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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어째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가? 본문

비폭력과 최소주의

어째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가?

못골 2019. 4. 7. 21:30

촛불시위가 전국 곳곳에 타오르고 있다. 지난 달 26일 서울에만 150만명이 모였고 전국에서 19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청와대는 물론 정치권도 놀랐을 것이다. 민심이 이렇게까지 뜨겁고 무서운 것인가 하며 탄식했을 것이다. 아마도 집회에 나선 시민들 스스로도 놀라고 또 감격했을 것이다. 주권자로서 박근혜씨에게 배신과 치욕을 당한 울분을 너도 똑같이 느꼈구나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이다. 길거리로 뛰쳐나온 2백만 시민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박근혜퇴진만을 외치는 촛불시위에 세계가 주목하고 감탄하고 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남녀노소가 촛불을 들고 참가자들의 발언을 듣고 공연을 즐기는 모습은 그 자체가 평화로움이다. 대규모 비폭력 촛불시위가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그러면 왜  비폭력인가? 인간의 기본권이나 윤리로 보면 비폭력이 정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비폭력이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시민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참 나쁜 통치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박사모가 때리면 그냥 맞으라고 하는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뜬금없는 패악질을 이긴단 말인가? 과연 촛불시위가 헌법을 유린하고도 적반하장인 박근혜씨를 무릎꿇릴 수 있을까? 그러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어떤 논리와 근거와 당위가 있을까?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 까닭

폭력을 대체하는 대안은 똑같은 폭력일 수 없다(이문영 1986: 290). 어차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약자의 대안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말”이며, 한마디로 비폭력이다(290,  294쪽). 통치자의 폭력에 대항하여 시민이 폭력으로 맞서면 전쟁이 일어난다(344 쪽). 시민의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문영은 (1) “폭력에 기반을 둔 정권은 강한 것이 아니라 허약”하고, (2) 폭력 정권은 무리수를 거듭하다가 자신의 말조차도 어길 만큼 통제력을 잃게 되는데, (3) 이런 정권은 자기비대화를 계속 하다 끝내는 스스로 망하게 되기 때문에, (4) 시민의 철저한 비폭력 투쟁으로도 족하다고 설명하였다(297-298 쪽). 

폭력 정권은 허약하다  

먼저 폭력 정권은 정당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수많은 헛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뿌리깊은 허약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정권유지를 위해 기꺼이 값비싼 통치비용을 지불한다. 시작부터 합리성과 상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말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나쁜 통치자는 백성들을 주권자는 커녕 대화 상대로도 여기지 않고 그저 찍어 눌러야 하는 피지배 계급으로 간주한다. 백성들이 통치자의 명령을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폭력으로 강제하지 않고서는 일을 추진할 수 없다. 말보다는 주먹질이고 발길질이며, 하는 일마다 무리수다. 

불만을 해소시켜주지 못하고 억누르기만 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반란이 일어날까봐 안절부절이다. 밤낮으로 정적을 감시하고 탄압하는데 몰두한다. 조그마한 일에도 과민반응이어서 애먼 사람을 잡는다.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희극이나 영화를 참아내지 못한다.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 관용성도 극빈한 정권이다. 유언비어라 몰아붙이고 빨갱이 종북 딱지를 붙이고, 응징하라고 뒤에서 압력을 넣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이런 통치비용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게 되면서 “고비용 저효율 저효과”가 지속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회 곳곳에서 고장이 나게 된다.  
  
폭력으로 일어선 정권은 그 자체로 백성들 편에 설 수 없다. 설령 통치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 해도 정권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부역자들(지지자, 재벌, 언론 등)이 용납하지 않는다. 주고 받는 셈법은 어디나 공평하다. 통치자는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탐욕을 채워줘야 한다. 공직을 나눠주고, 부역자들을 편드는 정책을 만들고, 권력으로 협박해서 돈을 뜯는다. 통치자와 부역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음껏 폭력을 휘두른다. 애초부터 의로움이 아닌 잇속으로 달려들어 정권을 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 “몹쓸 법”을 뜯어고치거나 새로운 악법을 만든다(이문영 1986: 340). 예컨대,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를 남발하여 정적을 찍어눌렀다. 이명박 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위해 법규정을 멋대로 바꾸었다.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세월호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개성공단 폐쇄 등)은 이제서야 겨우 실마리를 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멀쩡하게 돌아갈 까닭이 없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난장판이 된다. 

폭력 정권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작은 충격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하다. 장기미전향수 한 명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적화통일이 된다는 정신줄은 악한 정권의 허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나라가 있다면 어차피 망할 것이니 차라리 빨리 망하는 것이 훨씬 낫다.   

폭력 정권은 자신의 말조차 어긴다  

둘째, 폭력 정권은 자신이 제정한 법도 지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정권은 아랫 사람과 의논하여 합의를 보지 않고 그저 찍어 누르고, 자신을 위장하여 감추고, 교묘한 말로 속이고, 약속을 어겨서 일을 한다(이문영 2001: 240).  이와 같은 무리수를 거듭하다 보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자신이 만든 악법조차도 지키지 않게 된다(이문영 1986: 289, 340).

헌법을 능멸한 통치자가 헌법대로 법대로 하자며 버티고 있다. 국정농단을 주도한 자가 이제와서 선의로 추진한 일인데 주변을 살피지 못했을 뿐이라며 남이야기 하듯 한다. 뜬금없이 총리후보자를 지명해놓고 느닷없이 국회의장실로 쳐들어가 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통보한다. 세번째 “담화문”에서 박근혜씨는 “친박”과 “비박”의 갈등을 알면서도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말한다. 교묘한 말로 위기(탄핵)를 모면해보려는 협잡挾雜이다. 검찰과 특별검사 조사를 성실하게 받겠다고 약속했지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아직까지 검찰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박근혜씨다.   

깜냥이 안되면서도 완장차고 자리만 꿰찬 “끝발”들은 잇속을 차리려 눈에 불을 켜고 너도 나도 뒷골목까지 샅샅이 뒤집는다. 이런 판국에 약육강식 외에 무슨 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악법이든 아니든 통치자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키지 않게 된다. 무법천지가 되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야만野蠻이 판치게 된다. 이런 패악질을 하다 보면 끝발들끼리 부딪히게 되어 있고, 자기들끼리도 주먹다짐을 하거나 칼을 섞게 된다. 나쁜 정권의 끊임없는 “자기 비대화”라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19, 1996: 405). 

이문영은 가장 나쁜 통치로 진행되는 상태를 (1) 선과 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언론(신문, 방송, 대학, 종교 등)을 망가뜨리고, (2) 정적을 제거하고, (3) 백성 일반이(어린 아이까지도) 타락하고, (4) 바벨탑같은 전시효과를 노린 정책을 밀어붙이고, (5) 인접국가조차 포기하고 방치한다고 적었다(이문영 1991: 87-103, 2001: 184-202).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저질렀던 짓을 살펴서 귀납방법으로 유추한 결론일 것이다. “언로를 막는 정부는 언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이 자체 생산된 언론을 믿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단속한다”(이문영 1986: 316). 각종 의혹을 제기하면 유언비어로 치부되고 범죄행위로 규정된다. 김구, 여운형, 김대중 등이 암살되거나 죽을 고비를 겪었고, 정권에 밉보인 사람들이 각종 정치공작과 악법에 희생되었다. 이런 참담함이 계속되면서 상식과 도덕과 윤리가 아닌 돈과 권력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일을 상기해 보자. 언론신뢰도 1위를 이끌던 정연주씨가 KBS사장자리에서 쫓겨났으나, 대법원이 정사장의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퇴임 후 더 큰 사랑을 받던 노무현씨는 절벽 끝으로 밀려버렸고 “친노”들은 폐족이 되었다. “묻지마 범죄,”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갑질” 등 사회가 병든 조짐이 여기 저기서 보인다. 4대강 사업은 걸쭉한 “녹차라떼”를 확산시키면서 악취나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견인했다. 자원외교를 한답시고 엉터리 사업을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글로벌 호구”를 자처했다. 대북관계는 강경으로 치닫다가 매번 여기 저기서 쥐어터지고, 대책도 없이 북한이 쏘아대는 미사일만 하나 둘 셈하고 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옛소녀”들의 손을 뿌리치고 한사코 사과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돈을 받았다. 또 한일정보보호협정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인 THAAD 도입을 강했하였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박정희씨의 유신시대, 전두환씨의 폭압시절, “이명박근혜”씨의 엽기시대는 이런 점에서 맞닿아 있다.  

폭력 정권은 스스로 망한다  

세째, 폭력 정권은 시민의 비폭력 투쟁으로 스스로 붕괴된다(이문영 1986: 297). 악한 통치자가 위장을 하고, 교묘한 말을 하고, 약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하고, 통치자 자신을 실패케 하고 끝내는 스스로 멸망케 한다 (이문영 2001: 136-147). “남을 파괴하는 이는 본래 자신도 파괴하는 것”이다(157쪽). 못난 짓을 하는 악한 정권은 적에 의해 망하기보다 자기 스스로가 망하게 된다(이문영 2008: 346-347). 거듭되는 무리수로 무질서도(entropy)가 커지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무력과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지만 불신과 불만과 원망이 가속화되면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잇속을 탐하면서 통치자 자신과 백성을 타락시킨다. 법과 질서가 무력화되면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더 강한 자가 덜 강한 자의 것을 빼앗는 일이 벌어진다. 나쁜 정권이 최소한의 이성을 상실하고 막무가내로 나가면 정권 내 사람들마저도 흔들리게 된다(이문영 2008: 368). 기강이 무너져 명령을 내려도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나아가 자기편 끼리도 칼부림을 벌이는 상황이 된다. 사회가 멀쩡하게 돌아갈 까닭이 없으니 어디서든 시한폭탄의 시침이 째깍째깍 돌아간다. 국민방위군 사건, 사사오입개헌, 부산정치파동, 3·15부정선거 등 끝 간 데 모르고 해먹다가 하와이로 쫓겨간 이승만씨나 유신정권까지 세워 장기집권을 꿈꾸다 충복인 김재규씨에게 총맞아 죽은 박정희씨를 상기해 보라.  

철저한 비폭력 투쟁으로 족하다

마지막으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평화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이문영 1986: 289). 강자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비대케 하여 종국에는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없애지만, 약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과 타인을 살려낸다(이문영 2001: 148). 약자의 자기희생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비폭력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통치자도 거부할 수 없는 옳은 말(주권재민 등)을 최소한의 요구로 계속 한다. 폭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차분하게 비폭력의 길을 가면 된다(이문영 1986: 289).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면서 평화롭게 비폭력 투쟁을 잔치처럼 즐기면 된다. 박근혜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시위에서 전인권이 말한 “폼나는 촛불시위”는 이래서 멋있다. 

“어차피 쿠데타 정부는 넘어지게 되어 있고, ... 다만 재야가 과격해지지 말아야 이 사람들이 파쇼화하는 구실을 안주게 된다”(이문영 2008: 391). 만일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전개하면 자체 분열로 치닫던 폭력 세력들(예컨대, 독재자, 어용언론, 어용학자, 재벌가)이 서로 단결하여 폭력 투쟁을 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폭력 정권의 정당성만을 북돋을 뿐이다(이문영 1986: 297). 만일 박근혜퇴진  촛불시위가 폭력으로 치닫는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친박,” 국정원, 검찰, 경찰이 무시무시한 폭력을 들이밀고 달려들 것이다. 폭력 정권이 이미 허약하여 시민의 저항에 대처하지 못하면 정권의 강경파가 득세하여 폭력 투쟁을 진압하고 더 폭력적인 정권을 수립한다(297-298쪽). 행여 운이 좋아 시민들이 폭력 투쟁으로 폭력 정권을 무너뜨린다 해도 새 질서를 관리할 대안을 내지 못한다(298쪽). 시민운동에서 義가 아닌 잇속을 노린 자들이기 때문에 기껏 해봤자 또 다른 나쁜 정권을 세워 못난 짓을 계속할 것이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

요컨대, 폭력 정권은 말보다는 주먹으로 잇속을 챙기느라 혈안이 된다. 멈추지 않는 “자기비대화”는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서로 격려하면서 지치지 말고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 비폭력이다(박헌명 2006). 주권을 가진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정당한 요구를 계속할 따름이다. 이래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

참고문헌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이문영. 1986.『겁많은 자의 용기』, 2판. 서울: 중원문화.
이문영. 1991.『자전적 행정학』서울: 실천문학. 
이문영. 1996.『논어맹자와 행정학』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1.『인간 종교 국가』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8.『겁많은 자의 용기: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서울: 삼인.



원문: 박헌명. 2016. 어째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가? <최소주의행정학> 1(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