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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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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단잠을 잤다. 며칠째 겨울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렸다. 답답한 마음으로 전전반측했던 차였다. 아침에 연구실에 나와서 컴퓨터를 켜고 잠시 멍했다. 비상계엄이라니... 벌써 국회에서 계엄해제를 의결한 상황이었다. 지난 밤에 많은 일이 있었구나... 놀라움에 이어 노여움이 솟는다. 부창부수 개그였나? 이제 헛웃음이 나온다. 개념없이 막나가던 “김여사” 정권이 기어이 사고를 쳤다. 이렇게도 고마울 수가 있을까...

"김여사"의 자살같은 자살골

윤석열은 3일 밤 10시 20분경 긴급담화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한마디로 국민을 약탈하는 범죄자·종북·반국가 세력의 소굴인 국회를 소탕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합참의장이 아니라) 밤 11시 30분경 다음과 같은 비상계엄포고령을 내렸다.

"자유대한민국 내부에 암약하고 있는 반국가세력의 대한민국 체제전복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2024년 12월 3일 23:00부로 대한민국 전역에 다음 사항을 포고합니다.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분위기로 치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절로 되돌아갔다. 케케묵은 멸공반공에 신물나는 빨갱이칠이다. 내용은 엉망진창이다. 왜 거기서 예산이 나오고 전공의가 나온단 말인가. 계엄 요건과 무관하다. 왜 국회 활동을 금지하는가. 계엄 한계를 넘었다. 표현으로 치면 천박하다. 포고령 위반자는 처단處斷한다니 대체 이 무슨 망발인가? 처단의 뜻은 알고나 있는지... 코흘리개 이승복의 낙서장인가? 단순·무식·과격한 “김여사” 본색이다.

민주당은 곧바로 국회 본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자정 넘어 계엄군이 국회에 진입했고 유리창을 깨고 본청으로 들어왔다. 국회의장을 비롯한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 본회의장에 집결했고 4일 1시경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켰다. 계엄군이 바로 철수했고, 시간을 끌며 머뭇거리던 윤석열은 4시 30분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를 통해 비상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깨어있는 시민이 멈춰세운 반란

6시간에 걸친 친위반란(self coup d’État)은 이렇게 진압되었다. 21세기에 계엄령이라니 다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적과 교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행정과 사법이 불가능한 상황도 아닌데 비상계엄이라니 뜬금없다. 가깝게 지내는 미국인도 대만인도 놀랍다며 관심을 보였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에서 군사정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것이다. 눈떠보니 후진국이 된 느낌이랄까?

하지만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두시간 반만에 국회에서 계엄해제를 의결해서 상황을 종료시킨 사실이 더 놀랍다. 대만인 교수는 시민들이 한걸음에 국회로 달려가 중무장한 계엄군을 맨몸으로 맞서는 장면에 감동했다. 자정이 넘은 새벽에 그 짧은 시간 내에 수천 명의 시민이 몰려왔다는 사실에 미국인 교수는 경악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촉즉발 위기에서 실랑이를 벌였지만 단 1명의 사상자도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야간투시경까지 장착한 계엄군의 총구를 잡고 “부끄럽지 않냐”며 호통친 여성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단군이 하늘을 연 이래로 백성이 지켜온 나라의 실체다. 왕이 도망가고, 관료들이 숨고, 관군이 사라져도 피땀을 뿌려 나라를 지킨 것은 언제나 백성이었다. 거란과의 전쟁 때도, 임진왜란 때도, 병자호란 때도, 을사늑약 때도 그랬다. 나라의 주인이 백성이라는 것은 교과서에 적혀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 삶에 숨쉬고 있는 진리다. 비상계엄 소식을 듣고 여의도로 달려온 남녀노소, 땅바닥에 엎드리고 국회의원을 끌고 밀고 한 이름없는 시민들, 본회의장을 사수하기 위해 대열을 지킨 보좌진들, 놀란 마음을 쓸며 밤을 지새운 시민들 모두 이 나라의 주인이다. 그 마음이 아름답고 고맙고 자랑스럽다. 권력과 총구만 믿고 설쳤던 “김여사” 정권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대목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김여사"

윤석열 일당이 비상계엄을 밀어붙인 이유와 과정을 두고 벌써부터 설왕설래다.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은 우원식, 이재명, 한동훈, 박찬대, 김민석, 정청래, 조국, 김어준이 제거대상이었다고 자백했다. 계엄 주체와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공익도 국익도 없는 사리사욕의 분풀이다. 이성도 상식도 없는 제멋대로의 발광發狂이다.

그들이 비상계엄을 얼마나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얼마나 광범위하게 계획했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계엄군이 그들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완전무장으로 투입되었지만 명령을 회피하거나 지연시켰다. 전두환의 5.18과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계급장이 깡패”이고 “까라면 까”라는 쌍팔년도에 머물러 있다. 명령을 내리면 하급자는 무조건 따라야 하고 실제로 명령이 집행된다는 정신줄이다. 착각이다. 권위과 명령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상급자의 명령은 자동으로 집행되지 않는다. 하급자가 의심없이 받아들일 때 권위있는 명령으로 수용되고 실행된다. 상급자가 평소 법규를 준수하고 모범을 보여 하급자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김여사 정권은 통수권자라는 지위만 믿고 권위를 살피지 못했다. 느닷없이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긴다면서 국방부를 내쫓았다. 충직하고 유능한 장관과 지휘관을 쓰지 않았다. 충암파를 요직에 앉혀 분란을 자초했다. 해병대원 사망사건을 뭉갰다. 현역은 물론 예비역까지 모욕감을 주고 분노케 했다. 영令이 서지 않는 군대를 만들어 놓았다. 군기강이 무너진 것이다.

하물며 전시도 아닌데 야당이 맘에 안든다고 비상계엄을 한다니 21세기 장병들에게 먹힐 까닭이 없다. 이해할 수도 없고, 군대의 목적과 불일치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부합하지 않는 명령이다.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무력을 행사하여 국회를 마비시키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5.18과 6월 항쟁에서 배운 세대다. 이미 국민이 등돌린 식물 통수권자를 위해 지옥같은 고통과 낙인을 평생 떠안을 얼간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이없는 시대착오다.

"김여사" 정권의 자폭이 고맙다

그렇찮아도 제정신이 아닌 “김여사” 정권이 어찌 무너지나 궁금했다. 그냥 물러날 자들이 아니니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말리라 짐작은 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면 너무 박한가? 결국은 분을 이기지 못한 광자狂者의 허무한 자폭이었다. 20년 가까이 철권을 휘두른 박정희가 심복의 총에 맞고 나자빠진 그 허탈함일까?

참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다. 조상님의 은덕이다. 김여사의 패악질로 누가 이 나라를 갉아먹어온 존재인지 이제 명징明徵해졌다. 과연 구국의 결단이다. 박근혜와 더불어 21세기 대한민국 민주화의 정화精華로 우뚝 섰다. 김여사 정권의 생뚱맞은 반란을 격하게 환영한다. 

 

인용: 박헌명. 2024. 김여사 정권의 친위 반란을 환영한다. <최소주의행정학> 9(12): 2.

얼마 전 아파트 두레기(승강기)에 시뻘건 글씨가 적힌 인쇄물이 붙었다. 두서도 없이 1, 2, 3... 으로 적고 밑에다 손글씨로 이름 석자를 갈겨썼다. 주소도 연락처도 없다. 떼면 재물손괴로 처벌받을 수 있다면서 으름장이다. 맥락도 없고, 문장도 형편없다. 배배꼬인 심술만 덕지덕지 붙어있다. 한마디로 “나 승질나써, 재 시러”였다. 사실여부는 따지기도 싫다. 짖궂은 낙서가 아니라 막돼먹은 악당이 사람들이 오가는 담장에 똥칠을 해놓고 튄 것이다.

토착왜구들의 아무말과 어거지

이런 악당은 차라리 귀엽다. 주변국의 지도자들을 보라. 트럼프, 푸틴, 시진핑, 아베... 제왕(대통령) 놀이에 푹 빠져있는 김명신, 숙취인듯 반국가세력을 운운하는 윤석열, 그들이 임명한 장차관들... 국회의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은 공직자들. 국가안보와 수사를 들먹이며 자료제출과 답변을 거부하는 공복들.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자들. 국회의원을 윽박지르고 뒤에서 낄낄대는 자들. 차마 친일을 부정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동문서답하는 자들. 임사단장은 똥별이 되었고 방통위는 빵통위가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양지만 쫓는 기회주의자의 고백이다. 신념을 팔아먹은 자들의 과시용 간증이다. 일제 강점기에 모두가 일본국적이었다(사람취급도 못받았다), 일제의 곡물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었다(원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덕에 근대화를 이루었다(일제를 위한 일이었다), 광복이 아니라 건국이다(개천절이 건국절이다). 천황폐하의 항복을 의미하는 광복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안중근과 김구는 황은皇恩을 배신한 반역도이자 테러리스트이다. 오매불망 끗발있는 일본인이 되고 싶었고, 황민皇民으로서 당연히 곡물과 군수물자를 바친 것이고, 황군皇軍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남의 자식들을 징용으로 성노예로 보냈을 뿐이다...

또 상해임시정부는 국민, 영토, 주권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정부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감히 대일본제국에 맞선 불경스런 집단아닌가. 이런 식이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쓸어버리지 못했고, 헌법에 나와 있는 한반도를 영토로 확보하지 못했고, 북한 인권을 들먹이면서도 주석궁을 압수수색조차 못하고, 작전통제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자존自存과 자존自尊으로 살아가는 국민, 온전한 영토, 멀쩡한 주권을 갖추지 못했으니 국가라 할 수 있는가? 입에서 나왔다고 다 말이 아니다. 도대체 누가 어디서 이런 기라성같은 토착왜구들을 발굴했는지... 뼛속까지 왜놈 본색인 기회주의자들을...

교양있는 대화와 논쟁으로 대적하라

지난 8월 21일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오프라 윈프리(Oprah G. Winfrey)가 등장하였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대화쇼(talkshow) 달인으로 성공한 흑인여성이다. 나는 윈프리의 지지연설을 듣고 무릎을 쳤다. “We know all the old tricks and tropes that are designed to distract us from what actually matters, but ... and they require adult conversation. ... because civilized debate is vital to democracy...” 철지난 속임수와 말공작이 우리들을 문제의 핵심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한다. 필요한 것은 성숙한 어른다운 대화다. (야만스런 말싸움이 아닌) 교양있는 논쟁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토착왜구들의 배설에 가까운 궤변과 막말이 “old tricks and trops”이다. 종북, 주사파, 공산주의, 반국가세력 등 끝간데없는 빨갱이칠이다. “흘러간 주문呪文”도 신물이 날 지경인데, 한물 간 자들이 돌아와 철지난 사술邪術을 부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 선조들의 국적이 일본인 것을 몰랐냐고 당당하게 훈계하는 변절자,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는 국가안보 책임자. 어떻게든 천황의 황민으로 승천하려는 왜구의 발악질이다.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법제사법위원회와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벌어진 딴죽걸기를 보라. 쟁점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건다.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도록 난장판을 만든다. 성숙한 대화와 논쟁을 저지하는 육탄방어다.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따져보려는 의욕마저 무참하게 꺾는다. 청중들은 악다구니같은 횡설수설에 어질어질하다가 분별력이 흐려진다. 듣기도 쳐다보기도 싫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자포자기한다. 감언이설에 통달한 기회주의자들에게 유리한 판이 된다. 공작이 성공하는 순간이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자가 장관이 되고, 환경을 보호할 의지가 없는 자가 환경부를 지휘하고, 방송통신에 문외한인 검사가 방통위를 맡고, 임시정부와 광복이 탐탁찮은 자가 독립기념관장이 된다. 조직은 방향감각을 잃고 유인체계가 뒤집힌다. 지향이 다르니 하는 일마다 엉뚱하고 황당하다. 일을 모르니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다. 소신있게 일하는 자는 좌천이고 말만 잘듣는 자는 영전이다. 근본없는 낙하산이나 앞잡이가 완장을 차고 설친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다. 하지만 책임지는 자는 없다. 관료제가 급속도로 와해된다. 토착왜구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적들의 난동에 맞서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윈프리는 또 힘주어 말했다. “[T]he work is not done, the work will never be done because freedom isn’t free... It requires commitment. ... every now and then it requires standing up to life’s bullies.”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따라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여정은 끝나지 않았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언제나 인생 최대의 악당들과 당당히 맞서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시민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찾아내서 수정해야 하는 과정과 절차일 뿐이다. 민주주의 적들은 호시탐탐 빈틈을 노리고 있다. 이들의 난동에 맞서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적들의 요설에 흥분하면 안된다. 말폭력으로 맞대응하면 말려드는 것이다. 정신줄을 잡고 참아야 한다. 차분하게 사실과 논리로 말하고, 성숙한 토론으로 적들을 제압해야 한다. 아무말과 어거지가 난무하는 판에 강유정, 김영환, 이소영, 이해민, 임광현, 임미애, 최기상의 이성과 상식이 대안이 되길 바란다.

 

인용: 박헌명. 2024. 토착왜구들의 난동과 교양있는 논쟁. <최소주의행정학> 9(10): 1.

더불어민주당의 총선 공천이 21대 당선자 전체의 45%, 지역구 의원의 39%(163명 중 64명) 교체로 끝났다. 공천을 둘러싼 잡음은 여느 선거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여당 뿐만 아니라 공천을 받지 못한 자들은 “친명횡재 반명횡사”라는 주문을 외고 있다. 매일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측근공천, 특혜공천, 방탄공천, 멸문공천이라고 헐뜯고 있다. 그러면서 현역 다수와 용산파가 자리를 꿰찬 여당은 매끄러운 공천으로 찬양하기 바쁘다.

흙수저 이재명이어서 할 수 있는 공천

수년 째 이어지고 있는 이재명에 대한 수사로 측근 대부분이 구속되어 있는 마당에 무슨 측근공천이고 특혜공천이란 말인가? 이씨가 인재영입위원장으로 영입한 후보나 경선에서 이긴 후보는 당연히 “친명”이고 탈당이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는 “반명”이어야 한다는 어거지다. 평생 비주류로 살아온 이씨에게 밀려난 무능한 주류의 비루함이다. 비명, 친문, 주류가 학살되었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고민정 윤건영 이인영은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선출직 평가 하위 10%나 20% 성적표를 받은 자들의 심정은 이해하나 당원과 당직자, 지역주민, 동료 의원이 평가한 결과를 당대표가 어떻게 마음대로 조작했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 공천의 핵심은 현역 물갈이였다. 정치 신인과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고, 현역 의원에게 당원 50%가 포함된 경선을 요구했다. 평가 하위 20%까지 최대 30%까지 감산하고, 중도사퇴, 탈당, 징계 등에도 25%까지 감산하였다. 한마디로 당원의 기대치에 맞게 처신하고, 말하고, 행동한 후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규칙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당대표 문재인, 위원장 김상곤, 위원 조국)에서 제안하여 정착된 것이다. 당원, 동료 의원, 일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여 공천하겠다는 의지다. 다선이든 현역이든, 수박이든 호박인든 공정한 평가에 따라 정당의 추천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유권자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머슴을 퇴출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상식이다.

하지만 이런 원칙과 상식을 실제 현실에서 적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관행을 깨뜨리는 일이기에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민주당은 정치라는 이름으로 원칙과 상식을 적당히 뭉개고 유권자들을 좌절시켰다. 김종인(2016), 추미애(2016-2018), 이해찬(2018-2020), 이낙연(2020-2021) 모두 공천 규칙을 온전히 적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재명이 일을 냈다. 우직하게 참고 견디며 원칙과 상식을 지켜냈다. 흔들림없이 공천 규칙과 절차를 밀어붙였다. 어쩌면 그가 금수저가 아니어서 가능했는지 모른다. 꽃이 아닌 들풀이어서 학연 지연 혈연에 빚을 지지 않은 그였다. 맨몸으로, 피땀으로 갈고 닦은 재능과 겸허함과 부지런함으로 당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덧 김대중과 노무현이 되었다. 사실 당내외 수구 기득권 세력들이 이씨에게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다. 언론 대들보에 이씨를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몽둥이질을 해댔다. 이씨는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았다. 무차별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버텨냈다. 이씨가 멋대로 만든 공천 제도가 아니었지만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외마디없이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했다. 처절하게 피눈물을 흘려 본 흙수저의 집념이다. 기득권을 누려온 자들은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원칙과 상식의 무서움이다.

정치효능감을 각성시킨 민주당 공천

이번 민주당 공천에서 혼선도 있고 미흡한 점도 있었지만 어정쩡한 타협도 없이 규칙과 절차에 충실한 공천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당원들의 기대에 반하는 언행을 보였던 자들이 당원들의 표로 응징당했다는 점이다. 당원과 지역 주민들이 공천 제도에서 정치 효능감(political efficacy)을 체감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긴가 민가하다가 철옹성같던 현역들이 경선에서 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유권자들이 각성한 것이다. 다선 현역인 박용진이 지역구 경선에서 두 번이나 패한 것은 상징적이다. 이재명이 박씨를 싫어하든 말든 깨어난 유권자들이 몰려가 가감산없이 박용진을 끌어내렸다. 후보들에게는 등골이 오싹한 일이다. 친명이나 반명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유권자들의 뜻에 부응했느냐를 물을 뿐이다. 이것이 제도에 의한 공천이다. 가히 공천 혁명이라 할만 하다.

이제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으려면 당원과 시민들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여의도 짬밥이나 당대표와의 친분은 차라리 흠결이다. 당원과 민심이 가리키는 대로 “측근공천”이나 “방탄국회”가 아니라 “용산공천”과 “방탄대통령”으로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사법리스크”가 아니라 “검찰쿠데타”에 맞서야 한다. 의정활동 뿐만 아니라 지역구 관리도 게을리할 수 없다. 막말, 음주운전, 부동산 투기 등으로 유권자들을 화나게 해서는 안된다. 성골이든 진골이든 두품頭品이든 유권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뭐가 문제인가

이대표는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니라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했다. 민주당을 사당화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시비거는 말이다. 그러면 바이든 행정부(Biden Administration)는 뭐란 말인가? 바이든이 대통령으로서 이끄는 행정부가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이재명이 당대표로서 규정과 절차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한심한 소리다. 자신이 당대표를 하면 민주주의고, 남이 하면 “친문패거리”와 “친명독재”인가? 문재인이, 이재명이 물러나면 선거에서 승리하나? 그 다음은 누구인가? 적이 만만하게 생각하는 자들만 남아서 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꽃길만을 걸어온 정통 주류들은 천출 비주류인 이씨에게 허무하게 밀려난 현실을 부정하고 저주를 질투처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왜 8할의 당원들이 이씨에게 지지를 몰아줬는지를 곱씹어봐야 했다. 싸움에서 졌으면 깨끗하게 승복할 일이었다. 월등한 실력 차이를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소인배들은 당원들의 뜻을 외면하고, 돌아서서 딴소리를 하고, 동지의 뒷통수를 갈겼다. 찌질이 패배자의 지지리 궁상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모습이다.

참고문헌

박헌명. 2024. 친명횡재도 비명횡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주의행정학> 9(2): 1.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4. 흙수저 이재명의 공천이 무서운 이유. <최소주의행정학> 9(3): 1.

 

민주당 김종민, 이원욱, 조응천이 지난 1월 10일 탈당을 결행했다. 윤영찬과 함께 이른바 “원칙과 상식”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당지도부를 흔들어왔다. 탈당의 변으로 윤석열 정권을 심판해야 하는데, 사당화된 이재명 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양심상 비정상 정치에 더이상 끌려다닐 수 없다고 했다. 제 3지대 세력을 모아 비장한 뜻을 펼치겠다는 계획이다. 이튿날 이낙연도 “마음의 집”이었던 민주당이 방탄정당이 되었다며 떠났다.

그들의 행보가 모든 것을 말한다

수구세력은 민주당 공천을 두고 이른바 친명횡재(橫財) 반명횡사(橫死)라는 낙인을 찍었다. 공천을 받지 못한 자들도 적의 언어로 분풀이를 하고 있다. 실망하고 분노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나친 언사다. 이재명을 연산군이나 나찌에 빗대어 비난하기도 했다. 설훈은 선거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도소에 가지 않을까만을 궁리하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남탓은 핑계는 많지만 근거도 논리도 없다. 그들의 행보는 그들의 본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먼저 당의 입장이나 의원평가나 경선결과에 승복하는 경우다. 대다수가 여기에 포함된다. 우상호는 이미 불출마를 선언했고, 인재근(2월 14일)은 당의 결정을 받아들여 마음을 접었다. 하위 20%에 속한 박광온은 3월 6일 경선에서 탈락했지만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하기로 했다.

한편 당을 떠나지는 않지만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고민정은 단수공천을 받았으나 공천과정에 문제를 제기하고 최고위원직을 내던졌다. 정계은퇴를 번복한 임종석은 규정에 따라 전략공천지역이 된 중·성동에 출마한다고 고집을 피우다 3월 4일 무력시위를 접었다. 노웅래(마포)는 2월 22일 경선에서 배제된 뒤 당대표실에서 며칠 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윤영찬(3월 6일)과 박용진(3월 11일)은 하위 10% 불이익을 감수하고 경선에 참여했다가 패했다. 박씨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재심을 신청했다. 이들의 행보가 대체 당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선당후사와 거리가 멀다.

이수진(2월 22일), 전병헌(1월 25일), 홍영표(2월 29일)는 경선에서 배제되어 탈당했다. 4선 설훈은 2월 28일 하위 10% 성적을 받고 분개하여 탈당했다. 4선 김영주 역시 2월 19일 하위 20% 점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장관까지 역임한 현직 국회부의장 아닌가. 김씨는 3월 1일 기어코 탈당하고 4일 여당에 입당하여 5일 같은 곳(영등포)에 공천을 받았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어질어질하고 구역질이 난다. 지난 해 12월 3일 탈당하고 2월 17일 여당에서 같은 지역구(유성)에 공천을 따낸 이상민보다 더 극적이다. 전혜숙(광진)은 3월 11일 경선에서 패배하고 탈당하였다. 당의 후광으로 누릴 것은 다 누린 자들이... “수박”이라는 비아냥은 차라리 호사스럽다.

친명횡재도 비명횡사도 아니다

민주당 안팎에서 친명과 반명을 가르고, 싸움을 부추기고, 치고 박고 하는 꼴을 즐기는 자들이 있다. 매일매일 생중계를 하고 있는 신문과 방송을 보노라면 이재명은 제멋대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폭군이 되어 있다. 어리석은 당원들을 포섭하여 공당을 사유화한 파렴치한이고, 선거는 포기하고 당권강화와 방탄막이에 몰두하는 무책임한이다. 하지만 굴러들어온 돌이 당원 8할의 지지를 홀려내 박힌 돌을 빼냈다면 탁월한 재능아닌가? 지리멸렬한 정적을 없애고 선거를 망쳐서 독재자가 얻는 이득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선거에서 패하면 감옥도 안가고 재판에서 무죄받나?

“패권,” “팬덤,” “방탄,” “사천...” 수구세력의 교묘한 말공작이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다수의 지지를 받아 당대표가 되었고 정당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무슨 패권인가? 이대표가 법이나 규정을 위반하거나 심각한 비위를 저지른 적이 있는가? 비회기중에 영장을 청구하면 될 일을 검찰이 구태여 회기중에 체포동의안을 제출한 것인데 무슨 방탄인가? 검찰이 2년 넘게 탈탈 털었어도 1원 한푼이라도 찾아냈는가? 또 친노·친문하면서 왜 친이가 아닌 친명인가? 없이 자랐고 험하게 살아온 자에겐 성씨도 아까운가? 성골·진골이 아닌 천출이어서 무슨 짓을 해도 재수없다는 것 아닌가.

친명횡재나 비명횡사는 말장난일 뿐이다. 비루한 핑계질이다. 이씨와 당사자도 모르는 친명이나 비명이라니... “이재명의 입”이라던 김의겸은 반명이라 경선에서 횡사했나? 윤건영과 박범계는 친명이라 횡재했나? 횡橫이란 정상이 아닌 뜻밖에 벌어졌다는 뜻인데, 무슨 횡재며 무슨 횡사란 말인가? 다 뿌린 대로 거두고 있을 뿐이다. 모두 “게임의 규칙”을 잘 아는 상황(체포동의안 표결후 평가가 예정되어 있다는)에서 벌인 일이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당원과 주민들의 여망을 외면하고 당의 방침을 거스르고 자신의 잇속을 챙겼으면서 높은 점수를 기대했다면 경우없는 짓이다. 아직도 점수와 무관하게 “현역 프리미엄”을 누리면서 당총재를 구워삶거나 윽박지르면 그만인 시절을 살고 있는가?

인과응보요 자업자득이다

경선에서 배제당하고, 낮은 평가를 받고, 경선에서 패하고 반발하는 이들은 이재명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친명”이 아니라서, 당대표를 비판해서, 체포동의안에 찬성해서 보복을 당했다는 얘기다.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당대표가 15%를 결정하는 여당과 달리 의정·기여·공약·지역으로 나누어 동료의원, 보좌관, 당직자, 당원, 지역 주민이 평가한 결과를 어떻게 이재명이 주물렀다는 것인지... 확실한 것은 김상곤 시절에 정한 평가기준과 절차를 예외없이 적용한 결과라는 점이다. 현역이든 아니든 평가 주체들이 원하는 언행을 했는가를 따졌을 뿐이다. 원칙이고 상식이다.

공천과정에서 난동을 피운 자들을 되새겨 본다. 아깝다거나 억울하겠다는 자를 떠올릴 수 없으니 잘된 공천이다. 당의 절차와 결정을 무시하고 떼쓰기를 시연한 임종석의 철딱서니라니... 부디 억울해 하지 말라. 유권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받은 냉혹한 성적표일 뿐이다. 다선이든 현역이든 문희상 아들이든 마찬가지다. 특혜도 횡재도 횡사도 아니다. 인과응보요 자업자득이다.

 

인용: 박헌명. 2024. 친명횡재도 비명횡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주의행정학> 9(2): 1.

지난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수구기득권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우한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정부가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지 못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사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문정권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염치가 없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자 우격다짐이다.

세계 각국에서 문정부가 전염병 대처를 잘 했다며 이른바 “K방역”을 칭찬했다. 빠르고 정확성이 높은 한국산 바이러스진단도구를 구해가려고 안달이다. 잘 축적된 바이러스관련 정보와 방역 경험을 탐내고 있다. 수구세력들은 마지못해 정부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의료인과 국민이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둘러댔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다. 그렇다면 방역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는 의료인이 형편없고 국민이 못났다는 소리인가?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날숨같은 궤변이다.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입대한 위관장교가 상관인 영관장교의 제안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단기복무를 하는 비전투 병과 장교였다. 그 상관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지만 무단으로 논문을 군사관련 학술지에 보냈고, 심사절차를 거쳐 출판하게 되었다. 단독저자였고, 상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흉계를 까맣게 몰랐던 부하장교는 최소한 자신이 공동저자로 올라 있어야 했다며 분개했다. 출판을 기념한 회식자리에서 영관장교는 부하장교의 원망어린 시선과 떨떠름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럼, 이순신이 직접 왜적을 다 죽였나?”

명량해전에서 직접 왜적을 죽인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인데, 왜 이순신에게 공이 돌아갔는가에 대한 그의 자문자답이다. 이순신이 망치를 들고 거북선을 만들거나 팔을 걷고 노를 젓지 않았을 것이다.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어 적진에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칼을 담금질하고 벼림질하여 왜적을 베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순신을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억할 뿐 그 부하들의 공적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설교에 가까운 영관장교의 요설에 다들 멍하니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뒤 얼굴을 찌뿌리며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어거지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탁월한 무예와 치밀한 작전능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애민애족과 공명정대에 기반한 지도력이 부하들과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모이게 했고 뭉치게 했다. 개인역량과 무기보다도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그 지도력이 전쟁에서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원균은 똑같은 지위(삼도수군통제사)에서 같은 장비와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했지만 처참하게 패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 세 척 모두와 판옥선 140여 척을 잃었다(이순신은 무너진 몸이었지만 거북선 없이도 남은 판옥선 12척으로 명량해전을 이끌었다). 원균의 무술실력과 군사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가 직접 화살을 쏘거나 칼을 들고 전진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래도 원균은 인력과 장비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감히 이순신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다. 그냥 “날로 먹은” 영관장교의 요설이 사람들을 화나게 한 까닭이다.

시민의 좋은 행동을 문정부가 투영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지만 한국의 전염병 방역은 모범사례를 손꼽히고 있다. 정부당국은 과감하고 발빠르게 대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유전자증폭(RT-PCR) 검사법을 개발하여 업계가 진단키트를 양산하도록 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은 악조건에서도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천지나 이태원 같은 돌발변수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적극 협력했다.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H1N1)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같은 공무원, 같은 의료진, 같은 국민인데, 문재인 정부는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권과 이토록 천양지차天壤之差인가?

문정부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촛불혁명과 지난 해 한일 무역분쟁을 거치면서 깨어난 민의에 귀기울였다. 코로나19 현황을 보고하는데 머물지 않고 방송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했다. 박근혜정권의 청와대가 재난관리 책임을 회피하고 MERS 환자가 발생한 병원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신속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시민들의 협조를 구했고 시민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고 했다. SARS 방역에 성공하고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설립한 노무현 정부처럼 문재인 정부도 돈과 집권자가 아니라 사람과 시민이 기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문대통령은 관료제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전염병 방역을 독려했다. 청와대가 국가재난으로 인식하고 법에 따라 대처했지만, 위계질서로 찍어눌러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정치가 아닌 과학 영역인 만큼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문대통령은 박근혜정권에서 부당하게 멍에를 쓴 정은경씨를 일찌감치 질병관리본부장으로 발탁했다. 전문성도 없으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공식회의에서 그저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직원들이 맥빠지지 말고 힘내라고 홍삼액을 보냈다. 지금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사태수습을 주관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총리를 포함한 관료들과 지자체장들은 매일매일 정본부장의 입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대통령은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조정하고 지원하고 격려했다. 정적들의 무차별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정도를 걸었다.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면 이성과 원칙에 철저한 상식인이라는 점이다. 달변이 아닌 문대통령과 정본부장에게서 진심과 신뢰가 묻어난다. 트럼프나 아베가 지금 청와대에 없는 것이 천행이고 홍복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최소주의행정학> 5(6): 1.

제 21대 국회의원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지역구에서만 163석(미래통합당은 84석)을 차지했다. 더불어시민당과 합하면 180석이다. 수구기득권세력이 좌파독재, 경제폭망, 안보파탄이라고 문재인정권을 낙인찍었지만, 메아리가 되지 않은 저주였다. 촛불혁명으로 청와대권력이 교체되었고, 이제는 국회권력도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괴롭혔던 자들이 대거 사라졌다. 민생당 올드보이들의 마지막 몸부림도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국민의당 안철수의 생뚱맞은 뜀박질도 머쓱해졌다. 기세등등했던 소위 “태극기부대”의 패거리질도 봄날 아지랑이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다. 거짓은 참(진심)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정의당의 어리석은 패착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의당의 성적표다. 정당지지율 9.67%에도 불구하고 고작 6석(지역구 1석)을 얻었다. 욕심이 과해서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찼다. 정의당만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에는 잘못이 없다. 정당이라면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공직선거법 개정과정에서 강력한 수구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과 한 배를 탄 상황이었다. 정의당의 패착은 분명했다.

우선 정의당은 선거법 협상과정에서 비례대표 상한선을 20으로 하자는 민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위성정당 출현을 우려했다. 심상정씨는 연동형 비중을 줄이고 캡을 씌워야 한다는 주장을 거대정당의 “후려치기”라고 비판했다. 떡이 크게 보였고 바로 손에 잡힐 듯 느꼈을 것이다. 상한선이 30으로 정해지자 예상대로 위성정당이 출연했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무책임하게 속보이는 꼼수를 용납했다. 어처구니없는 이 결정으로 사달이 난 것이다.

두번째 패착은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개정된 선거법에서 독자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일까? 민주당이 비례대표 순서를 뒤로 하겠다고 양보했지만 끝끝내 참여를 거부하였다. 1할을 전후한 정당지지율을 보면서 침을 삼켰을 것이다. 물론 진보라는 원칙과 이상이 울었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비굴함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고려하는 현실적 이상주의여야 한다(1986: 138). 노회찬이었으면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대의를 위하여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번 선거에서 당당하게 최소한 10석(33.35%+9.67%를 가정하면)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열린민주당은 잠깐 인기를 몰았으나 국민의당과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3석(정당지지율 5.42%)에 머물렀다. 정봉주씨와 손혜원씨가 개혁성(선명성)과 확장성을 내세웠지만 결국 자기 살을 깎아먹었다. 민주당과 혹은 진보 지지자들 간의 갈등과 혼동을 초래했고 끝내 유권자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동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삐지고 흉보는 모습은 곱지 못했다. 의도가 순수했을지라도 순진무구의 자해에 가까운 과격이었다. 열린우리당처럼 마지막 2분을 참지 못하고 밥솥을 불에서 내려놓아 일을 그르친 것이다(1991: 198).

반부패, 반분열, 반과격

소정 선생님께서는 약자의 분열을 늘 경계했다. “나는 이 툭하면 갈가리 찢길 인자를 가진 운동체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를 고심했다”(2008: 380).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빌어 부패하지 말고, 분열하지 말고,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2008: 571). 무서운 상황에서 필요한 최소행동은 비폭력 대응, 동지들 간의 철저한 합의에 의한 운동, 시민과의 호응과 연대라 할 수 있다(1991: 25-26).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에게 돌리는 개인윤리를 갖는다(1996: 429). 실패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실패의 책임을 동지에게 돌려서는 안된다(2008: 386). 동지 간에 이용관계(잇속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다(1996: 621). <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사는 비결은 비폭력과 단결(동지애)이다(1991: 334). 이러한 동지에 대한 관용과 존경이 마음속에서 스며나오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참음이 필요하다(2008: 386).

더불어시민당의 진심과 간절함

최배근·우희종 교수가 이끌었던 더불어시민당은 정의당과 열린민주당과는 다른 길을 갔다. 애초부터 촛불혁명이 좌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민을 위하여”를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으라는 요구다. 사사로움(잇속)을 갖지 않고 대의를 위하여 진보진영의 연대로 촉구하고 판(플랫폼)을 깔아주었다. 두 대표는 선거가 끝나면 미련없이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을 전개하였다(1996: 620).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고(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동지를 해치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남탓하지 않았고), 참여정당의 합의내용에 충실했다. 민주당도 자기 몫을 11번부터 시작함으로써 연동형 선거법의 취지를 살려보려는 의지를 보였다. 선거법에 따라 참여정당의 직접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간판스타도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전국을 누볐다. 길고 혼동스러운 투표용지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시민들은 높은 지지율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께서 제시한 운동 방식에 충실한 결과다.

민주당은 경악스런 선거결과에 두려움을 느낀다며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곱씹었다. 승리에 취하여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부패와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 인기를 노리는 과격한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당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묵은 개혁과제는 순리에 따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세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경합 중인 민주당 후보들이 막판에 대부분 승리했다. 패색이 짙던 김남국도 막판에 살아왔다. 그냥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처참하게 쓸려간 세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하필 오늘이 세월호 참사 6주기 아닌가? 어린 원혼들을 편안히 잠들게 할 때다.

같이 읽기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최소주의행정학> 5(5): 1.

더불어민주당이 1월 28일 자 <경향신문>의 정동칼럼에 게재된 “민주당만 빼고”를 지난 달 13일 공직선거법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두어 주 전에 발행된 사설私說에 늦은 시비를 거는 것이 우습다. 쓸데없는 짓이다. 공당에서 언론사와 기고자를 고발하는 것도, 반발이 일자 고발을 취소하고 사과하느라 허둥대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껏 문학과 사상과 예술을 억압했던 자들이 이제와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민주당을 비난하는 일임에랴. 언론중재위원회가 12일 해당 私說을 공직선거법 8조(언론기관의 공정보도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냈지만, 이 소동을 법위반과 정쟁으로 보는 시각이 불편하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

일부러 날을 잡아 “민주당만 빼고”를 정독한 느낌은 한마디로 자괴감이다. 아무리 연구교수라지만 어설픈 “아줌마 논법”에 수구신문의 글쓰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인 상황에서 왜 “민주당만 빼고” 찍으라는 것인지... 멀쩡한 신문사에서 음식으로 치면 맛을 논할 수준도 안되는 먹을거리를 상에 올린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소위 “기레기”로 표현되는 언론인의 수준 그대로는 아닌지. 공직선거법을 어겼는지 표현할 자유를 침해했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와 신문사의 기본과 상식에 관한 문제다.

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최악이나 차악이나 나쁜 것은 매한가지여서 어차피 선거가 끝나면 상전노릇을 할테니 차악을 편드는 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결론은 선거도 정치도 없애야 한다(혁명을 해서라도 판을 뒤집자)가 아니라 뜬금없이 여당을 찍지 말라니... 최선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국민이 매번 차악을 선택했다가 배신을 당했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에 최선(틀림없이 모든 공약을 그대로 집행하는 정당)이 존재했단 말인가? 순진무구한 노녀老女의 두서없는 푸념이자 무책임한 망발이다.

그런데 정말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한 것이 잘못일까? 2월 16일 SBS의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한 글쓴이는 수구세력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민주당에게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싹수라도 보이는 자들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나름의 합리성이자 아량일 터이다. 하지만 강자(기득권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너도 잘한 것이 없다며 죽도록 발길질을 해대는 어리석음이다. 강자의 포악함에는 으레 그러려니 눈과 귀를 닫은 채 약자의 잘못만 야박하게 따지고 난도질하는 자들이다. 최악을 치죄治罪하지도 않으면서 강자의 편에 서서 차악을 훈계하는 짓이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모세를 원망한 못난 군중의 정신줄이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잃은 것이다.

인간에게 차라리 차악이 최선이다

소정 선생님(1986: 140)은 “물론 못난 야당이 어진 야당만은 못하다. 그러나 야당이 여당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는 신통치 않더라도 야당이 살아 남아 주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부정을 하는 구성원이 있는 [구조적으로 선한] 야당이 부정을 안하는 구성원이 있는 포악한 [구조적으로 악한] 여당보다 낫다”(1991: 308). 신이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을, 윤리적으로 나쁘지만 구조적으로 힘없는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1991: 307). 요셉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형(카인)에게 맞아죽은 아벨과는 달리 살아남아 최소한도의 회개라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던 형들을 용서할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요셉을 낳을 수 있었다. 한 단계 진전이다.

소정 선생님(1991: 306)은 “신이 최대의 개인윤리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점이 멋이 있다. 신은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자이다”라고 풀어냈다. 최소한의 변화(회개)라도 있어야 다음에 좀더 나은 권력의 견제자가 등장하며,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1986: 140-141). 그러니까 지금 당장 최선이 아니라고 해서 최악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인간에게 최선은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계속 타락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또 후회하면서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차악이 차라리 최선이다. 그러니 최소한이라도 악행을 돌아보고 말귀라도 알아들으려는 차악이 얼마나 귀한가. 어쨋든 그 미약한 시작이 없다면 어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악의 성장을 지켜보라

민주당이 여당이니까 구조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는 민주당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던 수구세력이다. 애초부터 친일부역세력과 친미반공세력을 등에 업고 지금껏 해먹고 있는 구조악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민주당이 집권하긴 했지만 여전히 민주세력은 위태롭고 아쉽다. 적폐청산도 개혁도 시원스럽지 못하고 더디기만 하다. 수구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패악질과 “침대축구”로 버티는 한 무던히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세월호 7시간을 양보해서라도 탄핵을 취해야 했다. 누더기질로 복잡한 셈법이 되었다 해도, 가짜정당으로 무력화되었다 해도 선거법을 바꿔야 했다.

수구세력의 파상공세와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지지도는 견고하다.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굼뜨지만 야곱(열린우리당)에서 요셉으로 성장해가는 변화를 보여준다. 하늘(백성)은 어리석지 않다. “민주당만 빼고”야말로 이상에 집착하여 이성을 잃은 자들의 횡설수설이자 “죽쒀서 개주는 짓”이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어린 새싹을 닦달하고 뿌리채 뽑아버려서야 어디...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최소주의행정학> 5(2): 1.

소정 선생님은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으로 진화하는 초월윤리를 정부관료제(행정개혁)에 적용하면서 “모든 나쁜 것은 官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民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1991: 42). 또한 악은 민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는 정권에서 나온다고 했다(2008: 268). 나는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부관료제가 제대로 설계되고 운영되지 않으면 백성들을 괴롭힐  뿐이지만, 그렇다손 쳐도 관료제(통치행정구조)가 모든 악의 씨앗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모든 좋은 것은 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다

여기서 民은 재야, 야당, 노조, 대학, 언론기관, 종교단체 등의 사회단체(시민사회)를 말하고 官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포함하여 통치자, 정권(여당), 정부관료제라 할 수 있다. 民은 나라의 주인이고 官은 민의 머슴이다. 정부 관료는 머슴처럼 주인의 일을 대신 해주고 녹을 받는 공복이다. 이런 존재의 차이를 생각했을 때 나랏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주인의 관심사지 애초부터  머슴(공복)의 관심사가 아니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民과 官의 좋은 행동은 무엇이고 나쁜 행동은 무엇일까? 좋은 시민사회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관이 일을 잘하는지를 감시하고 필요한 조치를 요구한다. 그 반대는 주인이라는 생각없이 잇속을 위해 망언과 망동을 서슴치 않는다. 합리적인 압력과 저항이 민의 좋은 행동이라면 책임회피와 어리석은 난동은 민의 나쁜 행동이다. 좋은 정부관료제(통치자)는 민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공복임을 마음에 새겨 주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그 반대는 백성의 머슴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잇속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다. 주인을 섬기기는 커녕 합리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비폭력 저항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한다.

民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면 官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관이 민의 좋은 행동을 배운다고 했지만 사실은 민의 감시와 압력과 저항 때문에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은 애초부터 좋은 행동을 할 의지가 없다. 오직 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합당한 일을 시켜야 관이 나쁜 행동을 못하게 된다. 주인이 게으르고 어리석다면 머슴은 주인을 우습게 보고 머리꼭대기에 올라앉는다. 주인이 경우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거나 패악질을 부리면 머슴들은 분수도 모르고 기고만장하여 주인의 상투들 틀어쥔다. 이런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머슴이 있다면 정신이 멀쩡하지 않거나 어딘가가 고장난 공복이다. 이런 미련한 머슴을 보고 감동을 받고 정신을 차리는 주인은 거의 없다. 나라 일을 크게 망치고 자신까지 망친 뒤에야 스스로의 무책임과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이다.

관의 나쁜 것을 민이 배운다

중요한 것은 民이 官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배운다는 점이다. 민의 나쁜 행동을 관이 배울 필요는 없다. 민이 주인이기를 포기하거나 난동을 피우면 관은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마음껏 해먹게 되어있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닌데 구태여 책임감을 가지고 법과 절차를 준수할 까닭이 있을까? 통치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법 위에 군림하면 약육강식의 난장판이 된다. 폭정과 무질서는 백성을 옥죄고 약탈한다. 통치자의 욕심은 채울수록 갈증만 더해간다. 끝내는 정권의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법은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1986: 289).

대혼란에서 民은 공정한 법과 절차를 기대할 수 없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찍어누를 뿐만 아니라 강자끼리도 서로 더 해먹겠다고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백성들도 아비규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아귀다툼을 한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금품을 건넨다. 민이 관의 나쁜 행동을 배우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부지불식 중에 닮아가게 된다. 지금 우리의 비루함은 그런 친일냉전독재의 그림자는 아닐는지. 사회 구석구석에 “갑질”과 “왕따”가 제도화되어 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빨갱이, 좌파독재라는 주술은 여전하다. 법과 합리성과 도덕과 양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모든 폐해는 결국 백성의 몫이다.

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주인이 어리석어 주인노릇을 못하면 머슴은 일은 안하고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서로 “코드가” 맞아서 과격함이 극에 달한다(2008: 578). 그런데 머슴은 스스로 잘못을 수정하고 퇴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官의 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것은 어쨋든 민이다. 국민과 정부와의 관계에서 온기의 원천은 국민이다(2001: 42). 民의 비폭력 투쟁이다.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가 통치자를 향하여 악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해야 바로잡힌다”(2008: 65).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1991: 30).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호응을 얻어 잔치가 되고 널리 감동을 만들어 내면 官은 바뀔 수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기는 통치자는 없다. 전두환을 굴복시킨 6.10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를 쫓아버린 촛불혁명 역시 주인임을 자각한 시민들의 감동어린 잔치였다.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세상의 주인은 민이다. 하지만 슬기롭고 부지런하고 용기있는 주인만이 주인노릇을 할 수 있고 주인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머슴(통치자나 관료제)의 언행을 지켜봐야 한다. 경우에 맞는 요구를 하되 시비를 철저히 가려서 못된 버릇을 고쳐가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최소주의행정학> 4(6): 1.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달 20일 문형배씨와 이미선씨를 헌법재판관으로 지명했다. 이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지난 10일 두 후보자를 대상으로 인사청문회를 열었다. 여야는 이 후보자 내외가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거래한 사실을 두고 공방을 벌였다. 수구세력은 후보자의 재산내역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고 내부정보를 이용한 의혹이 있다고 했다. 금융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하고 후보자 내외를 검찰에 고발했다. 여당은 주식투자가 실정법 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법조계와 정의당은 이 후보자의 자질과 소수약자라는 점을 부각했다. 이 후보자는 본인의 주식을 처분했다고 밝혔고, 헌법재판관이 되면 남편의 주식도 전부 내다 팔겠다고 했다. 15일 발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할(28.8%)이 적격, 5할 이상(54.6%)이 부적격이라고 답했다. 이런 대결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누구의 눈높이를 말하는가?

누가 “국민의 눈높이”를 운운하면 나는 종종 그 “국민”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아전인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이 후보자 내외의 전체 재산은 43억원이고 그 중 8할이 넘는 35억원을 주식으로 가지고 있다. 후보자 이름으로 된 주식은 약 7억원인데, 모두 남편이 관리를 해왔다고 한다. 판사로 재직하다가 법률회사의 변호사로 일해온 남편의 연봉은 약 5억원이라고 한다. 과연 이들의 재산불리기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일까? 손가락질을 당해 마땅한가?

한 가구의 재산이 40억원을 넘고 개인 재산이 9억원인 것은 보통 사람들의 눈을 벗어난다. 하지만 50대 내외가 판사이고 이름있는 변호사임을 생각하면 놀랄 만한 수준은 아니다. 남편 연봉 전부를 한 10년 저금해서 이자나 챙긴 정도다. 시골 사람들도 다 어림으로 하는 셈법이다. 주식 대신에 서울 강남에 어지간한 아파트 두세 채를 사놓았더라면 크게 재미를 보았을 것이다. 이재理財에 밝지 못한 내외다.

청문회에서 주식이 왜 이렇게 많냐는 푸념도 있었다. 부동산에 분산 투자하지 않고 주식에 몰아넣은 것은 분명 투기의 기본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주식보유량이 너무 많다거나 비중이 과하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주식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과할 수 있다. 하지만 증권가에서 보면 재력이 좀 있는 투자자일 뿐이고 재벌 총수의 눈으로 보면 티끌만도 못한 존재다. 그런데 왜 후보자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주식이 과하든 과하지 않든 실정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사유재산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단 말인가. 내외의 기본권을 짓밟는 폭력이다.

또 주식거래가 5천회에 이른다며 근무태도를 비난했다. 10년 동안 거래했다면 월평균 40여 차례 주식거래를 한 셈이다. 과연 근무시간에 업무를 제쳐두고 주식에 몰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공직자가 업무에 전념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사람살이는 기계와 같을 수 없다. 자신들은 걸핏하면 국회를 뛰쳐나가 스스럼없이 딴짓을 하면서 후보자에게는 업무 외의 일(예컨대, 배우자에게 전화를 한다든가, 차를 마신다든가, 인터넷으로 송금을 하는)을 일절 해서는 안된다고 어거지를 쓰는 것은 아닌지. 주식거래에 눈이 팔려 엉터리로 재판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전수안 전 대법관은 “강원도 화천의 이발소집 딸이 지방대를 나와” 법관이 되었음을 환기시키고 남녀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법관 중 한 분이라고 했다.

수구세력에게 사유재산이란?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수구세력의 반응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이 주식거래를 비난하고 범죄로 몰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자나 깨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주의를 숭배하던 자들 아닌가? 사유재산을 반공산주의의 상징처럼 여기던 자들 아닌가? 얼마 전 사립유치원 비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사유재산을 빼앗는다며 비난했던 자들 아닌가? 2005년 사립학교법을 개정할 때도 사유재산을 지킨답시고 그리 난리를 친 자들 아닌가? 따지고 보면 부동산보다 주식시장에 투자한 것을 칭송해야 할 자들이 아닌가? 도대체 사유재산이 많다고, 주식에 “몰빵”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과연 보수고 시장주의자들인가? 자신의 사유재산은 눈꼽만치도 건들지 못하게 하면서 남의 재산에 대해 트집을 잡는 심보는 무엇인가? 보수도 뭐도 아닌 수구·냉전·기회주의 세력일 뿐이다.

왜 수구세력은 이 후보자를 험악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먼저 이것은 그냥 화풀이다. 결국은 문재인을 헐뜯고 싶은 것인데 대놓고 못하니까 조국을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다. 조국을 흔들어야 하기 때문에 후보자를 거칠게 몰아붙여야 한다. 주식이 아니었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걸고 넘어졌을 것이다. 이 후보자 내외는 주식 때문에 이 곤욕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조국 때문에 애먼 매를 맞고 있다. 두번째는 수구세력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노무현씨에 대한 저주와 마찬가지다. 성골 진골도 아닌 “듣보잡” 주제에 언감생심 헌법재판관을 꿈꾸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지방대학을 나온, 그것도 멀쩡한 남자가 아닌 “치마” 판사아닌가? 아직 50줄도 안된, 이마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 아닌가? 돈을 좀 모았다고 족보를 사서 시답잖은 양반 흉내를 내는 쌍놈의 꼬락서니라니. 목불인견이다. 만일 이 후보자가 스카이를 졸업한 늙어빠진 “바지” 판사였다면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

이 후보자에 대한 수구세력의 언행은 과하다. 현행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위장전입도 없지 않은가? 지방대학을 나온 여자가 헌법재판관이 되면 안되는가? 주식투자로 재산을 묻어두고 여유있게 살면 안되는가? 같은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대보라.

물론 주눅이 들었는지 후보자가 소신을 분명히 밝히지 않고, 남편에게 떠넘기는 모습은 아쉽다. 내외가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밝힌 대목도 씁쓸하다. 조폭의 매질에 못이겨 “삥”을 왕창 뜯긴 것은 아닌지. 청문회를 빙자하여 무고한 이를 꿇려놓고 무차별로 “말길질”을 해대는 모습이라니. 최소한 후보자의 인권과 재산권을 보장해주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씨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눈높이와 인사청문회의 폭력. <최소주의행정학> 4(4): 1.





얼마 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 박물관에 다녀왔다며 누군가가 내게 Elinor Ostrom (1951-2012) 사진을 선물했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3년 뒤에 세상을 떠난 인디애나대학교의 정치경제학자다. 짧은 인연을 생각하며 바라본 사진 속 린(엘리노어의 애칭)은 너무 근엄해 보였다.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자상하고 활기찬 모습 뒤에 엄격함과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그래도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린의 동반자였던 Vincent Alfred Ostrom (1919-2012)도 비슷한 양면성을 가진 분이다. 

빈센트와 소정 선생님

언젠가 안도경 교수가 빈센트와 소정 선생님(1927-2014)께서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했다. 수년 간 린과 빈센트와 지냈고 고대 행정학과에서 가르쳤던 TK(안교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딱 맞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모두 키가 큰 편이다. 한덩치를 하고 서 있는 모습이 비슷하다. 특히 멜빵바지를 입은 모습과 어눌하게 말씀하시는 말법이 몹시도 닮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두 분의 닮은 꼴은 생김새보다는 생각과 행동에 있다. 소정 선생님께서 자신을 청교도로 규정했는데, 빈센트 역시 청교도 모습이었다. 한없이 인자한 반면에 상식과 원칙에는 타협하지 않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 오스트롬 Workshop에 갔을 때 나는 긴장을 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어서 더 낯설게 보였다. 옆자리에 지팡이를 든 어느 노신사가 앉았는데, 내게 어디서 왔는지 묻고는 워크숍 생활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것 저것 알려주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 노신사가 그때 이미 팔순인 빈센트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빈센트는 미국이 알래스카를 얻은 뒤 주헌법제정의회(Alaska Constitutional Convention)에게 자연자원 관리에 관한 자문을 해준 분이다. 관개灌漑와 어로漁撈 같은 공유자원(common-pool resources) 문제를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빈센트가 종종 polycentricity (일을 해나가는 주체가 여럿이어서 서로 협력하고 조정해나가는 경우)와 미국의 연방제(federalism)를 확신있게 말할 때 나는 그냥 민주주의 이론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었다. 빈센트가 정부가 시민단체에 돈을 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을 비판할 때도 나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우연히 빈센트의 행동을 목격하면서 나는 벼락을 맞는 깨달음을 얻었다. 

빈센트의 성내기

어느 여름날 나는 Kroger라는 대형 식료품점에 갔다. 필요한 물건을 담아서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다가오길래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허리를 펴고 무슨 일인가 봤더니 계산대 앞에 선 노 신사가 지팡이로 저쪽을 가리키며 고함을 치고 있었고,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 흑인이 뒷걸음질 치더니 몸을 돌려 내빼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노신사가 빈센트였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손수 장을 보러 나오셨을까...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빈센트는 어떻게 저런 자를 점원으로 고용하느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빈센트의 노여움이 하도 서릿발같아 나는 차마 나서지 못했다. 

빈센트 다음으로 (그러니까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던 아주머니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점원이 껄렁껄렁한 표정과 몸짓으로 빈센트가 담아온 물건을 성의없이 끄잡아서 스캐너로 읽었고,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마음이 상한 빈센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을 했지만 점원은 비웃으면서 계속  오만불손한 행동을 계속했고, 결국 빈센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그 점원이 뒷걸음치면서 지었던 비열한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이런 것이었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렇게 탄식했다. 민주주의란 것이 공짜가 아니구나. 거창하게 혁명, 선거, 시위 등에서 민주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다. 정치행사가 아닌 일상 생활에 잘 녹아든 민주주의여야 한다. 정치인과 법조인이 아니라 일반 유권자의 수준이 민주주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시민 개개인이 자연인으로서 누리는 기본 권리와 그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했을 때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치열하게 다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일반 시민의 이해와 용기와 행동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고객으로서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는 커녕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마저 무시당한 것에 대해 단호하게 부당하다고 말하고 시정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 소정 선생님이 묘사한 청교도 모습이다. 그제서야 정부가 시민단체에 돈을 주는 것을 왜 빈센트가 싫어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권자의 정직한 뜻과 피와 땀이 필요할 뿐이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씨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는 까닭이다.  

시민단체는 자발성과 자율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정부가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자본(social capital)을  늘린답시고 민간부문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는 것과 같다. 지난 9년 동안 신문 방송을 장악하고, 국가기관이 나서서 여론을 조작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랏돈으로 사회단체를 매수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정적을 공격하게 했음이 드러났다. 자발성과 자율성이 망가진 이들에게서 소정(1980)이 말한 관官의 폭력을 견제하는 합리적 요구와 건전한 압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세월호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인권과 9년간 짓밟힌 주권자의 자존심과 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깨어있는 시민의 사려깊은 이해와 참된 용기와 질서있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촛불 집회가 소중한 까닭이다. 나는 그 때 수많은 빈센트가 성내는 것을 보았다. 


원문: 박헌명. 2017. 팔순 노신사의 성내기와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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