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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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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인공지능 시대다. 대화하듯 글로 물어보면 답을 해주고, 원하는 것을 설명해주면 시, 노래, 그림, 동영상, 기사, 보고서까지 만들어 준다. 인간의 목소리와 얼굴을 그대로 복제하고, 인간과 토론도 한다. 인간의 손발을 빼다박은 로봇이 경기를 뛴다. GPT-5를 보면서 놀랍도록 빠르게 진화하는 인공지능에 감탄하면서도 어질어질하다. 영화에서는 첨단로봇과 융합된 인공인간(artificial human, AH)이 인간과 결혼도 하고, 죽은 남편의 몸과 기억을 복제한 인간로봇을 만들고, 가정부로 구입한 인간로봇이 아내를 떠밀고 남편을 넘보기도 한다. OpenAI, Google, Apple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기업이 인공지능에 사활을 거다시피 한다.

인공지능과 자료지능 3강의 초상

지난달 어느 학술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인공지능을 정부에 도입하는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오랫동안 정보기술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인공지능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기술발전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수용성)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금지하고 규제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개인이나 조직이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떻게 인공지능을 잘 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재명 정부는 인공지능 강국을 만들겠다며 대전환(AI Transformation, AX)을 천명했다. AI투자 100조원 시대, 고성능 GPU 5만개 확보, 국가 AI 데이터센터(AI 고속도로), 한국형 ChatGPT 보급... IT가 AI로 바뀌었을 뿐 인터넷 강국을 천명한 김대중 정부를 닮았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정신줄, 수요보다는 공급, 질보다는 물량, 효과보다는 성과지표...

100조원을 들여 여기 저기에 데이타센터를 짓고, 장비를 사다가 빠른 통신망(6G)에 연결하고, GPU를 쏟아부으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AI 3강에 이를 수 있을까? CPU나 GPU는 그렇다 쳐도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성하고 운용하고 활용하는 실력은 어찌하나? 지난 6월 기준 한국의 수퍼컴퓨팅 순위는 7위이고 일본은 4위인데, 과연 Fujitsu와 NEC의 경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AI는 자료가 핵심인데, 과연 우리는 AI에 필요한 자료를 잘 축적하여 관리하고 있는가? 공공자료를 공개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쓸만한 자료인가?

인공지능이 없어서 10.29 참사가 벌어졌나?

왜 AI인가? 왜 AI 가 필요한가? 만일 최첨단 AI가 정부기관에 도입되었라면 10.29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정부의 자료지능(data intellegence, DI) 시스템이 이태원 근처 CCTV, 유무선통신자료, 인터넷자료 등을 근거로 30분 후 참사 발생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치자. 시스템은 즉시 중앙정부, 자치단체, 경찰, 소방, 병원 등에 전달했을 것이다(만일 AI가 재난문자를 발송하듯 참사발생 경보를 마구 뿌려댔다면 더 큰 참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당사자와 책임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참사를 막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윤석열 정권에서는 참사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거리 카메라와 휴대폰이 눈이 풀려가는 청춘들을 실시간으로 비추고 Youtube로 중계하고 있었는데도 관료제는 딴청을 피웠다.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외면했던 공직자들이다. AI는 커녕 AI 할아버지가 왔어도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다. AI는 당연히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라고 했을 테지만 윤석열 정권은 끝끝내 묵살했을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없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안한 것이다. 아마도 초고성능 AI가 비상계엄이 명백한 위법이고 성공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라고 경고했어도 12.3 내란을 강행했을 것이다. 어차피 법이나 국민이나 인권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무도한 자들에게 AI는 듣기 싫은 잔소리나 해대는 샌님일 뿐이다.

인공인간이 장관과 대통령을 대신하는 정부?

과거 정보기술에서 주목을 끌었던 의사결정지원체제(Decision support system, DSS)가 인공지능(AI)바람을 타고 자료지능(DI)을 거쳐 인공인간(AH)으로 향하고 있다. 머지 않아 인공지능이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자리를 차지할는지 모른다. 정확성과 생산성으로 무장한 인공인간들이 노동자, 회사원, 공무원을 대신할는지 모른다. 정부기관의 국장, 장차관, 총리,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연예인처럼 멋있고, 말잘하고, 예의바른 인공인간이라면 어떠할까? 정해진 제도(법과 규칙과 절차)대로 빈틈없이 움직일테니 불법과 탈법, 뇌물수수, 과실과 태만, 직무유기, 권한남용, 빤쓰 추태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상대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모두가 행복할까?

인공인간에게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청소하는 것도, 아이를 기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여행을 가는 일도, 축구나 농구도 인공인간이 대신하여 그 느낌과 기억을 전달해 줄 것이다. 숨쉬는 것도 귀찮다면 산소를 공급해줄 것이고 연애나 결혼이 번거로우면 밤마나 이상형을 골라 주고 우량아를 생산해줄 것이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평화로울테니 매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잠자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일은 없다. AI로봇이 인간을 살아주는 세상아닌가? AI로봇을 위해 인간이 일없이 빈둥거리는가? 아님 Matrix (1999)에서 보듯 AI에게 사육되는 줄도 모른 채 유리관에 갖혀 열과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빨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멋진 AI를 원하면 먼저 멋진 인간이 되어라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내는 존재인 한 장밋빛 미래는 환상일 뿐이다. 입력된 자료와 학습하는 앨고리듬 모두 완벽하지 않다. 그 결과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든 물건인 한 로봇(인공인간)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속 상상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Modern Times (1936)에서 급식기계에 앉혀진 채플린은 옥수수처럼 입을 털리고 음식을 얼굴에 뒤집어 쓴 채 싸대기를 정신없이 얻어 맞는다. 인간됨과 기계됨의 영원한 간극을 풍자한 명작이다. 90년이 지난 오늘 기름때없이 말끔하고 정교하고 똑똑하고 육감적인 AI가 되었으니 사정이 좀 나아졌을까?

어쩌면 정교한 AI일수록 인간의 불완전성을 철저하게 학습할 것이다. 인간이 정해준 제도에서 오타, 충돌, 불일치, 불합리, 무의미를 배우면서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학습한 자료에 따라 뇌물도 받고 근무태만에 직권남용까지 자연스레 선보일 것이다. 전정권의 공직자(판검사 포함)들을 학습한 AI가 장관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과연 국민 앞에 정직하고 공손하고 책임지는 전문가 AI였을까? 멀쩡하지 않은 인간을 보고 배운 AI는 멀쩡할 수 없다.

또 멀쩡하지 않은 사람은 멀쩡한 AI를 쓰지 않는다. “윤건희”는 한동훈, 한덕수, 이상민, 김용현, 여인형같은 AI만 쓸 것이다. 전문성을 포기하고 상사에게 굴종하며 국민을 배신하는 대가로 利를 추구하고, 맹종을 강요하는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하찮은 존재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합목적성이다. 그런 자들은 전문지식을 갈고 닦아 국민에게 성실하게 봉사하고 전문지식 앞에 서는 존귀한 존재들(2001: 277, 465)를 성가시게 생각한다. 책임을 지겠다며 전문가의 소신을 꺾지 않는 꼰대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박정훈 대령과 백해룡 경정이 참혹한 수난을 당한 것이다. 그런 멀쩡한 AI의 조언은 소음이자 불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의 수준만큼 결과물을 낸다.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사용자가 스마트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한 사람만이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은 스마트폰에게 이용당할 뿐이다(알게 모르게 무보수로 이용자료를 제공하고 광고수익에 기여한다). 마찬가지로 AI를 사용하면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만이 AI를 제대로 활용하여 더 똑똑하고 유능해질 수 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뭘 알아야 질문도 하고 AI 가 쏟아내는 답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 결국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멋진 AI를 꿈꾼다면 먼저 멋진 인간이 되고 멋진 관료제를 만들어야 한다.

AI Governance와 행정학

정부에서 AI를 도입한다면 관련 기술이나 수퍼컴퓨팅 예산부터 들여다 볼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과연 필요한 것인지부터 따져야 한다. 기존 관료제가 큰 어려움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AI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모든 공무를 AI로 처리하는 것이라면 신기루와 같은 목표다. AI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같은 업무를 특정했다면 기존 업무의 특성과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대화로봇(Chatbot)으로 전화상담업무를 대치한다고 생각해 보자. 관련 규정, 내용(지식), 절차 등이 부실하다면 대화로봇을 동원해도 결과는 똑같다. 인건비, 업무피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대화로봇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AI도입으로 발생할 문제도 따져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사검증 절차와 내용이 엉터리라면 AI로 인사검증을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 기존 업무처리를 정상으로 구현하는 것이 먼저다. 필수다. AI를 사용하고 말고는 선택사항이다.

정부가 전자정부와 AI를 도입한다고 해서 행정학이 크게 바뀌어야 할 이유가 없다. 행정학의 과제는 그대로이다. 정부 관료제가 교과서에서 적고 있는 대로, 정해진 법절차대로 동작하지 않는 문제다. 10.29참사처럼 주권자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는 문제다. 참사나 산불이나 물폭탄이나 산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관료제가 이성과 상식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공직자들이 법에 있는 대로, 절차대로 성실하게 일했다면 결과가 아무리 참담해도 아쉬울 뿐 비난할 수는 없다. 사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정답을 모른 채 기껏해야 공직자와 관료제의 퇴화방지나 약간의 진전을 위한 노력이랄까? 어쩌면 힘겹게 큰 돌을 언덕 위로 밀어올리면 그 돌이 밑으로 굴러 내려가는 시시퍼스(Sisyphus)의 굴레일는지도 모른다. 전자정부나 AI가 구세주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망상이다.

정보기술에서 governance는 헐렁하게 정의해놓고 각자 제마음대로 사용한다. Digital governace가 그러하다. Governance에 가까운 단어는 “다스림”이지만 이 단어는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다. 아마도 어떤 분야를 다스리는 체계라고 표현할 수 있을텐데, 추상도가 너무 높아 굳이 필요할까 싶다. 이러한 체계는 제도制度나 그 바닥의 규칙과 상도商道로 구성되는데, 법조문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규범과 관습을 포함한다. 제도론의 institution에 해당한다. 물론 제도 자체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규제에 가깝다. 따라서 AI governance라 하면 AI에 관련된 분야를 규율하는 제도체계라 할 수 있다.

정부에서 AI를 도입한다고 행정학자들이 주무 부처가 어디고 추진체계를 어떻게 구성할지 논박할 필요는 없다. 정치의 몫이다. 행정학자가 굳이 AI를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다. AI에 대해 지나친 회의감이나 공포를 가질 필요도 없다. AI라고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관련 사안별로 깊이 있게 논구하여 관료제가 합리적으로 현실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해결책을 제시해줘야 한다. AI를 학습시킬 공공부문의 규칙과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막연하게 법조항을 하나하나 들추는 것이 아니라 AI가 대체할 만한 구체적인 업무를 선택하여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문제가 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 해결책은 있는지, AI가 해결할 수 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공공기록물과 사람에 투자하라

예컨대, 기록물관리체계를 정비하여 공공기관의 의사결정과정과 결과를 문서와 시청각자료로 기록하고 영구히 보관해야 한다. 누구도 고치거나 삭제하지 못하도록 하고 책임을 뼈아프게 물어야 한다. 대통령의 행위를 문서로 하라는 헌법을 무시하고 국무회의록도 없이 계엄을 밀어붙이는 2024년 대통령실은 독립된 사관이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 15세기 궁궐만도 못하다. 주요 의사결정자들의 비화전화기록이 삭제되었네, 누가 시켰네, 민간인도 사용했네 하고 있다. 어이가 없다. 이런 엉터리 관료제에서 AI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공공부문의 자료를 공개하는 문제는 법절차도 법절차이지만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당장 반강제로 개인정보를 빼내가는 보험사의 횡포부터 멈춰세워야 한다. 자료의 소유권, 저작권, 배포권에 대한 문제도 어느 정도 가르마를 타야 할 사안이다. 다음과 네이버에서 멋대로 뉴스기사를 주무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AI 윤리나 원칙은 선언 효과는 있겠지만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AI 고속도로”는 듣기 좋지만 수퍼컴퓨터나 데이타센터를 마치 세운상가에서 사들고 오는 PC로 치부置簿하는 공직자(국회의원 포함)의 인식을 우려한다. 이재명 정부에서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망보다도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성하고 운용하는 사람을 키우고 그 경험을 축적하는 일에 시선을 모았으면 한다. 초고속·고성능 기계가 아닌 그 인간의 머리가 AI 강국에 꼭 필요하다. 당장은 돈을 버리는 일이라 해도,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격이라 해도 나름의 CPU, GPU, 운영체제를 연구하는 노력에 100조의 1푼, 1리라도 호응해주었으면 한다. Intel과 Nvidia를 뛰어넘는 신개념의 CPU와 GPU를 쌓아올리고 혁신적인 운영체제를 탑재한 수퍼컴퓨터에서 기본기가 탄탄한 관료제를 학습한 K-AI가 문제해결을 도와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인용: 박헌명. 2025. 인공지능, 자료지능, 인공인간과 행정학. <최소주의행정학> 10(8): 1-2.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일본 니이가타新潟현 사도佐渡시를 방문하였다. 니이가타항에서 북쪽으로 70km를 달려 료츠兩津항에 도착했다. 해무 속에 드러난 사도섬은 조용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한반도를 위아래로 누른 듯한 모양이고 제주도의 절반이 못되는 크기다.

인간의 탐욕과 따오기의 죽음

사도는 희귀새 따오기(“토키”)의 도래지로 유명하다. 섬 어디를 가도 따오기를 주제로 한 물건과 형상을 볼 수 있다. 동경에서 니이가타로 가는 신칸센 열차의 이름도 토키다. 때마침 눈썰미 좋은 버스운전기사의 배려로 논가에서 먹이를 구하는 따오기 내외를 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마지막 따오기가 2003년 죽은 후 중국에서 기증받아 인공으로 부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산업화로 질주했고 따오기를 멸종위기로 내몰았다. 창녕의 우포늪과 마찬가지로 사도시는 사라진 따오기를 복원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와 사도금광의 흑역사

사도는 또한 일본 최대의 금광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거의 900년 동안 금과 은을 캐냈다. 특히 아이카와相川 금광은 에도 막부(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너뜨린 도쿠가와 정권)부터 400년(1596-1989)을 이어왔는데, 지금까지 금 80톤과 은 2,500톤을 생산했다고 한다. 100여년 전에는 아이카와에만 5만명(현재 사도섬 전체 인구)이 몰렸다고 한다. 한 가운데만 농지인 섬에 쌀, 물, 집이 부족해졌고 따오기가 밀려났다. 사금을 채취하는 다른 광산과는 달리 아이카와광산에서는 굴을 파고 광석(ore)을 캐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금맥을 파들어가는 채굴방식이다. 여기에서 생산된 금화로 네덜란드 등 서구와 교역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니 일본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산업유산이다.

에도 막부(1603-1868)와 메이지 정부(1868-1912)에 이어 1896년 미쓰비시三菱가 아이카와 광산을 넘겨받아 충실하게 일본제국에 부역했다. 일제는 사도광산에서 캐낸 금과 은으로 전쟁을 벌였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1938년 4월부터 점령지에서 무자비하게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였다. 미쓰비시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다. 사람들을 끌어와서 광산에 집어넣고 채석을 강요했다. 임금을 주기는 커녕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노동을 착취했다. 최소한의 음식과 옷가지와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석탄을 캐낸 군함도에서 벌인 미쓰비시의 만행과 닮은 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 그 전쟁에 부역한 전범기업 미쓰비시, 그리고 악랄한 강제동원은 사도금광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었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무일푼으로 돌아오신 당숙

어릴 적 집안 어른들이 일본으로 돈벌러 간 얘기를 종종 하셨다. 종조부께서는 일본에 가셔서 돈을 벌어오셨다고 했다.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운좋게도 품삵을 제대로 쳐준 관리자를 만난 모양이다. 당숙은 금광에서 일하셨다 했다. 1,500여명의 조선인이 사도금광에서 일했다는 자료도 있고, 1940년 논산에서 100여명을 집단모집으로 강제동원했다는 증언도 있다. 고향이 논산에서 멀지 않았으니 그 무리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닐까?

당숙은 거의 매일 몽둥이로 맞으면서 일만 하셨다고 했다. 우직하셨던 당숙이니 꾀를 내서 매를 피할 줄도 모르셨을 터. 가장 힘들고 위험한 채석일을 하고도 당숙은 결국 거의 무일푼으로 돌아오셨다.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종종 당숙은 약주를 하시고 동네 어귀부터 악다구니를 쓰셨다. 작은 체구지만 장사같은 힘을 가졌던 당숙이었다. 하지만 한창 나이에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화병이나 진폐증같은 후유증이었을까? 그때 나는 잔치인 줄만 알고 화덕에 걸린 가마솥을 맴돌며 7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당숙모의 하얀 치마자락을 끌고 있었다.

에도시대와 무관한 미쓰비시의 전범유산이다

사도금광관광은 주로 (1) 금광코스 체험, (2) 근대금광산업유산 견학, (3) 금광정보센터와 전시자료관 방문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한정하여 세계유산등록을 신청했다. 한마디로 꼼수다. 거품을 일으켜 금을 농축한 浮遊選鑛場(1935), 시멘트가 보급되기 전에 돌로 세워진 浮選鑛所, 광석저장소(1938), 광석을 깨뜨린 착광장搗鑛場, 부족한 물을 재활용하기 위한 thickener(1940), 금주조공장 등 관광상품 대부분이 에도시대와 무관하다. 모두 사도광산을 불하받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작품이다. 심지어 광산의 명물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戶 역시 19세기 말 발파에 의해 꼭대기가 V자로 갈라진 것이다. 에도시대의 유산에 에도시절은 없다. 주조공장은 수영장으로, 부유선광장 아래는 골프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공장 비탈 위에 있던 소학교를 다녔던 센터장의 설명이다. 반면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숙소와 식당 자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반성없는 아베정권의 역사 부정과 왜곡이다.

산비탈에 조성된 거대한 부선광소와 부유선광장은 현재 역사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낮에는 담쟁이가 삭은 철근 콘크리트를 뒤덮고 있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발이 과거를 수놓고 있다. 어둠 속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듯 웅장하다. 순간 미쓰비시가 저지른 범죄와 소리없이 죽어간 원혼은 사라진다. 인쇄물, 동영상, 강의 어디에도 관련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반짝이는 금과 산업시설만 미화되었다. 따오기와 공생을 말하지만 근대화 시절의 과오에는 입을 닫는 식이다. 아직까지 소유권을 가진 미쓰비시는 침묵하는 가운데 정부가 전범행적를 분칠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설치고 있다. 어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한들 경우가 아니다. 그저 미쓰비시 전범유산일 뿐이다.

사도섬은 조선인이 끌려가서 매맞은 슬픈 섬이다. 춥고 배고파서 서럽고 떠나지 못해 목이 멘 섬이다. 진실이 묻혀가는 원통한 섬이다. 눈감지 못하고 죽은 조선 따오기들이 떠도는 섬이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4.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미쯔비시 전범유산. <최소주의행정학> 9(6): 1.

일본이 지난 8월 24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인근 바다에 방사능 오염수를 버리기 시작했다. 동경전력은 2011년 원전 폭발 이후 원자로에 사용된 냉각수를 거대한 탱크에 담아 보관해왔는데, 탱크 수는 천 개가 넘고 총량은 150만톤에 이른다고 한다. 원전 근처의 빗물과 지하수에 방사능이 섞여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매일 수백톤의 오염수를 제외한 수치다. 앞으로 30년간 바다에 쏟아낼 예정인데, 그때까지 폐로를 마칠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다.

일본의 꼭두각시가 된 윤석열 정권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우려와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일본산 해산물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런데 일본과 가장 가까운 나라의 반응이 해괴하다. 오염수 해양투기를 반대해 온 문재인 정권과는 달리 윤석열 정권은 일본 정부가 하자는 대로 해놓고선 찬성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니랜다.

국무총리든 외무장관이든 국회에서 답변하는 내용과 논리는 똑같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안전성을 검증하였고 과학적으로 처리된 오염수니 안전하다는 것이다. 여당과 지지자들도 똑같은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오염수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하고 방류를 결사반대하던 자들이 이제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친일과 기회주의 본색 그대로다.

"과학이 진리는 아니죠"

수년 전 가수 송창식씨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한 말이다. 과학은 항상 진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봤을 때 진리일 수 있댄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윤씨는 원전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과학을 믿지 않고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우기는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정말 1 더하기 1은 하늘이 무너져도 2여야 하는가? 1+1 =2는 십진수의 세계관이다. 이진수의 세계에서는 1+1=10이다. 1+1=2는 수학이고 1+1=10은 수학이 아닌가? 십진수의 2와 이진수의 10은 똑같다. 쓰고 있는 색안경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일 뿐이다. 평생 십진수만 알고 있는 자에게는 황당한 셈법이다. 뭘 모르는 자의 아집이 이리 무섭다. 윤씨의 비분강개가 측은한 까닭이다. 하긴 후쿠시마 원전은 폭발하지 않았고 방사능도 누출되지 않았다고 확언한 자가 아닌가.

진리 앞에 한없이 초라한 과학

과학은 인간의 삶을 바꿔왔다. 특히 20세기 서양의 과학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성과를 냈다. 1-3차 산업을 지나 4차 산업에서 로봇(인공지능)의 시대를 꿈꾸고 있다. 수많은 질병을 극복했고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냈고 이제는 우주로 향하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의 자리를 넘볼 기세다.

하지만 과학이 알아낸 진리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한 진리 앞에 한없이 초라할 뿐이다. 우리가 겸손해야 하고 미지의 진리를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다. 원자력을 이용하는 과학은 80년 역사를 자랑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핵폭탄이든, 핵발전소든, 핵폐기물이든 뿜어져 나오는 방사능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방사능이 인간이나 생태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완벽하게 아는 이가 없다. 피폭된 생물을 완벽하게 치료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한총리가 침이 마르도록 언급한 과학은 후쿠시마 원자로가 폭발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로봇을 밀어넣을 수 있었다. 아직도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망가졌는지, 어떤 방사능이 얼마나 나오는지 정확히 모른다. 언제 어떻게 원자로를 해체할 수 있는지도 모른채 핵연료가 방사능을 다 뿜어낼 때까지 하염없이 냉각수를 퍼부을 뿐이다. 30년이 될 지 300년이 될 지 알 수 없다. 방사능을 제거하는 ALPS는 툭하면 고장이고 일부만 걸러낸다. 오염수 방류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방사능 안전기준이라는 것도 대강의 최소한이지(잘 모르니까), 이것을 지킨다고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현재 과학 수준의 민낯이다.

과학은 믿지만 인간을 믿지 못한다

과학도 과학이지만 과학을 이용하는 인간을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뼈아픈 대목이다. 과학을 말하는 자들이 정치질을 하고 있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사람이다. 어차피 대중은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 과학을 이용해 먹는 자들의 방식과 논리를 판단할 뿐이다.

그동안 동경전력은 수차례 거짓말을 하고 부실하게 자료를 관리한 전력이 있다. 처음에는 원전이 폭발하지 않았다고 했다. 냉각이 되지 않은 핵연료가 녹아내려 압력용기를 뚫고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은 콘크리트 균열을 통해 방사능 물질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급한대로 바닷물을 퍼부어 일단 원자로를 식히자는 기술자를 내쫓았다.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돈은 날렸을지언정 이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오염수에 포함된 방사능이 2천여종인데, 64종만 언급하다가 이제는 30종, 9종으로 줄였다. 일본 정부에게조차 원전관련 사실을 숨겼다. 방사선 피폭 한도를 대폭 높여 노동자를 개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이다. 숫자 장난으로 기준에 부합하니 안전하다는 것이 그들의 과학이다.

IAEA나 윤정권(오염수 시찰단)이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으로 오염수의 안전성을 검증하지 못했다. 체계적으로 정확한 방사능 자료를 축적하는데 게으른 동경전력이 오염수 탱크 위에 있는 물을 떠다줬을 뿐이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탱크 안의 오염수든, 원자로 안의 냉각수든, 지하수든, 발전소 앞바다의 물이든 자체 기준으로 시료를 채취했어야 했다. IAEA도 일본이 준 돈으로, 일본이 원하는 검사항목만 따져 보고서를 작성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과학적으로 분석했네, 안전기준에 맞네 하고 있다. 이런 저런 수치를 들이밀면서 왜 과학을 믿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안믿으면 가짜뉴스고 종북이랜다. 천안함 민관합동조사 때와 똑같다. 터무니없는 궤변이다. 대중은 어리석지 않다.

한총리는 과학적으로 처리되어 국제기준에 부합한 “오염처리수”라며 마시겠다고 했다. 일본총리도 못한 말이다. 제정신이 아니다. “오염처리수” 맛에 중독된 토착왜구들의 금단증상인가? 

 

인용: 박헌명. 2023.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는 과학인가? <최소주의행정학> 8(8): 1.

검찰은 2019년 9월 6일 조국 교수의 법무무장관 인사청문회가 열리고 있는 시간에 배우자인 정경심 교수를 기소했다. 총장이름으로 나가는 표창장을 위조한 혐의라지만 피의자를 조사하지도 않고 한밤중에 재판에 넘긴 것은 상식과 거리가 멀다. 검찰은 정교수에게 자본시장법과 금융실명법 위반 등 14개 혐의를 씌워 기어코 구치소로 보냈다. 언론보도에 비친 조국 내외는 반역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파렴치한이다. 하지만 “차고도 넘친다”는 검찰의 증거는 1심 재판에서 대부분 허무하게 무너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총장 표창장 위조에 관한 검찰의 설명과 법원의 판단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사실에 근거한 증거 제시와 과학적인 추론이라 할 수 없다.

IP주소가 뭐길래?

검찰은 동양대에서 압수한 PC에 저장된 IP (Internet Protocol) 주소를 근거로 정교수가 2013년 6월 방배동 자택에서 표창장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 IP주소는 네트웍에 연결된 장치(예컨대, 컴퓨터, 프린터, 스마트폰, 라우터)를 인식하기 위해 장치에 부여되는 번호다. IPv4는 8비트(0~255) 네 개를 붙여서 만든 번호체계로 최대 43억개 주소를 정의할 수 있다. IP주소는 특정 번호로 고정될 수도 있고(포트에 번호가 지정되어 있고), DHCP (Dynamic Host Configuration Protocol)가 그때그때 다른 번호를 할당할 수도 있다. 서버를 운영하려면 고정 IP주소가 필요하고, 대부분(정교수의 PC 포함)은 효율성이 높은 변동 IP주소를 사용한다.

ICANN에서 관리하는 공인 IP주소는 전체 인터넷에서 고유한 번호로서 Public 혹은 Global 주소라고 하고, 개별 네트워크(흔히 LAN)에서만 고유한 IP주소는 Private 주소라고 한다. 정교수가 라우터(Router)를 통해 PC를 연결했다고 하는데, 이는 라우터의 DHCP에서 사설 IP주소를 할당받았다는 뜻이다. 검찰은 192.168.123.xxx라고 했다. 정교수가 LG U+ 제품을 사용한 듯하다.

IP주소로는 위치를 알 수 없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장치가 많아짐에 따라 IPv4로는 감당하지 못하고, 16비트 여덟 개를 붙인 IPv6는 호환성 문제로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IP주소를 전환해주는 NAT (Network Address Translation) 기술이 대안이 되었다. 라우터의 NAT는 PC에서 외부로 신호(패킷)를 보낼 때 사설 IP주소를 공인 IP주소(라우터의 IP주소)로 변환하고, 외부에서 PC로 정보를 받을 때는 공인 주소를 사설 주소로 바꾸어준다. 따라서 똑같은 사설 IP주소가 동시에 다른 네트웍에서 사용될 수 있다. 한 네트웍 안에서만 고유한 번호라면 상관없다.

결론적으로 변동 사설 IP주소로는 PC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 검찰이든 변호인이든 마찬가지다. 내 PC의 사설 IP주소는 192.168.50.xxx이다. 여긴 방배동도 동양대도 아니다. 지리적 위치와 무관하게 제조사(Asus)가 정한 주소체계일 뿐이다. 이 라우터를 사용하는 한 세계 어디에서 접속하든 같은 IP주소(범위)를 받는다. 게다가 IP주소를 변조하여 서버를 속이는 방법도 있다.

MAC 주소는 좀 다른가?

검찰은 윈도우를 재설치하기 전과 후의 MAC (Media Access Control) 주소가 같으니까 PC가 방배동에 있었댄다. 황당하다. MAC주소는 제조사에서 네트웍장비(Network Interface Controller)에 물리적으로 적어놓은 고유번호다. MAC주소가 같다는 것은 그 PC의 네트웍카트를 빼내지 않았다는 뜻이지, 방배동인지 아닌지와는 무관하다.

그러면 어떤 조건에서 IP주소나 MAC주소로 장치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 첫째, 잘 관리된 고정 IP주소를 사용해야 한다. IP주소를 지정하는 부서에 가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서버가 라우터의 공인 IP주소, 할당된 변동 IP주소, MAC주소를 같이 저장해놓았다면, 특정한 시간에 어느 장치가 어느 변동 IP주소로 작업했는지를 알 수 있다.1) 하지만 이런 네트웍 환경을 가진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인터넷서비스회사(ISP)나 구멍가게 수준에서 이런 정보를 관리할 가능성(수익성)은 거의 없다.

컴퓨터를 좀 한다는 사람이라면 아는 사실을 검찰이 몰랐을 까닭이 없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검찰의 억측을 받아들인 1심 재판부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정말 방배동 주소가 적혀있는 줄로만 믿었을까?

최성해의 거짓말이 증거다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하루 전(참으로 절묘한 시기다) 검찰에 출석한 당시 동양대학교 총장 최성해씨는 조국 교수의 딸에게 표창장을 발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정한 일련번호를 부여받아야 하고 발급기록이 보관되기 때문에 총장 자신도 모르게 표창장이 발부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청을 나오면서 해맑게 교육자의 양심을 선택했다는 최씨를 보면서 나는 혀를 찼다. 정말 기억력이 좋아서 수년 전 발급된 표창장까지 다 꿰고 있단 말인가? 총장이 일련번호가 어떻게 생겼는지, 발급절차가 어찌되는지, 어떻게 기록이 보관되는지 시시콜콜 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학과나 연구소에서 요청하는 표창장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일련번호와 형식은 물론이고 기록을 관리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일련번호 형식이 서로 다른 동양대 총장 표창장이 여러 개가 발견되었다.

뉴스에 나온 최씨를 보면서 나는 2007년 학력위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씨를 떠올렸다. 그녀는 공항에서 출국하면서 예일대 박사학위를 증명하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나는 아연啞然했다. “아니 어떻게 본인 스스로가 박사학위를 증명한단 말인가? 지도교수와 심사위원이라면 모를까... 정말 박사과정 공부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군...” 최씨도 학위 5개 중 3개가 가짜로 드러났다. “교육학박사 최성해”가 찍힌 표창장 자체가 허위라는 것 아닌가.

가짜박사와 법쟁이들의 비양심

가짜박사의 인터뷰를 본 소감은 (1) 총장 노릇을 제대로 못한 사람이다(동양대의 학사가 엉망이다), (2) 당시 정황으로 보면 최씨는 정교수의 딸에게 표창장을 발급해 주었는지 아닌지를 잘 알고 있다, (3) 발급해 주었는데도 아니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평소 며느리감이라며 애지중지하던 사람에게 표창장이 아니라 명예박사인들 아깝겠는가. 지금은 관계가 틀어졌지만서도.

정말 최씨가 표장장에 대해 몰랐다면 일련번호나 장부를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검찰에 가기 전에 살펴보고 계산을 했다는 뜻이다. “교육자의 양심”은 1999년 옷로비 사건 때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양심있는 사람은 무겁게 진실을 말할 뿐 속보이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최소주의와 거리가 멀다.

나는 표창장이 위조되었는지 아닌지 모른다. 다만 검찰과 최씨의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소하고, 사실과 과학은 외면하고, 증인과 언론을 동원하여 망치를 두드린다면 판검사 편에 서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동양대 표장장이 뭐길래 이 난리인가? 과연 한 집안을 풍비박산 낼 일인가? 법쟁이와 가짜들의 양심에 모진 털이 무성하고, 백성들의 이성과 상식은 아파서 울고 있다. 

끝주

1) 인디애나대학교에서 컴퓨터를 네트웍에 연결하면 서버는 컴퓨터의 MAC주소를 읽어서 사용자 데이타베이스에 등록되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목록에 없으면 사용규정에 동의하고 10분 이상 기다렸다가 다시 접속하라고 한다. 서버가 누가, 언제, 어느 장치(MAC주소)를, 어느 변동 IP 주소로, 어디서(대강의 위치), 얼마동안 사용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는 얘기다.

같이 읽기

 

인용하기: 박헌명. 2021. 정경심 PC의 IP주소와 알리바이. <최소주의행정학> 6(6): 2.

네이버와 다음을 통해 제공되는 뉴스의 편향성이 화두다. MBC의 <스트레이트>에 따르면, 뉴스가 노출된 위치, 빈도, 기간 모두 수구언론사의 기사가 압도하고 있다. 이에 국내 웹포탈(Web portal) 업체인 다음과 네이버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알고리듬(algorithm)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가 한 일이니 공정하고 정확하다는 항변일 것이다. 박정희시절 세금문제를 따지는 민원인에게 국세청 직원이 퉁명스럽게 “컴퓨터로 출력했다”며 훈계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알고리듬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그저 웃음이 나온다. 인공지능의 알고리듬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이른바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이나 심층학습(deep learning or hierarchical learning)과 같은 아리송한 말로 사람들을 홀리고 있지만 진실은 간단하다. 신경망이든 양자 알고리듬이든 인간의 지능을 조금이라도 더 닮을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처럼 배울 수 있을까 하는 몸부림이다. 컴퓨터는 인간을 거울처럼 비치고 있다. 인공지능(알고리듬의 집합체)은 제작자의 마음과 의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무리 처리속도가 빨라지고 저장능력이 커졌다 해도 사람이 만든 기계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과 의도를 반영하지 않는 기계는 아무리 우수해도 실패작이다. 부수어지고, 버려지고, 다른 기계에 끼워질 운명이다.

데이타가 운명을 좌우한다

둘째, AI는 철저하게 데이타에 의존한다(data-driven). 알고리듬의 논리구조에 따라 데이타를 분석하여 대상의 특성치(parameters)를 수정해 나간다. 이것이 학습이다. 따라서 규모가 크고 다양하고 믿을 만한 데이타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쓰레기를 입력하면 쓰레기가 나올 뿐이다. 아무리 수퍼컴퓨터에 초대형 데이타(big data)를 넣어 돌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인 확률이나 회귀분석을 P(y|θ)라고 표현한다면, Maximum Likelihood (ML)나 Baysian 회귀분석은 조건부 확률인 P(θ|y)라고 말할 수 있다(King 1998: 14-18). 여기서 y는 데이타이고 θ(theta)는 특성치가 포함된 모델이다. AI는 주어진 데이타에서 특성치를 수정하면서 찾아가는 베이지안 방법을 취하고 있다. ML이든 베이지안이든 특성치의 운명은 전적으로 데이타에 달려있다.

네이버와 다음이 웃기고 자빠졌다

웹포탈의 인공지능이 바로 그들의 의지다. 알고리듬이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네이버와 다음이 한 짓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니가 했지?”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지만 반드시 문재인 정권을 흔들고 말겠다는 웹포탈의 의도라기보다는 그들의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이다. 돈을 벌기 위해 클릭수와 노출시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포탈의 셈법이다. 그들의 알고리듬은 이런 의도에 충실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실과 상관없이 독자를 유혹하는 기사를 백미터 경주하듯 쏟아내야 하는 기자들의 강박이 있다. 기사를 쓰느라 취재할 시간이 없다는 황당한 푸념이다.

웹포탈의 인공지능이 뉴스내용을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AI의 학습은 진위를 판단하고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패턴을 찾아 연결(추론)하는 것이다. 알파고가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닌 것처럼 AI는 기사를 읽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는 단지 주어진 논리구조에서 계산을 굉장히 빠르게 할 뿐이다. 사람들은 경이로운 계산능력을 지식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 뉴스 자체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과거 데이타에 의존하는 AI는 쓸모가 별로 없다. 주가를 예측한다는 AI가 허무맹랑한 까닭이다. 입력된 데이타가 없으면 나올 것이 없고, 적으면 정확성과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알파고가 이세돌의 변칙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결국 웹포탈의 뉴스편집은 인공지능이 아닌 AI를 가장한 “인공직원”의 작품이다. 미끼상품을 골라 진열하는 일이다

정말 웹포탈이 인간의 역사,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더이상 데이타가 필요없이 정확한 θ값을 알고 있는), 그러면서 엄청난 계산능력을 장착한 인간을 구현해 냈다면, 이 알고리듬은 인류역사를 바꿀 수 있는 “제왕의 반지”다. 네이버와 다음이 불확실성(uncertainty)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고, 세상을 지배한다는 의미다. 이자율과 주가를 예측할 수 있으니 온세상의 뭉치돈은 다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주가예측 AI를 광고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 AI는 꽁꽁 숨겨놓고 혼자만 사용해서 돈을 긁어모을 일이다). 대통령, 국회의원, 법관, 검사, 경찰, 종교인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주무를 것이다. 네이버와 다음은 웹포탈 시장의 푼돈이 아니라 전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그들의 “수동 알고리듬”은 고작 문재인 정권을 흠집내고 낙인찍으려는 기사를 골라내고 있다. 한미정상회담을 해리스 부통령이 문대통령과 악수한 손을 닦은 것으로 요약하는 수준이다. 앙증맞지 않은가.

네이버와 다음은 뉴스에서 손을 떼라

웹포탈과 언론사의 거래와 상술에 기자들은 노예가 되고, 시민들은 불량기사를 습관처럼 보면서 매출을 올려주고 있다. 클릭수와 노출시간에 쫓긴 기레기는 이제 모이를 쪼아대는 닭처럼 쉴새없이 글쇠판을 두드리는 “계자鷄者”가 되었다. 수구세력이 지배하는 언론지형에서 AI의 편파성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Garbage in, garbage out”이라 했다. 시민들이 포탈이 골라주는 쓰레기를 생각없이 받아먹으면 거짓과 왜곡으로 꾸며진 메아리방(echo chamber)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허상에 중독되고 편파성이 강화된다. 사실 AI의 알고리듬을 공개하냐 마냐는 본질이 아니다. 포탈이 뉴스장사를 못하도록 해야 한다. 방송이든 신문이든 날조기사는 엄중히 처벌해서 퇴출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깨어있는 시민 스스로가 진위를 따지고 진실을 밝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 King, Gary. 1998. Unifying Political Methodology. Ann Arbor, MI: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같이 읽기

 

인용하기: 박헌명. 2021. 웹포탈의 알고리듬은 그들의 욕망이다. <최소주의행정학> 6(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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