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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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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요 추잡스런 변태 행각이라고 박근혜 최순실 스캔들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영 개운치가 않다. 정말 봉건시대에서도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고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행정학자가 대통령이 “비선실세”가 권한 옷을 입고, 회의를 열고, 정책을 만들고, 상벌을 내리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맞춤법도 “공항장애” 수준이고 말법도 “이그저”인 갑질 아줌마에게 연설문까지 “컨펌”을 받으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참으로 입에 담기조차 “거시기”한 일이다. 정부 관료제가 박근혜 최순실에게 완전히 털린 것이다. 농락籠絡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도 찍소리 못하고 따귀질을 당하고 발길질까지 당한 것이다. 배울 것 다 배우고 알 것 다 아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어찌하여 “이그저”에게 속절없이 농락당했을까?  

“아주 나쁜 사람” 노태강은 공직자의 좌절

박근혜씨는 2013년 8월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를 청와대로 불러 놓고 수첩을 꺼내 두 공직자를 지목하여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비난하면서 인사조치를 요구했다(김의겸·노형석 2016). 그 해 10월 노태강 체육국장은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으로, 진재수 체육정책과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각각 좌천되었고, 박근혜씨가 2016년 3월경 “이 사람 아직도 있어요?”라고 문제삼은 뒤 그 해 7월 두 사람 모두 공직을 떠났다(같은 기사).

대통령이 공무원을 지목하여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는 기사 제목을 보고(내용을 읽지 않고) 나는 어이없어 했다. 첫번째 이유는 공사公私 구분이 없는 천둥벌거숭이의 말법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씨를 겨냥한 “참 나쁜 대통령”과 마찬가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딱 그 수준이다. 둘째는 어디서 고자질을 듣고 와서 대뜸 나쁘다니까 자르라고 쏘아대는 품이 영락없이 푼수 소갈딱지다. 재 싫으니까 때찌해달라는 칭얼댐이다. 정말로 나쁜 사람인지 따져보고 나서 결정을 할 일 아닌가? 세째는 대통령이 체통없이 장·차관도 아닌 국·과장을 들먹이고 있다는 점이다. 군대로 치면 군통수권자가 “박상사”를 자청한 것이다. 낄 데 안낄 데 구분못하여 생뚱맞은 짓만 골라서 하는 고문관顧問官 그대로다.1)

그리고 지난 해 “이 사람이 아직도...” 그러길래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하면서 짜증을 내었다. 스토커마냥 국·과장의 일을 그리 집요하게 들먹이는 것이 수상했다. 이 때만 해도 청와대가 요구한 전시회를 거부하여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경질된 일과 관련된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애초부터 박근혜씨는 대통령이 아닌 "왕놀이"를 해왔기 때문에 제멋대로 인사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직업공무원제도가 어쩌구 국가공무원법이 어쩌구는 아예 기대도 안했다. 하지만 어찌하여 이런 고문관 짓을 계속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을텐데 한 사람도 “박상사”를 제지하지 않았단 말인가? 대통령을 잘 모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박씨의 참모나 측근이라는 것이 쪽팔려서라도 그만 하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법과 절차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의 기본 양식이나 품격에 관한 일이 아닌가? 삼성의 이재용씨가 업무보고를 공손하게 하지 않았다며 늙은 과장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본능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주변에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결국 노국장과 진과장은 지난 해 7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정권이 하라는 일을 거부하거나 대놓고 맞선 것이 아니라 일상 업무를 한 결과가 하필이면 “비선실세”가 원치 않은 쪽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는 무슨 일인지, 뭐가 문제인지, 노국장이 누구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사리분별을 못하는 간난이가 칼을 들고 휘두르른 셈이다. 유신독재를 밀어붙인 그의 아버지 박정희씨가 즐겨쓰던 방식대로 법으로 신분이 보장된 공직자에게 직장 동료와 조직을 볼모로 명예퇴직을 강요했다(김의겸·노형석 2016). 폭군과 독재에 맞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문영(2008)은 “나는 처음 해직되었다가 복직되기 전에 거친 여름과 한 학기와 겨울의 반을 한마디로 땅 속에 묻힌 암흑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흙을 파고 나를 묻고 꾹꾹 밟아 묻어버려 나는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였다. 어느 신문도 단 한 줄이라도 우리 두 사람의 해직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내 집에 찾아오던 사람들은 발길을 싹 끊었다”(260쪽)고 회고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억울하고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구조악이냐? 개인악이냐?

그러면 “순실”시대의 미꾸라지들이 마음껏 정부 관료제를 휘젓고 다닐 때 일반 공직자들이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떠했으며 어떤 보상체계에 직면해 있었을까? 직업공무원제도는 도대체 왜 작동을 멈춘 것일까? 공복公僕이라는 본문을 망각하고 미꾸라지들의 부역자 노릇을 했다며 비난을 퍼부을 것인가? 아님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냐며 한숨만 내쉴 것인가? 공무원의 의무와 책임은 다 어디를 갔단 말인가? 진정한 백성의 심부름꾼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나?

이문영(1991: 131-133)은 조직과 그 구성원 일반이 탈권력화를 지향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4가지 상황을 상정하였다. 조직과 인간의 지향을 윤리 차원에서 선善과 악惡 양극단으로 단순화하였다. 즉, Hodgkinson (1978)의 힘([naked] power), 권위, 영향력, 전문성,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 지도력, 최고 지도력(leadership as excellence)이라는 개념 순서를 이용하여, 조직과 구성원 일반의 지향이 힘 논리에 가까우면 악, 지도력에 가까우면 선이라고 구분하였다(이문영 1991: 104-106, 131-132). 예컨대, 국민의 요구에 순응하고, 상하 간 대화와 설득을 강조하고, 도덕성을 가진 지도력으로 갈수록 정부 조직과 공직자는 선에 가까와 진다. 이문영(1991)은 각각의 구도에 따라 개혁을 추구하는 공무원이 가져야 할 (초월)윤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논구했다.

먼저 탈권위주의 조직에서 구성원 일반 역시 탈권력을 지향하는 경우다. 이처럼 조직과 구성원 모두 선한 상황에서는 공무원은 그저 비폭력으로 스스로 퇴화하는 것을 경계하면 된다. 제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일상의 기본 활동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둘째, 만일 조직은 선한데 구성원 일반이 선하지 않으면 개혁성향을 가진 공무원은 개인윤리를 가져야 한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것에 더하여 효율적 합리적 관리(분업)와 인간 관계 향상을 추구해야 한다. 세 번째 상황은 조직은 날것 그대로의 힘을 휘두르고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는데 구성원 일반은 탈권력화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개혁을 지향하는 공무원은 전문성을 높이고 합의를 모색하는 노력에 더하여 사회윤리를 가져야 한다. 정부조직 밖(국민)의 요구에 대응하여 다원성과 형평성을 추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직과 구성원 일반 모두 권력화를 지향하면 개혁을 추구하는 공무원은 자기희생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 이런 이상형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상사와 조직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한다.  
 
이문영(1986)은 이른바 개인악個人惡보다 구조악構造惡이 더 나쁘다고 했다. “선한 집단에서 일하는 나쁜 사람보다는 악한 집단에서 일하는 의리있고 멋진 사나이가 더 나쁘다”(47쪽). 그래서 구조선-개인악보다 구조악-개인선이 훨씬 나쁜 구도라고 보았다(이문영 1991: 133). 그래서 흔히 우리가 구조선 속에 있는 개인악에는 가혹하지만 구조악 속에 있는 개인선에는 너그러운 면이 있다면서 개인선에 홀려 그 개인이 속해 있는 구조의 악을 못 보는 일을 경계했다(이문영 1986: 48-49). 그렇다면 “순실”시대의 공무원들은 어떤 구도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구조악과 개인악이란 올가미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법과 원칙과 절차에 따라 조직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해관계와 훈수와 감정에 따라 칼을 휘두른 결과다. 각종 미꾸라지들은 말을 듣지 않는 공무원들을 좌천시키고 군말없이 말을 따르는 자들을 중용했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초연금 공약을 파기한 것을 반대해 물러났고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다 해임되었다. “왕의 여자”라 불리던 조윤선씨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여성가족부 장관과 청와대 정무수석을 거쳐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이 이르기까지 박근혜씨 밑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다. 껄끄러운 자들은 무슨 수를 쓰든 찍어내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자리에 앉혀셔 서로 “해먹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환관과 간신들로 둘러싸인 “사실상 절대왕정”이 들어서면서 관료제가 구조악이 된 것이다.  

그러면 공직자 일반은 어떠할까? 개인악에 가까울까? 개인선에 가까울까? 아마도 대다수는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면서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대놓고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하고 부당한 지시를 뭉개거나 질질 끌거나 마지못해 건성건성 했을 것이다. 물론 힘센 쪽에 붙어 부역질하면서 짧고 화려하게 불꽃을 태우려는 공무원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 비난 화살을 고슴도치 등짝처럼 맞아 산 송장이 된 문화체육광광부를 생각해 보자. 복지부동하면서도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섭고 불쾌하고 창피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윗선”이 시키는 일을 거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좌천당하고 왕따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블랙리스트 사태가 정점을 치달을 때 조윤선씨에서 이실직고以實直告할 것을 권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심각한 개인악은 아니었을 것같다. 하지만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내부인의 호루라기 불기(whistle blowing)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개인선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공무원의 선서는 어디로 갔을까? 결국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은 개인윤리는 챙겼는지 모르지만 공직자로서 사회윤리를 갖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일한 공직자들은 어떠할까?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랐다기보다는 힘 센 쪽에 붙어서 호의호식을 한 쪽에 가까왔다고 본다. 언감생심으로 자리를 꿰차고 앉았기 때문에 박근혜와 최순실씨에게 대가를 제공해야 했을 것이다. 군말없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영혼이 맑은” 사람들로 뽑았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를 “주군”으로 부르고 그의 지시를 “하명”이라고 받았다는 김기춘씨에게는 판단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맹종盲從이 있을 뿐이다. 민정수석이었으면서도 아는 것이 없다고 자신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자랑하는 우병우씨나 소위 문고리 3인방도 마찬가지다. 이런 음흉한 미꾸라지들이 뱀처럼 서로 몸을 비벼대면서 청와대에 똬리를 틀고 않아 관료사회를 농락하고, 증거를 없애고, 내부자 고발을 차단했던 것이다.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던 청와대 공무원이 검찰과 국회의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라. 구조악이 된 청와대에서 공직자 역시 개인악이었다. 이처럼 올가미에 걸린 상황에서 공무원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네 네”할 뿐이었다. 공직자의 자기희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묻는다. 관료제를 발기어 구조악을 구축해온 막장 미꾸라지들을 한탄해야 하나?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에 몸던져 저항하지 못한 공무원을 탓해야 하나? 결국 우리는 헌법 제 1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공화국의 주인인 국민이 답이다.

끝주

1) 어느 장군이 예하 부대 내무반을 순시차 들렀는데 신입 이등병이 보고 너무 놀라서 엉겁결에 도망을 쳤다. 장군은 화를 내면서 당장 잡아오게 했고, 잡혀와 무릎꿇린 그 이등병에게 경례를 왜 안했냐면서 벼락치듯 소리를 내질렀다. 사색이 되어 부르르 떨면서 눈물 콧물을 빼는 모습에 해당 지휘관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원사·상사들이 뒤에서 혀를 끌끌 찼다.

참고문헌

김의겸·노형석. 2016. “이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 박대통령 한마디에 국·과장 강제 퇴직. <한겨레신문>. 2016. 10. 12.

Hodgkinson, Christopher. 1978. Towards a Philosophy of Administration. St. Martins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순실"시대의 공직자들: 구조악과 개인악이란 올가미. <최소주의 행정학> 2(1): 2-3.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고 있다. 지난 가을부터 박근혜씨와 최순실씨, 그리고 그 부역자들이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 민간인인 이른바 “비선실세”는 그렇다 쳐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비서실장, 민정수석, 정무수석, 국가안보실장, 경호실장, 의무실장, 비서관, 행정관, 심지어는 장관과 차관까지 공무원들이 줄줄이 연루되었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좀도둑이나 깡패집단이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접수하고 나서 몇 년 간 마음껏 행세를 하고 난장판을 벌여놓은 셈이다. 곡간에 든 들쥐 무리처럼 말이다. 정말 이게 나라냐며 자조自嘲하는 까닭이다.

공직자의 의무와 윤리는 커녕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언급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중범죄를 저지르고 국정을 농단壟斷했다기보다는 그저 엽기獵奇다. 날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이들의 변태變態 행각에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못미더워 하다가, 부끄럽고 화가 나다가, 이제는 짜증내는 것조차 지겨워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다. 이 소름끼치고 역겨운 추문醜聞의 끝이 출생비밀이 풀려 딸이 동생이 되고 조카가 딸이 되고 언니가 엄마가 되는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喪失의 시대? 純失의 시대?

최씨가 사용한 태블릿 컴퓨터가 보도된 이후 미꾸라지들의 모습에서 일말의 양심이나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다. “박꾸라지”든 “최꾸라지”든 “법꾸라지”든 “우꾸라지”든 “얼꾸라지”든 “삼꾸라지”든 “롯꾸라지”든 뻔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레 혹은 짜증내듯이 혹은 억울하다는 투로 내뱉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분노를 넘어 절망하였다. 대국민 사과를 세 번씩이나 해놓고서도 약속한 검찰조사를 거부한 대통령, 탄핵요구안이 통과되어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정초에 느닷없이 “번개”로 기자들을 불러모아 변명을 늘어놓은 박근혜씨, 현직에 있으면서도 국회와 검찰의 출석요구를 회피하는 청와대 직원들, 출석요구서와 증인소환장을 받지 않기 위해 피해다니다 현상금이 걸린 전직 고위공직자... 그래도 한 때는 나랏 일을 한다며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닌 자들아닌가? 어찌하여 그 언동이 뒷골목 양아치 잡범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걸핏하면 애국과 법치와 민생을 들먹였던 자들이 이제는 자기만 살겠다고 나라를 내팽개치고 법을 우롱하고 백성을 외면하고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기는 커녕 사전에 문서를 파기하고 기계를 망가뜨리고 서로 입을 맞추어 죄를 모면할 궁리만 하고 있다.  

궁지에 몰려 키친 캐비넷(Kitchen Cabinet)이었다고 둘러댔지만 “이그저” 닭대가리들이 제멋대로 홰를 치다가 나라의 솥단지를 뒤엎은 치킨 캐비넷(Chicken Cabinet)이었을 뿐이다. 추잡스런 미꾸라지들의 눈에는 지금 피눈물을 흘리는 백성은 보이지 않는다. 한 올의 참회慙悔나 한 푼어치의 염치廉恥도 찾아볼 수 없다. 바야흐로 진실과 양심과 정의가 사라져 버린 시대다. 법과 이성과 상식을 상실한 시대다. 헌법과 국기國紀를 순전히 잃어버린 시대다. 민주주의 영혼을 “순실純失”한 시대다.  


박근혜가 한국 민주화의 정화?

요즘 대통령선거 후보들이 정권을 바꾸고 정치를 바꾸겠다고 앞다투어 말한다. 박근혜씨야말로 정권을 바꾸었고 정치를 바꾸었고 시대를 바꾸었다. 10년 민주정권에서 "무답정권"으로 바꾸어 진정한 “잃어버린 10년”을 구현했다. 어린 백성 수백이 수장되었는데도 대화가 없고 응답이 없으니 답없는 정부가 아니던가. 대궐 밖은 무정부 상태인 정부... 또한 공화정에서 절대왕정으로 바꾸었다. 청와대 말대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민주시대에서 유신독재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법꾸라지”로 상징되는 온갖 구악을 21세기에 재현해 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동지 섣달 추위를 견디면서 타오른 촛불이 정권과 정치와 시대를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리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박근혜씨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선거 여왕”이라 추켜 세우기도 했지만 “수첩 공주”라며 “액면가” 밑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이번 엽기 추문이 드러나고서야 비로소 그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되었다. 먼저, 두 달만에 천만명이나 되는 시민들을 길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했다. 단군이래 최초일 뿐더러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처음이라고들 했다. 둘째, 바보 노무현이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영호남 지역통합을 해냈다. 더이상 전라도와 경상도를 따지지 않게 되었다. 오죽하면 박씨의 (정치) 고향인 대구와 구미에서도 촛불이 타올랐겠는가? 또한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 각계 각층이 손잡고 한마음이 되는 진정한 사회통합을 일궈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온 국민이 헌법 조문을 꿰고, 이 나라의 주인이 바로 자신임을 뼈에 사무치게 깨닫고, 비폭력 저항의 힘과 감동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철벽같았던 박정희 신화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아버지가 20여 년 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을 딸이 4년 만에 헌 집 벽털듯이 허문 격이다. 말하자면 산 박근혜가 죽은 박정희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역설이다. 그 누가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니 박근혜씨는 전무후무한 한국 민주화의 영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서 싸운 민주 투사와 열사를 뛰어 넘었으니, 진정한 민주화의 정화淨火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매일 매시각 각종 방송에서 박근혜 최순실 추문을 앞다투어 보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늦은 반성과 회한이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도 아니고 각양각색의 미꾸라지들이 공직사회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한 패거리가 되어 대기업 돈을 “삥뜯고” 다닌 것을 어찌 몰랐단 말인가? 이 정권이 탄생할 때 국가정보원과 국방부가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했다. 공직자 검증이 연이어 참사로 끝나고 세월호 침몰로 수백 명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어도 미꾸라지같은 머슴들을 꾸짖지 못하고 내쫓지 못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이 나라의 주인이 우리 자신임을 애써 외면했다. 청와대만 바라보는 신문과 방송을 멀리하면서 무력하게 야당을 탓하고 정치를 탓하고 세월을 한탄했을 뿐이다. 박씨와 최씨의 추문은 어쩌면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이 순간 김대중씨가 2009년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에서 간곡하게 당부하신 말씀이 가슴팍을 찌른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강원국 2014: 170-171).

우리는 주인으로서 나라물을 흐리는 머슴들에게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양심을 속이고 시선을 딴 곳에 돌리고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미꾸라지들의 농간을 방관했다. 주인이면서 주인노릇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남 탓만 했다. 악의 편에 선 부역자였다.  

“나치는 처음에 공산주의자를 잡아갔다.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다음엔 노동자를 잡아가고, 신부를 잡아갔다. 역시 나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나치가 나까지 잡아가려 할 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강원국 2014: 287). 

2002년 10월 어느 교회에서 노무현씨가 말했던 내용이다. 나치에 저항했던 마르틴 니뮐러라는 목사가 한 말이라고 소개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그 목사와 같은 것은 아닐까? 주권자가 되어 그동안 게으르고 어리석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후회하는 까닭이다. 이문영(2001)은 다음과 같이 서문에 적었다.  

“노예는 죽음을 무릅쓰고서야 자유인이 되며, 종교는 교권의 탄압을 떨치고 일어나서야 참 종교의 자리를 얻으며, 국가는 국민의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진정 민주국가로 태어날 수 있다”(16쪽).


다시 민주주의다

촛불집회는 어쩌면 이런 회한으로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주인값을 못하여 스스로를 망치는 못난 주권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일는지 모른다. 촛불처럼 꺼지지 않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자신과 이웃을 살피겠다는 맹서盟誓일는지 모른다. 이젠 멍석말이를 해서라도 엽기 변태 미꾸라지들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제대로 고쳐놓겠다는 비장한 각오覺悟다. 광장을 밝힌 천만 촛불이 아름답고 장엄한 까닭이다. 이제 다시 민주주의다.  

참고문헌


강원국. 2016. <대통령의 글쓰기>. 서울: 메디치미디어.


원문: 박헌명. 2017. 영혼을 "순실"한 시대의 미꾸라지들. <최소주의 행정학> 2(1): 1-2.


과연 그렇다면 시민의 비폭력 운동이면 충분한가? 독재자와 악한 정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악한 정권이 무서워하는 것은 시민들의 폭력과 난동이 아니다. 시민들이 자신이 저질러 놓은 나쁜 짓을 알아차리고 주권자로서 권리를 깨닫는 것을 싫어한다. 진실을 따져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밝혀내는 것을 주저한다. 사실과 진리를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주권자의 기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서 군중의 목소리로 외치는 것을 무서워한다. 시민들이 주먹질이 아닌 비폭력으로 질서있게 최소한의 요구를 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흔들리지 않고, 참고 견디면서, 정당한 주장을 계속 요구하는 것을 괴롭게 생각한다. 

반면에 악한 정권은 시민들이 주권자임을 잊고 현실 문제에 무관심한 것을 좋아한다. 사실과 진실에 무감각한 시민들을 사랑한다. 시민들이 서로 비난하고 다투고, 단합하지 못하고 약속을 서로 어기고, 뿔뿔이 흩어지기를 원한다. 성난 시민들이 모여서 잇속이나 챙기고 부당한 주장을 남발하길 고대한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리고 그 난동이 그저 일회성 행사로 끝나기를 내심 바란다. 독재자들은 이런 시민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만만하기 때문이다.  

이문영(1996)은 중도中道를 잡아나가는 시민의 운동이 악한 정권을 몰아낼 수 있는데, 이렇게 執中하는 시민 운동의 뿌리를『논어』와『맹자』에서 찾았다. 시민 운동은 (1) 좌파나 우파 극단이 주도권을 잡는 운동을 멀리하고(620쪽), (2)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참여자간 합의가 존중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떳떳한 운동을 하고(620쪽), (3) 참여자간 동지애가 있어서 숙청이 아니라 관용과 합의를 하고(621쪽), (4) 누구의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신껏 운동을 하기 때문에 인기를 얻기 위한 발언을 하지 않고—때에 맞추어 신중하고 공손하게 대중의 지지를 받는 꼭 할 말만 하고(622-623쪽), (5) 중용中庸을 실천하는 훌륭한 인물을 얻지 못하면 차선책으로 진취적인 광자狂者나 융통성없이 올곧은 견자狷者와도 함께 하고(625-626쪽),1) (6) 설령 일이 잘못되어 불이익을 받는다 하더라도 올바른 말을 하고(628쪽), (7) 정권에게 빌붙어 귀여움을 받고 이름을 날리는 시골의 향원鄕原이 되지 않는다(628쪽).

바람직한 시민운동이란?   

이문영(1991)은 3·1독립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29 선언을 이끌어낸 6월 민주항쟁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바람직한 시민 운동의 특성을 밝혀냈다. (1)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부정했다, (2) 운동 참여자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합의에 따라 행동했다, (3) 운동 참여자와 일반 시민들 간에 굳은 연대를 유지했다, (4) 이념 대립이 없는 단일한 요구(고유한 시민의 기본권리)를 하였다, (5) 운동 참여자들이 권력쟁취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자기희생을 기꺼이 감수했다(330-332쪽).2) 바람직하지 않은 시민 운동은 폭력을 사용하고, 참여자들 간 합의가 존중되지 않고,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다수의 요구를 하여 본질을 흐리고, 시대정신을 구현하기보다는 권력을 잡으려는 데 몰두한다. 

비폭력 운동이어야 한다

이문영의 비폭력은 (1)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고 “말”만 하며, (2) 완전한 비폭력을 철저하게 실천하며(어설프고 불완전한 비폭력이 아니라), (3) 통치자조차도 양심상 거부할 수 없는 합당한 말을 하며, (4) 옳은 말만 최소한으로 하며, (5) 법, 관습, 상식, 약속과 같은 객관성있고 합리성이 있는 기준에 의지하는 것이다(Park 2015: 290-291).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니다(이문영 2001: 246).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야 하는데(149쪽), 이런 성숙하고 완전한 약자의 대응이 악한 강자의 악행을 멈출 수 있다(이문영 2008: 59).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해도 합당한 말(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기본권리나 진리)을 계속하는 일이다(이문영 1986: 295, 2001: 246). 백만 명이 넘는 촛불들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지만 폭력과 무질서가 없는 평화로운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면 왜 비폭력인가? 포악한 정권이 쥐고 있는 것은 무기와 폭력이지만 약자인 시민이 갖고 있는 것은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이기 때문이다(이문영 2001: 88). 강자의 쿠데타와 폭력 뿐만 아니라 약자의 난동亂動과 폭력 모두 평화와 거리가 멀다(이문영 1986: 297). 다만 난동은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4·19 혁명과 같은 저항권의 행사나 항일독립군의 무력 활동을 뜻하지 않는다(297쪽). 만일 경찰이 무차별 폭력진압으로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처럼 중무장한 게엄군이 시위대를 깔아뭉개려 한다면 주권자의 정당한 저항이 있을 뿐 난동은 없는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 문제가 아니라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인간의 생명과 주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지를 존중하고 합의를 존중하라

시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상대방을 이용하고 수단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하고 목적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문영 1991: 330). 이런 태도로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그리고 동지들 간의 합의에 따라 철저하게 함께 행동해야 한다(이문영 1991: 25, 330).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든 시민들이 자유발언으로 생각을 공유하고, 합의된 비폭력 투쟁을 위해 질서를 외치며 서로를 자제시키고,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인 집회에 불미스러운 일이나 지저분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바람직한 시민 운동의 모범이며 촛불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평화 그 자체다.

<이솝우화>에서 약자가 사는 비결(전략)은 포악한 강자를 피해서 살거나 지혜를 갖거나 단결하는 것이다(이문영 2001: 366). 개인의 인기를 위한 돌발행동은 참여자들을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호간 합의한 것을 깨뜨리는 짓이다. 시민 운동의 대열을 흩으려 나쁜 정권을 돕는 어리석은 짓이다. 야당이 공조하는 마당에 서로 가시돋힌 말을 주고 받는 것은 바람직한 운동과 거리가 멀다. 소위 “비박”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그들을 자극하는 언행은 어리석다. 강자의 폭력에 대항하는 약자는 서로 남을 탓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이문영 2001: 349). 추미애씨의 박근혜씨와의 양자회담 소동과 김무성씨와의 단독회담은 혼자만 잇속을 챙기려는 “단독 드리블”이며, 골을 넣어봤자 동지들과의 합의와 단결을 걷어차 버리는 자살골이다. 분열행위이며 이적행위일 뿐이다. 

시민의 호응과 연대를 도모하라

시민 운동은 참여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호응과 연대連帶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문영 1991: 26, 330). 왜 그러한가? 민심이 천심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꽁꽁 묶이고 짓밟히더라도 시대정신을 본능으로 깨닫는다. 시인 이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일반 시민들이 공감하는 시민운동은 참여자의 폭을 확대시키고 운동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은 학생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회사원, 청소년, 장년층, 노년층까지 동참하였다.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에도 남녀노소는 물론 심지어는 박근혜씨를 찍었던 사람들까지 참여하여 평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주권자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단일한 요구를 하라

바람직한 시민운동은 “이념적 대립이 없는 단일한 요구”를 한다(이문영 1991: 330). 이 요구는 대개 시대정신으로 표현되는데 3·1운동은 독립, 4·19 혁명은 부정선거 규탄, 5·18은 민주화(군부독재청산), 6·29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 할 수있다(이문영 1991: 330). 무서운 상황에서는 신중하게 최소한의 행동에 집중해야 하며 가장 긴요한 요구 하나만을 주장한다(이문영 1991: 25-26). 여러 가지를 주장하게 되면 삼각뿔 바닥(꼭지가 아니라)으로 누르는 것처럼 시민 운동의 힘이 분산되고 효과는 반감된다(Park 2015: 291).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에 참여하여 촛불을 든 시민들은 무엇이 핵심이 되는 “한 가지 주장”인지를 잘 알고 있다.  

덜 무서운 상황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은 철저한 비폭력을 내세우지 않고(잡혀갈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래서 시민의 호응과 연대를 잃게 만들고, 영웅주의나 인기를 얻기 위해 과격한 말을 하고, 긴요하지도 않은 요구를 남발하여 시민운동의 초점과 역량을 분산시키고, 젯밥(운동)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권력을 쥘 생각만 한다(이문영 1991: 673, 1996: 623).  

지금 촛불시위의 시대정신은 한마디로 박근혜 퇴진이다. 즉각 퇴진은 불필요한 강조다. 질서있는 퇴진, 명예로운 퇴진, 임기단축개헌, 국정공백 최소, 거국내각총리, 책임총리, 특별검사, 국정조사, 탄핵 등은 본질에서 벗어난 곁다리다. 

대체 누구를 위한 질서이며 누구를 위한 명예인가? 주권자는 이미 아름다운 촛불시위로 질서와 명예를 보여줬는데,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인가? 질서와 명예를 내팽개친 정치권이 무슨 염치로 질서를 구걸하는가? 주권자가 “정치권의 무질서”를 통해 새 질서를 만들고 싶다고 하지 않는가? “질서있는 퇴진”이나 임기단축 개헌은 이래서 정치공작에 가깝다. 박근혜씨의 퇴진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과연 순순히 퇴진을 선언할까? 세 번의 대국민 담화는 변명과 푸념과 잔꾀로 시민들의 화를 돋구었다. 당장 검찰조사도 거부한 박씨인데 퇴진을 선언한다 한들 그 약속을 어찌 믿는단 말인가? 어떤 식으로든 대통령 임기를 채우도록 하겠다는 것 아닌가?  

박근혜 퇴진이 없는 한 거국내각총리든 책임총리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국정공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씨와 현 정권의 내각이 그 자체로 국정공백이거나 국정 위기인데 퇴진 말고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한일군사정보보호헙정과 국정역사교과서 문제만 해도 안하느니만 못한 짓이다. 소위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지,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것도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내치든 외치든 박근혜씨는 더 이상 어떠한 일도 벌이지 말아야 한다. 특히 외교와 군사에 관한 권한부터 당장 회수하여 국가안보를 확보해야 한다. 특별검사와 국정조사와 탄핵은 국회의 일이고 절차이지 핵심이 아니다. 이런 정치공작 냄새가 짙거나 곁다리 문제를 들먹거리는 것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본질을 호도하는(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불필요한 말이다.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단일한 요구를 하지 않고 쓸데없이 혼동과 분열을 초래하는 짓이다.  

60일 내에 선거를 왜 못하나?

많은 정치인, 학자, 평론가, 언론인들은 박근혜씨가 퇴진을 하면 60일 내에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우려하고 있다. 선거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고 후보를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니 “질서있는 퇴진”을 주장하고 4개월이든 6개월이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합당한 말인가?

먼저 헌법 규정(60일 내 선거)을 그토록 금과옥조처럼 말하면서 왜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조항을 간과하는가? 60일이 그토록 절대불변인 조항인가? 주권자가 더 못참겠다며 퇴진을 요구하면 그만이다. 둘째, 60일 내에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다는 것은 정치권과 기득권의 입장일 뿐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위대한 이 나라의 백성들을 폄하하는 소리다. 주인이 머슴을 내치고 새로운 머슴을 뽑겠다고 나섰는데 머슴 후보들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머뭇거리는 형국이다. 그런 후보들은 아예 대선에 나올 필요가 없다. 잠룡이든 정치인이든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인 줄 착각하고 있다. 세째,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씨를 걸러내지 못한 것이 어디 검증할 시간이 없어서였던가? 박근혜씨를 보호하고 배려하는 엉터리 토론회를 되풀이한다면 60년을 줘도 소용이 없다. 제대로 된 검증절차와 노력이 있다면 60시간이라 해도 충분하다. 더 이상 60일을 핑계로 국민의 명령을 회피하지 말라.  
시대정신을 위해 자기희생하라

시민 운동 참여자들은 大義를 위해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무릇 민주화운동은 어긋난 原則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지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이문영 1991: 330). 원칙을 세우는 것이 대의이며 시대정신이다.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란 쿠데타 정부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민주화 요구를 하여, 그 대가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었다”(이문영 2008: 615-616). 대의가 아니라 개인의 잇속으로 시위에 참여하는 기회주의자들은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운동을 발판으로 한몫(정권장악) 챙기려는 사기꾼들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먼 곳에서도 찾아와 오랜 시간동안 욕보고 있다. 주권자로서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대의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입을 모아 박근혜퇴진을 외치면서 시대정신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닥치고 “박근혜 퇴진”

결국 열쇠는 주권자인 백성들이 쥐고 있다. 한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쳐야 한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기다려라.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고 버텨내라. 악한 정권은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섣불리 감정을 폭발시켜 반격할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비폭력 촛불시위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遍在]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이문영 1991: 29-30). “노예는 죽음을 무릅쓰고서야 자유인이 되며, ... 국가는 국민의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진정한 민주국가로 태어날 수 있다”(이문영 2001: 16). 왜 그러하냐? 박근혜씨나 잠룡이 아니라 백성이 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꿰뚤고 있는데, 정치인과 언론인 등이 쓸데없는 말로 본질을 흐리고 머뭇거리고 있다. 주권자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간을 벌어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그만 그 입을 다물라. 닥치고 “박근혜 퇴진”이 답이다.


1) “과·불급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인물을 얻어 더불어 할 수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나는 광자나 견자와 더불어 할 것이다.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행하지 아니 해야 할 것은 의연히 하지 않는 바가 있는 확실한 인물들이다”(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 (김용옥 2012: 844-848).

2) 이에 더하여 <이솝우화>에서는 약자에게 사물의 이치를 알고, 성의정심을 갖을 것을 권한다 (이문영 2001: 150-162). 먼저 격물치지格物致知로 사물을 알고, 안전한 곳을 알고, 적이 위장하고 기만하고, 욕심내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의정심誠意正心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알고(장단점, 역할, 잘못, 언행의 불일치), 헛된 소망을 갖지 않고, 욕심을 버린다.


참고문헌


김용옥. 2012.『맹자 사람의 길 下』서울: 통나무.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바람직한 시민운동 조건과 촛불시위.『 최소주의 행정학』 1(12): 2-4.

촛불시위가 전국 곳곳에 타오르고 있다. 지난 달 26일 서울에만 150만명이 모였고 전국에서 19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청와대는 물론 정치권도 놀랐을 것이다. 민심이 이렇게까지 뜨겁고 무서운 것인가 하며 탄식했을 것이다. 아마도 집회에 나선 시민들 스스로도 놀라고 또 감격했을 것이다. 주권자로서 박근혜씨에게 배신과 치욕을 당한 울분을 너도 똑같이 느꼈구나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을 것이다. 길거리로 뛰쳐나온 2백만 시민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박근혜퇴진만을 외치는 촛불시위에 세계가 주목하고 감탄하고 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남녀노소가 촛불을 들고 참가자들의 발언을 듣고 공연을 즐기는 모습은 그 자체가 평화로움이다. 대규모 비폭력 촛불시위가 감동을 주는 까닭이다.
   
그러면 왜  비폭력인가? 인간의 기본권이나 윤리로 보면 비폭력이 정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과연 비폭력이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비폭력이 폭력을 이길 수 있을까?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시민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참 나쁜 통치자”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박사모가 때리면 그냥 맞으라고 하는데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뜬금없는 패악질을 이긴단 말인가? 과연 촛불시위가 헌법을 유린하고도 적반하장인 박근혜씨를 무릎꿇릴 수 있을까? 그러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 어떤 논리와 근거와 당위가 있을까?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 까닭

폭력을 대체하는 대안은 똑같은 폭력일 수 없다(이문영 1986: 290). 어차피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약자의 대안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말”이며, 한마디로 비폭력이다(290,  294쪽). 통치자의 폭력에 대항하여 시민이 폭력으로 맞서면 전쟁이 일어난다(344 쪽). 시민의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 투쟁이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문영은 (1) “폭력에 기반을 둔 정권은 강한 것이 아니라 허약”하고, (2) 폭력 정권은 무리수를 거듭하다가 자신의 말조차도 어길 만큼 통제력을 잃게 되는데, (3) 이런 정권은 자기비대화를 계속 하다 끝내는 스스로 망하게 되기 때문에, (4) 시민의 철저한 비폭력 투쟁으로도 족하다고 설명하였다(297-298 쪽). 

폭력 정권은 허약하다  

먼저 폭력 정권은 정당성이 빈약하기 때문에 수많은 헛점을 안고 있다. 이러한 뿌리깊은 허약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정권유지를 위해 기꺼이 값비싼 통치비용을 지불한다. 시작부터 합리성과 상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말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나쁜 통치자는 백성들을 주권자는 커녕 대화 상대로도 여기지 않고 그저 찍어 눌러야 하는 피지배 계급으로 간주한다. 백성들이 통치자의 명령을 군말없이 받아들이는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폭력으로 강제하지 않고서는 일을 추진할 수 없다. 말보다는 주먹질이고 발길질이며, 하는 일마다 무리수다. 

불만을 해소시켜주지 못하고 억누르기만 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반란이 일어날까봐 안절부절이다. 밤낮으로 정적을 감시하고 탄압하는데 몰두한다. 조그마한 일에도 과민반응이어서 애먼 사람을 잡는다.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희극이나 영화를 참아내지 못한다. 표현할 수 있는 자유도 관용성도 극빈한 정권이다. 유언비어라 몰아붙이고 빨갱이 종북 딱지를 붙이고, 응징하라고 뒤에서 압력을 넣는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이다. 이런 통치비용이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게 되면서 “고비용 저효율 저효과”가 지속된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사회 곳곳에서 고장이 나게 된다.  
  
폭력으로 일어선 정권은 그 자체로 백성들 편에 설 수 없다. 설령 통치자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 해도 정권을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부역자들(지지자, 재벌, 언론 등)이 용납하지 않는다. 주고 받는 셈법은 어디나 공평하다. 통치자는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탐욕을 채워줘야 한다. 공직을 나눠주고, 부역자들을 편드는 정책을 만들고, 권력으로 협박해서 돈을 뜯는다. 통치자와 부역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음껏 폭력을 휘두른다. 애초부터 의로움이 아닌 잇속으로 달려들어 정권을 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현행법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 “몹쓸 법”을 뜯어고치거나 새로운 악법을 만든다(이문영 1986: 340). 예컨대,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를 남발하여 정적을 찍어눌렀다. 이명박 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위해 법규정을 멋대로 바꾸었다.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황당한 일(세월호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개성공단 폐쇄 등)은 이제서야 겨우 실마리를 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멀쩡하게 돌아갈 까닭이 없다. 원칙도 상식도 없는 난장판이 된다. 

폭력 정권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작은 충격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하다. 장기미전향수 한 명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적화통일이 된다는 정신줄은 악한 정권의 허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나라가 있다면 어차피 망할 것이니 차라리 빨리 망하는 것이 훨씬 낫다.   

폭력 정권은 자신의 말조차 어긴다  

둘째, 폭력 정권은 자신이 제정한 법도 지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정권은 아랫 사람과 의논하여 합의를 보지 않고 그저 찍어 누르고, 자신을 위장하여 감추고, 교묘한 말로 속이고, 약속을 어겨서 일을 한다(이문영 2001: 240).  이와 같은 무리수를 거듭하다 보면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자신이 만든 악법조차도 지키지 않게 된다(이문영 1986: 289, 340).

헌법을 능멸한 통치자가 헌법대로 법대로 하자며 버티고 있다. 국정농단을 주도한 자가 이제와서 선의로 추진한 일인데 주변을 살피지 못했을 뿐이라며 남이야기 하듯 한다. 뜬금없이 총리후보자를 지명해놓고 느닷없이 국회의장실로 쳐들어가 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통보한다. 세번째 “담화문”에서 박근혜씨는 “친박”과 “비박”의 갈등을 알면서도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말한다. 교묘한 말로 위기(탄핵)를 모면해보려는 협잡挾雜이다. 검찰과 특별검사 조사를 성실하게 받겠다고 약속했지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아직까지 검찰조사에 응하지 않고 있는 박근혜씨다.   

깜냥이 안되면서도 완장차고 자리만 꿰찬 “끝발”들은 잇속을 차리려 눈에 불을 켜고 너도 나도 뒷골목까지 샅샅이 뒤집는다. 이런 판국에 약육강식 외에 무슨 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악법이든 아니든 통치자가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키지 않게 된다. 무법천지가 되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야만野蠻이 판치게 된다. 이런 패악질을 하다 보면 끝발들끼리 부딪히게 되어 있고, 자기들끼리도 주먹다짐을 하거나 칼을 섞게 된다. 나쁜 정권의 끊임없는 “자기 비대화”라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19, 1996: 405). 

이문영은 가장 나쁜 통치로 진행되는 상태를 (1) 선과 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언론(신문, 방송, 대학, 종교 등)을 망가뜨리고, (2) 정적을 제거하고, (3) 백성 일반이(어린 아이까지도) 타락하고, (4) 바벨탑같은 전시효과를 노린 정책을 밀어붙이고, (5) 인접국가조차 포기하고 방치한다고 적었다(이문영 1991: 87-103, 2001: 184-202).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저질렀던 짓을 살펴서 귀납방법으로 유추한 결론일 것이다. “언로를 막는 정부는 언론을 자체 생산하면서 이 자체 생산된 언론을 믿지 않는 사람을 폭력으로 단속한다”(이문영 1986: 316). 각종 의혹을 제기하면 유언비어로 치부되고 범죄행위로 규정된다. 김구, 여운형, 김대중 등이 암살되거나 죽을 고비를 겪었고, 정권에 밉보인 사람들이 각종 정치공작과 악법에 희생되었다. 이런 참담함이 계속되면서 상식과 도덕과 윤리가 아닌 돈과 권력이 최고 가치가 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일어난 일을 상기해 보자. 언론신뢰도 1위를 이끌던 정연주씨가 KBS사장자리에서 쫓겨났으나, 대법원이 정사장의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퇴임 후 더 큰 사랑을 받던 노무현씨는 절벽 끝으로 밀려버렸고 “친노”들은 폐족이 되었다. “묻지마 범죄,”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갑질” 등 사회가 병든 조짐이 여기 저기서 보인다. 4대강 사업은 걸쭉한 “녹차라떼”를 확산시키면서 악취나는 “저탄소 녹색성장”을 견인했다. 자원외교를 한답시고 엉터리 사업을 벌여 국고를 탕진하고 “글로벌 호구”를 자처했다. 대북관계는 강경으로 치닫다가 매번 여기 저기서 쥐어터지고, 대책도 없이 북한이 쏘아대는 미사일만 하나 둘 셈하고 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옛소녀”들의 손을 뿌리치고 한사코 사과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돈을 받았다. 또 한일정보보호협정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인 THAAD 도입을 강했하였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박정희씨의 유신시대, 전두환씨의 폭압시절, “이명박근혜”씨의 엽기시대는 이런 점에서 맞닿아 있다.  

폭력 정권은 스스로 망한다  

세째, 폭력 정권은 시민의 비폭력 투쟁으로 스스로 붕괴된다(이문영 1986: 297). 악한 통치자가 위장을 하고, 교묘한 말을 하고, 약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욕심을 채우는 일을 하고, 통치자 자신을 실패케 하고 끝내는 스스로 멸망케 한다 (이문영 2001: 136-147). “남을 파괴하는 이는 본래 자신도 파괴하는 것”이다(157쪽). 못난 짓을 하는 악한 정권은 적에 의해 망하기보다 자기 스스로가 망하게 된다(이문영 2008: 346-347). 거듭되는 무리수로 무질서도(entropy)가 커지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무력과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민의 저항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지만 불신과 불만과 원망이 가속화되면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잇속을 탐하면서 통치자 자신과 백성을 타락시킨다. 법과 질서가 무력화되면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더 강한 자가 덜 강한 자의 것을 빼앗는 일이 벌어진다. 나쁜 정권이 최소한의 이성을 상실하고 막무가내로 나가면 정권 내 사람들마저도 흔들리게 된다(이문영 2008: 368). 기강이 무너져 명령을 내려도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나아가 자기편 끼리도 칼부림을 벌이는 상황이 된다. 사회가 멀쩡하게 돌아갈 까닭이 없으니 어디서든 시한폭탄의 시침이 째깍째깍 돌아간다. 국민방위군 사건, 사사오입개헌, 부산정치파동, 3·15부정선거 등 끝 간 데 모르고 해먹다가 하와이로 쫓겨간 이승만씨나 유신정권까지 세워 장기집권을 꿈꾸다 충복인 김재규씨에게 총맞아 죽은 박정희씨를 상기해 보라.  

철저한 비폭력 투쟁으로 족하다

마지막으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평화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이문영 1986: 289). 강자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비대케 하여 종국에는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없애지만, 약자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과 타인을 살려낸다(이문영 2001: 148). 약자의 자기희생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비폭력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통치자도 거부할 수 없는 옳은 말(주권재민 등)을 최소한의 요구로 계속 한다. 폭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차분하게 비폭력의 길을 가면 된다(이문영 1986: 289).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면서 평화롭게 비폭력 투쟁을 잔치처럼 즐기면 된다. 박근혜정권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시위에서 전인권이 말한 “폼나는 촛불시위”는 이래서 멋있다. 

“어차피 쿠데타 정부는 넘어지게 되어 있고, ... 다만 재야가 과격해지지 말아야 이 사람들이 파쇼화하는 구실을 안주게 된다”(이문영 2008: 391). 만일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전개하면 자체 분열로 치닫던 폭력 세력들(예컨대, 독재자, 어용언론, 어용학자, 재벌가)이 서로 단결하여 폭력 투쟁을 진압할 수 있는 빌미를 주고, 폭력 정권의 정당성만을 북돋을 뿐이다(이문영 1986: 297). 만일 박근혜퇴진  촛불시위가 폭력으로 치닫는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친박,” 국정원, 검찰, 경찰이 무시무시한 폭력을 들이밀고 달려들 것이다. 폭력 정권이 이미 허약하여 시민의 저항에 대처하지 못하면 정권의 강경파가 득세하여 폭력 투쟁을 진압하고 더 폭력적인 정권을 수립한다(297-298쪽). 행여 운이 좋아 시민들이 폭력 투쟁으로 폭력 정권을 무너뜨린다 해도 새 질서를 관리할 대안을 내지 못한다(298쪽). 시민운동에서 義가 아닌 잇속을 노린 자들이기 때문에 기껏 해봤자 또 다른 나쁜 정권을 세워 못난 짓을 계속할 것이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

요컨대, 폭력 정권은 말보다는 주먹으로 잇속을 챙기느라 혈안이 된다. 멈추지 않는 “자기비대화”는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서로 격려하면서 지치지 말고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 비폭력이다(박헌명 2006). 주권을 가진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정당한 요구를 계속할 따름이다. 이래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다.

참고문헌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이문영. 1986.『겁많은 자의 용기』, 2판. 서울: 중원문화.
이문영. 1991.『자전적 행정학』서울: 실천문학. 
이문영. 1996.『논어맹자와 행정학』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1.『인간 종교 국가』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8.『겁많은 자의 용기: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서울: 삼인.



원문: 박헌명. 2016. 어째서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가? <최소주의행정학> 1(12): 1-2.



전인권이 지난19일 밤 광화문에 모인 60만 시민들을 울렸다. “평화 시위”를 염원한 그는 <상록수>에서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라고 토해냈다. 그의 입에서 느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애국가>는 그의 말투처럼 어눌한듯 담담하나 비장한듯 장엄했다. 곧바로 이어진 <행진>과 어우러져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야수가 울부짖는 듯한 그의 <애국가·행진>은 시민들의 “떼창”으로 퍼져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며 두 팔을 벌릴거야. 에—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행진—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는 거야 우리들은
... 
우리나라 만세 하는 거야. 

OhmyStar의 김윤정(cascade)은 전인권이 허를 찔렀다며 애국가가 이렇게 비장할 줄 몰랐다고 적었다. 웬지 짠한 마음에 지난 해 어렵사리 구한 들국화 1집을 틀어본다.

전인권의 <애국가·행진>

전인권의 노래를 말하려는 것도 그의 높고 거친 쇠소리를 칭찬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의 노래와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눌하게 툭툭 던지듯 했던 말을 곱씹어보고 싶다. 전인권은 <걱정말아요 그대>에서 “우리 다함께 노래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라고 노래한 뒤 <애국가>를 시작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 혹시 박사모가 한 대 때리면 그냥 맞으세요. 우리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맞으신 분들 무지 많으세요. 그냥 박사모가 뭐라 그러면 네네 그러고 가세요. 세계에서 가장 폼나는 촛불시위가 되게 합시다. 에— 에— 에—” 

얼핏 들으면 우스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말 속에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것보다 더 쉽고 강렬하게 비폭력과 최소주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정농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엽기獵奇에 가까운 박근혜 최순실 사건에 분노하여 길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이 따라야 할 원칙과 윤리를 말하고 있다. 박근혜씨의 거듭되는 패착敗着으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직전에 이른 상황에서 절실해진 필승전략이자 지혜을 담고 있다.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

먼저 “싸우지 마세요, 절대로”는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먹질 하지 말고 발길질 하지 말라는 얘기다. 쇠파이프를 들지 말고 화염병 던지지 말라는 얘기다. 이문영(1986)은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291쪽) “돌만 던지지 말라.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294쪽)고 강조했다. 경찰이 확성기로 비아냥거리거나 물대포를 쏘면서 도발을 해온다 해도 벽돌을 깨거나 경찰차를 넘어뜨리지 말라는 얘기다. 비폭력으로 시민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구호를 외치라는 뜻이다.   

“때리면 그냥 맞으세요”

이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그냥 맞으세요”는 한마디로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주문이다.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이문영 2001: 246)이며 “통치자에게 폭력을 당하더라도 약자는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이문영 2008: 68-69). “폭력에 대신하는 것이 어차피 폭력일 수는 없다”(이문영 1986: 290). 그래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이문영 1986: 290, 2001: 105, 246).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이다(이문영 1986: 289). 약자가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이다(이문영 2008: 59). 이러한 어설픈 약자의 폭력이 난동이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이문영 1986: 297). “벌거벗은 힘의 행사를 민이 하는 것도 역겨움을 준다. 비폭력인 강경이 폭력인 강경에 쫓기는 민중운동은 성공하기 어렵다”(이문영 1986: 81-82).

누가 때리면 그냥 맞으라니 얼마나 허무한 개그인가? 한술 더 떠서 “맞[은]분들 무지 많[아]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심하게 농담던지듯 내뱉는 전인권씨의 이런 말투에 오히려 더 강한 호소력이 있다. 얼핏 무기력하게만 들리는 이 말은 같은 날 서울역에서 박사모 무리들이 쏟아낸 섬뜩한 저주(빨갱이, 종북, 좌파 총살 등)보다 몇 백배 몇 만배 더 강하게 들린다. 무심한 듯 툭툭 던진 조용한 몇 마디가 분기 탱천撐天하여 질러대는 박사모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뒤덮고 있으니 말이다.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이문영 1991: 19). 그래서 이문영(2001)은 “비폭력은 약자의 품격을 높이는 행위”라고 말했나 보다(149쪽). 

행진이라는 “시위“

행진이라는 “시위”는 맞으면서도 옳은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비폭력이란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 따라서 비폭력은 비폭력 투쟁을 뜻한다”(이문영 1986: 294). “때리는 것인 폭력의 반대는 매를 맞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지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이문영 1991: 118). 주권자로서 대리인인 통치자에게 합당한 요구를 하는 일이다.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란 쿠데타 정부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민주화 요구를 하여, 그 대가로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다(이문영 2008: 615-616). 이 “민주화 요구”가 옳은 말이며 합당한 진리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가 정부조직과 공식절차를 무시한 것은 법을 따지기 전에 그저 황당할 일이다. 말하자면 “창조정권”의 “창조통치”다. 의도야 어쨋든 그 결과가 공익이 아닌 오직 통치자 측근의 사리사욕을 채웠다. 박근혜씨가 두 차례 대국민 사과를 했음에도 검찰의 수사를 회피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통령 노릇을 재개하였다. 주권자의 역린을 제대로 거스른 것이다. 두 주 연속으로(12일과 19일) 백만명이 촛불을 들었고, 한국 Gallup의 여론조사에서 박근혜씨의 지지율이 3주 연속 5푼(5%)에 머물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박근혜씨는 정치로든 법으로든 용서받을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과 여야가 박근혜씨의 퇴진을 요구한 것은 당연하다. 주권자로서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행동이다. “통치자도 가지고 있는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며 이 이성을 환기하는 말”이다(이문영 2008: 66, 80). 역대 최저치인 지지율 5푼임에도 불구하고 민심을 외면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며 대통령 노릇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질없는 짓이다. 박사모 무리들의 집착은 사이비 신도를 연상케 한다. 노무현탄핵소추안을 날치기할 때 노무현씨의 지지율을 빗대서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자들이 이제와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기회주의자들의 진면목이 이런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촛불과 장승 

촛불시위는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로 상징되는 폭력시위와 대조된다. 우리나라에서 촛불시위는 2002년 미국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선 효순이 사건” 이후에 보편화된 것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전화나 LED 촛불도 사용되고 있다. 방송과 사진으로 보는 촛불시위는 말 그대로 장관이다. 수많은 별들이 빛나듯 조용히 반짝거리다가 어느 순간 바람이 보리밭을 쓸고 가듯 요동치는 모습이라니... 촛불이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폭력과는 거리가 먼 추모, 염원, 명상, 평화 등이다. 그래서 촛불은 비폭력을 상징한다.  

이문영(1980)은 “명치유신 때까지도 무인통치를 해 왔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장승은 비폭력문화의 상징”(383쪽)이라고 적었다. 장승은 (1) 솟대처럼 경계를 정하며, (2) 남녀가 같이 있어 평화스럽고, (3)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을 세워 인간화된 군대와 신장된 여권을 시사하며, (4) 장군인데도 전혀 무기를 들고 있지 않고, (5) 갑옷이 아니라 혼례복을 입고 있고, (6) 나무(쇠와 금이 아니라)로 만들어져 집 밖에서 눈비바람을 맞고 서 있다(제도화 부작용이 없다) (이문영 1980: 383-384). 이런 장승은 참는 것이 특징인데,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문화의 정상”이다(384쪽). “나무와 같이 쉽게 소멸해 버리는 육체를 지닌 인간이 참을 때에 그 참음이 덕으로 정신화”한다 (384쪽). 그래서 참는 것은 비폭력과 같은 말이다(이문영 1986: 336). 결국 장승=평화=인내=비폭력이다. 촛불은 설령 화가 나더라도 마음을 다스려 질서와 평정을 되찾자는 것이다. 참고 견디자는 약속이다. 평화를 갈구하는 몸짓이다. 

“가장 폼나는 촛불시위” 

전인권은 “세계에서 가장 폼나는 촛불시위”를 만들자고 했다. 이문영은 평소 한국의 반체제 운동이 다른 나라의 운동과 다른 특징은 비폭력에 있다고 했다(1986: 318, 344). 수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상대방[통치자]의 뺨 한번을 때려보지 못하고 자기희생”을 했다고 강조했다(1980: 386). 전인권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 맞[은]분들”이라고 했다. 장기 집권한 포악한 정권이 무너진 것은 “총을 쥔 정권을 향하여 ‘말함’이라는 비폭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승리였다”(이문영 2001: 88). 이는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전인권의 “폼나는 촛불시위”와 똑같은 맥락이다. 가장 무섭고 어려울 때에 “정의에 입각한 말함”(88쪽)을 고집하다 군부독재정권에게 매맞은 선생님의 마음일 터이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가수 전인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대정신과 과거 현재 미래의 감정

이문영(1991: 162-165, 2001:79-84)은 시대정신을 설명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원(통합 시간)이라는 시간이 있고, 각각의 시간에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고 했다. 과거는 행동의 준칙과 대안을 제공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흠모와 그리움을 갖는다(이문영 1991: 163). 현재는 과거지향 운동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통치자의 압제에 저항해야 하기 때문에 한숨을 짓는다. 미래에는 체제 밖의 사람들도 꿈을 꾸면서 역사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에서 이 그리운 과거와 현재를 견주어 한숨짓고, ... 미래에는 그리움과 한숨이 없기를 바라며 꿈을 꾼다”(이문영 2001: 83). 영원이란 시간은 그리움, 한숨, 꿈을 단번에 느끼는 황홀경(감동)을 경험한다. 

전인권의 <행진>에서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고 그리움, 한숨, 꿈이 보인다. 과거가 어둡고 힘들었지만 과거를 사랑하고 추억한다. 미래는 항상 밝을 수도 없고 힘도 들겠지만 (꿈이 있어서) 기꺼이 비를 맞고 눈을 맞는다. 그래서 매일 아침까지 그대(동지)와 노래하는 것이다. 下野할 때까지 매일 시위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의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수는 없겠지 
나의 미래는 때로는 힘이 들겠지 
그러나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거야
...
난 노래할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조동진의 <제비꽃>도 마찬가지 시간과 감정을 보여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머리에 제비꽃을 꽂고 새처럼 날고 싶은 작은 소녀였고, 다시 만났을 때는 이마에 땀방울을 달고 작은 일에도 눈물을 흘리는 야윈 너였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한밤중에도 깨어있어 창 너머로 그윽한 눈길을 보내고 싶은 평화로운 너였다는 이야기였다. 소정 선생님의 시대정신과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장필순이 부른 <제비꽃>을 떠올리곤 한다. 

끝까지 비폭력이어야 한다


지금 정국이 순간순간 요동치고 있다. 벌써 몇 주째 시민들은 당혹과 실망과 분노로 아파하고 있다. 하지만 폭력이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된다. 절대 지쳐서도 안된다. 망중한에 좋은 노래와 말씀을 음미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기운을 모았으면 한다.  



원문: 박헌명. 2016. 전인권의 <행진>과 비폭력 촛불시위. <최소주의 행정학> 1(11): 1-2.

정세균 국회의장이 수난을 겪고 있다. 농림수산부장관 해임안을 9월 24일 본회의 차수를 바꾸어 표결에 부쳤고, 여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해임안은 통과되었다. 이에 앞서 대정부질문에서 국무위원들은 시간을 벌려는 듯이 일부러 길게 답을 했다. 자정이 가까와 오자 여당 원내대표는 밥먹을 시간도 안주냐며 의장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이른바 여당의 “필리밥스터”라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해임안 표결처리에 반발하여 여당대표는 정의장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했다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정의장이 죽든 자신이 죽든 끝장을 보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다른 여당 의원들도 동조해서 밖으로 뛰쳐나가 반공멸공 시위를 하듯이 정의장을 규탄하고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뜬금없고 우스꽝스런 허세일 뿐이다. 표결처리는 핑계일 뿐 국정감사를 파행으로 이끌어 박근혜씨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덮겠다는 의도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차에 마침 정의장이 꼬투리를 잡혀 애먼 시비거리가 된 것이다. 서슬을 시퍼렇게 세운 이정현씨든 정진석씨든 국정감사가 끝나면 아마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의장에게 다가가 인사도 하고 농담도 건넬 것이다. 애초부터 “의로움”이 아닌 “이로움”을 쫓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이번 일은 어쩌다 벌어진 사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이미 뿌리깊게 박힌 “진영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큰 틀에서 보면 기득권을 둘러싼 힘겨루기이고, 그 잔상이 “필리밥스터”인 것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이해관계가 뒤얽혀 있는 문제이다. 소정 선생심께서 계셨더라면 아마도 정의장은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권유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정치인이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나는 선생님께서 정의장에게 어떤 말씀을 당부하셨을지 궁금해진다. 특별히 당면한 상황을 어찌 인식해야 하는지, 국회의장의 일을 어떤 방향과 원칙으로 해나가야 할 지, 어떻게 처신를 해야 할지에 관한 말씀을 상상해본다. 정의장이 이미 선생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겠지만,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비폭력과 최소주의에 중점을 둔 당부 말씀으로 적어본다. 

   
끝까지 참고 견뎌라


첫번째 말씀은 아마도 “참아라”였을 것이다(이문영 1991: 113-115).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어이다”(이문영 1986: 336). 순간 순간 짜증이 나고, 억울하고, 화가 나더라도 밖으로 드러내지 말라.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속으로 삭여야 한다.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쏟아내는 순간 그것이 끝이다. 되돌릴 수 없는 惡手다. 비폭력에서 시작하여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긴 여정을 참아야 한다(이문영 2001: 349). 현재 아무리 여소야대가 되었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지금은 민생이 어려운 시기이고 경제와 안보가 위험한 상황이고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무서운 정국임을 직시하여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뎌야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라(박헌명 2016다).


천부의 마음을 놓지 말아라


기득권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아무리 떼를 쓰고 난동을 부린다 해도 그들도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天賦의 마음이 있음을 잊지 말아라(이문영 1991: 44). “모든 나쁜 것은 官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民에서 나왔다”(이문영 1991: 42). 그들은 단지 나쁜 정치 구조 속에서 무조건 해먹는 것이 제일이라는 악을 배운 것이다. 친일파의 매국매족,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 쿠데타 등을 통해 무슨 수를 쓰든 수단방법 안가리고 권력을 잡고 봐야 한다는 악을 온 몸으로 배운 자들이다. 


하지만 그 기회주의자들도 반성하고 천부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설령 천부의 마음을 잊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며 패악질을 한다 해도 그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먹을 것이든 기본권이든 간에)은 주어져야 한다는 연민과 긍휼을 가져야 한다. 절대로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배타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이정현씨의 사생결단은 애초부터 빗나간 치기일 뿐이지만, 밉든 곱든 그들과 이 땅에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 저들도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는 이웃이다. 그래도 한 켠에는 천부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놓지 말라. 이런 인간관은 종교를 초월한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거지에게 적선하듯 나쁜 짓을 하는 상대방에게 무조건 베푸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다스리고 인간으로서 품격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합리성과 객관성에 의지하라


모든 언행은 합리성과 객관성에 근거하라. 헌법과 법률의 내용에 따라서 판단해야 하고, 어떤 주장이 원칙과 이치에 맞는지를 따져야 한다. 합리성과 상식에 어긋나는 언행은 절대 하지 말라.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이문영 1986: 291-292). 특히 단순히 노여운 감정을 발산하는 행동은 상대방(힘센 자)의 강경대응으로 이어지는 어리석은 짓이다(이문영 1986: 297). 합리성에 비추어 문제가 있다면 세상없어도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권력을 움켜쥔 자가 아닌 백성이 이 나라의 주권자이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는 민주공화국의 “최소”는 죽었다 깨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내용면에서 합리성을 확신할 수 없다면 절차를 따져본다.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각종 조례, 규칙, 절차를 따르는 것은 기본이다. 아랫사람에게 하나하나 물어서 국회법과 각종 절차를 따를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읽고 묻고 철저하게 공부하라. 지식을 습득하는 개인윤리이자 초월윤리의 두 번째 덕목이다. 토씨 하나가 중요한 대목에서 힘을 발휘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그래서 앞으로 벌어질 각종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라. 또한 자연의 질서나 사회에서 보편성있게 받아들이는 규범과 상식을 존중하고 순종하라. 일단 다른 사람과 약속한 것은 당장 손해가 나더라도 무겁게 지켜라. 그만큼 합의를 신중하게 하라.  


이도 저도 기댈 데가 없는 사안이라면 최소한 객관성이라도 유지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하나씩 양보하거나 나눠줄 수도 있고, 한 쪽이 빵을 나누고 다른 쪽이 먼저 고르게 할 수도 있다. 의결정족수를 따져 다수결로 정할 수도 있다. 하다 못해 제비뽑기나 동전던지기를 할 수도 있고 제 3자에게 의견을 물어 정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하고 객관성 있는 문제해결 방식을 찾아라. 물론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공정한 주고 받기를 낯설어 하고 불편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합리성과 객관성에 의지하여 일을 처리하라. 


주먹질이 아닌 말로 하라


국회의장이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生死가 갈리는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방이 아무리 불손하게 대들고 패악질을 해댄다 해도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 초월윤리의 첫번째 덕목인 비폭력이다. 여기서 폭력은 실제 폭력행위과 위협을 구분하지 않는다. 발길질도 폭력이고 주먹을 코앞에 들이밀고 윽박지르는 것도 폭력이다. 폭력에 물리력을 동원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언어폭력일 수도 있고, 몸짓 폭력일 수도 있고(예컨대, 손가락욕), 심리 폭력일 수도 있다. 강한 자가 하든 약한 자가 하든, 웃사람이 하든 아랫사람이 하든 폭력은 폭력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측근 비리에 침묵하고 판결지침을 내린다 해도 국회의장으로서 거친 언동과 난동은 자제해야 한다. 법원에서 야당에게 불리한 판결을 거듭해서 내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특히, 기회주의자들이 음흉하게 폭력을 유도하는 계략을 펼칠 때에 주의해야 한다. 험한 말폭력에 똑같이 대응하는 것은 정치판에 대한 혐오감을 키울 뿐이다. 정치불신과 무관심을 조장하려는 잔머리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기득권의 논리에 빠져들면 답이 없다. 소정 선생님의 민주화 운동의 화두가 “정부도 거절하지 못하는 말을 하되 말만 한다”였음을 상기하라(이문영 2008: 497).


폭력을 거두고 차분하게 이치에 닿는 말을 하여 상대방과 백성의 이성에 호소해야 한다. 국회를 대표해서 할 수 있고 해야 할 말을 해야 한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과 합리성에 의지하여 진심을 담아 당당하게 말을 하라. 국회가 백성을 대의하는 기관인 이상 백성의 입장을 끈질기게 고수하여 행정부와 사법부에 맞서면 된다. 예컨대, 지난 9월 1일 정기국회 개회사는 民意를 대변하는 국회의 본분에 충실한 말이다. 그래서 폭력의 반대말은 비폭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말하는 것이다(이문영 1986: 290, 1991: 322, 2001: 246).  


합당한 말을 하라


주먹질을 하지 말고 말을 계속 하되, 꼭 합당한 말을 하라. 패악질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옳은 말을 계속 하라. 무방비로 매를 맞는다 해도 (부당한 비난을 받는다 해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대통령이 싫어한다고 입을 다물고, 여당이 기분나빠한다고 주저하고, 야당이 꺼려한다고 멈칫하고, 공무원들이 반발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국회의장의 본분을 망각한 일이다. 정의장이 박근혜씨가 싫어할 것같다며 현안인 THAAD 배치에 대해 침묵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장관 해임안이 통과된 뒤에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의례 인사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장관을 해임하는 것이 순리이고 공론에 따라 THAAD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위협하거나, 떼쓰거나, 조롱하는 식이 아니라) 말했었야 했다. 서로 얼굴을 붉힐 수도 있겠지만 계속 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면 합당한 말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통치자도 가지고 있는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며 이 이성을 환기하는 말”이다(이문영: 2008: 66, 80, 435). 정말 이치에 꼭 들어맞고 합당해서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못할 만큼 옳은 말이다. 진리다. 심지어는 박근혜, 이정현, 정진석, 김무성씨조차도 차마 양심상 반박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말의 효과가 커진다. 물론 그들이 자기최면을 걸어 이치에 합당한 말을 무시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으나, 자기 양심을 영원히 속이거나 백성의 양심까지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만큼 정의장은 그 상황에 꼭 맞는 그런 말(진리)를 찾도록 애써야 한다. 


기회주의자의 궤변에 놀아나지 말라


주의할 것은 기회주의자들의 음흉한 말장난에 놀아나면 안된다. 그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합리성과 객관성을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유리한 대로 말을 바꾸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면 안된다. 소피스트들의 비열한 말법에 넘어가면 안된다. 오감을 자극하며 주의를 끄는 궤변 속에 비수와 함정이 여기저기 감춰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여당의원들은 정의장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지만,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안을 강행처리한 후에는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비아냥거렸던 자들이다. 국정원과 군대가 개입한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게 불복하는 것이냐고 윽박질렀지만, 2002년 대선에서 불복하고 재검표를 요구했던 자들이다. 그때 그때 이익을 쫓아 말을 바꾸고, 속이고, 윽박지르고, 떼를 쓰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정의장은 “그들의 합리성” 안쪽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속내(이해관계나 욕심)를 날카롭게 꿰뚫어 봐야 한다(이문영 1991: 120). 그 합리성이라는 거죽은 보통 입장(position 혹은stance)으로 표현되는데, 기회주의자들은 종종 속내와는 다른 입장을 내세워 상대방을 헷갈리게 한다. 따라서 기회주의자들의 궤변을 원칙과 기준에 비춰 차분하게 가늠해봐야 한다. 말폭력에 밀려서, 세력 싸움에 밀려서 아무런 생각없이 “허허허” 방심하면 안된다. 그 순간 死地에 들어서는 것이다. 중정과 안기부 직원들이 곱게 말하면서 회유할 때 도장을 찍으면 바로 죽은 목숨이다. 살아도 이미 산 목숨이 아니다. 소위 “덕장형” 의원이나 “신사의원”이라는 정의장이 특별히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싸움꾼은 감을 가지고 싸운다”(이문영 2008: 346)는 말 뜻을 깊이 새기라.


철저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한다(이문영 2001: 149). 어설픈 비폭력은 폭력과 마찬가지다. 말을 하더라도 상대방의 이성이 아닌 감성을 자극하여 불필요한 대립을 초래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말하는 표정, 발음, 높고 낮음, 몸짓 모두 상대방을 쓸데없이 흥분시켜서는 안된다(박헌명 2016나). 욕설은 물론이려니와 무심코 내뱉은 가시돋은 말, 빈정대는 농담, 불쾌한 눈빛 모두를 피해야 한다. 입에서 나왔다고 다 말이 아니다. 말 형식만을 빌린 폭행에 가까운 말이며 사실상 폭력이다(이문영 1986: 242, 2008: 246).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는데(이문영 2008: 59), 이것이 철저한 비폭력이다.


특히 강자가 악랄한 폭력을 행사해올수록 더 철저하게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이문영 1986: 289). 악한 통치자가 일부러 음흉한 폭력을 밑밥으로 던져 약자의 분노를 유발하고 성숙하지 못한 폭력을 유도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양아치들의 잔꾀에 넘어가면 더 잔혹한 폭력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채야 한다. 그렇다고 악한 강자의 협박과 물리력에 못이겨 옳지 않은 말을 하거나 비굴하게 진리(옳은 말)를 더듬거려서는 안된다. 어느 상황에서든 오호 감정을 잘 다스려 자신의 정당한 의사표시를 충실하게 전달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신사의원”이라는 정의장에게 굳이 철저한 비폭력을 거듭 강조하는 까닭을 곱씹어보았으면 한다.   


“교과서 읽기” 신공을 연마하라


무서운 상황에 직면할수록,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노와 흥분과 긴장과 두려움을 억누르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얕잡아 보거나, 무서워하거나, 싫어하거나, 좋아하는 감정 모두 위험하다. 마음을 끝까지 집중하지 못하고 흩으리는 순간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찰라의 방심, 티끌같은 실수가 빌미가 되어 삽시간에 적들의 십자포화를 받게 될 것이다. 진리에 가까운 옳은 말을 찾아냈어도 제대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달변일 필요는 없다. 감정을 죽이면서 필요한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때 “교과서 읽기”는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Park 2016). 교과서를 읽듯이,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옳은 말을 또박또막 읽어나가면 된다. 특히 소정 선생님 말투처럼 좀 어눌하게 찍어눌러 말하면 효과가 배가 된다. 그렇다고 “발연기”하듯이 티를 내거나 상대방을 약올리는 듯한 느낌을 주면 안된다. 좋고 싫은 감정을 완전히 죽이고 그냥 평서문에 가깝게 발언을 하면 된다. 정진석씨의 밥타령에 대꾸하지 말고, 예컨대, “국회법에 의하면 ... 입니다”라고 일러주면 그만이다. 물론 이런 神工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체득할 수밖에 없다. 위기 상황에서 치열하게 참고 견디는 과정에서 온 몸으로, “감”으로 느껴야 한다.


꼭 필요한 말만 최소한으로 하라


합당한 말을 하되 꼭 필요한 말만 하라. 가장 절실한 실존적 발언 혹은 최소한의 발언을 말한다. 말하자면 “긴요한 최소행동”을 하라(이문영 1991: 25). 먼저 불필요한 말을 해서 기회주의자들을 자극하거나 그들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 본회의장에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는 정진석씨와 언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밥먹을 시간 30분은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규칙을 말하고 그의 시비질에 일절 대꾸하지 말았어야 했다. 붓다도 말같잖은 궤변에 대응하지 않고 침묵했다.


노무현씨도 노건평씨에 대한 의혹으로 몰렸을 때 방송에 나와서 구구절절 친형을 변명하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간단히 “그러면 검찰이 조사하도록 하자”라고만 답했어야 했다. 조사해서 죄가 있으면 죄값을 받으면 되고 아니면 의혹을 제기한 자가 책임을 지면 된다. 방송에서 친형을 옹호한다 한들 누가 믿을 것인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며 간절한 말이 아니었다. 기회주의자들이 의혹을 증폭시키고 압박을 강화하는데 활용한 불쏘시개였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박근혜씨가 최순실 등 측근들에 대한 수많은  의혹이 사실이 아닌 비방, 폭로, 유언비어라고 깎아내린 것은 말은 짧되 불필요한 말만 한 것이다. 어차피 그대로 믿을 사람도 없으며, 죄가 있고 없음은 대통령이 아니라 검찰과 판사의 몫이다. 


다른 하나는 가장 중요한 말만 최소로 하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 여러 개 있더라도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것 하나만 말해라. 상황이 어려울수록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손바닥을 삼각뿔 꼭지로 누를 때가 삼각뿔 바닥으로 누를 때보다 아픈 법이다(Park 2015: 291). 이것 저것 말이 많으면 정작 필요한 것을 얻기 어렵다. 고구마 줄기를 잡아다니면 주렁주렁 고구마가 매달려 올라오듯이, 그런 핵심 고리가 되는 줄기를 찾아서 집중해서 말하라. 


마지막까지 때를 잘 기다려라


말을 하는 것도 때가 있다. 말을 계속하라는 의미는 쉬지 말고 입을 놀리라는 뜻이 아니다.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뜻이다. 남이 꼬드긴다고 해도, 협박을 한다고 해도, 매질이든 한다 해도 옳은 말을 하라는 뜻이다. 단 말을 해야 하는 때를 잘 포착해야 한다. 맹수가 먹이에게 달려들 순간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항상 입을 열어 이 소리 저 소리를 늘어놓으면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다. 말의 값이 싸구려가 된다. 


말을 해야 하는 때는 대개 옳은 말을 하기가 어려운 때다. 옳은 말이지만 직접 나서서 말하기 껄끄러운 상황이나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받는 때다. 이런 때가 말의 값이 비쌀 때다. 말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이 마지막 순간까지 말을 아끼면서, 기회주의자들의 난동을 잘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그 순간을  포착한 다음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바로 행동해야 한다. 반박자라도 늦거나 빠르면 맹수는 먹이의 명줄을 물어뜯기 어렵다. 어렵고 무서운 상황에서 그 정점을 기다려 주저하지 말고 적의 급소에 “진리라는 칼”을 깊숙히 찔러넣어라. 물론 이치에 합당한 최소한의 말이어야 한다. 그런 진리를 사자후獅子吼로 위엄있게 토해내라.   


약자인 여당에게 관용을 베풀라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보면 야당 국회의장은 왕조같은 체제에서 약자에 해당한다. 입법부가 행정부에 종속되어 있는 한(여당이 청와대에 휘둘리는 상황에서) 국회의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지만 국회 내에서 보면 국회의장은 강자다. 한편으로는 제왕의 폭정을 참고 견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인 여당이 힘을 동원하는 “약자의 패악질”을 참고 견뎌야 한다. 전자가 인고(persistence)라면 후자는 관용(tolerance)에 가깝다. 서로 지위와 힘이 다른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할 수 없는 갈등이다. 


정의장은 국회 내에서 소수인 여당의원들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과 규칙 내에서 더 배려하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콩쥐의 새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팥쥐가 아닌 콩쥐에게 더 관심을 둬야 하는 이치와 같다(이문영 1991: 230). 초월윤리의 세 번째 덕목인 사회윤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용은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기회주의자들의 막무가내를 예방할 수 있다. 주먹질이 아닌 말로 대화하도록 이끌 것이다. “진영 논리”가 아닌 합리성에 비추어 의견을 견주도록 할 것이다. 그 결과 합의와 협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합의모색은 초월윤리의 두 번째 덕목인 개인윤리이다. 


하지만 모든 패악질과 난동을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당이 국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하여 판을 뒤엎는 것은 잘못이다. 장관 해임안을 국회법에 따라 처리한 것은 여당이 즐거움을 못얻은 것이지만 그것으로 국회의장을 규탄하고 고소한 것은 지나친 난동이다. 반면에 국회의장으로서 여당의원의 기본권을 외면한다면 이것 역시 잘못한 것이다. 만일 국회의장이 이승만씨와 박정희씨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여당의원들을 물리력을 동원하여 내쫓거나 강금하고 투표를 강행했다면 국회의장은 그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야 마땅하다.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孔孟 』「梁惠王」下 4장).
따라서 천부의 마음을 갖고 여당 의원들을 적이나 원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로 보고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지켜봐주라. 관용을 베풀어 대화를 유도하고 합의를 모색해야 한다. 다만 부당하게 上을 비난하고 판을 뒤엎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물론 폭력이 아닌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해야 할 것을 안하는 것보다는, 마땅히 안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쁘다(이문영 1996: 420). 국회의장이라는 자리를 권위와 권리와 명예로 생각하지 말고 책임과 의무와 멍에로 받아들여라.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권위가 있고 힘이 있는 법이다. 일을 그르치면 권위도 명예도 없다. 권위는 그 자리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만들고 다듬어야 한다(박헌명 2016가). 조지훈 선생님의 말씀대로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


공식 업무는 물론이려니와 업무 외의 언행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본인은 물론 친지와 측근을 잘 다스려 조심하도록 하라. 김대중 정부가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측근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허물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기억하라. 그러니 밖에서 저승사자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처럼 경계해야 한다. 국정원이든 사이버사령부든 아무리 뒤지고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절대왕정으로 회귀하는 듯한 무서운 때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라고 말씀하셨다(이문영 1991: 19).


관행과 관습은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부당하고 현실에 맞지 않는 관행과 관습이 있다면 합리성과 객관성을 따져서 고쳐라. 법인카드로 방울토마토 사고 명품 지갑을 사는 것이 관행이라면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 적법성과 합리성을 따지기 전에 누가 그런 것을 용납하겠는가? 국회의장의 권한과 예우도 잘 따져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말라. 자신의 권위를 다지고 키우는 일이다.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이자 스스로 가진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기희생의 길이다.  


인터넷에서도 참아라


요즘 Facebook, Youtube, Twitter 등 유권자와 대화가 가능한 인터넷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런 사회매체(Social media)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치 견해, 최근 활동 등을 유권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쌍방향 소통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실제 대화에 몰입해서는 안된다. 본인이 바쁜 것도 바쁜 것이지만, 유권자와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거나 정치인 입장의 모호성을 해치는 일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Stromer-Galley 2000). 유권자의 질문에 답하느라 인터넷에 오래 머무는 것은 실익이 없다. 인터넷에서 대화는 쉽게 걷잡을 수 없는 언쟁(flaming)으로 번질 수 있다. 본전도 챙기지 못하는 선택이다. 또한 사회논란이 있는 특정 사안에 대해 찬반을 밝히라는 요구에 섯불리 답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기회주의자들이 “사상검증”을 한다면서 다그쳤을 때 빨갱이가 절대 아니라고 손사래치는 격이다. 그래봤자 믿어줄 사람도 없고 잘해봤자 순진무구일 뿐이다. 그러니 국회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사회매체에서도 참아야 한다.


정치인으로서 유권자와 쌍방향 소통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이론과 명분과 당위와 다른 길에 있다. 이런 당위와 현실간의 긴장을 모호함으로 잘 관리해야 한다. 첫째, 직접 Facebook을 열어보지 말고 계정관리자가 잘 정리해온 유권자의 의견을 파악하라. 바로 답글을 다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의견을 듣고 협의를 한 뒤에 관리자를 통하여 소통을 하는 것이 좋다. 계정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위를 환기시켜야 한다. 아무리 짧은 글이나 단순한 사진이라도 충분히 협의를 거쳐서 게재하도록 한다. 특히 실무자 개인의 감정과 선택으로 답하고 사진을 올리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조그마한 실수와 방심이 기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시비거리가 되고 반격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어 국회의장의 전범이 되시라


소정 선생님은 정의장이 비폭력에서 개인윤리, 사회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윤리를 실천하여 평화로운 국회를 구현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무모한 진영 대결로는 民意를 대변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이다. “자칭 보수”들에게 휘둘려서도 안되지만 똑같이 폭력으로 대응해서도 안된다. 폭력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서 옳은 말을 계속 해 나가는 비폭력이 절실할 때다. 주먹질과 발길질과 말폭력을 자제하면서 “말로 하는 국회”로 바꿔나가야 한다. 옳은 말로 경쟁을 하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의장이 폭력 구도를 극복하고 야당은 물론이려니와 여당에서도 인정하는 국회의장의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 후세에 議長典範으로 오래 불리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박헌명. 2016가.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최소주의 행정학』1(4): 1-3.

박헌명. 2016나. 이문영의 비폭력과 현실적 이상주의.『 최소주의 행정학』1(6): 1-2. 
박헌명. 2016다.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1(9): 1-3.
이문영. 1986.『겁많은 자의 용기』, 2판. 서울: 중원문화.
이문영. 1991.『자전적 행정학』서울: 실천문학. 
이문영. 1996.『논어맹자와 행정학』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1.『인간 종교 국가』서울: 나남출판.
이문영. 2008.『겁많은 자의 용기: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이야기』서울: 삼인.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Park, Hun Myoung. 2016.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in Conflict Management: Lee’s Nonviolence, Conflict Episode, and Principled Negoti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6(2): 99-108.


Stromer-Galley, Jennifer. 2000. on-Line Interaction and Why Candidates Avoid It. Journal of Communication 50(4): 111-132.




원문: 박헌명. 2016. 정세균 의장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을까? <최소주의 행정학> 1(10): 1-4.


정태춘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 “우리는 신선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에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우리는 이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여서는 안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라고 노래했다. 그는 92년 장마를 받아낸 종로에서 무더위처럼 답답하고 끈적거리는 우리의 하루살이를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헬조선”이란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으로 들리는 시절이다. “갑질”로 상징되는 가진 자의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 속에서 힘없는 자들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고 있다. 너나없이 벌어먹고 살기가 빡빡해졌다. 동무가 일하는 회사로 찾아가 반갑게 저녁을 먹고 술한잔 걸치는 일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컴퓨터와 손전화가 보편화되고 먹을거리가 널려있건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웃음보다는 긴장과 짜증이 묻어난다. 누구나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쉴 새없이 움직이도록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 서로가 부담을 권하고 술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선한 꾀부림”도 허락되지 않으니 생산성은 높아졌을 망정 인심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나 살기도 바쁜데 남에게 눈길을 줄 틈이 어디 있을까.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무엇에 쫓기듯, 무엇에 이끌리듯이 우르르  몰려가고 몰려오는 모습에서 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와 그들의 “희망없는 짐짝”을 본다. “긴긴 터널 길”에는 코딱지만한 여유도 없이 장마철의 무더운 열기에 헐떡이는 사람들 뿐이다. 그 헐떡임이 서로에게 열기가 되어 서로의 숨을 옥죄고 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아귀다툼 속에서 순간 순간 숨을 참고 쉬면서 버티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와 참지 못하는 사회

지난 수년 간 “묻지마” 혹은 “홧김에”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채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힘센 자들이 설계하고 추진한 무한 경쟁에서 뒤쳐지고, 상처받고, 고통받고, 끝내 내쫓긴 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인 것같아 안타깝다.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스런 본질을 교묘하게 감춘 경쟁력(국제화)이라는 허울이 아니던가. 가해자들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솟구치는 분노를 삭힐만한 기회도 여유도 없으니 더 이상 멀쩡한 정신줄로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뿐만 아니라 각자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조금이라도 신경을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같은 폭탄이 되어 전철에 몸을 싣고 있다.  

힘센 자들은 멀찍이서 경마를 즐기듯 약자들만의 무한 경쟁을 즐길 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칼부림하는 광경을 흡족스레 바라볼 뿐이다.  집값을 올려놓으면 아파트 분양권을 두고 아귀다툼이고 치솟은 전세보증금을 채워넣느라 가쁜 숨을 헐떡여야 한다. 말이 가계대출이지 정권이 빚을 내라고 권하고 대부업체가 밤낮으로 광고질이다. 너도 나도 빚더미에 코를 꿰어 버둥거리고, 가진 자들은 고리대질로 잔치판을 벌인다. 모두가 즐기는 축전祝典이 되지 못하고, 한쪽은 잔치판이고 다른 쪽은 줄초상인 축제祝祭가 된다. 

이렇게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잠시도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그들끼리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하는 이유가 있다. 약자들이 합리성과 인내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힘센자의 “갑질”(힘센자가 바로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지 못하고 서로 폭력을 사용하도록 부추기기 위함이다. 그래야 강자들이 독식하는 약육강식과 “갑질”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장승, 비폭력, 그리고 참는 것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아마도 “공자왈 맹자왈” 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구태여 윤리와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니 따분한 얘기일 것으로 지레짐작할 것이다. 또한 “초월”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냄새만으로 초월윤리와 최소주의가 실생활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라고 속단하기 쉽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폭력과 자기희생은 참으로 어려운 규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선생님의 행정철학과 사상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공기와 물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좀 모호하게 저작 여기저기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선생님의 행정이론틀을  떠바치는 너럭바위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참는 것이고 견디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한다고 본다(Park 2015: 293-294). 먼저 선생님께서 장승의 특징을 비폭력으로 설명하신 대목을 옮겨보자.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 명치유신 때까지도 무인통치를 해 왔던 일본과는 달리 장승은 비폭력 문화의 상징이다. ... 장승의 특징은 참는데 있다.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 문화의 정상을 말한다”(이문영 1980: 383-384). 

한국의 장승은 솟대처럼 지역의 경계를 정하며, 평화스럽게 남자(天下大將軍)와 여자(地下女將軍)가 같이 서 있으며, 장군인데도 활이나 칼이나 창을 안들고 있으며, 갑옷이 아니라 혼례식 때 입는 예복을 입고 있으며, 집도 없이 밖에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돌이나 쇠나 금이나 은이 아닌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다(이문영 1980: 383-384). 이러한 장승의 특징은 참는 것인데, 그 재료가 쉽게 사그러지는 나무이기 때문에 장승의 참을성을 돋보인다(이문영 1980: 384). 그래서 장승이 비폭력 문화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는 것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모두라고 했고, 이것이 바로 비폭력이라고 했다(이문영 1980: 384; 이문영 1986: 336). 약자는 참아야 한다는 것이며 참지 않고서 비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참는다는 것이 초월윤리, 특히 비폭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약자의 대응방법은 참는 것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인내다(이문영 2001: 348). 참는 것이며 주먹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이다. 선생님은 노동자(약자)는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이문영 2001: 350)고 말씀하셨다. 약자는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야 할 뿐 아니라 강자의 폭력을 견제하여 약자를 보호할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이문영 1996: 664). 비폭력에서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과정을 끈질기게 참아내야 한다(이문영 2001: 349). 이런 맥락에서 초월윤리는 약자의 대응전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이 성숙되고 인간이 완성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이문영 1991: 32). 

“부자의 죄를 극복하는 노동자의 대응방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내(忍耐)하는 것이다. 부자가 하는 짓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인내해야 할 하나요, 참된 비폭력을 시작으로 해 개인윤리, 사회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의 덕목까지도 갖춰나가야 하는 긴 여정의 인내가 바로 인내해야 할 다른 하나이다”(이문영 2001: 348-349). 

위의 인용에서 “부자가 하는 짓[폭력]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아래 인용은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머리”는 지식과 기술을, “마음”은 누구나 세상에 날 때부터 갖고 나온 “天賦의 마음” (이문영 1991: 44)이다. “天賦의 마음”이 있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를 증오하고 저주하기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가 원색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하에서도 국민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아닌 비폭력으로 대응함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이 일차적으로 사용하는 자산은 머리이며 그 다음이 마음이며 그리고 그 다음은 포악한 것과 포악한 것을 고쳐나갈 것을,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이다”(이문영 1986: 335).

요컨대, 참는 것은 이문영의 초월윤리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참지 않고서는 초월윤리를 실천할 수 없다. 특히 참는 것은 비폭력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우며, 차라리 비폭력 그 자체에 가깝다. 그렇다면 약자는 대체 무엇을 참아야 하는 것일까? 

이문영(1996)은 관절염이 낫는 것에 비유하여 (1) 우선 당장 죽을 만큼 아픈 것을 참아야 하고, (2) 그 다음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662, 664). 아픈 것을 참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자의 권력남용과 포악을 당하여 화가 나고, 분하고, 쓰라린 심정을 견뎌내는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는 난동(본능적인 감정의 폭발)을 억누르는 일이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아픔을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욕심을 자제하고 버리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동기가 이해관계인데, 사람들은 그 욕심을 합리성이라는 거죽으로 덮어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곤 한다(이문영 1991: 120).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타인(공익)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안해도 되는 일도 기꺼이(천부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국 참아야 할 것은 (1) 감정과 폭력(난동)이고, (2) 자신의 이해관계를 끈질기게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다(표 1).  

당장 아픈 것을 참아야 한다

약자는 먼저 강자의 폭정을 견뎌내야 한다. 악한 강자는 권력을 남용하고, 불법 탈법 행위를 저지르고,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여 약자들을 못살게 군다. 힘없는 자들은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하루하루를 괴롭고 무기력하게 버텨야 한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약자의 몫이다. “그냥 악한 세상이 아니라 구세력이 통치하는 가장 악한 세상”을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6: 662). 

약자는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이문영 1986: 335). 이문영의 비폭력은 주먹질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이고, 불필요하게 강자의 감정이나 심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하는 것이고, 강자조차도 양심에 찔려 차마 거부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인 기준 (법, 절차, 상식, 합의 등)에 준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Park 2015: 290-291). 악한 정권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순응하거나 무참하게 매를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물리력으로 대들지 말고 당당하게 계속 이치에 맞는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118). 이렇게 폭력을 참고 말하는 것이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포악한 정권이 쥐고 있는 것은 무기와 폭력이지만, 약한 국민이 갖고 있는 것은 악한 정권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이기 때문이다. ... 오랜 기간 끌었던 포악한 정권들이 무너진 것은 총을 쥔 정권을 향하여 ‘말함’이라는 비폭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승리였다”(이문영 2001: 88).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참아야 한다. 악한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생채기가 나고 피가 나고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그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1) 어쩌면 화가 나고 분하고 증오심이 일고 복수심으로 몸서리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른다.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악다구니를 써서 강자에게 대든다 해도 약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증오와 복수에 사로잡힌 난동은 감정을 쏟아낸 잠시의 시원함을 줄 뿐이다. 강자의 폭력 리듬을 맞춰주고 장단을 맞춰주는 어리석은 행위다. 어리석은 난동 뒤에는 더 고통스러운 강자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일 뿐이다 (이문영 1986: 297).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는 약자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대들 것을 예상하고, 또 그것을 은근히 바란다.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는 강자가 즐겨하는 폭력 리듬을 깨고 합리성에 박자를 맞추어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문영의 비폭력이다. 어차피 약자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이문영 2001: 148). 비폭력으로 맞서야 약자가 일단 보호가 되고, 그 다음에 약자가 성장을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8-19).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와 복수를 심중에 담고 매 순간을 사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다. 몸이 건강하다 해도 마음이 괴롭우면 하루하루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편안하고 행복하기는 커녕 천수를 누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약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고통을 견뎌내야 하고 분노를 참아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장 나쁜 세상의 구원을 기다리는 좀 더 밝으며 긍정적인 참음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이문영 1996: 664)고 적으셨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당장 아픈 것을 일단 참은 뒤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강자의 폭력을 견제할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가장 악한 세상에서 가장 시달림을 받을 자가 최소한 보호를 받아 나갈 구조가 생성되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이문영 1996: 664). 전자가 이문영의 “비폭력”에서 견디는 것이라면, 후자는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비폭력은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의 전제가 된다(이문영 2001: 149). 악한 강자의 포악함은 짧은 시간 내에 고쳐지기 어렵다. 또 아픈 것을 참는 것과는 달리 개인의 이해관계와 욕심을 하나하나 버려나가야 한다. 약속(합의사항)을 지키고, 타인을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과정이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초월윤리를 인사행정에 적용한 예를 살펴 보자(이문영 1996: 563-601; 이문영 2001: 419-431). 먼저 비폭력은 엽관주의(spoils system)를 거부하고 직업공무원제를 정착하는 일이다. 계모가 팥쥐를 편애하고, 쿠데타 정권이 자기 핏줄인 육사출신을 우대하고, 측근들을 낙하산에 태워 산하 기관장으로 내려보내는 일은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다. 개인윤리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경우에 맞게 공정하게 인사관리를 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인간 관계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사회윤리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과 외에 출신지역, 성별, 학력, 재력 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용평등주의이며 소외된 국민을 등용시키는 일이다. 자기희생은 공무원들이 단결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일을 용납하는 것이다. 

개인윤리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길은 결국 자기 몫을 부당하게 챙기려는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친 후에는 나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천부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따돌림시키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를 긍휼하게 된다. 따라서 정당한 내 몫까지도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주게 된다. 할 수 있어도 스스로 하지 않으니 (정당한 내 몫을 내어주니) 절제라 할 수 있고, 다른 목소리라 하여 내치지 않고 묵묵히 귀기울이니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거기에 있다는 이해관계, 이기심, 욕심을 버리는 것이 참는 것이다. 이것이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 일이다.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이러한 인내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이문영 1986: 335). 봄날 새순이 온전히 자라기 위해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성장을 해야 한다. 조금 날씨가 풀렸다고 해서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여린 새순은 얼어죽기 십상이라고 선생님을 말씀하셨다.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이문영 1991: 19).

특히 마지막 순간에 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크게 될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끝을 잘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그래서 “사람은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19), “말년이 좋으면 청장년시대의 허물을 덮을 수 있다” (이문영 1991: 357)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친일행위를 한 仁村 김성수씨가 말년에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을 사직하고 민주당의 씨앗을 뿌린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이문영 1991: 357). 또한 밥을 짓는데 마지막 1-2분을 못참으면 설익어서 못먹는다고 하셨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참는 자는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 더 많이 보일수록 철저하게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이문영 1986: 298). 

왜 하필 마지막이 중요할까? 아마도 가장 방심하기 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찰라의 방심이 오랜 시간 견디고 기다려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처럼 당장이라도 군부독재가 끝장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같은 분위기를 말한다. 정권이 위기에 몰려 덜 무서울 때여서 기회주의자들이 인기에 편승한 발언을 쏟아내고 대중의 요구가 과다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밥솥에서 김이 나오고 구수한 밥냄새가 풍겨올 때 마치 밥이 다 된 것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뜸들이는 것을 잊고 뚜껑을 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이럴 때일수록 끈질기게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이 다 될 때까지 꾹 참고 있어야 한다. 피부병도 한참 나아갈 때보다 나아가는 마지막 고비가 더 힘들다. 가려움과 아픔과 성적 쾌감이 교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 마지막 순간을 참지 못하고 상처를 건드리거나 긁으면 그동안 힘겹게 견뎌온 시간이 허사가 된다. 결국 마지막 순간의 방심을 경계해야 하며 끝까지 합리성에 근거한 초월윤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약자가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하다. 끈질기게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고 욕심을 버리면서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윤리에 귀의한다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1) 폭력을 기반으로 한 정권은 강하게 보이지만 실은 정당성이 없어서 법을 무시하고 폭력에 의지해야 할만큼 허약하고, (2) 나중에는 악법을 새롭게 만들어 정권유지를 도모하지만 그 악법마저도 지키지 않게 되고, (3) 이런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못난 정권은 스스로 망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86: 289, 297, 340; 이문영 2008: 346-347). 시민들의 비폭력 투쟁으로 악한 정권은 스스로 붕괴된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하면, (1) 거의 넘어가던 정권이 정당성을 회복하는 빌미를 주게 되고 (2) 더 강경한 폭력 정권이 출현할 유인을 제공하며, (3) 설령 폭력 정권이 무너져도 새 질서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이문영 1986: 297-298). 그래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악한 자가 망한 후의 [사회]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 (이문영 1986: 289).

그러나,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악한 강자가 약자를 파괴하고 급기야는 자신까지 파괴하는 비극보다는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강자의 악한 통치를 견제하여 피아 모두를 살려내는 희극이 이루어내기가 훨씬 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문영 2001: 203-204). “약자는 악한 통치를 그때그때 견제하기가 힘들고 시간도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04).

하지만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먼저 시민들이 성숙한 인격과 의식을 가져야 하고, 강자의 폭력(보복)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ark 2015: 294). 또한 강자의 폭력에 휘둘린 약자는 차분히 합리성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짐짝들”은 하루하루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날이 서 있어서 폭발 직전이다. 강자의 갑질과 아등바등하는 일상에 지쳐서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황이다. “헬조선”, “묻지마”,  “홧김에” 등이 약자들의 인내가 바닥임을 말해준다. 악한 강자가 아니라 이웃을 비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가야 할 길이 끈질기게 참고 버티는 것이니 어찌하랴. 분노를 억누르고 비폭력에 의지하고, 욕심을 버리고 초월윤리로 귀의하는 수밖에. 이를 악물고 서로 격려하고 허물을 감싸주면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각주

1) 물론 약자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다가오는 폭력을 회피하는 방법이다(이문영 1980: 366). 가만히 앉아서 칼맞고 총맞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참고문헌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 1(9): 1-3.

이번 브라질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대표단이 준결승전 진출을 놓고 온두라스 대표단과 경기를 치렀다. 경기 후반에 온두라스 선수가 공을 차넣어 0대 1로 한국 축구단이 패했다. 그런데 골을 넣은 후 온두라스 선수들이 걸핏하면 축구장에 드러눕거나 경기 진행을 방해하여 비난을 받았다. 전력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던 온두라스에게 이리 허망하게 진 것에 대해 선수와 관중이 분노했다. 이른바 “침대축구”(grassrolling)에 대책없이 당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중동 국가와 치른 경기에서도 “침대축구”는 위력을 발휘했다. 온두라스와 중동 국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에서도, 심지어는 월드컵 경기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티가 안나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영리한 전략으로서 좀 덜 미운 “침대축구”였을 뿐이다. 하지만 갈수록 “침대축구”는 적나라하고 구역질나는 양상이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양아치짓이다. 경기 자체가 아니라 오직 이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이다. 정말 무조건 이겨야만 맛인가? 

축구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2002년 미국 유타주 Salt Lake City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가 안톤 오노 선수의 “헐리웃 액션”으로 금메달을 놓쳤다(축구에서 헐리웃 액션은 골치거리가 된지 오래다). 2014년 러시아 Sochi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심판진의 엉터리 판정으로 은메달을 받았다. 우리나라 선수만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 12개로 단번에 4위에 올라섰지만, 군부독재정권의 무리수와 치부만 드러낸 성적이었다. 특히 남자 복싱 라이트 미들급에 나서서 Roy Jones Jr. 선수를 꺽고 금메달을 차지한 박시헌 선수는 그 참혹한 부끄러움의 정점에 있다. 한국인이 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3-2 판정승 아니었던가. 전두환 정권이 했던 것처럼 푸틴 정권도 체제유지를 위해 주최국의 이점을 악용하여 김연아 선수에게 횡포를 부린 것이다. 다 오십보 백보다.  

탁구공을 치면서 운동하는 의미를 생각하다 

언젠가 가까운 후배의 제안으로 탁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체육학과 선수출신에게 몇 달 동안 “레슨”이라는 특별교육을 받았다면서 설레발이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후배의 실력은 과연 “레슨”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후배의 기술은 한마디로 이기는 요령 몇가지일 뿐이었다. 특히 상대방이 치지 못할 만한 곳에 공을 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대방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배는 그 요령조차 숙달하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그 얄팍한 꼼수에 넘어가지 않는 상대를 골랐다. 경기랄 것도 없는 “탁구공 치기”가 끝난 다음에 나는 왜 기본기부터 다지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상대방을 골탕먹이는 것 말고 상대방과 탁구를 즐기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물었다. 상대방이 받아 치기 좋게 공을 보내면 기본기도 단련이 되고 서로 주고 받기가 길게 이어지면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상대방이 치기 좋은 곳에 공을 맘대로 보낼 수 있다면 언제든 치기 어려운 곳에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 후배는 그런 사람됨과 운동의 기본을 교육받지 못하고, 그저 이기는 기법만 전수받은 셈이다. 이른바 “레슨”이라는 엉터리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그러면서 나는 운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운동을 하는지를 자문한다. 운동이라는 것은 묘하다. 하루하루 자신을 단련하여 기량이 늘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그런 희열이 있다. 우아한 발차기가 제대로 들어가고, 찬 공이 자로 잰 듯이 날아가 꽂히고, 곡예하듯 던진 공이 그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런 감흥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재주를 보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흥분하게 된다. 이심전심으로 감정이입이 된다. 텔레비젼에서 중계되는 격투기나 축구나 농구를 보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하물며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에 직접 나서서 생생한 긴장과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일임에랴... 땀을 흠뻑 흘린 후에 상대방과 동지의식을 느끼거나 더 친밀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정으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얘기다. 어쩌면 선조들도 활쏘기를 하면서 이런 느낌을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쏘기는 자기 자신과 겨룬다는 점에서 선수들이 몸으로 부대끼는 격투기나 축구와는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해서인지 어느 경기에서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거나 기량이 아닌 꼼수로 일관하는 선수들을 나는 남달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우리 선수들이 “침대축구”를 한대도 마찬가지다. 또한 판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심판진과 욕설을 쏟아내고, 술병을 던지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난동꾼도 곱게 보아주지 못한다. 모두 경기를 망친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승리감을 누릴 권리가 없는 자들이고 아예 경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경기를 즐길 만한 깜냥이 안되는 뒷골목 잡배들이다.  

축구 경기의 주인인 관중이다

“침대축구”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축구일까? 과연 잔디밭에 드러눕는 선수들이 문제일까? 심판이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객석에서 축구를 구경하는 관중들 탓일까? 그러면서 나는 답답하기만 한 정치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축구경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먼저 양쪽 선수들이 있고,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진이 있다. 방송으로 경기를 중계하고 해설하는 사람이 있다. 끝으로 경기를 보러 오거나 텔레비젼을 통해 시청하는 관중이 있다. 축구는 관중과 시청자들이 내는 돈(광고 포함)으로 운영이 된다. 양쪽 선수들이 기량을 닦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겨뤄야 한다. 심판진도 규칙을 합리적으로 적용하여 불편부당하게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해설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관중(시청자)은 그런 멋진 경기를 즐기면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결국 축구경기의 수요자는 관중이며, 축구경기는 그들을 위해 열려야 한다. 

그런데 선수들이 기량을 닦지 않고 잔재주로 일관하면 어떻게 될까? “동네축구”와 “뻥축구”와 “헛발질 축구”를 누가 즐기겠는가? 기량과 경험은 있으나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남용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침대축구”든 “헐리웃 액션”이든 선수들이 요령만 피운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심판의 눈을 속여 상대방을 걷어 차고, 팔꿈치로 찍고, 시비를 걸어 화나게 하고, 손으로 공을 잡고, 반칙을 당했다며 뒹구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실력이 부족한데도 안간힘을 쓰면서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은 그나마 애처로움이라도 있다. 재능을 다 가진 자가 쓸데없이 공을 돌려 시간을 끌거나 거짓으로 상대방과 심판진을 속이는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다. 하물며 돈을 받고 경기 결과를 조작하는 일임에랴...  

또 심판진이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 불공정하고 부당한 판정을 내리면 경기는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심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런 범위를 벗어난 판정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침대축구”는 심판의 의지로도 쉽게 줄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다고 드러누웠으니 바로 밖으로 내보내거나 경고를 주고, 추가시간에는 “침대축구”로 지연된 시간의 세 배를 더 주는 관행을 도입한다. 한편 쓸데없이 양쪽 선수를 자극하고, 물리력으로 경기를 방해하는 관중도 구역질나게 한다. 한번 잘 했다고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가 헛발질 한번에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순진함은 그나마 양반이다. 술에 취해 물건을 던지거나 경기장에 들어가는 부류는 경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두의 안전을 해치는 악당들이다.   

이 모두가 스포츠 자본주의나 상업화된 프로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이 꾸준히 기량을 연마하도록 격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경쟁을 통해 이기는 경기를 강요한다. 기량에 따라 선수의 품값이 매겨지고 승부에 따라 몸값이 정해지면서 놀이의 규칙(rules of a game)이 달라진 것이다. 축구가 관중을 위한 경기가 아니라 돈을 위한 경기가 된 것이다. 멋진 경기가 아니라 이기는 경기가 환영받는다. 관중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승리를 해서 돈을 챙기는 것이 “장땡”인 세상이 된 것이다. 각종 스포츠 관련 복권도 이런 돈잔치를 부추긴다. 갈수록 선수도, 심판도, 관중도 운동경기가 주는 참된 맛을 잊고 그저 돈을 바라볼 뿐이다.  

정치 경기의 주인은 백성이다

이런 면에서 축구 경기는 민주주의 정치 경기와 비슷하다. 경기장은 의회나 국회다. 양쪽 선수들은 말하자면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다. 백성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갈고 닦아 의회에서 경쟁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민다. 심판진은 대통령과 행정부에 해당한다. 당파성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따져 일을 추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정치를 논평하며 여론을 이끈다. 축구에서 관중이 있다면 정치에서는 백성이 있다. 그들이 대표들을 뽑아 의회로 보내고 세금을 내어 선수와 심판진을 먹여살린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정치 경기는 당연히 백성들을 위해서 치러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경험하는 정치 경기는 교과서에 적힌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일단 선수들의 기량이 편차가 큰 가운데 수준 미달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배경과 이해관계가 백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세금을 떼어먹고, 군복무를 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비율이 현저하게 높다. 전문 지식은 커녕 일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들도 적지 않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해서, 나름의 의견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리있게 말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 허구헌날 “뻥축구”에 “헛발질”이니 백성들이 볼 때도 그저 딱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개중에 말이나 좀 하는 부류들은 잔머리를 굴려 상대를 속이고 골려먹는 술수를 부린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 누명을 씌우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국면을 뒤바꾸고 “침대축구”(필리밥스터)로 의사진행을 방해한다. 기량이 준수하고 멀쩡한 의원도 이런 판에서는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당선이 급하고 공천이 포도청이니 센  놈 편에 줄을 대고 건달들 마냥 패거리질을 한다. 멋진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마음껏 펼칠 수가 없다.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합리성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머리끄댕이 잡고 아귀다툼을 하는 삼류 “동네축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정부 관료들은 정파를 떠나서 합리성에 따라 행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가 여당편을 들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경기는 망가지게 된다.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하든, 여당이 대통령의 등에 올라타 채찍질을 하든 정치 경기가 벌어지는 의회는 개판이 된다. 여당이 다수가 되면 행정부를 등에 업고 야당이 뭐라 하든 일당 독재를 강행할 것이고, 야당이 다수가 되면 여당과 행정부는 구석에 몰려 발버둥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멀쩡한 행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독재정권은 의원들을 줄세워 통제할 뿐만 아니라 관료들을 줄세워 “기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강요한다. 여당이 아무리 반칙을 해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고 야당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노란딱지와 빨간 딱지를 아끼지 않는다. 언론과 시민사회까지 겁박하고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심판의 판정에 의문을 제기하면 유언비어 유포나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또한 여당과 야당이 졸전을 거듭하면서 정부관료제를 견제하지 못하면 관료의 독재로 이어진다. 입법부는 입법부의 논리가 있고 행정부는 행정부 나름의 논리가 있는 법인데, 그 구분이 없이 승자가 독식을 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정치가 백성들의 위한 경기인 만큼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도 백성이다. 하지만 백성들도 정치 경기에 제 몫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아는 것이 없으면서 정치라는 말만 나오면 욕부터 내뱉으면서 미주알 고주알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면서 경기가 잘 안풀리면 터무니없이 선수를 힐난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다. 선수가 그렇게 쉬운 골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감독이 용병술이 없다며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으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은 공을 몰고가는 것도 골대 안으로 차넣는 것도 형편없으면서 선수값을 하라며 다그친다. 토론회든 공청회든 눈꼽만한 관심도 두지 않고 투표장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저주한다. 주인이, 주권자가 바로 자신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어리석음이자 누워 침뱉기다. 

또한 예산은 먼저 빼먹는 놈이 임자라며 공직자들에게 이런 저런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고,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임에 가서 정치인에게 밥과 술을 얻어 먹고 선물을 받는 것은 차라리 순진하다. 돈을 받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외치는 구호가 무슨 뜻인지는 관심사항이 아니다. 드물게는 용팔이 사건처럼 정치인의 하수인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깡통을 던지거나 운동장으로 내려가 난동을 부리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정치를 왜곡하고 망가뜨리는 자들이다. 나쁜 정치가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혐오를 가중시키고 정치판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경제라는 경기도 비슷하다. 경제라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자영업자다. 심판은 정부 (입법, 사법, 행정부) 혹은 시민사회이다. 경제를 지켜보면서 즐기는 관중은 소비자들이다. 하지만 “갑질”로 표현되는 대기업의 횡포는 경제라는 운동장이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프로 선수와 초등학교 선수들의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에서는 “침대축구”든 “헛리웃 엑션”이든 대기업의 전유물이다. 약육강식 논리 그대로다. 이런 불공정한 경기를 막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바다에 플랑크톤이 없으면 멸치도 없고 조기도 없는 것처럼(2008: 675), 중소기업이 없으면 대기업이 위태롭다. 그래서 정부와 대기업은 공생을 외치지만 그때 뿐이고 “갑질”은 쭉 계속된다.  

주인인 관중과 백성이 하기 나름이다

축구나 정치에서 추잡한 반칙, “침대축구,” “헐리웃 엑션”을 뿌리뽑으려면 관중과 백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경기의 주인이고 정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관중과 백성의 수준이 경기와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영악한 머슴을 제대로 부리려면 주인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행동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인값을 해야 한다. 

관중이 경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하듯이, 백성도 정치 결과에 상심하지 말고 정치 과정에 관심을 갖아야 한다. 공부하고 생각한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반칙왕을 퇴출시켜야 한다. 신중하게 토론을 지켜보고, 공청회에 참석하고, 투표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머슴들이 주인을 얕보지 않는다. 또한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후원금도 내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주인의 행동이 필요하다.



원문: 박헌명. 2016. "침대축구"를 보면서 정치 경기를 생각하다. <최소주의 행정학> 1(8): 3-4쪽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지난 8월 5일부터 21일까지 여름올림픽이 열렸다. 흔히 올림픽을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祝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감흥은 예전만 못하다. 언제부터인가 연례행사인 것처럼 그냥 때가 되면 텔레비젼 앞에서 보는 둥 마는 둥 시간을 죽이곤 한다. 왜 똑같은 경기를 지상파 방송사에서 동시에 중계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우병우와 THAAD 사태를 잊고 박근혜를 더 이상 비난하지 말라는 뜻인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마냥 국민들 모두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선수들 응원이나 하라는 뜻일까? 

왜 “죄송합니다”인가?

남자 10미터 공기권총 경기에서 5위를 차지한 진종오 선수가 기자회견을 “죄송합니다”로 대신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이 생각난다. 올림픽을 포함한 세계대회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정상을 지켜온 선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경기에서 진 다른 선수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준결승전 진출에 실패한 여자배구 선수들도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경기에서 부진했던 박정아 선수는 십자포화같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왜 그들은 죄송한 것일까? 왜 석고대죄를 하듯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소위 세계 랭킹에 비추어 선수들의 기대치를 매긴다. 성적이 기대치를 웃돌거나 금매달을 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다. 그 기대치에 못미치면 그 격차만큼 비난이 쏟아진다. 기대치가 금매달인 선수가 매달을 따지 못하면 반역을 도모한 죄인 취급을 받는다. 기대치와 경기 결과가 메달과 상관없는 선수들은 아예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필명 “ 

버락킴너의길을가라”는 지난 8월 10일 “금메달을 획득하면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아들, 딸로 호명되며 추앙받지만, 패배하는 순간 그들은 버려진 사생아(?)쯤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과 국민에 실망감을 안긴 죄인 그 극단적 위치를 오가야 하는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들...”이라고 적었다(http://www.ziksir.com/ziksir/view/3564). 

금메달 정신줄과 올림픽 헌장

결국은 메달이다. 그것도 금메달이다. 종합순위를 따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은메달이 많아도 금매달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든 금메달을 따고 볼 일이다. 공을 차든, 뜀박질을 하든, 헤엄을 치든, 철봉에 매달리든, 골프공을 치든 상관이 없다. 아마도 방귀뀌기나 눈알굴리기에서 일등을 해도 환호할 것이다. 하다못해 도둑질이나 성추행을 잘해서 금메달을 땄다 해도 환장들을 할 것이다. 이러니 출산율 최저, 자살율 최고, 입양아 수출 최고 등은 금메달만 받는다면 국가의 자랑으로 내세울 판이다. “금메달 정신줄”이다. 금메달병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금메달만 따면 그만이라는 것 아닌가.

현대 올림픽은 19세기 말 쿠베르탱(Coubertin)이 주창하여 시작되었다.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의 기본원칙(Fundamental Principles of Olympism)은 올림픽이 즐겁게 힘쓰는 것, 좋은 교육적 가치, 보편적인 기본 윤리원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존중을 추구한다고 했다(“Blending sport with culture and education, Olympism seeks to create a way of life based on the joy of effort, the educational value of good example, social responsibility and respect for universal fundamental ethical principles.”). 올림픽 정신은 상호 이해, 우정, 결속, 깨끗한 경기를 강조한다(“... in the Olympic spirit, which requires mutual understanding with a spirit of friendship, solidarity and fair play.”). 

과연 금메달 정신줄이 즐거운 마음으로 힘써 경기에 임하고 우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가? 선수들이 상호 결속을 다지고 깨끗한 경기를 하게끔 하는가? 경기에서 지거나 메달을 따지 못하면 국민들에게 석고대죄하듯 죄송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우정, 상호 이해, 결속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금메달을 목에 걸지 않고서는 영웅이 될 수 없고 박수를 받을 수 없는 정신줄에서 어떠한 교육적 가치와 윤리원칙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신체, 의지, 마음을 고양하고 균형있게 묶어내는 삶의 철학(“Olympism is a philosophy of life, exalting and combining in a balanced whole the qualities of body, will and mind.”)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행여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올림픽 표어가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금메달 정신줄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3S운동과 금메달 정신줄 

3S는 Sex, Screen, Sports를 말한다. 흔히 나쁜 정권이 일반 국민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권장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97). 백성들이 현실과 정치를 깨닫고 판단하지 못하게끔 관심을 돌리려는 공작이다. 매일매일 닥치는 일상과 이웃에 관심을 끊고 공공집회에는 걸음을 끊는다. 벗고 찍고 보는 일에 몰두하고, 영화관에 몰려가고, 경기장의 응원물결에 휩쓸린다. 카지노와 (화상) 경마장이 주택가까지 스며든다. 길거리와 인터넷에서 복권과 노름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백성들은 성실한 삶을 포기고 현실에서 도피하여 환상과 도박에 빠지게 된다. 바로 독재자가 원하는 상황이다.  

독재정권은 정치정당성이 없다는 열등감을 끝까지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치명적인 약점을 덮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만한 일을 찾는다. GNP를 올리는 경제사업을 추진하고 4대강사업같은 큰 토목사업을 일으킨다. 무언가 손에 잡히고 눈에 확 띄는 그런 “바벨탑”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또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드높인다면서 선전에 열을 올린다. 정권이 잘하고 있다고 백성들을 세뇌하려는 것이다. 이런 공작에는 스포츠 경기가 제격이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프로 야구, 축구, 씨름을 출범시키고, 88올림픽을 강행한 것이 대표사례이다. 

금메달 정신줄, 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는 3S의 한 축이다. (1) 체력은 국력이라면서 백성들을 동원한다. 시간에 맞춰 온 백성들을 줄세워 국민체조를 하도록 강요한다. (2) 경기 성적이 국가의 경쟁력이 된다. 올림픽 종합 순위가 민족의 우수성 순위이고 국력 순위가 된다(버락킴너의길을가라 2016). 올림픽 10위를 내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3) 따라서 경기를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일로 치환한다. 스포츠는 국가사업이 되고 소위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한다. 선수 개인의 영광이 국가의 영광으로 둔갑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박근혜 정권은 금메달 10개, 종합 10위를 목표로 내세웠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국가에서 예산을 지출하여 선수들을 훈련시킨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수확해오기를 기대한다.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고 국위를 선양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강조한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하거나 축전을 보낸다. 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의 힘을 과시했으니 얼마나 통치자가 흥이 났을 것인가?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영웅으로 추앙되고 온갖 혜택을 받는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와 김정은 정권은 다를 바 없다. 박정희, 김일성, 전두환, 노태우, 김정일 정권 모두 이런 금메달 정신줄로 백성들을 현혹해왔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민족과 국가는 사실 통치자 자신일 뿐이다. 우월성과 자긍심은 금메달이라는 마약이 그려낸 환영이다.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은 올림픽 헌장을 거스르고 있다. 올림픽 헌장 제 1장 6조 1항은  올림픽 경기가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이지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The Olympic Games are competitions between athletes in individual or team events and not between countries.”).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시상식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연주된다. 

금메달 정신줄의 정치경제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에서 올림픽의 기본원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구촌 축전이라지만 선수들은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 결과에 목맬 수 밖에 없다. 결과에 따라 영웅과 죄인이 결정되고, 특혜와 무관심이 갈리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따내면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주어지지만, 실패하면 아무 것도 손에 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포상금과 연금이 달린 문제이니 죽기 살기로 금메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깨끗한 경기가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한다. 비열한 반칙과 행위는 잠깐이고 금메달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선수라기보다는 금메달을 생산하는 기계에 가깝다. 인간이기보다는 금메달을 물어오는 사냥개에 가깝다. 자의든 타의든 사생활을 잊고 불타오르는 애국심과 사생결단할 각오로 금매달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고 지면 패장으로 목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면 인생은 무의미해지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금메달 정신줄을 가진 단체와 국가가 선수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금메달이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수를 선발하고 파격에 가까운 지원을 해준다.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원하는 음료수를 선택하여 빼먹는 식이다. 전투를 하듯이 훈련을 하고 전쟁을 하듯이 경기를 하도록 선수들을 다그친다. 군사작전을 전개하듯이 자세한 계획을 세워놓고 선수들을 닥달한다. 독재정권일수록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조바심을 가진다. 짧은 시일 내에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사냥해 온 선수들에게 넉넉한 보상을 던져주고, 금메달은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밤낮으로 울궈먹는다.    

금메달에 사로잡힌 백성들도 흥겨운 마음으로 축전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기고 지느냐에 몰두하기 때문에 경기 자체를 즐기기 어렵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라는 표현은 승패에 목을 건다는 뜻이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염원할 뿐이다. 이긴 쪽에서는 잔치집이 되고 진 쪽은 초상집이 되는 판이니 어찌 숨돌릴 짬이 있겠는가. 승리한 선수는 영웅이라 부르고 온갖 찬사를 쏟아낸다. 패배한 선수 죄인으로 낙인찍고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것은 경기 자체가 아닌 결과에 대한 평일 뿐이다. 박정아 선수에게 비난을 쏟아낸 사람들이 얼마나 배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몇 번이나 배구경기를 관람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금메달 정신줄에서는 전문가인지 문외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경기에서 이겼는지, 금메달을 땄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승패는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무관하다

경기에서 승패는 피할 수 없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은 일상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승패는 경기의 결과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기는 것이 옳고 지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승패가 선수들의 인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경기 그 자체다. 경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우정을 쌓고, 인격을 닦고, 또 체력을 다지는 것이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선수들의 실력만이 아니다. 그 날의 날씨 (비, 바람, 온도, 습도 등), 선수의 건강상태, 경기장과 장비 상태, 경기장 분위기, 심판의 판정 등이 영향을 미친다. 우연이라거나 운(random error)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대치라는 것은 평균 개념이다. 가장 높은 확률을 보이는 사건을 말한다. 세계랭킹 1위라면 그 선수가 금메달을 딸 확률이 가장 크다는 말이다. 확실히 금메달을 딴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경기는 예측할 수는 있어도 누가 이길 것인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패에 대한 지나친 환호와 비난은 무지와 천박 그 자체다.    

한편 인구수를 고려하면 한국의 성적은 놀랍다. 남한의 인구가 5천만명인데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1억2천만), 독일(8천만), 프랑스(7천만), 이탈리아(6천만)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4억명의 중국이 금메달 26개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천만명당 금메달 0.19개 (=26/140)인데, 한국은 1.8개 (=9/5)를 획득했으니 한국이 10배 더 잘 한 셈이다. 엇그제 월드컵 축구 예선경기에서 한국이 중국을 물리쳤다. 개개인의 축구능력분포가 두 나라 모두 같다고 치면 2천 5백만명 (남자축구니깐)에서 11명을 뽑고, 7억만명에서 11명을 뽑아서 경기를 벌인 결과가 “공한증”이었다. 하지만 이 결과가 조선족이 한족보다 낫다거나 한국이 중국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가끔씩은 안쓰럽게 생각한다. 현대 올림픽의 경기종목은 대개 서구에서 보편화된 것이고, 서구 사람들의 체격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체형과 체력으로 봐도 한국인은 서구인에 미치지 못한다. 애초부터 올림픽은 동양인에게는 불공정한 경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이 맘을 아프게 한다. 금메달만 쫓는 정권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감내하는 선수들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더 크고 빠르고 힘센 경쟁자를 이기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치고, 부딫히고, 넘어지고, 피흘리고, 이를 악무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기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경기는 이기고 지는 자를 가린다. 하지만 겨루는 행위 자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패에만 몰입한다면 슬픈 일이다. 하물며 승패로 선수들을 얽어매고 백성들을 호도하는 일임에랴... 겨루는 그 자체를 즐기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상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는 한 판 승부를 보고 싶지 않다. 사격이든 배구든 좋아하는 경기 그 자체를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선수들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경기에서 진 우리 선수들이 어깨를 떨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진종오도, 김잔디도, 김우진도 죄송할 필요가 없다. 김연경도 박정아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최선을 다해 재주를 겨루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좀 흉하게 내지르는 김연경의 괴성도, 양효진의 얌전한 오리궁뎅이도, 실수를 연발했다는 박정아의 서브리시브도 그저 예쁠 뿐이다. 이제 그만 국가라는 짐을 내려놓으라. 승패에 목을 매는 태극전사의 투혼은 잊으라. 그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즐겁게 마음껏 펼쳐라. 그런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고 싶다. 


원문: 박헌명. 2016.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최소주의 행정학> 1(8): 1-3쪽.

지난 7월 15일 국무총리 황교안씨가 경북 성주군을 방문하였다. 미국의 미사일요격체계라는 THAAD기지를 그 지역에 배치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다가 여섯 시간 동안 군민들에게 곤혹을 당하였다. 일부 성난 군민들은 황씨에게 고함을 지르고, 소금을 뿌리고, 물병과 달걀을 던졌다고 한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손나발을 불어댄다. 감히 국무총리에게 패악질을 했다느니, 불법 폭력시위를 했다느니, 공무집행방해와 교통방해를 저질렀다느니, 감금죄를 물어야 한다느니, 불순한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느니, 종북좌파가 어쩌느니 연일 떠들어 댄다. 왜 미군기지를 성주에 설치해야 하는지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정승에게 달걀을 던진 불경스런 백성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를 앞다투어 따지고 있다.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나간 박근혜씨를 대신해서 황씨가 총대를 메고 귀중한 ‘매값’을 벌어온 셈이다. 과연 성주군민들은 이런 돌팔매질을 당해 마땅한가?  

왕과 정승의 ‘매값’

백성들이 왕이나 정승에게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드물다. 불경죄로 볼기가 너널거리도록 곤장을 맞거나 아예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장돌을 던진다면 백성들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뜻이다. 일상의 문제해결절차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공포와 분노와 흥분으로 몸서리치고 있다는 소리다. 몇가지 사례를 더듬어보자. 

2015년 4월 16일 전남 진도에 있는 세월호 참사대책본부를 찾은 국무총리 정홍원씨는 분노한 실종자 식구들에게 물 세례를 받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던 국무총리 정운찬씨가 2009년 11월 28일 세종시(충남 연기)에서, 12월 12일 대전 KBS에서 달걀 세례를 받았다. 1999년 6월 3일에는 일본을 방문하려던 김영삼씨가 김포공항에서 박의정씨에게 빨간 페인트가 들어있는 달걀을 맞았다.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이유에서다.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씨는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강행하다가 밀가루와 달걀을 덮어쓰고 학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하였다. 문교부장관 시절 전교조 교사들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굴비엮듯이 줄줄이 끌어갔고 1,500여명을 교단에서 내쫓은 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달걀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왕은 노무현씨다. 김영삼씨의 삼당합당에 반대한 후 1990년 부산역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 2001년 5월 22일 방문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서 봉변을 당했다.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소환된 2009년 4월 30일에는 타고 있던 버스에 달걀이 날아들었다. 이회창씨(2007년 11월 13일 대구)와 이명박씨 (2007년 12월 3일 의정부)도 달걀을 맞기도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한편 한강인도교를 폭파하고 대구로 도망간 이승만씨와 왜놈들에게 쫓겨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난 선조 이연씨는 무슨 욕지거리를 들었을까?  

정원식씨는 학생들의 움직임을 알고서도 평소처럼 강의를 나갔다. 무방비 상태에서 난타당하는 국무총리의 처참한 모습을 내외언론에 생생하게 전했으니 ‘매값’을 두둑히 받아낸 셈이다. 대학생 20여명이 잡혀가서 실형을 받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공고화했다. 김영삼씨에게 닭알을 투척한 박씨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정홍원씨나 정운찬씨는 사태가 하도 험악해서 처벌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반하여 노무현씨는 “정치인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냐.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2011년 11월 필리핀에서 군사협정에 반대하는 시민들로부터 달걀을 맞은 클린턴 부인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매값’을 구걸하는 자와 주권자의 매질을 달게 받는 자가 이렇게 다르다.    

성주군민의 죄

그러면 성주군민들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먼저 그들은 약자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듯 자기 동네에 미군기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덜컥 미군기지 배치를 결정한 정권은 강자다. 약자를 우습게 여기고 힘으로 찍어 누르는 우악스러운 통치자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강자다.

성주를 방문한 황교안씨에게 군민들이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길을 가로막고, 물병을 던지고, 소금을 뿌리고, 달걀을 던진 것은 분명 지나쳤다.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행동임이 분명하고 물리력을 동원하여 황씨의 생명을 위협한 것은 아니지만, 성숙되지 않은 군중의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이문영은 “비폭력이란 통치자에게 폭력을 당하더라도 약자는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 (2008: 68-69)이라고 밝히고, “돌만 던지지 말라.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 (1986: 292)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1986: 291)고 역설했다. 유감스럽게도 성주군민들은 권위주의 정권의 속임수(“제발 뺨이라도 갈겨줍쇼. 아님 욕이라도 해줍쇼.”)에 말려든 것이다.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 피치자인 국민에게 주는 신호는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호이다” (1986: 289). 

그리고 폭력은 물리력은 물론 언어, 심리, 감정 등을 동원한 폭력 모두를 의미한다. 교묘한 말을 하여 감정을 흐트리거나, 힐난을 하는 것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깝다. 이문영은 다음과 같이 ‘말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였다. 그러니까 성주군민 일부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은 것은 비폭력이 아니라 말폭력이다. 

“상황 1에서 예수의 비폭력 저항—비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여지는 폭력이나 폭군의 웃는 얼굴과는 거리가 먼 저항—을 본다. …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님을 상황은 보여준다. 따라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 (2001: 246).

성주군민들의 죄는 노여움을 미처 삭이지 못하고 잠시나마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지한 것이다. 물론 일부 군민들이 저지른 실수이다. 고성과 욕설을 보내기보다는 항의서든 요구서든 최소한의 주장을 담은 글을 전달하거나 낭독했어야 했다. 물병을 던지고 소금을 뿌리고 달걀을 던지기보다는 입가리개를 하고 침묵시위를 했어야 했다. 설명회에서 나선 황씨를 멀리 등지고 (황씨 앞에 청중이 없도록) 조용히 연좌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지 못하고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행동하는 순수한 백성들이었던 죄다. 약아빠지지 못한 순진무구純眞無垢가 죄라면 죄다. 그래서 음흉한 정권이 의도한 대로 꼬투리를 잡혀 연일 신문 방송에서 무방비로 두들겨 맞고 있다. ‘매값’을 비싸게 물어주고 있다. 하지만 성주군민들의 죄를 묻는 것은 법으로 보나 윤리로 보나 지나치다.  

합리성적 저항과 완전한 비폭력

이문영은 모든 나쁜 것은 관官에서 나오고 모든 좋은 것은 민民 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 (1991: 42). “가라지의 악이[든] 곡식의 악이[든] 악의 근원은 정부의 과격이다” (2008: 589).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1991: 29).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고 통치자와 官은 국민의 종이기 때문이다(主權在民). 주인은 이런 머슴의 버르장머리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合理性的 抵抗”이며 비폭력 투쟁이다 (1991: 30), 왜 그러한가? 폭력에 의지하는 통치자는 자기가 정한 법도 안지킬만큼 제멋대로여서 비폭력 투쟁으로 붕괴가 된다 (1986: 297). 그런데 백성들이 폭력 투쟁으로 대응하면 자체분열을 하던 못된 머슴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1986: 197). 결국 머슴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면 주인이 끝까지 수모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문영은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는『孔孟』「梁惠王」下 4장을 종종 인용했다 (1996: 74, 293, 606). 上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下의 난동도 용납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안하무인의 꼴을 관(官)과 민(民)에서 각각 보기 싫다… 안하무인의 관을 정치학에서 말하길「벌거벗은 힘」이라고 한다. … 벌거벗은 힘의 행사를 민이 하는 것도 역겨움을 준다” (1986: 81)고 말했다. 이문영은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과격한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과격함이 극에 달하는 것을 경계했다 (2008: 578).

“…평화적이라는 말은 쿠데타라든지 국민측에서 발생하는 난동이 없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난동이란 4·19와 같은 저항권의 행사라든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과 같은 정쟁(政爭)을 뜻하지 않는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 (1986: 297).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대안)은 한마디로 비폭력이다 (1986: 294). 약자는 어차피 폭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게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 비폭력은 감정이 아닌 합리성이다. 철저하게 이성에 근거한 행동으로 ‘폭력 대 폭력’ 구도에서 ‘자의성 대 합리성’ 혹은 ‘야만 대 문명’으로 국면을 바꿔야 한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약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참고 기다려야 한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매사를 조심해야 한다. 힘센 통치자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만을 조심스레 해야 한다 (2008: 66, 80). 그냥 비폭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합리적인, 완전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보다는 강자가 꼼짝없이 악을 계속 저지를 수 없게 하는 대응책을 찾는 것이 약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8: 59).

일부 성주군민들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은 것은 물리적 폭력은 아니라 해도 완전한 비폭력이라 할 수 없다. 약자의 노여움과 억울함을 분출시킨 것이다. 쓸데없는 말이고 지나친 언동이다.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비폭력이며, 합리성과 거리가 먼 ‘말폭력’일 뿐이다. 강자에게 꼬투리를 잡혀 더 잔인한 폭력을 부를 뿐이다. 죄송하다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뺨이라도 한대 갈겨달라며 꼬드기는 양아치들 아니던가. 다행히 성주군민들이 그 음흉한 계책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지금은 최소한의 행동으로 맞서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훨씬 더 나쁘다 

성주군민들이 황교안씨에게 고성을 지르고 달걀을 던진 것은 잘못한 일이다. 일부 군민들의 일탈 행위라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폭력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훨씬 더 잘못했다. 공론없이 통치자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군민들은 절차적 합리성을 묻고 있는데, 국가안보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며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사오정식 딴소리다. 이제는 뒤늦게 대화를 한답시고 군민들이 아닌 지역 정치인과 유지들을 찾고 있다. 동시에 성주군민들의 폭력행위를 처벌하는데 골몰해 있다.  

하지만 핵심은 성주군민의 난동이 아니라 권위주의 통치자의 폭력이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성주군민이 아니라 외부세력이다. 혈맹이랍시고 미국을 끌어들여 조용한 마을을 시끄럽게 만든 정권의 종미주의자들이다. 군민들을 자극하여 폭력을 유도해 놓고 처벌을 한다면서 설치고 다니는 불순세력이다. 선량한 군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우고 있는 전문시위진압꾼들이다. 백성과 동락하기는 커녕 힘으로 누르고 발길질을 해대는 못난 上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보를 들먹이며 자기 잘못을 백성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도둑이 주인을 매질하고 방귀뀐 놈이 성내는 격이다. 

안타까운 것은 음흉한 정권은 약자의 행동 원리를 훤히 꿰고 있는 반면에 정작 순진무구들은 그 얼개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약자인 백성들이 나쁜 통치자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강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상황에서 약자들은 신중한 최소주의 행동을 해야 하는데, (1) 비폭력, (2) 동지들과의 합의, (3) 일반 시민의 호응과 연대 모색이 포함된다 (1991: 25-26). 

음흉한 정권은 (1) 멋대로 결정해놓고 자신감있게 폭력을 행사한다. 백성을 궁지에 내몰고 자해공갈에 가까운 방법으로 약자의  난동을 유발하여 ‘폭력 대 폭력’ 구도를 만든다. (2) 반대하는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 분열시키고 낙하산으로 장악한 신문 방송을 동원하여 여론을 몰아간다. 반대의견은 유언비어로 폄하하고 찬성의견을 부추겨 이간질한다. 뒷조사를 하고 처벌을 운운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3) 벼랑에 내몰린 백성들을 ‘왕따’시킨다. 시민사회가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윽박지른다. 시민연대를 차단한다. 1980년 광주처럼 철저하게 고립시킨 뒤 맘놓고 ‘왕따들’를 난타질한다. 외부세력=불순세력=종북좌파=빨갱이를 들먹거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약자의 비폭력 투쟁을 분쇄하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약자들이 비폭력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완전한 비폭력은 감정이 아닌 이성에 의지하여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폭력의 얼개와 의미를 깨달아야 하고, 감정과 유혹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문: 박헌명. 성주군민의 죄와 국무총리의 '매값.' <최소주의행정학> 1(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