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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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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문영 선생님의 마지막 학부 지도학생이다. 1987년 봄 고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을 때 동기생이 65여명 되었는데, 가나다 순으로 학번을 매겼다. 절반을 나눠서 앞쪽에 있는 동기생들이 정년을 앞둔 선생님께 지도를 받도록 배정되었다. 그 앞쪽 절반의 거의 끝에 내 이름이 있었으니 마지막 지도학생이라 해도 과한 말은 아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고대스러운” 사제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많은 동기생들이 지도교수가 누군지도 모르거나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선생님 화갑기념 논문집 출간회에 가서 심부름을 하고, 동기생과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쌍문동 선생님 댁을 불쑥 방문하고, 현민 유진오 선생 빈소사건에 사용된 피켓을 만드는 일을 거들고, 다른 대학의 행정고시반 운영현황을 조사하여 선생님께 보고하고, <자전적 행정학> 원고를 타이핑해드린 것은 특별한 우연이자 행운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감성이 풍부한 촌티나는 학생이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많으나 제대로 표현할 줄을 몰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생각한 것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더욱 힘들어 했다. 하려는 말과 입으로 나온 말이 달라 종종 당혹스러워 했다. 생각은 많아서 터질 듯 쌓여만 가는데 마땅히 배설할 방법을 알지 못해 끙끙거렸다. 교과서에 있는 민주주의와 최루탄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현실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았다. 이러한 괴리에 화가 나고 그것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화가 났다. 시한폭탄처럼 위태위태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지독한 혼돈과 분노와 좌절 속에서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고대 교수들의 4.22 호헌 반대성명, 6.10 민주항쟁, 6.29선언이 이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재무행정>을 수강하면서 무언가 깨닫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복식부기라는 돈셈 원리에서, 처음 30만원 목돈을 만들기가 더 어렵다는 대목에서, 처음에 들어온 30만원짜리 사람을 들볶아 대면 나중에 30원짜리도 안되는 폐인이 되어 나간다는 말씀에서(이문영 1991:198) 나는 실마리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전체가 아닌 몇몇 파편을 주워듣고 기뻐했을 뿐이다. 사실 선생님 말씀은 대개가 어려웠다. 나름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뜬구름같은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고 다만 몇 마디라도 이해하려 애썼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여러 번 곱씹어 생각했고, 가끔씩 늦게나마 그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다.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꾸준함”이 귀하다 말씀해주시고,『論語』學而篇에 나오는 “巧言令色 鮮矣仁”을 설명해주셨을 때 나는 많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정년퇴임식을 마치고 불쑥 내게 오셔서는 “박헌명의 정년은 언제지?”라고 물으셨다. 꽃다발 고맙게 받았다, 꾸준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그리 뜬금없는 질문으로 대신하셨으리라. 내가 가장 아끼는 선생님의 말씀은 <자전적 행정학>(1991: 22)에 적으신 다음 문장이다. 

“나는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고--또 잊고도 있고--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기억하건대 그 책을 쓰시기 전에도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이 마치 내가 한 말인 듯 느끼고 있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다.1) 아마도 내가 문장으로 적지 않았다 해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이 마치 내 생각이나 글처럼 그렇게 느껴졌을는지 모른다. 아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뜻인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마침 그 비슷한 경험을 하고서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다”

어쩌면 위 문장은 그냥 어떤 사람의 평범한 소망처럼 들릴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그 속뜻을 알기 어렵고 별다른 감흥을 얻기도 어렵다. 선생님의 말씀이 늘 그러하듯이 그 독특한 맥락의 자락을 잡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먼저 첫번째 문구를 살펴보자. 왜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을까? 사소한 일을 가지고 일희일비하는 소인배가 아닌 대인배가 되기 위해서일까? 성인군자가 되어보기 위함일까? 아마도 정답은 내가 살기 위해서이다. 그 섭섭함을 마음에 담고 산다면 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섭섭함이 화가 되고 분노가 되어 궁극에는 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병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독재정권에게 참혹하게 당한 사람들이 대개는 오래 살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화병이었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추측하셨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런 화를 마음에 담고 산다면 어찌 멀쩡하게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임에랴...  

그런데 누가 섭섭하게 한 이일까? 생각컨대,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독재자와 그 떨거지들이 아니다. 섭섭하게 한 자들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될 나쁜 짓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섭섭하게 한 이는 먹고 살려다 보니 독재자의 지시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른 평범한 공무원일 것이다. 지독한 고문과 탄압에 시달린 나머지 독재자에게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억지로 협조하는 사람들이다. 더 가깝게는 민주화운동을 같이 했으면서도 기본 생각이 달라서 민주화 과실을 탐하여 일을 그르친 사람들일 것이다. 동지이기 때문에, 동지였기 때문에 섭섭하지만 그만큼 더 아픈 것이다. 

이렇게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분들의 처지를 인간적으로 긍휼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려야 할]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해서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문영 1986: 96). 또한 동지와의 합의를 중요시하고 동지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동지들과 같이 일하다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96: 429).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최소주의일 것이다. 섭섭하게는 했지만 백번을 양보해도 그들이 나름대로 최소한을 지켰기 때문이다. 최대를 하지 않았어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을 안하는 것보다 마땅히 안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쁘다(이문영 1996: 420). 즉, 무엇을 안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에 앞선다(404쪽). 조지훈 선생은 “사람은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이문영 1986: 329). 결국 나를 섭섭하게 한 이는 마땅히 안해야 할 짓은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서울 때에도 그 최소한을 버리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동아리에서 경험한 일을 떠올린다. 다수가 동아리의 목적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울려 노는 일(사교)에 몰두한다. 원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외면을 당하고 비난을 받는다. 모두가 나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났다. 애초부터 합의한 일을 하자는 요구를 다수와 학번으로 무시하고 핍박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연히 여자 동기생이 일을 담당한 임원으로서 내 일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애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더 열심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관심이라는 것도 최소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최소한 동배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눈꼽만치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참으로 어려울 때에 그런 동배조차 없었다면 나 자신이 너무 서글퍼졌을 것이다. 섭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애의 최소한이 고마왔다. 은연한 애정을 느꼈다. 이 땅의 많은 “알뜰한 당신”들이 그 애처럼 지켜야 할 최소를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이 나라가 이 정도라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그들이 보여준 최소에 감사한 것은 나를 번뇌에서 자유롭게 했고, 이성과 상식에 머물게 해서 지나친 선택(폭력)을 하지 않도록 했다. 

나는 선생님께서 적으신 “--또 잊고도 있고--”라는 표현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을 하셨나를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섭섭하게 한 이를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지였다면 더 섭섭하고 잊는 일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모두 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정말 그렇게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정말 “지켜야 할 최소를 지키려 하는 최소주의자였다”(이문영 2008: 150). 아마도 김석중 사모님께서는 섭섭하게 한 이를 차마 잊지 못하셔서, 그만큼 원망이 깊어서 마음에 병을 얻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석중은 ... 정권을 바로잡지도 못하면서 관직에 들어간 재야 동지들을 민주화 후에 강자에 붙어먹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해 왔다”(이문영 2008: 187).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이 문구는 앞 문구와 대조를 이룬다. 신세를 진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섭섭하게 한 이를 잊는 것보다 더 쉽다. 왜냐면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기억하는 것은 고통이 아닌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푼 것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사람의 기본 품성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울 때 신세를 진 이를 잊고 살거나 오히려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왜 구태여 이런 상식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을까? 

선생님에게 고맙게 한 이는 단순히 고마운 사람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시절에 利가 아닌 義로 이심전심이 된 사람들이다. 무서운 시절에 독재자의 감시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쌀을 보내주고 돈을 보태준 분들일 것이다(이문영 1991: 22). 그 도움 자체가 크지 않더라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박해를 무릅쓰고 손을 내밀어준 그 자체가 눈물나게 고마운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값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이문영 2008: 78). “한계상황에 사는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이문영 1986: 96). 최소의 것을 빼앗겨본 자는 꼭 필요한 최소를 내어준 고마움을 차마 잊을 수 없다. 또 다시 선생님의 최소주의다.2)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을 베풀어준 은혜를 최소한(갚지 못한다 해도) 잊지는 않겠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선생님께서 참담하고 혹독한 세월을 치열하게 참고 견디어오셨다는 뜻이다.   

나는 동아리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몰두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회원들은 이런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해 했다. 모여서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쏟아냈고, 급기야 나를 쫓아내려 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세상은 모두 나를 외면하고 배척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 얼마나 사람을 좌절하게 했던가. 공식모임에서 나는 마지막 발언을 마치고 모든 기운을 소진한 듯 자리에 앉았다. 어떤 미련도 기대도 갖지 않았다. 그때 평소에 과묵하던 선배 한 분이 걸어나와 차분한 어조로 발언을 하셨다. 그를 몰아세우기 전에 스스로 우리가 어떠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의 비판에 떳떳했는가, 성찰도 없이 대안도 없이 몰려다니며 사람 하나를 낙인찍어 쫓아내면 그만인가 그는 물었다. 냉정을 되찾아 모두가 반성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책임을 느낀다며 상임위원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이 최소한의 발언에 아무도 감히 토달지 못하였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과 최소주의와 자기희생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말이었음을 기억한다. 그후 나는 그 분을 나에게 고맙게 한 이로 알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그냥 고마운 이가 아니라 최소를 다투는 한계상황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진리를 살려냈으니 가슴에 사무치게 고마운 분이다. 

“고-마-워...”

나는 2013년 12월 말 고대병원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힘든 고비를 넘기신 직후였다. 아무 말씀도 없이 내 얘기를 힘겹게 들으셨다. 편히 쉬게 해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려는데, 물끄러미 지켜만 보시던 선생님께서 내게 숨을 내쉬듯이 말씀하셨다. “고-마-워...” 나는 마지막 말씀임을 직감했다. 해드린 것이 없어서 항상 송구한 제자를 기억해주신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간절한 느낌으로 들었고, 끝까지 잊지 않으려 애쓰시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 순간  정년퇴임식을 떠올리셨는지 모른다. 다른 선생님과는 달리 누구에게서도 꽃다발과 축하인사를 건네받지 못하셨다. 내 차례까지 올까 싶어 꽃다발을 안고 내심 초조했던 나는 얼마나 황망했던가.  

하지만 고맙게 한 이는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셨다. 가장 고뇌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내게 한줄기 빛처럼 의지가 되어 주셨다. 비폭력과 최소주의라는 가르침은 군대와 외국생활에서 위기에 처했던 나를 지켜주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의미없는 숫자놀음으로 강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해주셨다. 투석중인 상황에서도 이제 좋은 색시를 만나야 한다며 마음을 써주셨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색시를 데리고 가서 인사시켜드린 것이 내가 가장 잘 한 일이었던 것같다.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린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게 한 선생님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마지막까지 진솔하고 간절하셨던 바로 그 마음으로 말이다. 

끝주 


1) 중학교 국어선생님께서『論語』學而篇을 인용하시면서 曾子는 하루에 세 가지를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반성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단지 오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가를 반성한다고 답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답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와 맥락이 맞닿아 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남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최소한 폐가 되지는 않겠다는...

각주 2)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 (2008)를 읽고 감동한 전라도의 한 치과의사가 선생님의 치아를 치료해 드렸다고 한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그 여의사 일을 종종 말씀해 주셨다. 




원문: 박헌명.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최소주의행정학> 1(5): 1-2쪽

권위란 무엇인가? 20여년 전 직위가 높은 윗사람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代價로 적어낸 반성문의 첫번째 문장이다. 많은 아랫사람들이 보는 데서 윗사람의 체면과 위신을 땅바닥에 패대기친 그 불경을 참회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떳떳한 마음으로 대의를 선택하기로 하고 나는 두번째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권위란 그 자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반성문을 읽어본 어느 상급자가 혀를 끌끌 찼다. 반성문을 가장한 훈계문에 당혹해하면서도 차마 나무라지 못하는 심경을 그의 낯빛에서 읽었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불경스런 반성문”을 적었을까? 

무관심영역? 수용영역?

이문영은『인간 종교 국가』(2001: 388)에서 “바너드(Chester I. Barnard)는 1938년에 저술한 Functions of the Executive에서 하급자의 무관심영역(zone of indifference)를 말했다. ...  위사람이 마구 눌러대면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지며(indifference), 윗사람의 명령을 받아들이는(acceptance) 영역이 한정된다는 말이다”라고 적었다. 이에 앞서 “윗사람이 아무리 설쳐도 아랫사람이 무관심하면 일이 안된다는 바너드의 말, ‘무관심영역’(zone of indifference)을 이어받아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 시몬이다. 바너드는 윗사람이 명령을 내려도 그 명령을 아랫사람이 실천할 수 없는 명령이거나 그 명령의 실천이 아랫사람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거나 그 명령이 조직의 목적과 어긋나면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진다고 보았다”(47쪽)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선생님은 “Indifference”를 문자그대로 무관심으로 해석해서 Barnard의 뜻을 조금 오해하신 것같다. 이 zone of indiference는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지는 영역이 아니라 윗사람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고 명령(의사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영역이다. 원문은 “[T]here exists a ‘zone of indifference’ in each individual within which orders are acceptable without conscious question of their authority” (Barnard 1968: 167) 로 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Simon (1997)은 zone of acceptance를 설명하면서 “... whenever [a subordinate] permits his behavior to be guided by the decision of a superior, without independently examining the merits of that decision” (10쪽)과 “an area of acceptance in behavior within which the subordinate is willing to accept the decisions made for him by his superior” (185쪽) 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수용영역은 명령의 적절성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을만큼 합당한 것이어서 아랫사람이 군소리없이 그냥 명령을 받아들이는 영역을 말한다. 어떤 명령이 그 영역 안에 있는 한 아랫사람은 의심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윗사람이 내리는 명령을 아랫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도를 순서에 따라 정렬하면, (1) 명백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명령, (2)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unquestionably acceptable)  명령, 그리고 (3) 그 중간선에 있어서 가까스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명령이 있다(Barnard 1968: 168-169). 두번째 부류가 바로 수용할 만한 범위(range) 안에 있는 명령인데, 아랫사람은 그 명령이 무엇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윗사람의 권위를 의심하거나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다)(169쪽).

그래서 Barnard의 zone of indifference (상관안하고 받아들이는 영역)은 Simon이 Administrative Behavior (1997)에서 표현한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1) 어차피 Barnard의 설명에도 acceptance가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인간 종교 국가』(2001)에 있는 표현은 “위사람이 마구 눌러대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명령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영역에서 벗어나게 되어 윗사람의 권위가 의심받게 된다는 말이다,” “윗사람이 아무리 설쳐도 아랫사람이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령을 내려야 일이 된다는 바너드의 말,” “... 그 명령이 조직의 목적과 어긋나면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을 벗어난 명령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받아들이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정도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위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1968)는 권위를 “the character of a communication (order) in a formal organization by virtue of which it is accepted by a contributor to or ‘member’ of the organization as governing the action he contributes” (163쪽)로 정의했다. 사람들(아랫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권위를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명령이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1) 아랫사람이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2) 조직의 목적과 불일치하지 않아야 하고, (3) 자신의 이해관계와 부합해야 하고, (4)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따를 수 있어야 한다(165쪽). 물론 권위는 개인의 주관이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객관이라는 관점에서 조직 내에서 의사전달 체계(channels of communication)를 통하여 공식성 “acting officially”을 가지고 행사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163, 172쪽). 

요컨대, Barnard는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명령과 지시가 아니라 아랫사람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Golembiewski and Kuhnert 1994: 1210-1211). 권위가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상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단지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명령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받아들였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Fry 1989: 168). Barnard는 위사람에 방점을 둔 기존의 권위와 다르게 아랫사람의 관점을 강조했는데, 그의 견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권위는 다듬고 가꾸는 것이다 

왜 나는 권위가 자리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는가? 당시 나는 Barnard (1968)과 Simon (1997)을 직접 읽지 못했다. 물론 강의시간에 zone of acceptance를 배웠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절실하게 그 의미를 느낀 것은 대학과 사회생활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부여된 책임을 생각하기보다는 권위를 내세우는 것일까? 일을 잘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일까? 자신이 권위에 합당한 능력(지식과 기술)을 가졌는지를 따지는데 게으르고,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데 부지런한 것일까? 일이 잘 되면 자기 공으로 돌리고 잘못되면 아랫사람 책임으로 돌리는 일을 어쩌면 그리도 잘하는 것일까? 결국은 명예롭지 못하게, 혹은 비참하게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면서 끝까지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 악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조직을 망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들인지를 생생하게 관찰하였다.   

Barnard (1968)는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 (authority of position)와 관리자의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 (authority of leadership)를 구분하고, 능력이 출중하지만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권위라기보다는 영향력(influence)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173-174쪽). 비록 이론 에서 두 권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라도 현실에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은 능력과 자리는 비례한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능력이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이렇게 평가와 상벌이 공정하면 조직 구성원들은 편안하게 일을 잘 할 것이고 조직의 성과는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능력이 쳐지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경우이다. 멋대로 조직의 유인체계를 조작하여 편을 가르고 내 편에게 부당한 혜택을 베풀어 조직을 흔든다. 자원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한 조직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조직을 망친다.

권위가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보다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권위가 계서제로 운영되는 공식 조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이상 권위는 물론 자리(직위)에서 시작된다. 일을 잘 하기 위해 책임을 나누어 지는데(분업) 그것이 그 자리다. 권위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고 권능 (법률상 능력) 을 주는 것이 아니다. 책임은 권위의 장식품이 아니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자리는 거기에 걸맞는 권능이 부여되고 권위는 높고 크다. 자리에서 시작된 권위(권능이라 하자)는 조직도표나 직무분석표에 나와있는 서류상의 권위이다. 실제 권위(자리와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의 총합)는 그 자리에 오른 자가 어찌 하느냐에 따라 서류상 권위보다 낮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높아지기도 한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지식, 기술, 도덕성, 체력, 언변, 글쓰는 능력 등을 어찌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실제 권위(의 크기)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권위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서류상의 권능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선 사람이 다듬고 가꾸고 개발해나가야 하는 능력이다.  

권위는 능력이자 자원이다 

권위의 본질은 조직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영향력이다. 또한 권위는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이나 장비와 같은 소비 자원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없어지는 그런 자원이 아니다. 잘 사용하면 늘지만 잘못 사용하면 줄어드는 그런 자원이다. 

Barnard (1968: 165, 167)가 지적한 대로 윗사람은 사려깊이 좌우를 살펴서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에 들어갈 만한 명령(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단순히 서류상 적힌 권능을 행사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권위는 크게 늘거나 줄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권능을 행사하여 사람들과 화합하고 조직의 일을 잘 해내간다면 권위는 늘어난다.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든 능력에서 나오든 권위든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경우다. 권위 점수는 쌓여갈 것이고 “권위 계좌”의 잔고는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그만큼 윗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진다. 반대로 적절하지 않은 권능을 행사한다면 권위는 줄어든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수행할 수 없는 명령,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이해관계를 해치는 명령 등은 수용영역에서 벗어난다. 이런 정당성 없는 명령을 강제하면 당장은 어떨는지 몰라도 알게 모르게 권위는 허물어진다. 권위 점수가 깎이고 계좌 잔고가 줄어든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도 쭈그러 든다. 윗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총알’이 없어진다.

평소에 권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윗사람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윗사람이 어쩌다가 정당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아랫사람의 허용영역은 이미 좁아져서 퇴짜맞기 십상이다. 아랫사람은 그 명령이 정당한지 의심부터 할 것이고, 수행한다 해도 성의를 다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잔고가 바닥난 윗사람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던 소년 얘기처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사람들이 더이상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소에 권위 점수를 많이 쌓아두고 잔고를 넉넉히 채워넣은 윗사람은 좀 더 쉽고 여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어지간 하면 아랫사람이 그 명령이 정당한지를 따지지 않고 성심성의껏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평소와는 다르게 덜 정당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수용영역이 넓고 벌어놓은 권위 잔고가 많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명령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윗사람이 자리와 능력에서 나온 권위를 모두 겸비한 경우 아랫사람은 수용영역 밖에 있는 명령조차도 따를 수도 있다 (Barnard 1968: 174). 물론 그만큼 윗사람의 권위 점수는 깎일 것이고 권위 잔고는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은 좁아질 것이다. 

누가 불경죄를 말하는가? 

우리는 사극에서 왕이나 양반을 능멸한 불경죄를 묻는 장면을 종종 본다. 왕의 권위를 세우고 반상 법도를 반듯하게 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고 아랫사람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멍석말이를 한다. 그런 장면 대부분은 윗사람이 떳떳하지 못한 경우다. 떳떳한 윗사람은 그 권위를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는다. 설령 자리에서 비롯된 권위가 부당하게 도전받았다 해도 그런 윗사람은 아량을 베풀고 꼭 필요한 경우에 정해진 절차를 온전히 따르는 방법으로 대응한다. 그러니 무거운 처벌을 내린다 해도 원망이 없고 억울함이 없다. 그 처벌조차 수용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옳으니 그르니 시비걸지 않는다. 정당하고 공정한 의사결정은 윗사람의 권위를 높일 뿐이다. 그런 윗사람은 스스로 권위니 불경죄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 자체로 권위를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대신 행여나 자신에게(자리가 아닌 관리자 능력과 처신에서) 부족한 것이 있었는지를 차분히 돌아보면서 반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관찰하는 윗사람은 그 반대이기 십상이다. 어느 자리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한 자리를 꿰어차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팔뚝에 찬 완장이 마치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표식인 것처럼 우쭐대고 골목길을 누비는 자들이다. 그 자리가 주는 책임은 망각하고 자리에서 나온 권능이 모두인 것으로 믿고 법대로 하자고 한다.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은 아무렇게나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아랫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받들어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천진난만한 윗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윗사람의 몫이지 아랫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까라면 까”를 입에 달고 다니는 자들이다. 

이런 기고만장들은 평소 말과 행실이 비루한 자들이다. 권능만 내세우면서 거드름을 피우다 일이 잘못 되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다. 자리가 주는 권능이 아무리 높아도 이런 태도와 처신은 그 사람의 실제 권위를 크게 깎아먹는다. 지식과 기술과 언변이 아무리 좋아도 권위 점수를 벌거나 잔고를 불릴 수 없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을 넓힐 수 없다.   

국회의 권위가 어쩌니 하면서 청문회에 출석한 참고인을 윽박지르는 장면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그렇게 권위를 따지는 사람치고 멀쩡한 윗사람인 경우는 극히 희박하다. 대부분은 부적절한 언행으로 쓸데없는 언쟁을 불러일으킨 뒤 그 책임을 참고인에게 떠넘긴다. 소위 “갑질”이다. 청와대에서 걸핏하면 국회를 비난하고 국민을 탓한다. 민주공화국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거나 입법권과 사법권이 국회와 법원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행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죄를 규정한다. 자신이 진리이고 정답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자기 중심으로 돌고, 또 그렇게 돌아야 한다는 정신줄이다. 한마디로 공화국에서 즐기는 “왕놀이”다.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그 어느 것도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순진무구이다. 자신이 앉아 있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비롯된 권능만 따지고 있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탓을 할 뿐이다. 지식이든 기술이든 깜냥이 안되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주어진 권능조차 무시하고 전지전능한 신처럼 세상을 굴림하려는 격이다.  

누가 권위를 허물었는가? 거울을 보라! 

모두 똑같은 정신줄이다. 권위가 아랫사람의 수용여부에 달려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앉아있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권위가 변화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 자리에 앉은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뼛속 깊이 깨닫는데 게으르고 권능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그 자리가 제공한 권능만 믿고 기고만장하여 무슨 의사결정(명령)이든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아랫사람은 무조건 그 의사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억압하고 탄압하여 아랫사람들의 신망을 잃을 자들이다. 권위 잔고는 0을 지나쳐 마이너스가 된다. 그래서 더 자신의 권위에 집착한다. 헛된 무리수를 반복하여 쉼없이 아랫사람을 못살게 들볶는 자들이다. 

과연 누가 그들의 권위를 허물었는가? 누가 그들의 권위 점수를 깎아먹고 잔고를 바닥내었는가? 그들의 명령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인가? 자신의 수용영역을 벗어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아랫사람인가? 못난 윗사람들은 흔히 그런 아랫사람들을 잡아다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며 호통을 친다. 하지만 그 “불경죄”는 기껏해봤자 자신의 책임을 피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권위를 훼손한 것은 아랫사람이 아니라 서류상 권위만 믿고 날뛴 윗사람 자신이다.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이 그 자리의 무게에 미치지 못해서 자리가 주는 권능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다 까먹은 까닭이다. 백성에게 신망을 잃은 왕의 권위가 어떠한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와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버린 이승만을 보라. 그런 못난 왕(혹은 왕노릇을 한)을 험하게 욕한다 한들 누가 백성을 탓할 것인가? 왕이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스스로 거울을 보라. 거기에 권위를 갉아먹은 암종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반성문에서 이런 내용을 적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비판을 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아서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면, 그런 권위는 내세울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만일 자신의 권위가 훼손되고 무너졌다면, 남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런 것이라고.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스스로 못난 짓을 한 결과라고. 그러니 남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봐 반성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얼마나 합당하고 정당한 의사결정을 했는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협조를 구했는지, 얼마나 평소에 언행을 조심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이다.

수용영역과『 맹자』의「양혜왕」4장 2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의 폭과 크기는 조직이 제공하는 대가가 조직구성원이 기여하는 노력과 희생보다 얼마나 큰 큰가에 달려있다 “... the degree to which the inducements exceed the burdens and sacrifices which determine the individuals’ adhesion to the organization” (Barnard 1968: 169). 또한 명령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강제력 “the sanctions which authority has available to enforce its commands”에 따라 결정된다 (Simon 1997: 10). 예컨대, 군대같은 조직은 강제력(처벌)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조직에 비해 수용영역이 더 넓다 (p.186).   

하지만 마피아나 야쿠자가 아니라면 일반 조직에서 권위라는 이름으로 아랫사람을 총칼로 겁박하고 주먹으로 때려서 일을 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군대에서도 군법과 규정에 따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무 명령이나 내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Simon (1997: 10)은 “... the superior does not seek to convince the subordinate, but only to obtain his acquiescence”라고 적었다. 설령 부하가 상급자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할 수 없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묵인(acquiescence)이다. 상급자가 평소에 올바르게 행동하여 권위를 충분히 벌어놓았다면 전시에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라는 명령도 부하들이 순응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80년 5월 게엄령이 선포된 광주에서 공수부대 지위관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고 지시한 것은 정당한 명령이 아니다. 어린 애들도 본능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명령이 아닌 장병들의 수용영역에서 한참을 벗어난 사실상 폭력이고 고문이다. 권위도 뭐도 아닌 그냥 살인마의 가혹한 강요일 뿐이다. 

어떤 자리에서 비롯된 권능과 강제력 같은 공식성 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개인 능력에 따라서 아랫사람이 인정하는 수용영역이 달라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서 나는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는『孔孟』「梁惠王」下 4장 2를 떠올리곤 한다. 이문영 선생님은 이 구절을『孔孟 』를 꿰뚫는 문장으로 보았다 (1996: 74, 293, 606; 2001: 70, 147). 나는 이 문장이 Barnard와 Simon의 수용영역과 맥락이 같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못얻었다는 것은 上이 제공하는 서비스(정치, 경제, 사회 등)가  民이 기대하는 최대치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民이 上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上이 民과 同樂하지 않는 것은 上의 최소치이고 同樂하는 것이 최대치이다. 그 최소치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民이 上을 비난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上이 최소한 이상을 해야 할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벗어나 극단에 이르면 民이 난동을 부리는 것이고, 上이 패도질을 하는 것이다. 이러니 양극단을 경계하는 선생님의 최소주의를 참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끝주

1) 『인간 종교 국가 』(2001)에 나오는 “행태론 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시몬과는 달리 왈도는 정치학을 공부한 행정학자로서...”(436쪽)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Herbert A. Simon (1916-2001)은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정치학은 물론 경제학, 인공지능, 심리학, 컴퓨터학 등으로 학문 지평을 넓힌 분으로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Barnard, Chester, I. 1968. The Functions of Executiv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Fry, Brian R. 1989. Chester Barnard: Organizations as Systems of Exchange. In Mastering Public Administration: From Max Weber to Dwight Waldo. 156-180. Chatham, NJ: Chatham House. 

Golembiewski, Robert T., and Karl W. Kuhnert. 1994. Barnard on Authority and Zone of Indifference: Toward Perspectives on the Decline of Managerialism.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Administration17(6): 1195-1238. 

Simon, Herbert A. 1997. Administrative Behavior, 4th ed. Free Press.



원문: 박헌명. 2016.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 <최소주의 행정학> 1(4): 1-3.

공직자와 정치인의 부적절한 말법으로 사회의 공분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은 그 사람의 지식수준과 편견과 도덕성이 기대이하임을 민낯처럼 드러낸다. 화가 나기보다는 참담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여 백성들이 당면한 문제를 풀어야 할 공복公僕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합을 하기 위함인데 그런 말법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고 듣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기 때문이다. 공직자들이 적절하지 못한 말법을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보다도 그 말하는 모냥새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임도 져야 한다. 비열하고 무책임한 공직자의 말법 두 가지를 살펴보자. 

2010년 1월 17일 이명박씨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세종시 수정안이 백년대계를 위한 고육책임을 넌지지 말하고, 같은날 정운찬씨는 세종시에 한 부처라도 옮겨 “행정부처가 분할되면 나라가 거덜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18일). 노무현씨의 세종시 계획안은 나라를 거덜낼 지도 모르는 흉악한 정책이고 세종시 수정안은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이라는 소리다. 사람마다 가치와 선호가 다르기 마련이나 국가 정책을 놓고 뜬금없이 낙인을 찍고 저주하는 것은 지나치다. 아무리 정치 수사라 해도 비열한 짓이다.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정말 세종시 계획안이 백년대계가 아니라 나라를 거덜내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선거때에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하지 말아야 했다. 원안추진이 어렵다면 불가피한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약속한 것을 뒤집는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참회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백년대계는 커녕 나라를 거덜낼지도 모르는 흉악한 짓거리로 몰아붙였다. 자신이 공약한 것을 저주하는 황당한 자기부정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나라가 거덜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소리다.

정말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공직자라면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된다면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답해서는 안된다. 수정안이 나라의 백년대계임을 확신한다면 대통령이든 총리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백성들에게 엎드려 호소할 것이다. 이명박씨의 말대로 “정권에 도움이 안될지라도”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수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백성의 신뢰를 잃었으니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으나 다시 한번 냉철히 생각해줄 것을 읍소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씨도 정운찬씨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수정안이 부결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에 눌러앉아 원안을 추진하였다. 또다른 자기부정이다. 애초부터 수정안이 그들의 신념이나 국가의 백년대계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뜻이다. 국가나 백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이문영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선공후사先公後私와 정반대이다. 기껏 해봤자 ‘나는 노무현이 싫다’ 자신의 심사를 고백한 것일 뿐이다.  

박근혜씨도 마찬가지다. 강한 자의 권리만 있지 책임은 없다. 상대방이 어찌하든 자신의 입장을 반복하는 독백만 있지 상대방과 교감하는 진지한 대화는 없다. 2004년 4월 18일 밤에 한국방송공사에서 열린 특집 <국민대토론 : 17대국회 어떻게 풀 것인가?>에서 사회자가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전화인터뷰를 한 내용을 적어보자.

사회자: 헌재결정이 만일 탄핵안에 대해 기각 결정을 할 경우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나라당이 어떤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질것인가를 물었는데 여기에 대한 박대표의 입장은 어떠 하십니까?

박근혜: 헌재결정은 당연히 수용해야되고 저희는 일관되게 그런 주장을 해 왔습니다.

사회자: 아니 질문의 요지는요, 한나라당이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박근혜: 저희 입장은 수용하는 것이지요.

사회자: 단순히 수용하자는 것이 다입니까?

박근혜: 네!

모두들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김영삼씨의 “굶으면 학실히 죽는다”에 필적하는 사오정 말법이다. 잘 들리냐는 질문에 ‘잘 안보여요’라는 답변이다. 게다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날치기하여(합의가 아닌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어지럽혀 놓고, 헌재 결정을 그냥 수용한다니... 힘을 남용하여 사회 혼란과 분열을 초래해 놓고 책임은 모르쇠란 말인가. 어찌 그리 쉽게 “네!”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반성도 없을 뿐더라 책임이라는 개념조차 찾을 수 없다. 이게 공직자(당시는 공당의 우두머리)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허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고 기어이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겠다는 심산이었나? 암살자나 반란군을 동원하지는 않을테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는 소리인가? 온갖 패악질은 다 해놓고 자기편조차도 민망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구석에 몰리니까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려는 양아치 수작이다. 그것도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것이 아니라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마치 큰 양보라도 하듯이 떠벌리면서 끝까지 허세를 부린다. 그러면서 정작 선거 때에는 “잘못했다”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며 백성들에게 표를 구걸하는 기회주의자로 잽싸게 탈바꿈한다. 

이런 자들에게는 公은 없고 私만 있다. 이문영(1996: 311)은 논어「자로子路」편을 인용하며 “일은 國政이어야지 사사로운 집안일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정반대 길을 걷는 자들이다. 힘을 얻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공복이라는 생각이 혼미하거나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권한과 이득만 생각하지 책임과 백성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 체면이고 염치고 따지지 않는다. 私만 있고 利만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호주머니 돈으로 4대강 사업과 자원 외교를 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돈(백성의 세금)이기에 자기 돈처럼 뿌려대면서 생색을 내고 다닌 것이다. 부처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예컨대, ‘미래’와 ‘창조’)를 넣어 바꾼 것도 公과 私 구분이 없는 정신줄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심하고 비열하고 무책임한 말법 그대로여서 한없이 부끄럽고 비참하다.




원문: 박헌명. 2016. 비열한 공직자의 말법과 선공후사. <최소주의행정학> 1(3): 1.

처음으로 식구들을 데리고 나들이에 나섰다. 오래된 동무가 사는 동네에 가서 산에도 올라보고 온천에도 다니면서 며칠 쉬었다 올 생각이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뒷간에 갈 일이 생겼다. 

길게 바닥까지 내려앉은 소변기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소변기 밑에 사방 30cm가 되는 타일이 한 줄로 깔려서 바닥에서 높이 1cm 정도가 되는 턱을 만들고 있었다. 소변기에서 타일 끝까지의 거리가 아주 묘해서 적당히 타일을 밟고 있으면 서 있기가 불안했다. 볼 일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완전히 타일 위로 올라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소변기 가까이에 가도록 했다. 이런 뒷간을 전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이런 만듦새는 말하지 않고도 그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소변기를 깨끗하게 쓰라느니, 소변기에 가까이 가서 일을 보라느니 잔소리하지 않는다. 서로 말하고 듣기 민망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볼일을 보러 간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자연스레 그 뜻을 깨닫고 따르도록 한다. 말없이 손자가 제 길을 갈 수 있게 끔 자연스레 이끌어 주는 할머니의 따스함이다. 좋은 정부는 일방적으로 백성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지향한다. 이런 것이 무위無爲이다. 폭군이 나서서 뭔가를 한다고 설쳐대는 유의有爲와 대조된다 (이문영 2001: 250). 

어느 음악방송에서 남자들이 뒷간을 사용하는 버릇을 지적한 것이 생각난다. 소변기에 가까이 가지 않고 일을 보면 오줌이 바닥에 튀게 되고, 다음 사람은 튄 오줌을 밟지 않으려고 더 멀리서 일을 보게 되고, 그러면 청소하는 분들이 애를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간에 “한 걸음만 앞으로” 혹은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사회가 좀 더 밝아진다는 것이다. 

얼핏 듣기에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얘기다. 실제 휴게소 뒷간에서 이런 문구를 보고 정말이었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하지만 왠지 불편하다. “한 걸음만 앞으로”는 그렇다 쳐도 “남자가 흘리지...”는 지나치다 싶다. 왜 하필 남자이며, 왜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구태여 여성주의(faminism)나 수컷질(machoism)과 연관짓고 싶지는 않다. 벌이나 파리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소변기 얘기가 나올 때에는 헛웃음이 나온다. 화살로 과녁을 맞추듯이 조준을 하도록 유도한댄다. 남자들이 (여자들과는 달리) 똥오줌을 못가리는, 그래서 계몽이 필요한 철부지란 말인가? 이런 지경이니 어느 뒷간의 소변기에 그려놓은 여자의 앞태와 뒤태는 더 말하여 무엇하리. 이런 정신줄이라면 여자 뒷간에 무엇을 그려놓았을 것인가? 그냥 재미삼아 그랬다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계몽문구는 말이 아니라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유위·무위를 따지기 이전의 문제다. 

정부(국토해양부)는 2010년부터 길가는 시민들이 오른쪽으로 걷도록 했다.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딫히거나 차에 치이는 것을 방지한다는 취지에 토달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불쾌하다. “편리하고 안전한 우측보행! 세계 그리고 우리의 보행문화입니다.” 정부의 선전문구다. 우측보행은 미국·캐나다·일본 등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고 한다. 문명인은 우측보행을 한다는 문구도 보았다. 어떤 이는 드디어 선진교통국가 대열에 오른다고 흥분하였다. 정말 우측보행이 좌측보행에 비해 편리하고 안전한가? 우측보행만 하면 선진교통국이 되는가? 정말 야만인만이 좌측보행을 하는가? 이 모두가 역린逆鱗을 건드는 말폭력이다.

강준만(2008)에 의하면 조선통독부가 1921년 12월 1일부터 좌측통행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2009년까지 90여년 간 한국은 좌측보행을 해왔다. 당시 소방대원이 부른 ‘교통선전가’에는 “행보는 문명인의 거동, 좌측통행은 그의 표징...”이라고 되어 있다 (강준만 2008).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두고 문명인 어쩌구 하는 것이 재미있다. 90년이 지나도 정신줄이 똑같으니 말이다. 조선총독부나 (독도 문제 등으로) 친일 딱지를 떼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나  지독하게도 일관성이 있으니 말이다.

걸어가는 방향이 왼쪽이 좋은지 오른쪽이 좋은지는 사람들의 생활 습성에 달린 문제다. 자동차가 많은 사회라면 자동차 운전방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문명과 야만을 결정짓는다면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정말 그러하다면 반대편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죄다 잡아다가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야만인처럼 길거리에서 벌거벗고 다니고, 머리끄댕이 잡고 쌈박질을 해대고, 아무데서나 먹고 자고 볼일을 보는 등의 행위를 용납하는 문명국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캐나다·일본에서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고 처벌받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우측보행이 문명인의 거동이라는 것일까? 한국은 90년 동안 야만국이었고, 2010년부터 드디어 문명국으로 개화되었다는 소리인가? 그럼 좌측보행을 하는 일본(이명박 정부의 선전문구는 거짓이다)은 아직도 야만국이라는 소리인가? 당장이라도 눈과 귀를 깨끗이 씻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핵심은 왼쪽·오른쪽이 아니다. 문명·야만도 아니다. 물론 국민의 편리와 안전도 아니다. 그저 정부와 공무원의 완장질일 뿐이다. 有爲이다. 백성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찾아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방침을 정해놓고 이것 저것을 동원하여 정당화를 시킨다. 조현오 경찰권력이 벌인 “삼색신호등” 소동에서 보듯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별 상관하지 않는다. 구호를 만들고 표어를 붙이고 어깨띠를 두른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문명을 거부하는 야만인이나 정부를 뒤엎으려는 빨갱이로 몰아 압박한다. 그리고 무슨 비판이 있어도 강제로 밀어붙인다. 실제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전한지, 얼마나 편리한지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다.  

아마도 권력자와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모든 국민들이 줄지어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 할 것이다. 완장질하는 그 짜릿한 ‘손맛’을 어찌 잊을 것인가. 호루라기를 불거나 깃발을 흔드는 대로 사람들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는 그런 마법을 말이다. 하지만 유치한 것으로 치면 교실서 떠든 동무 이름을 칠판에 적는 줄반장의 완장질과 매한가지일 뿐이다.   

이런 有爲가 백성을 화나게 한다. 백성을 보살피는 행정이 아니라 권력자와 공무원 스스로 즐기는 자위自慰일 뿐이다. 백성을 무지하고 어리석은 철딱서니로 취급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뭉개는 행위다. 구호나 표어나 어깨띠로 백성을 줄세우고 훈계한다.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아니라 어용御用 언론이나 조직을 동원하여 백성을 들볶는다. 원래 취지와 무관하게 백성을 노엽게 한다. 북한 인권문제는 북한인권법을 만들면 되고, 테러가 걱정되면 테러방지법을 만들면 된다는 정신줄이다. 세상 참 편하게 사는 인간들이다. 내가 뒷간 소변기 만듦새를 無爲처럼 귀하게 살펴본 이유가 있다.      


참고문헌


강준만. 2008.『한국근대사 산책 7: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인물과 사상사.



원문: 박헌명. 2016. 뒷간 만듦새, 우측보행, 그리고 무위 행정. <최소주의행정학> 1(3): 2.



테러 의심만으로도 국가정보원이 제멋대로 (법원의 영장없이 자의恣意로) 국민을 감청하고 금융계좌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 2016년 2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입법부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이 법안에 합의를 보지 못하고 행정부에서는 박근혜씨가 법안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책상을 내리친 가운데 국회의장 정의화씨가 북한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발사 등을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고 규정하고 법안을 직권상정하였다. 이에 야당의원들이 반발하여 국회법 제 106조 2에 근거하여 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 무제한 토론을 며칠째 진행하고 있다.

이 무제한 토론은 지난 수십 년 간 벌어진 법안 날치기와 이를 둘러싼 폭력을 막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다수당의 횡포를 소수당이 폭력이 아닌 말로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를 보장하여 주먹질 대신에 말로 다투도록 한다는 점이다. 법안을 반대해야만 하는 애절함이 있으면 주먹이 아닌 말로 약자(소수당)의 원망을 풀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문영 (1980: 357; 1986: 290; 2001: 187)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때리지 말고 말로 합시다’라는 세간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Leiter (2010)는 John Stuart Mill의 논리를 빌어 말할 자유의 가치를 논구하였다. Mill에 의하면 인간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언제든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허용해야 하며, 우리가 진리 전체가 아닌 부분을 가지고 있는 한 다른 의견을 접해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진리 전체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 만큼 자신있게 다른 의견 (설령 완전히 틀린 의견이라 하더라도)에 맞서야 한다 (Leiter 2010: 164). 요컨대, 말할 자유는 불완전한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 무제한 토론은 이러한 명제에 부합하는 제도이다.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 (이문영 2001: 246).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야당의원들의 무제한 토론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다.

비폭력과 말

이문영 (1986: 290; 1991: 322; 1996: 404; 2001: 105)은 평소에 비폭력을 설명하면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임 역설하였다. 이문영 (1991)은 “때리는 것인 폭력의 반대는 매를 맞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지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118쪽). 상대방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매를 맞으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비폭력과 말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통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문영 1980: 6; 이문영 1991: 30, 118).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억압하고 때려서 일을 한다 (이문영 1986: 242). “때리지 않고 말로 하는 사회가 민주사회이다” (이문영 1991: 317). 말은 토론을 통해 약속(합의)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계약이 되고 법이 된다 (이문영 1980: 357). 비폭력은 (1) 약자를 일단 보호하고, (2) 약자를 성장시킨다 (이문영 1991:18-19). 어차피 약자는 약해서 강자에게 쓸 폭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먹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문영 2001: 148). 그렇지 않으면 약자는 더 센 폭력과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주먹이 아닌 머리를 쓰는 일이 바로 비폭력이고 말이다. 이 비폭력이 약자가 강자의 폭력을 극복하고 끝내는 평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무기이다 (이문영 1986: 297-298). 또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성질(도덕성)이기도 하다 (Park 2015: 292). 그러면 도대체 그 ‘말’이란 무엇인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은 너무나 옳고 지당至當해서 상대방조차도 그의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6, 80, 491, 497). 상식과 규칙에 비추어 올바른 말이며 진리이다 (이문영 1986: 242; 이문영 1991: 351). 군더더기 없이 “말할 것만 말하는 것”이다 (이문영 1991: 18). 그래서 진리의 반대어는 비진리나 허위가 아니라 바로 폭력이며, 말의 반대어는 침묵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문영 2001: 187, 189). 또한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와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말이어야 하며 (이문영 2008: 150, 491), 말을 하되 말만을  해야 한다 (이문영 1996: 56). 비폭력은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이며 (이문영 2008: 65), 그 비폭력이 말이고 최소한의 발언이다 (이문영 1996: 56). 즉, 비폭력=말=진리=최소라고 할 수 있다. 소정 선생님의 최소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모두 ‘말’이 아니다. 이문영 (2001)은 예수의 비폭력 저항을 설명하면서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님을 상황은 보여준다” (246쪽)고 적었다. ‘말폭력’도 폭력이라는 뜻이다. 또 비폭력은 완전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이문영 2008: 59).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언어, 감정, 심리 등과 같은 ‘불완전한 비폭력’도 폭력이다. 강자의 폭력에 약자가 어설픈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자의 폭력이 가혹할수록 약자는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완전한 비폭력에 의지해야 한다 (이문영 1986: 289, 298). 군더더기나 감정 발산을 피해야 한다. 꼭 필요한 실존 발언만을 최소로 해야 한다. (이문영 1996: 56).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목소리를 가다듬고 교과서를 읽듯이 개인 감정을 걷어내고 말해야 한다 (Park 2015: 290).

말이 아닌 ‘말폭력’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말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갑질’로 표현되는 불공정과 강자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말폭력에 내성耐性이 생겨서인지 이제는 어지간한 언사는 폭력으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점점 더 오감을 자극하도록 말폭력은 거칠어지고 흉포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공직자와 정치인이 즐겨쓰는 말법에서 두드러진다. 주먹질은 무대 뒤로 감춰지고 ‘말두겁’을 쓴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간의 합리성을 살리고 지혜를 모으려는 대화와 토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당장 너를 짓밟아야만 내가 산다는 그런 정신줄에 사로잡혀 있다. 생사 기로에서 무슨 수를 쓰든 피난열차에 올라타야 하는 피난민 정신줄이다.

무제한 토론을 하는 중에 말을 못하게 하거나 훼방놓는 언사言辭는 폭행에 가까운 말이다. 테러방지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면서 윽박지르고, 반대편을 국가 안보와 안전을 내팽개친 무책임한 세력으로 매도罵倒하는 것은 말이 아닌 폭력이다. 상대방의 의견이 완전히 틀렸다 해도 당당하게 맞서라는 Mill의 지적을 무색케 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고 믿고 있다 해도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傲慢일 뿐이다. 무제한 토론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최소한의 실존 발언으로) 끝까지 상대방의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노여운 감정을 흘린다면 이것 역시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다.

좀 더 야만스런 말폭력도 종종 경험한다. 예컨대, “오세훈은 산소같은 후보이고 한명숙은 연탄가스 같은 후보”라고 말하고 “안상수는 1급수이고 송영길은 5급수”라고 외쳐댄다. 아마도 간단명료하게 의미전달을 하려는 선거전략일는지는 모르지만 밑도 끝도 없이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저주하는 짓이다. 말두겁을 쓴 파렴치한 폭력행위다.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빨갱이가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빨갱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빨갱이칠을 해놓고 돌팔매질을 할 뿐이다. 이쯤되면 대화니 토론이니 합리성이니를 따질 판이 아니다.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산다는 생존전쟁에서 패거리를 나누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할 뿐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연탄가스가 되고 5급수가 되어버린 상대방과 그 식구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참으로 천박하고 비열한 말폭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화는 커녕 최소한의 인간존엄성마저 해치는 짓이다. 이런 야만스러운 말폭력은 비단 피아간 경쟁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2월 10일 이승준 기자가 요약한 김종인씨의 기자간담회 발언을 보자. “안철수 대표가 말하는 공정성장론과 김 위원장이 말하는 포용적 성장론은 어떤 차이가 있나?”는 질문에 대해 김종인씨는 이렇게 답한다.

“안 대표의 공정성장론은 시장의 정의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정의만 갖고 경제문제 해결이 안된다. 시장정의, 사회정의 조화를 맞춰야 하는데, 그게 포용적 성장이다. 그 사람(안철수)은 경제를 몰라서 누가 용어를 가르쳐 주니까 공정성장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하고 많이 이야기해봐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샌더스라고 했다고 했다가, 자기가 스티브 잡스라고 했다가 왔다갔다, 그 사람이 정직하지를 않다. … 그럴 수도 있다. (안철수는) 시장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를 구분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의사하다가 백신 하나 개발했는데 경제를 잘 아나, 적당히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른바 배울 것 다 배우고 알 것 다 알 만한 사람의 언사로 믿기 어렵다. “경제를 몰라서 누가 용어를 가르쳐 주니까,” “…구분지을 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정직하지를 않다,” “의사하다가 백신 하나 개발했는데…” 등은 사실여부와는 별개로 말하는 자의 품격을 의심케 한다. 공당公黨의 우두머리의 입에서 나온 언사가 저자 거리의 거간꾼이나 건달의 말법을 닮아 있으니 말이다. 어찌 그리 쉽게 상대 정당의 수장을 깔아뭉개는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오랜 정적도 아니고 얼마전까지도 ‘멘토’(무슨 뜻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지는 모르겠으나)였다는 사람이 아닌가? 여당과 각을 세운다는 면에서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은 김종인씨가 안철수씨에게 ‘직격탄’을 날렸다고 흔히 말한다. 얼마나 말폭력에 시달렸으면 이젠 말폭력으로도 부족해 말폭탄을 쐈다고 표현한단 말인가? 말 그대로 상대방 가슴팍에 ‘직격탄’ 을 박아넣어 말로 피와 살을 한방에 날려버리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치도 않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하다. 말폭력의 당사자와 희생자는 물론이려니와 방송과 신문에서조차 그 뜻을 깊이 생각치 않고 으레 그러려니 하고 있다.

왜 꼭 이렇게 남을 깎아내리고 짓밟아야 하는가? 의사는 경제를 알면 안되는가?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경제이론을 알아야 하는가? 경제학 박사는 쿠데타 세력을 편들고 여야를 왔다갔다 해도 되지만, 의사는 기업을 크게 일구었어도 경제를 말하거나 정치를 하면 안되는가? 얘기해 보면 사람을 그리 잘 안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그토록 허무하게 박근혜씨에게 버림을 받았단 말인가? 사실관계는 물론 논리도 품격도 없는 ‘말구정물’을 입에서 뿜어낼 뿐이다. 상대방만 구정물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구경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구역질나는 ‘말구정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워 침뱉기다. 생각없이 허공으로 날려버린 ‘직격탄’이 제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도망갈 틈도 없이 피아 구분없이 뼈는 산산조각나고 피와 살은 터지고 찢겨 사방에 흩어진다. 어이없는 자폭自爆이다. 이런 판에 대화, 토론, 약속, 합의, 합리성이 자리할 틈은 없다.

모두 폭행에 가까운 부적절한 언사이다. 지나치고 불필요한 얘기다. 최소주의에서 요구하는 실존적이고 간절한 말이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생각없이 내뱉어서 쓸데없는 불란만 자초하는 말폭력일 뿐이다. 말두겁을 쓴 폭력에는 사람은 없고 처절한 피아만 있다. 사실과 논리는 없고 매도와 저주만 있다. 약속은 없고 배신만 있다. 상식은 없고 광기만 있다. 원칙과 합리성은 없고 제멋대로만 남아 있다. 상대방의 이성이 차마 거부하지 못하는 그런 지당한 말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니 설령 지적한 것 모두가 맞다고 해도  상대방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 말본새가 싫어서 원망과 적의만 품을 것이다. 결국 대화를 열고 토론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묻지마 말전쟁’을 시작하는 일이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기만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라

이렇게 ‘말폭격’을 해놓고 이성에 근거한 토론과 합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솥밥을 먹었던 동지가 아니었던가?『 論語 』<衛靈公>편에 ‘스스로 책망하기를 후하게 하고, 타인을 적게 질책하면 원망이 멀어진다’(躬自厚而薄責於人則遠怨矣)고 했다. 이 문구를 인용하며 이문영 (1996: 429)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개인윤리이다. 남을 폄하하거나 남의 실수를 악용하여 그 위에 올라서기보다는 자신을 잘 갈고 다듬어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야만이 아닌 문명을 지향하는 한 상대방과 대화하고 토론하여 합의를 이끄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자기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적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말전쟁’으로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먹질을 포기했으면 폭력과 같은 말을 피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 서로를 상처내지 않으려는 최소 조건이자 비폭력이다. 인간의 자랑인 언어능력을 최대로 살려 사실에 근거한 논리로 말을 해야 한다. 적이 들어도 도저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공손히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이 약속을 만들고 규칙과 법이 되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 특히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이런 비폭력과 말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한다. 이제 그만 끝 간데 없는 ‘말폭력’ 전쟁을 끝내고 서로의 지혜를 모으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화와 토론을 시작했으면 한다.

참고문헌

Leiter, Brian. 2010. Cleaning cyber-cesspools: Google and free speech In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edited by Saul X. Levmore and Nussbaum, Martha Craven, 155-173.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무제한 토론 제도와 말이 아닌 말폭력. <최소주의행정학> 1(2): 1-2.

얼마 전에 딸아이의 여권을 신청하러 구청에 갔다가 어이없는 일을 경험했다. 사진과 여권신청서를 담당직원에게 건네주고 기다렸다. 직원이 신청서를 살펴보더니 영문 이름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에서 공문이 왔다면서 영문 이름에 빈칸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황당하다가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직원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 어찌 그런 공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정부가 영문 이름을 쓰는 것까지 간섭을 한단 말인가? 백성이 ‘누려야 할 최소한’을 빼앗긴 노여움이 고인다. 미처 분을 삭이기도 전에 거친 숨이 나온다. 정말 그런 지시가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름을 붙이라 말라 한다는 것인가, 이름자를 붙여도 발음하는데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지시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등을 토해냈다. 외국에 방문할 기회가 많은 외교부 직원들이 나라마다 이름을 쓰는 관습이 다른 것을 잘 알텐데 어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탄식했다. 혼자말로 구시렁거리는 독백이었지만, 사실상 담당 직원에 대한 항의이자 외교부에 대한 시위에 가까왔다.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담당직원은 다시 한번 외무부의 지시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럼 나같이 영문 이름을 떼어 쓴 사람은 어찌하느냐고 물으니, 이미 여권을 만든 사람은 현재 쓰고 있는 영문 이름 그대로 사용하면 된댄다. 새로 여권을 신청한 사람들만 붙여쓰게 한댄다. 당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이상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결정한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가 항의를 계속하자 담당직원은 법률용어를 들먹이며 이의신청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말한다. 또 내용을 확인하고 절차를 알려달라고 당부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반응하자 담당직원은 조금은 당황한 표정이다. 직원이 그리 얘기하면 시민들 대개는 툴툴거리면서도 알았다면서 대충 넘어갔으리라… 직원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처럼 여기 저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무언가를 찾는다. 몇분이 지나도 문서를 찾지 못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아무렇치도 않은 듯 내게 한마디를 한다.

“그러시면 오늘은 (특별히) 영문 이름에 빈칸을 넣게 해주겠습니다.”

나는 이 말에 충격을 받는다. 외무부의 공문 얘기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담당직원의 말은 차라리 참담하기까지 하다. 딸아이의 영문이름을 고치지 않고 신청서를 접수시키기는 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노여움을 삭이지 못했다. 이게 멀쩡한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소리란 말인가… 외교부가 영문 이름을 띄어 쓰는 것을 금지한 것이 맞다면 일단 그 지시대로 시행하고 시민의 불만을 전달하여 잘못된 결정을 수정하는 것이 정상이다. 영문 이름에 빈 칸을 넣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애초부터 외교부의 공문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마치 특혜를 주듯 빈칸을 넣게 해주겠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이 대목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때 민주당 조순형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노무현씨가 사과하면 소추안을 취소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발의하겠다고 했다. 한심한 말법이다. 소추안을 발의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면 사과를 하든 말든 발의해야 한다. 국회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과하면 되는 사소한 사안이라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사과’나 ‘탄핵’이 아니라 그냥 노무현이 싫은 것이다. 결국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개인의 화풀이를 한 셈이다.

만일 영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이라면 그 취지 그대로를 설명하고 시민들의 선택을 도와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마치 자신이 외교부의 지시를 무시할 권능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특별히 혜택을 베푸는 것저럼 말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다. 이른바 ‘완장찬’ 자들의 기고만장이다. 시민 위에서 군림하면서 자신의 지시대로 시민들을 이리저리 줄세우고 훈계하는 맛에 취한 자들의 전형이다. 법과 절차를 핑계대지만, 사실은 법과 절차를 제멋대로 적용하여 이득(권력욕)을 취하려 할 뿐이다. 침묵하는 다수에게 엄하고 귀찮게 따지는 사람들에게 약하게 굴어 소위 ‘떼법’을 자초한다. 떼법은 백성의 난동이 아니라 정부의 편파와 부당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 ‘완장질’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공복인 공직자가 섬겨야 하는 왕(주권자)임을 망각한 정신줄이다.

외교부의 여권업무 웹집(http://www.passport.go.kr/)에는 “영문이름은 붙여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함” “종전 여권의 띄어 쓴 영문이름은 계속 쓰는 것을 허용함”이라고 되어 있다. 예상대로 구청 담당직원은 외교부 지시를 빙자하여 영문 이름을 붙여써야 한다는 식으로 시민을 호도한 것이다. 본래 취지를 살려 백성 편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가감하여 백성의 기본권(이름을 결정하는 자유)을 제한한 것이다. 누군가 직원의 말에 따라 영문 이름을 붙여서 여권을 만든 다음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항의를 한다면 (일단 이름을 정하면 수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직원은 틀림없이 자신은 이름을 붙이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 것이다.

그런데 일선 공무원의 ‘완장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정부가 무슨 권능으로 이름 쓰는 것을 “허용”을 하고 말고 한단 말인가. 이런 표현이 과연 민주공화국에서 가당하기나 한가? 왜 백성들이 이름쓰는 것을 정부에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류가 아니라면 갑돌이든 을순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옷입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자는 것도, 숨쉬는 것도 정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인권에 관한 문제를 감히 정부에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는 것인가? 실제 내용과는 별개로 그 발상이 식민지를 경영하는 총독의 정신줄이다. 식민지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짐승처럼 노예처럼 찍어눌러 다뤄야 하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외교부의 권고는 물론 이해할 만한 구석도 있다. 이름을 영문으로 띄어 쓰면 미국에서 첫째 이름자를 그들의 관습대로 가운데 이름 (middle name)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돌림자가 영미권의 가운데 이름과는 그 의미와 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발상에 동의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줄은 그 자체로 해괴하고 천박하다.

한번 이리 물어보자. 미국에서 영문이름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으면 그만인가? 미국에서만 괜찮으면 중국에서든 독일에서든 브라질에서든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여권의 목적이 미국에 방문하는 것인가? 각 나라마다 이름을 쓰는 방식이 다르고 관습이 다른 것은 상식인데, 대한민국 백성이 미국식에 맞춰야 하는 소이연은 무엇인가? 명색이 대한민국 외교부가 나서서 자국 백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면서까지 미국식을 권고하고, ‘완장질’을 통해 사실상 강요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외교와 군사면에서 미국의 식민지임을 자인하고 자주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도대체 영문 이름을 붙여 써서 이 나라 백성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 두 자를 영문으로 떼어 쓰면 미국의 어느 기관은 두 자 모두를 첫째 이름(first name)으로 제대로 불러주기도 하지만, 다른 기관은 가운데 이름과 첫째 이름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가운데 이름으로 인식한다 해도 약간의 혼동이 있을 뿐 실제 본인 확인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사실상 여권번호가 기본 인식정보이며, 성명과 생년월일은 참고사항이다. 비행기표에 이름자가 붙여나오지만 여권의 영문 이름을 떼어 쓸지, 이음표(-)를 쓸지와는 관계가 없다. 이름의 철자가 틀리지 않는 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영문 이름을 붙여쓴다 해도 백성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다. 단지 가운데 이름으로 오인할 가능성과 혼동을 줄일 수 있다는 미국의 실익이 있을 뿐이다. 왜 대한민국 외교부는 백성의 실익이 아닌 미국의 실익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모든 나라가 미국식 이름 법과 관습을 따른다면 외교부의 권고는 나름대로 합리성과 실익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미국식은 모든 나라에서 인정하는 세계 표준이 아니다. 다 그 나라 나름의 방법과 관습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성이 한 자, 이름이 두 자가 대부분이지만, 성이 두 자인 사람도 있고 이름이 외자거나 석 자인 사람도 있다. 외국에서 성이 두 단어로 되어 있는 경우나 이름이 세 단어 이상인 경우도 적잖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아예 성명이 단어 하나로 되어 있다. 성과 이름을 구분하지 않아 성이 이름이고 이름이 성이다. 더 황당하게는 성명이 몇 단어로 되어 있는데, 역시 성과 이름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첫째 이름, 가운데 이름, 마지막 이름(family name)을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죄다 엉터리 이름이라며 힐난하며 근본없는 상놈이라며 돌팔매라도 던지려는가?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지 않는 독선주의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야박하게 굴고, 센놈에게는 간 쓸개를 다 내어주고 비굴하게 목숨줄을 구걸하는 사대주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행인을 데려와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크면 망치로 행인을 자르고, 작으면 행인을 늘려뜨리는 패악질을 했다. 그는 테세우스(Theseus)에게 잡혀서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침대에 맞춰져서 죽었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공직자들이 바로 프로크루스테스일는지 모른다. 영문 이름에 관한 지침을 결정한 자도, ‘완장질’로 시민을 호도한 일선 공무원도 그 정신줄은 매한가지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의적인 잣대를 백성들에게 들이대고 길네 짧네 하면서 훈계질만 할 뿐이다.

이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는 주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국학술진흥재단에 신고해야 한다. 학생들이 외국에서 공부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없으면서 힘들게 박사학위과정을 마친 것을 신고하라 강요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이다. 또 신고를 안하면 벌금을 물고 국내 대학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해놓았다(지원서류로 신고필증을 제출하도록 함).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신고를 할 수가 없다. 오직 마이크로소프트 고객만 외국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소린가? 또한 지도교수의 성함을 제대로 입력할 수가 없다. 지도교수가 모두 한국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함에 들어있는 모든 빈칸을 삭제하여 붙여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대학 이름이든 전공이든 수백 개는 됨직한  펼쳐내림 메뉴에서 골라야 한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대학이나 전공은 입력할 수가 없다. 세계수준의 정보기술기관에서 수년간 일한 사람이 하루종일 용을 써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외국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이라니…

시스템 분석과 설계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의 폭력일 뿐이다. 어찌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서비스를 제한하고, 외국박사학위를 관리한다면서 외국인 지도교수 성함을 제대로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대학이나 전공 이름도 그냥 적도록 할 일이지 어찌하여 완전하지도 않은 그 긴 목록을 헤매도록 한단 말인가(이런 무모한 시도를 했다는 자체가 놀랍다). 결국 신정아같은 사람은 가짜 학위를 신고하고 교수가 되었는데, 멀쩡하게 학위를 받은 사람은 신고를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정부가 외국학위수여자를 관리한답시고 이런 제도를 만들었으나 가짜 학위를 분별해낼 능력도 없는 형편이니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질’을 할 수밖에 없다. 그저 관료들 머리에 든 것(마이크로소프트, 한국이름, 자신이 아는 대학과 전공이름이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확신하고)을 잣대랍시고 들이대고 있으니 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쓰지 않는다고 팔다리를 핏줄이 터지도록 당겨대고, 목록에 없는 전공을 공부한다고 얼굴을 찍어내고 있다. 이런 엉망인 시스템을 사용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멋드러진 웹집에 수여국별, 학교별, 전공별 학위를 보여줘 봤자 가짜와 진짜를 모르는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민주공화국은 백성의 돈으로 운영되며 백성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흔히 공복이라고 부르는 공직자는 주인을 섬기는 머슴이지, 주인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아 ‘완장질’을 하면서 세경이나 챙기는 건달이 아니다. 게으르고 주인을 우습게 보는 머슴의 말로는 멍석말이다. 주인의 자존과 고유함을 내팽개치고 누구든 힘센 자에게 맹종하는 사대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법과 상식에 기대지 않고 약자에게 혹독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재량 남용도 경계되어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억지로 백성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심을 다해 공직자 스스로를 백성에게 맞추어야 한다. 다양한 백성이 살고 있듯이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최소주의, 비폭력, 민주주의가 아닐까?


원문: 박헌명. 2016. 공직자의 완장질과 Procrustes의 침대.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