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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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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일본 정부는 한국으로 수출되는 불화수소를 포함한 3개 품목에 대한 규제강화를 발표했다. 나아가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조치이며 불공정한 경제보복이라고 보았다. 박근혜 정권에서 강행한 성노예피해자 문제에 대한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고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에 대한 아베 정부의 분노와 응징이라는 것이다. 비상한 상황으로 규정한 문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여 경제체질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정치갈등으로 경제협력의 틀을 깨버린 이번 조치는 부당하며 양국 모두에게 큰 피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도전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다. 기업들은 해당 품목을 확보하고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들은 일본방문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혐한으로 치닫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차분하고 경우에 맞는 대응이다.

토착왜구와 식민사관의 잔재

하지만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수구세력들은 모든 것이 문재인 정권의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권력서열 1위였던 최순실의 존재를 들켜 한순간에 정권을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한이 묻어난다. 그들은 문정권이 좌파 이념에 매몰되어 이분법으로 국민을 갈라놓고 있다고 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정치보복을 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여론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야당과의 협치를 포기한 독재정권이라고도 했다. 최저임금인상과 같은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밀어붙여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고, 부질없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다가 한미일 관계만 파탄냈다고 했다. 성노예피해자 관련 합의를 파기하고 징용피해자 배상판결을 이끌어 아베 정권의 화를 돋구어 끝내 경제보복을 자초했다는 시각이다. 어느 수구신문은 일본어판에 “한국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나 “반일로 한국을 망쳐 일본을 돕는 매국 문재인 정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광복 70주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꿈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다.

나는 얼마 전 사람들과 한일 갈등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덕을 봤는데 이제와서 딴 소리냐고 했다. 다른 이는 일본이 얼마나 부강한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대들고 있다고 혀를 찼다. 한국 정부가 국제공조를 추진하든 일본과 협상을 하든 결국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이다. 정치꾼이야 그렇다 쳐도 교육수준이나 소득수준이 상위급인 분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토착왜구”까지는 아니어도 부지불식 중에 식민사관에 젖어든 정신세계라는 생각이다. 일본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일본은 부자이고 선진국이고 우리는 아니다. 그러니 일본이 아니면 안된다. 알랑거리든 싹싹 빌든 우네부네 하든 무조건 일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감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들다니... 세상사는 이치를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아닌가. 힘센 자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주고 힘없는 자는 가혹하게 짓밟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거늘...

그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지혜나 요령이라며 훈수한다. 하지만 자존自尊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심리상태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줄이며 양아치의 생존법이다. 강자에게 죽도록 매맞은 기억으로 몸서리치는 피해의식이다. 강자가 눈만 흘겨도 똥오줌싸고 까무라치는 수준이다. 이성과 양심이 아닌 힘의 논리에 충실한 셈법이다. 야만의 약육강식 그대로다. 일본에 특사를 보내라는 주장은 사실상 (어차피 항복해야 하니까) 조국 수석을 볼모로 보내고 아베에게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三跪九叩頭禮) 잘못했다고 싹싹 빌라는 충고다. 분기탱천한 아베는 더한 것도 요구할 기세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제3국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묵살하여 3권분립을 해체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포기하자는 소리다. 어차피 바위에 계란치기인데 명분이 밥먹여주는가, 당장 살아 남아야 할 것 아니냐라는 식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서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을사오적의 변과 다를 바 없다.

매맞으면서도 할 말은 하라

왜 겨뤄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꼬리를 내려야 하나? 왜 트럼프나 아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는가? 언제나 강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양국의 우호인가? 트럼프의 요구대로 방위비 분담금을 올려주고 아베가 원하는 대로 대법원 판결을 뭉개고 투항하면 우리에게 평화는 오는가? 양아치는 단물을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코가 꿰인 먹잇감을 허투루 놔주는 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힘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무서움을 극복하고 부당함에 맞설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아베 정권의 수출품목 규제강화는 난해한 경제문제와 남북문제와는 달리 옳고 그름이 명백하다. 애초부터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 책임에 연결된 문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핵심은 보편적 인권 문제다. 정답은 자명하다. 다만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小丁 선생님은 강자에게 고통받는 약자는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1986: 294). 폭력을 휘두르는 정권은 자기가 정한 법도 지키지 못할만큼 허약하고 정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민의 불복종 운동(비폭력투쟁)으로 붕괴가 된다(1986: 297). 하지만 여기서 비폭력은 강자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자포자기로 매만 맞으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을지언정 할 말을 계속 하는 것이다(1991: 118). 상대방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사실과 지극히 옳은 말만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감정을 자제하고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만을 해야 한다(1996: 56).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1980: 384). 약자가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다(1991: 18; 2001: 149).

비폭력 투쟁과 불매운동

지금 문재인 정부와 국민의 대응은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 투쟁에 가깝다. 특히 경제 우위를 앞세워 대화를 거부하고 강공으로 일관하고 있는 아베 정권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차분하게 일반론과 원칙론으로 맞서고 있다. 국제무역 질서와 관행은 물론 상식으로 봐도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가 경제보복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일본의 도발과 협박과 무례에도 불구하고 문대통령은 감정을 흐트리지 않고 합당한 말만 하고 있다. 비폭력 투쟁이다.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라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낭독하는 듯하다. 갈등과 긴장을 노리는 아베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인 벽창호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음인지 지난 25일 일본 지식인 75명이 아베 정권에게 규제강화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많은 시민들이 일본여행을 취소하거나 자제하고 있다. 일본제품을 팔거나 사지않는 운동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불매운동은 일본인에 대한 혐오나 적대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권경화씨는 일본여행을 취소한 시민들에게 무료로 머리를 깎아준다고 했다. 일본 손님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일본 TBS의 질문에 당연히 깎아준다고 답했다고 했다. 우리의 불매운동이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아닌 보편적 인도주의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는 공약삼장에 충실한 운동이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얼마 전 조국 민정수석이 그의 FaceBook에 적었다는 글이다. 그는 아베 정권의 궤변에 동조해 대법원과 정부를 매도하는 수구 정치인과 언론의 행태가 개탄스럽다고도 했다. 법을 공부한 그가 일제의 식민지배, 한일청구권협정,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등에 관한 의견을 적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민정수석이라는 지위와 의사소통 방식에 비추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자기정치에 열을 올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나대지 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어야 마땅한 그런 상식적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 일본의 국력은 우리보다 낫다. 하지만 2019년은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교할 수 없었던 1919년과 크게 다르다. 일본은 국토가 우리의 3.6배나 넓고, 인구는 1억 3천 명(2.5배)이고 2019년 예산은 9천 2백억 달러(2.3배)에 이른다. 2017년 국내총생산은 4조 3천억 달러(3.1배), 2018년 수출은 7천 3백억 달러(1.2배), 수입은 7천 5백억 달러(1.4배)로 근접하고 있다. 일인당 GDP는 4만 달러대 3만 달러이지만 최근 경제성장률이 2-3%인 우리가 1% 미만인 일본을 따라잡고 있다. 하우머치닷넷이 발표한 GDP대비 국가부채율은 2017년 기준 우리가 40%인데 비해 일본은 무려 238%다. 세계 최대의 채무국의 민낯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한국의 왕조에 의지하고 살았던 약소국이었다. 20세기 한 때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일본이 지난 30년 내내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그동안 각종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시도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부활을 획책하는 극우세력들이 일본을 퇴화시키고 있다. 사실과 역사가 아닌 신화를 믿고 사는 왜구倭寇의 난동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과거 공주 우금치에서 2만 명의 동학군이 2백 명의 일본군에게 비참하게 무너졌던 조선이나 무기력하게 경술국치를 당한 대한제국이 더이상 아니다. 어엿한 OECD와 G20 회원국으로서 강대국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성장과 힘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깨어있는 촛불이 우리의 힘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촛불을 밝히는 국민이다. 백년 전 3.1 운동 이후, 4.19 혁명(1960),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 6월 항쟁(1987)를 거쳐 촛불혁명(2016)으로 진화한 국민이다. 왕조시절에도 나라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왔다. 광화문 광장에 켜진 백만 촛불은 끈질긴 투쟁의 함성이자 우리의 자부심이다. 이는 사무라이 습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이 감히 꿈꾸지 못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다. 우리는 일본을 얕잡아봐서도 안되지만 막연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학대해서도 안된다. 깨어있는 촛불 국민은 침착하고 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백년 전 총칼 앞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만세를 외쳤던 그 마음, 3년 전 촛불을 들고 얼어붙은 광장을 밝혔던 그 마음이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심을 성심껏 받들면 된다.

한쪽이 자신의 힘만 믿고 막무가내로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다면 다른 한쪽의 선택은 쉽다. 똑같이 감정을 폭발하고 발길질로 대응하면 이전투구가 될 뿐이다. 막나가는 폭력과는 정반대로 합리성과 보편성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을 벌여야 한다. 냉철한 자세로 진리를 말하면서 인내하고 견뎌내야 한다. 뱉은 말도 뒤집고 갈팡질팡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정권은 나라 안팎에서 정당성을 잃는다. 대의大義가 아닌 잇속을 차리려는 자들이 끝도 없이 멋대로 굴기 때문이다. 앞다투어 욕심을 채우다가 수틀리면 서로 치고 박다가 스스로 망한다. 어차피 지금의 경제보복은 어느 한쪽이 사달이 나야 끝날 것 같은 상황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절제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서로 단결하여 고통을 나누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배타적 감정이 아닌 인류애와 동포애로 서로 다독이며 버텨내야 한다. 2019년 경제독립 운동의 공약삼장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의 비폭력 투쟁. <최소주의행정학> 4(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