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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전쟁: 曺國의 고난과 祖國의 평화

2020. 9. 27. 12:37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달 14일 사임했다. 장관에 임명된 지 35일 만이다. 8월 9일 장관후보로 지명된 이후 수구세력들은 수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수구 야당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의혹공세에 집중하다가 9월 2일로 예정되었던 인사청문회를 무산시켰다. 조후보자는 당일 11시간 가까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여당과 야당은 우여곡절 끝에 6일 인사청문회를 열었고,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한 상태에서 문대통령은 9일 장관임명을 결정하였다. 이른바 “조국전쟁”이다.

“가족사기단”과 “가족인질극”

수구 야당은 반발하면서 조장관을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적법하게 임명된 장관을 장관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라고 우겼다. 제기된 의혹을 반복하여 물고 늘어지면서 국정감사는 “조국감사”가 되었다. 수구 언론도 조장관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고 검찰발 기사를 뿌려대고 있다. 검찰의 행보에 따라 국면이 요동치고 있다. 이젠 조장관 여식이 꼴지인 주제에 포르쉐를 타고 다녔고, 시험도 치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는 낭설은 벌써 고조선 시절의 얘기가 되었다. 약발이 다한 소재는 사실이든 아니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수구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파렴치한 “가족사기단”이라는 낙인이 판결문에 찍힌 느낌이다.

검찰은 조장관 식구들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까지 샅샅이 훑고 있다. 수구 세력의 고발에 따른 적법한 조사라고 했다. 인사청문회일정이 합의된 다음 날인 8월 27일 강제수사를 시작하여 정국을 흔들었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던 6일 밤에는 조장관 배우자를 조사없이 기소하였고, 16일부터는 여식女息과 자식子息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23일에는 11시간 동안 조장관 자택을 수색했다. 지금까지 백여 차례에 이르는 압수수색이 있었다. 수구 언론과 야당은 검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침내 조장관의 당질(9월 16일), 배우자(10월 24일), 동생(10월 31일)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이제 검찰의 칼날은 조장관을 향하고 있다.

이에 유시민씨는 유튜비 방송 <다스뵈이다>와 <알릴레오>에서 참전을 선언하면서 이 사건을 “가족인질극”이라고 규정했다.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조장관을 낙마시키기 위해 검찰이 조장관의 식구들을 잡아놓고 벌이는 인질극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털어도 조장관에게서 먼지가 나오지 않으니까 병약한 배우자를 앞세우고, 딸과 아들을 고졸로 만들겠다며 위협한다. 애초의 계산법으로는 검찰이 청와대에 불가 신호를 주면 문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고, 안되면 압수수색과 기소로 겁을 주면 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하고, 이것도 안되면 실력행사를 통해 대통령이 장관임명을 포기하도록 한다. 관련자를 구속기소하고 피의사실을 흘리면 여론을 흔들 수 있다. 지지율 하락을 이겨낼 장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문대통령과 조장관은 검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막힌 인간”들이었다. 웬만하면 다들 알아서 물러나고 자수하건만, 참으로 눈치도 요령도 없이 쇠심줄같이 질긴 자들아닌가. 그래서 사달이 난 것이다.

비록 장관이 사임을 했지만 검찰은 여기서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다. 사퇴하든 말든 목표는 조장관이기 때문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장관의 식구들이 “가족사기단”임을 증명해야 한다. 정경심씨를 구속한 뒤에도 수차례 불러야 하는 까닭이 있다. 사실보다 형식이다. 검찰 체면에 “모냥빠지는” 일은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4일 <뉴스공장>에 출연한 조민씨는 고졸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어머니가 검찰의 압박에 못이겨 자녀를 지키기 위해 허위자백을 할까봐 괴롭다고 했다. 현직 부장검사인 임은정씨는 조장관의 사임을 두고 “[검찰이]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라고 적었다. 하지만 가족인질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

검찰조사를 지켜보자면 의금부에서 무슨 대역죄인을 다루는 듯하다. 조장관 식구들이 저질렀다는 혐의는 진학(인턴쉽, 장학금, 논문저자),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문제다. 과연 최고 검사들이 달라붙어 두 달 넘게 조사할 사항인가? 학생이 인턴쉽을 하루 더하고 덜하고, 고등학생이 제 1저자가 되는지, 장학금이나 표창장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가 왜 이리 문제가 되는지, 또 왜 밝히기 어려운지. 컴퓨터를 잘 모른다는 정씨가 어떻게 포토샵으로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것인지. 대놓고 “스펙”을 권하는 그런 법제도를 만들어 활용해놓고 이제와서 전혀 몰랐던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 옳은 일인지. 수백 억이 왔다갔다 판에 기껏해봤자 30억도 안되는 돈을 가지고 기업을 주물렀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웅동학원의 “어르신”이 “애”로 취급하는 조장관이 이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인지. 불법을 저질렀다면 경중에 따라 벌을 받을 일이지만 검찰이 시퍼런 칼을 들고 밝히려는 혐의들은 초라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반면 세월호 침몰, 삼성의 경영권 승계, 신속처리안건 파동,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등에 대한 조사는 어찌하여 이리도 더디고 물러터진 것일까?

조장관에 대한 비난은 (1) 불법이나 탈법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이다. (2) 평소에 정의와 공정을 강조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던 사람이 뒤로는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게다가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의 몫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첫번째 비판은 과하지 않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불순하고 악랄하다. 붓다나 예수나 공자를 모셔와서 법무부장관을 시키자는 소린가? 언행일치를 못했다고 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수구세력의 일상화된 언행불일치는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진보세력에게는 가혹하게 도덕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합당한가? 또한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강자로 보고 비난하는 것은 착시錯視다. 정말 그랬다면 언론이든 야당이든 검찰이든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들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주물러 온 세력이 한순간에 해체되겠는가?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평등·공정·정의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수구세력의 교활한 계략에 놀아나는 순진함이다.

지난 8월 23일부터 서울대, 고대, 연대, 부산대에서 촛불집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불공정과 진상조사를 외쳤지만,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자신만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을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절한 불공정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대학가 집회는 그 자체로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다. 과학고, 외고, 자사고 학생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작 개혁되어야 할 적폐가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고 있으니... 주최자 논란도 있었지만 대학가 촛불집회가 500여명에 머물고 흥행에 실패한 까닭이다.

진영논리? 국론분열?

결국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적나라한 힘겨루기다. 친일반민족세력과 일반 백성의 가치 충돌이다. 조장관의 친구라는 진중권씨는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가지고 지금 미쳐버린 게 아닌가”라며 한탄했다. 참여연대의 김경율 회계사와 신문칼럼을 써온 서민 교수 역시 다들 진영논리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모두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강자의 힘에 당했던 피해의식이랄까, 도덕우월성에 대한 집착이랄까, 강박이랄까? 왜 그 가혹한 잣대를 조장관 식구들에게만 들이대는가? 자기 편에 가혹하고 남의 편에 관대한 것이 정의이고 진리인가? 옳든 그르든 무조건 권력자를 깎아내리고 비난해야 하는가? 어용御用을 피하고 지조를 지키는 일이니 멋져보이는가?

국론분열이라는 말도 음흉하다. 국론이 통일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수십, 수백만이 모인 검찰개혁 촛불집회와 천여 명이 모인 태극기집회를 찬반이 팽팽하다고 보는 자들의 궤변이라니... 어쨋든 나라가 시끄러우니 죄가 있든 없든 조국이 물러나고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어렵고, 돼지열병이 위험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지만, 어쨋든 결론은 조국사퇴다.

수구 야당은 장관후보로 지명되기 전부터 조장관을 벼르고 있었다. 조국을 주저앉히기 위해 조국이 사노맹이라고 헐뜯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평소 그가 “강남좌파”로서 사사건건 자신들을 (정의와 도덕성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또 가만놔뒀다가는 미래의 후환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시끄럽게 들쑤시고 다닌 것이다. 과도한 응징이다. 허망하게 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다. 나라가 어찌되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수구 야당도 언론도 검찰도 같은 편에 서서 적폐청산과 개혁을 흔들고 좌초시키고 있는 모양새다.

광화문에서는 수구 여당과 일부 기독교단이 주최하는 태극기집회가 벌어지고, 서초동과 여의도에서는 개싸움국민운동본부 주도로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수구 세력은 상대방이 사실을 외면하고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난하지만 자신의 진영논리는 말하지 않는다. 유시민씨는 진영이 나뉘어 서로 다투는 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본다. 단지 얼마나 정당하게 합리성으로 논리를 겨루는가를 따질 뿐이다.

사실 진영이 있다면 수구 기득권이지 나머지는 진영이랄 것도 없다. 지킬 것이 있으니 성을 쌓고 방책을 세워두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백성들은 그냥 순리와 상식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있다. 지킬 것이 없는 자들은 가진 자가 극도로 포악해질 때 서로 손을 잡고 떨쳐 일어날 뿐이다. 진영이 나뉘어져 있다면 그것은 가진 자가 포악하게 해먹었다는 증거다. 수구 세력들은 강고한 진영을 갖추고 있으면서 단결한 백성들을 진영논리라며 비난한다. 무조건 잇속을 지키자는 무논리가 생존과 정의를 쟁취하자는 논리를 비웃는 비열함이다. 끊임없이 의혹과 유언비어를 쏟아내어 백성을 이간질하는 자들의 음흉한 논리다.

“강남좌파”가 선택한 고난의 길

나는 조장관과 식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설명을 들어도 입학전형이든 사모펀드든 우회상장이든 와닿지 않는다. 만일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조장관은 애초에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두달 넘게 식구들이 무방비로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9월 2일 조후보자의 기자간담회를 대부분 지켜본 후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국은] 이른바 강남좌파라지만 충분히 현실을 치열하게 살았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여식의 진학이나 인턴이나 장학금 문제를 사과하긴 했지만 과한 비난이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놓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그런 수많은 일상의 조각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범죄사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검찰이 욕보겠다.”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법과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석 달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검찰수사는 이례적이며 지나치다. 수구 야당과 언론의 응원을 받으며 정예수사팀이 한 집안을 털었지만 정작 조장관에 대한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쯤되면 수사능력이 형편없었거나 애초부터 겨누었던 중대한 범죄사실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시민이나 김어준씨가 어렵지 않게 확인한 사실을 검찰이 아직도 뒤지고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검찰은 어떻게든 조장관을 넘어뜨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족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군가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공소권 없음”으로 깔끔하게 후퇴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매주 서초동과 여의도에 모여 촛불을 밝힌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다가는 자신도 조장관처럼 저렇게 대책없이 난도질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연민이자 분노다. 그래서 검찰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각성한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뜻은 자연인 “조국”을 좋아하고 그 배우자 정씨를 응원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려야 하는 기본권과 평범한 일상을 검찰의 횡포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그 마음이 하나 둘씩 모여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된 것이다.

의미있는 고난과 조국의 평화

수구세력은 왜 조국이 아니면 안되냐며 따진다. 쓸만한 인물이 그리도 없느냐고 힐난한다. 하지만 조국만 아니면 누구라도 괜찮다거나 왜 조국은 안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가족사기단”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사실은 검찰개혁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조국이 아니어도 누구든 사명감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속으로는 조국이 정말 개혁을 잘할 것같으니까, 그래서 나라가 잘 되는 끔찍한 결과가 나올까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주저앉히려는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문재인을 끌어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의미있는 고난을 통해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점이다(1991: 333; 2008: 101, 270). 박근혜 탄핵으로 강자의 폭력이 잠시 멈추었을뿐 백성들이 원하는 태평성대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개혁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조장관은 집안, 학력, 외모, 재산, 관운 등에서 “금수저”였지만 꽃길이 보장된 기득권편에 서지 않았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여 검찰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앞으로도 일가친척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의 자기희생으로 검찰개혁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정의와 인권이 세상의 원칙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曺國의 의미있는 고난이 祖國의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같이 읽기

  1.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2.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조국전쟁: 曺國의 고난과 祖國의 평화. <최소주의행정학> 4(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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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2020. 9. 27. 12:29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조국 전 민정수석이 지난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결사반대를 공언하고 나선 기득권 세력들은 한 달 넘게 자진사퇴를 압박했다. 수구언론은 조국 후보자의 배우자, 여식, 동생 내외, 웅동학원 등에 대한 신상털기 기사를 쏟아냈다. 여식이 포르쉐를 탄다거나 특별전형으로 진학을 했다는 헛소문을 보도했고, 심지어 어느 수구채널은 조국 후보자가 자택 아파트 주자창에 주차했음을 뉴스속보로 보도했다. 융단폭격같은 의혹제기에도 납득할 만한 사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구야당은 여론전에 몰입하면서 인사청문회를 질질끌었지만 결국 소문만 요란한 잔치가 되어버렸다. 조장관이 임명되자 그들은 해임건의, 국정조사, 특검을 들고 나왔다. 의혹을 반복하고 단식을 벌이고 삭발削髮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사생결단이다. 급기야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국회의원이 법절차에 따라 임명된 장관을 장관으로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를 고집하고 있다. 비열한 막말과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정신병이고 과대망상이라고 했다. 정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넘어서서 인간이란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과거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칼자루를 쥔 윤석열 검찰

결국 칼자루는 검찰이 쥐게 되었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조장관 식구들을 검찰에 고발하였고, 검찰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수십 곳을 압수수색하였다. 소환도 없이 청문회 중에 조후보의 부인을 기소하였다. 윤석열 총장을 적임자라고 옹호하였던 여당은 검찰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반발했고, 청문회에서 윤총장을 강하게 몰아붙이던 야당은 이제 검찰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둘러싼 검찰청, 법무부, 청와대, 여야의 힘겨루기가 얽히고 섥힌 모양새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단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되었다. 정치문제를 정치로 풀지 못하고 스스로 모가지를 검찰의 칼날에 맡기는 어리석음이여...

윤석열 검찰총장의 인생은 굴곡졌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안희정과 감금원을 구속했고, 2008년 BBK 특검에 참여하여 이명박을 무혐의로 처리했고, 이명박 정권에서 특수통 검사로 경력을 쌓았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를 밀어붙이다가 좌천되어 절치부심하던 중 2016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했다. 2017년 초에는 박근혜와 이재용을 구속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에는 DAS의 이명박을 잡아넣고, 올해 초 사법농단의 주범 양승태를 구속하였다. 지난 7월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윤총장은 2013년 국정감사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의 수사외압을 폭로하면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수차례 이어진 좌천인사 불이익과 모욕을 감내했다. 그래서 정권의 휘둘림에도 굴하지 않고 엄정하게 수사하는 강골검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그를 파격으로 중용한 까닭이다.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

소정 선생님은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다”라고 적었다(2008: 481).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소는 무엇일까? 예컨대, “성욕, 연애, 가정, 일용할 양식, 노동할 권리, 평화스러운 공동체” 등은 살아가는 누구나가 갖기를 바라는 최소이다(1986: 95). 일용할 양식은 배불리 먹을 만한 수준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다. 화려한 옷이 아니라 흉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옷이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의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일자리다. 감옥에 갖힌 자에게는 추운 날 더운 물 한 모금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다(2008: 303).

한계인은 “최소의 것을 빼앗긴 자”이거나 “최소를 가질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이다(1986: 96). 외압에도 불구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검사의 최소한을 차마 저버리지 못한 윤검사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96쪽). 그래서 “[최소를] 빼앗은 자를 미움으로만으로 대하지 못하는 인간의 품위”를 가질 수 있다. “최소에의 흠모를 존중시하는 이는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하여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다(96쪽).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는 최소를 빼앗은 자의 이기심에 굴종하지 않으며, 빼앗은 자를 미워하면서도 똑같이 물질을 탐하는 인간의 타락도 거부한다(96쪽). “빼앗는 이의 모습을 도저히 그의 원래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품격에 대한 외경”을 갖는다(97쪽). 한계인과 최소주의자의 인간주의이다.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의 길

윤총장이 억울하게 최소를 빼앗겨 본 사람이라면, 그 한계 상황을 온몸으로 버텨낸 최소주의자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첫째, 법에서 정한 기준과 절차를 철저하게 따른다. 윗사람의 권한남용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둘째, 지독하게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한다. 사람이나 조직에 충성하지 않고 헌법과 국민만 바라본다. 국민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로 말한다. 정치와 여론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세째, 약자의 인권을 저버리지 않는다. 최소마저 박탈당했던 자는 수구세력의 집단 매질에 내몰린 조장관 식구들을 긍휼한다. 인간 본연의 품격을 거부하지 못한다.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 피의사실을 흘리지 않고 최소한의 사생활은 지켜준다. 극악무도한 피의자라도 누려야할 최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째, 엄정한 수사에 집중할 뿐 유불리나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 조장관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오면 수구야당은 윤총장을 비난하고 특검카드를 들이밀 것이고 그 반대면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청와대로 몰려갈 자들이다. 여당은 그 반대일 것이다. 칼자루를 쥔 자의 마음이 흔들리면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베이기 십상이다. 윤 총장의 선택이 한계 상황을 겪은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이길 바란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최소주의행정학> 4(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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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2020. 9. 27. 12:26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조국 전 정무수석이 지난 달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수구 야당의 파상공세 속에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지금까지 관련기사가 무려 120여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황당한 수치다. 청문회를 앞두고 조후보자의 식구들과 관련된 압수수색이 전격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시시각각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고 입과 입을 거치면서 자가발전하고 있다. 애초에 제기된 조후보자 여식女息의 포르쉐나 특례입학이나 성적 문제는 벌써 갑오경장 시절 얘기가 되었다. 청문회 정국이 요동치고 점입가경이다.

고대생의 촛불집회가 불편하다

조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은 자신이 아닌 여식의 입학과 장학금 문제에 집중되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강남좌파”라는 조후보자의 언행이 다르다는 배신감이다. 특히 20대의 지지율이 흔들리면서 여당도 우려하고 있다. 지난 달 23일에는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촛불집회를 열어 항의했다. 부산대 학생들도 거들고 나섰다. 조후보자의 여식이 고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은 것이 입시부정이나 특혜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나는 촛불을 들고 고대 본관 앞을 도는 학생들의 행렬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미 3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과연 꼭 필요한 행동이었을까? 70-80년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선배들을 잇는 행동인가? 폭정에 시달리던 32년 전 고대 교수들이 목숨을 걸고 시국성명서를 낭독했던 그 자리 아닌가. 그 간절한 말이 사람들을 울려서 끝내는 6월 민주화운동으로 타오르게 했던 역사의 현장 아닌가.

소정의 최소주의에서 벗어난 촛불집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은 최소주의로 구현된다. “일단 그 날이 오면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행동”으로 “긴요한 최소행동”이다(1991: 25-26). 첫째, 정국이 극도로 무서울 때에 행동한다. 행동을 하면 힘센 자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대부분 몸을 사리는 상황이다. 둘째, 그래서 신중하게 행동방법을 결정한다. 참여자 간의 철저한 합의와 일반 시민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세째, 필연적으로 비폭력 방법을 취한다. 주먹이 아닌 말로 대응하되 지극히 옳은 말만 한다. 상대방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네째, 이말 저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않고 꼭 필요한 요구만 한다. 실존적 발언을 최소한으로 한다(1996: 56). 무섭지 않을 때는 아무나 나와서 인기를 끌 만한 발언을 난사하기 때문에 전투력이 분산된다. 마지막으로 행동을 통해 개인의 잇속을 차리지 않는다. 기분나빠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다칠 줄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뿐이다.

하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최소주의와 거리가 멀다. 첫째, 다칠까봐 몸을 움츠리는 무서운 때가 아니다. 집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거나 경찰에 잡혀갈 일이 없다. 오히려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주목받고 박수를 받을 일이다. 지난 달 29일 TBS <뉴스공장>에 출연한 유시민씨는 “근데 의사표현을 못하게 막고 있나요, 아니면 권력으로 이 문제제기를 틀어막고 있나요? 여론은 압도적으로 조국에게 불리하고, 언론은 대통령에게 비판적이고, 언론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기사들을 쏟아내서 조국을 공격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될 때, 이것을 비판하면 불이익이 우려될 때, 익명으로 신분을 감추고 투쟁을 하거나 마스크를 쓰거나 그러는 거지. 지금 조국 욕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해서 누가 불이익을 줘요?”라고 말했다.

둘째, 아무리 온라인 광장에서 논의되었다지만 신중한 행동이 아니다. 집회발의자, 합의과정, 대표성 모두 흠결이 있다. 사실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의혹과 비난 광풍에 휩쓸린 느낌이다. 더구나 민감한 고대 교우의 일을 어찌 그리 성급하게 말하는가. 의혹이 사실이 아니면 그 생채기를 다 어찌 하려는가? 학내 문제라며 외부인 개입을 배제했지만, 국민 다수에게 공감을 얻기 어려운 속내임을 암시할 뿐이다. 세째, 촛불시위라는 비폭력을 동원한 것은 맞지만 지극히 옳은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의혹이나 예단이지 직선제 개헌과 같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네째, 긴요한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학교당국이 살펴보겠다고 했고 검찰이 조사하고 있는 마당에 지레 평등·공정·정의가 사망했다고 단정하고, 자료공개, 진실규명, 입학취소, 지명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 홀로 선 조국을 난타질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숱가락을 얹는 인기영합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촛불집회로 얻으려는 대의가 보이지 않는다. 정의를 말하고 공정을 말했지만, 속내는 직접적인 자신의 잇속이다. 자신은 힘들게 공부해서 입학했는데, 부정하게 입학했다면 부당하다. 감히 고대에서... 한마디로 기분나쁘다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자격이 의심스러운 자가 기득권을 누리거나,.. 우리들의 자부심에 손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을 굳이 집단적으로 표출시킬 이유가 있나 싶어요?”라고 일갈했다. 학생들이 자문해야 할 대목이다. 어쩌면 SKY의 관점이 아닌 일반 청년의 시각에서 대학입시 제도에 대한 성찰과 개선을 말했다면 차라리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배부른 자의 밥투정이나 힘자랑

기득권의 부도덕과 특혜라고 비난했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또다른 기득권을 상징한다. 토익과 AP 만점자도 자질을 의심받는 범접할 수 없는 학교라는 것 아닌가. SKY의 힘자랑이다. 배불러 터진 자들의 밥투정이자 난동이다. 그냥 속상한 자들이 술집에 모여서 육두문자를 안주삼아 주사부릴 얘기 아닌가. 간절함이 없으니 감동도 없고 호응도 없다. 신중치 못한 행동이 의도찮게 수구세력의 필사항전을 편들고 대의를 호도하는 것은 아닌지...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최소주의행정학> 4(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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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의 비폭력 투쟁

2020. 9. 27. 12:07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이달 초 일본 정부는 한국으로 수출되는 불화수소를 포함한 3개 품목에 대한 규제강화를 발표했다. 나아가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조치이며 불공정한 경제보복이라고 보았다. 박근혜 정권에서 강행한 성노예피해자 문제에 대한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고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에 대한 아베 정부의 분노와 응징이라는 것이다. 비상한 상황으로 규정한 문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여 경제체질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정치갈등으로 경제협력의 틀을 깨버린 이번 조치는 부당하며 양국 모두에게 큰 피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도전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다. 기업들은 해당 품목을 확보하고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들은 일본방문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혐한으로 치닫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차분하고 경우에 맞는 대응이다.

토착왜구와 식민사관의 잔재

하지만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수구세력들은 모든 것이 문재인 정권의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권력서열 1위였던 최순실의 존재를 들켜 한순간에 정권을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한이 묻어난다. 그들은 문정권이 좌파 이념에 매몰되어 이분법으로 국민을 갈라놓고 있다고 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정치보복을 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여론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야당과의 협치를 포기한 독재정권이라고도 했다. 최저임금인상과 같은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밀어붙여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고, 부질없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다가 한미일 관계만 파탄냈다고 했다. 성노예피해자 관련 합의를 파기하고 징용피해자 배상판결을 이끌어 아베 정권의 화를 돋구어 끝내 경제보복을 자초했다는 시각이다. 어느 수구신문은 일본어판에 “한국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나 “반일로 한국을 망쳐 일본을 돕는 매국 문재인 정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광복 70주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꿈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다.

나는 얼마 전 사람들과 한일 갈등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덕을 봤는데 이제와서 딴 소리냐고 했다. 다른 이는 일본이 얼마나 부강한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대들고 있다고 혀를 찼다. 한국 정부가 국제공조를 추진하든 일본과 협상을 하든 결국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이다. 정치꾼이야 그렇다 쳐도 교육수준이나 소득수준이 상위급인 분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토착왜구”까지는 아니어도 부지불식 중에 식민사관에 젖어든 정신세계라는 생각이다. 일본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일본은 부자이고 선진국이고 우리는 아니다. 그러니 일본이 아니면 안된다. 알랑거리든 싹싹 빌든 우네부네 하든 무조건 일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감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들다니... 세상사는 이치를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아닌가. 힘센 자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주고 힘없는 자는 가혹하게 짓밟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거늘...

그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지혜나 요령이라며 훈수한다. 하지만 자존自尊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심리상태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줄이며 양아치의 생존법이다. 강자에게 죽도록 매맞은 기억으로 몸서리치는 피해의식이다. 강자가 눈만 흘겨도 똥오줌싸고 까무라치는 수준이다. 이성과 양심이 아닌 힘의 논리에 충실한 셈법이다. 야만의 약육강식 그대로다. 일본에 특사를 보내라는 주장은 사실상 (어차피 항복해야 하니까) 조국 수석을 볼모로 보내고 아베에게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三跪九叩頭禮) 잘못했다고 싹싹 빌라는 충고다. 분기탱천한 아베는 더한 것도 요구할 기세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제3국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묵살하여 3권분립을 해체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포기하자는 소리다. 어차피 바위에 계란치기인데 명분이 밥먹여주는가, 당장 살아 남아야 할 것 아니냐라는 식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서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을사오적의 변과 다를 바 없다.

매맞으면서도 할 말은 하라

왜 겨뤄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꼬리를 내려야 하나? 왜 트럼프나 아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는가? 언제나 강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양국의 우호인가? 트럼프의 요구대로 방위비 분담금을 올려주고 아베가 원하는 대로 대법원 판결을 뭉개고 투항하면 우리에게 평화는 오는가? 양아치는 단물을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코가 꿰인 먹잇감을 허투루 놔주는 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힘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무서움을 극복하고 부당함에 맞설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아베 정권의 수출품목 규제강화는 난해한 경제문제와 남북문제와는 달리 옳고 그름이 명백하다. 애초부터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 책임에 연결된 문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핵심은 보편적 인권 문제다. 정답은 자명하다. 다만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小丁 선생님은 강자에게 고통받는 약자는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1986: 294). 폭력을 휘두르는 정권은 자기가 정한 법도 지키지 못할만큼 허약하고 정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민의 불복종 운동(비폭력투쟁)으로 붕괴가 된다(1986: 297). 하지만 여기서 비폭력은 강자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자포자기로 매만 맞으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을지언정 할 말을 계속 하는 것이다(1991: 118). 상대방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사실과 지극히 옳은 말만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감정을 자제하고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만을 해야 한다(1996: 56).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1980: 384). 약자가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다(1991: 18; 2001: 149).

비폭력 투쟁과 불매운동

지금 문재인 정부와 국민의 대응은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 투쟁에 가깝다. 특히 경제 우위를 앞세워 대화를 거부하고 강공으로 일관하고 있는 아베 정권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차분하게 일반론과 원칙론으로 맞서고 있다. 국제무역 질서와 관행은 물론 상식으로 봐도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가 경제보복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일본의 도발과 협박과 무례에도 불구하고 문대통령은 감정을 흐트리지 않고 합당한 말만 하고 있다. 비폭력 투쟁이다.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라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낭독하는 듯하다. 갈등과 긴장을 노리는 아베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인 벽창호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음인지 지난 25일 일본 지식인 75명이 아베 정권에게 규제강화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많은 시민들이 일본여행을 취소하거나 자제하고 있다. 일본제품을 팔거나 사지않는 운동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불매운동은 일본인에 대한 혐오나 적대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권경화씨는 일본여행을 취소한 시민들에게 무료로 머리를 깎아준다고 했다. 일본 손님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일본 TBS의 질문에 당연히 깎아준다고 답했다고 했다. 우리의 불매운동이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아닌 보편적 인도주의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는 공약삼장에 충실한 운동이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얼마 전 조국 민정수석이 그의 FaceBook에 적었다는 글이다. 그는 아베 정권의 궤변에 동조해 대법원과 정부를 매도하는 수구 정치인과 언론의 행태가 개탄스럽다고도 했다. 법을 공부한 그가 일제의 식민지배, 한일청구권협정,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등에 관한 의견을 적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민정수석이라는 지위와 의사소통 방식에 비추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자기정치에 열을 올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나대지 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어야 마땅한 그런 상식적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 일본의 국력은 우리보다 낫다. 하지만 2019년은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교할 수 없었던 1919년과 크게 다르다. 일본은 국토가 우리의 3.6배나 넓고, 인구는 1억 3천 명(2.5배)이고 2019년 예산은 9천 2백억 달러(2.3배)에 이른다. 2017년 국내총생산은 4조 3천억 달러(3.1배), 2018년 수출은 7천 3백억 달러(1.2배), 수입은 7천 5백억 달러(1.4배)로 근접하고 있다. 일인당 GDP는 4만 달러대 3만 달러이지만 최근 경제성장률이 2-3%인 우리가 1% 미만인 일본을 따라잡고 있다. 하우머치닷넷이 발표한 GDP대비 국가부채율은 2017년 기준 우리가 40%인데 비해 일본은 무려 238%다. 세계 최대의 채무국의 민낯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한국의 왕조에 의지하고 살았던 약소국이었다. 20세기 한 때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일본이 지난 30년 내내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그동안 각종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시도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부활을 획책하는 극우세력들이 일본을 퇴화시키고 있다. 사실과 역사가 아닌 신화를 믿고 사는 왜구倭寇의 난동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과거 공주 우금치에서 2만 명의 동학군이 2백 명의 일본군에게 비참하게 무너졌던 조선이나 무기력하게 경술국치를 당한 대한제국이 더이상 아니다. 어엿한 OECD와 G20 회원국으로서 강대국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성장과 힘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깨어있는 촛불이 우리의 힘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촛불을 밝히는 국민이다. 백년 전 3.1 운동 이후, 4.19 혁명(1960),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 6월 항쟁(1987)를 거쳐 촛불혁명(2016)으로 진화한 국민이다. 왕조시절에도 나라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왔다. 광화문 광장에 켜진 백만 촛불은 끈질긴 투쟁의 함성이자 우리의 자부심이다. 이는 사무라이 습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이 감히 꿈꾸지 못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다. 우리는 일본을 얕잡아봐서도 안되지만 막연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학대해서도 안된다. 깨어있는 촛불 국민은 침착하고 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백년 전 총칼 앞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만세를 외쳤던 그 마음, 3년 전 촛불을 들고 얼어붙은 광장을 밝혔던 그 마음이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심을 성심껏 받들면 된다.

한쪽이 자신의 힘만 믿고 막무가내로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다면 다른 한쪽의 선택은 쉽다. 똑같이 감정을 폭발하고 발길질로 대응하면 이전투구가 될 뿐이다. 막나가는 폭력과는 정반대로 합리성과 보편성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을 벌여야 한다. 냉철한 자세로 진리를 말하면서 인내하고 견뎌내야 한다. 뱉은 말도 뒤집고 갈팡질팡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정권은 나라 안팎에서 정당성을 잃는다. 대의大義가 아닌 잇속을 차리려는 자들이 끝도 없이 멋대로 굴기 때문이다. 앞다투어 욕심을 채우다가 수틀리면 서로 치고 박다가 스스로 망한다. 어차피 지금의 경제보복은 어느 한쪽이 사달이 나야 끝날 것 같은 상황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절제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서로 단결하여 고통을 나누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배타적 감정이 아닌 인류애와 동포애로 서로 다독이며 버텨내야 한다. 2019년 경제독립 운동의 공약삼장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의 비폭력 투쟁. <최소주의행정학> 4(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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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과 최소주의

2019. 4. 14. 11:53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올해가 己未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백 년이 된다. 백 년 전 오늘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을사늑약乙巳勒約(1905)과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를 거치면서 조선 민중을 옥죄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무장봉기가 아닌 철저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일제는 잔혹한 무력진압으로 맞섰다. 공식 집계만 해도 백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각지에서 참여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거나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제는 무단통치방식을 포기하였다. 헌법 전문에 나와 있듯이 3.1운동은 대한민국이란 물줄기의 발원지였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총독부 앞에 휘날리던 일장기를 끌어내린 자들은 독립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그들이 게양한 깃발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염원이 무산되면서 남과 북에서 그들만의 권력을 틀어쥐려는 무리들이 또다시 이 땅을 갈라내고 동족상잔의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4.3학살, 여순항쟁, 한국전쟁, 보도연맹학살은 그들만의 제단에 뿌려진 무고한 피였다. 이승만 일당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좌절시겼고, 단두대에 세워진 친일파를 풀어주는 대신에 그 자리에 정적을 끌어다 놓고 마구잡이로 “빨갱이칠”을 해댔다. 혹독했던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미군을 등에 업은 반민족·친일·기회주의자들의 폭정에 시달려야 했다. 3.1운동을 이은 4·19, 5·18, 6·29, 촛불혁명은 배신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처절한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끊임없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도도하게 흘러왔던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3.1운동은 아직도 진행중일는지 모른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백 년이 지났어도 이 나라 백성들은 여전히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자에게 맞서고 있다. 투쟁대상이 일본 제국주의와 동족의 피를 빨아먹은 친일파에서 “빨갱이칠”로 기득권을 이어온 수구·냉전·반공세력으로 바뀌었을 뿐 갈등 구조는 그대로다. 애초부터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아니라 이성과 상식과 양심이 기득권을 위해 배반과 변신을 거듭해온 수구기회주의 세력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義를 내팽개치고 利만을 쫓아온 강자의 폭력에 약자는 어떤 자세로 맞서야 하는가? 소정 선생님께서는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人道生存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하나,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첫번째 공약은 “일”에 관한 언급인데, 일본제국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에 의하여 핍박받고 있는 동포의 고유 권리를 찾는 거사라는 점을 말한다(1991: 329). 두번째는 육체의 종식으로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사람”의 책임과 운명을 말한다(1980: 358; 1991: 319, 329). 마지막은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라는 “방법”을 말한다. 한마디로 비폭력 평화 투쟁을 천명한 것이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먼저 질서를 존중하며,”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등은 철저한 비폭력 의지를 말한다(1996: 407).


소정의 초월윤리와 촛불집회


이문영(1991)은 사람·일·방법이란 범주와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으로 발전하는 초월윤리를 연결시켰다(48-49쪽). 공약삼장에서 보면 일(此擧)은 긍휼감으로 민족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사회윤리이며, 사람(一人)은 마지막 육체의 존재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기희생을 표현하며, 마지막으로 방법(行動)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라 할 수 있다(1991: 318-319).


출처: 이문영(1991: 162-170; 1996: 403-407)에서 재구성함.
방법사람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
신信예지禮智인仁의義
그리움한숨감동


공무원으로 치면 비폭력은 권력남용을 자제하는 일이고, 개인윤리는 법령을 준수하는 일이고, 사회윤리는 소외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일이며, 자기희생은 손해보면서까지 시민참여(예컨대, 공무원 노조)를 허용하는 일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도리와 사단四端으로 치면 각각 信(光名之心), 禮(辭讓之心)와 智(是非之心), 仁(惻隱之心), 義(羞惡之心)와 대응된다(1996: 403-407). 신信은 예지禮智에 앞서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덕목으로 비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개인윤리는 폭력이 멈춰진 뒤 합의를 모색하고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1996: 404). 또한 불쌍한 자를 긍휼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회윤리를 기대할 수 있으며, 사람으로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권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고 기꺼이 불이익을 당하는 자기희생이 가능하다(1996: 405, 437).


공약삼장은 지난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계속되었던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개인적으로 박근혜씨가 미워서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이게 나라냐”는 기본 질문을 한 것이다(일, 사회윤리). 민심을 억압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이었지만 남녀노소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많게는 하루에 이백만 명이 넘게 모였고, 당당하게 주권자의 의사를 시원스레 밝혔다(사람, 자기희생). 수백만 명의 함성과 발구름과 소등 시위는 구중궁궐에 포위되어 있는 박씨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겠지만, 백성들에게는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하는 축전祝典이었다.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참여한 개인발언은 민심 그대로였다. 방법으로 치자면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끝까지 질서가 유지되었으며, 폭력이 추방된 비폭력 운동이었다(방법, 비폭력과 개인윤리). 경찰이 벽을 치고 긴장을 조성한 면도 있었으나 시민들 스스로 폭력을 자제하고 질서를 외쳤으며 집회가 끝난 뒤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모범을 보였다. 총 23차에 걸친 집회에서 총 천 오백만 명이 참여했지만 폭력으로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계절”을 그리워하고, 이명박근혜라는 현실에 한숨짓고, 꿈꾸는 너와 나의 미래를 확인하며 감동했던 혁명이었다.


『맹자』의 설궁장과 최소주의


이문영(1980)은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힘과 권력남용으로 대표되는 官의 벌거벗은 힘이 부딪치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싶었다(vii쪽). 이런 대결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양 극단이지 일반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자들의 폭정(권력남용)도 극복해야 하지만 백성들의 난동 역시 자제되어야 한다. 꼭 필요할 때에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최소행동이 필요한 까닭이다.『孔孟』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의 설궁雪宮장은 이러한 소정의 최소주의에 맞닿아 있다.


“齊宣王見孟子於雪宮。王曰 賢者亦有此樂乎? 孟子對曰 有。人不得則非其上矣。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제선왕이 맹자를 설궁에서 만났다. 왕이 말하기를, 현자에게도 이러한 즐거움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그 윗사람을 비난합니다.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 위사람을 비난하는 자(백성)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지 않는 자도 잘못입니다” (『孔孟』 「梁惠王章句 下」4).


여기서 즐거움을 무엇을 말하는가? 이 장에 앞서 맹자는 왕이 백성과 더불어 음악, 사냥, 동산을 즐긴다면 왕노릇을 할 수 있다(與百姓同樂則王矣)고 했다. 현자(백성)도 왕과 마찬가지로 멋진 별장을 노니는 즐거움이 있다. 왕이 백성들과 더불어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백성들과 같이 동산을 이용하면 백성들은 왕의 즐거움을 같이 느낀다. 소정의 초월윤리로 치면 윗사람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는 물론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백성이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무엇인가? 왕의 동산에 들어왔다고 무조건 때려죽이거나 법에도 없는 일(예컨대, 벌금이나 형벌)을 강요하는 일은 없지만,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거나 (그들에게 예외를 허용하거나) 동산을 백성에게 개방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다. 최소한 비폭력과 개인윤리를 보여주지만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는 이르지 못한 경우다. 이 때 백성들이 왕의 동산이나 별장을 누리지 못해서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지나친 행동이며 과격이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난동이다. 그들이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성백효 2014: 110). 윗사람이 되어 권력남용을 안하고 법령에 나와있는 일만 하는 것은 물론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백성들에게 비난받고 매맞고 쫓겨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백성이 왕을 비난할 수 있을까? 왕의 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동산에서 사슴을 죽인 자를 살인죄로 다스리는 경우이다(성백효 2014: 101). 예컨대, 법에서 정한 살인죄도 모자라 7족에게도 죄를 묻는 패악질을 하는 경우다.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은 커녕 개인윤리나 비폭력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포악한 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리석은 독재자들은 무력만 믿고 끝간데 없이 폭정을 휘두르다가 스스로 무너진다(1986: 289, 297). 서로 더 해먹으려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치고 박다가 끝내는 자기들이 만든 법조차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비폭력은 물론 개인윤리조차 무너진 상황에서 백성의 원성과 죽창은 피할 길이 없다.


소정의 최소주의로 나아가라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초창기에 8할이 넘었던 대통령 지지율은 현재 절반에 머물고 있다. 개헌, 선거법개정, 적폐청산, 사법농단수사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불만이다.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현하려는 시도는 사회주의로 치부되고, 최저임금인상을 포함한 소득주소성장정책이 오히려 민생경제를 망치는 주범으로 몰린다. 북한에 속아 GP를 철수하고 한미훈련을 중단하고 안보를 포기했댄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립유치원, 미세먼지 등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호시탐탐 민심을 호리는 날조뉴스들이 넘쳐난다. 야당 대표는 총체적 난국에 처한 좌파정권의 폭정을 막겠다며 기염氣焰을 토한다.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현정권이 정치를 망치고 경제를 망치고 안보를 망치고 통일을 망쳤으면 하는 주술과 희망사항을 저주로 퍼붓고 있다. 작정을 하고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던 수구 야당과 언론의 모습 그대로다. 경제파탄과 불통과 퍼주기라고 또다시 헌나발을 불지만 “경포대”보다도 처참했던 이명박근혜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북미관계가 틀어져 장거리미사일이 하늘을 날던 시절만을 오매불망하고 있다.

과연 문재인 정권은 이런 비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가? 유시민씨의 말대로 모든 구악이 그대로인 채 대통령만 갑자기 바뀐 것 아닌가. 야당에서 “침대축구”를 하면 개헌이든 뭐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수구세력들이 사사건건 적폐청산을 가로막아왔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법령을 준수하는 민주정권의 “약점”을 최대로 악용해왔다. 시민사회도 그동안 짓눌렸던 욕망과 불만을 드러내고 자기 몫을 요구하고 있다. 그저 대통령이 알아서 뚝딱 만들어내라는 심산이다. 이 조급함과 이기심을 수구세력이 파고들고 있다.


오래도록 쌓여온 못된 관행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각자가 변화하는 고통과 손해와 혼란을 감내해야 한다. 의사에게 병을 당장 고쳐내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병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참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놀리면 화타가 명약을 줘도 병을 고칠 수 없다. 당장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윗사람을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감동은 아니어도 폭력을 휘두르고 법규를 무시하는 포악한 정권은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조급하게 굴지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과욕과 무책임한 난동은 음흉한 수구세력의 장단에 놀아나는 짓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신중하게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절박했던 3.1운동을 돌아보자. 광장에 모인 천만 촛불의 간절함을 상기하자. 利가 아닌 大義를 위한 실존의 몸부림아니었던가. 절실한 최소한의 요구를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


참고문헌

  • 성백효. 2014. 현토신역 부안설 맹자집주: 天. 경기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과 최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4(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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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2019. 4. 11. 14:27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지난 23일 노회찬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인터넷 게시물의 조회수를 조작한 “드루킹” 김동원 일당이 건넨 돈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사건이 불거진 후 줄곧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유서에서 4천만 원을 대가없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예기치 못한 비보에 많은 시민들이 지역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소를 찾았다. 여야는 물론이려니와 수구냉전 세력까지도 이심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폭염에도 조문객이 7만 명에 이르렀다니... 하물며 진보가 빨갱이로 낙인찍힌 나라에서. 

유시민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정의롭고 품격있는 논객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준 운동가였다. 척박한 토양에서 진보정치를 대중화시킨 정치가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잃었다. 어이없는 일이었고, 허무한 일이었고, 안타까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없이 서글픈 일이었다. 며칠 동안 비몽사몽으로 헤매다가 깨어난 느낌이다. 


품격있는 화객

사람들은 노회찬을 비유의 달인이라고 했다. 촌철살인의 대가라고도 불렀다.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난 50년 동안 삼겹살을 궈먹은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가 일갈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일반 시민들의 시각과 정서를 담은 말이었다. 기존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노회찬은 사람들이 평소 말하고 싶었던 얘기와 강자에게 따지고 싶었던 얘기를 조리있게 다듬어 쉽고 간결하게 풀어냈다. 고갱이를 가려내어 짜임새있게 엮어낸 뒤 잘 발효시킨 말이었다. 구성지게 뽑아낸 가락이었다. 논리가 있고 해학이 있었다. 설득력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시원하고 통괘했다. 수구세력의 억지와 궤변과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가 출현했던 <뉴스공장>의 꼭지 이름은 “노르가즘”이 되었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대체 불가”였다. 그는 인간이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품격있고 멋진 화객話客이었다.

노회찬의 말은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서 경우에 맞는 말이었고 힘이 있는 말이었다. 이런 생생한 사실과 진리를 비유를 통해 완곡하게 표현했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전달했다. 그는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려고 애썼지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인간의 품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주제에 집중했지 사람(상대방을 비난하는 데)에 매달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성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말이었다(2008: 66). 이러한 노회찬의 말법은 상대방의 논지나 주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과 보복을 무력화시켰다. 이성과 상식에 꼭맞는 말이어서 상대방이 차마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폭력이며 최소주의다. 진중권씨의 말이 살인검이라면 노회찬의 말은 활인검이라 할 수 있다.  


도덕 결벽증? 자기희생?

노회찬은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라는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어리석게 처리한 일을 자책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어쩌면 노회찬의 선택은 진보세력의 과도한 도덕 결벽潔癖이나 강박일는지 모른다. 수구냉전 세력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사면증(면죄부)을 지닌 자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만 소위 진보세력은 사소한 실수라도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마냥 고개를 쳐박고 다닌다. 폭력을 완비한 강자의 자신만만과 강자에게 당한 악몽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약자의 피해의식이랄까?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듯 강자가 약자의 도덕성을 따지고 든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민간인 드루킹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민주주의 파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약자의 도덕 결벽증을 노리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논법이다.  

노회찬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세력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덕 결벽증을 경계한 말이다.

노회찬은 원망하지도 않았고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대로 현실의 엄격한 요구를 아프게 받아들였다. 혹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힐난했지만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물은 것이다.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해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잘못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세비도 당에 주고 당에서 최소 월급을 타왔던 사람이었다. 현직에게 특혜를 주고 도전자의 손발을 묶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그가 받은 돈은 올바르게 처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노회찬도 지키지 못할 정치자금법이라 꼬집은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당이 어려워지는 것을 더 우려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당이나 진보세력 전체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제 특별활동비가 혁파될 것이며, 정치자금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의 희생이 아프고 슬프다. 

참고문헌

구영식.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한겨레21> 1223호.  2018.7.31.



원문: 박헌명. 2018.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최소주의행정학> 3(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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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비폭력인가?

2019. 4. 11. 14:19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은 주먹을 내려놓고 말로 하자는 것이다(1986: 318). 이문영(2008)은 “무서웠을 때 내가 한 말은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의 말”(491쪽)이라 했고, “정부도 거절하지 못하는 말을 하되 말만 한다”라고 적었다(497쪽). 하지만 비폭력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물리력을 사용하지 말고 거친 말을 내뱉지 말라는 뜻일까? 어떤 상황에서든 화내지 말고 성내지 말라는 소린가? 노무현씨처럼 최루탄이 터져도 도망가지 않고 길바닥에 앉아 연좌시위를 계속해야 하는가? 전투경찰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거나 군인들이 총을 난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앉아서 품격있게 군자왈 맹자왈 하다가 맞아죽는 것이 비폭력인가? 이런 상황에서 약자는 어떻게 비폭력을 실천하고 최소의 말을 해야 하는가? 지난 호(2권 11호)에 소개한 빈센트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는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 

소정 선생님은 인자하고 인간미가 있는 분이다. 하지만 비폭력을 강조하시는 선생님도 화를 내실 때가 있었다.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에서 나는 기말과제로「자전적 행정학」(1991)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이라는 초월윤리를 조직, 정책, 인사, 재무에 적용하는데 무리가 따르는 대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선생님께서 일부러 내가 공부하는 방으로 찾아오셔서 역정을 내셨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다듬어 온 초월윤리라는 분석틀을 논거없이 비판했다며 불편한 속내를 말씀하셨다. 당시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기에 그 노여움을 달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평소 모습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웠다.

자서전인「겁많은 자의 용기」(2008)에는 선생님의 성내기 몇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일기로 적은 1983년 8월 31일 사건은 다음과 같다. 

“곧 택시로 대학교로 해 기독교빌딩 앞에 차를 세운다. 마침 현아 엄마와 안박사 부인이 현관에 나오면서 지금 기동대가 농성 중인 네 분을 다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오후 세 시 경에 200명이 들이닥쳐서. 그러니 피하라는 것인데 연동교회 쪽으로 한 20미터도 걷기 전에 뒤에서 사복 경찰들이 와 나를 잡는다. 내 차로 간다니까 자기네 차로 집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북부서 강 형사가가 나를 잡는다. 북부서 정보과에 현아 엄마가 같이 간다. 계장실 하나에 함 선생님이 깊이 있고 생각하시는 표정으로 앉아 계신다. 문 목사님이 독이 나서 과 사무실에 앉아 계신다. 나는 과장실로 안내된다. 조금 있다가 형사가 와서 과장보고 ‘문 목사가 반공계로 자리를 옮기자 하니, 나를 짐짝같이 끌고 왔으니 끌고 가라고 안 움직여요’한다. 과장이 ‘뭐? 죄인이 무슨 큰소리야?’라고 악을 쓰며 나간다. 나는 길길이 악을 쓴다. ‘이 깡패 놈아 네가 죄인이지 누가 죄인이냐? 죄를 졌으면 영장을 가지고 와야지,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해놓고 경찰서에 끌고 온 놈이 깡패이고, 너 과장이란 것은 깡패 두목 아니냐!’ 마침 박용길, 박영숙, 김석중이 밖에 있어 야단들이다. 밥을 안먹고 수사에 안응한다”(2008: 400-401).

또한 수감중인 교도소에서 더운 물을 달라며 플라스틱 베개를 두드린 사건은 이러하다. 교도관과의 대화에 주목해보자. 

“나는 습관대로 추운 겨울날 어느 저녁에 심호흡과 요가를 했다. 몸에 땀이 흠뻑 났다. 나는 냉수마찰을 하고 나서 자리를 깔고 취침을 했다. 밤중에 잠이 깨더니 갈증이 났다. 그래서 저녁에 받아둔 물을 마셨다.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복도로 난 문을 똑똑 두드렸다. 교도관이 왔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달라고 말했다. 그는 더운물이 없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가 왔다.‘만일 댁에서 지금 물을 마시고 싶다면 어떻게 하세요?’‘저 난로에서 끓여 마시지요.’‘그러면 저에게도 난로에서 끓여 주세요.’‘안됩니다.’그와 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내가 더운물을 못 얻어마시는 것은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며 갈리리 교회에서 성찬을 함께 한 동료들도 나처럼 찬물을 마시고 덜덜 떨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더운물 한 모금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라고 생각했다. 생각한 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교도관이 안왔다. 그러자 나는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교도관이 달려왔다. 다시 더운물을 달라고 말했다. 물을 안주겠단다. 그러면 더운물을 달라는 청원을 교도소장에게 하겠으니 교도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 (2008: 302-303).

「자전적 행정학」(1991)에 나오는 “박정희 노래” 사건은 강의시간에도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 “박정희씨의 노래”라고 하면 되겠느냐며 놀리는 선생님의  반문이 들리는 것같다.  

“서울구치소에서 순천교도소로 이감가기 직전 어느날 새벽에 느닷없이 스피커에서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오는 異變이 생긴다. 이런 노래는 안부르기로 18개 조항에 약속이 된 것인데 버젓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되 그것도 흘러나오는 노래 중 제일 먼저 흘러나오지 않는가? 약속위반이다. 이렇게 약속은 강자가 어긴다. 정부가 지켜야 법의 지배가 가능해진다. 나는 이 때에 내 애용의 무기 플라스틱 목침을 또 사용하면서‘박정희 노래 집어치워라!’를 외친다. 더운 물 달랠 때같은 소동이 난다. 보안과장과 내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눈다. 과장: 약속을 어겼다고 박정희 대통령이라고도 않고 박정희 노래가 뭡니까? 나: 아니, 과장님은 슈벨트의 노래를 슈벨트의 노래라고 하지 슈벨트씨의 노래라고 합니까? 과장: … ”(1991: 352-353).

비폭력은 무서울 때에(나서면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상황)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1) 자신의 분석틀을 비판한 보고서를 보고 화를 내셨고, (2) 부당하게 시민을 연행하고 죄인취급을 한 경찰의 행동에 악다구니를 부리셨고, (3) 겨울에 뜨거운 물을 주지 않는다며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리셨고, (4) 교도소에서 틀어 놓은 “박정희 노래”를 집어치우라고 외치셨다. 베개로 쇠문을 두드린 것은 물리력을 동원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거친 언어를 사용한 경우다. 사람을 때린 것은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폭력이라면 폭력인 셈이다.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는 고객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를 한 것으로 (2)번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면 어느 경우가 초월윤리의 비폭력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급한 상황은 피하고 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달리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을 때에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현실적 이상주의”는 (특히 약자의) 철저하고 엄격한 현실이해를 필요로 한다(1986: 138, 298). 모든 생물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포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동물을 피해서 살거나, 지혜를 갖거나, 약한 동물끼리 단결을 해야 한다(1980: 366). 당장 눈앞으로 쏟아지는 총칼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비장할지는 몰라도 비폭력과는 관련이 없다.


저항권 행사는 폭력이 아니다 

비폭력은 평화라는 말뜻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평화스럽다는 쿠데타나 국민의 난동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난동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이다(1986: 297). 따라서 “4·19와 같은 저항권의 행사라든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과 같은 정쟁(政爭)”은 난동이 아니다. 또한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사회가 민주 사회인데, (1) 폭력 정치에 대하여 저항하여 말할 수 있는 자유, (2) 피치자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자유, (3) 치자와 피치자가 서로를 구속하는 약속(계약이나 법)을 만들어내는 자유가 필요하다(1991: 317). 

결국 주권자로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은 난동이라 할 수 없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력으로 저항한 독립군과 적군의 수뇌부를 암살한 의병 중장 안중근를 난동꾼으로 볼 수 없다. 맥락없이 물리력 행사만 강조하여 물타기하려는 친일 매국노들의  음흉한 논리다. 영장없이 거짓말로 시민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범죄자 취급을 한 경찰의 위법행위에 저항한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폭력이라 할 수 없다. 
  
가져야 할 최소를 요구한다

따뜻한 물 한모금이라는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를 누리지 못하거나 고객으로서 최소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본이나 최소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라 할 수 없다. 그 최소는 꼭 필요한 것이어서 양보할 수 없다. 교도관이든 수감자든 인간인 이상 따뜻한 물 한모금은 최소라 할 수 있고, 바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쇠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문 목사가 경찰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혀 해코지를 당하게 된 마당에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노래”를 틀지 말라는 것은 재소자들이 요구한 최소인데, 이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겼기 때문에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최소한 약속은 지키라고 플라스틱 베개를 두드린 것을 폭력이라 말하기 어렵다. 한편 누차례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물건을 성의없이 바구니에 던지는 점원을 꾸짖고 관리자에게 항의한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 역시 폭력이라 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이러한 요구는 거부될 수 없는 보편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비판한 보고서를 보고 발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단계로 이루어진 초월윤리는 선생님께서 평생을 두고 갈고 다듬은 생각틀인데, 타당한 근거가 없이 비판을 받았다고 느끼셨을 터이다. 다른 것이었다면 몰라도 지키고 싶은 분석틀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그토록 민감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의 행동이어야 한다 

성내는 이유와는 별개로 최소한의 행동이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문영(1986)은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고 학생들에게 권고하였다. 또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고 했지만(2001: 246), 긴급피난이나 정당방위 등과 같은 상황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거친 언사도 약자를 방어하는 약이 될 수 있다.   

선생님은 보고서 내용에 대해 화를 내셨지만 사실 항의에 가까운 반론이었다. 손찌검을 포함한 일체의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문 목사가 죄인처럼 끌려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경찰의 부당함을 강하게 지적하고 법에 따라 시민을 대우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상황에서 점잖게 경찰관직무집행법이나 형사소송법을 언급하며 과장을 타일렀더라면 어떠했을까? 어쨋든 경찰을 때리거나 무기를 빼앗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했다. 다만 법에 나와 있는 대로 수사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항의를 이어갔다. 

또한 더운 물이라는 긴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개로 쇠문을 두드렸을 뿐이다. 조용히 두드려서는 교도관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지만 벽이나 문을 부수거나 물건을 내던지거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박정희 노래” 사건에서 사용된 무기는 플라스틱 베개였을 뿐이다. 요구 내용도 상식에 맞는 것이었고 대응도 철저하게 비폭력이었다. 만일 보안과장에게 “박정희xx 노래”나 “독재자의 노래”라고 대꾸를 했더라면 전혀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오스트롬 선생님도 지팡이로 도망가는 점원을 가리키기는 했지만 점원이나 관리자에게 휘두르지는 않았다. 분하다고 울고 불고하지 않았고, 바닥에 드러눕지 않았고, 보상을 하라며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객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를 했을 뿐이다.     
     
약올림의 미학

Park (2016)은 초월윤리의 비폭력이 의도치 않은 약올림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107쪽). 강자가 자제력을 잃고 계속 폭력에 의존하가다 끝내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약올림은 비폭력의 귀결이지만 자칫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 되기 쉽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증거와 논리를 갖추지 않고 상대방을 헐뜯는 것은 비폭력도 약올림도 아닌 그저 어리석은 짓이다.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상대방의 헛점을 예리하게 파고 들어야 한다. “박정희 노래”가 뭐냐는 보안과장의 말에 “슈벨트의 노래를 슈벨트의 노래라고 하지 슈벨트씨의 노래라고 합니까?”라고 답한 것은 약올림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문영(2008)은 재판을 받으면서 “검사의 화를 돋워 미치게 만들고, 나는 길게 말하고, 검사가 결재받아 오지 않은 것을 물음으로써 악한 정권의 본색이 내 질문으로 폭로가 되게” 하는 전략을 취했다(296쪽). 법대 교수이면서 왜 국민투표로 결정된 헌법을 비방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 말 잘 하셨어요. 검사는 어느 대학 법대를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민법 총칙 시간에 무효의 의사표시라는 것을 안배웠어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무효예요. ...검사님, 댁에서 말하는 국민투표 때에는 중앙청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국투표를 해 국민을 협박했는데, 어찌 그 국민투표가 유효해요?”라고 답했다(297쪽). 상대방의 어설픈 공격을 바로 되치기하고 약을 올려 평정심을 잃게 만든 “아름다운 비폭력”이다. 

소정의 성내기는 비폭력이다

처음에 나는 소정 선생님이나 오스트롬 선생님께서 화를 내신 것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비폭력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저항권의 행사이거나 누려야 할 최소를 요구한 최소한의 행동이었다고 본다. 비폭력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약올림의 미학까지 갖추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 역시 비폭력 구도에서 행사된 정당하고 최소한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Park, Hun Myoung. 2016.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in Conflict Management: Lee’s Nonviolence, Conflict Episode, and Principled Negoti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6(2): 99-108.


원문: 박헌명. 2017.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비폭력인가? <최소주의행정학> 2(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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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가?

2019. 4. 7. 21:30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촛불시위가 전국 곳곳에 타오르고 있다. 지난 달 26일 서울에만 150만명이 모였고 전국에서 19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청와대는 물론 정치권도 놀랐을 것이다. 민심이 이렇게까지 뜨겁고 무서운 것인가 하며 탄식했을 것이다. 아마도 집회에 나선 시민들 스스로도 놀라고 또 감격했을 것이다. 주권자로서 박근혜씨에게 배신과 치욕을 당한 울분을 너도 똑같이 느꼈구나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이다. 길거리로 뛰쳐나온 2백만 시민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박근혜퇴진만을 외치는 촛불시위에 세계가 주목하고 감탄하고 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남녀노소가 촛불을 들고 참가자들의 발언을 듣고 공연을 즐기는 모습은 그 자체가 평화로움이다. 대규모 비폭력 촛불시위가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그러면 왜  비폭력인가? 인간의 기본권이나 윤리로 보면 비폭력이 정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비폭력이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시민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참 나쁜 통치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박사모가 때리면 그냥 맞으라고 하는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뜬금없는 패악질을 이긴단 말인가? 과연 촛불시위가 헌법을 유린하고도 적반하장인 박근혜씨를 무릎꿇릴 수 있을까? 그러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어떤 논리와 근거와 당위가 있을까?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 까닭

폭력을 대체하는 대안은 똑같은 폭력일 수 없다(이문영 1986: 290). 어차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약자의 대안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말”이며, 한마디로 비폭력이다(290,  294쪽). 통치자의 폭력에 대항하여 시민이 폭력으로 맞서면 전쟁이 일어난다(344 쪽). 시민의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문영은 (1) “폭력에 기반을 둔 정권은 강한 것이 아니라 허약”하고, (2) 폭력 정권은 무리수를 거듭하다가 자신의 말조차도 어길 만큼 통제력을 잃게 되는데, (3) 이런 정권은 자기비대화를 계속 하다 끝내는 스스로 망하게 되기 때문에, (4) 시민의 철저한 비폭력 투쟁으로도 족하다고 설명하였다(297-298 쪽). 

폭력 정권은 허약하다  

먼저 폭력 정권은 정당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수많은 헛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뿌리깊은 허약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정권유지를 위해 기꺼이 값비싼 통치비용을 지불한다. 시작부터 합리성과 상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말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나쁜 통치자는 백성들을 주권자는 커녕 대화 상대로도 여기지 않고 그저 찍어 눌러야 하는 피지배 계급으로 간주한다. 백성들이 통치자의 명령을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폭력으로 강제하지 않고서는 일을 추진할 수 없다. 말보다는 주먹질이고 발길질이며, 하는 일마다 무리수다. 

불만을 해소시켜주지 못하고 억누르기만 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반란이 일어날까봐 안절부절이다. 밤낮으로 정적을 감시하고 탄압하는데 몰두한다. 조그마한 일에도 과민반응이어서 애먼 사람을 잡는다.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희극이나 영화를 참아내지 못한다.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 관용성도 극빈한 정권이다. 유언비어라 몰아붙이고 빨갱이 종북 딱지를 붙이고, 응징하라고 뒤에서 압력을 넣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이런 통치비용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게 되면서 “고비용 저효율 저효과”가 지속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회 곳곳에서 고장이 나게 된다.  
  
폭력으로 일어선 정권은 그 자체로 백성들 편에 설 수 없다. 설령 통치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 해도 정권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부역자들(지지자, 재벌, 언론 등)이 용납하지 않는다. 주고 받는 셈법은 어디나 공평하다. 통치자는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탐욕을 채워줘야 한다. 공직을 나눠주고, 부역자들을 편드는 정책을 만들고, 권력으로 협박해서 돈을 뜯는다. 통치자와 부역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음껏 폭력을 휘두른다. 애초부터 의로움이 아닌 잇속으로 달려들어 정권을 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 “몹쓸 법”을 뜯어고치거나 새로운 악법을 만든다(이문영 1986: 340). 예컨대,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를 남발하여 정적을 찍어눌렀다. 이명박 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위해 법규정을 멋대로 바꾸었다.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세월호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개성공단 폐쇄 등)은 이제서야 겨우 실마리를 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멀쩡하게 돌아갈 까닭이 없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난장판이 된다. 

폭력 정권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작은 충격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하다. 장기미전향수 한 명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적화통일이 된다는 정신줄은 악한 정권의 허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나라가 있다면 어차피 망할 것이니 차라리 빨리 망하는 것이 훨씬 낫다.   

폭력 정권은 자신의 말조차 어긴다  

둘째, 폭력 정권은 자신이 제정한 법도 지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정권은 아랫 사람과 의논하여 합의를 보지 않고 그저 찍어 누르고, 자신을 위장하여 감추고, 교묘한 말로 속이고, 약속을 어겨서 일을 한다(이문영 2001: 240).  이와 같은 무리수를 거듭하다 보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자신이 만든 악법조차도 지키지 않게 된다(이문영 1986: 289, 340).

헌법을 능멸한 통치자가 헌법대로 법대로 하자며 버티고 있다. 국정농단을 주도한 자가 이제와서 선의로 추진한 일인데 주변을 살피지 못했을 뿐이라며 남이야기 하듯 한다. 뜬금없이 총리후보자를 지명해놓고 느닷없이 국회의장실로 쳐들어가 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통보한다. 세번째 “담화문”에서 박근혜씨는 “친박”과 “비박”의 갈등을 알면서도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말한다. 교묘한 말로 위기(탄핵)를 모면해보려는 협잡挾雜이다. 검찰과 특별검사 조사를 성실하게 받겠다고 약속했지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아직까지 검찰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박근혜씨다.   

깜냥이 안되면서도 완장차고 자리만 꿰찬 “끝발”들은 잇속을 차리려 눈에 불을 켜고 너도 나도 뒷골목까지 샅샅이 뒤집는다. 이런 판국에 약육강식 외에 무슨 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악법이든 아니든 통치자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키지 않게 된다. 무법천지가 되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야만野蠻이 판치게 된다. 이런 패악질을 하다 보면 끝발들끼리 부딪히게 되어 있고, 자기들끼리도 주먹다짐을 하거나 칼을 섞게 된다. 나쁜 정권의 끊임없는 “자기 비대화”라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19, 1996: 405). 

이문영은 가장 나쁜 통치로 진행되는 상태를 (1) 선과 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언론(신문, 방송, 대학, 종교 등)을 망가뜨리고, (2) 정적을 제거하고, (3) 백성 일반이(어린 아이까지도) 타락하고, (4) 바벨탑같은 전시효과를 노린 정책을 밀어붙이고, (5) 인접국가조차 포기하고 방치한다고 적었다(이문영 1991: 87-103, 2001: 184-202).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저질렀던 짓을 살펴서 귀납방법으로 유추한 결론일 것이다. “언로를 막는 정부는 언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이 자체 생산된 언론을 믿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단속한다”(이문영 1986: 316). 각종 의혹을 제기하면 유언비어로 치부되고 범죄행위로 규정된다. 김구, 여운형, 김대중 등이 암살되거나 죽을 고비를 겪었고, 정권에 밉보인 사람들이 각종 정치공작과 악법에 희생되었다. 이런 참담함이 계속되면서 상식과 도덕과 윤리가 아닌 돈과 권력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일을 상기해 보자. 언론신뢰도 1위를 이끌던 정연주씨가 KBS사장자리에서 쫓겨났으나, 대법원이 정사장의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퇴임 후 더 큰 사랑을 받던 노무현씨는 절벽 끝으로 밀려버렸고 “친노”들은 폐족이 되었다. “묻지마 범죄,”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갑질” 등 사회가 병든 조짐이 여기 저기서 보인다. 4대강 사업은 걸쭉한 “녹차라떼”를 확산시키면서 악취나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견인했다. 자원외교를 한답시고 엉터리 사업을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글로벌 호구”를 자처했다. 대북관계는 강경으로 치닫다가 매번 여기 저기서 쥐어터지고, 대책도 없이 북한이 쏘아대는 미사일만 하나 둘 셈하고 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옛소녀”들의 손을 뿌리치고 한사코 사과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돈을 받았다. 또 한일정보보호협정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인 THAAD 도입을 강했하였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박정희씨의 유신시대, 전두환씨의 폭압시절, “이명박근혜”씨의 엽기시대는 이런 점에서 맞닿아 있다.  

폭력 정권은 스스로 망한다  

세째, 폭력 정권은 시민의 비폭력 투쟁으로 스스로 붕괴된다(이문영 1986: 297). 악한 통치자가 위장을 하고, 교묘한 말을 하고, 약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하고, 통치자 자신을 실패케 하고 끝내는 스스로 멸망케 한다 (이문영 2001: 136-147). “남을 파괴하는 이는 본래 자신도 파괴하는 것”이다(157쪽). 못난 짓을 하는 악한 정권은 적에 의해 망하기보다 자기 스스로가 망하게 된다(이문영 2008: 346-347). 거듭되는 무리수로 무질서도(entropy)가 커지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무력과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지만 불신과 불만과 원망이 가속화되면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잇속을 탐하면서 통치자 자신과 백성을 타락시킨다. 법과 질서가 무력화되면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더 강한 자가 덜 강한 자의 것을 빼앗는 일이 벌어진다. 나쁜 정권이 최소한의 이성을 상실하고 막무가내로 나가면 정권 내 사람들마저도 흔들리게 된다(이문영 2008: 368). 기강이 무너져 명령을 내려도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나아가 자기편 끼리도 칼부림을 벌이는 상황이 된다. 사회가 멀쩡하게 돌아갈 까닭이 없으니 어디서든 시한폭탄의 시침이 째깍째깍 돌아간다. 국민방위군 사건, 사사오입개헌, 부산정치파동, 3·15부정선거 등 끝 간 데 모르고 해먹다가 하와이로 쫓겨간 이승만씨나 유신정권까지 세워 장기집권을 꿈꾸다 충복인 김재규씨에게 총맞아 죽은 박정희씨를 상기해 보라.  

철저한 비폭력 투쟁으로 족하다

마지막으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평화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이문영 1986: 289). 강자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비대케 하여 종국에는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없애지만, 약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과 타인을 살려낸다(이문영 2001: 148). 약자의 자기희생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비폭력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통치자도 거부할 수 없는 옳은 말(주권재민 등)을 최소한의 요구로 계속 한다. 폭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차분하게 비폭력의 길을 가면 된다(이문영 1986: 289).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면서 평화롭게 비폭력 투쟁을 잔치처럼 즐기면 된다. 박근혜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시위에서 전인권이 말한 “폼나는 촛불시위”는 이래서 멋있다. 

“어차피 쿠데타 정부는 넘어지게 되어 있고, ... 다만 재야가 과격해지지 말아야 이 사람들이 파쇼화하는 구실을 안주게 된다”(이문영 2008: 391). 만일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전개하면 자체 분열로 치닫던 폭력 세력들(예컨대, 독재자, 어용언론, 어용학자, 재벌가)이 서로 단결하여 폭력 투쟁을 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폭력 정권의 정당성만을 북돋을 뿐이다(이문영 1986: 297). 만일 박근혜퇴진  촛불시위가 폭력으로 치닫는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친박,” 국정원, 검찰, 경찰이 무시무시한 폭력을 들이밀고 달려들 것이다. 폭력 정권이 이미 허약하여 시민의 저항에 대처하지 못하면 정권의 강경파가 득세하여 폭력 투쟁을 진압하고 더 폭력적인 정권을 수립한다(297-298쪽). 행여 운이 좋아 시민들이 폭력 투쟁으로 폭력 정권을 무너뜨린다 해도 새 질서를 관리할 대안을 내지 못한다(298쪽). 시민운동에서 義가 아닌 잇속을 노린 자들이기 때문에 기껏 해봤자 또 다른 나쁜 정권을 세워 못난 짓을 계속할 것이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

요컨대, 폭력 정권은 말보다는 주먹으로 잇속을 챙기느라 혈안이 된다. 멈추지 않는 “자기비대화”는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서로 격려하면서 지치지 말고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 비폭력이다(박헌명 2006). 주권을 가진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정당한 요구를 계속할 따름이다. 이래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

참고문헌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이문영. 1986.『겁많은 자의 용기』, 2판. 서울: 중원문화.
이문영. 1991.『자전적 행정학』서울: 실천문학. 
이문영. 1996.『논어맹자와 행정학』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1.『인간 종교 국가』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8.『겁많은 자의 용기: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서울: 삼인.



원문: 박헌명. 2016. 어째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가? <최소주의행정학> 1(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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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의 <행진>과 비폭력 촛불시위

2019. 4. 7. 21:29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전인권이 지난19일 밤 광화문에 모인 60만 시민들을 울렸다. “평화 시위”를 염원한 그는 <상록수>에서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라고 토해냈다. 그의 입에서 느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애국가>는 그의 말투처럼 어눌한듯 담담하나 비장한듯 장엄했다. 곧바로 이어진 <행진>과 어우러져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야수가 울부짖는 듯한 그의 <애국가·행진>은 시민들의 “떼창”으로 퍼져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며 두 팔을 벌릴거야. 에—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행진—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는 거야 우리들은
... 
우리나라 만세 하는 거야. 

OhmyStar의 김윤정(cascade)은 전인권이 허를 찔렀다며 애국가가 이렇게 비장할 줄 몰랐다고 적었다. 웬지 짠한 마음에 지난 해 어렵사리 구한 들국화 1집을 틀어본다.

전인권의 <애국가·행진>

전인권의 노래를 말하려는 것도 그의 높고 거친 쇠소리를 칭찬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의 노래와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눌하게 툭툭 던지듯 했던 말을 곱씹어보고 싶다. 전인권은 <걱정말아요 그대>에서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라고 노래한 뒤 <애국가>를 시작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 혹시 박사모가 한 대 때리면 그냥 맞으세요. 우리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맞으신 분들 무지 많으세요. 그냥 박사모가 뭐라 그러면 네네 그러고 가세요. 세계에서 가장 폼나는 촛불시위가 되게 합시다. 에— 에— 에—” 

얼핏 들으면 우스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말 속에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보다 더 쉽고 강렬하게 비폭력과 최소주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정농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엽기獵奇에 가까운 박근혜 최순실 사건에 분노하여 길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이 따라야 할 원칙과 윤리를 말하고 있다. 박근혜씨의 거듭되는 패착敗着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직전에 이른 상황에서 절실해진 필승전략이자 지혜을 담고 있다.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

먼저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먹질 하지 말고 발길질 하지 말라는 얘기다. 쇠파이프를 들지 말고 화염병 던지지 말라는 얘기다. 이문영(1986)은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291쪽) “돌만 던지지 말라.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294쪽)고 강조했다. 경찰이 확성기로 비아냥거리거나 물대포를 쏘면서 도발을 해온다 해도 벽돌을 깨거나 경찰차를 넘어뜨리지 말라는 얘기다. 비폭력으로 시민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구호를 외치라는 뜻이다.   

“때리면 그냥 맞으세요”

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그냥 맞으세요”는 한마디로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주문이다.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이문영 2001: 246)이며 “통치자에게 폭력을 당하더라도 약자는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이문영 2008: 68-69). “폭력에 대신하는 것이 어차피 폭력일 수는 없다”(이문영 1986: 290). 그래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이문영 1986: 290, 2001: 105, 246).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이문영 1986: 289). 약자가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이다(이문영 2008: 59). 이러한 어설픈 약자의 폭력이 난동이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이문영 1986: 297). “벌거벗은 힘의 행사를 민이 하는 것도 역겨움을 준다. 비폭력인 강경이 폭력인 강경에 쫓기는 민중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이문영 1986: 81-82).

누가 때리면 그냥 맞으라니 얼마나 허무한 개그인가? 한술 더 떠서 “맞[은]분들 무지 많[아]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심하게 농담던지듯 내뱉는 전인권씨의 이런 말투에 오히려 더 강한 호소력이 있다. 얼핏 무기력하게만 들리는 이 말은 같은 날 서울역에서 박사모 무리들이 쏟아낸 섬뜩한 저주(빨갱이, 종북, 좌파 총살 등)보다 몇 백배 몇 만배 더 강하게 들린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진 조용한 몇 마디가 분기 탱천撐天하여 질러대는 박사모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뒤덮고 있으니 말이다.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이문영 1991: 19). 그래서 이문영(2001)은 “비폭력은 약자의 품격을 높이는 행위”라고 말했나 보다(149쪽). 

행진이라는 “시위“

행진이라는 “시위”는 맞으면서도 옳은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비폭력이란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 따라서 비폭력은 비폭력 투쟁을 뜻한다”(이문영 1986: 294). “때리는 것인 폭력의 반대는 매를 맞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지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이문영 1991: 118). 주권자로서 대리인인 통치자에게 합당한 요구를 하는 일이다.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란 쿠데타 정부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민주화 요구를 하여, 그 대가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다(이문영 2008: 615-616). 이 “민주화 요구”가 옳은 말이며 합당한 진리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가 정부조직과 공식절차를 무시한 것은 법을 따지기 전에 그저 황당할 일이다. 말하자면 “창조정권”의 “창조통치”다. 의도야 어쨋든 그 결과가 공익이 아닌 오직 통치자 측근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박근혜씨가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음에도 검찰의 수사를 회피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통령 노릇을 재개하였다. 주권자의 역린을 제대로 거스른 것이다. 두 주 연속으로(12일과 19일) 백만명이 촛불을 들었고, 한국 Gallup의 여론조사에서 박근혜씨의 지지율이 3주 연속 5푼(5%)에 머물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박근혜씨는 정치로든 법으로든 용서받을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과 여야가 박근혜씨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당연하다. 주권자로서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행동이다. “통치자도 가지고 있는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며 이 이성을 환기하는 말”이다(이문영 2008: 66, 80). 역대 최저치인 지지율 5푼임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외면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대통령 노릇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질없는 짓이다. 박사모 무리들의 집착은 사이비 신도를 연상케 한다. 노무현탄핵소추안을 날치기할 때 노무현씨의 지지율을 빗대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자들이 이제와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기회주의자들의 진면목이 이런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촛불과 장승 

촛불시위는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로 상징되는 폭력시위와 대조된다. 우리나라에서 촛불시위는 2002년 미국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선 효순이 사건” 이후에 보편화된 것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전화나 LED 촛불도 사용되고 있다. 방송과 사진으로 보는 촛불시위는 말 그대로 장관이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듯 조용히 반짝거리다가 어느 순간 바람이 보리밭을 쓸고 가듯 요동치는 모습이라니... 촛불이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추모, 염원, 명상, 평화 등이다. 그래서 촛불은 비폭력을 상징한다.  

이문영(1980)은 “명치유신 때까지도 무인통치를 해 왔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장승은 비폭력문화의 상징”(383쪽)이라고 적었다. 장승은 (1) 솟대처럼 경계를 정하며, (2) 남녀가 같이 있어 평화스럽고, (3)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을 세워 인간화된 군대와 신장된 여권을 시사하며, (4) 장군인데도 전혀 무기를 들고 있지 않고, (5) 갑옷이 아니라 혼례복을 입고 있고, (6) 나무(쇠와 금이 아니라)로 만들어져 집 밖에서 눈비바람을 맞고 서 있다(제도화 부작용이 없다) (이문영 1980: 383-384). 이런 장승은 참는 것이 특징인데,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문화의 정상”이다(384쪽). “나무와 같이 쉽게 소멸해 버리는 육체를 지닌 인간이 참을 때에 그 참음이 덕으로 정신화”한다 (384쪽). 그래서 참는 것은 비폭력과 같은 말이다(이문영 1986: 336). 결국 장승=평화=인내=비폭력이다. 촛불은 설령 화가 나더라도 마음을 다스려 질서와 평정을 되찾자는 것이다. 참고 견디자는 약속이다. 평화를 갈구하는 몸짓이다. 

“가장 폼나는 촛불시위” 

전인권은 “세계에서 가장 폼나는 촛불시위”를 만들자고 했다. 이문영은 평소 한국의 반체제 운동이 다른 나라의 운동과 다른 특징은 비폭력에 있다고 했다(1986: 318, 344).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상대방[통치자]의 뺨 한번을 때려보지 못하고 자기희생”을 했다고 강조했다(1980: 386). 전인권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맞[은]분들”이라고 했다. 장기 집권한 포악한 정권이 무너진 것은 “총을 쥔 정권을 향하여 ‘말함’이라는 비폭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승리였다”(이문영 2001: 88). 이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전인권의 “폼나는 촛불시위”와 똑같은 맥락이다. 가장 무섭고 어려울 때에 “정의에 입각한 말함”(88쪽)을 고집하다 군부독재정권에게 매맞은 선생님의 마음일 터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가수 전인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대정신과 과거 현재 미래의 감정

이문영(1991: 162-165, 2001:79-84)은 시대정신을 설명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원(통합 시간)이라는 시간이 있고, 각각의 시간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고 했다. 과거는 행동의 준칙과 대안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흠모와 그리움을 갖는다(이문영 1991: 163). 현재는 과거지향 운동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통치자의 압제에 저항해야 하기 때문에 한숨을 짓는다. 미래에는 체제 밖의 사람들도 꿈을 꾸면서 역사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에서 이 그리운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한숨짓고, ... 미래에는 그리움과 한숨이 없기를 바라며 꿈을 꾼다”(이문영 2001: 83). 영원이란 시간은 그리움, 한숨, 꿈을 단번에 느끼는 황홀경(감동)을 경험한다. 

전인권의 <행진>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그리움, 한숨, 꿈이 보인다. 과거가 어둡고 힘들었지만 과거를 사랑하고 추억한다. 미래는 항상 밝을 수도 없고 힘도 들겠지만 (꿈이 있어서) 기꺼이 비를 맞고 눈을 맞는다. 그래서 매일 아침까지 그대(동지)와 노래하는 것이다. 下野할 때까지 매일 시위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거야
...
난 노래할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조동진의 <제비꽃>도 마찬가지 시간과 감정을 보여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머리에 제비꽃을 꽂고 새처럼 날고 싶은 작은 소녀였고, 다시 만났을 때는 이마에 땀방울을 달고 작은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야윈 너였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한밤중에도 깨어있어 창 너머로 그윽한 눈길을 보내고 싶은 평화로운 너였다는 이야기였다. 소정 선생님의 시대정신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장필순이 부른 <제비꽃>을 떠올리곤 한다. 

끝까지 비폭력이어야 한다


지금 정국이 순간순간 요동치고 있다. 벌써 몇 주째 시민들은 당혹과 실망과 분노로 아파하고 있다. 하지만 폭력이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된다. 절대 지쳐서도 안된다. 망중한에 좋은 노래와 말씀을 음미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모았으면 한다.  



원문: 박헌명. 2016. 전인권의 <행진>과 비폭력 촛불시위. <최소주의 행정학> 1(11): 1-2.

Comment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2019. 4. 7. 21:25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정태춘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 “우리는 신선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에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우리는 이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여서는 안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라고 노래했다. 그는 92년 장마를 받아낸 종로에서 무더위처럼 답답하고 끈적거리는 우리의 하루살이를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헬조선”이란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으로 들리는 시절이다. “갑질”로 상징되는 가진 자의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 속에서 힘없는 자들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고 있다. 너나없이 벌어먹고 살기가 빡빡해졌다. 동무가 일하는 회사로 찾아가 반갑게 저녁을 먹고 술한잔 걸치는 일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컴퓨터와 손전화가 보편화되고 먹을거리가 널려있건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웃음보다는 긴장과 짜증이 묻어난다. 누구나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쉴 새없이 움직이도록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 서로가 부담을 권하고 술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선한 꾀부림”도 허락되지 않으니 생산성은 높아졌을 망정 인심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나 살기도 바쁜데 남에게 눈길을 줄 틈이 어디 있을까.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무엇에 쫓기듯, 무엇에 이끌리듯이 우르르  몰려가고 몰려오는 모습에서 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와 그들의 “희망없는 짐짝”을 본다. “긴긴 터널 길”에는 코딱지만한 여유도 없이 장마철의 무더운 열기에 헐떡이는 사람들 뿐이다. 그 헐떡임이 서로에게 열기가 되어 서로의 숨을 옥죄고 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아귀다툼 속에서 순간 순간 숨을 참고 쉬면서 버티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와 참지 못하는 사회

지난 수년 간 “묻지마” 혹은 “홧김에”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채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힘센 자들이 설계하고 추진한 무한 경쟁에서 뒤쳐지고, 상처받고, 고통받고, 끝내 내쫓긴 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인 것같아 안타깝다.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스런 본질을 교묘하게 감춘 경쟁력(국제화)이라는 허울이 아니던가. 가해자들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솟구치는 분노를 삭힐만한 기회도 여유도 없으니 더 이상 멀쩡한 정신줄로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뿐만 아니라 각자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조금이라도 신경을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같은 폭탄이 되어 전철에 몸을 싣고 있다.  

힘센 자들은 멀찍이서 경마를 즐기듯 약자들만의 무한 경쟁을 즐길 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칼부림하는 광경을 흡족스레 바라볼 뿐이다.  집값을 올려놓으면 아파트 분양권을 두고 아귀다툼이고 치솟은 전세보증금을 채워넣느라 가쁜 숨을 헐떡여야 한다. 말이 가계대출이지 정권이 빚을 내라고 권하고 대부업체가 밤낮으로 광고질이다. 너도 나도 빚더미에 코를 꿰어 버둥거리고, 가진 자들은 고리대질로 잔치판을 벌인다. 모두가 즐기는 축전祝典이 되지 못하고, 한쪽은 잔치판이고 다른 쪽은 줄초상인 축제祝祭가 된다. 

이렇게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잠시도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그들끼리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하는 이유가 있다. 약자들이 합리성과 인내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힘센자의 “갑질”(힘센자가 바로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지 못하고 서로 폭력을 사용하도록 부추기기 위함이다. 그래야 강자들이 독식하는 약육강식과 “갑질”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장승, 비폭력, 그리고 참는 것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아마도 “공자왈 맹자왈” 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구태여 윤리와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니 따분한 얘기일 것으로 지레짐작할 것이다. 또한 “초월”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냄새만으로 초월윤리와 최소주의가 실생활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라고 속단하기 쉽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폭력과 자기희생은 참으로 어려운 규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선생님의 행정철학과 사상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공기와 물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좀 모호하게 저작 여기저기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선생님의 행정이론틀을  떠바치는 너럭바위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참는 것이고 견디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한다고 본다(Park 2015: 293-294). 먼저 선생님께서 장승의 특징을 비폭력으로 설명하신 대목을 옮겨보자.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 명치유신 때까지도 무인통치를 해 왔던 일본과는 달리 장승은 비폭력 문화의 상징이다. ... 장승의 특징은 참는데 있다.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 문화의 정상을 말한다”(이문영 1980: 383-384). 

한국의 장승은 솟대처럼 지역의 경계를 정하며, 평화스럽게 남자(天下大將軍)와 여자(地下女將軍)가 같이 서 있으며, 장군인데도 활이나 칼이나 창을 안들고 있으며, 갑옷이 아니라 혼례식 때 입는 예복을 입고 있으며, 집도 없이 밖에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돌이나 쇠나 금이나 은이 아닌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다(이문영 1980: 383-384). 이러한 장승의 특징은 참는 것인데, 그 재료가 쉽게 사그러지는 나무이기 때문에 장승의 참을성을 돋보인다(이문영 1980: 384). 그래서 장승이 비폭력 문화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는 것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모두라고 했고, 이것이 바로 비폭력이라고 했다(이문영 1980: 384; 이문영 1986: 336). 약자는 참아야 한다는 것이며 참지 않고서 비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참는다는 것이 초월윤리, 특히 비폭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약자의 대응방법은 참는 것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인내다(이문영 2001: 348). 참는 것이며 주먹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이다. 선생님은 노동자(약자)는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이문영 2001: 350)고 말씀하셨다. 약자는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야 할 뿐 아니라 강자의 폭력을 견제하여 약자를 보호할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이문영 1996: 664). 비폭력에서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과정을 끈질기게 참아내야 한다(이문영 2001: 349). 이런 맥락에서 초월윤리는 약자의 대응전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이 성숙되고 인간이 완성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이문영 1991: 32). 

“부자의 죄를 극복하는 노동자의 대응방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내(忍耐)하는 것이다. 부자가 하는 짓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인내해야 할 하나요, 참된 비폭력을 시작으로 해 개인윤리, 사회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의 덕목까지도 갖춰나가야 하는 긴 여정의 인내가 바로 인내해야 할 다른 하나이다”(이문영 2001: 348-349). 

위의 인용에서 “부자가 하는 짓[폭력]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아래 인용은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머리”는 지식과 기술을, “마음”은 누구나 세상에 날 때부터 갖고 나온 “天賦의 마음” (이문영 1991: 44)이다. “天賦의 마음”이 있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를 증오하고 저주하기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가 원색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하에서도 국민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아닌 비폭력으로 대응함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이 일차적으로 사용하는 자산은 머리이며 그 다음이 마음이며 그리고 그 다음은 포악한 것과 포악한 것을 고쳐나갈 것을,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이다”(이문영 1986: 335).

요컨대, 참는 것은 이문영의 초월윤리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참지 않고서는 초월윤리를 실천할 수 없다. 특히 참는 것은 비폭력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우며, 차라리 비폭력 그 자체에 가깝다. 그렇다면 약자는 대체 무엇을 참아야 하는 것일까? 

이문영(1996)은 관절염이 낫는 것에 비유하여 (1) 우선 당장 죽을 만큼 아픈 것을 참아야 하고, (2) 그 다음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662, 664). 아픈 것을 참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자의 권력남용과 포악을 당하여 화가 나고, 분하고, 쓰라린 심정을 견뎌내는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는 난동(본능적인 감정의 폭발)을 억누르는 일이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아픔을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욕심을 자제하고 버리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동기가 이해관계인데, 사람들은 그 욕심을 합리성이라는 거죽으로 덮어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곤 한다(이문영 1991: 120).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타인(공익)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안해도 되는 일도 기꺼이(천부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국 참아야 할 것은 (1) 감정과 폭력(난동)이고, (2) 자신의 이해관계를 끈질기게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다(표 1).  

당장 아픈 것을 참아야 한다

약자는 먼저 강자의 폭정을 견뎌내야 한다. 악한 강자는 권력을 남용하고, 불법 탈법 행위를 저지르고,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여 약자들을 못살게 군다. 힘없는 자들은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하루하루를 괴롭고 무기력하게 버텨야 한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약자의 몫이다. “그냥 악한 세상이 아니라 구세력이 통치하는 가장 악한 세상”을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6: 662). 

약자는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이문영 1986: 335). 이문영의 비폭력은 주먹질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이고, 불필요하게 강자의 감정이나 심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하는 것이고, 강자조차도 양심에 찔려 차마 거부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인 기준 (법, 절차, 상식, 합의 등)에 준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Park 2015: 290-291). 악한 정권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순응하거나 무참하게 매를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물리력으로 대들지 말고 당당하게 계속 이치에 맞는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118). 이렇게 폭력을 참고 말하는 것이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포악한 정권이 쥐고 있는 것은 무기와 폭력이지만, 약한 국민이 갖고 있는 것은 악한 정권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이기 때문이다. ... 오랜 기간 끌었던 포악한 정권들이 무너진 것은 총을 쥔 정권을 향하여 ‘말함’이라는 비폭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승리였다”(이문영 2001: 88).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참아야 한다. 악한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생채기가 나고 피가 나고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그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1) 어쩌면 화가 나고 분하고 증오심이 일고 복수심으로 몸서리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른다.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악다구니를 써서 강자에게 대든다 해도 약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증오와 복수에 사로잡힌 난동은 감정을 쏟아낸 잠시의 시원함을 줄 뿐이다. 강자의 폭력 리듬을 맞춰주고 장단을 맞춰주는 어리석은 행위다. 어리석은 난동 뒤에는 더 고통스러운 강자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일 뿐이다 (이문영 1986: 297).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는 약자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대들 것을 예상하고, 또 그것을 은근히 바란다.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는 강자가 즐겨하는 폭력 리듬을 깨고 합리성에 박자를 맞추어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문영의 비폭력이다. 어차피 약자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이문영 2001: 148). 비폭력으로 맞서야 약자가 일단 보호가 되고, 그 다음에 약자가 성장을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8-19).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와 복수를 심중에 담고 매 순간을 사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다. 몸이 건강하다 해도 마음이 괴롭우면 하루하루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편안하고 행복하기는 커녕 천수를 누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약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고통을 견뎌내야 하고 분노를 참아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장 나쁜 세상의 구원을 기다리는 좀 더 밝으며 긍정적인 참음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이문영 1996: 664)고 적으셨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당장 아픈 것을 일단 참은 뒤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강자의 폭력을 견제할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가장 악한 세상에서 가장 시달림을 받을 자가 최소한 보호를 받아 나갈 구조가 생성되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이문영 1996: 664). 전자가 이문영의 “비폭력”에서 견디는 것이라면, 후자는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비폭력은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의 전제가 된다(이문영 2001: 149). 악한 강자의 포악함은 짧은 시간 내에 고쳐지기 어렵다. 또 아픈 것을 참는 것과는 달리 개인의 이해관계와 욕심을 하나하나 버려나가야 한다. 약속(합의사항)을 지키고, 타인을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과정이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초월윤리를 인사행정에 적용한 예를 살펴 보자(이문영 1996: 563-601; 이문영 2001: 419-431). 먼저 비폭력은 엽관주의(spoils system)를 거부하고 직업공무원제를 정착하는 일이다. 계모가 팥쥐를 편애하고, 쿠데타 정권이 자기 핏줄인 육사출신을 우대하고, 측근들을 낙하산에 태워 산하 기관장으로 내려보내는 일은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다. 개인윤리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경우에 맞게 공정하게 인사관리를 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인간 관계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사회윤리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과 외에 출신지역, 성별, 학력, 재력 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용평등주의이며 소외된 국민을 등용시키는 일이다. 자기희생은 공무원들이 단결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일을 용납하는 것이다. 

개인윤리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길은 결국 자기 몫을 부당하게 챙기려는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친 후에는 나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천부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따돌림시키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를 긍휼하게 된다. 따라서 정당한 내 몫까지도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주게 된다. 할 수 있어도 스스로 하지 않으니 (정당한 내 몫을 내어주니) 절제라 할 수 있고, 다른 목소리라 하여 내치지 않고 묵묵히 귀기울이니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거기에 있다는 이해관계, 이기심, 욕심을 버리는 것이 참는 것이다. 이것이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 일이다.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이러한 인내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이문영 1986: 335). 봄날 새순이 온전히 자라기 위해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성장을 해야 한다. 조금 날씨가 풀렸다고 해서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여린 새순은 얼어죽기 십상이라고 선생님을 말씀하셨다.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이문영 1991: 19).

특히 마지막 순간에 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크게 될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끝을 잘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그래서 “사람은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19), “말년이 좋으면 청장년시대의 허물을 덮을 수 있다” (이문영 1991: 357)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친일행위를 한 仁村 김성수씨가 말년에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을 사직하고 민주당의 씨앗을 뿌린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이문영 1991: 357). 또한 밥을 짓는데 마지막 1-2분을 못참으면 설익어서 못먹는다고 하셨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참는 자는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 더 많이 보일수록 철저하게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이문영 1986: 298). 

왜 하필 마지막이 중요할까? 아마도 가장 방심하기 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찰라의 방심이 오랜 시간 견디고 기다려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처럼 당장이라도 군부독재가 끝장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같은 분위기를 말한다. 정권이 위기에 몰려 덜 무서울 때여서 기회주의자들이 인기에 편승한 발언을 쏟아내고 대중의 요구가 과다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밥솥에서 김이 나오고 구수한 밥냄새가 풍겨올 때 마치 밥이 다 된 것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뜸들이는 것을 잊고 뚜껑을 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이럴 때일수록 끈질기게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이 다 될 때까지 꾹 참고 있어야 한다. 피부병도 한참 나아갈 때보다 나아가는 마지막 고비가 더 힘들다. 가려움과 아픔과 성적 쾌감이 교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 마지막 순간을 참지 못하고 상처를 건드리거나 긁으면 그동안 힘겹게 견뎌온 시간이 허사가 된다. 결국 마지막 순간의 방심을 경계해야 하며 끝까지 합리성에 근거한 초월윤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약자가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하다. 끈질기게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고 욕심을 버리면서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윤리에 귀의한다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1) 폭력을 기반으로 한 정권은 강하게 보이지만 실은 정당성이 없어서 법을 무시하고 폭력에 의지해야 할만큼 허약하고, (2) 나중에는 악법을 새롭게 만들어 정권유지를 도모하지만 그 악법마저도 지키지 않게 되고, (3) 이런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못난 정권은 스스로 망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86: 289, 297, 340; 이문영 2008: 346-347). 시민들의 비폭력 투쟁으로 악한 정권은 스스로 붕괴된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하면, (1) 거의 넘어가던 정권이 정당성을 회복하는 빌미를 주게 되고 (2) 더 강경한 폭력 정권이 출현할 유인을 제공하며, (3) 설령 폭력 정권이 무너져도 새 질서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이문영 1986: 297-298). 그래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악한 자가 망한 후의 [사회]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 (이문영 1986: 289).

그러나,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악한 강자가 약자를 파괴하고 급기야는 자신까지 파괴하는 비극보다는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강자의 악한 통치를 견제하여 피아 모두를 살려내는 희극이 이루어내기가 훨씬 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문영 2001: 203-204). “약자는 악한 통치를 그때그때 견제하기가 힘들고 시간도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04).

하지만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먼저 시민들이 성숙한 인격과 의식을 가져야 하고, 강자의 폭력(보복)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ark 2015: 294). 또한 강자의 폭력에 휘둘린 약자는 차분히 합리성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짐짝들”은 하루하루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날이 서 있어서 폭발 직전이다. 강자의 갑질과 아등바등하는 일상에 지쳐서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황이다. “헬조선”, “묻지마”,  “홧김에” 등이 약자들의 인내가 바닥임을 말해준다. 악한 강자가 아니라 이웃을 비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가야 할 길이 끈질기게 참고 버티는 것이니 어찌하랴. 분노를 억누르고 비폭력에 의지하고, 욕심을 버리고 초월윤리로 귀의하는 수밖에. 이를 악물고 서로 격려하고 허물을 감싸주면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각주

1) 물론 약자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다가오는 폭력을 회피하는 방법이다(이문영 1980: 366). 가만히 앉아서 칼맞고 총맞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참고문헌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 1(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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