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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본문

비폭력과 최소주의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못골 2019. 4. 11. 14:27
지난 23일 노회찬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인터넷 게시물의 조회수를 조작한 “드루킹” 김동원 일당이 건넨 돈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사건이 불거진 후 줄곧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유서에서 4천만 원을 대가없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예기치 못한 비보에 많은 시민들이 지역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소를 찾았다. 여야는 물론이려니와 수구냉전 세력까지도 이심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폭염에도 조문객이 7만 명에 이르렀다니... 하물며 진보가 빨갱이로 낙인찍힌 나라에서. 

유시민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정의롭고 품격있는 논객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준 운동가였다. 척박한 토양에서 진보정치를 대중화시킨 정치가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잃었다. 어이없는 일이었고, 허무한 일이었고, 안타까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없이 서글픈 일이었다. 며칠 동안 비몽사몽으로 헤매다가 깨어난 느낌이다. 


품격있는 화객

사람들은 노회찬을 비유의 달인이라고 했다. 촌철살인의 대가라고도 불렀다.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난 50년 동안 삼겹살을 궈먹은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가 일갈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일반 시민들의 시각과 정서를 담은 말이었다. 기존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노회찬은 사람들이 평소 말하고 싶었던 얘기와 강자에게 따지고 싶었던 얘기를 조리있게 다듬어 쉽고 간결하게 풀어냈다. 고갱이를 가려내어 짜임새있게 엮어낸 뒤 잘 발효시킨 말이었다. 구성지게 뽑아낸 가락이었다. 논리가 있고 해학이 있었다. 설득력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시원하고 통괘했다. 수구세력의 억지와 궤변과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가 출현했던 <뉴스공장>의 꼭지 이름은 “노르가즘”이 되었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대체 불가”였다. 그는 인간이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품격있고 멋진 화객話客이었다.

노회찬의 말은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서 경우에 맞는 말이었고 힘이 있는 말이었다. 이런 생생한 사실과 진리를 비유를 통해 완곡하게 표현했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전달했다. 그는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려고 애썼지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인간의 품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주제에 집중했지 사람(상대방을 비난하는 데)에 매달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성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말이었다(2008: 66). 이러한 노회찬의 말법은 상대방의 논지나 주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과 보복을 무력화시켰다. 이성과 상식에 꼭맞는 말이어서 상대방이 차마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폭력이며 최소주의다. 진중권씨의 말이 살인검이라면 노회찬의 말은 활인검이라 할 수 있다.  


도덕 결벽증? 자기희생?

노회찬은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라는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어리석게 처리한 일을 자책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어쩌면 노회찬의 선택은 진보세력의 과도한 도덕 결벽潔癖이나 강박일는지 모른다. 수구냉전 세력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사면증(면죄부)을 지닌 자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만 소위 진보세력은 사소한 실수라도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마냥 고개를 쳐박고 다닌다. 폭력을 완비한 강자의 자신만만과 강자에게 당한 악몽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약자의 피해의식이랄까?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듯 강자가 약자의 도덕성을 따지고 든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민간인 드루킹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민주주의 파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약자의 도덕 결벽증을 노리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논법이다.  

노회찬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세력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덕 결벽증을 경계한 말이다.

노회찬은 원망하지도 않았고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대로 현실의 엄격한 요구를 아프게 받아들였다. 혹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힐난했지만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물은 것이다.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해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잘못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세비도 당에 주고 당에서 최소 월급을 타왔던 사람이었다. 현직에게 특혜를 주고 도전자의 손발을 묶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그가 받은 돈은 올바르게 처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노회찬도 지키지 못할 정치자금법이라 꼬집은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당이 어려워지는 것을 더 우려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당이나 진보세력 전체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제 특별활동비가 혁파될 것이며, 정치자금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의 희생이 아프고 슬프다. 

참고문헌

구영식.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한겨레21> 1223호.  2018.7.31.



원문: 박헌명. 2018.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최소주의행정학> 3(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