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 “우리는 신선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에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우리는 이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여서는 안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라고 노래했다. 그는 92년 장마를 받아낸 종로에서 무더위처럼 답답하고 끈적거리는 우리의 하루살이를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헬조선”이란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으로 들리는 시절이다. “갑질”로 상징되는 가진 자의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 속에서 힘없는 자들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고 있다. 너나없이 벌어먹고 살기가 빡빡해졌다. 동무가 일하는 회사로 찾아가 반갑게 저녁을 먹고 술한잔 걸치는 일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컴퓨터와 손전화가 보편화되고 먹을거리가 널려있건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웃음보다는 긴장과 짜증이 묻어난다. 누구나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쉴 새없이 움직이도록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 서로가 부담을 권하고 술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선한 꾀부림”도 허락되지 않으니 생산성은 높아졌을 망정 인심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나 살기도 바쁜데 남에게 눈길을 줄 틈이 어디 있을까.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무엇에 쫓기듯, 무엇에 이끌리듯이 우르르 몰려가고 몰려오는 모습에서 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와 그들의 “희망없는 짐짝”을 본다. “긴긴 터널 길”에는 코딱지만한 여유도 없이 장마철의 무더운 열기에 헐떡이는 사람들 뿐이다. 그 헐떡임이 서로에게 열기가 되어 서로의 숨을 옥죄고 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아귀다툼 속에서 순간 순간 숨을 참고 쉬면서 버티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와 참지 못하는 사회
지난 수년 간 “묻지마” 혹은 “홧김에”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채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힘센 자들이 설계하고 추진한 무한 경쟁에서 뒤쳐지고, 상처받고, 고통받고, 끝내 내쫓긴 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인 것같아 안타깝다.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스런 본질을 교묘하게 감춘 경쟁력(국제화)이라는 허울이 아니던가. 가해자들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솟구치는 분노를 삭힐만한 기회도 여유도 없으니 더 이상 멀쩡한 정신줄로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뿐만 아니라 각자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조금이라도 신경을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같은 폭탄이 되어 전철에 몸을 싣고 있다.
힘센 자들은 멀찍이서 경마를 즐기듯 약자들만의 무한 경쟁을 즐길 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칼부림하는 광경을 흡족스레 바라볼 뿐이다. 집값을 올려놓으면 아파트 분양권을 두고 아귀다툼이고 치솟은 전세보증금을 채워넣느라 가쁜 숨을 헐떡여야 한다. 말이 가계대출이지 정권이 빚을 내라고 권하고 대부업체가 밤낮으로 광고질이다. 너도 나도 빚더미에 코를 꿰어 버둥거리고, 가진 자들은 고리대질로 잔치판을 벌인다. 모두가 즐기는 축전祝典이 되지 못하고, 한쪽은 잔치판이고 다른 쪽은 줄초상인 축제祝祭가 된다.
이렇게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잠시도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그들끼리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하는 이유가 있다. 약자들이 합리성과 인내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힘센자의 “갑질”(힘센자가 바로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지 못하고 서로 폭력을 사용하도록 부추기기 위함이다. 그래야 강자들이 독식하는 약육강식과 “갑질”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장승, 비폭력, 그리고 참는 것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아마도 “공자왈 맹자왈” 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구태여 윤리와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니 따분한 얘기일 것으로 지레짐작할 것이다. 또한 “초월”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냄새만으로 초월윤리와 최소주의가 실생활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라고 속단하기 쉽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폭력과 자기희생은 참으로 어려운 규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선생님의 행정철학과 사상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공기와 물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좀 모호하게 저작 여기저기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선생님의 행정이론틀을 떠바치는 너럭바위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참는 것이고 견디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한다고 본다(Park 2015: 293-294). 먼저 선생님께서 장승의 특징을 비폭력으로 설명하신 대목을 옮겨보자.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 명치유신 때까지도 무인통치를 해 왔던 일본과는 달리 장승은 비폭력 문화의 상징이다. ... 장승의 특징은 참는데 있다.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 문화의 정상을 말한다”(이문영 1980: 383-384).
한국의 장승은 솟대처럼 지역의 경계를 정하며, 평화스럽게 남자(天下大將軍)와 여자(地下女將軍)가 같이 서 있으며, 장군인데도 활이나 칼이나 창을 안들고 있으며, 갑옷이 아니라 혼례식 때 입는 예복을 입고 있으며, 집도 없이 밖에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돌이나 쇠나 금이나 은이 아닌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다(이문영 1980: 383-384). 이러한 장승의 특징은 참는 것인데, 그 재료가 쉽게 사그러지는 나무이기 때문에 장승의 참을성을 돋보인다(이문영 1980: 384). 그래서 장승이 비폭력 문화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는 것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모두라고 했고, 이것이 바로 비폭력이라고 했다(이문영 1980: 384; 이문영 1986: 336). 약자는 참아야 한다는 것이며 참지 않고서 비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참는다는 것이 초월윤리, 특히 비폭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약자의 대응방법은 참는 것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인내다(이문영 2001: 348). 참는 것이며 주먹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이다. 선생님은 노동자(약자)는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이문영 2001: 350)고 말씀하셨다. 약자는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야 할 뿐 아니라 강자의 폭력을 견제하여 약자를 보호할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이문영 1996: 664). 비폭력에서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과정을 끈질기게 참아내야 한다(이문영 2001: 349). 이런 맥락에서 초월윤리는 약자의 대응전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이 성숙되고 인간이 완성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이문영 1991: 32).
“부자의 죄를 극복하는 노동자의 대응방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내(忍耐)하는 것이다. 부자가 하는 짓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인내해야 할 하나요, 참된 비폭력을 시작으로 해 개인윤리, 사회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의 덕목까지도 갖춰나가야 하는 긴 여정의 인내가 바로 인내해야 할 다른 하나이다”(이문영 2001: 348-349).
위의 인용에서 “부자가 하는 짓[폭력]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아래 인용은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머리”는 지식과 기술을, “마음”은 누구나 세상에 날 때부터 갖고 나온 “天賦의 마음” (이문영 1991: 44)이다. “天賦의 마음”이 있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를 증오하고 저주하기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가 원색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하에서도 국민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아닌 비폭력으로 대응함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이 일차적으로 사용하는 자산은 머리이며 그 다음이 마음이며 그리고 그 다음은 포악한 것과 포악한 것을 고쳐나갈 것을,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이다”(이문영 1986: 335).
요컨대, 참는 것은 이문영의 초월윤리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참지 않고서는 초월윤리를 실천할 수 없다. 특히 참는 것은 비폭력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우며, 차라리 비폭력 그 자체에 가깝다. 그렇다면 약자는 대체 무엇을 참아야 하는 것일까?
이문영(1996)은 관절염이 낫는 것에 비유하여 (1) 우선 당장 죽을 만큼 아픈 것을 참아야 하고, (2) 그 다음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662, 664). 아픈 것을 참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자의 권력남용과 포악을 당하여 화가 나고, 분하고, 쓰라린 심정을 견뎌내는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는 난동(본능적인 감정의 폭발)을 억누르는 일이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아픔을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욕심을 자제하고 버리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동기가 이해관계인데, 사람들은 그 욕심을 합리성이라는 거죽으로 덮어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곤 한다(이문영 1991: 120).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타인(공익)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안해도 되는 일도 기꺼이(천부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국 참아야 할 것은 (1) 감정과 폭력(난동)이고, (2) 자신의 이해관계를 끈질기게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다(표 1).
당장 아픈 것을 참아야 한다
약자는 먼저 강자의 폭정을 견뎌내야 한다. 악한 강자는 권력을 남용하고, 불법 탈법 행위를 저지르고,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여 약자들을 못살게 군다. 힘없는 자들은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하루하루를 괴롭고 무기력하게 버텨야 한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약자의 몫이다. “그냥 악한 세상이 아니라 구세력이 통치하는 가장 악한 세상”을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6: 662).
약자는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이문영 1986: 335). 이문영의 비폭력은 주먹질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이고, 불필요하게 강자의 감정이나 심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하는 것이고, 강자조차도 양심에 찔려 차마 거부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인 기준 (법, 절차, 상식, 합의 등)에 준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Park 2015: 290-291). 악한 정권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순응하거나 무참하게 매를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물리력으로 대들지 말고 당당하게 계속 이치에 맞는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118). 이렇게 폭력을 참고 말하는 것이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포악한 정권이 쥐고 있는 것은 무기와 폭력이지만, 약한 국민이 갖고 있는 것은 악한 정권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이기 때문이다. ... 오랜 기간 끌었던 포악한 정권들이 무너진 것은 총을 쥔 정권을 향하여 ‘말함’이라는 비폭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승리였다”(이문영 2001: 88).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참아야 한다. 악한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생채기가 나고 피가 나고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그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1) 어쩌면 화가 나고 분하고 증오심이 일고 복수심으로 몸서리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른다.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악다구니를 써서 강자에게 대든다 해도 약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증오와 복수에 사로잡힌 난동은 감정을 쏟아낸 잠시의 시원함을 줄 뿐이다. 강자의 폭력 리듬을 맞춰주고 장단을 맞춰주는 어리석은 행위다. 어리석은 난동 뒤에는 더 고통스러운 강자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일 뿐이다 (이문영 1986: 297).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는 약자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대들 것을 예상하고, 또 그것을 은근히 바란다.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는 강자가 즐겨하는 폭력 리듬을 깨고 합리성에 박자를 맞추어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문영의 비폭력이다. 어차피 약자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이문영 2001: 148). 비폭력으로 맞서야 약자가 일단 보호가 되고, 그 다음에 약자가 성장을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8-19).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와 복수를 심중에 담고 매 순간을 사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다. 몸이 건강하다 해도 마음이 괴롭우면 하루하루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편안하고 행복하기는 커녕 천수를 누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약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고통을 견뎌내야 하고 분노를 참아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장 나쁜 세상의 구원을 기다리는 좀 더 밝으며 긍정적인 참음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이문영 1996: 664)고 적으셨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당장 아픈 것을 일단 참은 뒤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강자의 폭력을 견제할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가장 악한 세상에서 가장 시달림을 받을 자가 최소한 보호를 받아 나갈 구조가 생성되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이문영 1996: 664). 전자가 이문영의 “비폭력”에서 견디는 것이라면, 후자는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비폭력은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의 전제가 된다(이문영 2001: 149). 악한 강자의 포악함은 짧은 시간 내에 고쳐지기 어렵다. 또 아픈 것을 참는 것과는 달리 개인의 이해관계와 욕심을 하나하나 버려나가야 한다. 약속(합의사항)을 지키고, 타인을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과정이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초월윤리를 인사행정에 적용한 예를 살펴 보자(이문영 1996: 563-601; 이문영 2001: 419-431). 먼저 비폭력은 엽관주의(spoils system)를 거부하고 직업공무원제를 정착하는 일이다. 계모가 팥쥐를 편애하고, 쿠데타 정권이 자기 핏줄인 육사출신을 우대하고, 측근들을 낙하산에 태워 산하 기관장으로 내려보내는 일은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다. 개인윤리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경우에 맞게 공정하게 인사관리를 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인간 관계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사회윤리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과 외에 출신지역, 성별, 학력, 재력 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용평등주의이며 소외된 국민을 등용시키는 일이다. 자기희생은 공무원들이 단결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일을 용납하는 것이다.
개인윤리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길은 결국 자기 몫을 부당하게 챙기려는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친 후에는 나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천부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따돌림시키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를 긍휼하게 된다. 따라서 정당한 내 몫까지도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주게 된다. 할 수 있어도 스스로 하지 않으니 (정당한 내 몫을 내어주니) 절제라 할 수 있고, 다른 목소리라 하여 내치지 않고 묵묵히 귀기울이니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거기에 있다는 이해관계, 이기심, 욕심을 버리는 것이 참는 것이다. 이것이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 일이다.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이러한 인내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이문영 1986: 335). 봄날 새순이 온전히 자라기 위해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성장을 해야 한다. 조금 날씨가 풀렸다고 해서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여린 새순은 얼어죽기 십상이라고 선생님을 말씀하셨다.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이문영 1991: 19).
특히 마지막 순간에 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크게 될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끝을 잘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그래서 “사람은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19), “말년이 좋으면 청장년시대의 허물을 덮을 수 있다” (이문영 1991: 357)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친일행위를 한 仁村 김성수씨가 말년에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을 사직하고 민주당의 씨앗을 뿌린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이문영 1991: 357). 또한 밥을 짓는데 마지막 1-2분을 못참으면 설익어서 못먹는다고 하셨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참는 자는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 더 많이 보일수록 철저하게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이문영 1986: 298).
왜 하필 마지막이 중요할까? 아마도 가장 방심하기 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찰라의 방심이 오랜 시간 견디고 기다려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처럼 당장이라도 군부독재가 끝장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같은 분위기를 말한다. 정권이 위기에 몰려 덜 무서울 때여서 기회주의자들이 인기에 편승한 발언을 쏟아내고 대중의 요구가 과다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밥솥에서 김이 나오고 구수한 밥냄새가 풍겨올 때 마치 밥이 다 된 것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뜸들이는 것을 잊고 뚜껑을 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이럴 때일수록 끈질기게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이 다 될 때까지 꾹 참고 있어야 한다. 피부병도 한참 나아갈 때보다 나아가는 마지막 고비가 더 힘들다. 가려움과 아픔과 성적 쾌감이 교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 마지막 순간을 참지 못하고 상처를 건드리거나 긁으면 그동안 힘겹게 견뎌온 시간이 허사가 된다. 결국 마지막 순간의 방심을 경계해야 하며 끝까지 합리성에 근거한 초월윤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약자가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하다. 끈질기게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고 욕심을 버리면서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윤리에 귀의한다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1) 폭력을 기반으로 한 정권은 강하게 보이지만 실은 정당성이 없어서 법을 무시하고 폭력에 의지해야 할만큼 허약하고, (2) 나중에는 악법을 새롭게 만들어 정권유지를 도모하지만 그 악법마저도 지키지 않게 되고, (3) 이런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못난 정권은 스스로 망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86: 289, 297, 340; 이문영 2008: 346-347). 시민들의 비폭력 투쟁으로 악한 정권은 스스로 붕괴된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하면, (1) 거의 넘어가던 정권이 정당성을 회복하는 빌미를 주게 되고 (2) 더 강경한 폭력 정권이 출현할 유인을 제공하며, (3) 설령 폭력 정권이 무너져도 새 질서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이문영 1986: 297-298). 그래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악한 자가 망한 후의 [사회]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 (이문영 1986: 289).
그러나,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악한 강자가 약자를 파괴하고 급기야는 자신까지 파괴하는 비극보다는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강자의 악한 통치를 견제하여 피아 모두를 살려내는 희극이 이루어내기가 훨씬 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문영 2001: 203-204). “약자는 악한 통치를 그때그때 견제하기가 힘들고 시간도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04).
하지만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먼저 시민들이 성숙한 인격과 의식을 가져야 하고, 강자의 폭력(보복)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ark 2015: 294). 또한 강자의 폭력에 휘둘린 약자는 차분히 합리성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짐짝들”은 하루하루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날이 서 있어서 폭발 직전이다. 강자의 갑질과 아등바등하는 일상에 지쳐서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황이다. “헬조선”, “묻지마”, “홧김에” 등이 약자들의 인내가 바닥임을 말해준다. 악한 강자가 아니라 이웃을 비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가야 할 길이 끈질기게 참고 버티는 것이니 어찌하랴. 분노를 억누르고 비폭력에 의지하고, 욕심을 버리고 초월윤리로 귀의하는 수밖에. 이를 악물고 서로 격려하고 허물을 감싸주면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각주
1) 물론 약자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다가오는 폭력을 회피하는 방법이다(이문영 1980: 366). 가만히 앉아서 칼맞고 총맞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참고문헌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 1(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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