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 조별리그에서 한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1대 0으로 패했다. 그냥 참패가 아니라 6.25 몬테레이 참사라 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좋은 선수들이 출전했는데 최약체라고 알려진 선수단에게 역대급 졸전 끝에 무너진 것이다. 비기기만 했어도 32강 아니었던가. 이제는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판이니 너나없이 분노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축구를 했던 사람도, 국가대표로 나섰던 사람들도 날선 비난이다. 경기가 끝난 후 땅을 치며 분을 삭이는 이강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홍명보는 정몽규와 함께 월드컵을 확실하게 말아먹은 것이다. 그 어려운 사명을 완수한 불굴의 집념이 대단하다. 이번 월드컵이 낳은 스타는 매시도 호날두도 손흥민도 아닌 홍명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전략이 없고 영혼이 없는 홍명보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만 축구에 대한 전문성은 없다. 수비수가 세 명이어야 하는지 네 명이 나은지 잘 모르겠다. 손흥민을 왼쪽 날개로 써야 하는지 최전방 공격수로 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경기가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있다. 경기에 지더라도 멋있는 기량과 끝까지 경기에 집중하는 투지를 보고 싶다. 보는 사람이 즐겁도록 축구를 하는 손흥민을 좋아하는 이유다.
이번 월드컵에서 나는 한국 선수단의 경기를 하나도 보지 않았다. 유투비에 올려진 짧은 요약본을 힐끔 봤을 뿐이다. 우리 선수단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으면서도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기 싫었다. 축구단을 운영하는 자들의 행태에 진저리가 났다. 문체부의 감사에서 드러난 축구협회의 불법탈법은 거침없고 오색찬란했다. 그 활극의 주인공이 정몽규와 홍명보와 그 패거리들이다.
홍명보는 이기든 지든 재미없고 짜증나는 축구를 보여줬다. 전략 전술이란 것이 상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해야 하는데 늘 똑같다. 전진하지 못하고 공을 뒤로 돌리다 허무하게 골을 먹는다. 상대 골대에 공을 넣어야 이길 것 아닌가. 축구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지. 훌쩍 큰 선수들에게 땅꼬마 옷을 입혀 옥죄고, 다양한 재능을 해묵은 다식판에 넣고 찍어내는 모양새다. 정상급 선수를 구닥다리 기계틀에 소모품처럼 돌려쓰면서 갈아넣고 있다. 한마디로 답이 없다. 사람들은 “(니가 좀) 해줘” 축구라고 했다. 게다가 선수를 편애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인맥 축구”다.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홀대하는 것을 누가 납득하겠는가? 메시인들 멀쩡하겠는가? 고대나 울산 출신이 그리 대단한가? 정말 대단한 성골 뼉대기 나셨다. 이건 축구가 아니라 정치질이다.
홍명보의 강 건너 불구경에 좌절하다
홍명보가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을 듣고 탄식했다. 머리굵은 인간이 개과천선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구나. 자신을 버렸고, 이제 한국 축구밖에 없다더니 홍명보는 사실 영혼을 버렸구나.
감독이라는 자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태연스레 말을 한다. “[한국 경기에 대한] 외신의 혹평은 뭐 정확하겠죠.” “저희가 [경기를 더]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이라니, 지금 남 얘기를 하고 있는가? 유체이탈幽體離脫이다. “왜 갑자기 [경기력이 나빠졌는지] 당황스러운 건 사실이예요.” 선수단에 문제는 없다면서도 선수들의 정신적인 면, 심리적인 상태, 더운 날씨를 들먹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면서 남의 탓으로 돌리는 감독이라니. 깜냥이 안되는 자다. 본인이 암덩어리임을 모르고 횡설수설이다.
홍명보는 경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고 했다. 공자왈 맹자왈같이 하나마나한 소리다. 하지만 그 책임을 언제 어떻게 질 것인가를 말하지 않았다. “저희가 어느 그룹에 갈지는 모르겠지만은... 더 중요한 건 선수들이 지금 얼마만큼 회복을 할 수 있느냐... 지금까지 쭉 해왔던 거를 갑자기 ... 바꾸는 것도 ... 별로 좋은 건 아니라고...” 혹평이나 비난이 빗발치든 말든 끝까지 지금 하던 그 방식대로 쭈욱 가겠다는 소리다. 요행으로 승자진출전에 나간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안봐도 비디오다. 언제나 그랫듯이 그들이 말한 책임이란 그저 입발림일 뿐이다.
선거업무를 모르는 선거관리위원장 노태악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서 투표를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부 부정선거에 홀린 자들이 잠실 개표소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여야는 물론이고 시민단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성토하고 있다. 많은 직원들이 선거철만 되면 휴직을 하고 일반 공무원들에게 일을 떠넘겼다. 위원장은 한 달에 한 번 출근하고 수백만 원 수당을 챙겼고, 전국 17개 시도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선거당일 선거관리위원 두 명만 출근을 했다. 채용비리도 벌어졌다. 헌법기관이라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해왔던 것인가.
선거관리위원회가 집중포화를 맞는 차에 위원장과 사무총장이 책임을 진다며 사퇴했다. 노태악을 포함한 주요 간부들은 국정조사에 출석을 거부하거나 지각했다. 국정조사에서 보인 노태악의 자세와 태도는 충격 그 자체였다. 최악이다. 대법관과 위원장을 겸직했다는 자가 천하 태평이다. 사태파악을 못한 것인지 자기일인줄 몰랐다는 소린지... 선거관리 업무를 따져 물어도 아는 것이 없다. 눈만 꿈뻑이며 아랫사람이 답하기를 기다린다. 배우자를 출장에 동행시킨 것도 아래에서 알아서 한 일이다. 아는 것이 없으니 답할 것도 없고 책임질 것도 없다는 투다. 과분한 특혜를 우아하게 받아먹으면서 아랫 것들이 해먹는 것을 못본 척한 것이다.
수구기득권의 민낯이다. 성골이네 진골이네 폼을 잡지만 하는 짓은 양아치보다 못하다. 끼리끼리 해먹는 것은 축구협회나 선거관리위원회나 다를 바 없다. 실력도, 양심도, 품격도 없는 자들이다. 예술성이나 창의성과 원수진 “푸세식”들이다. 공공의 일을 모르면서, 일을 못하면서, 일을 안하면서 자리를 뭉개면서 꿀만 빨고 있다. 상식있는 일반인이 협회장을 하고 감독을 하고 위원장을 했어도 이 지경은 면했을 것이다. 주적이 있다면 바로 이들 패거리들이다. 수많은 시민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니 즐거움을 얻지 못해 비난하는 것(不得而非其上者)이 아니다. 자리에 있으면서 여민동락與民同樂을 못했으니 이제 혹독한 처분을 달게 받으시라.
공직자들의 파렴치한 입놀림이 끝간데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시시비비를 따지기도 지친다. 그냥 깃털보다 가벼운 존재들의 발광發狂이 역겨울 뿐이다. 지식이나 법 문제가 아니다. 이념이나 종파 문제가 아니다. 멀쩡하게 생겨먹은 공복들에게 사람사는 세상의 경우를 기대하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자괴감이 든다.
비열하고 비겁한 오세훈의 입놀림
GTX-A 삼성역 건설현장에서 80개 기둥 중 50개에서 주철근이 누락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갯수로는 2,500개, 무게로는 200톤에 가까운 철근이 기둥에서 빠졌다는 얘기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지난 해 11월 10일 발주처인 서울시에 보고했는데, 서울시는 올해 4월 29일 철도공단과 국토부에 보고했다고 알려졌다. 중대한 사안인지 사소한 문제인지, 시공이 잘못인지 감리가 잘못인지, 서울시가 보고를 안했는지 철도공단이 안했는지를 두고 공방이 치열하다. 사물을 다루는 공학 문제를 두고 왜 다투는지 모르겠다. 법과 절차에 따라서 문서로 일을 하게 되어있는 관료조직에서 자초지종을 밝히지 않고 서로 네 탓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다. 사실 그대로를 밝히면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정말 황당한 것은 5월 18일 오세훈의 발언이다. 오씨는 이 사건을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원리원칙대로 했고 법을 위반한 것도 아닌데, 아직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왜들 호들갑이냐는 식이다. 빼먹은 철근 대신 철판대기를 덧대면 안전보강이 훨씬 잘된다고 떠벌린다. “니 집을 그따위로 지어도 그런 소릴 할텐가?” 그 좋은 방법을 두고 왜 비싼 철근을 수백톤이나 박아넣으려고 했을까? 정말 사고라도 났으면 풍장치고 잔치라도 벌일 작정이었나? 시장이라는 자가 작년에 벌어진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선거철에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니... 아무것도 몰랐으니 심심한 위로라도 해주랴? 아님 표창장이나 훈장이라도 주랴?
지난 26일에는 서울 서소문 고가도로가 무너져 세 명이 죽거나 다쳤다. 또 서울시, 철도공사, 국토교통부, 시공사, 책임공방을 벌이고 있다. 직급이 높은 공무원일수록 명확하게 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린다. 제일 어처구니없는 것은 해체작업을 추진했던 오세훈의 입놀림이다. “현재로서는 직무가 정지돼 있지만 현직 시장으로서 정말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비참해서 울고 싶을 심정이니 손수건이라도 건네주랴? “기억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그 비열한 말장난이다. 왜 깨끗하게 “시장으로서 사과드립니다”라는 그 한마디를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토를 다는가. 시장직무가 정지되어 있음을 내내 강조하면서 굳이 기어나와 시장질을 하는 얍삽함이여. 직무가 정지되었음에도 굳이 광화문 “받들어 총” 준공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잔머리여...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 책임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고 폼내고 돈써서 생색내는 데만 관심이 있다는 소리다. 시민에 대한 봉사는 없고 오직 선거 승리만 있을 뿐이다. 공치사는 내 몫이고 절대 책임은 안진다는 오씨 특유의 정신줄이다. 다섯살박이에서 성장을 멈춘 늙은 어린이의 소아병인가.
송언석, 정용진, 정몽규의 입놀림
야당 원내대표인 송언석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리는 광주에 가지 않았는데, “나는 더러버서 (광주에) 안간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송씨는 더러워서가 아니라 “서러워서”라고 했다고 둘러댔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덮기 위해 법적 조치를 운운하며 우격다짐을 벌였다.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며 우기면서 사실을 보도한 언론사를 법사슬에 옭아맨 짓거리 그대로다. “서러워서”나 “날리면”이나 말이 안되는 줄 알면서도 기득권의 힘만 믿고 밀어붙인다. 부적절한 입놀림은 실언이겠지만 왜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하지 못하는가? 제1야당 원내대표의 처신이라니...
지난 26일에는 신세계 회장 정용진(공직자는 아니지만)이 나와 스타벅스의 “탱크탁” 사건에 대해 기자회견을 했다. 사과를 한다고 나왔으나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그래서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더 좋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이 무슨 궤변인가. 누군가가 좋은 미래를 위해서 정씨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그 생각을 존중하여 암살을 받아들이겠는가? 2024년 11월 7일 윤석열이 대국민담화에서 국정농단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사과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항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니들이 하도 징징대니까 대인인 내가 큰 맘먹고 사과해주는 거야. 더 바라지 말고 먹고 떨어져...” 판박이다. 망둥이가 뛰니 꼴두기도 뛴다고 했던가. 며칠 전 29일 축구협회장 정몽규가 월드컵이 끝난 뒤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의 논란과 비판은 부덕의 소치이며 대표팀을 지원하는 것이 마지막 소임이라고 했다. 명백한 불법임을 법원이 판결했는데 무슨 뚱단지인가. 또 자신과 감독이 최대 걸림돌인데 무슨 지원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번 월드컵까지 확실하게 발목을 잡아 말아먹겠다는 소린가?(똥차 회장과 감독만 없어져도 아무리 못해도 8강은 노릴 전력 아닌가?) 자리는 달라도 이 자들의 언행에는 참으로 일관성이 있다. “내 책임이 아니라 다 니들 책임이야, 찌질이 아랫것들아!”
책임을 묻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공동의 목표를 더 잘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협력한다. 조직의 행정이다. 혼자서 못하는 일을 합리적으로 나누고 전문가에게 일을 맡긴다. 협력이 원할하게 이루어지도록 규칙(법)과 절차를 만든다. 계서제(hierarchy)에서 업무수행에 필요한 만큼 권한을 부여한다. 권한은 어디까지나 일을 잘하기 위하여 부여하는 것이지 특권이 아니다. 당연하게 권한(예산)에 비례하여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A]uthority be commensurate with responsibility” (Simon et al., 2010, p. 215).
오씨 등은 권한만 내세웠지 책임을 감내하지 않았다. 유권자가 원하는 가치(예컨대, 안전과 복지)가 아닌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데 몰두했다. 그래서 일이 제대로 안되고 망한 것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한 한덕수, 한동훈 추경호, 최상목, 조태용, 심우정, 조희대 등 고위 공무원(정당지도자)과 계엄군 장교들의 무책임한 입놀림을 참담하게 바라본 까닭이다. 국민이 너희에게 부여한 권한의 무게를 알고는 있는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라고 총리, 장관, 시장, 장군 딱지를 달아줬는데 감히 국민을 배신하다니... 즉각 비상계엄이 불법임을 명백하게 말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기는 커녕 반란군에 편에 서서 거짓말로 주권자를 농락하고 있으니 참담할 뿐이다. 일반 시민들도 직감으로 아는 반란을 공직을 맡은 자들이 법원을 들먹이며 얼버무리는 비루함이라니...
공직자의 책임은 공식적으로 법원(judicial controls), 입법(accountability to the legislature), 계서제(hierarchical controls)를 통해 묻게 되어 있으나, 어느 것도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Simon et al., 2010). 결국은 유권자의 몫이다. “투표할 때마다 유권자의 의식수준이 논의되는 것도 다 교묘한 말에 속아 도끼자루할 것을 나무꾼에게 내주지 말라는 이야기다”(2001: 139). 정파에 영혼을 털리고 달콤한 말장난에 놀아나면 공무는 망가지고 예산은 거덜나고 공기관은 무너진다. 민생은 파탄나고 일상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걸어가다 갑자기 땅이 꺼지거나 돌벼락을 맞아도 하소연할 수 없다. 언제 무너진 건물 밑에 깔려 헐덕거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못된 나무꾼은 밑도 끝도 없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대중을 한없이 타락시킨다. 사리분별이 모호해지고 선악이 뒤바뀌면 퇴화된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없어진다. 야만의 아귀다툼만이 남을 뿐이다. 그때까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러니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망각하고 입을 함부로 놀린 머슴들은 가차없이 끌어내려 멍석에 말아야 한다. 주권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권한을 멋대로 사용한 대가를 처절하게 물어야 한다. 권한에 비례한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음을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강택시와 한강버스에서 돈 뿌리는 재미를 봤으니 한강자전거, 한강스쿠터, 한강잠수열차, 한강잠수헬기, 한강스노우보드 등 온갖 헤괴한 짓거리를 반복할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못된 머슴에게 총칼을 쥐어 줬으니 어쩌겠는가. 머슴보다 게으르고 어리석은 주인의 말로는 불을 보듯 뻔하다. 주사酒邪와 주술呪術에 미쳐 날뛴 비상계엄을 힘겹게 멈추어 세웠으나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다.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선이 한창이다. 4월 7일 추미애가 경기도지사 후보로, 9일에는 전재수가 부산시장 후보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경선에서 패한 한준호와 이재성의 반응이 흥미롭다.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일이 쉬울 리는 없겠지만, 그 논리와 태도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천에서 배제되고도 백의종군한 정청래와 이재명을 범죄자로 팔아넘긴 이낙연의 선택을 보는 듯하다.
이재성의 유쾌한 패배와 한준호의 뒤끝
이재성은 유투비 계정에 건달풍의 패배승복 동영상을 올렸다. 선거운동원에게 “괘안타, 다들 욕봤다”면서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 “재수 도와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참으로 유쾌통쾌하다. 그는 원팀으로 선거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소정 선생님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는 것”이라 했고(1996: 429), “... 동지들끼리 서로 원망해서는 안된다. ... 못난 운동가의 특징은 대의를 안보고 중얼거리는 일”이라고 했다(1983: 255). 이재성은 자신은 물론 경쟁자인 전재수와 민주당의 품격까지 높였다.
반면 한준호는 패배후 올린 동영상에서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후보가 우리당의 후보가 됨으로 인해서 앞으로 이 본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 ... 경기도정이 어떻게 될까...” 걱정한다고 말했다. 도민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했다. 경우없는 자의 궤변이다. 무슨 근거로 추미애는 준비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가? 추미애가 본선에 나가면 패배하고, 이기더라도 경기도정을 망친다는 것인가? 추미애를 선택한 시민과 당원이 무지렁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잘못된 경선이 아닌 한 깨끗히 승복하고 본선에서 협조하는 것이 상식이다. 궁시렁거리며 남을 탓하고 깎아내리기 전에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해야 했다.
한준호는 교묘한 말로 아군을 헷갈리게 하고 분열케 했다. 선거철의 광인처럼 적군의 언어로 아군을 공격했다. 지난 3월 10일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한 장인수기자가 대통령 공소취소거래설을 언급한 것을 두고 음모론이라며 애먼 김씨를 몰아붙였다. 장씨의 발언이 설익은 것은 맞지만 과민하고 과격한 반응이다. 사실판단에 관한 문제아닌가. 바야흐로 무도한 시절이 지나고 호시절이 찾아왔으니 이제 권력자의 측근이라거나 소신파라는 이름으로 “튀는 자”들이 나올 때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려먹었다(我是他非)는 정신줄로 자신의 잇속을 탐하는 자들이다. 남에게 내어줄 줄을 모르는 소아병자들이다. 대의를 보지 못하고 못난 대중의 싸구려 입맛에 맞는 말을 마구 쏟아내는 자들이다.
곽상언의 언행이 위험한 까닭
곽상언은 지난해 9월 11일과 올해 3월 20일 YTN(뉴스정면승부)에 출연하여 신격화된 유투비 방송이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자신은 교주가 된 권력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정치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제사장정치 혹은 북한의 세습권력과 같은 유훈정치라 했다. 또한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도구로 이용해 먹는 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정작 자신은 장인의 그늘을 즐기고 있으면서 남들에게는 노무현을 이용하지 말라니... 노무현이 사유물이었던가?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다가도 이것인지 저것인지 아리송하다.
누가 정교분리를 부정하는가? 누가 남의 죽음을 이용해먹는 일을 곱게 볼 것인가? 하나마나한 소리를 공자왈 맹자왈 하고 있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 비겁하게 모호함 뒤에 숨어 동지에게 화살을 쏘고 있다. 누구라고 특정하지 않았다지만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의 김어준, 봉하마을에 검찰개혁을 보고하러 간 정청래, 민주당에 쓴소리를 던진 유시민을 겨누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가 딴주머니를 차고 있음이다.
김어준과 유시민이 살아온 길을 봐라
김어준의 <겸공>은 구독자가 2백만이 넘고 보통 20만명이 생방송을 시청한다. 지상파, 종합편성, 보도전문 등을 포함해도 독보적인 존재감이다. 말 한마디로 후원금 계좌를 채우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할 수 있는 영향력이다. 어떻게 김어준과 유시민이 그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우선 방송과 신문이 수구기득권이 되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언론이라 말하기도 부끄럽다. 시민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고 공공선을 향한 여론형성에 훼방을 놓았다. 둘째, 정치권, 권력기관, 사회단체가 주권자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겸공>의 성공은 TBS를 고사시킨 오세훈(수구기득권)과 역겨운 구정물을 퍼나른 나쁜 언론의 합작품이다. 세째, 김씨는 남보다 일찍 팟캐스트와 유투비를 받아들여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뉴스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반면 수구사이비언론은 인터넷시대에도 기득권 놀이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몰랐다.
물론 그들의 감각과 역량이 탁월했다. 어느날 갑자기 줄을 잘 서서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으로 갈고 닦아 이뤄낸 성과물이다. 공空으로 얻는 횡재가 아니다. 그들은 잘생긴 것도, 키가 큰 것도, 목소리가 좋은 것도, 노래나 연기를 잘하는 것도, 학벌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값비싼 장비로 도배하거나 거대한 조직을 거느린 것도 아니다. 그냥 내용과 품질로 승부하여 수구 언론을 뛰어넘은 것이다. 사실을 밝히고, 합당한 논리를 다투고,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 맞추었다. 실수도 오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사실과 상식이란 과녁을 향했다. 김씨가 툭툭 내뱉는 역설과 독설과 반어反語와 반말은 종종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지만 허름한 주막집에서 깍뚜기와 함께 먹는 국밥이다. 양념덩이로 맛내거나 고상하게 멋부리지 않는다. 거칠지만 날것 그대로의 맛이다. 진국이다. 가식이 없다. 돈을 더 많이 벌어 포르쉐를 타고 다니겠다며 대놓고 앙탈을 부린다. 한마디로 그들의 말(책)이 시민들의 갈증을 풀어줬고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쫄지마 씨바.”
곽씨에 따르면 김어준은 상왕上王이나 교주가 되어 공천에 개입하고 좌표(방향)를 찍는다. 상왕의 말은 곧 진리이니 신앙처럼 떠받들어야 한다. 교주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다. 권씨의 말이 맞다면 김어준은 이재명을 불러들여(초대가 아니라) 원하는 검찰개혁을 교시하고, 정청래와 조국을 초치招致하여 합당을 지시하고, 선거구별 공천자를 불러줬을 것이다. 이것이 신정체제의 정치권력이다. 대통령이든 당대표든 어찌 감히 토를 달 것인가? 이 얼마나 고루固陋한 발상인가. 아직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 윤건희 시대를 살고 있나? 국민을 개·돼지처럼 짓밟은 낭만을 추억하는가? 과연 그 심중에 광기어린 비상계엄을 가로막은 깨어있는 시민과 당원이 있기는 한건가? 그의 소신은 수구기득권을 향하고 있다.
김어준의 힘은 이성과 상식
곽씨는 객관적인 양 진보든 보수든 유투비 정치권력의 폐해는 피장파장이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김어준과 전아무개 따위를 등치시킨단 말인가? 기린과 똥파리를 비교하는 어리석음이다.
김어준과 유시민은 일방적으로 소식을 전달하고 훈계하기보다는 시민의 시각에서 말을 풀고 해석하고 뜻을 나누었다. 시청자의 호응을 이끌어내 시민사회의 합리성과 양식을 살찌웠다. 그들의 말(의견)을 강요하거나 무오류를 주장하지 않았다. 동의하고 말고는 시청자(독자)의 몫이다. 단지 그들의 말에 동의한 시민들이 많았을 뿐이다. 만일 김씨가 이성과 상식에서 벗어나는 말을 한다면 그의 영향력을 봄눈처럼 사라질 것이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참고 들어주고 수퍼챗을 쏴줄 얼간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김어준의 힘은 뒷배와 신앙이 아니라 이성과 상식에서 나왔음이다. 허구헌날 잇속을 챙기기 위해 없는 얘기, 지어낸 얘기, 뒷얘기, 기괴한 얘기를 막말로 쏟아내는 종자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권씨가 주장한 성역화된 유투버, 제사장 정치, 상왕정치 등이 허무한 까닭이다. 적들이 간절히 원하는 말폭력을 아군을 상대로 대행하는 짓이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시사時事방송을 종교활동(제정일치)으로 규정해놓고, 정교분리政敎分離에 따라 정치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것 아닌가. 이재명은 많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니 범죄자다, 그러니 선거에 나오지 말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오래 전 흘러간 조중동의 논법이다. 곽씨가 과연 김어준의 방송과 발언을 제대로 보고 들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지난 4월 4일자 <주간조선>은 권씨의 과격한 말이 어떻게 아군을 분열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잇속이 없으니 순수하다
김어준과 유시민은 나쁜 수구기득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요주의要注意 인물이었다. 걸핏하면 권력기관과 정적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지난 12.3 내란에서 체포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던 김씨는 살해되어 서해바다에 수장되었을 운명이었다. 유시민도 정청래도 젊은 시절 독재자에게 끌려가 모진 상황을 경험했다. 반면 한준호와 곽상언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맞아죽을 일이 없으니(적의 경계대상이 아니니까) 세상이 무지개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장인인 노무현이 각을 세었던 조선이 들어주고 써주니 신나고 감격스럽고 영광스러운가? 아직 세상살이가 짧은 탓일까?
수구기득권의 집요함과 음흉함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던 김어준은 눈꼽만치의 빌미도 주지 않기 위해 극도로 절제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주식도 건드리지 않고, 세무전문가에게도 흠을 잡히지 않게끔 세금처리를 했고, 전화나 메신저 등 기록이 남는 대화를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여성과 단둘이 있는 자리를 피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검찰과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지만 아직까지 그들에게서 폭력, 사기, 탈세, 성비리 등을 물어오지 못했다. 한계를 넘나들며 지독하게 살아온 최소주의 인생이다. 기댈 곳이 전무한 천출이기 때문에 돈을 먹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살았다는 이재명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게 살아온 그들은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이 걸어간 길이다. 어떻게든 국회의원이나 장관자리를 꿰어 찰 생각이 없다. 현안에 대한 이해와 진단을 돕고,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을 조언해주었다. 소외받은(억울하게 수구기득권에게 당한) 자들에게 하소연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술과 문화예술을 발굴하여 알렸다. 언론이 해줘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나 기업에게서 돈을 받거나 당선자에게 삥을 뜯어내지 않았다(그랬다면 진즉에 검찰이나 경찰에게 물어뜯겨 사달이 났을 것이다). <겸공>은 유투비 수익(광고)을 취하지 않는다. 권력과 돈에서 독립하기 위함이다. 세속적인 잇속이 없으니 그들에게 권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후원금이든 공천이든 잇속을 취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회주의자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지다.
여론조사 꽃은 김어준의 정화
특히 <여론조사 꽃>은 김어준이 우리 사회에 공헌한 업적의 정화精華다. 여론조사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동안 수구기득권은 여론조사를 주물러 솔솔하게 재미를 보았다. 김어준은 딴지마켓, 겸손공장 등으로 번 돈을 과감하게 투자하여 교과서에 가까운 여론조사를 수행하였다. 기존 여론조사기관과 차별화된 과학적인 조사방법(표본추출, 자료처리, 해석 등)과 압도적인 표본수로 여론조사의 기준을 세웠다. 그동안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와 실제 결과를 비교하면 <여론조사 꽃>의 정확도는 놀랍다. 정론正論의 꽃이다. 이제서야 우리 사회도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반갑기 그지없다. 게다가 자신의 돈을 퍼부어 오염되지 않은 여론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니 김어준의 기여가 참으로 높고 크다. 그 결과 이제 수구기득권세력은 온갖 꼼수로 여론을 조작하기 어렵게 되었다. 기세가 꺾인 그들이 <여론조사 꽃>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고 저주하는 까닭이다.
김어준과 유시민은 바람직한 운동가의 행적을 따르고 있다. 현실은 그들이 고유한 삶을 영위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합리성과 상식에서 멀어진 현실을 바꾸고자 헌신했다. 시민사회가 어려울 때일수록 용감하게 등판하여 상황을 헤쳐왔다. 그 대가로 오랫동안 협박과 비난을 받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헌신의 대가로 감투를 탐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 바람직한 운동자는 개혁을 이룬 후에 “자신의 고유생활로 돌아갈지언정 운동을 통한 이득...을 바라지 않는 점에서 자기희생의 덕목을 지닌다”(1991: 26). 우리는 김어준과 유시민이 정말 귀한 줄을 알아야 한다.
돌과 가라지를 골라내는 법
곡식이 자라는 밭에는 돌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억지로 모든 돌을 제거하려면 힘이 많이 들고 오히려 흙의 물빠짐이 나빠진다. 물론 돌밭이 되지 않도록 과격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돌을 골라내야 한다. 곡식이 한참 클 때 돌을 골라내다가는 농사를 망칠 수도 있다. 마테오복음 13절을 빌어 가라지(풀)를 없애는 방법을 적어본다(2008: 571).
집주인이 자기 밭에 좋은 밀씨를 뿌렸다. 원수(수구기득권)가 어느날 밤에 몰래 밀 가운데에 가라지(기회주의자)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어서야 가라지들이 드러났다. ... 원수의 소행임을 안 집주인은 가라지를 거두어낼지를 묻는 머슴에게“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선거)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수확 때에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단번에 처단하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말했다.
현명한 시민은 사소한 이견과 갈등을 인내하고 극복한다. 함부로 동지를 비난하지 않는다. 적들의 흉계에 경거망동하지 않고 차분히 지켜본다. 다만 심판의 날이 되면 못된 가라지를 한 표로 찍어낼 뿐이다.
유시민씨가 언급한 “ABC” 범주가 화제다. 지난 달 18일 매불쇼에 출연한 그는 권력 편에 선 사람들을 A, B, C로 분류했다. 일반 시민이나 지지자보다는 정치인, 언론인, 비평가들의 행태를 단순화하여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다. 여기저기서 시의적절하지 않다느니, “갈라치기”라느니, 사과해야 한다느니 말이 많다. 이렇게까지 시끌벅적할 일인가. 생뚱맞고 과도한 반응이 불편하다.
가치를 쫓는 자와 잇속을 탐하는 자
유씨에 의하면 A는 권력의 가치(이념)에 충실한 핵심 세력이다. 중심에 있는 알갱이다. 종종 노선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다. 정권이 힘이 셀 때에는 설쳐대는 세력에 가려 표가 나지 않지만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 충심으로 지켜준다. B는 주로 잇속(이해관계)에 충실한 세력이다. 지금처럼 정권이 잘 나갈 때는 만고의 충신처럼 설치고 다니지만 정권이 어려워지면 제일 먼저 등을 돌리는 세력이다. 감탄고토甘呑苦吐라 했다. 잇속을 위해서는 동지와 식구는 물론 영혼까지도 팔아치울 자들이다. C는 가치와 잇속을 모두 고려하여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추구하는 부류다. 보통 A와 B가 양극단에 분포하는 한계인이라면 C는 중원을 두텁게 차지하는 평균인이다. 정치인으로 치면 노무현은 A, 윤석열은 B, 김대중과 문재인은 C에 해당한다고 했다.
유씨의 범주화를 비난하고 분개하는 자들은 아마도 유씨가 자신을 B로 분류했다고 짐작한 모양이다. 스스로 A급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B급이라니 화가 치밀만 하다. 마침 물이 들어와서 힘껏 노를 젓고 있는 호시절 아닌가. 무서울 때(독재시절)에는 고개를 땅에 처박고 벌벌 떨고 있다가 따스한 봄날이 되니 꾸역꾸역 기어나와 혼자서 민주화를 이뤄낸 것처럼 활개치고 다니는 놈이란 소리 아닌가! 만일 스스로를 B라고 생각했다면 구태여 화를 내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 인간을 성인, 일반인, 범죄인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면 이는 범죄인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인가?
무서울 때와 안무서울 때의 B를 보라
사람들이 “ABC” 범주를 혼동을 하게 된 원인을 굳이 찾자면 유씨가 대상을 지도자, 정치인, 비평가, 지지자를 넘나들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치와 잇속이라는 차원이 교차하는 밴다이어그램으로 표시한 탓도 있다. 아마도 A, B, C의 몫을 표시하는 동그라미그림(pie chart)이었어야 했다.
이제 정치상황을 고려하여 민주정권과 독재정권, 힘이 셀 때(지지율이 높을 때)와 약할 때(비난받고 위기에 빠질 때)를 상정해보자. 민주정권은 설령 틀린 말을 해도 부당하게 맞아죽을 일이 없는 “안무서운” 체제이고 독재정권은 옳든 그르든 독재자가 싫어하는 말을 하면 맞아죽는 “무서운” 체제다. 그러면 네 개의 동그라미그림을 그릴 수 있다.
우선 민주정권이 힘이 셀 때는 A와 C의 몫이 크고 B의 비중이 작다. 예컨대, 각각 10%, 85%, 5%가 된다고 생각해 보라. B가 활개치고 다녀도(A로 참칭하여 사람들을 헷갈리게 해도) 노선을 관리하는데 문제는 없다. 민주정권이 힘을 잃고 위기에 직면하면 A 일부가 B와 C로 떨어져 나가 몫이 줄고, C일부가 B로 바뀌어 전체적으로 B가 두터워진다(예컨대, 3%, 77%, 20%). 이때 A(참된 중심)와 B(기회주의자)는 쉽게 구분된다. 노무현을 끝까지 지킨 자들과 정당한 후보를 흔든 “후단협”을 보라. 이재명을 사수한 자들과 “사법리스크”라면서 멀쩡하게 선출된 대표/후보를 끌어내리려 했던 “비명횡사”들을 보라. 적과의 내통까지 불사한 자들이 제일 먼저 등에 칼을 꽂았다. 내 편이라 믿었던 자들이 던진 돌이 더 모질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민주당에서 이해찬은 A의 정화精華다.
독재정권이 힘이 셀 때는 C의 몫이 크고 A와 B의 비중이 작다(예컨대, 각각 90%, 3%, 7%). 독재자의 서슬이 퍼렇게 살아있을 때 B는 A에 붙어먹지만 감히 A를 참칭하지 못한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선은 넘지 않게끔 몸조심을 한다. 독재정권에서 A는 “x핵관”이나 “V0” 정도여서 앞잡이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독재자가 약해지면 A와 C는 줄어들고 B는 급격히 커진다(예컨대, 1%, 74%, 25%). 최악은 B가 A를 없애고 A 행세를 하는 것이다. 난장판이 된다. A에게 달려들어 목을 노리는 자들이 많은데 순전히 잇속을 챙기려는 배신자와 개혁을 원하는 운동가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개혁에 성공한 후 논공행상을 다투며 자리를 꿰어차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자가 있다. 개혁정권에서 전자는 B가 되고 후자가 A가 된다. 다수를 차지하는 C는 나쁜 정권에서는 떳떳한 삶을 체념한 자들이고, 정당한 정권에서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깨어있는 시민으로 변모한다.
B의 잇속을 꿰뚫어 B의 난동을 경계해야
소정 선생님은 사람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깊은 동기는 이해관계이며, 사회적 관습과 인간관계가 잇속을 둘러싸고 있으며, 제일 밖에 드러나는 거죽은 합리성이라고 보았다(1991: 120-121). 누구나 겉으로는 그럴듯한 합리성을 내세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이해관계(잇속)을 꿰뚤어 보아야 언행의 참동기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후단협”도 “비명횡사”도 말은 많고 화려했지만 결국은 분수에 넘치는 잇속(공천)을 챙기려는 수작이었다. 경우없는 자들의 허무한 최후였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대중영합주의이다(2008: 617). 경우를 모르고 난동을 벌인 B세력의 운명이다.
하지만 B가 없는 A와 C만의 세상은 존재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B가 필요하지만 일을 그르치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옛날 성을 공격하는 장군은 아직 준비가 안되었는데도 공을 세우려고 성급하게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병사를 활로 쏘아 떨어뜨렸다고 했다(2008: 575). “밭에 돌이 좀 있을 수도 있다. 기회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좌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밭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흙이어야 한다”(574-575). 김원기씨의 말을 빌자면, B와 함께 가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B를 중심에 두지는 말아야 한다. 중요한 국면에서 우리가 B의 난동을 경계해야 하는 까닭이다.
한평생 민주화 여정을 걸어왔던 이해찬 민족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이 지난 1월 25일 영면했다. 출장을 떠난 베트남에서 심근경색으로 걸음을 멈췄다. 향년 73세이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허무한 그의 이른 서거逝去가 아쉽고 안타깝다. 이른바 백세시대 아닌가.
민주당과 한국 민주화의 산 증인
이해찬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활동하였다. 1988년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여 관악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18대를 제외하고 내리 7선을 달린 천하무적이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한 뒤 수구기득권에게 패배하고 핍박받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을 차례로 대통령으로 만든 전략가였다. 누가 뭐래도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 정권의 일등공신이다. 진창에 버려진 진주를 건져내서 닦고 죄고 광내고 밀어주었으니 말이다. 이해찬은 김대중 정부에서 38대 교육장관(1998-1999), 노무현 정부에서 36대 국무총리(2004-2006), 2012년과 2018년에는 민주당대표를 역임했다. 특히 2019년에는 민주당을 온라인정당으로 탈바꿈시켰고, 이른바 시스템공천을 정착시켜 이듬해 21대 총선에서 180석을 휩쓸었다. 그가 바로 민주당의 과거이고 현재이다. 민주당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구기득권세력들은 이해찬을 괴팍하고 과격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좌파, 운동권, 빨갱이, 상왕, 버럭, 호통, 독설, 오만, 불통, 까칠, 뻣뻣은 물론 심지어는 “해골”이라는 멸칭蔑稱을 붙이기도 했다. 수구기득권에 도전하는 위험인물들을 정상이 아닌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일반시민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얄팍한 공작이다. 기득권의 패악질에 시시비비를 따지지 말고 그저 눈감고 입닫으라는 소리다. 김대중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세력들에게 가해진 “왕따”질이다. 하지만 이해찬은 부당한 상황에서 강요된 침묵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아니다”를 말하고 힘센 자들의 패악질을 몸으로 받아낸 사람이다. 1990년 1월 30일 김영삼의 3당야합 때 “이의있습니다”라고 외친 노무현의 모습 그대로다.
2004년 10월 28일 국회에 출석한 이총리는 터무니없는 야당의 공세에 “국민이 잘 알듯이 한나라당은 지하실에서 차떼기하고 고속도로에서 수백억원을 받은 당인데 어떻게 좋은 당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날선 비난이 쏟아졌다. 2012년 6월 5일 YTN의 <김갑수의 출발 새아침>에 출연한 그는 북한인권법에 관한 질문은 받고 “저에 관한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데 자꾸 이런 문제로 인터뷰를 하면 원래 취지와 다르지 않냐”며 전화인터뷰를 그만 하겠다고 했다. 버럭, 발끈, 무례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2018년 11월 9일에는 속보이는 “혜경궁 김씨” 사건을 묻는 기자에게 “그만하라니까”라고 했고, 2020년 7월 10일 박원순의 빈소에서 당차원의 의혹 조사를 묻는 기자에게 “그런 것을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합니까? 최소한 가릴 게 있다. 이놈의 자식같으니라고” 일갈했다. 수구기득권의 경우없는 공세와 질문에 대해 주눅들지 않고 똑똑히 “너희들이 틀려먹었다”고 말한 것이다. 빈소에서 곡하는 기자 상주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너희 아버지가 생전에 기생질을 즐겼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사하겠는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어찌 할 것인가. 이게 질문인가?
이해찬의 최소주의, 보수주의, 현실적 이상주의
이러한 이해찬의 언행에서 소정 선생님의 최소주의를 본다. 사실 두 분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같이 끌려가 옥살이를 했으나 서로 다른 세대를 살았으니 직접 동행한 순간은 많지 않았다. 두 분 모두 달변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말은 주저하지 않았다. “일단 그 날이 오면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 긴요한 최소행동”(1991:25)을 한 사람들이다. 소정 선생님은 “무서웠을 때 내가 한 말은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의 말이었으며 그 말 때문에 나는 불이익을 입었다”(2008: 491), “나는 지켜야 할 최소를 지켜려 하는 최소주의자였다”(2008: 150),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다”(2008: 481)라고 말했다. “때리는 것인 폭력의 반대는 매를 맞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지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1991: 118). 이해찬은 1980년 법정에서 “전두환 일당인 당신들을 붙잡아 이 법정에 세우겠다. 나는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최후진술했다. 매를 맞으면서도 따박따박 바른 말을 했다.
나는 또 이해찬에게서 원칙과 신념에 충실한 사대부의 꼬장꼬장함과 대마도에 끌려가 단식을 마다하지 않은 면암勉庵 최익현의 꼿꼿함을 본다. 그가 태어난 충남 청양은 1970년대만 해도 갓쓰고 도포입은 양반들이 오가던 곳이었고, 목숨을 내걸고 위정척사의 길을 고집한 최익현의 본가이기도 하다. 경우없는 짓거리를 못참는 동네다. 그는 이치에 맞지 않는 쉰소리를 늘어놓거나 듣기 좋은 소리로 아부하지 않았다. 돌려 말하지 않고 할 말만 직설했다. 수구기득권은 그를 독설이라니 버럭이라며 몰아세웠지만, 불의를 방관하거나 몰상식에 타협하지 않은 용기와 강단剛斷일 뿐이다.
소정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이해찬은 선공후사를 내세우고 공직의 무거움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이다. 그는 2018년 6월 14일 교통방송 <장윤선의 이슈파이터>에서 민주당이 진보보다는 보수에 가깝고, 수구세력에 맞서는 중도우파 개혁세력이라고 말했다. 웃사람의 패악질과 아랫사람의 난동을 경계하였으니 급진이 아니라 온건이다. 일의 경중을 따지고, 선후를 살피고, 속도를 조절하는 합리주의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소신파라면서도 리더쉽이 부족하다고 평했지만, 욕심으로 계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계파를 만들지도 않았다.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찾는다”고 말한 그는 현실에서 치열하게 다투면서 합당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참일꾼이었다. 이상만 쫓는 것이 아니라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냉철하게 살피는 현실적 이상주의자였다(1986: 138). 또한 시대의 흐름을 꿰뚫는 감각과 인물을 알아보는 탁월한 식견을 가졌다. 그런 그가 같은 과科인 이재명을 알아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해찬의 안식을 기원한다
이해찬은 지난 해 10월 24일 <다스뵈이다>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동년배에 비해 훨씬 노안이었던 그였다. 어느 순간부터 말이 어눌해지고 손이 떨리던 그가 그날따라 몸과 입을 놀리는 일을 힘겨워했다. “아, 그의 몸에 새겨진 훈장같은 고문이 끝내 발목을 잡는구나...” 콧물이 흘러도 얼굴에 뭐가 묻어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고문 후유증일까? 김근태도 그랬고 소정 선생님도 그랬다. 과연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라면서 깊은 탄식을 했다. 참혹한 방법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아버린 짐승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가증스러운 인두겁을 발기고 처절하게 단죄해야 함이다.
“대장부엉이”의 급작스런 서거를 애도하고, 한국 민주화에 헌신한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오래 짊어졌던 봇짐은 그만 내려놓고 “술먹고 자야지”라는 말처럼 평안하게 주유周遊하시라.
피고인을 징역 23년에 처한다... 21일 한덕수의 내란중요임무종사혐의 등에 대하여 이진관 판사가 내린 판결이다. 호사가들은 특별검사가 구형한 15년보다는 적게 나올 것이다, 절반인 7-8년이 될 것이라고들 했다. 지난 16일 백대현 판사는 특수공무집행방해혐의 등으로 징역 15년이 구형된 윤석열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내란 초범이라 감경한다는 대목에서는 다들 뒷목을 잡았다. 12·3내란 이후 어처구니없는 검사와 판사들의 행태에 좌절하고 분노했던 터에 그리 자조섞인 예측을 했을 것이다.
징역 23년에 환호하고 울먹인 까닭은?
대부분 이진관 판사의 선고에 환호했다.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치기도 했고 감정이 북받쳐 울먹이기도 했다. 구형보다 높은 형량에 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이심전심이라 했다. 이것이 민심이고 상식이다. 백판사는 판결문까지는 잘 끌고 갔지만 형량을 셈하는 대목에서 민심에 부응하지 못했다. 반면 지귀연 판사는 처음부터 낙제점이었다. 판검사들의 제멋대로에 질려버렸던 마당에 법상식에 부합한 판결을 내렸으니 이판사가 탁월하게 보이는 것이다. 만백성이 원하는 법관의 전형이다.
“12 ·3 내란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내란 행위 자체는 몇 시간 만에 종료되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무장한 계엄군에 맨몸으로 맞서 국회를 지킨 국민의 용기에 의한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국민의 저항을 바탕으로 신속히 국회에 진입하여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한 일부 정치인들의 노력, 대한민국 역사에 있었던 내란의 암울한 기억을 상기하면서 위법한 지시와 명령에 저항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따르더라도 소극적으로 참여한 일부 군인과 경찰 공무원의 행동에 의한 것입니다. 결코 12·3 내란 가담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판사는 내란을 멈춘 것은 용기있는 시민, 정치인, 군인, 경찰의 공이었음을 적시했다. 무책임하고 품위없는 내란종사자들의 궤변을 단호하게 내쳤다. 대국민 호소용 계몽령이라느니, 두 시간짜리 계엄이 어디있냐느니, 아무 일(피해)도 없었다느니, 서부지법 난동이 국민 저항권이라니... 그만 그 입 다물라! 사실과 상식에 기반한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또한 한덕수에 대해서 “피고인은 간접적으로나마 민주적 정당성과 그에 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국무총리로서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 그럼에도 피고인은 12·3 내란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러한 의무와 책임을 끝내 외면하고 오히려 그 일원으로 가담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교언영색으로 양지만을 쫓아온 기회주의 기름장어의 본색을 꿰뚫는 말이다. 내란에 관여했으면서도 모른척 시치미를 떼고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하고서도 스스로 대통령선거에 나선 몰염치의 어질어질한 행보라니... 인간이 아니다. 사람들이 말하고 싶었던 말을, 주권자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법관이 법 언어로 정갈하게 말해준 것이다. 그동안 천지분간을 못하는 판검사들 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이다. 국민의 아픈 곳을 치유해주는 판결이다. 그래서 감동이 있고 울림이 있다.
1987년 그 날에도 환호하고 울먹였다
이러한 종류의 감동이 처음은 아니다. 1987년 4월 22일. 싱그러운 녹음이 퍼지고 햇살이 따스한 봄날이었다. 교수님들이 시국성명서를 발표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대 본관으로 달려갔다. 서관 앞 의자 뒤에서 본관 앞 잔디밭을 내려다 보았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본관 앞 계단에 교수님들이 계셨고 그 앞에 학생과 시민들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뒤에 많은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인촌동상 근처에도 사람들이 오갔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끓어오르더니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점에서 6·29가 생겨난 것을 1986년 3월 28일 고대교수들 28명이 성명서를 냈을 때에 고대캠퍼스를 휩쓴 축제분위기에서 찾는다” (1991: 30).
1986년 촉발된 개헌운동은 1987년 전두환의 4.13호헌조치에 된서리를 맞았다. 공포분위기를 만들어 민중의 요구를 찍어누르려는 술수였다. 무섭고 험악한 상황에서 고대교수들이 당당하게 “잔말말고 개헌하라”고 일갈한 것이다. 이 감동과 울림이 바로 전국을 흔들었다. 대학과 시민사회에서 시국선언이 빗발치게 되었다. 국민들이 듣고 싶었던, 하고 싶었던 말을 학자의 언어로 풀어냈고, 이 말이 국민을 위로하고 뭉치게 했다. 나는 이 의미를, 그 중심에 소정 선생님께서 계셨음을 나중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박정훈·조성현 대령도 세상을 울렸다
정권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박정훈 대령도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에게 가슴먹먹한 울림을 주었다. 박대령은 2023년 7월 민간인 실종자를 수색하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해병대 채일병 사건을 조사했다. 해병대수사단장으로서 수사 결과를 해병대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보고했지만, 죄명·혐의자·혐의내용을 빼라는 등의 압박을 받았다. 미운털이 밖힐 줄을 알면서도 법규정에 따라 수사결과를 경북경찰청에 이첩하고 20개월 넘게 고초를 당했다. 법과 상식에 부합한 그의 언행은 해병대 장병들과 시민들이 하고 싶고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보고 싶었던 행동이었다. 안되는 것은 절대 안된다는 상식이다. 무도함과 무능함으로 폭주하던 “윤건희”의 주술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한 순간이다.
제1경비단장 조성현 대령은 국회를 통제하라, 의원을 끌어내라는 수방사령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고 후속부대에게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고 지시했다. 국민의 군대로서 정당하지 않고 합법적이지 않은 명령을 따를 수 없다고 했다. 똥별보다 낫다. 여차하면 군용차를 돌려 용산에 들이닥칠 수도 있음은 “윤건희”에겐 절망이었다. 박대령과 조대령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무서울 때에 법과 상식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처절한 불이익을 당할 줄을 알면서도 국민을 끌내 배신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렸다. 이들의 충칙함이 만인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소피스트는 기원전 4-5세기경 아테네의 민주정치(athenian democracy)에서 논쟁술을 가르쳐 호의호식한 지식인이다. 아테네는 국가의 대소사를 민회의 토론을 거쳐 직접 결정했다. 시민(성인 남자)이면 누구나 참여하여 말솜씨를 뽐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자신의 유무죄 역시 배심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설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상대방의 주장을 제압하는데 유용한 수사학, 논리학, 웅변술 등을 가르쳤다. 이들에게는 사실, 진실, 진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대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말빨”과 순발력이 필요할 뿐이었다. 민회는 소피스트의 놀이터가 되었다. 요설과 궤변이 난무했다. 한 명제에 대한 찬반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중논변(Dissoi logoi)으로 어질어질했다. 떳다방처럼 충동적이었고 즉흥적이었다. 사실에 기반한 차분하고 합리적인 결정은 거의 불가능했다. 직접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백년 만에 허무하게 막을 내린 까닭은 분명했다.
소피스트와 대중영합주의자
소정 선생님은 과도한 참여를 비판하면서 소피스트를 대중영합주의자로 언급하셨다(2008: 518, 544, 617). 기회주의(1991: 26; 1996: 391, 394, 437) 혹은 인기주의(1986: 298; 2008: 391)라고도 표현했다. “말을 하되 운동에 적합한 말이라기보다는 운동자의 인기 위주의 말”을 하고, “말을 하는 기준이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 추구가 되어 마구 과격한 말”을 한다고 했다(1996: 673). 옳고 그름이 아니라 틈만 나면 자신의 잇속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자들이다(2008: 544).
소피스트는 (1) 사실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2) 돈을 벌기 위해 남을 속이고 홀리는 말법을 전수한다, (3) 자신의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이중논변). 기회주의자들이어서 그때 그때 유리한 대로 말을 교묘하게 꼬아 비튼다. 주목을 끌만한 과격한 발언을 쏟아낸다. 무서울 때에 최소의 말을 하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자가 아니다(2008: 258). 반대로 추울 때(꼭 필요할 때)에는 고개를 쳐박고 숨을 죽이다가 날이 풀리면 입에 거품물고 잇속만을 챙기는 자들이다.
2,500년 전 소피스트의 무대가 되었던 민회는 지금은 사회매체(social media)로 바뀌었다. 기득권과 결탁하여 “꼰대질”을 해오던 매체와 방송이 신뢰를 잃었다. 과거 민회에서의 수업료, 환호, 표가 이제는 수퍼챗(후원금), 좋아요, 구독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른바 “말빨”을 자랑하는 자들이 특히 유투비(Youtube)를 중심으로 활개를 치면서 사실과 거짓을 뒤바꾸거나 뒤섞고 있다. 담론의 장은 활짝 열렸지만 극성스러운 소피스트들이 몰려다니면서 난장판이 되고 있다.
사회매체는 고객이 원하는 논변만 골라먹을 수 있도록 해주고, 인공지능은 사람의 선호를 알아채어 고객들을 일정한 논조의 방안에 가두고(chamber effect)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를 양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상호간 이해를 넓히고 합리성으로 이견을 좁혀가는 대화가 아니라 무조건 상대방을 헐뜯는 패악질이다. 아군이 좋아하는 마약을 먹여 좀비처럼 귀를 닫고 공염불만 외게 할 뿐이다. 정치 양극화를 가속시킨다. 참여 폭이 넓어지고 참여 기술이 발달할수록 소크라테스의 토론과 비판은 숨을 쉬지 못한다.
사회매체로 무장한 21세기 소피스트들
기회주의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지만 수구기득권에 주로 똬리를 틀고 있다. 의리義理보다는 이문利文에 집착하는 자들 아닌가. 사악한 소피스트들은 평소에는 티를 내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본색을 드러낸다. 20대 대선(2022)에서 “이재명 필패”를 주장하고 22대 총선(2024)에서 “비명횡사 친명횡재”를 들먹인 자들을 보라. 정해진 절차에 따른 결과에 불복하고 동지에게 침을 뱉았다. 사실 일부와 그들의 잇속(희망사항)을 뒤섞어 적의 언어로 경쟁자에게 비수를 꽂았다. 내부총질로 전열을 흐트린 “수박”은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대의를 저버린 민주당 소피스트이다.
수구기득권은 애초부터 기회주의자와 소피스트 집단이다. 친일·쿠데타·독재세력과 부역자들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말과 몸을 바꾸어온 자들이다. 세상에 정의와 진리가 어디 있느냐며 독립투사와 민주투사를 비웃은 자들이다. 배신은 본능이요 삶의 지혜다. 옳고 그름을 안개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치부를 감추고 상대방의 예봉을 흔드려는 술책이다. 강자일 때는 무법자로 군림하고 위기에 몰리면 비굴하게 법타령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자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죽지도 않고 또 온다.
“김여사 정권”은 소피스트들의 천국이었다. 온갖 꼼수와 거짓말의 향연이었다. 값비싼 목걸이를 받은 사연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춘다. 줄리할 시간이 없었다는 유지(Yuji) 박사.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는 우격다짐. 재난통제 책임이 없다는 대통령실. 뜬금없이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겠다는 비상계엄. 계엄이 아니라 계몽, 의원이 아니라 요원, 국회통제가 아니라 질서유지라는 자들... 서부지법에 몰려가 난동을 피워놓고 국민저항권이라니... 이제와서 나 혼자 살겠다고 말을 바꾸는 장차관과 별들. 체면몰수하고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밀며 횡설수설하는 내란수괴. 궤변을 아편처럼 나눠먹은 자들이다. 이런 깜냥들이 비상계엄이라니 언감생심이다. 내란을 내란이라 말하지 못하는 정치인, 판검사, 변호사, 경찰들... 확정판결이 나지 않았으니 내란이라고 하면 안된다? 강도가 성폭행을 해도 “강도야”라고 소리치면 안된단 말인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인간을 부수는 폭력이다. 품격을 잃고 반칙을 통제하지 못하는 민회와 정치는 민주주의를 좀먹는 암종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야 토론과 비판이 의미를 가진다. 논객은 기술과 재주가 아니라 인간성과 합리성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 보편적 규칙에 따라 사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공론장이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문제가 아니다. 중립을 빙자한 “백날토론”을 멈춰세우고 잇속을 위해 혹세무민하는 소피스트들을 쫓아내야 한다. 거짓, 왜곡, 막말, 말장난으로 연명하는 자들이다. 멋진 변론으로 승부를 내는 “말투사”와 지적 희열로 환호하는 대중을 보았으면 한다.
올해 국정감사는 참으로 특이하다. 갑작스런 친위정변과 내란을 거쳐 정권이 바뀐 직후라서 그럴까? 감사가 현 정권보다는 전 정권의 실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뀌어 수비수가 된 옛공격수가 계속 폭격을 하는 상황이다. 전 정권의 수비수는 이제 공격수가 되었지만 “윤건희”를 막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시비라도 걸어서 감사를 파행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경우가 아닌 정치꾼, 검사꾼, 판사꾼
“김여사 정권” 편에 선 장차관, 기관장, 임원, 국회의원들이 거짓말과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나 살고 보자”라는 궁여지책일 수 있다. 하지만 삼권분립이니 사법권 독립이니를 말하면서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내란수괴를 편드는 검사와 판사 공직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법이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기사회생을 노리는 것일까? 아직도 이재명을 한방에 날려버릴 꿈에 부풀어 설레는 것일까? 국민의 알 권리를 빙자하여 기득권을 편들고 꿀만 빨아먹던 언론인과 수구 추종자들의 건재에 안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치를 것은 치르고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경우에 맞는 성장을, 한 개인에게서나 국가에서나 보고 싶은 것이다”(1986: 62).
내가 좋아하는 소정 선생님의 글귀다. 경우境遇는 사리와 도리를 말하는데, 사리事理는 일이 되어가는 이치이고 도리道理는 어떤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 길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분수分數 혹은 分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직분이나 미칠 수 있는 한도(한계)를 말한다. 경우와 분수 모두 사람들이 그 자리 앉은 자들에게 기대하는 언행의 기준치다. 최소한의 한계이다. 대개는 법이나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못된 판검사를 비롯한 특권층은 시민들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하는 준거를 경우라고 착각한다. 분수를 모르고 자신(권한)을 거대하게 그려놓고 산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치를 것”을 치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한만 멋대로 휘두르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경우없는 짓이다. 돈셈조차 엉망이니 다른 것은 따져 볼 것도 없다.
치를 것을 치르지 않는 판사와 검사들
제일 화나는 것은 12.3 비상계엄이 불법이고 내란인지를 몰랐다고 변명하는 수구정치인과 판사와 검사들의 비루한 모습이다. 누구보다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하는 자들이 아닌가. 사법·준사법 기관이라며 각잡고 영감·땡감하면서 거들먹거리던 자들이 이제와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니... 어찌하여 총리, 장차관, 장군, 판사, 검사, 경찰 고위직 중에 당시 비상계엄이 불법이고 내란이라고 말한 자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일촉즉발의 국회 상황을 보고서도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비상계엄에 부역한 총리와 장차관, 후속조치를 논의했던 판사들과 검사들...
계엄법 2조는 비상계엄 요건을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로 정하고 있다. 형법 87조는 내란을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정의하고, 91조는 국헌 문란을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법계엄이고, 국회를 전복하고 권능행사를 못하게 했으니 내란이 분명하다. 국회에 군인이 난입한 것 자체가 내란이다. 모를 수가 없다. 그 많은 시민들이 엄동설한에 옷도 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여의도로 몰려든 까닭이다.
"밥"과 "앙심"만 남은 판사와 검사들
내란은 실패했지만 아직 종식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판사와 검사는 그대로다. 아직도 불법계엄과 내란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보는 눈이 없고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수구 기득권의 난동이다. 핵심 증거인 관봉권 띠지가 없어졌는데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검사, 사건을 조작하여 수구세력의 정적을 때려잡은 검사, 법에서 정한 날짜가 아닌 시간으로 계산해서 내란수괴를 풀어준 지귀연과 심우정, 절차와 관례를 무시하고 대선후보를 지워버리려 했던 조희대와 대법원 판사, 검찰청을 폐지하니 보완수사권이라도 달라며 앙탈을 부리는 검사들, 파기환송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못하면서 사법권 독립을 운운하는 판사들... 사리와 도리 모두 빵점이다. 경우없는 짓이다. 공무원이라는 본분을 망각했다.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이들은 우선 사람들이 기대하는 준거를 깡그리 무시했다. 주인을 대신하여 월급받고 일하는 공복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인 양 법을 멋대로 주무르고 거리의 시민들을 깔봤다. 판검사가 없으면 어차피 대한민국은 망한다는 황당한 믿음일까? 국정감사에 출석한 검사들은 당장에라도 국회의원 놈들을 잡아다가 몽둥이로 찜질하고 껍데기라도 벗겨버릴 기세다. 그 용맹함을 불법계엄을 휘두른 내란수괴에게 보여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시큰둥하게 앉아서 의미없는 훈수질만 하는 판사들이 잔머리라도 굴려 내란수괴를 점잖게 타일렀더라면 좋았을 것을...
더 중요하게는 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맘대로 사고를 쳐놓고 누구하나 값을 치르지 않았다. 경우에 맞지 않는 짓이다. 비상계엄이 방송과 온라인에서 중계되었는데도 불법이고 내란인 줄을 몰랐다면 부장급 이상 판검사는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 근신하며 처단을 기다렸어야 했다. 특히 한덕수, 지귀연, 조희대는 광화문에서 석고대죄라도 했어야 했다.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지른 판검사를 경우에 맞게 단죄했어야 했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했어야 했다. 김학의와 지귀연은 검찰청과 사법부의 자정능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화석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판검사들은 법과 양심이 아닌 “밥”과 “앙심”으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세상 고상한 척은 다 하지만 실상은 강자에게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포학한 자들이다.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깡패에게는 납짝 엎드리지만 합리적으로 대화하려는 상식인은 안하무인으로 짓밟아 버리는... 친일파를 비롯한 기회주의자들의 철칙이다. 민주주의, 법, 절차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나라의 주인도 아니고 주인될 생각도 없는데...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일이다. 괜시리 불법계엄이라고 말했다간 끌려갈까봐 복지부동했으나 이젠 잡혀가 쥐터질 일이 없으니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서 정의의 사도임네 하고 있다. 법리는 말장난이고 그저 “밥리”일 뿐이다.
만일 국정원 요원이 옛날 식으로 판검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찰하면 대법원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머리부터 땅에 쳐박을 것이다. 감히 수사권이니 사법권이니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기득권의 단맛에 취한 자들의 속성이다. 행여나 내란수괴와 잔당들을 무죄로 풀어주고 여당의원들을 잡아들이고 이재명 재판을 강행한다고 생각해보자.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으니 나라 전체가 난장판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해 검사와 판사만을 대상으로 반역자를 색출한다고 해보자. 기고만장했던 판검사 그 누구도 계엄군의 군화발이 무서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국민이 죽든 말든 자신은 끝까지 잇속을 챙기고 손톱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귀연이 내란수괴를 풀어주고 번갯불에 콩궈먹듯 이재명 파기환송을 해도 비판하지 않았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자신에게 손해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열혈 검사 하나가 조희대를 긴급 체포하고, 체포에 반대하는 상급자를 직권남용으로 잡아 가두고, 영장을 기각한 판사를 질질 끌고 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밀어붙이면 어떠할까? 정의감에 불타는 판사가 미친 척하고 한덕수 재판에서 조씨(한씨가 아니라)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법정구속하면 어떠할까?(왜라고 묻지 말라) 국민주권을 신봉하는 구치소장이 다짜고짜 조씨 사형을 집행한 뒤 사형에 필요한 절차를 밟는다면 어떠할까?(말이 안된다고 따지지 말라) 검찰권 사법권은 하늘이 내린 권한이니 이런 엉망진창인 일도 숙명인줄 알고 순순히 받아들이라면 어떻겠는가? 아마도 이들은 길길이 날뛰면서 법이 어쩌고 절차가 어쩌고 인권이 어쩌고 나불거릴 것이다. 나는 맘대로 해도 되고 너는 나에게 손해되는 짓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 추종자들이다.
동전던지기와 인공지능 판검사
이런 판국이니 공정한 조사, 기소,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정치, 권력, 재벌, 판검사에 관련된 사건은 검사와 판사가 누구냐에 달려있다. 요행히 멀쩡한 판검사가 맡는다면 법에 따른 공정한 사법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법의 껍데기를 쓴 깡패에게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할 수 밖에 없다. 돈과 권력이 있는 피의자는 죄가 있어도 무죄를 받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동전던지기나 주사위굴리기(복권추첨)를 도입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재판기록도 안읽고 절차도 무시하고 증거도 보지않고 판결을 내린다는 것 아닌가. 비용도 거의 안들고 빠르다. 대법원 판사 14명 늘리는데 1조 4천억원이 든다니 법관을 모두 없애면 어마어마한 비용절감이다. 전관예우도 변호사비도 필요없다. 나경원 재판이 6년째 1심을 하고 있다는데 동전던지기를 하면 1초도 안걸린다. 작심하면 3심까지 5분 내에 끝낼 수 있다. 공연히 몇 년씩 진을 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공정하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는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
동전던지기가 불편하면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제일 잘 대체할 수 있는 직업이 법관과 의사라고 한다. 모든 법체계를 검색하여 가장 적합한 법적용을 찾는 것은 인공지능의 주특기이다. 놀라운 인공지능의 발전속도를 생각해보면 엉터리 판결을 낼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물론 모범적인 판결만을 골라서 학습시켜야 한다. 인공지능 판사는 동전던지기보다 느리겠지만 빠르면 1주일 내에 3심도 가능할 것이다. 기존 법관은 인공지능의 판단을 보조하는 조수助手로 채용하면 인공지능 도입비용으로 쓰고도 남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뇌물, 학연, 지연, 전관예우 등과 무관하니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내릴 수 있다.
인공지능도 불편하면 정치, 재벌, 판검사와 관련되는 재판은 영장심사부터 일반 시민이 참여하면 된다. 법원이 판사를 무작위로 뽑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판결업적을 보고 국민이 선출한다. 물론 모든 법관의 판결은 다른 법관과 변호사와 법학자의 평가를 받고 공시되어야 한다. 못된 판검사가 1할도 안 될테니 지귀연이나 조희대같은 자가 뽑힐 확률은 거의 없다. 또한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고 유무죄를 결정한다. 2심과 3심은 새로운 배심원과 판사를 뽑아 진행한다. 내란과 같은 긴급을 요하는 것은 표본이 매우 큰 여론조사로 처리한다.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본 내란을 1년이 다 되도록 내란이라 판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판검사들이 제값을 치를 때다
이제 판사와 검사들은 “치를 것”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전 국정원장이었던 박지원이 말한 것처럼 판검사들은 독재정권에 부역하여 기득권을 누렸고 이제는 민주화의 과실로 사법권 독립을 누리고 있다. 독재에 맞서 당당하게 판결하지 못한 값을 치르지 않았고, 시민들과 함께 피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한 값을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화를 이끌었던 김대중에게 사형판결을 내렸고 노무현을 궁지로 내몰았다. 항상 포악한 자를 편들고 배은망덕을 반복하며 호의호식해왔다.
검찰청이 80여 년 만에 문을 닫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다. 잇따른 무리수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신뢰를 잃은 사법부도 제 값을 치러야 할 차례다. 역시 자업자득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주인이 기고만장으로 기어오르는 머슴을 멍석에 말아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데... 천하가 자기들 주위로 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 주인인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착하고 성실한 공무원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기를 바란다. 공소를 맡는 소사訴事가 되든 재판을 돕는 助事가 되든 그동안 경우없이 난동을 피운 죄를 반성하면서 주인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시라.
조용필의 노래 “슬픈 베아트리체”가 흘러나왔다. 교향악단의 선율을 거느리고 한 자 한 자 씹어넘기듯 읊어 내려가는 간절함이 함박눈처럼 내려왔다. “떠나버린 나의 사랑아, 꽃상여에 그대 보내며 살아야 할 이유마저 없으니...” 순정을 담은 시구詩句가 더욱 또렷하게 가슴 속에 들어왔다.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조차 영화 속 장면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가왕 조용필이 지난 9월 6일 광복 80주년을 기념한 공연을 펼쳤고 한가위에 전파를 탔다.
조용필에 빠져들다가 고개를 떨구다
조용필은 이번 공연에서 세 시간 동안 30곡을 불렀다. 아, 풋풋하던 젊은 오빠는 어느덧 일흔 다섯의 백발이 되었건만... 많은 사람들이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창밖의 여자”의 처절함과 날카로움은 옅어지고 그 자리에 “그 겨울의 찻집”의 풍미와 처연凄然함으로 채웠다.
무엇보다 조용필의 치열함이 마음을 움직인다. 한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마지막 공연, 마지막 노래인 양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전쟁과 같은 처절한 몸부림이다. 배수진으로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백전노장의 비장함이다. 그 덕에 사람들은 삶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공연장에 모인 남녀노소 2만여 명이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으로 호응했다. 빛으로 수놓은 물결이 흥겹게 춤을 췄다.
흠뻑 젖어든 감동을 가까스로 수습한 나는 문득 서글퍼졌다. 조용필은 혼을 담은 노래로 일상에 지친 관객을 위로하고 함께 어울렸는데, 어찌하여 작금의 공직자들은 공복의 기본을 망각하고 행패를 일삼는단 말인가?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與民同樂은 커녕 주인을 업신여기면서 거짓과 궤변을 늘어놓고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조용필의 판소리와 공직자의 개소리
판소리는 소리(창), 아니리(말), 너름새(발림), 추임새로 짜여져 있다. 여기서 소리는 소리꾼이 부르는 노래를 말하고, 아니리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辭說을, 발림는 소리꾼의 몸짓을 말한다. 추임새는 북을 치는 고수와 관객의 몫이다. 조용필의 마음을 울리는 소리, 짧고 진솔한 말, 자연스런 표정과 손짓에 따라 2만 명이 울고 웃고 내지르고 쓰러졌다. 모두가 완벽하게 어울린 판소리였다. 예술이었다.
소리를 잘한다는 말은 노래를 잘 한다는 뜻이다. 노래가 엉망이면 소리가 아니라 개소리다. 영혼을 위로해주는 예술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화가 치밀고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환호와 박수가 아니라 짱돌이나 술병이 날아든다.
“김여사 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고위 공직자들의 언행은 꼴볼견을 넘어섰다. 기자회견이든 청문회든 국정감사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선자시절부터 안하무인으로 주권자를 욕보였다. 통수권자가 “부대 열중쉬어” 그 한마디를 못하나... 대통령의 동선을 밟고 왕족 앞에서 건들건들인 푼수데기. 매사에 성의가 없고 천박하다. 술꾼과 점꾼이 부창부수다. 뭘 아는 것이 없으면서 아는 것처럼 엉뚱한 사설을 장황하게 떠벌린다. 아니리가 아닌 헛소리요 잡소리다. 뭔 말인지 모르겠거나 말문이 막히면 버럭질에 훈계질이다. 너름새가 아니라 핏대질이고 삿대질이다. 위기를 모면하느라 그때 그때 거짓말로 다른 거짓말을 덮다 보니 말걸음이 꼬여 스스로 나자빠진다. 주가조작이든, 목걸이든, 핸드백이든 새빨간 거짓말들의 향연이다. 아름다운 노래가 아닌 돼지 멱따는 소리다. 말이 아니라 막말이고 말폭력이다. 차라리 고문이다. 이러니 관객의 추임새는 한숨과 야유와 욕설과 탄핵일 수밖에...
“윤건희”가 임명한 장차관과 기관장(임원)도 마찬가지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다. 그냥 전리품(spoils)처럼 자리를 나눠먹은 셈이다. 점쟁이와 비선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수구, 친일, 검사, 판사, 학연, 지연, 이웃, 그들의 친구들이 점령군처럼 관료제를 농락했다. 대통령실 CCTV에 드러난 한덕수, 최상목, 이상민, 박성재의 모습은 그들의 거짓말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일을 몰라 딱하거나(김홍일, 김태규, 민영삼), 친일본색을 주체하지 못하거나(김문수, 김태효, 김형석, 이진숙), 반대 방향으로 치달리거나(안창호, 유철환, 김용원, 정승윤, 박선영), 행동대장처럼 달려들거나(한동훈, 원희룡, 김용현, 유병호, 최달영), 내란수괴를 풀어주고 무리수를 두거나(지귀연, 심우정, 조희대), 사건 조작으로 비난을 받거나(최재현, 이시원, 강백신, 엄희준, 박상용, 이희동), 그 자리에 왜 있는지 모르겠거나(이상민, 최재해, 김영호, 신원식, 조태용, 정진석)... 관료제가 멀쩡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불량 공직자들의 천태만상이다. 소리도 아니리도 아닌 개소리와 헛소리다. 공복인 주제에 주인을 능멸하고 하고 있다. (1) 일단은 모른다, 기억에 없다고 잡아뗀다. (2) 아는지 모르는지, 맞는지 틀리는지 가부를 밝히지 않고 침묵한다. (3)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자료제출이나 답변 자체를 거부한다. (4) 관계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말장난으로 시간을 때운다. 동문서답이다. (5) 온갖 거짓말로 변명하고 진실을 덮는다. (6) 증거를 들이 밀면 꼬리를 내리고 얼버무린다. (7) 분수를 모르고 실실 비웃거나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8) 윽박지르거나 호통을 친다. 어찌하여 머슴이란 놈들이 주인이 묻는 말에 똑부러지게 답을 하지 못하는가. 이들의 추태와 패악질에 신물이 난다. 멍석말이라도 해서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 아님 죄다 옷을 벗기고 칼을 채울 일이다.
조용필의 소리, 아니리, 너름새를 배우라
소정선생님은 “무서웠을 때 내가 한 말은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의 말이었으며...”(2008: 491) 이는 “실존적 발언”(1996: 54)이라고 하셨다. 한계상황을 경험한 자는 꼭 할 말만 한다. 마지막인듯 간절하기 때문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보다는 어눌해도 필요한 말만 하라고 하셨다. 조용필은 몇 마디만 남기고 십여 곡을 불러 젖혔다. 어쩌면 그래서 눈과 귀와 가슴이 더 호강했는지 모른다. 노래로 말하는 참소리꾼이자 최소주의자다. 황홀한 그의 소리와 아니리와 너름새가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드디어 검찰청이 문을 닫게 되었다. 지난 27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78년 만에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에 조사권과 기소권을 넘기게 되었다. 자업자득이다. 수사와 기소는 서로 연계되어 있지만 상호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사필귀정이 오랜 시간 논쟁과 갈등을 겪은 뒤에야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수구기득권세력의 공작과 몽니에 합리성이 휘둘린 결과다. 하지만 수사와 기소를 분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원하는 결과(개혁)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악마가 된 정치검사들의 민낯을 보다
국회본회의를 앞두고 법제사법위원회에서 5일과 22일 검찰개혁 청문회를 개최했다. 증인 명단을 보면서 대체 어찌 생겨먹은 자들인지 궁금했다. 청문회에 나와서 답하는 태도를 보면서 흠칫 놀랐다. 어이없다. 화난다. 공무원이 아니라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초인간이다. 검사로 취직시켜준 주권자에게 배은망덕하고도 오만불손이라니... 분에 넘치는 권한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고만장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난도질 했을까? 부끄러움이 없고 반성이 없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조폭도 고개를 숙일 줄을 알거늘... 이들이 해먹었다고 알려진 사건을 보자.
가까이는 건진법사에게 건넸다는 관봉권 띠지를 잃어버렸고(최재현, 박건욱, 신응석),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을 간첩으로 조작했고(이시원), 대장동 사건을 이재명에게 뒤집어 씌웠고(강백신, 엄희준), 쌍방을 대북송금으로 이재명을 엮으려 했고(박상용), 손준성 고발사주 사건을 비틀었으며(이희동),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을 무혐의로 털어주고(조상원, 이창수), 해괴한 셈법으로 내란수괴를 풀어주었다(심우정). 이들(신응석, 임관혁)이 한명숙 뇌물수수 사건을 어찌 요리했을지 훤히 보인다. 악귀가 씌인 살인마의 칼솜씨다.
걸핏하면 법과 원칙을 들먹이던 정치검사들은 강자에게 힘없이 비굴했고 약자에겐 한없이 가혹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무기로 휘두르며 멋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구현했다. 사실을 왜곡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정의를 욕보였다. 사람의 짓이 아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모습이다. 법과 국민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 공무원증을 들고 깡패짓을 일삼은 자들에게 국회의원의 질문은 같잖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잡아다 물고낼 수도 있는데 어디서 겁대가리도 없이... 끼리끼리 똘똘 뭉쳐 권력과 돈을 탐하다 한줌도 안되는 미꾸라지들이 검찰을 말아먹었다.
권한에 비례한 무거운 책임을 물려야 한다
인간을 위하지 않은 행정이란 인간의 것을 빼앗는 행정인데, 상급 공무원이 하급 공무원의 권한을 빼앗고, 행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빼앗는다(1980: 250). 이런 관료제에서 공직자는 스스로 전문성을 포기하고 상사에게 굴종하며 국민들에게는 교만하고, 공익이 아니라 상사에게 상납하는 대가로 利를 추구하고, 맹종을 강요하는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하찮은 존재다(2001: 277, 465).
그들도 어렸을 때는 천진난만했을 것이고 성장해서는 나름의 꿈을 품었을 것이다. 천재는 아니어도 법전을 이해할 만한 머리는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모르고 사리분별을 못하여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만행을 밝히고 책임을 묻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움켜쥔 그들의 힘에 눌려 신상필벌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다. 징계와 처벌을 받은 검사는 극히 드물다. 성접대를 받은 김학의는 선명한 동영상이 있어도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도망가는 김씨를 막은 자들만 피를 봤다. 탄핵소추된 검사들도 줄줄이 생환하는 법현실이다. 경우가 아니다. 조직을 배신하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결국 핵심은 조직개편이 아니라 권한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이다. 조직구조가 개판이라도 사람이 멀쩡하면 효율성이 떨어질 뿐 큰 문제는 없다. 누진세처럼 권한과 피해에 비례하여 엄중한 책임을 확실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징역이상의 엄벌에 처해야 한다. 예컨대,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한 자는 무기징역과 재산몰수로 단죄해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고 사실상 사람을 죽인 것이나 진배없다. 내란수괴를 풀어준 지귀연이나 대선에 개입하여 정적을 없애려 했던 조희대도 마찬가지다. 많은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내란의 무게를 고려하면 사형도 호사다. 왕조시절이었으면 능지처참에 3족을 도륙할 역모죄 아닌가.
주권자의 눈높이에서 감시, 조사, 기소, 재판해야
그러면 어떻게 책임을 묻는 것이 합당한가? 조직을 개편하여 권한을 분산하고 서로 견제하도록 만드는 것은 기본이다. 수사지휘권은 견제와 거리가 멀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판사 수를 늘리고, 일반국민의 상식을 반영할 비법조인을 포함시킨다. 권력기관의 고위 공무원은 선거로 뽑고, 주요한 수사, 기소, 판결을 공시하여 공무원의 잘잘못을 평가한다. 공무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앤다. 이시원, 지귀연 정도면 승진은 커녕 파면되고 감옥가고 배상금을 토해내야 한다. 권한이 센만큼 매도 매서워야 하는 법이다. 망나니칼을 잘못놀리다간 패가망신하도록 해야 한다. 또 직급에 따라 변호사 자격을 제한하여 전관 예우 폐해를 줄인다. 예컨대, 헌법재판관이나 대법원 판사는 10년 동안 변호사나 재판 관련 일을 일절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미 권한과 혜택을 충분히 누렸지 않은가.
권력기관의 폭주는 권력기관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의 눈높이에서 판단해야 한다. 국민이 참여하는 제 3의 조직을 구성할 수 있다. 특히 선거개입이나 내란과 같은 중대범죄는 아예 조사부터 재판까지 국민이 이끌어가야 한다. 국회든 공수처든 수사청이든 법원이든 국민의 요구에 적극 부응해야 한다. 독립성은 서로 권한을 침해하지 말라는 소리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물며 주권자를 배신하고 나라의 근본을 흔들어서야 어디... 필요하면 국민 앞에 나서서 정당함을 입증해야 한다. 주권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항상 감시당하고 언제든 반드시 처절한 단죄를 받는다는 공포가 엄습하면 악귀는 물러나고 발광하던 괴물은 분수를 깨닫고 얌전한 공무원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