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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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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벌써 두 해를 넘겼다. 인도에서 발생한 델타변종이 3차 유행을 이끌더니 남아프리카공화국발 오미크론(Omicron)이 4차 유행에 불을 질렀다. 모든 나라가 방역수준을 높이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 방역은 잘하고 있다

수구언론만 보면 한국의 코로나 방역은 완전 실패다. 참사다. 이미 5천만명이 다 죽어 나자빠진 듯하다. 이런 호들갑이 다 있을까?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를 폐쇄하지 않았다고 난리고, 방역마스크를 빼돌려 대란이 벌어졌다고 법석이다. 백신계획을 발표해도 계약이 늦었다고, 물량이 부족하다고 난리다. 막상 접종을 시작하니까 백신이 위험하다며 동네방네 나발을 분다. 방송에 나와 100% 안전한 백신을 내놓으라고 생떼다. 소망과는 달리 접종률이 급격하게 높아지니까 망연자실하더니 소아청소년들에게 접종하려니까 위험하다며 또다시 게거품을 문다. 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눈을 좀 밖으로 돌려보자.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12월 27일 현재 우리나라는 82%가 백신접종을 마친 가운데 지난 1주 동안 확진자가 4만명(매일 평균 6천명, 인구 만명당 8명)이 발생했다. 접종완료율이 60%인 미국은 118만명(만명당 35명), 접종률 69%의 영국은 53만명(만명당 78명), 72%인 프랑스는 48만명(만명당 75명), 70%인 독일은 20만명(만명당 23명), 74%인 이탤리는 26만명(만명당 42명)이 신규로 확진되었다. 최근 확진자수가 급격하게 떨어져 국민들마저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일본은 접종률이 78%(세계평균은 46%)다. 지금까지 COVID-19로 사망한 사람은 미국이 81만명(만명당 23명), 영국이 15만명(만명당 22명), 프랑스가 12만명(만명당 18명), 독일이 11만명(만명당 13명)이다. 일본은 1만 8천명(만명당 1.4명)이고 우리나라는 5천 3백명(만명당 1명)이다. 특히 백신을 개발하지 못했고 접종을 늦게 시작했지만, 세계 최고수준의 접종 속도와 완료율을 보여주고 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K-방역의 성과는 놀랍다.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위용이다.

도대체 K-방역이 폭망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위의 수치만 따진다면 당신은 어느 나라에 살고 싶은가? 오미크론 공포가 확산되자 PCR검사를 받으려는 행렬이 길어지고 있다. 혹한에 몇시간을 기다렸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배불러 터진 소리다. 한국처럼 물쓰듯 검사를 공짜로, 전투적으로 해주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네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기다려도 좋으니 나도 한번 검사를 받아봤으면 좋겠다.

코로나 방역은 공공보건을 생산하는 공역이다

이른바 K-방역은 정치가 아닌 과학(전문가)이 주도하고, 공격적으로 검사와 격리를 지속하고, 경제와 균형을 모색하고,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수출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였고, GPD성장률은 2년 연속 선방하고 있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의료진도 시민들도 지쳐가고 있다. 긴장감이 줄고 있다.

특히 백신접종 완료율이 8할이 넘었지만 아직도 접종을 꺼리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아청소년의 확진이 늘어나면서 백신접종을 권장하고 있지만 자녀들의 접종을 머뭇거리는 부모들이 있다. 백신패스를 도입하는 것을 무리지어 반대하기도 한다. 백신을 안맞았다고 식당에서 밥을 못먹고, 학원을 다니지 못한다니 말이 되냐며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확진이 되었을 경우 어떻게 식당과 학원에 책임을 질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백신을 안맞을 자유를 말하지만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손님을 받지 않을 업주의 자유에는 입을 닫는다. 백신을 맞지 않은 손님과 같은 공간에서 밥먹거나 공부하기를 꺼리는 접종완료자의 건강과 자유는 말하지 않는다. 이기주의자들이다. 나는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남들은 무조건 내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의무만이 있다는 “자유민주주의”다. “살인백신 강제접종”이라니... 군대나 학교에서 사망자가 생긴다고 해서 “살인국방 강제입대,” “살인교육 강제입학”이라 할 것인가? 천둥벌거숭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난동이다.

전염병은 서로 접촉을 피하는 것이 요체다. 많이 모이지 말고, 일정한 거리를 지키고, 마스크를 쓰고, 환기를 하고, 잘 씻어야 한다. PCR검사를 받고 백신을 접종받아야 한다. 확진자를 가려내고, 격리하고, 치료해야 한다. 이런 것이 방역이다. 일상이 어그러지고 불편하고 마음이 답답한 일이다. 공동체 구성원이 인내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방역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자연스레 무임승차 문제가 생긴다. 방역의 혜택은 공동체 전체가 누리고, 방역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방역조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공짜로 혜택을 보려는 단순한 얌체짓이 아니라 공공의 보건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자유를 빙자한 무책임하고 부주의한 행동으로 식구와 친구와 이웃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고약한 이기주의자의 심보다.

공역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하라

여야는 지난 1년 간 재난지원금을 주네 마네, 누구에게 얼마나 언제 주네, 재정건전성이 어쩌니 밀고 당겼다. 한마디로 방역조치로 생계가 어려워졌으니 구휼미를 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휼이 아니라 코로나 방역이라는 부역賦役에 협조한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다. 정부의 방역조치로 영업을 하지 못한 자영업자의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역公役에 대한 최소한의 몫을 지불하는 일이다. 임금이나 영업손실 그대로를 보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생존을 위해 방역조치를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은 최소한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기준은 수입이나 영업손실이 아니라 공역에 성실히 참여했는가이다. 방역에 적극 협조한 개인과 기업과 자영업자에게는 격려금과 혜택(예컨대, 영업시간 연장)으로 보답한다. 위반자에게는 부역을 거부하고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 책임을 벌금, 행정처분, 손해배상 등으로 철저히 물어야 한다. 또 코로나 장기화에 대비하여 K-방역을 생활화하고 산업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방역 인력을 육성하여 확충하고, 관련 기술(검사, 백신, 치료제 등)을 개발하고 고도화해야 한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2. 코로나 방역에 협조한 공역에 보답하라. <최소주의행정학> 7(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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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3일 민주당 대통령선거 경선에 나섰던 정세균 후보가 사퇴했다. 지지율은 제자리 걸음인데 뽀족한 묘수가 보이지 않자 호남경선을 앞두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국회의원, 장관, 당대표, 국회의장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두루 역임한 정후보여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미치지 못함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깨끗하게 물러선 신사 정세균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정치신사 정세균의 선공후사

정씨는 기자회견에서 담백하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족한 저를 오랫동안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평당원으로 돌아가 하나 되는 민주당,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백의종군하겠습니다. 나라와 국민과 당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겠습니다. 함께 뛰던 동료들께 응원을, 저를 돕던 동지들께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의 진심에는 미움과 원망이 없다. 이런 저런 가시돛힌 공방으로 마음이 상했을 법도 한데, 섭섭함은 가슴에 묻고 고마움과 감사만을 담았다. 나라와 국민과 당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두고두고 갚겠다고 했다. “나는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고 ...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고 적은(1991: 22) 소정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또 그의 뜻에는 사사로움이 없다. 민주당과 나라를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 사퇴한다 해서 그가 뒷주머니에 챙길 수 있는 이익이 없다. 그는 민주당의 성공과 승리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며, 백의종군하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를 깎아내리거나 특정 후보를 편들지 않았다. 다만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고 경쟁했던 동료를 응원했고, 도움을 준 동지들에게 감사했다(1996: 429). 한마디로 선공후사先公後私다.

선공후사를 뒤집은 이낙연의 사퇴

이낙연 후보는 지난 9월 8일 “민주당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정권재창출에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모든 것을 던져 정권 재창출을 이룸으로써 민주주의와 민주당, 대한민국과 호남, 서울 종로에 ... 진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사퇴는 뜬금없고 실망스럽다. 불쾌하다. 대의를 빙자하여 유권자를 우롱한 것이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이기적인 선택이다.

우선 사퇴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정말 정권 재창출이 간절하여 모든 것을 던질 각오였다면 이씨는 경선 전에 사퇴했어야 했다. 자신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서 이재명씨에게 경기도 지사직을 내려놓으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다. 법과 당규와 합의사항도 아닌 일을 강요했다. 경우없는 짓이다. 이씨의 사퇴는 경선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국면을 바꾸기 위해 띄운 승부수다. 궁여지책이다. 자기 주장의 일관성 부족을 채우고, 경쟁자에게 사퇴하도록 압박하기(내가 사퇴했으니 너도 사퇴해) 위한 술수다. 유리한 분위기였으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패다.

둘째, 종로구 국회의원이 왜 광주에 가서 사퇴를 발표한단 말인가? 본인 말대로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사람들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종로구민아닌가? 광주시민에게는 전혀 생뚱맞은 짓이고 서울시민에게는 그저 황당한 짓이다. 느닷없이 사퇴선언을 하기 전에 이씨는 먼저 종로구 유권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가장 먼저 광주시민에서 대선승리를 보고하겠다는 망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체 종로구민을 뭘로 보고...

세째, 누가 봐도 광주전남경선을 앞두고 고향에 가서 지역감정을 들쑤신 것이다. 16일 다시 광주를 찾은 이씨는 “광주에서 반전을 일으켜 결선 투표로 가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십시오. ... 광주가 저에게 지지를 보내주지 않으면 제 역할은 여기서 끝납니다”라고 읍소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광주가 자신을 키웠으니, 광주가 책임지라는 소리다. 안그럼 당신이 키운 인물은 끝장난다는 협박이다. 의원직도 내놓았다며 동네사람 들으라는 듯 항아리에다 대고 울먹이는 신파극이다. 용돈을 안주면 죽어버리겠다며 숫가락을 내던지고 떼를 쓰는 못난 자식놈이다. 엉덩이에서 불이 나도록 후려패주고 싶다. 명색이 국회의원, 도지사, 국무총리까지 지낸 자가 대선승리도 아닌 고작 결선투표에 목을 맨단 말인가.

네째, 사심이 지나쳐 일을 그르쳤다. 말은 많지만 내가 아니면 절대 안된다는 것 아닌가. “저의 모든 것을 비웠다. 진정성을 받아달라”고 강변했지만, 그는 유권자와 당과 동지들과 보좌진을 비우고 자신의 욕심을 채워넣었다. 자신의 의정활동을 도왔던 보좌진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민주당은 내년 대선과 함께 어려운 보궐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자신의 이득을 따진 것이지 손해를 무릅쓰는 최소주의자의 간절한 결단이 아니었다(1980: 363). 이씨는 “정권 재창출이라는 역사의 책임 앞에 제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을 던지기로 결심”했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직이 유권자에 대한 책임이 아닌 개인의 권리(재산)란 말인가? 아연실색이다.

찬물을 끼얹은 이낙연의 뒤끝

이씨는 광주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도덕적이지 않아도 좋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민주당과 보수야당이 도덕성에서 공격과 방어가 역전되는 기막힌 현실도 괜찮습니까?”라며 호소했다. 불안한 후보가 아닌 안심되는 후보를 내놔야 한다며 에둘렀지만, 누가 들어도 경쟁자인 이재명씨를 헐뜯는 소리다. 추미애씨의 일침대로 수구세력의 의혹과 말법으로 아군을 공격한 셈이다. 10월 10일 경선결과가 발표된 직후 이씨는 이지사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잔치가 어수선해졌다. 무효표 계산을 핑계삼아 침묵을 지켰다. 경선 중에 이미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었다. 이씨는 극렬지지자들의 경선불복을 사흘동안이나 방치하다가 마지못해 당무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글을 남겼다. 지저분한 뒤끝 때문인지 여론조사에서 이지사는 경선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못먹는 밥에 재를 뿌렸으니 속이 시원한가? 이낙연씨에게 그가 내뱉은 언어로 묻는다. 그대는 “5.18영령 앞에 ...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며 희생하고 헌신하셨던 선배 당원들한테 부끄럽지” 않은가?

 

인용: 박헌명. 2021. 정세균의 사퇴와 이낙연의 사퇴. <최소주의행정학> 6(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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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1014735.html

    [사설] ‘경선 불복’ 논란 빚는 민주당, 갈등 조속히 매듭지어야. 한겨레신문. 2021. 10. 11

  2.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14738.html

    심우삼. 민주 “이재명 후보 확정”…경선 불복 움직임에 쐐기. 한겨레신문. 2021. 10. 11.

바야흐로 대통령선거철이다. 여야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각종 실언이 쏟아지고 있다. 찌르고 막는 자들의 사생결단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맞든 틀리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잠결에 날벼락 맞은 황교익

지난 13일 이재명씨가 음식평론가 황교익씨를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내정하자 여야 대선 후보들은 “보은인사”라며 비난했다. 그렇찮아도 이씨가 도지사직을 유지한 채 경선에 참여하는 것이 불공정이라며 시비를 걸던 터였다.

급기야 17일 이낙연 선거대책위원회 부대변인인 신경민씨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황씨는] 일본 도쿄나 오사카 관광공사에 맞을 분이 아닌가 생각이 되요. ... 일본음식에 대해서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한국음식은 거기에 아류다...”라고 말했다. 관광공사는 커녕 맛집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깎아내렸다. 다른 관계자는 “경기맛집공사”라느니 누가 더 낫겠다느니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이에 황교익씨는 이낙연 후보측이 “일베”의 친일 프레임으로 자신을 공격했다고 분개했다.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보은인사가 아니라 법절차에 따라 공개모집에 참여해서 최종후보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친일 프레임을 반사한다면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이낙연씨는 일본 총리에나 어울린다고 일갈했다. “청문회 전까지 이낙연의 정치적 생명을 끊는데 집중하겠다”고 적었다.

스카이가 아닌 중앙대를 졸업한 죄인가?

나는 방송에 나온 황씨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 흥분할까 의아했다. 이해찬 전대표가 나서서 격앙된 황씨를 위로하고, 황씨가 후보를 사퇴하면서 공방은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혀를 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권의 말폭탄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왜 애꿎은 일반시민(연예인에 가깝지만)에게 던진단 말인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셈이다. 황씨의 항거가 납득된다.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방송에 출연한 신경민씨는 남 얘기하듯 어물쩍 넘어갔다. 여당 전체에 폭탄을 던진 어리석음을 반성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누구도 신씨나 이낙연씨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송영길 대표도 황씨의 발언이 금도를 벗어났다고 말했지만 신씨의 발언은 문제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진보의 탈을 쓴 기득권의 힘자랑일까?

만일 신씨와 이낙연씨가 스카이를 졸업하거나 언론인을 거쳐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황씨와 이재명씨가 중앙대학교가 아닌 스카이를 졸업했다면 어땠을까? 첫째, 보은인사 얘기는 애초부터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언관政言官계를 장악한 스카이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먹었기 때문이다. 음식평론이나 하는 “딴따라”가 무슨 사장이냐는 힐난은 핑계일 뿐이다(이런 식이면 “법나부랭이”들이 무슨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말인가). 둘째, 신씨와 이낙연씨는 “개비”들에게 처참하게 물어뜯겼을 것이다. 스카이 선후배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등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조리돌리고 얼굴에 “非”라고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반상의 법도를 뒤집는 역적을 가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비개비”인 주제에 언감생심 개비의 밥그릇을 노렸다는 것이 황씨의 죽을 죄다.

욕설이라고 꼭 말폭력인가?

황씨의 발언 자체는 과한 것이 사실이다. 잠결에 날벼락을 맞은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짐승이라느니 정치생명을 끊겠다느니 하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신씨의 발언은 사실에 기초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황씨의 인격과 호구糊口를 뭉개는 폭력이었다. 인간의 최소한을 부정한 셈이다. 어쩌면 황씨의 대응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일는지 모른다. 지금 상황은 강도가 칼을 들고 위협하다가 집주인에게 맞았는데, 경찰이 집주인을 살인미수라며 땅바닥에 패대기를 친 것이다. 알고 보니 강도와 기자와 경찰이 스카이인 상황이다. 그들은 황씨를 노리개로 쓰다 시궁창에 버린 것이다. 야만이다.

이재명씨가 형수에게 욕설을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어머니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며, 위기를 모면하려다 벌어진 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이런 물리력과 욕설을 맥락없이 떼어 내어 비난하는 것은 비열하다. 하지만 설훈씨는 녹음을 들어보면 이씨의 인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실망스럽다. 설씨였으면 그런 상황에서 법을 따지고 품격을 따졌을까?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엄중하게 훈계질을 했을까? 설씨나 이낙연씨는 어머니가 죽든 말든 나는 절대로 욕설이나 주먹질을 안했다고 뿌듯해 할 것인가? 비폭력을 강조하신 함석헌 선생님도, 소정 선생님도 권력기관의 포악한 폭력질에 악다구니를 쓰셨다고 했다(2008: 401). 인간의 최소한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물리력과 욕설을 폭력이라 말할 수 없다.

비폭력은 법과 상식을 지키는 일이다

왜 이재명씨에게 지사직 사퇴를 요구하는가? 왜 양승조·최문순 지사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나? 국회의원은 왜 사퇴하지 않나? 지난 대선경선에 나섰던 홍준표·안희정 지사는 어떠한가? 성남시장이던 이재명에게는 왜 요구하지 않았나? 경남지사를 사퇴하고 욕먹은 김두관씨는 뭐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공정을 원하는가? 돈많으면 버리고, 잘생기면 망가뜨리고, 말잘하면 어눌해져야 하나?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대통령후보는 선거 90일 전까지 지사직을 그만둬야 한다. 이재명씨는 법대로 하면 된다. 원희룡씨가 제주지사를 사직한 것은 그의 맘이다. 하지만 “지사찬스”를 쓰지 말라고 이재명씨를 압박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씨에게 사퇴를 종용하는 평론가들도 마찬가지다. 말이 아니라 말폭력이다. 정말 후보가 공직을 유지하는 것이 불공정하다면 공직선거법을 비판하고 개정할 일이다. 선거와 관련한 불법행위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이다. 상식이다. 이재명씨를 둘러싼 시비에서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냥 이재명이기 때문에 벌어진 말폭력이고 이전투구다. “비개비”여서 차별받는 서러움을 보여준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세력이 누군지를 똑똑히 보여준 패악질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1. 황교익은 무슨 죄를 지었나?. <최소주의행정학> 6(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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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대전이 발발한 지 2년이 되었다. 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된 2019년 8월 9일부터 장관으로 임명된 9월 9일을 지나 스스로 “검찰개혁의 불쏘시개”가 되겠다며 사퇴한 10월 14일까지 개혁세력과 기득권세력이 각각 서초동과 광화문을 달궜다. 조국과 윤석열은 양진영의 기싸움을 상징한다. 지금 조씨는 수렁에 빠진 자신과 식구들을 지키는데 사활을 걸고 있고, 조씨를 짓밟고 우뚝 선 윤씨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조국대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조국의 전쟁과 최소주의

서해맹산誓海盟山으로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운 조씨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조폭 두목이 믿었던 행동대장에게 어이없이 난도질을 당한 느낌이랄까? 처자식은 물론이려니와 동생(조권)과 당질(조범동)과 주변 사람들(최강욱, 노환중 등)까지 처참하게 발렸다. “니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며 계속 쑤셔댔다. 유시민씨가 규정했던 몹쓸 가족인질극이다.

검찰은 100여 군데를 압수수색하고 수사와 재판을 질질 끌면서 권력형 범죄, 가족사기단, 파렴치라는 낙인을 찍었다. 수구 야당과 기자들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조씨 일가를 진창에 몰아놓고 마음껏 조졌다. 한 집안을 풍비박산風飛雹散낸 검찰과 수구세력의 기세에 지인들은 감히 조씨의 편에 서지 못했다. 양심을 거슬러 조씨를 외면하고 자기 목숨을 건사하기에도 바빴다. 조씨 식구들은 억울함과 미안함과 고립감으로 손발이 묶인 채 쏟아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아내야 했다. 지인을 원망하고 손가락질하는 자와 지인에게 버림받는 자 모두 인간성이 파괴되는 악랄한 짓이다. 수사가 아니라 인간 학대와 인격 학살이다.

이렇게 역적을 때려잡듯이 해서 기소한 정경심 교수의 혐의는 자녀입시, 사모펀드, 증거인멸에 관련한 15개였다. 조씨 자신은 자녀입시, 웅동학원, 딸장학금 등과 관련한 11개 혐의로 기소되었다. 말이 26개 혐의이지 사실 같은 사건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해서 늘린 숫자다. 정말 눈이 나쁜 황새의 사냥법인가? 검찰은 입시 당사자인 조씨의 자녀는 정작 기소하지 않았다. 비열한 압박이다. 또 “조국펀드”로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중범죄라며 열을 올렸지만, 그 바닥에서는 푼돈인 10억원으로 뭘 어쨋다는지 하품만 나온다. 권력형 범죄라더니 특수부 검사라는 자들이 인턴활동을 몇 시간 했는지, 학회에 참석했는지, 표창장이 위조되었는지를 따지고 앉아 있다. 설사 모든 혐의가 사실이라 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조국 교수가 사법개혁을 말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달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되지 않았다면 그의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은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사표를 내지 않았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질로 끌려갔을 것이다. 또 조국이 아니어도 누구든 검찰을 건드리겠다는 자는 똑같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검찰개혁을 추진한 것 자체가 죄라는 소리다. 사모펀드니 인턴증명서니 표창장은 다 핑계고 구실이다. 이래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서초동과 여의도에 몰려가 촛불을 든 것이다. 누구도 조씨 일가처럼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해서는 안된다는 공포와 분노다. 국민이 원하는 개혁을 거부하는 검찰에 대한 주권자의 노여움이다.

조씨의 지난 2년은 고난 그 자체였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휘두르는 폭력을 참고 견디어 왔다. 그렇다고 대책없이 맞고만 있거나 꼼수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자신과 식구들에게만 가혹한 검찰과 야당과 언론과 재판관에게 법과 상식과 사실과 논리로 대응해왔다. 외면받고 비난을 받는다 해도 꼭 해야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감정을 누르고 “하나하나 따박따박” 법절차를 진행했다. 최소주의 비폭력이다. 조국의 전쟁이 그만의 전쟁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정치와 검찰주의

윤석열씨는 박근혜 정권에서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을 수사하다 좌천되는 수난을 당했지만 검찰총장으로서 조씨 식구들이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주지 않았다. 최소주의자의 품격이 아니다. 후보자의 자택을 기습奇襲으로 압수수색한 8월 27일, 윤씨는 박상기 장관을 만나 조씨의 낙마를 요구했다고 한다. 장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임명권자에게 무력시위를 한 셈이다. 누가 뭐래도 자기 멋대로 찔러대는 낭만자객의 만용蠻勇이다. 장관도 대통령도 발 아래에 둔 자의 눈에 조후보자가 보였을 리 만무하다. 시퍼런 서슬은 스스로 참지 못하고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본인이 확신했던 사모펀드 혐의는 최근 대법원 판결로 허물어졌다. 윤씨의 칼베기는 성급했고, 난폭했고, 과했고, 허무했다.

반면에 윤씨는 검찰조직과 자기 식구들에게는 끔찍했다. 검찰의 칼날은 균형을 잃었다. “별장 성접대” 동영상을 보고도 두 차례나 김학의를 불기소 처분했던 자들이 김씨의 출국을 막은 절차를 문제삼았다. 한명숙 전총리 사건과 관련한 모해위증교사는 끝끝내 무혐의로 처분했다. 장관의 수사지휘도 위증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증언도 법공작에 묻혔다. 집요한 자기식구 감싸기가 눈물겹다. 윤씨는 자신에 대한 직무정지와 징계에 반발하여 집행정지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기술이다. 윤씨 배우자와 장모에 관련한 사건은 의혹만 남긴 채 진전되지 못했지만, 추미애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자 6년 전에는 입건조차 되지 않았던 장모가 한달 전 징역 3년형을 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윤씨가 어떻게 검찰권력을 활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씨의 대권 도전은 오래된 권력욕의 정점으로 보인다. 그의 “보스기질”은 조국대전에서 확인한 반문수구세력의 지지를 계기로 야망이 되어 불타올랐다. 상관을 멋대로 치받을수록 박수를 받는 재미에 홀닥 빠진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을 일 아니던가. 무서운 세상이 아님을 깨달은 기회주의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갈 곳 없는 수구들의 울분과 저주에 편승한 것이다.

윤씨는 법깡패들의 칼잡이로서 꽤 괜찮았는지는 몰라도 정치인으로서는 햇병아리다. 그는 문재인 정권이 국민을 약탈하는 독재라고 비난했다. 검찰총장이었던 자신은 약탈과 독재를 눈뜨고 보고만 있었단 소린가? 얼마 전 한국이 5년 만에 완전한 민주주의로 복귀했다는데,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인가? 윤씨는 지지자들에게 공정과 법치를 약속했다. 과연 조국 수사, 김학의 사건, 한총리 사건은 공정하고 정당한 법집행이었을까? 배우자와 장모에게 그토록 자비롭게 처리되었던 사건들은 정말 우연일까?

윤씨는 과격하거나 민심과 동떨어진 발언으로 설화를 자초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세금을 나눠줄거면 안걷어야, 다른 지역이었으면 민란, 주 120시간이라도 일하고, 이한열 앞에서 부마항쟁 등은 참담한 수준이다. 말할 필요가 없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난사하자 지지자들이 나자빠지고 있다. 좌충우돌하며 구세력들과 선문답을 섞더니 압수수색하듯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그의 정치 “지평선”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근혜를 꿰뚫는 수구기득권이라는 선언이다. 역사인식과 정치감이 가난한 낭만자객의 한계다. 그래서 조국을 바르고 청와대를 들이받은 것일까? 하지만 상처투성이 조국이 뚜벅뚜벅 돌아오고 있다. 윤씨는 다 잊었다지만 이제 어찌할 것인가? 

같이 읽기

 

인용하기: 박헌명. 2021. 조국의 최소주의와 윤석열의 검찰주의. <최소주의행정학> 6(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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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달 14일 사임했다. 장관에 임명된 지 35일 만이다. 8월 9일 장관후보로 지명된 이후 수구세력들은 수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수구 야당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의혹공세에 집중하다가 9월 2일로 예정되었던 인사청문회를 무산시켰다. 조후보자는 당일 11시간 가까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여당과 야당은 우여곡절 끝에 6일 인사청문회를 열었고,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한 상태에서 문대통령은 9일 장관임명을 결정하였다. 이른바 “조국전쟁”이다.

“가족사기단”과 “가족인질극”

수구 야당은 반발하면서 조장관을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적법하게 임명된 장관을 장관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라고 우겼다. 제기된 의혹을 반복하여 물고 늘어지면서 국정감사는 “조국감사”가 되었다. 수구 언론도 조장관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고 검찰발 기사를 뿌려대고 있다. 검찰의 행보에 따라 국면이 요동치고 있다. 이젠 조장관 여식이 꼴지인 주제에 포르쉐를 타고 다녔고, 시험도 치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는 낭설은 벌써 고조선 시절의 얘기가 되었다. 약발이 다한 소재는 사실이든 아니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수구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파렴치한 “가족사기단”이라는 낙인이 판결문에 찍힌 느낌이다.

검찰은 조장관 식구들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까지 샅샅이 훑고 있다. 수구 세력의 고발에 따른 적법한 조사라고 했다. 인사청문회일정이 합의된 다음 날인 8월 27일 강제수사를 시작하여 정국을 흔들었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던 6일 밤에는 조장관 배우자를 조사없이 기소하였고, 16일부터는 여식女息과 자식子息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23일에는 11시간 동안 조장관 자택을 수색했다. 지금까지 백여 차례에 이르는 압수수색이 있었다. 수구 언론과 야당은 검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침내 조장관의 당질(9월 16일), 배우자(10월 24일), 동생(10월 31일)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이제 검찰의 칼날은 조장관을 향하고 있다.

이에 유시민씨는 유튜비 방송 <다스뵈이다>와 <알릴레오>에서 참전을 선언하면서 이 사건을 “가족인질극”이라고 규정했다.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조장관을 낙마시키기 위해 검찰이 조장관의 식구들을 잡아놓고 벌이는 인질극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털어도 조장관에게서 먼지가 나오지 않으니까 병약한 배우자를 앞세우고, 딸과 아들을 고졸로 만들겠다며 위협한다. 애초의 계산법으로는 검찰이 청와대에 불가 신호를 주면 문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고, 안되면 압수수색과 기소로 겁을 주면 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하고, 이것도 안되면 실력행사를 통해 대통령이 장관임명을 포기하도록 한다. 관련자를 구속기소하고 피의사실을 흘리면 여론을 흔들 수 있다. 지지율 하락을 이겨낼 장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문대통령과 조장관은 검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막힌 인간”들이었다. 웬만하면 다들 알아서 물러나고 자수하건만, 참으로 눈치도 요령도 없이 쇠심줄같이 질긴 자들아닌가. 그래서 사달이 난 것이다.

비록 장관이 사임을 했지만 검찰은 여기서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다. 사퇴하든 말든 목표는 조장관이기 때문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장관의 식구들이 “가족사기단”임을 증명해야 한다. 정경심씨를 구속한 뒤에도 수차례 불러야 하는 까닭이 있다. 사실보다 형식이다. 검찰 체면에 “모냥빠지는” 일은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4일 <뉴스공장>에 출연한 조민씨는 고졸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어머니가 검찰의 압박에 못이겨 자녀를 지키기 위해 허위자백을 할까봐 괴롭다고 했다. 현직 부장검사인 임은정씨는 조장관의 사임을 두고 “[검찰이]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라고 적었다. 하지만 가족인질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

검찰조사를 지켜보자면 의금부에서 무슨 대역죄인을 다루는 듯하다. 조장관 식구들이 저질렀다는 혐의는 진학(인턴쉽, 장학금, 논문저자),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문제다. 과연 최고 검사들이 달라붙어 두 달 넘게 조사할 사항인가? 학생이 인턴쉽을 하루 더하고 덜하고, 고등학생이 제 1저자가 되는지, 장학금이나 표창장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가 왜 이리 문제가 되는지, 또 왜 밝히기 어려운지. 컴퓨터를 잘 모른다는 정씨가 어떻게 포토샵으로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것인지. 대놓고 “스펙”을 권하는 그런 법제도를 만들어 활용해놓고 이제와서 전혀 몰랐던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 옳은 일인지. 수백 억이 왔다갔다 판에 기껏해봤자 30억도 안되는 돈을 가지고 기업을 주물렀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웅동학원의 “어르신”이 “애”로 취급하는 조장관이 이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인지. 불법을 저질렀다면 경중에 따라 벌을 받을 일이지만 검찰이 시퍼런 칼을 들고 밝히려는 혐의들은 초라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반면 세월호 침몰, 삼성의 경영권 승계, 신속처리안건 파동,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등에 대한 조사는 어찌하여 이리도 더디고 물러터진 것일까?

조장관에 대한 비난은 (1) 불법이나 탈법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이다. (2) 평소에 정의와 공정을 강조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던 사람이 뒤로는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게다가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의 몫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첫번째 비판은 과하지 않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불순하고 악랄하다. 붓다나 예수나 공자를 모셔와서 법무부장관을 시키자는 소린가? 언행일치를 못했다고 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수구세력의 일상화된 언행불일치는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진보세력에게는 가혹하게 도덕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합당한가? 또한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강자로 보고 비난하는 것은 착시錯視다. 정말 그랬다면 언론이든 야당이든 검찰이든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들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주물러 온 세력이 한순간에 해체되겠는가?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평등·공정·정의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수구세력의 교활한 계략에 놀아나는 순진함이다.

지난 8월 23일부터 서울대, 고대, 연대, 부산대에서 촛불집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불공정과 진상조사를 외쳤지만,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자신만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을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절한 불공정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대학가 집회는 그 자체로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다. 과학고, 외고, 자사고 학생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작 개혁되어야 할 적폐가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고 있으니... 주최자 논란도 있었지만 대학가 촛불집회가 500여명에 머물고 흥행에 실패한 까닭이다.

진영논리? 국론분열?

결국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적나라한 힘겨루기다. 친일반민족세력과 일반 백성의 가치 충돌이다. 조장관의 친구라는 진중권씨는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가지고 지금 미쳐버린 게 아닌가”라며 한탄했다. 참여연대의 김경율 회계사와 신문칼럼을 써온 서민 교수 역시 다들 진영논리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모두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강자의 힘에 당했던 피해의식이랄까, 도덕우월성에 대한 집착이랄까, 강박이랄까? 왜 그 가혹한 잣대를 조장관 식구들에게만 들이대는가? 자기 편에 가혹하고 남의 편에 관대한 것이 정의이고 진리인가? 옳든 그르든 무조건 권력자를 깎아내리고 비난해야 하는가? 어용御用을 피하고 지조를 지키는 일이니 멋져보이는가?

국론분열이라는 말도 음흉하다. 국론이 통일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수십, 수백만이 모인 검찰개혁 촛불집회와 천여 명이 모인 태극기집회를 찬반이 팽팽하다고 보는 자들의 궤변이라니... 어쨋든 나라가 시끄러우니 죄가 있든 없든 조국이 물러나고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어렵고, 돼지열병이 위험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지만, 어쨋든 결론은 조국사퇴다.

수구 야당은 장관후보로 지명되기 전부터 조장관을 벼르고 있었다. 조국을 주저앉히기 위해 조국이 사노맹이라고 헐뜯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평소 그가 “강남좌파”로서 사사건건 자신들을 (정의와 도덕성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또 가만놔뒀다가는 미래의 후환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시끄럽게 들쑤시고 다닌 것이다. 과도한 응징이다. 허망하게 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다. 나라가 어찌되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수구 야당도 언론도 검찰도 같은 편에 서서 적폐청산과 개혁을 흔들고 좌초시키고 있는 모양새다.

광화문에서는 수구 여당과 일부 기독교단이 주최하는 태극기집회가 벌어지고, 서초동과 여의도에서는 개싸움국민운동본부 주도로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수구 세력은 상대방이 사실을 외면하고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난하지만 자신의 진영논리는 말하지 않는다. 유시민씨는 진영이 나뉘어 서로 다투는 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본다. 단지 얼마나 정당하게 합리성으로 논리를 겨루는가를 따질 뿐이다.

사실 진영이 있다면 수구 기득권이지 나머지는 진영이랄 것도 없다. 지킬 것이 있으니 성을 쌓고 방책을 세워두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백성들은 그냥 순리와 상식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있다. 지킬 것이 없는 자들은 가진 자가 극도로 포악해질 때 서로 손을 잡고 떨쳐 일어날 뿐이다. 진영이 나뉘어져 있다면 그것은 가진 자가 포악하게 해먹었다는 증거다. 수구 세력들은 강고한 진영을 갖추고 있으면서 단결한 백성들을 진영논리라며 비난한다. 무조건 잇속을 지키자는 무논리가 생존과 정의를 쟁취하자는 논리를 비웃는 비열함이다. 끊임없이 의혹과 유언비어를 쏟아내어 백성을 이간질하는 자들의 음흉한 논리다.

“강남좌파”가 선택한 고난의 길

나는 조장관과 식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설명을 들어도 입학전형이든 사모펀드든 우회상장이든 와닿지 않는다. 만일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조장관은 애초에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두달 넘게 식구들이 무방비로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9월 2일 조후보자의 기자간담회를 대부분 지켜본 후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국은] 이른바 강남좌파라지만 충분히 현실을 치열하게 살았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여식의 진학이나 인턴이나 장학금 문제를 사과하긴 했지만 과한 비난이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놓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그런 수많은 일상의 조각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범죄사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검찰이 욕보겠다.”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법과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석 달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검찰수사는 이례적이며 지나치다. 수구 야당과 언론의 응원을 받으며 정예수사팀이 한 집안을 털었지만 정작 조장관에 대한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쯤되면 수사능력이 형편없었거나 애초부터 겨누었던 중대한 범죄사실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시민이나 김어준씨가 어렵지 않게 확인한 사실을 검찰이 아직도 뒤지고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검찰은 어떻게든 조장관을 넘어뜨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족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군가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공소권 없음”으로 깔끔하게 후퇴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매주 서초동과 여의도에 모여 촛불을 밝힌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다가는 자신도 조장관처럼 저렇게 대책없이 난도질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연민이자 분노다. 그래서 검찰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각성한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뜻은 자연인 “조국”을 좋아하고 그 배우자 정씨를 응원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려야 하는 기본권과 평범한 일상을 검찰의 횡포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그 마음이 하나 둘씩 모여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된 것이다.

의미있는 고난과 조국의 평화

수구세력은 왜 조국이 아니면 안되냐며 따진다. 쓸만한 인물이 그리도 없느냐고 힐난한다. 하지만 조국만 아니면 누구라도 괜찮다거나 왜 조국은 안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가족사기단”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사실은 검찰개혁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조국이 아니어도 누구든 사명감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속으로는 조국이 정말 개혁을 잘할 것같으니까, 그래서 나라가 잘 되는 끔찍한 결과가 나올까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주저앉히려는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문재인을 끌어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의미있는 고난을 통해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점이다(1991: 333; 2008: 101, 270). 박근혜 탄핵으로 강자의 폭력이 잠시 멈추었을뿐 백성들이 원하는 태평성대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개혁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조장관은 집안, 학력, 외모, 재산, 관운 등에서 “금수저”였지만 꽃길이 보장된 기득권편에 서지 않았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여 검찰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앞으로도 일가친척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의 자기희생으로 검찰개혁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정의와 인권이 세상의 원칙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曺國의 의미있는 고난이 祖國의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같이 읽기

  1.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2.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조국전쟁: 曺國의 고난과 祖國의 평화. <최소주의행정학> 4(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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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민정수석이 지난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결사반대를 공언하고 나선 기득권 세력들은 한 달 넘게 자진사퇴를 압박했다. 수구언론은 조국 후보자의 배우자, 여식, 동생 내외, 웅동학원 등에 대한 신상털기 기사를 쏟아냈다. 여식이 포르쉐를 탄다거나 특별전형으로 진학을 했다는 헛소문을 보도했고, 심지어 어느 수구채널은 조국 후보자가 자택 아파트 주자창에 주차했음을 뉴스속보로 보도했다. 융단폭격같은 의혹제기에도 납득할 만한 사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구야당은 여론전에 몰입하면서 인사청문회를 질질끌었지만 결국 소문만 요란한 잔치가 되어버렸다. 조장관이 임명되자 그들은 해임건의, 국정조사, 특검을 들고 나왔다. 의혹을 반복하고 단식을 벌이고 삭발削髮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사생결단이다. 급기야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국회의원이 법절차에 따라 임명된 장관을 장관으로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를 고집하고 있다. 비열한 막말과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정신병이고 과대망상이라고 했다. 정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넘어서서 인간이란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과거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칼자루를 쥔 윤석열 검찰

결국 칼자루는 검찰이 쥐게 되었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조장관 식구들을 검찰에 고발하였고, 검찰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수십 곳을 압수수색하였다. 소환도 없이 청문회 중에 조후보의 부인을 기소하였다. 윤석열 총장을 적임자라고 옹호하였던 여당은 검찰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반발했고, 청문회에서 윤총장을 강하게 몰아붙이던 야당은 이제 검찰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둘러싼 검찰청, 법무부, 청와대, 여야의 힘겨루기가 얽히고 섥힌 모양새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단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되었다. 정치문제를 정치로 풀지 못하고 스스로 모가지를 검찰의 칼날에 맡기는 어리석음이여...

윤석열 검찰총장의 인생은 굴곡졌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안희정과 감금원을 구속했고, 2008년 BBK 특검에 참여하여 이명박을 무혐의로 처리했고, 이명박 정권에서 특수통 검사로 경력을 쌓았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를 밀어붙이다가 좌천되어 절치부심하던 중 2016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했다. 2017년 초에는 박근혜와 이재용을 구속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에는 DAS의 이명박을 잡아넣고, 올해 초 사법농단의 주범 양승태를 구속하였다. 지난 7월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윤총장은 2013년 국정감사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의 수사외압을 폭로하면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수차례 이어진 좌천인사 불이익과 모욕을 감내했다. 그래서 정권의 휘둘림에도 굴하지 않고 엄정하게 수사하는 강골검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그를 파격으로 중용한 까닭이다.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

소정 선생님은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다”라고 적었다(2008: 481).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소는 무엇일까? 예컨대, “성욕, 연애, 가정, 일용할 양식, 노동할 권리, 평화스러운 공동체” 등은 살아가는 누구나가 갖기를 바라는 최소이다(1986: 95). 일용할 양식은 배불리 먹을 만한 수준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다. 화려한 옷이 아니라 흉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옷이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의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일자리다. 감옥에 갖힌 자에게는 추운 날 더운 물 한 모금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다(2008: 303).

한계인은 “최소의 것을 빼앗긴 자”이거나 “최소를 가질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이다(1986: 96). 외압에도 불구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검사의 최소한을 차마 저버리지 못한 윤검사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96쪽). 그래서 “[최소를] 빼앗은 자를 미움으로만으로 대하지 못하는 인간의 품위”를 가질 수 있다. “최소에의 흠모를 존중시하는 이는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하여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다(96쪽).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는 최소를 빼앗은 자의 이기심에 굴종하지 않으며, 빼앗은 자를 미워하면서도 똑같이 물질을 탐하는 인간의 타락도 거부한다(96쪽). “빼앗는 이의 모습을 도저히 그의 원래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품격에 대한 외경”을 갖는다(97쪽). 한계인과 최소주의자의 인간주의이다.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의 길

윤총장이 억울하게 최소를 빼앗겨 본 사람이라면, 그 한계 상황을 온몸으로 버텨낸 최소주의자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첫째, 법에서 정한 기준과 절차를 철저하게 따른다. 윗사람의 권한남용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둘째, 지독하게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한다. 사람이나 조직에 충성하지 않고 헌법과 국민만 바라본다. 국민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로 말한다. 정치와 여론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세째, 약자의 인권을 저버리지 않는다. 최소마저 박탈당했던 자는 수구세력의 집단 매질에 내몰린 조장관 식구들을 긍휼한다. 인간 본연의 품격을 거부하지 못한다.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 피의사실을 흘리지 않고 최소한의 사생활은 지켜준다. 극악무도한 피의자라도 누려야할 최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째, 엄정한 수사에 집중할 뿐 유불리나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 조장관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오면 수구야당은 윤총장을 비난하고 특검카드를 들이밀 것이고 그 반대면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청와대로 몰려갈 자들이다. 여당은 그 반대일 것이다. 칼자루를 쥔 자의 마음이 흔들리면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베이기 십상이다. 윤 총장의 선택이 한계 상황을 겪은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이길 바란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최소주의행정학> 4(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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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전 정무수석이 지난 달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수구 야당의 파상공세 속에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지금까지 관련기사가 무려 120여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황당한 수치다. 청문회를 앞두고 조후보자의 식구들과 관련된 압수수색이 전격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시시각각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고 입과 입을 거치면서 자가발전하고 있다. 애초에 제기된 조후보자 여식女息의 포르쉐나 특례입학이나 성적 문제는 벌써 갑오경장 시절 얘기가 되었다. 청문회 정국이 요동치고 점입가경이다.

고대생의 촛불집회가 불편하다

조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은 자신이 아닌 여식의 입학과 장학금 문제에 집중되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강남좌파”라는 조후보자의 언행이 다르다는 배신감이다. 특히 20대의 지지율이 흔들리면서 여당도 우려하고 있다. 지난 달 23일에는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촛불집회를 열어 항의했다. 부산대 학생들도 거들고 나섰다. 조후보자의 여식이 고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은 것이 입시부정이나 특혜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나는 촛불을 들고 고대 본관 앞을 도는 학생들의 행렬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미 3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과연 꼭 필요한 행동이었을까? 70-80년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선배들을 잇는 행동인가? 폭정에 시달리던 32년 전 고대 교수들이 목숨을 걸고 시국성명서를 낭독했던 그 자리 아닌가. 그 간절한 말이 사람들을 울려서 끝내는 6월 민주화운동으로 타오르게 했던 역사의 현장 아닌가.

소정의 최소주의에서 벗어난 촛불집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은 최소주의로 구현된다. “일단 그 날이 오면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행동”으로 “긴요한 최소행동”이다(1991: 25-26). 첫째, 정국이 극도로 무서울 때에 행동한다. 행동을 하면 힘센 자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대부분 몸을 사리는 상황이다. 둘째, 그래서 신중하게 행동방법을 결정한다. 참여자 간의 철저한 합의와 일반 시민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세째, 필연적으로 비폭력 방법을 취한다. 주먹이 아닌 말로 대응하되 지극히 옳은 말만 한다. 상대방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네째, 이말 저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않고 꼭 필요한 요구만 한다. 실존적 발언을 최소한으로 한다(1996: 56). 무섭지 않을 때는 아무나 나와서 인기를 끌 만한 발언을 난사하기 때문에 전투력이 분산된다. 마지막으로 행동을 통해 개인의 잇속을 차리지 않는다. 기분나빠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다칠 줄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뿐이다.

하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최소주의와 거리가 멀다. 첫째, 다칠까봐 몸을 움츠리는 무서운 때가 아니다. 집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거나 경찰에 잡혀갈 일이 없다. 오히려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주목받고 박수를 받을 일이다. 지난 달 29일 TBS <뉴스공장>에 출연한 유시민씨는 “근데 의사표현을 못하게 막고 있나요, 아니면 권력으로 이 문제제기를 틀어막고 있나요? 여론은 압도적으로 조국에게 불리하고, 언론은 대통령에게 비판적이고, 언론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기사들을 쏟아내서 조국을 공격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될 때, 이것을 비판하면 불이익이 우려될 때, 익명으로 신분을 감추고 투쟁을 하거나 마스크를 쓰거나 그러는 거지. 지금 조국 욕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해서 누가 불이익을 줘요?”라고 말했다.

둘째, 아무리 온라인 광장에서 논의되었다지만 신중한 행동이 아니다. 집회발의자, 합의과정, 대표성 모두 흠결이 있다. 사실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의혹과 비난 광풍에 휩쓸린 느낌이다. 더구나 민감한 고대 교우의 일을 어찌 그리 성급하게 말하는가. 의혹이 사실이 아니면 그 생채기를 다 어찌 하려는가? 학내 문제라며 외부인 개입을 배제했지만, 국민 다수에게 공감을 얻기 어려운 속내임을 암시할 뿐이다. 세째, 촛불시위라는 비폭력을 동원한 것은 맞지만 지극히 옳은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의혹이나 예단이지 직선제 개헌과 같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네째, 긴요한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학교당국이 살펴보겠다고 했고 검찰이 조사하고 있는 마당에 지레 평등·공정·정의가 사망했다고 단정하고, 자료공개, 진실규명, 입학취소, 지명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 홀로 선 조국을 난타질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숱가락을 얹는 인기영합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촛불집회로 얻으려는 대의가 보이지 않는다. 정의를 말하고 공정을 말했지만, 속내는 직접적인 자신의 잇속이다. 자신은 힘들게 공부해서 입학했는데, 부정하게 입학했다면 부당하다. 감히 고대에서... 한마디로 기분나쁘다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자격이 의심스러운 자가 기득권을 누리거나,.. 우리들의 자부심에 손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을 굳이 집단적으로 표출시킬 이유가 있나 싶어요?”라고 일갈했다. 학생들이 자문해야 할 대목이다. 어쩌면 SKY의 관점이 아닌 일반 청년의 시각에서 대학입시 제도에 대한 성찰과 개선을 말했다면 차라리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배부른 자의 밥투정이나 힘자랑

기득권의 부도덕과 특혜라고 비난했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또다른 기득권을 상징한다. 토익과 AP 만점자도 자질을 의심받는 범접할 수 없는 학교라는 것 아닌가. SKY의 힘자랑이다. 배불러 터진 자들의 밥투정이자 난동이다. 그냥 속상한 자들이 술집에 모여서 육두문자를 안주삼아 주사부릴 얘기 아닌가. 간절함이 없으니 감동도 없고 호응도 없다. 신중치 못한 행동이 의도찮게 수구세력의 필사항전을 편들고 대의를 호도하는 것은 아닌지...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최소주의행정학> 4(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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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일본 정부는 한국으로 수출되는 불화수소를 포함한 3개 품목에 대한 규제강화를 발표했다. 나아가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조치이며 불공정한 경제보복이라고 보았다. 박근혜 정권에서 강행한 성노예피해자 문제에 대한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고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에 대한 아베 정부의 분노와 응징이라는 것이다. 비상한 상황으로 규정한 문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여 경제체질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정치갈등으로 경제협력의 틀을 깨버린 이번 조치는 부당하며 양국 모두에게 큰 피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도전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다. 기업들은 해당 품목을 확보하고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들은 일본방문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혐한으로 치닫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차분하고 경우에 맞는 대응이다.

토착왜구와 식민사관의 잔재

하지만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수구세력들은 모든 것이 문재인 정권의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권력서열 1위였던 최순실의 존재를 들켜 한순간에 정권을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한이 묻어난다. 그들은 문정권이 좌파 이념에 매몰되어 이분법으로 국민을 갈라놓고 있다고 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정치보복을 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여론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야당과의 협치를 포기한 독재정권이라고도 했다. 최저임금인상과 같은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밀어붙여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고, 부질없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다가 한미일 관계만 파탄냈다고 했다. 성노예피해자 관련 합의를 파기하고 징용피해자 배상판결을 이끌어 아베 정권의 화를 돋구어 끝내 경제보복을 자초했다는 시각이다. 어느 수구신문은 일본어판에 “한국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나 “반일로 한국을 망쳐 일본을 돕는 매국 문재인 정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광복 70주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꿈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다.

나는 얼마 전 사람들과 한일 갈등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덕을 봤는데 이제와서 딴 소리냐고 했다. 다른 이는 일본이 얼마나 부강한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대들고 있다고 혀를 찼다. 한국 정부가 국제공조를 추진하든 일본과 협상을 하든 결국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이다. 정치꾼이야 그렇다 쳐도 교육수준이나 소득수준이 상위급인 분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토착왜구”까지는 아니어도 부지불식 중에 식민사관에 젖어든 정신세계라는 생각이다. 일본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일본은 부자이고 선진국이고 우리는 아니다. 그러니 일본이 아니면 안된다. 알랑거리든 싹싹 빌든 우네부네 하든 무조건 일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감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들다니... 세상사는 이치를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아닌가. 힘센 자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주고 힘없는 자는 가혹하게 짓밟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거늘...

그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지혜나 요령이라며 훈수한다. 하지만 자존自尊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심리상태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줄이며 양아치의 생존법이다. 강자에게 죽도록 매맞은 기억으로 몸서리치는 피해의식이다. 강자가 눈만 흘겨도 똥오줌싸고 까무라치는 수준이다. 이성과 양심이 아닌 힘의 논리에 충실한 셈법이다. 야만의 약육강식 그대로다. 일본에 특사를 보내라는 주장은 사실상 (어차피 항복해야 하니까) 조국 수석을 볼모로 보내고 아베에게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三跪九叩頭禮) 잘못했다고 싹싹 빌라는 충고다. 분기탱천한 아베는 더한 것도 요구할 기세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제3국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묵살하여 3권분립을 해체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포기하자는 소리다. 어차피 바위에 계란치기인데 명분이 밥먹여주는가, 당장 살아 남아야 할 것 아니냐라는 식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서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을사오적의 변과 다를 바 없다.

매맞으면서도 할 말은 하라

왜 겨뤄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꼬리를 내려야 하나? 왜 트럼프나 아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는가? 언제나 강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양국의 우호인가? 트럼프의 요구대로 방위비 분담금을 올려주고 아베가 원하는 대로 대법원 판결을 뭉개고 투항하면 우리에게 평화는 오는가? 양아치는 단물을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코가 꿰인 먹잇감을 허투루 놔주는 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힘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무서움을 극복하고 부당함에 맞설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아베 정권의 수출품목 규제강화는 난해한 경제문제와 남북문제와는 달리 옳고 그름이 명백하다. 애초부터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 책임에 연결된 문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핵심은 보편적 인권 문제다. 정답은 자명하다. 다만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小丁 선생님은 강자에게 고통받는 약자는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1986: 294). 폭력을 휘두르는 정권은 자기가 정한 법도 지키지 못할만큼 허약하고 정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민의 불복종 운동(비폭력투쟁)으로 붕괴가 된다(1986: 297). 하지만 여기서 비폭력은 강자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자포자기로 매만 맞으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을지언정 할 말을 계속 하는 것이다(1991: 118). 상대방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사실과 지극히 옳은 말만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감정을 자제하고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만을 해야 한다(1996: 56).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1980: 384). 약자가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다(1991: 18; 2001: 149).

비폭력 투쟁과 불매운동

지금 문재인 정부와 국민의 대응은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 투쟁에 가깝다. 특히 경제 우위를 앞세워 대화를 거부하고 강공으로 일관하고 있는 아베 정권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차분하게 일반론과 원칙론으로 맞서고 있다. 국제무역 질서와 관행은 물론 상식으로 봐도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가 경제보복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일본의 도발과 협박과 무례에도 불구하고 문대통령은 감정을 흐트리지 않고 합당한 말만 하고 있다. 비폭력 투쟁이다.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라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낭독하는 듯하다. 갈등과 긴장을 노리는 아베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인 벽창호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음인지 지난 25일 일본 지식인 75명이 아베 정권에게 규제강화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많은 시민들이 일본여행을 취소하거나 자제하고 있다. 일본제품을 팔거나 사지않는 운동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불매운동은 일본인에 대한 혐오나 적대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권경화씨는 일본여행을 취소한 시민들에게 무료로 머리를 깎아준다고 했다. 일본 손님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일본 TBS의 질문에 당연히 깎아준다고 답했다고 했다. 우리의 불매운동이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아닌 보편적 인도주의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는 공약삼장에 충실한 운동이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얼마 전 조국 민정수석이 그의 FaceBook에 적었다는 글이다. 그는 아베 정권의 궤변에 동조해 대법원과 정부를 매도하는 수구 정치인과 언론의 행태가 개탄스럽다고도 했다. 법을 공부한 그가 일제의 식민지배, 한일청구권협정,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등에 관한 의견을 적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민정수석이라는 지위와 의사소통 방식에 비추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자기정치에 열을 올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나대지 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어야 마땅한 그런 상식적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 일본의 국력은 우리보다 낫다. 하지만 2019년은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교할 수 없었던 1919년과 크게 다르다. 일본은 국토가 우리의 3.6배나 넓고, 인구는 1억 3천 명(2.5배)이고 2019년 예산은 9천 2백억 달러(2.3배)에 이른다. 2017년 국내총생산은 4조 3천억 달러(3.1배), 2018년 수출은 7천 3백억 달러(1.2배), 수입은 7천 5백억 달러(1.4배)로 근접하고 있다. 일인당 GDP는 4만 달러대 3만 달러이지만 최근 경제성장률이 2-3%인 우리가 1% 미만인 일본을 따라잡고 있다. 하우머치닷넷이 발표한 GDP대비 국가부채율은 2017년 기준 우리가 40%인데 비해 일본은 무려 238%다. 세계 최대의 채무국의 민낯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한국의 왕조에 의지하고 살았던 약소국이었다. 20세기 한 때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일본이 지난 30년 내내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그동안 각종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시도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부활을 획책하는 극우세력들이 일본을 퇴화시키고 있다. 사실과 역사가 아닌 신화를 믿고 사는 왜구倭寇의 난동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과거 공주 우금치에서 2만 명의 동학군이 2백 명의 일본군에게 비참하게 무너졌던 조선이나 무기력하게 경술국치를 당한 대한제국이 더이상 아니다. 어엿한 OECD와 G20 회원국으로서 강대국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성장과 힘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깨어있는 촛불이 우리의 힘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촛불을 밝히는 국민이다. 백년 전 3.1 운동 이후, 4.19 혁명(1960),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 6월 항쟁(1987)를 거쳐 촛불혁명(2016)으로 진화한 국민이다. 왕조시절에도 나라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왔다. 광화문 광장에 켜진 백만 촛불은 끈질긴 투쟁의 함성이자 우리의 자부심이다. 이는 사무라이 습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이 감히 꿈꾸지 못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다. 우리는 일본을 얕잡아봐서도 안되지만 막연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학대해서도 안된다. 깨어있는 촛불 국민은 침착하고 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백년 전 총칼 앞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만세를 외쳤던 그 마음, 3년 전 촛불을 들고 얼어붙은 광장을 밝혔던 그 마음이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심을 성심껏 받들면 된다.

한쪽이 자신의 힘만 믿고 막무가내로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다면 다른 한쪽의 선택은 쉽다. 똑같이 감정을 폭발하고 발길질로 대응하면 이전투구가 될 뿐이다. 막나가는 폭력과는 정반대로 합리성과 보편성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을 벌여야 한다. 냉철한 자세로 진리를 말하면서 인내하고 견뎌내야 한다. 뱉은 말도 뒤집고 갈팡질팡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정권은 나라 안팎에서 정당성을 잃는다. 대의大義가 아닌 잇속을 차리려는 자들이 끝도 없이 멋대로 굴기 때문이다. 앞다투어 욕심을 채우다가 수틀리면 서로 치고 박다가 스스로 망한다. 어차피 지금의 경제보복은 어느 한쪽이 사달이 나야 끝날 것 같은 상황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절제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서로 단결하여 고통을 나누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배타적 감정이 아닌 인류애와 동포애로 서로 다독이며 버텨내야 한다. 2019년 경제독립 운동의 공약삼장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의 비폭력 투쟁. <최소주의행정학> 4(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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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己未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백 년이 된다. 백 년 전 오늘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을사늑약乙巳勒約(1905)과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를 거치면서 조선 민중을 옥죄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무장봉기가 아닌 철저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일제는 잔혹한 무력진압으로 맞섰다. 공식 집계만 해도 백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각지에서 참여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거나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제는 무단통치방식을 포기하였다. 헌법 전문에 나와 있듯이 3.1운동은 대한민국이란 물줄기의 발원지였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총독부 앞에 휘날리던 일장기를 끌어내린 자들은 독립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그들이 게양한 깃발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염원이 무산되면서 남과 북에서 그들만의 권력을 틀어쥐려는 무리들이 또다시 이 땅을 갈라내고 동족상잔의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4.3학살, 여순항쟁, 한국전쟁, 보도연맹학살은 그들만의 제단에 뿌려진 무고한 피였다. 이승만 일당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좌절시겼고, 단두대에 세워진 친일파를 풀어주는 대신에 그 자리에 정적을 끌어다 놓고 마구잡이로 “빨갱이칠”을 해댔다. 혹독했던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미군을 등에 업은 반민족·친일·기회주의자들의 폭정에 시달려야 했다. 3.1운동을 이은 4·19, 5·18, 6·29, 촛불혁명은 배신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처절한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끊임없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도도하게 흘러왔던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3.1운동은 아직도 진행중일는지 모른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백 년이 지났어도 이 나라 백성들은 여전히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자에게 맞서고 있다. 투쟁대상이 일본 제국주의와 동족의 피를 빨아먹은 친일파에서 “빨갱이칠”로 기득권을 이어온 수구·냉전·반공세력으로 바뀌었을 뿐 갈등 구조는 그대로다. 애초부터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아니라 이성과 상식과 양심이 기득권을 위해 배반과 변신을 거듭해온 수구기회주의 세력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義를 내팽개치고 利만을 쫓아온 강자의 폭력에 약자는 어떤 자세로 맞서야 하는가? 소정 선생님께서는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人道生存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하나,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첫번째 공약은 “일”에 관한 언급인데, 일본제국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에 의하여 핍박받고 있는 동포의 고유 권리를 찾는 거사라는 점을 말한다(1991: 329). 두번째는 육체의 종식으로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사람”의 책임과 운명을 말한다(1980: 358; 1991: 319, 329). 마지막은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라는 “방법”을 말한다. 한마디로 비폭력 평화 투쟁을 천명한 것이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먼저 질서를 존중하며,”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등은 철저한 비폭력 의지를 말한다(1996: 407).


소정의 초월윤리와 촛불집회


이문영(1991)은 사람·일·방법이란 범주와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으로 발전하는 초월윤리를 연결시켰다(48-49쪽). 공약삼장에서 보면 일(此擧)은 긍휼감으로 민족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사회윤리이며, 사람(一人)은 마지막 육체의 존재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기희생을 표현하며, 마지막으로 방법(行動)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라 할 수 있다(1991: 318-319).


출처: 이문영(1991: 162-170; 1996: 403-407)에서 재구성함.
방법사람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
신信예지禮智인仁의義
그리움한숨감동


공무원으로 치면 비폭력은 권력남용을 자제하는 일이고, 개인윤리는 법령을 준수하는 일이고, 사회윤리는 소외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일이며, 자기희생은 손해보면서까지 시민참여(예컨대, 공무원 노조)를 허용하는 일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도리와 사단四端으로 치면 각각 信(光名之心), 禮(辭讓之心)와 智(是非之心), 仁(惻隱之心), 義(羞惡之心)와 대응된다(1996: 403-407). 신信은 예지禮智에 앞서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덕목으로 비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개인윤리는 폭력이 멈춰진 뒤 합의를 모색하고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1996: 404). 또한 불쌍한 자를 긍휼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회윤리를 기대할 수 있으며, 사람으로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권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고 기꺼이 불이익을 당하는 자기희생이 가능하다(1996: 405, 437).


공약삼장은 지난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계속되었던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개인적으로 박근혜씨가 미워서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이게 나라냐”는 기본 질문을 한 것이다(일, 사회윤리). 민심을 억압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이었지만 남녀노소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많게는 하루에 이백만 명이 넘게 모였고, 당당하게 주권자의 의사를 시원스레 밝혔다(사람, 자기희생). 수백만 명의 함성과 발구름과 소등 시위는 구중궁궐에 포위되어 있는 박씨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겠지만, 백성들에게는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하는 축전祝典이었다.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참여한 개인발언은 민심 그대로였다. 방법으로 치자면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끝까지 질서가 유지되었으며, 폭력이 추방된 비폭력 운동이었다(방법, 비폭력과 개인윤리). 경찰이 벽을 치고 긴장을 조성한 면도 있었으나 시민들 스스로 폭력을 자제하고 질서를 외쳤으며 집회가 끝난 뒤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모범을 보였다. 총 23차에 걸친 집회에서 총 천 오백만 명이 참여했지만 폭력으로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계절”을 그리워하고, 이명박근혜라는 현실에 한숨짓고, 꿈꾸는 너와 나의 미래를 확인하며 감동했던 혁명이었다.


『맹자』의 설궁장과 최소주의


이문영(1980)은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힘과 권력남용으로 대표되는 官의 벌거벗은 힘이 부딪치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싶었다(vii쪽). 이런 대결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양 극단이지 일반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자들의 폭정(권력남용)도 극복해야 하지만 백성들의 난동 역시 자제되어야 한다. 꼭 필요할 때에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최소행동이 필요한 까닭이다.『孔孟』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의 설궁雪宮장은 이러한 소정의 최소주의에 맞닿아 있다.


“齊宣王見孟子於雪宮。王曰 賢者亦有此樂乎? 孟子對曰 有。人不得則非其上矣。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제선왕이 맹자를 설궁에서 만났다. 왕이 말하기를, 현자에게도 이러한 즐거움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그 윗사람을 비난합니다.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 위사람을 비난하는 자(백성)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지 않는 자도 잘못입니다” (『孔孟』 「梁惠王章句 下」4).


여기서 즐거움을 무엇을 말하는가? 이 장에 앞서 맹자는 왕이 백성과 더불어 음악, 사냥, 동산을 즐긴다면 왕노릇을 할 수 있다(與百姓同樂則王矣)고 했다. 현자(백성)도 왕과 마찬가지로 멋진 별장을 노니는 즐거움이 있다. 왕이 백성들과 더불어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백성들과 같이 동산을 이용하면 백성들은 왕의 즐거움을 같이 느낀다. 소정의 초월윤리로 치면 윗사람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는 물론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백성이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무엇인가? 왕의 동산에 들어왔다고 무조건 때려죽이거나 법에도 없는 일(예컨대, 벌금이나 형벌)을 강요하는 일은 없지만,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거나 (그들에게 예외를 허용하거나) 동산을 백성에게 개방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다. 최소한 비폭력과 개인윤리를 보여주지만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는 이르지 못한 경우다. 이 때 백성들이 왕의 동산이나 별장을 누리지 못해서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지나친 행동이며 과격이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난동이다. 그들이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성백효 2014: 110). 윗사람이 되어 권력남용을 안하고 법령에 나와있는 일만 하는 것은 물론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백성들에게 비난받고 매맞고 쫓겨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백성이 왕을 비난할 수 있을까? 왕의 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동산에서 사슴을 죽인 자를 살인죄로 다스리는 경우이다(성백효 2014: 101). 예컨대, 법에서 정한 살인죄도 모자라 7족에게도 죄를 묻는 패악질을 하는 경우다.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은 커녕 개인윤리나 비폭력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포악한 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리석은 독재자들은 무력만 믿고 끝간데 없이 폭정을 휘두르다가 스스로 무너진다(1986: 289, 297). 서로 더 해먹으려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치고 박다가 끝내는 자기들이 만든 법조차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비폭력은 물론 개인윤리조차 무너진 상황에서 백성의 원성과 죽창은 피할 길이 없다.


소정의 최소주의로 나아가라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초창기에 8할이 넘었던 대통령 지지율은 현재 절반에 머물고 있다. 개헌, 선거법개정, 적폐청산, 사법농단수사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불만이다.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현하려는 시도는 사회주의로 치부되고, 최저임금인상을 포함한 소득주소성장정책이 오히려 민생경제를 망치는 주범으로 몰린다. 북한에 속아 GP를 철수하고 한미훈련을 중단하고 안보를 포기했댄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립유치원, 미세먼지 등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호시탐탐 민심을 호리는 날조뉴스들이 넘쳐난다. 야당 대표는 총체적 난국에 처한 좌파정권의 폭정을 막겠다며 기염氣焰을 토한다.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현정권이 정치를 망치고 경제를 망치고 안보를 망치고 통일을 망쳤으면 하는 주술과 희망사항을 저주로 퍼붓고 있다. 작정을 하고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던 수구 야당과 언론의 모습 그대로다. 경제파탄과 불통과 퍼주기라고 또다시 헌나발을 불지만 “경포대”보다도 처참했던 이명박근혜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북미관계가 틀어져 장거리미사일이 하늘을 날던 시절만을 오매불망하고 있다.

과연 문재인 정권은 이런 비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가? 유시민씨의 말대로 모든 구악이 그대로인 채 대통령만 갑자기 바뀐 것 아닌가. 야당에서 “침대축구”를 하면 개헌이든 뭐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수구세력들이 사사건건 적폐청산을 가로막아왔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법령을 준수하는 민주정권의 “약점”을 최대로 악용해왔다. 시민사회도 그동안 짓눌렸던 욕망과 불만을 드러내고 자기 몫을 요구하고 있다. 그저 대통령이 알아서 뚝딱 만들어내라는 심산이다. 이 조급함과 이기심을 수구세력이 파고들고 있다.


오래도록 쌓여온 못된 관행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각자가 변화하는 고통과 손해와 혼란을 감내해야 한다. 의사에게 병을 당장 고쳐내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병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참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놀리면 화타가 명약을 줘도 병을 고칠 수 없다. 당장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윗사람을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감동은 아니어도 폭력을 휘두르고 법규를 무시하는 포악한 정권은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조급하게 굴지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과욕과 무책임한 난동은 음흉한 수구세력의 장단에 놀아나는 짓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신중하게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절박했던 3.1운동을 돌아보자. 광장에 모인 천만 촛불의 간절함을 상기하자. 利가 아닌 大義를 위한 실존의 몸부림아니었던가. 절실한 최소한의 요구를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


참고문헌

  • 성백효. 2014. 현토신역 부안설 맹자집주: 天. 경기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과 최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4(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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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노회찬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인터넷 게시물의 조회수를 조작한 “드루킹” 김동원 일당이 건넨 돈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사건이 불거진 후 줄곧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유서에서 4천만 원을 대가없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예기치 못한 비보에 많은 시민들이 지역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소를 찾았다. 여야는 물론이려니와 수구냉전 세력까지도 이심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폭염에도 조문객이 7만 명에 이르렀다니... 하물며 진보가 빨갱이로 낙인찍힌 나라에서. 

유시민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정의롭고 품격있는 논객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준 운동가였다. 척박한 토양에서 진보정치를 대중화시킨 정치가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잃었다. 어이없는 일이었고, 허무한 일이었고, 안타까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없이 서글픈 일이었다. 며칠 동안 비몽사몽으로 헤매다가 깨어난 느낌이다. 


품격있는 화객

사람들은 노회찬을 비유의 달인이라고 했다. 촌철살인의 대가라고도 불렀다.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난 50년 동안 삼겹살을 궈먹은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가 일갈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일반 시민들의 시각과 정서를 담은 말이었다. 기존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노회찬은 사람들이 평소 말하고 싶었던 얘기와 강자에게 따지고 싶었던 얘기를 조리있게 다듬어 쉽고 간결하게 풀어냈다. 고갱이를 가려내어 짜임새있게 엮어낸 뒤 잘 발효시킨 말이었다. 구성지게 뽑아낸 가락이었다. 논리가 있고 해학이 있었다. 설득력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시원하고 통괘했다. 수구세력의 억지와 궤변과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가 출현했던 <뉴스공장>의 꼭지 이름은 “노르가즘”이 되었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대체 불가”였다. 그는 인간이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품격있고 멋진 화객話客이었다.

노회찬의 말은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서 경우에 맞는 말이었고 힘이 있는 말이었다. 이런 생생한 사실과 진리를 비유를 통해 완곡하게 표현했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전달했다. 그는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려고 애썼지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인간의 품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주제에 집중했지 사람(상대방을 비난하는 데)에 매달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성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말이었다(2008: 66). 이러한 노회찬의 말법은 상대방의 논지나 주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과 보복을 무력화시켰다. 이성과 상식에 꼭맞는 말이어서 상대방이 차마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폭력이며 최소주의다. 진중권씨의 말이 살인검이라면 노회찬의 말은 활인검이라 할 수 있다.  


도덕 결벽증? 자기희생?

노회찬은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라는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어리석게 처리한 일을 자책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어쩌면 노회찬의 선택은 진보세력의 과도한 도덕 결벽潔癖이나 강박일는지 모른다. 수구냉전 세력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사면증(면죄부)을 지닌 자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만 소위 진보세력은 사소한 실수라도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마냥 고개를 쳐박고 다닌다. 폭력을 완비한 강자의 자신만만과 강자에게 당한 악몽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약자의 피해의식이랄까?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듯 강자가 약자의 도덕성을 따지고 든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민간인 드루킹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민주주의 파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약자의 도덕 결벽증을 노리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논법이다.  

노회찬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세력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덕 결벽증을 경계한 말이다.

노회찬은 원망하지도 않았고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대로 현실의 엄격한 요구를 아프게 받아들였다. 혹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힐난했지만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물은 것이다.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해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잘못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세비도 당에 주고 당에서 최소 월급을 타왔던 사람이었다. 현직에게 특혜를 주고 도전자의 손발을 묶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그가 받은 돈은 올바르게 처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노회찬도 지키지 못할 정치자금법이라 꼬집은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당이 어려워지는 것을 더 우려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당이나 진보세력 전체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제 특별활동비가 혁파될 것이며, 정치자금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의 희생이 아프고 슬프다. 

참고문헌

구영식.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한겨레21> 1223호.  2018.7.31.



원문: 박헌명. 2018.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최소주의행정학> 3(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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