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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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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선생님은 구민법의 대상이 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숫제 선거권을 주지 않는 제한선거제도를 채택했더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08: 219). 어느 수업시간이었는데, 당시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보통 ·평등·직접·비밀 선거라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말씀이셨기 때문이다. 인종, 지역, 성별, 교육, 소득 등에서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선거(universal suffrage)가 상식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칙은 원칙이 아니라 주입된 이념에 가깝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

나는 몇년 전부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몇몇 사회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꾸준함을 깊이 새겨 매달 꼬박꼬박 내려고 한다. 또 <너흰 아니야>와 <이게 나라냐 ㅅㅂ>를 만든 윤민석씨의 “감동후불제”에 동참했다. 지난 해 촛불집회에 조카와 함께 참석해서 기꺼이 촛값을 내고 왔다. 촛불집회에 가면 일당 5만원씩 준다는 음흉한 뜬소문을 옮겨온 아버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5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학생 시절에는 호주머니가 가벼우니 이런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애초부터 내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제는 취직도 해서 좀 여유가 생겼으니 말하자면 호기浩氣를 부린 셈이다(사실은 마음이 문제지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는 단지 호주머니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수많은 촛불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2009년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마음이 울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놓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방심했던 것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절망으로 보내면서 무책임했던 유권자였음을 자책했다. 한국을 떠나와서 벌어진 일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던 안타까움이 있었다. 큰 빚을 졌고 그 빚이 묵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치를 것은 치르고 내 몫을 요구해야

그러던 터에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1986)에서 “치를 것은 치르고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경우에 맞는 성장을, 한 개인에게서나 국가에서나 보고 싶은 것이다”(62쪽)를 읽었다.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고 내 몫을 기대했다는 뉘우침이 있었다. 손 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는 심보랄까. 경우에 맞지 않는 짓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소정 선생님은 사람(정치), 돈(경제), 지식(문화)에 관한 좋은 의식이 사회에 퍼져야 한다고 했다(1986: 64). 미움과 박해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와 나누는 마음을 품고, 연줄을 대거나 요행수을 바라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쓸모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마디로 행동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64쪽).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회단체에 참여하거나 후원금을 내는 일을 언급했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공짜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음에도(2001: 16) 어리석게도 나는 감나무 밑에서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홍시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상식과 원칙과 정의를 갈구했지만 “행동을 하는 일”에 한없이 게을렀음을 알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은 또 제한선거를 말씀하시면서 “당비를 내는 [지방의원 입후보자] 선거인단이 극소수인 것을 발견하고 의사표시만 앞세우고 회비 지출 의무를 안 지키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결핍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적었다(2008: 219).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금·당비·후원비를 안낼까 자문하고, “국민 일반이 더럽게 벌었기에 깨끗한 데 돈을 못 쓴다”고 답했다(219쪽). 돈을 더럽게 번 사람은 자신을 타락시키거나 세속의 복(줄서기나 횡재)을 비는데 돈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비·당비·후원회비를 잘 내는 나라치고 돈 못버는 젊은이들이 백화점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는 나라가 있는지를”(220쪽)이라고 한탄했다. 유권자가 치를 것을 다 치르지 않고(책임과 의무는 나몰라라 하고) 민주주의를 기대했다는 뜻이다. 뼈아픈 지적이다. 매달 글을 써서 올리고 후원금을 내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일, 경우에 맞는 행정

경우境遇는 사리事理나 도리道理를 말한다. 경우에 맞는 일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다. 지난 9년이 참담했던 까닭은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을 핑계삼아 전시작전권 환수를 차일피일 미뤄놓은 군면제자들이 유사시에 원점타격을 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일도 경험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엽기·변태 행각으로 파면되어 감옥으로 끌려간 판에 적폐청산과 국정농단 조사를 두고 정치보복 운운하는 일임에랴... 소위 “갑질”이라는 것 역시 경우없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정부 관료제에서 경우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안타깝다. 천둥벌거숭이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관료제의 전문성과 중립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고삐풀린 정부는 원래 좋은 말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그동안 경우없는 정권에서 댓글을 달아 여론을 조작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民(관변단체 등)을 타락시켰음이 드러나고 있다.

합리성을 갖춘 행정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화문을 포함한 전국에서 타오른 촛불의 물결이 준 교훈이다. 관료제에서 옳지 못한 경우를 바로잡는 것은 결국은 백성의 몫이다. 주인으로서 경우에 맞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유권자가 제 몫을 요구하기 전에 치러야 할 경우에 맞는 값이다. 좋은 기사를 읽고 토론하고  촛불을 들고 후원금을 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좋은 의식”과 “좋은 행동”이 못된 官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우”의 기준을 세워나가면서 경우에 맞는 행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원문: 박헌명. 2017. 행동하는 일과 경우에 맞는 행정. <최소주의행정학> 2(10): 1.


지난 5월 문재인씨가 제 19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청와대 위민관爲民館의 이름을 여민관與民館으로 되돌린다고 했다. 2004년 노무현씨가 청와대에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짓고서 여민관으로 이름지었는데, 2008년 이명박씨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다수가 이명박씨의 “Anything But Rho”라는 구호로 추진된 “노무현 흔적 지우기”라고 생각했다. 임석규 (2017)는 여민이든 위민이든 뜻은 다 훌륭하니 문패를 갈아치우는 악순환을 피하고 그 뜻을 제대로 구현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두리뭉실한 양비론이 몹시 불편하다. 과연 여민과 위민은 같은가?

<맹자>에 나오는 여민

여민관의 “與民”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긴다(與民同樂)”는 표현에 있다. 반면 위민관의 “爲民”은 고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단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추정된다. 임석규 (2017)는 세종의 “위민정치”를 본받겠다는 명분으로 풀이했다. 혹자는 링컨의 말에 빗대어 여민은 by the people에 상통하고, 위민은 for the people에 해당한다고 풀었다 (http://boramaeavengers.tistory.com/266). 여민의 주체는 국민이고 위민의 주체는 정부(청와대와 관료들의 엘리트주의)라는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고전종합DB (http://db.cyberseodang.or.kr/)로 살펴보면, 여민은 <맹자>에서 분명한 출처를 찾을 수 있지만 위민은 그렇지 않다. 與民은 <맹자> 본문에서 총 일곱 번 나오는데 與民同樂과 不與民同樂으로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 에서 두 번 나온다. 나머지 다섯 번 모두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爲民은 <맹자>에 爲民父母 (백성의 부모가 되어)로 세 번, 爲民上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그리고 以爲民望 (백성들이 보고 따라하게 하시고)으로 총 다섯 번 나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백성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논어論語>를 포함한 사서에서도 백성을 위한다는 爲民은 찾아볼 수 없다.

소정 선생님께서 아끼는 <맹자> 양혜왕장구하 4를 살펴보자. 不得而非其上者 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 亦非也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위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지 않는 자도 잘못이다). 여기서 여민은 “與民同樂”의 일부로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이다. 흔히 알려진 뜻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 위민은 “爲民上”의 일부로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爲가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된다”(자격내지는 지위)는 뜻이다. 원문의 맥락을 반영한다면 “爲民館”이 아니라 “民上館”이 되었어야 했다. 爲가 아니라 民上이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풀이하면 백성의 위에 군림하는 자리이니 그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나라를 평안케하라는 뜻이다. 결국 爲民館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제멋대로 갖다 붙인 “막이름”이다.

<맹자>에 안나오는 위민

“위민사상”이라며 사람들이 흔히 언급하는 <맹자>의 문구는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14이다. 하지만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벼운 존재다)이라는 문장에서 民爲는 있지만 정작 爲民은 없다. 왜 그럴까? 당시는 왕조체제였으니 임금을 위한다는 爲君이란 표현은 있을까? 사서 중 <논어>에 爲君이 딱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임금답다와 군자가 되다라는 뜻이지 임금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愛民처럼 어떤 일상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충”과 조선왕조에서 특히 강조한 “충성”이 다르듯이,  후대에 필요에 따라 덧칠되거나 조작된 어휘나 용법이 아닐까? 나라에 대한 충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절대 가치로 등극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위민과 여민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혈통이 분명한 진도개와 개처럼 생겼으나 종마저 헷갈리는 “듣보잡”을 견주는 일이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

국민과 더불어 한다는 뜻을 담은 여민관은 참여정부의 사상과 철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말 그대로 與民觀이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고 나쁜 뜻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명박씨는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의식(자신과는 달리 깨어있는 시민들의 진심어린 성원을 받는 것 못마땅하고 기분이 나빠서) 때문에 저지른 “무조건 반항”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과 더불어 일을 해나간다는 “여민”은 왕조 정신줄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 임금과 백성이 겸상을 하고 “맞짱”을 뜰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인자한 임금이 어리석은 백성을 긍휼하여 성은을 베푸는 “위민”이 있을 뿐이다. 이명박씨의 爲民觀이다. 백성들은 본시 우매한 존재여서 분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쉽게 속고 쉽게 흥분한다. 검은 돈을 받고 촛불을 들고 난동을 부리곤 한다. 철없는 애들까지 선동하여 거리에서 큰 어른인 대통령을 욕보이게 한다. 그러니 노무현이 틀려먹은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씨의 정신줄에서는 당연히 與民이 아닌 爲民이어야만 했다.

爲民觀이 역겨운 까닭

나는 “위민”이나 “애국”이라는 말에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위정자들이 나라를 위한다느니 백성을 위한다느니 하면서 세상을 속이고 자신들을 속였던가? 현대사에서 “애국”이라는 말을 누가 애용했던가? 완장차고 빨갱이를 잡는다고 설치던 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구차한 말이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권력을 남용하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이 역겹게 내뱉은 말이다. 국민들이 우려하는 4대강 사업과 광물 외교를 벌일 때 넌더리 나게 듣던 소리다. 엽기 변태 행각으로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근혜씨를 구출하자며 태극기를 휘날리는 자들이 신물이 나도록 외치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의 “위민”에서 백성은 없었고, “애국”에서 나라는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이 있었다. “위민”의 대상은 온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자기편”이었다.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까지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소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국민을 갈라놨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국민이 아니라 빨갱이고 종북좌파이고 노빠문빠였고, 꼭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이창동의 <시>는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인들이 인정하는 빼어난 작품이었지만 이명박과 유인촌에게는 그냥 “빵점”이어야만 했다.   

“애국”의 대상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며 집단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다. 나라가 있다면 바로 그들 자신이다. 따라서 빨갱이와 종북좌파들이 세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는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 그들만의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스통을 굴리고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애국”하는 이유다. 우국충정이란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켜고 종북좌파를 만들고 뒷조사하고 집요하게 짓밟았다. 정예요원으로서 쪽팔림을 감수하면서 “가카”를 기쁘게 하는 감동스런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르는 대로 달려가서 빨갱이 타령을 하고 종북좌파라면서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애국을 한답시고 완장차고 거드름을 부렸지만, 사실은 꽂감빼먹듯이 나랏돈을 빼내서 펑펑쓰는 재미가 솔솔했다. 여기 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애국한다는 자부심과 자기최면으로 꿋꿋하게 버텼지만 그냥 뒷돈을 받아 챙기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에 백성이 있고 어디에 국가가 있단 말인가? 위정자들이여, 제발이지 위민도 하지 말고 애국도 하지 말라.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욕보이고 거덜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묻지마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

새로 들어선 정권이 건물 이름을 자기 입맛대로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큰 흠이 없다면 전임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론절차를 거쳐 바꾸는 것이 상식이다. 건물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지만 시시비비를 가려서 말해야 한다. 애초에 이명박씨가 정당한 이유없이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문제였다. 당시에도 말이 많았을 정도로 합당하지 않았고 쓸데없이 의심만 샀던 짓이었다. 문재인씨가 여민관으로 되돌리는 것은 사필귀정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런데 어차피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매한가지라면서 이명박씨와 문재인씨의 결정을 싸잡아 악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의도했든 안했든 이런 양비론은 결국 악한 강자의 손을 들어준다. 즉, 이명박씨의 잘못은 덮은 채 문재인씨의 사필귀정을 “악순환”에 쓸쩍 끼워넣는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한패거리로 묶어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자고 유혹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튄 놈은 그 죄가 묽어지고 가려진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자는 너무 박하다거나 가혹하다고 몰린다. 튄 놈은 피해자가 되고 사필귀정은 가해자가 된다. 적폐청산이 갑자기 정치보복이 되어 본질을 호도한다. 결국 패악질은 교정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적폐들이다.
 
혹시나 이명박근혜 정권 때는 공연히 해코지 당할까봐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세월이 좋아지니까 (해코지 위험이 없어지니까) 이름을 되돌리는 것을 시비걸고 나선 것이라면 기회주의자들의 “묻지마 양비론”일 뿐이다. 멀쩡한 사람들을 몽롱하게 만들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헷갈리게 함으로써 악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적폐를 만들어 왔던 논리다. 나는 이런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을 경계하고자 한다.

수구 패악질의 악순환

왜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거듭된 패악질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수구세력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사면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범죄와 부도덕과 비윤리에 완벽하게 면역이 된 인종들인가?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가 국내정치에 개입한 증거가 드러났어도 눈깜짝하지 않고 외면하는 강골들 아닌가? 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인정하지 않다가 위기가 닥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진흙탕싸움을 벌여 물타기를 시도한다. 적폐청산이 이명박을 정조준한다며 슬쩍 노무현을 끌어들인다.

반면에 수구세력들은 자신이 핍박하는 멀쩡한 자들에게 언제나 가혹한 비난을 쏟아낸다. 흔히 빨갱이나 종북좌파라고 낙인찍힌 민주주의자들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마치 큰 죄를 지은 양 침소봉대하고 정적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약자의 꼬투리를 잡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한번 약점이 잡히면 수구세력의 잘못을 들추는 일을 멈추고 쥐죽은 듯이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수구세력은 보수이자 우파이며, 우익보수는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진보이자 좌파이며, 좌익진보는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단순무식한 정신줄이다.

재미있는 것은 핍박받은 자들은 수구세력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너무 쉽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물러선다. 마치 결벽증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사소한 법적 도덕적 인간적 잘못까지 모두 떠안으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대신 짊어진 예수처럼 자책한다. 그것이 옳은 길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자부심마저 갖는다. 정확하게 사실을 밝히고 합당하게 책임을 따지는 일을 꺼려하고 부끄러워한다.

이런 형국에서 승자는 언제나 수구세력이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정적에게 떠넘기는 용기와 몰염치와 재주를 가지고 있다. 수구세력은 사실을 밝히는 일을 방해하고(은폐하고) 조작하는데 적극적인  반면, 정적들은 사실과 책임을 따지는 일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은 패악질을 저지를수록 승승장구하고, 반대세력들은 조그마한 실수에도 고개숙이고 물러난다. 수구세력은 서로 단결하여 패악질을 독려하는 반면, 반대세력들은 합당한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수구세력과 합세하여 더 가혹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피해자로 살면서 결벽증과 반성과 사과가 일상화되고 체질화된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쫄지말고 적폐청산을 말하라

요컨대,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벌거벗은 힘에 기대어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자들을 몰아세우고, 그 반대편 사람들은 사실을 치열하게 따지고 패악질을 비판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일을 낯설어 하고 꺼려 한다. 이런 얼개는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주물러 온 수구세력들의 힘에 눌린 착시효과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수구세력들은 현재 “정치보복”이라고 엄살을 피우면서 또다른 적폐라며 맞서고 있다. 벌건 대낮에 퍽치기당하지 않으려면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힘에 밀려 기득권 세력들에게 매를 맞고 비난을 받더라도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해야 한다 (이문영 1991: 118). 더도 덜도 말고 사실과 법과 상식과 양심에 근거한 옳은 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노무현씨가 걸었던 길이다. 여민이나 위민이나 뜻이 다 훌륭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이 하늘과 땅처럼 멀어 보인다.

참고문헌

임석규. 2017. 여민관-위민관. <한겨레신문>. 2017. 5. 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642.html


원문: 박헌명. 2017. 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최소주의행정학> 2(9): 1-2.


문재인 정부는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내세웠다. 대통령 후보로 나설 때부터 병역회피, 부동산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표절에 연루된 사람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낙연, 강경화, 김상조, 김상곤 등이 위장전입이나 논문표절로 곤욕을 치렀다.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자승자박”이 되어 새 정부를 옥죄고 있다(문현구 2017). 수구 기득권 세력은 공직배제 5대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며 문재인 정부를 공격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거나 참여정부 시절의 ‘코드인사’라며 비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인사참사 정부인가?

과연 문재인 정부가 치솟은 지지율만 믿고 엉터리 공직후보자를 남발했을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이후 국무총리와 장관급 고위공직자 후보자들의 성적을 정권 별로 살펴보자.

후보자가 낙마를 했거나, 청문회 보고서 없이 임명되었거나, 부적격 의견임에도 임명된 비율은 참여정부가 16%로 가장 낮았고 이명박근혜 정부가 각각 53.1%와 51.5%로 크게 높았다(박경원 2017). 문재인 정부는 7월 4일 기준으로 33.3%였다. 낙마 비율만 봐도 참여정부는 3.7% (=3/81)였고, 이명박근혜 정부는 각각 8.8% (=10/113)와 10.1% (=10/99)였고, 새정부에서는 지금까지 안경환 후보자가 낙마를 하여 6.7% (=1/15)였다. 청문회 보고서 없이 혹은 부적격 의견임에도 임명을 강행한 비율은 참여정부가 12.3%, 이명박근혜 정부가 44.2%와 41.4%였다. 문재인 정부는 26.7%였다. 결국 인사참사가 있다면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코드인사’와 ‘회전문인사’를 떠올린다. 이명박 정권의 ‘회전문 인사’와 박근혜 정권의 ‘수첩인사’와 ‘밀봉인사’는 벌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듯하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절반이 넘는 후보자가 논란거리가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비난은 참여정부가 받는 것일까?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부가 ‘코드인사’했다며 비판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 ‘코드’로 치면 김용준, 문창극, 이완구, 황교안, 김진태, 이경재 같은 기라성綺羅星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마법에 걸린 나라?

조기숙(2007)은 이런 황당한 현상을 조선, 동아, 문화 일보(조중동이라기보다는 조동문)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주술로 설명했다. 조동문이 참여정부를 저주하는 주술을 만들면 보수와 진보 오피니언 리더들이 다른 언론에그 주술을 읊어 대고, 급기야는 진보언론(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과 여당(열린우리당)까지 합세했다(40-42쪽). 일반 시민들은 이런 마법에 홀려 사실과 진실을 깨닫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담론 혹은 프레임 경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했고, 부당하게 그리고 박하게 평가받았고, 철저하게 왕따를 당했고, 무방비 상태로 얻어터지고 짓밟혔다.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고위공직자를 임명하는데 5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 상식에 가깝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원칙(예컨대, 성범죄자 배제)을 선호할 수도 있다. 조세와 공납과 역은 옛부터 내려온 나라의 기본이니 납세, 병역, 재산형성이 떳떳하지 못한 자를 공직에 배제하는 것은 합당하다. 다만 주민등록법 37조에 근거한 ‘위장전입’ 여부만으로 공직자의 자질을 판단하거나 표절여부를 가리기가 어려운 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다. 차라리 투기와 탈세 문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거나 (그런 목적으로 주민등록을 신고했는지) 패륜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따지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공직배제 원칙이 불편해 보이는 이유는 그 내용이 부적절해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수구 정권과 차별화되는 선명성을  부각하려다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인사참사’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시민들을 달래주고 그  눈높이에 맞춰줘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들과는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이 무리수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말하자면 표현할 자유를 억압하는 법규정에 눌려 지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고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어리석음이다. 참여정부에서 과반인 152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한번도 그런 힘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무기력했던 것처럼 지지율이 8할인 문재인 정부도 그 힘을 실감하지 못하고 얼떨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이 세다는 뜻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판을 깨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직배제 원칙은 상식에 가까운 문제 (조세, 재산형성, 병역, 패륜범죄 등)에 치중했어야 했다. 쓸데없는 논란거리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심각한 수준부터 시작하고 점차 폭을 넓혔어야 한다. 과거 10여 년 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고위 공직자를 찾아야 한다면 배제 대상의 폭과 수준을 적절하게 조정했어야 했다(야당의 비난을 받은 이후에 이를 깨달았음이 아쉽다). 물론 공직자들 중에 원칙에 꼭 맞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의 고위 공직 배제 5대 원칙은 소정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과격’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나치게 방어와 수세에 촛점을 두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뒤 수구 기득권 세력의  반격을 받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열린우리당의 어리석음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촛불민심으로 만들어 준 정권임을 되새겨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을 바라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민심을 믿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  

참고문헌

문현구. 2017. ‘화려한 출발’ 문재인 정부, ‘5대 비리 공직 배제 공약’에 자승자박. <데일리안>. 5월 7일. http://www.dailian.co.kr/news/view/635809

박경원. 2017. 인사청문대해부 1: 논란인사 비율,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노무현 정부 순으로 높았다. <SBS News>. 6월 28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266883

조기숙. 2007. <마법에 걸린 나라>. 서울: 지식공작소.


원문: 박헌명. 2017.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최소주의행정학> 2(6): 1.


지난 5월 5일 김어준의 파파이스(144회)에 출연한 유시민씨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무엇을 할 생각인지 밝혔다. 최근까지 국무총리로 청원되거나 “강제 소환”되는 압박을 받아온 그였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저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어요. … 헛물켜지 마세요. …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진보어용지식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노무현씨가 서거했을 때 세상이 무너진 듯이 절규하고 원망어린 눈빛을 화살처럼 쏘아내던 그였다. 그런 그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태연히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사는 자의 아픔이 묻어나온다. 아야 소리조차 뼈를 저미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런….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유시민은 말한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실 대통령만 바뀌었다고. 정치권력만 잡은 것이지 기득권을 대변하는 언론권력, 재벌권력, 지식인 집단 다 그대로라고. 여소야대라는 국회권력도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모든 기득권 권력이 그대로 있고 그 기득권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 한 매듭만 딱 바뀌는 건데. 지금까서 선거과정에서 편들어 줬던 여러 세력들이 또 자기의 논리에 의해서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공격해요. 열 개의 사안에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다 때린다구요. 저는 그게 제일 무섭고요. 지금도. 그 악몽이 또 되풀이 되면 거의 99프로 망한다 그렇게 봐요.”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참여정부시절에 정부에 있을 때 또 여당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게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이 들었던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해주는 지식인들이 너무 없는 것예요. 언론인 지식인이.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제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게 무조건 편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제대로 옹호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어야 되지 않냐.”

이러한 최소주의 발언이 소리없는 한맺힌 절규로 들린다. 공정하게 공과를 따져준 지식인이 한 명도 없이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무방비로 줘터지고 짓밟힌 노무현 정권의 한이 느껴진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 했던가…. 그의 핏발서린 눈빛은 8년 세월에 바래지고 평온을 되찾았지만 뼈속 깊이 박혀있는 회한悔恨은 그대로다.

“무릇 지식인이거나 언론인이면 권력과는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어야 [하]고. 그것은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대통령만 바뀌는 거예요.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예요.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 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서 또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 범진보의 정부에 대해서 어용진보지식인이 되려고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한 때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노무현을 비난했다. 수구기회주의 언론은 물론이려니와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신문>마저도 날마다 매질을 해댔다. 무방비로 난타당하는 동네북 신세였다. 하다 못해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도, 비가 와도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들 했다 (조기숙 2012: 95). 마치 “노무현 욕하기 올림픽”이 열린 듯이 너도 나도 뛰어들었다. 2003년 잠깐 부모님댁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나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출신이 미천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기득권층의 유치한 몽니로 생각했다. 도올선생님 말마따나 좀 한다는 집안에 며느리가 덜컥 들어왔는데, 집안도 학력도 인물도 변변찮은 며느리를 콧대높은 시어머니가 얼마나 무시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겠는가.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지식인들조차도 노무현 욕하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듯 “노무현 욕하기 월드컵”에서 온갖 재주를 뽐내고 있었다. 학자의 입에서 참여 정부가 “좌파 민주주의”고 “운동권 정권”이고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정권은 커녕 기본도 안된 형편없는 패거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고졸이고 그것도 상고출신이고 언행이 기존 기득권의 품격과 거리가 먼 천것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데, 자존심이 상하니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노무현씨가 무엇을 어찌 잘못했기에 그리 깎아내리냐는 말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노빠”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유시민씨의 말이 가슴에 팍 꽂히는 까닭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고 깨끗하게 지내야 되잖아요. 지식인은 권력에 굴종하면 안되지. 이래가지고 사정없이 깔 거라고. 전에도 그랬잖아요.” 참여정부가 초장부터 교육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파동, KBS사장 임명 파동, 화물연대 파업, 부안핵폐기장 파동 등으로 얻어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주로 노무현씨를 지지했던 진보 세력이 공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아팠다고 그는 회고했다. 당시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저런 처참한 비난을 받는 것인가?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노무현씨에 대한 비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여당 내에서도 비난에 직면했던 노무현씨가 좋은 인재를 뽑아서 일을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미숙한 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비난은 지나치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대통령이었나? 그러면 30년 가까이 해먹은 박정희 정권같은 “프로 정권”을 원하는가? 또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사람의 일이 모두 잘 되어가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프로인 박정희 정권은 하는 일마다 매끄럽게 추진되었고 매번 성공했는가?

소위 운동권 출신을 청와대에 기용해서 “운동권 정부”라면 각종 비리와 전과가 있는 자들을 장관에 기용하면 “비리 전과자 정부”인가? 아무리 논란이 있다 해도 6억원 이상 부동산에 대하여 중과세하는 것이 “좌파 민주주의”란 말인가?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에 사는 노인네들이 모여앉아 “종부세”를 한탄하며 노무현을 죽일 놈 만드는 것이 좌파 정권인가? 학문이 아닌 상식 선에서 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기득권을 틀어 쥔 세력들의 삐딱한 시기심이나 화풀이나 모략질(여럿이 작당을 해서 한 사람을 바보 만드는 짓)로 보였다.

어느날 나는 고대 병원에서 투석透析 중인 소정 선생님을 찾아뵙고 노무현씨의 잘못을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과도한 참여”라고 말씀하셨다. 노무현씨가 말이 너무 많고 과격하다는 말씀이셨다. 예를 들면, 노건평씨 사건 때 구차하게 형님을 편드는 얘기를 하지 말고 그냥 검찰이 법대로 조사해서 처리하는 것이라고만 말했어야 했다(박헌명 2016: 3). “한마디로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15). 꼭 긴요하고 꼭 맞는 말만을 최소로 하라는 말씀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문영 (2008)은 “나는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한다고 결정한 뒤에 대통령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을 과격이라고 본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살려준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를 옮기는 일에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대통령이, ‘나는 관습법이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라고 발언했던 것이 과격이다” 라고 적었다 (576쪽).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심쩍은 속내를 깨끗이 풀어내지는 못했다.  

소피스트와 386세대의 과격

이문영(2008)은 ‘국민의 정부’는 측근 정치를 다스리지 못해 부패가 만연했고, ‘참여정부’는 여당인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북한에 대한 과격한 조치를 취해 민심을 잃었다고 했다 (661쪽). 또 노무현씨가 좌파를 포함한 기회주의자들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574 쪽). 선생님은 이들을 잇속(욕심)이나 챙기는 소피스트나 대중영합주의자로 불렀다 (544, 618쪽). “… 나는 밭에는 돌이 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밭의 대부분은 흙이 메우지만 돌이 좀 있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흙이 적고 돌 천지인 경우이다. … 기회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좌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밭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흙’이어야 한다” (574-575 쪽).

이문영(2008)은 참여정부를 주도한 386세대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햇볕정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663쪽). “…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악한 정부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여 해직과 옥고를 치른 1970년대 운동의 불씨를 잘 살려냈어야 했다. ...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386세대를 자랑했는데, 386세대는 가장 무서웠던 때인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이들이 아니었다” (582쪽). “1980년대는 1970년대보다 덜 실존적이며 덜 무서운 때였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가 과다해졌고 과다한 요구만큼 잇속을 챙기려는 움직임도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662쪽).

나는 소정 선생님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중도 보수인 선생님의 입장에서 (500쪽) 권위주의를 파괴하고 격의隔意없이 일반 시민과 눈맞추는 지도자가 탐탁찮고, 세상이 뒤집어진 듯 (어제까지도 강자의 폭압에 눌려지냈던 자들이) 너도 나도 자기 몫을 주장하고 나서는 무질서함을 마땅찮아 하셨으리라.

반면 아직도 노무현이라면 치를 떨고 저주를 쏟아내는 기득권 세력의 “악다구니”에서 합리성을 눈꼽만큼도 찾기 어렵다. 각종 수치를 보아도 그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참여정부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훨씬 못미쳤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연극을 빙자한 <환생경제>에서 쏟아냈던 “노가리”, “육시戮屍랄 놈”,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불알 값을...”,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 등의 욕지거리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창조욕설”을 들으면서 박장대소를 하던 박근혜씨는 이제 수갑을 찬 채 부시시한 올림머리를 하고 깡마른 표정으로 재판정에 들어서는 피의자가 되었다. 義가 아닌 利를 탐한 “장사치 정권”과 스스로 비정상이면서 정상이라고 우겨댄 “엽기 변태 정권”아니었던가.

내가 경험한 지식인들의 노무현 욕하기는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월드컵 열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명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데 지극히 인색했다. 생각컨대, 노무현씨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강력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다 처참하게 짓밟혔고, 그들의 “노무현 왕따” 전략(혹은 프레임)에 걸려들어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난도질당하고 유린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인다.

“과도한 참여”란 무슨 뜻일까?

소정 선생님은 참여정부가 끝까지 참을 줄 몰랐다고 하셨다 (이문영 2008: 520). 나는 “과도한 참여”나 “과격”이라는 비판을 어렴풋이만 이해했다.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낯빛만 좋은 사람 치고 인자한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는 <論語> 學而篇을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386세대와 소피스트와 사학재단의 재산권 등에 관해서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孔孟> (梁惠王下)를 다시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비판하신 참여정부의 “과도한 참여”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樂者亦非也).”

이문영(2008)은 “...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말하자면 코드가 맞아서, 한덩어리가 되어 그 과격함이 극에 달하게 된다”고 적었다 (578쪽). 꼭 독재정권이 아니어도 순리를 거슬러 급격하고 과격한 정책을 펴는 정부도 문제이지만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잇속만을 탐하려 이합집산하는 시민사회도 과격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의 원형은 선생님의 <한국행정론> 서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자율성이 있는 社會團體의 형성을 주장하는 근본 취지는 官의 권력 남용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하는‘亂動을 불사하는 힘’과의 原色的인 對決을 회피하는 데 있다. … 原色的 對決의 결과는 혼란이며 이런 기회를 이용할 이는 정치면에서 극우와 좌익의 정치 단체들 뿐이다. 官·民 兩者의 원색적 대결을 회피하는 길은 좀더 合理化한 統治行政構造가 官쪽에서, 그리고 自律性 있는 社會集團[가] 民쪽에서 각각 형성되며, 후자에서 전자에 이르는 輿論과 要求의 供給路가 마련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문영 1980: vii).

“과도한 참여”라는 소정 선생님의 비판은 단지 참여정부와 노무현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군사독재처럼 권력을 남용하고 벌거벗은 힘을 휘둘렀다는 것이 아니다. 기회주의 언론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필요없는 말을 해서 불란을 자초하였다. 물론 대개는 “대통령 못해먹겠다”처럼 진의를 왜곡시킨 단장취의斷章取義와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침묵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의도와 다르게 종종 낯설고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시민보다 반 걸음이 아닌 서너 걸음을 앞서 간 죄이다.  

“과도한 참여”는 참여정부와 사회에서 소화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 과도한 요구에 가깝다. 그동안 기득권 세력에 짓눌려온 백성들이 운좋게 건져낸 승리에 도취하여 과욕을 부린 것이다. 선거에서 이긴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뽑아놓은 노무현이 알아서 구악을 청산하고 국민통합 시대를 열어주리라 기대했다. 스스로가 약자이고 대통령조차도 약자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의를 잊고 자기 잇속만을 생각하여 제멋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진보세력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천신만고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어 의욕을 펼치려던 노무현을 앞장서서 괴롭히고 뒤흔들고 물어뜯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유시민씨가 정말 힘들고 아팠던 대목이다. 기득권 세력의 파상 공세와 음흉한 “노무현 왕따” 전략에 진보 언론도 지식인도 넘어갔다. “노무현 욕하기”에 너도 나도 뛰어들었지만 그것이 수구 세력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노무현을 잃고 나서야 그 미련함이 자해행위였음을 깨닫고 “지못미”로 땅을 치고 통곡했다.  

벌거벗은 힘을 가진 上의 포악이 아니라 한마디로 下의 난동이었다. 잇속을 참지 못하고 부당한 요구를 쏟아낸 시민사회의 “과도한 참여”였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이 아닌 좀더 합리화한 統治·行政構造, 그리고 亂動을 不辭하는 힘이 아닌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는 社會集團이 兩者[가] 납득할 만한 관계 형성을 우리가 公開的적으로 볼 수가 있을 때 우리의 行政과 政治는 비로소 제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viii)고 했다.

“강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Strong Democracy (1984)의 저자 Benjamin Barber는 “[T]here can be no strong democratic legitimacy without ongoing talk” (p. 136)라고 말했다. 투표하고 나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다음 선거까지 입닥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끊임없이 토론과정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고 대안을 만들고 선출된 자들이 하는 짓을 잘 관찰하고 꾸짖어야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참여정부의 경우에는 정부의 못된 짓을 캐내어 고발하고 응징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다. 정부가 능력이 부족하고 미숙한 점은 있었다 해도 그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비난과 저주는 전혀 합당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자율성과 책임성을 가지고, 무책임한 요구와 과도한 참여를 자제했어야 했다. 기회주의 언론의 파상공세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이성과 증거에 근거하여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졌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철저한 반성과 참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보어용지식인”이 되자

요즘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가 인기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잘생겨서가 아니고 그가 내세우는 상식과 원칙 때문이다. 노무현씨는 개인의 실패를 아파했고, 그것으로 大義가 훼손되는 것을 못견뎌했다. 그래서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버리라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스스로를 버렸다. 어쩌면 그 자기희생이 광장의 촛불이 되어 상식과 원칙과 꿈을 밝혔는지 모른다. 이제 문재인이다. 참혹했던 지난 8년 세월에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먼저 녹록치 않은 지금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적폐 청산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어쩌면 참여정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유시민씨 말대로 청와대만 바뀌고 언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그대로다. 기득권 세력은 박근혜 최순실의 엽기 변태 행각 때문에 정권을 내줘을 뿐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과도한 요구와 참여를 자제해야 한다. 참고 인내해야 한다. 자신의 잇속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노동조합으로 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당장은 괴롭더라도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기다리면서 얽힌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또한 문재인과 박원순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예컨대, “주적”을 밝히라거나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떼쓰지 말라. 이기적이고 성급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기득권 세력에게 빌미를 주는 과격한 언동이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깨달은 것처럼 분열하지 말고 서로 단결하고, 나만이 아닌 이웃을 배려하고,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한 민주주의는 “진보어용지식인”을 원한다. 권력을 감시한다는 뜻은 비난하라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똑바로 따져서 일을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공정하게 평가하고 정당한 요구를 하라는 뜻이다. 촛불을 응시하던 절실한 눈으로 관찰하고 공부하고  토론하여 지혜를 모으고 힘을 길러야 한다. 촛불을 지키는 “진보어용지식인”과 “진보어용언론인”이 되보자.

참고문헌

박헌명. 2016. 정세균 의장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을까? <최소주의 행정학>  1(10): 1-4.
조기숙. 2012. <문재인이 이긴다>. 서울: 리얼텍스트.
Barber, Benjamin. R. 1984.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진보어용지식인"과 강한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5): 1-3.


전우용 교수가 지난 해 10월 26일 그의 트위터 방(histopian)에서 “노무현은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없앴고, 이명박은 대통령의 도덕성을 없앴으며, 박근혜는 드디어 대통령의 자격기준을 없앴습니다”라고 적었댄다. 참으로 재치있는 독설이다. 한마디로 시체나 금치산자가 아니라면 이젠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촛불민심은 어디로 갔는가?

이른바 “촛불대선” 혹은 “장미대선”이 끝을 향하고 있다. 박근혜씨가 탄핵을 당하여 파면된 후 60일 만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깜깜이 선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후보와 그들의 공약을 꼼꼼하게 검증하기에 너무 짧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60일이 아니라 60년을 줘도 크게 달라질 것같지 않다. 관련 법과 관행은 강자의 편을 들고 시민들의 참여를 최소화하고 있다. 차라리 선거에 관심을 끊고 살라는 뜻으로 읽힌다. 아직도 종북 좌파 소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보자 입에서 나온다. 케케묵은 지역주의과 색깔론(반공)에 찌든 유권자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 방식도 요식행위에 가깝다. 시간을 초단위로 재서 후보별로 “개인기”를 보여주는 학예회 수준이다. 이번에는 규칙을 바꿔가며 토론방법을 달리하고 있지만 후보, 방송사, 시민들 모두 낯설어하고 있다.  

어쨋든 우리는 열흘 안에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이번 선거에 15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역대 대선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전우용교수의 말대로 자격기준이 없어서인지 박근혜 정권에 책임이 있는 자들까지 몰려들었다. “네거티브”가 아닌 정책선거를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말꼬리잡기, 인신공격, 안보장사, 사상검증(종북좌파), 막말로 가고 있다. 똑같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가장 나쁜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촛불민심”은 사라지고 이전투구
泥田鬪狗만 남았다. 아직도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나쁜 구세력들이 원하는 구도다. 혼란을 부추겨 “다 그 놈이 그 놈”을 만드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천만 촛불을 밝힌 시대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벌써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뜻과 고통과 공포와 인내와 열정과 감동을... 가장 나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를 망각하고 당장 민주주의와 평화가 온 것처럼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닌지... 

이문영(1991: 84-103; 1996: 368-390)은 나쁜 정권이 악화되는 단계를 창세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설화에 빗대어 설명했다. 첫째 단계에서 정권은 말을 못하게 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지식인(대학)과 언론인과 종교인을 탄합한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다. 진리를 말하는 혹은 정권이 잘했나 못했나를 판정하는 시민사회를 망가뜨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주권자(신, 모든 권력의 근원)의 명령을 머슴인 정권 패거리(아담과 이브와 뱀)들이 거역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씨는 한국방송공사 정연주씨를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내쫓고 언론사와 방송통신위원회를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웠다. 국가정보원과 군대를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였고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았다. 

둘째 단계에서 정치경쟁자를 죽인다. 퇴임 후에 오히려 큰 지지와 사랑을 받은 노무현씨는 전직대통령은 커녕 일반 피의자만큼도 대우받지 못하고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른바 “친노”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말 그대로 폐족이 되었다. 창세기에서 장자인 카인이 시기심때문에 약자인 동생 아벨을 쳐죽인다. 세째 단계에서 국민 일반이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하고 타락한다. 개인이 나쁜 개인악이 아니라 사회 정치 구조가 나쁜 구조악이 지배한다. 이른바 사회 양극화, “묻지마 범죄”나 “갑질” 등이 구조악을 상징한다. 창세기에서는 신이 홍수를 내려 노아 식구들을 뺀 나머지를 쓸어버린다. 네째 단계는 정부가 전시효과를 노리고 큰 일을 내세운다. 한강 르네상스, 한반도 대운하,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삽질이다. 바벨이란 도시에 세운 탑을 보고 화가 난 신이 인간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것에 비유된다. 마지막 단계는 인접국가가 내정에 간섭할만큼 내부에서 통제력을 상실한다. 창세기에서 신은 구제불능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다. 북한 핵실험, THAAD 도입, 일본군 성노예(위안부가 아니라) 합의,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등은 갈 데까지 간 상황을 보여준다. 
  
후보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뽑아라

중요한 점은 이런 가장 나쁜 상태를 만들고 발전시켜 온 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단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선거가 치러진다는것이다. 박근혜씨와 최순실씨를 비롯한 각종 미꾸라지들이 감옥에 잡혀갔지만 황교안씨를 비롯한 수많은 부역자들이 아직도 건재하다. 이승만씨가 반민특위를 해체한 일이나 박근혜씨가 세월호참사특별위원회를 뭉갠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없는 청와대 압수수색을 방해하고 서둘러 대통령기록물을 지정하여 이관하는 것을 보라.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선거를 덮어 잠재운 솜씨 그대로다. 이번  탄핵사태로 보수(사실은 수구기회주의자들)가 죽었다지만 사실 몇 대 쥐어터지고 몇 군데 멍이 든 정도다.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라고 신이 탄식한 이유가 있다. 이번에도 상상을 벗어나는 “창조선거”를 기획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출마한 후보들이 “촛불민심”을 잊은 듯 서로 앞다투어 선심공약을 남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본다. 혜택을 주고 표를 사는 “돈뿌리기”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한다. “나라를 나라답게”하려면 일자리와 복지 공약보다는 원칙이 되는 큰 그림(생각틀)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박근혜·최순실의 변태정권을 퇴출시킨 촛불민심과 시대정신을 살려내야 한다. 아직도 부역자들은 책임지기는 커녕 개헌타령이나 하고 서민 행복을 말하고 친북좌파의 집권은 막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하루빨리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백성의 뜻에 따라 나쁜 상태를 하나씩 청산해야 한다. 왜곡되고 망가진 시민사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행정에서 합리주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은 후보나 공약이 아니라 우리의 시대정신을 뽑을 때다. 


원문: 박헌명. 2017. 가장 나쁜 상태에서 시대정신 살려내기. <최소주의행정학> 2(4): 1.

과연 그렇다면 시민의 비폭력 운동이면 충분한가? 독재자와 악한 정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악한 정권이 무서워하는 것은 시민들의 폭력과 난동이 아니다. 시민들이 자신이 저질러 놓은 나쁜 짓을 알아차리고 주권자로서 권리를 깨닫는 것을 싫어한다. 진실을 따져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밝혀내는 것을 주저한다. 사실과 진리를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주권자의 기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서 군중의 목소리로 외치는 것을 무서워한다. 시민들이 주먹질이 아닌 비폭력으로 질서있게 최소한의 요구를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흔들리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정당한 주장을 계속 요구하는 것을 괴롭게 생각한다. 

반면에 악한 정권은 시민들이 주권자임을 잊고 현실 문제에 무관심한 것을 좋아한다. 사실과 진실에 무감각한 시민들을 사랑한다. 시민들이 서로 비난하고 다투고, 단합하지 못하고 약속을 서로 어기고, 뿔뿔이 흩어지기를 원한다. 성난 시민들이 모여서 잇속이나 챙기고 부당한 주장을 남발하길 고대한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리고 그 난동이 그저 일회성 행사로 끝나기를 내심 바란다. 독재자들은 이런 시민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만만하기 때문이다.  

이문영(1996)은 중도中道를 잡아나가는 시민의 운동이 악한 정권을 몰아낼 수 있는데, 이렇게 執中하는 시민 운동의 뿌리를『논어』와『맹자』에서 찾았다. 시민 운동은 (1) 좌파나 우파 극단이 주도권을 잡는 운동을 멀리하고(620쪽), (2)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참여자간 합의가 존중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떳떳한 운동을 하고(620쪽), (3) 참여자간 동지애가 있어서 숙청이 아니라 관용과 합의를 하고(621쪽), (4)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신껏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기 위한 발언을 하지 않고—때에 맞추어 신중하고 공손하게 대중의 지지를 받는 꼭 할 말만 하고(622-623쪽), (5) 중용中庸을 실천하는 훌륭한 인물을 얻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진취적인 광자狂者나 융통성없이 올곧은 견자狷者와도 함께 하고(625-626쪽),1) (6) 설령 일이 잘못되어 불이익을 받는다 하더라도 올바른 말을 하고(628쪽), (7) 정권에게 빌붙어 귀여움을 받고 이름을 날리는 시골의 향원鄕原이 되지 않는다(628쪽).

바람직한 시민운동이란?   

이문영(1991)은 3·1독립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29 선언을 이끌어낸 6월 민주항쟁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바람직한 시민 운동의 특성을 밝혀냈다. (1)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부정했다, (2) 운동 참여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합의에 따라 행동했다, (3) 운동 참여자와 일반 시민들 간에 굳은 연대를 유지했다, (4) 이념 대립이 없는 단일한 요구(고유한 시민의 기본권리)를 하였다, (5) 운동 참여자들이 권력쟁취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했다(330-332쪽).2) 바람직하지 않은 시민 운동은 폭력을 사용하고, 참여자들 간 합의가 존중되지 않고,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다수의 요구를 하여 본질을 흐리고,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보다는 권력을 잡으려는 데 몰두한다. 

비폭력 운동이어야 한다

이문영의 비폭력은 (1)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고 “말”만 하며, (2) 완전한 비폭력을 철저하게 실천하며(어설프고 불완전한 비폭력이 아니라), (3) 통치자조차도 양심상 거부할 수 없는 합당한 말을 하며, (4) 옳은 말만 최소한으로 하며, (5) 법, 관습, 상식, 약속과 같은 객관성있고 합리성이 있는 기준에 의지하는 것이다(Park 2015: 290-291).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니다(이문영 2001: 246).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야 하는데(149쪽), 이런 성숙하고 완전한 약자의 대응이 악한 강자의 악행을 멈출 수 있다(이문영 2008: 59).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해도 합당한 말(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본권리나 진리)을 계속하는 일이다(이문영 1986: 295, 2001: 246). 백만 명이 넘는 촛불들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지만 폭력과 무질서가 없는 평화로운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 왜 비폭력인가? 포악한 정권이 쥐고 있는 것은 무기와 폭력이지만 약자인 시민이 갖고 있는 것은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이기 때문이다(이문영 2001: 88). 강자의 쿠데타와 폭력 뿐만 아니라 약자의 난동亂動과 폭력 모두 평화와 거리가 멀다(이문영 1986: 297). 다만 난동은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4·19 혁명과 같은 저항권의 행사나 항일독립군의 무력 활동을 뜻하지 않는다(297쪽). 만일 경찰이 무차별 폭력진압으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처럼 중무장한 게엄군이 시위대를 깔아뭉개려 한다면 주권자의 정당한 저항이 있을 뿐 난동은 없는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 문제가 아니라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생명과 주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지를 존중하고 합의를 존중하라

시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용하고 수단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하고 목적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문영 1991: 330). 이런 태도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리고 동지들 간의 합의에 따라 철저하게 함께 행동해야 한다(이문영 1991: 25, 330).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든 시민들이 자유발언으로 생각을 공유하고, 합의된 비폭력 투쟁을 위해 질서를 외치며 서로를 자제시키고,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인 집회에 불미스러운 일이나 지저분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바람직한 시민 운동의 모범이며 촛불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평화 그 자체다.

<이솝우화>에서 약자가 사는 비결(전략)은 포악한 강자를 피해서 살거나 지혜를 갖거나 단결하는 것이다(이문영 2001: 366). 개인의 인기를 위한 돌발행동은 참여자들을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호간 합의한 것을 깨뜨리는 짓이다. 시민 운동의 대열을 흩으려 나쁜 정권을 돕는 어리석은 짓이다. 야당이 공조하는 마당에 서로 가시돋힌 말을 주고 받는 것은 바람직한 운동과 거리가 멀다. 소위 “비박”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그들을 자극하는 언행은 어리석다. 강자의 폭력에 대항하는 약자는 서로 남을 탓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이문영 2001: 349). 추미애씨의 박근혜씨와의 양자회담 소동과 김무성씨와의 단독회담은 혼자만 잇속을 챙기려는 “단독 드리블”이며, 골을 넣어봤자 동지들과의 합의와 단결을 걷어차 버리는 자살골이다. 분열행위이며 이적행위일 뿐이다. 

시민의 호응과 연대를 도모하라

시민 운동은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호응과 연대連帶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문영 1991: 26, 330). 왜 그러한가? 민심이 천심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꽁꽁 묶이고 짓밟히더라도 시대정신을 본능으로 깨닫는다. 시인 이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일반 시민들이 공감하는 시민운동은 참여자의 폭을 확대시키고 운동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사원, 청소년, 장년층, 노년층까지 동참하였다.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에도 남녀노소는 물론 심지어는 박근혜씨를 찍었던 사람들까지 참여하여 평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주권자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단일한 요구를 하라

바람직한 시민운동은 “이념적 대립이 없는 단일한 요구”를 한다(이문영 1991: 330). 이 요구는 대개 시대정신으로 표현되는데 3·1운동은 독립, 4·19 혁명은 부정선거 규탄, 5·18은 민주화(군부독재청산), 6·29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 할 수있다(이문영 1991: 330). 무서운 상황에서는 신중하게 최소한의 행동에 집중해야 하며 가장 긴요한 요구 하나만을 주장한다(이문영 1991: 25-26). 여러 가지를 주장하게 되면 삼각뿔 바닥(꼭지가 아니라)으로 누르는 것처럼 시민 운동의 힘이 분산되고 효과는 반감된다(Park 2015: 291).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에 참여하여 촛불을 든 시민들은 무엇이 핵심이 되는 “한 가지 주장”인지를 잘 알고 있다.  

덜 무서운 상황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은 철저한 비폭력을 내세우지 않고(잡혀갈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래서 시민의 호응과 연대를 잃게 만들고, 영웅주의나 인기를 얻기 위해 과격한 말을 하고, 긴요하지도 않은 요구를 남발하여 시민운동의 초점과 역량을 분산시키고, 젯밥(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권력을 쥘 생각만 한다(이문영 1991: 673, 1996: 623).  

지금 촛불시위의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박근혜 퇴진이다. 즉각 퇴진은 불필요한 강조다. 질서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 임기단축개헌, 국정공백 최소, 거국내각총리, 책임총리, 특별검사, 국정조사, 탄핵 등은 본질에서 벗어난 곁다리다. 

대체 누구를 위한 질서이며 누구를 위한 명예인가? 주권자는 이미 아름다운 촛불시위로 질서와 명예를 보여줬는데,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인가? 질서와 명예를 내팽개친 정치권이 무슨 염치로 질서를 구걸하는가? 주권자가 “정치권의 무질서”를 통해 새 질서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는가? “질서있는 퇴진”이나 임기단축 개헌은 이래서 정치공작에 가깝다. 박근혜씨의 퇴진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과연 순순히 퇴진을 선언할까? 세 번의 대국민 담화는 변명과 푸념과 잔꾀로 시민들의 화를 돋구었다. 당장 검찰조사도 거부한 박씨인데 퇴진을 선언한다 한들 그 약속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임기를 채우도록 하겠다는 것 아닌가?  

박근혜 퇴진이 없는 한 거국내각총리든 책임총리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국정공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씨와 현 정권의 내각이 그 자체로 국정공백이거나 국정 위기인데 퇴진 말고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한일군사정보보호헙정과 국정역사교과서 문제만 해도 안하느니만 못한 짓이다. 소위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지,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것도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내치든 외치든 박근혜씨는 더 이상 어떠한 일도 벌이지 말아야 한다. 특히 외교와 군사에 관한 권한부터 당장 회수하여 국가안보를 확보해야 한다. 특별검사와 국정조사와 탄핵은 국회의 일이고 절차이지 핵심이 아니다. 이런 정치공작 냄새가 짙거나 곁다리 문제를 들먹거리는 것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본질을 호도하는(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불필요한 말이다.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단일한 요구를 하지 않고 쓸데없이 혼동과 분열을 초래하는 짓이다.  

60일 내에 선거를 왜 못하나?

많은 정치인, 학자, 평론가, 언론인들은 박근혜씨가 퇴진을 하면 60일 내에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우려하고 있다. 선거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고 후보를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질서있는 퇴진”을 주장하고 4개월이든 6개월이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합당한 말인가?

먼저 헌법 규정(60일 내 선거)을 그토록 금과옥조처럼 말하면서 왜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조항을 간과하는가? 60일이 그토록 절대불변인 조항인가? 주권자가 더 못참겠다며 퇴진을 요구하면 그만이다. 둘째, 60일 내에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다는 것은 정치권과 기득권의 입장일 뿐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위대한 이 나라의 백성들을 폄하하는 소리다. 주인이 머슴을 내치고 새로운 머슴을 뽑겠다고 나섰는데 머슴 후보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머뭇거리는 형국이다. 그런 후보들은 아예 대선에 나올 필요가 없다. 잠룡이든 정치인이든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인 줄 착각하고 있다. 세째,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씨를 걸러내지 못한 것이 어디 검증할 시간이 없어서였던가? 박근혜씨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엉터리 토론회를 되풀이한다면 60년을 줘도 소용이 없다. 제대로 된 검증절차와 노력이 있다면 60시간이라 해도 충분하다. 더 이상 60일을 핑계로 국민의 명령을 회피하지 말라.  
시대정신을 위해 자기희생하라

시민 운동 참여자들은 大義를 위해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무릇 민주화운동은 어긋난 原則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지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이문영 1991: 330). 원칙을 세우는 것이 대의이며 시대정신이다.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란 쿠데타 정부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민주화 요구를 하여, 그 대가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었다”(이문영 2008: 615-616). 대의가 아니라 개인의 잇속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기회주의자들은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운동을 발판으로 한몫(정권장악) 챙기려는 사기꾼들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먼 곳에서도 찾아와 오랜 시간동안 욕보고 있다. 주권자로서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대의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입을 모아 박근혜퇴진을 외치면서 시대정신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닥치고 “박근혜 퇴진”

결국 열쇠는 주권자인 백성들이 쥐고 있다. 한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쳐야 한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기다려라.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고 버텨내라. 악한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섣불리 감정을 폭발시켜 반격할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비폭력 촛불시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遍在]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이문영 1991: 29-30). “노예는 죽음을 무릅쓰고서야 자유인이 되며, ... 국가는 국민의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진정한 민주국가로 태어날 수 있다”(이문영 2001: 16). 왜 그러하냐? 박근혜씨나 잠룡이 아니라 백성이 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꿰뚤고 있는데, 정치인과 언론인 등이 쓸데없는 말로 본질을 흐리고 머뭇거리고 있다. 주권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간을 벌어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만 그 입을 다물라. 닥치고 “박근혜 퇴진”이 답이다.


1) “과·불급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인물을 얻어 더불어 할 수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나는 광자나 견자와 더불어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행하지 아니 해야 할 것은 의연히 하지 않는 바가 있는 확실한 인물들이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김용옥 2012: 844-848).

2) 이에 더하여 <이솝우화>에서는 약자에게 사물의 이치를 알고, 성의정심을 갖을 것을 권한다 (이문영 2001: 150-162). 먼저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사물을 알고, 안전한 곳을 알고, 적이 위장하고 기만하고, 욕심내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의정심誠意正心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알고(장단점, 역할, 잘못, 언행의 불일치), 헛된 소망을 갖지 않고, 욕심을 버린다.


참고문헌


김용옥. 2012.『맹자 사람의 길 下』서울: 통나무.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바람직한 시민운동 조건과 촛불시위.『 최소주의 행정학』 1(12): 2-4.

정세균 국회의장이 수난을 겪고 있다. 농림수산부장관 해임안을 9월 24일 본회의 차수를 바꾸어 표결에 부쳤고, 여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해임안은 통과되었다. 이에 앞서 대정부질문에서 국무위원들은 시간을 벌려는 듯이 일부러 길게 답을 했다. 자정이 가까와 오자 여당 원내대표는 밥먹을 시간도 안주냐며 의장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이른바 여당의 “필리밥스터”라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해임안 표결처리에 반발하여 여당대표는 정의장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했다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정의장이 죽든 자신이 죽든 끝장을 보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다른 여당 의원들도 동조해서 밖으로 뛰쳐나가 반공멸공 시위를 하듯이 정의장을 규탄하고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뜬금없고 우스꽝스런 허세일 뿐이다. 표결처리는 핑계일 뿐 국정감사를 파행으로 이끌어 박근혜씨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덮겠다는 의도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차에 마침 정의장이 꼬투리를 잡혀 애먼 시비거리가 된 것이다. 서슬을 시퍼렇게 세운 이정현씨든 정진석씨든 국정감사가 끝나면 아마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의장에게 다가가 인사도 하고 농담도 건넬 것이다. 애초부터 “의로움”이 아닌 “이로움”을 쫓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번 일은 어쩌다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이미 뿌리깊게 박힌 “진영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기득권을 둘러싼 힘겨루기이고, 그 잔상이 “필리밥스터”인 것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는 문제이다. 소정 선생심께서 계셨더라면 아마도 정의장은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권유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정치인이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나는 선생님께서 정의장에게 어떤 말씀을 당부하셨을지 궁금해진다. 특별히 당면한 상황을 어찌 인식해야 하는지, 국회의장의 일을 어떤 방향과 원칙으로 해나가야 할 지, 어떻게 처신를 해야 할지에 관한 말씀을 상상해본다. 정의장이 이미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겠지만,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비폭력과 최소주의에 중점을 둔 당부 말씀으로 적어본다. 

   
끝까지 참고 견뎌라


첫번째 말씀은 아마도 “참아라”였을 것이다(이문영 1991: 113-115).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어이다”(이문영 1986: 336). 순간 순간 짜증이 나고,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속으로 삭여야 한다.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쏟아내는 순간 그것이 끝이다. 되돌릴 수 없는 惡手다. 비폭력에서 시작하여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긴 여정을 참아야 한다(이문영 2001: 349). 현재 아무리 여소야대가 되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지금은 민생이 어려운 시기이고 경제와 안보가 위험한 상황이고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무서운 정국임을 직시하여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뎌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라(박헌명 2016다).


천부의 마음을 놓지 말아라


기득권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아무리 떼를 쓰고 난동을 부린다 해도 그들도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天賦의 마음이 있음을 잊지 말아라(이문영 1991: 44). “모든 나쁜 것은 官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民에서 나왔다”(이문영 1991: 42). 그들은 단지 나쁜 정치 구조 속에서 무조건 해먹는 것이 제일이라는 악을 배운 것이다. 친일파의 매국매족,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 쿠데타 등을 통해 무슨 수를 쓰든 수단방법 안가리고 권력을 잡고 봐야 한다는 악을 온 몸으로 배운 자들이다. 


하지만 그 기회주의자들도 반성하고 천부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설령 천부의 마음을 잊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며 패악질을 한다 해도 그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먹을 것이든 기본권이든 간에)은 주어져야 한다는 연민과 긍휼을 가져야 한다. 절대로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배타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이정현씨의 사생결단은 애초부터 빗나간 치기일 뿐이지만, 밉든 곱든 그들과 이 땅에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 저들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이웃이다. 그래도 한 켠에는 천부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놓지 말라. 이런 인간관은 종교를 초월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거지에게 적선하듯 나쁜 짓을 하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베푸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다스리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합리성과 객관성에 의지하라


모든 언행은 합리성과 객관성에 근거하라. 헌법과 법률의 내용에 따라서 판단해야 하고, 어떤 주장이 원칙과 이치에 맞는지를 따져야 한다. 합리성과 상식에 어긋나는 언행은 절대 하지 말라.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이문영 1986: 291-292). 특히 단순히 노여운 감정을 발산하는 행동은 상대방(힘센 자)의 강경대응으로 이어지는 어리석은 짓이다(이문영 1986: 297). 합리성에 비추어 문제가 있다면 세상없어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권력을 움켜쥔 자가 아닌 백성이 이 나라의 주권자이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는 민주공화국의 “최소”는 죽었다 깨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내용면에서 합리성을 확신할 수 없다면 절차를 따져본다.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각종 조례, 규칙, 절차를 따르는 것은 기본이다. 아랫사람에게 하나하나 물어서 국회법과 각종 절차를 따를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읽고 묻고 철저하게 공부하라. 지식을 습득하는 개인윤리이자 초월윤리의 두 번째 덕목이다. 토씨 하나가 중요한 대목에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그래서 앞으로 벌어질 각종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라. 또한 자연의 질서나 사회에서 보편성있게 받아들이는 규범과 상식을 존중하고 순종하라. 일단 다른 사람과 약속한 것은 당장 손해가 나더라도 무겁게 지켜라. 그만큼 합의를 신중하게 하라.  


이도 저도 기댈 데가 없는 사안이라면 최소한 객관성이라도 유지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하나씩 양보하거나 나눠줄 수도 있고, 한 쪽이 빵을 나누고 다른 쪽이 먼저 고르게 할 수도 있다. 의결정족수를 따져 다수결로 정할 수도 있다. 하다 못해 제비뽑기나 동전던지기를 할 수도 있고 제 3자에게 의견을 물어 정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성 있는 문제해결 방식을 찾아라. 물론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공정한 주고 받기를 낯설어 하고 불편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합리성과 객관성에 의지하여 일을 처리하라. 


주먹질이 아닌 말로 하라


국회의장이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生死가 갈리는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방이 아무리 불손하게 대들고 패악질을 해댄다 해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초월윤리의 첫번째 덕목인 비폭력이다. 여기서 폭력은 실제 폭력행위과 위협을 구분하지 않는다. 발길질도 폭력이고 주먹을 코앞에 들이밀고 윽박지르는 것도 폭력이다. 폭력에 물리력을 동원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언어폭력일 수도 있고, 몸짓 폭력일 수도 있고(예컨대, 손가락욕), 심리 폭력일 수도 있다. 강한 자가 하든 약한 자가 하든, 웃사람이 하든 아랫사람이 하든 폭력은 폭력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측근 비리에 침묵하고 판결지침을 내린다 해도 국회의장으로서 거친 언동과 난동은 자제해야 한다. 법원에서 야당에게 불리한 판결을 거듭해서 내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회주의자들이 음흉하게 폭력을 유도하는 계략을 펼칠 때에 주의해야 한다. 험한 말폭력에 똑같이 대응하는 것은 정치판에 대한 혐오감을 키울 뿐이다. 정치불신과 무관심을 조장하려는 잔머리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기득권의 논리에 빠져들면 답이 없다. 소정 선생님의 민주화 운동의 화두가 “정부도 거절하지 못하는 말을 하되 말만 한다”였음을 상기하라(이문영 2008: 497).


폭력을 거두고 차분하게 이치에 닿는 말을 하여 상대방과 백성의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 국회를 대표해서 할 수 있고 해야 할 말을 해야 한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과 합리성에 의지하여 진심을 담아 당당하게 말을 하라. 국회가 백성을 대의하는 기관인 이상 백성의 입장을 끈질기게 고수하여 행정부와 사법부에 맞서면 된다. 예컨대, 지난 9월 1일 정기국회 개회사는 民意를 대변하는 국회의 본분에 충실한 말이다. 그래서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말하는 것이다(이문영 1986: 290, 1991: 322, 2001: 246).  


합당한 말을 하라


주먹질을 하지 말고 말을 계속 하되, 꼭 합당한 말을 하라. 패악질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옳은 말을 계속 하라. 무방비로 매를 맞는다 해도 (부당한 비난을 받는다 해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대통령이 싫어한다고 입을 다물고, 여당이 기분나빠한다고 주저하고, 야당이 꺼려한다고 멈칫하고, 공무원들이 반발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국회의장의 본분을 망각한 일이다. 정의장이 박근혜씨가 싫어할 것같다며 현안인 THAAD 배치에 대해 침묵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장관 해임안이 통과된 뒤에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의례 인사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장관을 해임하는 것이 순리이고 공론에 따라 THAAD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위협하거나, 떼쓰거나, 조롱하는 식이 아니라) 말했었야 했다. 서로 얼굴을 붉힐 수도 있겠지만 계속 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면 합당한 말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통치자도 가지고 있는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며 이 이성을 환기하는 말”이다(이문영: 2008: 66, 80, 435). 정말 이치에 꼭 들어맞고 합당해서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못할 만큼 옳은 말이다. 진리다. 심지어는 박근혜, 이정현, 정진석, 김무성씨조차도 차마 양심상 반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말의 효과가 커진다. 물론 그들이 자기최면을 걸어 이치에 합당한 말을 무시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으나, 자기 양심을 영원히 속이거나 백성의 양심까지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만큼 정의장은 그 상황에 꼭 맞는 그런 말(진리)를 찾도록 애써야 한다. 


기회주의자의 궤변에 놀아나지 말라


주의할 것은 기회주의자들의 음흉한 말장난에 놀아나면 안된다. 그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합리성과 객관성을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유리한 대로 말을 바꾸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면 안된다. 소피스트들의 비열한 말법에 넘어가면 안된다. 오감을 자극하며 주의를 끄는 궤변 속에 비수와 함정이 여기저기 감춰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여당의원들은 정의장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지만,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을 강행처리한 후에는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비아냥거렸던 자들이다. 국정원과 군대가 개입한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게 불복하는 것이냐고 윽박질렀지만, 2002년 대선에서 불복하고 재검표를 요구했던 자들이다. 그때 그때 이익을 쫓아 말을 바꾸고, 속이고, 윽박지르고, 떼를 쓰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정의장은 “그들의 합리성” 안쪽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속내(이해관계나 욕심)를 날카롭게 꿰뚫어 봐야 한다(이문영 1991: 120). 그 합리성이라는 거죽은 보통 입장(position 혹은stance)으로 표현되는데, 기회주의자들은 종종 속내와는 다른 입장을 내세워 상대방을 헷갈리게 한다. 따라서 기회주의자들의 궤변을 원칙과 기준에 비춰 차분하게 가늠해봐야 한다. 말폭력에 밀려서, 세력 싸움에 밀려서 아무런 생각없이 “허허허” 방심하면 안된다. 그 순간 死地에 들어서는 것이다. 중정과 안기부 직원들이 곱게 말하면서 회유할 때 도장을 찍으면 바로 죽은 목숨이다. 살아도 이미 산 목숨이 아니다. 소위 “덕장형” 의원이나 “신사의원”이라는 정의장이 특별히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싸움꾼은 감을 가지고 싸운다”(이문영 2008: 346)는 말 뜻을 깊이 새기라.


철저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한다(이문영 2001: 149). 어설픈 비폭력은 폭력과 마찬가지다.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이성이 아닌 감성을 자극하여 불필요한 대립을 초래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말하는 표정, 발음, 높고 낮음, 몸짓 모두 상대방을 쓸데없이 흥분시켜서는 안된다(박헌명 2016나). 욕설은 물론이려니와 무심코 내뱉은 가시돋은 말, 빈정대는 농담, 불쾌한 눈빛 모두를 피해야 한다. 입에서 나왔다고 다 말이 아니다. 말 형식만을 빌린 폭행에 가까운 말이며 사실상 폭력이다(이문영 1986: 242, 2008: 246).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는데(이문영 2008: 59), 이것이 철저한 비폭력이다.


특히 강자가 악랄한 폭력을 행사해올수록 더 철저하게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이문영 1986: 289). 악한 통치자가 일부러 음흉한 폭력을 밑밥으로 던져 약자의 분노를 유발하고 성숙하지 못한 폭력을 유도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양아치들의 잔꾀에 넘어가면 더 잔혹한 폭력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채야 한다. 그렇다고 악한 강자의 협박과 물리력에 못이겨 옳지 않은 말을 하거나 비굴하게 진리(옳은 말)를 더듬거려서는 안된다. 어느 상황에서든 오호 감정을 잘 다스려 자신의 정당한 의사표시를 충실하게 전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신사의원”이라는 정의장에게 굳이 철저한 비폭력을 거듭 강조하는 까닭을 곱씹어보았으면 한다.   


“교과서 읽기” 신공을 연마하라


무서운 상황에 직면할수록,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노와 흥분과 긴장과 두려움을 억누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얕잡아 보거나,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감정 모두 위험하다. 마음을 끝까지 집중하지 못하고 흩으리는 순간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찰라의 방심, 티끌같은 실수가 빌미가 되어 삽시간에 적들의 십자포화를 받게 될 것이다. 진리에 가까운 옳은 말을 찾아냈어도 제대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달변일 필요는 없다. 감정을 죽이면서 필요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때 “교과서 읽기”는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Park 2016). 교과서를 읽듯이,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옳은 말을 또박또막 읽어나가면 된다. 특히 소정 선생님 말투처럼 좀 어눌하게 찍어눌러 말하면 효과가 배가 된다. 그렇다고 “발연기”하듯이 티를 내거나 상대방을 약올리는 듯한 느낌을 주면 안된다. 좋고 싫은 감정을 완전히 죽이고 그냥 평서문에 가깝게 발언을 하면 된다. 정진석씨의 밥타령에 대꾸하지 말고, 예컨대, “국회법에 의하면 ... 입니다”라고 일러주면 그만이다. 물론 이런 神工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체득할 수밖에 없다. 위기 상황에서 치열하게 참고 견디는 과정에서 온 몸으로, “감”으로 느껴야 한다.


꼭 필요한 말만 최소한으로 하라


합당한 말을 하되 꼭 필요한 말만 하라. 가장 절실한 실존적 발언 혹은 최소한의 발언을 말한다. 말하자면 “긴요한 최소행동”을 하라(이문영 1991: 25). 먼저 불필요한 말을 해서 기회주의자들을 자극하거나 그들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본회의장에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정진석씨와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밥먹을 시간 30분은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규칙을 말하고 그의 시비질에 일절 대꾸하지 말았어야 했다. 붓다도 말같잖은 궤변에 대응하지 않고 침묵했다.


노무현씨도 노건평씨에 대한 의혹으로 몰렸을 때 방송에 나와서 구구절절 친형을 변명하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간단히 “그러면 검찰이 조사하도록 하자”라고만 답했어야 했다. 조사해서 죄가 있으면 죄값을 받으면 되고 아니면 의혹을 제기한 자가 책임을 지면 된다. 방송에서 친형을 옹호한다 한들 누가 믿을 것인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며 간절한 말이 아니었다. 기회주의자들이 의혹을 증폭시키고 압박을 강화하는데 활용한 불쏘시개였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박근혜씨가 최순실 등 측근들에 대한 수많은  의혹이 사실이 아닌 비방, 폭로, 유언비어라고 깎아내린 것은 말은 짧되 불필요한 말만 한 것이다. 어차피 그대로 믿을 사람도 없으며, 죄가 있고 없음은 대통령이 아니라 검찰과 판사의 몫이다. 


다른 하나는 가장 중요한 말만 최소로 하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 여러 개 있더라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것 하나만 말해라. 상황이 어려울수록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손바닥을 삼각뿔 꼭지로 누를 때가 삼각뿔 바닥으로 누를 때보다 아픈 법이다(Park 2015: 291). 이것 저것 말이 많으면 정작 필요한 것을 얻기 어렵다. 고구마 줄기를 잡아다니면 주렁주렁 고구마가 매달려 올라오듯이, 그런 핵심 고리가 되는 줄기를 찾아서 집중해서 말하라. 


마지막까지 때를 잘 기다려라


말을 하는 것도 때가 있다. 말을 계속하라는 의미는 쉬지 말고 입을 놀리라는 뜻이 아니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다. 남이 꼬드긴다고 해도, 협박을 한다고 해도, 매질이든 한다 해도 옳은 말을 하라는 뜻이다. 단 말을 해야 하는 때를 잘 포착해야 한다. 맹수가 먹이에게 달려들 순간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항상 입을 열어 이 소리 저 소리를 늘어놓으면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다. 말의 값이 싸구려가 된다. 


말을 해야 하는 때는 대개 옳은 말을 하기가 어려운 때다. 옳은 말이지만 직접 나서서 말하기 껄끄러운 상황이나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받는 때다. 이런 때가 말의 값이 비쌀 때다. 말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이 마지막 순간까지 말을 아끼면서, 기회주의자들의 난동을 잘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그 순간을  포착한 다음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행동해야 한다. 반박자라도 늦거나 빠르면 맹수는 먹이의 명줄을 물어뜯기 어렵다. 어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그 정점을 기다려 주저하지 말고 적의 급소에 “진리라는 칼”을 깊숙히 찔러넣어라. 물론 이치에 합당한 최소한의 말이어야 한다. 그런 진리를 사자후獅子吼로 위엄있게 토해내라.   


약자인 여당에게 관용을 베풀라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보면 야당 국회의장은 왕조같은 체제에서 약자에 해당한다. 입법부가 행정부에 종속되어 있는 한(여당이 청와대에 휘둘리는 상황에서) 국회의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지만 국회 내에서 보면 국회의장은 강자다. 한편으로는 제왕의 폭정을 참고 견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인 여당이 힘을 동원하는 “약자의 패악질”을 참고 견뎌야 한다. 전자가 인고(persistence)라면 후자는 관용(tolerance)에 가깝다. 서로 지위와 힘이 다른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다. 


정의장은 국회 내에서 소수인 여당의원들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과 규칙 내에서 더 배려하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콩쥐의 새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팥쥐가 아닌 콩쥐에게 더 관심을 둬야 하는 이치와 같다(이문영 1991: 230). 초월윤리의 세 번째 덕목인 사회윤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용은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기회주의자들의 막무가내를 예방할 수 있다. 주먹질이 아닌 말로 대화하도록 이끌 것이다. “진영 논리”가 아닌 합리성에 비추어 의견을 견주도록 할 것이다. 그 결과 합의와 협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합의모색은 초월윤리의 두 번째 덕목인 개인윤리이다. 


하지만 모든 패악질과 난동을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당이 국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하여 판을 뒤엎는 것은 잘못이다. 장관 해임안을 국회법에 따라 처리한 것은 여당이 즐거움을 못얻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국회의장을 규탄하고 고소한 것은 지나친 난동이다. 반면에 국회의장으로서 여당의원의 기본권을 외면한다면 이것 역시 잘못한 것이다. 만일 국회의장이 이승만씨와 박정희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여당의원들을 물리력을 동원하여 내쫓거나 강금하고 투표를 강행했다면 국회의장은 그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마땅하다.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孔孟 』「梁惠王」下 4장).
따라서 천부의 마음을 갖고 여당 의원들을 적이나 원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 보고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지켜봐주라. 관용을 베풀어 대화를 유도하고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 다만 부당하게 上을 비난하고 판을 뒤엎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물론 폭력이 아닌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해야 할 것을 안하는 것보다는, 마땅히 안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쁘다(이문영 1996: 420). 국회의장이라는 자리를 권위와 권리와 명예로 생각하지 말고 책임과 의무와 멍에로 받아들여라.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권위가 있고 힘이 있는 법이다. 일을 그르치면 권위도 명예도 없다. 권위는 그 자리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만들고 다듬어야 한다(박헌명 2016가). 조지훈 선생님의 말씀대로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공식 업무는 물론이려니와 업무 외의 언행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본인은 물론 친지와 측근을 잘 다스려 조심하도록 하라. 김대중 정부가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측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허물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기억하라. 그러니 밖에서 저승사자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처럼 경계해야 한다. 국정원이든 사이버사령부든 아무리 뒤지고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는 듯한 무서운 때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라고 말씀하셨다(이문영 1991: 19).


관행과 관습은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부당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관행과 관습이 있다면 합리성과 객관성을 따져서 고쳐라. 법인카드로 방울토마토 사고 명품 지갑을 사는 것이 관행이라면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 적법성과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누가 그런 것을 용납하겠는가? 국회의장의 권한과 예우도 잘 따져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라. 자신의 권위를 다지고 키우는 일이다.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이자 스스로 가진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기희생의 길이다.  


인터넷에서도 참아라


요즘 Facebook, Youtube, Twitter 등 유권자와 대화가 가능한 인터넷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런 사회매체(Social media)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치 견해, 최근 활동 등을 유권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쌍방향 소통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실제 대화에 몰입해서는 안된다. 본인이 바쁜 것도 바쁜 것이지만, 유권자와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거나 정치인 입장의 모호성을 해치는 일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Stromer-Galley 2000). 유권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인터넷에 오래 머무는 것은 실익이 없다. 인터넷에서 대화는 쉽게 걷잡을 수 없는 언쟁(flaming)으로 번질 수 있다. 본전도 챙기지 못하는 선택이다. 또한 사회논란이 있는 특정 사안에 대해 찬반을 밝히라는 요구에 섯불리 답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기회주의자들이 “사상검증”을 한다면서 다그쳤을 때 빨갱이가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치는 격이다. 그래봤자 믿어줄 사람도 없고 잘해봤자 순진무구일 뿐이다. 그러니 국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사회매체에서도 참아야 한다.


정치인으로서 유권자와 쌍방향 소통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이론과 명분과 당위와 다른 길에 있다. 이런 당위와 현실간의 긴장을 모호함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 첫째, 직접 Facebook을 열어보지 말고 계정관리자가 잘 정리해온 유권자의 의견을 파악하라. 바로 답글을 다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의견을 듣고 협의를 한 뒤에 관리자를 통하여 소통을 하는 것이 좋다. 계정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위를 환기시켜야 한다. 아무리 짧은 글이나 단순한 사진이라도 충분히 협의를 거쳐서 게재하도록 한다. 특히 실무자 개인의 감정과 선택으로 답하고 사진을 올리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조그마한 실수와 방심이 기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시비거리가 되고 반격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어 국회의장의 전범이 되시라


소정 선생님은 정의장이 비폭력에서 개인윤리, 사회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윤리를 실천하여 평화로운 국회를 구현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무모한 진영 대결로는 民意를 대변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이다. “자칭 보수”들에게 휘둘려서도 안되지만 똑같이 폭력으로 대응해서도 안된다. 폭력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옳은 말을 계속 해 나가는 비폭력이 절실할 때다. 주먹질과 발길질과 말폭력을 자제하면서 “말로 하는 국회”로 바꿔나가야 한다. 옳은 말로 경쟁을 하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의장이 폭력 구도를 극복하고 야당은 물론이려니와 여당에서도 인정하는 국회의장의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 후세에 議長典範으로 오래 불리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박헌명. 2016가.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최소주의 행정학』1(4): 1-3.

박헌명. 2016나. 이문영의 비폭력과 현실적 이상주의.『 최소주의 행정학』1(6): 1-2. 
박헌명. 2016다.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이문영. 1986.『겁많은 자의 용기』, 2판. 서울: 중원문화.
이문영. 1991.『자전적 행정학』서울: 실천문학. 
이문영. 1996.『논어맹자와 행정학』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1.『인간 종교 국가』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8.『겁많은 자의 용기: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서울: 삼인.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Park, Hun Myoung. 2016.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in Conflict Management: Lee’s Nonviolence, Conflict Episode, and Principled Negoti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6(2): 99-108.


Stromer-Galley, Jennifer. 2000. on-Line Interaction and Why Candidates Avoid It. Journal of Communication 50(4): 111-132.




원문: 박헌명. 2016. 정세균 의장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을까? <최소주의 행정학> 1(10): 1-4.


처음으로 식구들을 데리고 나들이에 나섰다. 오래된 동무가 사는 동네에 가서 산에도 올라보고 온천에도 다니면서 며칠 쉬었다 올 생각이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뒷간에 갈 일이 생겼다. 

길게 바닥까지 내려앉은 소변기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소변기 밑에 사방 30cm가 되는 타일이 한 줄로 깔려서 바닥에서 높이 1cm 정도가 되는 턱을 만들고 있었다. 소변기에서 타일 끝까지의 거리가 아주 묘해서 적당히 타일을 밟고 있으면 서 있기가 불안했다. 볼 일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완전히 타일 위로 올라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소변기 가까이에 가도록 했다. 이런 뒷간을 전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이런 만듦새는 말하지 않고도 그 뜻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소변기를 깨끗하게 쓰라느니, 소변기에 가까이 가서 일을 보라느니 잔소리하지 않는다. 서로 말하고 듣기 민망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볼일을 보러 간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뜻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자연스레 그 뜻을 깨닫고 따르도록 한다. 말없이 손자가 제 길을 갈 수 있게 끔 자연스레 이끌어 주는 할머니의 따스함이다. 좋은 정부는 일방적으로 백성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지향한다. 이런 것이 무위無爲이다. 폭군이 나서서 뭔가를 한다고 설쳐대는 유의有爲와 대조된다 (이문영 2001: 250). 

어느 음악방송에서 남자들이 뒷간을 사용하는 버릇을 지적한 것이 생각난다. 소변기에 가까이 가지 않고 일을 보면 오줌이 바닥에 튀게 되고, 다음 사람은 튄 오줌을 밟지 않으려고 더 멀리서 일을 보게 되고, 그러면 청소하는 분들이 애를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뒷간에 “한 걸음만 앞으로” 혹은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사회가 좀 더 밝아진다는 것이다. 

얼핏 듣기에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얘기다. 실제 휴게소 뒷간에서 이런 문구를 보고 정말이었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하지만 왠지 불편하다. “한 걸음만 앞으로”는 그렇다 쳐도 “남자가 흘리지...”는 지나치다 싶다. 왜 하필 남자이며, 왜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구태여 여성주의(faminism)나 수컷질(machoism)과 연관짓고 싶지는 않다. 벌이나 파리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소변기 얘기가 나올 때에는 헛웃음이 나온다. 화살로 과녁을 맞추듯이 조준을 하도록 유도한댄다. 남자들이 (여자들과는 달리) 똥오줌을 못가리는, 그래서 계몽이 필요한 철부지란 말인가? 이런 지경이니 어느 뒷간의 소변기에 그려놓은 여자의 앞태와 뒤태는 더 말하여 무엇하리. 이런 정신줄이라면 여자 뒷간에 무엇을 그려놓았을 것인가? 그냥 재미삼아 그랬다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이런 계몽문구는 말이 아니라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유위·무위를 따지기 이전의 문제다. 

정부(국토해양부)는 2010년부터 길가는 시민들이 오른쪽으로 걷도록 했다. 길가는 사람들이 서로 부딫히거나 차에 치이는 것을 방지한다는 취지에 토달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불쾌하다. “편리하고 안전한 우측보행! 세계 그리고 우리의 보행문화입니다.” 정부의 선전문구다. 우측보행은 미국·캐나다·일본 등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고 한다. 문명인은 우측보행을 한다는 문구도 보았다. 어떤 이는 드디어 선진교통국가 대열에 오른다고 흥분하였다. 정말 우측보행이 좌측보행에 비해 편리하고 안전한가? 우측보행만 하면 선진교통국이 되는가? 정말 야만인만이 좌측보행을 하는가? 이 모두가 역린逆鱗을 건드는 말폭력이다.

강준만(2008)에 의하면 조선통독부가 1921년 12월 1일부터 좌측통행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2009년까지 90여년 간 한국은 좌측보행을 해왔다. 당시 소방대원이 부른 ‘교통선전가’에는 “행보는 문명인의 거동, 좌측통행은 그의 표징...”이라고 되어 있다 (강준만 2008).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두고 문명인 어쩌구 하는 것이 재미있다. 90년이 지나도 정신줄이 똑같으니 말이다. 조선총독부나 (독도 문제 등으로) 친일 딱지를 떼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나  지독하게도 일관성이 있으니 말이다.

걸어가는 방향이 왼쪽이 좋은지 오른쪽이 좋은지는 사람들의 생활 습성에 달린 문제다. 자동차가 많은 사회라면 자동차 운전방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문명과 야만을 결정짓는다면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정말 그러하다면 반대편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죄다 잡아다가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야만인처럼 길거리에서 벌거벗고 다니고, 머리끄댕이 잡고 쌈박질을 해대고, 아무데서나 먹고 자고 볼일을 보는 등의 행위를 용납하는 문명국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캐나다·일본에서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고 처벌받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우측보행이 문명인의 거동이라는 것일까? 한국은 90년 동안 야만국이었고, 2010년부터 드디어 문명국으로 개화되었다는 소리인가? 그럼 좌측보행을 하는 일본(이명박 정부의 선전문구는 거짓이다)은 아직도 야만국이라는 소리인가? 당장이라도 눈과 귀를 깨끗이 씻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핵심은 왼쪽·오른쪽이 아니다. 문명·야만도 아니다. 물론 국민의 편리와 안전도 아니다. 그저 정부와 공무원의 완장질일 뿐이다. 有爲이다. 백성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찾아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방침을 정해놓고 이것 저것을 동원하여 정당화를 시킨다. 조현오 경찰권력이 벌인 “삼색신호등” 소동에서 보듯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별 상관하지 않는다. 구호를 만들고 표어를 붙이고 어깨띠를 두른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문명을 거부하는 야만인이나 정부를 뒤엎으려는 빨갱이로 몰아 압박한다. 그리고 무슨 비판이 있어도 강제로 밀어붙인다. 실제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얼마나 안전한지, 얼마나 편리한지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다.  

아마도 권력자와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모든 국민들이 줄지어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흐뭇해 할 것이다. 완장질하는 그 짜릿한 ‘손맛’을 어찌 잊을 것인가. 호루라기를 불거나 깃발을 흔드는 대로 사람들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는 그런 마법을 말이다. 하지만 유치한 것으로 치면 교실서 떠든 동무 이름을 칠판에 적는 줄반장의 완장질과 매한가지일 뿐이다.   

이런 有爲가 백성을 화나게 한다. 백성을 보살피는 행정이 아니라 권력자와 공무원 스스로 즐기는 자위自慰일 뿐이다. 백성을 무지하고 어리석은 철딱서니로 취급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뭉개는 행위다. 구호나 표어나 어깨띠로 백성을 줄세우고 훈계한다.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아니라 어용御用 언론이나 조직을 동원하여 백성을 들볶는다. 원래 취지와 무관하게 백성을 노엽게 한다. 북한 인권문제는 북한인권법을 만들면 되고, 테러가 걱정되면 테러방지법을 만들면 된다는 정신줄이다. 세상 참 편하게 사는 인간들이다. 내가 뒷간 소변기 만듦새를 無爲처럼 귀하게 살펴본 이유가 있다.      


참고문헌


강준만. 2008.『한국근대사 산책 7: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인물과 사상사.



원문: 박헌명. 2016. 뒷간 만듦새, 우측보행, 그리고 무위 행정. <최소주의행정학> 1(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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