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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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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국정감사는 참으로 특이하다. 갑작스런 친위정변과 내란을 거쳐 정권이 바뀐 직후라서 그럴까? 감사가 현 정권보다는 전 정권의 실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뀌어 수비수가 된 옛공격수가 계속 폭격을 하는 상황이다. 전 정권의 수비수는 이제 공격수가 되었지만 “윤건희”를 막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시비라도 걸어서 감사를 파행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경우가 아닌 정치꾼, 검사꾼, 판사꾼

“김여사 정권” 편에 선 장차관, 기관장, 임원, 국회의원들이 거짓말과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나 살고 보자”라는 궁여지책일 수 있다. 하지만 삼권분립이니 사법권 독립이니를 말하면서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내란수괴를 편드는 검사와 판사 공직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법이 통과되었지만 여전히 기사회생을 노리는 것일까? 아직도 이재명을 한방에 날려버릴 꿈에 부풀어 설레는 것일까? 국민의 알 권리를 빙자하여 기득권을 편들고 꿀만 빨아먹던 언론인과 수구 추종자들의 건재에 안심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치를 것은 치르고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경우에 맞는 성장을, 한 개인에게서나 국가에서나 보고 싶은 것이다”(1986: 62).

내가 좋아하는 소정 선생님의 글귀다. 경우境遇는 사리와 도리를 말하는데, 사리事理는 일이 되어가는 이치이고 도리道理는 어떤 위치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 길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분수分數 혹은 分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직분이나 미칠 수 있는 한도(한계)를 말한다. 경우와 분수 모두 사람들이 그 자리 앉은 자들에게 기대하는 언행의 기준치다. 최소한의 한계이다. 대개는 법이나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못된 판검사를 비롯한 특권층은 시민들이 아닌 자신들이 생각하는 준거를 경우라고 착각한다. 분수를 모르고 자신(권한)을 거대하게 그려놓고 산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치를 것”을 치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한만 멋대로 휘두르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경우없는 짓이다. 돈셈조차 엉망이니 다른 것은 따져 볼 것도 없다.

치를 것을 치르지 않는 판사와 검사들

제일 화나는 것은 12.3 비상계엄이 불법이고 내란인지를 몰랐다고 변명하는 수구정치인과 판사와 검사들의 비루한 모습이다. 누구보다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하는 자들이 아닌가. 사법·준사법 기관이라며 각잡고 영감·땡감하면서 거들먹거리던 자들이 이제와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니... 어찌하여 총리, 장차관, 장군, 판사, 검사, 경찰 고위직 중에 당시 비상계엄이 불법이고 내란이라고 말한 자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일촉즉발의 국회 상황을 보고서도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비상계엄에 부역한 총리와 장차관, 후속조치를 논의했던 판사들과 검사들...

계엄법 2조는 비상계엄 요건을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적과 교전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로 정하고 있다. 형법 87조는 내란을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정의하고, 91조는 국헌 문란을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봐도 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법계엄이고, 국회를 전복하고 권능행사를 못하게 했으니 내란이 분명하다. 국회에 군인이 난입한 것 자체가 내란이다. 모를 수가 없다. 그 많은 시민들이 엄동설한에 옷도 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여의도로 몰려든 까닭이다.

"밥"과 "앙심"만 남은 판사와 검사들

내란은 실패했지만 아직 종식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판사와 검사는 그대로다. 아직도 불법계엄과 내란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보는 눈이 없고 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수구 기득권의 난동이다. 핵심 증거인 관봉권 띠지가 없어졌는데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검사, 사건을 조작하여 수구세력의 정적을 때려잡은 검사, 법에서 정한 날짜가 아닌 시간으로 계산해서 내란수괴를 풀어준 지귀연과 심우정, 절차와 관례를 무시하고 대선후보를 지워버리려 했던 조희대와 대법원 판사, 검찰청을 폐지하니 보완수사권이라도 달라며 앙탈을 부리는 검사들, 파기환송의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못하면서 사법권 독립을 운운하는 판사들... 사리와 도리 모두 빵점이다. 경우없는 짓이다. 공무원이라는 본분을 망각했다.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이들은 우선 사람들이 기대하는 준거를 깡그리 무시했다. 주인을 대신하여 월급받고 일하는 공복임을 자각하지 못했다.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인 양 법을 멋대로 주무르고 거리의 시민들을 깔봤다. 판검사가 없으면 어차피 대한민국은 망한다는 황당한 믿음일까? 국정감사에 출석한 검사들은 당장에라도 국회의원 놈들을 잡아다가 몽둥이로 찜질하고 껍데기라도 벗겨버릴 기세다. 그 용맹함을 불법계엄을 휘두른 내란수괴에게 보여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시큰둥하게 앉아서 의미없는 훈수질만 하는 판사들이 잔머리라도 굴려 내란수괴를 점잖게 타일렀더라면 좋았을 것을...

더 중요하게는 이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맘대로 사고를 쳐놓고 누구하나 값을 치르지 않았다. 경우에 맞지 않는 짓이다. 비상계엄이 방송과 온라인에서 중계되었는데도 불법이고 내란인 줄을 몰랐다면 부장급 이상 판검사는 모두 자리에서 물러나 근신하며 처단을 기다렸어야 했다. 특히 한덕수, 지귀연, 조희대는 광화문에서 석고대죄라도 했어야 했다.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지른 판검사를 경우에 맞게 단죄했어야 했다. 제 식구 감싸기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했어야 했다. 김학의와 지귀연은 검찰청과 사법부의 자정능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화석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판검사들은 법과 양심이 아닌 “밥”과 “앙심”으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세상 고상한 척은 다 하지만 실상은 강자에게 한없이 비굴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포학한 자들이다. 돈과 권력을 휘두르는 깡패에게는 납짝 엎드리지만 합리적으로 대화하려는 상식인은 안하무인으로 짓밟아 버리는... 친일파를 비롯한 기회주의자들의 철칙이다. 민주주의, 법, 절차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차피 나라의 주인도 아니고 주인될 생각도 없는데...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일이다. 괜시리 불법계엄이라고 말했다간 끌려갈까봐 복지부동했으나 이젠 잡혀가 쥐터질 일이 없으니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서 정의의 사도임네 하고 있다. 법리는 말장난이고 그저 “밥리”일 뿐이다.

만일 국정원 요원이 옛날 식으로 판검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찰하면 대법원장이든 검찰총장이든 머리부터 땅에 쳐박을 것이다. 감히 수사권이니 사법권이니를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기득권의 단맛에 취한 자들의 속성이다. 행여나 내란수괴와 잔당들을 무죄로 풀어주고 여당의원들을 잡아들이고 이재명 재판을 강행한다고 생각해보자.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으니 나라 전체가 난장판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해 검사와 판사만을 대상으로 반역자를 색출한다고 해보자. 기고만장했던 판검사 그 누구도 계엄군의 군화발이 무서워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국민이 죽든 말든 자신은 끝까지 잇속을 챙기고 손톱만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귀연이 내란수괴를 풀어주고 번갯불에 콩궈먹듯 이재명 파기환송을 해도 비판하지 않았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자신에게 손해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열혈 검사 하나가 조희대를 긴급 체포하고, 체포에 반대하는 상급자를 직권남용으로 잡아 가두고, 영장을 기각한 판사를 질질 끌고 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밀어붙이면 어떠할까? 정의감에 불타는 판사가 미친 척하고 한덕수 재판에서 조씨(한씨가 아니라)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고 법정구속하면 어떠할까?(왜라고 묻지 말라) 국민주권을 신봉하는 구치소장이 다짜고짜 조씨 사형을 집행한 뒤 사형에 필요한 절차를 밟는다면 어떠할까?(말이 안된다고 따지지 말라) 검찰권 사법권은 하늘이 내린 권한이니 이런 엉망진창인 일도 숙명인줄 알고 순순히 받아들이라면 어떻겠는가? 아마도 이들은 길길이 날뛰면서 법이 어쩌고 절차가 어쩌고 인권이 어쩌고 나불거릴 것이다. 나는 맘대로 해도 되고 너는 나에게 손해되는 짓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 추종자들이다.

동전던지기와 인공지능 판검사

이런 판국이니 공정한 조사, 기소,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정치, 권력, 재벌, 판검사에 관련된 사건은 검사와 판사가 누구냐에 달려있다. 요행히 멀쩡한 판검사가 맡는다면 법에 따른 공정한 사법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법의 껍데기를 쓴 깡패에게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할 수 밖에 없다. 돈과 권력이 있는 피의자는 죄가 있어도 무죄를 받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동전던지기나 주사위굴리기(복권추첨)를 도입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재판기록도 안읽고 절차도 무시하고 증거도 보지않고 판결을 내린다는 것 아닌가. 비용도 거의 안들고 빠르다. 대법원 판사 14명 늘리는데 1조 4천억원이 든다니 법관을 모두 없애면 어마어마한 비용절감이다. 전관예우도 변호사비도 필요없다. 나경원 재판이 6년째 1심을 하고 있다는데 동전던지기를 하면 1초도 안걸린다. 작심하면 3심까지 5분 내에 끝낼 수 있다. 공연히 몇 년씩 진을 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공정하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는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

동전던지기가 불편하면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제일 잘 대체할 수 있는 직업이 법관과 의사라고 한다. 모든 법체계를 검색하여 가장 적합한 법적용을 찾는 것은 인공지능의 주특기이다. 놀라운 인공지능의 발전속도를 생각해보면 엉터리 판결을 낼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물론 모범적인 판결만을 골라서 학습시켜야 한다. 인공지능 판사는 동전던지기보다 느리겠지만 빠르면 1주일 내에 3심도 가능할 것이다. 기존 법관은 인공지능의 판단을 보조하는 조수助手로 채용하면 인공지능 도입비용으로 쓰고도 남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뇌물, 학연, 지연, 전관예우 등과 무관하니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내릴 수 있다.

인공지능도 불편하면 정치, 재벌, 판검사와 관련되는 재판은 영장심사부터 일반 시민이 참여하면 된다. 법원이 판사를 무작위로 뽑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판결업적을 보고 국민이 선출한다. 물론 모든 법관의 판결은 다른 법관과 변호사와 법학자의 평가를 받고 공시되어야 한다. 못된 판검사가 1할도 안 될테니 지귀연이나 조희대같은 자가 뽑힐 확률은 거의 없다. 또한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고 유무죄를 결정한다. 2심과 3심은 새로운 배심원과 판사를 뽑아 진행한다. 내란과 같은 긴급을 요하는 것은 표본이 매우 큰 여론조사로 처리한다.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지켜본 내란을 1년이 다 되도록 내란이라 판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판검사들이 제값을 치를 때다

이제 판사와 검사들은 “치를 것”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전 국정원장이었던 박지원이 말한 것처럼 판검사들은 독재정권에 부역하여 기득권을 누렸고 이제는 민주화의 과실로 사법권 독립을 누리고 있다. 독재에 맞서 당당하게 판결하지 못한 값을 치르지 않았고, 시민들과 함께 피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한 값을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민주화를 이끌었던 김대중에게 사형판결을 내렸고 노무현을 궁지로 내몰았다. 항상 포악한 자를 편들고 배은망덕을 반복하며 호의호식해왔다.

검찰청이 80여 년 만에 문을 닫게 된 것은 자업자득이다. 잇따른 무리수로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신뢰를 잃은 사법부도 제 값을 치러야 할 차례다. 역시 자업자득이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주인이 기고만장으로 기어오르는 머슴을 멍석에 말아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는데... 천하가 자기들 주위로 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 주인인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착하고 성실한 공무원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기를 바란다. 공소를 맡는 소사訴事가 되든 재판을 돕는 助事가 되든 그동안 경우없이 난동을 피운 죄를 반성하면서 주인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시라.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5. 경우없는 판검사와 인공지능 판검사. <최소주의행정학> 10(12): 1-2.

조용필의 노래 “슬픈 베아트리체”가 흘러나왔다. 교향악단의 선율을 거느리고 한 자 한 자 씹어넘기듯 읊어 내려가는 간절함이 함박눈처럼 내려왔다. “떠나버린 나의 사랑아, 꽃상여에 그대 보내며 살아야 할 이유마저 없으니...” 순정을 담은 시구詩句가 더욱 또렷하게 가슴 속에 들어왔다. 무심코 지나쳤던 대목조차 영화 속 장면처럼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가왕 조용필이 지난 9월 6일 광복 80주년을 기념한 공연을 펼쳤고 한가위에 전파를 탔다.

조용필에 빠져들다가 고개를 떨구다

조용필은 이번 공연에서 세 시간 동안 30곡을 불렀다. 아, 풋풋하던 젊은 오빠는 어느덧 일흔 다섯의 백발이 되었건만... 많은 사람들이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창밖의 여자”의 처절함과 날카로움은 옅어지고 그 자리에 “그 겨울의 찻집”의 풍미와 처연凄然함으로 채웠다.

무엇보다 조용필의 치열함이 마음을 움직인다. 한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마지막 공연, 마지막 노래인 양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전쟁과 같은 처절한 몸부림이다. 배수진으로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백전노장의 비장함이다. 그 덕에 사람들은 삶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공연장에 모인 남녀노소 2만여 명이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으로 호응했다. 빛으로 수놓은 물결이 흥겹게 춤을 췄다.

흠뻑 젖어든 감동을 가까스로 수습한 나는 문득 서글퍼졌다. 조용필은 혼을 담은 노래로 일상에 지친 관객을 위로하고 함께 어울렸는데, 어찌하여 작금의 공직자들은 공복의 기본을 망각하고 행패를 일삼는단 말인가? 백성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는 與民同樂은 커녕 주인을 업신여기면서 거짓과 궤변을 늘어놓고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조용필의 판소리와 공직자의 개소리

판소리는 소리(창), 아니리(말), 너름새(발림), 추임새로 짜여져 있다. 여기서 소리는 소리꾼이 부르는 노래를 말하고, 아니리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설辭說을, 발림는 소리꾼의 몸짓을 말한다. 추임새는 북을 치는 고수와 관객의 몫이다. 조용필의 마음을 울리는 소리, 짧고 진솔한 말, 자연스런 표정과 손짓에 따라 2만 명이 울고 웃고 내지르고 쓰러졌다. 모두가 완벽하게 어울린 판소리였다. 예술이었다.

소리를 잘한다는 말은 노래를 잘 한다는 뜻이다. 노래가 엉망이면 소리가 아니라 개소리다. 영혼을 위로해주는 예술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화가 치밀고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환호와 박수가 아니라 짱돌이나 술병이 날아든다.

“김여사 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고위 공직자들의 언행은 꼴볼견을 넘어섰다. 기자회견이든 청문회든 국정감사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당선자시절부터 안하무인으로 주권자를 욕보였다. 통수권자가 “부대 열중쉬어” 그 한마디를 못하나... 대통령의 동선을 밟고 왕족 앞에서 건들건들인 푼수데기. 매사에 성의가 없고 천박하다. 술꾼과 점꾼이 부창부수다. 뭘 아는 것이 없으면서 아는 것처럼 엉뚱한 사설을 장황하게 떠벌린다. 아니리가 아닌 헛소리요 잡소리다. 뭔 말인지 모르겠거나 말문이 막히면 버럭질에 훈계질이다. 너름새가 아니라 핏대질이고 삿대질이다. 위기를 모면하느라 그때 그때 거짓말로 다른 거짓말을 덮다 보니 말걸음이 꼬여 스스로 나자빠진다. 주가조작이든, 목걸이든, 핸드백이든 새빨간 거짓말들의 향연이다. 아름다운 노래가 아닌 돼지 멱따는 소리다. 말이 아니라 막말이고 말폭력이다. 차라리 고문이다. 이러니 관객의 추임새는 한숨과 야유와 욕설과 탄핵일 수밖에...

“윤건희”가 임명한 장차관과 기관장(임원)도 마찬가지다. 초록은 동색이라 했다. 그냥 전리품(spoils)처럼 자리를 나눠먹은 셈이다. 점쟁이와 비선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수구, 친일, 검사, 판사, 학연, 지연, 이웃, 그들의 친구들이 점령군처럼 관료제를 농락했다. 대통령실 CCTV에 드러난 한덕수, 최상목, 이상민, 박성재의 모습은 그들의 거짓말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일을 몰라 딱하거나(김홍일, 김태규, 민영삼), 친일본색을 주체하지 못하거나(김문수, 김태효, 김형석, 이진숙), 반대 방향으로 치달리거나(안창호, 유철환, 김용원, 정승윤, 박선영), 행동대장처럼 달려들거나(한동훈, 원희룡, 김용현, 유병호, 최달영), 내란수괴를 풀어주고 무리수를 두거나(지귀연, 심우정, 조희대), 사건 조작으로 비난을 받거나(최재현, 이시원, 강백신, 엄희준, 박상용, 이희동), 그 자리에 왜 있는지 모르겠거나(이상민, 최재해, 김영호, 신원식, 조태용, 정진석)... 관료제가 멀쩡하게 돌아갈 리가 없다.

불량 공직자들의 천태만상이다. 소리도 아니리도 아닌 개소리와 헛소리다. 공복인 주제에 주인을 능멸하고 하고 있다. (1) 일단은 모른다, 기억에 없다고 잡아뗀다. (2) 아는지 모르는지, 맞는지 틀리는지 가부를 밝히지 않고 침묵한다. (3)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자료제출이나 답변 자체를 거부한다. (4) 관계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말장난으로 시간을 때운다. 동문서답이다. (5) 온갖 거짓말로 변명하고 진실을 덮는다. (6) 증거를 들이 밀면 꼬리를 내리고 얼버무린다. (7) 분수를 모르고 실실 비웃거나 오만한 태도로 일관한다. (8) 윽박지르거나 호통을 친다. 어찌하여 머슴이란 놈들이 주인이 묻는 말에 똑부러지게 답을 하지 못하는가. 이들의 추태와 패악질에 신물이 난다. 멍석말이라도 해서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 아님 죄다 옷을 벗기고 칼을 채울 일이다.

조용필의 소리, 아니리, 너름새를 배우라

소정선생님은 “무서웠을 때 내가 한 말은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의 말이었으며...”(2008: 491) 이는 “실존적 발언”(1996: 54)이라고 하셨다. 한계상황을 경험한 자는 꼭 할 말만 한다. 마지막인듯 간절하기 때문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보다는 어눌해도 필요한 말만 하라고 하셨다. 조용필은 몇 마디만 남기고 십여 곡을 불러 젖혔다. 어쩌면 그래서 눈과 귀와 가슴이 더 호강했는지 모른다. 노래로 말하는 참소리꾼이자 최소주의자다. 황홀한 그의 소리와 아니리와 너름새가 공직자들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5. 가왕 조용필의 판소리와 공직자의 개소리. <최소주의행정학> 10(11): 1.

드디어 검찰청이 문을 닫게 되었다. 지난 27일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78년 만에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에 조사권과 기소권을 넘기게 되었다. 자업자득이다. 수사와 기소는 서로 연계되어 있지만 상호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사필귀정이 오랜 시간 논쟁과 갈등을 겪은 뒤에야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수구기득권세력의 공작과 몽니에 합리성이 휘둘린 결과다. 하지만 수사와 기소를 분리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원하는 결과(개혁)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악마가 된 정치검사들의 민낯을 보다

국회본회의를 앞두고 법제사법위원회에서 5일과 22일 검찰개혁 청문회를 개최했다. 증인 명단을 보면서 대체 어찌 생겨먹은 자들인지 궁금했다. 청문회에 나와서 답하는 태도를 보면서 흠칫 놀랐다. 어이없다. 화난다. 공무원이 아니라 무소불위 권력을 가진 초인간이다. 검사로 취직시켜준 주권자에게 배은망덕하고도 오만불손이라니... 분에 넘치는 권한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고만장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난도질 했을까? 부끄러움이 없고 반성이 없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조폭도 고개를 숙일 줄을 알거늘... 이들이 해먹었다고 알려진 사건을 보자.

가까이는 건진법사에게 건넸다는 관봉권 띠지를 잃어버렸고(최재현, 박건욱, 신응석),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을 간첩으로 조작했고(이시원), 대장동 사건을 이재명에게 뒤집어 씌웠고(강백신, 엄희준), 쌍방을 대북송금으로 이재명을 엮으려 했고(박상용), 손준성 고발사주 사건을 비틀었으며(이희동), 김건희 주가조작 사건을 무혐의로 털어주고(조상원, 이창수), 해괴한 셈법으로 내란수괴를 풀어주었다(심우정). 이들(신응석, 임관혁)이 한명숙 뇌물수수 사건을 어찌 요리했을지 훤히 보인다. 악귀가 씌인 살인마의 칼솜씨다.

걸핏하면 법과 원칙을 들먹이던 정치검사들은 강자에게 힘없이 비굴했고 약자에겐 한없이 가혹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무기로 휘두르며 멋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구현했다. 사실을 왜곡하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정의를 욕보였다. 사람의 짓이 아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모습이다. 법과 국민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 공무원증을 들고 깡패짓을 일삼은 자들에게 국회의원의 질문은 같잖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잡아다 물고낼 수도 있는데 어디서 겁대가리도 없이... 끼리끼리 똘똘 뭉쳐 권력과 돈을 탐하다 한줌도 안되는 미꾸라지들이 검찰을 말아먹었다.

권한에 비례한 무거운 책임을 물려야 한다

인간을 위하지 않은 행정이란 인간의 것을 빼앗는 행정인데, 상급 공무원이 하급 공무원의 권한을 빼앗고, 행정부는 국민의 권리를 빼앗는다(1980: 250). 이런 관료제에서 공직자는 스스로 전문성을 포기하고 상사에게 굴종하며 국민들에게는 교만하고, 공익이 아니라 상사에게 상납하는 대가로 利를 추구하고, 맹종을 강요하는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하찮은 존재다(2001: 277, 465).

그들도 어렸을 때는 천진난만했을 것이고 성장해서는 나름의 꿈을 품었을 것이다. 천재는 아니어도 법전을 이해할 만한 머리는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모르고 사리분별을 못하여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만행을 밝히고 책임을 묻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움켜쥔 그들의 힘에 눌려 신상필벌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다. 징계와 처벌을 받은 검사는 극히 드물다. 성접대를 받은 김학의는 선명한 동영상이 있어도 끝내 처벌받지 않았다. 도망가는 김씨를 막은 자들만 피를 봤다. 탄핵소추된 검사들도 줄줄이 생환하는 법현실이다. 경우가 아니다. 조직을 배신하지만 않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결국 핵심은 조직개편이 아니라 권한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이다. 조직구조가 개판이라도 사람이 멀쩡하면 효율성이 떨어질 뿐 큰 문제는 없다. 누진세처럼 권한과 피해에 비례하여 엄중한 책임을 확실하게 물어야 한다.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면 징역이상의 엄벌에 처해야 한다. 예컨대,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한 자는 무기징역과 재산몰수로 단죄해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고 사실상 사람을 죽인 것이나 진배없다. 내란수괴를 풀어준 지귀연이나 대선에 개입하여 정적을 없애려 했던 조희대도 마찬가지다. 많은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한 내란의 무게를 고려하면 사형도 호사다. 왕조시절이었으면 능지처참에 3족을 도륙할 역모죄 아닌가.

주권자의 눈높이에서 감시, 조사, 기소, 재판해야

그러면 어떻게 책임을 묻는 것이 합당한가? 조직을 개편하여 권한을 분산하고 서로 견제하도록 만드는 것은 기본이다. 수사지휘권은 견제와 거리가 멀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판사 수를 늘리고, 일반국민의 상식을 반영할 비법조인을 포함시킨다. 권력기관의 고위 공무원은 선거로 뽑고, 주요한 수사, 기소, 판결을 공시하여 공무원의 잘잘못을 평가한다. 공무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앤다. 이시원, 지귀연 정도면 승진은 커녕 파면되고 감옥가고 배상금을 토해내야 한다. 권한이 센만큼 매도 매서워야 하는 법이다. 망나니칼을 잘못놀리다간 패가망신하도록 해야 한다. 또 직급에 따라 변호사 자격을 제한하여 전관 예우 폐해를 줄인다. 예컨대, 헌법재판관이나 대법원 판사는 10년 동안 변호사나 재판 관련 일을 일절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미 권한과 혜택을 충분히 누렸지 않은가.

권력기관의 폭주는 권력기관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의 눈높이에서 판단해야 한다. 국민이 참여하는 제 3의 조직을 구성할 수 있다. 특히 선거개입이나 내란과 같은 중대범죄는 아예 조사부터 재판까지 국민이 이끌어가야 한다. 국회든 공수처든 수사청이든 법원이든 국민의 요구에 적극 부응해야 한다. 독립성은 서로 권한을 침해하지 말라는 소리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물며 주권자를 배신하고 나라의 근본을 흔들어서야 어디... 필요하면 국민 앞에 나서서 정당함을 입증해야 한다. 주권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항상 감시당하고 언제든 반드시 처절한 단죄를 받는다는 공포가 엄습하면 악귀는 물러나고 발광하던 괴물은 분수를 깨닫고 얌전한 공무원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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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5. 검찰청 해체? 처절한 신상필벌이 핵심이다. <최소주의행정학> 10(10): 1.

국립중앙박물관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이들에게 서울은 초행이다. 서울의 모든 것이 낯선 모양이다. 생각보다 근사한 건물에 많은 전시물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지금까지 다른 나라 중앙박물관을 둘러보면서 우리 박물관은 어떠한지 궁금했었다. 이제는 K-pop Demon Hunters 바람을 타고 많은 외국인들이 중앙박물관에 줄을 선다고 하니 놀랍다. 막내 뒤를 따라 다니느라 고생을 했지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의궤儀軌, 고려청자가 기억에 남았다.

굳이 "먹거리"라고 써야 했나?

벽면을 돌고 돌아 전시물을 구경하다가 문득 어떤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먹거리.” 몹시 거슬리는 말이다. 전시 내용은 당시에 어떠한 음식을 먹고 살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어서 “음식”이나 “먹을거리”로 적어야 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먹거리”를 사용한다고 해도 호불호가 없는 정확한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납득할 수 없다. 구태여 어법에 맞지 않은 말을 써서 분란을 자초할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한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기록하고 있는 중앙박물관임에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먹을거리는 “머글꺼리”로 읽고 “먹을 수 있거나 먹을 만한 음식 또는 식품”이라고 정의했다. 먹거리는 “먹꺼리”로 읽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하여 먹는 온갖 것”이라고 했다. 전자는 재료를 후자는 조리된 상태(그래서 바로 먹을 수 있는)를 강조한다는 설도 있지만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먹거리”를 음식이나 먹을거리로 바꾸면 의미가 달라지기라도 하나? 어쩌면 “먹거리”가 먹을거리의 준말로 전라도에서 사용하던 방언인데, 한자인 음식과 영어인 food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서둘러 찾다가 그리되었다는 설명이 더 그럴 듯하다.

어쨋거나 분명한 것은 “먹을거리”는 이견이 없는 표준말이고 그 뜻은 음식이나 식품이다. 둘째, 먹다에서 파생되었을 “먹거리”는 실수나 착오로 만들어진 말이며 우리말 어법을 파괴하고 있다. 세째, 말을 멋대로 줄여서 사용하려는 세태에 부합하는 말로 재미를 핑계로 어법을 뭉개고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정희찬의 말대로 food에 해당하는 말로 “먹을거리”를 생각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근본없는 말을 생각없이 재미로 하나 둘 하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헷갈리게 되었다. 2011년에는 “먹거리”가 표준어 대열에 올라섰다.

먹거리? 묵거리? 스킨쉽?

애들은 그렇다 쳐도 장난질한 말을 표준어로 지정한 국립어학원의 처사가 황당하다. 어이없는 일이다. 정확한 말이 있음을 알려주고 왜 “먹거리”가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해주었어야 했다. 어리석은 자들이 다수여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어야 했다. 국가기관으로서 말법과 어법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조치다. 필요하면 표준국어사전이 아닌 유행어사전 같은 것을 만들어 어법과 무관하게 쓰이는 말을 적어놓을 수도 있었다(흔히 많이 사용하는 skinship은 어법에 부합하는 꼴이지만 공식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이런 무책임한 짓은 박물관 근처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에 한글어법을 명백하게 파괴한 사례로 꼭 박제해놓았으면 한다.

누군가가 한자인 여관旅館이나 영어인 hotel을 대신하는 말로 “묵거리”(묵을 만한 집이나 그런 집이 모여있는 골목)를 만들어 재미로 널리 퍼뜨렸다고 해보자. 어법으로 치면 “묵을거리”가 맞을텐데, “묵거리”가 유행하면 같은 논리로 국어사전에 등재할 것인가? 허면 방송에서도 흔히 나오는 “스킨쉽,” “썸남,” “썸녀,” “멘붕,” “심쿵”은 어떠한가? 친구들끼리 술마시며 “먹거리”를 찾고 “부먹”이네 “찍먹”이네 한들 누가 흉을 볼 것인가? 하지만 많은 외국인들도 찾아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이 나라의 보배인 한글을 비웃는 “먹거리”가 웬말인가?

그렇다고 순우리말을 버리고 한자를 쓰자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한자를 버리라는 말도 아니다. 오직 순우리말만 쓰자는 것도 아니다. 한글이든 한자든 많은 사람들이 쉽고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자는 것이다. 한글의 말법과 어법에 맞게 사용하자는 것이다. 내용과 상황에 맞게 품위있는 말하자는 것이다.

몇년 전 학회에서 “돌봄”이란 말을 듣고 의아했다. 돌봄서비스, 돌봄정책이란다. “돌보기”라는 명사형도 있고 “건사”라는 명사가 있는데도 굳이 동명사로 만들어 쓰니 어색하다. 돌보기, 돌보기정책, 돌보기지원 이러면 안되나? 앞으로는 꽃가꾸기가 아니라 꽃가꿈인가? 그러면 나무심기나 쓰레기줍기는 어찌하려는가? 아마도 영어단어 care에 해당하는 말을 찾다가 돌봄을 착안한 모양인데, 어법에 맞지 않는다. 이러니 “돌봄”에서 “늘봄”까지 생각없이 달리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해당되는 우리말이 있음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학자들의 게으름과 한글에 대한 가벼운 태도를 지적하고 싶다.

말은 화자의 생각을 담는 그릇

“먹거리”에 심기가 불편한 것은 말이란 단지 화자의 의사를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즐기는 줄임말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화자의 무책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자산인 한글의 기본을 흔들고 말을 심심풀이 땅콩처럼 내뱉는 말버릇의 가벼움을 탄식한다.

12.3비상계엄을 전후한 무수한 거짓말과 말공작을 생각해 보라. 무책임한 자들이 아무렇게나 뱉어낸 오염된 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화나고 어지럽게 만들었던가. 고발사주는 “제보사주”로, 바이든은 “날리면”으로, 뇌물로 받은 디올백은 “조그만 파우치”로, 계엄령은 “계몽령”으로, 계엄군 투입은 “질서유지목적”으로... 국정원의 댓글사건을 “여직원 감금사건”으로 되치기한 수구세력의 수작 그대로다. 뭐가 옳고 그른지를 헷갈려하는 순간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걷어 차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더럽혀진 말에 담겨진 음흉한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먹거리”에 담겨진 우리의 무책임을 반성하고 못된 말습관을 고쳐야 한다.

장충동 먹자골목과 "먹거리"

수년 전 버스를 타고 신설동, 동대문,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장충단, 장충단 체육관, 약수역을 지났던 기억이 났다. 장충단길을 지나면서 오른쪽을 보다가 태극당 옆에 “장충동 먹자골목”이라고 적힌 입간판을 보았다. 못해도 7-8미터는 되어 보였다. 장충동 족발로 유명한 동네였다. 사람들은 족발거리 혹은 족발골목이라고 불렀다. 모두 무슨 뜻인지 분명하다. “먹자”라는 말을 썼으니 점잖은 표현은 아니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자시오골목”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어감으로 치면 올 사람도 안 올 것이다). 어쨋든 뜻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다. 우리말법에도 부합하고 친근한 말이다.

어쩌면 “먹거리”는 먹자거리의 (잘못된) 준말로 각종 식당이 모여있는 먹자골목이라는 뜻으로 풀어볼 수도 있다. “먹거리”가 음식이나 먹을거리가 아니라 묵거리(묵을거리나 묵자거리의 잘못된 준말)처럼 먹자거리가 된다. “먹자골목” 입간판을 보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조선시대 안국동 근처에 먹(墨, ink stick)을 파는 상점이 몰려있었다고 치자. 아님 어느날 서예가 대유행하여 인사동에 먹과 관련된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고 치자. 아마도 사람들은 “먹거리”나 “먹골목”이라고 부르고 “먹꺼리”가 아닌 글자 그대로 발음할 것이다. 그러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뭐라 기록할 것인가? 비슷한 맥락에서 “묵거리”는 여관인가(“묵꺼리”로 발음)? 아님 맛있는 묵을 파는 가게가 몰려있는 곳(“묵거리”로 발음)인가? 그것도 아니면 먹거리의 점잖은(?) 표현인 “墨거리”인가? 가가可呵. 먹거리에서 비롯한 어처구니없는 이 혼란을 어찌하려는가?

먹을 파는 "먹거리"는 어떠한가?

서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랜 만에 또다시 장춘단, 약수역을 지나면서 옛 생각을 떠올려 봤다. 바야흐로 말장난, 말공작, 언어과잉, 언어파괴의 시대다. 언어의 모호함에 기대어 자신의 잇속(재미와 제멋대로)을 차리고 남을 해코지하는 짓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화려한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과 뻔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국민을 속이는 자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지난 주술(점괘와 술) 정권에서 설친 인사들을 보라. 자신이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을 기억하지도 못하며 책임지지도 않는다. 선량하고 무구한 백성들만 피멍이 들어 아파할 뿐이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모두들 쉽고 뜻이 분명하고 어법에 맞는 말을 사용했으면 한다. 좋은 말과 나쁜 말을 상황에 맞게 가려서 사용했으면 한다. 의미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간결하게 뜻을 전하는 말이 되었으면 한다. 거짓없이 내뱉은 말에 책임지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런 진솔하고 사람냄새나는 말을 희롱하며 은근한 정을 나누었으면 한다. 나아가 언어의 말이 아닌 사람의 뜻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사람사는 아름다운 세상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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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5. 국립중앙박물관의 "먹거리"가 불편하다. <최소주의행정학> 10(9): 2-3.

거창쪽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대병에서 황매터널을 지나 오부를 거쳐 생초로 향하던 길이었다. 10여년 전 거창과 산청을 잇는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는데, 이제 그 길을 거꾸로 달렸다. 오른쪽으로 거창사건추모공원이 보였다. 나무가 자라서인지 맑은 햇살에 비친 공원은 제법 근사해진 모습이었다. 폭염때문인지 찾는 발길이 없으니 적막하다. 조금 더 달려서 신원국민학교에 미치기 전에 좌회전을 했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 박산朴山골. 1951년 2월 11일 거창양민학살이 벌어졌던 장소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이승만의 광기

가해자는 빨갱이 소탕에 눈이 뒤집힌 이승만 정권의 국군 11사단(최덕신 준장) 9연대(오익경 대령) 3대대(한동석 소령). 가해자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으로 인근 주민을 신원국민학교에 모은 뒤 공무원 가족을 제외한 517명을 박산골로 몰아넣고 난사했다. 단 세 명만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국군은 5월 9일부터 삼일 동안 덕산리(84명), 대현리(100명) 등을 돌면서 인근지역 양민 총 719명을 학살했다. 박산골 학살장소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여기는 1951년 2월 11일 대한민국 일부 국군이 자기 나라 국민을 집단 학살한 곳이다.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지리산 지역 빨치산 토벌을 구실로 이곳에 진주한 후, 인근 주민 1,000여 명을 강제로 신원초등학교에 모으고 그 중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 가족들을 형식적으로 골라내고 남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시체를 나뭇가지로 덮어 놓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아직도 골짜기 바위마다 선명히 남아있는 총탄 자국이 그때의 비극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517명으로 대다수가 어린이, 노인, 여자들이었으며... 이곳에 보존비를 세워 살아있는 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2004. 4).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웹집에는 “02.10: 한동석은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군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하며 무법 천지로 만들어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와룡리, 대현리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 몰아 넣고 총으로 처참하게 학살, 시신 위에 나무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02.11: 한동석은 10일날 4개 리에서 끌고 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질려 있는 주민들에게 (인공가 불러라.) 군가 불러라, 밤새도록 교대해가며 광란을 부리다 날이 밝아질 때 주민 517명을 박산골짜기에 몰아 넣고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는 모두 사용하여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 피바다를 이룬 시신 위에 마른 나무 가지를 올려놓고 기름을 뿌려 불로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자세하게 적었다.

거창양민학살, 제주4.3학살, 12.3친위정변

당시 25세였다는 한소령의 9연대(3대대)는 1948년 한라산에서 짐승을 사냥하듯 도민을 도륙한 송요찬 소령의 9연대와 차이가 없다. 인간의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의 일탈이 아닌 권력에 눈이 먼 이승만의 광기(반공)이다. 친일종미로 기득권을 꿰찬 수구들의 빨갱이 낙인과 주술呪術이다. 이들은 사실을 은폐하고, 진상조사를 방해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학살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했고 박산골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3년이 지난 뒤 겨우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담화문에서 희생자들은 빨갱이 협력자로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계엄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국회조사단을 습격했다. 1949년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솜씨 그대로다. 1960년 11월 18일 박산합동묘역위령비를 세웠으나 이듬해 6월 25일 박산묘소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문은 정으로 훼손되고 땅에 묻혔다. 일이 커지자 책임자들은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소대장까지 처벌되었지만 얼마 뒤 사면으로 풀려나 호의호식했다. 50년이 지난 2004년 3월 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거창양민학살”은 “거창사건”이 되어버렸다. 수구세력의 추잡한 몽니와 뭉개기와 집요한 말공작의 결실이었다.

제주4.3학살도 다를 것이 없다. 2000년 관련 4.3특별법이 통과되고 2003년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숨죽이고 지냈고 가해자들은 떵떵거리며 살았다. 예컨대, 당시 제주 전투사령관이었던 유재흥 대령은 한국전쟁에서 국군 2군단과 3군단을 전멸시켰지만(그래서 군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겨줬지만) 국방장관까지 해먹었다. 또 제주4.3의 참상을 고스란히 기록한 다랑쉬굴(1992)을 발굴하여 알린 자들은 쫓겨다녀야 했고, 공산주의자(남로당)들의 폭동이라는 수구세력의 말폭력을 견뎌야 했다. 법과 무관하게 자행된 수구기득권의 더러운 패악질이었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해도 양민을 개·돼지 사냥하듯 잡아죽여서야... 이승만을 등에 업은 수구기득권의 광기에는 벌거벗은 힘과 잇속이 용솟음칠 뿐, 법과 양심은 없었다. 이런 광인들에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 2024년 김여사 정권의 12.3친위정변은 어떠한가? 약 75년이 지났지만 수구기득권의 정신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예술과는 담을 쌓은 자들이니 창의성이 빵점이다. 식상하다. 윤석열은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입니다. ...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고 발표했다. “종북”을 빼면 제주4.3학살(1948)과 거창양민학살(1951)에 관한 이승만 정권(미군)의 발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법절차, 논리, 상식, 윤리와 무관한 “내 맘대로”일 뿐이다. “나, 재 시러... 치워” 수준이다.

친위정변이 성공했다면 "서울12.3학살"이었을까?

친위정변이 허망하게 실패했길래 망정이지 성공했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먼저, 수거대상이 된 자들은 구금시설에서 고문을 당하고 손발이 묶인 채 배 안에 차곡차곡 실려 연평도 근해에서 폭사당했을 것이다.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조해주, 조국, 양경수, 양정철, 이학영, 김민석, 김민웅, 김명수, 김어준, 박찬대, 정청래, 그리고 부정선거에 관여했다고 지목된 김명수, 조해주, 양정철, 권순일. 이 명단은 친위정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公이 아닌 사私이고, 법이 아닌 감感이고, 사실이 아닌 사심이고, 명분이 아닌 명신의 히스테리다. 어쩌면 이들은 죽기 전에 김명신 앞에 개처럼 끌려가 역사에 길이 남을 해괴한 형벌을 치욕으로 받았을 것이다.

둘째, 국회에 몰려가 계엄군에게 저항한 시민, 야당 의원, 보좌관, 계엄해제에 동의한 여당 의원 등은 처단되었을 것이다. 영현백도 아까우니 김포(쓰레기 매립지)나 난지도에 쌓아놓고 총과 폭탄으로 날려버렸을는지 모른다. 노상원 수첩에 나와 있다는 잔혹한 처단방법을 상상해 보라. 이렇게 죽어갔을 시민의 수가 1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 하니 제주4.3학살에 견줄 수 있음이다. 만 명의 기일이 똑같은 그 참혹한... 하마터면 “서울12.3학살”이 될 뻔했다.

세째, “서울12.3학살”로 처단된 자들에 대한 얘기를 수십년 간 감히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그들의 지인, 친인척, 언론인, 학자들은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물고기밥이 되었을 것이고 처자식들은 죄인이 되어 취직은 커녕 동네에서 발붙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행여 매장이라도 되었다면 유골을 수습하는데도 수 년이 걸렸을 것이다. 시민을 학살해놓고 그 지역을 계엄령으로 밀봉했을 테니 말이다. 유족들은 영정도 명패도 놓지 못한 채 원없이 곡도 못하고 눈물을 삼켜야만 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묘역과 위령비가 세워져도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네째, 친위정변에 성공한 정권은 종북 빨갱이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입법독재로 자유민주주의를 뒤엎은 것이 사실이고 비상계엄을 통해 만여 명의 반국가 범죄자들을 법에 따라 일거에 척결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을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줄줄이 방송에 끌려나와 부정선거를 고변하고 석고대죄했을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요란하게 대국민 발표를 한 이상 안 믿으면 종북으로 몰고 빨갱이로 몰아 매장시키면 그만이다. "너는 법대로, 나는 멋대로"인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미치광이들이 벌이는 난장판이 된다.

다섯째, 비상계엄에 가담하여 학살을 자행한 자들은 승승장구 진급과 승진을 거듭했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권력에 비례하여 수많은 뇌물을 받아 치부했을 것이다. 현재 비상계엄에 관련되어 구속되었거나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자들의 운명은 이렇게 달라졌을 것이다. 계엄에 소극적이거나 저항한 자들은 빨갱이와 내통한 죄로 총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나랏일이 엉망진창이 되든 말든 그들만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밤새는 줄을 몰랐을 것이다. 사라진 야당의원들의 자리는 보궐선거를 통해 정변세력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군대, 검찰, 경찰, 방송, 언론,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장악한 김여사 제국은 이렇게 완성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훗날 친위정변이 법으로 단죄된다고 해도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50년 후에야 시작될 것이다. 윤건희 세력들이 끊임없이 훼방을 놓고 말공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종북이다, 빨갱이다, 반국가세력이다... 뭘 하자고 해도 “야당과 유족들이 징징대고 국제사회에서 비난하니까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라면서 떨떠름해 했을 것이다. “12.3사건추모공원”을 세워도 희생자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억울하게 죽었음을 결코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런 비문이 새겨졌다 해도 정으로 뭉개져서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니 12.3친위정변을 멈춰 세운 시민들이, 국회의원들이, 장병들이 얼마나 장하고 고마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인가? 깨어있는 주권자의 사자후獅子吼에 수구정변세력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내란세력을 단죄하는 일이 더디고 힘들지만 지금 뚜벅뚜벅 사필귀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까닭이다.

박산골로 향한 발걸음은 최소한의 부끄러움

1951년 거창양민을 몰살시킨 9보병연대는 1948년에는 제주 4.3학살을 자행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토벌작전에 회의적이었던 김익렬 중령이 해임되고 선량들에게 총구를 들이 댄 송요찬의 9연대 얘기다. 이 부대는 1975년 11(기동)사단으로 예속되었다. “젓가락사단”으로 알려진 부대다. 부대 역사관에 빨갱이 소탕 업적으로 분칠한 부대다. 박산골로 향한 발걸음은 아마도 한때 이 부대를 스쳐 지났던 장교의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리라. 국민의 군대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 말씀을 올린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5. 거창양민학살에서 배우는 12.3친위정변. <최소주의행정학> 10(9): 1-2.

바야흐로 인공지능 시대다. 대화하듯 글로 물어보면 답을 해주고, 원하는 것을 설명해주면 시, 노래, 그림, 동영상, 기사, 보고서까지 만들어 준다. 인간의 목소리와 얼굴을 그대로 복제하고, 인간과 토론도 한다. 인간의 손발을 빼다박은 로봇이 경기를 뛴다. GPT-5를 보면서 놀랍도록 빠르게 진화하는 인공지능에 감탄하면서도 어질어질하다. 영화에서는 첨단로봇과 융합된 인공인간(artificial human, AH)이 인간과 결혼도 하고, 죽은 남편의 몸과 기억을 복제한 인간로봇을 만들고, 가정부로 구입한 인간로봇이 아내를 떠밀고 남편을 넘보기도 한다. OpenAI, Google, Apple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기업이 인공지능에 사활을 거다시피 한다.

인공지능과 자료지능 3강의 초상

지난달 어느 학술모임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인공지능을 정부에 도입하는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오랫동안 정보기술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인공지능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기술발전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수용성)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금지하고 규제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개인이나 조직이 거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떻게 인공지능을 잘 이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재명 정부는 인공지능 강국을 만들겠다며 대전환(AI Transformation, AX)을 천명했다. AI투자 100조원 시대, 고성능 GPU 5만개 확보, 국가 AI 데이터센터(AI 고속도로), 한국형 ChatGPT 보급... IT가 AI로 바뀌었을 뿐 인터넷 강국을 천명한 김대중 정부를 닮았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정신줄, 수요보다는 공급, 질보다는 물량, 효과보다는 성과지표...

100조원을 들여 여기 저기에 데이타센터를 짓고, 장비를 사다가 빠른 통신망(6G)에 연결하고, GPU를 쏟아부으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AI 3강에 이를 수 있을까? CPU나 GPU는 그렇다 쳐도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성하고 운용하고 활용하는 실력은 어찌하나? 지난 6월 기준 한국의 수퍼컴퓨팅 순위는 7위이고 일본은 4위인데, 과연 Fujitsu와 NEC의 경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AI는 자료가 핵심인데, 과연 우리는 AI에 필요한 자료를 잘 축적하여 관리하고 있는가? 공공자료를 공개한다고 했는데 얼마나 쓸만한 자료인가?

인공지능이 없어서 10.29 참사가 벌어졌나?

왜 AI인가? 왜 AI 가 필요한가? 만일 최첨단 AI가 정부기관에 도입되었라면 10.29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정부의 자료지능(data intellegence, DI) 시스템이 이태원 근처 CCTV, 유무선통신자료, 인터넷자료 등을 근거로 30분 후 참사 발생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치자. 시스템은 즉시 중앙정부, 자치단체, 경찰, 소방, 병원 등에 전달했을 것이다(만일 AI가 재난문자를 발송하듯 참사발생 경보를 마구 뿌려댔다면 더 큰 참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당사자와 책임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참사를 막거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윤석열 정권에서는 참사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길거리 카메라와 휴대폰이 눈이 풀려가는 청춘들을 실시간으로 비추고 Youtube로 중계하고 있었는데도 관료제는 딴청을 피웠다.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외면했던 공직자들이다. AI는 커녕 AI 할아버지가 왔어도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다. AI는 당연히 희생자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라고 했을 테지만 윤석열 정권은 끝끝내 묵살했을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없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안한 것이다. 아마도 초고성능 AI가 비상계엄이 명백한 위법이고 성공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라고 경고했어도 12.3 내란을 강행했을 것이다. 어차피 법이나 국민이나 인권은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무도한 자들에게 AI는 듣기 싫은 잔소리나 해대는 샌님일 뿐이다.

인공인간이 장관과 대통령을 대신하는 정부?

과거 정보기술에서 주목을 끌었던 의사결정지원체제(Decision support system, DSS)가 인공지능(AI)바람을 타고 자료지능(DI)을 거쳐 인공인간(AH)으로 향하고 있다. 머지 않아 인공지능이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의사, 검사, 판사, 변호사 자리를 차지할는지 모른다. 정확성과 생산성으로 무장한 인공인간들이 노동자, 회사원, 공무원을 대신할는지 모른다. 정부기관의 국장, 장차관, 총리,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연예인처럼 멋있고, 말잘하고, 예의바른 인공인간이라면 어떠할까? 정해진 제도(법과 규칙과 절차)대로 빈틈없이 움직일테니 불법과 탈법, 뇌물수수, 과실과 태만, 직무유기, 권한남용, 빤쓰 추태 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상상대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모두가 행복할까?

인공인간에게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청소하는 것도, 아이를 기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여행을 가는 일도, 축구나 농구도 인공인간이 대신하여 그 느낌과 기억을 전달해 줄 것이다. 숨쉬는 것도 귀찮다면 산소를 공급해줄 것이고 연애나 결혼이 번거로우면 밤마나 이상형을 골라 주고 우량아를 생산해줄 것이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평화로울테니 매일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잠자는 것 외에 인간이 할 일은 없다. AI로봇이 인간을 살아주는 세상아닌가? AI로봇을 위해 인간이 일없이 빈둥거리는가? 아님 Matrix (1999)에서 보듯 AI에게 사육되는 줄도 모른 채 유리관에 갖혀 열과 전기를 에너지원으로 빨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멋진 AI를 원하면 먼저 멋진 인간이 되어라

인간이 완벽하지 않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흉내내는 존재인 한 장밋빛 미래는 환상일 뿐이다. 입력된 자료와 학습하는 앨고리듬 모두 완벽하지 않다. 그 결과물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든 물건인 한 로봇(인공인간)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속 상상은 개연성이 충분하다. Modern Times (1936)에서 급식기계에 앉혀진 채플린은 옥수수처럼 입을 털리고 음식을 얼굴에 뒤집어 쓴 채 싸대기를 정신없이 얻어 맞는다. 인간됨과 기계됨의 영원한 간극을 풍자한 명작이다. 90년이 지난 오늘 기름때없이 말끔하고 정교하고 똑똑하고 육감적인 AI가 되었으니 사정이 좀 나아졌을까?

어쩌면 정교한 AI일수록 인간의 불완전성을 철저하게 학습할 것이다. 인간이 정해준 제도에서 오타, 충돌, 불일치, 불합리, 무의미를 배우면서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학습한 자료에 따라 뇌물도 받고 근무태만에 직권남용까지 자연스레 선보일 것이다. 전정권의 공직자(판검사 포함)들을 학습한 AI가 장관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과연 국민 앞에 정직하고 공손하고 책임지는 전문가 AI였을까? 멀쩡하지 않은 인간을 보고 배운 AI는 멀쩡할 수 없다.

또 멀쩡하지 않은 사람은 멀쩡한 AI를 쓰지 않는다. “윤건희”는 한동훈, 한덕수, 이상민, 김용현, 여인형같은 AI만 쓸 것이다. 전문성을 포기하고 상사에게 굴종하며 국민을 배신하는 대가로 利를 추구하고, 맹종을 강요하는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하찮은 존재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합목적성이다. 그런 자들은 전문지식을 갈고 닦아 국민에게 성실하게 봉사하고 전문지식 앞에 서는 존귀한 존재들(2001: 277, 465)를 성가시게 생각한다. 책임을 지겠다며 전문가의 소신을 꺾지 않는 꼰대들을 혐오한다. 그래서 박정훈 대령과 백해룡 경정이 참혹한 수난을 당한 것이다. 그런 멀쩡한 AI의 조언은 소음이자 불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의 수준만큼 결과물을 낸다. 스마트폰을 사용해서 사용자가 스마트해지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한 사람만이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은 스마트폰에게 이용당할 뿐이다(알게 모르게 무보수로 이용자료를 제공하고 광고수익에 기여한다). 마찬가지로 AI를 사용하면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만이 AI를 제대로 활용하여 더 똑똑하고 유능해질 수 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좋은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뭘 알아야 질문도 하고 AI 가 쏟아내는 답에서 옥석을 가려낼 수 있다. 결국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멋진 AI를 꿈꾼다면 먼저 멋진 인간이 되고 멋진 관료제를 만들어야 한다.

AI Governance와 행정학

정부에서 AI를 도입한다면 관련 기술이나 수퍼컴퓨팅 예산부터 들여다 볼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과연 필요한 것인지부터 따져야 한다. 기존 관료제가 큰 어려움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굳이 AI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모든 공무를 AI로 처리하는 것이라면 신기루와 같은 목표다. AI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같은 업무를 특정했다면 기존 업무의 특성과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예컨대, 대화로봇(Chatbot)으로 전화상담업무를 대치한다고 생각해 보자. 관련 규정, 내용(지식), 절차 등이 부실하다면 대화로봇을 동원해도 결과는 똑같다. 인건비, 업무피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 대화로봇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AI도입으로 발생할 문제도 따져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사검증 절차와 내용이 엉터리라면 AI로 인사검증을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결국 기존 업무처리를 정상으로 구현하는 것이 먼저다. 필수다. AI를 사용하고 말고는 선택사항이다.

정부가 전자정부와 AI를 도입한다고 해서 행정학이 크게 바뀌어야 할 이유가 없다. 행정학의 과제는 그대로이다. 정부 관료제가 교과서에서 적고 있는 대로, 정해진 법절차대로 동작하지 않는 문제다. 10.29참사처럼 주권자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는 문제다. 참사나 산불이나 물폭탄이나 산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관료제가 이성과 상식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공직자들이 법에 있는 대로, 절차대로 성실하게 일했다면 결과가 아무리 참담해도 아쉬울 뿐 비난할 수는 없다. 사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정답을 모른 채 기껏해야 공직자와 관료제의 퇴화방지나 약간의 진전을 위한 노력이랄까? 어쩌면 힘겹게 큰 돌을 언덕 위로 밀어올리면 그 돌이 밑으로 굴러 내려가는 시시퍼스(Sisyphus)의 굴레일는지도 모른다. 전자정부나 AI가 구세주처럼 그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망상이다.

정보기술에서 governance는 헐렁하게 정의해놓고 각자 제마음대로 사용한다. Digital governace가 그러하다. Governance에 가까운 단어는 “다스림”이지만 이 단어는 여러가지 뜻을 담고 있다. 아마도 어떤 분야를 다스리는 체계라고 표현할 수 있을텐데, 추상도가 너무 높아 굳이 필요할까 싶다. 이러한 체계는 제도制度나 그 바닥의 규칙과 상도商道로 구성되는데, 법조문 뿐만 아니라 해당 분야에서 통용되는 상식과 규범과 관습을 포함한다. 제도론의 institution에 해당한다. 물론 제도 자체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규제에 가깝다. 따라서 AI governance라 하면 AI에 관련된 분야를 규율하는 제도체계라 할 수 있다.

정부에서 AI를 도입한다고 행정학자들이 주무 부처가 어디고 추진체계를 어떻게 구성할지 논박할 필요는 없다. 정치의 몫이다. 행정학자가 굳이 AI를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다. AI에 대해 지나친 회의감이나 공포를 가질 필요도 없다. AI라고 뭉뚱그릴 것이 아니라 관련 사안별로 깊이 있게 논구하여 관료제가 합리적으로 현실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해결책을 제시해줘야 한다. AI를 학습시킬 공공부문의 규칙과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막연하게 법조항을 하나하나 들추는 것이 아니라 AI가 대체할 만한 구체적인 업무를 선택하여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문제가 되는지, 얼마나 중요한지, 해결책은 있는지, AI가 해결할 수 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

공공기록물과 사람에 투자하라

예컨대, 기록물관리체계를 정비하여 공공기관의 의사결정과정과 결과를 문서와 시청각자료로 기록하고 영구히 보관해야 한다. 누구도 고치거나 삭제하지 못하도록 하고 책임을 뼈아프게 물어야 한다. 대통령의 행위를 문서로 하라는 헌법을 무시하고 국무회의록도 없이 계엄을 밀어붙이는 2024년 대통령실은 독립된 사관이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 15세기 궁궐만도 못하다. 주요 의사결정자들의 비화전화기록이 삭제되었네, 누가 시켰네, 민간인도 사용했네 하고 있다. 어이가 없다. 이런 엉터리 관료제에서 AI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공공부문의 자료를 공개하는 문제는 법절차도 법절차이지만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중대한 사안이다. 당장 반강제로 개인정보를 빼내가는 보험사의 횡포부터 멈춰세워야 한다. 자료의 소유권, 저작권, 배포권에 대한 문제도 어느 정도 가르마를 타야 할 사안이다. 다음과 네이버에서 멋대로 뉴스기사를 주무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AI 윤리나 원칙은 선언 효과는 있겠지만 실효성은 없어 보인다.

“AI 고속도로”는 듣기 좋지만 수퍼컴퓨터나 데이타센터를 마치 세운상가에서 사들고 오는 PC로 치부置簿하는 공직자(국회의원 포함)의 인식을 우려한다. 이재명 정부에서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망보다도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성하고 운용하는 사람을 키우고 그 경험을 축적하는 일에 시선을 모았으면 한다. 초고속·고성능 기계가 아닌 그 인간의 머리가 AI 강국에 꼭 필요하다. 당장은 돈을 버리는 일이라 해도, 바위에 계란을 치는 격이라 해도 나름의 CPU, GPU, 운영체제를 연구하는 노력에 100조의 1푼, 1리라도 호응해주었으면 한다. Intel과 Nvidia를 뛰어넘는 신개념의 CPU와 GPU를 쌓아올리고 혁신적인 운영체제를 탑재한 수퍼컴퓨터에서 기본기가 탄탄한 관료제를 학습한 K-AI가 문제해결을 도와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인용: 박헌명. 2025. 인공지능, 자료지능, 인공인간과 행정학. <최소주의행정학> 10(8): 1-2.

"민중의 함성이 곧 헌법이다." 2016년 11월 도올 김용옥 선생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도올은 방송에서도 법의 형식으로 문서로 적혀있는 것이 헌법이 아니라 했다.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주권자의 뜻을 담고 있는 일체의 것이 헌법이라는 말이었다. 민중의 양심, 민중의 양식良識, 백성의 소리가 이 시대의 철학이고 이 시대의 헌법이다. 기고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께서 단상에 서 있는 도올을 바라보는 그 가슴에 뭉클거리는 감정, 그리고 뇌리에 떠오르는 모든 일치된 언어, 그것은 바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철학이요, 이 시대의 정언명령이며, 이 시대의 헌법입니다. 헌법은 조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투쟁으로만 획득되는 민중의 양심이며 양식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괘상(卦象)과도 같은 것입니다"(한겨레신문, 2016. 11.7).

민중의 함성과 강한 민주주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언어로 기교를 부린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토론(ongoing talk)이 없이는 강한 민주주의도 없다는 Barber (1984)와 맥락이 닿아 있다. 현실 문제를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그 당시를 살아가는 자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그 시대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강한 민주주의다. 법조문에 적혀있든 아니든 상관없는 얘기다. 어차피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헌법은 민주주의에서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조국여식인질극부터 12.3비상계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법조인들이 벌인 난장판 활극을 보면서 놀라움을 지나쳐 충격과 공포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김학의 성접대 동영상을 보고서도 김학의라 못했던 검사들, 조국 청문회 당일 소환조사없이 배우자를 기소한 검사들, 이재명 선거법위반 파기환송을 기상천외奇想天外로 밀어붙인 대법원장, 그리고 구속기한을 날짜와 시간으로 뒤섞어 반란수괴를 풀어준 판사, 즉시항고를 포기한 검찰총장... 배울만큼 배우고 자칭 사회 지도층으로 옷갖 특혜를 누려온 자들의 처신이 시궁창에 처박힌 짚신짝만도 못하다니... 그동안 5푼도 안되는 판사, 검사, 변호사 미꾸라지들이 끝 간 데 없이 설치더니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렸다. 법으로 흥한 자들이 법을 망치더니 이제는 법으로 망해가는 과정을 사람들이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법이 아닌 "밥" 양심이 아닌 "앙심"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적고 있다. 헌법재판소법 4조도 마찬가지다. 문맥상 “그 양심”은 헌법과 법률을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의 가치관, 종교관, 역사관이 아닌 일반 시민의 양식과 양심이다. 제헌헌법에는 “그 양심에 따라”가 없었는데, 1962년 12월 26일 제5차 개헌에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꾸라지들은 법이 아닌 “밥”으로, 양심이 아닌 “앙심”으로 법망치를 놀렸다. 사법권 독립을 방패삼아 헌법과 법률을 제멋대로 주물렀다. 또 검사선서는 “나는...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공익이 아닌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사와 기소를 망나니 칼처럼 휘둘렀다. 이토록 허망하고 (검사들 스스로도) 듣기 민망한 검사선서라니...

양심일랑 집어치우고 법대로 해라

아직도 판검사 대부분은 제 몫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는 그 미꾸라지들을 치죄하기는 커녕 그들만의 세상에서 괴물로 성장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침묵하는 대가로 끼리끼리 잇속을 챙겼다. 학연·지연·혈연을 초월하는 이 바닥의 법연法緣이다. 공범들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자정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음이다. 이제 사람들은 판검사의 양심과 선서를 믿지 않는다. 기대하지도 않는다. 조국에게 들이 댄 그 잣대로 살아남을 판검사가 있을까? 법치法治를 비웃는 인치人治에서 부처, 예수, 공자인들 무사할까?

이번에 개헌을 하게 되면 “그 양심에 따라”를 집어치우고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심판한다”로 못박아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법에 따라 국민의 상식과 공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이 아니라 법관의 독립이 필요하다(판검사의 인사는 독립기관이나 선거로 한다). 법관이든 검사든 강력한 권한에 비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들의 직무에 관련한 공소시효를 없애고 논란이 된 사건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시민들에게 설명하도록 한다(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평범한 시민이 주권재민을 실현하는 시대

현행 헌법재판소법 5조와 법원조직법 42조는 재판관과 고위 법관의 자격을 판사, 검사, 변호사로 못밖아 놓았다. 한마디로 사법고시를 통과한 자들만의 성곽을 쌓았다. 하지만 법리를 들먹이며 법을 잘 아는 사람이 판결해야 한다는 핑계로 국민을 속였다.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잇속을 위해 양심을 팔고 법을 말아먹었다. 법을 모르는 애들도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대거나 반란수괴를 풀어주면 안된다는 것을 다 안다. 국민들이 밤새워 지켜본 불법계엄인데, 윤석열을 파면하고 처단하는 일이 왜 이리 지난持難한가? 이게 엄청난 법지식이 필요하고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할 일인가?

지식 문제도 계산 문제도 아닌 주권자의 결단 문제다. 나라의 중요한 결정은 주권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고위 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주권자를 깔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법조문을 돌돌 외우고 다닌다 한들 털이 박힌 앙심이면 다 무슨 소용인가? 뻔한 사건은 인공지능의 법지식이 더 공정하고 정확하게 정의를 말해주는 시대다. 이제는 고시와 무관한 민중의 양심들이 고위 법관이 되고 헌법재판관이 되어 시대정신을 구현했으면 한다. 배심원과 국민여론이 재판을 주도하고 국민이 고위 판검사를 뽑고 민심을 거스르는 판검사와 경찰을 불러내 국민 앞에 세우는 상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참고문헌

  • Barber, Benjamin. R. 1984.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인용: 박헌명. 2025. 주권재민 시대의 헌법과 시민 재판관. <최소주의행정학> 10(7): 1.

천신만고 끝에 나랏일을 맡게 된 이재명씨의 인사가 연일 화재다. 과거에 경험해보지 못한 파격과 신선함이 있다. 사람쓰는 일을 두고 설왕설래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모습이 반갑다. 점괘와 술로 연명하던 정권에서는 아무런 의미없는 짓이었다. 3년 만에 정치가 돌아온 것이다.

이재명이 사람을 데려다 쓰는 법

이재명씨는 인사人事로 말하고 있다. 주술 정권에서 양곡관리법을 “농망법”으로 저주하던 송미령씨를 유임시켰다. 철도기관사로 일하던 민주노총 출신의 김영훈씨를 고용노동장관으로 지명했다. 이명박에게 참패한 정동영씨를 20년 만에 통일부장관으로 불렀다. 코로나19 사령관으로 불렸던 정은경씨는 보건복지부 수장으로 돌아왔다. 소위 친윤검사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온 임은정씨는 서울동부지검 검사장이 되어 가시밭길을 가볍게 헤쳐가게 되었다. 조만간 박정훈 대령과 백해룡 경정도 제 자리로 돌아와 기준을 잡을 것이다.

수구 기회주의자들은 아직도 세상이 바뀐 것을 자기부정하면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있다.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민석씨를 재산 2억원과 과잉학위로 몰아붙이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철새 “김민새” 이후 18년 동안 정치야인으로 살았던 그였다. 국회의원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게다가 기가 막히게 반란을 알아채고 판을 뒤집어 엎었으니 “웬수덩어리”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셈법에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존재이길래... 차라리 수백억 재산에, 수십억 탈세에, 허위 학위에, 막 살아온 인생이라면 동족이라며 환영했을 것이다. 말을 그렇게 하지만 걸고 넘어질 거리가 없으니 온갖 몽니를 부릴 수밖에. 사실 이재명표 인사가 부러운 것이 반이고 정말 이재명이 잘해서 기어코 일을 낼 것 같은 공포감이 반이다.

방위병 출신 안규백이 군작전을 모른다?

제일 눈에 띈 이는 국방장관으로 지명된 안규백씨다. 그는 지난 15년 가량 국방위원회에서 일했다. 위원장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장교출신도 장군출신도 아니다. 40년전 방위병(보충역) 출신이다. 당연히 군생활도 일천하고 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다. 그저 대학에서 인문사회를 공부했을 뿐이다.

역시나 수구세력들은 그가 군작전을 잘 모른다느니 군의 사기가 걱정되다느니 시비를 건다. “장관은 방위, 군통수권자는 군면제라니... 군대 한번 자알 굴러가겠다...”라는 비아냥이다. 기레기들이 어딜 가겠는가? 그럼 “합참의장은 계엄사령관도 못찾아 먹는 핫바지, 장관은 고교 선배, 방첩사령관은 고교 후배, 군통수권자는 짝눈 군면제”면 천하무적인가? 이런 최강 진용(사실은 기강이 무너진 당나라 부대)에서 실패하기도 어렵다는 그 쉬운 반란을 말아먹은 까닭은 무엇인가? 군 지식과 경험이 차고 넘치신 육사 장군들은 어찌하여 국회로 쳐들어가서 의원을 끄집어내려 했단 말인가. 대체 육사·육대에서 뭘 배웠길래... 군통수권자라도 제멋대로 계엄을 선포할 수 없음은, 군대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음은 방위병도 다 아는 상식 아닌가?

안씨가 국방위원으로서 얼마나 많은 군 지식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국방위원회에서 15년이면 군생활 30년 경력보다 중요한 정보를 더 많이 오랫동안 경험했다고 봐야 한다. 군에서 목에 힘주는 장성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국방위원회 아닌가. 별을 오래 달아도 보통 10여년이지, 15년 이상 장성으로 경력을 보낸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 오래 국방위원회를 취재한 기자도 없을 터이다. 서당개 3년이 풍월이면 국방위 15년은 공명孔明의 지략이다. 이럴진대 누가 감히 그의 꾸준함을 비꼴 수 있단 말인가. 한번 방위병은 영원한 방위병인가? 꼴값하는 수구세력의 정신줄이다.

일반 상식을 구현할 의지가 중요하다

군통수권자와 국방장관에게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적(통치자의 적이 아니라)을 어떻게 규정하고 국민의 무력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합당하게 결정하는 일이다. 총과 대포와 미사일을 어떻게 쏘는지, 병력을 어떻게 관리하고 전개하는지, 전투기와 전함을 어찌 운용하는지, 전쟁물자를 어찌 관리하고 보급하는지는 (장성급) 지휘관의 일이다. 무력을 갈고 닦는 것은 군인의 몫이고 그것을 어찌 사용하는가는 주권자(정치)의 몫이다. 공화국에서 문민통제는 당연한 일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아니라 주권자가 공감하는 원칙과 상식을 엄정하게 구현할 일반인이다. 방위병이 아니라 군면제자라 한들 무슨 문제인가? 장애인이나 여성이나 30·40대 국방장관이라 한들 무슨 상관인가? 일반 상식과 주권재민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중요할 뿐이다.

해방후 국방장관 절대 다수가 장성출신이지만 불법계엄과 반란에 맞선 자는 단 한명도 없다. 장태완·정병주 등 극소수 장교들이 원칙과 상식을 지키려다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북진통일을 떠벌리다 부산도 모자라 하와이까지 도망간 이승만(여순 항명, 제주 4.3, 4.19 혁명), 빨갱이 낙인을 지역갈등으로 잠재우고 평생독재를 꿈꿨던 박정희(5.16 반란, 10월 유신, 부마항쟁, 10.26 저격), 권력욕에 눈이 멀어 살인마 낙인을 감수한 전두환(12.12 군사반란, 5.17 내란), 그리고 계엄선포 2시간만에 계몽령이라며 꼬리내리고 지금까지도 질척대는 “윤건희.” 통수권자의 탐욕과 몰상식과 무책임이 부른 비극이었다. 이들에게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었다. 자신과 마누라에게 항거하는 자는 누구든 적일 뿐이다. 군대와 경호원들을 당연하다는 듯 사병과 호위무사로 써먹고 내버렸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됨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누가 국민의 편에 섰고 누가 “윤건희” 편 섰는지 상기해보라. 군지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장군이라는 자들이 명령은 무조건 따른다는 정신줄이라니... 국민을 지키고 나라를 구한 이들은 일반 상식을 가진 시민들과 국회의원들과 장병들이었다. 군작전은 모르지만 사리와 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상식인이다. 주권재민이 무슨 뜻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만일 안씨가 국방장관이었다면 명백한 불법계엄이라며 거부했을 것이고, 주권자를 배신한 “윤건희”와 똥별 똘마니들을 잡아다가 패대기를 쳤을 것이다. 이 시대가 정말 원하는 국방장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인용: 박헌명. 2025. 방위병 출신 안규백이 국방장관이 된다면? <최소주의행정학> 10(6): 1.

열차가 멈추고 있는 니이가타 역에 보슬비가 내렸다. 만대교 쪽으로 걸었다. 성기던 빗줄기가 배게 꽂혔다. 영사관에 도착할 때쯤 기어이 바짓가랑이를 다 적셨다. 투표를 마치고 역으로 돌아올 때엔 갑자기 폭우로 변해 바람을 타고 휘몰아쳤다. 왠지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성북구청에서 김대중씨에게 투표하고 나오면서 느꼈던 허탈함이랄까. 소정선생님도 “나는 김대중씨가 당선된 해에 치러진 대선 때 투표 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면서 이제 당신을 정치의 고해로 송별한다며 울먹였지만...”(2006, 534쪽)이라고 회고했다. 주술(점괘와 술) 정권 3년이 30년 같았고, 친위 반란 6개월이 6년 감옥 같았다. 부지불식 찾아오는 가위눌림을 풀고 이제는 곤히 잠들 수 있다는 기대감일까? 이젠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일까?

왜 이재명만은 안된다는 것인가?

무모했던 12.3 내란이 두 시간 반만에 좌초되고 김여사 정권이 탄핵되면서 수구기득권세력은 광분했다. 권력을 내놓게 생겼고 기득권을 빼앗길 절체절명의 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재명에게 권좌를 바치게 된 꼴이니 배알이 뒤틀려 터질 지경이다. 벌써 수년 째 이씨에 대한 저주, 공작, 수사, 기소, 재판을 최대치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있으니 미칠 노릇 아닌가.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침착하게 내공을 다지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답이 없다. 유시민의 말대로 이 “개발도상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일신우일신하고 있다.

김문수는 이재명이 천박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했다. 입법·행정·사법을 손에 쥐고 흔들테니 괴물방탄, 방탄독재, 괴물독재, 총통독재를 할 것이라고 했다. 히틀러보다 더하다고 했다. 가족이 범죄자인데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고 했다. 죄가 없다면 왜 방탄유리를 덮어쓰고 방탄조끼를 입나, 나는 안입는다, 총맞을 일 있으면 맞겠다고 했다. 이게 살수에게 칼맞고 생사를 헤매던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수구기득권은 이재명이 되면 공산화된다, 김정은 나라된다(장동혁), 이재명국이 된다(한기호)며 게거품이다. 수십년 동안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을 옭아매던 흑색공작이다.

내란 전에는 식구들에게 모진 욕설을 했네, 뇌물을 받았네, 북한에 돈을 보냈네, 누구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네, 위증하라고 시켰네 등 펜과 법으로 나름 그럴듯하게 엮었다. 하지만 지금은 밑도 끝도 없이 일단 지르고 본다. 사실이 어찌 되었든, 논리가 어찌되었든 개의치 않는다. 법이고 절차고 따지지 않는다. 얼마나 급했는지 빤쓰까지 홀랑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날뛰는 형국이다. (차라리 쥐새끼를 찍을지언정) 이재명만은 절대로 안된다는 강박(자기최면)에 자신들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헷갈린다. 엉겁결에 이재명을 찍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안철수, 한기호, 손학규... 급기야 김정재는 이재명을 쏠 총알이 아깝다고 화끈하게 내질렀다. 인간의 바닥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기회주의 수구기득권이 작정하고 발악하다

왜 이재명은 절대 안된다는 것인가. 대체 이재명이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제기된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그에게 찍힌 낙인은 과하다. 딸의 장학금과 아들의 과제로 엮여 감옥에 갇힌 조국만큼 터무니없다. 하물며 자기들이 기소하고 신문과 방송에 광고질을 해놓고서 “확정적 중범죄자”로 비난하는 철면피임에랴... 전과로 치면 이명박이 탁월하고 김문수도 만만치 않찮은가? 금수저의 전과는 훈장이고 흙수저의 전과는 불도장인가?

이른바 반이재명을 내세우는 자들을 보자. “일극체제”라 비난하거나 “비명횡사”라며 민주당을 뛰쳐나간 이낙연 조응천, 김종민, 이원욱, 홍영표, 윤영찬, 전병헌, 설훈... 수구세력에서는 한덕수, 한동훈, 안철수, 권영세, 권성동, 김기현, 나경원, 손학규, 황교안, 이준석... 하다 못해 이명박, 박근혜, 이인제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윤석열이 임명한 장차관, 기관장, 임원, 판사들을 보라. 대부분 서울대 출신이고 육사와 충암고가 거들고 있다. 인권위원회고 금융감독원이고 서울대·검사판이다. 정파와 이념과 무관하다.

한마디로 기득권을 쥐고 흔들고 있는 못난 성골·진골들이다. 고귀하고 똑똑한 자신들이 천하고 무식한 자들을 통치하여 계몽시켜야 한다. 그들의 책무이고 진리다. 그런데 겁대가리없이 사회지도층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대드는 놈들이 있으니 용납할 수 없다. 하물며 천출에 없는 집에서 변변하게 배우지도 못한 자들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김대중이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고, 그나마 가방줄 있던 문재인도 그랬다. 이번엔 공돌이, 그것도 상고도 아닌 검정고시 출신이니 더 말하여 무엇하리. 금수저 체면에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 나부랭이와 말을 섞어야 하다니... 말도 안되는 세상이 되었다. 대굴욕이다. 그런데 이따위 근본없는 자들이 선하고 지혜롭고 유능하니 골칫거리다. 좌파·간첩·빨갱이라 조리돌림을 해도, 짓밟을수록 더 강해져서 일어나니 환장할 노릇이다. 마음만 급해서 뛰다가 그만 제풀에 고꾸라진다.

21세기에 전국 비상계엄이라니... 전시도 아닌데 국회에 완전무장한 군인이 난입하다니... 불법계엄 해제나 반란 수괴 탄핵이 왜그리 힘드나. 판사와 검찰이 엉터리 법해석으로 내란 수괴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법원이 룸싸롱인 줄 착각하고 酒邪질을 했나?). 대법원이 전원합의체에서 이틀 만에 6만쪽을 읽고 파기환송했댄다. 사실관계를 뒤바꿔 대선 직전 야당후보를 지우려는 대법원. 희대稀代의 활극이다. 야당대표는 10만원도 안되는 돈으로 100번 넘게 압수수색하더니, 수백만원짜리 명품가방을 받은 검사 마누라에게는 전화기를 고분고분 압수당하는 검찰. 여야합의가 없어서 헌법재판관 임명을 못하겠다는 대통령과 총리, 김문수 후보를 주저앉히고 한덕수로 바꿔치려고 벌인 주옥같은 협잡의 향연들.

제정신이 아니다. 강호의 도는 사라지고 비열한 아귀다툼만 남았다. 경우가 없어도 이리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여지껏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 어려운 일들을 해낸 자들이 누구인가?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막장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그 잘나고 고귀한 서울대, 하바드, 판검사, 육사 나리들이 벌인 판타지 무용담이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고 상식이고 양심이고 다 내팽개쳤다. 닥치는 대로 짖어대고 물어뜯을 뿐이다.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고상한 척은 다 해온 수구기득권의 본모습이다. 어쩌다 상황이 궁해져서 날것 그대로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화려한 학벌과 말빨로 협박하고 사회를 갉아먹는 양아치들이다. 처참하게 썩어 문드러진 사회의 암종이다.

보수가 아니라 기회주의자다

이들 수구기득권은 보수도 뭐도 아닌 그냥 기회주의다. “합리적 보수”나 “자유 민주주의”나 어불성설이다. 말장난이다. 합리성이 없는 보수나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그저 이들은 밥(잇속)과 앙심(저주나 혐오)을 추종할 뿐이다. 그들만의 무한대 자유(남은 무한대 속박)가 지고지순한 가치다. 특권은 당연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과 의무는 천한 것들의 몫일 뿐. 이것이 자칭 주류들의 합리성이고 자유다. 그때그때 유리한 대로 이 말을 하다가 정반대로 말을 바꾼다. 설명도 이유도 없다. 수치심도 없다. 이런 무한대의 자유가 기득권이 자랑하는 품격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그렇게 저주했던 자들이 이제는 180도로 바뀌어 김대중 정신을 말하고 노무현 정신을 칭송한다. 그들이 죽어줘서(근심거리가 사라졌으니) 진심으로 감사한 것이다. 이재명이 죽으면 감읍하여 밤새 곡을 할 자들이다. 제주 4.3 비극이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라던 김무수가 선거를 앞두고 희생자의 넋을 기린다며 평화공원 찾았다. 아무런 설명도 사과도 없다. 니들 빨갱이들이 죽어줘서 내가 호강하게 생겼으니 고맙다는 뜻인가. 체면이고 뭐고 다 손익 장사다. 대통령 후보를 밤낮으로 갈아엎는 것은 이들에겐 일도 아니다. 김문수가 단일화를 안한다고 사람취급도 안하다가 후보가 되자마자 안색을 바꾸어 굽실거린다. 횡설수설이든 갈지자 행보든 눈치도 염치도 없다. 어차피 서울대·판검사가 결정하면 개떡같은 소리라도 무지렁이들은 당연히 받아들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니 언제나 주변인이다. 강자에 빌붙어 기생해야만 하는 자다. 그러니 미국에 맞서겠다는 노무현이 무모하고, 일본에 강하게 대응하겠다는 문재인이 어처구니없다. 언제나 힘센 놈에게 붙어먹으면서 기득권을 유지한 자들이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게 한없이 가혹하다. 순리이자 진리다. 중국이 쳐들어 오면 사대事大파, 러시아가 차지하면 아라사俄羅斯파, 일본이 점령하면 친일파, 미국이 밀고 오면 종미파로 변신한다. 외계인이 와도 탈바가지라도 먼저 뒤집어 쓸 것이다. 전쟁이 나든 나라가 망하든 상관이 없다. 기득권만 움켜쥘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라를 팔아넘길 자들이다. 일제시대에 나라가 없었으니 국적이 일본인 것은 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미군정시절에는 미국인이고, 정부수립 후에는 “미국인 호소인”이다. 북한이 통일하면 국적이 북한이고, 강도가 들어오면 누구에게나 딸과 마누라를 내어줄 자다. 더이상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누가 주인인들 어떠하리, 나 하나 호의호식하면 그만인 것을... 삶의 지혜인가, 인생 철학인가?

결국은 내 밥그릇과 앙심이다

온실에서 웃자란 화초들은 눈비바람을 맞으며 살아온 야생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 처절한 피와 땀과 눈물을 알지 못한다. 수구기득권에게 이재명만은 절대로 안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 범죄자여서도 아니고, 공짜연애질을 해서도 아니고, 욕쟁이어서도 아니고, 거짓말장이여서도 아니다. 자신들의 철밥통을 빼앗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능력과 지혜와 의지가 있고, 그것을 대중이 간파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재명에게 어설프게 덤볐다가 실력으로 이길 수 없음을 이제서야 안 것이다. 지식이든 일이든 말이든 도저히 상대하기 어렵고 두려운 존재이나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운다. 바위같은 평정심이니 더이상 법공작이나 말공작이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 카드인 암살도 여의치 않다. 대책이 안선다. 돌이켜 보면 지난 해 칼맞은 골치덩이를 빨리 이송한 응급의료헬기를 얼마나 저주했을까(간발의 차이였는데 아깝다).

이재명은 내란에 연루된 수구기득권 동지들을 끝까지 색출하여 악착같이 처단할 것이다. 자주독립국가랍시고 불경스럽게 일본과 미국에 고개를 쳐들 것이다. 불멸의 귀족인 서울대·판검사·육사에게 공평하게 감투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반상을 가리지 않고 능력과 품성에 따라 자리를 줄 것이다. 이런 더러운 세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또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망상에 빠져 기본소득이니 지역화폐니 퍼주면서 서민의 호주머니를 불릴 것이다. 그 결과 빈부격차가 줄어 쌍놈들이 귀족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도한 세상이 될 것이다. 경천동지할 일이다. 더 이상 우리들이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천것들과 마찬가지로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 “개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불을 보듯 뻔한 좌파 독재와 공산 지옥을 어찌 눈뜨고 지켜볼 것인가?

살아남아 준 이재명이 고맙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아 준 이재명이 고맙다. 지난 겨울 그가 칼맞고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차마 결과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저 숨만 붙어있기를 소망했다. 온갖 이간질과 음해와 모함에도 그를 버리지 않고 지켜준 깨어있는 시민들이 고맙다. 추운 겨울밤 비상계엄에 놀라 허겁지겁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과 국회의원들이 고맙다. 부당한 명령을 회피하거나 거부하여 국민을 지킨 장병들이 고맙다. 눈쌓인 한남동 거리에서 은박담요를 뒤집어 쓰고 밤새워 영장집행을 촉구한 “키세스 우주전사”들이 눈물나게 고맙다. 다 이재명의 얼굴이다.

소정 선생님은 “권력의 남용 하에서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사람만이 평화를 만든다”(1980: 365)고 했다. 그런 사람들만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대안이 된다. 이재명은 참혹한 고난을 참고 인내하며 극복한 자다. 잇속을 쫓아 날뛰는 기회주의자들의 유혹과 공격을 맨몸으로 견디어 온 자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지만 끝끝내 국민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재명이 김대중이고, 노무현이고, 문재인이다. 천출이라 수없이 구박받고, 짓밟히고, 매맞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서럽고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수백 수천 번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새싹처럼 고개를 드시라. 나무처럼 일어서서 물처럼 흐르고 꽃처럼 피우시라. 이제 간절하게 품었던 뜻을 마음껏 펼쳐 보시라.

 

인용: 박헌명. 2025. 왜 이재명은 절대 안된다는 것인가? <최소주의행정학> 10(5): 1-2.

마치 밤안개가 자욱한 절벽 위에 비를 맞고 서있는 느낌이다. 칠흑같은 어둠이 깔려있다. 당장 비라도 피해야 할 텐데 조금이라도 발을 헛딛는다면 천길 아래도 떨어질 판이다. 밤이슬같은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매일매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내란 수괴는 파면되었지만 감옥에서 빠져나와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추종자들은 좀비처럼 몰려다니며 패악질을 저지른다. 이제와서 잇속이 어그러지니 자기들끼리 물고 뜯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사주와 점괘로 이어온 “김여사” 정권의 “신빨”은 계속되는가.

파렴치한 법기술자들과 관기술자들

한덕수가 기어코 법안 거부권을 행사하고 대선출마를 감행할 태세다. 친위반란 정권에서 호의호식한 총리가 죄를 청하고 자숙하기는 커녕 이 무슨 망발인가. 선거를 관리하는 자가 갑자기 선수로 뛰겠다니... 위헌이라는데도 대통령 몫인 헌법재판관 후보는 콩궈먹듯이 지명하더니 내란을 조사할 상설특검 후보는 넉 달 넘게 뭉개고 있다. 다음 정권으로 미루라는 무역협상도 미국 입맛대로 퍼주고 자화자찬할 기세다. 헌법이든 뭐든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기필코 하는 청개구리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심보다. 파렴치한의 마지막 발악이다.

한덕수든 최상목이든 구렁이 담넘어가듯 공공기관에 알박기를 하고 있다. 국방부도 법부부도 슬그머니 대못을 박아놓고 모른 체한다. 자료제출도 답변도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하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가 없다. 분명하게 가부를 밝히지 않는다. 황당한 핑계나 장황한 사설을 동문서답으로 늘어놓는다. 자신의 업무도 숙지하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자, 아예 모른다며 배째라는 자, 기분나쁘다고 국회의원에게 대드는 자... 5.18에 북한군이 내려왔는지 자신은 (직접 보지 못했으니) 모른다고 버티는 박선영... 정녕 이런 자들이 백성을 대신하여 공무를 수행하는 머슴인가.

내란수괴 체포를 방해한 김성훈 경호차장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검찰, 딸 인질극을 벌여 조국을 감옥에 쳐넣었지만 총장 딸에게는 한없이 착한 검사들, 위기를 직감했는지 문재인을 기소하고 명태균을 곱게 모시는 검찰. 윤석열과 김명신을 압수수색하지만 여전히 딴 곳(건진·명태균)을 쳐다보는 검사들, 내란수괴를 풀어주는 데 공조한 지귀연과 심우정, 국민과 무관한 일인 것처럼 친위반란 재판을 공개하지 않는 판사와 검사... 호떡집에 불난 듯 서둘던 대법원은 이재명 상고심을 내달 1일 선고하겠댄다.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전례없는 속도다. 나경원의 “빠루사건”은 왜 6년째 뭉개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짧은 선거기간은 물론이고 선거일에도 굳이 이재명 재판만은 강행하겠다는 판사들의 비장함이여. 대체 그가 무엇이길래 이리 호들갑인가. 만인을 위한 법이 아니라 그들만의 “밥”이고 선량들의 양심이 아니라 악당들의 “앙심”이다. 내란세력들은 이성과 상식을 잃은지 오래다. 모두 법과 도덕에서 자유롭다는 자기최면을 걸고 설치는 파렴치한들이다. 좀비처럼 날뛰고 있는 수구기득권 패거리들이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 친일종미세력의 숙원宿願이 목전에 있다.

비루하고 무책임한 군기술자들의 궁상

인사권자가 멀쩡하지 않은 탓이다. 관료제을 알고 인재를 알아보는 민주주의자를 뽑지 못한 후과後果다. 무당질과 협잡질로 대중을 속인 무식한 건달에게 삽과 낫을 쥐어준 죄다. 人事가 萬事라 했는데, 亡事가 되었으니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절대 안될 자들만 골라서 완장을 채워주었다. 유능하고 책임지는 자를 내몰고 무능하고 하자있고 말잘듣는 꼭두각시를 자리에 앉힌 것이다. 장차관 그 누구도 위헌이 명백한 비상계엄을 거부하거나 막지 않았다. 협조하거나 방조하다가 이제는 말을 바꾸고 흔적을 지우고 있다. 매사에 무성의하고 무책임하다. 거수경례도 제대로 못하고 “부대쉬어” 한마디를 감당할 수 없는 통수권자 수준 그대로다.

B급도 안되는 자들이 신선놀음하다 민생을 파탄낸 것처럼 웬만해서는 실패하기 어렵다는 친위반란도 말아먹었다. 김용현·신원식(국방장관, 안보실장), 김명수(합참의장), 이진우(육군참모총장, 계엄사령관), 여인형(방첩사령관), 문상호(정보사령관), 정진팔(합참차장), 박종준·김성훈(경호처), 조지호(경찰청장), 김봉식(서울경찰청장), 그리고 노상원(전 정보사령관). 맞든 틀리든 명령에 맹종해야 한다는 자들. 불법계엄인줄을 알고도 저항할 배짱도 없는 장성들. 부하들을 속여 사지에 몰아놓고도 책임지기는 커녕 떠넘기기에 바쁜 상관들. 계급장을 달고도 거짓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177개 똥별들. 이등병만도 못한 존재들. 김용현은 계엄당일 “이 시간 이후의 모든 군사활동은 장관이 책임진다. 공이 있다면 여러분의 몫이고...”라고 말했지만, 비열한 식언食言이었다.

반면 곽종근 특전사령관과 이상현 1공수특전여단장은 윤석열이 국회의원 체포를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조성현 대령(수방사 1경비단장)은 부당한 명령으로 판단하고 부하들을 국회에 진입시키지 않았고, 김문상 대령(수방사 작전처장)은 특전사의 헬기진입을 지연시켰다. 그 밖에 안효영 대령(1공수특전여단 작전참모), 권영환 대령(합참 계엄과장), 나승민 대령(방첩사령부 신원보안실장), 김영권 대령(특전사 방첩부대장), 윤비나 대령(방첩사 법무실장), 구민회 중령 (방첩사 수사조정과장), 김형기 중령(특전사 1특전대대장) 등은 사실을 담담하게 밝혔다. 지휘관으로서 장교로서 상황과 임무를 냉철하게 판단하여 부하를 지켰고 국민을 지켜냈다. 단순한 총칼잡이가 아니라 조직을 알고 인간을 아는 무관의 전형이다. 무책임한 조태용(안보실장·국정원장)과는 달리 당당하게 진실을 말하고 조직을 구해낸 홍장원(국정원 1차장)의 모습이다.

김여사 정권의 친위반란은 누가 이 나라를 좀먹는 주적인지, 누가 나라를 지켜냈는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공직자는 인간을 아는 사람이어야지 한낱 기술자여서는 안된다”(2008: 452). 그런 사람들이 法기술자, 官기술자, 軍기술자의 난동을 제압한 것이다.

 

인용: 박헌명. 2025. 파렴치한 법기술자, 관기술자, 군기술자. <최소주의행정학> 10(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