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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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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5일 국무총리 황교안씨가 경북 성주군을 방문하였다. 미국의 미사일요격체계라는 THAAD기지를 그 지역에 배치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다가 여섯 시간 동안 군민들에게 곤혹을 당하였다. 일부 성난 군민들은 황씨에게 고함을 지르고, 소금을 뿌리고, 물병과 달걀을 던졌다고 한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손나발을 불어댄다. 감히 국무총리에게 패악질을 했다느니, 불법 폭력시위를 했다느니, 공무집행방해와 교통방해를 저질렀다느니, 감금죄를 물어야 한다느니, 불순한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느니, 종북좌파가 어쩌느니 연일 떠들어 댄다. 왜 미군기지를 성주에 설치해야 하는지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정승에게 달걀을 던진 불경스런 백성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를 앞다투어 따지고 있다.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나간 박근혜씨를 대신해서 황씨가 총대를 메고 귀중한 ‘매값’을 벌어온 셈이다. 과연 성주군민들은 이런 돌팔매질을 당해 마땅한가?  

왕과 정승의 ‘매값’

백성들이 왕이나 정승에게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드물다. 불경죄로 볼기가 너널거리도록 곤장을 맞거나 아예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장돌을 던진다면 백성들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뜻이다. 일상의 문제해결절차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공포와 분노와 흥분으로 몸서리치고 있다는 소리다. 몇가지 사례를 더듬어보자. 

2015년 4월 16일 전남 진도에 있는 세월호 참사대책본부를 찾은 국무총리 정홍원씨는 분노한 실종자 식구들에게 물 세례를 받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던 국무총리 정운찬씨가 2009년 11월 28일 세종시(충남 연기)에서, 12월 12일 대전 KBS에서 달걀 세례를 받았다. 1999년 6월 3일에는 일본을 방문하려던 김영삼씨가 김포공항에서 박의정씨에게 빨간 페인트가 들어있는 달걀을 맞았다.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이유에서다.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씨는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강행하다가 밀가루와 달걀을 덮어쓰고 학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하였다. 문교부장관 시절 전교조 교사들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굴비엮듯이 줄줄이 끌어갔고 1,500여명을 교단에서 내쫓은 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달걀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왕은 노무현씨다. 김영삼씨의 삼당합당에 반대한 후 1990년 부산역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 2001년 5월 22일 방문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서 봉변을 당했다.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소환된 2009년 4월 30일에는 타고 있던 버스에 달걀이 날아들었다. 이회창씨(2007년 11월 13일 대구)와 이명박씨 (2007년 12월 3일 의정부)도 달걀을 맞기도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한편 한강인도교를 폭파하고 대구로 도망간 이승만씨와 왜놈들에게 쫓겨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난 선조 이연씨는 무슨 욕지거리를 들었을까?  

정원식씨는 학생들의 움직임을 알고서도 평소처럼 강의를 나갔다. 무방비 상태에서 난타당하는 국무총리의 처참한 모습을 내외언론에 생생하게 전했으니 ‘매값’을 두둑히 받아낸 셈이다. 대학생 20여명이 잡혀가서 실형을 받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공고화했다. 김영삼씨에게 닭알을 투척한 박씨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정홍원씨나 정운찬씨는 사태가 하도 험악해서 처벌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반하여 노무현씨는 “정치인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냐.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2011년 11월 필리핀에서 군사협정에 반대하는 시민들로부터 달걀을 맞은 클린턴 부인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매값’을 구걸하는 자와 주권자의 매질을 달게 받는 자가 이렇게 다르다.    

성주군민의 죄

그러면 성주군민들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먼저 그들은 약자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듯 자기 동네에 미군기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덜컥 미군기지 배치를 결정한 정권은 강자다. 약자를 우습게 여기고 힘으로 찍어 누르는 우악스러운 통치자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강자다.

성주를 방문한 황교안씨에게 군민들이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길을 가로막고, 물병을 던지고, 소금을 뿌리고, 달걀을 던진 것은 분명 지나쳤다.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행동임이 분명하고 물리력을 동원하여 황씨의 생명을 위협한 것은 아니지만, 성숙되지 않은 군중의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이문영은 “비폭력이란 통치자에게 폭력을 당하더라도 약자는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 (2008: 68-69)이라고 밝히고, “돌만 던지지 말라.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 (1986: 292)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1986: 291)고 역설했다. 유감스럽게도 성주군민들은 권위주의 정권의 속임수(“제발 뺨이라도 갈겨줍쇼. 아님 욕이라도 해줍쇼.”)에 말려든 것이다.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 피치자인 국민에게 주는 신호는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호이다” (1986: 289). 

그리고 폭력은 물리력은 물론 언어, 심리, 감정 등을 동원한 폭력 모두를 의미한다. 교묘한 말을 하여 감정을 흐트리거나, 힐난을 하는 것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깝다. 이문영은 다음과 같이 ‘말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였다. 그러니까 성주군민 일부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은 것은 비폭력이 아니라 말폭력이다. 

“상황 1에서 예수의 비폭력 저항—비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여지는 폭력이나 폭군의 웃는 얼굴과는 거리가 먼 저항—을 본다. …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님을 상황은 보여준다. 따라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 (2001: 246).

성주군민들의 죄는 노여움을 미처 삭이지 못하고 잠시나마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지한 것이다. 물론 일부 군민들이 저지른 실수이다. 고성과 욕설을 보내기보다는 항의서든 요구서든 최소한의 주장을 담은 글을 전달하거나 낭독했어야 했다. 물병을 던지고 소금을 뿌리고 달걀을 던지기보다는 입가리개를 하고 침묵시위를 했어야 했다. 설명회에서 나선 황씨를 멀리 등지고 (황씨 앞에 청중이 없도록) 조용히 연좌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지 못하고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행동하는 순수한 백성들이었던 죄다. 약아빠지지 못한 순진무구純眞無垢가 죄라면 죄다. 그래서 음흉한 정권이 의도한 대로 꼬투리를 잡혀 연일 신문 방송에서 무방비로 두들겨 맞고 있다. ‘매값’을 비싸게 물어주고 있다. 하지만 성주군민들의 죄를 묻는 것은 법으로 보나 윤리로 보나 지나치다.  

합리성적 저항과 완전한 비폭력

이문영은 모든 나쁜 것은 관官에서 나오고 모든 좋은 것은 민民 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 (1991: 42). “가라지의 악이[든] 곡식의 악이[든] 악의 근원은 정부의 과격이다” (2008: 589).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1991: 29).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고 통치자와 官은 국민의 종이기 때문이다(主權在民). 주인은 이런 머슴의 버르장머리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合理性的 抵抗”이며 비폭력 투쟁이다 (1991: 30), 왜 그러한가? 폭력에 의지하는 통치자는 자기가 정한 법도 안지킬만큼 제멋대로여서 비폭력 투쟁으로 붕괴가 된다 (1986: 297). 그런데 백성들이 폭력 투쟁으로 대응하면 자체분열을 하던 못된 머슴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1986: 197). 결국 머슴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면 주인이 끝까지 수모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문영은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는『孔孟』「梁惠王」下 4장을 종종 인용했다 (1996: 74, 293, 606). 上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下의 난동도 용납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안하무인의 꼴을 관(官)과 민(民)에서 각각 보기 싫다… 안하무인의 관을 정치학에서 말하길「벌거벗은 힘」이라고 한다. … 벌거벗은 힘의 행사를 민이 하는 것도 역겨움을 준다” (1986: 81)고 말했다. 이문영은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과격한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과격함이 극에 달하는 것을 경계했다 (2008: 578).

“…평화적이라는 말은 쿠데타라든지 국민측에서 발생하는 난동이 없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난동이란 4·19와 같은 저항권의 행사라든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과 같은 정쟁(政爭)을 뜻하지 않는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 (1986: 297).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대안)은 한마디로 비폭력이다 (1986: 294). 약자는 어차피 폭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게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 비폭력은 감정이 아닌 합리성이다. 철저하게 이성에 근거한 행동으로 ‘폭력 대 폭력’ 구도에서 ‘자의성 대 합리성’ 혹은 ‘야만 대 문명’으로 국면을 바꿔야 한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약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참고 기다려야 한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매사를 조심해야 한다. 힘센 통치자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만을 조심스레 해야 한다 (2008: 66, 80). 그냥 비폭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합리적인, 완전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보다는 강자가 꼼짝없이 악을 계속 저지를 수 없게 하는 대응책을 찾는 것이 약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8: 59).

일부 성주군민들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은 것은 물리적 폭력은 아니라 해도 완전한 비폭력이라 할 수 없다. 약자의 노여움과 억울함을 분출시킨 것이다. 쓸데없는 말이고 지나친 언동이다.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비폭력이며, 합리성과 거리가 먼 ‘말폭력’일 뿐이다. 강자에게 꼬투리를 잡혀 더 잔인한 폭력을 부를 뿐이다. 죄송하다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뺨이라도 한대 갈겨달라며 꼬드기는 양아치들 아니던가. 다행히 성주군민들이 그 음흉한 계책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지금은 최소한의 행동으로 맞서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훨씬 더 나쁘다 

성주군민들이 황교안씨에게 고성을 지르고 달걀을 던진 것은 잘못한 일이다. 일부 군민들의 일탈 행위라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폭력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훨씬 더 잘못했다. 공론없이 통치자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군민들은 절차적 합리성을 묻고 있는데, 국가안보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며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사오정식 딴소리다. 이제는 뒤늦게 대화를 한답시고 군민들이 아닌 지역 정치인과 유지들을 찾고 있다. 동시에 성주군민들의 폭력행위를 처벌하는데 골몰해 있다.  

하지만 핵심은 성주군민의 난동이 아니라 권위주의 통치자의 폭력이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성주군민이 아니라 외부세력이다. 혈맹이랍시고 미국을 끌어들여 조용한 마을을 시끄럽게 만든 정권의 종미주의자들이다. 군민들을 자극하여 폭력을 유도해 놓고 처벌을 한다면서 설치고 다니는 불순세력이다. 선량한 군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우고 있는 전문시위진압꾼들이다. 백성과 동락하기는 커녕 힘으로 누르고 발길질을 해대는 못난 上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보를 들먹이며 자기 잘못을 백성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도둑이 주인을 매질하고 방귀뀐 놈이 성내는 격이다. 

안타까운 것은 음흉한 정권은 약자의 행동 원리를 훤히 꿰고 있는 반면에 정작 순진무구들은 그 얼개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약자인 백성들이 나쁜 통치자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강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상황에서 약자들은 신중한 최소주의 행동을 해야 하는데, (1) 비폭력, (2) 동지들과의 합의, (3) 일반 시민의 호응과 연대 모색이 포함된다 (1991: 25-26). 

음흉한 정권은 (1) 멋대로 결정해놓고 자신감있게 폭력을 행사한다. 백성을 궁지에 내몰고 자해공갈에 가까운 방법으로 약자의  난동을 유발하여 ‘폭력 대 폭력’ 구도를 만든다. (2) 반대하는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 분열시키고 낙하산으로 장악한 신문 방송을 동원하여 여론을 몰아간다. 반대의견은 유언비어로 폄하하고 찬성의견을 부추겨 이간질한다. 뒷조사를 하고 처벌을 운운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3) 벼랑에 내몰린 백성들을 ‘왕따’시킨다. 시민사회가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윽박지른다. 시민연대를 차단한다. 1980년 광주처럼 철저하게 고립시킨 뒤 맘놓고 ‘왕따들’를 난타질한다. 외부세력=불순세력=종북좌파=빨갱이를 들먹거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약자의 비폭력 투쟁을 분쇄하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약자들이 비폭력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완전한 비폭력은 감정이 아닌 이성에 의지하여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폭력의 얼개와 의미를 깨달아야 하고, 감정과 유혹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문: 박헌명. 성주군민의 죄와 국무총리의 '매값.' <최소주의행정학> 1(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