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己未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백 년이 된다. 백 년 전 오늘 전국에서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을사늑약乙巳勒約(1905)과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를 거치면서 조선 민중을 옥죄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무장봉기가 아닌 철저한 비폭력 평화운동에 일제는 잔혹한 무력진압으로 맞섰다.
공식 집계만 해도 백만 명이 넘는 백성들이 각지에서 참여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거나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일제는 무단통치방식을 포기하였다. 헌법 전문에 나와 있듯이
3.1운동은 대한민국이란 물줄기의 발원지였다.
하지만 해방 후 조선총독부 앞에 휘날리던 일장기를 끌어내린 자들은 독립군이 아니라 미군이었고, 그들이 게양한 깃발은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였다. 통일정부를 세우려던 염원이 무산되면서 남과 북에서 그들만의 권력을 틀어쥐려는 무리들이 또다시 이 땅을 갈라내고 동족상잔의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4.3학살, 여순항쟁, 한국전쟁, 보도연맹학살은 그들만의 제단에 뿌려진 무고한 피였다. 이승만 일당들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좌절시겼고, 단두대에 세워진 친일파를 풀어주는 대신에 그 자리에 정적을 끌어다 놓고 마구잡이로 “빨갱이칠”을 해댔다. 혹독했던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미군을 등에 업은 반민족·친일·기회주의자들의 폭정에 시달려야 했다. 3.1운동을 이은 4·19, 5·18, 6·29, 촛불혁명은 배신과 왜곡으로 점철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백성들의 처절한 피와 땀과 눈물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끊임없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도도하게 흘러왔던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3.1운동은 아직도 진행중일는지 모른다.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
백 년이 지났어도 이 나라 백성들은 여전히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자에게 맞서고 있다. 투쟁대상이
일본 제국주의와 동족의 피를 빨아먹은 친일파에서 “빨갱이칠”로 기득권을 이어온 수구·냉전·반공세력으로 바뀌었을 뿐 갈등 구조는
그대로다. 애초부터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아니라 이성과 상식과 양심이 기득권을 위해 배반과 변신을 거듭해온
수구기회주의 세력에 힘겹게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義를 내팽개치고 利만을 쫓아온 강자의 폭력에 약자는 어떤 자세로 맞서야 하는가?
소정 선생님께서는 “吾等은 玆에 我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人道生存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하나,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하나,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첫번째 공약은 “일”에 관한 언급인데, 일본제국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에 의하여 핍박받고 있는 동포의 고유 권리를 찾는 거사라는 점을 말한다(1991: 329). 두번째는 육체의 종식으로 사람의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사람”의 책임과 운명을 말한다(1980: 358; 1991: 319, 329). 마지막은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게 행동하라는 “방법”을 말한다. 한마디로 비폭력 평화 투쟁을 천명한 것이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먼저 질서를 존중하며,”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 등은 철저한 비폭력 의지를 말한다(1996: 407).
소정의 초월윤리와 촛불집회
이문영(1991)은 사람·일·방법이란 범주와 비폭력-개인윤리-사회윤리-자기희생으로 발전하는 초월윤리를 연결시켰다(48-49쪽).
공약삼장에서 보면 일(此擧)은 긍휼감으로 민족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사회윤리이며, 사람(一人)은 마지막 육체의 존재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기희생을 표현하며, 마지막으로 방법(行動)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라 할 수 있다(1991: 318-319).
방법 | 일 | 사람 | |
---|---|---|---|
비폭력 | 개인윤리 | 사회윤리 | 자기희생 |
신信 | 예지禮智 | 인仁 | 의義 |
그리움 | 한숨 | 꿈 | 감동 |
공무원으로 치면 비폭력은 권력남용을 자제하는 일이고, 개인윤리는 법령을 준수하는 일이고, 사회윤리는 소외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일이며, 자기희생은 손해보면서까지 시민참여(예컨대, 공무원 노조)를 허용하는 일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도리와
사단四端으로 치면 각각 信(光名之心), 禮(辭讓之心)와 智(是非之心), 仁(惻隱之心), 義(羞惡之心)와 대응된다(1996:
403-407). 신信은 예지禮智에 앞서서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지 않는 덕목으로 비폭력이라 할 수 있으며, 개인윤리는 폭력이
멈춰진 뒤 합의를 모색하고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1996: 404). 또한 불쌍한 자를 긍휼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회윤리를 기대할
수 있으며, 사람으로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정권의 부당한 지시를 거절하고 기꺼이 불이익을 당하는 자기희생이
가능하다(1996: 405, 437).
공약삼장은 지난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계속되었던 박근혜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개인적으로 박근혜씨가 미워서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이게 나라냐”는 기본 질문을 한 것이다(일, 사회윤리). 민심을 억압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이었지만 남녀노소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많게는 하루에 이백만 명이 넘게 모였고, 당당하게 주권자의 의사를 시원스레 밝혔다(사람, 자기희생). 수백만 명의 함성과 발구름과 소등 시위는 구중궁궐에 포위되어 있는 박씨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겠지만, 백성들에게는 스스로 주권자임을 자각하는 축전祝典이었다. 각계각층의 남녀노소가 참여한 개인발언은 민심 그대로였다. 방법으로 치자면 한없이 평화스러웠고, 끝까지 질서가 유지되었으며, 폭력이 추방된 비폭력 운동이었다(방법, 비폭력과 개인윤리). 경찰이 벽을 치고 긴장을 조성한 면도 있었으나 시민들 스스로 폭력을 자제하고 질서를 외쳤으며 집회가 끝난 뒤 쓰레기를 거두어 가는 모범을 보였다. 총 23차에 걸친 집회에서 총 천 오백만 명이 참여했지만 폭력으로 체포된 사람이 없었다. “따뜻한 계절”을 그리워하고, 이명박근혜라는 현실에 한숨짓고, 꿈꾸는 너와 나의 미래를 확인하며 감동했던 혁명이었다.
『맹자』의 설궁장과 최소주의
이문영(1980)은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힘과 권력남용으로 대표되는 官의 벌거벗은 힘이 부딪치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싶었다(vii쪽). 이런 대결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은 양 극단이지 일반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자들의 폭정(권력남용)도
극복해야 하지만 백성들의 난동 역시 자제되어야 한다. 꼭 필요할 때에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최소행동이 필요한
까닭이다.『孔孟』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의 설궁雪宮장은 이러한 소정의 최소주의에 맞닿아 있다.
“齊宣王見孟子於雪宮。王曰 賢者亦有此樂乎? 孟子對曰 有。人不得則非其上矣。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제선왕이
맹자를 설궁에서 만났다. 왕이 말하기를, 현자에게도 이러한 즐거움이 있습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지 못하면 그 윗사람을 비난합니다.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 위사람을 비난하는 자(백성)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같이 하지 않는 자도 잘못입니다” (『孔孟』 「梁惠王章句 下」4).
여기서 즐거움을 무엇을 말하는가? 이 장에 앞서 맹자는 왕이 백성과 더불어 음악, 사냥, 동산을 즐긴다면 왕노릇을 할 수
있다(與百姓同樂則王矣)고 했다. 현자(백성)도 왕과 마찬가지로 멋진 별장을 노니는 즐거움이 있다. 왕이 백성들과 더불어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백성들과 같이 동산을 이용하면 백성들은 왕의 즐거움을 같이 느낀다. 소정의 초월윤리로 치면 윗사람은 비폭력과
개인윤리는 물론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백성이 그런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는 뜻은 무엇인가? 왕의 동산에 들어왔다고 무조건 때려죽이거나 법에도 없는 일(예컨대,
벌금이나 형벌)을 강요하는 일은 없지만, 사회의 약자를 배려하거나 (그들에게 예외를 허용하거나) 동산을 백성에게 개방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경우다. 최소한 비폭력과 개인윤리를 보여주지만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에는 이르지 못한 경우다. 이 때 백성들이 왕의
동산이나 별장을 누리지 못해서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에게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지나친 행동이며 과격이다.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난동이다. 그들이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성백효 2014: 110). 윗사람이 되어 권력남용을 안하고 법령에 나와있는 일만 하는 것은 물론 잘하는 짓은 아니지만
백성들에게 비난받고 매맞고 쫓겨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백성이 왕을 비난할 수 있을까? 왕의 동산에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동산에서 사슴을 죽인 자를 살인죄로 다스리는 경우이다(성백효 2014: 101). 예컨대, 법에서 정한 살인죄도 모자라 7족에게도 죄를 묻는 패악질을 하는 경우다. 사회윤리와 자기희생은 커녕 개인윤리나 비폭력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포악한 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리석은 독재자들은 무력만 믿고 끝간데 없이 폭정을 휘두르다가 스스로 무너진다(1986: 289, 297). 서로 더 해먹으려다 이해관계가 틀어지고 서로 치고 박다가 끝내는 자기들이 만든 법조차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비폭력은 물론 개인윤리조차 무너진 상황에서 백성의 원성과 죽창은 피할 길이 없다.
소정의 최소주의로 나아가라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초창기에 8할이 넘었던 대통령 지지율은 현재 절반에 머물고 있다. 개헌, 선거법개정, 적폐청산, 사법농단수사
등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불만이다.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현하려는 시도는 사회주의로 치부되고, 최저임금인상을 포함한
소득주소성장정책이 오히려 민생경제를 망치는 주범으로 몰린다. 북한에 속아 GP를 철수하고 한미훈련을 중단하고 안보를 포기했댄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립유치원, 미세먼지 등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호시탐탐 민심을 호리는 날조뉴스들이
넘쳐난다. 야당 대표는 총체적 난국에 처한 좌파정권의 폭정을 막겠다며 기염氣焰을 토한다.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현정권이 정치를 망치고 경제를 망치고 안보를 망치고 통일을 망쳤으면 하는 주술과 희망사항을 저주로 퍼붓고 있다. 작정을 하고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던 수구 야당과 언론의 모습 그대로다. 경제파탄과 불통과 퍼주기라고 또다시 헌나발을 불지만 “경포대”보다도 처참했던 이명박근혜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북미관계가 틀어져 장거리미사일이 하늘을 날던 시절만을 오매불망하고 있다.
과연 문재인 정권은 이런 비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가? 유시민씨의 말대로 모든 구악이 그대로인 채 대통령만 갑자기 바뀐 것
아닌가. 야당에서 “침대축구”를 하면 개헌이든 뭐든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수구세력들이 사사건건 적폐청산을
가로막아왔다.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법령을 준수하는 민주정권의 “약점”을 최대로 악용해왔다. 시민사회도 그동안 짓눌렸던 욕망과
불만을 드러내고 자기 몫을 요구하고 있다. 그저 대통령이 알아서 뚝딱 만들어내라는 심산이다. 이 조급함과 이기심을 수구세력이
파고들고 있다.
오래도록 쌓여온 못된 관행과 인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다. 각자가 변화하는 고통과 손해와 혼란을 감내해야 한다. 의사에게
병을 당장 고쳐내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환자 스스로 병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참지 못하고 몸을 함부로 놀리면
화타가 명약을 줘도 병을 고칠 수 없다. 당장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윗사람을 비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감동은
아니어도 폭력을 휘두르고 법규를 무시하는 포악한 정권은 아니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조급하게 굴지 말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과욕과 무책임한 난동은 음흉한 수구세력의 장단에 놀아나는 짓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신중하게 생각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절박했던 3.1운동을 돌아보자. 광장에 모인 천만 촛불의
간절함을 상기하자. 利가 아닌 大義를 위한 실존의 몸부림아니었던가. 절실한 최소한의 요구를 경우에 맞게 해야 한다.
참고문헌
- 성백효. 2014. 현토신역 부안설 맹자집주: 天. 경기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기미독립선언서 공약삼장과 최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4(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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