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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14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2. 2019.04.08 김동환의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2019. 4. 14. 11:41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와 적폐 청산을 기치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올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기소되고 적폐세력들이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힘겨운 “여름나기”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지만 실업률은 2014년 이후 3%대에 머물다가 올해 4%대로 올라섰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9%대에서 얼마 전 10.5%를 찍었다(연합뉴스. 2018.6.15). 이른바 “취업절벽,” “결혼절벽,” “출산절벽” 등은 벼랑끝에 내몰린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득주도성장정책의 일환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정해졌으나, 한쪽에선 가파르게(10.9%) 오른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다른 쪽에서는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임금 항목이 늘어나 인상효과가 적다고 항변한다. 최근에는 아파트집 가격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상승하면서 정부가 주택관련 정책을 정비하고 보유세와 종합부동산세를 손질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종부세 강화에 분개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공시가격을 현실화하고 종부세를 더 올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연초까지 8할대 고공행진이었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6월까지 7할대, 8월까지 6할대로 떨어졌고 9월 현재 5할대로 내려앉았다. 민주당 지지율은 연초부터 6월까지 5할대를 유지하였으나 이후 4할 초반으로 내려앉았다.

요즘 분위기는 얼핏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때리기”를 떠올린다. 뜬금없는 “친문패권”에 이어 “제왕적 대통령,” “내로남불(문로남불),” “불통,” “독선,” “코드인사,”  “대북퍼주기,” “세금폭탄” ... 흘러간 유행가를 다시 듣는 식상함이 있다. 노무현 문재인은 코드인사라고 비난하면서 이명박근혜가 김기춘을 앉힌 것은 적합한 인사라고 말한다. 노무현 문재인이 주는 것은 “퍼주기”라고 쏘아붙이면서도 이명박근혜가 보낸 돈은 “통일대박” 투자라고 한다. 청와대에서 국민청원까지 받고 있는데도 불통이고 독선이면 이명박근혜는 대체 뭐라 해야 하나?

요즘 수구세력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말법은 이성과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컨대, 종부세 인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13 부동산 대책을 발표한 다음 날 김병준씨는 완벽한 실패라고 단언했다. 정책평가가 아니라 비난과 저주 그 자체다. 하물며 “마이너스의 손”이나 “광팔이 정권”과 같은 유치한 칭얼댐임에랴... 연극을 빙자해 육두문자로 노대통령을 욕보인 <환생경제>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난 해 읽었던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2007)와 <왕따의 정치학>(2017)을 다시 펼쳐 든 까닭이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의 정신줄은 별반 달라진 것같지 않다.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

참여정부시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고도 왜 노무현은 비난을 받았는가?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데 왜 노무현의 인기는 오르는가? 왜 진보언론마저도 유독 문재인을 가혹하게 구박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의 지지도가 견고하게 올라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기숙은 두 책을 통해 일관된 답을 주고 있다. 진보진영(진보정당, 시민사회, 진보언론)이 세력화하지 못하고 사분오열했고 수구세력과의 담론경쟁에서 밀려나서 국민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조기숙 2007: 9, 29, 48).

조기숙은 수구언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어 마법을 건다고 했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32쪽).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담론을 잘 표현하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마법의 유리벽”은 수구언론이 만든 담론 프레임이다. 이 유리벽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수구세력이 원하는 흉칙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춘다(22쪽). 일단 마법에 걸리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수구든 진보든,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남녀노소가 “노무현 때리기”와 “기승전—문재인”을 즐긴다. 현대정치에서 언론은 담론을 공론의 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힘센 수구언론이 “마법의 유리벽”을 만들어 낸다. “

이른바 “밤의 대통령이자 어둠의 마왕”이 부리는 이 마법은(42쪽) (1) 프레임 개발, (2) 확대재생산, (3) 기정사실화, (4) 국민들의 확신이라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꼬투리를 잡아 살짝 비틀어놓으면 다음 날 새누리당이 그걸 확대해서 공격했다. 그러면 저녁에 문화일보가 진보진영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의 인터뷰해서 살을 붙이고, 다음 날 오전이 되면 동아일보가 더 큰 문제로 확대했다. 한 이틀, 때로는 1-2주가 지나면 소위 진보언론이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보도했다”(87쪽).

첫째 단계에서 “조동문”(조선, 동아, 문화일보)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이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주술을 건다. 예컨대,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제왕적 대통령, 호남홀대 등이다(87, 310쪽).

둘째, 수구정당이 언론에 나온 얘기라며 공격을 하고, 수구언론이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교수, 연구원, 운동가와 같은 여론선도자(opinion leader)를 동원하여 판을 벌인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조간에 프레임을 만들면 그걸 받아 <문화일보>가 확대재생산하는 순환 홍보”라고 할 수 있다(33쪽). “어떤 쟁점에 대한 합리적인 찬반 토론을 통해 과학적으로 주장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언론이 주술을 만들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진보, 보수 진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 주술을 읊고 다닌다”(40쪽).

세째 단계에서 드디어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은 물론 진보정당마저도 마법의 세몰이에 넘어간다. 이 지경에 이르면 “조동문 프레임”이 기정사실화된다. 시민단체와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정부를 편든다는 어용시비가 두려워 수구세력의 부당한 비난을 눈감거나 무작정 맞장구를 치거나 수구세력보다 더 가혹하게 비난한다(45-47, 84쪽). 진보 언론인들의 “양심 결벽증”때문이다(조기숙 2017: 114-115). “노무현도 그렇고 문재인도 그렇고, 치명상을 입는 건 좌파언론이 우파언론의 왜곡보도를 확인사살할 때다”(조기숙 2017: 89).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유시민씨 역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다 때[리는]” 진보세력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또 열린우리당은 끌내는 자신을 옥죄는 줄도 모르고 나서서 참여정부에 흠집을 내고 서로 쌈박질을 해댔다. “영악한 보수언론은 진보진영의 낮은 변별력을 이용해 큰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물을 뿌렸다.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추방시킨 사람들은 바로 참여진영 인사들이다”(조기숙 2007: 206). 친노/비노/반노 프레임 공격에 맞서기보다는 스스로 친노를 해체했고, 문재인 역시 뜬금없는 “친문 패권”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일일이 대응하기] 귀찮아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먹잇감을 대주던 우리당이 통째로 보수언론에 잡아먹히게 된 것”(169쪽)이다. “진보진영은 사분오열했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제 발등 찍기에 바빴”고(48쪽) “열린우리당은 … 보수언론의 장단에 북치고 장구까지 친 것”(149쪽)이다. 조기숙은 “진정으로 뭘 반성해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보수언론의 주술을 그대로 따라 외면서 국민 앞에 반성한 것이 가장 큰 잘못”(167쪽)이라고 적었다.

마지막 단계는 일반 국민들도 홀려서 주문을 따라 왼다. 진보세력은 물론 진보 운동가, 교수, 언론, 정당까지 다들 그러니까 확신을 가지고 노무현과 문재인을 비난한다. 마법이 현실화된고 완성된다.

“조동문” 마법의 특성

생각을 덛붙이자면 수구세력의 마법은 우선 합리성과 관계가 없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구세력이 원하는 결론(비난과 저주)이 있을 뿐이다. 터무니없는 프레임이며 그저 신앙과 종교같은 믿음이다.

둘째, “마법의 유리벽”은 항상 나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원래의 뜻과 사실을 바꾸기 위해 단장취의, 맥락왜곡, 허위조작 등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조기숙(2007)은 “언론의 자의적 해석, 과잉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말꼬리 잡기, 말 뒤집기, 없는 말 만들어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적었다(22-23쪽).

세번째 특성은 차별화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정적을 끌어내려 짓밟는 반면 우군은 띄워주워 기득권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사실 수구세력의 전매특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옳은 말을 해도 몹쓸 말을 한 것처럼 매도하고, 이명박근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도 없었던 일로 넘어가거나 미화한다. 문재인은 항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찡그리지만 박근혜와 안철수는 후광이 비치고 해맑게 그려준다.

마지막으로 수구세력의 마법은 영원히 국민을 홀리고 속일 수는 없다. “마법의 유리벽”은 생각보다 깨지기 쉽다. 이치에 맞는 것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발이 오래 가지 못한다. 사실과 진실과 진심은 거짓과 왜곡과 눈속임으로 덮을 수 없다. 똑같은 것을 계속 써먹다 보면 내성이 생겨 잘 먹히지 않는다. 마약과 같은 셈이다. 참여정부 시절 수구세력은 “친노/비노”와 “세금폭탄”으로 재미를 봤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같다.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조동문”의  유리벽은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정치판에서 “마법의 유리벽”과 “왕따”가 위력을 발휘했지만 국민들은 끝내 노무현과 문재인을 버리지 않았다.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조동문” 마법력의 원천

왜 합리성이 없는 “조동문 프레임”이 먹히는 것일까? 참여정부가 담론 경쟁에서 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생각컨대, 첫째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이 그만큼 강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프레임 경쟁은 “쪽수”를 따지는 패싸움이나 세몰이에 가깝다. 경기규칙은 약육강식이다.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득권에 힘으로 맞서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현재 문재인은 “최순실정권”의 기저효과와 촛불혁명의 뒷배로 버티고 있다.

둘째는 수구세력이 능력이 탁월하고 영악하기 때문이다(조기숙 2007: 81-82). 기득권을 가진 만큼 인재들의 질이 높기 때문이다. 수구정당과 조동문 기자들의 능력이 진보정당과 한경오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이들의 조직력과 추진력은 정점을 찍었다. 사실 어설픈 프레임은 흥행하기 어렵다. 아주 그럴듯하게, 덜 혐오스럽게, 덜 유치하게 사실을 비틀고 색칠해야 한다. 인터넷 댓글 조작도 그렇지만 “기술자”들이 똑똑하고, 정교하고, 음흉해야 한다.

세째, 노무현과 문재인은 권력을 남용해서 수구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는 양심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선동정치를 하는 언론과 경쟁을 하려면 일정 부분 같은 전술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어떤 전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국민을 속이거나 감추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 한다”(116쪽). 이 사실을 수구세력이 잘 알고 역으로 공격한다.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에게는 참여정부를 편드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약(“어용 프레임”)을 친다. 참여정부에서 조그마한 실수나 오해라도 있으면 당장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교활하게 그 프레임을 덮어씌운다(정말 빨갱이나 제왕이라고 생각했으면 구석에 머리처박고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시절에 참혹하게 당한 피해의식과 낭만에 가까운 도덕 결벽증을 들쑤셔 진보세력을 몰아붙인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조기숙의 <왕따의 정치학>

노무현과 문재인은 집단으로 구박을 받고 따돌림를 당하고 무참하게 짓밟혔다. 즉, “왕따”나 “조리돌림”를 당했다. “노무현 왕따”와 “마법의 유리벽”은 동전의 양면이다. “노무현 왕따”가 구조를 설명한다면 마법을 만들어 내는 “조동문 프레임”은 과정을 말한다. 조기숙(2017)은 왕따 현상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를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로 설명하였다(92-95쪽).

“노무현 왕따는 그의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들은 비만 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다. 노무현 때리기는 이른바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조기숙 2017: 43).

피해자(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는 가해자가 싫어하는 어떤 특성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민주화 운동, 국민통합, 적폐청산 등이 그것이다. 가해자(수구정당, 수구언론)는 힘, 권력, 기득권을 가진 자인데 피해자를 못마땅해하고 못살게 군다. 가해자는 동조자(수구지지자)들이 자신의 왕따질을 응원해주고 방관자(깨어있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묵인하는 것을 원한다. 반면에 방어자(깨어있는 시민)가 끼어들어 왕따를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방관자는 “조동문” 주술에 걸려 걸핏하면 노무현 때문이라고 투덜대거나 달동네에 살면서 종부세 걱정에 한숨쉬는 사람들이다. 동조자와는 달리 나서서 가해자를 지지하거나 직접 피해자를 걷어차지는 않는다. 강화자는 한 때 왕따 피해자였던 사람인데 더 약한 왕따 후보가 나타나면 또다시 왕따당할까봐 두려워서, 자기가 당했던 설움을 화풀이하려고 더 심하게 피해자를 해코지 한다(94쪽). 말하자면 가해자의 앞잡이가 되어 왕따를 강화한다. 방어자는 왕따당하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부당함을 말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방관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노’라고 말하면 왕따 현상에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94쪽).

“일관되게 호남 왕따의 방어자가 되어 기득권으로부터 온갖 미움을 샀던,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까지 버려야 했던 노 대통령에게 호남을 차별했다는 마타도어를 퍼뜨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이들은 친노와 호남의 분열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다. 왕따 이론에 따르면 가해자, 강화자, 동조자가 바로 그들이다”(309쪽).

참여정부로 따지자면 피해자는 노무현인데,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호남홀대 등의 프레임으로 공격을 받았다. 가해자는 수구냉전 정당과 언론이고, 동조자는 그 지지자들과 수구냉전 단체다. 강화자는 대통령 탄핵소추에 나섰던 새천년민주당(이후 민주당),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참여정부를 헐뜯었던 시민단체와 진보언론(한경오)이다. 이때 방어자는 깨어있는 시민 소수와 문재인(정부 인사)이었다. 

왕따질의 법칙

생각을 덧붙이자면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는 왕따 내내 바뀌기 어렵다.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방관자가 늘면 방어자는 줄고, 방어자가 늘면 방관자는 줄게 되어 있다. 강화자는 가해자의 왕따가 무서워서 혹은 더 약한 자를 괴롭혀 보상받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따 분위기가 바뀌면 달라진다. 단지 심지가 굳지 못하고 겁이 많아 매질을 못견뎌할(매질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입에 거품물고 쓰러지는) 뿐이다.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확인사살한 사람들이 변절한 운동권 인사였던 것처럼 문재인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국민의당과 변절한 동교동계 인사들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어리석게도 “내부총질”을 하면서 노무현 후보를 끌어내렸던 새천년민주당(후보단일화협의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얼마나 가해자와 동조자가 왕따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느냐, 얼마나 방어자를 억누를 수 있느냐에 조리돌림의 성패가 달려있다. 즉, 얼마나 방관자를 확대하고 줄이느냐의 싸움이다. 한편에서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과 역량,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자와 방어자의 인내와 전략이 맞부딪힌다. “마법의 유리벽”은 가해자와 동조자와 강화자의 힘이 월등하여 감히 방어자가 나타나기 힘든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다수가 방관자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왕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방어자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해자와 동조자들은 누군가가 방어자가 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필사적으로 싹을 잘라버린다. 두목을 배신한 조직원을 보는 데서 난도질을 해대는 조폭의 생리와 마찬가지다. 꼼짝말고 방관자로 남아있으라는 강력한 경고다. 그래서 김대중과 호남을 지키려던 방어자 노무현이 그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조기숙 2017: 95, 97).

마법과 왕따에서 벗어나기

그러면 어떻게 “마법의 유리벽”을 깨고 주술을 풀 수 있을까? 어떻게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기숙(2017)은 왕따의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수많은 방어자를 만들어내고, 정치세력화로 다수파가 되면 왕따는 자연스레 해소된다고 주장했다(318쪽).

“... 딱 하나 남은 방법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을 국민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방어자가 세력화되어 국민 중 친노가 절반을 넘어가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선진국 대열로 들어설 것이고 친노 왕따는 사라질 것이다”(211쪽).“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세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계파를 다수파로 만들면 된다. 다수파가 되어 소수자를 포용하는 게 왕따 정치를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212 쪽).

피해자가 방어자를 모아 세력화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왕따는 불가능해진다. 다수파가 힘을 잃은 소수파에게 왕따를 당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소수파가 스스로 세력을 불려 다수파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다. 현실성이 거의 없는 전략이다. 가해자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동조자와 강화자가 등을 돌리게 되면 곧바로 가해자의 기세가 꺾이게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그런 탁월한 소수파였다면 애초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글쓰기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국정홍보처도 운영했지만 “조동문의 마법”을 걷어내지 못하였다. 진보언론까지 주술에 걸려 노무현에게 돌팔매질을 해댔다. 친정인 민주당(조순형, 추미애)은 노무현의 등에 칼을 꽂았고, 열린우리당은 청와대를 힐난하면서 각자 살아남을 궁리에 바빴다. 조기숙(2017)은 “만일 진보진영에서 최대 다수의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친노가 패권으로 민주당을 장악했다면...” 라면서 아쉬워했지만(102쪽) 그들은 자질과 역량에서 수구세력에게 밀렸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먼저 알고 떠나는 것을... 義가 아닌 利를 보고 모인 “탄돌이”아니었던가. 아무리 모래알을 모아놓은들 차돌이 되겠는가.

조기숙(2017)은 “조동문 프레임”에 말려들어 참여정부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사과하고 “친노”를 해체한 민주당의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205, 258쪽). 맞는 지적이다. “친노” 자체가 판짜기인 것을... 하지만 진보세력이 강대강으로 수구세력과 “맞짱”을 떴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어차피 마법이든 왕따질이든 힘자랑인데, 어떻게 약자가 강자를 힘으로 이긴단 말인가? 아마도 깡마른 독기를 품고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다보면 왕따질을 피하기는 커녕 더 가혹한 폭력을 각오해야 한다.

행여 노무현이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총칼로 수구세력을 제압했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義로 뭉쳤던 방어자(민주세력)는 흩어지고, 냉소를 짓는 방관자는 늘어났을 것이다. 대의를 잃고 명분을 잃고 사람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만일 문재인이 참여정부 시절 사사건건 싸움닭처럼 악다구니를 썼더라면 지금의 문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빙하기같은 겨울이 다가옴을 깨닫고 미련없이 고개를 떨군 마지막 잎새였다. 순리대로 조용히 몸을 땅에 삭히며 새싹이 솟는 봄을 참고 견디면서 기다렸다.

소정의 비폭력이 답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을 원하지만 아무 때나 그 힘을 얻을 수는 없다. 정치세력화는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떻게 하면 진보세력이 “조동문”의 마법을 풀고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을 음미해보자. “마법의 유리벽”이든 “왕따질”이든 모두 강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다. 소정의 비폭력은 강자에게 매를 맞더라도 약자는 흥분하거나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것이다(1986: 289; 2008: 68-69). 폭력을 극복하는 대안이 폭력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비폭력은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것이다(1986: 290).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투쟁—악한 강자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2001: 88)—을 하라는 것이다(1986: 294). 강자에게 매를 맞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더라도 할 말은 계속 하라는 것이다(1991:118; 2001:246). 이때 말은 합리성이 있고 사실과 이치에 맞아서 강자의 이성조차 감히 부정하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지극히 옳은 말이다(2008: 66).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하며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 행사가 아니다(1991: 322; 2001: 149).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이나 최소한의 말이어야 한다(1996: 56; 2008: 491). 예컨대, 박해를 받더라도 “세금폭탄”은 사실이 아니며 호남 왕따는 잘못이라고 소신껏 말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사실무근이나 흑색선전이라며 펄쩍 뛰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난동이다. 조기숙(2007)은 “옳은 말을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냐고요? 옳은 말을 옳게 하면 누가 써준대요?”(135쪽)라고 진보언론에게 항의하고 싶었겠지만 흥분하지 말고 옳은 말을 옳게 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폭력에 의지하는 강자는 정당성이 빈약하며, 철저하게 잇속으로 엮여진 세력이다. 한국에서 수구세력은 보수도 우익도 아닌 그냥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부와 권세를 쫓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념집단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애국을 팔고 안보를 파는 구악舊惡일 뿐이다(민주당이 진보와 보수 역할을 다 하느라 바쁘고 헷갈려한다). 이들은 금덩이가 커질수록 탐욕도 커져 법도 규칙도 없이, 위아래도 없이 서로 칼부림을 하다가 스스로 붕괴한다(1986: 297-298). 조기숙(2007: 49)의 예측과는 달리 구악들은 장기집권은 커녕 끝간데 모르고 해먹다가 9년 만에 자멸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나 최순실이 적당히 해먹고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패가망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자의 폭력에 대하여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가 보호되고, 성장할 토대가 마련된다(1991: 18-19). 소정은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라고 했다(1991: 19). 그런데 약자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난동을 부리면 스스로 분열하던 구악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당성을 축적하게 된다(1986: 297). 망해가던 구악들이 살아나 보복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래서 약자는 인내하고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2001: 204). 소정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어”라고 말했다(1986: 336). 절망같은 폭력(왕따)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으로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자만이 평화를 만든다(1980: 350, 365). 

노무현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노무현은 김대중과 호남이 왕따당하는 것에 맞서면서 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폭력이 아닌 말로 다투었다. “마법의 유리벽”에 갖혀 있었지만 그는 치열하게 사고하고 글쓰고 논리적으로 말하고 대화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겠지만 노무현은 “조동문 프레임”에 맞서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지 않았다. 반칙과 특권을 거부하고 원칙과 상식에 충실한 바보였다. 조기숙(2007: 123)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노대통령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라고 했다.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처럼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채 정적을 사찰하거나 협박하고 여론을 조작하지 않았다. 국정원이든 기무사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국가기관을 일절 동원하지 않았다.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수구세력의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국가기록물(하드디스크 복사본)을 유출했다며 몰아붙였을 때에도 편지를 적어 할 말을 하고 깨끗이 물러섰다. 그는 끝까지 비폭력(이성, 상식, 논리)에 의지하여 참고 견디었다. 오랜 시간 의미있는 고난을 겪어온 또다른 인동초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에 모여들어 다같이 슬퍼하고 자책하면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친 까닭이다.

노무현의 서거는 본인의 최선이었다. 그의 마지막 글에서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한다고 했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비폭력자로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운명이라고 적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서거는 마지막 비폭력(의사표시)이자 “자기희생”이었다. 그의 몸던짐이 사람들을 울렸고 움직였다. 마법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했다. “마법의 유리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주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왕따질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고, 패거리질을 하던 동조자와 강화자를 부끄럽게 했다. 저수지둑이 터진 듯이 방관자들이 방어자가 되어 쏟아졌다. “비폭력의 효과는 원수를 갚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가 그에게 돌아오게 할 정도로 큰 효과가 있다”(1996: 423). 그 가슴 울림이 9년 동안 성장하여 광장의 천만 촛불이 되었다. “조동문”의 주술은 타버리고 “마법의 유리벽”은 깨져나갔다. 왕따 방어자이자 피해자였던 노무현이 정치의 전범典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희생자가 지켰던 규칙이 악한 세상을 구출하는 원칙으로 만인에게 인식”되었다(1996: 437-438).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

사실 이명박근혜가 없었다면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은 최소한 20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이명박의 탐욕과 “최순실 정권”의 엽기 행각은 21세기 민주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이제 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눈을 맞추고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대북 퍼주기”와 “세금폭탄”과 같은 주술을 재탕·삼탕하고 있다. 수구 정권에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인터넷 댓글을 조작했다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도 온라인은 세력싸움으로 뜨겁다. 적폐들의 저항과 패악질도 거세다. 하지만 이제는 “조동문”의 마법도 왕따질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그만 피해의식과 도덕/양심 결벽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인재를 발굴해 자질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멀리 보면서 보편성과 합리성과 원칙과 상식에 비추어 묵은 난제를 하나하나 풀어갔으면 한다.
 
참고문헌

조기숙. 2007. <바법에 걸린 나라>. 서울: 지식공작소.

조기숙. 2017. <왕따의 정치학: 왜 진보언론조차 노무현 문재인을 공격하는가?>. 경기도: 위즈덤하우스


원문: 박헌명. 2018.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최소주의행정학> 3(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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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의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2019. 4. 8. 00:12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김동환(2016)은 이명박 정권 말기부터 나라를 휩쓸고 있는 “빅데이터” 광풍을 유행이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데이터” 라는 유행이 1990년대의 “정보,” 2000년대의 “콘텐츠”와 “사이버 공간,” 2010년대의 “스마트”를 거쳐서, 30년 만에 다시 “빅”이라는 접두사를 달고 돌아왔다는 것이다(41-42쪽). 빅데이터는 아무리 커도 데이터일 뿐인데 호사가들이 “그럴듯한 신화”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미혹迷惑시키고 있다고 했다(155-158쪽).

빅데이터라는 유행의 구조

이러한 “지적 유행”은 그 바닥에 여유자원이 넉넉하고, 그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는 판(기회)이 벌어져야 하고, 진리를 모르거나 회피하는 열악한 지식 풍토가 있어야 가능하다(113-114쪽). 도박으로 치면 뭉치돈을 대주는(잃어주는) 호구, 도박판을 벌여주는 하우스 운영자와 돈을 챙기는 타짜, 타짜와 호구를 엮어주는 바람잡이에 비유된다(115쪽). 빅데이터 광풍으로 치면 각각 눈먼 정부예산, 빅데이터 관련 업체와 정부, 그리고 빅데이터 옹호자와 침묵하는 지식인에 해당한다(115-116쪽). 빅데이터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침묵하는 타락한 지식인이 바람잡이다(15-17쪽). 이와같이 정부, 빅데이터 업체, 타락한 지식인이 쇠같이 단단한 삼각관계를 이루어 광풍을 주도한다고 저자는 분석했다(115-119쪽).  

빅데이터에 대한 환상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사업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관련 업체와 바람잡이 지식인들은 분석할 빅데이터가 부족하다며 정부에게 빅데이터 포털을 통해 공공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한다(77쪽).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빅데이터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마어마하게 생산되는 빅데이터를 이용하려고 시작한 사업이 빅데이터가 없어서 실패한다는 모순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Ouroboros를 보는 듯하다(146-147쪽). 또한 빅데이터 전문가가 부족한 탓이라며 전문가 양성 교육을 강화하라고 정부에 요구한다(75-77쪽). 결국 빅데이터 호사가들은 반성은 커녕 책임을 떠넘기며 끊임없이 전문가 교육, 공공 정보 공개 등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자가발전을 꾀한다. “정부는 빅데이터에 돈을 대는 것도 모자라, 또 빅데이터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욕을 먹는다”(81쪽). 
  
흔히 빅데이터 유행의 근거로 Nature에 발표된 Ginsberg et al. (2009)이 거론되는데, 사실 이 논문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사용하여 독감 의심 환자 비율을 추정(estimation)한 것이지 예측(prediction)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89-90쪽). 몇 년 후 Butler (2013)는 구글의 독감환자 추정치는 질병예방통제국(CDC)의 결과와 차이가 큰 경우가 있었다고 보고했다(94쪽). 이에 비해 소수 참여자들의 정보를 분석한 Brownstein의 독감추적 프로그램은 질병예방통제국의 추정치와 가까왔다(96쪽). 말하자면 빅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주장이 허구이며 환상이며 망상이다(158-159쪽). “과거에 대한 측정과 추론을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159쪽). 미국의 빅데이터 유행도 좋은 물건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는 단순히 주가를 올려 이익을 챙기려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와 정부의 투자에 편승했다고 보았다(129-135쪽).

말이 빅데이터지 사실은 Facebook, Twitter, 카카오톡 등에 담겨진 문자정보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런 잡담을 긁어모아 분석한다 한들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40쪽). 저자는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재난이나 범죄를 예방한다는 대목에서 특히 절망스러워했다(56쪽).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데이터를 분석할 것이 아니라 즉시 출동해야 할 일 아닌가?(48쪽) 빅데이터를 분석한다 한들 산사태와 눈사태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어떻게 예측한단 말인가?(49-50쪽).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문장은 이것이다. “주민들이 위험하다고 신고할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행정체제만 유지되더라도 대단한 것이다. … 그저 평소에 침수 위험 지역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재난 행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0쪽).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한 최소주의 행정학이다.

한국에 쓸만한 자료가 있던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고 나는 바로 반응을 했다. 한국에 (쓸만한) 공공 자료가 있던가? 잘 측정되고 정리된 보통 자료도 구경하기도 힘들 지경인데 무슨 빅데이터인가라고 반문했다. 백성들이 원하는 정보를 알차게 담고 있는 공공 자료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공공기관의 문서와 자료가 적절한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희망사항에 가깝지 않았던가? 투박한 자료조각을 찢고 째고 오리고 붙이고 한바탕 난리를 쳐야 그나마 좀 쓸모있게 보이지 않았던가? 경험에서 얻은 상식이다. 그런 자료일망정 정부에서 문서와 자료를 얻는 일이 그 자체로 얼마나 어려운가? 애초부터 분석을 하지 못하게 끔 작정을 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자료를 가공하고 감질나게 찔끔찔끔 민간에 흘리면서 생색이나 낸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속편하다. 그럴 때마다 연구자는 절벽 앞에 선 심정인 것은 나만의 경험인가? 그런데 빅데이터라니… 생뚱맞다고 해야 할까? 그냥 하던 일이나,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미국 공공기관의 자료에 관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어느날 미국인 대학원생이 CD-ROM 하나를 들고 내게 찾아와서 어떻게 이 자료를 SAS로 읽어서 분석할지를 물어 왔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의 질환에 관한 자세한 자료가 고정길이 형식(fixed format)의 문자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 관측치 수(N)는 물론이려니와 변수도 많아서 컴퓨터가 힘들어 할 만큼 SAS 자료파일이 매우 컸다. 다른 자료분석 프로그램은 아마도 읽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료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 도대체 이 나라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미국에서 어지간한 정부 문서와 자료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내용이 적절하고 알차며, 형식도 손질이 잘 되어 있다. 한국 정부의 웹집(Web site)은 휘황찬란해도 자료를 얻기 불편하고 마땅히 얻어갈 것이 없다. 반면 미국 정부의 웹집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능에 충실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당장 미국 감사원(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웹집에 가보라. 또한 General Social Survey (GSS)와 Current Population Survey (CPS)같은 공공 자료가 많은 연구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수퍼컴퓨터 네트웍을 통해 전국에 있는 자료(예컨대, CDC 자료)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 유용한 분석도구를 제공한다. 이른바 grid computing으로 data grid 를 실현하고 있다. 주요 기관에 분산되어 저장된 대용량 자료를 효율성있게 활용하는 체제다. 

미국은 “빅데이터”가 유행하기 전에 이미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쌓아놓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자가 비판하는 행태주의와 거대주의의 소산물이 아니라 합리성을 추구하는 관료제에서 한 축이 되는 문서주의가 이뤄낸 결과물이다. 거대한 자료보다도 정보관리 체계가 부럽다. 어쩌면 20세기 이후 한국의 정보관리 수준은 15세기 조선왕조를 따라가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책에서 묘사된 “빅데이터 중독”은 생각한 것보다 정도가 심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랏돈을 뿌려대며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형국이다. 소문은 무성하고 정부 사업은 요란한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쓸모있는 자료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대한민국 빅데이터”의 현주소다. 한국의 빅데이터 현상은 반성과 비판없이 미국에서 베껴온 것이며, 실제 국민이 필요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여 판을 벌렸다는 김교수 지적 그대로다(111쪽). 끝장을 보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폭주기관차라고나 할까? 한번쯤은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자문해볼 법도 한데 말이다.

빅데이터는 자료인가, 기술인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빅데이터”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이다. 2011년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에서 발행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스마트 정부 구현(안)>에 의하면 빅데이터는 “대용량 데이터를 활용, 분석하여 가치있는 정보를 추출하고, 생성된 지식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대응하거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정보화 기술”이다(38쪽). 한글 위키피디아에는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도구의 능력을 넘어서는 대량(수십 테라바이트)의 정형 또는 심지어 데이터베이스형태가 아닌 비정형의 데이터 집합조차 포함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라고 되어 있다. 빅데이터가 데이터가 아니라 “기술”이라는 얘기다. 데이터가 커지면 더이상 데이터가 아니라 “기술”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한다는 말인가? 납득하기 어려운 정의다. 빅데이터 사업의 지지부진이 큰 데이터가 없어서라는 변명이 분석 “기술”은 있는데 분석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술邪術로 들리는 까닭이다.

미국에서 빅데이터는 어쨋거나 “자료”다. Laney (2001)는 전자상거래에서 자료관리 문제가 세가지 차원에서 폭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빅데이터는 깊이와 폭이 큰 자료(high volume)이고, 자료가 빠르게 생성되고(high velocity),  형식과 구조가 다양한 자료(high diversity)다. Wikipedia에는 너무 크고 복잡해서 기존의 자료처리방법으로는 요리하기 어려운 자료집(data sets)이라고 적혀있다. 빅데이터 업체라 할 수 있는 SAS와 IBM도 규모가 크고, 대량으로 발생하고, 다양한 형식을 가진 자료라고 정의하고 있다. 상식에 맞고 현실성이 있는 정의이다. 

어쩌면 비약으로 들릴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자정부에 관한 정의도 비슷하다. 2001년에 제정된 한국 전자정부법 제 2조는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행정기관 및 공공기관…의 업무를 전자화하여 행정기관등의 상호 간의 행정업무 및 국민에 대한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정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2002년 제정된 미국 전자정부법 Section 3601에는 정부가 웹기반의 인터넷과 정보기술을 이용하는 것(“the use of the Government of [W]eb-based Internet applications and other information technologies”)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의 전자정부가 당위나 신화에 가깝다면 미국의 전자정부는 상식과 현실에 가깝다. 어느 정부나 한국에서 정의한 전자정부를 꿈꾸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정의에 꼭맞는 전자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부터 한국의 전자정부는 현실과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현재 3.0으로 진화하면서 “그들만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전자정부 2.0이든 3.0이든 “이명박근혜 정부”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무엇이 빅데이터인가?

빅데이터는 주로 (1) 디지탈 거래자료 (예컨대, 신용카드 사용내역), (2) 감시카메라, 인공위성 등에서 얻은 사진과 영상 자료(예컨대, CCTV와 remote sensing), (3) 이동통신 자료(예컨대, 교통카드, 무선결재, 무선전화 사용 자료), (4) 사회매체(social media)에서 발생된 자료 (예컨대, Facebook, Blog, Youtube, )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주요 관심은 특별히 사회매체의 한 종류인 사회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에서 일어나는 대화나 인터넷 정보(뉴스 기사)다. (1)과 (3)은 기존의 방법대로 일정한 형식으로 잘 정리된 자료인데 관측치 수만 매우 크고 계속 생산된다는 특징이 있다. (2)는 그림이나 영상 자료라는 특성이 있다. Facebook, Twitter, Skype, 카카오톡 등에는 문자정보 뿐만 아니라 사진, 동영상, 음성, 이진파일과 같은 비문자 정보가 담겨있다. 하지만 비문자정보는 분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빅데이터 분석은 사실상 문자정보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사진과 동영상을 분석하여 지하철의 혼잡도를 측정하고 특정한 사람들의 행위(예컨대, 테러)를 판별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빅데이터의 대표성은 있는가? 

빅데이터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전체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용카드나 교통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빅데이터에서 빠진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거나 시골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 역시 제외된다. 인터넷이나 사회망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도 빅데이터는 담고 있지 않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망서비스에서 글을 남기고 대화에 참여하는가? 

한국 시민들의 참여도는 높은 편이지만 그래도 웹마실(Web surfing)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눈요기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아무나 블로그를 시작할 수 있지만 좋은 블로거가 되기는 쉽지 않다. 소위 파워 블로거는 교육을 많이 받고 지식과 능력을 가진 교수, 언론인, 변호사들이다(Hindman 2009). 결국 빅데이터는 이런 소수 엘리트나 적극 참여자의 말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대표성을 가지기 어렵다. 
또한 이름을 가리고(익명으로), 돈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칼의 양날과 같다. 웹이 등장하기 전에는 의사표시를 하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화의 품격과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른바 “구글세대(Generation Google)”에서 피하기 어려운 가상공간의 시궁창(cyber-cesspool)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사회매체를 남용하며 그 폐해弊害를 관리하기가 어려운지를 보여준다(Levmore and Nussabaum 2010).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회매체를 선하게 사용하여 유용성과 즐거움을 얻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사회의 일부 조각을 반영하는 빅데이터와 과장, 왜곡, 조작 등으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빅데이터를 분석한다면 그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가 될 것이다. 아무리 수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엄청난 기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분석결과는 현실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 있다. 일단 쓰레기가 들어가면 수퍼컴퓨터이라 한들 쓰레기를 토해낼 수밖에 없다(garbage in, garbage out). 자료를 기반으로(data-driven) 하는 방법론의 숙명이다. 이런 빅데이터라면 아무리 규모가 크다 한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확실하게 틀린 결과를 내놓을 뿐이다. 시민들이 사고가 난 현장의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어서 Facebook에 올린 사진을 보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과 가상공간의 시궁창에서 벌어지는 싸구려 잡담을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아무리 사례나 관측치 수가 크다 해도 말이다.

빅데이터는 얼마나 커야 하나?

빅데이터는 덩치가 크고 다양한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기존에 자료를 저장하고, 손질하고,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빅데이터라는 식이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다. 기존의 방법으로 빅데이터를 적절하게 처리할 수 없다면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기존 방법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웹이 출현하던 90년대 이전의 방법인가?

먼저 얼마나 커야 빅데이터인가? 관측치수가 몇 개면 되는가? 1억 개면 족한가? 변수가 몇 개쯤 되어야 하나? 저장공간은 어떠한가? 1 Peta (1,024 Tera) 바이트면 되는가? 올해는 Peta 바이트면 되고 내년에는 Zeta (1,024 Peta) 바이트면 만족하겠는가? 이런 식이면 20년 전에도 빅데이터는 존재했을 것이고 그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 수십만 개 관측치와 변수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Giga (1,024 Mega) 바이트는 꿈같은 크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20 Mega 바이트 하드디스크를 보고 나는 얼마나 감동을 했던가?   
  
누구한테 큰 데이터인가? 

사실 데이터가 큰지 아닌지, 복잡한지 아닌지는 연구자의 처리 능력과 기술에 따라 다르다. 누구에게 크고 복잡한 데이터냐가 중요하다. 관측치가 10개라면 유치원생에게는 버거운 크기일 테지만 중학생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몇 백 개는 대학생에게 만만하겠지만 몇 십만 개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만 개는 유치원생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다. 몇년 전에 한 학생이 천만 개도 넘는 어마어마한 거래정보라며 들고 왔다. (1)번 빅데이터인 디지탈 거래자료였다. 자료처리 능력이 부족한 그 학생에게 몇 Tera 바이트는 “수퍼 빅데이터”였을 테지만, 내게는 “껌값”은 아니어도 랩탑에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그냥 그렇고 그런 자료일 뿐이었다. 아는 사람은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불가능이자 기적이자 충격이다.  

어쩌면 빅데이터라며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은 정작 자료가 무엇인지, 어찌 분석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지 모른다. 실제 자료를 손질하거나 요리해 본 경험이 없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칼로 무를 써는 것만 봐도 황홀해하며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는 위인들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빅데이터 드라마를 쓰고 신화를 만드는지 모른다. 자료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빅데이터라는 “연기”를 그럴듯하게 해서 사람들을 호려먹는 부류는 아닐는지... 천만 개가 넘는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감탄하며 경이롭게 바라보던 그 학생의 얼굴과 빅데이터를 팔고 다니는 바람잡이나 장사꾼들의 얼굴이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럼 수퍼컴퓨터면 되겠니?

자료처리에 관한 지식과는 별개로 실제 자료를 처리할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따져보자. 컴퓨팅 파워를 생각해 보자. 빅데이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하다니 컴퓨팅 파워가 가장 빠르다는 수퍼컴퓨터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수퍼컴퓨터는 어떤 절대 컴퓨팅 파워 이상을 가진 컴퓨터가 아니라 https://top500.org/에 6개월에 한 번씩 발표되는 목록에 나와 있는 컴퓨터를 말한다. 작년 11월 기준 세계 최고 컴퓨터인 중국의 Sunway TaihuLight는 CPU라 할 수 있는 core가 1천만 개, 주메모리로 1.3 Peta 바이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컴퓨터로 처리해야 하는 자료라면 충분히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랩탑으로도 충분히 분석할 수 있는 자료라면 빅데이터라고 하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그렇다면 빅데이터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컴퓨팅 파워를 가진 수퍼컴퓨터 사용자란 말인가? 과연 몇 명이나 수퍼컴퓨터를 사용해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는가?

그러면 대한민국은 현재 얼마나 컴퓨팅 파워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 한국 기상청에서 가지고 있는 Cray사의 Nuri와 Miri 각각 46등과 47등(1년 전에는 28, 29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core가 똑같이 7만 개다. 날씨 예측을 잘못한다고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그 컴퓨터다(사실 컴퓨터가 무슨 죄가 있나?). 그리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의 iREMB가 351등 (만 4천 core), 어느  제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가 404등(만 6천 core)이다. 고작 이 네 대 뿐이다. 서울대학교의 천둥(2012년 기준 277등, 8천 core)은 벌써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수퍼컴퓨터가 아니라는 소리다. 

현재 미국, 중국, 일본이 수퍼컴퓨팅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1등과 2등을, 일본은 6등과 7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10위 밖에도 두 나라의 수퍼컴퓨터는 즐비하다. 물론 미국은 1, 2등을 놓쳤지만 누가 뭐래도 수퍼컴퓨팅을 주도하고 있다. 빅데이터가 정말 크고 복잡한 데이터라면 한국은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 앞에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다윗과 골리앗 차이 그 이상이다. 수퍼컴퓨터로 치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보다도 못하다. 한국에 아무리 큰 빅데이터가 있다 해도 현재 담아서 처리할 만한 컴퓨팅 파워는 허망하리만치 초라하다. 무역 10대 강국에 전혀 걸맞지 않은 허접한 수준이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빅데이터 옹호자와 정부는 데이터가 엄청 크다고만 하고 수퍼컴퓨터를 새로 사거나 만들자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3살박이 아이에게 하늘이 얼마나 큰지, 눈이 얼마나 오는지, 기차가 얼마나 긴지, 아버지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우동을 얼마나 먹을지 차이가 없다. 똑같이 두 팔을 찢어지도록 벌리고 입으로 “이—만큼 많—이”라고 답할 뿐이다. 

빅데이터 전용 분석법이 있나?

그러면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별도 방법이 있는가? 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방법론을 적용하되 일반 사용자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방법을 개선하고 시각화를 강조하는 듯하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열린 SAS사용자 학회에 참석했을 때 SAS가 내세웠던 JMP (http://jmp.com)가 그러했다. 마우스로 꾹꾹 눌러서 원하는 분석 결과를 바로 알려주고 그래프로 표시해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발표자는 이제 더 이상 통계분석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벌써 지금 빅데이터 옹호자들이 하고 있는 얘기를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현란한 화면 뒤편에서 실제 이루어지는 분석은 기존의 통계기법일 뿐이다. 회귀분석이든 분산분석이든 T-test든 방법론은 그대로이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다를 뿐이다. 

현재 미국에서 Data Science 혹은 (Data) Analytics라는 이름으로 학위 프로그램이나 학과가 생기고 있다. 모두 Big Data를 염두念頭에 두고 시류를 쫓고 있다. 예컨대, 인디애나 대학교는 몇 년 전부터 School of Informatics and Computing (https://www.soic.indiana.edu)에서 Master of Science in Data Science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교과과정은 기존의 Computer Science, Informaiton and Library Science, Informatics 과목에 더하여 통계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계학은 Introduction to Statistics, Exploratory Data Analysis, Statistical Learning and High-Deminsional Data Analysis, Baysian Theory and Data Analysis, Applied Linear Models, Reproducible Results in Stats, Topics in Applied Statistics 등이다. 과목 이름을 자세히 살펴 보라. 컴퓨터과학, 사회정보학(informatics), 통계학 등이 잘 결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빅데이터 학위 프로그램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빅데이터용 회귀분석”같은 과목이 없다. 기존 과목을 기존 교수진이 가르치고 있다. 같은 포도주를 예쁘장한 새 잔에 담은 셈이다.

요즘 방송 출연자들이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라며 그래프를 가져와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기억컨대, 사회망서비스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단위로 빈도분석(frequency analysis)하여 추세를 따져보는 것이 전부였다. 방법론으로 치면 기초 수준의 분석방법이다. 관측치 수가 크고 멋진 그래프로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 외에 뭐가 새롭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과관계냐 상관관계냐?

저자는 빅데이터가 상관관계를 말해줄 뿐이며 기존의 “스몰데이터”는 인과관계를 말해준다고 했다(99-100쪽). 그래서 상관관계를 말해주는 빅데이터가 “스몰데이터”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사실 공정하지 못하다. 빅데이터이든 스몰데이터든 분석방법이 다르지 않다면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회귀분석(혹은 이런 류의 계량분석)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밝혀주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회귀분석은 처음부터 인과관계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 결국 상관관계를 말해줄 뿐인데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해석할 뿐이다. 빅데이터든 스몰데이터든 마찬가지다.  

변수 사이의 인과관계는 분석방법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어떻게 자료가 발생되는가(data generation process, DGP) 혹은 변수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등을 따져서 설정해주는 것이다(김수영 2016: 24). 연구자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어야 하는 큰 그림(분석틀)에 관한 문제다.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이론에 관한 문제다. 결코 빅데이터냐 스몰데이터냐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이다.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고 그 가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 이론이 없이 데이터를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154쪽). 

요즘 통계분석기법과 컴퓨팅 성능이 고도로 발달했다 해도 컴퓨터가 알아서 데이터를 분석해서 원하는 결과를 내주지 못한다. 이렇게 데이터에서 그럴듯한 변수관계나 모델을 끌어내는 낚시질(data fishing)은 유희遊戲일는지는 몰라도 과학은 아니다. 하물며 분석결과를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일임에랴. 

항상 큰 것이 좋은가?

N(관측치 수)으로 치자면 빅데이터가 꼭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자료를 설명할 때는(descriptive statistics) N이 큰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분석모형을 통하여 통계추론을 할 때는(inferential statistics)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분석모형에서 일정한 효과크기(effect size)와 통계증거력(statistical power)이 주어지면 적정한 표본크기(sample size)가 결정된다. N이 지나치게 크면 통계증거력이 너무 커서 분석할 필요성이 사라지고(의미없는 분석이 되고), N이 지나치게 적으면 신뢰성이 떨어지게 된다. N이 크면 클수록 좋다며 빅데이터를 찬양하는 것은 단지 무지거나 착각이거나 미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표성을 가진 랜덤샘플을 뽑을 것이가와 분석모형에 따라 적정한 샘플수를 결정하는 일이다. 빅데이터는 이런 랜덤샘플링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예컨대, 빅데이터가 사회매체에서 얻은 대화나 반응에 의존하는 한 자기선택(self-selection)문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빅데이터가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 빅데이터의 정신줄은 한마디로 N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덩치 큰 N으로 문외한門外漢인 청중을 윽박질러(압도하여) 자신이 원하는 (진리와 상관없는) 주장을 강요하기에 딱 알맞는 주술呪術이다.  

빅데이터와 개인정보보호

“빅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빅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빅데이터가 부족하니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국민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없다고 말이다”(80쪽). 저자의 비판은 세 가지다. 하나는 빅데이터가 없어서 빅데이터 산업 부흥이 안되니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국민 정보를 공개하라는 논리 모순이다. 빅데이터 산업의 실패를 빅데이터가 아니라 공공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는 술수라는 것이다(81쪽). 또한 공공데이터 포털을 만들어 국민들의 비밀스러운 개인정보를 무방비 상태로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다고 우려한다(77-78쪽). 마지막으로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라는 것도 미봉책彌縫策이어서 “비식별 조치된” 개인정보 조각 조각을 끼워맞추면 재식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재식별도 못하는 빅데이터 분석 기술이라면 모든 개인 정보를 다 공개한다 한들 쓸모있는 분석을 할 수 없을테니(줘도 못먹을 테니) 공공 정보를 공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앞뒤가 안맞는 주장이다(80-81쪽).    

이런 비판을 곱씹으며 몇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빅데이터를 그때 그때 편리한 대로 둘러댄다는 느낌이다. 보통은 사회매체에서 벌어지는 대화처럼 손질되지 않은 자료를 말하다가 정부의 공공 정보를 요구할 때는 잘 손질되거나 (1)과 (3)과 같이 덩치가 큰 자료를 지칭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매체에서 쓸만한 것을 건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의 정보를 담은 공공데이타베이스를 공개하라고 다른 과녁으로 화살을 돌렸을는지 모른다. 

저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공공데이터 포털은 다행히(?) 그냥 시늉내기에 머물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은밀한 정보도, 의미있는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자료도, 분석에 유용한 형태로 손질된 자료도 찾기 어렵다. 생색을 낼 뿐이다. 쉽게 말해 http://data.go.kr은 http://data.gov를 껍데기만 베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어찌 해서 그럴듯한 웹집을 만들기는 했는데, 수십 년 치 자료를 한꺼번에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해오던 자료축적 수준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의미없는 국가단위 통계, 제공 주체에 따라 띄엄띄엄 올려진 자료... 자료를 사용하라고 공개한 것인지, 사용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소리인지 알쏭달쏭하다. 게다가 웹표준과 웹접근성(Web accessibility)과도 거리가 있어 한글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용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하다. 표준도 지키지 않고 여기 저기에 자바스크립(javascript)을 덕지덕지 발라놨으니 말이다. 설령 국가기밀을 수두룩하게 올려놓았다 해도 멀쩡한 외국인이 빼가기 힘든 상황이다. 전자정부 3.0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료보안에 각별히 심혈을 쏟은 것같다. 누가 되었든지 간에 쓸모있는 정보를 캐내기 어렵게 해놨으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 할는지... 그러니 김교수는 안심하고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시기 바란다. 

한편 개인정보는 자료수집부터 저장, 수정, 사용(접근, 전달, 분석 등), 폐기 전 과정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감출 게 없으면 상관없다”는 논리(nothing-to-hide argument)는 자료를 수집하는데만 시선을 돌림으로써 자료처리 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Solove 2011). 예컨대,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는 위험할 것 같지 않은 자료 조각을 붙이면 “재식별”이 가능하다. Solove (2011)는 이런 과정을 aggregation이라고 불렀다.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식별정보를 지우거나 일부 자료만 공개하는 자료보안 기법은 빠르게 진화하는 자료 분석 기술에 무력하다. 

마지막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그래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법에서 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개인 정보가 수집되고 저장되고 수정(공개)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느냐가 중요하다. 개개인이 자신의 정보가 어찌 처리되는지 전 과정을 지켜보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개인 정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개인정보 문제에 관하여 국회와 사법부가 어떻게 행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지를 따지는 문제이다.  
  
행태주의와 거대주의는 왜?

저자는 미국의 빅데이터 유행은 행태주의 (behavioralism)와 거대주의 (gigantism)라는 두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123-128쪽). 특히 행태주의는 관찰가능한 자료를 계량방법으로 분석하는데, 객관성으로 측정된 행태 자료 간의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행태주의의 근본정신이라고 주장했다(151쪽). 그런데 빅데이터가 밝혀내는 것이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니까 빅데이터는 행태주의 원리와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이다(151쪽). 또한 빅데이터 사업자들은 계량분석을 위주로 한 행태주의 방법론을 이끌었던 통계소프트웨어 회사와 여론 조사 회사라고 했다(11쪽). 말하자면 행태주의 = 객관성있는 경험자료 = 계량분석 = 상관관계 = 빅데이터라는 연관성이다. 또한  거대주의는 언제나 큰 것이 좋다거나 끊임없이 탐욕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과 비판은 지나쳐 보인다. 행태주의나 계량분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근본을 잊고 엉터리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문제는 빅데이터가 아니다

사실 문제는 빅데이터가 아니다. 상식에 가까운 자료조차 챙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료를 만들지 않을 뿐더러 있던 자료도 치우고 지우고 고치는 세상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모른다고 하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세상이다. 청문회, 검찰 조사,  법원의 재판에서조차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실과 진실과 이성과 상식을 빅데이터라는 미신과 허구와 환영으로 덮어버리려는 세상일는지 모른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하다가 엉겁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빅데이터를 끌어다가 뭐라도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거나 자기최면을 거는 것은 아닐까?

결국 빅데이터가 아니라 한 올, 한 조각이라도 멀쩡한 데이터가 아쉬운 세상이다. 당연히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료를 챙기는 것이 먼저다. 빅데이터를 논하기 전에 사회의 기본 정보를 알차게 축적하여 효율성있게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해야 한다. 자료를 모으고, 저장하고, 분석하고, 폐기하는 전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보호될 수 있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컴퓨팅 파워를 자랑하는 21세기의 정보관리 제도가 500년을 버텨온 조선왕조의 체제보다도 못한대서야 어디... 

그냥 기본기에나 충실하라

중요한 것은 한마디로 기본기라 할 수 있다. 빅데이터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일상의 정보를 제대로 구축하여, 알맞은 형식과 방법으로 필요한 때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도 GSS와 CPS같은 자료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또한 거창하게 빅데이터 분석기술을 따지기 전에 컴퓨팅 파워를 늘리고 기본에 해당하는 자료분석 방법부터 철저하게 익혀야 한다. 

저자는 과거를 기록한 자료를 통하여 미래를 예측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귀기울이지 말 것을 권한다. 물론 사람들의 감정이나 의견이 아닌 사람들의 행동이나 물리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타당하다. 정부가 나서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재난과 범죄를 예방하려 애쓰기보다는 법과 절차에 따라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주었으면 한다. 규정대로 건물과 구조물을 살피고  주민들의 요구에 성심성의껏 대응해 주는 정부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최대주의 행정이 아니라 최소주의 행정을 구현했으면 한다.

참고문헌

김동환. 2016.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대한민국의 빅데이터 유행을 말하다>. 서울: 페이퍼로드.


김수영. 2016. <구조방정식 모형의 기본과 확장: Mplus 예제와 함께>. 서울: 학지사.

Ginsberg, Jeremy, Matthew H. Mohebbi, Rajan S. Patel, Lynnette Brammer, Mark S. Smolinski, and Larry Brilliant. 2009. Detecting Influenza Epidemics Using Search Engine Query Data. Nature 457: 1012-1014.

Hindman, Matthew Scott. 2009. Blogs: The New Elite Media. In The Myth of Digital Democracy, 102-128,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Laney, Doug. 2001. 3D Data management: Controlling Data Volume, Velocity, and Variety. Application Delivery Strategies 949 (6 February).

Levmore, Saul, and Martha C. Nussabaum,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Solove, Daniel J. 2011. Nothing to Hide: The False Tradeoff Between Privacy and Security. New He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책읽기: 김동환의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최소주의행정학> 2(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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