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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국민과의 대화? 대통령과의 대화? 본문

말버릇 글버릇

국민과의 대화? 대통령과의 대화?

못골 2019. 4. 11. 14:16
문재인씨가 지난 17일 대통령 취임 100일을 기념하여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했다. 설레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고, 또 흐뭇하기도 했다. 높은 지지율에 걸맞는 그런 회견을 해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조바심에 가까왔다.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솔하게 말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대화에 굶주리고 목말랐던 국민들의 마음이리라. 회견이 끝난 뒤 답답했던 속이 풀린 듯한 시원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럼 이명박근혜가 문재인보다 잘했니?


문재인씨의 기자회견을 두고 역시 여야의 평이 갈렸다.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이념과 처지를 언급한 수준이다. 지도자가 레드라인을 밝힌 것이 적절하지 않았다느니, 원론 수준에 머물렀다느니, 시간이 부족했다느니 등은 점잖은 편이었다. ‘이명박근혜’를 배출했던 야당의 반응은 알맹이가 없는 억지 자화자찬이라느니,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느니, 여전히 ‘쇼통’이라며 깎아내렸다. 사실과 무관하게 기자회견이 반드시 잘못되어야 한다는 신앙에 가까운 소망이리라. 만일 똑같은 잣대로 이명박근혜의 기자회견을 평했다면 그들은 무어라 말했을까?  

지난 9년 동안 청와대는 대답없는 구중궁궐이었다. 박근혜씨는 취임 13개월만에 첫번째 기자회견(2014.1.6)을 가졌다. 대부분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왔다. 일방적으로 국민들을 지시하고 가르치고 윽박지르고 야단쳤다. 국민들이 묻는 것을 가로막거나 모른 체 하거나 그저 침묵했다. 속이 찔리는 의혹 제기는 근거없는 유언비어, 괴담, 음모, 소설, 선동으로 매도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찍어눌렀다.

2008년 ‘광우병 파동’때 이명박씨는 촛불시위를 내려다 보고 반성했다지만 뒤에서는 시위대를 보복하고 여론조작을 시도했다. 2010년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면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고 몰아붙였지만 공론과정도 없는 ‘노무현 흔적 지우기’로 끝나며 체면만 구겼다 (수정안이 부결된 후 반성도 없이 태연하게 나라를 거덜낸다던 원안을 추진했다). 2014년 300여명의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속으로 가라앉던 시간에 박근혜씨가 어찌 했는지 아직까지 속시원히 답하지 않았다. 2016년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사과랍시고 대국민담화를 세 번씩이나 했지만 매번 국민들을 불질러 광장의 촛불로 타오르게 했다. 국민이 알고 싶은 것에 답하지 않고 그들이 알리고 싶은 것만 여과없이 쏟아냈다.

상대방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條理있게 말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과연 언어능력을 가진 인간이란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을까? 인간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세월이었다. 최소한 지도자는 유권자와 자유롭고 효과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민과의 대화’와 ‘대통령과의 대화’

나는 문득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열렸던 ‘국민과의 대화’와 이명박 정부에서 두 차례 열렸던 ‘대통령과의 대화’ (2008.9.9과 2009.11.27)를 생각한다. 단순히 행사 제목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화자의 생각과 국민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과의 대화’는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다가가서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해소시켜주는 것으로 국민에게 방점이 있다. 1998년 1월 18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국민과의 대화’를 시작한 김대중씨는 독특한 해학과 구수한 말법으로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노무현씨는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2003.3.9), 언론인과의 대화(2007.6.17), 심지어는 TBS를 통해 일본 국민과의 대화(2003.6.8)까지 시도했을 만큼 듣고 말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두 대통령은 방식은 달랐지만 그 누구보다도 대중에게 말하고 글쓰는 일에 사명감과 열정과 재능을 보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강원국 2014; 윤태영 2016). 두 사람은 탁월한 문장가였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다(강원국 2014).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말하기에 대해 노무현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윤태영 2016: 5-7).  

“말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다. 그런데 말만 잘하고 일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 민주주의의 핵심은 설득의 정치이다. 그래서 ‘말’은 민주정치에서 필수적이다. ...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결국 말은 지적 능력의 표현이다. ... 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국민들이 지도자를 초청하여 의견을 듣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불러다가 묻고 따지는 것이다. 2003년 일본 TBS에서 노무현씨를 초청하여 진행한 프로그램 제목은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韓國盧武鉉大統領 本音で直接對話)’였다. 취임 4주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화(2007.2.27)는 주요 신문사나 방송사가 아닌 인터넷신문협회가 마련하였고 정치평론가나 교수가 아닌 연예인 김미화씨가 진행하였다. 반면에 1988년 전두환 노태우를 5공화국 청문회에 불러내 내란, 학살, 비리 등을 추궁追窮한 일은 후자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청와대가 주체가 되어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였고, 지도자가  방송에 나와 대본대로 ‘연기’를 하였다. 질문지가 사전에 유출되었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들 했다. 이명박근혜의 말하기, 시선, 표정은 그들이 뱉어내는 연설과 답변 내용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국민이나 민간 단체가 아니라 대통령(청와대)이 스스로 ‘대통령과의 대화’를 한 것이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이런 ‘대통령과의 대화’는 방점이 국민이 아닌 지도자에게 있다. 궁궐에 몰려가 임금을 알현謁見케 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백성을 불쌍하게 여겨 큰 맘먹고 존귀한 용안龍顔을 보여주는 성군의 풍모라고나 할까. ‘대통령과의 대화’는 사실상 ‘어쩌다 성은聖恩을 입어 임금을 알현하고 납작 엎드려서 어지御旨를 어성御聲으로 경청하는 일’에 불과했다.

바람직한 공화국의 지도자상

바람직한 국가지도자의 모습은 시대를 반영한다. 왕조에서 원하는 임금의 자질과 품격은 공화국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소위 성군聖君이라는 군주 이념형(ideal type)은 품성이 어질고 덕이 뛰어나며 학문을 닦아 국정을 잘 돌보는 왕이다. 나라의 주인이자 나라 그 자체인 군주가 소유물의 일부인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한다. 맹자가 말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은 책임과 의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군주가 백성에게 베푸는 시혜施惠다. 하지만 공화국에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지도자는 국민을 대신해서 국정을 이끌어갈 뿐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주인인 국민의 질문에 답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기본은 해줘야 한다. 그 기본은 헌법과 법률과 상식을 어기지 않고 유권자의 요구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업무시간에 ‘여성의 사생활’을 운운하는 것은 공화국에서 용납될 수 없다.  

대한민국이 공화국이 아니라 왕조였다면 아마도 노무현씨가 용상龍床에서 쫓겨날 확률이 제일 높았을 것이다. 수구언론이 그려낸 모습을 보면 (예컨대,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발언은 맥락없이 단장취의斷章取義한 왜곡보도다), 미천한 출신인데다가 언행에서 군주의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시민들은 그런 자연스럽고 사람냄새 풍기는 노무현식 말법에 환호했지만 왕조의 백성들은 쌍스럽고 천박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노무현씨를 탄핵소추했듯이 터무니없는 명분이라도 내세워 무조건 왕을 끌어내리려 작당을 했을 것이다. 노무현씨는 조선왕조로 치자면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서 왜군과 싸웠고 서자로서 왕위에 올라 전후복구에 힘쓰다가 북인과 함께 몰락한 광해군에 비견된다. 대통령 후보시절 천덕꾸러기로 당내외에서 따돌림을 받다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등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수구세력의 파죽공세에 밀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두번째로 가능성이 큰 경우는 ‘환관정치’로 국정을 마비시키고 백성들을 위기에 몰아넣은 박근혜씨일 것이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괴駭怪한 짓을 벌이다 쫓겨난 연산군처럼 박씨도 끝까지 아빠의 바짓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최순실, 문고리 삼인방, 김기춘, 우병우 등과 함께 엽기 변태 행각을 벌이다가 탄핵을 당한 것이다. 이명박씨는 공과 사, 옳고 그름, 일의 선후를 분별하지 못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용산 철거민 참사, 세종시 수정안 파동, 4대강 사업 등을 벌여 나라를 파탄지경에 몰고 갔다. 조선왕조 최초로 서자출신의 왕이라는 열등감과 이순신에 대한 어리석은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은 선조처럼, 이명박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감으로 ‘Anything But Rho’ (노무현만 아니면 뭐든 좋다)를 외치면서 삽질만 해댔다. 백성들이 따르는 이순신을 중용하고 국민들이 좋아하는 노무현에게 시비걸지 않는 일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마지막으로 김대중씨는 탁월한 정치력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했지만 자식문제로 고통을 겪은 영조에 비견된다.

아마도 대한민국이 분권과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동작한 공화국이었다면 박근혜씨가 제일 먼저 쫓겨났을 것이고 이명박씨가 그 뒤를 이었을 것이다. 공화국의 근간인 헌법과 법률을 제멋대로 흔들면서 민의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서 시작하여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세종시 건설에 딴죽을 치기 위해 이명박 정권이 얼마나 많은 꼼수를 부렸던가. 특히 박근혜씨는 최순실씨를 끌어들어 국정을 농단한 것이 결정적으로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근혜 정권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정적을 탄압하고, 총선과 대선에 개입하였다. 그래서 9년 동안 공화국이 정상으로 동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백성의 입을 닫게 하고 백성의 요구에 답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말만을 쏟아내는 짓은 왕조에서라면 몰라도 공화국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머슴이 일을 하다가 실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유권자를 업신여기고 국민의 명령을 듣지 않는 지도자는 당장 쫓아내야 한다.

수구 정당의 만성 부적응증

이명박근혜와 그들을 배출한 야당은 현재 공화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줄은 아직도 왕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나섰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약같은 ‘빨갱이 놀음’을 끊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도 박근혜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에게 박근혜는 순진무구한 공주이자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박정희를 잇는 성군이고, 감히 임금을 모함하여 끌어내린 ‘종북좌빨’들은 척살해야 할 대역죄인이다.

박근혜씨 탄핵에 9할이 넘는 국민이 찬성을 했고 5푼 정도만 반대를 했다. 현재 여당의 평균 지지율이 5할이 넘는 가운데 8할의 국민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구세력은 탄핵이 잘못되었고, 적폐청산에 음모가 있고, 부동산 대책은 부질없고, 청와대가 ‘협치’를 걷어차고 ‘쇼’만 한다고 쏘아댔다. 여전히 다른 시대, 다른 별나라에 있는 정신줄이다. 그들의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돼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 돼지인 것을 어쩌겠는가?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벌써 70년인데도, 바뀐 정치와 사회와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적응증이다.

‘국민과의 대화’가 좋은 까닭

문재인씨의 기자회견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부족했거나 아쉬운 대목도 있다. 문재인씨는 김대중씨보다 부드럽지 못했고, 노무현씨만큼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상도 발음에 눌변이지만 차분하고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 9년 동안 목말라했던 갈증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유권자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지도자가 성실하게 답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갈망했지 않은가. 최소한 누가 무엇을 어느 순서로 질문할 것인지를 미리 짜지 않고, 누가 써준 대본이나 수첩을 뜻도 모른 채 주절주절 읽지 않은 것만 해도 큰 변화다. 군대라도 동원해서 세종시 건설을 막겠다는 식의 막말이 사라지고 ‘박근혜 번역기’를 돌리지 않고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해도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까?

이런 ‘국민과의 대화’가 민주주의와 민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왕조 정신줄에서나 가능한 일방통행식 ‘대통령과의 대화’가 아니라서 좋다. 서로 눈을 맞추고 뜻을 나누는 대화라서 나는 참으로 좋다.  

참고문헌

강원국. 2014. <대통령의 글쓰기>. 서울: 메디치미디어.

아이엠피터. 2016. ‘거침없이 불통’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2016. 1. 13. http://theimpeter.com/31649/?ckattempt=1

윤태영. 2016. <대통령의 말하기>. 경기도: 위즈덤하우스.


원문: 박헌명. 2017. 국민과의 대화? 대통령과의 대화? <최소주의행정학> 2(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