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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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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2020. 9. 27. 15:01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지난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수구기득권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우한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정부가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지 못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사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문정권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염치가 없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자 우격다짐이다.

세계 각국에서 문정부가 전염병 대처를 잘 했다며 이른바 “K방역”을 칭찬했다. 빠르고 정확성이 높은 한국산 바이러스진단도구를 구해가려고 안달이다. 잘 축적된 바이러스관련 정보와 방역 경험을 탐내고 있다. 수구세력들은 마지못해 정부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의료인과 국민이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둘러댔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다. 그렇다면 방역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는 의료인이 형편없고 국민이 못났다는 소리인가?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날숨같은 궤변이다.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입대한 위관장교가 상관인 영관장교의 제안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단기복무를 하는 비전투 병과 장교였다. 그 상관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지만 무단으로 논문을 군사관련 학술지에 보냈고, 심사절차를 거쳐 출판하게 되었다. 단독저자였고, 상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흉계를 까맣게 몰랐던 부하장교는 최소한 자신이 공동저자로 올라 있어야 했다며 분개했다. 출판을 기념한 회식자리에서 영관장교는 부하장교의 원망어린 시선과 떨떠름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럼, 이순신이 직접 왜적을 다 죽였나?”

명량해전에서 직접 왜적을 죽인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인데, 왜 이순신에게 공이 돌아갔는가에 대한 그의 자문자답이다. 이순신이 망치를 들고 거북선을 만들거나 팔을 걷고 노를 젓지 않았을 것이다.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어 적진에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칼을 담금질하고 벼림질하여 왜적을 베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순신을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억할 뿐 그 부하들의 공적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설교에 가까운 영관장교의 요설에 다들 멍하니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뒤 얼굴을 찌뿌리며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어거지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탁월한 무예와 치밀한 작전능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애민애족과 공명정대에 기반한 지도력이 부하들과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모이게 했고 뭉치게 했다. 개인역량과 무기보다도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그 지도력이 전쟁에서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원균은 똑같은 지위(삼도수군통제사)에서 같은 장비와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했지만 처참하게 패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 세 척 모두와 판옥선 140여 척을 잃었다(이순신은 무너진 몸이었지만 거북선 없이도 남은 판옥선 12척으로 명량해전을 이끌었다). 원균의 무술실력과 군사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가 직접 화살을 쏘거나 칼을 들고 전진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래도 원균은 인력과 장비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감히 이순신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다. 그냥 “날로 먹은” 영관장교의 요설이 사람들을 화나게 한 까닭이다.

시민의 좋은 행동을 문정부가 투영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지만 한국의 전염병 방역은 모범사례를 손꼽히고 있다. 정부당국은 과감하고 발빠르게 대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유전자증폭(RT-PCR) 검사법을 개발하여 업계가 진단키트를 양산하도록 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은 악조건에서도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천지나 이태원 같은 돌발변수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적극 협력했다.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H1N1)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같은 공무원, 같은 의료진, 같은 국민인데, 문재인 정부는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권과 이토록 천양지차天壤之差인가?

문정부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촛불혁명과 지난 해 한일 무역분쟁을 거치면서 깨어난 민의에 귀기울였다. 코로나19 현황을 보고하는데 머물지 않고 방송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했다. 박근혜정권의 청와대가 재난관리 책임을 회피하고 MERS 환자가 발생한 병원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신속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시민들의 협조를 구했고 시민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고 했다. SARS 방역에 성공하고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설립한 노무현 정부처럼 문재인 정부도 돈과 집권자가 아니라 사람과 시민이 기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문대통령은 관료제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전염병 방역을 독려했다. 청와대가 국가재난으로 인식하고 법에 따라 대처했지만, 위계질서로 찍어눌러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정치가 아닌 과학 영역인 만큼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문대통령은 박근혜정권에서 부당하게 멍에를 쓴 정은경씨를 일찌감치 질병관리본부장으로 발탁했다. 전문성도 없으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공식회의에서 그저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직원들이 맥빠지지 말고 힘내라고 홍삼액을 보냈다. 지금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사태수습을 주관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총리를 포함한 관료들과 지자체장들은 매일매일 정본부장의 입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대통령은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조정하고 지원하고 격려했다. 정적들의 무차별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정도를 걸었다.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면 이성과 원칙에 철저한 상식인이라는 점이다. 달변이 아닌 문대통령과 정본부장에게서 진심과 신뢰가 묻어난다. 트럼프나 아베가 지금 청와대에 없는 것이 천행이고 홍복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최소주의행정학> 5(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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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2020. 9. 27. 14:58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제 21대 국회의원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지역구에서만 163석(미래통합당은 84석)을 차지했다. 더불어시민당과 합하면 180석이다. 수구기득권세력이 좌파독재, 경제폭망, 안보파탄이라고 문재인정권을 낙인찍었지만, 메아리가 되지 않은 저주였다. 촛불혁명으로 청와대권력이 교체되었고, 이제는 국회권력도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괴롭혔던 자들이 대거 사라졌다. 민생당 올드보이들의 마지막 몸부림도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국민의당 안철수의 생뚱맞은 뜀박질도 머쓱해졌다. 기세등등했던 소위 “태극기부대”의 패거리질도 봄날 아지랑이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다. 거짓은 참(진심)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정의당의 어리석은 패착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의당의 성적표다. 정당지지율 9.67%에도 불구하고 고작 6석(지역구 1석)을 얻었다. 욕심이 과해서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찼다. 정의당만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에는 잘못이 없다. 정당이라면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공직선거법 개정과정에서 강력한 수구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과 한 배를 탄 상황이었다. 정의당의 패착은 분명했다.

우선 정의당은 선거법 협상과정에서 비례대표 상한선을 20으로 하자는 민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위성정당 출현을 우려했다. 심상정씨는 연동형 비중을 줄이고 캡을 씌워야 한다는 주장을 거대정당의 “후려치기”라고 비판했다. 떡이 크게 보였고 바로 손에 잡힐 듯 느꼈을 것이다. 상한선이 30으로 정해지자 예상대로 위성정당이 출연했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무책임하게 속보이는 꼼수를 용납했다. 어처구니없는 이 결정으로 사달이 난 것이다.

두번째 패착은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개정된 선거법에서 독자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일까? 민주당이 비례대표 순서를 뒤로 하겠다고 양보했지만 끝끝내 참여를 거부하였다. 1할을 전후한 정당지지율을 보면서 침을 삼켰을 것이다. 물론 진보라는 원칙과 이상이 울었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비굴함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고려하는 현실적 이상주의여야 한다(1986: 138). 노회찬이었으면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대의를 위하여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번 선거에서 당당하게 최소한 10석(33.35%+9.67%를 가정하면)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열린민주당은 잠깐 인기를 몰았으나 국민의당과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3석(정당지지율 5.42%)에 머물렀다. 정봉주씨와 손혜원씨가 개혁성(선명성)과 확장성을 내세웠지만 결국 자기 살을 깎아먹었다. 민주당과 혹은 진보 지지자들 간의 갈등과 혼동을 초래했고 끝내 유권자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동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삐지고 흉보는 모습은 곱지 못했다. 의도가 순수했을지라도 순진무구의 자해에 가까운 과격이었다. 열린우리당처럼 마지막 2분을 참지 못하고 밥솥을 불에서 내려놓아 일을 그르친 것이다(1991: 198).

반부패, 반분열, 반과격

소정 선생님께서는 약자의 분열을 늘 경계했다. “나는 이 툭하면 갈가리 찢길 인자를 가진 운동체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를 고심했다”(2008: 380).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빌어 부패하지 말고, 분열하지 말고,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2008: 571). 무서운 상황에서 필요한 최소행동은 비폭력 대응, 동지들 간의 철저한 합의에 의한 운동, 시민과의 호응과 연대라 할 수 있다(1991: 25-26).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에게 돌리는 개인윤리를 갖는다(1996: 429). 실패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실패의 책임을 동지에게 돌려서는 안된다(2008: 386). 동지 간에 이용관계(잇속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다(1996: 621). <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사는 비결은 비폭력과 단결(동지애)이다(1991: 334). 이러한 동지에 대한 관용과 존경이 마음속에서 스며나오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참음이 필요하다(2008: 386).

더불어시민당의 진심과 간절함

최배근·우희종 교수가 이끌었던 더불어시민당은 정의당과 열린민주당과는 다른 길을 갔다. 애초부터 촛불혁명이 좌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민을 위하여”를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으라는 요구다. 사사로움(잇속)을 갖지 않고 대의를 위하여 진보진영의 연대로 촉구하고 판(플랫폼)을 깔아주었다. 두 대표는 선거가 끝나면 미련없이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을 전개하였다(1996: 620).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고(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동지를 해치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남탓하지 않았고), 참여정당의 합의내용에 충실했다. 민주당도 자기 몫을 11번부터 시작함으로써 연동형 선거법의 취지를 살려보려는 의지를 보였다. 선거법에 따라 참여정당의 직접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간판스타도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전국을 누볐다. 길고 혼동스러운 투표용지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시민들은 높은 지지율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께서 제시한 운동 방식에 충실한 결과다.

민주당은 경악스런 선거결과에 두려움을 느낀다며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곱씹었다. 승리에 취하여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부패와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 인기를 노리는 과격한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당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묵은 개혁과제는 순리에 따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세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경합 중인 민주당 후보들이 막판에 대부분 승리했다. 패색이 짙던 김남국도 막판에 살아왔다. 그냥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처참하게 쓸려간 세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하필 오늘이 세월호 참사 6주기 아닌가? 어린 원혼들을 편안히 잠들게 할 때다.

같이 읽기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최소주의행정학> 5(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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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2020. 9. 27. 14:44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더불어민주당이 1월 28일 자 <경향신문>의 정동칼럼에 게재된 “민주당만 빼고”를 지난 달 13일 공직선거법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두어 주 전에 발행된 사설私說에 늦은 시비를 거는 것이 우습다. 쓸데없는 짓이다. 공당에서 언론사와 기고자를 고발하는 것도, 반발이 일자 고발을 취소하고 사과하느라 허둥대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껏 문학과 사상과 예술을 억압했던 자들이 이제와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민주당을 비난하는 일임에랴. 언론중재위원회가 12일 해당 私說을 공직선거법 8조(언론기관의 공정보도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냈지만, 이 소동을 법위반과 정쟁으로 보는 시각이 불편하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

일부러 날을 잡아 “민주당만 빼고”를 정독한 느낌은 한마디로 자괴감이다. 아무리 연구교수라지만 어설픈 “아줌마 논법”에 수구신문의 글쓰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인 상황에서 왜 “민주당만 빼고” 찍으라는 것인지... 멀쩡한 신문사에서 음식으로 치면 맛을 논할 수준도 안되는 먹을거리를 상에 올린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소위 “기레기”로 표현되는 언론인의 수준 그대로는 아닌지. 공직선거법을 어겼는지 표현할 자유를 침해했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와 신문사의 기본과 상식에 관한 문제다.

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최악이나 차악이나 나쁜 것은 매한가지여서 어차피 선거가 끝나면 상전노릇을 할테니 차악을 편드는 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결론은 선거도 정치도 없애야 한다(혁명을 해서라도 판을 뒤집자)가 아니라 뜬금없이 여당을 찍지 말라니... 최선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국민이 매번 차악을 선택했다가 배신을 당했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에 최선(틀림없이 모든 공약을 그대로 집행하는 정당)이 존재했단 말인가? 순진무구한 노녀老女의 두서없는 푸념이자 무책임한 망발이다.

그런데 정말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한 것이 잘못일까? 2월 16일 SBS의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한 글쓴이는 수구세력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민주당에게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싹수라도 보이는 자들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나름의 합리성이자 아량일 터이다. 하지만 강자(기득권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너도 잘한 것이 없다며 죽도록 발길질을 해대는 어리석음이다. 강자의 포악함에는 으레 그러려니 눈과 귀를 닫은 채 약자의 잘못만 야박하게 따지고 난도질하는 자들이다. 최악을 치죄治罪하지도 않으면서 강자의 편에 서서 차악을 훈계하는 짓이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모세를 원망한 못난 군중의 정신줄이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잃은 것이다.

인간에게 차라리 차악이 최선이다

소정 선생님(1986: 140)은 “물론 못난 야당이 어진 야당만은 못하다. 그러나 야당이 여당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는 신통치 않더라도 야당이 살아 남아 주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부정을 하는 구성원이 있는 [구조적으로 선한] 야당이 부정을 안하는 구성원이 있는 포악한 [구조적으로 악한] 여당보다 낫다”(1991: 308). 신이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을, 윤리적으로 나쁘지만 구조적으로 힘없는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1991: 307). 요셉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형(카인)에게 맞아죽은 아벨과는 달리 살아남아 최소한도의 회개라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던 형들을 용서할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요셉을 낳을 수 있었다. 한 단계 진전이다.

소정 선생님(1991: 306)은 “신이 최대의 개인윤리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점이 멋이 있다. 신은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자이다”라고 풀어냈다. 최소한의 변화(회개)라도 있어야 다음에 좀더 나은 권력의 견제자가 등장하며,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1986: 140-141). 그러니까 지금 당장 최선이 아니라고 해서 최악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인간에게 최선은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계속 타락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또 후회하면서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차악이 차라리 최선이다. 그러니 최소한이라도 악행을 돌아보고 말귀라도 알아들으려는 차악이 얼마나 귀한가. 어쨋든 그 미약한 시작이 없다면 어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악의 성장을 지켜보라

민주당이 여당이니까 구조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는 민주당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던 수구세력이다. 애초부터 친일부역세력과 친미반공세력을 등에 업고 지금껏 해먹고 있는 구조악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민주당이 집권하긴 했지만 여전히 민주세력은 위태롭고 아쉽다. 적폐청산도 개혁도 시원스럽지 못하고 더디기만 하다. 수구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패악질과 “침대축구”로 버티는 한 무던히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세월호 7시간을 양보해서라도 탄핵을 취해야 했다. 누더기질로 복잡한 셈법이 되었다 해도, 가짜정당으로 무력화되었다 해도 선거법을 바꿔야 했다.

수구세력의 파상공세와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지지도는 견고하다.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굼뜨지만 야곱(열린우리당)에서 요셉으로 성장해가는 변화를 보여준다. 하늘(백성)은 어리석지 않다. “민주당만 빼고”야말로 이상에 집착하여 이성을 잃은 자들의 횡설수설이자 “죽쒀서 개주는 짓”이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어린 새싹을 닦달하고 뿌리채 뽑아버려서야 어디...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최소주의행정학> 5(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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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2019. 5. 16. 12:34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소정 선생님은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으로 진화하는 초월윤리를 정부관료제(행정개혁)에 적용하면서 “모든 나쁜 것은 官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民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1991: 42). 또한 악은 민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는 정권에서 나온다고 했다(2008: 268). 나는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부관료제가 제대로 설계되고 운영되지 않으면 백성들을 괴롭힐  뿐이지만, 그렇다손 쳐도 관료제(통치행정구조)가 모든 악의 씨앗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모든 좋은 것은 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다

여기서 民은 재야, 야당, 노조, 대학, 언론기관, 종교단체 등의 사회단체(시민사회)를 말하고 官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포함하여 통치자, 정권(여당), 정부관료제라 할 수 있다. 民은 나라의 주인이고 官은 민의 머슴이다. 정부 관료는 머슴처럼 주인의 일을 대신 해주고 녹을 받는 공복이다. 이런 존재의 차이를 생각했을 때 나랏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주인의 관심사지 애초부터  머슴(공복)의 관심사가 아니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民과 官의 좋은 행동은 무엇이고 나쁜 행동은 무엇일까? 좋은 시민사회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관이 일을 잘하는지를 감시하고 필요한 조치를 요구한다. 그 반대는 주인이라는 생각없이 잇속을 위해 망언과 망동을 서슴치 않는다. 합리적인 압력과 저항이 민의 좋은 행동이라면 책임회피와 어리석은 난동은 민의 나쁜 행동이다. 좋은 정부관료제(통치자)는 민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공복임을 마음에 새겨 주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그 반대는 백성의 머슴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잇속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다. 주인을 섬기기는 커녕 합리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비폭력 저항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한다.

民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면 官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관이 민의 좋은 행동을 배운다고 했지만 사실은 민의 감시와 압력과 저항 때문에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은 애초부터 좋은 행동을 할 의지가 없다. 오직 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합당한 일을 시켜야 관이 나쁜 행동을 못하게 된다. 주인이 게으르고 어리석다면 머슴은 주인을 우습게 보고 머리꼭대기에 올라앉는다. 주인이 경우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거나 패악질을 부리면 머슴들은 분수도 모르고 기고만장하여 주인의 상투들 틀어쥔다. 이런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머슴이 있다면 정신이 멀쩡하지 않거나 어딘가가 고장난 공복이다. 이런 미련한 머슴을 보고 감동을 받고 정신을 차리는 주인은 거의 없다. 나라 일을 크게 망치고 자신까지 망친 뒤에야 스스로의 무책임과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이다.

관의 나쁜 것을 민이 배운다

중요한 것은 民이 官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배운다는 점이다. 민의 나쁜 행동을 관이 배울 필요는 없다. 민이 주인이기를 포기하거나 난동을 피우면 관은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마음껏 해먹게 되어있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닌데 구태여 책임감을 가지고 법과 절차를 준수할 까닭이 있을까? 통치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법 위에 군림하면 약육강식의 난장판이 된다. 폭정과 무질서는 백성을 옥죄고 약탈한다. 통치자의 욕심은 채울수록 갈증만 더해간다. 끝내는 정권의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법은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1986: 289).

대혼란에서 民은 공정한 법과 절차를 기대할 수 없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찍어누를 뿐만 아니라 강자끼리도 서로 더 해먹겠다고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백성들도 아비규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아귀다툼을 한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금품을 건넨다. 민이 관의 나쁜 행동을 배우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부지불식 중에 닮아가게 된다. 지금 우리의 비루함은 그런 친일냉전독재의 그림자는 아닐는지. 사회 구석구석에 “갑질”과 “왕따”가 제도화되어 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빨갱이, 좌파독재라는 주술은 여전하다. 법과 합리성과 도덕과 양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모든 폐해는 결국 백성의 몫이다.

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주인이 어리석어 주인노릇을 못하면 머슴은 일은 안하고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서로 “코드가” 맞아서 과격함이 극에 달한다(2008: 578). 그런데 머슴은 스스로 잘못을 수정하고 퇴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官의 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것은 어쨋든 민이다. 국민과 정부와의 관계에서 온기의 원천은 국민이다(2001: 42). 民의 비폭력 투쟁이다.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가 통치자를 향하여 악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해야 바로잡힌다”(2008: 65).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1991: 30).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호응을 얻어 잔치가 되고 널리 감동을 만들어 내면 官은 바뀔 수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기는 통치자는 없다. 전두환을 굴복시킨 6.10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를 쫓아버린 촛불혁명 역시 주인임을 자각한 시민들의 감동어린 잔치였다.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세상의 주인은 민이다. 하지만 슬기롭고 부지런하고 용기있는 주인만이 주인노릇을 할 수 있고 주인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머슴(통치자나 관료제)의 언행을 지켜봐야 한다. 경우에 맞는 요구를 하되 시비를 철저히 가려서 못된 버릇을 고쳐가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최소주의행정학> 4(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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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눈높이와 인사청문회의 폭력

2019. 4. 17. 01:01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달 20일 문형배씨와 이미선씨를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했다. 이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지난 10일 두 후보자를 대상으로 인사청문회를 열었다. 여야는 이 후보자 내외가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거래한 사실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수구세력은 후보자의 재산내역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고 내부정보를 이용한 의혹이 있다고 했다. 금융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하고 후보자 내외를 검찰에 고발했다. 여당은 주식투자가 실정법 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법조계와 정의당은 이 후보자의 자질과 소수약자라는 점을 부각했다. 이 후보자는 본인의 주식을 처분했다고 밝혔고, 헌법재판관이 되면 남편의 주식도 전부 내다 팔겠다고 했다. 15일 발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할(28.8%)이 적격, 5할 이상(54.6%)이 부적격이라고 답했다. 이런 대결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누구의 눈높이를 말하는가?

누가 “국민의 눈높이”를 운운하면 나는 종종 그 “국민”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아전인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 후보자 내외의 전체 재산은 43억원이고 그 중 8할이 넘는 35억원을 주식으로 가지고 있다. 후보자 이름으로 된 주식은 약 7억원인데, 모두 남편이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판사로 재직하다가 법률회사의 변호사로 일해온 남편의 연봉은 약 5억원이라고 한다. 과연 이들의 재산불리기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일까? 손가락질을 당해 마땅한가?

한 가구의 재산이 40억원을 넘고 개인 재산이 9억원인 것은 보통 사람들의 눈을 벗어난다. 하지만 50대 내외가 판사이고 이름있는 변호사임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남편 연봉 전부를 한 10년 저금해서 이자나 챙긴 정도다. 시골 사람들도 다 어림으로 하는 셈법이다. 주식 대신에 서울 강남에 어지간한 아파트 두세 채를 사놓았더라면 크게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이재理財에 밝지 못한 내외다.

청문회에서 주식이 왜 이렇게 많냐는 푸념도 있었다. 부동산에 분산 투자하지 않고 주식에 몰아넣은 것은 분명 투기의 기본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주식보유량이 너무 많다거나 비중이 과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주식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과할 수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 보면 재력이 좀 있는 투자자일 뿐이고 재벌 총수의 눈으로 보면 티끌만도 못한 존재다. 그런데 왜 후보자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주식이 과하든 과하지 않든 실정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유재산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인가. 내외의 기본권을 짓밟는 폭력이다.

또 주식거래가 5천회에 이른다며 근무태도를 비난했다. 10년 동안 거래했다면 월평균 40여 차례 주식거래를 한 셈이다. 과연 근무시간에 업무를 제쳐두고 주식에 몰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직자가 업무에 전념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사람살이는 기계와 같을 수 없다. 자신들은 걸핏하면 국회를 뛰쳐나가 스스럼없이 딴짓을 하면서 후보자에게는 업무 외의 일(예컨대, 배우자에게 전화를 한다든가, 차를 마신다든가, 인터넷으로 송금을 하는)을 일절 해서는 안된다고 어거지를 쓰는 것은 아닌지. 주식거래에 눈이 팔려 엉터리로 재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수안 전 대법관은 “강원도 화천의 이발소집 딸이 지방대를 나와” 법관이 되었음을 환기시키고 남녀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법관 중 한 분이라고 했다.

수구세력에게 사유재산이란?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수구세력의 반응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이 주식거래를 비난하고 범죄로 몰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자나 깨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주의를 숭배하던 자들 아닌가? 사유재산을 반공산주의의 상징처럼 여기던 자들 아닌가? 얼마 전 사립유치원 비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사유재산을 빼앗는다며 비난했던 자들 아닌가? 2005년 사립학교법을 개정할 때도 사유재산을 지킨답시고 그리 난리를 친 자들 아닌가? 따지고 보면 부동산보다 주식시장에 투자한 것을 칭송해야 할 자들이 아닌가? 도대체 사유재산이 많다고, 주식에 “몰빵”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과연 보수고 시장주의자들인가? 자신의 사유재산은 눈꼽만치도 건들지 못하게 하면서 남의 재산에 대해 트집을 잡는 심보는 무엇인가? 보수도 뭐도 아닌 수구·냉전·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왜 수구세력은 이 후보자를 험악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먼저 이것은 그냥 화풀이다. 결국은 문재인을 헐뜯고 싶은 것인데 대놓고 못하니까 조국을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다. 조국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에 후보자를 거칠게 몰아붙여야 한다. 주식이 아니었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걸고 넘어졌을 것이다. 이 후보자 내외는 주식 때문에 이 곤욕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조국 때문에 애먼 매를 맞고 있다. 두번째는 수구세력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노무현씨에 대한 저주와 마찬가지다. 성골 진골도 아닌 “듣보잡” 주제에 언감생심 헌법재판관을 꿈꾸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지방대학을 나온, 그것도 멀쩡한 남자가 아닌 “치마” 판사아닌가? 아직 50줄도 안된, 이마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 아닌가? 돈을 좀 모았다고 족보를 사서 시답잖은 양반 흉내를 내는 쌍놈의 꼬락서니라니. 목불인견이다. 만일 이 후보자가 스카이를 졸업한 늙어빠진 “바지” 판사였다면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

이 후보자에 대한 수구세력의 언행은 과하다. 현행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위장전입도 없지 않은가? 지방대학을 나온 여자가 헌법재판관이 되면 안되는가? 주식투자로 재산을 묻어두고 여유있게 살면 안되는가? 같은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보라.

물론 주눅이 들었는지 후보자가 소신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남편에게 떠넘기는 모습은 아쉽다. 내외가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밝힌 대목도 씁쓸하다. 조폭의 매질에 못이겨 “삥”을 왕창 뜯긴 것은 아닌지. 청문회를 빙자하여 무고한 이를 꿇려놓고 무차별로 “말길질”을 해대는 모습이라니. 최소한 후보자의 인권과 재산권을 보장해주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씨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눈높이와 인사청문회의 폭력. <최소주의행정학> 4(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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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노신사의 성내기와 민주주의

2019. 4. 11. 14:19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얼마 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 박물관에 다녀왔다며 누군가가 내게 Elinor Ostrom (1951-2012) 사진을 선물했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3년 뒤에 세상을 떠난 인디애나대학교의 정치경제학자다. 짧은 인연을 생각하며 바라본 사진 속 린(엘리노어의 애칭)은 너무 근엄해 보였다.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자상하고 활기찬 모습 뒤에 엄격함과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그래도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린의 동반자였던 Vincent Alfred Ostrom (1919-2012)도 비슷한 양면성을 가진 분이다. 

빈센트와 소정 선생님

언젠가 안도경 교수가 빈센트와 소정 선생님(1927-2014)께서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했다. 수년 간 린과 빈센트와 지냈고 고대 행정학과에서 가르쳤던 TK(안교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딱 맞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모두 키가 큰 편이다. 한덩치를 하고 서 있는 모습이 비슷하다. 특히 멜빵바지를 입은 모습과 어눌하게 말씀하시는 말법이 몹시도 닮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두 분의 닮은 꼴은 생김새보다는 생각과 행동에 있다. 소정 선생님께서 자신을 청교도로 규정했는데, 빈센트 역시 청교도 모습이었다. 한없이 인자한 반면에 상식과 원칙에는 타협하지 않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 오스트롬 Workshop에 갔을 때 나는 긴장을 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어서 더 낯설게 보였다. 옆자리에 지팡이를 든 어느 노신사가 앉았는데, 내게 어디서 왔는지 묻고는 워크숍 생활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것 저것 알려주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 노신사가 그때 이미 팔순인 빈센트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빈센트는 미국이 알래스카를 얻은 뒤 주헌법제정의회(Alaska Constitutional Convention)에게 자연자원 관리에 관한 자문을 해준 분이다. 관개灌漑와 어로漁撈 같은 공유자원(common-pool resources) 문제를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빈센트가 종종 polycentricity (일을 해나가는 주체가 여럿이어서 서로 협력하고 조정해나가는 경우)와 미국의 연방제(federalism)를 확신있게 말할 때 나는 그냥 민주주의 이론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었다. 빈센트가 정부가 시민단체에 돈을 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을 비판할 때도 나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우연히 빈센트의 행동을 목격하면서 나는 벼락을 맞는 깨달음을 얻었다. 

빈센트의 성내기

어느 여름날 나는 Kroger라는 대형 식료품점에 갔다. 필요한 물건을 담아서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다가오길래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허리를 펴고 무슨 일인가 봤더니 계산대 앞에 선 노 신사가 지팡이로 저쪽을 가리키며 고함을 치고 있었고,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 흑인이 뒷걸음질 치더니 몸을 돌려 내빼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노신사가 빈센트였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손수 장을 보러 나오셨을까...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빈센트는 어떻게 저런 자를 점원으로 고용하느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빈센트의 노여움이 하도 서릿발같아 나는 차마 나서지 못했다. 

빈센트 다음으로 (그러니까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던 아주머니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점원이 껄렁껄렁한 표정과 몸짓으로 빈센트가 담아온 물건을 성의없이 끄잡아서 스캐너로 읽었고,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마음이 상한 빈센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을 했지만 점원은 비웃으면서 계속  오만불손한 행동을 계속했고, 결국 빈센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그 점원이 뒷걸음치면서 지었던 비열한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이런 것이었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렇게 탄식했다. 민주주의란 것이 공짜가 아니구나. 거창하게 혁명, 선거, 시위 등에서 민주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다. 정치행사가 아닌 일상 생활에 잘 녹아든 민주주의여야 한다. 정치인과 법조인이 아니라 일반 유권자의 수준이 민주주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시민 개개인이 자연인으로서 누리는 기본 권리와 그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했을 때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치열하게 다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일반 시민의 이해와 용기와 행동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고객으로서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는 커녕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마저 무시당한 것에 대해 단호하게 부당하다고 말하고 시정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 소정 선생님이 묘사한 청교도 모습이다. 그제서야 정부가 시민단체에 돈을 주는 것을 왜 빈센트가 싫어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권자의 정직한 뜻과 피와 땀이 필요할 뿐이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씨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는 까닭이다.  

시민단체는 자발성과 자율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정부가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자본(social capital)을  늘린답시고 민간부문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는 것과 같다. 지난 9년 동안 신문 방송을 장악하고, 국가기관이 나서서 여론을 조작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랏돈으로 사회단체를 매수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정적을 공격하게 했음이 드러났다. 자발성과 자율성이 망가진 이들에게서 소정(1980)이 말한 관官의 폭력을 견제하는 합리적 요구와 건전한 압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세월호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인권과 9년간 짓밟힌 주권자의 자존심과 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깨어있는 시민의 사려깊은 이해와 참된 용기와 질서있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촛불 집회가 소중한 까닭이다. 나는 그 때 수많은 빈센트가 성내는 것을 보았다. 


원문: 박헌명. 2017. 팔순 노신사의 성내기와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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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일과 경우에 맞는 행정

2019. 4. 11. 14:18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소정 선생님은 구민법의 대상이 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숫제 선거권을 주지 않는 제한선거제도를 채택했더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08: 219). 어느 수업시간이었는데, 당시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보통 ·평등·직접·비밀 선거라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말씀이셨기 때문이다. 인종, 지역, 성별, 교육, 소득 등에서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선거(universal suffrage)가 상식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칙은 원칙이 아니라 주입된 이념에 가깝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

나는 몇년 전부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몇몇 사회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꾸준함을 깊이 새겨 매달 꼬박꼬박 내려고 한다. 또 <너흰 아니야>와 <이게 나라냐 ㅅㅂ>를 만든 윤민석씨의 “감동후불제”에 동참했다. 지난 해 촛불집회에 조카와 함께 참석해서 기꺼이 촛값을 내고 왔다. 촛불집회에 가면 일당 5만원씩 준다는 음흉한 뜬소문을 옮겨온 아버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5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학생 시절에는 호주머니가 가벼우니 이런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애초부터 내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제는 취직도 해서 좀 여유가 생겼으니 말하자면 호기浩氣를 부린 셈이다(사실은 마음이 문제지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는 단지 호주머니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수많은 촛불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2009년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마음이 울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놓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방심했던 것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절망으로 보내면서 무책임했던 유권자였음을 자책했다. 한국을 떠나와서 벌어진 일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던 안타까움이 있었다. 큰 빚을 졌고 그 빚이 묵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치를 것은 치르고 내 몫을 요구해야

그러던 터에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1986)에서 “치를 것은 치르고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경우에 맞는 성장을, 한 개인에게서나 국가에서나 보고 싶은 것이다”(62쪽)를 읽었다.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고 내 몫을 기대했다는 뉘우침이 있었다. 손 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는 심보랄까. 경우에 맞지 않는 짓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소정 선생님은 사람(정치), 돈(경제), 지식(문화)에 관한 좋은 의식이 사회에 퍼져야 한다고 했다(1986: 64). 미움과 박해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와 나누는 마음을 품고, 연줄을 대거나 요행수을 바라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쓸모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마디로 행동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64쪽).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회단체에 참여하거나 후원금을 내는 일을 언급했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공짜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음에도(2001: 16) 어리석게도 나는 감나무 밑에서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홍시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상식과 원칙과 정의를 갈구했지만 “행동을 하는 일”에 한없이 게을렀음을 알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은 또 제한선거를 말씀하시면서 “당비를 내는 [지방의원 입후보자] 선거인단이 극소수인 것을 발견하고 의사표시만 앞세우고 회비 지출 의무를 안 지키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결핍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적었다(2008: 219).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금·당비·후원비를 안낼까 자문하고, “국민 일반이 더럽게 벌었기에 깨끗한 데 돈을 못 쓴다”고 답했다(219쪽). 돈을 더럽게 번 사람은 자신을 타락시키거나 세속의 복(줄서기나 횡재)을 비는데 돈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비·당비·후원회비를 잘 내는 나라치고 돈 못버는 젊은이들이 백화점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는 나라가 있는지를”(220쪽)이라고 한탄했다. 유권자가 치를 것을 다 치르지 않고(책임과 의무는 나몰라라 하고) 민주주의를 기대했다는 뜻이다. 뼈아픈 지적이다. 매달 글을 써서 올리고 후원금을 내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일, 경우에 맞는 행정

경우境遇는 사리事理나 도리道理를 말한다. 경우에 맞는 일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다. 지난 9년이 참담했던 까닭은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을 핑계삼아 전시작전권 환수를 차일피일 미뤄놓은 군면제자들이 유사시에 원점타격을 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일도 경험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엽기·변태 행각으로 파면되어 감옥으로 끌려간 판에 적폐청산과 국정농단 조사를 두고 정치보복 운운하는 일임에랴... 소위 “갑질”이라는 것 역시 경우없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정부 관료제에서 경우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안타깝다. 천둥벌거숭이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관료제의 전문성과 중립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고삐풀린 정부는 원래 좋은 말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그동안 경우없는 정권에서 댓글을 달아 여론을 조작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民(관변단체 등)을 타락시켰음이 드러나고 있다.

합리성을 갖춘 행정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화문을 포함한 전국에서 타오른 촛불의 물결이 준 교훈이다. 관료제에서 옳지 못한 경우를 바로잡는 것은 결국은 백성의 몫이다. 주인으로서 경우에 맞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유권자가 제 몫을 요구하기 전에 치러야 할 경우에 맞는 값이다. 좋은 기사를 읽고 토론하고  촛불을 들고 후원금을 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좋은 의식”과 “좋은 행동”이 못된 官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우”의 기준을 세워나가면서 경우에 맞는 행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원문: 박헌명. 2017. 행동하는 일과 경우에 맞는 행정. <최소주의행정학> 2(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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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2019. 4. 11. 14:17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지난 5월 문재인씨가 제 19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청와대 위민관爲民館의 이름을 여민관與民館으로 되돌린다고 했다. 2004년 노무현씨가 청와대에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짓고서 여민관으로 이름지었는데, 2008년 이명박씨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다수가 이명박씨의 “Anything But Rho”라는 구호로 추진된 “노무현 흔적 지우기”라고 생각했다. 임석규 (2017)는 여민이든 위민이든 뜻은 다 훌륭하니 문패를 갈아치우는 악순환을 피하고 그 뜻을 제대로 구현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두리뭉실한 양비론이 몹시 불편하다. 과연 여민과 위민은 같은가?

<맹자>에 나오는 여민

여민관의 “與民”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긴다(與民同樂)”는 표현에 있다. 반면 위민관의 “爲民”은 고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단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추정된다. 임석규 (2017)는 세종의 “위민정치”를 본받겠다는 명분으로 풀이했다. 혹자는 링컨의 말에 빗대어 여민은 by the people에 상통하고, 위민은 for the people에 해당한다고 풀었다 (http://boramaeavengers.tistory.com/266). 여민의 주체는 국민이고 위민의 주체는 정부(청와대와 관료들의 엘리트주의)라는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고전종합DB (http://db.cyberseodang.or.kr/)로 살펴보면, 여민은 <맹자>에서 분명한 출처를 찾을 수 있지만 위민은 그렇지 않다. 與民은 <맹자> 본문에서 총 일곱 번 나오는데 與民同樂과 不與民同樂으로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 에서 두 번 나온다. 나머지 다섯 번 모두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爲民은 <맹자>에 爲民父母 (백성의 부모가 되어)로 세 번, 爲民上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그리고 以爲民望 (백성들이 보고 따라하게 하시고)으로 총 다섯 번 나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백성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논어論語>를 포함한 사서에서도 백성을 위한다는 爲民은 찾아볼 수 없다.

소정 선생님께서 아끼는 <맹자> 양혜왕장구하 4를 살펴보자. 不得而非其上者 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 亦非也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위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지 않는 자도 잘못이다). 여기서 여민은 “與民同樂”의 일부로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이다. 흔히 알려진 뜻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 위민은 “爲民上”의 일부로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爲가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된다”(자격내지는 지위)는 뜻이다. 원문의 맥락을 반영한다면 “爲民館”이 아니라 “民上館”이 되었어야 했다. 爲가 아니라 民上이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풀이하면 백성의 위에 군림하는 자리이니 그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나라를 평안케하라는 뜻이다. 결국 爲民館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제멋대로 갖다 붙인 “막이름”이다.

<맹자>에 안나오는 위민

“위민사상”이라며 사람들이 흔히 언급하는 <맹자>의 문구는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14이다. 하지만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벼운 존재다)이라는 문장에서 民爲는 있지만 정작 爲民은 없다. 왜 그럴까? 당시는 왕조체제였으니 임금을 위한다는 爲君이란 표현은 있을까? 사서 중 <논어>에 爲君이 딱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임금답다와 군자가 되다라는 뜻이지 임금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愛民처럼 어떤 일상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충”과 조선왕조에서 특히 강조한 “충성”이 다르듯이,  후대에 필요에 따라 덧칠되거나 조작된 어휘나 용법이 아닐까? 나라에 대한 충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절대 가치로 등극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위민과 여민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혈통이 분명한 진도개와 개처럼 생겼으나 종마저 헷갈리는 “듣보잡”을 견주는 일이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

국민과 더불어 한다는 뜻을 담은 여민관은 참여정부의 사상과 철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말 그대로 與民觀이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고 나쁜 뜻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명박씨는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의식(자신과는 달리 깨어있는 시민들의 진심어린 성원을 받는 것 못마땅하고 기분이 나빠서) 때문에 저지른 “무조건 반항”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과 더불어 일을 해나간다는 “여민”은 왕조 정신줄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 임금과 백성이 겸상을 하고 “맞짱”을 뜰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인자한 임금이 어리석은 백성을 긍휼하여 성은을 베푸는 “위민”이 있을 뿐이다. 이명박씨의 爲民觀이다. 백성들은 본시 우매한 존재여서 분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쉽게 속고 쉽게 흥분한다. 검은 돈을 받고 촛불을 들고 난동을 부리곤 한다. 철없는 애들까지 선동하여 거리에서 큰 어른인 대통령을 욕보이게 한다. 그러니 노무현이 틀려먹은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씨의 정신줄에서는 당연히 與民이 아닌 爲民이어야만 했다.

爲民觀이 역겨운 까닭

나는 “위민”이나 “애국”이라는 말에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위정자들이 나라를 위한다느니 백성을 위한다느니 하면서 세상을 속이고 자신들을 속였던가? 현대사에서 “애국”이라는 말을 누가 애용했던가? 완장차고 빨갱이를 잡는다고 설치던 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구차한 말이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권력을 남용하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이 역겹게 내뱉은 말이다. 국민들이 우려하는 4대강 사업과 광물 외교를 벌일 때 넌더리 나게 듣던 소리다. 엽기 변태 행각으로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근혜씨를 구출하자며 태극기를 휘날리는 자들이 신물이 나도록 외치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의 “위민”에서 백성은 없었고, “애국”에서 나라는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이 있었다. “위민”의 대상은 온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자기편”이었다.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까지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소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국민을 갈라놨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국민이 아니라 빨갱이고 종북좌파이고 노빠문빠였고, 꼭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이창동의 <시>는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인들이 인정하는 빼어난 작품이었지만 이명박과 유인촌에게는 그냥 “빵점”이어야만 했다.   

“애국”의 대상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며 집단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다. 나라가 있다면 바로 그들 자신이다. 따라서 빨갱이와 종북좌파들이 세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는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 그들만의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스통을 굴리고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애국”하는 이유다. 우국충정이란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켜고 종북좌파를 만들고 뒷조사하고 집요하게 짓밟았다. 정예요원으로서 쪽팔림을 감수하면서 “가카”를 기쁘게 하는 감동스런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르는 대로 달려가서 빨갱이 타령을 하고 종북좌파라면서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애국을 한답시고 완장차고 거드름을 부렸지만, 사실은 꽂감빼먹듯이 나랏돈을 빼내서 펑펑쓰는 재미가 솔솔했다. 여기 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애국한다는 자부심과 자기최면으로 꿋꿋하게 버텼지만 그냥 뒷돈을 받아 챙기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에 백성이 있고 어디에 국가가 있단 말인가? 위정자들이여, 제발이지 위민도 하지 말고 애국도 하지 말라.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욕보이고 거덜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묻지마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

새로 들어선 정권이 건물 이름을 자기 입맛대로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큰 흠이 없다면 전임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론절차를 거쳐 바꾸는 것이 상식이다. 건물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지만 시시비비를 가려서 말해야 한다. 애초에 이명박씨가 정당한 이유없이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문제였다. 당시에도 말이 많았을 정도로 합당하지 않았고 쓸데없이 의심만 샀던 짓이었다. 문재인씨가 여민관으로 되돌리는 것은 사필귀정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런데 어차피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매한가지라면서 이명박씨와 문재인씨의 결정을 싸잡아 악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의도했든 안했든 이런 양비론은 결국 악한 강자의 손을 들어준다. 즉, 이명박씨의 잘못은 덮은 채 문재인씨의 사필귀정을 “악순환”에 쓸쩍 끼워넣는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한패거리로 묶어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자고 유혹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튄 놈은 그 죄가 묽어지고 가려진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자는 너무 박하다거나 가혹하다고 몰린다. 튄 놈은 피해자가 되고 사필귀정은 가해자가 된다. 적폐청산이 갑자기 정치보복이 되어 본질을 호도한다. 결국 패악질은 교정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적폐들이다.
 
혹시나 이명박근혜 정권 때는 공연히 해코지 당할까봐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세월이 좋아지니까 (해코지 위험이 없어지니까) 이름을 되돌리는 것을 시비걸고 나선 것이라면 기회주의자들의 “묻지마 양비론”일 뿐이다. 멀쩡한 사람들을 몽롱하게 만들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헷갈리게 함으로써 악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적폐를 만들어 왔던 논리다. 나는 이런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을 경계하고자 한다.

수구 패악질의 악순환

왜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거듭된 패악질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수구세력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사면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범죄와 부도덕과 비윤리에 완벽하게 면역이 된 인종들인가?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가 국내정치에 개입한 증거가 드러났어도 눈깜짝하지 않고 외면하는 강골들 아닌가? 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인정하지 않다가 위기가 닥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진흙탕싸움을 벌여 물타기를 시도한다. 적폐청산이 이명박을 정조준한다며 슬쩍 노무현을 끌어들인다.

반면에 수구세력들은 자신이 핍박하는 멀쩡한 자들에게 언제나 가혹한 비난을 쏟아낸다. 흔히 빨갱이나 종북좌파라고 낙인찍힌 민주주의자들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마치 큰 죄를 지은 양 침소봉대하고 정적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약자의 꼬투리를 잡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한번 약점이 잡히면 수구세력의 잘못을 들추는 일을 멈추고 쥐죽은 듯이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수구세력은 보수이자 우파이며, 우익보수는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진보이자 좌파이며, 좌익진보는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단순무식한 정신줄이다.

재미있는 것은 핍박받은 자들은 수구세력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너무 쉽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물러선다. 마치 결벽증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사소한 법적 도덕적 인간적 잘못까지 모두 떠안으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대신 짊어진 예수처럼 자책한다. 그것이 옳은 길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자부심마저 갖는다. 정확하게 사실을 밝히고 합당하게 책임을 따지는 일을 꺼려하고 부끄러워한다.

이런 형국에서 승자는 언제나 수구세력이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정적에게 떠넘기는 용기와 몰염치와 재주를 가지고 있다. 수구세력은 사실을 밝히는 일을 방해하고(은폐하고) 조작하는데 적극적인  반면, 정적들은 사실과 책임을 따지는 일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은 패악질을 저지를수록 승승장구하고, 반대세력들은 조그마한 실수에도 고개숙이고 물러난다. 수구세력은 서로 단결하여 패악질을 독려하는 반면, 반대세력들은 합당한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수구세력과 합세하여 더 가혹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피해자로 살면서 결벽증과 반성과 사과가 일상화되고 체질화된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쫄지말고 적폐청산을 말하라

요컨대,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벌거벗은 힘에 기대어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자들을 몰아세우고, 그 반대편 사람들은 사실을 치열하게 따지고 패악질을 비판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일을 낯설어 하고 꺼려 한다. 이런 얼개는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주물러 온 수구세력들의 힘에 눌린 착시효과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수구세력들은 현재 “정치보복”이라고 엄살을 피우면서 또다른 적폐라며 맞서고 있다. 벌건 대낮에 퍽치기당하지 않으려면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힘에 밀려 기득권 세력들에게 매를 맞고 비난을 받더라도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해야 한다 (이문영 1991: 118). 더도 덜도 말고 사실과 법과 상식과 양심에 근거한 옳은 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노무현씨가 걸었던 길이다. 여민이나 위민이나 뜻이 다 훌륭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이 하늘과 땅처럼 멀어 보인다.

참고문헌

임석규. 2017. 여민관-위민관. <한겨레신문>. 2017. 5. 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642.html


원문: 박헌명. 2017. 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최소주의행정학> 2(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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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2019. 4. 11. 14:14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문재인 정부는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내세웠다. 대통령 후보로 나설 때부터 병역회피, 부동산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표절에 연루된 사람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낙연, 강경화, 김상조, 김상곤 등이 위장전입이나 논문표절로 곤욕을 치렀다.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자승자박”이 되어 새 정부를 옥죄고 있다(문현구 2017). 수구 기득권 세력은 공직배제 5대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며 문재인 정부를 공격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거나 참여정부 시절의 ‘코드인사’라며 비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인사참사 정부인가?

과연 문재인 정부가 치솟은 지지율만 믿고 엉터리 공직후보자를 남발했을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이후 국무총리와 장관급 고위공직자 후보자들의 성적을 정권 별로 살펴보자.

후보자가 낙마를 했거나, 청문회 보고서 없이 임명되었거나, 부적격 의견임에도 임명된 비율은 참여정부가 16%로 가장 낮았고 이명박근혜 정부가 각각 53.1%와 51.5%로 크게 높았다(박경원 2017). 문재인 정부는 7월 4일 기준으로 33.3%였다. 낙마 비율만 봐도 참여정부는 3.7% (=3/81)였고, 이명박근혜 정부는 각각 8.8% (=10/113)와 10.1% (=10/99)였고, 새정부에서는 지금까지 안경환 후보자가 낙마를 하여 6.7% (=1/15)였다. 청문회 보고서 없이 혹은 부적격 의견임에도 임명을 강행한 비율은 참여정부가 12.3%, 이명박근혜 정부가 44.2%와 41.4%였다. 문재인 정부는 26.7%였다. 결국 인사참사가 있다면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코드인사’와 ‘회전문인사’를 떠올린다. 이명박 정권의 ‘회전문 인사’와 박근혜 정권의 ‘수첩인사’와 ‘밀봉인사’는 벌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듯하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절반이 넘는 후보자가 논란거리가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비난은 참여정부가 받는 것일까?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부가 ‘코드인사’했다며 비판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 ‘코드’로 치면 김용준, 문창극, 이완구, 황교안, 김진태, 이경재 같은 기라성綺羅星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마법에 걸린 나라?

조기숙(2007)은 이런 황당한 현상을 조선, 동아, 문화 일보(조중동이라기보다는 조동문)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주술로 설명했다. 조동문이 참여정부를 저주하는 주술을 만들면 보수와 진보 오피니언 리더들이 다른 언론에그 주술을 읊어 대고, 급기야는 진보언론(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과 여당(열린우리당)까지 합세했다(40-42쪽). 일반 시민들은 이런 마법에 홀려 사실과 진실을 깨닫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담론 혹은 프레임 경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했고, 부당하게 그리고 박하게 평가받았고, 철저하게 왕따를 당했고, 무방비 상태로 얻어터지고 짓밟혔다.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고위공직자를 임명하는데 5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 상식에 가깝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원칙(예컨대, 성범죄자 배제)을 선호할 수도 있다. 조세와 공납과 역은 옛부터 내려온 나라의 기본이니 납세, 병역, 재산형성이 떳떳하지 못한 자를 공직에 배제하는 것은 합당하다. 다만 주민등록법 37조에 근거한 ‘위장전입’ 여부만으로 공직자의 자질을 판단하거나 표절여부를 가리기가 어려운 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다. 차라리 투기와 탈세 문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거나 (그런 목적으로 주민등록을 신고했는지) 패륜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따지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공직배제 원칙이 불편해 보이는 이유는 그 내용이 부적절해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수구 정권과 차별화되는 선명성을  부각하려다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인사참사’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시민들을 달래주고 그  눈높이에 맞춰줘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들과는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이 무리수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말하자면 표현할 자유를 억압하는 법규정에 눌려 지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고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어리석음이다. 참여정부에서 과반인 152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한번도 그런 힘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무기력했던 것처럼 지지율이 8할인 문재인 정부도 그 힘을 실감하지 못하고 얼떨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이 세다는 뜻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판을 깨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직배제 원칙은 상식에 가까운 문제 (조세, 재산형성, 병역, 패륜범죄 등)에 치중했어야 했다. 쓸데없는 논란거리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심각한 수준부터 시작하고 점차 폭을 넓혔어야 한다. 과거 10여 년 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고위 공직자를 찾아야 한다면 배제 대상의 폭과 수준을 적절하게 조정했어야 했다(야당의 비난을 받은 이후에 이를 깨달았음이 아쉽다). 물론 공직자들 중에 원칙에 꼭 맞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의 고위 공직 배제 5대 원칙은 소정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과격’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나치게 방어와 수세에 촛점을 두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뒤 수구 기득권 세력의  반격을 받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열린우리당의 어리석음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촛불민심으로 만들어 준 정권임을 되새겨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을 바라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민심을 믿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  

참고문헌

문현구. 2017. ‘화려한 출발’ 문재인 정부, ‘5대 비리 공직 배제 공약’에 자승자박. <데일리안>. 5월 7일. http://www.dailian.co.kr/news/view/635809

박경원. 2017. 인사청문대해부 1: 논란인사 비율,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노무현 정부 순으로 높았다. <SBS News>. 6월 28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266883

조기숙. 2007. <마법에 걸린 나라>. 서울: 지식공작소.


원문: 박헌명. 2017.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최소주의행정학> 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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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어용지식인"과 강한 민주주의

2019. 4. 8. 00:18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지난 5월 5일 김어준의 파파이스(144회)에 출연한 유시민씨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무엇을 할 생각인지 밝혔다. 최근까지 국무총리로 청원되거나 “강제 소환”되는 압박을 받아온 그였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저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어요. … 헛물켜지 마세요. …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진보어용지식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노무현씨가 서거했을 때 세상이 무너진 듯이 절규하고 원망어린 눈빛을 화살처럼 쏘아내던 그였다. 그런 그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태연히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사는 자의 아픔이 묻어나온다. 아야 소리조차 뼈를 저미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런….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유시민은 말한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실 대통령만 바뀌었다고. 정치권력만 잡은 것이지 기득권을 대변하는 언론권력, 재벌권력, 지식인 집단 다 그대로라고. 여소야대라는 국회권력도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모든 기득권 권력이 그대로 있고 그 기득권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 한 매듭만 딱 바뀌는 건데. 지금까서 선거과정에서 편들어 줬던 여러 세력들이 또 자기의 논리에 의해서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공격해요. 열 개의 사안에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다 때린다구요. 저는 그게 제일 무섭고요. 지금도. 그 악몽이 또 되풀이 되면 거의 99프로 망한다 그렇게 봐요.”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참여정부시절에 정부에 있을 때 또 여당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게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이 들었던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해주는 지식인들이 너무 없는 것예요. 언론인 지식인이.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제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게 무조건 편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제대로 옹호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어야 되지 않냐.”

이러한 최소주의 발언이 소리없는 한맺힌 절규로 들린다. 공정하게 공과를 따져준 지식인이 한 명도 없이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무방비로 줘터지고 짓밟힌 노무현 정권의 한이 느껴진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 했던가…. 그의 핏발서린 눈빛은 8년 세월에 바래지고 평온을 되찾았지만 뼈속 깊이 박혀있는 회한悔恨은 그대로다.

“무릇 지식인이거나 언론인이면 권력과는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어야 [하]고. 그것은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대통령만 바뀌는 거예요.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예요.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 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서 또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 범진보의 정부에 대해서 어용진보지식인이 되려고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한 때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노무현을 비난했다. 수구기회주의 언론은 물론이려니와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신문>마저도 날마다 매질을 해댔다. 무방비로 난타당하는 동네북 신세였다. 하다 못해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도, 비가 와도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들 했다 (조기숙 2012: 95). 마치 “노무현 욕하기 올림픽”이 열린 듯이 너도 나도 뛰어들었다. 2003년 잠깐 부모님댁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나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출신이 미천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기득권층의 유치한 몽니로 생각했다. 도올선생님 말마따나 좀 한다는 집안에 며느리가 덜컥 들어왔는데, 집안도 학력도 인물도 변변찮은 며느리를 콧대높은 시어머니가 얼마나 무시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겠는가.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지식인들조차도 노무현 욕하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듯 “노무현 욕하기 월드컵”에서 온갖 재주를 뽐내고 있었다. 학자의 입에서 참여 정부가 “좌파 민주주의”고 “운동권 정권”이고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정권은 커녕 기본도 안된 형편없는 패거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고졸이고 그것도 상고출신이고 언행이 기존 기득권의 품격과 거리가 먼 천것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데, 자존심이 상하니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노무현씨가 무엇을 어찌 잘못했기에 그리 깎아내리냐는 말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노빠”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유시민씨의 말이 가슴에 팍 꽂히는 까닭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고 깨끗하게 지내야 되잖아요. 지식인은 권력에 굴종하면 안되지. 이래가지고 사정없이 깔 거라고. 전에도 그랬잖아요.” 참여정부가 초장부터 교육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파동, KBS사장 임명 파동, 화물연대 파업, 부안핵폐기장 파동 등으로 얻어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주로 노무현씨를 지지했던 진보 세력이 공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아팠다고 그는 회고했다. 당시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저런 처참한 비난을 받는 것인가?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노무현씨에 대한 비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여당 내에서도 비난에 직면했던 노무현씨가 좋은 인재를 뽑아서 일을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미숙한 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비난은 지나치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대통령이었나? 그러면 30년 가까이 해먹은 박정희 정권같은 “프로 정권”을 원하는가? 또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사람의 일이 모두 잘 되어가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프로인 박정희 정권은 하는 일마다 매끄럽게 추진되었고 매번 성공했는가?

소위 운동권 출신을 청와대에 기용해서 “운동권 정부”라면 각종 비리와 전과가 있는 자들을 장관에 기용하면 “비리 전과자 정부”인가? 아무리 논란이 있다 해도 6억원 이상 부동산에 대하여 중과세하는 것이 “좌파 민주주의”란 말인가?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에 사는 노인네들이 모여앉아 “종부세”를 한탄하며 노무현을 죽일 놈 만드는 것이 좌파 정권인가? 학문이 아닌 상식 선에서 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기득권을 틀어 쥔 세력들의 삐딱한 시기심이나 화풀이나 모략질(여럿이 작당을 해서 한 사람을 바보 만드는 짓)로 보였다.

어느날 나는 고대 병원에서 투석透析 중인 소정 선생님을 찾아뵙고 노무현씨의 잘못을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과도한 참여”라고 말씀하셨다. 노무현씨가 말이 너무 많고 과격하다는 말씀이셨다. 예를 들면, 노건평씨 사건 때 구차하게 형님을 편드는 얘기를 하지 말고 그냥 검찰이 법대로 조사해서 처리하는 것이라고만 말했어야 했다(박헌명 2016: 3). “한마디로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15). 꼭 긴요하고 꼭 맞는 말만을 최소로 하라는 말씀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문영 (2008)은 “나는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한다고 결정한 뒤에 대통령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을 과격이라고 본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살려준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를 옮기는 일에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대통령이, ‘나는 관습법이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라고 발언했던 것이 과격이다” 라고 적었다 (576쪽).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심쩍은 속내를 깨끗이 풀어내지는 못했다.  

소피스트와 386세대의 과격

이문영(2008)은 ‘국민의 정부’는 측근 정치를 다스리지 못해 부패가 만연했고, ‘참여정부’는 여당인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북한에 대한 과격한 조치를 취해 민심을 잃었다고 했다 (661쪽). 또 노무현씨가 좌파를 포함한 기회주의자들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574 쪽). 선생님은 이들을 잇속(욕심)이나 챙기는 소피스트나 대중영합주의자로 불렀다 (544, 618쪽). “… 나는 밭에는 돌이 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밭의 대부분은 흙이 메우지만 돌이 좀 있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흙이 적고 돌 천지인 경우이다. … 기회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좌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밭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흙’이어야 한다” (574-575 쪽).

이문영(2008)은 참여정부를 주도한 386세대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햇볕정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663쪽). “…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악한 정부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여 해직과 옥고를 치른 1970년대 운동의 불씨를 잘 살려냈어야 했다. ...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386세대를 자랑했는데, 386세대는 가장 무서웠던 때인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이들이 아니었다” (582쪽). “1980년대는 1970년대보다 덜 실존적이며 덜 무서운 때였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가 과다해졌고 과다한 요구만큼 잇속을 챙기려는 움직임도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662쪽).

나는 소정 선생님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중도 보수인 선생님의 입장에서 (500쪽) 권위주의를 파괴하고 격의隔意없이 일반 시민과 눈맞추는 지도자가 탐탁찮고, 세상이 뒤집어진 듯 (어제까지도 강자의 폭압에 눌려지냈던 자들이) 너도 나도 자기 몫을 주장하고 나서는 무질서함을 마땅찮아 하셨으리라.

반면 아직도 노무현이라면 치를 떨고 저주를 쏟아내는 기득권 세력의 “악다구니”에서 합리성을 눈꼽만큼도 찾기 어렵다. 각종 수치를 보아도 그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참여정부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훨씬 못미쳤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연극을 빙자한 <환생경제>에서 쏟아냈던 “노가리”, “육시戮屍랄 놈”,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불알 값을...”,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 등의 욕지거리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창조욕설”을 들으면서 박장대소를 하던 박근혜씨는 이제 수갑을 찬 채 부시시한 올림머리를 하고 깡마른 표정으로 재판정에 들어서는 피의자가 되었다. 義가 아닌 利를 탐한 “장사치 정권”과 스스로 비정상이면서 정상이라고 우겨댄 “엽기 변태 정권”아니었던가.

내가 경험한 지식인들의 노무현 욕하기는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월드컵 열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명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데 지극히 인색했다. 생각컨대, 노무현씨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강력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다 처참하게 짓밟혔고, 그들의 “노무현 왕따” 전략(혹은 프레임)에 걸려들어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난도질당하고 유린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인다.

“과도한 참여”란 무슨 뜻일까?

소정 선생님은 참여정부가 끝까지 참을 줄 몰랐다고 하셨다 (이문영 2008: 520). 나는 “과도한 참여”나 “과격”이라는 비판을 어렴풋이만 이해했다.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낯빛만 좋은 사람 치고 인자한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는 <論語> 學而篇을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386세대와 소피스트와 사학재단의 재산권 등에 관해서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孔孟> (梁惠王下)를 다시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비판하신 참여정부의 “과도한 참여”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樂者亦非也).”

이문영(2008)은 “...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말하자면 코드가 맞아서, 한덩어리가 되어 그 과격함이 극에 달하게 된다”고 적었다 (578쪽). 꼭 독재정권이 아니어도 순리를 거슬러 급격하고 과격한 정책을 펴는 정부도 문제이지만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잇속만을 탐하려 이합집산하는 시민사회도 과격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의 원형은 선생님의 <한국행정론> 서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자율성이 있는 社會團體의 형성을 주장하는 근본 취지는 官의 권력 남용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하는‘亂動을 불사하는 힘’과의 原色的인 對決을 회피하는 데 있다. … 原色的 對決의 결과는 혼란이며 이런 기회를 이용할 이는 정치면에서 극우와 좌익의 정치 단체들 뿐이다. 官·民 兩者의 원색적 대결을 회피하는 길은 좀더 合理化한 統治行政構造가 官쪽에서, 그리고 自律性 있는 社會集團[가] 民쪽에서 각각 형성되며, 후자에서 전자에 이르는 輿論과 要求의 供給路가 마련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문영 1980: vii).

“과도한 참여”라는 소정 선생님의 비판은 단지 참여정부와 노무현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군사독재처럼 권력을 남용하고 벌거벗은 힘을 휘둘렀다는 것이 아니다. 기회주의 언론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필요없는 말을 해서 불란을 자초하였다. 물론 대개는 “대통령 못해먹겠다”처럼 진의를 왜곡시킨 단장취의斷章取義와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침묵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의도와 다르게 종종 낯설고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시민보다 반 걸음이 아닌 서너 걸음을 앞서 간 죄이다.  

“과도한 참여”는 참여정부와 사회에서 소화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 과도한 요구에 가깝다. 그동안 기득권 세력에 짓눌려온 백성들이 운좋게 건져낸 승리에 도취하여 과욕을 부린 것이다. 선거에서 이긴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뽑아놓은 노무현이 알아서 구악을 청산하고 국민통합 시대를 열어주리라 기대했다. 스스로가 약자이고 대통령조차도 약자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의를 잊고 자기 잇속만을 생각하여 제멋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진보세력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천신만고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어 의욕을 펼치려던 노무현을 앞장서서 괴롭히고 뒤흔들고 물어뜯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유시민씨가 정말 힘들고 아팠던 대목이다. 기득권 세력의 파상 공세와 음흉한 “노무현 왕따” 전략에 진보 언론도 지식인도 넘어갔다. “노무현 욕하기”에 너도 나도 뛰어들었지만 그것이 수구 세력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노무현을 잃고 나서야 그 미련함이 자해행위였음을 깨닫고 “지못미”로 땅을 치고 통곡했다.  

벌거벗은 힘을 가진 上의 포악이 아니라 한마디로 下의 난동이었다. 잇속을 참지 못하고 부당한 요구를 쏟아낸 시민사회의 “과도한 참여”였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이 아닌 좀더 합리화한 統治·行政構造, 그리고 亂動을 不辭하는 힘이 아닌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는 社會集團이 兩者[가] 납득할 만한 관계 형성을 우리가 公開的적으로 볼 수가 있을 때 우리의 行政과 政治는 비로소 제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viii)고 했다.

“강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Strong Democracy (1984)의 저자 Benjamin Barber는 “[T]here can be no strong democratic legitimacy without ongoing talk” (p. 136)라고 말했다. 투표하고 나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다음 선거까지 입닥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끊임없이 토론과정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고 대안을 만들고 선출된 자들이 하는 짓을 잘 관찰하고 꾸짖어야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참여정부의 경우에는 정부의 못된 짓을 캐내어 고발하고 응징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다. 정부가 능력이 부족하고 미숙한 점은 있었다 해도 그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비난과 저주는 전혀 합당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자율성과 책임성을 가지고, 무책임한 요구와 과도한 참여를 자제했어야 했다. 기회주의 언론의 파상공세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이성과 증거에 근거하여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졌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철저한 반성과 참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보어용지식인”이 되자

요즘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가 인기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잘생겨서가 아니고 그가 내세우는 상식과 원칙 때문이다. 노무현씨는 개인의 실패를 아파했고, 그것으로 大義가 훼손되는 것을 못견뎌했다. 그래서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버리라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스스로를 버렸다. 어쩌면 그 자기희생이 광장의 촛불이 되어 상식과 원칙과 꿈을 밝혔는지 모른다. 이제 문재인이다. 참혹했던 지난 8년 세월에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먼저 녹록치 않은 지금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적폐 청산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어쩌면 참여정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유시민씨 말대로 청와대만 바뀌고 언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그대로다. 기득권 세력은 박근혜 최순실의 엽기 변태 행각 때문에 정권을 내줘을 뿐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과도한 요구와 참여를 자제해야 한다. 참고 인내해야 한다. 자신의 잇속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노동조합으로 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당장은 괴롭더라도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기다리면서 얽힌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또한 문재인과 박원순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예컨대, “주적”을 밝히라거나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떼쓰지 말라. 이기적이고 성급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기득권 세력에게 빌미를 주는 과격한 언동이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깨달은 것처럼 분열하지 말고 서로 단결하고, 나만이 아닌 이웃을 배려하고,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한 민주주의는 “진보어용지식인”을 원한다. 권력을 감시한다는 뜻은 비난하라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똑바로 따져서 일을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공정하게 평가하고 정당한 요구를 하라는 뜻이다. 촛불을 응시하던 절실한 눈으로 관찰하고 공부하고  토론하여 지혜를 모으고 힘을 길러야 한다. 촛불을 지키는 “진보어용지식인”과 “진보어용언론인”이 되보자.

참고문헌

박헌명. 2016. 정세균 의장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을까? <최소주의 행정학>  1(10): 1-4.
조기숙. 2012. <문재인이 이긴다>. 서울: 리얼텍스트.
Barber, Benjamin. R. 1984.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진보어용지식인"과 강한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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