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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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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선생님은 가장 포악한 정권의 모습을 자기비대화自己肥大化로 그렸다. 또한 과다한 체제 경직화硬直化나 우경화右傾化라고 했다(1986: 298; 1996: 383). 이렇게 최악으로 진행된 불치병(1996: 390)은 자기희생으로 치유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자아에 의하여 희생하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는 결단”이다(1980: 363; 1986: 327; 1991: 49).

정권의 자기비대화

자기비대화(self-aggrandizement)는 주어진 한계를 넘어 권한을 탐하고 끊임없이 확대하는 것이다. 힘으로 타인을 윽박질러 일을 강요하거나 강제로 타인의 권한을 빼앗는 행위다. “아랫사람을 쥐어 짜고 끝임없이 의심하면서 모든 권력을 빨아들인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몸집이 불고 뼈가 휘고 살이 썩어 문드러져도 멈추지 못한다”(박헌명 2022). 자신에 맞서는 정적과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도전을 용납하지 못한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강자의 정의고 공정이고 상식이고 윤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직화(rigidification)다. 지금의 권세가 영원하리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돈 지나친 자기확신이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는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다. 법과 규칙과 이치가 아닌 약육강식 그 자체다. 경우境遇와 합리성을 짓밟는 폭력이다.

“관官이 주도권을 잡는 통치구도에서는 관이 민民을 한낱 관의 통치수단으로 보며, 자기 스스로의 크기를 굉장히 비대화하게 그린다. ... 민이 주도권을 잡는 통치구도에서는 ... 민이 관에 들어가서는 자기희생을 하며 봉사자의 위치를 지킨다”(2001: 109).

소정 선생님은 가장 나쁜 통치는 (1) 선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관(신문, 방송, 대학, 종교 등)을 망가뜨리고, (2) 걸림돌이 되는 정적을 제거하고, (3) 일반 시민이(어린 아이까지도)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케 해 도덕을 타락시키고, (4) 필요한 문제해결이 아닌 바벨탑같은 전시효과를 노린 정책을 밀어붙이고, (5) 인접국가들이 폭정을 방치하거나 내정에 간섭하는 단계로 진행한다고 적었다(1991: 87-103; 1996: 383-384; 2001: 184-202). “언로를 막는 정부는 언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이 자체 생산된 언론을 믿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단속한다”(1986: 316). 정치경쟁자들이 정치공작과 악법에 희생되면서 비판과 반대가 위축된다. 일상과 무관한 자기과시용 정책을 남발하게 되면 국민을 자포자기한다. 올바름과 의로움이 아닌 돈과 권력을 쫓을 뿐이다.

과도한 체제경직화와 자체분열

주변국들은 최악의 상태에 이른 정권을 직접 정벌하거나 가격경쟁력을 상실한 정권을 농락한다(1996: 383). 정권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체제를 경성硬性으로 유지하지만, 개혁을 거부하고 사회비용을 줄이지 못한 대가는 가격경쟁력 추락이다(389쪽). 즉, 과다한 체제경직화가 통치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국제경쟁력을 잃게 한다(383쪽). 투자, 고용, 내수, 물가, 무역 등에서 빨간 불이 들어온다. 이런 정권의 약점을 알아챈 주변국들은 외교, 국방, 경제, 역사, 문화 등의 이득을 노리고 달려든다.

인접국조차 우습게 보아 정벌을 받을 만한 정권에서는 부도덕한 위정자들이 자기들끼리 싸운다(1996: 389). 자체 분열이다(2001: 147). 약자를 착취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재산 분배를 공정히 하지 않아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못살게 굴고 이를 취한다(1996: 397). 애초부터 잇속에서 시작한 이들에게 법과 정의와 공정은 허공 속의 메아리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서로 합종연횡하지만 충돌할 때는 검을 속내를 드러낸다. 자기편 끼리도 믿지 못하고 경계한다. “끝없는 탐욕은 그들의 잇속 관계를 뒤틀리게 하고, 끝내는 자기편끼리도 잡아먹는 아귀다툼으로 몰아간다”(박헌명 2023).

자기비대화는 끝없는 탐욕에서 비롯된다

왜 악한 정권은 자기비대화, 과도한 경직화, 자체분열(self-disintegration)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첫째는 정당성이 부족해서다. 선거의 공정성과 별개로 유권자 다수가 정당성에 의문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 권력자의 자질이 부족하여 매사에 좌충우돌하거나, 공약을 손바닥 뒤집듯 파기하고, 밀어붙이는 정책마다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면 유권자의 마음은 돌아설 수밖에 없다. 통치자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된다. 불안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한다. 정적과 반대파는 물론 자기 편도 믿지 못한다. 누구든 배신자를 찾아내어 보복하는데 혈안이 된다. 민생과 관련이 없는 통치비용과 사회비용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둘째, 정권의 문제해결 능력이 부족하다.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나이 많고 덕 있는 이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에 항상 하수인만 데리고 일을 한다(1996: 396). 자리를 얻으려 충성경쟁을 하는 자들이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인재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말잘듣는 이들이 모인 조직은 위기에 직면해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사실과 진실이 어찌되었든 통치자의 언행을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안)하는 추종자들의 “지당하옵니다”만 있을 뿐이다. 열등의식을 힘으로 극복하려 든다. 현실과 통치자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면서 문제해결은 요원해진다. 자기확신이 강화되고 경직화된 정권은 자신의 포악한 행동을 스스로 교정할 능력을 상실한다(1986: 317).

결국은 통치자와 그 추종자들의 탐욕 때문이다. 국익을 말하지만 그들만의 잇속이 있을 뿐이다. 시민들이 혹할 만한 일을 벌이지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잇속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없기 때문에 벌거벗은 힘(naked power)이 강대강으로 부딪힌다. 끊임없이 돈과 권력을 탐하는 자기비대화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만든 악법조차 지키지 않는 체제는 적에 의해 망하기보다 자기 스스로가 망한다(2008: 347). 폭주기관차같은 자기비대화는 국정을 말아먹고 충복마저 잡아먹고 급기야 스스로를 집어삼켜야만 끝이 난다(박헌명 2022).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정권의 자기비대화, 경직화, 자체분열. <최소주의행정학> 8(7): 1.

 
 

 

 

지난 3월 윤석열 정부는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징용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제3자 변제로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일본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배상하도록 한 대법원의 판결과 어긋난다. 인권과 법은 사라지고 일본 극우정권이 내세운 돈얘기만 남았다. 2015년 박근혜 정권의 한일 위안부(성노예로 불러야 마땅하다) 문제 합의도 마찬가지다. 당사자도 아닌 정부가 일본이 원하는 대로 밀어붙였다. 어릴 적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당한 피해자들의 한을 돈푼이나 뜯어내려는 노파老婆의 떼쓰기로 치부했다. 또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투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윤정권은 일본 편을 들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같은 입장이라 밝혔지만 해양투기에 반대한다는 말은 차마 못한다. 시찰단이랍시고 보냈지만, 방사선 물질로 오염된 시료를 독립적으로 확보하지도 못한 과학적·객관적 검증은 말장난이다. 처리된 오염수가 안전하고 깨끗하다고 했다. 혹자는 기꺼이 마시겠다고도 했다. 일본 총리나 장관의 말이 아니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생리와 습성

2021년 4월 일본이 방류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게거품을 물던 자들이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자들이다. 묻지마 “한미일 동맹”에 집착한 나머지 눈과 귀를 닫고 있다. 국민건강과 해양환경을 우려한 사람들의 문제제기는 “괴담”으로 몰아세운다. 여차하면 압수수색으로 홀딱 벗겨내고 구속기소로 때려잡을 태세다. “언로를 막는 정부는 언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이 자체 생산된 언론을 믿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단속한다”(1986: 316).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소정 선생님은 이들을 ‘구 세력’이라고 불렀고, 구체적으로 친일파와 군사독재자, 이에 동조한 기회주의자들의 연대 세력으로 규정했다(1996: 390-391). 수구기득권 세력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정권을 꿰뚫는 그들의 생리와 습성이 있다.

첫째, 기득권자는 고치라는 완곡한 말을 듣기는 좋아해도 정작 허물을 고치지는 않는다(1996: 392). 공자는 사사로운 뜻이 없으며, 기필코 하겠다는 마음이 없으며,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이기심이 없다고 했는데(子絶四毋意毋必毋固毋我), 이들은 일을 의로 하되 私意로 하고, 기필코 일을 해내야 한다며 친일·쿠데타·독재를 가리지 않고 밀어 붙이고, 일을 한 후에는 잘못되었는데도 반성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고, 끝내 일이 사사로운 자기들의 私利가 된다(391쪽). 자기 잘난 맛에 꿈 속을 살고 취해서 죽는 자라고 했다(398쪽). 무당의 주술에 신들린 듯 작두를 타는 呪辭정권과 막걸리·맥주에 취해 바지춤을 늘어뜨린 채 횡설수설하는 酒邪정권의 모습이다.

둘째, 자기네끼리의 잘못을 숨겨 주는 집단이기주의를 갖는다(395쪽). 자신의 불법·범법·탈법·편법은 기득권자의 당연한 권리이고, 정적의 사소한 잘못과 실수는 일벌백계해야 하는 중범죄라는 세계관이다. 세째,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나이 많고 덕 있는 이를 만홀漫忽히 여기기 때문에 항상 하수인만 데리고 일을 한다(396쪽). 성실하고 강직하고 유능한 자가 머물지 않는다. 네째, 수구 세력들은 한번 관직을 떠난 후에도 끈질기게 이사장, 총재, 회장, 위원장 등 이익이 되는 자리를 계속 차지한다. 국가안보실에 이어 방송통신위원장까지 지인이나 “올드보이”를 고집한다. 다섯째, 기득권 세력은 자기들끼리도 재산 분배를 공정히 하지 않아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못살게 굴고 이를 취한다(397쪽). 그들은 단지 끼리끼리 이해가 맞아서 의기투합했을 뿐이다. 끝없는 탐욕은 그들의 잇속 관계를 뒤틀리게 하고, 끝내는 자기편끼리도 잡아먹는 아귀다툼으로 몰아간다. 마지막으로, 수구기득권 세력을 해체시키려면 백 년이 걸린다(394쪽). 그만큼 친일파와 군사독재자와 이에 빌붙은 무리들이 끈질기게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다.

그냥 사대주의에 찌든 기회주의자들이다

수구기득권 세력은 事大에 찌든 자들이다. 강자에 대한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스스로는 어느 것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강박이다. 그러니 언제나 강자에게 의지해야 연명할 수 있다는 절박감이다. 과거에는 대륙의 대국이었고, 일본이었고, 이제는 미국으로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일제 식민사관과 우민화 정책의 결실일까? 대국이 원하는 대로 절기에 맞추어 朝貢과 貢女를 보냈듯이 천황폐하를 위해 징용·징병·성노예는 물론 숟가락까지 징집해 보냈다. 이제 미국의 반도체와 배터리 공급망 재편에 손발을 걷어붙이고 인도태평양 전략에 돌격대장으로 나섰다. 당연한 의무이자 예의이자 承恩이다. 대국에 토다는 것은 물론이고 빳빳이 고개를 쳐든다는 것 자체가 불경이다. 문재인 정권에서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소부장” 독립과 일본 불매운동을 감행한 것은 이들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짓이자 9족을 멸하고도 남을 죄다. 하물며 돈벌기 위해 몸을 판 할망구들에게 사과하고 자발적으로 징용에 나선 할배들에게 배상을 하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사대주의자들의 정신줄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면 처자식을 기꺼이 상납하고 망설임없이 나라도 팔아먹을 자들이다. 일본과 미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윤씨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수구 세력은 흔히 보수라고 말한다. 우파라고 자부한다. 기득권이기에 보수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언행에는 일관성이 없다. 그때그때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둘러대기 때문이다. 그냥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잡초보다 더 질기게 살아남는가 보다. 보수주의자라면 일본군 성노예, 강제징용, 독도 등에 관해서는 단호한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나라의 근본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질서와 예절에 순응하는 품격을 보였을 것이다. 안보가 어쩌느니 늘어놓지만 번번히 북한에게 쥐어터지고 포탄인지 마호병인지도 헷갈리는 안보구멍이다. 시장을 만병특효약처럼 들먹이지만 정작 시장을 제멋대로 주무른다. 요행이 아니라면 시장이 망가지고 경제가 망한다. 자유를 부르짖지만 자신을 비판하는 학문과 문화와 놀이는 그냥 놔두지 못한다. 영화든 만화든 노래든 검찰을 동원하여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을 기세다. 자유는 자기편의 특권일 뿐이지 남의 편에게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역린을 거스르는 윤정권의 대일 행보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본질을 드러낸다. “내 나라를 빼앗았던 나라의 악을 용서할 능력이 없는 정권이 용서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또한 일본이 전과를 뉘우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용서할 자격이 있는 세력이 용서하고, 악을 저지른 자가 전과를 뉘우쳐야 한다는 이 두가지 요건이 한국 정치에서는 ... 충족되지 않고 있다”(2008: 148).

기회주의자의 생리를 깨달아야

소정 선생님은 이솝우화를 빌어 악한 통치자는 상대를 속이기 위해 위장하고 교묘한 말을 한다고 했다(2001: 138).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세우며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존재가 아니다(148쪽).

문정권에서 승승장구했던 윤씨는 마치 구박받고 탄압받은 피해자 행세를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의 엄호를 받으며 검찰총장이 되었고,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도 문재인씨는 끝까지 그를 내쫓지 않았다. 나쁜 강자는 백성에게 아첨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걸인같이 구걸을 하여 얻어낸 것으로 백성을 해치기도 한다(139쪽). 코로나에 지쳐 잠시 혼미해진 유권자들이 정의와 공정으로 위장한 자의 교묘한 말에 속아 어리석게도 자신들을 해칠 도끼 자루(검찰을 동원할 권한)를 스스로 내어준 셈이다.

강자는 또 약속을 어긴다고 했다(139쪽). 병사월급 200만원부터 시작하여 여성가족부 폐지, 주식 양도소득세 폐지 등 이제 약속뒤집기는 일상이 되었다. 윤씨가 대선기간 약속했던 간호사법 개정안도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나 스스로 거부하였다. 약속한 적이 없댄다. “바이든이 쪽팔려서”가 “날리면”으로 둔갑하는 마당이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국민이 납득하는 말을 하여 신뢰를 얻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을 사용해서 일을 하는 민주 정부가 아니다( 240쪽).

결국 수구기득권 세력은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 자신의 잇속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국익은 그들만의 사익이며, 나라의 미래는 그들만이 살아남는 길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나랏일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다(142쪽).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는 법이다. 사대주의와 기회주의 세력의 생리를 꿰뚫고 있어야 처절하게 당하지 않는다.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자의 참모습을 알아봐야 하며, 긴가민가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국익과 미래라는 모호한 구호에 덮여있는 채울 수 없는 탐욕을 알아봐야 한다. 깨어있는 유권자의 냉철함이 절실한 계절이다. 

 

인용: 박헌명. 2023. 수구기득권 세력의 사대주의와 기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8(6): 1-2.

인사관리(personnel administration)는 조직 구성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고, 알맞은 부서에 배치하고, 훈련시키고, 일한 성과를 평가하고, 승진을 시키고, 상벌을 주는 일이다. 인사행정(public human resources management)은 정부에서 공무원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정부관료제는 민간기업보다 엄격하게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며 정치영향력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사人事는 동서고금의 상사常事지만, 현대 인사제도의 근간인 능력주의(merit system)는 고작 150년 된 역사이다. 윤정권의 용인술을 보고 있노라면 200년 전 미국의 엽관제(spoils system)가 떠오른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괴력이다.

200년 전 도입된 잭슨의 엽관제도

미국은 독립전쟁(1775-1783)에서 승리한 뒤, 1789년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워싱턴은 공무원의 능력(competence)과 정치 중립(political neutrality)의 균형을 추구하였는데, 성실하고 공공의식이 있는 유망한 사람들을 임명하였다(Berman et al. 2020). 교육을 잘 받은 상류층이 공직을 맡는 이른바 귀족공직자(gentlemen)의 시대(1789-1829)였다. 당시 대부분이 유럽에서 밀려왔기 때문에 공직에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드물었음이리라.

1829년 Andrew Jackson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직은 선거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돌아가는 전리품(spoils)이 되었다. 이른바 엽관제도(1829-1883)다. 잭슨은 연방공무원의 임기를 대통령 임기와 일치시켜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논공행상으로 새로 임명하는 것을 제안했다(Rosenbloom et al. 2009). 바로 오매불망 논공행상으로 한자리를 노리는 윤씨측의 숙원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귀족이 아닌 대통령이 된 잭슨은 상류층 위주의 공직사회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갈아 엎었다. 재능과 전문성이 결여된 중하류층 지지자들로 공직을 물갈이했다. 또 보직순환(job rotation)으로 관료제의 변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경험, 지식, 능력이 처참한 자들이 자리를 꿰차게 되면서 행정부의 공직의식, 효율성, 합리성, 성과는 추락했다(Rosenbloom et al. 2009). 낙하산, 횡령, 뇌물, 공갈로 자리를 꿰찬 자들은 선거에만 몰입했다. 공공서비스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행정과 정치질이 뒤섞였고 “politcal assessments”라는 이름으로 나랏돈이 여당으로 흘러갔다. 승자독식은 죽기살기식의 선거전쟁와 자리쟁탈전이 되었다. 1881년에는 공직을 따내지 못한 자가 Garfield 대통령을 암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보게 될 일들이다.

능력주의와 인사제도의 진화

미국은 1883년 Pendleton Act (Civil Service Act)를 도입하여 능력주의로 전환하였다. 신분이나 친분이 아니라 공개경쟁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채용했다. 공무원의 능력에 기반한 공직(tenure)을 보장하고 탈정치화를 지향했다. 공직자의 권위와 정당성은 정치 중립, 전문성, 기술 능력에서 나온다고 보았다(Rosenbloom et al. 2009). 또한 인사문제를 관장하는 공무원위원회(Civil Serivce Commission)를 출범시켰다. 공공서비스의 효율성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just causes”) 연방공무원을 당파를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하는 것을 금지하고, 내부고발자(whistleblowers)를 보호하였다(Llod-La Follettee Act of 1912). 이후 연방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엄격하게 금지시켰고(Hatch Act of 1939), 균등한 고용기회를 촉진하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집단을 우대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윤석열은 앤드류 잭슨의 재림인가?

잭슨은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쟁에 휩쓸렸지만, 윤씨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학을 졸업했다. 흙수저와 금수저 모두 법학을 공부했으나 경력과는 별개로 자질은 신통치 않았다. 판사까지 했다는 자는 잘 읽지도 못했다고 전해지고, 사시 9수를 거친 자의 소양과 언변과 태도는 민망 그 자체다. 압박 속에 자란 탓인지 고집이 세고 호전적이었다. 잭슨은 수차례 총으로 결투를 벌였고, 윤씨는 거침없이 윗전을 치받았다. 이러한 수컷스러운 과격함은 어리석은 대중을 현혹했다. 잭슨은 노예와 토지투기로 치부했고 윤씨는 처가의 불법탈법에 눈감았다. 모두 배우자의 불륜이나 줄리 접대부 문제에는 과민반응했다.

툭하면 자유를 내세운 것도 비슷하다. 잭슨은 군대를 동원하여 인디언을 학살하고 토지를 빼앗고 생존자들을 피눈물나는 길(trail of tears)로 내몰았다. 농장에서 흑인 노예를 부리며 학대했다. 법과 인권과 윤리의 굴레를 벗겨준 그만의 자유를 누린 것이다. 윤씨는 정적을 빨갱이나 범죄자로 몰았고, 노조를 불법으로 낙인찍어 탄압했다. 괴담과 가짜뉴스를 퍼뜨려 선동하는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내 편이 아니면 자유는 커녕 공민권도 없다는 잭슨식 민주주의와 윤씨의 자유민주주의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궁하면 법과 절차를 거슬러 내달렸다. 잭슨의 열렬 지지자들은 과격한 중하류 계층이었고 대부분 정식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였다(Rosenbloom et al. 2009). “바보들의 합창”에 취한 낭만자객들의 인기영합이다.

잭슨은 임기를 시작하면서 연방공무원의 1-2할을 해고하고(patronage dismissals), 승리에 기여한 지지자들에게 그 자리를 나눠 주었다(patronage appointments). 귀족들이 차지했던 공직을 주군에 대한 충성심(moral qualities)만으로 꿰어 찼으니 얼마나 감격했을 것인가.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언감생심 하루아침에 공직자가 되었으나 일을 할 줄 몰랐다. 정파에 휩쓸려 선거에만 몰입했다. 관료제는 사달이 났다. 무지한 자의 싸구려 자기확신이 낳은 참사였다.

그런데 윤씨가 기어코 그 길로 들어섰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가? 문정권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을 빨갱이 사냥하듯 찍어낸다. 찔끔 남은 임기도 용납하지 못하는 품격의 빈곤함이여.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못하는 윤씨측이 알박기와 후안무치로 몰면, 수구 언론이 풍장을 치고, 검찰이 몸을 푸는 구도다. 공공서비스가 어찌 되든 말든 내 자리만 보고, 내 밥그릇만 챙길 뿐이다. 잭슨의 실정은 1835년 암살시도와 1837년 공황(panic)으로 이어졌다. 좌충우돌 윤씨의 폭주는 과연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 

참고문헌

  • Rosenbloom, David H., Kravchuk, Robert S., and Richard M. Clerkin. 2015. Public administration: Understanding management, politics, and law in the public sector. 8th ed. McGraw Hill.
  • Berman, Evan M., James S. Bowman, Jonathan P. West, and Montgomery R. Van Wart. 2020. Human resource management in public service: Paradoxes, processes, and problems. 6th ed. Sage & CQ Press.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앤드류 잭슨의 재림과 인사행정의 퇴화. <최소주의행정학> 8(5): 1.

전현희 국가인권위원장이 방송에 나와 윤정권의 사퇴압박을 고발했다. 검찰이 기소하여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도 마찬가지다. 이들과 같은 장관급 정무직으로 이석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작년 8월 사표를 냈다. 이명박정권이 부당하게 KBS에서 쫓아냈던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도 위태로워 보인다. 지난 2-3월에는 문정인 세종재단(세종연구소) 이사장이 물러났고, 나승희 한국철도공사 사장과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은 해고되었다. 얼마전에는 정승일 한국전력사장이 자리를 내놓았다. 발표된 이유는 제각각이나, 그들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얘기는 없다. 문재인정권에서 임명했다는 이유로, 윤정권과 정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내쫓긴 것(patronage dismissals)이다.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이유는?

2022년 현재 350여개의 공공기관(공기업, 준정부기관, 기타 기획재정부장관이 지정한 기관)이 있다. 대통령이 임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공기관의 자리는 기관장, 이사, 감사 등 3,800개라고 한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부는 공공기관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하고(3조), 기관장은 법·정관 위반(22조), 직무태만(32조, 35조), 경영실적저조(48조), 비위행위(52조) 이외의 사유로 임기중 해임되지 않는다(25조).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까닭은 더 좋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자율 경영, 책임 경영, 합리 경영, 투명한 경영을 통해 공공기관의 대국민서비스를 증진하기 위함이다(1조). 능력있고 정직하고 성실한 자가 책임을 지고 일을 하고 그 결과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안정성을 부여한 것이다. 공공서비스는 정권의 향방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꾸준히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관장은 제멋대로 자리를 던지거나, 일은 안하고 정치에만 몰두하거나, 느닷없이 보궐선거에라도 출마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러니 일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무노동으로 월급이나 탐내거나, 출마할 사람을 기관장으로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임면권자의 맘에 안든다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멀쩡한 기관장을 쫓아내지 말라는 소리다. 상식에 가까운 얘기다.

누가 알박기, 국기문란, 후안무치란 말인가?

그런데 여당인사와 수구언론에서 나오는 소리는 황당하다. 새정부 출범 후에도 문정부에서 임명한 기관장들이 알박기를 한댄다. 정치도의를 망각한 후안무치라느니 대선불복이자 국기문란이라고도 했다. 서울신문의 사설 “공공기관 틀어쥔 문정부 인사들 물러나라”(2023.5.16)는 반란수준이다. “전정권의 코드를 맞춘 자들이 아직도 자리를 꿰차고 있다니 이런 부조리극이 없다. 보통 심각한 인사파행이 아니다”라고 했다. 현재의 국정철학과 정책노선에 공감하지 못하는 기관장들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며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훈계했다. MB정권에서 장관 자리를 꿰찼던 유인촌씨가 생각난다.

당연한 내 몫이니 당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끌어내리겠다는 협박이다. 정치꾼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밥그릇 타령이다. 역사와 법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다. 직업공무원제를 정착시키기까지 치렀던 값비싼 시행착오를 모르는 자들이다. 알면서도 법치주의를 외면하고 잇속대로 딴소리를 하는 자들의 어거지다. 간도 쓸개도 빼놓고 그저 공천을 받아내기 위한 처절한 몸무림이다. 논리도, 책임도, 양심도 없는 정치질이다.

기회주의 정치꾼들의 더러운 정치다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이유는 좋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지, 선거를 도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나눠 주기 위함이 아니다. 국민을 위한 것이지 정치꾼들을 위함이 아니다. 누가 기관장을 임명했는지, 기관장이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는 따질 까닭이 없다. 얼마나 일을 잘해서 공공서비스를 만족스럽게 제공했는가를 물을 뿐이다. 능력과 자질에 관한 문제다. 명백한 직무유기나 비위행위 증거를 내놓지도 않으면서 이것 저것 들춰보겠다거나 막말로 도발하는 짓은 수구 검찰과 언론를 믿고 벌이는 공갈이다.

공공서비스는 정권이 바뀐다 해서 근본이 달라질 수 없다. 윤정권에서는 원전만 사용하고 가스값은 시장價고 KTX는 우측통행하는가? 후쿠시마 오염수가 깨끗하다니 이제 수입해서 가정에 공급해야 하나? 학문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며 노래를 금지시키고, 대마초 가수라며 매장하고,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을 이창동씨의 <시>에 빵점을 주는 것는 만행이다. 사실과 가치, 공과 사를 구분못하는 자들의 유치찬란한 떼쓰기다.

기회주의 정치꾼들의 주장이 맞다면 공공기관운영법은 알박기, 대선불복, 국기문란, 부조리극, 인사파행, 정치도의를 저버린 후안무치를 제도화한 것이다. 그러니 법을 만든 여야 국회의원들을 반국가행위자로 죄다 잡아다가 물고物故를 내야 할 것이다. 당장 이런 중범죄자들을 방치하고 있는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부터 파면해야 한다. 그리고 법을 개정하여 정권 출범시 모든 공공기관장을 새로 임명하도록 해야 된다. 이렇게 되면 누가 이득을 보겠는가?

마음은 콩밭(선거)에 가 있는 자를 전리품(spoils)을 주듯 기관장으로 앉히면 공공서비스가 망가진다. 관료제가 정치판이 되어 합리성과 전문성을 잃는다. 완장찬 낙하산들이 공무원들을 줄세우고 정파검증을 할 것이다. 자리를 빼앗겼거나 꿰차지 못한 자들은 암살이라도 시도할 것이다. 200년 전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결국 국민이 손해다. 권력자와 정치꾼들만 이득을 본다. 이들은 정작 정권을 잃으면 직업공무원제와 정치탄압을 운운하며 자리에서 악착같이 버틸 것이다. 남이 하면 보은·코드 인사고 자기가 하면 공정·능력 인사다. 이미 검사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절대 낙하산 인사는 없다던 윤정권의 철학과 정책인가, 자가당착인가?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국민에 대한 도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철딱서니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무책임한 난동이 노여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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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3. 난도질당하는 공공기관장의 임기 보장. <최소주의행정학> 8(4): 1.

오늘은 3월의 네째 금요일이다. 북한의 도발로 시작된 제 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피격 사건에서 생명을 잃은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2016년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라고 한다. 윤석열씨는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 8회 기념식에 참석하여 희생자 55인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했다고 한다. 군대도 가지 않은 윤씨가 울먹였다고 한다. 박근혜씨의 대국민사과 눈물처럼 맥락이 없고 공감이 없다. 그냥 생뚱맞다는 생각이다.

대체 무엇을 잊지 않겠다는 것인가?

주요한 길목마다 “그대들의 이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혹은 “그대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등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수구세력들의 일사불란함이다. 야당이 내건 현수막은 찾아볼 수 없다. 기념일 자체가 정쟁의 산물이니 당연한 귀결이다. 안보위기에 처한 박근혜 정권이 내놓은 궁여지책아니던가. 애국을 빙자한 반공멸공이고, 안보를 빙자한 수구정권 수호아닌가. 누가 이런 쉬어터진 빨갱이 굿판에 장단을 맞출 것인가?

현수막에 적힌 문구를 보면서 혀를 찬다.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겠다가 아니라 처절한 패배를 잊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1999년 6월 7일부터 15일까지 도발한 북한군을 물리쳤던 제 1연평해전이 아닌, 피해가 많았던 제 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을 기억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적은 55용사를 보면 그 의도가 읽힌다. 제 2연평해전(6명),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47명),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피격(2명)이다. 천안함 사건을 끌어들여 매년 안보장사를 해먹겠다는 것이다. “북한군에게 이렇게 당했어요. 많이 아파요. 전 공산당이 싫어요. 때찌해주세요.” 딱 “이승복 어린이” 수준이다. 그런데 저항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훈련 중인 초계함이 어뢰에 맞았다는 점에서(정부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더 한심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이순신은 잊고 원균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군인의 책무다. 그래야 국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다. 서해수호를 했다는 용사들은 실제로 서해를 지키지 못했다. 국지전이었길래 망정이지 전면전이었으면 나라를 빼앗겼을 것이다. 한마디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패잔병들이다. 이들이 임무수행중 희생된 것 자체는 존중받아 마땅하며, 자초지종을 잘 따져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뼈아픈 교훈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한 영웅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일은 그저 황당할 뿐이다. 당장 제 1연평해전에서 승리한 장병들은 그럼 뭐가 되는가? 한산도대첩(1592년)과 명량해전(1597년)에서 승리한 이순신과 조선해군의 헌신과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1597년 칠천량에서 140여척을 잃고 2만여명을 몰살시킨 원균의 참패는 나라를 지킨 헌신과 희생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1951년 5월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국군에게 허무하게 궤멸당한 유재흥의 3군단을 국토수호의 상징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장병들은 호국영웅으로 길이길이 기억해야 하는가? 허면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와 그 때 희생되었던 장병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수구세력의 기회주의와 안보팔이

공을 세우면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고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상식이다. 서해수호의 날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패장인 최원일 함장이 최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방송에 나섰다. 어뢰에 맞았든 암초에 부딪혔든 부하장병 수십 명을 수장시킨 지휘관의 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최대 치욕으로 기록된 현리전투의 패장 유재흥은 참형을 받기는 커녕 박정희 정권에서 국방부장관까지 해먹었다. 한국군 7사단과 2군단을 궤멸시켜 아군을 위기에 빠뜨리고, 3군단을 해체시켜 군작전권을 미군에 넘기게 한 장본인이 2004년에는 노무현씨의 군작전권 환수를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현충원이 웬말이냐.

수구세력의 정체성과 정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념도 뭐도 아닌 힘과 돈을 따라다니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유씨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과 맞섰고 미군정 시절 제주 4.3항쟁을 짓밟았음에도 승승장구했다. 미군을 등에 업고 친일세력을 앞세워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사출신인 윤석열씨가 검사들과 지인들을 요직에 앉힌 것도 마찬가지다. 최씨도 수구정권에서 북한군에게 피격을 받았기 때문에 안보장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국민을 편갈라 줄세우는 빨갱이 타령에 적합한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신상필벌에 엄격한 정권이었다면, 만일 일본자위대에게 쥐어터졌다면 유씨든 최씨든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승리를 꿈꾸지 못하는 만년 패자의 정신줄

수구세력은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에게 포악한 모습이다. 스스로는 무엇을 할 수 없다거나 경쟁자를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과 무기력증이다. 일본이 강제로 쳐들어와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고초를 당했다는 식이다. 자학이다. 허니 일본에게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본의 수출규제조치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죄하기는 커녕 불매운동과 국산화라니... 하물며 미국의 요구에 감히 고개 빳빳이 들고 토를 다는 일임에랴.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강자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일본 앞에 허리를 접고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목숨줄처럼 잡고 있는 까닭이다. 간이든 쓸개든 다 내어주고서라도 자신들이 호의호식하면 그만이다. 악착같이 약자를 쥐어짜서 조공으로 바친다. 국민들이 성노예로 끌려가거나 방사능에 오염된 수산물을 먹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하여 299명이 익사당하고, 2022년 이태원에서 159명이 압사당했지만 무슨 대수인가? 강자가 원하는 안보장사에 들러리가 되어줄 패전 55용사만이 귀할 뿐이다. 감히 승리를 꿈꾸지도 못하는 만년 패자의 정신줄이다.

 

인용: 박헌명. 2023. 서해를 수호하지 못한 서해수호용사. <최소주의행정학> 8(3): 1.

어쩌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 네팔을 다녀왔다. 수도인 카트만두는 히말라야 산맥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다. 공해물질이 빠져나가지 못하는지 대기오염이 심하다. 북위 27도에 걸쳐 있고 해수면에서 1,300미터나 높은 곳에 앉아 있다. 2월 초인데 낮기온이 20도를 오르내린다.

과거 궁전이었다는 더르바르 광장을 둘러보았다. 사람과 개와 비둘기가 자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신과 왕의 위엄은 아기자기한 조형물에서나 찾아봐야 했다. 한때는 강성한 왕국을 건설했지만, 왕실은 스스로 신망을 잃고 2008년 쫓겨났다. 면적이나 인구가 서울의 1할인 카트만두인데, 도로며 다리며 건물이며 변변한 것이 거의 없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가 하늘거린다.

각지고 구멍뚫린 전봇대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나브로 전봇대에 시선이 간다. 길거리에 박혀있는 많은 전봇대들. 아무리 찾아봐도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기울어져 있다. 위태롭다.

너무나 많은 전기줄이 전봇대를 휘감고 있다. 분배기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선TV와 인터넷 선이 전기줄과 뒤섞여 있는 듯하다. 몇 개인지 세지도 못할 검은 줄들이 전봇대에 너저분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 야생 원숭이 무리들이 전선을 타고 재주를 부린다. 어떤 놈은 해먹에 누운 것처럼 전기줄 다발 위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다.

이러니 전봇대가 배겨날 재간이 없다. 앞뒤 좌우로 기울고 있다. 가로등이라도 서 있으면 전선이 슬쩍 손을 얹고 있다. 한마디로 전기줄이 전봇대에 걸려있는 것인지 전봇대가 전기줄에 매달려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기간 시설이 열악하여 전기줄을 수용하지 못하니 전봇대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가중되는 듯하다.

콘크리트 전봇대를 자세히 살펴보니 원형 기둥이 아니었다. 단면이 직사각형이었다. 전봇대 절반은 사각형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람의 저항을 피하려 했던 모양이다. 각진 전봇대는 얼핏 봐도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가린다. 원형 전봇대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해서였을까? 콘크리트 표면은 쉽게 삭는지 부스러지고 있다. 쇠파이프 전봇대는 녹슬어 있고, 얇은 꼭대기는 금방이라도 휘어질 듯하다.

카트만두의 도로와 대중교통

카트만두의 차도는 좁고 굽어 있고 연결성이 부족하다. 옛날 사람이 오가고, 짐승들이 몰려 다니고, 마차가 지나던 길이 연상된다.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있으니 잠시만 방심해도 사고나기 십상이다. 차도와 보도는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폭이 1미터가 안되는 인도가 허다하다. 진흙 위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아 있으니 중앙선과 횡단보도를 알아보기 어렵다. 신호등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별 소용이 없다. 경찰관이 나와서 쉴새없이 손짓을 하고 있다. 눈치가 없으면 길건너는 일도 쉽지 않다. 10분이면 족할 거리를 한시간을 간다. 걷는 것이 더 빠를 것같다.

멀쩡하게 생긴 버스를 찾아보기 힘들다. 작고 오래된 버스들이 제각각인 색깔을 입고 다닌다. 공터에 마련된 터미널에서 버스들이 아무데서나 승객을 싣고 있다. 지정된 승차구역이 없으니 행선지를 어찌 구분하는지 궁금하다. 제대로 된 정류장을 찾기가 힘들다. 대중교통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나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 많은 오토바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평온하다. 불평보다는 웃음이다. 두려움이나 긴장보다는 여유로움이다. 젊은이와 아이들의 생동감이 이슬처럼 빛난다. 하지만 정부가 공공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역대 왕들은 시민들의 고단함을 덜어주는데 골몰하거나 후손들을 위한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한 것같지 않다. 여민동락을 하지 않은 것이다. 화려한 궁궐을 짓고 정교한 탑을 쌓기 전에 도시의 큰 그림을 그리고 기반시설을 확충했어야 했다.

시민들의 의식과 요구는 저 멀리에 가 있는데, 왕과 정부는 그 기대에 못미쳤다. 그 괴리를 채우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마침 지나다가 공사중인 고층 빌딩을 보았다. 첨단 유리벽으로 짓고 있는 철강건물은 굵은 통대나무를 끈으로(철사가 아닌) 묶은 안전구조물이 둘러싸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이 부조화를 어찌해야 하나. 늘어나는 전기줄을 감당하지 못하고 위태롭게 서있는, 모나고 구멍뚫린 전봇대를 묘하게 닮았다.

윤석열의 전봇대는 안녕한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반세기 동안 폐허나 다름없는 터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몸부림쳤다.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모범이 될 만한 기반구조를 만들어 냈고 문재인 정부에서 선진국 반열에 우뚝 섰다.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내고 있다. 하지만 낙후된 정치와 언론 지형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왕의 무관심과 게으름과 패악질이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도 갖추지 못한 정권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다. 국민의 열망을 떠받들어야 할 “정치 전봇대”가 중심을 잃고 기운다. 대책없이 친미탈중국을 외치다 균형을 잃고 탈탈 털리고 있다. 둥글고 강한 원형 기둥이 아니라 단면이 길쭉한 직사각형 말뚝을 박았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이리 저리 부딫히고 긁힌다. 비바람에 시달린다. 머리카락 다발처럼 얽히고 섥힌 당면과제를 모나고 삭은 작대기로 풀어낼 수 없다.

“정치 차도”는 진흙탕이고 안개 속이다. 세계는 전쟁같은 아귀다툼으로 우릴 옥죄오는데, 한가하게 편을 가르고 “애들 풀어서” 정적을 때려잡고 있다. 약속을 뒤집어도 변명은 커녕 적반하장이다. 이젠 누가 참인지 누가 옳은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꼭 해야 할 것도,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도 없는 무도한 세상이다. 중앙선과 차선이 없다. 국민이 다니는 인도는 좁아지고 정치 차도에 밀려나기 일쑤다. 바퀴가 빠지고 창문이 깨진 “정치 버스”는 국민의 요구를 실어나르지 못한다. 난방비와 전기료가 폭등해도 전정권 탓만 한다. 못난 불량 버스다.

“정치 신호등”은 있는 곳이 드물고, 있어봤자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제복입은 자가 나타나 제멋대로 호루라기를 불고 손짓을 할 뿐이다. 법과 양심良心은 밥과 앙심怏心으로 뒤바뀐지 오래다. 학생의 인턴활동은 반란죄인듯 압수수색으로 뒤지고 성인의 학력과 경력 위조는 눈감는다. 600만원 개인장학금은 뇌물이고, 50억원은 그냥 퇴직금일 뿐이다. "정치 신호등"은 권력자와 판검사 앞에서 언제나 파란불을 켠다. 그들이 타고 내리는 곳이 바로 정류장이다. 도로에 서 있는 표지판은 그들의 달리는 대로 속도와 방향을 자동으로 바꾼다. 과속이든 역주행이든 주차위반이든 그들에겐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이 모칠고 천박한 전봇대 정권의 상식이고 공정이고 정의다.

이런 상황에서 진리는 각자도생이다. 승용차든 트럭이든 오토바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치껏 먼저 내빼는 것이 최고다. 강호에 도가 사라지니 못하는 것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에 너무 지친 나머지 깜빡 정신줄을 놓았던 것이다. 참지 못하고 너무 과격하게 나대다 망한 것이다. 묵묵히 잘 버텨주던 원형 전봇대를 흔들어 뽑아내고 근본없이 모나고 구멍이 숭숭 뚫린 말뚝을 박아넣었으니, 이 사달이다. 

 

인용: 박헌명. 2023. 네팔의 전봇대와 윤석열의 전봇대 <최소주의행정학> 8(2): 2.

지난해 말 “바이든이 쪽팔려”로 한바탕 곤욕困辱을 치른 윤석열씨가 “도어스테핑”을 전격 중단했다. 번번이 설화를 촉발했지만 나름 많이 즐겼을 놀이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쏟아내도 기자들이 토달지 않고 경전외듯 받아 적는 모습에서 느끼는 뿌듯함이랄까? 그 맛을 잊고 당장 MBC의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심정은 참으로 쓰리고 아렸을 것이다. “봤지? MBC 때문에 도어스테핑은 없는 거야? 알아서들 해.”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설친다더니 이제는 한동훈씨가 대신 도어스테핑의 짜릿한 맛을 즐기는 듯하다.

Doorstepping이 무엇인가?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도어스테핑은 주제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다. 왜 지도자가 국민에게 굳이 생소한 외국어로 말하는가? 대체 도어스테핑이 무엇이란 말인가?

Doorstep은 명사로 출입문에 오르는 계단이나 문에 가까운 공간을 말한다. 동사로서 언론인이 취재 대상자의 집에 무작정 찾아가서 대상자가 말하고 싶지 않더라도 말을 거는(취재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자들이 대상자의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대상자가 나타나면 들이닥쳐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미는 짓이다. 당사자로서는 집에까지 쳐들어왔으니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놀랄 수밖에 없다. 외통수처럼 피할 데도 없으니 대단히 난감하고 불쾌한 일이다. 말하자면 “깜짝 문간취재”라 할 수 있다. 조국씨와 그 식구들에 대한 기레기들의 막가파식 “뻗치기”에 꼭 맞는 표현이다.

Dogstep과 "Dogstepping"

Doorstep과 비슷하게 dogstep라는 말이 있다. 강아지가 높은 곳에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계단이다. 물론 강아지가 걷고 뛰는 모습(춤)을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다. 동사형을 만든다면 “dogstepping”은 아마도 강아지(기레기)를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길들이는 행위 쯤으로 정의될 것이다. 지정한 장단에 맞춰 무조건반사로 춤추고 구르도록 훈련시킨다. 감히 주인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을 물어뜯지 못하도록 세뇌시키는 일이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도그스테핑이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doorstepping과는 전혀 다르다. 첫째, 장소가 윤씨의 집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집무실이다. 언제든 피할 수 있다. 둘째, 문앞 계단이나 문간이 아니라 미리 문답할 준비가 된 복도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세째, 따라서 윤씨가 깜짝 놀랄 일도 없고, 기자들이 하염없이 “뻗치기”를 할 일도 없다. 서로 출퇴근시간만 챙기면 된다. 네째, 기자들에게 질문을 미리 받는다고 하는데, 형식상 즉흥문답일 뿐 전혀 긴장감이 없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면 너무 박한가? 물론 마련된 답안을 윤씨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좌충우돌 돌발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다섯째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으로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어 있다. 기자들이 윤씨를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윤씨가 어떤 말을 흘리면 기자들은 그저 주워먹을 뿐이다.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독이 묻었는지 아닌지는 관심 밖이다. 본인도 뜻도 모르고 기억도 못할 말 아닌가. 여섯째, 그러므로 윤씨가 도어스테핑의 범위와 형식과 절차 모두를 결정한다. 기자들은 선택지가 없다. 윤씨의 심사가 뒤틀리면 버럭질을 하거나 해당 기자를 콕 찍어내면 그만이다. 그의 “Yuji 민주주의” 언론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상적인 doorstepping이라면 지도자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객체가 되어야 한다. 항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가 국민 앞에 선 마음으로 명확하고 간결하게 답해야 한다. 일정한 장소를 정하거나 횟수와 시간을 조정할 수는 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질문거리를 미리 받거나 불편한 질문이라며 화내지는 말아야 한다. 보도내용이 좀 틀리고 맘에 안든다고 고발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공직자)은 어떤 경우에도 신(국민)이 금지한 선악과(언론의 양심)를 따먹지 말아야 한다(1991: 89-91).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도그스테핑”(똥강아지 길들이기)에 가깝다. 주체인 윤씨가 정해진 시간에 나와 종을 치고 먹잇감을 뿌리면 객체인 기레기들이 꾸역꾸역 몰려와 정신없이 모이를 쫀다. 일단 허겁지겁 목구녕으로 넘기고 보는 게걸스러움은 똥인지 된장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럴 짬도 없다. 미운털이 박힌 오리들은 주둥이를 사정없이 걷어차고 순종할 때까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중단되었으나 “도그스테핑”은 멈출 줄을 모른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본인만 말할 자유”를 누리고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용두질인 셈이다. 애초부터 소통은 없었다. 게다가 내용이 없거나 틀리거나 비뚤어져 있다. 짧고 좁고 얇고 가볍다. 게으르고 무성의하다. 태도도 불량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는 커녕 만냥 빚을 덤으로 얹고 있다. 건성건성 멋대로가 화근이다.

못난이 열등생의 허장성세

윤씨와 그 측근들의 말은 종종 귀를 거슬리게 한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황당한 논리가 사람을 좌절시킨다. 동의없는 사진과 위패가 이차가해라니... 뜬금없이 영어를 섞는 말법은 차라리 고문이다.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하는가? 영어를 모르면 국민도 아닌가? 조미료가 범벅된 음식을 씹는 불쾌함이다. 절로 구역질이 난다.

“문간취재”가 아니라 꼭 “도어스테핑”이어야 하나? “혼잡관리”가 아닌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고 하면 뭐가 있어 보이나? “가븐먼트 인게이지먼트”나 “레규레이션”이라고 “어그레시브하게” 내지르면 좀 유식하게 들리나? Government engagement가 정부규제면 civic engagement는 시민규제가 되는가? 유권자를 욕보이는 짓이다. 대개 삼류 못난이들이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를 하려다 사고를 친다. 엉겁결에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꿰찬 열등생들의 허세랄까. 뭘 좀 아는 자는 요란스럽게 주접떨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벼는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언젠가 가게에 꼬마를 데려온 어느 강남아줌마의 귀티나는 훈계가 생각난다. “디스(this)는 대인저(danger)야. 그니까 돈타치(don’t touch)에용. 오-케이(Okay)?” 도어스테핑이라... 딱 그 수준이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도어스테핑인가? 도그스테핑인가? <최소주의행정학> 8(2): 1.

MBC의<뉴스외전>(2022. 11. 10)에 출연한 유시민씨는 윤석열 정부의 6개월을 열역학 제2법칙으로 풀어냈다. 윤정권의 무지와 무능과 무책임으로 사회 전반에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했고, 10.29 참사는 그 귀결의 하나라는 것이다. 윤석열, 한덕수, 이상민 등 책임자들은 구차하게 자리에 눌러앉아 있고, 현장에서 참사를 수습한 경찰관과 소방관들은 악몽을 꾸듯 취조당하고 있다. 뇌가 작동하지 않아 손발이 움직이지 못한 것인데, 이제와서 사태를 직감한 뇌가 손발을 잘라내겠다며 성내고 있다. 경우없는 짓이다. 정적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칼춤을 추고 있는 정권이다. 유작가는 무지성이고 개념없는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박정희의 10.26과 윤석열의 10.29

소정은 1971년 서울대 부속병원 인턴의 집단농성을 해결하기 위해 보사부 주사가 아닌 문교장관과 국무총리가 나서는 것을 보고 박정희씨의 국가비상사태를 예감했다(1991: 339-340). 마땅히 주사가 할 일을 장관과 국무총리까지 연달아 나서야 하는 정권의 난맥상이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불법탈법을 가리지 않고 별별 짓을 다 저지른다. 사회의 합리성과 효율성은 곤두박질치고 상황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다. 상식이 무너지고 민심이 이반離叛해도 권력욕은 기어코 극단적인 강경책으로 이어진다. 소정의 불길한 예감은 72년 10월 유신이었다. 헌정파괴 쿠데타 7년 만에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술먹다 심복 김재규의 총에 맞고 죽었다.

10.29 참사 직후 영정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에 매일 방문해서 무표정으로 참배하는 윤씨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참사 희생자가 아니라 구태여 사고 사망자라 부르고,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는 것을 패륜이라 매도하고, 참사를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며 설레발이다. 내외국인 158명이 희생되었는데도 구청장, 서울시장, 경찰청, 행정안전부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말로는 추모와 위로를 말하지만 실제는 슬픔과 분노를 차단하느라 용쓰고 있다. 뭘 모르면서 엉뚱한 일만 저지르고, 사고 수습은 고사하고 황당한 언행으로 짜증과 분노만 돋구고 있다. 대통령조차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막 질러대고, 외눈박이 하수인들은 염불외듯 복창하고 있다. G20 만찬장에 늦게 나타나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김명신씨에게 등떠밀려 나서는 윤씨의 난감함은 이 정권의 초상이다. 뭐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윤씨의 표정이다. 한마디로 답이 없다. 스스로도 실망하고 답답하겠지만 백성들은 환장할 지경이다.

반성없이 폭주하는 윤석열차

G20에 참석하면서 윤씨는 MBC기자를 전용기에 태우지 않았다. 악의적인 기사와 방송으로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했고 국익을 훼손했댄다. 탑승 거부는 헌법수호라는 대통령의 책무를 다하려는 조치라고 했다. 그토록 자랑했던 문간취재도 못하게 했다. “이 새끼들”과 “바이든”이 들리는 동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뭐가 가짜 뉴스라는 것인지... 보도 하나가 한미를 이간질시키고 헌법을 허물어뜨렸다는 것인지... 한미동맹이 곧 국익이고, 윤씨가 헌법(국가)이란 말인지... 국세청은 MBC가 수백억원을 탈루했다며 청구서를 들이밀고, 여당은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불을 지폈다. 대답없는 윤씨의 뒤통수에 대고 질문하는 기자와 말다툼한 비서관, 기자가 버르장머리없이 슬리퍼를 신었다며 시비를 거는 여당 인사. 그냥 졸렬하고 유치찬란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는 없고 좀스럽고 지저분한 말폭력만 난무한다.

결국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정신줄이다. 자신은 언제나 정의롭고 공정한 존재이다. 어떠한 오류도 없는 진리 그 자체다. 폼나게 헛기침이나 하고 에험 하면 언론이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다 알아서 움직여 줘야 한다. 예기치 못하게 상황이 꼬이면 버럭 화를 내면 그만이다. 책임은 정적과 약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자 유족과 야당에게 해코지를 당한 장관 고교 후배를 위로한다. 김씨의 빈곤포르노에 조명이 있었네 없었네로 야당 의원을 겁박한다.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도 불순한 주동자들의 난동일 뿐이다. 손해배상과 업무개시명령으로 슬쩍 찔러본다.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자유와 특권을 부여받는 것처럼 파죽지세로 밀어붙인다. 일단 검사들을 풀어서 민의를 찍어누르다가 여의치 않으면 필시 눈을 뒤집어 까고 마구잡이로 망나니짓을 벌일 자들이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가 장검을 휘두르고, 전후좌우를 보지 않고 자동차를 몰고 폭주한다.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上의 무지와 무능이 망가뜨린 관료제

10.29 참사는 관료제가 망가졌음을 보여준다. 전문성을 가진 관료가 역할에 따라 합당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법과 절차에 따라 문서로 공직을 수행하는 관료제가 아니다. 무지와 무능과 무책임으로 무장한 上이 똑같은 부류를 요직에 앉혔으니 관료제의 합리성은 숨쉴 곳이 없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上의 자의성과 확증편향에 관료제는 경직된다. 계서제(hierarchy)는 허울뿐이고 제왕의 폭정은 무질서도를 급격히 상승시킨다. 권한침해權限侵害와 몰상식은 일상이 된다. 모두 上의 입과 심기만 살피면서 처벌을 피할 궁리만 한다. 시위대를 막기도 힘겨우니 백성을 살필 이유도 여력도 없다. 영혼없는 복지부동이 최선이다. 소정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나라의 행정조직체 내에서의 행동의 계속성을 단속시키는 유일의 이유는 권한침해에 있다. ... 합리주의 현상이 행정에서 발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의 행정에 대한 극도의 간섭증, 엽관주의,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의 하급기관이나 하급자에 대한 권력남용,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서] 업무담당기관이 아닌 막료로서의 예산기관의 횡포 등에서 볼 수 있다”(1980: 6).

윤김씨를 등에 업은 하수인들은 동네방네 들쑤시면서 잇속을 챙기고 있다. 자유당 정권에서 완장차고 빨갱이를 때려잡던 기세다. 벌써 자기비대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 몫을 다투다 틀어져 차지철이 되고 김재규가 될 것이다. 자기분열이다. 10.29 참사는 시작이니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한남동일까, 청담동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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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3. 박정희의 10.26과 윤석열의 10.29. <최소주의행정학> 8(1): 1.

지난 달 29일 할로윈을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방문했던 156명이 좁은 골목에서 뒤엉키면서 압사당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 사흘 동안 대통령 윤석열, 국무총리 한덕수, 행정안전부장관 이상민, 경찰청장 윤희근, 서울경찰청장 김광호, 서울시장 오세훈, 용산구청장 박희영 등의 발언을 들으면서 탄식했다. 또다시 무지하고 무책임한 자들이 앞길이 구만리같은 청춘들을 죽였다.

일반적으로 남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은 점잖치 못하다. 유치한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들의 망언과 희언을 들으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참으로 비열하고, 한심하고, 이상하고, 희한하고, 철딱서니없는 자들이다. 참사 동영상을 보지도 못할만큼 참담한 마음인데, 처음엔 어이가 없다가 혀를 차다가 이제는 화가 치민다.

이상민과 윤희근의 주책바가지

이상민씨는 30일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던 것은 아니고 ...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에는 “경찰의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진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경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 경찰국이 필요하다던 자가 이제 와서 장관은 책임이 없다니 정신분열증인가?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입닥치고 있으라고? 그 발언 자체가 음흉한 정치질이다. 참사는 물론 그 조사까지도 따져봐야 한다.

주요 공직자와 경찰 지휘부는 주최자가 없어서, 관련 규정이 없어서 참사를 막지 못했다고 강변했다. 대통령실은 31일 “경찰은 집회나 시위와 같은 상황이 아니면 일반 국민을 통제할 법적, 제도적 권한은 없다”고 했다. 그럼 성탄절에는 왜 경찰이 설치고 다녔나? 예수나 산타클로스라도 강림했나? 윤희근씨도 1일 “주최자 없는 자발적 다중 운집 상황에 대한 경찰 또는 지자체 등의 권한·역할·책임에 대해 많은 의견과 논란이 있다”고 말했다. 다들 검사, 판사, 경찰 해먹기 위해 헌법·행정법을 마르고 닳도록 공부했던 자들 아닌가. 경찰警察 자체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인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가. 주최자가 없어서라고? 한 터럭의 염치도 없는 주책바가지다.

서울시장과 용산구청장의 궤변

오세훈씨는 정책탐방을 한답시고 21일부터 10일 일정으로 유럽을 돌고 있었다. 30일 급히 귀국한 오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얼버무렸다. 전자우편도 휴대폰도 끊고 휴가를 즐겼나? 실시간 확인은 커녕 사후 보고도 못받았단 말인가? 오씨는 1일 나타나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며 울먹이고 눈물까지 훔쳤다. 시장이 시민에게 사과하는데 무슨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가? 면피용 생쇼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사죄한다면서도 수사를 통해 책임소재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조사해 봤자 자신의 형사책임은 없다는 소리다.

31일 조문에 나선 용산구청장 박희영씨의 망발은 더 주옥같다. “저희는 전략적인 준비를 다 해왔고요.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습니다 ... 이건 축제가 아닙니다.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 그냥 할로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되겠죠.” 이게 과연 공직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공직이 무엇인지 자기 책임이 무엇인지 전혀 감(개념)이 없는 자 아닌가. 뒷배인 지역구 의원 권영세씨는 몸사리고 침묵중이다.

윤석열과 한덕수의 횡설수설

1일 등판한 윤석열씨는 무식의 나래를 펼쳤다. “드론 등 첨단 디지털 역량을 적극 활용해서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기술을 개발하고, 필요한 제도적 보완도 해야 ... 이번 대형 참사가 발생한 이면도로뿐만 아니라 군중이 운집하는 경기장, 공연장 등에 대해서도 확실한 인파 관리 안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 9월 태풍이 지나간 뒤 재난 대응 매뉴얼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은 기억이나 하는지. 뭔 일만 터지만 되든 말든 습관적으로 하는 소리다.

같은 날 한덕수씨도 거들었다. 외신기자들에게 “이태원 참사는 이른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는 인파 사고의 관리 통제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줬다”며 “아직 인파 관리 또는 군중 관리라고 하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개발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누가 써줬는지 모르겠지만 윤씨와 한씨 모두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굳이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를 반복하는 모습은 궁색함 자체다. 참사를 말하는 자리에서 실실거리며 어설픈 영어로 농담을 던지는 여유라니... 총리는 영어로 말하고 통역은 한국어로 말하는 황당함이여... 이를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참사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제도 탓을 하고 기술 탓을 했다. 법이 없고, 규정이 없고, 매뉴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휴가철이나 연말연시 해돋이에는 매년 참사가 반복되었어야 했다. 아니면 경찰과 소방서가 권한도 없으면서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소리다. 결론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거짓말이다. 매뉴얼만 해도 너무 많아서 못찾을 지경이다. 드론이 없고, GIS가 없고, CCTV가 없어서 이런 참사가 난 것이 아니다. 당시 CCTV는 참사현장을 비추고 있었지만 담당자는 딴짓을 하고 있었다. 문정부에서 1조 5천억 예산을 쏟아부은 재난안전통신망은 제대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이런 데도 무슨 얼어죽을 기술 타령인가.

영정·위패 생략? 사고 사망자?

행정안전부는 30일 전국에 공문을 내려 ‘참사 희생자’가 아니라 ‘사고 사망자’라 하고, 분향소에 영정과 위패를 생략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인사혁신처는 근조글자가 없는 리본을 달라고 했다. 근조가 안보이게 뒤집어 달라는 소리다. 그런데 누가 이런 발상을 했는지 총리도 장관도 아는 이가 없다. 무당의 향기나 법사의 손길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초상집 가서 밤새도록 울어놓고 누가 죽었냐고 묻는 황당함이랄까. 얼마전 영국에서 조문을 못다해서 욕먹었던 한을 이제서야 풀어냈을 윤씨의 회한인가?

외신도 disaster라 하는데 왜 incident라 하는가? 그래서 누가 밀었나 조사하나?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이라는 자는 2일 “이태원은 굉장히 유명한 관광지다 ... 그런 지명 뒤에 참사, 압사라는 용어를 쓰면 ...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켜” 그 지역 자영업자가 피해를 입는다고 했다. 그러니 ‘사고’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랜다. 업자에게는 이리도 애달프면서 황망하게 죽어간 청춘들에게는 왜 그리도 박할까? 북한 해안에서 변을 당한 공무원은 전직 대통령마저 겨냥할 만큼 국가안보에 중요한데, 서울 한복판에서 깔려죽은 156명은 공무원 한명 값도 못한단 말인가? 결국은 죽은 자도, 책임자도, 참사 그 자체도 잊으라는 소리다.

할로윈을 비웃는 '핼러윈'들

제도나 기술 문제가 아니다. 정치·행정 이론 문제가 아니다. 그냥 사람의 본성과 기본에 관한 문제다. 주요 책임자들의 마음에 백성과 주권자는 없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나 ‘도어스테핑’은 정권의 무지와 무능과 불통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있어 보이나? 이 정권 자체가 참사다. 멀쩡한 할로윈(Halloween)을 두고 근본없는 ‘핼러윈’이라니... Go to hell이다.

 

인용: 박헌명. 2022. 할로윈을 비웃는 '핼러윈'들의 주책바가지. <최소주의행정학> 7(12): 2.

윈스턴의 1984년과 윤석열의 2022년

2022. 11. 9. 22:38 | Posted by 못골

George Orwell의 소설 <Nineteen Eighty-Four>는 사람의 행동과 생각은 물론 영혼까지 통제하는 큰놈(Big Brother, B-B) 체제에서 인간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렸다. 집사람과 별거중인 39세 Winston Smith는 진실성(Ministry of Truth)의 기록부(Records Department)에서 당의 지침에 따라 과거를 완벽하게 날조하는 일을 맡고 있다.

진실은 소각되고 언어는 파괴되는 1984년

전지전능인 큰놈은 항상 옳고 항상 성공하고 항상 승리해야 한다. 큰놈의 언행이 과거 행적과 다르면 책이나 잡지나 신문 등에 적힌 원래의 사실과 그림과 숫자를 폐기하고 현재의 것으로 바꿔치기 한다. 단순히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억소각통(memory hole)에 넣어 완전히 삭제해버린다(42쪽). 큰놈 체제를 위해 과거를 날조하고 왜곡하는 현실통제(reality control)는 끊임없이 사람의 기억을 무너뜨린다(37쪽). 승리한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된다.

큰놈은 곳곳에 모니터(telescreen)와 마이크(microphone)를 설치하여 사람들의 언행을 감시한다. 잠자지 않는 눈과 귀다(174쪽).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은 범죄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뒤바뀐 사실에 의심을 품는 것은 사상범죄(thoughtcrime)다. 큰놈의 언행에 대해 걱정과 불편을 내비치면 표정범죄(facecrime)다(65쪽). 순결은 당에 대한 충성이고 성행위는 반란이고 욕정欲情은 그 자체로 사상범죄다(71쪽). 중앙정보부에 해당하는 애정성(Ministry of Love)과 사상경찰(Thought Police)은 큰놈에게 위험한 자들을 감시하고 여차하면 잡아다가 매질을 하여 물고物故를 내거나 영혼까지 완전히 개조시킨다.

결국 사람들은 물리적이든 정서적이든 외톨이로 살면서 아무 생각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일만을 하고 주어진 정보와 노래만 듣고 주어진 음식만을 먹고 주어진 놀이만을 해야 한다. 연구부(Research Department)에서는 새말사전(Newspeak Dictionary)을 만들어 단어를 파괴하고 언어의 표현감을 잘라낸다(54쪽). 단어를 줄이고 단순화함으로써 생각할 범위를 줄인다(55쪽). 언어의 환원이다. 큰놈은 궁극적으로 모든 개념을 한 단어로 표현하도록 하여, 말하자면 사상범죄라는 말조차 존재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2022년 윤석열은 윈스턴인가? 큰놈인가?

윤석열씨의 언행을 보면 스스로 큰놈이라도 된 듯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진실이고 무슨 짓을 해도 공정과 정의라는 투다. 덩치값도 못하는 검사질이다. 사실이 어찌되었든 검사가 기소하면 죄가 있는 것이고 안하면 죄가 없는 것이다. 김학의는 화질이 선명한 동영상이 나와도 무조건 무죄여야 하고 한명숙은 물증없이 진술이 오락가락해도 반드시 유죄여야 한다.

윤씨가 사고(말실수)를 치면 검은옷들이 일사불란하게 사실을 뒤집고 왜곡하여 진실로 둔갑시킨다. 언어공작이다. 소정은 이런 자들을 수구기득권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진실의 자가발전소라고 했다(1991: 90). “이 새끼”는 미국 의회가 아니라 국회고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다. 이태원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희생자가 아니라 사망자다. 이렇게 먹이를 흘려주면 수구세력(언론)이 물어다가 방방곡곡에 떠벌린다. 진실을 의심하는 자는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빨갱이라 짖어댄다. 입다물라는 협박이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하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37쪽). 결국 권력잡은 놈이 다 해먹는다는 소리다.

윤씨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노예, 무지는 힘(War is peace; Freedom is slavery; Ignorance is strength)”이라는 큰놈의 기치에 충실한 듯하다. 평화를 말하면서 대책도 없이 강대강이다. 어찌 원점타격을 하고 전술핵을 배치한단 말인가? 허구헌날 자유를 들먹이지만 정적의 자유는 없다. 당원이 아닌 노동자는 그저 포르노와 복권(lottery)이나 즐기는 개돼지다. “Proles and animals are free”(75쪽). 물에 빠져 죽든 압사당하든 무슨 대수인가.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패기가 솟구쳐 좌고우면하지 않고 폭주한다. 정치, 외교, 국방, 경제, 문화가 폭싹 망해도 무지의 힘은 죽을 줄을 모른다.

윤씨는 윈스턴처럼 의심이 많아서인지 측근에만 의지한다. 윤씨의 언행에 맞추는 그들의 현실통제는 반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윈스턴의 1984년을 살고 있다. 답이 없다. 어쩌면 그는 지금 공상의 여인 “유지”를 만나 마지막 자유를 불사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윈스턴처럼 큰형님(백성)에게 끌려가 영혼까지 털릴 운명인 것을...

줄리아는 줄리의 초상인가?

윈스턴의 애인은 공상부(Fiction Department)에서 일한다. 26세 싱싱한 그녀는 포르노부서(Pornsec)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싸구려 포르노물 책자를 만들다가 이제는 소설기계(novel-writing machine)로 허접한 얘기를 쓰고 있다(136-137쪽). 당의 지시니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관심 밖이다. 그녀는 똑똑하지도 않다. 과거와 현재, 사실과 진실에 관심이 없다. 큰놈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믿지도 않지만, 어차피 실패로 끝날 반란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한다(138쪽). 인생은 단순히 쾌락을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16세때 60세 노인과 첫경험을 한 후 당원들과 수십 차례 성관계를 맺는다. 이런 행위까지 간섭하고 처벌하는 당과 법을 저주할 뿐이다.

세간에 알려진 줄리도 비슷하다. 젊고 당돌한 미술전공자로서 박사학위로 강의까지 했댄다. 최근 예쁘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아름답지는 않다. 똑똑하거나 재능이 있지도 않다. 알만한 작품도 없고, 요란하게 기획사를 운영하지만 실속은 없다. 학위 논문은 남의 것을 베낀 것이고 영어도 한자도 처참한 수준이다. 이력을 돋보이게 날조했지만 금방 탄로날 만큼 허당이다. 엄마와 함께 부동산과 주식으로 부당한 수익을 챙겼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데도 줄리는 귀신처럼 수사와 기소를 피해왔다. 학생 때부터 유흥업소에 나가 힘깨나 쓰는 늙은 남자(검사)들과 어울려 방패막이로 삼았다는 소문이다. 천박하나 특유의 요설로 뒷배를 갈아타면서 돈과 권력을 탐했다. 참으로 화려한 인생이다. 줄리는 윈스턴의 여인처럼 영화같은 애정행각에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윈스턴이 사랑하고 끝내 배신한 여인의 이름이 바로 줄리아(Julia)였다. 

참고문헌

 

인용: 박헌명. 2022. 윈스턴의 1984년과 윤석열의 2022년. <최소주의행정학> 7(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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