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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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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노회찬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인터넷 게시물의 조회수를 조작한 “드루킹” 김동원 일당이 건넨 돈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사건이 불거진 후 줄곧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유서에서 4천만 원을 대가없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예기치 못한 비보에 많은 시민들이 지역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소를 찾았다. 여야는 물론이려니와 수구냉전 세력까지도 이심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폭염에도 조문객이 7만 명에 이르렀다니... 하물며 진보가 빨갱이로 낙인찍힌 나라에서. 

유시민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정의롭고 품격있는 논객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준 운동가였다. 척박한 토양에서 진보정치를 대중화시킨 정치가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잃었다. 어이없는 일이었고, 허무한 일이었고, 안타까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없이 서글픈 일이었다. 며칠 동안 비몽사몽으로 헤매다가 깨어난 느낌이다. 


품격있는 화객

사람들은 노회찬을 비유의 달인이라고 했다. 촌철살인의 대가라고도 불렀다.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난 50년 동안 삼겹살을 궈먹은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가 일갈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일반 시민들의 시각과 정서를 담은 말이었다. 기존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노회찬은 사람들이 평소 말하고 싶었던 얘기와 강자에게 따지고 싶었던 얘기를 조리있게 다듬어 쉽고 간결하게 풀어냈다. 고갱이를 가려내어 짜임새있게 엮어낸 뒤 잘 발효시킨 말이었다. 구성지게 뽑아낸 가락이었다. 논리가 있고 해학이 있었다. 설득력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시원하고 통괘했다. 수구세력의 억지와 궤변과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가 출현했던 <뉴스공장>의 꼭지 이름은 “노르가즘”이 되었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대체 불가”였다. 그는 인간이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품격있고 멋진 화객話客이었다.

노회찬의 말은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서 경우에 맞는 말이었고 힘이 있는 말이었다. 이런 생생한 사실과 진리를 비유를 통해 완곡하게 표현했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전달했다. 그는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려고 애썼지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인간의 품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주제에 집중했지 사람(상대방을 비난하는 데)에 매달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성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말이었다(2008: 66). 이러한 노회찬의 말법은 상대방의 논지나 주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과 보복을 무력화시켰다. 이성과 상식에 꼭맞는 말이어서 상대방이 차마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폭력이며 최소주의다. 진중권씨의 말이 살인검이라면 노회찬의 말은 활인검이라 할 수 있다.  


도덕 결벽증? 자기희생?

노회찬은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라는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어리석게 처리한 일을 자책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어쩌면 노회찬의 선택은 진보세력의 과도한 도덕 결벽潔癖이나 강박일는지 모른다. 수구냉전 세력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사면증(면죄부)을 지닌 자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만 소위 진보세력은 사소한 실수라도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마냥 고개를 쳐박고 다닌다. 폭력을 완비한 강자의 자신만만과 강자에게 당한 악몽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약자의 피해의식이랄까?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듯 강자가 약자의 도덕성을 따지고 든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민간인 드루킹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민주주의 파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약자의 도덕 결벽증을 노리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논법이다.  

노회찬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세력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덕 결벽증을 경계한 말이다.

노회찬은 원망하지도 않았고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대로 현실의 엄격한 요구를 아프게 받아들였다. 혹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힐난했지만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물은 것이다.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해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잘못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세비도 당에 주고 당에서 최소 월급을 타왔던 사람이었다. 현직에게 특혜를 주고 도전자의 손발을 묶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그가 받은 돈은 올바르게 처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노회찬도 지키지 못할 정치자금법이라 꼬집은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당이 어려워지는 것을 더 우려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당이나 진보세력 전체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제 특별활동비가 혁파될 것이며, 정치자금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의 희생이 아프고 슬프다. 

참고문헌

구영식.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한겨레21> 1223호.  2018.7.31.



원문: 박헌명. 2018.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최소주의행정학> 3(7): 1.


지난 6월 20일부터 약 사흘 간 일본 미애三重현 이세伊勢시에 위치한 신궁을 구경했다. 일본을 지켜준다는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Amaterasu-Omikami)을 모신 곳으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신도神道의 성지다. 기원 전에 바쳐졌다는 이곳은 내궁인 황대신궁皇大神宮(kotaijingu)과 외궁인 풍수대신궁農受大神宮(Toyokedaijingu)으로 나뉘어져 있다. 매년 수많은 일본인들이 찾고 있다. 

길잡이가 신도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일본인들은 모든 동식물과 산과 강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 수만 해도 수백 만에 이른다고 한다. 애니미즘(animism)이다. 심지어는 왕이 죽어도 신이 되는데, 왕실에 관련된 신을 모시는 신사神社를 신궁이라 부른다. 신궁은 20년마다 기존의 건물 옆에 새 건물을 지어 옮긴다. 신은 일반인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이 자리잡은 정궁正宮은 나무 담장 네 개로 가로막혀 있는데, 사람들은 가장 바깥에 있는 네번 째 담장(흔히 신사를 상징하는 토리이라는 문)을 지나 세번 째 담장 앞에서 경배할 뿐이다. 일반인은 스스로 세번 째 담장을 지날 수가 없다. 격식을 갖추어 사제(priest)가 특별히 인도를 해줘야 가능하다.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

일본 사람들은 수많은 신과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제 있는 것처럼 인식하거나 아예 사실로 둔갑시키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실을 믿고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일본인들은 신화를 믿고 신을 두려워한다. 지식인들조차도 객관적 역사와 사실을 버리고 신과 신화를 필요에 따라 아무렇치도 않게 역사와 사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섬뜩하다. 어떻게 사지멀쩡한 사람들의 이성이 이토록 쉽게 마비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신사나 신궁을 방문할 때마다 신이 자리잡은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했다.  

우리나라에서 절에 가면 부처님 상이 있고, 성당에 가면 그리스도의 상이 있다. 누구나 사람이 다가가 볼 수 있고,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신사와 신궁에서는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것은 가림막이고 신은 가림막 저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이 머무는 정궁 (신사에서는 본전本殿)은 첫번 째와 두번 째 나무 담장 사이에 있어서 사람들은 절대로 신의 자리를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번 째 담장 앞에서 그냥 동전을 던지고 박수 두 번 친 뒤 천으로 가려져 있는 안쪽을 향해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뿐이다.

일본인 친구나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신이 자리한 곳에는 보통 오래된 거울이나 돌이나 나무토막을 놓아둔다. 신의 자리에 아무 것도 없는 신사도 있다고 했다. 이세신궁에는 천조대어신을 상징하는 거울이 놓여져 있다고 한다. 나는 참 어이가 없었다. 8할이나 되는 일본인들의 정신줄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 거울이나 돌이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절대 권력과 폭력을 행사해온 존재가 알고보니 한낱 생쥐같은 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허탈한 반전이다.


박근혜가 ‘신궁’에서 사는 법

삼백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세월호 참사 당시, 사고 발생 7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근혜씨는 생뚱맞게도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나타났길래 저지경인가 했다. 국민들은 물론이려니와 해외에서도 시시각각 물속으로 가라앉는 세월호를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잖은가.  

나는 이세신궁을 돌아보면서 박씨가 보여준 언행을 상기했다. 그는 스스로를 한국을 지키는 신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박정희가 반신반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일제 신민지 시절에 일본인의 정신줄을 빼속깊이 새긴 친일파였고 해방 이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기회주의자들 아닌가. 그러니 박씨는 신궁에 들어앉아 사제의 시중을 받으면서 신비롭고 우아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일본의 신을 꿈꾸었을 법하다. 그에게 권력과 재물은 당연한 것이고, 정부관료제는 사제일 뿐이며, 국민들은 하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완벽한 존재로서 신은 인간 세상과는 거리를 두면서 천부인권과 같은 권력을 고상하게 누릴 뿐이다. 삼성과 국정원의 돈을 받은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신의 권리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을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하면 “모냥빠진다.” 모두 사제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문제가 있으면 신의 탓이 아니라 심부름꾼의 잘못이다. 그래서 해양경찰청은 잘못했어야만 했고 해체되어야 했다.

박씨는 오직 문고리 삼인방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했다. 장관도 안보실장도 비서실장도 박씨를 알현하기 어려웠다. 박씨가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하물며 여신의 은밀한 사생활임에랴. 품위 유지를 위해 기꺼이 기치료도 받고, 올림머리도 하고, 태반주사도 챙겨맞은 정성이 어디인가.

정부관료제는 신을 지키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제였다. 세월호 7시간 박씨의 행적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보고시간이나 지시사항도 조작되었다. 훈령을 임의로 고쳐서 청와대가 국가위기관리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우겼다. 검찰은 법원의 영장을 받아들고서도 박근혜 청와대를 압수수색하지 못했다. 청와대는 환관과 탐관오리들로 둘러싸인 신궁이었다. 최근에는 기무사령부가 탄핵안이 기각될 경우 계엄을 선포하여 국민과 촛불집회를 찍어누르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절대 존재인 신을 지키기 위한 사제들의 필사적인 항거였다. 관료제에 국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여신의 자리에는 “공항장애”에도 불구하고 연설문까지 “컨펌”했던 최순실이 있었다. 권력서열 1위인 최씨에게 휘둘리고 떠밀려 꼭두각시가 된 No. 3 박근혜씨가 있었다. 사람들이 허탈해하다가 분노한 이유다. 여신은 커녕 고작 깨진 돌조각이나 나무토막이었으니 말이다. 이젠 촛불시민들에게 끌려내려와 드넓은 감방에서 우아하게 식기를 닦는 늙은 공주가 되었다. 

국민이 곧 신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는 신과 신화가 아닌 역사와 사실을 경계하며 살고 있다. 역사와 사실이라는 촛불이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이라고. 신궁을 나오면서 생각한 것이다. 


원문: 박헌명. 2018.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이 사는 법. <최소주의행정학> 3(6): 1.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촛불혁명 이후 지난 1년간 국정농단에 연루된 자들이 줄줄이 재판정에 섰다. 주역인 최순실 박근혜씨가 감옥에 끌려갔고, 다스 실소유주 논란의 당사자인 이명박씨도 뇌물수수, 조세포탈, 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구치소에 갖혔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수인번호 503과 716을 달고 재판을 받고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완강한 저항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묵묵히 추진하였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이끌어냈고, 끈질기게 문재인씨가 중재한 북미정상회담은 우연히도 선거 전날 열리게 되었다. 문재인씨의 지지율이 7할을 상회하고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이 5할을 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일까? 이런 낯선 풍경은 이번 선거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누가 감히 “인격검증”을 한단 말인가?

민주당이 압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거다. 얼마나 철저하게 국정농단 세력을 심판하느냐에 관심이 더 몰린다. 호사가好事家들의 술안주로 치면 드루킹과 한나라당/새누리당의 댓글조작이나 홍준표씨의 “아무말 잔치” 정도가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경기도지사 선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남경필씨는 이재명씨가 수 년 전 친형과 형수에게 폭언을 했다며 통화음성파일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공직 후보의 인격을 검증하겠다고 했다. “인간성 말살”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이재명씨를 후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에게는 후보를 당장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지나치다. 텔레비젼 토론에 나선 바른미래당의 김영환씨는 이재명씨가 권한을 남용하여 친형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김부선씨와 밀회한 사실을 회유와 협박으로 은폐했다고 비난했다. 불륜은 아니지만 거짓말로 “여배우에 대한 인격살인”을 자행했으니 공직자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이재명씨는 식구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심한 욕설을 했고, 김부선씨와 만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나머지는 각자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어느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남경필씨와 김영환씨가 이씨의 사생활 문제를 “인격검증”이나 “국민의 알권리”라면서 공식자리에서 끄집어 내었다. 이씨의 지지율이 5할인 상황에서 남씨와 김씨가 선택한 궁여지책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먼저 “인격검증”이라는 말을 듣고 탄식한다. “사상검증”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누가 인격을 어떻게 검증한다는 것인가? 누가 “인격검증”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가? 욕설을 하고 폭력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짜고짜 인격파탄으로 몰아도 되는 것인가? 사람의 인격이란 것이 그리도 간단하고 쉽단 말인가? 남씨는 누군가가 해치려고 본인에게 달려들 때 인격을 생각해서 점잖게 공자왈 맹자왈 훈계를 할 셈인가? 그렇게 인격을 따지면서 어찌하여 이명박과 박근혜씨의 인격을 검증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것일까? 사상검증과 마찬가지로 인격검증도 가능하지 않다. 기껏해봤자 제멋대로 “관심법”으로 상대방을 빨갱이칠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인격검증”이라니... 참으로 유치하고 한심하다. 

“국민의 알권리”라굽쇼? 

음성파일에 나온 폭언은 이재명씨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한 사생활이다. 언행에 잘못이 있든 없든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한다. 사생활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수집된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는지까지 본인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Solove 2011). 따라서 이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음성파일을 정당의 웹집에 올려놓거나 유세현장에서 트는 것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이다. 여배우와 밀회도 마찬가지다. 여배우 스스로 심심해서 만났고 비용도 본인이 다 내면서 즐겼다니 성추행도 성폭력도 아닌 셈이다. 박수받을 행동은 아니지만 사실이라 해도 공개된 자리에서 비난을 받거나 처벌을 받아야 할 사안도 아니다. 남씨와 김씨는 공직자 후보의 자질을 따진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씨의 사생활을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모욕을 주고 있다. 특히 김씨는 밀회(불륜)를 기정사실화하고 자신이 감옥에 갈 각오라고 기염을 토했다. 공직 후보인지 여배우의 변호사인지...

또한 국민의 알권리라고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런 욕설을 듣고 싶단 말인가? 무슨 공공의 이익이 있단 말인가? 유세장을 오가는 청소년들까지 그런 험한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 자체로 말폭력이고 공해다. 남경필씨는 일단 국민이 들어보고 판단할 일이며 당이 공개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비열하고 무책임하다. 후보로 인정을 안한다면서 토론회에서 말을 섞는 모순은 무어란 말인가? 왜 국민들이 어떤 후보가 누구에게 무슨 욕을 했는지, 후보의 친형이 어떻게 병원에 입원했는지, 후보가 누구와 즐기는지를 알아야 하는가? 호사가들은 그렇다 쳐도 어느 멀쩡한 유권자들이 알고 싶어하는가? 과연 방송토론회에서 이전투구할만한 내용인가? 방송에다 대고 질척거리는 추문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낯뜨겁고 구역질나는 것 아닌가? 시청자와 유권자를 능멸하는 짓이 아닌가? 
 
언젠가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군부대가 출동했다. 어느 일보 기자라는 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어느 병력이 언제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군사작전이니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더니 역시나 “국민의 알권리”라며 막무가내였다. 나는 어느 국민이 그런 작전을 알고 싶냐며 힐난했다. 국민은 작전이 아니라 인민군을 소탕했는지, 이젠 안전한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덜 나쁘고 덜 게으른 머슴을 고르는 일이다. 주권자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내용을 냉철하게 따져서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방송토론회에서 사생활을 들춰내고 험악한 진실공방을 벌임으로써 유권자를 불쾌하고 혼란스럽게 한 자들을 한표로 응징해야 한다. 

참고문헌


Solove, Daniel J. 2011. Nothing to Hide. New Haven: Yale Univ. Press.


원문: 박헌명. 2018. 후보의 "인격검증"과 국민의 알권리. <최소주의행정학> 3(5): 1.


서울시가 2014년 제정된 <서울특별시 국어사용조례>에 따라 국어바르게쓰기위원회를 꾸려 행정용어 145개를 쉬운 우리말로 고쳤는데, 그 중에는 최근 고시된 성별, 장애 등 차별에 관련된 용어 13개가 포함되었다고 한다(연합뉴스, 2018.4.16). 예컨대, “정상인”은 “비장애인”으로, “조선족”은 “중국동포”로 쓰라고 권고했다. 아직도 많은 법률과 행정 용어와 표현이 한글의 말법과 글법과 거리가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본말 찌끄러기가 널부러져 있고 쓸데없이 영어 단어를 섞어쓰고 있는 현실에서 그 취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거나 일상의 말습관에 맞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학부형? 처녀작? 레이싱걸? 

예컨대, “학부형學父兄”은 학생의 아버지와 형이어서 여성이 빠져있다. 그래서 “학부모學父母”로 쓰라는 것이다. 이미 학부모는 널리 사용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나 여성이 빠져 있으니 학부형은 안된다는 발상 자체가 불편하다. 이런 식이면 형, 누나, 숙부, 숙모 등은 죽었다 깨나도 학생의 보호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단어에 여성이 들어있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말습관을 성차별로 찍어누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다. 말이 학부형이지 어머니나 누나가 학교에 찾아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여성이 학부형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바꾼다면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라 하겠지만…

또 “편부偏父”나 “편모偏母”는 남자나 여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한쪽을 편들지 않는 “한부모”로 하겠다고 한다. 편부나 편모라고 것이 특정한 상황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남녀를 차별하는 말이라고 인식한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말습관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 마을”이 "같은 마을"이라는 뜻인 것처럼 “한부모”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뜻으로 "한부모"를 운운하는 것은 엉터리 조어법이다. 마치 “먹을 거리”가 아니라 “먹거리”로 어법을 파괴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그러면 “볶을 거리”가 아니라 “볶거리”요 “씹을 거리”가 아니라 “씹거리”란 말인가?). 게다가 “홀아버지”와 “홀어머니”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웬 편부와 편모 타령인가? 굳이 단어를 만들자면 그냥 “홀부모”라고 하면 될 일이다. 

2006년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성차별하는 단어라며 예시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이유진, 한겨레신문, 2006. 11.9). 대개는 여성입장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습관을 무시하고 단어의 사전 의미에 집착한 결과 많은 비난을 받았다. 예컨대, “처녀작”이라 하면서 왜 “총각작”이라고는 안하는가? 그럼 “총각김치”에 대항하여 “처녀김치”도 만들어야 하나? “처녀귀신”에 더하여 “총각귀신”은 어떠한가? 왜 “스포츠우먼”이라고 하지 않고 “스포츠맨”이라고 하는가? 친가, 외가, 친정, 시댁 등에 시비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고 있다. “여자도 남자처럼 서서 일을 보고, 수영복도 한 조각만 입고, 군대가게 해주세요”라는 우스개소리로 들린다. 

“레이싱걸”은 한 술 더뜬다. 짧은 옷을 입고 멋있는 차 옆에 서 있는 성인 여성은 분명 소녀가 아닌데 왜 girl이라고 부르냐면서 “경주도우미”라고 하랜다. 그럼 팔순 할머니도 자신을 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 서구 문화는 어쩌란 말인가. 또 환갑 진갑이 넘어서도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치매환자로 몰아야 하나? 그래도 girl이 소녀라는 뜻임을 돌돌돌 외고 있는 것만 해도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경주도우미”라니... 스스로 앉고 움직이는데도 불편해하는 여성이 자동차 경주를 어떻게 돕는다고 도움이란 말인가. 발음을 해도 입에 잘 붙지도 않는다. 뜻으로 치면 차라리 “차들러리”가 더 낫지 않을까? 
   
미망인, 과부, 그리고 “故 OOO의 부인”

서울시와 한국여성개발원은 공통으로 “미망인” 대신에 “故OOO의 부인”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다. 미망인未亡人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나온 말인데, 사전 의미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다. 따라서 양성평등에 맞지 않기 때문에 “故 OOO의 부인”이라고 쓰라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은 또한 과부寡婦와 홀아비가 원래의 뜻이 바뀌어 비하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라고 권했다. 나는 이런 권고가 못마땅하다. 멀쩡한 어휘를 삐딱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대체 과부와 홀아비가 무슨 죄란 말인가? 

<춘추좌씨전> 노장공魯莊公  28년에 따르면 (http://db.cyberseodang.or.kr/) 초나라 文王이 죽은 후 동생인 자원子元이 형수인 식규息嬀를 유혹하기 위해 만무萬舞를 추자 문부인文夫人이 선왕(남편)은 그 춤으로 원수를 토벌하는 연습을 했는데, 지금 영륜令尹이 된 子元(시동생)은 그 춤을 연습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미망인(자신) 옆에서 추고 있다며 수상하게 여겼다(今令尹不尋諸仇讎 而於未亡人之側 不亦異乎). 부주附注에는 부인婦人이 과부가 되면 스스로 미망인이라 칭한다(婦人旣寡 自稱未亡人)고 적혀 있다. 애초에 남편을 잃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 
과부이고, 남이 아니라 과부 스스로가 오랜 관습에 빗대어 겸손하게 미망인이라고 칭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上 3의 集註는 “과인寡人은 제후가 스스로 칭하는 것인데, 덕이 적은 사람(寡人諸侯自稱 言寡德之人也)을 말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과부는 寡德之婦로서 “덕이 부족해서 남편을 먼저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말 그대로 겸양이고 점잖은 표현이며 남녀 차별과는 관계가 없다. 미망인과 마찬가지로 제후가 스스로를 과인이라 칭하는 것이지 남이 제후를 과인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왕을 寡人이라 불렀다가는 당장 불경죄로 질질 끌려가서 볼기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寡婦는 고상한 뜻임에도 불구하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나쁜 선입견을 주는 천박한 말이 되었다. 
정말로 덕이 부족해서 남편을 잡아먹은 여자로 해석해서였을까? 말의 참뜻과 맥락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면 남편을 잃고 “다 내 책임이다. 내 죄다. 내가 죽어야지”라며 울부짖는 寡德之婦를 살인죄로 다스려 순장殉葬시켜야 하나? 또 우리는 “순직한 OOO씨의 미망인” 같은 표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未亡人은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지, 타인이 당사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다. 전우를 잃고 홀로 살아 돌아와 "나만 혼자 죽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자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만큼 슬픈데도 죽지 못하고 있는 심정"을 담은 말이다. 그런데 점잖게 예의를 차린다면서 어떻게 대놓고 “남편이 죽었는데도 아직까지 따라죽지 않다니... 얼른 죽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멱살을 잡히거나 귀싸대기 맞을 일이다. 이는 어법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좋은 약도 맞게 쓰지 않으면 독이 되는 것처럼 고운 말도 잘못쓰면 흉기가 된다.


마치 자기가 쓴 책을 남에게 주면서 상대방의 이름 뒤에 혜존惠存이라고 적어 “잘 간직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래는 책을 받은 사람이 “귀한 책을 주신 것이 참으로 은혜로우니 잘 보존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책을 준 사람 이름 뒤에 적는 것인데,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일본식 혜존이 정착되었다고 한다(이윤옥 2010). 김봉규라는 웹마실꾼의 의견이라고 한다. 책을 받은 사람 스스로가 그 고마움을 새겨서 잘 간수하겠다는 뜻으로 惠存이라고 적는 것이 아니라, 책을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잘 보존하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부적절한가. 얼마나 명문장이길래, 얼마나 비싼 책이길래, 얼마나 권세가 높길래 책을 주면서 잘 간수하라고 이른단 말인가? 품위와 겸손과 거리가 먼 말이다. 과부 스스로가 미망인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미망인으로 부르는 것은 惠存을 잘못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말을 뒤바꾸는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도올의 목욕탕 민원해결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에서 권고하고 있는 “故 OOO의 부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하필 “故”를 붙여야 할까? 한국여성개발원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부인” 등으로 풀어써야 한다고 설명했다(이유진, 한겨레신문, 2006. 11.9). 남편을 먼저 보낸 것도 슬픈 일일 터인데, 왜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사살”하여 아픈 곳을 헤집어 놓는가? 당사자의 남편이 고인이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일 텐데, 굳이 죽은 남편 이름이 누구라고 매번 각인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자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해야 하니 어느 한 순간도 개가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뜻일까? 이것이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가 추구하는 양성평등인가? 

수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어느 방송에서 동네 목욕탕에 갔을 때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알아 보고는 벌거벗은 채로 고민거리를 털어놨다. 결혼을 앞둔 신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청첩장에 “故 OOO씨의 장녀△△△”로 해야 할지 또 청첩인을 누구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도올 선생님의 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가슴아픈 일인데 뭐하러 청첩장에 죽었다고 쓰냐면서 아버지의 딸인 것은 맞으니 그냥 “OOO씨의 장녀△△△”로 쓰고 청첩인은 살아있는 사람(어머니나 친척) 이름을 쓰면 된다고 했다. 

“故 OOO의 부인”도 마찬가지 경우다. 뭐하러 당사자를 부를 때마다 남편이 죽었다고 각인을 시키는가? 주인인 남편이 죽었으니 초나라의 子元이처럼 춤이라도 춰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셈인가? 아님 남편이 살아있는 사람과 차별을 하여 깔보고 업신여기겠다는 심산인가? 이런 점에서 “故 OOO의 부인”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러면 “OOO의 부인”이면 괜찮을까? 

남편이 이미 세상에 없는데 뭐하러 남편 이름을 들먹거리는가? 그렇게 양성평등을 외치면서 “OOO의 부인”이라고 관계를 적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법이나 업무상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더구나 여기서 부인은 婦人(결혼한 여자)이 아니라 夫人(아내)이다.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남자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은 男便이지 “여자의 남자”가 아니다. 레이싱걸에 소녀는 없으니 girl을 써서는 안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女便”을 사용하라고 하지 않고(“女便네”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싫어하면서) 아무개 남자의 여자라고 적으라고 권고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컨대, 미망인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당사자를 맨정신으로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이다. 과덕지부라는 좋은 뜻을 망각하고 寡婦라고 색안경을 끼고 삐딱하게 보는 자들이 잘못이다. 과부나 미망인이나 모두 무죄다. 생각컨대 그냥 ◇◇◇씨나 ◇◇◇여사로 부르면 족하다. 필요하다면 설명을 붙이면 될 일이다. 또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면 寡德之夫(지어미를 잃은 남편), 寡婦(지아비를 잃은 아내), 寡人(짝을 잃은 사람)이라 해도 괜찮을 것같다. 그동안 부당하게 과부를 천대하고 미망인을 오용한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 
  
말법과 글법을 살펴 신중하게 

나는 한글을 아름답게 다듬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먹거리”나 “안습”같은 말장난이나 언어파괴질은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일본어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며, 외국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일도 자제되어야 한다. 물론 각종 차별을 상징하거나 조장하는 어휘와 말법을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의 취지와 의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욕이 지나쳐 일을 그르쳐서는 안된다. 언제나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언어에 갖혀서는 안된다. 무조건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또다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해야 한다. 문자가 아닌 표현의 전후맥락을 살펴야 한다. 말법과 급법과 관행과 그 변화과정을 잘 살펴서 과격하지 않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 어차피 일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제안된 말법과 글법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성차별에 관련된 어휘는 차분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정부관료제에서 사용되는 단어, 문장, 양식에서 일본어 잔재를 하루 빨리 걷어내야 한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과 특별위원회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좌절되면서 친일파와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료제를 지배하였다. 일본식 한자를 한글로 읽거나 토씨만 갖다 붙인 수준이었다. 일본의 법률문장이나 서류양식을 거의 그대로 베껴왔다. “대통령”과 “헌법” 뿐만 아니라 “회람”(돌려보기), “시말서”(경위서) 등이 우리 일상에 넘쳐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 같이 제대로 된 한글사전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사전은 그 언어의 수준과 힘을 재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현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뜻풀이도 그러하고 용례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말 사전의 종류가 시계가 멈춘 듯 제한되어 있다. 서점에 가서 외국어사전과 한글 사전을 비교해 보라. 한글이 우수하다는 자랑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제 단순히 일본어 사전을 베낀 사전이 아니라 우리말의 느낌과 표현(광범한 용례를 포함한)을 충분히 담은 사전이 필요하다. 순한글, 관련어(thesaurus), 방언, 속담, 관용어 등에 관한 다양한 사전이 절실하다. 이오덕(2009)의 <우리글 바로쓰기>(서울: 한길사)와 이한섭(2014)의 <일본에서 온 우리말 사전>(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과 같은 역작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정부와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이윤옥. 2010. <사쿠라 훈민정음: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 인물과 사상사.


원문: 박헌명. 2018. 미망인? 과부? “故 OOO의 부인?” <최소주의행정학> 3(4): 3-4.


최근 여당의 유력한 공직 후보 몇몇이 성추행 의혹을 받고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6월 지방선거 출마를 포기하였다.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아 출장을 가고 정치후원금을 기부한 일 때문에 김기식씨가 얼마 전 금융감독원장을 그만두었다. 댓글을 조작했다는 “드루킹 사건”으로 경남지사 후보로 나섰던 김경수씨가 곤경에 처했다. 물론 공직자든 아니든 법을 위반했다면 누구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야당은 물만난 물고기마냥 지난 대통령선거까지 들먹이며 특검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절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 경찰까지 나서서 여론을 조작한 일과 마찬가지라며 총력을 다해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다가왔어도 요즘 방송과 신문은 “드루킹 사건”으로 도배되어 있다. “최순실 정권”의 국정 농단, 박근혜 대통령 탄핵, 대통령선거 참패 등으로 절체절명에 직면한 야당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누가 봐도 개헌을 저지하고 지방선거 판을 흔들어보려는 정치공세이다.

수구 언론은 여야의 정치공방을 치밀한 사실 확인과 분석 없이 스포츠 경기처럼 중계하고 있다. 이성과 상식에 근거하여 사안(미투운동이든 정치후원금이든 댓글조작이든)을 다루는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이든 아니든, 가해자든 아니든, 사생활이든 아니든 일단 이런 덫에 걸려든 사람은 무차별로 까발려지고 짓밟혔다. 이른바 “정치장사”와 “언론장사”에 불쏘시개가 되어 질겅질겅 씹히다가 단맛이 빠지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껌딱지 신세가 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유죄판결”을 받아 낙마한 김기식씨는 벌써 호사가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다던 김씨가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았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타버린 불쏘시개를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이 사회의 암종이 누구인지, 적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적폐보다는 개혁 세력을 돌아보라

최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사건은 민심을 등에 업고 적폐청산을 추진하고 있는 개혁 세력들을 돌아보게 한다. 벌써 짧은 승리에 취해 현재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수구 세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짓눌린 피해의식이나 지나친 도덕 결벽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구세력의 덫에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어차피 수구세력들은 무책임한 기회주의자였지 않은가. 일제시대 이래 힘센 세력(청나라, 러시아, 일본, 미국)에게 재빠르게 빌붙어서 백성의 피와 땀을 빨아먹었던 기회주의 세력 아닌가?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애국이고 자신을 비판하면 무조건 매국이고 빨갱이라는 자들 아닌가?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회 구석구석은 아직도 그들의 손발 아래에 있다.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에 놀라 혼비백산했던 기득권 세력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호시탐탐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개혁이 지나는 길목마다 자갈길이고 가시밭길인 까닭이다. 그때 그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재빠르게 변신해온 기회주의자들을 제압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래서 개혁이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이런 참혹한 현실을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굶주린 맹수처럼 어디라도 물어뜯는데 혈안이 된 수구 세력들에게 한치의 빈틈이라도 주지 않토록 조심해야 한다. 행여 억울하게 꼬투리를 잡혔다 해도 냉철하게 대응하고 차분하게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과연 의미있는 고난을 겪었는가

소정 선생님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자동으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뜻있는 고난을 겪으면서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것이라고 하였다(1986: 289; 1991: 333; 2008: 270). 자신의 임무수행에 충실하고 식솔들을 잘 살 수 있도록 근면하게 일한 니콜라이 로스토프(Rostov), 온순하고 선량하여 악한 정치 체제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 마리아 볼곤스키(Bolkonsky),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귀족 신분이면서도 인생의 진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유를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피에르 베즈호프(Bezuhov)가 그들이다(2001: 172-174; 2008: 270). 혼란을 틈타 남을 속이거나 해쳐서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지금껏 누려온 부귀영화를 이어가기 위해 또다른 변신에 몰골하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참혹한 전쟁이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면서 봄이 올 때까지 욕심내거나 무리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이 모든 절제는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1991: 19).  

이런 의미에서 성폭력 혐의를 받고 충남지사직에서 물러난 안희정씨를 안타깝게 본다. 노무현 정부가 끝나면서 “폐족”으로 몰렸던 이른바 “친노”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서거 당시 봉하마을의 생가 앞 논가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던 안씨를 보았다. 그랬던 그가 충남지사에 연거푸 당선되면서 승승장구했고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수행비서관이 안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며 방송에서 고발함으로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강제로 벌인 일이 아니라 해도 처자를 둔 가장으로서, 사회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했던 지도자로서 용서받기 어렵다. 지난 10년간 극심한 부침을 경험하면서 안씨가 받았을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의미있는 고난”을 겪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정 선생님은 “최소에의 흠모 속에 있는 이는 행복하다. 물질과 이기적인 특정인 같은 것에 매어 있지 않고 사람이 사람의 수준으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최소의 것이 침범받았을 때에 본연의 인간이란 무엇일까를 더욱 생각하게 된다. ... 최소를 가질 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1986: 96). 과연 안씨는 폐족으로 몰린 한계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최소만을 생각하고 물질과 사람(여자)을 초월한 “사람의 수준”을 경험했을까?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했다면 어떻게 식구들과 주변을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최소마저 빼앗긴 자의 행복”을 망각하여 스스로를 망치고 동지를 배신했단 말인가? 소정 선생님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1986: 336),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고 했다(1986: 298; 1991: 198; 2008: 202). 안희정씨가 뼈아프게 귀담아들었어야 할 가르침이다.

지나친 피해의식과 도덕결벽

지난 3월 민병두씨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사자를 만나기는 했지만 노래방에서 신체접촉을 한 일은 없다면서 문제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정치를 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제 자신에게 항상 엄격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자그마한 잘못이라도 있다면 항상 의원직을 내려놓을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김태규, <한겨레신문>, 2018. 3.10).
 
청와대 대변인을 내려 놓고 충남도지사 선거에 나서려던 박수현씨도 “내연녀 설”과 사생활 의혹이 붉어지면서 꿈을 접었다. 지난 3월 초 공주시 민주당원 오영환씨는 페이스북에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의 권력을 앞세워 내연녀를 공주시 기초의원 비례대표에 말도 않되는 이유를 들어 공천”했다며 박씨의 사퇴를 요구했다. 9일에는 박씨 전처와 함께 나와 박수현씨의 여자문제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특혜 공천도 내연 관계도 아니며 수년 전 아내가 가출했다고 반박했다. 내연녀로 지목된 한 공주시의원은 오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박수현씨는 민주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14일 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보면 공직이나 공직후보 자리를 내려놓을 만한 일이 아니다. 미투(#MeToo)라지만 민병두씨를 언급한 여성의 절실함과 실익은 커보이지 않는다. 박수현씨의 경우는 사생활을 들추어 맞네 틀리네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민주당의 최고위원회에서 사퇴나 제명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다. 만일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경쟁자를 끌어내린 것이라면 박씨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과거 선거에서 종종 벌어졌던 추악한 짓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진심이 아니다.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전략이 현실 정치에서 효과만점이라는 점이다. 비방과 흑색선전으로 목표를 달성하기도 쉽고 설령 들통나도 처벌이 그다지 무겁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도덕 결벽증이다. 민병두씨가 자신에 대해 엄격한 것은 칭찬과 존경을 받을 일이지만 그 결벽이 지나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민씨는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입법기관의 구성원이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민주당과 박수현씨는 이성과 상식이 아니라 냉엄한 정치현실에 타협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수구세력들의 포악과 공작에 짓눌렸던 경험이 피해의식으로 굳어졌는지 모른다. 사소한 일에도 트집이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반죽음이 되거나 불구가 되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일까?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도덕 결벽은 수구 세력들에게 주는 “손 안대고 코푸는” 선물이다. 조폭이나 양아치들이 애용하는 비열한 수법이다. 무슨 짓을 해도 면죄를 받은 것처럼 완장을 차고 패악질을 서슴치 않는 기회주의자들아닌가?

따라서 개혁을 하려는 자들은 평소에 자신과 주변을 철저하게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수구세력에 대한 피해의식과 도덕 결벽도 극복해야 한다. 민병두씨와 같은 지나친 결벽증과 자존심은 기회주의자들이 반격할 빌미를 줄 뿐이다. 민주당은 피해의식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가지고 수구세력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법과 상식에 따라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고 합당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떳떳한 행동과 당당한 대응

네이버에서 정치 댓글을 조작한 “드루킹” 사건은 개혁 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른바 파워블로거로서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씨를 지지하는 온라인 활동을 했던 “드루킹”이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청탁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이후  문재인 정권을 비난하는 댓글의 공감수를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늘렸다가 검찰에 꼬리가 밟혔다. 그런데 김경수씨가 “드루킹”과 모바일 편지를 주고 받았고, 김씨의 보좌관이 “드루킹” 측의 돈을 받았다 돌려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증폭되었다. 야당은 검찰과 경찰 조사를 믿을 수 없으니 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한다면서 몰아붙였으나 김경수씨는 떳떳하다며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민주화 운동은 어긋난 原則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지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1991: 330).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며,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이다(1996: 620). “운동원 간에 이용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으며(1996: 621), 무서울 때에 최소 행동을 하고 나서 자신의 고유생활로 돌아갈지언정 개인의 이득을 바라거나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1991: 26; 1996: 56).  소정 선생님은 시국이 무섭지 않을 때는 최소한의 말이 아니라 과격한 발언이나 과다한 요구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1991: 26; 1996: 673). 뒷전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나와서 인기위주의 무책임한 말잔치로 자리를 꿰어차고 잇속을 챙기곤 한다(1996: 623; 2008: 258, 582).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혁명의 주역이 아닌 기회주의자들이 엉뚱하게 열매를 따먹고 일을 그르친다.

“두루킹”은 무서울 때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최소한의 행동(꼭 필요한 정당한 요구)을 한 순수한 운동자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교만하게 개인의 이익을 과도하게 쫓다가 그만 탈이 난 것이다. 제사보다는 젯밥을 탐한 결과다. 소정 선생님은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2008: 615)고 했다. 바람직하지 않은 재야운동자들처럼 “드루킹”은 철저하게 비폭력을 내세우지 않았고(위법하게 부당한 말을 남발했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는 인기 위주의 말(댓글)을 하였고, 부당하게 정치 권력을 모색하다 망했다(1996: 673).  

이명박근혜를 당선시켜 호의호식했던 야당은 “드루킹” 사건을 김경수씨를 매개로 문재인씨의 바지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안희정, 박수현, 정봉주, 김기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미보기에 푹 빠진 모양새다. 천막까지 세워서 특검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까지는 김경수씨가 불법행위를 공모하거나 지시한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선거운동이나 댓글조작을 부탁한 것도 아니고, 인사청탁을 들어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선거꾼들을 좀 더 신중하게 대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병두씨와는 달리 수구세력의 파상 공세에 지레 겁먹고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선거에 나섰다. 소신껏 행동했으니 떳떳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노무현씨의 마지막 비서관이라지 않은가?   

"제왕적 야당"과 "황제 언론"의 과격

최근 수구 세력들이 보여준 언행은 지나치다. 방송법 개정에서 시작된 “제왕적 야당”의 몽니가 이어지면서 벌써 6월 개헌은 물건너갔고, 공직선거법이나 추가경정예산도 갈 길이 멀다. 미투나 김기식이나 김경수가 아니어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물고늘어질 기세다. 그러면서도 피감기관의 후원 내역을 전수조사하자는 데는 반대한다. 특검을 받으면 개헌이든 추경이든 전향적으로 검토해보겠다더니 민주당이 조건부 수용 의사를 내비치자 엉덩이를 빼고 있다. “황제 언론”도 개헌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서 흥미위주나 정파성에 매몰되어 있다. 성추행, 성폭력, 내연녀, 정치자금 땡처리, “드루킹” 댓글조작 등을 우려먹으면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정말 이런 문제가 뉴스의 첫꼭지가 될만큼 중대한 것일까? 철저한 검증과 치열한 분석과 생산적인 토론과 거리가 먼 “언론장사”다. 또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의 논문을 왜곡하여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며 호들갑을 떤다.

결국은 이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이번 선거에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한다.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나선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줘야 한다. 똑똑한 국민이라야 수구세력의 적폐와 장난질을 극복할 수 있다.


원문: 박헌명. 2018. 안희정, 민병두, 김경수의 선택. <최소주의행정학> 3(4): 1-3.


지난 1월 29일 현직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수년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고발했다. 3월 5일에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정무비서 역시 <뉴스룸>에서 안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했다. 이른바 미투(#MeToo) 운동이다. 유명한 연극연출가, 시인, 배우, 가수, 정치인 등이 가해자로 지목되었고, 일부는 자리를 내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데뷰 25년 만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김생민씨가 10년 전 회식 중 제작진 두 명을 성추행한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본인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찾아 사과를 했지만 김씨는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출연중인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 해야 했고, 광고도 내려져 피해보상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과연 김씨의 성추행은 그가 이룬 모든 것을 허물어야 할만큼 용서받지 못할 중죄인가?  

최근 금융감독원장으로 임명된 김기식씨가 국회 정무위원 시절 피감기관인 한국거래소의 지원을 받아 2014년 3월우즈베키스탄에 출장을 다녀오고 2015년 5월에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지원으로 유럽에 갔다고 한다(김남일 엄지원, <한겨레신문>, 2018. 4.6). 일부 야당과 언론은 평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주도하면서 기업의 잘못된 관행에 날을 세웠던 김씨가 뇌물성 외유를 다녀왔다며 국회일정을 볼모삼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청와대가 임명을 취소하거나 본인 스스로 사퇴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과연 김씨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합당한가? 

“미투 공작”과 “사이비 미투”

팟캐스트 <다스뵈이다>를 진행하고 있는 김어준씨는 지난 3월 14회 방송에서 미투 운동을 공작으로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서, 미투 운동이 안희정, 정봉주 등 한쪽에 몰려 있고, 각하(이명박씨)가 점점 관심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미투 운동이 사회인식을 바꾸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효과를 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고 민감한 문제여서 공작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많다고 했다. 따라서 본질인 미투 운동이 사라지고 공작만 남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언론, 시민 사회에서 김씨가 진영논리에 빠져 미투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피해자들을 두 번 죽였다며 비난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의 조기숙씨는 지난 3월 12일 FaceBook에 미투 운동이 사이비 미투(익명에 기대 증거나 논리도 없이 무차별로 공인의 성적 추문이나 사생활을 폭로하는 행위)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고 말했다. 위계나 위력 관계이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인정하거나, 폭로의 논리나 근거가 일관성이 있거나, 실명으로 폭로하거나, “한 사람이 반복적으로 경험하거나 2명 이상이 유사한 경험을 한 경우”를 미투 운동에 부합한다고 했다(조기숙, <오마이뉴스>, 2018.4.5). 그렇지 않으면 Me Too가 아니라 Me only라는 것이다. 이 글을 두고 “위계와 위력에 의한 상습적 성범행”만을  미투의 대상으로 한정했다며 여기저기서 날선 비난이 쏟아졌다. 

두 사람 모두 정당한 미투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투를 빙자한 공작이나 사이비 미투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보다는 그 과실을 따먹으려는 사람들처럼 미투보다는 그 기회를 통해 잇속만 차리려는 무리들이 있다. 가해가 불분명하거나 피해가 심각하지 않거나 절실함도 없고 뒷감당을 각오하지 않는 미투다. 조씨는 “우리 사회에 정작 미투가 필요한 곳은 지속적인 왜곡과 오보로 한 인간을 인격파탄으로 이끄는 일부 언론들이다”라고 적고, 언론이 신중하게 미투 사실을 확인하고, 인권을 보장하고, 책임있게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과 민의 과격한 난동

孟子는 梁惠王章句 下에서 “이러한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그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고 했다. 한쪽 끝에 법을 위반하여 백성(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를, 그 반대편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라)를 상정하자. 그 사이에 법위반은 아니어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나)와 불편하게 하는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닌 경우(다)를 놓아 보자. 위 구절은 (라) 수준이 아니라고 함부로 上을 비난해서도 안되지만(民의 亂動이니까), 上이 (라)를 지향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는 뜻이다. 

김생민씨의 경우 위계관계나 상습 행위가 아니다. 의도는 있으나 피해가 심각한 것도 아니다. 우연한 실수에 가까와 보인다. 미투에 해당하는 (가)가 아니다. 더구나 다른 가해자들과는 달리 김씨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다. 孔子는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過則勿憚改)”고 했고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진심으로 자책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라고 탄식했다. 허물을 깨닫고 반성하고 고치려는 김씨에게 미투라는 이름으로 굴레를 씌우고 불도장을 찍는 짓은 집단 폭행이나 조리돌림이다.  

김기식 원장을 비난하는 일도 과격한 미투 운동과 비슷하다. 김씨의 행동은 (나)이거나 (다)에 해당한다. 만일 (가)였다면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이미 결딴이 났을 것이다. 일부 야당과 언론과 시민들이 사퇴를 종용하고 검찰에 고발한 것은 上이 (라) 수준이 안된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짓이다. 부당하고 과격한 요구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가)와 (나)도 밀어붙였으면서 문재인 정권에서는 (라)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패악질일 뿐이며 경우에 맞지 않다. 

이런 음흉한 정략에 넘어간 시민 사회는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다가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청와대도 여당도 벼랑끝에 몰린 일부 야당과 언론과 시민의 과격한 난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수구세력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도덕적 결벽에 빠져 (라) 수준이 아님을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김 원장도 스스로를 겸허히 돌아보되 부당한 겁박에 무릎꿇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미투 공작, 사이비 미투, 민의 과격. <최소주의행정학> 3(3): 1.

지난 2월 9일부터 25일까지 강원도 평창에서 제 23회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아대는 바람에 과연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전쟁위기설까지 퍼지는 와중에 선수파견을 유보하겠다는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연초에 북한이 태도를 바꾸어 올림픽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겠다고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9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남북 선수단은 한반도기를 내걸고 개막식에 들어섰다.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은 1승도 건지지 못했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내외신 모두 이번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문제를 놓고 일부 야당이 비난을 쏟아냈다. 이른바 판싸움(프레임 경쟁)를 시도한 것이다. 평창올림픽이 아니라 평양올림픽이라고 했다. 북한의 전략에 놀아나는 짓이고, 북한이 올림픽을 체제선전에 이용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짓이라고 했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인 나경원씨는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일이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박탈하고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다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개막식이나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지 않고 애국가가 불리지 않는다는 가짜뉴스가 나돌기도 했다. 소위 “애국세력”들의 집단저항이라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대목이다. 이에 맞서 민주당과 소위 범여권은 평창올림픽이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평화올림픽이라고 반박했다. 

평양올림픽? 평화올림픽?


먼저 씁쓸한 느낌이 든다. 기껏 해봤자 동계 올림픽이 엉망으로 끝나기를 갈망하는 자들의 심술이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무리수임에도 평양올림픽이라고 우격다짐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평양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작 자신은 동계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나서 북한의 참여를 요청하지 않았던가? 어떻게든 정국을 바꾸어 선거에서 이득을 보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대사까지 훼방놓는 일은 곱게 봐줄 수 없다. 한마디로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신의 잇속만 차리면 된다는 정신줄 아닌가? 

다른 느낌은 긴장과 걱정이다. 이른바 촛불혁명 이후 구석에 몰린 수구세력들이 발악하는 것같다. 단순한 말싸움이나 선거전략이 아니라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가 즐기던 음흉한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소정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이런 공작을 설명하고 있다. 

“세상이 文民統治가 아니라 軍事統治에 알맞은 말을 쓴다. … 예를 들어 부정선거라는 차원 높은 말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면 관은 선거부정이라는 문제의 핵심을 피하는 말을 잽싸게 만들어 제도 언론을 통하여 푼다” (1991: 99).

“부정선거”는 정권의 정당성에 직결되는 문제지만 “선거부정”은 작은 문제로 받아들여진다(2001: 198). 나쁜 정권은 이렇게 위기가 닥치면 음흉한 수법으로 국면을 바꿔 위기를 모면한다. 박정희씨가 1970년대 “부정부패”로 위기에 몰렸을 때 뜬금없이 “서정쇄신”을 들고 나왔고, 전두환씨는 1980년대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어 정의사회를 구현한답시고 설치고 다녔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졌던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도 마찬가지다. 

“잠금”과 “감금” 사이 

12월 11일 국정원 요원이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문재인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올리다가 야당의원들에게 발각되었다. 야당은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한 관권선거라며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고, 국정원과 여당은 민주당원들이 여직원을 감금한 사건이라며 반발했다. 경찰은 13일에서야 여직원의 하드디스크를 임의제출 형식으로 받았고, 16일 밤 대선토론이 끝난 뒤 경찰은 서둘러 국정원이 불법행위를 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중간발표를 했다. 그리고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씨가 당선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뿐만 아니라 국국기무사령부와 국군사이버사령부도 댓글 공작을 벌였음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이명박근혜의 입장에서는 관권선거로 몰려 대통령선거를 망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야당이 관권선거로 비난하고 부정선거로 거세게 몰아붙이자 새누리당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연약한 여성을 오피스텔에 감금한 여성의 인권침해 문제로 몰아갔다. 대선토론에 나선 박근혜씨는 사건의 본질은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침해라고 말하면서 댓글을 단 증거가 없었다고 말했다. 17일 JTBC에 출연한 새누리당 권영진씨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카메라가 번쩍거리는 상황에서 여직원이 문을 걸어닫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변했다. 그에게는 여직원을 미행한 사생활 침해만 보이고 국정원의 불법행위와 관권선거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같이 출연한 표창원씨는 이렇게 일갈했다.

“국가 공무원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문만 열어주면 되요. 안열여주고 잠그고 있어요. 그게 무슨 감금이에요, 잠금이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인권침해 문제로 뒤바뀐 것이다. 사실확인을 거부하고 증거를 없애려는 “잠금”이 연약한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감금”이 된 것이다. 국정원, 기무사,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에 관한 최근 조사로 미루어 보면 당시 국민들은 벌건 대낮에 눈뜨고 날치기를 당한 것이다. 수구세력의 잔머리와 음흉함과 뻔뻔함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어쩌다 권영진 대구시장을 볼 때마다 선공후사를 내팽개치고 간사한 혀를 놀리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국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결국은 국민의 이성과 지혜와 양심에 달려있다. 요망한 말공작에 넘어가서 퍽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남북 단일팀이 되면 선수들의 출전 기회가 박탈되고 공정한 경쟁이 안된다는 사술에 넘어가면 안된다. 이것이 평창올림픽→평양올림픽→평화올림픽으로 이어지는 판싸움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  


원문: 박헌명. 2018. 평창올림픽, 평양올림픽, 평화올림픽. <최소주의행정학> 3(2): 1.

청와대의 국민청원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구호는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지지한 청원에 대하여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가 답한다는 것이다. 이미 청소년보호법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폐지하고, 낙태죄를 폐지하고, 흉악범 조두순을 다시 재판하여 처벌하고, 권역외상센터의 중증외상분야를 지원하고, 술을 마시고 저지른 범죄을 깎아주는 “주취감형”을 없애달라는 요구에 답을 했다. 

국민청원의 빛과 그림자 

지난 9년 이명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애절한 요구를 외면하고 억압했던 벽창碧昌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규제를 덜컥 풀어준 것에 항의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소위 “명박산성”을 쌓아 물리쳤다. 세월호가 침몰하여 삼백여 명의 젊은 목숨이 수장되었는데도 대통령이 업무시간에 무얼했는지 밝히지 않았고 공무원들을 동원하여 집요하게 진상조사를 방해했다.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었을 때 박근혜씨는 “묵언수행” 중에 가끔씩 나와 기어코 민심에 불을 질렀다. 나라의 주인임에도 하찮은 머슴들에게 제대로 당한 민심의 원한과 회한이 깊었다. 그래서 청와대의 국민청원은 더욱 빛이 난다.  
  
하지만 국민청원이 장사가 잘 되는 만큼 씁쓸한 면도 있다. 그만큼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의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민의와 동떨어진 짓을 해왔다. 정부 관료제도 국민이 가려워하는 곳을 제대로 긁어주지 못했다. 법원 역시 권력자와 가진 자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반면 가진 것이 없거나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었던 모습이었다. 결국 국민청원은 그동안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국민청원의 흥행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상화폐규제를 실시하지 말고 나경원씨의 평창올림픽 의원직을 파면시켜달라는 청원이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시시콜콜한 일을 시비걸거나 심지어는 장관과 금융감독원장을 파면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청원은 공익과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타인과 사회전체에 얼마나 이로운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따질 뿐이다. 일부러 논란이 되거나 답하기 곤란한 청원을 하여 정쟁을 유발하려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정적에 대한 사상검증이나 낙인찍기라 할 수 있다. 무서울 때에는 절실함으로 서로 단결하여 촛불을 들었지만 폭정暴政과 난정亂政과 우정愚政이 사라진  뒤에는 긴장감을 잃고 너나할 것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과격한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은 아닌지...(1996: 673). 

의 포악과 하의 난동

소정 선생님은 관官의 폭력만 나쁜 것이 아니라 민民의 폭력 역시 나쁘다고 했다. “난동화하기 쉬운 민중과 포악하기 쉬운 기득권층”(1986: 101) 또는 “上의 포악과 下의 난동”이라고 표현했다(1996: 606). 民이든 官이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꼴을 보이는 짓이며, 서로 “벌거벗은 힘”을 행사하는 짓이다(1986: 81). 官의 권력남용과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행동이 부딫혀 서로 원색적으로 대결하는 일이다(1980: vii). 이렇게 양 극단의 벌거벗은 힘이 작정을 하고 충돌하게 되면, 어느 경우에도 민은 승자가 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소정 선생님의 명제를 살펴보자.

“모든 악의 근원은 정부의 과격”이다(2008: 589).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민에서 나왔다”(1991: 42). 그런데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 이런 명제에 따르면 官은 자기반성으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民의 건전한 압력을 통해서 官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1980: vii). 또한 官의 나쁜 행동을 배운 民은 “좋은 것”을 생산하지 못하고 (“나쁜 것”도 생산하여) 官의 나쁜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없다. 전자는 民의 “좋은 것”이 만드는 선순환이며 후자는 官의 “나쁜 것”이 만드는 악순환이다. 결국 열쇠는 民이 쥐고 있다. 그래서 주권재민인 것이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폭력은 특별히 난동이라 불렀는데(官의 폭력은 권력남용이나 포악),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이며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라고 했다(1986: 297). 함석헌과 이문영의 표현에 의하면 앞뒤 안가리고 돈이나 챙기려는 부패한 국민, 힘센 자에게 빌붙어먹으려고 분열하는 국민, 무작정 윗자리를 차지하려고만 하는 과격한 국민의 행동이다 (2008: 571-578). 따라서 바람직한 시민사회(언론, 대학, 종교단체, 노동조합 등의 사회단체)는 자율성(교만하지 않고 자제하고)과 책임성(감정과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에 근거하여 官이 납득할 만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 (1980: vii-viii).  

과격하지 않은 민의 품격

모든 민의가 공익을 위한 선은 아니다.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거나 정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언사도 있다. 투자한 돈이 아까워 가상화폐규제를 반대하거나 맘에 안든다고 해코지하는 것은 과격이다. 동성애, 사형제 등의 논란거리를 들이대고 찬반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어리석다. 새싹이 자라기도 전에 시험에 들게 하여 짓밟는 자해행위이다. 멀리 보고 참고 자제해야 한다. 또한 공연한 시비거리를 만들어 공직자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흉한 과격도 주의해야 한다. 뜬금없이 여성의 군복무를 요구하거나 자유민주주의(사실상 “완장찬 반공주의”)로 시비거는 것은 판(프레임)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러한 民의 과격은 스스로를 망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대통령은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속담을 초월해야 한다(2008: 578). 과격한 자식의 패악질에 휘둘리거나 넘어가서는 안된다. 공직자는 권한남용이란 유혹을 물리쳐야 할 뿐만 아니라 품격있는 민의는 받들되 과격과 난동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청와대의 국민청원과 과격한 국민. <최소주의행정학> 3(1): 1.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은 주먹을 내려놓고 말로 하자는 것이다(1986: 318). 이문영(2008)은 “무서웠을 때 내가 한 말은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의 말”(491쪽)이라 했고, “정부도 거절하지 못하는 말을 하되 말만 한다”라고 적었다(497쪽). 하지만 비폭력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물리력을 사용하지 말고 거친 말을 내뱉지 말라는 뜻일까? 어떤 상황에서든 화내지 말고 성내지 말라는 소린가? 노무현씨처럼 최루탄이 터져도 도망가지 않고 길바닥에 앉아 연좌시위를 계속해야 하는가? 전투경찰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거나 군인들이 총을 난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앉아서 품격있게 군자왈 맹자왈 하다가 맞아죽는 것이 비폭력인가? 이런 상황에서 약자는 어떻게 비폭력을 실천하고 최소의 말을 해야 하는가? 지난 호(2권 11호)에 소개한 빈센트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는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 

소정 선생님은 인자하고 인간미가 있는 분이다. 하지만 비폭력을 강조하시는 선생님도 화를 내실 때가 있었다.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에서 나는 기말과제로「자전적 행정학」(1991)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이라는 초월윤리를 조직, 정책, 인사, 재무에 적용하는데 무리가 따르는 대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선생님께서 일부러 내가 공부하는 방으로 찾아오셔서 역정을 내셨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다듬어 온 초월윤리라는 분석틀을 논거없이 비판했다며 불편한 속내를 말씀하셨다. 당시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기에 그 노여움을 달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평소 모습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웠다.

자서전인「겁많은 자의 용기」(2008)에는 선생님의 성내기 몇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일기로 적은 1983년 8월 31일 사건은 다음과 같다. 

“곧 택시로 대학교로 해 기독교빌딩 앞에 차를 세운다. 마침 현아 엄마와 안박사 부인이 현관에 나오면서 지금 기동대가 농성 중인 네 분을 다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오후 세 시 경에 200명이 들이닥쳐서. 그러니 피하라는 것인데 연동교회 쪽으로 한 20미터도 걷기 전에 뒤에서 사복 경찰들이 와 나를 잡는다. 내 차로 간다니까 자기네 차로 집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북부서 강 형사가가 나를 잡는다. 북부서 정보과에 현아 엄마가 같이 간다. 계장실 하나에 함 선생님이 깊이 있고 생각하시는 표정으로 앉아 계신다. 문 목사님이 독이 나서 과 사무실에 앉아 계신다. 나는 과장실로 안내된다. 조금 있다가 형사가 와서 과장보고 ‘문 목사가 반공계로 자리를 옮기자 하니, 나를 짐짝같이 끌고 왔으니 끌고 가라고 안 움직여요’한다. 과장이 ‘뭐? 죄인이 무슨 큰소리야?’라고 악을 쓰며 나간다. 나는 길길이 악을 쓴다. ‘이 깡패 놈아 네가 죄인이지 누가 죄인이냐? 죄를 졌으면 영장을 가지고 와야지,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해놓고 경찰서에 끌고 온 놈이 깡패이고, 너 과장이란 것은 깡패 두목 아니냐!’ 마침 박용길, 박영숙, 김석중이 밖에 있어 야단들이다. 밥을 안먹고 수사에 안응한다”(2008: 400-401).

또한 수감중인 교도소에서 더운 물을 달라며 플라스틱 베개를 두드린 사건은 이러하다. 교도관과의 대화에 주목해보자. 

“나는 습관대로 추운 겨울날 어느 저녁에 심호흡과 요가를 했다. 몸에 땀이 흠뻑 났다. 나는 냉수마찰을 하고 나서 자리를 깔고 취침을 했다. 밤중에 잠이 깨더니 갈증이 났다. 그래서 저녁에 받아둔 물을 마셨다.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복도로 난 문을 똑똑 두드렸다. 교도관이 왔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달라고 말했다. 그는 더운물이 없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가 왔다.‘만일 댁에서 지금 물을 마시고 싶다면 어떻게 하세요?’‘저 난로에서 끓여 마시지요.’‘그러면 저에게도 난로에서 끓여 주세요.’‘안됩니다.’그와 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내가 더운물을 못 얻어마시는 것은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며 갈리리 교회에서 성찬을 함께 한 동료들도 나처럼 찬물을 마시고 덜덜 떨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더운물 한 모금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라고 생각했다. 생각한 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교도관이 안왔다. 그러자 나는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교도관이 달려왔다. 다시 더운물을 달라고 말했다. 물을 안주겠단다. 그러면 더운물을 달라는 청원을 교도소장에게 하겠으니 교도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 (2008: 302-303).

「자전적 행정학」(1991)에 나오는 “박정희 노래” 사건은 강의시간에도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 “박정희씨의 노래”라고 하면 되겠느냐며 놀리는 선생님의  반문이 들리는 것같다.  

“서울구치소에서 순천교도소로 이감가기 직전 어느날 새벽에 느닷없이 스피커에서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오는 異變이 생긴다. 이런 노래는 안부르기로 18개 조항에 약속이 된 것인데 버젓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되 그것도 흘러나오는 노래 중 제일 먼저 흘러나오지 않는가? 약속위반이다. 이렇게 약속은 강자가 어긴다. 정부가 지켜야 법의 지배가 가능해진다. 나는 이 때에 내 애용의 무기 플라스틱 목침을 또 사용하면서‘박정희 노래 집어치워라!’를 외친다. 더운 물 달랠 때같은 소동이 난다. 보안과장과 내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눈다. 과장: 약속을 어겼다고 박정희 대통령이라고도 않고 박정희 노래가 뭡니까? 나: 아니, 과장님은 슈벨트의 노래를 슈벨트의 노래라고 하지 슈벨트씨의 노래라고 합니까? 과장: … ”(1991: 352-353).

비폭력은 무서울 때에(나서면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상황)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1) 자신의 분석틀을 비판한 보고서를 보고 화를 내셨고, (2) 부당하게 시민을 연행하고 죄인취급을 한 경찰의 행동에 악다구니를 부리셨고, (3) 겨울에 뜨거운 물을 주지 않는다며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리셨고, (4) 교도소에서 틀어 놓은 “박정희 노래”를 집어치우라고 외치셨다. 베개로 쇠문을 두드린 것은 물리력을 동원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거친 언어를 사용한 경우다. 사람을 때린 것은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폭력이라면 폭력인 셈이다.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는 고객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를 한 것으로 (2)번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면 어느 경우가 초월윤리의 비폭력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급한 상황은 피하고 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달리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을 때에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현실적 이상주의”는 (특히 약자의) 철저하고 엄격한 현실이해를 필요로 한다(1986: 138, 298). 모든 생물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포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동물을 피해서 살거나, 지혜를 갖거나, 약한 동물끼리 단결을 해야 한다(1980: 366). 당장 눈앞으로 쏟아지는 총칼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비장할지는 몰라도 비폭력과는 관련이 없다.


저항권 행사는 폭력이 아니다 

비폭력은 평화라는 말뜻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평화스럽다는 쿠데타나 국민의 난동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난동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이다(1986: 297). 따라서 “4·19와 같은 저항권의 행사라든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과 같은 정쟁(政爭)”은 난동이 아니다. 또한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사회가 민주 사회인데, (1) 폭력 정치에 대하여 저항하여 말할 수 있는 자유, (2) 피치자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자유, (3) 치자와 피치자가 서로를 구속하는 약속(계약이나 법)을 만들어내는 자유가 필요하다(1991: 317). 

결국 주권자로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은 난동이라 할 수 없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력으로 저항한 독립군과 적군의 수뇌부를 암살한 의병 중장 안중근를 난동꾼으로 볼 수 없다. 맥락없이 물리력 행사만 강조하여 물타기하려는 친일 매국노들의  음흉한 논리다. 영장없이 거짓말로 시민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범죄자 취급을 한 경찰의 위법행위에 저항한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폭력이라 할 수 없다. 
  
가져야 할 최소를 요구한다

따뜻한 물 한모금이라는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를 누리지 못하거나 고객으로서 최소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본이나 최소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라 할 수 없다. 그 최소는 꼭 필요한 것이어서 양보할 수 없다. 교도관이든 수감자든 인간인 이상 따뜻한 물 한모금은 최소라 할 수 있고, 바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쇠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문 목사가 경찰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혀 해코지를 당하게 된 마당에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노래”를 틀지 말라는 것은 재소자들이 요구한 최소인데, 이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겼기 때문에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최소한 약속은 지키라고 플라스틱 베개를 두드린 것을 폭력이라 말하기 어렵다. 한편 누차례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물건을 성의없이 바구니에 던지는 점원을 꾸짖고 관리자에게 항의한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 역시 폭력이라 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이러한 요구는 거부될 수 없는 보편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비판한 보고서를 보고 발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단계로 이루어진 초월윤리는 선생님께서 평생을 두고 갈고 다듬은 생각틀인데, 타당한 근거가 없이 비판을 받았다고 느끼셨을 터이다. 다른 것이었다면 몰라도 지키고 싶은 분석틀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그토록 민감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의 행동이어야 한다 

성내는 이유와는 별개로 최소한의 행동이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문영(1986)은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고 학생들에게 권고하였다. 또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고 했지만(2001: 246), 긴급피난이나 정당방위 등과 같은 상황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거친 언사도 약자를 방어하는 약이 될 수 있다.   

선생님은 보고서 내용에 대해 화를 내셨지만 사실 항의에 가까운 반론이었다. 손찌검을 포함한 일체의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문 목사가 죄인처럼 끌려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경찰의 부당함을 강하게 지적하고 법에 따라 시민을 대우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상황에서 점잖게 경찰관직무집행법이나 형사소송법을 언급하며 과장을 타일렀더라면 어떠했을까? 어쨋든 경찰을 때리거나 무기를 빼앗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했다. 다만 법에 나와 있는 대로 수사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항의를 이어갔다. 

또한 더운 물이라는 긴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개로 쇠문을 두드렸을 뿐이다. 조용히 두드려서는 교도관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지만 벽이나 문을 부수거나 물건을 내던지거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박정희 노래” 사건에서 사용된 무기는 플라스틱 베개였을 뿐이다. 요구 내용도 상식에 맞는 것이었고 대응도 철저하게 비폭력이었다. 만일 보안과장에게 “박정희xx 노래”나 “독재자의 노래”라고 대꾸를 했더라면 전혀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오스트롬 선생님도 지팡이로 도망가는 점원을 가리키기는 했지만 점원이나 관리자에게 휘두르지는 않았다. 분하다고 울고 불고하지 않았고, 바닥에 드러눕지 않았고, 보상을 하라며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객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를 했을 뿐이다.     
     
약올림의 미학

Park (2016)은 초월윤리의 비폭력이 의도치 않은 약올림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107쪽). 강자가 자제력을 잃고 계속 폭력에 의존하가다 끝내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약올림은 비폭력의 귀결이지만 자칫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 되기 쉽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증거와 논리를 갖추지 않고 상대방을 헐뜯는 것은 비폭력도 약올림도 아닌 그저 어리석은 짓이다.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상대방의 헛점을 예리하게 파고 들어야 한다. “박정희 노래”가 뭐냐는 보안과장의 말에 “슈벨트의 노래를 슈벨트의 노래라고 하지 슈벨트씨의 노래라고 합니까?”라고 답한 것은 약올림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문영(2008)은 재판을 받으면서 “검사의 화를 돋워 미치게 만들고, 나는 길게 말하고, 검사가 결재받아 오지 않은 것을 물음으로써 악한 정권의 본색이 내 질문으로 폭로가 되게” 하는 전략을 취했다(296쪽). 법대 교수이면서 왜 국민투표로 결정된 헌법을 비방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 말 잘 하셨어요. 검사는 어느 대학 법대를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민법 총칙 시간에 무효의 의사표시라는 것을 안배웠어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무효예요. ...검사님, 댁에서 말하는 국민투표 때에는 중앙청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국투표를 해 국민을 협박했는데, 어찌 그 국민투표가 유효해요?”라고 답했다(297쪽). 상대방의 어설픈 공격을 바로 되치기하고 약을 올려 평정심을 잃게 만든 “아름다운 비폭력”이다. 

소정의 성내기는 비폭력이다

처음에 나는 소정 선생님이나 오스트롬 선생님께서 화를 내신 것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비폭력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저항권의 행사이거나 누려야 할 최소를 요구한 최소한의 행동이었다고 본다. 비폭력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약올림의 미학까지 갖추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 역시 비폭력 구도에서 행사된 정당하고 최소한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Park, Hun Myoung. 2016.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in Conflict Management: Lee’s Nonviolence, Conflict Episode, and Principled Negoti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6(2): 99-108.


원문: 박헌명. 2017.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비폭력인가? <최소주의행정학> 2(12): 1-2.


얼마 전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노벨 박물관에 다녀왔다며 누군가가 내게 Elinor Ostrom (1951-2012) 사진을 선물했다.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3년 뒤에 세상을 떠난 인디애나대학교의 정치경제학자다. 짧은 인연을 생각하며 바라본 사진 속 린(엘리노어의 애칭)은 너무 근엄해 보였다.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했다. 자상하고 활기찬 모습 뒤에 엄격함과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그래도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린의 동반자였던 Vincent Alfred Ostrom (1919-2012)도 비슷한 양면성을 가진 분이다. 

빈센트와 소정 선생님

언젠가 안도경 교수가 빈센트와 소정 선생님(1927-2014)께서 많이 닮았다는 얘기를 했다. 수년 간 린과 빈센트와 지냈고 고대 행정학과에서 가르쳤던 TK(안교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딱 맞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 모두 키가 큰 편이다. 한덩치를 하고 서 있는 모습이 비슷하다. 특히 멜빵바지를 입은 모습과 어눌하게 말씀하시는 말법이 몹시도 닮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두 분의 닮은 꼴은 생김새보다는 생각과 행동에 있다. 소정 선생님께서 자신을 청교도로 규정했는데, 빈센트 역시 청교도 모습이었다. 한없이 인자한 반면에 상식과 원칙에는 타협하지 않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 오스트롬 Workshop에 갔을 때 나는 긴장을 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곳이어서 더 낯설게 보였다. 옆자리에 지팡이를 든 어느 노신사가 앉았는데, 내게 어디서 왔는지 묻고는 워크숍 생활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것 저것 알려주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 노신사가 그때 이미 팔순인 빈센트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빈센트는 미국이 알래스카를 얻은 뒤 주헌법제정의회(Alaska Constitutional Convention)에게 자연자원 관리에 관한 자문을 해준 분이다. 관개灌漑와 어로漁撈 같은 공유자원(common-pool resources) 문제를 어떻게 잘 관리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빈센트가 종종 polycentricity (일을 해나가는 주체가 여럿이어서 서로 협력하고 조정해나가는 경우)와 미국의 연방제(federalism)를 확신있게 말할 때 나는 그냥 민주주의 이론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었다. 빈센트가 정부가 시민단체에 돈을 줘서 무엇을 하려는 것을 비판할 때도 나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우연히 빈센트의 행동을 목격하면서 나는 벼락을 맞는 깨달음을 얻었다. 

빈센트의 성내기

어느 여름날 나는 Kroger라는 대형 식료품점에 갔다. 필요한 물건을 담아서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다가오길래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금새 소란스러워졌다. 허리를 펴고 무슨 일인가 봤더니 계산대 앞에 선 노 신사가 지팡이로 저쪽을 가리키며 고함을 치고 있었고,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 흑인이 뒷걸음질 치더니 몸을 돌려 내빼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노신사가 빈센트였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손수 장을 보러 나오셨을까...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사태를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었고, 빈센트는 어떻게 저런 자를 점원으로 고용하느냐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빈센트의 노여움이 하도 서릿발같아 나는 차마 나서지 못했다. 

빈센트 다음으로 (그러니까 바로 내 앞에) 서 있었던 아주머니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 점원이 껄렁껄렁한 표정과 몸짓으로 빈센트가 담아온 물건을 성의없이 끄잡아서 스캐너로 읽었고,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마음이 상한 빈센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지적을 했지만 점원은 비웃으면서 계속  오만불손한 행동을 계속했고, 결국 빈센트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그 점원이 뒷걸음치면서 지었던 비열한 웃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이런 것이었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이렇게 탄식했다. 민주주의란 것이 공짜가 아니구나. 거창하게 혁명, 선거, 시위 등에서 민주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다. 정치행사가 아닌 일상 생활에 잘 녹아든 민주주의여야 한다. 정치인과 법조인이 아니라 일반 유권자의 수준이 민주주의 시금석試金石이다. 시민 개개인이 자연인으로서 누리는 기본 권리와 그 가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기본권이 침해당했을 때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치열하게 다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일반 시민의 이해와 용기와 행동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센트는 고객으로서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는 커녕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마저 무시당한 것에 대해 단호하게 부당하다고 말하고 시정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이다. 소정 선생님이 묘사한 청교도 모습이다. 그제서야 정부가 시민단체에 돈을 주는 것을 왜 빈센트가 싫어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권자의 정직한 뜻과 피와 땀이 필요할 뿐이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씨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는 까닭이다.  

시민단체는 자발성과 자율성을 그 생명으로 한다. 정부가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자본(social capital)을  늘린답시고 민간부문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는 것과 같다. 지난 9년 동안 신문 방송을 장악하고, 국가기관이 나서서 여론을 조작하고 비판세력을 탄압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랏돈으로 사회단체를 매수하여 여론을 호도하고 정적을 공격하게 했음이 드러났다. 자발성과 자율성이 망가진 이들에게서 소정(1980)이 말한 관官의 폭력을 견제하는 합리적 요구와 건전한 압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세월호에서 죽어간 수백 명의 인권과 9년간 짓밟힌 주권자의 자존심과 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깨어있는 시민의 사려깊은 이해와 참된 용기와 질서있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촛불 집회가 소중한 까닭이다. 나는 그 때 수많은 빈센트가 성내는 것을 보았다. 


원문: 박헌명. 2017. 팔순 노신사의 성내기와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