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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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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인쇄된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미셨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글이라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평소에 볼 수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박근혜 탄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던 아버지여서 의아했다. 


“도울 김용욱”이라고라?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게 뭐야?”라고 내뱉었다. 김용옥 선생의 문장은 고사하고 잘 봐줘도 까까머리 중학생 수준이었다. 두서없는 문단 구성과 유치한 단어 선택이 딱 그러했다. 논리도 없이 박근혜씨 탄핵을 비난하는 내용은 가관이었다. 아버지의 의도가 읽혔다. 봐라, 박근혜를 비난하고 문재인을 지지했던 도올마저 이렇게 돌아섰으니 참으로 고소하다... 나는 바로 “이거 도올 선생님 글이 아니예요”라면서 어디서 받아왔는지를 여쭈었다. 우물쭈물하시는 동안 나는 다시 글을 살펴봤다. 허탈했다. 누군가 작성한 것을 퍼나른 것인데, 작성자와 퍼나른 자가 “도울 김용욱”이라고 적었다. 순간 의도성이 다분한 선수들이 공작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기용 기자의 <한겨레신문> 기사(2016.12.31)를 참조하라.  


이런 날조질은 도메인 이름을 선점하거나 마치 오타를 한 것처럼 비슷한 도메인 이름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키는 이름점거(Cybersquatting or typosquatting)와 구조가 같다. 예컨대, 고대와 관련없는 자가 korea.edu를 먼저 등록해놓고 흥정을 하거나  오탈자인 것처럼 kore.edu를 만들어 부주의한 방문자를 호도한다. 마치 실수를 한 것처럼 “도올”을 “도울”로 적어놓고 사람들이 도올 김용옥씨의 글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호린다. 유치하고 저열한 꼼수다. 적의 지지자의 입을 빌어 적을 치는 것이니, 지지자들의 사기를 꺾고 그들끼리 서로 다투게 만들고 끝내는 적을 무너뜨리는 전술이다. 꿩먹고 알먹고다. 전시에 사용되는 심리전으로서 흑색선전과 회색선전이다. 저열한 짓이지만 사려깊지 않은 대중을 낚는데 효과만점인 방법이다. 아버지께 이 글이 왜 엉터리인지를 설명하면서 나는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값이 올랐다?


또 하루는 외출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JTBC <뉴스룸>을 시청하고 있는 내게 한 마디 하신다. 마침 손석희씨가 문대통령에 관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문재인은 사상이 수상해.” “손석희, 저 xx는 거짓말이나 하고...”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나는 황당했다. 어째서 문재인이 수상하다는 거냐는 내 말에 “너도 사상이 이상해”라고 답하신다. 목소리에 격해진 감정이 실려있다. 그러더니 드디어 “요즘 쌀값이 왜 오른 줄 아남? 문재인이 북한에 쌀을 다 퍼다 줬댜!”라고 폭발하신다.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처절한 울분과 적개심이 이런 것일까? 도대체 누가 저 팔순 늙은이를 저리 만들었을까? 평생 쌀값은 커녕 콩나물값이 얼마인지 모르고 사신 분이 아닌가.


날조기사가 만들어지고 퍼지는 구조


얼마 전부터 <한겨레신문>는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연재물을 통하여 날조기사捏造記事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는지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김완, 박준용, 변지민 기자(2018.9.27)는 극우 기독교 세력이 이끄는 “에스더 기도운동”의 인터넷 게시판이 날조기사의 공장이자 진원지라고 밝혔다. 대표인 이용희 등이 날조기사를 만들면 이른바 “미디어 선교사”들이 인터넷에 퍼트리는 “인터넷 사역”을 맡았다고 했다. 난민, 동성애, 북핵, 문재인, 박원순 등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추천을 눌렀다고 했다. 이 기자들(2018.9.28)은 “정규재TV”와 “신의 한수”와 같은 극우 유투비(youtube) 개인방송이 날조기사를 퍼트리고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버지께서 매일 전자우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열심히 읽고 밤늦게까지 유투비를 보신 까닭을 이제는 알 듯하다. 언젠가 우연히 아버지의 우편함을 보았는데 하루에도 수십 개 편지가 보내져 왔고, 멋있는 그림이나 시나 격언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내용은 황당무계한 혐오, 저주, 분개로 일관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마도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유투비 방송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짜증날 정도로 집요하게 반복했다. 예컨대, 박근혜 탄핵이 부당한 20개 이유를 선언문 낭독하듯이 또박또박 읽어내렸다. 법과 논리와 무관하고 증거와 상식과 거리가 먼 황당한 격문에 가까왔다.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불경이나 성경 구절을 독송하는 식이다. 사실과 논증이 아니라 차라리 종교였다.  


이쯤 되면 누가 무슨 이유로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날조질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하다. 현 정권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세력이다. 적폐청산을 좌절시키고 정권을 망가뜨려 친일·독재·냉전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수구세력이다. 그 대상은 일반인 수준의 사리분별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쉽게 낚일 뿐만 아니라 일단 낚이면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박정희 신격화와 김일성 우상화와 같이 이들을 현혹하여 세뇌洗腦시킨 뒤, 포로나 노예처럼 붙잡아 놓고 통제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간첩들처럼 수많은 (젊은) 노인들이 똑같은 내용과 표현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주문을 외듯이 따라서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더가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을 찍으면 나라가 망하고 북한의 식민지가 된다”라고 지령을 내리면 마법에 걸린 어리석은 노예들은 어찌 할 것인가?


날조기사? 가짜뉴스?


날조기사는 흔히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부르지만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날조기사나 가짜뉴스나 유언비어나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날조기사는 일상에서 자연스레 벌어질 수 있는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라 정적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물어뜯으려는 악의가 담겨있다. 의도가 불순하고 폭력성이 강하다.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웹마실꾼들을 유혹하기 위한 미끼로 가짜뉴스를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둘째, 사소한 오해가 아니라 사실과 거짓을 그럴듯하게 찢고 째고 붙여서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유언비어와 다르다. 작정을 하고 적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치밀하게 짜놓은 흉계다. 세째, 그냥 뜬소문이 아니라 기사 형식으로 작성되어 사람들을 홀린다. 기사의 권위와 공신력을 빌어 뭘 모르는 사람들을 속여먹는 파렴치짓이다. 네째, 자연스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조직적으로 전투를 하듯이 퍼뜨린다. 이런 면에서 전시에 벌어지는 심리전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의를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적이며 사회의 암종이다. 항간에 떠도는 뜬소문과는 달리 나쁜 의도와 흠융한 내용과 비열한 방법으로 정적을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날조기사의 폐해弊害는 유언비어나 가짜뉴스에 비할 수 없이 크다.  


날조기사를 어찌할 것인가?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역할에 주목한 수구세력은 노무현을 저주하면서도 노사모의 온라인 활동을 모방했다. 다만 노사모의 정치의식, 토론, 열정, 헌신을 가슴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인터넷 사용 기술만을 머리로 베낀 것이 비극이었다. 마음만 급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글쇠판(keyboard)만 두드리다 보니 사달이 난 것이다. “십알단” 사건이나 국정원·경찰·국방부(기무사령부와 사이버사령부)가 협력한 여론조작과 대선개입사건이 그것이다. 모두 기사날조질과 구조가 같다.


이후 팟캐스트(podcast)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수구세력은 날조질을 유투비로 이어갔다. 기본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유투비는 팟캐스트보다 이용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유투비는 영상과 그림을 제공하고 팟캐스트는 라디오처럼 소리만 전달하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의 유투비 활동은 조직적이었고 현재 우세를 점하고 있다(한겨레신문, 2018. 9.28).


날조기사의 목표가 된 민주당은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위협한다고 했다. 날조질을 법으로 규제하겠다고 했다. 수구세력들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미국산 소고기수입 파동이나 촛불집회에서도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난무했다고 강변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날조기사를 규제하는 것은 “내로남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광우병 가능성을 보도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른 <PD수첩>은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최순실의 존재와 이명박의 다스는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과 거짓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날조기사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 


정보통신사업자의 면책 여부


정부규제는 날조기사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퍼뜨리는 과정에 집중된다. 유포과정에서 정보통신사업자(서비스제공자)의 역할과 책임을 어찌 정의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매체에 올려진 날조기사에 대한 사업자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으며, 사업자 스스로 검토하여 부적절한  내용물을 걸러내도록 할 수도 있다. 또한 부적절한 내용물을 사업자가 내리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사업자의 책임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물을 것이냐에 따라 규제 강도는 달라진다. 

첫번째 방법은 사업자에게 면책권(immunity policy)을 준다. 미국의 통신품위법(Communications Decency Act of 1996)에 따르면 통신사업자는 통신망에 올려진 정보내용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No provider or user of an interactive computer service shall be treated as the publisher or speaker of any information provided by another information content provider” (Section 230). 이 규정은 원래는 저작권(copyright)을 위반한 게시물을 사업자가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보면 서비스 제공자는 올려진 정보 내용이 남을 비방하거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임을 알고서도 삭제하지 않았다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Levmore and Nussbaum 2010: 24). 페이스북이나 유투비에 올려진 게시물은 사업자가 출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서비스 제공자가 알아서 정보 내용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미 구글(유투비)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부적절한 게시물을 걸러내고 있다. 하지만 날조기사를 포함한 유언비어와 저질 정보가 인터넷을 휩쓸면서 많은 사회문제를 초래하였다. 


세번째 방법은 피해자가 합당하게 항의하면 서비스 제공자가 해당 게시물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정책”(notice-and-takedown)이다. 미국의 Digital Milledium Copyright Act of 1998의 Section 512에 따르면 사업자는 저작권침해로 신고된 게시물을 신속하게 삭제하거나 접근불가 처리를 해야 한다. 이 조항 역시 저작권에 관한 것이지만 이 논리는 일반 게시물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44조에 사업자가 부적절한 게시물을 “끌어내리도록” 명시하고 있다.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침해를 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제44조의2). 사업자는 삭제·임시조치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즉시 삭제 신청인과 정보게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물론 어떻게 신청인과 게재인의 갈등을 관리할 것인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조기사 문제는 이 규정을 제대로 적용하면 해결될 수 있다. 


날조기사와 표현의 자유


날조기사를 규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Levmore and Nussbaum (2010)는 표현의 자유가 추구하는 가치를 진리 발견(discovery of truth), 자율성(autonomy), 민주 토론(democratic deliberation)으로 정리했다. Mill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틀릴 수 있는 존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면 진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결정할 자율성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다양한 의견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필수요소인 공개 논쟁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날조기사는 진리를 발견하는 노력이 아니라 진리를 흠집내고 땅에 묻는 일이다. 애초부터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남을 해코지하기 위해 사실을 위조했기 때문이다. 자율성을 발현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탐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또한 서로 간의 숙고와 토론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정적을 매도하고 저주하는 짓이다. 날조기사는 표현의 자유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나 객관성을 가진 기관이 엄정하게 사실 확인을 하면 날조기사를 판별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대통령이 치매라는 허무맹랑한 낭설임에랴...


자율성에 기반한 민의가 여론


소정은 자율성을 가진 사회집단의 건전한 압력으로 행정기구가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1981: vii). 즉 정당, 노조, 대학, 시민단체 등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날조기사는 자율성이 있는 백성의 뜻이 아니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의 작전이다. 민의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흉계다. 민의 난동이다.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아니라 사회부채(social debt)나 사회악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문제를 살펴서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참고문헌


Levmore, Saul, and Martha C. Nussabaum,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원문: 박헌명. 2018. ”도울 김용욱”과 날조기사 공작. <최소주의행정학> 3(10): 1-2.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2019. 4. 14. 11:41 | Posted by 못골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와 적폐 청산을 기치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올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기소되고 적폐세력들이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힘겨운 “여름나기”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지만 실업률은 2014년 이후 3%대에 머물다가 올해 4%대로 올라섰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9%대에서 얼마 전 10.5%를 찍었다(연합뉴스. 2018.6.15). 이른바 “취업절벽,” “결혼절벽,” “출산절벽” 등은 벼랑끝에 내몰린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득주도성장정책의 일환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정해졌으나, 한쪽에선 가파르게(10.9%) 오른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다른 쪽에서는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임금 항목이 늘어나 인상효과가 적다고 항변한다. 최근에는 아파트집 가격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상승하면서 정부가 주택관련 정책을 정비하고 보유세와 종합부동산세를 손질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종부세 강화에 분개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공시가격을 현실화하고 종부세를 더 올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연초까지 8할대 고공행진이었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6월까지 7할대, 8월까지 6할대로 떨어졌고 9월 현재 5할대로 내려앉았다. 민주당 지지율은 연초부터 6월까지 5할대를 유지하였으나 이후 4할 초반으로 내려앉았다.

요즘 분위기는 얼핏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때리기”를 떠올린다. 뜬금없는 “친문패권”에 이어 “제왕적 대통령,” “내로남불(문로남불),” “불통,” “독선,” “코드인사,”  “대북퍼주기,” “세금폭탄” ... 흘러간 유행가를 다시 듣는 식상함이 있다. 노무현 문재인은 코드인사라고 비난하면서 이명박근혜가 김기춘을 앉힌 것은 적합한 인사라고 말한다. 노무현 문재인이 주는 것은 “퍼주기”라고 쏘아붙이면서도 이명박근혜가 보낸 돈은 “통일대박” 투자라고 한다. 청와대에서 국민청원까지 받고 있는데도 불통이고 독선이면 이명박근혜는 대체 뭐라 해야 하나?

요즘 수구세력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말법은 이성과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컨대, 종부세 인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13 부동산 대책을 발표한 다음 날 김병준씨는 완벽한 실패라고 단언했다. 정책평가가 아니라 비난과 저주 그 자체다. 하물며 “마이너스의 손”이나 “광팔이 정권”과 같은 유치한 칭얼댐임에랴... 연극을 빙자해 육두문자로 노대통령을 욕보인 <환생경제>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난 해 읽었던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2007)와 <왕따의 정치학>(2017)을 다시 펼쳐 든 까닭이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의 정신줄은 별반 달라진 것같지 않다.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

참여정부시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고도 왜 노무현은 비난을 받았는가?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데 왜 노무현의 인기는 오르는가? 왜 진보언론마저도 유독 문재인을 가혹하게 구박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의 지지도가 견고하게 올라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기숙은 두 책을 통해 일관된 답을 주고 있다. 진보진영(진보정당, 시민사회, 진보언론)이 세력화하지 못하고 사분오열했고 수구세력과의 담론경쟁에서 밀려나서 국민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조기숙 2007: 9, 29, 48).

조기숙은 수구언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어 마법을 건다고 했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32쪽).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담론을 잘 표현하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마법의 유리벽”은 수구언론이 만든 담론 프레임이다. 이 유리벽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수구세력이 원하는 흉칙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춘다(22쪽). 일단 마법에 걸리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수구든 진보든,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남녀노소가 “노무현 때리기”와 “기승전—문재인”을 즐긴다. 현대정치에서 언론은 담론을 공론의 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힘센 수구언론이 “마법의 유리벽”을 만들어 낸다. “

이른바 “밤의 대통령이자 어둠의 마왕”이 부리는 이 마법은(42쪽) (1) 프레임 개발, (2) 확대재생산, (3) 기정사실화, (4) 국민들의 확신이라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꼬투리를 잡아 살짝 비틀어놓으면 다음 날 새누리당이 그걸 확대해서 공격했다. 그러면 저녁에 문화일보가 진보진영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의 인터뷰해서 살을 붙이고, 다음 날 오전이 되면 동아일보가 더 큰 문제로 확대했다. 한 이틀, 때로는 1-2주가 지나면 소위 진보언론이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보도했다”(87쪽).

첫째 단계에서 “조동문”(조선, 동아, 문화일보)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이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주술을 건다. 예컨대,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제왕적 대통령, 호남홀대 등이다(87, 310쪽).

둘째, 수구정당이 언론에 나온 얘기라며 공격을 하고, 수구언론이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교수, 연구원, 운동가와 같은 여론선도자(opinion leader)를 동원하여 판을 벌인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조간에 프레임을 만들면 그걸 받아 <문화일보>가 확대재생산하는 순환 홍보”라고 할 수 있다(33쪽). “어떤 쟁점에 대한 합리적인 찬반 토론을 통해 과학적으로 주장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언론이 주술을 만들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진보, 보수 진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 주술을 읊고 다닌다”(40쪽).

세째 단계에서 드디어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은 물론 진보정당마저도 마법의 세몰이에 넘어간다. 이 지경에 이르면 “조동문 프레임”이 기정사실화된다. 시민단체와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정부를 편든다는 어용시비가 두려워 수구세력의 부당한 비난을 눈감거나 무작정 맞장구를 치거나 수구세력보다 더 가혹하게 비난한다(45-47, 84쪽). 진보 언론인들의 “양심 결벽증”때문이다(조기숙 2017: 114-115). “노무현도 그렇고 문재인도 그렇고, 치명상을 입는 건 좌파언론이 우파언론의 왜곡보도를 확인사살할 때다”(조기숙 2017: 89).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유시민씨 역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다 때[리는]” 진보세력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또 열린우리당은 끌내는 자신을 옥죄는 줄도 모르고 나서서 참여정부에 흠집을 내고 서로 쌈박질을 해댔다. “영악한 보수언론은 진보진영의 낮은 변별력을 이용해 큰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물을 뿌렸다.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추방시킨 사람들은 바로 참여진영 인사들이다”(조기숙 2007: 206). 친노/비노/반노 프레임 공격에 맞서기보다는 스스로 친노를 해체했고, 문재인 역시 뜬금없는 “친문 패권”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일일이 대응하기] 귀찮아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먹잇감을 대주던 우리당이 통째로 보수언론에 잡아먹히게 된 것”(169쪽)이다. “진보진영은 사분오열했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제 발등 찍기에 바빴”고(48쪽) “열린우리당은 … 보수언론의 장단에 북치고 장구까지 친 것”(149쪽)이다. 조기숙은 “진정으로 뭘 반성해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보수언론의 주술을 그대로 따라 외면서 국민 앞에 반성한 것이 가장 큰 잘못”(167쪽)이라고 적었다.

마지막 단계는 일반 국민들도 홀려서 주문을 따라 왼다. 진보세력은 물론 진보 운동가, 교수, 언론, 정당까지 다들 그러니까 확신을 가지고 노무현과 문재인을 비난한다. 마법이 현실화된고 완성된다.

“조동문” 마법의 특성

생각을 덛붙이자면 수구세력의 마법은 우선 합리성과 관계가 없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구세력이 원하는 결론(비난과 저주)이 있을 뿐이다. 터무니없는 프레임이며 그저 신앙과 종교같은 믿음이다.

둘째, “마법의 유리벽”은 항상 나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원래의 뜻과 사실을 바꾸기 위해 단장취의, 맥락왜곡, 허위조작 등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조기숙(2007)은 “언론의 자의적 해석, 과잉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말꼬리 잡기, 말 뒤집기, 없는 말 만들어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적었다(22-23쪽).

세번째 특성은 차별화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정적을 끌어내려 짓밟는 반면 우군은 띄워주워 기득권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사실 수구세력의 전매특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옳은 말을 해도 몹쓸 말을 한 것처럼 매도하고, 이명박근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도 없었던 일로 넘어가거나 미화한다. 문재인은 항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찡그리지만 박근혜와 안철수는 후광이 비치고 해맑게 그려준다.

마지막으로 수구세력의 마법은 영원히 국민을 홀리고 속일 수는 없다. “마법의 유리벽”은 생각보다 깨지기 쉽다. 이치에 맞는 것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발이 오래 가지 못한다. 사실과 진실과 진심은 거짓과 왜곡과 눈속임으로 덮을 수 없다. 똑같은 것을 계속 써먹다 보면 내성이 생겨 잘 먹히지 않는다. 마약과 같은 셈이다. 참여정부 시절 수구세력은 “친노/비노”와 “세금폭탄”으로 재미를 봤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같다.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조동문”의  유리벽은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정치판에서 “마법의 유리벽”과 “왕따”가 위력을 발휘했지만 국민들은 끝내 노무현과 문재인을 버리지 않았다.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조동문” 마법력의 원천

왜 합리성이 없는 “조동문 프레임”이 먹히는 것일까? 참여정부가 담론 경쟁에서 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생각컨대, 첫째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이 그만큼 강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프레임 경쟁은 “쪽수”를 따지는 패싸움이나 세몰이에 가깝다. 경기규칙은 약육강식이다.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득권에 힘으로 맞서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현재 문재인은 “최순실정권”의 기저효과와 촛불혁명의 뒷배로 버티고 있다.

둘째는 수구세력이 능력이 탁월하고 영악하기 때문이다(조기숙 2007: 81-82). 기득권을 가진 만큼 인재들의 질이 높기 때문이다. 수구정당과 조동문 기자들의 능력이 진보정당과 한경오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이들의 조직력과 추진력은 정점을 찍었다. 사실 어설픈 프레임은 흥행하기 어렵다. 아주 그럴듯하게, 덜 혐오스럽게, 덜 유치하게 사실을 비틀고 색칠해야 한다. 인터넷 댓글 조작도 그렇지만 “기술자”들이 똑똑하고, 정교하고, 음흉해야 한다.

세째, 노무현과 문재인은 권력을 남용해서 수구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는 양심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선동정치를 하는 언론과 경쟁을 하려면 일정 부분 같은 전술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어떤 전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국민을 속이거나 감추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 한다”(116쪽). 이 사실을 수구세력이 잘 알고 역으로 공격한다.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에게는 참여정부를 편드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약(“어용 프레임”)을 친다. 참여정부에서 조그마한 실수나 오해라도 있으면 당장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교활하게 그 프레임을 덮어씌운다(정말 빨갱이나 제왕이라고 생각했으면 구석에 머리처박고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시절에 참혹하게 당한 피해의식과 낭만에 가까운 도덕 결벽증을 들쑤셔 진보세력을 몰아붙인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조기숙의 <왕따의 정치학>

노무현과 문재인은 집단으로 구박을 받고 따돌림를 당하고 무참하게 짓밟혔다. 즉, “왕따”나 “조리돌림”를 당했다. “노무현 왕따”와 “마법의 유리벽”은 동전의 양면이다. “노무현 왕따”가 구조를 설명한다면 마법을 만들어 내는 “조동문 프레임”은 과정을 말한다. 조기숙(2017)은 왕따 현상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를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로 설명하였다(92-95쪽).

“노무현 왕따는 그의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들은 비만 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다. 노무현 때리기는 이른바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조기숙 2017: 43).

피해자(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는 가해자가 싫어하는 어떤 특성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민주화 운동, 국민통합, 적폐청산 등이 그것이다. 가해자(수구정당, 수구언론)는 힘, 권력, 기득권을 가진 자인데 피해자를 못마땅해하고 못살게 군다. 가해자는 동조자(수구지지자)들이 자신의 왕따질을 응원해주고 방관자(깨어있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묵인하는 것을 원한다. 반면에 방어자(깨어있는 시민)가 끼어들어 왕따를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방관자는 “조동문” 주술에 걸려 걸핏하면 노무현 때문이라고 투덜대거나 달동네에 살면서 종부세 걱정에 한숨쉬는 사람들이다. 동조자와는 달리 나서서 가해자를 지지하거나 직접 피해자를 걷어차지는 않는다. 강화자는 한 때 왕따 피해자였던 사람인데 더 약한 왕따 후보가 나타나면 또다시 왕따당할까봐 두려워서, 자기가 당했던 설움을 화풀이하려고 더 심하게 피해자를 해코지 한다(94쪽). 말하자면 가해자의 앞잡이가 되어 왕따를 강화한다. 방어자는 왕따당하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부당함을 말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방관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노’라고 말하면 왕따 현상에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94쪽).

“일관되게 호남 왕따의 방어자가 되어 기득권으로부터 온갖 미움을 샀던,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까지 버려야 했던 노 대통령에게 호남을 차별했다는 마타도어를 퍼뜨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이들은 친노와 호남의 분열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다. 왕따 이론에 따르면 가해자, 강화자, 동조자가 바로 그들이다”(309쪽).

참여정부로 따지자면 피해자는 노무현인데,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호남홀대 등의 프레임으로 공격을 받았다. 가해자는 수구냉전 정당과 언론이고, 동조자는 그 지지자들과 수구냉전 단체다. 강화자는 대통령 탄핵소추에 나섰던 새천년민주당(이후 민주당),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참여정부를 헐뜯었던 시민단체와 진보언론(한경오)이다. 이때 방어자는 깨어있는 시민 소수와 문재인(정부 인사)이었다. 

왕따질의 법칙

생각을 덧붙이자면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는 왕따 내내 바뀌기 어렵다.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방관자가 늘면 방어자는 줄고, 방어자가 늘면 방관자는 줄게 되어 있다. 강화자는 가해자의 왕따가 무서워서 혹은 더 약한 자를 괴롭혀 보상받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따 분위기가 바뀌면 달라진다. 단지 심지가 굳지 못하고 겁이 많아 매질을 못견뎌할(매질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입에 거품물고 쓰러지는) 뿐이다.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확인사살한 사람들이 변절한 운동권 인사였던 것처럼 문재인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국민의당과 변절한 동교동계 인사들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어리석게도 “내부총질”을 하면서 노무현 후보를 끌어내렸던 새천년민주당(후보단일화협의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얼마나 가해자와 동조자가 왕따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느냐, 얼마나 방어자를 억누를 수 있느냐에 조리돌림의 성패가 달려있다. 즉, 얼마나 방관자를 확대하고 줄이느냐의 싸움이다. 한편에서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과 역량,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자와 방어자의 인내와 전략이 맞부딪힌다. “마법의 유리벽”은 가해자와 동조자와 강화자의 힘이 월등하여 감히 방어자가 나타나기 힘든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다수가 방관자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왕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방어자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해자와 동조자들은 누군가가 방어자가 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필사적으로 싹을 잘라버린다. 두목을 배신한 조직원을 보는 데서 난도질을 해대는 조폭의 생리와 마찬가지다. 꼼짝말고 방관자로 남아있으라는 강력한 경고다. 그래서 김대중과 호남을 지키려던 방어자 노무현이 그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조기숙 2017: 95, 97).

마법과 왕따에서 벗어나기

그러면 어떻게 “마법의 유리벽”을 깨고 주술을 풀 수 있을까? 어떻게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기숙(2017)은 왕따의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수많은 방어자를 만들어내고, 정치세력화로 다수파가 되면 왕따는 자연스레 해소된다고 주장했다(318쪽).

“... 딱 하나 남은 방법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을 국민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방어자가 세력화되어 국민 중 친노가 절반을 넘어가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선진국 대열로 들어설 것이고 친노 왕따는 사라질 것이다”(211쪽).“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세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계파를 다수파로 만들면 된다. 다수파가 되어 소수자를 포용하는 게 왕따 정치를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212 쪽).

피해자가 방어자를 모아 세력화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왕따는 불가능해진다. 다수파가 힘을 잃은 소수파에게 왕따를 당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소수파가 스스로 세력을 불려 다수파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다. 현실성이 거의 없는 전략이다. 가해자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동조자와 강화자가 등을 돌리게 되면 곧바로 가해자의 기세가 꺾이게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그런 탁월한 소수파였다면 애초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글쓰기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국정홍보처도 운영했지만 “조동문의 마법”을 걷어내지 못하였다. 진보언론까지 주술에 걸려 노무현에게 돌팔매질을 해댔다. 친정인 민주당(조순형, 추미애)은 노무현의 등에 칼을 꽂았고, 열린우리당은 청와대를 힐난하면서 각자 살아남을 궁리에 바빴다. 조기숙(2017)은 “만일 진보진영에서 최대 다수의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친노가 패권으로 민주당을 장악했다면...” 라면서 아쉬워했지만(102쪽) 그들은 자질과 역량에서 수구세력에게 밀렸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먼저 알고 떠나는 것을... 義가 아닌 利를 보고 모인 “탄돌이”아니었던가. 아무리 모래알을 모아놓은들 차돌이 되겠는가.

조기숙(2017)은 “조동문 프레임”에 말려들어 참여정부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사과하고 “친노”를 해체한 민주당의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205, 258쪽). 맞는 지적이다. “친노” 자체가 판짜기인 것을... 하지만 진보세력이 강대강으로 수구세력과 “맞짱”을 떴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어차피 마법이든 왕따질이든 힘자랑인데, 어떻게 약자가 강자를 힘으로 이긴단 말인가? 아마도 깡마른 독기를 품고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다보면 왕따질을 피하기는 커녕 더 가혹한 폭력을 각오해야 한다.

행여 노무현이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총칼로 수구세력을 제압했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義로 뭉쳤던 방어자(민주세력)는 흩어지고, 냉소를 짓는 방관자는 늘어났을 것이다. 대의를 잃고 명분을 잃고 사람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만일 문재인이 참여정부 시절 사사건건 싸움닭처럼 악다구니를 썼더라면 지금의 문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빙하기같은 겨울이 다가옴을 깨닫고 미련없이 고개를 떨군 마지막 잎새였다. 순리대로 조용히 몸을 땅에 삭히며 새싹이 솟는 봄을 참고 견디면서 기다렸다.

소정의 비폭력이 답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을 원하지만 아무 때나 그 힘을 얻을 수는 없다. 정치세력화는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떻게 하면 진보세력이 “조동문”의 마법을 풀고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을 음미해보자. “마법의 유리벽”이든 “왕따질”이든 모두 강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다. 소정의 비폭력은 강자에게 매를 맞더라도 약자는 흥분하거나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것이다(1986: 289; 2008: 68-69). 폭력을 극복하는 대안이 폭력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비폭력은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것이다(1986: 290).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투쟁—악한 강자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2001: 88)—을 하라는 것이다(1986: 294). 강자에게 매를 맞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더라도 할 말은 계속 하라는 것이다(1991:118; 2001:246). 이때 말은 합리성이 있고 사실과 이치에 맞아서 강자의 이성조차 감히 부정하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지극히 옳은 말이다(2008: 66).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하며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 행사가 아니다(1991: 322; 2001: 149).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이나 최소한의 말이어야 한다(1996: 56; 2008: 491). 예컨대, 박해를 받더라도 “세금폭탄”은 사실이 아니며 호남 왕따는 잘못이라고 소신껏 말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사실무근이나 흑색선전이라며 펄쩍 뛰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난동이다. 조기숙(2007)은 “옳은 말을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냐고요? 옳은 말을 옳게 하면 누가 써준대요?”(135쪽)라고 진보언론에게 항의하고 싶었겠지만 흥분하지 말고 옳은 말을 옳게 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폭력에 의지하는 강자는 정당성이 빈약하며, 철저하게 잇속으로 엮여진 세력이다. 한국에서 수구세력은 보수도 우익도 아닌 그냥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부와 권세를 쫓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념집단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애국을 팔고 안보를 파는 구악舊惡일 뿐이다(민주당이 진보와 보수 역할을 다 하느라 바쁘고 헷갈려한다). 이들은 금덩이가 커질수록 탐욕도 커져 법도 규칙도 없이, 위아래도 없이 서로 칼부림을 하다가 스스로 붕괴한다(1986: 297-298). 조기숙(2007: 49)의 예측과는 달리 구악들은 장기집권은 커녕 끝간데 모르고 해먹다가 9년 만에 자멸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나 최순실이 적당히 해먹고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패가망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자의 폭력에 대하여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가 보호되고, 성장할 토대가 마련된다(1991: 18-19). 소정은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라고 했다(1991: 19). 그런데 약자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난동을 부리면 스스로 분열하던 구악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당성을 축적하게 된다(1986: 297). 망해가던 구악들이 살아나 보복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래서 약자는 인내하고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2001: 204). 소정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어”라고 말했다(1986: 336). 절망같은 폭력(왕따)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으로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자만이 평화를 만든다(1980: 350, 365). 

노무현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노무현은 김대중과 호남이 왕따당하는 것에 맞서면서 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폭력이 아닌 말로 다투었다. “마법의 유리벽”에 갖혀 있었지만 그는 치열하게 사고하고 글쓰고 논리적으로 말하고 대화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겠지만 노무현은 “조동문 프레임”에 맞서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지 않았다. 반칙과 특권을 거부하고 원칙과 상식에 충실한 바보였다. 조기숙(2007: 123)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노대통령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라고 했다.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처럼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채 정적을 사찰하거나 협박하고 여론을 조작하지 않았다. 국정원이든 기무사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국가기관을 일절 동원하지 않았다.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수구세력의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국가기록물(하드디스크 복사본)을 유출했다며 몰아붙였을 때에도 편지를 적어 할 말을 하고 깨끗이 물러섰다. 그는 끝까지 비폭력(이성, 상식, 논리)에 의지하여 참고 견디었다. 오랜 시간 의미있는 고난을 겪어온 또다른 인동초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에 모여들어 다같이 슬퍼하고 자책하면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친 까닭이다.

노무현의 서거는 본인의 최선이었다. 그의 마지막 글에서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한다고 했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비폭력자로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운명이라고 적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서거는 마지막 비폭력(의사표시)이자 “자기희생”이었다. 그의 몸던짐이 사람들을 울렸고 움직였다. 마법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했다. “마법의 유리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주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왕따질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고, 패거리질을 하던 동조자와 강화자를 부끄럽게 했다. 저수지둑이 터진 듯이 방관자들이 방어자가 되어 쏟아졌다. “비폭력의 효과는 원수를 갚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가 그에게 돌아오게 할 정도로 큰 효과가 있다”(1996: 423). 그 가슴 울림이 9년 동안 성장하여 광장의 천만 촛불이 되었다. “조동문”의 주술은 타버리고 “마법의 유리벽”은 깨져나갔다. 왕따 방어자이자 피해자였던 노무현이 정치의 전범典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희생자가 지켰던 규칙이 악한 세상을 구출하는 원칙으로 만인에게 인식”되었다(1996: 437-438).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

사실 이명박근혜가 없었다면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은 최소한 20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이명박의 탐욕과 “최순실 정권”의 엽기 행각은 21세기 민주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이제 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눈을 맞추고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대북 퍼주기”와 “세금폭탄”과 같은 주술을 재탕·삼탕하고 있다. 수구 정권에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인터넷 댓글을 조작했다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도 온라인은 세력싸움으로 뜨겁다. 적폐들의 저항과 패악질도 거세다. 하지만 이제는 “조동문”의 마법도 왕따질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그만 피해의식과 도덕/양심 결벽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인재를 발굴해 자질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멀리 보면서 보편성과 합리성과 원칙과 상식에 비추어 묵은 난제를 하나하나 풀어갔으면 한다.
 
참고문헌

조기숙. 2007. <바법에 걸린 나라>. 서울: 지식공작소.

조기숙. 2017. <왕따의 정치학: 왜 진보언론조차 노무현 문재인을 공격하는가?>. 경기도: 위즈덤하우스


원문: 박헌명. 2018.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최소주의행정학> 3(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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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분양은 갑질이자 정치다

2019. 4. 14. 11:39 | Posted by 못골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을 의식주라고 한다. 왜 살 곳이 입을 것과 먹을 거리 다음에 오는 것일까? 아마도 긴 시간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 아파트집(apartment)은 흔히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 부와 탐욕을 상징한다. 서울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집(흔히 “아파트”로 통용되는)은 25-30평형 기준으로 보통 15억원을 넘는다. 이런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기 위해 서민들은 허리를 졸라매고 수십 년 동안 월급을 모아야 한다. 강남 아파트 불패신화는 요즘 서울 전역으로 파고 들어 문재인 정부를 옥죄고 있다.

식구가 늘면서 지난 해부터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산너머에 경관이 뛰어난 아파트 단지가 공공기관의 발주로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공성과 환경보호 문제로 벌써 몇 년 째 미뤄지다가 드디어 분양을 하게 되어 기대감이 폭발하였다. “로또”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첨만 되면 당장 억 대 프리미엄을 챙길 수 있다고 했다. 가까운 동무가 등떠밀 듯 분양신청을 권했다.

아파트집 분양신청이 처음인 나는 지어진 아파트를 사는 것이 아니라 조감도와 맛보기집(show house) 만 보고 결정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분양 후 3년 뒤에나 지어질 집을 미리 돈을 주고 예매한다는 것이 떨떠름하다. 소비자들이 “제발 집 한 채만 줍쇼”라고 조아리면서 돈다발을 드리밀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정부와 공급자들은 분양원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집을 지어 파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유리한 방식이다. 애초부터 “갑질” 냄새가 확 풍기는 일이다.

“선수”들에게만 친절한 분양공고

깨알같이 적힌 분양공고를 확대해서 읽으면서 나는 속이 불편했다. 일반 시민들이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니가 알아서 이해해라”는 소리다. 닳고 닳은 “선수”들을 위한 주의사항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국민주택과 민영주택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같은 공공기관이 공급하는 아파트인데, 84m2보다 작다고 국민주택이고 크다고(97m2형) 민영주택이라니… 차라리 공급주체에 따라 공영주택과 민영주택으로 나눌 일이거늘… 또 전용면적이니 공용면적이니 공급면적이니 하는 소리는 “선수”가 아닌 사람들을 홀리는 숫자놀음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용어와 표현이 수두룩하다. 한 젊은이는 규정을 모르고 청약을 했는데도 당첨되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이번 분양에서 일반분양은 1순위와 2순위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63%를 차지하는 특별분양은 기관추천, 국가 유공자, 생애최초, 신혼, 다가구, 노부모 부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신청할 수 있었다. 각 유형 별로 자격 기준과 제출 서류가 달라서 어느 것이 본인에게 해당되는지, 어느 것이 유리한지 알기 어려웠다. 언론 보도를 참고하거나 귀동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웹집을 방문했지만 아파트집을 광고하는 문구, 조감도, 맛보기집을 찍은 사진 정도를 볼 수 있었다. 확대경이 없이는 볼 수 없는 분양공고 파일 그대로를 덩그러니 올려놓았을 뿐이다. 공급자가 원하는 내용을 멋있는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지 소비자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단히 불친절한 웹집이었다.

문의사항을 물어보라는 전화번호가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통화량이 많아서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만 해댔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러 번 통화를 시도해도 똑같은 소리였다. 분양에 관한 궁금증을 풀기는 커녕 인내심과 통신비만 허공에 날렸다. 생색용에 가까운 문의전화번호였다. “답답한 니가 참으세요”라고 배짱을 부리는 듯했다.

이미 언론에서는 청약광풍이 분다고 진단하고 아무리 못해도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일반공급 1순위 청약에만 15만 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이 240대 1이었으며, 특별공급은 평균 11대 1로 집계되었으며, 일반분양 최고 경쟁률은 540대 1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비자의 관심과 청약수요는 오래 전부터 예상되었지만 사업자는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게을러 터졌다. 그럴듯한 사진으로 치장한 웹집은 내용이 부실했고, 문의전화는 언제나 통화중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맛보기집에 직접 방문하여 직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분양초짜의 맛보기집 줄서기 

그렇찮아도 나는 아파트 분양이 대체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맛보기집이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하였다. 특별히 공공기관이 분양과정에서 어떻게 신청자를 대우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맛보기집(“모델하우스”)이 문을 여는 오전 10시에 맞추어 도착했다. 올해 유난스레 뜨거웠던 여름이 한껏 폭염을 뽐내던 날이었다. 터다지기를 마친 허허벌판에 세워진 맛보기집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맛보기집 뒤쪽은 벌써 차가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7시부터 와서 기다렸댄다. 사람들은 입구에서 줄을 서기 시작해서 맛보기집 뒤에 세워진 천막 안을 채웠고, 차츰 공터에 주차된 차 사이에 줄을 만들어 순대 모양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천막 안에 줄을 선 2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광경이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아 막 도착한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연일 맹위를 떨치던 폭염 속에 네댓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이 노인들과 여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기도 했고, 먹을 거리와 마실 거리를 챙겨오기도 했다. 식구들이 와서 교대로 줄을 지키기도 했다. 나처럼 대책없이 혼자서 전화기만 달랑 들고 온 초짜는 드물었다. 천막 안은 아쉬운대로 생수가 제공되고 냉방기가 돌아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매마르고 후끈 달아오른 맨땅에 무방비로 서 있었다. 노출된 팔다리와 목이 타버렸다. 젊은 아낙의 등에 업혀 온 젖먹이는 칭얼대다 지쳐 늘어졌다. 사업자는 급한대로 허름한 그늘막이라도 설치하고 구급차를 준비시켰어야 했다. 냉방기는 어렵다 해도 마실 물이라도 제공했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누군가가 생수병을 사와 곱절 값에 팔았겠는가. 또 사람들이 인부들의 화장실을 물어 물어 찾아가게 할 일이 아니었다. 공공기관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을 외면하고 시민들을 이리 박대해서야 어디...

드디어 일부 사람들이 폭발했다. 서류를 제출하러 두번 째 맛보기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첨자와 예비당첨자만 모여서 첫번 째보다는 사람들은 적었지만 맛보기집 안에 들어가기까지 고역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당첨자보다 예비당첨자를 먼저 들여보내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잘못 배부된 번호표가 시비거리가 되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뒷번호를 받았다. 번호표는 받아들었지만 순서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방문객과 안내원들이 대치하였다.

사람들은 해명과 개선을 요구했고 안내원들은 자신들이 지시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맞섰다. 분개한 사람들은 책임자를 나오라고 했고, 안내원은 책임자의 이름도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도 믿지 못하겠는지 다들 입구에 몰려들었고 순간 안내원들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이쯤되면 폭동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고 끝내는 책임자 모가지가 죽창에 걸리는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다.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일용직이고 상사가 누구인지 어느 회사 소속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사업자는 신청인들과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권한도 없는 일용직을 동원하여 “집 한 채만 줍쇼”하는 거렁뱅이들을 상대하게 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완장채운 용역 직원과 신청인들이 언쟁하고 몸싸움하는 광경을 멀찍이서 즐기는 책임자의 품격이라고나 할까. 양쪽 모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사이에 책임자는 빠지고 그의 책임은 사라진다. 참으로 비열한 처사다.  

큰 고객, 작은 서버

대기줄 이론(queueing theory)에서 보면 소비자가 폭발하듯 도착했지만 시스템은 처리능력이 터무니없이 작았고 대기줄을 다루는데도 소홀했다. 안내원은 줄세우는 데만 몰두할 뿐이고 사람들의 불편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그 결과 대기 비용 대부분을 소비자가 고스란히 부담하였다.

먼저 잠재고객(calling population)은 무한대는 아니어도 충분히 많았다. 맛보기집에 사람들이 몰린 것 이상으로 분양신청을 했다. 고객이 도착하는 것은 포아송분포(Poisson distribution)를 따르지만, 평균도착수(λ)가 일정치 않고 최대치가 매우 컸다. 10시 전후해서 집중되었고 심지어는 7시부터 맛보기집 앞에서 기다린 사람들도 많았다.
 
장장 6시간을 폭염과 싸우면서 기다리다 맛보기집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도대체 몇 명이 상담을 하는지를 먼저 살폈다. 고작 6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내가 받은 번호표는 321번이었는데, 상담신청은 이미 끝나버린 뒤였다. 서류를 제출하려고 다시 방문했을 때는 10-12명이 서류를 받고 있었다. 맛보기집 안에는 서버수(s)를 배로 늘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사업자는 상담사나 접수인을 늘리지 않았다. 평균서비스시간 (1/μ)은 분양유형별로 달랐다. 예컨대, 일반분양 서류접수는 3분이면 족했으나 노부모와 다자녀 특별분양은 15-20분이 걸렸다. 당연히 특별분양에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어야 했다. 

대기줄이 엉망이었다

맛보기집을 시스템으로 봤을 때 대기줄(queue)이 너무 짧았다. 시스템을 주차장까지 확대하더라도 일렬로 이어진 대기줄은 짧았다. 한마디로 대기줄 설계가 엉망이었다. 방문자들은 맛보기집 밖에서 줄을 섰고, 혼잡을 피하기 위해 입구에서 20명씩 새 줄에서 기다렸고, 상담을 받거나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다시 줄을 서야 했다.

고객은 몰려들고 서버수는 터무니없이 적고 대기줄이 너무 짧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 번호표를 선착순으로 정확하고 나누어 주었어야 했다. 엉터리 대기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뙤약볕에서 장시간 생고생을 한 셈이다. 맛보기집 안에서도 줄을 세우지 말고 유형에 따라 번호표를 나누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줄을 세우면서 어설프게 번호표를 나누어 주다 혼동과 분란만 초래했다. 또 맛보기집을 둘러보려는 단순 방문자와 상담을 받기 위에 찾아온 고객을 구분했어야 했다. 상담고객이 맛보기집에 오래 머물면서 방문자 역시 애꿎게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대기줄에서 기다리는 고객을 부르는 규칙(queue discipline)도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서류를 제출할 때 입구에 있는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고 분양유형에 따라 일련번호표를 주었다. 하지만 한 직원이 두 가지 유형의 서류를 받으면서 혼란이 생겼다. 일반분양과는 달리 번호를 부르지 않아 신청자의 순서를 알기 어려웠다. 또 서류제출시 당첨자보다 예비당첨자를 우선 들여보내 논란이 되었다. 5세 미만 아이를 데려온 방문객에게 우선권을 준 것은 고객의 안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만 하다.   

투기판, 사기판, 정치판이다

내가 관찰한 아파트집 분양은 갑질이다. 아파트를 짓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파트에 그렇게 사람이 몰리고 돈이 몰리는 것을 맨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약하러 온 어떤 이는 프리미엄만 벌써 1억 5천이고 몇 채씩 분양받은 사람도 있다고 떠벌렸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분양신청자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말이다. 수많은 탈락자들이 “로또”에 당첨된 소수를 부러워하고 원망하는 그런 투기판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진 자들의 못된 짓을 배운 백성의 모습이다.
 
그런 투기 수요에 공급자는 아쉬울 것이 없다. 아파트집을 짓기도 전에 설계도도 없이 그럴듯한 조감도와 맛보기집으로 분양을 할 수 있다. 분양원가와 세세한 항목을 밝히지 않고 분양가를 책정한다. 소비자는 집의 정확한 모습과 품질을 판별할 수 없으며 가격이 적정한지를 따질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애초부터 시장실패는 불가피하다.  사전분양이 불완전한 계약이며 공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갑甲인 사업자는 친절하게 분양공고를 설명해주지 않았고, 을乙인 고객을 뙤약볕에 방치해 놓고 최소한의 그늘막이나 물도 제공하지 않았다. 책임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임시직원을 내세워 시민들의 궁금증과 분노를 짓눌렀다.

어쩌면 아파트 분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축소판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그려진 그대로다. 신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 열차 끝에서 바둥대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고, 열차 앞에서는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른다. 뙤약볕이 불타는 곳에서 천막안으로, 다시 입구에서 맛보기집 안으로 전진하면서 냉방기와 생수가 제공되고 덧신과 안락의자가 추가된다. 인간대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줄을 서고 번호표를 또 움켜쥔다. 약육강식의 전쟁이다.

흔히 아파트 분양은 시장 논리이며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득권자의 횡포에 가깝다. 아파트 가격을 떠받치는 세력이 버티는 한 강남에 수백만 채를 공급한다 해도 그 탐욕은 채울 길이 없다. 은행대출을 규제하고 세금을 강화해도 그들은 버티면서 반격을 도모한다. 규제가 약하면 실실 비웃고 강하면 세금폭탄이라며 대든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들을 구석(주택분양)에 몰아넣고 경쟁과 불안을 부추겨 가격상승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은 가진 자들이 대부분을 갖게 되는 사기판이다. 돈이 없으면 아파트를 살 수도,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힘겨루기이자 돈겨루기다. 

아파트집 문제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토지, 증권시장, 이자율, 환율까지 얽히고 설킨 난제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피튀기는 몸싸움이다. 약육강식의 현실이다. 이래서 시장과 정부 모두 실패하기 쉽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그 어려움을 이해하고 참고 견디면서 길게 호흡했으면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아파트 분양은 갑질이자 정치다. <최소주의행정학> 3(8): 1-2.




지난 23일 노회찬이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인터넷 게시물의 조회수를 조작한 “드루킹” 김동원 일당이 건넨 돈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사건이 불거진 후 줄곧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지만 유서에서 4천만 원을 대가없이 받았다고 인정했다. 예기치 못한 비보에 많은 시민들이 지역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소를 찾았다. 여야는 물론이려니와 수구냉전 세력까지도 이심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폭염에도 조문객이 7만 명에 이르렀다니... 하물며 진보가 빨갱이로 낙인찍힌 나라에서. 

유시민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정의롭고 품격있는 논객이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준 운동가였다. 척박한 토양에서 진보정치를 대중화시킨 정치가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잃었다. 어이없는 일이었고, 허무한 일이었고, 안타까운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없이 서글픈 일이었다. 며칠 동안 비몽사몽으로 헤매다가 깨어난 느낌이다. 


품격있는 화객

사람들은 노회찬을 비유의 달인이라고 했다. 촌철살인의 대가라고도 불렀다.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지난 50년 동안 삼겹살을 궈먹은 불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그가 일갈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일반 시민들의 시각과 정서를 담은 말이었다. 기존의 논객이나 정치인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노회찬은 사람들이 평소 말하고 싶었던 얘기와 강자에게 따지고 싶었던 얘기를 조리있게 다듬어 쉽고 간결하게 풀어냈다. 고갱이를 가려내어 짜임새있게 엮어낸 뒤 잘 발효시킨 말이었다. 구성지게 뽑아낸 가락이었다. 논리가 있고 해학이 있었다. 설득력이 있었고 감동이 있었다. 시원하고 통괘했다. 수구세력의 억지와 궤변과 대비되었다. 그래서 그가 출현했던 <뉴스공장>의 꼭지 이름은 “노르가즘”이 되었다. 김어준씨의 말대로 노회찬은 “대체 불가”였다. 그는 인간이 말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품격있고 멋진 화객話客이었다.

노회찬의 말은 현장의 경험과 목소리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래서 경우에 맞는 말이었고 힘이 있는 말이었다. 이런 생생한 사실과 진리를 비유를 통해 완곡하게 표현했고 재치있는 입담으로 전달했다. 그는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려고 애썼지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인간의 품격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주제에 집중했지 사람(상대방을 비난하는 데)에 매달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성이 도저히 거절하지 못할 말이었다(2008: 66). 이러한 노회찬의 말법은 상대방의 논지나 주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반격과 보복을 무력화시켰다. 이성과 상식에 꼭맞는 말이어서 상대방이 차마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폭력이며 최소주의다. 진중권씨의 말이 살인검이라면 노회찬의 말은 활인검이라 할 수 있다.  


도덕 결벽증? 자기희생?

노회찬은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라는 드루킹 일당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어리석게 처리한 일을 자책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어쩌면 노회찬의 선택은 진보세력의 과도한 도덕 결벽潔癖이나 강박일는지 모른다. 수구냉전 세력은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사면증(면죄부)을 지닌 자처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다니지만 소위 진보세력은 사소한 실수라도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마냥 고개를 쳐박고 다닌다. 폭력을 완비한 강자의 자신만만과 강자에게 당한 악몽으로 스스로를 옥죄는 약자의 피해의식이랄까?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듯 강자가 약자의 도덕성을 따지고 든다. 국정원과 국방부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민간인 드루킹의 댓글조작사건에는 민주주의 파괴라며 입에 거품을 문다. 약자의 도덕 결벽증을 노리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논법이다.  

노회찬은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진보세력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다”라고 말했다. 또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덕 결벽증을 경계한 말이다.

노회찬은 원망하지도 않았고 억울해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대로 현실의 엄격한 요구를 아프게 받아들였다. 혹자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힐난했지만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물은 것이다. 실정법을 엄격하게 적용한다 해도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잘못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세비도 당에 주고 당에서 최소 월급을 타왔던 사람이었다. 현직에게 특혜를 주고 도전자의 손발을 묶고 있는 정치 현실에서 그가 받은 돈은 올바르게 처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노회찬도 지키지 못할 정치자금법이라 꼬집은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 당이 어려워지는 것을 더 우려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의당이나 진보세력 전체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개혁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제 특별활동비가 혁파될 것이며, 정치자금법과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의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의 희생이 아프고 슬프다. 

참고문헌

구영식.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한겨레21> 1223호.  2018.7.31.



원문: 박헌명. 2018. 화객 노회찬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최소주의행정학> 3(7): 1.


지난 6월 20일부터 약 사흘 간 일본 미애三重현 이세伊勢시에 위치한 신궁을 구경했다. 일본을 지켜준다는 천조대어신天照大御神(Amaterasu-Omikami)을 모신 곳으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신도神道의 성지다. 기원 전에 바쳐졌다는 이곳은 내궁인 황대신궁皇大神宮(kotaijingu)과 외궁인 풍수대신궁農受大神宮(Toyokedaijingu)으로 나뉘어져 있다. 매년 수많은 일본인들이 찾고 있다. 

길잡이가 신도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일본인들은 모든 동식물과 산과 강에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 수만 해도 수백 만에 이른다고 한다. 애니미즘(animism)이다. 심지어는 왕이 죽어도 신이 되는데, 왕실에 관련된 신을 모시는 신사神社를 신궁이라 부른다. 신궁은 20년마다 기존의 건물 옆에 새 건물을 지어 옮긴다. 신은 일반인이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이 자리잡은 정궁正宮은 나무 담장 네 개로 가로막혀 있는데, 사람들은 가장 바깥에 있는 네번 째 담장(흔히 신사를 상징하는 토리이라는 문)을 지나 세번 째 담장 앞에서 경배할 뿐이다. 일반인은 스스로 세번 째 담장을 지날 수가 없다. 격식을 갖추어 사제(priest)가 특별히 인도를 해줘야 가능하다.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

일본 사람들은 수많은 신과 신화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제 있는 것처럼 인식하거나 아예 사실로 둔갑시키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실을 믿고 역사를 두려워한다면 일본인들은 신화를 믿고 신을 두려워한다. 지식인들조차도 객관적 역사와 사실을 버리고 신과 신화를 필요에 따라 아무렇치도 않게 역사와 사실로 바꿔치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섬뜩하다. 어떻게 사지멀쩡한 사람들의 이성이 이토록 쉽게 마비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신사나 신궁을 방문할 때마다 신이 자리잡은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했다.  

우리나라에서 절에 가면 부처님 상이 있고, 성당에 가면 그리스도의 상이 있다. 누구나 사람이 다가가 볼 수 있고,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신사와 신궁에서는 일반인이 볼 수 있는 것은 가림막이고 신은 가림막 저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신이 머무는 정궁 (신사에서는 본전本殿)은 첫번 째와 두번 째 나무 담장 사이에 있어서 사람들은 절대로 신의 자리를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번 째 담장 앞에서 그냥 동전을 던지고 박수 두 번 친 뒤 천으로 가려져 있는 안쪽을 향해 고개 숙여 기도를 할 뿐이다.

일본인 친구나 길잡이의 설명에 따르면 신이 자리한 곳에는 보통 오래된 거울이나 돌이나 나무토막을 놓아둔다. 신의 자리에 아무 것도 없는 신사도 있다고 했다. 이세신궁에는 천조대어신을 상징하는 거울이 놓여져 있다고 한다. 나는 참 어이가 없었다. 8할이나 되는 일본인들의 정신줄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고작 거울이나 돌이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절대 권력과 폭력을 행사해온 존재가 알고보니 한낱 생쥐같은 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허탈한 반전이다.


박근혜가 ‘신궁’에서 사는 법

삼백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세월호 참사 당시, 사고 발생 7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박근혜씨는 생뚱맞게도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발견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드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나타났길래 저지경인가 했다. 국민들은 물론이려니와 해외에서도 시시각각 물속으로 가라앉는 세월호를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잖은가.  

나는 이세신궁을 돌아보면서 박씨가 보여준 언행을 상기했다. 그는 스스로를 한국을 지키는 신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버지 박정희가 반신반인이라 하지 않았는가. 일제 신민지 시절에 일본인의 정신줄을 빼속깊이 새긴 친일파였고 해방 이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기회주의자들 아닌가. 그러니 박씨는 신궁에 들어앉아 사제의 시중을 받으면서 신비롭고 우아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일본의 신을 꿈꾸었을 법하다. 그에게 권력과 재물은 당연한 것이고, 정부관료제는 사제일 뿐이며, 국민들은 하찮은 존재였을 것이다. 


완벽한 존재로서 신은 인간 세상과는 거리를 두면서 천부인권과 같은 권력을 고상하게 누릴 뿐이다. 삼성과 국정원의 돈을 받은 것도 너무나 당연하다. 신의 권리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일을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하면 “모냥빠진다.” 모두 사제들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문제가 있으면 신의 탓이 아니라 심부름꾼의 잘못이다. 그래서 해양경찰청은 잘못했어야만 했고 해체되어야 했다.

박씨는 오직 문고리 삼인방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했다. 장관도 안보실장도 비서실장도 박씨를 알현하기 어려웠다. 박씨가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하물며 여신의 은밀한 사생활임에랴. 품위 유지를 위해 기꺼이 기치료도 받고, 올림머리도 하고, 태반주사도 챙겨맞은 정성이 어디인가.

정부관료제는 신을 지키기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제였다. 세월호 7시간 박씨의 행적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보고시간이나 지시사항도 조작되었다. 훈령을 임의로 고쳐서 청와대가 국가위기관리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우겼다. 검찰은 법원의 영장을 받아들고서도 박근혜 청와대를 압수수색하지 못했다. 청와대는 환관과 탐관오리들로 둘러싸인 신궁이었다. 최근에는 기무사령부가 탄핵안이 기각될 경우 계엄을 선포하여 국민과 촛불집회를 찍어누르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절대 존재인 신을 지키기 위한 사제들의 필사적인 항거였다. 관료제에 국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여신의 자리에는 “공항장애”에도 불구하고 연설문까지 “컨펌”했던 최순실이 있었다. 권력서열 1위인 최씨에게 휘둘리고 떠밀려 꼭두각시가 된 No. 3 박근혜씨가 있었다. 사람들이 허탈해하다가 분노한 이유다. 여신은 커녕 고작 깨진 돌조각이나 나무토막이었으니 말이다. 이젠 촛불시민들에게 끌려내려와 드넓은 감방에서 우아하게 식기를 닦는 늙은 공주가 되었다. 

국민이 곧 신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는 신과 신화가 아닌 역사와 사실을 경계하며 살고 있다. 역사와 사실이라는 촛불이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이라고. 신궁을 나오면서 생각한 것이다. 


원문: 박헌명. 2018. 신화의 신과 역사의 신이 사는 법. <최소주의행정학> 3(6): 1.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촛불혁명 이후 지난 1년간 국정농단에 연루된 자들이 줄줄이 재판정에 섰다. 주역인 최순실 박근혜씨가 감옥에 끌려갔고, 다스 실소유주 논란의 당사자인 이명박씨도 뇌물수수, 조세포탈, 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구치소에 갖혔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수인번호 503과 716을 달고 재판을 받고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완강한 저항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묵묵히 추진하였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이끌어냈고, 끈질기게 문재인씨가 중재한 북미정상회담은 우연히도 선거 전날 열리게 되었다. 문재인씨의 지지율이 7할을 상회하고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이 5할을 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일까? 이런 낯선 풍경은 이번 선거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누가 감히 “인격검증”을 한단 말인가?

민주당이 압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거다. 얼마나 철저하게 국정농단 세력을 심판하느냐에 관심이 더 몰린다. 호사가好事家들의 술안주로 치면 드루킹과 한나라당/새누리당의 댓글조작이나 홍준표씨의 “아무말 잔치” 정도가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경기도지사 선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남경필씨는 이재명씨가 수 년 전 친형과 형수에게 폭언을 했다며 통화음성파일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공직 후보의 인격을 검증하겠다고 했다. “인간성 말살”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이재명씨를 후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에게는 후보를 당장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지나치다. 텔레비젼 토론에 나선 바른미래당의 김영환씨는 이재명씨가 권한을 남용하여 친형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김부선씨와 밀회한 사실을 회유와 협박으로 은폐했다고 비난했다. 불륜은 아니지만 거짓말로 “여배우에 대한 인격살인”을 자행했으니 공직자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이재명씨는 식구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심한 욕설을 했고, 김부선씨와 만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나머지는 각자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어느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남경필씨와 김영환씨가 이씨의 사생활 문제를 “인격검증”이나 “국민의 알권리”라면서 공식자리에서 끄집어 내었다. 이씨의 지지율이 5할인 상황에서 남씨와 김씨가 선택한 궁여지책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먼저 “인격검증”이라는 말을 듣고 탄식한다. “사상검증”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누가 인격을 어떻게 검증한다는 것인가? 누가 “인격검증”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가? 욕설을 하고 폭력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짜고짜 인격파탄으로 몰아도 되는 것인가? 사람의 인격이란 것이 그리도 간단하고 쉽단 말인가? 남씨는 누군가가 해치려고 본인에게 달려들 때 인격을 생각해서 점잖게 공자왈 맹자왈 훈계를 할 셈인가? 그렇게 인격을 따지면서 어찌하여 이명박과 박근혜씨의 인격을 검증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것일까? 사상검증과 마찬가지로 인격검증도 가능하지 않다. 기껏해봤자 제멋대로 “관심법”으로 상대방을 빨갱이칠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인격검증”이라니... 참으로 유치하고 한심하다. 

“국민의 알권리”라굽쇼? 

음성파일에 나온 폭언은 이재명씨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한 사생활이다. 언행에 잘못이 있든 없든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한다. 사생활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수집된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는지까지 본인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Solove 2011). 따라서 이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음성파일을 정당의 웹집에 올려놓거나 유세현장에서 트는 것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이다. 여배우와 밀회도 마찬가지다. 여배우 스스로 심심해서 만났고 비용도 본인이 다 내면서 즐겼다니 성추행도 성폭력도 아닌 셈이다. 박수받을 행동은 아니지만 사실이라 해도 공개된 자리에서 비난을 받거나 처벌을 받아야 할 사안도 아니다. 남씨와 김씨는 공직자 후보의 자질을 따진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씨의 사생활을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모욕을 주고 있다. 특히 김씨는 밀회(불륜)를 기정사실화하고 자신이 감옥에 갈 각오라고 기염을 토했다. 공직 후보인지 여배우의 변호사인지...

또한 국민의 알권리라고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런 욕설을 듣고 싶단 말인가? 무슨 공공의 이익이 있단 말인가? 유세장을 오가는 청소년들까지 그런 험한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 자체로 말폭력이고 공해다. 남경필씨는 일단 국민이 들어보고 판단할 일이며 당이 공개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비열하고 무책임하다. 후보로 인정을 안한다면서 토론회에서 말을 섞는 모순은 무어란 말인가? 왜 국민들이 어떤 후보가 누구에게 무슨 욕을 했는지, 후보의 친형이 어떻게 병원에 입원했는지, 후보가 누구와 즐기는지를 알아야 하는가? 호사가들은 그렇다 쳐도 어느 멀쩡한 유권자들이 알고 싶어하는가? 과연 방송토론회에서 이전투구할만한 내용인가? 방송에다 대고 질척거리는 추문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낯뜨겁고 구역질나는 것 아닌가? 시청자와 유권자를 능멸하는 짓이 아닌가? 
 
언젠가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군부대가 출동했다. 어느 일보 기자라는 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어느 병력이 언제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군사작전이니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더니 역시나 “국민의 알권리”라며 막무가내였다. 나는 어느 국민이 그런 작전을 알고 싶냐며 힐난했다. 국민은 작전이 아니라 인민군을 소탕했는지, 이젠 안전한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덜 나쁘고 덜 게으른 머슴을 고르는 일이다. 주권자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내용을 냉철하게 따져서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방송토론회에서 사생활을 들춰내고 험악한 진실공방을 벌임으로써 유권자를 불쾌하고 혼란스럽게 한 자들을 한표로 응징해야 한다. 

참고문헌


Solove, Daniel J. 2011. Nothing to Hide. New Haven: Yale Univ. Press.


원문: 박헌명. 2018. 후보의 "인격검증"과 국민의 알권리. <최소주의행정학> 3(5): 1.


서울시가 2014년 제정된 <서울특별시 국어사용조례>에 따라 국어바르게쓰기위원회를 꾸려 행정용어 145개를 쉬운 우리말로 고쳤는데, 그 중에는 최근 고시된 성별, 장애 등 차별에 관련된 용어 13개가 포함되었다고 한다(연합뉴스, 2018.4.16). 예컨대, “정상인”은 “비장애인”으로, “조선족”은 “중국동포”로 쓰라고 권고했다. 아직도 많은 법률과 행정 용어와 표현이 한글의 말법과 글법과 거리가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본말 찌끄러기가 널부러져 있고 쓸데없이 영어 단어를 섞어쓰고 있는 현실에서 그 취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거나 일상의 말습관에 맞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학부형? 처녀작? 레이싱걸? 

예컨대, “학부형學父兄”은 학생의 아버지와 형이어서 여성이 빠져있다. 그래서 “학부모學父母”로 쓰라는 것이다. 이미 학부모는 널리 사용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나 여성이 빠져 있으니 학부형은 안된다는 발상 자체가 불편하다. 이런 식이면 형, 누나, 숙부, 숙모 등은 죽었다 깨나도 학생의 보호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단어에 여성이 들어있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말습관을 성차별로 찍어누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다. 말이 학부형이지 어머니나 누나가 학교에 찾아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여성이 학부형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바꾼다면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라 하겠지만…

또 “편부偏父”나 “편모偏母”는 남자나 여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한쪽을 편들지 않는 “한부모”로 하겠다고 한다. 편부나 편모라고 것이 특정한 상황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남녀를 차별하는 말이라고 인식한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말습관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 마을”이 "같은 마을"이라는 뜻인 것처럼 “한부모”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뜻으로 "한부모"를 운운하는 것은 엉터리 조어법이다. 마치 “먹을 거리”가 아니라 “먹거리”로 어법을 파괴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그러면 “볶을 거리”가 아니라 “볶거리”요 “씹을 거리”가 아니라 “씹거리”란 말인가?). 게다가 “홀아버지”와 “홀어머니”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웬 편부와 편모 타령인가? 굳이 단어를 만들자면 그냥 “홀부모”라고 하면 될 일이다. 

2006년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성차별하는 단어라며 예시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이유진, 한겨레신문, 2006. 11.9). 대개는 여성입장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습관을 무시하고 단어의 사전 의미에 집착한 결과 많은 비난을 받았다. 예컨대, “처녀작”이라 하면서 왜 “총각작”이라고는 안하는가? 그럼 “총각김치”에 대항하여 “처녀김치”도 만들어야 하나? “처녀귀신”에 더하여 “총각귀신”은 어떠한가? 왜 “스포츠우먼”이라고 하지 않고 “스포츠맨”이라고 하는가? 친가, 외가, 친정, 시댁 등에 시비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고 있다. “여자도 남자처럼 서서 일을 보고, 수영복도 한 조각만 입고, 군대가게 해주세요”라는 우스개소리로 들린다. 

“레이싱걸”은 한 술 더뜬다. 짧은 옷을 입고 멋있는 차 옆에 서 있는 성인 여성은 분명 소녀가 아닌데 왜 girl이라고 부르냐면서 “경주도우미”라고 하랜다. 그럼 팔순 할머니도 자신을 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 서구 문화는 어쩌란 말인가. 또 환갑 진갑이 넘어서도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치매환자로 몰아야 하나? 그래도 girl이 소녀라는 뜻임을 돌돌돌 외고 있는 것만 해도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경주도우미”라니... 스스로 앉고 움직이는데도 불편해하는 여성이 자동차 경주를 어떻게 돕는다고 도움이란 말인가. 발음을 해도 입에 잘 붙지도 않는다. 뜻으로 치면 차라리 “차들러리”가 더 낫지 않을까? 
   
미망인, 과부, 그리고 “故 OOO의 부인”

서울시와 한국여성개발원은 공통으로 “미망인” 대신에 “故OOO의 부인”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다. 미망인未亡人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나온 말인데, 사전 의미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다. 따라서 양성평등에 맞지 않기 때문에 “故 OOO의 부인”이라고 쓰라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은 또한 과부寡婦와 홀아비가 원래의 뜻이 바뀌어 비하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라고 권했다. 나는 이런 권고가 못마땅하다. 멀쩡한 어휘를 삐딱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대체 과부와 홀아비가 무슨 죄란 말인가? 

<춘추좌씨전> 노장공魯莊公  28년에 따르면 (http://db.cyberseodang.or.kr/) 초나라 文王이 죽은 후 동생인 자원子元이 형수인 식규息嬀를 유혹하기 위해 만무萬舞를 추자 문부인文夫人이 선왕(남편)은 그 춤으로 원수를 토벌하는 연습을 했는데, 지금 영륜令尹이 된 子元(시동생)은 그 춤을 연습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미망인(자신) 옆에서 추고 있다며 수상하게 여겼다(今令尹不尋諸仇讎 而於未亡人之側 不亦異乎). 부주附注에는 부인婦人이 과부가 되면 스스로 미망인이라 칭한다(婦人旣寡 自稱未亡人)고 적혀 있다. 애초에 남편을 잃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 
과부이고, 남이 아니라 과부 스스로가 오랜 관습에 빗대어 겸손하게 미망인이라고 칭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上 3의 集註는 “과인寡人은 제후가 스스로 칭하는 것인데, 덕이 적은 사람(寡人諸侯自稱 言寡德之人也)을 말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과부는 寡德之婦로서 “덕이 부족해서 남편을 먼저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말 그대로 겸양이고 점잖은 표현이며 남녀 차별과는 관계가 없다. 미망인과 마찬가지로 제후가 스스로를 과인이라 칭하는 것이지 남이 제후를 과인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왕을 寡人이라 불렀다가는 당장 불경죄로 질질 끌려가서 볼기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寡婦는 고상한 뜻임에도 불구하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나쁜 선입견을 주는 천박한 말이 되었다. 
정말로 덕이 부족해서 남편을 잡아먹은 여자로 해석해서였을까? 말의 참뜻과 맥락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면 남편을 잃고 “다 내 책임이다. 내 죄다. 내가 죽어야지”라며 울부짖는 寡德之婦를 살인죄로 다스려 순장殉葬시켜야 하나? 또 우리는 “순직한 OOO씨의 미망인” 같은 표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未亡人은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지, 타인이 당사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다. 전우를 잃고 홀로 살아 돌아와 "나만 혼자 죽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자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만큼 슬픈데도 죽지 못하고 있는 심정"을 담은 말이다. 그런데 점잖게 예의를 차린다면서 어떻게 대놓고 “남편이 죽었는데도 아직까지 따라죽지 않다니... 얼른 죽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멱살을 잡히거나 귀싸대기 맞을 일이다. 이는 어법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좋은 약도 맞게 쓰지 않으면 독이 되는 것처럼 고운 말도 잘못쓰면 흉기가 된다.


마치 자기가 쓴 책을 남에게 주면서 상대방의 이름 뒤에 혜존惠存이라고 적어 “잘 간직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래는 책을 받은 사람이 “귀한 책을 주신 것이 참으로 은혜로우니 잘 보존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책을 준 사람 이름 뒤에 적는 것인데,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일본식 혜존이 정착되었다고 한다(이윤옥 2010). 김봉규라는 웹마실꾼의 의견이라고 한다. 책을 받은 사람 스스로가 그 고마움을 새겨서 잘 간수하겠다는 뜻으로 惠存이라고 적는 것이 아니라, 책을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잘 보존하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부적절한가. 얼마나 명문장이길래, 얼마나 비싼 책이길래, 얼마나 권세가 높길래 책을 주면서 잘 간수하라고 이른단 말인가? 품위와 겸손과 거리가 먼 말이다. 과부 스스로가 미망인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미망인으로 부르는 것은 惠存을 잘못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말을 뒤바꾸는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도올의 목욕탕 민원해결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에서 권고하고 있는 “故 OOO의 부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하필 “故”를 붙여야 할까? 한국여성개발원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부인” 등으로 풀어써야 한다고 설명했다(이유진, 한겨레신문, 2006. 11.9). 남편을 먼저 보낸 것도 슬픈 일일 터인데, 왜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사살”하여 아픈 곳을 헤집어 놓는가? 당사자의 남편이 고인이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일 텐데, 굳이 죽은 남편 이름이 누구라고 매번 각인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자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해야 하니 어느 한 순간도 개가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뜻일까? 이것이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가 추구하는 양성평등인가? 

수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어느 방송에서 동네 목욕탕에 갔을 때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알아 보고는 벌거벗은 채로 고민거리를 털어놨다. 결혼을 앞둔 신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청첩장에 “故 OOO씨의 장녀△△△”로 해야 할지 또 청첩인을 누구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도올 선생님의 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가슴아픈 일인데 뭐하러 청첩장에 죽었다고 쓰냐면서 아버지의 딸인 것은 맞으니 그냥 “OOO씨의 장녀△△△”로 쓰고 청첩인은 살아있는 사람(어머니나 친척) 이름을 쓰면 된다고 했다. 

“故 OOO의 부인”도 마찬가지 경우다. 뭐하러 당사자를 부를 때마다 남편이 죽었다고 각인을 시키는가? 주인인 남편이 죽었으니 초나라의 子元이처럼 춤이라도 춰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셈인가? 아님 남편이 살아있는 사람과 차별을 하여 깔보고 업신여기겠다는 심산인가? 이런 점에서 “故 OOO의 부인”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러면 “OOO의 부인”이면 괜찮을까? 

남편이 이미 세상에 없는데 뭐하러 남편 이름을 들먹거리는가? 그렇게 양성평등을 외치면서 “OOO의 부인”이라고 관계를 적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법이나 업무상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더구나 여기서 부인은 婦人(결혼한 여자)이 아니라 夫人(아내)이다.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남자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은 男便이지 “여자의 남자”가 아니다. 레이싱걸에 소녀는 없으니 girl을 써서는 안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女便”을 사용하라고 하지 않고(“女便네”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싫어하면서) 아무개 남자의 여자라고 적으라고 권고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컨대, 미망인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당사자를 맨정신으로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이다. 과덕지부라는 좋은 뜻을 망각하고 寡婦라고 색안경을 끼고 삐딱하게 보는 자들이 잘못이다. 과부나 미망인이나 모두 무죄다. 생각컨대 그냥 ◇◇◇씨나 ◇◇◇여사로 부르면 족하다. 필요하다면 설명을 붙이면 될 일이다. 또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면 寡德之夫(지어미를 잃은 남편), 寡婦(지아비를 잃은 아내), 寡人(짝을 잃은 사람)이라 해도 괜찮을 것같다. 그동안 부당하게 과부를 천대하고 미망인을 오용한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 
  
말법과 글법을 살펴 신중하게 

나는 한글을 아름답게 다듬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먹거리”나 “안습”같은 말장난이나 언어파괴질은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일본어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며, 외국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일도 자제되어야 한다. 물론 각종 차별을 상징하거나 조장하는 어휘와 말법을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의 취지와 의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욕이 지나쳐 일을 그르쳐서는 안된다. 언제나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언어에 갖혀서는 안된다. 무조건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또다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해야 한다. 문자가 아닌 표현의 전후맥락을 살펴야 한다. 말법과 급법과 관행과 그 변화과정을 잘 살펴서 과격하지 않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 어차피 일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제안된 말법과 글법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성차별에 관련된 어휘는 차분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정부관료제에서 사용되는 단어, 문장, 양식에서 일본어 잔재를 하루 빨리 걷어내야 한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과 특별위원회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좌절되면서 친일파와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료제를 지배하였다. 일본식 한자를 한글로 읽거나 토씨만 갖다 붙인 수준이었다. 일본의 법률문장이나 서류양식을 거의 그대로 베껴왔다. “대통령”과 “헌법” 뿐만 아니라 “회람”(돌려보기), “시말서”(경위서) 등이 우리 일상에 넘쳐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 같이 제대로 된 한글사전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사전은 그 언어의 수준과 힘을 재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현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뜻풀이도 그러하고 용례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말 사전의 종류가 시계가 멈춘 듯 제한되어 있다. 서점에 가서 외국어사전과 한글 사전을 비교해 보라. 한글이 우수하다는 자랑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제 단순히 일본어 사전을 베낀 사전이 아니라 우리말의 느낌과 표현(광범한 용례를 포함한)을 충분히 담은 사전이 필요하다. 순한글, 관련어(thesaurus), 방언, 속담, 관용어 등에 관한 다양한 사전이 절실하다. 이오덕(2009)의 <우리글 바로쓰기>(서울: 한길사)와 이한섭(2014)의 <일본에서 온 우리말 사전>(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과 같은 역작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정부와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이윤옥. 2010. <사쿠라 훈민정음: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 인물과 사상사.


원문: 박헌명. 2018. 미망인? 과부? “故 OOO의 부인?” <최소주의행정학> 3(4): 3-4.


최근 여당의 유력한 공직 후보 몇몇이 성추행 의혹을 받고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6월 지방선거 출마를 포기하였다.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아 출장을 가고 정치후원금을 기부한 일 때문에 김기식씨가 얼마 전 금융감독원장을 그만두었다. 댓글을 조작했다는 “드루킹 사건”으로 경남지사 후보로 나섰던 김경수씨가 곤경에 처했다. 물론 공직자든 아니든 법을 위반했다면 누구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야당은 물만난 물고기마냥 지난 대통령선거까지 들먹이며 특검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절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 경찰까지 나서서 여론을 조작한 일과 마찬가지라며 총력을 다해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다가왔어도 요즘 방송과 신문은 “드루킹 사건”으로 도배되어 있다. “최순실 정권”의 국정 농단, 박근혜 대통령 탄핵, 대통령선거 참패 등으로 절체절명에 직면한 야당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누가 봐도 개헌을 저지하고 지방선거 판을 흔들어보려는 정치공세이다.

수구 언론은 여야의 정치공방을 치밀한 사실 확인과 분석 없이 스포츠 경기처럼 중계하고 있다. 이성과 상식에 근거하여 사안(미투운동이든 정치후원금이든 댓글조작이든)을 다루는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이든 아니든, 가해자든 아니든, 사생활이든 아니든 일단 이런 덫에 걸려든 사람은 무차별로 까발려지고 짓밟혔다. 이른바 “정치장사”와 “언론장사”에 불쏘시개가 되어 질겅질겅 씹히다가 단맛이 빠지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껌딱지 신세가 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유죄판결”을 받아 낙마한 김기식씨는 벌써 호사가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다던 김씨가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았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타버린 불쏘시개를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이 사회의 암종이 누구인지, 적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적폐보다는 개혁 세력을 돌아보라

최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사건은 민심을 등에 업고 적폐청산을 추진하고 있는 개혁 세력들을 돌아보게 한다. 벌써 짧은 승리에 취해 현재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수구 세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짓눌린 피해의식이나 지나친 도덕 결벽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구세력의 덫에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어차피 수구세력들은 무책임한 기회주의자였지 않은가. 일제시대 이래 힘센 세력(청나라, 러시아, 일본, 미국)에게 재빠르게 빌붙어서 백성의 피와 땀을 빨아먹었던 기회주의 세력 아닌가?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애국이고 자신을 비판하면 무조건 매국이고 빨갱이라는 자들 아닌가?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회 구석구석은 아직도 그들의 손발 아래에 있다.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에 놀라 혼비백산했던 기득권 세력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호시탐탐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개혁이 지나는 길목마다 자갈길이고 가시밭길인 까닭이다. 그때 그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재빠르게 변신해온 기회주의자들을 제압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래서 개혁이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이런 참혹한 현실을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굶주린 맹수처럼 어디라도 물어뜯는데 혈안이 된 수구 세력들에게 한치의 빈틈이라도 주지 않토록 조심해야 한다. 행여 억울하게 꼬투리를 잡혔다 해도 냉철하게 대응하고 차분하게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과연 의미있는 고난을 겪었는가

소정 선생님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자동으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뜻있는 고난을 겪으면서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것이라고 하였다(1986: 289; 1991: 333; 2008: 270). 자신의 임무수행에 충실하고 식솔들을 잘 살 수 있도록 근면하게 일한 니콜라이 로스토프(Rostov), 온순하고 선량하여 악한 정치 체제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 마리아 볼곤스키(Bolkonsky),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귀족 신분이면서도 인생의 진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유를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피에르 베즈호프(Bezuhov)가 그들이다(2001: 172-174; 2008: 270). 혼란을 틈타 남을 속이거나 해쳐서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지금껏 누려온 부귀영화를 이어가기 위해 또다른 변신에 몰골하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참혹한 전쟁이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면서 봄이 올 때까지 욕심내거나 무리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이 모든 절제는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1991: 19).  

이런 의미에서 성폭력 혐의를 받고 충남지사직에서 물러난 안희정씨를 안타깝게 본다. 노무현 정부가 끝나면서 “폐족”으로 몰렸던 이른바 “친노”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서거 당시 봉하마을의 생가 앞 논가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던 안씨를 보았다. 그랬던 그가 충남지사에 연거푸 당선되면서 승승장구했고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수행비서관이 안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며 방송에서 고발함으로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강제로 벌인 일이 아니라 해도 처자를 둔 가장으로서, 사회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했던 지도자로서 용서받기 어렵다. 지난 10년간 극심한 부침을 경험하면서 안씨가 받았을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의미있는 고난”을 겪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정 선생님은 “최소에의 흠모 속에 있는 이는 행복하다. 물질과 이기적인 특정인 같은 것에 매어 있지 않고 사람이 사람의 수준으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최소의 것이 침범받았을 때에 본연의 인간이란 무엇일까를 더욱 생각하게 된다. ... 최소를 가질 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1986: 96). 과연 안씨는 폐족으로 몰린 한계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최소만을 생각하고 물질과 사람(여자)을 초월한 “사람의 수준”을 경험했을까?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했다면 어떻게 식구들과 주변을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최소마저 빼앗긴 자의 행복”을 망각하여 스스로를 망치고 동지를 배신했단 말인가? 소정 선생님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1986: 336),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고 했다(1986: 298; 1991: 198; 2008: 202). 안희정씨가 뼈아프게 귀담아들었어야 할 가르침이다.

지나친 피해의식과 도덕결벽

지난 3월 민병두씨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사자를 만나기는 했지만 노래방에서 신체접촉을 한 일은 없다면서 문제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정치를 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제 자신에게 항상 엄격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자그마한 잘못이라도 있다면 항상 의원직을 내려놓을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김태규, <한겨레신문>, 2018. 3.10).
 
청와대 대변인을 내려 놓고 충남도지사 선거에 나서려던 박수현씨도 “내연녀 설”과 사생활 의혹이 붉어지면서 꿈을 접었다. 지난 3월 초 공주시 민주당원 오영환씨는 페이스북에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의 권력을 앞세워 내연녀를 공주시 기초의원 비례대표에 말도 않되는 이유를 들어 공천”했다며 박씨의 사퇴를 요구했다. 9일에는 박씨 전처와 함께 나와 박수현씨의 여자문제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특혜 공천도 내연 관계도 아니며 수년 전 아내가 가출했다고 반박했다. 내연녀로 지목된 한 공주시의원은 오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박수현씨는 민주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14일 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보면 공직이나 공직후보 자리를 내려놓을 만한 일이 아니다. 미투(#MeToo)라지만 민병두씨를 언급한 여성의 절실함과 실익은 커보이지 않는다. 박수현씨의 경우는 사생활을 들추어 맞네 틀리네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민주당의 최고위원회에서 사퇴나 제명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다. 만일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경쟁자를 끌어내린 것이라면 박씨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과거 선거에서 종종 벌어졌던 추악한 짓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진심이 아니다.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전략이 현실 정치에서 효과만점이라는 점이다. 비방과 흑색선전으로 목표를 달성하기도 쉽고 설령 들통나도 처벌이 그다지 무겁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도덕 결벽증이다. 민병두씨가 자신에 대해 엄격한 것은 칭찬과 존경을 받을 일이지만 그 결벽이 지나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민씨는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입법기관의 구성원이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민주당과 박수현씨는 이성과 상식이 아니라 냉엄한 정치현실에 타협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수구세력들의 포악과 공작에 짓눌렸던 경험이 피해의식으로 굳어졌는지 모른다. 사소한 일에도 트집이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반죽음이 되거나 불구가 되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일까?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도덕 결벽은 수구 세력들에게 주는 “손 안대고 코푸는” 선물이다. 조폭이나 양아치들이 애용하는 비열한 수법이다. 무슨 짓을 해도 면죄를 받은 것처럼 완장을 차고 패악질을 서슴치 않는 기회주의자들아닌가?

따라서 개혁을 하려는 자들은 평소에 자신과 주변을 철저하게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수구세력에 대한 피해의식과 도덕 결벽도 극복해야 한다. 민병두씨와 같은 지나친 결벽증과 자존심은 기회주의자들이 반격할 빌미를 줄 뿐이다. 민주당은 피해의식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가지고 수구세력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법과 상식에 따라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고 합당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떳떳한 행동과 당당한 대응

네이버에서 정치 댓글을 조작한 “드루킹” 사건은 개혁 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른바 파워블로거로서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씨를 지지하는 온라인 활동을 했던 “드루킹”이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청탁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이후  문재인 정권을 비난하는 댓글의 공감수를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늘렸다가 검찰에 꼬리가 밟혔다. 그런데 김경수씨가 “드루킹”과 모바일 편지를 주고 받았고, 김씨의 보좌관이 “드루킹” 측의 돈을 받았다 돌려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증폭되었다. 야당은 검찰과 경찰 조사를 믿을 수 없으니 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한다면서 몰아붙였으나 김경수씨는 떳떳하다며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민주화 운동은 어긋난 原則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지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1991: 330).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며,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이다(1996: 620). “운동원 간에 이용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으며(1996: 621), 무서울 때에 최소 행동을 하고 나서 자신의 고유생활로 돌아갈지언정 개인의 이득을 바라거나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1991: 26; 1996: 56).  소정 선생님은 시국이 무섭지 않을 때는 최소한의 말이 아니라 과격한 발언이나 과다한 요구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1991: 26; 1996: 673). 뒷전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나와서 인기위주의 무책임한 말잔치로 자리를 꿰어차고 잇속을 챙기곤 한다(1996: 623; 2008: 258, 582).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혁명의 주역이 아닌 기회주의자들이 엉뚱하게 열매를 따먹고 일을 그르친다.

“두루킹”은 무서울 때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최소한의 행동(꼭 필요한 정당한 요구)을 한 순수한 운동자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교만하게 개인의 이익을 과도하게 쫓다가 그만 탈이 난 것이다. 제사보다는 젯밥을 탐한 결과다. 소정 선생님은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2008: 615)고 했다. 바람직하지 않은 재야운동자들처럼 “드루킹”은 철저하게 비폭력을 내세우지 않았고(위법하게 부당한 말을 남발했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는 인기 위주의 말(댓글)을 하였고, 부당하게 정치 권력을 모색하다 망했다(1996: 673).  

이명박근혜를 당선시켜 호의호식했던 야당은 “드루킹” 사건을 김경수씨를 매개로 문재인씨의 바지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안희정, 박수현, 정봉주, 김기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미보기에 푹 빠진 모양새다. 천막까지 세워서 특검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까지는 김경수씨가 불법행위를 공모하거나 지시한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선거운동이나 댓글조작을 부탁한 것도 아니고, 인사청탁을 들어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선거꾼들을 좀 더 신중하게 대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병두씨와는 달리 수구세력의 파상 공세에 지레 겁먹고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선거에 나섰다. 소신껏 행동했으니 떳떳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노무현씨의 마지막 비서관이라지 않은가?   

"제왕적 야당"과 "황제 언론"의 과격

최근 수구 세력들이 보여준 언행은 지나치다. 방송법 개정에서 시작된 “제왕적 야당”의 몽니가 이어지면서 벌써 6월 개헌은 물건너갔고, 공직선거법이나 추가경정예산도 갈 길이 멀다. 미투나 김기식이나 김경수가 아니어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물고늘어질 기세다. 그러면서도 피감기관의 후원 내역을 전수조사하자는 데는 반대한다. 특검을 받으면 개헌이든 추경이든 전향적으로 검토해보겠다더니 민주당이 조건부 수용 의사를 내비치자 엉덩이를 빼고 있다. “황제 언론”도 개헌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서 흥미위주나 정파성에 매몰되어 있다. 성추행, 성폭력, 내연녀, 정치자금 땡처리, “드루킹” 댓글조작 등을 우려먹으면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정말 이런 문제가 뉴스의 첫꼭지가 될만큼 중대한 것일까? 철저한 검증과 치열한 분석과 생산적인 토론과 거리가 먼 “언론장사”다. 또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의 논문을 왜곡하여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며 호들갑을 떤다.

결국은 이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이번 선거에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한다.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나선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줘야 한다. 똑똑한 국민이라야 수구세력의 적폐와 장난질을 극복할 수 있다.


원문: 박헌명. 2018. 안희정, 민병두, 김경수의 선택. <최소주의행정학> 3(4): 1-3.


지난 1월 29일 현직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수년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고발했다. 3월 5일에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정무비서 역시 <뉴스룸>에서 안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했다. 이른바 미투(#MeToo) 운동이다. 유명한 연극연출가, 시인, 배우, 가수, 정치인 등이 가해자로 지목되었고, 일부는 자리를 내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데뷰 25년 만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김생민씨가 10년 전 회식 중 제작진 두 명을 성추행한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본인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찾아 사과를 했지만 김씨는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출연중인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 해야 했고, 광고도 내려져 피해보상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과연 김씨의 성추행은 그가 이룬 모든 것을 허물어야 할만큼 용서받지 못할 중죄인가?  

최근 금융감독원장으로 임명된 김기식씨가 국회 정무위원 시절 피감기관인 한국거래소의 지원을 받아 2014년 3월우즈베키스탄에 출장을 다녀오고 2015년 5월에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지원으로 유럽에 갔다고 한다(김남일 엄지원, <한겨레신문>, 2018. 4.6). 일부 야당과 언론은 평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주도하면서 기업의 잘못된 관행에 날을 세웠던 김씨가 뇌물성 외유를 다녀왔다며 국회일정을 볼모삼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청와대가 임명을 취소하거나 본인 스스로 사퇴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과연 김씨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합당한가? 

“미투 공작”과 “사이비 미투”

팟캐스트 <다스뵈이다>를 진행하고 있는 김어준씨는 지난 3월 14회 방송에서 미투 운동을 공작으로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서, 미투 운동이 안희정, 정봉주 등 한쪽에 몰려 있고, 각하(이명박씨)가 점점 관심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미투 운동이 사회인식을 바꾸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효과를 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고 민감한 문제여서 공작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많다고 했다. 따라서 본질인 미투 운동이 사라지고 공작만 남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언론, 시민 사회에서 김씨가 진영논리에 빠져 미투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피해자들을 두 번 죽였다며 비난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의 조기숙씨는 지난 3월 12일 FaceBook에 미투 운동이 사이비 미투(익명에 기대 증거나 논리도 없이 무차별로 공인의 성적 추문이나 사생활을 폭로하는 행위)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고 말했다. 위계나 위력 관계이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인정하거나, 폭로의 논리나 근거가 일관성이 있거나, 실명으로 폭로하거나, “한 사람이 반복적으로 경험하거나 2명 이상이 유사한 경험을 한 경우”를 미투 운동에 부합한다고 했다(조기숙, <오마이뉴스>, 2018.4.5). 그렇지 않으면 Me Too가 아니라 Me only라는 것이다. 이 글을 두고 “위계와 위력에 의한 상습적 성범행”만을  미투의 대상으로 한정했다며 여기저기서 날선 비난이 쏟아졌다. 

두 사람 모두 정당한 미투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투를 빙자한 공작이나 사이비 미투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보다는 그 과실을 따먹으려는 사람들처럼 미투보다는 그 기회를 통해 잇속만 차리려는 무리들이 있다. 가해가 불분명하거나 피해가 심각하지 않거나 절실함도 없고 뒷감당을 각오하지 않는 미투다. 조씨는 “우리 사회에 정작 미투가 필요한 곳은 지속적인 왜곡과 오보로 한 인간을 인격파탄으로 이끄는 일부 언론들이다”라고 적고, 언론이 신중하게 미투 사실을 확인하고, 인권을 보장하고, 책임있게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과 민의 과격한 난동

孟子는 梁惠王章句 下에서 “이러한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그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고 했다. 한쪽 끝에 법을 위반하여 백성(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를, 그 반대편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라)를 상정하자. 그 사이에 법위반은 아니어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나)와 불편하게 하는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닌 경우(다)를 놓아 보자. 위 구절은 (라) 수준이 아니라고 함부로 上을 비난해서도 안되지만(民의 亂動이니까), 上이 (라)를 지향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는 뜻이다. 

김생민씨의 경우 위계관계나 상습 행위가 아니다. 의도는 있으나 피해가 심각한 것도 아니다. 우연한 실수에 가까와 보인다. 미투에 해당하는 (가)가 아니다. 더구나 다른 가해자들과는 달리 김씨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다. 孔子는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過則勿憚改)”고 했고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진심으로 자책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라고 탄식했다. 허물을 깨닫고 반성하고 고치려는 김씨에게 미투라는 이름으로 굴레를 씌우고 불도장을 찍는 짓은 집단 폭행이나 조리돌림이다.  

김기식 원장을 비난하는 일도 과격한 미투 운동과 비슷하다. 김씨의 행동은 (나)이거나 (다)에 해당한다. 만일 (가)였다면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이미 결딴이 났을 것이다. 일부 야당과 언론과 시민들이 사퇴를 종용하고 검찰에 고발한 것은 上이 (라) 수준이 안된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짓이다. 부당하고 과격한 요구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가)와 (나)도 밀어붙였으면서 문재인 정권에서는 (라)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패악질일 뿐이며 경우에 맞지 않다. 

이런 음흉한 정략에 넘어간 시민 사회는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다가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청와대도 여당도 벼랑끝에 몰린 일부 야당과 언론과 시민의 과격한 난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수구세력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도덕적 결벽에 빠져 (라) 수준이 아님을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김 원장도 스스로를 겸허히 돌아보되 부당한 겁박에 무릎꿇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미투 공작, 사이비 미투, 민의 과격. <최소주의행정학> 3(3): 1.

지난 2월 9일부터 25일까지 강원도 평창에서 제 23회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아대는 바람에 과연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전쟁위기설까지 퍼지는 와중에 선수파견을 유보하겠다는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연초에 북한이 태도를 바꾸어 올림픽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겠다고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9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남북 선수단은 한반도기를 내걸고 개막식에 들어섰다.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은 1승도 건지지 못했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내외신 모두 이번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문제를 놓고 일부 야당이 비난을 쏟아냈다. 이른바 판싸움(프레임 경쟁)를 시도한 것이다. 평창올림픽이 아니라 평양올림픽이라고 했다. 북한의 전략에 놀아나는 짓이고, 북한이 올림픽을 체제선전에 이용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짓이라고 했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인 나경원씨는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일이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박탈하고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다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개막식이나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지 않고 애국가가 불리지 않는다는 가짜뉴스가 나돌기도 했다. 소위 “애국세력”들의 집단저항이라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대목이다. 이에 맞서 민주당과 소위 범여권은 평창올림픽이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평화올림픽이라고 반박했다. 

평양올림픽? 평화올림픽?


먼저 씁쓸한 느낌이 든다. 기껏 해봤자 동계 올림픽이 엉망으로 끝나기를 갈망하는 자들의 심술이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무리수임에도 평양올림픽이라고 우격다짐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평양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작 자신은 동계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나서 북한의 참여를 요청하지 않았던가? 어떻게든 정국을 바꾸어 선거에서 이득을 보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대사까지 훼방놓는 일은 곱게 봐줄 수 없다. 한마디로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신의 잇속만 차리면 된다는 정신줄 아닌가? 

다른 느낌은 긴장과 걱정이다. 이른바 촛불혁명 이후 구석에 몰린 수구세력들이 발악하는 것같다. 단순한 말싸움이나 선거전략이 아니라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가 즐기던 음흉한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소정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이런 공작을 설명하고 있다. 

“세상이 文民統治가 아니라 軍事統治에 알맞은 말을 쓴다. … 예를 들어 부정선거라는 차원 높은 말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면 관은 선거부정이라는 문제의 핵심을 피하는 말을 잽싸게 만들어 제도 언론을 통하여 푼다” (1991: 99).

“부정선거”는 정권의 정당성에 직결되는 문제지만 “선거부정”은 작은 문제로 받아들여진다(2001: 198). 나쁜 정권은 이렇게 위기가 닥치면 음흉한 수법으로 국면을 바꿔 위기를 모면한다. 박정희씨가 1970년대 “부정부패”로 위기에 몰렸을 때 뜬금없이 “서정쇄신”을 들고 나왔고, 전두환씨는 1980년대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어 정의사회를 구현한답시고 설치고 다녔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졌던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도 마찬가지다. 

“잠금”과 “감금” 사이 

12월 11일 국정원 요원이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문재인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올리다가 야당의원들에게 발각되었다. 야당은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한 관권선거라며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고, 국정원과 여당은 민주당원들이 여직원을 감금한 사건이라며 반발했다. 경찰은 13일에서야 여직원의 하드디스크를 임의제출 형식으로 받았고, 16일 밤 대선토론이 끝난 뒤 경찰은 서둘러 국정원이 불법행위를 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중간발표를 했다. 그리고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씨가 당선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뿐만 아니라 국국기무사령부와 국군사이버사령부도 댓글 공작을 벌였음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이명박근혜의 입장에서는 관권선거로 몰려 대통령선거를 망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야당이 관권선거로 비난하고 부정선거로 거세게 몰아붙이자 새누리당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연약한 여성을 오피스텔에 감금한 여성의 인권침해 문제로 몰아갔다. 대선토론에 나선 박근혜씨는 사건의 본질은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침해라고 말하면서 댓글을 단 증거가 없었다고 말했다. 17일 JTBC에 출연한 새누리당 권영진씨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카메라가 번쩍거리는 상황에서 여직원이 문을 걸어닫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변했다. 그에게는 여직원을 미행한 사생활 침해만 보이고 국정원의 불법행위와 관권선거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같이 출연한 표창원씨는 이렇게 일갈했다.

“국가 공무원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문만 열어주면 되요. 안열여주고 잠그고 있어요. 그게 무슨 감금이에요, 잠금이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인권침해 문제로 뒤바뀐 것이다. 사실확인을 거부하고 증거를 없애려는 “잠금”이 연약한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감금”이 된 것이다. 국정원, 기무사,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에 관한 최근 조사로 미루어 보면 당시 국민들은 벌건 대낮에 눈뜨고 날치기를 당한 것이다. 수구세력의 잔머리와 음흉함과 뻔뻔함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어쩌다 권영진 대구시장을 볼 때마다 선공후사를 내팽개치고 간사한 혀를 놀리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국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결국은 국민의 이성과 지혜와 양심에 달려있다. 요망한 말공작에 넘어가서 퍽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남북 단일팀이 되면 선수들의 출전 기회가 박탈되고 공정한 경쟁이 안된다는 사술에 넘어가면 안된다. 이것이 평창올림픽→평양올림픽→평화올림픽으로 이어지는 판싸움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  


원문: 박헌명. 2018. 평창올림픽, 평양올림픽, 평화올림픽. <최소주의행정학> 3(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