”)을 친다. 참여정부에서 조그마한 실수나 오해라도 있으면 당장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교활하게 그 프레임을 덮어씌운다(정말 빨갱이나 제왕이라고 생각했으면 구석에 머리처박고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시절에 참혹하게 당한 피해의식과 낭만에 가까운 도덕 결벽증을 들쑤셔 진보세력을 몰아붙인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조기숙의 <왕따의 정치학>

노무현과 문재인은 집단으로 구박을 받고 따돌림를 당하고 무참하게 짓밟혔다. 즉, “왕따”나 “조리돌림”를 당했다. “노무현 왕따”와 “마법의 유리벽”은 동전의 양면이다. “노무현 왕따”가 구조를 설명한다면 마법을 만들어 내는 “조동문 프레임”은 과정을 말한다. 조기숙(2017)은 왕따 현상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를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로 설명하였다(92-95쪽).

“노무현 왕따는 그의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들은 비만 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다. 노무현 때리기는 이른바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조기숙 2017: 43).

피해자(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는 가해자가 싫어하는 어떤 특성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민주화 운동, 국민통합, 적폐청산 등이 그것이다. 가해자(수구정당, 수구언론)는 힘, 권력, 기득권을 가진 자인데 피해자를 못마땅해하고 못살게 군다. 가해자는 동조자(수구지지자)들이 자신의 왕따질을 응원해주고 방관자(깨어있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묵인하는 것을 원한다. 반면에 방어자(깨어있는 시민)가 끼어들어 왕따를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방관자는 “조동문” 주술에 걸려 걸핏하면 노무현 때문이라고 투덜대거나 달동네에 살면서 종부세 걱정에 한숨쉬는 사람들이다. 동조자와는 달리 나서서 가해자를 지지하거나 직접 피해자를 걷어차지는 않는다. 강화자는 한 때 왕따 피해자였던 사람인데 더 약한 왕따 후보가 나타나면 또다시 왕따당할까봐 두려워서, 자기가 당했던 설움을 화풀이하려고 더 심하게 피해자를 해코지 한다(94쪽). 말하자면 가해자의 앞잡이가 되어 왕따를 강화한다. 방어자는 왕따당하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부당함을 말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방관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노’라고 말하면 왕따 현상에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94쪽).

“일관되게 호남 왕따의 방어자가 되어 기득권으로부터 온갖 미움을 샀던,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까지 버려야 했던 노 대통령에게 호남을 차별했다는 마타도어를 퍼뜨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이들은 친노와 호남의 분열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다. 왕따 이론에 따르면 가해자, 강화자, 동조자가 바로 그들이다”(309쪽).

참여정부로 따지자면 피해자는 노무현인데,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호남홀대 등의 프레임으로 공격을 받았다. 가해자는 수구냉전 정당과 언론이고, 동조자는 그 지지자들과 수구냉전 단체다. 강화자는 대통령 탄핵소추에 나섰던 새천년민주당(이후 민주당),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참여정부를 헐뜯었던 시민단체와 진보언론(한경오)이다. 이때 방어자는 깨어있는 시민 소수와 문재인(정부 인사)이었다. 

왕따질의 법칙

생각을 덧붙이자면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는 왕따 내내 바뀌기 어렵다.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방관자가 늘면 방어자는 줄고, 방어자가 늘면 방관자는 줄게 되어 있다. 강화자는 가해자의 왕따가 무서워서 혹은 더 약한 자를 괴롭혀 보상받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따 분위기가 바뀌면 달라진다. 단지 심지가 굳지 못하고 겁이 많아 매질을 못견뎌할(매질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입에 거품물고 쓰러지는) 뿐이다.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확인사살한 사람들이 변절한 운동권 인사였던 것처럼 문재인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국민의당과 변절한 동교동계 인사들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어리석게도 “내부총질”을 하면서 노무현 후보를 끌어내렸던 새천년민주당(후보단일화협의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얼마나 가해자와 동조자가 왕따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느냐, 얼마나 방어자를 억누를 수 있느냐에 조리돌림의 성패가 달려있다. 즉, 얼마나 방관자를 확대하고 줄이느냐의 싸움이다. 한편에서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과 역량,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자와 방어자의 인내와 전략이 맞부딪힌다. “마법의 유리벽”은 가해자와 동조자와 강화자의 힘이 월등하여 감히 방어자가 나타나기 힘든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다수가 방관자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왕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방어자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해자와 동조자들은 누군가가 방어자가 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필사적으로 싹을 잘라버린다. 두목을 배신한 조직원을 보는 데서 난도질을 해대는 조폭의 생리와 마찬가지다. 꼼짝말고 방관자로 남아있으라는 강력한 경고다. 그래서 김대중과 호남을 지키려던 방어자 노무현이 그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조기숙 2017: 95, 97).

마법과 왕따에서 벗어나기

그러면 어떻게 “마법의 유리벽”을 깨고 주술을 풀 수 있을까? 어떻게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기숙(2017)은 왕따의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수많은 방어자를 만들어내고, 정치세력화로 다수파가 되면 왕따는 자연스레 해소된다고 주장했다(318쪽).

“... 딱 하나 남은 방법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을 국민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방어자가 세력화되어 국민 중 친노가 절반을 넘어가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선진국 대열로 들어설 것이고 친노 왕따는 사라질 것이다”(211쪽).“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세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계파를 다수파로 만들면 된다. 다수파가 되어 소수자를 포용하는 게 왕따 정치를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212 쪽).

피해자가 방어자를 모아 세력화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왕따는 불가능해진다. 다수파가 힘을 잃은 소수파에게 왕따를 당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소수파가 스스로 세력을 불려 다수파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다. 현실성이 거의 없는 전략이다. 가해자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동조자와 강화자가 등을 돌리게 되면 곧바로 가해자의 기세가 꺾이게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그런 탁월한 소수파였다면 애초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글쓰기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국정홍보처도 운영했지만 “조동문의 마법”을 걷어내지 못하였다. 진보언론까지 주술에 걸려 노무현에게 돌팔매질을 해댔다. 친정인 민주당(조순형, 추미애)은 노무현의 등에 칼을 꽂았고, 열린우리당은 청와대를 힐난하면서 각자 살아남을 궁리에 바빴다. 조기숙(2017)은 “만일 진보진영에서 최대 다수의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친노가 패권으로 민주당을 장악했다면...” 라면서 아쉬워했지만(102쪽) 그들은 자질과 역량에서 수구세력에게 밀렸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먼저 알고 떠나는 것을... 義가 아닌 利를 보고 모인 “탄돌이”아니었던가. 아무리 모래알을 모아놓은들 차돌이 되겠는가.

조기숙(2017)은 “조동문 프레임”에 말려들어 참여정부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사과하고 “친노”를 해체한 민주당의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205, 258쪽). 맞는 지적이다. “친노” 자체가 판짜기인 것을... 하지만 진보세력이 강대강으로 수구세력과 “맞짱”을 떴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어차피 마법이든 왕따질이든 힘자랑인데, 어떻게 약자가 강자를 힘으로 이긴단 말인가? 아마도 깡마른 독기를 품고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다보면 왕따질을 피하기는 커녕 더 가혹한 폭력을 각오해야 한다.

행여 노무현이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총칼로 수구세력을 제압했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義로 뭉쳤던 방어자(민주세력)는 흩어지고, 냉소를 짓는 방관자는 늘어났을 것이다. 대의를 잃고 명분을 잃고 사람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만일 문재인이 참여정부 시절 사사건건 싸움닭처럼 악다구니를 썼더라면 지금의 문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빙하기같은 겨울이 다가옴을 깨닫고 미련없이 고개를 떨군 마지막 잎새였다. 순리대로 조용히 몸을 땅에 삭히며 새싹이 솟는 봄을 참고 견디면서 기다렸다.

소정의 비폭력이 답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을 원하지만 아무 때나 그 힘을 얻을 수는 없다. 정치세력화는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떻게 하면 진보세력이 “조동문”의 마법을 풀고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을 음미해보자. “마법의 유리벽”이든 “왕따질”이든 모두 강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다. 소정의 비폭력은 강자에게 매를 맞더라도 약자는 흥분하거나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것이다(1986: 289; 2008: 68-69). 폭력을 극복하는 대안이 폭력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비폭력은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것이다(1986: 290).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투쟁—악한 강자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2001: 88)—을 하라는 것이다(1986: 294). 강자에게 매를 맞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더라도 할 말은 계속 하라는 것이다(1991:118; 2001:246). 이때 말은 합리성이 있고 사실과 이치에 맞아서 강자의 이성조차 감히 부정하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지극히 옳은 말이다(2008: 66).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하며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 행사가 아니다(1991: 322; 2001: 149).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이나 최소한의 말이어야 한다(1996: 56; 2008: 491). 예컨대, 박해를 받더라도 “세금폭탄”은 사실이 아니며 호남 왕따는 잘못이라고 소신껏 말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사실무근이나 흑색선전이라며 펄쩍 뛰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난동이다. 조기숙(2007)은 “옳은 말을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냐고요? 옳은 말을 옳게 하면 누가 써준대요?”(135쪽)라고 진보언론에게 항의하고 싶었겠지만 흥분하지 말고 옳은 말을 옳게 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폭력에 의지하는 강자는 정당성이 빈약하며, 철저하게 잇속으로 엮여진 세력이다. 한국에서 수구세력은 보수도 우익도 아닌 그냥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부와 권세를 쫓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념집단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애국을 팔고 안보를 파는 구악舊惡일 뿐이다(민주당이 진보와 보수 역할을 다 하느라 바쁘고 헷갈려한다). 이들은 금덩이가 커질수록 탐욕도 커져 법도 규칙도 없이, 위아래도 없이 서로 칼부림을 하다가 스스로 붕괴한다(1986: 297-298). 조기숙(2007: 49)의 예측과는 달리 구악들은 장기집권은 커녕 끝간데 모르고 해먹다가 9년 만에 자멸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나 최순실이 적당히 해먹고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패가망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자의 폭력에 대하여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가 보호되고, 성장할 토대가 마련된다(1991: 18-19). 소정은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라고 했다(1991: 19). 그런데 약자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난동을 부리면 스스로 분열하던 구악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당성을 축적하게 된다(1986: 297). 망해가던 구악들이 살아나 보복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래서 약자는 인내하고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2001: 204). 소정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어”라고 말했다(1986: 336). 절망같은 폭력(왕따)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으로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자만이 평화를 만든다(1980: 350, 365). 

노무현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노무현은 김대중과 호남이 왕따당하는 것에 맞서면서 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폭력이 아닌 말로 다투었다. “마법의 유리벽”에 갖혀 있었지만 그는 치열하게 사고하고 글쓰고 논리적으로 말하고 대화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겠지만 노무현은 “조동문 프레임”에 맞서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지 않았다. 반칙과 특권을 거부하고 원칙과 상식에 충실한 바보였다. 조기숙(2007: 123)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노대통령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라고 했다.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처럼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채 정적을 사찰하거나 협박하고 여론을 조작하지 않았다. 국정원이든 기무사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국가기관을 일절 동원하지 않았다.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수구세력의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국가기록물(하드디스크 복사본)을 유출했다며 몰아붙였을 때에도 편지를 적어 할 말을 하고 깨끗이 물러섰다. 그는 끝까지 비폭력(이성, 상식, 논리)에 의지하여 참고 견디었다. 오랜 시간 의미있는 고난을 겪어온 또다른 인동초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에 모여들어 다같이 슬퍼하고 자책하면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친 까닭이다.

노무현의 서거는 본인의 최선이었다. 그의 마지막 글에서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한다고 했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비폭력자로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운명이라고 적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서거는 마지막 비폭력(의사표시)이자 “자기희생”이었다. 그의 몸던짐이 사람들을 울렸고 움직였다. 마법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했다. “마법의 유리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주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왕따질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고, 패거리질을 하던 동조자와 강화자를 부끄럽게 했다. 저수지둑이 터진 듯이 방관자들이 방어자가 되어 쏟아졌다. “비폭력의 효과는 원수를 갚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가 그에게 돌아오게 할 정도로 큰 효과가 있다”(1996: 423). 그 가슴 울림이 9년 동안 성장하여 광장의 천만 촛불이 되었다. “조동문”의 주술은 타버리고 “마법의 유리벽”은 깨져나갔다. 왕따 방어자이자 피해자였던 노무현이 정치의 전범典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희생자가 지켰던 규칙이 악한 세상을 구출하는 원칙으로 만인에게 인식”되었다(1996: 437-438).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

사실 이명박근혜가 없었다면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은 최소한 20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이명박의 탐욕과 “최순실 정권”의 엽기 행각은 21세기 민주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이제 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눈을 맞추고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대북 퍼주기”와 “세금폭탄”과 같은 주술을 재탕·삼탕하고 있다. 수구 정권에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인터넷 댓글을 조작했다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도 온라인은 세력싸움으로 뜨겁다. 적폐들의 저항과 패악질도 거세다. 하지만 이제는 “조동문”의 마법도 왕따질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그만 피해의식과 도덕/양심 결벽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인재를 발굴해 자질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멀리 보면서 보편성과 합리성과 원칙과 상식에 비추어 묵은 난제를 하나하나 풀어갔으면 한다.
 
참고문헌

조기숙. 2007. <바법에 걸린 나라>. 서울: 지식공작소.

조기숙. 2017. <왕따의 정치학: 왜 진보언론조차 노무현 문재인을 공격하는가?>. 경기도: 위즈덤하우스


원문: 박헌명. 2018.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최소주의행정학> 3(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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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분양은 갑질이자 정치다

2019. 4. 14. 11:39 | Posted by 못골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을 의식주라고 한다. 왜 살 곳이 입을 것과 먹을 거리 다음에 오는 것일까? 아마도 긴 시간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 아파트집(apartment)은 흔히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 부와 탐욕을 상징한다. 서울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집(흔히 “아파트”로 통용되는)은 25-30평형 기준으로 보통 15억원을 넘는다. 이런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기 위해 서민들은 허리를 졸라매고 수십 년 동안 월급을 모아야 한다. 강남 아파트 불패신화는 요즘 서울 전역으로 파고 들어 문재인 정부를 옥죄고 있다.

식구가 늘면서 지난 해부터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산너머에 경관이 뛰어난 아파트 단지가 공공기관의 발주로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공성과 환경보호 문제로 벌써 몇 년 째 미뤄지다가 드디어 분양을 하게 되어 기대감이 폭발하였다. “로또”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첨만 되면 당장 억 대 프리미엄을 챙길 수 있다고 했다. 가까운 동무가 등떠밀 듯 분양신청을 권했다.

아파트집 분양신청이 처음인 나는 지어진 아파트를 사는 것이 아니라 조감도와 맛보기집(show house) 만 보고 결정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분양 후 3년 뒤에나 지어질 집을 미리 돈을 주고 예매한다는 것이 떨떠름하다. 소비자들이 “제발 집 한 채만 줍쇼”라고 조아리면서 돈다발을 드리밀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정부와 공급자들은 분양원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집을 지어 파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유리한 방식이다. 애초부터 “갑질” 냄새가 확 풍기는 일이다.

“선수”들에게만 친절한 분양공고

깨알같이 적힌 분양공고를 확대해서 읽으면서 나는 속이 불편했다. 일반 시민들이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니가 알아서 이해해라”는 소리다. 닳고 닳은 “선수”들을 위한 주의사항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국민주택과 민영주택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같은 공공기관이 공급하는 아파트인데, 84m2보다 작다고 국민주택이고 크다고(97m2형) 민영주택이라니… 차라리 공급주체에 따라 공영주택과 민영주택으로 나눌 일이거늘… 또 전용면적이니 공용면적이니 공급면적이니 하는 소리는 “선수”가 아닌 사람들을 홀리는 숫자놀음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용어와 표현이 수두룩하다. 한 젊은이는 규정을 모르고 청약을 했는데도 당첨되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이번 분양에서 일반분양은 1순위와 2순위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63%를 차지하는 특별분양은 기관추천, 국가 유공자, 생애최초, 신혼, 다가구, 노부모 부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신청할 수 있었다. 각 유형 별로 자격 기준과 제출 서류가 달라서 어느 것이 본인에게 해당되는지, 어느 것이 유리한지 알기 어려웠다. 언론 보도를 참고하거나 귀동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웹집을 방문했지만 아파트집을 광고하는 문구, 조감도, 맛보기집을 찍은 사진 정도를 볼 수 있었다. 확대경이 없이는 볼 수 없는 분양공고 파일 그대로를 덩그러니 올려놓았을 뿐이다. 공급자가 원하는 내용을 멋있는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지 소비자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단히 불친절한 웹집이었다.

문의사항을 물어보라는 전화번호가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통화량이 많아서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만 해댔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러 번 통화를 시도해도 똑같은 소리였다. 분양에 관한 궁금증을 풀기는 커녕 인내심과 통신비만 허공에 날렸다. 생색용에 가까운 문의전화번호였다. “답답한 니가 참으세요”라고 배짱을 부리는 듯했다.

이미 언론에서는 청약광풍이 분다고 진단하고 아무리 못해도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일반공급 1순위 청약에만 15만 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이 240대 1이었으며, 특별공급은 평균 11대 1로 집계되었으며, 일반분양 최고 경쟁률은 540대 1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비자의 관심과 청약수요는 오래 전부터 예상되었지만 사업자는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게을러 터졌다. 그럴듯한 사진으로 치장한 웹집은 내용이 부실했고, 문의전화는 언제나 통화중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맛보기집에 직접 방문하여 직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분양초짜의 맛보기집 줄서기 

그렇찮아도 나는 아파트 분양이 대체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맛보기집이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하였다. 특별히 공공기관이 분양과정에서 어떻게 신청자를 대우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맛보기집(“모델하우스”)이 문을 여는 오전 10시에 맞추어 도착했다. 올해 유난스레 뜨거웠던 여름이 한껏 폭염을 뽐내던 날이었다. 터다지기를 마친 허허벌판에 세워진 맛보기집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맛보기집 뒤쪽은 벌써 차가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7시부터 와서 기다렸댄다. 사람들은 입구에서 줄을 서기 시작해서 맛보기집 뒤에 세워진 천막 안을 채웠고, 차츰 공터에 주차된 차 사이에 줄을 만들어 순대 모양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천막 안에 줄을 선 2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광경이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아 막 도착한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연일 맹위를 떨치던 폭염 속에 네댓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이 노인들과 여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기도 했고, 먹을 거리와 마실 거리를 챙겨오기도 했다. 식구들이 와서 교대로 줄을 지키기도 했다. 나처럼 대책없이 혼자서 전화기만 달랑 들고 온 초짜는 드물었다. 천막 안은 아쉬운대로 생수가 제공되고 냉방기가 돌아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매마르고 후끈 달아오른 맨땅에 무방비로 서 있었다. 노출된 팔다리와 목이 타버렸다. 젊은 아낙의 등에 업혀 온 젖먹이는 칭얼대다 지쳐 늘어졌다. 사업자는 급한대로 허름한 그늘막이라도 설치하고 구급차를 준비시켰어야 했다. 냉방기는 어렵다 해도 마실 물이라도 제공했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누군가가 생수병을 사와 곱절 값에 팔았겠는가. 또 사람들이 인부들의 화장실을 물어 물어 찾아가게 할 일이 아니었다. 공공기관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을 외면하고 시민들을 이리 박대해서야 어디...

드디어 일부 사람들이 폭발했다. 서류를 제출하러 두번 째 맛보기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첨자와 예비당첨자만 모여서 첫번 째보다는 사람들은 적었지만 맛보기집 안에 들어가기까지 고역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당첨자보다 예비당첨자를 먼저 들여보내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잘못 배부된 번호표가 시비거리가 되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뒷번호를 받았다. 번호표는 받아들었지만 순서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방문객과 안내원들이 대치하였다.

사람들은 해명과 개선을 요구했고 안내원들은 자신들이 지시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맞섰다. 분개한 사람들은 책임자를 나오라고 했고, 안내원은 책임자의 이름도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도 믿지 못하겠는지 다들 입구에 몰려들었고 순간 안내원들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이쯤되면 폭동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고 끝내는 책임자 모가지가 죽창에 걸리는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다.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일용직이고 상사가 누구인지 어느 회사 소속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사업자는 신청인들과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권한도 없는 일용직을 동원하여 “집 한 채만 줍쇼”하는 거렁뱅이들을 상대하게 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완장채운 용역 직원과 신청인들이 언쟁하고 몸싸움하는 광경을 멀찍이서 즐기는 책임자의 품격이라고나 할까. 양쪽 모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사이에 책임자는 빠지고 그의 책임은 사라진다. 참으로 비열한 처사다.  

큰 고객, 작은 서버

대기줄 이론(queueing theory)에서 보면 소비자가 폭발하듯 도착했지만 시스템은 처리능력이 터무니없이 작았고 대기줄을 다루는데도 소홀했다. 안내원은 줄세우는 데만 몰두할 뿐이고 사람들의 불편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그 결과 대기 비용 대부분을 소비자가 고스란히 부담하였다.

먼저 잠재고객(calling population)은 무한대는 아니어도 충분히 많았다. 맛보기집에 사람들이 몰린 것 이상으로 분양신청을 했다. 고객이 도착하는 것은 포아송분포(Poisson distribution)를 따르지만, 평균도착수(λ)가 일정치 않고 최대치가 매우 컸다. 10시 전후해서 집중되었고 심지어는 7시부터 맛보기집 앞에서 기다린 사람들도 많았다.
 
장장 6시간을 폭염과 싸우면서 기다리다 맛보기집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도대체 몇 명이 상담을 하는지를 먼저 살폈다. 고작 6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내가 받은 번호표는 321번이었는데, 상담신청은 이미 끝나버린 뒤였다. 서류를 제출하려고 다시 방문했을 때는 10-12명이 서류를 받고 있었다. 맛보기집 안에는 서버수(s)를 배로 늘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사업자는 상담사나 접수인을 늘리지 않았다. 평균서비스시간 (1/μ)은 분양유형별로 달랐다. 예컨대, 일반분양 서류접수는 3분이면 족했으나 노부모와 다자녀 특별분양은 15-20분이 걸렸다. 당연히 특별분양에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어야 했다. 

대기줄이 엉망이었다

맛보기집을 시스템으로 봤을 때 대기줄(queue)이 너무 짧았다. 시스템을 주차장까지 확대하더라도 일렬로 이어진 대기줄은 짧았다. 한마디로 대기줄 설계가 엉망이었다. 방문자들은 맛보기집 밖에서 줄을 섰고, 혼잡을 피하기 위해 입구에서 20명씩 새 줄에서 기다렸고, 상담을 받거나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다시 줄을 서야 했다.

고객은 몰려들고 서버수는 터무니없이 적고 대기줄이 너무 짧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 번호표를 선착순으로 정확하고 나누어 주었어야 했다. 엉터리 대기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뙤약볕에서 장시간 생고생을 한 셈이다. 맛보기집 안에서도 줄을 세우지 말고 유형에 따라 번호표를 나누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줄을 세우면서 어설프게 번호표를 나누어 주다 혼동과 분란만 초래했다. 또 맛보기집을 둘러보려는 단순 방문자와 상담을 받기 위에 찾아온 고객을 구분했어야 했다. 상담고객이 맛보기집에 오래 머물면서 방문자 역시 애꿎게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대기줄에서 기다리는 고객을 부르는 규칙(queue discipline)도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서류를 제출할 때 입구에 있는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고 분양유형에 따라 일련번호표를 주었다. 하지만 한 직원이 두 가지 유형의 서류를 받으면서 혼란이 생겼다. 일반분양과는 달리 번호를 부르지 않아 신청자의 순서를 알기 어려웠다. 또 서류제출시 당첨자보다 예비당첨자를 우선 들여보내 논란이 되었다. 5세 미만 아이를 데려온 방문객에게 우선권을 준 것은 고객의 안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만 하다.   

투기판, 사기판, 정치판이다

내가 관찰한 아파트집 분양은 갑질이다. 아파트를 짓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파트에 그렇게 사람이 몰리고 돈이 몰리는 것을 맨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약하러 온 어떤 이는 프리미엄만 벌써 1억 5천이고 몇 채씩 분양받은 사람도 있다고 떠벌렸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분양신청자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말이다. 수많은 탈락자들이 “로또”에 당첨된 소수를 부러워하고 원망하는 그런 투기판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진 자들의 못된 짓을 배운 백성의 모습이다.
 
그런 투기 수요에 공급자는 아쉬울 것이 없다. 아파트집을 짓기도 전에 설계도도 없이 그럴듯한 조감도와 맛보기집으로 분양을 할 수 있다. 분양원가와 세세한 항목을 밝히지 않고 분양가를 책정한다. 소비자는 집의 정확한 모습과 품질을 판별할 수 없으며 가격이 적정한지를 따질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애초부터 시장실패는 불가피하다.  사전분양이 불완전한 계약이며 공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갑甲인 사업자는 친절하게 분양공고를 설명해주지 않았고, 을乙인 고객을 뙤약볕에 방치해 놓고 최소한의 그늘막이나 물도 제공하지 않았다. 책임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임시직원을 내세워 시민들의 궁금증과 분노를 짓눌렀다.

어쩌면 아파트 분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축소판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그려진 그대로다. 신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 열차 끝에서 바둥대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고, 열차 앞에서는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른다. 뙤약볕이 불타는 곳에서 천막안으로, 다시 입구에서 맛보기집 안으로 전진하면서 냉방기와 생수가 제공되고 덧신과 안락의자가 추가된다. 인간대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줄을 서고 번호표를 또 움켜쥔다. 약육강식의 전쟁이다.

흔히 아파트 분양은 시장 논리이며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득권자의 횡포에 가깝다. 아파트 가격을 떠받치는 세력이 버티는 한 강남에 수백만 채를 공급한다 해도 그 탐욕은 채울 길이 없다. 은행대출을 규제하고 세금을 강화해도 그들은 버티면서 반격을 도모한다. 규제가 약하면 실실 비웃고 강하면 세금폭탄이라며 대든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들을 구석(주택분양)에 몰아넣고 경쟁과 불안을 부추겨 가격상승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은 가진 자들이 대부분을 갖게 되는 사기판이다. 돈이 없으면 아파트를 살 수도,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힘겨루기이자 돈겨루기다. 

아파트집 문제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토지, 증권시장, 이자율, 환율까지 얽히고 설킨 난제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피튀기는 몸싸움이다. 약육강식의 현실이다. 이래서 시장과 정부 모두 실패하기 쉽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그 어려움을 이해하고 참고 견디면서 길게 호흡했으면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아파트 분양은 갑질이자 정치다. <최소주의행정학> 3(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