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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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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선생님은 구민법의 대상이 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숫제 선거권을 주지 않는 제한선거제도를 채택했더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08: 219). 어느 수업시간이었는데, 당시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보통 ·평등·직접·비밀 선거라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말씀이셨기 때문이다. 인종, 지역, 성별, 교육, 소득 등에서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선거(universal suffrage)가 상식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칙은 원칙이 아니라 주입된 이념에 가깝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

나는 몇년 전부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몇몇 사회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꾸준함을 깊이 새겨 매달 꼬박꼬박 내려고 한다. 또 <너흰 아니야>와 <이게 나라냐 ㅅㅂ>를 만든 윤민석씨의 “감동후불제”에 동참했다. 지난 해 촛불집회에 조카와 함께 참석해서 기꺼이 촛값을 내고 왔다. 촛불집회에 가면 일당 5만원씩 준다는 음흉한 뜬소문을 옮겨온 아버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5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학생 시절에는 호주머니가 가벼우니 이런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애초부터 내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제는 취직도 해서 좀 여유가 생겼으니 말하자면 호기浩氣를 부린 셈이다(사실은 마음이 문제지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는 단지 호주머니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수많은 촛불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2009년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마음이 울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놓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방심했던 것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절망으로 보내면서 무책임했던 유권자였음을 자책했다. 한국을 떠나와서 벌어진 일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던 안타까움이 있었다. 큰 빚을 졌고 그 빚이 묵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치를 것은 치르고 내 몫을 요구해야

그러던 터에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1986)에서 “치를 것은 치르고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경우에 맞는 성장을, 한 개인에게서나 국가에서나 보고 싶은 것이다”(62쪽)를 읽었다.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고 내 몫을 기대했다는 뉘우침이 있었다. 손 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는 심보랄까. 경우에 맞지 않는 짓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소정 선생님은 사람(정치), 돈(경제), 지식(문화)에 관한 좋은 의식이 사회에 퍼져야 한다고 했다(1986: 64). 미움과 박해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와 나누는 마음을 품고, 연줄을 대거나 요행수을 바라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쓸모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마디로 행동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64쪽).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회단체에 참여하거나 후원금을 내는 일을 언급했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공짜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음에도(2001: 16) 어리석게도 나는 감나무 밑에서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홍시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상식과 원칙과 정의를 갈구했지만 “행동을 하는 일”에 한없이 게을렀음을 알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은 또 제한선거를 말씀하시면서 “당비를 내는 [지방의원 입후보자] 선거인단이 극소수인 것을 발견하고 의사표시만 앞세우고 회비 지출 의무를 안 지키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결핍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적었다(2008: 219).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금·당비·후원비를 안낼까 자문하고, “국민 일반이 더럽게 벌었기에 깨끗한 데 돈을 못 쓴다”고 답했다(219쪽). 돈을 더럽게 번 사람은 자신을 타락시키거나 세속의 복(줄서기나 횡재)을 비는데 돈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비·당비·후원회비를 잘 내는 나라치고 돈 못버는 젊은이들이 백화점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는 나라가 있는지를”(220쪽)이라고 한탄했다. 유권자가 치를 것을 다 치르지 않고(책임과 의무는 나몰라라 하고) 민주주의를 기대했다는 뜻이다. 뼈아픈 지적이다. 매달 글을 써서 올리고 후원금을 내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일, 경우에 맞는 행정

경우境遇는 사리事理나 도리道理를 말한다. 경우에 맞는 일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다. 지난 9년이 참담했던 까닭은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을 핑계삼아 전시작전권 환수를 차일피일 미뤄놓은 군면제자들이 유사시에 원점타격을 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일도 경험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엽기·변태 행각으로 파면되어 감옥으로 끌려간 판에 적폐청산과 국정농단 조사를 두고 정치보복 운운하는 일임에랴... 소위 “갑질”이라는 것 역시 경우없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정부 관료제에서 경우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안타깝다. 천둥벌거숭이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관료제의 전문성과 중립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고삐풀린 정부는 원래 좋은 말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그동안 경우없는 정권에서 댓글을 달아 여론을 조작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民(관변단체 등)을 타락시켰음이 드러나고 있다.

합리성을 갖춘 행정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화문을 포함한 전국에서 타오른 촛불의 물결이 준 교훈이다. 관료제에서 옳지 못한 경우를 바로잡는 것은 결국은 백성의 몫이다. 주인으로서 경우에 맞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유권자가 제 몫을 요구하기 전에 치러야 할 경우에 맞는 값이다. 좋은 기사를 읽고 토론하고  촛불을 들고 후원금을 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좋은 의식”과 “좋은 행동”이 못된 官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우”의 기준을 세워나가면서 경우에 맞는 행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원문: 박헌명. 2017. 행동하는 일과 경우에 맞는 행정. <최소주의행정학> 2(10): 1.


지난 5월 문재인씨가 제 19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청와대 위민관爲民館의 이름을 여민관與民館으로 되돌린다고 했다. 2004년 노무현씨가 청와대에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짓고서 여민관으로 이름지었는데, 2008년 이명박씨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다수가 이명박씨의 “Anything But Rho”라는 구호로 추진된 “노무현 흔적 지우기”라고 생각했다. 임석규 (2017)는 여민이든 위민이든 뜻은 다 훌륭하니 문패를 갈아치우는 악순환을 피하고 그 뜻을 제대로 구현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두리뭉실한 양비론이 몹시 불편하다. 과연 여민과 위민은 같은가?

<맹자>에 나오는 여민

여민관의 “與民”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긴다(與民同樂)”는 표현에 있다. 반면 위민관의 “爲民”은 고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단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추정된다. 임석규 (2017)는 세종의 “위민정치”를 본받겠다는 명분으로 풀이했다. 혹자는 링컨의 말에 빗대어 여민은 by the people에 상통하고, 위민은 for the people에 해당한다고 풀었다 (http://boramaeavengers.tistory.com/266). 여민의 주체는 국민이고 위민의 주체는 정부(청와대와 관료들의 엘리트주의)라는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고전종합DB (http://db.cyberseodang.or.kr/)로 살펴보면, 여민은 <맹자>에서 분명한 출처를 찾을 수 있지만 위민은 그렇지 않다. 與民은 <맹자> 본문에서 총 일곱 번 나오는데 與民同樂과 不與民同樂으로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 에서 두 번 나온다. 나머지 다섯 번 모두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爲民은 <맹자>에 爲民父母 (백성의 부모가 되어)로 세 번, 爲民上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그리고 以爲民望 (백성들이 보고 따라하게 하시고)으로 총 다섯 번 나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백성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논어論語>를 포함한 사서에서도 백성을 위한다는 爲民은 찾아볼 수 없다.

소정 선생님께서 아끼는 <맹자> 양혜왕장구하 4를 살펴보자. 不得而非其上者 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 亦非也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위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지 않는 자도 잘못이다). 여기서 여민은 “與民同樂”의 일부로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이다. 흔히 알려진 뜻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 위민은 “爲民上”의 일부로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爲가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된다”(자격내지는 지위)는 뜻이다. 원문의 맥락을 반영한다면 “爲民館”이 아니라 “民上館”이 되었어야 했다. 爲가 아니라 民上이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풀이하면 백성의 위에 군림하는 자리이니 그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나라를 평안케하라는 뜻이다. 결국 爲民館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제멋대로 갖다 붙인 “막이름”이다.

<맹자>에 안나오는 위민

“위민사상”이라며 사람들이 흔히 언급하는 <맹자>의 문구는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14이다. 하지만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벼운 존재다)이라는 문장에서 民爲는 있지만 정작 爲民은 없다. 왜 그럴까? 당시는 왕조체제였으니 임금을 위한다는 爲君이란 표현은 있을까? 사서 중 <논어>에 爲君이 딱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임금답다와 군자가 되다라는 뜻이지 임금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愛民처럼 어떤 일상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충”과 조선왕조에서 특히 강조한 “충성”이 다르듯이,  후대에 필요에 따라 덧칠되거나 조작된 어휘나 용법이 아닐까? 나라에 대한 충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절대 가치로 등극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위민과 여민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혈통이 분명한 진도개와 개처럼 생겼으나 종마저 헷갈리는 “듣보잡”을 견주는 일이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

국민과 더불어 한다는 뜻을 담은 여민관은 참여정부의 사상과 철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말 그대로 與民觀이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고 나쁜 뜻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명박씨는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의식(자신과는 달리 깨어있는 시민들의 진심어린 성원을 받는 것 못마땅하고 기분이 나빠서) 때문에 저지른 “무조건 반항”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과 더불어 일을 해나간다는 “여민”은 왕조 정신줄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 임금과 백성이 겸상을 하고 “맞짱”을 뜰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인자한 임금이 어리석은 백성을 긍휼하여 성은을 베푸는 “위민”이 있을 뿐이다. 이명박씨의 爲民觀이다. 백성들은 본시 우매한 존재여서 분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쉽게 속고 쉽게 흥분한다. 검은 돈을 받고 촛불을 들고 난동을 부리곤 한다. 철없는 애들까지 선동하여 거리에서 큰 어른인 대통령을 욕보이게 한다. 그러니 노무현이 틀려먹은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씨의 정신줄에서는 당연히 與民이 아닌 爲民이어야만 했다.

爲民觀이 역겨운 까닭

나는 “위민”이나 “애국”이라는 말에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위정자들이 나라를 위한다느니 백성을 위한다느니 하면서 세상을 속이고 자신들을 속였던가? 현대사에서 “애국”이라는 말을 누가 애용했던가? 완장차고 빨갱이를 잡는다고 설치던 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구차한 말이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권력을 남용하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이 역겹게 내뱉은 말이다. 국민들이 우려하는 4대강 사업과 광물 외교를 벌일 때 넌더리 나게 듣던 소리다. 엽기 변태 행각으로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근혜씨를 구출하자며 태극기를 휘날리는 자들이 신물이 나도록 외치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의 “위민”에서 백성은 없었고, “애국”에서 나라는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이 있었다. “위민”의 대상은 온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자기편”이었다.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까지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소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국민을 갈라놨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국민이 아니라 빨갱이고 종북좌파이고 노빠문빠였고, 꼭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이창동의 <시>는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인들이 인정하는 빼어난 작품이었지만 이명박과 유인촌에게는 그냥 “빵점”이어야만 했다.   

“애국”의 대상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며 집단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다. 나라가 있다면 바로 그들 자신이다. 따라서 빨갱이와 종북좌파들이 세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는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 그들만의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스통을 굴리고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애국”하는 이유다. 우국충정이란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켜고 종북좌파를 만들고 뒷조사하고 집요하게 짓밟았다. 정예요원으로서 쪽팔림을 감수하면서 “가카”를 기쁘게 하는 감동스런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르는 대로 달려가서 빨갱이 타령을 하고 종북좌파라면서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애국을 한답시고 완장차고 거드름을 부렸지만, 사실은 꽂감빼먹듯이 나랏돈을 빼내서 펑펑쓰는 재미가 솔솔했다. 여기 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애국한다는 자부심과 자기최면으로 꿋꿋하게 버텼지만 그냥 뒷돈을 받아 챙기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에 백성이 있고 어디에 국가가 있단 말인가? 위정자들이여, 제발이지 위민도 하지 말고 애국도 하지 말라.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욕보이고 거덜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묻지마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

새로 들어선 정권이 건물 이름을 자기 입맛대로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큰 흠이 없다면 전임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론절차를 거쳐 바꾸는 것이 상식이다. 건물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지만 시시비비를 가려서 말해야 한다. 애초에 이명박씨가 정당한 이유없이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문제였다. 당시에도 말이 많았을 정도로 합당하지 않았고 쓸데없이 의심만 샀던 짓이었다. 문재인씨가 여민관으로 되돌리는 것은 사필귀정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런데 어차피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매한가지라면서 이명박씨와 문재인씨의 결정을 싸잡아 악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의도했든 안했든 이런 양비론은 결국 악한 강자의 손을 들어준다. 즉, 이명박씨의 잘못은 덮은 채 문재인씨의 사필귀정을 “악순환”에 쓸쩍 끼워넣는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한패거리로 묶어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자고 유혹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튄 놈은 그 죄가 묽어지고 가려진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자는 너무 박하다거나 가혹하다고 몰린다. 튄 놈은 피해자가 되고 사필귀정은 가해자가 된다. 적폐청산이 갑자기 정치보복이 되어 본질을 호도한다. 결국 패악질은 교정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적폐들이다.
 
혹시나 이명박근혜 정권 때는 공연히 해코지 당할까봐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세월이 좋아지니까 (해코지 위험이 없어지니까) 이름을 되돌리는 것을 시비걸고 나선 것이라면 기회주의자들의 “묻지마 양비론”일 뿐이다. 멀쩡한 사람들을 몽롱하게 만들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헷갈리게 함으로써 악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적폐를 만들어 왔던 논리다. 나는 이런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을 경계하고자 한다.

수구 패악질의 악순환

왜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거듭된 패악질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수구세력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사면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범죄와 부도덕과 비윤리에 완벽하게 면역이 된 인종들인가?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가 국내정치에 개입한 증거가 드러났어도 눈깜짝하지 않고 외면하는 강골들 아닌가? 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인정하지 않다가 위기가 닥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진흙탕싸움을 벌여 물타기를 시도한다. 적폐청산이 이명박을 정조준한다며 슬쩍 노무현을 끌어들인다.

반면에 수구세력들은 자신이 핍박하는 멀쩡한 자들에게 언제나 가혹한 비난을 쏟아낸다. 흔히 빨갱이나 종북좌파라고 낙인찍힌 민주주의자들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마치 큰 죄를 지은 양 침소봉대하고 정적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약자의 꼬투리를 잡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한번 약점이 잡히면 수구세력의 잘못을 들추는 일을 멈추고 쥐죽은 듯이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수구세력은 보수이자 우파이며, 우익보수는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진보이자 좌파이며, 좌익진보는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단순무식한 정신줄이다.

재미있는 것은 핍박받은 자들은 수구세력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너무 쉽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물러선다. 마치 결벽증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사소한 법적 도덕적 인간적 잘못까지 모두 떠안으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대신 짊어진 예수처럼 자책한다. 그것이 옳은 길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자부심마저 갖는다. 정확하게 사실을 밝히고 합당하게 책임을 따지는 일을 꺼려하고 부끄러워한다.

이런 형국에서 승자는 언제나 수구세력이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정적에게 떠넘기는 용기와 몰염치와 재주를 가지고 있다. 수구세력은 사실을 밝히는 일을 방해하고(은폐하고) 조작하는데 적극적인  반면, 정적들은 사실과 책임을 따지는 일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은 패악질을 저지를수록 승승장구하고, 반대세력들은 조그마한 실수에도 고개숙이고 물러난다. 수구세력은 서로 단결하여 패악질을 독려하는 반면, 반대세력들은 합당한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수구세력과 합세하여 더 가혹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피해자로 살면서 결벽증과 반성과 사과가 일상화되고 체질화된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쫄지말고 적폐청산을 말하라

요컨대,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벌거벗은 힘에 기대어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자들을 몰아세우고, 그 반대편 사람들은 사실을 치열하게 따지고 패악질을 비판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일을 낯설어 하고 꺼려 한다. 이런 얼개는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주물러 온 수구세력들의 힘에 눌린 착시효과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수구세력들은 현재 “정치보복”이라고 엄살을 피우면서 또다른 적폐라며 맞서고 있다. 벌건 대낮에 퍽치기당하지 않으려면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힘에 밀려 기득권 세력들에게 매를 맞고 비난을 받더라도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해야 한다 (이문영 1991: 118). 더도 덜도 말고 사실과 법과 상식과 양심에 근거한 옳은 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노무현씨가 걸었던 길이다. 여민이나 위민이나 뜻이 다 훌륭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이 하늘과 땅처럼 멀어 보인다.

참고문헌

임석규. 2017. 여민관-위민관. <한겨레신문>. 2017. 5. 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642.html


원문: 박헌명. 2017. 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최소주의행정학> 2(9): 1-2.


문재인씨가 지난 17일 대통령 취임 100일을 기념하여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했다. 설레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고, 또 흐뭇하기도 했다. 높은 지지율에 걸맞는 그런 회견을 해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조바심에 가까왔다.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솔하게 말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대화에 굶주리고 목말랐던 국민들의 마음이리라. 회견이 끝난 뒤 답답했던 속이 풀린 듯한 시원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럼 이명박근혜가 문재인보다 잘했니?


문재인씨의 기자회견을 두고 역시 여야의 평이 갈렸다.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이념과 처지를 언급한 수준이다. 지도자가 레드라인을 밝힌 것이 적절하지 않았다느니, 원론 수준에 머물렀다느니, 시간이 부족했다느니 등은 점잖은 편이었다. ‘이명박근혜’를 배출했던 야당의 반응은 알맹이가 없는 억지 자화자찬이라느니,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느니, 여전히 ‘쇼통’이라며 깎아내렸다. 사실과 무관하게 기자회견이 반드시 잘못되어야 한다는 신앙에 가까운 소망이리라. 만일 똑같은 잣대로 이명박근혜의 기자회견을 평했다면 그들은 무어라 말했을까?  

지난 9년 동안 청와대는 대답없는 구중궁궐이었다. 박근혜씨는 취임 13개월만에 첫번째 기자회견(2014.1.6)을 가졌다. 대부분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왔다. 일방적으로 국민들을 지시하고 가르치고 윽박지르고 야단쳤다. 국민들이 묻는 것을 가로막거나 모른 체 하거나 그저 침묵했다. 속이 찔리는 의혹 제기는 근거없는 유언비어, 괴담, 음모, 소설, 선동으로 매도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찍어눌렀다.

2008년 ‘광우병 파동’때 이명박씨는 촛불시위를 내려다 보고 반성했다지만 뒤에서는 시위대를 보복하고 여론조작을 시도했다. 2010년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면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고 몰아붙였지만 공론과정도 없는 ‘노무현 흔적 지우기’로 끝나며 체면만 구겼다 (수정안이 부결된 후 반성도 없이 태연하게 나라를 거덜낸다던 원안을 추진했다). 2014년 300여명의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속으로 가라앉던 시간에 박근혜씨가 어찌 했는지 아직까지 속시원히 답하지 않았다. 2016년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사과랍시고 대국민담화를 세 번씩이나 했지만 매번 국민들을 불질러 광장의 촛불로 타오르게 했다. 국민이 알고 싶은 것에 답하지 않고 그들이 알리고 싶은 것만 여과없이 쏟아냈다.

상대방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條理있게 말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과연 언어능력을 가진 인간이란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을까? 인간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세월이었다. 최소한 지도자는 유권자와 자유롭고 효과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민과의 대화’와 ‘대통령과의 대화’

나는 문득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열렸던 ‘국민과의 대화’와 이명박 정부에서 두 차례 열렸던 ‘대통령과의 대화’ (2008.9.9과 2009.11.27)를 생각한다. 단순히 행사 제목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화자의 생각과 국민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과의 대화’는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다가가서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해소시켜주는 것으로 국민에게 방점이 있다. 1998년 1월 18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국민과의 대화’를 시작한 김대중씨는 독특한 해학과 구수한 말법으로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노무현씨는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2003.3.9), 언론인과의 대화(2007.6.17), 심지어는 TBS를 통해 일본 국민과의 대화(2003.6.8)까지 시도했을 만큼 듣고 말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두 대통령은 방식은 달랐지만 그 누구보다도 대중에게 말하고 글쓰는 일에 사명감과 열정과 재능을 보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강원국 2014; 윤태영 2016). 두 사람은 탁월한 문장가였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다(강원국 2014).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말하기에 대해 노무현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윤태영 2016: 5-7).  

“말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다. 그런데 말만 잘하고 일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 민주주의의 핵심은 설득의 정치이다. 그래서 ‘말’은 민주정치에서 필수적이다. ...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결국 말은 지적 능력의 표현이다. ... 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국민들이 지도자를 초청하여 의견을 듣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불러다가 묻고 따지는 것이다. 2003년 일본 TBS에서 노무현씨를 초청하여 진행한 프로그램 제목은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韓國盧武鉉大統領 本音で直接對話)’였다. 취임 4주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화(2007.2.27)는 주요 신문사나 방송사가 아닌 인터넷신문협회가 마련하였고 정치평론가나 교수가 아닌 연예인 김미화씨가 진행하였다. 반면에 1988년 전두환 노태우를 5공화국 청문회에 불러내 내란, 학살, 비리 등을 추궁追窮한 일은 후자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청와대가 주체가 되어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였고, 지도자가  방송에 나와 대본대로 ‘연기’를 하였다. 질문지가 사전에 유출되었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들 했다. 이명박근혜의 말하기, 시선, 표정은 그들이 뱉어내는 연설과 답변 내용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국민이나 민간 단체가 아니라 대통령(청와대)이 스스로 ‘대통령과의 대화’를 한 것이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이런 ‘대통령과의 대화’는 방점이 국민이 아닌 지도자에게 있다. 궁궐에 몰려가 임금을 알현謁見케 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백성을 불쌍하게 여겨 큰 맘먹고 존귀한 용안龍顔을 보여주는 성군의 풍모라고나 할까. ‘대통령과의 대화’는 사실상 ‘어쩌다 성은聖恩을 입어 임금을 알현하고 납작 엎드려서 어지御旨를 어성御聲으로 경청하는 일’에 불과했다.

바람직한 공화국의 지도자상

바람직한 국가지도자의 모습은 시대를 반영한다. 왕조에서 원하는 임금의 자질과 품격은 공화국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소위 성군聖君이라는 군주 이념형(ideal type)은 품성이 어질고 덕이 뛰어나며 학문을 닦아 국정을 잘 돌보는 왕이다. 나라의 주인이자 나라 그 자체인 군주가 소유물의 일부인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한다. 맹자가 말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은 책임과 의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군주가 백성에게 베푸는 시혜施惠다. 하지만 공화국에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지도자는 국민을 대신해서 국정을 이끌어갈 뿐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주인인 국민의 질문에 답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기본은 해줘야 한다. 그 기본은 헌법과 법률과 상식을 어기지 않고 유권자의 요구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업무시간에 ‘여성의 사생활’을 운운하는 것은 공화국에서 용납될 수 없다.  

대한민국이 공화국이 아니라 왕조였다면 아마도 노무현씨가 용상龍床에서 쫓겨날 확률이 제일 높았을 것이다. 수구언론이 그려낸 모습을 보면 (예컨대,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발언은 맥락없이 단장취의斷章取義한 왜곡보도다), 미천한 출신인데다가 언행에서 군주의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시민들은 그런 자연스럽고 사람냄새 풍기는 노무현식 말법에 환호했지만 왕조의 백성들은 쌍스럽고 천박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노무현씨를 탄핵소추했듯이 터무니없는 명분이라도 내세워 무조건 왕을 끌어내리려 작당을 했을 것이다. 노무현씨는 조선왕조로 치자면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서 왜군과 싸웠고 서자로서 왕위에 올라 전후복구에 힘쓰다가 북인과 함께 몰락한 광해군에 비견된다. 대통령 후보시절 천덕꾸러기로 당내외에서 따돌림을 받다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등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수구세력의 파죽공세에 밀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두번째로 가능성이 큰 경우는 ‘환관정치’로 국정을 마비시키고 백성들을 위기에 몰아넣은 박근혜씨일 것이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괴駭怪한 짓을 벌이다 쫓겨난 연산군처럼 박씨도 끝까지 아빠의 바짓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최순실, 문고리 삼인방, 김기춘, 우병우 등과 함께 엽기 변태 행각을 벌이다가 탄핵을 당한 것이다. 이명박씨는 공과 사, 옳고 그름, 일의 선후를 분별하지 못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용산 철거민 참사, 세종시 수정안 파동, 4대강 사업 등을 벌여 나라를 파탄지경에 몰고 갔다. 조선왕조 최초로 서자출신의 왕이라는 열등감과 이순신에 대한 어리석은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은 선조처럼, 이명박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감으로 ‘Anything But Rho’ (노무현만 아니면 뭐든 좋다)를 외치면서 삽질만 해댔다. 백성들이 따르는 이순신을 중용하고 국민들이 좋아하는 노무현에게 시비걸지 않는 일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마지막으로 김대중씨는 탁월한 정치력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했지만 자식문제로 고통을 겪은 영조에 비견된다.

아마도 대한민국이 분권과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동작한 공화국이었다면 박근혜씨가 제일 먼저 쫓겨났을 것이고 이명박씨가 그 뒤를 이었을 것이다. 공화국의 근간인 헌법과 법률을 제멋대로 흔들면서 민의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서 시작하여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세종시 건설에 딴죽을 치기 위해 이명박 정권이 얼마나 많은 꼼수를 부렸던가. 특히 박근혜씨는 최순실씨를 끌어들어 국정을 농단한 것이 결정적으로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근혜 정권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정적을 탄압하고, 총선과 대선에 개입하였다. 그래서 9년 동안 공화국이 정상으로 동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백성의 입을 닫게 하고 백성의 요구에 답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말만을 쏟아내는 짓은 왕조에서라면 몰라도 공화국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머슴이 일을 하다가 실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유권자를 업신여기고 국민의 명령을 듣지 않는 지도자는 당장 쫓아내야 한다.

수구 정당의 만성 부적응증

이명박근혜와 그들을 배출한 야당은 현재 공화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줄은 아직도 왕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나섰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약같은 ‘빨갱이 놀음’을 끊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도 박근혜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에게 박근혜는 순진무구한 공주이자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박정희를 잇는 성군이고, 감히 임금을 모함하여 끌어내린 ‘종북좌빨’들은 척살해야 할 대역죄인이다.

박근혜씨 탄핵에 9할이 넘는 국민이 찬성을 했고 5푼 정도만 반대를 했다. 현재 여당의 평균 지지율이 5할이 넘는 가운데 8할의 국민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구세력은 탄핵이 잘못되었고, 적폐청산에 음모가 있고, 부동산 대책은 부질없고, 청와대가 ‘협치’를 걷어차고 ‘쇼’만 한다고 쏘아댔다. 여전히 다른 시대, 다른 별나라에 있는 정신줄이다. 그들의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돼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 돼지인 것을 어쩌겠는가?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벌써 70년인데도, 바뀐 정치와 사회와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적응증이다.

‘국민과의 대화’가 좋은 까닭

문재인씨의 기자회견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부족했거나 아쉬운 대목도 있다. 문재인씨는 김대중씨보다 부드럽지 못했고, 노무현씨만큼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상도 발음에 눌변이지만 차분하고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 9년 동안 목말라했던 갈증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유권자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지도자가 성실하게 답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갈망했지 않은가. 최소한 누가 무엇을 어느 순서로 질문할 것인지를 미리 짜지 않고, 누가 써준 대본이나 수첩을 뜻도 모른 채 주절주절 읽지 않은 것만 해도 큰 변화다. 군대라도 동원해서 세종시 건설을 막겠다는 식의 막말이 사라지고 ‘박근혜 번역기’를 돌리지 않고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해도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까?

이런 ‘국민과의 대화’가 민주주의와 민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왕조 정신줄에서나 가능한 일방통행식 ‘대통령과의 대화’가 아니라서 좋다. 서로 눈을 맞추고 뜻을 나누는 대화라서 나는 참으로 좋다.  

참고문헌

강원국. 2014. <대통령의 글쓰기>. 서울: 메디치미디어.

아이엠피터. 2016. ‘거침없이 불통’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2016. 1. 13. http://theimpeter.com/31649/?ckattempt=1

윤태영. 2016. <대통령의 말하기>. 경기도: 위즈덤하우스.


원문: 박헌명. 2017. 국민과의 대화? 대통령과의 대화? <최소주의행정학> 2(8): 1-2.


요즘 갑질이 화두다. 이른바 ‘갑질’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불공정한 행위를 말한다. 힘이 센 ‘갑’이 힘이 약한 ‘을’을 강제로 몰아붙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짓이다. ‘갑’과 ‘을’ 사이의 특별한 (권력) 관계를 올가미로 삼아 강자가 약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놓고 쥐어짠다.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무차별로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는 야비한 패악질이다. 일방적인 강자의 횡포이다. 악질의 적나라한 폭력 그 자체다. 

‘갑질’과 ‘을’의 반란 

그동안 갑질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여러가지 양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현상인 양 gapjil로 표현되기도 한다. 갑질공화국이라는 말도 생겼다. 하지만 그동안 갑질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공론장에 오르기 어려웠다. ‘갑’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을’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무자비한 보복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갑’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것은 한마디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 사회매체가 보편화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갑질에 무관심하거나 ‘갑’을 편들던 정부기관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을’들이 참아왔던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비정상’(박근혜씨의 ‘정상’)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던 ‘을의 반란’이었다.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씨의 ‘땅콩회항’과 종근당 회장 이장한씨의 운전기사 폭언은 ‘을’들의 반란을 예고했다. 미스터피자 회장 정우현씨의 갑질은 프랜차이즈업계에서 가맹점들을 착취했던 삐뚤어진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육군대장 박찬주씨와 그의 부인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은 오래된 군대 내 인권 침해 문제를 공론장으로 끌어냈다. 8월 12일자 <한겨레신문>은 서연이화의 ‘을질’을 통해 갑질이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상대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임을 보였다. 모두 법(계약)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이나 상식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의 양심과 품격에 관한 문제이다. 

관료주의 갑질과 권한 남용

관료제에서 벌어지는 갑질은 어떠한가? 막스 베버의 관료제 이념형에서 일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유기적으로 분화되어 있고, 그 자리에 필요한 전문성을 가진 자가 일을 담당한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직책에 따라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일을 해야 한다. 각각의 일은 계서제를 통해 규칙과 절차에 따라 조율된다. 만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직책과 권한을 무시하고 누르기만 하면 관료 조직이 아니라 관료주의적 조직과 권위주의 사회가 된다 (이문영 2001: 71). 계서제에서 윗사람이 부당하게 아랫사람의 고유한 권한을 빼앗는 관행이 일반화된 사회이다 (이문영 2001: 111). 이런 관행이 ‘관료주의 갑질’이며, 그 본질은 한마디로 권한 침해와 권한 남용이다. 권한 남용은 관료제의 계속성과 합리주의를 가로막는 근본 이유이다 (이문영 1980: 6).

대통령인 이명박씨가 나서서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뽑아버리고 규제철폐를 독려했다. 하지만 당장 결과물을 내려는 욕심에 실무 담당자에 이르는 관료들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관료들은 맡은 일을 소신을 가지고 해나가기보다는 위를 쳐다보면서 지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복지부동이다. 또한 장관에게 일개 국장 이름을 들먹이며 나쁜 사람이라느니 아직도 그 자리에 있냐느니 말한 박근혜씨도 권한 침해인 것을 매한가지다. 국가정보원 등의 부정선거를 법대로 조사하려던 검찰총장과 검사를 내쫓은 것은 권한 남용이 아니라 그냥 볼썽사나운 짓이다.   

관료제에서 갑질은 윗사람이 모든 일을 혼자 알아서 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라면서 시시콜콜 참견하다 일을 그르친다. 윗사람이면 규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언제 어디서든 아랫사람의 권한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다는 무지나 시대착오다. 공화정에서 살면서도 정신줄은 양반이 천민을 마음대로 부리는 왕조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를 전문성과 자율성을 가진 관료들의 조직체계로 보지 않고 명령대로 움직이는 똘마니 집단이나 기계 뭉치로 보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맘에 들지 않으면 부품을 교체하듯 바로 쫓아내고 말잘듣는 ‘내사람’으로 채워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터미네이터’같은 관료제는 찾아보기도 어렵거니와 있다 해도 좋은 결과를 내지도 못한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회자되는 갑질은 모두 ‘갑’이 끝간데 모르고 횡포를 부리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을’이 몸종이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공직자의 비폭력 

공무원은 전문지식을 매일매일 닦아서 조직 내에서는 상사를 존중하며 조직 밖에서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며, 전문지식 앞에서 존귀한 존재이지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존재가 아니며, 상사에게 굴종하고 상납하는 대가로 利를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문영 2001: 277). ‘관료주의 갑질’은 아랫사람에게 전문지식은 내팽개치고 상사에게 굴종하고 잇속이나 챙기는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한다. 권위주의 조직에서 아랫사람은 일에 맞는 고유한 권한을 갖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써먹고 내버리는 기계 부품이거나 그저 굽실대며 “네, 네”하는 노예일 따름이다 (이문영 2008: 606).

주어진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이 非暴力이다 (이문영1996: 404). 주먹질(권한 남용)이 멈춘 뒤에야 우리는 지혜를 쌓고(智), 합의를 모색하고(禮), 나아가 사회윤리(仁)와 자기희생(義)을 실천할 수 있다 (이문영 2008: 143). 관료주의 갑질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비폭력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경험했듯이 강자의 폭력이 통제되지 않은 판에 관료제에서 전문성, 효율성, 동의와 협력(‘협치’), 복지와 사회통합을 따지는 일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최소한의 인권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갑질을 방치한 채 관료제의 합리성을 따지니 말이다.  

참고문


곽정수. 2017. 고발합니다, 갑질공화국. <한겨레신문>. 2017. 8. 12.


원문: 박헌명. 2017. 관료주의 갑질과 공직자의 권한 남용. <최소주의행정학> 2(7): 1.

문재인 정부는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내세웠다. 대통령 후보로 나설 때부터 병역회피, 부동산투기, 탈세, 위장전입, 논문표절에 연루된 사람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낙연, 강경화, 김상조, 김상곤 등이 위장전입이나 논문표절로 곤욕을 치렀다.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자승자박”이 되어 새 정부를 옥죄고 있다(문현구 2017). 수구 기득권 세력은 공직배제 5대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며 문재인 정부를 공격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거나 참여정부 시절의 ‘코드인사’라며 비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인사참사 정부인가?

과연 문재인 정부가 치솟은 지지율만 믿고 엉터리 공직후보자를 남발했을까?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이후 국무총리와 장관급 고위공직자 후보자들의 성적을 정권 별로 살펴보자.

후보자가 낙마를 했거나, 청문회 보고서 없이 임명되었거나, 부적격 의견임에도 임명된 비율은 참여정부가 16%로 가장 낮았고 이명박근혜 정부가 각각 53.1%와 51.5%로 크게 높았다(박경원 2017). 문재인 정부는 7월 4일 기준으로 33.3%였다. 낙마 비율만 봐도 참여정부는 3.7% (=3/81)였고, 이명박근혜 정부는 각각 8.8% (=10/113)와 10.1% (=10/99)였고, 새정부에서는 지금까지 안경환 후보자가 낙마를 하여 6.7% (=1/15)였다. 청문회 보고서 없이 혹은 부적격 의견임에도 임명을 강행한 비율은 참여정부가 12.3%, 이명박근혜 정부가 44.2%와 41.4%였다. 문재인 정부는 26.7%였다. 결국 인사참사가 있다면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코드인사’와 ‘회전문인사’를 떠올린다. 이명박 정권의 ‘회전문 인사’와 박근혜 정권의 ‘수첩인사’와 ‘밀봉인사’는 벌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듯하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절반이 넘는 후보자가 논란거리가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비난은 참여정부가 받는 것일까?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부가 ‘코드인사’했다며 비판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 ‘코드’로 치면 김용준, 문창극, 이완구, 황교안, 김진태, 이경재 같은 기라성綺羅星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마법에 걸린 나라?

조기숙(2007)은 이런 황당한 현상을 조선, 동아, 문화 일보(조중동이라기보다는 조동문)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주술로 설명했다. 조동문이 참여정부를 저주하는 주술을 만들면 보수와 진보 오피니언 리더들이 다른 언론에그 주술을 읊어 대고, 급기야는 진보언론(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과 여당(열린우리당)까지 합세했다(40-42쪽). 일반 시민들은 이런 마법에 홀려 사실과 진실을 깨닫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담론 혹은 프레임 경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했고, 부당하게 그리고 박하게 평가받았고, 철저하게 왕따를 당했고, 무방비 상태로 얻어터지고 짓밟혔다.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고위공직자를 임명하는데 5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사실 상식에 가깝다. 물론 어떤 사람은 다른 원칙(예컨대, 성범죄자 배제)을 선호할 수도 있다. 조세와 공납과 역은 옛부터 내려온 나라의 기본이니 납세, 병역, 재산형성이 떳떳하지 못한 자를 공직에 배제하는 것은 합당하다. 다만 주민등록법 37조에 근거한 ‘위장전입’ 여부만으로 공직자의 자질을 판단하거나 표절여부를 가리기가 어려운 일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다. 차라리 투기와 탈세 문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거나 (그런 목적으로 주민등록을 신고했는지) 패륜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따지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공직배제 원칙이 불편해 보이는 이유는 그 내용이 부적절해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수구 정권과 차별화되는 선명성을  부각하려다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인사참사’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시민들을 달래주고 그  눈높이에 맞춰줘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쳤기 때문이다. 그들과는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이 무리수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말하자면 표현할 자유를 억압하는 법규정에 눌려 지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기검열’을 하고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어리석음이다. 참여정부에서 과반인 152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한번도 그런 힘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무기력했던 것처럼 지지율이 8할인 문재인 정부도 그 힘을 실감하지 못하고 얼떨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이 세다는 뜻이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판을 깨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직배제 원칙은 상식에 가까운 문제 (조세, 재산형성, 병역, 패륜범죄 등)에 치중했어야 했다. 쓸데없는 논란거리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주 심각한 수준부터 시작하고 점차 폭을 넓혔어야 한다. 과거 10여 년 동안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살아남은 자들 중에서 고위 공직자를 찾아야 한다면 배제 대상의 폭과 수준을 적절하게 조정했어야 했다(야당의 비난을 받은 이후에 이를 깨달았음이 아쉽다). 물론 공직자들 중에 원칙에 꼭 맞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의 고위 공직 배제 5대 원칙은 소정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과격’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나치게 방어와 수세에 촛점을 두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뒤 수구 기득권 세력의  반격을 받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열린우리당의 어리석음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촛불민심으로 만들어 준 정권임을 되새겨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을 바라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민심을 믿고 당당하게 나아가야 한다.  

참고문헌

문현구. 2017. ‘화려한 출발’ 문재인 정부, ‘5대 비리 공직 배제 공약’에 자승자박. <데일리안>. 5월 7일. http://www.dailian.co.kr/news/view/635809

박경원. 2017. 인사청문대해부 1: 논란인사 비율,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노무현 정부 순으로 높았다. <SBS News>. 6월 28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266883

조기숙. 2007. <마법에 걸린 나라>. 서울: 지식공작소.


원문: 박헌명. 2017. 고위공직 배제 5대 원칙이 불편한 이유. <최소주의행정학> 2(6): 1.


지난 5월 5일 김어준의 파파이스(144회)에 출연한 유시민씨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무엇을 할 생각인지 밝혔다. 최근까지 국무총리로 청원되거나 “강제 소환”되는 압박을 받아온 그였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저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어요. … 헛물켜지 마세요. …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진보어용지식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노무현씨가 서거했을 때 세상이 무너진 듯이 절규하고 원망어린 눈빛을 화살처럼 쏘아내던 그였다. 그런 그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태연히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사는 자의 아픔이 묻어나온다. 아야 소리조차 뼈를 저미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런….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유시민은 말한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실 대통령만 바뀌었다고. 정치권력만 잡은 것이지 기득권을 대변하는 언론권력, 재벌권력, 지식인 집단 다 그대로라고. 여소야대라는 국회권력도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모든 기득권 권력이 그대로 있고 그 기득권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 한 매듭만 딱 바뀌는 건데. 지금까서 선거과정에서 편들어 줬던 여러 세력들이 또 자기의 논리에 의해서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공격해요. 열 개의 사안에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다 때린다구요. 저는 그게 제일 무섭고요. 지금도. 그 악몽이 또 되풀이 되면 거의 99프로 망한다 그렇게 봐요.”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참여정부시절에 정부에 있을 때 또 여당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게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이 들었던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해주는 지식인들이 너무 없는 것예요. 언론인 지식인이.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제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게 무조건 편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제대로 옹호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어야 되지 않냐.”

이러한 최소주의 발언이 소리없는 한맺힌 절규로 들린다. 공정하게 공과를 따져준 지식인이 한 명도 없이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무방비로 줘터지고 짓밟힌 노무현 정권의 한이 느껴진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 했던가…. 그의 핏발서린 눈빛은 8년 세월에 바래지고 평온을 되찾았지만 뼈속 깊이 박혀있는 회한悔恨은 그대로다.

“무릇 지식인이거나 언론인이면 권력과는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어야 [하]고. 그것은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대통령만 바뀌는 거예요.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예요.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 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서 또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 범진보의 정부에 대해서 어용진보지식인이 되려고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한 때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노무현을 비난했다. 수구기회주의 언론은 물론이려니와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신문>마저도 날마다 매질을 해댔다. 무방비로 난타당하는 동네북 신세였다. 하다 못해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도, 비가 와도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들 했다 (조기숙 2012: 95). 마치 “노무현 욕하기 올림픽”이 열린 듯이 너도 나도 뛰어들었다. 2003년 잠깐 부모님댁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나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출신이 미천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기득권층의 유치한 몽니로 생각했다. 도올선생님 말마따나 좀 한다는 집안에 며느리가 덜컥 들어왔는데, 집안도 학력도 인물도 변변찮은 며느리를 콧대높은 시어머니가 얼마나 무시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겠는가.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지식인들조차도 노무현 욕하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듯 “노무현 욕하기 월드컵”에서 온갖 재주를 뽐내고 있었다. 학자의 입에서 참여 정부가 “좌파 민주주의”고 “운동권 정권”이고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정권은 커녕 기본도 안된 형편없는 패거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고졸이고 그것도 상고출신이고 언행이 기존 기득권의 품격과 거리가 먼 천것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데, 자존심이 상하니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노무현씨가 무엇을 어찌 잘못했기에 그리 깎아내리냐는 말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노빠”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유시민씨의 말이 가슴에 팍 꽂히는 까닭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고 깨끗하게 지내야 되잖아요. 지식인은 권력에 굴종하면 안되지. 이래가지고 사정없이 깔 거라고. 전에도 그랬잖아요.” 참여정부가 초장부터 교육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파동, KBS사장 임명 파동, 화물연대 파업, 부안핵폐기장 파동 등으로 얻어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주로 노무현씨를 지지했던 진보 세력이 공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아팠다고 그는 회고했다. 당시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저런 처참한 비난을 받는 것인가?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노무현씨에 대한 비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여당 내에서도 비난에 직면했던 노무현씨가 좋은 인재를 뽑아서 일을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미숙한 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비난은 지나치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대통령이었나? 그러면 30년 가까이 해먹은 박정희 정권같은 “프로 정권”을 원하는가? 또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사람의 일이 모두 잘 되어가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프로인 박정희 정권은 하는 일마다 매끄럽게 추진되었고 매번 성공했는가?

소위 운동권 출신을 청와대에 기용해서 “운동권 정부”라면 각종 비리와 전과가 있는 자들을 장관에 기용하면 “비리 전과자 정부”인가? 아무리 논란이 있다 해도 6억원 이상 부동산에 대하여 중과세하는 것이 “좌파 민주주의”란 말인가?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에 사는 노인네들이 모여앉아 “종부세”를 한탄하며 노무현을 죽일 놈 만드는 것이 좌파 정권인가? 학문이 아닌 상식 선에서 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기득권을 틀어 쥔 세력들의 삐딱한 시기심이나 화풀이나 모략질(여럿이 작당을 해서 한 사람을 바보 만드는 짓)로 보였다.

어느날 나는 고대 병원에서 투석透析 중인 소정 선생님을 찾아뵙고 노무현씨의 잘못을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과도한 참여”라고 말씀하셨다. 노무현씨가 말이 너무 많고 과격하다는 말씀이셨다. 예를 들면, 노건평씨 사건 때 구차하게 형님을 편드는 얘기를 하지 말고 그냥 검찰이 법대로 조사해서 처리하는 것이라고만 말했어야 했다(박헌명 2016: 3). “한마디로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15). 꼭 긴요하고 꼭 맞는 말만을 최소로 하라는 말씀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문영 (2008)은 “나는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한다고 결정한 뒤에 대통령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을 과격이라고 본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살려준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를 옮기는 일에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대통령이, ‘나는 관습법이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라고 발언했던 것이 과격이다” 라고 적었다 (576쪽).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심쩍은 속내를 깨끗이 풀어내지는 못했다.  

소피스트와 386세대의 과격

이문영(2008)은 ‘국민의 정부’는 측근 정치를 다스리지 못해 부패가 만연했고, ‘참여정부’는 여당인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북한에 대한 과격한 조치를 취해 민심을 잃었다고 했다 (661쪽). 또 노무현씨가 좌파를 포함한 기회주의자들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574 쪽). 선생님은 이들을 잇속(욕심)이나 챙기는 소피스트나 대중영합주의자로 불렀다 (544, 618쪽). “… 나는 밭에는 돌이 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밭의 대부분은 흙이 메우지만 돌이 좀 있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흙이 적고 돌 천지인 경우이다. … 기회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좌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밭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흙’이어야 한다” (574-575 쪽).

이문영(2008)은 참여정부를 주도한 386세대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햇볕정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663쪽). “…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악한 정부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여 해직과 옥고를 치른 1970년대 운동의 불씨를 잘 살려냈어야 했다. ...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386세대를 자랑했는데, 386세대는 가장 무서웠던 때인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이들이 아니었다” (582쪽). “1980년대는 1970년대보다 덜 실존적이며 덜 무서운 때였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가 과다해졌고 과다한 요구만큼 잇속을 챙기려는 움직임도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662쪽).

나는 소정 선생님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중도 보수인 선생님의 입장에서 (500쪽) 권위주의를 파괴하고 격의隔意없이 일반 시민과 눈맞추는 지도자가 탐탁찮고, 세상이 뒤집어진 듯 (어제까지도 강자의 폭압에 눌려지냈던 자들이) 너도 나도 자기 몫을 주장하고 나서는 무질서함을 마땅찮아 하셨으리라.

반면 아직도 노무현이라면 치를 떨고 저주를 쏟아내는 기득권 세력의 “악다구니”에서 합리성을 눈꼽만큼도 찾기 어렵다. 각종 수치를 보아도 그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참여정부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훨씬 못미쳤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연극을 빙자한 <환생경제>에서 쏟아냈던 “노가리”, “육시戮屍랄 놈”,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불알 값을...”,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 등의 욕지거리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창조욕설”을 들으면서 박장대소를 하던 박근혜씨는 이제 수갑을 찬 채 부시시한 올림머리를 하고 깡마른 표정으로 재판정에 들어서는 피의자가 되었다. 義가 아닌 利를 탐한 “장사치 정권”과 스스로 비정상이면서 정상이라고 우겨댄 “엽기 변태 정권”아니었던가.

내가 경험한 지식인들의 노무현 욕하기는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월드컵 열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명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데 지극히 인색했다. 생각컨대, 노무현씨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강력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다 처참하게 짓밟혔고, 그들의 “노무현 왕따” 전략(혹은 프레임)에 걸려들어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난도질당하고 유린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인다.

“과도한 참여”란 무슨 뜻일까?

소정 선생님은 참여정부가 끝까지 참을 줄 몰랐다고 하셨다 (이문영 2008: 520). 나는 “과도한 참여”나 “과격”이라는 비판을 어렴풋이만 이해했다.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낯빛만 좋은 사람 치고 인자한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는 <論語> 學而篇을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386세대와 소피스트와 사학재단의 재산권 등에 관해서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孔孟> (梁惠王下)를 다시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비판하신 참여정부의 “과도한 참여”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樂者亦非也).”

이문영(2008)은 “...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말하자면 코드가 맞아서, 한덩어리가 되어 그 과격함이 극에 달하게 된다”고 적었다 (578쪽). 꼭 독재정권이 아니어도 순리를 거슬러 급격하고 과격한 정책을 펴는 정부도 문제이지만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잇속만을 탐하려 이합집산하는 시민사회도 과격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의 원형은 선생님의 <한국행정론> 서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자율성이 있는 社會團體의 형성을 주장하는 근본 취지는 官의 권력 남용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하는‘亂動을 불사하는 힘’과의 原色的인 對決을 회피하는 데 있다. … 原色的 對決의 결과는 혼란이며 이런 기회를 이용할 이는 정치면에서 극우와 좌익의 정치 단체들 뿐이다. 官·民 兩者의 원색적 대결을 회피하는 길은 좀더 合理化한 統治行政構造가 官쪽에서, 그리고 自律性 있는 社會集團[가] 民쪽에서 각각 형성되며, 후자에서 전자에 이르는 輿論과 要求의 供給路가 마련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문영 1980: vii).

“과도한 참여”라는 소정 선생님의 비판은 단지 참여정부와 노무현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군사독재처럼 권력을 남용하고 벌거벗은 힘을 휘둘렀다는 것이 아니다. 기회주의 언론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필요없는 말을 해서 불란을 자초하였다. 물론 대개는 “대통령 못해먹겠다”처럼 진의를 왜곡시킨 단장취의斷章取義와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침묵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의도와 다르게 종종 낯설고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시민보다 반 걸음이 아닌 서너 걸음을 앞서 간 죄이다.  

“과도한 참여”는 참여정부와 사회에서 소화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 과도한 요구에 가깝다. 그동안 기득권 세력에 짓눌려온 백성들이 운좋게 건져낸 승리에 도취하여 과욕을 부린 것이다. 선거에서 이긴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뽑아놓은 노무현이 알아서 구악을 청산하고 국민통합 시대를 열어주리라 기대했다. 스스로가 약자이고 대통령조차도 약자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의를 잊고 자기 잇속만을 생각하여 제멋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진보세력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천신만고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어 의욕을 펼치려던 노무현을 앞장서서 괴롭히고 뒤흔들고 물어뜯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유시민씨가 정말 힘들고 아팠던 대목이다. 기득권 세력의 파상 공세와 음흉한 “노무현 왕따” 전략에 진보 언론도 지식인도 넘어갔다. “노무현 욕하기”에 너도 나도 뛰어들었지만 그것이 수구 세력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노무현을 잃고 나서야 그 미련함이 자해행위였음을 깨닫고 “지못미”로 땅을 치고 통곡했다.  

벌거벗은 힘을 가진 上의 포악이 아니라 한마디로 下의 난동이었다. 잇속을 참지 못하고 부당한 요구를 쏟아낸 시민사회의 “과도한 참여”였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이 아닌 좀더 합리화한 統治·行政構造, 그리고 亂動을 不辭하는 힘이 아닌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는 社會集團이 兩者[가] 납득할 만한 관계 형성을 우리가 公開的적으로 볼 수가 있을 때 우리의 行政과 政治는 비로소 제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viii)고 했다.

“강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Strong Democracy (1984)의 저자 Benjamin Barber는 “[T]here can be no strong democratic legitimacy without ongoing talk” (p. 136)라고 말했다. 투표하고 나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다음 선거까지 입닥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끊임없이 토론과정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고 대안을 만들고 선출된 자들이 하는 짓을 잘 관찰하고 꾸짖어야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참여정부의 경우에는 정부의 못된 짓을 캐내어 고발하고 응징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다. 정부가 능력이 부족하고 미숙한 점은 있었다 해도 그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비난과 저주는 전혀 합당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자율성과 책임성을 가지고, 무책임한 요구와 과도한 참여를 자제했어야 했다. 기회주의 언론의 파상공세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이성과 증거에 근거하여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졌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철저한 반성과 참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보어용지식인”이 되자

요즘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가 인기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잘생겨서가 아니고 그가 내세우는 상식과 원칙 때문이다. 노무현씨는 개인의 실패를 아파했고, 그것으로 大義가 훼손되는 것을 못견뎌했다. 그래서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버리라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스스로를 버렸다. 어쩌면 그 자기희생이 광장의 촛불이 되어 상식과 원칙과 꿈을 밝혔는지 모른다. 이제 문재인이다. 참혹했던 지난 8년 세월에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먼저 녹록치 않은 지금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적폐 청산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어쩌면 참여정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유시민씨 말대로 청와대만 바뀌고 언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그대로다. 기득권 세력은 박근혜 최순실의 엽기 변태 행각 때문에 정권을 내줘을 뿐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과도한 요구와 참여를 자제해야 한다. 참고 인내해야 한다. 자신의 잇속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노동조합으로 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당장은 괴롭더라도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기다리면서 얽힌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또한 문재인과 박원순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예컨대, “주적”을 밝히라거나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떼쓰지 말라. 이기적이고 성급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기득권 세력에게 빌미를 주는 과격한 언동이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깨달은 것처럼 분열하지 말고 서로 단결하고, 나만이 아닌 이웃을 배려하고,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한 민주주의는 “진보어용지식인”을 원한다. 권력을 감시한다는 뜻은 비난하라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똑바로 따져서 일을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공정하게 평가하고 정당한 요구를 하라는 뜻이다. 촛불을 응시하던 절실한 눈으로 관찰하고 공부하고  토론하여 지혜를 모으고 힘을 길러야 한다. 촛불을 지키는 “진보어용지식인”과 “진보어용언론인”이 되보자.

참고문헌

박헌명. 2016. 정세균 의장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을까? <최소주의 행정학>  1(10): 1-4.
조기숙. 2012. <문재인이 이긴다>. 서울: 리얼텍스트.
Barber, Benjamin. R. 1984.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진보어용지식인"과 강한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5): 1-3.


전우용 교수가 지난 해 10월 26일 그의 트위터 방(histopian)에서 “노무현은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없앴고, 이명박은 대통령의 도덕성을 없앴으며, 박근혜는 드디어 대통령의 자격기준을 없앴습니다”라고 적었댄다. 참으로 재치있는 독설이다. 한마디로 시체나 금치산자가 아니라면 이젠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촛불민심은 어디로 갔는가?

이른바 “촛불대선” 혹은 “장미대선”이 끝을 향하고 있다. 박근혜씨가 탄핵을 당하여 파면된 후 60일 만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깜깜이 선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후보와 그들의 공약을 꼼꼼하게 검증하기에 너무 짧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60일이 아니라 60년을 줘도 크게 달라질 것같지 않다. 관련 법과 관행은 강자의 편을 들고 시민들의 참여를 최소화하고 있다. 차라리 선거에 관심을 끊고 살라는 뜻으로 읽힌다. 아직도 종북 좌파 소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보자 입에서 나온다. 케케묵은 지역주의과 색깔론(반공)에 찌든 유권자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 방식도 요식행위에 가깝다. 시간을 초단위로 재서 후보별로 “개인기”를 보여주는 학예회 수준이다. 이번에는 규칙을 바꿔가며 토론방법을 달리하고 있지만 후보, 방송사, 시민들 모두 낯설어하고 있다.  

어쨋든 우리는 열흘 안에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이번 선거에 15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역대 대선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전우용교수의 말대로 자격기준이 없어서인지 박근혜 정권에 책임이 있는 자들까지 몰려들었다. “네거티브”가 아닌 정책선거를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말꼬리잡기, 인신공격, 안보장사, 사상검증(종북좌파), 막말로 가고 있다. 똑같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가장 나쁜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촛불민심”은 사라지고 이전투구
泥田鬪狗만 남았다. 아직도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나쁜 구세력들이 원하는 구도다. 혼란을 부추겨 “다 그 놈이 그 놈”을 만드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천만 촛불을 밝힌 시대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벌써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뜻과 고통과 공포와 인내와 열정과 감동을... 가장 나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를 망각하고 당장 민주주의와 평화가 온 것처럼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닌지... 

이문영(1991: 84-103; 1996: 368-390)은 나쁜 정권이 악화되는 단계를 창세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설화에 빗대어 설명했다. 첫째 단계에서 정권은 말을 못하게 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지식인(대학)과 언론인과 종교인을 탄합한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다. 진리를 말하는 혹은 정권이 잘했나 못했나를 판정하는 시민사회를 망가뜨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주권자(신, 모든 권력의 근원)의 명령을 머슴인 정권 패거리(아담과 이브와 뱀)들이 거역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씨는 한국방송공사 정연주씨를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내쫓고 언론사와 방송통신위원회를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웠다. 국가정보원과 군대를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였고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았다. 

둘째 단계에서 정치경쟁자를 죽인다. 퇴임 후에 오히려 큰 지지와 사랑을 받은 노무현씨는 전직대통령은 커녕 일반 피의자만큼도 대우받지 못하고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른바 “친노”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말 그대로 폐족이 되었다. 창세기에서 장자인 카인이 시기심때문에 약자인 동생 아벨을 쳐죽인다. 세째 단계에서 국민 일반이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하고 타락한다. 개인이 나쁜 개인악이 아니라 사회 정치 구조가 나쁜 구조악이 지배한다. 이른바 사회 양극화, “묻지마 범죄”나 “갑질” 등이 구조악을 상징한다. 창세기에서는 신이 홍수를 내려 노아 식구들을 뺀 나머지를 쓸어버린다. 네째 단계는 정부가 전시효과를 노리고 큰 일을 내세운다. 한강 르네상스, 한반도 대운하,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삽질이다. 바벨이란 도시에 세운 탑을 보고 화가 난 신이 인간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것에 비유된다. 마지막 단계는 인접국가가 내정에 간섭할만큼 내부에서 통제력을 상실한다. 창세기에서 신은 구제불능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다. 북한 핵실험, THAAD 도입, 일본군 성노예(위안부가 아니라) 합의,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등은 갈 데까지 간 상황을 보여준다. 
  
후보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뽑아라

중요한 점은 이런 가장 나쁜 상태를 만들고 발전시켜 온 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단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선거가 치러진다는것이다. 박근혜씨와 최순실씨를 비롯한 각종 미꾸라지들이 감옥에 잡혀갔지만 황교안씨를 비롯한 수많은 부역자들이 아직도 건재하다. 이승만씨가 반민특위를 해체한 일이나 박근혜씨가 세월호참사특별위원회를 뭉갠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없는 청와대 압수수색을 방해하고 서둘러 대통령기록물을 지정하여 이관하는 것을 보라.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선거를 덮어 잠재운 솜씨 그대로다. 이번  탄핵사태로 보수(사실은 수구기회주의자들)가 죽었다지만 사실 몇 대 쥐어터지고 몇 군데 멍이 든 정도다.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라고 신이 탄식한 이유가 있다. 이번에도 상상을 벗어나는 “창조선거”를 기획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출마한 후보들이 “촛불민심”을 잊은 듯 서로 앞다투어 선심공약을 남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본다. 혜택을 주고 표를 사는 “돈뿌리기”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한다. “나라를 나라답게”하려면 일자리와 복지 공약보다는 원칙이 되는 큰 그림(생각틀)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박근혜·최순실의 변태정권을 퇴출시킨 촛불민심과 시대정신을 살려내야 한다. 아직도 부역자들은 책임지기는 커녕 개헌타령이나 하고 서민 행복을 말하고 친북좌파의 집권은 막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하루빨리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백성의 뜻에 따라 나쁜 상태를 하나씩 청산해야 한다. 왜곡되고 망가진 시민사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행정에서 합리주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은 후보나 공약이 아니라 우리의 시대정신을 뽑을 때다. 


원문: 박헌명. 2017. 가장 나쁜 상태에서 시대정신 살려내기. <최소주의행정학> 2(4): 1.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하다. 물과 기름처럼 겉과 속이 따로 놀아 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현실에 맞지 않아 거리감을 느낄 때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쩌면 박근혜 최순실 사건 이후 우리가 느끼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이런 것일는지 모른다. 

미국 제도, 일본 관행, 그리고 조선 사람

20년 전 군복무를 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몸뚱아리와 정신줄은 조선 사람인데 일본군의 관행으로 미군의 제도를 운영하려다 보니 이런 저런 탈이 나는 것은 아닌지. 장비는 물론 하다 못해 교본까지도 미군의 그늘 아래에 있다. 군대의 발길에 일본어 잔재가 흔하게 부딪혀 온다. 요즘 더 분명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도 일본인들의 독특함이 있다. 칼 두 자루를 찬 사무라이들이 일반 백성을 내려다 보거나, 혹은 백성들이 사무라이들의 위세에 설설 기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니 토론이래봤자 토론을 흉내내는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쌍방통행은 이론이고 일방통행은 현실이었다.사람과 관행과 제도가 서로 어긋나다 보니 아무리 애써도 어색함과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적고 있다. 공화국은 왕(군주)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주권이 왕이나 특권층이 아닌 백성에게 있다는 뜻이다.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제도를 가진 것은 고작 70년도 되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 왕정에서 살다가 우연찮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의 공화정을 덜컥 들여놓았다. 조선 사람이 미국인에 맞춰 지은 옷을 걸친 셈이니 애초부터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사회 구석구석에 아직까지도 일본 식민지 찌거기가 남아 있다. 와사비山葵(고추냉이)와 무대뽀無鐵砲(무작정)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대통령大統領도 일본어(일본어 번역) 아닌가? 만일 개헌을 한다면, 민주주의는 그렇다 쳐도 당장 “대통령”부터 우리말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아직도 “왕조 정신줄”로 살고 있다

그래서 민주공화국은 신화에 가깝고 현실은 왕조에 가까운지 모른다. 말이 민주공화국이지 아버지 옷마냥 몸에 맞지를 않아 어색하고 불편하다. 어쩌면 처음 옷을 입을 때 느끼는 낯섦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그런… 하지만 70년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 주위에서 관찰하는 것은 공화정보다는 왕정의 모습이다. 중국에서도 하는 투표는 껍데기일 뿐이다. 서구(미국)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화려하고 멋있기는 하나 여전히 코쟁이의 옷처럼 커보인다. 

근 오백 년을 이어온 조선왕조가 문을 닫고, 36년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운좋게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백성들의 “왕조 정신줄”은 여전하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씨를  국부國父라 했고 프란체스카씨를 국모國母라 불렀다. 육영수씨는 마지막 가는 길을 소복입는 백성들이 배웅했던 국모였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모습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씨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부의 반열에 올랐다. 백성들이 스스로 뽑아 임명하는 대통령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임금을 정서상 더 친근하게 생각했다. 민주주를 기치旗幟로 내건 국민의 정부의 김대중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음은 이문영(2008: 529)이 적은 김대중씨 일화다. 

“신년 초에 누군가가 불러서 청와대에 갔다. 대통령의 친인척이랑 늘 보던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 대통령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를 별실로 인도했다. 내가 제일 앞에 서서 들어갔다. 멀리 대통령 내외가 앉아 있고 마루에는 긴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나는 이 화문석을 정중히 밟고 들어가 두 내외분과 악수를 했다. 두 분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수를 나눈 후 뒤돌아 나오면서 보니 내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화문석에 부복(俯伏)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배를 했던 것이다. 의외의 구경이었다.”

최근 파면을 당하고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근혜씨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같은 정치인보다는 여왕(선거 여왕)과 공주 (수첩 공주, 유신 공주, 변기 공주 등) 칭호로 호사를 누렸다. 박씨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조선왕조의 이씨처럼 왕족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육영수씨 사후에는 사실상 국모로 살았다. 박근혜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궁궐에서 쫓겨나 사저에서 눈물로 지새는 여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격”이라거나 “산발로 포승줄에 묶여 감옥 가는 것”이라는 김진태씨 표현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정신줄은 아직 15세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이명박씨의 왕놀이

지금까지 지도자가 된 자들의 정신줄도 사실상 왕정이다. 노무현씨는 그의 이력만큼이나 예외에 가깝다. 특히 이명박씨나 박근혜씨는 생각없이 왕놀이를 하다가 일을 크게 그르친 경우다. 왕은 모든 것을 소유했다. 자신이 국가이고 국가가 곧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공公이자 사私이기 때문에 공사 구분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존재였다. 왕은 말을 할 뿐 백성에게 묻지 않는다. 어명御名은 그저 받들어 시행해야 하는 것이지 따지고 비판할 대상이 아니다. 왕의 언행에 감히 토를 다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빨갱이든, 좌익이든, 종북이든 닥치는 대로 낙인을 찍어 응징을 해야 하는 중범죄였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무관하게 이명박씨는 대놓고 대통령질보다는 사장질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장사꾼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주권자인 백성들은 “이명박 사장”에게 고용된 회사원이 아니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멋대로 밀어붙이던 이씨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을 시작으로 용산 철거민 참사, 민간인 사찰,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 등 주옥같은 정치·군사·외교 업적을 남겼다. “명박산성”은 임금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식 장사치의 정치무능이 빚은 참극이었다. 한편 백성 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사업과 자원외교를 강행하여 기어코 수십 조 국고를 탕진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퍼주기를 했다면서 저주를 쏟아냈지만 정작 본인은 나라의 재물을 제 것인양 물쓰듯 했다. 이명박씨 손을 거쳐간 회사와 조직의 말로末路가 어쩌면 이리 똑같은지…

박근혜씨의 창조군주론

박근혜씨는 한 술 더 떠서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군주론을 창조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범죄 혐의만 보더라도 엽기 그 자체다. 박근혜 왕조에서 권력 서열 1위는 박근혜가 아니었다. 이른바 비선실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최순실이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이치라고나 할까? 왕조에서 왕이 아닌 자가 감쪽같이 왕노릇을 했으니 <최선생님, 왕이 된 여자>라도 찍었다고 해야 하나? 선거로 뽑아놓은 대통령은 집구석에서 뭉개다가 가끔씩 올림머리를 하고 나와서 써준 글이나 생각없이 읽었고, “공항장애”로 고생하고 심신이 “회폐”한 아줌마가 대통령질을 하면서 옷갖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홍준표식으로 말하자면 춘향이로 뽑아놨더니만 허접한 향단이가 설친 셈이다. 박관천씨의 증언이 아니어도 일이 진행된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박씨는 최씨의 꼭두각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옷입는 것도 태반 주사나 백옥 주사를 맞는 것도 박씨가 간여干與했다. 기업에게 돈을 뜯어내고 민간기업의 인사까지 주무르고 권력을 휘둘러 깔끔하게 마무리(증거인멸과 입단속)하는 솜씨가 참으로 경탄스럽다. 

박근혜씨 본인은 위엄있고 고상하고 정의롭고 인자한 군주였다고 생각했고, 또 지금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헌법 자체이자 법 위의 존재가 어찌 검찰의 조사를 용납한단 말인가. 모두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고, “최선생님"의 일은 전혀 몰랐으며, 1원 한 푼 안받았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 아닌가. 노처녀로서 쪽팔리지만 바이아그라까지 챙겨먹었고 얼굴이 붓고 아파도 기꺼이 미용시술까지 감수하면서 국정은 물론 일개 회사와 개인의 일까지 꼼꼼하게 챙긴 대가가 고작 탄핵이고 구속영장이란 말인가. 만고의 충신인 이정현 윤상현 김진태 등이 반정에 성공하여 용상에 복귀하는 즉시 “좌빨” 역도들을 의금부에 잡아다가 요절을 내버리고 삼족은 물론 구족까지 멸하리라. 주먹을 불끈 쥐고 아버지 박정희 영정 앞에 울먹이며 이렇게 맹세하지 않았을까? 왜냐고? 군주를 능멸한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자들을 어찌 살려둘 수 있단 말인가?

박근혜씨는 그동안 본인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추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려했다. 걸핏하면 대통령의 권위를 내세웠지만 사생활에 관한 한 연약한 여자의 신비주의로 얼버무렸다. 백성들이 뽑은 것이 지도자가 아니라 여자였단 말인가? 노무현씨와는 전혀 다르게 박씨는 언론 접촉도 꺼렸고, 소수 “친박”을 제외한 정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관들의 대면보고도 대부분 서면보고로 대치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조차도 서면보고했다고 국가안보실장이 진술했다.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조윤선씨도 박씨와 독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쯤되면 선호나 습관이 아니라 병이다.

이런 박근혜씨의 행태는 일단은 본인의 처참한 약점을 감추려는 본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리분별이 희미하고, 이해와 분석 능력이 약하고, 상대방과 감성과 이성으로 대화할 능력이 빈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궁여지책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체성이다. 특히 왕족과 군주라는 집착과 망상이다. 햄버거도 포크와 나이프가 있어야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왕의 사생활을 들추거나 왕에게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군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감히 임금과 맞먹는단 말인가?

한마디로 간신과 환관이 활개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이른바 문고리 삼인방이나 윤전추 이영선씨 등이 박씨를 에워싸고 그들만의 왕조를 건설했다. 청와대는 세상을 등진 궁궐이 되었고, 세월호 참사든 촛불집회든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모두 역적들의 궁상(예컨대, 시체장사나 거지근성)으로 치부 되었다. 군주는 품위유지를 위해 세상사 일에 대해 시시콜콜 말하지 않았다(세상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따지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었는지 모른다). 결국 박근혜씨는, 왕이 교지敎旨를 내리듯, 자기가 준비한 혹은 누군가가 써준 것을 들고 나와 읽고 들어가 버리는 방식을 탄핵당할 때까지 고집했다. 아직도 간신배와 광신도같은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서 꿈을 꾸면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조직개편과 이름 장난질 

과거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부조직을 개편한다고 난리를 쳤다. 모두 거창한 목적과 기대효과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관료제를 길들이고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다. 역대 실력자들이 정부조직을 백성들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권자의 소유물인 관료제를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군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찟고 째고 한 것이다. 물론 합리성에 근거한 조직 개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정략일 뿐이었다. 

이명박씨는 노무현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폐지하고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를 해체했다. 그 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 등 대책없이 얻어터진 뒤에서야 박근혜씨가 국가안보실과 해양수산부를 부활시켰다. 결국은 노무현으로 돌아간 셈이다. 박씨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책임을 묻는다며 눈물찍으며 해양경찰청을 해산했지만 잠시 얼떨떨했던 백성들은 해양경찰청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왕이야 조직을 이리 째고 저리 붙이는 재미가 솔솔하겠지만 해당 공무원들은 죽을 맛이다.
1)

이명박씨는 “저탄소”와 “녹색성장”를 좋아해서 부서와 공공사업 이름에 넣었다. 정부에서 돈푼깨나 받으려면 두 단어를 넣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정권이 끝나자 탄소와 녹색은 봄눈녹듯 사라졌다. 박근혜씨는 “창조”와 “미래”를 좋아해서 정권의 비전도 “창조 경제”로 내세웠다. 부처이름도 “미래창조과학부”로 했다. 영문 이름은 Ministry of Science, ICT, and Future Planning이다. Creative는 아예 빠져 있고 생뚱맞게 ICT가 들어가 있다. 과학과 정보기술은 업무에 보이지만 미래 설계나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이름이 바뀔 것이 확실한데 도대체 뭐하러 바꾼 것일까? 또 안전을 강조한다면서 2013년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꾸었다. 안전을 앞에다 놓으면 국가가 안전해지나? 무책임한 이름짓기 놀이에 혈세만 낭비했다.

사람, 관행, 제도가 어울려야 

이런 해괴駭怪한 짓거리들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닌 왕국의 군주라는 정신줄에서 생겨난다. 공직과 정부관료제를 사유물로 생각한 결과다. 제도가 사람과 관행과 서로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개헌 논의가 무성한데,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만 있지 정작 주권자인 백성들의 의견은 빠져있는 것같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개헌안이 좋은지는 의미없는 질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주권자들이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일이다. 그동안 몸이 어찌 변했는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어디가 얼마나 불편한지, 옷에 익숙해지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스스로를 잘 살펴서 몸에 맞는 제도를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과 성실하게 제도를 실천하면서 문제를 조정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끝주

1) 어느 국장은 부처 이름이라도 바뀌면 얼마나 비용과 노력과 시간이 드는지 아느냐며 푸념했다. 하다 못해 명함부터 시작해서 명패, 간판, 상징물, 문서, 법령 등을 바꿔야 하고 정보시스템 내의 각종 이름을 바꿔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7. 민주공화국에서 왕놀이하기: 창조군주론. <최소주의행정학> 2(3): 1-2.



김동환의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2019. 4. 8. 00:12 | Posted by 못골

김동환(2016)은 이명박 정권 말기부터 나라를 휩쓸고 있는 “빅데이터” 광풍을 유행이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데이터” 라는 유행이 1990년대의 “정보,” 2000년대의 “콘텐츠”와 “사이버 공간,” 2010년대의 “스마트”를 거쳐서, 30년 만에 다시 “빅”이라는 접두사를 달고 돌아왔다는 것이다(41-42쪽). 빅데이터는 아무리 커도 데이터일 뿐인데 호사가들이 “그럴듯한 신화”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미혹迷惑시키고 있다고 했다(155-158쪽).

빅데이터라는 유행의 구조

이러한 “지적 유행”은 그 바닥에 여유자원이 넉넉하고, 그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는 판(기회)이 벌어져야 하고, 진리를 모르거나 회피하는 열악한 지식 풍토가 있어야 가능하다(113-114쪽). 도박으로 치면 뭉치돈을 대주는(잃어주는) 호구, 도박판을 벌여주는 하우스 운영자와 돈을 챙기는 타짜, 타짜와 호구를 엮어주는 바람잡이에 비유된다(115쪽). 빅데이터 광풍으로 치면 각각 눈먼 정부예산, 빅데이터 관련 업체와 정부, 그리고 빅데이터 옹호자와 침묵하는 지식인에 해당한다(115-116쪽). 빅데이터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침묵하는 타락한 지식인이 바람잡이다(15-17쪽). 이와같이 정부, 빅데이터 업체, 타락한 지식인이 쇠같이 단단한 삼각관계를 이루어 광풍을 주도한다고 저자는 분석했다(115-119쪽).  

빅데이터에 대한 환상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사업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관련 업체와 바람잡이 지식인들은 분석할 빅데이터가 부족하다며 정부에게 빅데이터 포털을 통해 공공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한다(77쪽).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빅데이터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마어마하게 생산되는 빅데이터를 이용하려고 시작한 사업이 빅데이터가 없어서 실패한다는 모순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Ouroboros를 보는 듯하다(146-147쪽). 또한 빅데이터 전문가가 부족한 탓이라며 전문가 양성 교육을 강화하라고 정부에 요구한다(75-77쪽). 결국 빅데이터 호사가들은 반성은 커녕 책임을 떠넘기며 끊임없이 전문가 교육, 공공 정보 공개 등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자가발전을 꾀한다. “정부는 빅데이터에 돈을 대는 것도 모자라, 또 빅데이터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욕을 먹는다”(81쪽). 
  
흔히 빅데이터 유행의 근거로 Nature에 발표된 Ginsberg et al. (2009)이 거론되는데, 사실 이 논문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사용하여 독감 의심 환자 비율을 추정(estimation)한 것이지 예측(prediction)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89-90쪽). 몇 년 후 Butler (2013)는 구글의 독감환자 추정치는 질병예방통제국(CDC)의 결과와 차이가 큰 경우가 있었다고 보고했다(94쪽). 이에 비해 소수 참여자들의 정보를 분석한 Brownstein의 독감추적 프로그램은 질병예방통제국의 추정치와 가까왔다(96쪽). 말하자면 빅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주장이 허구이며 환상이며 망상이다(158-159쪽). “과거에 대한 측정과 추론을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159쪽). 미국의 빅데이터 유행도 좋은 물건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는 단순히 주가를 올려 이익을 챙기려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와 정부의 투자에 편승했다고 보았다(129-135쪽).

말이 빅데이터지 사실은 Facebook, Twitter, 카카오톡 등에 담겨진 문자정보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런 잡담을 긁어모아 분석한다 한들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40쪽). 저자는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재난이나 범죄를 예방한다는 대목에서 특히 절망스러워했다(56쪽).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데이터를 분석할 것이 아니라 즉시 출동해야 할 일 아닌가?(48쪽) 빅데이터를 분석한다 한들 산사태와 눈사태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어떻게 예측한단 말인가?(49-50쪽).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문장은 이것이다. “주민들이 위험하다고 신고할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행정체제만 유지되더라도 대단한 것이다. … 그저 평소에 침수 위험 지역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재난 행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0쪽).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한 최소주의 행정학이다.

한국에 쓸만한 자료가 있던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고 나는 바로 반응을 했다. 한국에 (쓸만한) 공공 자료가 있던가? 잘 측정되고 정리된 보통 자료도 구경하기도 힘들 지경인데 무슨 빅데이터인가라고 반문했다. 백성들이 원하는 정보를 알차게 담고 있는 공공 자료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공공기관의 문서와 자료가 적절한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희망사항에 가깝지 않았던가? 투박한 자료조각을 찢고 째고 오리고 붙이고 한바탕 난리를 쳐야 그나마 좀 쓸모있게 보이지 않았던가? 경험에서 얻은 상식이다. 그런 자료일망정 정부에서 문서와 자료를 얻는 일이 그 자체로 얼마나 어려운가? 애초부터 분석을 하지 못하게 끔 작정을 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자료를 가공하고 감질나게 찔끔찔끔 민간에 흘리면서 생색이나 낸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속편하다. 그럴 때마다 연구자는 절벽 앞에 선 심정인 것은 나만의 경험인가? 그런데 빅데이터라니… 생뚱맞다고 해야 할까? 그냥 하던 일이나,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미국 공공기관의 자료에 관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어느날 미국인 대학원생이 CD-ROM 하나를 들고 내게 찾아와서 어떻게 이 자료를 SAS로 읽어서 분석할지를 물어 왔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의 질환에 관한 자세한 자료가 고정길이 형식(fixed format)의 문자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 관측치 수(N)는 물론이려니와 변수도 많아서 컴퓨터가 힘들어 할 만큼 SAS 자료파일이 매우 컸다. 다른 자료분석 프로그램은 아마도 읽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료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 도대체 이 나라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미국에서 어지간한 정부 문서와 자료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내용이 적절하고 알차며, 형식도 손질이 잘 되어 있다. 한국 정부의 웹집(Web site)은 휘황찬란해도 자료를 얻기 불편하고 마땅히 얻어갈 것이 없다. 반면 미국 정부의 웹집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능에 충실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당장 미국 감사원(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웹집에 가보라. 또한 General Social Survey (GSS)와 Current Population Survey (CPS)같은 공공 자료가 많은 연구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수퍼컴퓨터 네트웍을 통해 전국에 있는 자료(예컨대, CDC 자료)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 유용한 분석도구를 제공한다. 이른바 grid computing으로 data grid 를 실현하고 있다. 주요 기관에 분산되어 저장된 대용량 자료를 효율성있게 활용하는 체제다. 

미국은 “빅데이터”가 유행하기 전에 이미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쌓아놓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자가 비판하는 행태주의와 거대주의의 소산물이 아니라 합리성을 추구하는 관료제에서 한 축이 되는 문서주의가 이뤄낸 결과물이다. 거대한 자료보다도 정보관리 체계가 부럽다. 어쩌면 20세기 이후 한국의 정보관리 수준은 15세기 조선왕조를 따라가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책에서 묘사된 “빅데이터 중독”은 생각한 것보다 정도가 심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랏돈을 뿌려대며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형국이다. 소문은 무성하고 정부 사업은 요란한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쓸모있는 자료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대한민국 빅데이터”의 현주소다. 한국의 빅데이터 현상은 반성과 비판없이 미국에서 베껴온 것이며, 실제 국민이 필요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여 판을 벌렸다는 김교수 지적 그대로다(111쪽). 끝장을 보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폭주기관차라고나 할까? 한번쯤은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자문해볼 법도 한데 말이다.

빅데이터는 자료인가, 기술인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빅데이터”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이다. 2011년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에서 발행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스마트 정부 구현(안)>에 의하면 빅데이터는 “대용량 데이터를 활용, 분석하여 가치있는 정보를 추출하고, 생성된 지식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대응하거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정보화 기술”이다(38쪽). 한글 위키피디아에는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도구의 능력을 넘어서는 대량(수십 테라바이트)의 정형 또는 심지어 데이터베이스형태가 아닌 비정형의 데이터 집합조차 포함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라고 되어 있다. 빅데이터가 데이터가 아니라 “기술”이라는 얘기다. 데이터가 커지면 더이상 데이터가 아니라 “기술”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한다는 말인가? 납득하기 어려운 정의다. 빅데이터 사업의 지지부진이 큰 데이터가 없어서라는 변명이 분석 “기술”은 있는데 분석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술邪術로 들리는 까닭이다.

미국에서 빅데이터는 어쨋거나 “자료”다. Laney (2001)는 전자상거래에서 자료관리 문제가 세가지 차원에서 폭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빅데이터는 깊이와 폭이 큰 자료(high volume)이고, 자료가 빠르게 생성되고(high velocity),  형식과 구조가 다양한 자료(high diversity)다. Wikipedia에는 너무 크고 복잡해서 기존의 자료처리방법으로는 요리하기 어려운 자료집(data sets)이라고 적혀있다. 빅데이터 업체라 할 수 있는 SAS와 IBM도 규모가 크고, 대량으로 발생하고, 다양한 형식을 가진 자료라고 정의하고 있다. 상식에 맞고 현실성이 있는 정의이다. 

어쩌면 비약으로 들릴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자정부에 관한 정의도 비슷하다. 2001년에 제정된 한국 전자정부법 제 2조는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행정기관 및 공공기관…의 업무를 전자화하여 행정기관등의 상호 간의 행정업무 및 국민에 대한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정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2002년 제정된 미국 전자정부법 Section 3601에는 정부가 웹기반의 인터넷과 정보기술을 이용하는 것(“the use of the Government of [W]eb-based Internet applications and other information technologies”)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의 전자정부가 당위나 신화에 가깝다면 미국의 전자정부는 상식과 현실에 가깝다. 어느 정부나 한국에서 정의한 전자정부를 꿈꾸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정의에 꼭맞는 전자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부터 한국의 전자정부는 현실과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현재 3.0으로 진화하면서 “그들만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전자정부 2.0이든 3.0이든 “이명박근혜 정부”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무엇이 빅데이터인가?

빅데이터는 주로 (1) 디지탈 거래자료 (예컨대, 신용카드 사용내역), (2) 감시카메라, 인공위성 등에서 얻은 사진과 영상 자료(예컨대, CCTV와 remote sensing), (3) 이동통신 자료(예컨대, 교통카드, 무선결재, 무선전화 사용 자료), (4) 사회매체(social media)에서 발생된 자료 (예컨대, Facebook, Blog, Youtube, )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주요 관심은 특별히 사회매체의 한 종류인 사회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에서 일어나는 대화나 인터넷 정보(뉴스 기사)다. (1)과 (3)은 기존의 방법대로 일정한 형식으로 잘 정리된 자료인데 관측치 수만 매우 크고 계속 생산된다는 특징이 있다. (2)는 그림이나 영상 자료라는 특성이 있다. Facebook, Twitter, Skype, 카카오톡 등에는 문자정보 뿐만 아니라 사진, 동영상, 음성, 이진파일과 같은 비문자 정보가 담겨있다. 하지만 비문자정보는 분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빅데이터 분석은 사실상 문자정보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사진과 동영상을 분석하여 지하철의 혼잡도를 측정하고 특정한 사람들의 행위(예컨대, 테러)를 판별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빅데이터의 대표성은 있는가? 

빅데이터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전체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용카드나 교통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빅데이터에서 빠진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거나 시골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 역시 제외된다. 인터넷이나 사회망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도 빅데이터는 담고 있지 않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망서비스에서 글을 남기고 대화에 참여하는가? 

한국 시민들의 참여도는 높은 편이지만 그래도 웹마실(Web surfing)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눈요기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아무나 블로그를 시작할 수 있지만 좋은 블로거가 되기는 쉽지 않다. 소위 파워 블로거는 교육을 많이 받고 지식과 능력을 가진 교수, 언론인, 변호사들이다(Hindman 2009). 결국 빅데이터는 이런 소수 엘리트나 적극 참여자의 말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대표성을 가지기 어렵다. 
또한 이름을 가리고(익명으로), 돈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칼의 양날과 같다. 웹이 등장하기 전에는 의사표시를 하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화의 품격과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른바 “구글세대(Generation Google)”에서 피하기 어려운 가상공간의 시궁창(cyber-cesspool)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사회매체를 남용하며 그 폐해弊害를 관리하기가 어려운지를 보여준다(Levmore and Nussabaum 2010).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회매체를 선하게 사용하여 유용성과 즐거움을 얻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사회의 일부 조각을 반영하는 빅데이터와 과장, 왜곡, 조작 등으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빅데이터를 분석한다면 그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가 될 것이다. 아무리 수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엄청난 기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분석결과는 현실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 있다. 일단 쓰레기가 들어가면 수퍼컴퓨터이라 한들 쓰레기를 토해낼 수밖에 없다(garbage in, garbage out). 자료를 기반으로(data-driven) 하는 방법론의 숙명이다. 이런 빅데이터라면 아무리 규모가 크다 한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확실하게 틀린 결과를 내놓을 뿐이다. 시민들이 사고가 난 현장의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어서 Facebook에 올린 사진을 보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과 가상공간의 시궁창에서 벌어지는 싸구려 잡담을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아무리 사례나 관측치 수가 크다 해도 말이다.

빅데이터는 얼마나 커야 하나?

빅데이터는 덩치가 크고 다양한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기존에 자료를 저장하고, 손질하고,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빅데이터라는 식이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다. 기존의 방법으로 빅데이터를 적절하게 처리할 수 없다면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기존 방법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웹이 출현하던 90년대 이전의 방법인가?

먼저 얼마나 커야 빅데이터인가? 관측치수가 몇 개면 되는가? 1억 개면 족한가? 변수가 몇 개쯤 되어야 하나? 저장공간은 어떠한가? 1 Peta (1,024 Tera) 바이트면 되는가? 올해는 Peta 바이트면 되고 내년에는 Zeta (1,024 Peta) 바이트면 만족하겠는가? 이런 식이면 20년 전에도 빅데이터는 존재했을 것이고 그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 수십만 개 관측치와 변수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Giga (1,024 Mega) 바이트는 꿈같은 크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20 Mega 바이트 하드디스크를 보고 나는 얼마나 감동을 했던가?   
  
누구한테 큰 데이터인가? 

사실 데이터가 큰지 아닌지, 복잡한지 아닌지는 연구자의 처리 능력과 기술에 따라 다르다. 누구에게 크고 복잡한 데이터냐가 중요하다. 관측치가 10개라면 유치원생에게는 버거운 크기일 테지만 중학생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몇 백 개는 대학생에게 만만하겠지만 몇 십만 개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만 개는 유치원생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다. 몇년 전에 한 학생이 천만 개도 넘는 어마어마한 거래정보라며 들고 왔다. (1)번 빅데이터인 디지탈 거래자료였다. 자료처리 능력이 부족한 그 학생에게 몇 Tera 바이트는 “수퍼 빅데이터”였을 테지만, 내게는 “껌값”은 아니어도 랩탑에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그냥 그렇고 그런 자료일 뿐이었다. 아는 사람은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불가능이자 기적이자 충격이다.  

어쩌면 빅데이터라며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은 정작 자료가 무엇인지, 어찌 분석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지 모른다. 실제 자료를 손질하거나 요리해 본 경험이 없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칼로 무를 써는 것만 봐도 황홀해하며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는 위인들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빅데이터 드라마를 쓰고 신화를 만드는지 모른다. 자료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빅데이터라는 “연기”를 그럴듯하게 해서 사람들을 호려먹는 부류는 아닐는지... 천만 개가 넘는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감탄하며 경이롭게 바라보던 그 학생의 얼굴과 빅데이터를 팔고 다니는 바람잡이나 장사꾼들의 얼굴이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럼 수퍼컴퓨터면 되겠니?

자료처리에 관한 지식과는 별개로 실제 자료를 처리할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따져보자. 컴퓨팅 파워를 생각해 보자. 빅데이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하다니 컴퓨팅 파워가 가장 빠르다는 수퍼컴퓨터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수퍼컴퓨터는 어떤 절대 컴퓨팅 파워 이상을 가진 컴퓨터가 아니라 https://top500.org/에 6개월에 한 번씩 발표되는 목록에 나와 있는 컴퓨터를 말한다. 작년 11월 기준 세계 최고 컴퓨터인 중국의 Sunway TaihuLight는 CPU라 할 수 있는 core가 1천만 개, 주메모리로 1.3 Peta 바이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컴퓨터로 처리해야 하는 자료라면 충분히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랩탑으로도 충분히 분석할 수 있는 자료라면 빅데이터라고 하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그렇다면 빅데이터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컴퓨팅 파워를 가진 수퍼컴퓨터 사용자란 말인가? 과연 몇 명이나 수퍼컴퓨터를 사용해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는가?

그러면 대한민국은 현재 얼마나 컴퓨팅 파워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 한국 기상청에서 가지고 있는 Cray사의 Nuri와 Miri 각각 46등과 47등(1년 전에는 28, 29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core가 똑같이 7만 개다. 날씨 예측을 잘못한다고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그 컴퓨터다(사실 컴퓨터가 무슨 죄가 있나?). 그리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의 iREMB가 351등 (만 4천 core), 어느  제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가 404등(만 6천 core)이다. 고작 이 네 대 뿐이다. 서울대학교의 천둥(2012년 기준 277등, 8천 core)은 벌써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수퍼컴퓨터가 아니라는 소리다. 

현재 미국, 중국, 일본이 수퍼컴퓨팅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1등과 2등을, 일본은 6등과 7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10위 밖에도 두 나라의 수퍼컴퓨터는 즐비하다. 물론 미국은 1, 2등을 놓쳤지만 누가 뭐래도 수퍼컴퓨팅을 주도하고 있다. 빅데이터가 정말 크고 복잡한 데이터라면 한국은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 앞에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다윗과 골리앗 차이 그 이상이다. 수퍼컴퓨터로 치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보다도 못하다. 한국에 아무리 큰 빅데이터가 있다 해도 현재 담아서 처리할 만한 컴퓨팅 파워는 허망하리만치 초라하다. 무역 10대 강국에 전혀 걸맞지 않은 허접한 수준이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빅데이터 옹호자와 정부는 데이터가 엄청 크다고만 하고 수퍼컴퓨터를 새로 사거나 만들자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3살박이 아이에게 하늘이 얼마나 큰지, 눈이 얼마나 오는지, 기차가 얼마나 긴지, 아버지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우동을 얼마나 먹을지 차이가 없다. 똑같이 두 팔을 찢어지도록 벌리고 입으로 “이—만큼 많—이”라고 답할 뿐이다. 

빅데이터 전용 분석법이 있나?

그러면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별도 방법이 있는가? 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방법론을 적용하되 일반 사용자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방법을 개선하고 시각화를 강조하는 듯하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열린 SAS사용자 학회에 참석했을 때 SAS가 내세웠던 JMP (http://jmp.com)가 그러했다. 마우스로 꾹꾹 눌러서 원하는 분석 결과를 바로 알려주고 그래프로 표시해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발표자는 이제 더 이상 통계분석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벌써 지금 빅데이터 옹호자들이 하고 있는 얘기를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현란한 화면 뒤편에서 실제 이루어지는 분석은 기존의 통계기법일 뿐이다. 회귀분석이든 분산분석이든 T-test든 방법론은 그대로이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다를 뿐이다. 

현재 미국에서 Data Science 혹은 (Data) Analytics라는 이름으로 학위 프로그램이나 학과가 생기고 있다. 모두 Big Data를 염두念頭에 두고 시류를 쫓고 있다. 예컨대, 인디애나 대학교는 몇 년 전부터 School of Informatics and Computing (https://www.soic.indiana.edu)에서 Master of Science in Data Science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교과과정은 기존의 Computer Science, Informaiton and Library Science, Informatics 과목에 더하여 통계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계학은 Introduction to Statistics, Exploratory Data Analysis, Statistical Learning and High-Deminsional Data Analysis, Baysian Theory and Data Analysis, Applied Linear Models, Reproducible Results in Stats, Topics in Applied Statistics 등이다. 과목 이름을 자세히 살펴 보라. 컴퓨터과학, 사회정보학(informatics), 통계학 등이 잘 결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빅데이터 학위 프로그램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빅데이터용 회귀분석”같은 과목이 없다. 기존 과목을 기존 교수진이 가르치고 있다. 같은 포도주를 예쁘장한 새 잔에 담은 셈이다.

요즘 방송 출연자들이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라며 그래프를 가져와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기억컨대, 사회망서비스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단위로 빈도분석(frequency analysis)하여 추세를 따져보는 것이 전부였다. 방법론으로 치면 기초 수준의 분석방법이다. 관측치 수가 크고 멋진 그래프로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 외에 뭐가 새롭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과관계냐 상관관계냐?

저자는 빅데이터가 상관관계를 말해줄 뿐이며 기존의 “스몰데이터”는 인과관계를 말해준다고 했다(99-100쪽). 그래서 상관관계를 말해주는 빅데이터가 “스몰데이터”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사실 공정하지 못하다. 빅데이터이든 스몰데이터든 분석방법이 다르지 않다면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회귀분석(혹은 이런 류의 계량분석)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밝혀주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회귀분석은 처음부터 인과관계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 결국 상관관계를 말해줄 뿐인데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해석할 뿐이다. 빅데이터든 스몰데이터든 마찬가지다.  

변수 사이의 인과관계는 분석방법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어떻게 자료가 발생되는가(data generation process, DGP) 혹은 변수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등을 따져서 설정해주는 것이다(김수영 2016: 24). 연구자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어야 하는 큰 그림(분석틀)에 관한 문제다.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이론에 관한 문제다. 결코 빅데이터냐 스몰데이터냐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이다.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고 그 가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 이론이 없이 데이터를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154쪽). 

요즘 통계분석기법과 컴퓨팅 성능이 고도로 발달했다 해도 컴퓨터가 알아서 데이터를 분석해서 원하는 결과를 내주지 못한다. 이렇게 데이터에서 그럴듯한 변수관계나 모델을 끌어내는 낚시질(data fishing)은 유희遊戲일는지는 몰라도 과학은 아니다. 하물며 분석결과를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일임에랴. 

항상 큰 것이 좋은가?

N(관측치 수)으로 치자면 빅데이터가 꼭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자료를 설명할 때는(descriptive statistics) N이 큰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분석모형을 통하여 통계추론을 할 때는(inferential statistics)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분석모형에서 일정한 효과크기(effect size)와 통계증거력(statistical power)이 주어지면 적정한 표본크기(sample size)가 결정된다. N이 지나치게 크면 통계증거력이 너무 커서 분석할 필요성이 사라지고(의미없는 분석이 되고), N이 지나치게 적으면 신뢰성이 떨어지게 된다. N이 크면 클수록 좋다며 빅데이터를 찬양하는 것은 단지 무지거나 착각이거나 미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표성을 가진 랜덤샘플을 뽑을 것이가와 분석모형에 따라 적정한 샘플수를 결정하는 일이다. 빅데이터는 이런 랜덤샘플링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예컨대, 빅데이터가 사회매체에서 얻은 대화나 반응에 의존하는 한 자기선택(self-selection)문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빅데이터가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 빅데이터의 정신줄은 한마디로 N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덩치 큰 N으로 문외한門外漢인 청중을 윽박질러(압도하여) 자신이 원하는 (진리와 상관없는) 주장을 강요하기에 딱 알맞는 주술呪術이다.  

빅데이터와 개인정보보호

“빅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빅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빅데이터가 부족하니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국민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없다고 말이다”(80쪽). 저자의 비판은 세 가지다. 하나는 빅데이터가 없어서 빅데이터 산업 부흥이 안되니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국민 정보를 공개하라는 논리 모순이다. 빅데이터 산업의 실패를 빅데이터가 아니라 공공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는 술수라는 것이다(81쪽). 또한 공공데이터 포털을 만들어 국민들의 비밀스러운 개인정보를 무방비 상태로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다고 우려한다(77-78쪽). 마지막으로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라는 것도 미봉책彌縫策이어서 “비식별 조치된” 개인정보 조각 조각을 끼워맞추면 재식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재식별도 못하는 빅데이터 분석 기술이라면 모든 개인 정보를 다 공개한다 한들 쓸모있는 분석을 할 수 없을테니(줘도 못먹을 테니) 공공 정보를 공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앞뒤가 안맞는 주장이다(80-81쪽).    

이런 비판을 곱씹으며 몇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빅데이터를 그때 그때 편리한 대로 둘러댄다는 느낌이다. 보통은 사회매체에서 벌어지는 대화처럼 손질되지 않은 자료를 말하다가 정부의 공공 정보를 요구할 때는 잘 손질되거나 (1)과 (3)과 같이 덩치가 큰 자료를 지칭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매체에서 쓸만한 것을 건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의 정보를 담은 공공데이타베이스를 공개하라고 다른 과녁으로 화살을 돌렸을는지 모른다. 

저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공공데이터 포털은 다행히(?) 그냥 시늉내기에 머물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은밀한 정보도, 의미있는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자료도, 분석에 유용한 형태로 손질된 자료도 찾기 어렵다. 생색을 낼 뿐이다. 쉽게 말해 http://data.go.kr은 http://data.gov를 껍데기만 베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어찌 해서 그럴듯한 웹집을 만들기는 했는데, 수십 년 치 자료를 한꺼번에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해오던 자료축적 수준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의미없는 국가단위 통계, 제공 주체에 따라 띄엄띄엄 올려진 자료... 자료를 사용하라고 공개한 것인지, 사용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소리인지 알쏭달쏭하다. 게다가 웹표준과 웹접근성(Web accessibility)과도 거리가 있어 한글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용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하다. 표준도 지키지 않고 여기 저기에 자바스크립(javascript)을 덕지덕지 발라놨으니 말이다. 설령 국가기밀을 수두룩하게 올려놓았다 해도 멀쩡한 외국인이 빼가기 힘든 상황이다. 전자정부 3.0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료보안에 각별히 심혈을 쏟은 것같다. 누가 되었든지 간에 쓸모있는 정보를 캐내기 어렵게 해놨으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 할는지... 그러니 김교수는 안심하고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시기 바란다. 

한편 개인정보는 자료수집부터 저장, 수정, 사용(접근, 전달, 분석 등), 폐기 전 과정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감출 게 없으면 상관없다”는 논리(nothing-to-hide argument)는 자료를 수집하는데만 시선을 돌림으로써 자료처리 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Solove 2011). 예컨대,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는 위험할 것 같지 않은 자료 조각을 붙이면 “재식별”이 가능하다. Solove (2011)는 이런 과정을 aggregation이라고 불렀다.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식별정보를 지우거나 일부 자료만 공개하는 자료보안 기법은 빠르게 진화하는 자료 분석 기술에 무력하다. 

마지막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그래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법에서 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개인 정보가 수집되고 저장되고 수정(공개)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느냐가 중요하다. 개개인이 자신의 정보가 어찌 처리되는지 전 과정을 지켜보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개인 정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개인정보 문제에 관하여 국회와 사법부가 어떻게 행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지를 따지는 문제이다.  
  
행태주의와 거대주의는 왜?

저자는 미국의 빅데이터 유행은 행태주의 (behavioralism)와 거대주의 (gigantism)라는 두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123-128쪽). 특히 행태주의는 관찰가능한 자료를 계량방법으로 분석하는데, 객관성으로 측정된 행태 자료 간의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행태주의의 근본정신이라고 주장했다(151쪽). 그런데 빅데이터가 밝혀내는 것이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니까 빅데이터는 행태주의 원리와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이다(151쪽). 또한 빅데이터 사업자들은 계량분석을 위주로 한 행태주의 방법론을 이끌었던 통계소프트웨어 회사와 여론 조사 회사라고 했다(11쪽). 말하자면 행태주의 = 객관성있는 경험자료 = 계량분석 = 상관관계 = 빅데이터라는 연관성이다. 또한  거대주의는 언제나 큰 것이 좋다거나 끊임없이 탐욕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과 비판은 지나쳐 보인다. 행태주의나 계량분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근본을 잊고 엉터리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문제는 빅데이터가 아니다

사실 문제는 빅데이터가 아니다. 상식에 가까운 자료조차 챙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료를 만들지 않을 뿐더러 있던 자료도 치우고 지우고 고치는 세상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모른다고 하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세상이다. 청문회, 검찰 조사,  법원의 재판에서조차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실과 진실과 이성과 상식을 빅데이터라는 미신과 허구와 환영으로 덮어버리려는 세상일는지 모른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하다가 엉겁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빅데이터를 끌어다가 뭐라도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거나 자기최면을 거는 것은 아닐까?

결국 빅데이터가 아니라 한 올, 한 조각이라도 멀쩡한 데이터가 아쉬운 세상이다. 당연히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료를 챙기는 것이 먼저다. 빅데이터를 논하기 전에 사회의 기본 정보를 알차게 축적하여 효율성있게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해야 한다. 자료를 모으고, 저장하고, 분석하고, 폐기하는 전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보호될 수 있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컴퓨팅 파워를 자랑하는 21세기의 정보관리 제도가 500년을 버텨온 조선왕조의 체제보다도 못한대서야 어디... 

그냥 기본기에나 충실하라

중요한 것은 한마디로 기본기라 할 수 있다. 빅데이터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일상의 정보를 제대로 구축하여, 알맞은 형식과 방법으로 필요한 때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도 GSS와 CPS같은 자료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또한 거창하게 빅데이터 분석기술을 따지기 전에 컴퓨팅 파워를 늘리고 기본에 해당하는 자료분석 방법부터 철저하게 익혀야 한다. 

저자는 과거를 기록한 자료를 통하여 미래를 예측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귀기울이지 말 것을 권한다. 물론 사람들의 감정이나 의견이 아닌 사람들의 행동이나 물리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타당하다. 정부가 나서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재난과 범죄를 예방하려 애쓰기보다는 법과 절차에 따라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주었으면 한다. 규정대로 건물과 구조물을 살피고  주민들의 요구에 성심성의껏 대응해 주는 정부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최대주의 행정이 아니라 최소주의 행정을 구현했으면 한다.

참고문헌

김동환. 2016.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대한민국의 빅데이터 유행을 말하다>. 서울: 페이퍼로드.


김수영. 2016. <구조방정식 모형의 기본과 확장: Mplus 예제와 함께>. 서울: 학지사.

Ginsberg, Jeremy, Matthew H. Mohebbi, Rajan S. Patel, Lynnette Brammer, Mark S. Smolinski, and Larry Brilliant. 2009. Detecting Influenza Epidemics Using Search Engine Query Data. Nature 457: 1012-1014.

Hindman, Matthew Scott. 2009. Blogs: The New Elite Media. In The Myth of Digital Democracy, 102-128,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Laney, Doug. 2001. 3D Data management: Controlling Data Volume, Velocity, and Variety. Application Delivery Strategies 949 (6 February).

Levmore, Saul, and Martha C. Nussabaum,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Solove, Daniel J. 2011. Nothing to Hide: The False Tradeoff Between Privacy and Security. New He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책읽기: 김동환의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최소주의행정학> 2(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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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초월한 박근혜와 최순실의 엽기 행각이 사람들을 놀래키고, 분노케 하고, 좌절시키고, 분열시키고 있다. 뜬금없이 “창조”를 말했지만 비선과 비정상으로 꼼꼼하게 챙겨낸 변태 추문이었다. 현재로서는 그 추문의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기염氣焰을 토했지만 단지 그들만의 행복 시대였다. 밑도 끝도 없이 “미래”를 말했지만 박씨의 아버지가 총맞아 죽었던 유신 독재 시절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이성과 상식과 염치를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부 관료제를 멋대로 부려먹은 자들이다.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가 망가뜨린 자들이다. 공직사회를 제멋대로 흔들어 기강을 무너뜨린 자들이다. 어찌하여 관료제와 공직자들이 그리도 속절없이 휘둘렸단 말인가?

권한 침해와 행정의 합리주의 현상

이문영(1980)은 정부의 행정과정에서 “합리주의 현상”이 발생하거나 계속되지 못하는 것은 “권한 침해” 때문이라고 단언했다(6쪽). 권한 침해는 “아랫사람이 고유하게 갖는 권한을 윗사람이 부당하게 빼앗는 관행”을 말하는데(이문영 2001: 111), 권위주의나 관료주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컨대, “정치의 행정에 대한 극도의 간섭증, 엽관주의,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의 하급기관이나 하급자에 대한 권한 남용,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서] 업무담당기관이 아닌 … 예산기관의 횡포” 등이다(이문영 1980: 6). 

권한 침해는 웨버(Max Weber)가 합리성을 가장 잘 갖춘 형태로 묘사한 관료제 이상형(ideal type bureaucracy)과 거리가 멀다. 업무가 기능에 따라 분명하게 나뉘어 지고, 자의성이 배제된 합당한 규칙에 따라 조직이 통제되고,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계약에 의해 자리에 임명되고, 업무 성과에 따라서 승진이 이루어지는 관료제의 특성을 해체한다. 단지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직책과 권한을 무시한다면 업무가 분화되지 않은 것이고, 합의된 규칙은 적용되지 않으며, 전문 지식은 인정되지 않고 (웃사람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허세를 부리면서 만능 전문가 행세를 하고), 성과가 아닌 위계질서에 의한 무조건 상명하복으로 승진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가 웃사람이 되느냐, 누가 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관료제가 좌우된다는 뜻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권한 침해는 정부 관료제를 넘어서 민간기업과 예술인에게까지 미친 엽기와 변태였다. 公과 私를 넘나든 이른바 “갑질”의 최고봉이었다. 공무원 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은 물론이고 최씨 존재를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시하고 보복을 가했다. 무자비한 폭력 그 자체였다. 이런 관료제에서 행정은 예측가능성과 연속성과 안정성을 가질 수가 없다. 언제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자리에서 쫓겨나갈 지 알 수 없다. 힘센 자들의 “갑질” 때문에 이성과 상식을 따라 일하기 어렵다. 공직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공직자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을 가진 관료가 아닌 그저 “네 네”하는 심부름꾼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 독재자 편에 줄설 것을 강요하는 관료제는 좋은 경험을 축적시키지 못하고 합리주의를 구현할 수 없게 된다.

합리주의는 행정이 가야할 길

그러면 왜 합리주의인가? 그것이 행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자 걸어가야 할 “제 길”이기 때문이다(이문영 1980: viii). 官의 권력 남용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난동을 불사하는 힘”이 부딪히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관의 정책과 민의 평화”가 호응하는 합리적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vii쪽). 官이 “옷을 입[은] 힘”을 행사하고 民이 자율성이 있는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백성의 정당한 의견과 요구를 정부가 존중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간 피를 보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vii쪽). 

결국은 官의 권력 남용과 民의 난동은 모두 폭력인데, 이런 극단의 폭력이 난무하는 데서 합리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비폭력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통치자와 공무원이 권력 남용을 억제하고 백성들이 난동을 자제하는 것이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추고 합당한 말로 사실과 진리를 다투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그런데 官의 비폭력보다도 民의 비폭력이 훨씬 중요하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이문영 1990: 29).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29쪽).  주인이 부지런하고 모범을 보여야 머슴들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서 제대로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이문영 1991: 30). 

물론 비폭력이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정부 관료제에서 합리주의나 합리성을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중간가치는 합리성 rationality이다”(1991: 118). 헤겔의 역사발전논리로 치자면 폭력은 정正(thesis), 비폭력은 반反(antithesis), 제 3의 가치인 합리성은 합合(synthesis)에 해당한다(이문영 1991: 30). 모순이 있는 상태를 부정하여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모순을 부정하는 反이 없이는 合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反을 내세운다(30쪽). 따라서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이문영의 초월윤리는 合인 합리성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反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30쪽).  

공무원 이상형의 행동강령 

이문영은 행정개혁은 (1) 인간계발을 위한 환경 조성 (권한 보장 작업), (2) 과학적 관리와 인간관계 향상, 그리고 (3) 적극적인 인간계발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이문영 1980: 4). 그런데 처음 두 단계에서 성공을 하는 것은 소극적인 행정조치일 뿐이어서 행정개혁을 완수完遂하기에는 부족하다(7쪽). 궁극적인 힘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데, “무엇에나 ‘네, 네’ 하는 사람이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좀더 독립적이며 자신을 갖고 있으며 근면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심히 탐색하는 사람”이 필요하다(7쪽). 이문영은 이러한 공무원 이상형이 따라야 할 행동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2001: 277, 465;  2008: 561). 

(1) 공무원이 일을 하는‘방법’은 전문 지식(능률과 민주주의 이념 포함)을 매일매일 닦아서, 이 학문을 갖고서 조직 내에서는 상사를 존중하며 조직 밖에서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전문지식을 연마하지 않고 다만 상사에게 굴종하며 조직 밖의 국민들에게는 교만하는 것이 아니다. 

(2) 공무원이 할‘일’이란 민주·복지국가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상사에게 상납하는 대가로‘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3) 공무원인‘사람’이란 전문 지식(능률과 민주주의 이념 포함) 앞에 서는 존귀한 존재이지,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존재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추문에서 우리가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 침해”나 과학적 관리 실패가 아니다. 물론 공사公私를 구분못하고 제멋대로 관료제를 휘젓은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 하지만 “공무원 이상형”에 가깝게 행동했던 공직자가 드물었다는 사실이 비수匕首가 되어 행정학의 가슴을 찌른다. 

전문 지식을 닦아서 상사를 존중하고 국민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라, 공직자 대부분은 전문 지식을 내팽개치거나 악용하였고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 굴종하고 국민들에게는 교만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복지를 신장하고 정의를 실현한 것이 아니라 상사의 부당한 명령까지도 복종하는 대가로 이득을 챙겼다. 자율성을 가지고 전문성 앞에 당당하게 서는 공직자가 아니라 그저 상사와 조직에게 쓰여지고 버려지는 소모품이나 도구를 자처했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과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모습이 대조되는 이유다.

비루한 고위 공직자의 자화상

특별히 고등고시나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득의양양得意揚揚했던 고위 공직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비굴한 처신은 사람들을 참담하게 한다. 그들의 전문 지식이란 것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출세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을 뿐이다. 그들은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데에는 “염치불구”였고, 전문성에 걸맞는 사회 윤리와 책임은 나몰라라 했다. 공학도라면서 산소가스 이산화가스라는 박씨와 “심신이 회폐”한 “최선생님” 앞에만 서면 바짝 쪼그라들어 오금도 펴지 못하는 전문성이라니... 한때 하늘을 찔렀을 자존심과 자부심은 다 어디에 내팽개쳤단 말인가? 

청문회에 나와서도 모른다거나 기억이 안난다거나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고위 공직자와 자칭 사회 지도층을 기억한다. 걸핏하면 나랏 일을 한다며, 혹은 공인이라며, 혹은 사회 발전에 기여해왔다며 온갖 공치사
功致辭란 공치사는 다 늘어놓았던 자들 아닌가. 이런 자들의 비루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원문: 박헌명. 2017. 독재자의 권한 침해와 관료제의 합리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