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5 20:52
블로그 이미지
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못골

태그목록

공지사항

글 보관함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한미동맹의 민낯

2020. 9. 27. 12:41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미국 트럼프 정부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50억 달러(6조 원)를 요구하였다. 지난 2월에 어렵게 합의된 9억 2천만 달러(1조 원)에 비하면 황당한 금액이다. 말이 증액이지 일방적인 협박이다. 외교력이 아닌 군사력을 앞세운 힘자랑이다. 정치인의 협상이 아닌 트럼프의 입에서 시작된 장사치의 후려치기다. 적나라한 강자의 폭력이다. 피로 맺었다는 한미동맹의 민낯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의 민낯

한미동맹은 1951년 군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반강제로 빼앗기고 1953년 휴전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출발했다. 북진통일을 자신하던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도망간 뒤,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까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이다. 이후 한국군은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안주했고 1994년에서야 겨우 평시작전권을 이양받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으려 했으나 수구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딫혀 아직까지 표류하고 있다. 특히 유재흥劉載興은 한국전쟁에서 2군단과 3군단을 말아먹음으로써 작전권을 상실케 한 장본인인데, 그런 그가 2004년 전시작전권 환수를 반대하고 나섰다.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수구 세력의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 장면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스스로 나라를 만들거나 지킬 생각도 의지도 없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강자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하려는 자들이다. 미군이 없으면 북한에게 당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붙잡아놔야 한다. 한미동맹이 없는 “그들의 대한민국”은 없다. 그러니 지소미아 파기도 철회하고 방위비 분담금도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 대통령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누가 감히 불경스럽게 패권자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한 미국에게 500억 달러를 준다 한들 무슨 대수인가? 트럼프가 수천 명의 공녀를 바치라 한들 무슨 상관인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갈 돈도 아니며 자신의 딸이 끌려갈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징용이나 성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겪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일중러를 따지지 않는다. 나라와 민생이 망하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친일·종미·반공 수구 세력에게 한미동맹은 생명줄이자 성역이다. 국가안보가 우려된다면서도 한미동맹이 튼튼한지를 걱정할 뿐, 국방비를 더 내고 군역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작전수행능력을 높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주한미군을 줄이거나 철수한다는 말만 나와도 까무라치는 정신줄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내야 한다며 거품을 무는 자들이다(대체 왜 미국이 이런 자들을 지켜줘야 하나?). 전시작전권을 포기한 지 70년인데도 아직 환수 준비가 안되었다고 정색하는 자들이다. 60만 대군과 최신 무기가 있다지만 스스로 작전을 세워 제대로 병력을 움직이고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몸뚱아리는 사지 멀쩡한 어른이지만 머리는 백일된 아기 수준인 것을... 작전능력이 없어서 작전권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권이 없으니 작전능력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없다. 한미동맹이 만병통치라는 미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와 자신감이 중요

지금까지 한미동맹은 나라를 지키는 마법이었다. 수구 세력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퍼트린 신화였다. 한국과 미국이 혈맹이라지만 수구 세력의 짝사랑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는 군사적으로, 심리적으로 식민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라 간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상식이자 철칙이다. 150년 전 미국은 우리와 전쟁(신미양요辛未洋擾)을 치른 적이었다. 미국이 계속 동맹으로 남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냉엄한 국제질서다. 이런 마당에 백성들이 마르고 닳도록 한미동맹에만 목을 매고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처럼 군다면 한심한 일이다. 이제는 그 허상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스스로를 옥죄는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병력이나 무기가 아니다. 최고 용병을 데려오고 첨단 전투기와 미사일을 들여온다고 나라를 지킬 수 없다. 백성이 주인으로서 스스로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적이 쳐들어왔다고 모두 도망친다면 천하무적 용병인들 목숨을 걸고 싸울 까닭이 있을까? 아무리 한미동맹이 강고하다 해도 결국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또한 쓸데없는 자학이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무역과 군사력에서 세계 7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시민들의 대일본 불매운동은 우리의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이다.

합리적 근거를 대면서 할 말을 하라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는 사실상 폭력 행사다. 하지만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안된다(2008: 68-69). 날선 말로 트럼프를 비난하거나 미대사관에 쳐들어가면 안된다. 이런 난동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이다. 아무리 억울하고 무섭다 해도 끝까지 참고 비폭력에 의지해야 한다. 보편성있는 원칙과 상식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할 말을 해야 한다. 강자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올바른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비폭력은 매를 맞으면서도 할 말을 하는 것이지 공포에 질려서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1991: 118). 트럼프의 도발에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내린다면 굴종이지 비폭력이 아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비굴한 것이 아니며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의 품격을 높인다(1991: 19; 2001: 149).

예컨대, 주한미군의 유지비가 많이 든다고 하니 제대로 원가를 따져본다. 분담금에 포함되지 않는 시설비, 전기료, 물세 등을 포함하여 계산서에 올린다. 미국이 누리는 편익도 하나하나 따져 수치로 보여준다.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현재 분담금도 과한 것임을 증명한다. 한미동맹이라는 약발이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이제 깨어있는 국민의 의지와 자신감으로 할 말을 하면 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한미동맹의 민낯. <최소주의행정학> 4(12): 1.

Comment

미얀마 쉐다곤탑과 우리의 쉐다곤탑

2019. 4. 14. 11:50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얼마 전 미얀마(Myanmar)에 출장을 다녀왔다. 양곤(Yangon)에 며칠 머물면서 짬을 내어 전통시장과 차이나타운을 둘러봤다. 21층 호텔방에서 맞은 아침은 감동이었다. 발 아래로 미얀마(버어마)의 상징이자 자랑이라는 쉐다곤탑(Shwedagon Pagoda)이 서 있고 멀리 흐르는 양곤 강에 배가 오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 시뻘건 해가 넘어가면서 무심한 강물이 만나는 두물길에 그려놓은 풍경화는 인상에 깊이 남았다. 호텔에서 바라본 양곤은 정말 아름다웠다.


다정한 남매와 저녁을 먹다


호텔에서 짐을 풀었을 때 2년 전에 졸업한 제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여자친구와 만달레이(Mandalay) 공항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나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행여 부담을 줄까 저어하여 일절 방문소식을 알리지 않았는데 뜻밖이었다. 양곤에 잘 도착했다고 적었더니, 그는 호텔방으로 전화를 걸어서 극구 저녁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언제나 밝고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다. 교정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지내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그는 정체가 심했다며 미안해 했다.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해졌지만 여전히 건강해보였다. 근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여동생을 데려왔다. 침착하고 수더분하고 당차게 보였다. 식당에서 그는 어떻게 야채와 고기를 고르는지, 어떻게 남비에 담궜다가 어느 양념장에 찍어먹는지 조심스레 알려줬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오랜 만에 만난 오누이가 다정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그는 지금 진학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와 연말에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저녁을 마친 뒤 차이나타운에서 산책을 했다. 설날 행사로 떠들썩한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던 여동생은 선물이라며 자스민차와 녹차를 사들고 돌아왔다. 은근한 마음이 전해진다. 새벽 일찍 출발을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안전운전을 신신당부했다. 어디 쯤인지는 몰라도 두세 시간 거리라고 했다. 다음 날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읽으며 나는 안심했다. 학교에 돌아와서 혹시나 해서 지도를 찾아봤다. 아뿔싸. 그는 양곤에서 700킬로 떨어진 만달레이 근처에 살고 있었다. 낙후된 도로 때문에 못해도 아홉 시간을 운전했을 그런 멀고 먼 거리였다.


쉐다곤탑에서 미얀마의 현실을 보다


현지 직원을 따라 양곤 시내 작은 언덕에 위치한 쉐다곤탑을 방문했다. 붓다의 머리카락 8개를 모신 신성한 곳이라고 했다. 호텔방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웅장하고 화려했다. 입구부터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6-10세기 경에 지어진 이후 계속 탑을 높게 개축해왔는데, 18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진 탑 꼭대기를 99미터로 높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탑이 벽돌로 세워졌는데 수많은 금박을 붙여 마무리를 했다는 점이다. 멀리서도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탑을 상상해 보라. 탑 꼭대기에는 귀한 보석을 박아놓고 망원경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금과 루비와 같은 보석이 많이 나는 나라에서나 할 수 있는 호사다.


탑은 긴 깔때기를 엎어놓은 형국인데, 가장자리에 다양한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서로 다른 부처상을 모셔놓았다. 사람들이 탑 주위로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성전을 둘러보게끔 해놓았다. 내 생일이라는 화요일 길목에 있는 부처상에 가서 소망을 담아 물을 서너 번 붓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탑 둘레를 거닐며 담소하거나, 바닥에 앉아 쉬거나, 혹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매년 많은 시민들이 기꺼이 시주를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이 탑을 갈고 닦고 꾸미고 있다고 했다. 어느 곳보다도 깨끗하고 단정하고 안전한 장소였다.


아마도 이 탑은 백여 개가 넘는 인종을 하나로 묶고 붓다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만들었을 터이다. 그 오누이처럼 사람들의 품성이 밝고 착한 것은 이런 까닭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금탑에 현혹되어 지배자의 통치이념에 순종하거나 고통받는 차안此岸을 외면하고 피안彼岸를 꿈꾸는 것같아 안타깝다. 바벨이란 도시에 세워진 탑을 보고 신이 노여워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소정은 “탑을 세우느라 동원된 국민들은 시간과 자원을 통치체제에 박탈당하며, 이 광장에서 탑을 보고 이를 건설한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탑의 건설을 지휘한 통치자를 숭배케 된다”(1991: 99-100)라고 적었다. 마찬가지로 이 쉐다곤탑을 보면서 사람들이 주권자 자신이 흘린 피와 땀을 망각하고 지배자인 왕과 식민지 총독과 군인정권의 치적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천년 양곤의 도로와 건물은 몇몇 현대식 건물을 제외하고는 신민지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조그마한 집과 가게들은 무너져 내릴까 위험해 보였다. 녹이 잔뜩 슨 철문으로 걸어 잠근 집과 아파트는 “우리”를 잊은 식민지배의 흔적이었다. 깨끗하고 안전한 곳은 쉐다곤탑이나 호텔 뿐인 것처럼 보였다. 도로 바닥은 고르지 못하고 요동치고 상하수도가 통하지 않아 냄새가 났다. 버스 위주의 대중교통은 부족하고 교통신호는 잘 지켜지지 않아 차행렬은 언제나 더뎠다. 어찌하여 쉐다곤탑에는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으면서 일상 생활을 개선하는데는 이리도 게으르단 말인가? 피안이 아닌 현실에서, 성지가 아닌 집과 거리에서 “쉐다곤탑”을 구현할 수는 없는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금덩어리 베개삼아 보석같은 세상을 꿈꾸며 행복하게 굶어죽을 것인가?


우리의 쉐다곤탑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도 어쩌면 서울 한복판에 “쉐다곤탑”을 세워놓고 멍하니 수구세력의 지배이념을 숭배하고 있는지로 모른다. 구한말 이래로 반공, 냉전, 반민족, 성장주의, 재벌주의 등이 우리 일상을 옥죄고 있다. 10대 교역국, 3만불시대면 뭐하나? 빨갱이면 사람도 아닌가? 북한과 잘 지내면 안되나? 한미동맹은 영구불변의 진리인가?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나? 최저임금을 올리면 기업과 경제가 망하나? 노조와 규제를 없애야 기업이 투자를 하나? 부자들이 종부세 더 내면 공산주의인가? 저 탑을 넘어야 답이 보인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미얀마 쉐다곤탑과 우리의 쉐다곤탑. <최소주의행정학> 4(1): 1.




Comment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이 사는 법

2019. 4. 11. 14:26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지난 6월 20일부터 약 사흘 간 일본 미애三重현 이세伊勢시에 위치한 신궁을 구경했다. 일본을 지켜준다는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Amaterasu-Omikami)을 모신 곳으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신도神道의 성지다. 기원 전에 바쳐졌다는 이곳은 내궁인 황대신궁皇大神宮(kotaijingu)과 외궁인 풍수대신궁農受大神宮(Toyokedaijingu)으로 나뉘어져 있다. 매년 수많은 일본인들이 찾고 있다. 

길잡이가 신도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일본인들은 모든 동식물과 산과 강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 수만 해도 수백 만에 이른다고 한다. 애니미즘(animism)이다. 심지어는 왕이 죽어도 신이 되는데, 왕실에 관련된 신을 모시는 신사神社를 신궁이라 부른다. 신궁은 20년마다 기존의 건물 옆에 새 건물을 지어 옮긴다. 신은 일반인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이 자리잡은 정궁正宮은 나무 담장 네 개로 가로막혀 있는데, 사람들은 가장 바깥에 있는 네번 째 담장(흔히 신사를 상징하는 토리이라는 문)을 지나 세번 째 담장 앞에서 경배할 뿐이다. 일반인은 스스로 세번 째 담장을 지날 수가 없다. 격식을 갖추어 사제(priest)가 특별히 인도를 해줘야 가능하다.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

일본 사람들은 수많은 신과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제 있는 것처럼 인식하거나 아예 사실로 둔갑시키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실을 믿고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일본인들은 신화를 믿고 신을 두려워한다. 지식인들조차도 객관적 역사와 사실을 버리고 신과 신화를 필요에 따라 아무렇치도 않게 역사와 사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섬뜩하다. 어떻게 사지멀쩡한 사람들의 이성이 이토록 쉽게 마비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신사나 신궁을 방문할 때마다 신이 자리잡은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했다.  

우리나라에서 절에 가면 부처님 상이 있고, 성당에 가면 그리스도의 상이 있다. 누구나 사람이 다가가 볼 수 있고,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신사와 신궁에서는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것은 가림막이고 신은 가림막 저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이 머무는 정궁 (신사에서는 본전本殿)은 첫번 째와 두번 째 나무 담장 사이에 있어서 사람들은 절대로 신의 자리를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번 째 담장 앞에서 그냥 동전을 던지고 박수 두 번 친 뒤 천으로 가려져 있는 안쪽을 향해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뿐이다.

일본인 친구나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신이 자리한 곳에는 보통 오래된 거울이나 돌이나 나무토막을 놓아둔다. 신의 자리에 아무 것도 없는 신사도 있다고 했다. 이세신궁에는 천조대어신을 상징하는 거울이 놓여져 있다고 한다. 나는 참 어이가 없었다. 8할이나 되는 일본인들의 정신줄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 거울이나 돌이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절대 권력과 폭력을 행사해온 존재가 알고보니 한낱 생쥐같은 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허탈한 반전이다.


박근혜가 ‘신궁’에서 사는 법

삼백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세월호 참사 당시, 사고 발생 7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근혜씨는 생뚱맞게도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나타났길래 저지경인가 했다. 국민들은 물론이려니와 해외에서도 시시각각 물속으로 가라앉는 세월호를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잖은가.  

나는 이세신궁을 돌아보면서 박씨가 보여준 언행을 상기했다. 그는 스스로를 한국을 지키는 신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박정희가 반신반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일제 신민지 시절에 일본인의 정신줄을 빼속깊이 새긴 친일파였고 해방 이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기회주의자들 아닌가. 그러니 박씨는 신궁에 들어앉아 사제의 시중을 받으면서 신비롭고 우아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일본의 신을 꿈꾸었을 법하다. 그에게 권력과 재물은 당연한 것이고, 정부관료제는 사제일 뿐이며, 국민들은 하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완벽한 존재로서 신은 인간 세상과는 거리를 두면서 천부인권과 같은 권력을 고상하게 누릴 뿐이다. 삼성과 국정원의 돈을 받은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신의 권리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을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하면 “모냥빠진다.” 모두 사제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문제가 있으면 신의 탓이 아니라 심부름꾼의 잘못이다. 그래서 해양경찰청은 잘못했어야만 했고 해체되어야 했다.

박씨는 오직 문고리 삼인방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했다. 장관도 안보실장도 비서실장도 박씨를 알현하기 어려웠다. 박씨가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하물며 여신의 은밀한 사생활임에랴. 품위 유지를 위해 기꺼이 기치료도 받고, 올림머리도 하고, 태반주사도 챙겨맞은 정성이 어디인가.

정부관료제는 신을 지키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제였다. 세월호 7시간 박씨의 행적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보고시간이나 지시사항도 조작되었다. 훈령을 임의로 고쳐서 청와대가 국가위기관리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우겼다. 검찰은 법원의 영장을 받아들고서도 박근혜 청와대를 압수수색하지 못했다. 청와대는 환관과 탐관오리들로 둘러싸인 신궁이었다. 최근에는 기무사령부가 탄핵안이 기각될 경우 계엄을 선포하여 국민과 촛불집회를 찍어누르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절대 존재인 신을 지키기 위한 사제들의 필사적인 항거였다. 관료제에 국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여신의 자리에는 “공항장애”에도 불구하고 연설문까지 “컨펌”했던 최순실이 있었다. 권력서열 1위인 최씨에게 휘둘리고 떠밀려 꼭두각시가 된 No. 3 박근혜씨가 있었다. 사람들이 허탈해하다가 분노한 이유다. 여신은 커녕 고작 깨진 돌조각이나 나무토막이었으니 말이다. 이젠 촛불시민들에게 끌려내려와 드넓은 감방에서 우아하게 식기를 닦는 늙은 공주가 되었다. 

국민이 곧 신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는 신과 신화가 아닌 역사와 사실을 경계하며 살고 있다. 역사와 사실이라는 촛불이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이라고. 신궁을 나오면서 생각한 것이다. 


원문: 박헌명. 2018.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이 사는 법. <최소주의행정학> 3(6): 1.


Comment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2019. 4. 7. 21:23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지난 8월 5일부터 21일까지 여름올림픽이 열렸다. 흔히 올림픽을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祝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감흥은 예전만 못하다. 언제부터인가 연례행사인 것처럼 그냥 때가 되면 텔레비젼 앞에서 보는 둥 마는 둥 시간을 죽이곤 한다. 왜 똑같은 경기를 지상파 방송사에서 동시에 중계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우병우와 THAAD 사태를 잊고 박근혜를 더 이상 비난하지 말라는 뜻인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마냥 국민들 모두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선수들 응원이나 하라는 뜻일까? 

왜 “죄송합니다”인가?

남자 10미터 공기권총 경기에서 5위를 차지한 진종오 선수가 기자회견을 “죄송합니다”로 대신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이 생각난다. 올림픽을 포함한 세계대회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정상을 지켜온 선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경기에서 진 다른 선수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준결승전 진출에 실패한 여자배구 선수들도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경기에서 부진했던 박정아 선수는 십자포화같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왜 그들은 죄송한 것일까? 왜 석고대죄를 하듯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소위 세계 랭킹에 비추어 선수들의 기대치를 매긴다. 성적이 기대치를 웃돌거나 금매달을 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다. 그 기대치에 못미치면 그 격차만큼 비난이 쏟아진다. 기대치가 금매달인 선수가 매달을 따지 못하면 반역을 도모한 죄인 취급을 받는다. 기대치와 경기 결과가 메달과 상관없는 선수들은 아예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필명 “ 

버락킴너의길을가라”는 지난 8월 10일 “금메달을 획득하면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아들, 딸로 호명되며 추앙받지만, 패배하는 순간 그들은 버려진 사생아(?)쯤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과 국민에 실망감을 안긴 죄인 그 극단적 위치를 오가야 하는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들...”이라고 적었다(http://www.ziksir.com/ziksir/view/3564). 

금메달 정신줄과 올림픽 헌장

결국은 메달이다. 그것도 금메달이다. 종합순위를 따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은메달이 많아도 금매달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든 금메달을 따고 볼 일이다. 공을 차든, 뜀박질을 하든, 헤엄을 치든, 철봉에 매달리든, 골프공을 치든 상관이 없다. 아마도 방귀뀌기나 눈알굴리기에서 일등을 해도 환호할 것이다. 하다못해 도둑질이나 성추행을 잘해서 금메달을 땄다 해도 환장들을 할 것이다. 이러니 출산율 최저, 자살율 최고, 입양아 수출 최고 등은 금메달만 받는다면 국가의 자랑으로 내세울 판이다. “금메달 정신줄”이다. 금메달병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금메달만 따면 그만이라는 것 아닌가.

현대 올림픽은 19세기 말 쿠베르탱(Coubertin)이 주창하여 시작되었다.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의 기본원칙(Fundamental Principles of Olympism)은 올림픽이 즐겁게 힘쓰는 것, 좋은 교육적 가치, 보편적인 기본 윤리원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존중을 추구한다고 했다(“Blending sport with culture and education, Olympism seeks to create a way of life based on the joy of effort, the educational value of good example, social responsibility and respect for universal fundamental ethical principles.”). 올림픽 정신은 상호 이해, 우정, 결속, 깨끗한 경기를 강조한다(“... in the Olympic spirit, which requires mutual understanding with a spirit of friendship, solidarity and fair play.”). 

과연 금메달 정신줄이 즐거운 마음으로 힘써 경기에 임하고 우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가? 선수들이 상호 결속을 다지고 깨끗한 경기를 하게끔 하는가? 경기에서 지거나 메달을 따지 못하면 국민들에게 석고대죄하듯 죄송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우정, 상호 이해, 결속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금메달을 목에 걸지 않고서는 영웅이 될 수 없고 박수를 받을 수 없는 정신줄에서 어떠한 교육적 가치와 윤리원칙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신체, 의지, 마음을 고양하고 균형있게 묶어내는 삶의 철학(“Olympism is a philosophy of life, exalting and combining in a balanced whole the qualities of body, will and mind.”)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행여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올림픽 표어가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금메달 정신줄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3S운동과 금메달 정신줄 

3S는 Sex, Screen, Sports를 말한다. 흔히 나쁜 정권이 일반 국민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권장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97). 백성들이 현실과 정치를 깨닫고 판단하지 못하게끔 관심을 돌리려는 공작이다. 매일매일 닥치는 일상과 이웃에 관심을 끊고 공공집회에는 걸음을 끊는다. 벗고 찍고 보는 일에 몰두하고, 영화관에 몰려가고, 경기장의 응원물결에 휩쓸린다. 카지노와 (화상) 경마장이 주택가까지 스며든다. 길거리와 인터넷에서 복권과 노름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백성들은 성실한 삶을 포기고 현실에서 도피하여 환상과 도박에 빠지게 된다. 바로 독재자가 원하는 상황이다.  

독재정권은 정치정당성이 없다는 열등감을 끝까지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치명적인 약점을 덮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만한 일을 찾는다. GNP를 올리는 경제사업을 추진하고 4대강사업같은 큰 토목사업을 일으킨다. 무언가 손에 잡히고 눈에 확 띄는 그런 “바벨탑”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또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드높인다면서 선전에 열을 올린다. 정권이 잘하고 있다고 백성들을 세뇌하려는 것이다. 이런 공작에는 스포츠 경기가 제격이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프로 야구, 축구, 씨름을 출범시키고, 88올림픽을 강행한 것이 대표사례이다. 

금메달 정신줄, 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는 3S의 한 축이다. (1) 체력은 국력이라면서 백성들을 동원한다. 시간에 맞춰 온 백성들을 줄세워 국민체조를 하도록 강요한다. (2) 경기 성적이 국가의 경쟁력이 된다. 올림픽 종합 순위가 민족의 우수성 순위이고 국력 순위가 된다(버락킴너의길을가라 2016). 올림픽 10위를 내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3) 따라서 경기를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일로 치환한다. 스포츠는 국가사업이 되고 소위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한다. 선수 개인의 영광이 국가의 영광으로 둔갑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박근혜 정권은 금메달 10개, 종합 10위를 목표로 내세웠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국가에서 예산을 지출하여 선수들을 훈련시킨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수확해오기를 기대한다.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고 국위를 선양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강조한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하거나 축전을 보낸다. 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의 힘을 과시했으니 얼마나 통치자가 흥이 났을 것인가?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영웅으로 추앙되고 온갖 혜택을 받는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와 김정은 정권은 다를 바 없다. 박정희, 김일성, 전두환, 노태우, 김정일 정권 모두 이런 금메달 정신줄로 백성들을 현혹해왔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민족과 국가는 사실 통치자 자신일 뿐이다. 우월성과 자긍심은 금메달이라는 마약이 그려낸 환영이다.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은 올림픽 헌장을 거스르고 있다. 올림픽 헌장 제 1장 6조 1항은  올림픽 경기가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이지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The Olympic Games are competitions between athletes in individual or team events and not between countries.”).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시상식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연주된다. 

금메달 정신줄의 정치경제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에서 올림픽의 기본원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구촌 축전이라지만 선수들은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 결과에 목맬 수 밖에 없다. 결과에 따라 영웅과 죄인이 결정되고, 특혜와 무관심이 갈리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따내면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주어지지만, 실패하면 아무 것도 손에 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포상금과 연금이 달린 문제이니 죽기 살기로 금메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깨끗한 경기가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한다. 비열한 반칙과 행위는 잠깐이고 금메달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선수라기보다는 금메달을 생산하는 기계에 가깝다. 인간이기보다는 금메달을 물어오는 사냥개에 가깝다. 자의든 타의든 사생활을 잊고 불타오르는 애국심과 사생결단할 각오로 금매달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고 지면 패장으로 목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면 인생은 무의미해지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금메달 정신줄을 가진 단체와 국가가 선수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금메달이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수를 선발하고 파격에 가까운 지원을 해준다.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원하는 음료수를 선택하여 빼먹는 식이다. 전투를 하듯이 훈련을 하고 전쟁을 하듯이 경기를 하도록 선수들을 다그친다. 군사작전을 전개하듯이 자세한 계획을 세워놓고 선수들을 닥달한다. 독재정권일수록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조바심을 가진다. 짧은 시일 내에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사냥해 온 선수들에게 넉넉한 보상을 던져주고, 금메달은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밤낮으로 울궈먹는다.    

금메달에 사로잡힌 백성들도 흥겨운 마음으로 축전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기고 지느냐에 몰두하기 때문에 경기 자체를 즐기기 어렵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라는 표현은 승패에 목을 건다는 뜻이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염원할 뿐이다. 이긴 쪽에서는 잔치집이 되고 진 쪽은 초상집이 되는 판이니 어찌 숨돌릴 짬이 있겠는가. 승리한 선수는 영웅이라 부르고 온갖 찬사를 쏟아낸다. 패배한 선수 죄인으로 낙인찍고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것은 경기 자체가 아닌 결과에 대한 평일 뿐이다. 박정아 선수에게 비난을 쏟아낸 사람들이 얼마나 배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몇 번이나 배구경기를 관람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금메달 정신줄에서는 전문가인지 문외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경기에서 이겼는지, 금메달을 땄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승패는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무관하다

경기에서 승패는 피할 수 없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은 일상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승패는 경기의 결과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기는 것이 옳고 지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승패가 선수들의 인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경기 그 자체다. 경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우정을 쌓고, 인격을 닦고, 또 체력을 다지는 것이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선수들의 실력만이 아니다. 그 날의 날씨 (비, 바람, 온도, 습도 등), 선수의 건강상태, 경기장과 장비 상태, 경기장 분위기, 심판의 판정 등이 영향을 미친다. 우연이라거나 운(random error)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대치라는 것은 평균 개념이다. 가장 높은 확률을 보이는 사건을 말한다. 세계랭킹 1위라면 그 선수가 금메달을 딸 확률이 가장 크다는 말이다. 확실히 금메달을 딴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경기는 예측할 수는 있어도 누가 이길 것인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패에 대한 지나친 환호와 비난은 무지와 천박 그 자체다.    

한편 인구수를 고려하면 한국의 성적은 놀랍다. 남한의 인구가 5천만명인데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1억2천만), 독일(8천만), 프랑스(7천만), 이탈리아(6천만)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4억명의 중국이 금메달 26개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천만명당 금메달 0.19개 (=26/140)인데, 한국은 1.8개 (=9/5)를 획득했으니 한국이 10배 더 잘 한 셈이다. 엇그제 월드컵 축구 예선경기에서 한국이 중국을 물리쳤다. 개개인의 축구능력분포가 두 나라 모두 같다고 치면 2천 5백만명 (남자축구니깐)에서 11명을 뽑고, 7억만명에서 11명을 뽑아서 경기를 벌인 결과가 “공한증”이었다. 하지만 이 결과가 조선족이 한족보다 낫다거나 한국이 중국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가끔씩은 안쓰럽게 생각한다. 현대 올림픽의 경기종목은 대개 서구에서 보편화된 것이고, 서구 사람들의 체격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체형과 체력으로 봐도 한국인은 서구인에 미치지 못한다. 애초부터 올림픽은 동양인에게는 불공정한 경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이 맘을 아프게 한다. 금메달만 쫓는 정권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감내하는 선수들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더 크고 빠르고 힘센 경쟁자를 이기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치고, 부딫히고, 넘어지고, 피흘리고, 이를 악무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기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경기는 이기고 지는 자를 가린다. 하지만 겨루는 행위 자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패에만 몰입한다면 슬픈 일이다. 하물며 승패로 선수들을 얽어매고 백성들을 호도하는 일임에랴... 겨루는 그 자체를 즐기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상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는 한 판 승부를 보고 싶지 않다. 사격이든 배구든 좋아하는 경기 그 자체를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선수들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경기에서 진 우리 선수들이 어깨를 떨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진종오도, 김잔디도, 김우진도 죄송할 필요가 없다. 김연경도 박정아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최선을 다해 재주를 겨루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좀 흉하게 내지르는 김연경의 괴성도, 양효진의 얌전한 오리궁뎅이도, 실수를 연발했다는 박정아의 서브리시브도 그저 예쁠 뿐이다. 이제 그만 국가라는 짐을 내려놓으라. 승패에 목을 매는 태극전사의 투혼은 잊으라. 그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즐겁게 마음껏 펼쳐라. 그런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고 싶다. 


원문: 박헌명. 2016.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최소주의 행정학> 1(8): 1-3쪽.

Comment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