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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본문

민주주의로 가는 길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못골 2019. 5. 16. 12:34

소정 선생님은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으로 진화하는 초월윤리를 정부관료제(행정개혁)에 적용하면서 “모든 나쁜 것은 官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民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1991: 42). 또한 악은 민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는 정권에서 나온다고 했다(2008: 268). 나는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부관료제가 제대로 설계되고 운영되지 않으면 백성들을 괴롭힐  뿐이지만, 그렇다손 쳐도 관료제(통치행정구조)가 모든 악의 씨앗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모든 좋은 것은 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다

여기서 民은 재야, 야당, 노조, 대학, 언론기관, 종교단체 등의 사회단체(시민사회)를 말하고 官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포함하여 통치자, 정권(여당), 정부관료제라 할 수 있다. 民은 나라의 주인이고 官은 민의 머슴이다. 정부 관료는 머슴처럼 주인의 일을 대신 해주고 녹을 받는 공복이다. 이런 존재의 차이를 생각했을 때 나랏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주인의 관심사지 애초부터  머슴(공복)의 관심사가 아니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民과 官의 좋은 행동은 무엇이고 나쁜 행동은 무엇일까? 좋은 시민사회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관이 일을 잘하는지를 감시하고 필요한 조치를 요구한다. 그 반대는 주인이라는 생각없이 잇속을 위해 망언과 망동을 서슴치 않는다. 합리적인 압력과 저항이 민의 좋은 행동이라면 책임회피와 어리석은 난동은 민의 나쁜 행동이다. 좋은 정부관료제(통치자)는 민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공복임을 마음에 새겨 주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그 반대는 백성의 머슴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잇속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다. 주인을 섬기기는 커녕 합리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비폭력 저항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한다.

民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면 官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관이 민의 좋은 행동을 배운다고 했지만 사실은 민의 감시와 압력과 저항 때문에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은 애초부터 좋은 행동을 할 의지가 없다. 오직 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합당한 일을 시켜야 관이 나쁜 행동을 못하게 된다. 주인이 게으르고 어리석다면 머슴은 주인을 우습게 보고 머리꼭대기에 올라앉는다. 주인이 경우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거나 패악질을 부리면 머슴들은 분수도 모르고 기고만장하여 주인의 상투들 틀어쥔다. 이런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머슴이 있다면 정신이 멀쩡하지 않거나 어딘가가 고장난 공복이다. 이런 미련한 머슴을 보고 감동을 받고 정신을 차리는 주인은 거의 없다. 나라 일을 크게 망치고 자신까지 망친 뒤에야 스스로의 무책임과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이다.

관의 나쁜 것을 민이 배운다

중요한 것은 民이 官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배운다는 점이다. 민의 나쁜 행동을 관이 배울 필요는 없다. 민이 주인이기를 포기하거나 난동을 피우면 관은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마음껏 해먹게 되어있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닌데 구태여 책임감을 가지고 법과 절차를 준수할 까닭이 있을까? 통치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법 위에 군림하면 약육강식의 난장판이 된다. 폭정과 무질서는 백성을 옥죄고 약탈한다. 통치자의 욕심은 채울수록 갈증만 더해간다. 끝내는 정권의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법은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1986: 289).

대혼란에서 民은 공정한 법과 절차를 기대할 수 없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찍어누를 뿐만 아니라 강자끼리도 서로 더 해먹겠다고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백성들도 아비규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아귀다툼을 한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금품을 건넨다. 민이 관의 나쁜 행동을 배우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부지불식 중에 닮아가게 된다. 지금 우리의 비루함은 그런 친일냉전독재의 그림자는 아닐는지. 사회 구석구석에 “갑질”과 “왕따”가 제도화되어 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빨갱이, 좌파독재라는 주술은 여전하다. 법과 합리성과 도덕과 양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모든 폐해는 결국 백성의 몫이다.

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주인이 어리석어 주인노릇을 못하면 머슴은 일은 안하고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서로 “코드가” 맞아서 과격함이 극에 달한다(2008: 578). 그런데 머슴은 스스로 잘못을 수정하고 퇴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官의 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것은 어쨋든 민이다. 국민과 정부와의 관계에서 온기의 원천은 국민이다(2001: 42). 民의 비폭력 투쟁이다.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가 통치자를 향하여 악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해야 바로잡힌다”(2008: 65).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1991: 30).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호응을 얻어 잔치가 되고 널리 감동을 만들어 내면 官은 바뀔 수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기는 통치자는 없다. 전두환을 굴복시킨 6.10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를 쫓아버린 촛불혁명 역시 주인임을 자각한 시민들의 감동어린 잔치였다.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세상의 주인은 민이다. 하지만 슬기롭고 부지런하고 용기있는 주인만이 주인노릇을 할 수 있고 주인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머슴(통치자나 관료제)의 언행을 지켜봐야 한다. 경우에 맞는 요구를 하되 시비를 철저히 가려서 못된 버릇을 고쳐가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최소주의행정학> 4(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