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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갑질이 화두다. 이른바 ‘갑질’은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불공정한 행위를 말한다. 힘이 센 ‘갑’이 힘이 약한 ‘을’을 강제로 몰아붙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짓이다. ‘갑’과 ‘을’ 사이의 특별한 (권력) 관계를 올가미로 삼아 강자가 약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놓고 쥐어짠다. 저항하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무차별로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는 야비한 패악질이다. 일방적인 강자의 횡포이다. 악질의 적나라한 폭력 그 자체다.
‘갑질’과 ‘을’의 반란
그동안 갑질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여러가지 양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현상인 양 gapjil로 표현되기도 한다. 갑질공화국이라는 말도 생겼다. 하지만 그동안 갑질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공론장에 오르기 어려웠다. ‘갑’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을’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무자비한 보복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갑’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것은 한마디로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 사회매체가 보편화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갑질에 무관심하거나 ‘갑’을 편들던 정부기관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을’들이 참아왔던 울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비정상’(박근혜씨의 ‘정상’)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던 ‘을의 반란’이었다.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씨의 ‘땅콩회항’과 종근당 회장 이장한씨의 운전기사 폭언은 ‘을’들의 반란을 예고했다. 미스터피자 회장 정우현씨의 갑질은 프랜차이즈업계에서 가맹점들을 착취했던 삐뚤어진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육군대장 박찬주씨와 그의 부인의 공관병에 대한 갑질은 오래된 군대 내 인권 침해 문제를 공론장으로 끌어냈다. 8월 12일자 <한겨레신문>은 서연이화의 ‘을질’을 통해 갑질이 단순히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상대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임을 보였다. 모두 법(계약)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이나 상식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의 양심과 품격에 관한 문제이다.
관료주의 갑질과 권한 남용
관료제에서 벌어지는 갑질은 어떠한가? 막스 베버의 관료제 이념형에서 일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유기적으로 분화되어 있고, 그 자리에 필요한 전문성을 가진 자가 일을 담당한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직책에 따라 권한과 책임을 나누어 일을 해야 한다. 각각의 일은 계서제를 통해 규칙과 절차에 따라 조율된다. 만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직책과 권한을 무시하고 누르기만 하면 관료 조직이 아니라 관료주의적 조직과 권위주의 사회가 된다 (이문영 2001: 71). 계서제에서 윗사람이 부당하게 아랫사람의 고유한 권한을 빼앗는 관행이 일반화된 사회이다 (이문영 2001: 111). 이런 관행이 ‘관료주의 갑질’이며, 그 본질은 한마디로 권한 침해와 권한 남용이다. 권한 남용은 관료제의 계속성과 합리주의를 가로막는 근본 이유이다 (이문영 1980: 6).
대통령인 이명박씨가 나서서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뽑아버리고 규제철폐를 독려했다. 하지만 당장 결과물을 내려는 욕심에 실무 담당자에 이르는 관료들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관료들은 맡은 일을 소신을 가지고 해나가기보다는 위를 쳐다보면서 지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복지부동이다. 또한 장관에게 일개 국장 이름을 들먹이며 나쁜 사람이라느니 아직도 그 자리에 있냐느니 말한 박근혜씨도 권한 침해인 것을 매한가지다. 국가정보원 등의 부정선거를 법대로 조사하려던 검찰총장과 검사를 내쫓은 것은 권한 남용이 아니라 그냥 볼썽사나운 짓이다.
관료제에서 갑질은 윗사람이 모든 일을 혼자 알아서 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해봐서 잘 아는데...”라면서 시시콜콜 참견하다 일을 그르친다. 윗사람이면 규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언제 어디서든 아랫사람의 권한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 있다는 무지나 시대착오다. 공화정에서 살면서도 정신줄은 양반이 천민을 마음대로 부리는 왕조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관료제를 전문성과 자율성을 가진 관료들의 조직체계로 보지 않고 명령대로 움직이는 똘마니 집단이나 기계 뭉치로 보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이 맘에 들지 않으면 부품을 교체하듯 바로 쫓아내고 말잘듣는 ‘내사람’으로 채워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터미네이터’같은 관료제는 찾아보기도 어렵거니와 있다 해도 좋은 결과를 내지도 못한다.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회자되는 갑질은 모두 ‘갑’이 끝간데 모르고 횡포를 부리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을’이 몸종이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공직자의 비폭력
공무원은 전문지식을 매일매일 닦아서 조직 내에서는 상사를 존중하며 조직 밖에서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며, 전문지식 앞에서 존귀한 존재이지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존재가 아니며, 상사에게 굴종하고 상납하는 대가로 利를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문영 2001: 277). ‘관료주의 갑질’은 아랫사람에게 전문지식은 내팽개치고 상사에게 굴종하고 잇속이나 챙기는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한다. 권위주의 조직에서 아랫사람은 일에 맞는 고유한 권한을 갖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써먹고 내버리는 기계 부품이거나 그저 굽실대며 “네, 네”하는 노예일 따름이다 (이문영 2008: 606).
주어진 권한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이 非暴力이다 (이문영1996: 404). 주먹질(권한 남용)이 멈춘 뒤에야 우리는 지혜를 쌓고(智), 합의를 모색하고(禮), 나아가 사회윤리(仁)와 자기희생(義)을 실천할 수 있다 (이문영 2008: 143). 관료주의 갑질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비폭력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경험했듯이 강자의 폭력이 통제되지 않은 판에 관료제에서 전문성, 효율성, 동의와 협력(‘협치’), 복지와 사회통합을 따지는 일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최소한의 인권과 공정성을 훼손하는 갑질을 방치한 채 관료제의 합리성을 따지니 말이다.
참고문
곽정수. 2017. 고발합니다, 갑질공화국. <한겨레신문>. 2017. 8. 12.
원문: 박헌명. 2017. 관료주의 갑질과 공직자의 권한 남용. <최소주의행정학> 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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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교수가 지난 해 10월 26일 그의 트위터 방(histopian)에서 “노무현은 대통령의 권위[주의]를 없앴고, 이명박은 대통령의 도덕성을 없앴으며, 박근혜는 드디어 대통령의 자격기준을 없앴습니다”라고 적었댄다. 참으로 재치있는 독설이다. 한마디로 시체나 금치산자가 아니라면 이젠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소리 아닌가?
촛불민심은 어디로 갔는가?
이른바 “촛불대선” 혹은 “장미대선”이 끝을 향하고 있다. 박근혜씨가 탄핵을 당하여 파면된 후 60일 만에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깜깜이 선거”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후보와 그들의 공약을 꼼꼼하게 검증하기에 너무 짧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60일이 아니라 60년을 줘도 크게 달라질 것같지 않다. 관련 법과 관행은 강자의 편을 들고 시민들의 참여를 최소화하고 있다. 차라리 선거에 관심을 끊고 살라는 뜻으로 읽힌다. 아직도 종북 좌파 소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후보자 입에서 나온다. 케케묵은 지역주의과 색깔론(반공)에 찌든 유권자들이 아직도 버티고 있다. 텔레비전 토론 방식도 요식행위에 가깝다. 시간을 초단위로 재서 후보별로 “개인기”를 보여주는 학예회 수준이다. 이번에는 규칙을 바꿔가며 토론방법을 달리하고 있지만 후보, 방송사, 시민들 모두 낯설어하고 있다.
어쨋든 우리는 열흘 안에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이번 선거에 15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역대 대선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전우용교수의 말대로 자격기준이 없어서인지 박근혜 정권에 책임이 있는 자들까지 몰려들었다. “네거티브”가 아닌 정책선거를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말꼬리잡기, 인신공격, 안보장사, 사상검증(종북좌파), 막말로 가고 있다. 똑같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가장 나쁜 상태에 있다
한마디로 “촛불민심”은 사라지고 이전투구泥田鬪狗만 남았다. 아직도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나쁜 구세력들이 원하는 구도다. 혼란을 부추겨 “다 그 놈이 그 놈”을 만드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천만 촛불을 밝힌 시대정신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벌써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뜻과 고통과 공포와 인내와 열정과 감동을... 가장 나쁜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를 망각하고 당장 민주주의와 평화가 온 것처럼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닌지...
이문영(1991: 84-103; 1996: 368-390)은 나쁜 정권이 악화되는 단계를 창세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설화에 빗대어 설명했다. 첫째 단계에서 정권은 말을 못하게 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지식인(대학)과 언론인과 종교인을 탄합한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다. 진리를 말하는 혹은 정권이 잘했나 못했나를 판정하는 시민사회를 망가뜨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주권자(신, 모든 권력의 근원)의 명령을 머슴인 정권 패거리(아담과 이브와 뱀)들이 거역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씨는 한국방송공사 정연주씨를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내쫓고 언론사와 방송통신위원회를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채웠다. 국가정보원과 군대를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였고 시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았다.
둘째 단계에서 정치경쟁자를 죽인다. 퇴임 후에 오히려 큰 지지와 사랑을 받은 노무현씨는 전직대통령은 커녕 일반 피의자만큼도 대우받지 못하고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른바 “친노”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말 그대로 폐족이 되었다. 창세기에서 장자인 카인이 시기심때문에 약자인 동생 아벨을 쳐죽인다. 세째 단계에서 국민 일반이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하고 타락한다. 개인이 나쁜 개인악이 아니라 사회 정치 구조가 나쁜 구조악이 지배한다. 이른바 사회 양극화, “묻지마 범죄”나 “갑질” 등이 구조악을 상징한다. 창세기에서는 신이 홍수를 내려 노아 식구들을 뺀 나머지를 쓸어버린다. 네째 단계는 정부가 전시효과를 노리고 큰 일을 내세운다. 한강 르네상스, 한반도 대운하, 4대강 사업과 같은 토목삽질이다. 바벨이란 도시에 세운 탑을 보고 화가 난 신이 인간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것에 비유된다. 마지막 단계는 인접국가가 내정에 간섭할만큼 내부에서 통제력을 상실한다. 창세기에서 신은 구제불능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다. 북한 핵실험, THAAD 도입, 일본군 성노예(위안부가 아니라) 합의,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 등은 갈 데까지 간 상황을 보여준다.
후보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뽑아라
중요한 점은 이런 가장 나쁜 상태를 만들고 발전시켜 온 자들 대부분이 제대로 단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선거가 치러진다는것이다. 박근혜씨와 최순실씨를 비롯한 각종 미꾸라지들이 감옥에 잡혀갔지만 황교안씨를 비롯한 수많은 부역자들이 아직도 건재하다. 이승만씨가 반민특위를 해체한 일이나 박근혜씨가 세월호참사특별위원회를 뭉갠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없는 청와대 압수수색을 방해하고 서둘러 대통령기록물을 지정하여 이관하는 것을 보라. 국가기관이 개입한 부정선거를 덮어 잠재운 솜씨 그대로다. 이번 탄핵사태로 보수(사실은 수구기회주의자들)가 죽었다지만 사실 몇 대 쥐어터지고 몇 군데 멍이 든 정도다.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라고 신이 탄식한 이유가 있다. 이번에도 상상을 벗어나는 “창조선거”를 기획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출마한 후보들이 “촛불민심”을 잊은 듯 서로 앞다투어 선심공약을 남발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본다. 혜택을 주고 표를 사는 “돈뿌리기”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한다. “나라를 나라답게”하려면 일자리와 복지 공약보다는 원칙이 되는 큰 그림(생각틀)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박근혜·최순실의 변태정권을 퇴출시킨 촛불민심과 시대정신을 살려내야 한다. 아직도 부역자들은 책임지기는 커녕 개헌타령이나 하고 서민 행복을 말하고 친북좌파의 집권은 막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하루빨리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백성의 뜻에 따라 나쁜 상태를 하나씩 청산해야 한다. 왜곡되고 망가진 시민사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행정에서 합리주의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은 후보나 공약이 아니라 우리의 시대정신을 뽑을 때다.
원문: 박헌명. 2017. 가장 나쁜 상태에서 시대정신 살려내기. <최소주의행정학> 2(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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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으면 어색하고 불편하다. 물과 기름처럼 겉과 속이 따로 놀아 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가 현실에 맞지 않아 거리감을 느낄 때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쩌면 박근혜 최순실 사건 이후 우리가 느끼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이런 것일는지 모른다.
미국 제도, 일본 관행, 그리고 조선 사람
20년 전 군복무를 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몸뚱아리와 정신줄은 조선 사람인데 일본군의 관행으로 미군의 제도를 운영하려다 보니 이런 저런 탈이 나는 것은 아닌지. 장비는 물론 하다 못해 교본까지도 미군의 그늘 아래에 있다. 군대의 발길에 일본어 잔재가 흔하게 부딪혀 온다. 요즘 더 분명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을 다루는 방식에도 일본인들의 독특함이 있다. 칼 두 자루를 찬 사무라이들이 일반 백성을 내려다 보거나, 혹은 백성들이 사무라이들의 위세에 설설 기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니 토론이래봤자 토론을 흉내내는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쌍방통행은 이론이고 일방통행은 현실이었다.사람과 관행과 제도가 서로 어긋나다 보니 아무리 애써도 어색함과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
우리의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적고 있다. 공화국은 왕(군주)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주권이 왕이나 특권층이 아닌 백성에게 있다는 뜻이다. 오천 년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제도를 가진 것은 고작 70년도 되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 왕정에서 살다가 우연찮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의 공화정을 덜컥 들여놓았다. 조선 사람이 미국인에 맞춰 지은 옷을 걸친 셈이니 애초부터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사회 구석구석에 아직까지도 일본 식민지 찌거기가 남아 있다. 와사비山葵(고추냉이)와 무대뽀無鐵砲(무작정)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민주주의民主主義와 대통령大統領도 일본어(일본어 번역) 아닌가? 만일 개헌을 한다면, 민주주의는 그렇다 쳐도 당장 “대통령”부터 우리말로 바꾸어야 할 판이다.
아직도 “왕조 정신줄”로 살고 있다
그래서 민주공화국은 신화에 가깝고 현실은 왕조에 가까운지 모른다. 말이 민주공화국이지 아버지 옷마냥 몸에 맞지를 않아 어색하고 불편하다. 어쩌면 처음 옷을 입을 때 느끼는 낯섦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그런… 하지만 70년 세월이 지났어도 우리 주위에서 관찰하는 것은 공화정보다는 왕정의 모습이다. 중국에서도 하는 투표는 껍데기일 뿐이다. 서구(미국)의 민주주의와 공화정이 화려하고 멋있기는 하나 여전히 코쟁이의 옷처럼 커보인다.
근 오백 년을 이어온 조선왕조가 문을 닫고, 36년 일제 식민지가 끝나고, 운좋게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백성들의 “왕조 정신줄”은 여전하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씨를 국부國父라 했고 프란체스카씨를 국모國母라 불렀다. 육영수씨는 마지막 가는 길을 소복입는 백성들이 배웅했던 국모였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모습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씨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부의 반열에 올랐다. 백성들이 스스로 뽑아 임명하는 대통령보다는 하늘에서 내려준다는 임금을 정서상 더 친근하게 생각했다. 민주주를 기치旗幟로 내건 국민의 정부의 김대중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음은 이문영(2008: 529)이 적은 김대중씨 일화다.
“신년 초에 누군가가 불러서 청와대에 갔다. 대통령의 친인척이랑 늘 보던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 대통령이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우리를 별실로 인도했다. 내가 제일 앞에 서서 들어갔다. 멀리 대통령 내외가 앉아 있고 마루에는 긴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나는 이 화문석을 정중히 밟고 들어가 두 내외분과 악수를 했다. 두 분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수를 나눈 후 뒤돌아 나오면서 보니 내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화문석에 부복(俯伏)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배를 했던 것이다. 의외의 구경이었다.”
최근 파면을 당하고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근혜씨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같은 정치인보다는 여왕(선거 여왕)과 공주 (수첩 공주, 유신 공주, 변기 공주 등) 칭호로 호사를 누렸다. 박씨는 자의이든 타의이든 조선왕조의 이씨처럼 왕족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육영수씨 사후에는 사실상 국모로 살았다. 박근혜씨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궁궐에서 쫓겨나 사저에서 눈물로 지새는 여인에게 사약을 내리는 격”이라거나 “산발로 포승줄에 묶여 감옥 가는 것”이라는 김진태씨 표현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정신줄은 아직 15세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이명박씨의 왕놀이
지금까지 지도자가 된 자들의 정신줄도 사실상 왕정이다. 노무현씨는 그의 이력만큼이나 예외에 가깝다. 특히 이명박씨나 박근혜씨는 생각없이 왕놀이를 하다가 일을 크게 그르친 경우다. 왕은 모든 것을 소유했다. 자신이 국가이고 국가가 곧 자신이었다. 모든 것이 공公이자 사私이기 때문에 공사 구분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존재였다. 왕은 말을 할 뿐 백성에게 묻지 않는다. 어명御名은 그저 받들어 시행해야 하는 것이지 따지고 비판할 대상이 아니다. 왕의 언행에 감히 토를 다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빨갱이든, 좌익이든, 종북이든 닥치는 대로 낙인을 찍어 응징을 해야 하는 중범죄였다.
제왕적 대통령제와 무관하게 이명박씨는 대놓고 대통령질보다는 사장질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정치인이 아니라 장사꾼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주권자인 백성들은 “이명박 사장”에게 고용된 회사원이 아니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멋대로 밀어붙이던 이씨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을 시작으로 용산 철거민 참사, 민간인 사찰,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 등 주옥같은 정치·군사·외교 업적을 남겼다. “명박산성”은 임금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식 장사치의 정치무능이 빚은 참극이었다. 한편 백성 다수가 반대하는 4대강사업과 자원외교를 강행하여 기어코 수십 조 국고를 탕진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퍼주기를 했다면서 저주를 쏟아냈지만 정작 본인은 나라의 재물을 제 것인양 물쓰듯 했다. 이명박씨 손을 거쳐간 회사와 조직의 말로末路가 어쩌면 이리 똑같은지…
박근혜씨의 창조군주론
박근혜씨는 한 술 더 떠서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군주론을 창조했다. 지금까지 드러난 범죄 혐의만 보더라도 엽기 그 자체다. 박근혜 왕조에서 권력 서열 1위는 박근혜가 아니었다. 이른바 비선실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최순실이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이치라고나 할까? 왕조에서 왕이 아닌 자가 감쪽같이 왕노릇을 했으니 <최선생님, 왕이 된 여자>라도 찍었다고 해야 하나? 선거로 뽑아놓은 대통령은 집구석에서 뭉개다가 가끔씩 올림머리를 하고 나와서 써준 글이나 생각없이 읽었고, “공항장애”로 고생하고 심신이 “회폐”한 아줌마가 대통령질을 하면서 옷갖 이권을 챙기고 있었다. 홍준표식으로 말하자면 춘향이로 뽑아놨더니만 허접한 향단이가 설친 셈이다. 박관천씨의 증언이 아니어도 일이 진행된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박씨는 최씨의 꼭두각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옷입는 것도 태반 주사나 백옥 주사를 맞는 것도 박씨가 간여干與했다. 기업에게 돈을 뜯어내고 민간기업의 인사까지 주무르고 권력을 휘둘러 깔끔하게 마무리(증거인멸과 입단속)하는 솜씨가 참으로 경탄스럽다.
박근혜씨 본인은 위엄있고 고상하고 정의롭고 인자한 군주였다고 생각했고, 또 지금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헌법 자체이자 법 위의 존재가 어찌 검찰의 조사를 용납한단 말인가. 모두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고, “최선생님"의 일은 전혀 몰랐으며, 1원 한 푼 안받았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 아닌가. 노처녀로서 쪽팔리지만 바이아그라까지 챙겨먹었고 얼굴이 붓고 아파도 기꺼이 미용시술까지 감수하면서 국정은 물론 일개 회사와 개인의 일까지 꼼꼼하게 챙긴 대가가 고작 탄핵이고 구속영장이란 말인가. 만고의 충신인 이정현 윤상현 김진태 등이 반정에 성공하여 용상에 복귀하는 즉시 “좌빨” 역도들을 의금부에 잡아다가 요절을 내버리고 삼족은 물론 구족까지 멸하리라. 주먹을 불끈 쥐고 아버지 박정희 영정 앞에 울먹이며 이렇게 맹세하지 않았을까? 왜냐고? 군주를 능멸한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자들을 어찌 살려둘 수 있단 말인가?
박근혜씨는 그동안 본인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감추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꺼려했다. 걸핏하면 대통령의 권위를 내세웠지만 사생활에 관한 한 연약한 여자의 신비주의로 얼버무렸다. 백성들이 뽑은 것이 지도자가 아니라 여자였단 말인가? 노무현씨와는 전혀 다르게 박씨는 언론 접촉도 꺼렸고, 소수 “친박”을 제외한 정치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관들의 대면보고도 대부분 서면보고로 대치했다. 심지어 세월호 참사조차도 서면보고했다고 국가안보실장이 진술했다.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조윤선씨도 박씨와 독대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이쯤되면 선호나 습관이 아니라 병이다.
이런 박근혜씨의 행태는 일단은 본인의 처참한 약점을 감추려는 본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리분별이 희미하고, 이해와 분석 능력이 약하고, 상대방과 감성과 이성으로 대화할 능력이 빈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궁여지책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체성이다. 특히 왕족과 군주라는 집착과 망상이다. 햄버거도 포크와 나이프가 있어야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왕의 사생활을 들추거나 왕에게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군주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감히 임금과 맞먹는단 말인가?
한마디로 간신과 환관이 활개치기에 딱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이른바 문고리 삼인방이나 윤전추 이영선씨 등이 박씨를 에워싸고 그들만의 왕조를 건설했다. 청와대는 세상을 등진 궁궐이 되었고, 세월호 참사든 촛불집회든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모두 역적들의 궁상(예컨대, 시체장사나 거지근성)으로 치부 되었다. 군주는 품위유지를 위해 세상사 일에 대해 시시콜콜 말하지 않았다(세상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따지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없었는지 모른다). 결국 박근혜씨는, 왕이 교지敎旨를 내리듯, 자기가 준비한 혹은 누군가가 써준 것을 들고 나와 읽고 들어가 버리는 방식을 탄핵당할 때까지 고집했다. 아직도 간신배와 광신도같은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서 꿈을 꾸면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조직개편과 이름 장난질
과거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부조직을 개편한다고 난리를 쳤다. 모두 거창한 목적과 기대효과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관료제를 길들이고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연막작전이었다. 역대 실력자들이 정부조직을 백성들의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사유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주권자의 소유물인 관료제를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군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찟고 째고 한 것이다. 물론 합리성에 근거한 조직 개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정략일 뿐이었다.
이명박씨는 노무현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폐지하고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해양수산부를 해체했다. 그 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 등 대책없이 얻어터진 뒤에서야 박근혜씨가 국가안보실과 해양수산부를 부활시켰다. 결국은 노무현으로 돌아간 셈이다. 박씨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책임을 묻는다며 눈물찍으며 해양경찰청을 해산했지만 잠시 얼떨떨했던 백성들은 해양경찰청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왕이야 조직을 이리 째고 저리 붙이는 재미가 솔솔하겠지만 해당 공무원들은 죽을 맛이다.1)
이명박씨는 “저탄소”와 “녹색성장”를 좋아해서 부서와 공공사업 이름에 넣었다. 정부에서 돈푼깨나 받으려면 두 단어를 넣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었다. 정권이 끝나자 탄소와 녹색은 봄눈녹듯 사라졌다. 박근혜씨는 “창조”와 “미래”를 좋아해서 정권의 비전도 “창조 경제”로 내세웠다. 부처이름도 “미래창조과학부”로 했다. 영문 이름은 Ministry of Science, ICT, and Future Planning이다. Creative는 아예 빠져 있고 생뚱맞게 ICT가 들어가 있다. 과학과 정보기술은 업무에 보이지만 미래 설계나 계획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봐도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이름이 바뀔 것이 확실한데 도대체 뭐하러 바꾼 것일까? 또 안전을 강조한다면서 2013년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꾸었다. 안전을 앞에다 놓으면 국가가 안전해지나? 무책임한 이름짓기 놀이에 혈세만 낭비했다.
사람, 관행, 제도가 어울려야
이런 해괴駭怪한 짓거리들은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닌 왕국의 군주라는 정신줄에서 생겨난다. 공직과 정부관료제를 사유물로 생각한 결과다. 제도가 사람과 관행과 서로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개헌 논의가 무성한데,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만 있지 정작 주권자인 백성들의 의견은 빠져있는 것같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개헌안이 좋은지는 의미없는 질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주권자들이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일이다. 그동안 몸이 어찌 변했는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어디가 얼마나 불편한지, 옷에 익숙해지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따져봐야 한다. 스스로를 잘 살펴서 몸에 맞는 제도를 정교하게 다듬는 과정과 성실하게 제도를 실천하면서 문제를 조정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끝주
1) 어느 국장은 부처 이름이라도 바뀌면 얼마나 비용과 노력과 시간이 드는지 아느냐며 푸념했다. 하다 못해 명함부터 시작해서 명패, 간판, 상징물, 문서, 법령 등을 바꿔야 하고 정보시스템 내의 각종 이름을 바꿔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7. 민주공화국에서 왕놀이하기: 창조군주론. <최소주의행정학> 2(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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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2016)은 이명박 정권 말기부터 나라를 휩쓸고 있는 “빅데이터” 광풍을 유행이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데이터” 라는 유행이 1990년대의 “정보,” 2000년대의 “콘텐츠”와 “사이버 공간,” 2010년대의 “스마트”를 거쳐서, 30년 만에 다시 “빅”이라는 접두사를 달고 돌아왔다는 것이다(41-42쪽). 빅데이터는 아무리 커도 데이터일 뿐인데 호사가들이 “그럴듯한 신화”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미혹迷惑시키고 있다고 했다(155-158쪽).
빅데이터라는 유행의 구조
이러한 “지적 유행”은 그 바닥에 여유자원이 넉넉하고, 그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는 판(기회)이 벌어져야 하고, 진리를 모르거나 회피하는 열악한 지식 풍토가 있어야 가능하다(113-114쪽). 도박으로 치면 뭉치돈을 대주는(잃어주는) 호구, 도박판을 벌여주는 하우스 운영자와 돈을 챙기는 타짜, 타짜와 호구를 엮어주는 바람잡이에 비유된다(115쪽). 빅데이터 광풍으로 치면 각각 눈먼 정부예산, 빅데이터 관련 업체와 정부, 그리고 빅데이터 옹호자와 침묵하는 지식인에 해당한다(115-116쪽). 빅데이터를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침묵하는 타락한 지식인이 바람잡이다(15-17쪽). 이와같이 정부, 빅데이터 업체, 타락한 지식인이 쇠같이 단단한 삼각관계를 이루어 광풍을 주도한다고 저자는 분석했다(115-119쪽).
빅데이터에 대한 환상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사업 성과가 지지부진하자 관련 업체와 바람잡이 지식인들은 분석할 빅데이터가 부족하다며 정부에게 빅데이터 포털을 통해 공공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한다(77쪽).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빅데이터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마어마하게 생산되는 빅데이터를 이용하려고 시작한 사업이 빅데이터가 없어서 실패한다는 모순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Ouroboros를 보는 듯하다(146-147쪽). 또한 빅데이터 전문가가 부족한 탓이라며 전문가 양성 교육을 강화하라고 정부에 요구한다(75-77쪽). 결국 빅데이터 호사가들은 반성은 커녕 책임을 떠넘기며 끊임없이 전문가 교육, 공공 정보 공개 등으로 화제를 돌리면서 자가발전을 꾀한다. “정부는 빅데이터에 돈을 대는 것도 모자라, 또 빅데이터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욕을 먹는다”(81쪽).
흔히 빅데이터 유행의 근거로 Nature에 발표된 Ginsberg et al. (2009)이 거론되는데, 사실 이 논문은 구글의 검색엔진을 사용하여 독감 의심 환자 비율을 추정(estimation)한 것이지 예측(prediction)한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지적한다(89-90쪽). 몇 년 후 Butler (2013)는 구글의 독감환자 추정치는 질병예방통제국(CDC)의 결과와 차이가 큰 경우가 있었다고 보고했다(94쪽). 이에 비해 소수 참여자들의 정보를 분석한 Brownstein의 독감추적 프로그램은 질병예방통제국의 추정치와 가까왔다(96쪽). 말하자면 빅데이터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주장이 허구이며 환상이며 망상이다(158-159쪽). “과거에 대한 측정과 추론을 미래에 대한 예측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159쪽). 미국의 빅데이터 유행도 좋은 물건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하기보다는 단순히 주가를 올려 이익을 챙기려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와 정부의 투자에 편승했다고 보았다(129-135쪽).
말이 빅데이터지 사실은 Facebook, Twitter, 카카오톡 등에 담겨진 문자정보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런 잡담을 긁어모아 분석한다 한들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40쪽). 저자는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재난이나 범죄를 예방한다는 대목에서 특히 절망스러워했다(56쪽). 주민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데이터를 분석할 것이 아니라 즉시 출동해야 할 일 아닌가?(48쪽) 빅데이터를 분석한다 한들 산사태와 눈사태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어떻게 예측한단 말인가?(49-50쪽).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문장은 이것이다. “주민들이 위험하다고 신고할 때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행정체제만 유지되더라도 대단한 것이다. … 그저 평소에 침수 위험 지역을 꾸준히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재난 행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0쪽). 말하자면 기본에 충실한 최소주의 행정학이다.
한국에 쓸만한 자료가 있던가?
이 책을 처음 소개받고 나는 바로 반응을 했다. 한국에 (쓸만한) 공공 자료가 있던가? 잘 측정되고 정리된 보통 자료도 구경하기도 힘들 지경인데 무슨 빅데이터인가라고 반문했다. 백성들이 원하는 정보를 알차게 담고 있는 공공 자료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공공기관의 문서와 자료가 적절한 형식으로 작성되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희망사항에 가깝지 않았던가? 투박한 자료조각을 찢고 째고 오리고 붙이고 한바탕 난리를 쳐야 그나마 좀 쓸모있게 보이지 않았던가? 경험에서 얻은 상식이다. 그런 자료일망정 정부에서 문서와 자료를 얻는 일이 그 자체로 얼마나 어려운가? 애초부터 분석을 하지 못하게 끔 작정을 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자료를 가공하고 감질나게 찔끔찔끔 민간에 흘리면서 생색이나 낸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속편하다. 그럴 때마다 연구자는 절벽 앞에 선 심정인 것은 나만의 경험인가? 그런데 빅데이터라니… 생뚱맞다고 해야 할까? 그냥 하던 일이나, 해야 할 일이나 제대로 하세요...
미국 공공기관의 자료에 관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어느날 미국인 대학원생이 CD-ROM 하나를 들고 내게 찾아와서 어떻게 이 자료를 SAS로 읽어서 분석할지를 물어 왔다.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의 질환에 관한 자세한 자료가 고정길이 형식(fixed format)의 문자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 관측치 수(N)는 물론이려니와 변수도 많아서 컴퓨터가 힘들어 할 만큼 SAS 자료파일이 매우 컸다. 다른 자료분석 프로그램은 아마도 읽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자료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 도대체 이 나라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미국에서 어지간한 정부 문서와 자료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내용이 적절하고 알차며, 형식도 손질이 잘 되어 있다. 한국 정부의 웹집(Web site)은 휘황찬란해도 자료를 얻기 불편하고 마땅히 얻어갈 것이 없다. 반면 미국 정부의 웹집은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능에 충실하고 내용이 풍부하다. 당장 미국 감사원(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웹집에 가보라. 또한 General Social Survey (GSS)와 Current Population Survey (CPS)같은 공공 자료가 많은 연구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수퍼컴퓨터 네트웍을 통해 전국에 있는 자료(예컨대, CDC 자료)를 공유할 뿐만 아니라 연구자에게 유용한 분석도구를 제공한다. 이른바 grid computing으로 data grid 를 실현하고 있다. 주요 기관에 분산되어 저장된 대용량 자료를 효율성있게 활용하는 체제다.
미국은 “빅데이터”가 유행하기 전에 이미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쌓아놓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저자가 비판하는 행태주의와 거대주의의 소산물이 아니라 합리성을 추구하는 관료제에서 한 축이 되는 문서주의가 이뤄낸 결과물이다. 거대한 자료보다도 정보관리 체계가 부럽다. 어쩌면 20세기 이후 한국의 정보관리 수준은 15세기 조선왕조를 따라가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책에서 묘사된 “빅데이터 중독”은 생각한 것보다 정도가 심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랏돈을 뿌려대며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형국이다. 소문은 무성하고 정부 사업은 요란한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쓸모있는 자료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대한민국 빅데이터”의 현주소다. 한국의 빅데이터 현상은 반성과 비판없이 미국에서 베껴온 것이며, 실제 국민이 필요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여 판을 벌렸다는 김교수 지적 그대로다(111쪽). 끝장을 보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폭주기관차라고나 할까? 한번쯤은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자문해볼 법도 한데 말이다.
빅데이터는 자료인가, 기술인가?
가장 눈에 들어오는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빅데이터”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이다. 2011년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에서 발행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스마트 정부 구현(안)>에 의하면 빅데이터는 “대용량 데이터를 활용, 분석하여 가치있는 정보를 추출하고, 생성된 지식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대응하거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한 정보화 기술”이다(38쪽). 한글 위키피디아에는 “기존 데이터베이스 관리도구의 능력을 넘어서는 대량(수십 테라바이트)의 정형 또는 심지어 데이터베이스형태가 아닌 비정형의 데이터 집합조차 포함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라고 되어 있다. 빅데이터가 데이터가 아니라 “기술”이라는 얘기다. 데이터가 커지면 더이상 데이터가 아니라 “기술”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한다는 말인가? 납득하기 어려운 정의다. 빅데이터 사업의 지지부진이 큰 데이터가 없어서라는 변명이 분석 “기술”은 있는데 분석할 “자료”가 없기 때문이라는 사술邪術로 들리는 까닭이다.
미국에서 빅데이터는 어쨋거나 “자료”다. Laney (2001)는 전자상거래에서 자료관리 문제가 세가지 차원에서 폭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빅데이터는 깊이와 폭이 큰 자료(high volume)이고, 자료가 빠르게 생성되고(high velocity), 형식과 구조가 다양한 자료(high diversity)다. Wikipedia에는 너무 크고 복잡해서 기존의 자료처리방법으로는 요리하기 어려운 자료집(data sets)이라고 적혀있다. 빅데이터 업체라 할 수 있는 SAS와 IBM도 규모가 크고, 대량으로 발생하고, 다양한 형식을 가진 자료라고 정의하고 있다. 상식에 맞고 현실성이 있는 정의이다.
어쩌면 비약으로 들릴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자정부에 관한 정의도 비슷하다. 2001년에 제정된 한국 전자정부법 제 2조는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행정기관 및 공공기관…의 업무를 전자화하여 행정기관등의 상호 간의 행정업무 및 국민에 대한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정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2002년 제정된 미국 전자정부법 Section 3601에는 정부가 웹기반의 인터넷과 정보기술을 이용하는 것(“the use of the Government of [W]eb-based Internet applications and other information technologies”)이라고 적고 있다. 한국의 전자정부가 당위나 신화에 가깝다면 미국의 전자정부는 상식과 현실에 가깝다. 어느 정부나 한국에서 정의한 전자정부를 꿈꾸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정의에 꼭맞는 전자정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애초부터 한국의 전자정부는 현실과 다른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현재 3.0으로 진화하면서 “그들만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 전자정부 2.0이든 3.0이든 “이명박근혜 정부”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아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무엇이 빅데이터인가?
빅데이터는 주로 (1) 디지탈 거래자료 (예컨대, 신용카드 사용내역), (2) 감시카메라, 인공위성 등에서 얻은 사진과 영상 자료(예컨대, CCTV와 remote sensing), (3) 이동통신 자료(예컨대, 교통카드, 무선결재, 무선전화 사용 자료), (4) 사회매체(social media)에서 발생된 자료 (예컨대, Facebook, Blog, Youtube, )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주요 관심은 특별히 사회매체의 한 종류인 사회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에서 일어나는 대화나 인터넷 정보(뉴스 기사)다. (1)과 (3)은 기존의 방법대로 일정한 형식으로 잘 정리된 자료인데 관측치 수만 매우 크고 계속 생산된다는 특징이 있다. (2)는 그림이나 영상 자료라는 특성이 있다. Facebook, Twitter, Skype, 카카오톡 등에는 문자정보 뿐만 아니라 사진, 동영상, 음성, 이진파일과 같은 비문자 정보가 담겨있다. 하지만 비문자정보는 분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빅데이터 분석은 사실상 문자정보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사진과 동영상을 분석하여 지하철의 혼잡도를 측정하고 특정한 사람들의 행위(예컨대, 테러)를 판별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빅데이터의 대표성은 있는가?
빅데이터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전체 모습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용카드나 교통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빅데이터에서 빠진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거나 시골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 역시 제외된다. 인터넷이나 사회망서비스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와 행동도 빅데이터는 담고 있지 않다. 그러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망서비스에서 글을 남기고 대화에 참여하는가?
한국 시민들의 참여도는 높은 편이지만 그래도 웹마실(Web surfing)을 다니면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눈요기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아무나 블로그를 시작할 수 있지만 좋은 블로거가 되기는 쉽지 않다. 소위 파워 블로거는 교육을 많이 받고 지식과 능력을 가진 교수, 언론인, 변호사들이다(Hindman 2009). 결국 빅데이터는 이런 소수 엘리트나 적극 참여자의 말을 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대표성을 가지기 어렵다.
또한 이름을 가리고(익명으로), 돈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은 칼의 양날과 같다. 웹이 등장하기 전에는 의사표시를 하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화의 품격과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른바 “구글세대(Generation Google)”에서 피하기 어려운 가상공간의 시궁창(cyber-cesspool)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사회매체를 남용하며 그 폐해弊害를 관리하기가 어려운지를 보여준다(Levmore and Nussabaum 2010).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회매체를 선하게 사용하여 유용성과 즐거움을 얻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사회의 일부 조각을 반영하는 빅데이터와 과장, 왜곡, 조작 등으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빅데이터를 분석한다면 그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가 될 것이다. 아무리 수퍼컴퓨터를 동원하고 엄청난 기법을 적용한다고 해도 분석결과는 현실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 있다. 일단 쓰레기가 들어가면 수퍼컴퓨터이라 한들 쓰레기를 토해낼 수밖에 없다(garbage in, garbage out). 자료를 기반으로(data-driven) 하는 방법론의 숙명이다. 이런 빅데이터라면 아무리 규모가 크다 한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확실하게 틀린 결과를 내놓을 뿐이다. 시민들이 사고가 난 현장의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어서 Facebook에 올린 사진을 보고 사태를 수습하는 것과 가상공간의 시궁창에서 벌어지는 싸구려 잡담을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아무리 사례나 관측치 수가 크다 해도 말이다.
빅데이터는 얼마나 커야 하나?
빅데이터는 덩치가 크고 다양한 형태를 가졌기 때문에 기존에 자료를 저장하고, 손질하고, 분석하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빅데이터라는 식이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다. 기존의 방법으로 빅데이터를 적절하게 처리할 수 없다면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기존 방법은 계속 발전하고 진화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웹이 출현하던 90년대 이전의 방법인가?
먼저 얼마나 커야 빅데이터인가? 관측치수가 몇 개면 되는가? 1억 개면 족한가? 변수가 몇 개쯤 되어야 하나? 저장공간은 어떠한가? 1 Peta (1,024 Tera) 바이트면 되는가? 올해는 Peta 바이트면 되고 내년에는 Zeta (1,024 Peta) 바이트면 만족하겠는가? 이런 식이면 20년 전에도 빅데이터는 존재했을 것이고 그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 수십만 개 관측치와 변수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Giga (1,024 Mega) 바이트는 꿈같은 크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20 Mega 바이트 하드디스크를 보고 나는 얼마나 감동을 했던가?
누구한테 큰 데이터인가?
사실 데이터가 큰지 아닌지, 복잡한지 아닌지는 연구자의 처리 능력과 기술에 따라 다르다. 누구에게 크고 복잡한 데이터냐가 중요하다. 관측치가 10개라면 유치원생에게는 버거운 크기일 테지만 중학생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몇 백 개는 대학생에게 만만하겠지만 몇 십만 개는 부담스러울 것이다. 만 개는 유치원생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다. 몇년 전에 한 학생이 천만 개도 넘는 어마어마한 거래정보라며 들고 왔다. (1)번 빅데이터인 디지탈 거래자료였다. 자료처리 능력이 부족한 그 학생에게 몇 Tera 바이트는 “수퍼 빅데이터”였을 테지만, 내게는 “껌값”은 아니어도 랩탑에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그냥 그렇고 그런 자료일 뿐이었다. 아는 사람은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불가능이자 기적이자 충격이다.
어쩌면 빅데이터라며 호들갑을 떠는 인간들은 정작 자료가 무엇인지, 어찌 분석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지 모른다. 실제 자료를 손질하거나 요리해 본 경험이 없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칼로 무를 써는 것만 봐도 황홀해하며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는 위인들일는지 모른다. 그래서 빅데이터 드라마를 쓰고 신화를 만드는지 모른다. 자료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면서 빅데이터라는 “연기”를 그럴듯하게 해서 사람들을 호려먹는 부류는 아닐는지... 천만 개가 넘는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감탄하며 경이롭게 바라보던 그 학생의 얼굴과 빅데이터를 팔고 다니는 바람잡이나 장사꾼들의 얼굴이 겹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럼 수퍼컴퓨터면 되겠니?
자료처리에 관한 지식과는 별개로 실제 자료를 처리할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따져보자. 컴퓨팅 파워를 생각해 보자. 빅데이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복잡하다니 컴퓨팅 파워가 가장 빠르다는 수퍼컴퓨터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수퍼컴퓨터는 어떤 절대 컴퓨팅 파워 이상을 가진 컴퓨터가 아니라 https://top500.org/에 6개월에 한 번씩 발표되는 목록에 나와 있는 컴퓨터를 말한다. 작년 11월 기준 세계 최고 컴퓨터인 중국의 Sunway TaihuLight는 CPU라 할 수 있는 core가 1천만 개, 주메모리로 1.3 Peta 바이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컴퓨터로 처리해야 하는 자료라면 충분히 빅데이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랩탑으로도 충분히 분석할 수 있는 자료라면 빅데이터라고 하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그렇다면 빅데이터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컴퓨팅 파워를 가진 수퍼컴퓨터 사용자란 말인가? 과연 몇 명이나 수퍼컴퓨터를 사용해서 빅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는가?
그러면 대한민국은 현재 얼마나 컴퓨팅 파워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 한국 기상청에서 가지고 있는 Cray사의 Nuri와 Miri 각각 46등과 47등(1년 전에는 28, 29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core가 똑같이 7만 개다. 날씨 예측을 잘못한다고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그 컴퓨터다(사실 컴퓨터가 무슨 죄가 있나?). 그리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의 iREMB가 351등 (만 4천 core), 어느 제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가 404등(만 6천 core)이다. 고작 이 네 대 뿐이다. 서울대학교의 천둥(2012년 기준 277등, 8천 core)은 벌써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더 이상 수퍼컴퓨터가 아니라는 소리다.
현재 미국, 중국, 일본이 수퍼컴퓨팅을 주도하고 있다. 중국은 1등과 2등을, 일본은 6등과 7등을 차지하고 있는데, 10위 밖에도 두 나라의 수퍼컴퓨터는 즐비하다. 물론 미국은 1, 2등을 놓쳤지만 누가 뭐래도 수퍼컴퓨팅을 주도하고 있다. 빅데이터가 정말 크고 복잡한 데이터라면 한국은 미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 앞에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다윗과 골리앗 차이 그 이상이다. 수퍼컴퓨터로 치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사우디 아라비아보다도 못하다. 한국에 아무리 큰 빅데이터가 있다 해도 현재 담아서 처리할 만한 컴퓨팅 파워는 허망하리만치 초라하다. 무역 10대 강국에 전혀 걸맞지 않은 허접한 수준이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도 빅데이터 옹호자와 정부는 데이터가 엄청 크다고만 하고 수퍼컴퓨터를 새로 사거나 만들자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일이다. 3살박이 아이에게 하늘이 얼마나 큰지, 눈이 얼마나 오는지, 기차가 얼마나 긴지, 아버지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우동을 얼마나 먹을지 차이가 없다. 똑같이 두 팔을 찢어지도록 벌리고 입으로 “이—만큼 많—이”라고 답할 뿐이다.
빅데이터 전용 분석법이 있나?
그러면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별도 방법이 있는가? 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기존의 방법론을 적용하되 일반 사용자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방법을 개선하고 시각화를 강조하는 듯하다. 10여년 전 미국에서 열린 SAS사용자 학회에 참석했을 때 SAS가 내세웠던 JMP (http://jmp.com)가 그러했다. 마우스로 꾹꾹 눌러서 원하는 분석 결과를 바로 알려주고 그래프로 표시해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발표자는 이제 더 이상 통계분석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벌써 지금 빅데이터 옹호자들이 하고 있는 얘기를 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지만 현란한 화면 뒤편에서 실제 이루어지는 분석은 기존의 통계기법일 뿐이다. 회귀분석이든 분산분석이든 T-test든 방법론은 그대로이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다를 뿐이다.
현재 미국에서 Data Science 혹은 (Data) Analytics라는 이름으로 학위 프로그램이나 학과가 생기고 있다. 모두 Big Data를 염두念頭에 두고 시류를 쫓고 있다. 예컨대, 인디애나 대학교는 몇 년 전부터 School of Informatics and Computing (https://www.soic.indiana.edu)에서 Master of Science in Data Science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교과과정은 기존의 Computer Science, Informaiton and Library Science, Informatics 과목에 더하여 통계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계학은 Introduction to Statistics, Exploratory Data Analysis, Statistical Learning and High-Deminsional Data Analysis, Baysian Theory and Data Analysis, Applied Linear Models, Reproducible Results in Stats, Topics in Applied Statistics 등이다. 과목 이름을 자세히 살펴 보라. 컴퓨터과학, 사회정보학(informatics), 통계학 등이 잘 결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빅데이터 학위 프로그램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빅데이터용 회귀분석”같은 과목이 없다. 기존 과목을 기존 교수진이 가르치고 있다. 같은 포도주를 예쁘장한 새 잔에 담은 셈이다.
요즘 방송 출연자들이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라며 그래프를 가져와 설명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기억컨대, 사회망서비스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시간단위로 빈도분석(frequency analysis)하여 추세를 따져보는 것이 전부였다. 방법론으로 치면 기초 수준의 분석방법이다. 관측치 수가 크고 멋진 그래프로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 외에 뭐가 새롭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과관계냐 상관관계냐?
저자는 빅데이터가 상관관계를 말해줄 뿐이며 기존의 “스몰데이터”는 인과관계를 말해준다고 했다(99-100쪽). 그래서 상관관계를 말해주는 빅데이터가 “스몰데이터”에 비해 나을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은 사실 공정하지 못하다. 빅데이터이든 스몰데이터든 분석방법이 다르지 않다면 인과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예컨대, 회귀분석(혹은 이런 류의 계량분석)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밝혀주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해서 회귀분석은 처음부터 인과관계를 가정하고 있지 않다. 결국 상관관계를 말해줄 뿐인데 마치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해석할 뿐이다. 빅데이터든 스몰데이터든 마찬가지다.
변수 사이의 인과관계는 분석방법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어떻게 자료가 발생되는가(data generation process, DGP) 혹은 변수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등을 따져서 설정해주는 것이다(김수영 2016: 24). 연구자가 머리 속에 그리고 있어야 하는 큰 그림(분석틀)에 관한 문제다. 사물과 현상을 이해하는 이론에 관한 문제다. 결코 빅데이터냐 스몰데이터냐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이다.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고 그 가설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 이론이 없이 데이터를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154쪽).
요즘 통계분석기법과 컴퓨팅 성능이 고도로 발달했다 해도 컴퓨터가 알아서 데이터를 분석해서 원하는 결과를 내주지 못한다. 이렇게 데이터에서 그럴듯한 변수관계나 모델을 끌어내는 낚시질(data fishing)은 유희遊戲일는지는 몰라도 과학은 아니다. 하물며 분석결과를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하는 일임에랴.
항상 큰 것이 좋은가?
N(관측치 수)으로 치자면 빅데이터가 꼭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자료를 설명할 때는(descriptive statistics) N이 큰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분석모형을 통하여 통계추론을 할 때는(inferential statistics)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분석모형에서 일정한 효과크기(effect size)와 통계증거력(statistical power)이 주어지면 적정한 표본크기(sample size)가 결정된다. N이 지나치게 크면 통계증거력이 너무 커서 분석할 필요성이 사라지고(의미없는 분석이 되고), N이 지나치게 적으면 신뢰성이 떨어지게 된다. N이 크면 클수록 좋다며 빅데이터를 찬양하는 것은 단지 무지거나 착각이거나 미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대표성을 가진 랜덤샘플을 뽑을 것이가와 분석모형에 따라 적정한 샘플수를 결정하는 일이다. 빅데이터는 이런 랜덤샘플링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예컨대, 빅데이터가 사회매체에서 얻은 대화나 반응에 의존하는 한 자기선택(self-selection)문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빅데이터가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 빅데이터의 정신줄은 한마디로 N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이다. 덩치 큰 N으로 문외한門外漢인 청중을 윽박질러(압도하여) 자신이 원하는 (진리와 상관없는) 주장을 강요하기에 딱 알맞는 주술呪術이다.
빅데이터와 개인정보보호
“빅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빅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빅데이터가 부족하니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국민들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라고 한다. 그리고 또 말한다. 빅데이터 분석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없다고 말이다”(80쪽). 저자의 비판은 세 가지다. 하나는 빅데이터가 없어서 빅데이터 산업 부흥이 안되니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국민 정보를 공개하라는 논리 모순이다. 빅데이터 산업의 실패를 빅데이터가 아니라 공공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정부의 탓으로 돌리려는 술수라는 것이다(81쪽). 또한 공공데이터 포털을 만들어 국민들의 비밀스러운 개인정보를 무방비 상태로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다고 우려한다(77-78쪽). 마지막으로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라는 것도 미봉책彌縫策이어서 “비식별 조치된” 개인정보 조각 조각을 끼워맞추면 재식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재식별도 못하는 빅데이터 분석 기술이라면 모든 개인 정보를 다 공개한다 한들 쓸모있는 분석을 할 수 없을테니(줘도 못먹을 테니) 공공 정보를 공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앞뒤가 안맞는 주장이다(80-81쪽).
이런 비판을 곱씹으며 몇 가지 생각이 든다. 먼저 빅데이터를 그때 그때 편리한 대로 둘러댄다는 느낌이다. 보통은 사회매체에서 벌어지는 대화처럼 손질되지 않은 자료를 말하다가 정부의 공공 정보를 요구할 때는 잘 손질되거나 (1)과 (3)과 같이 덩치가 큰 자료를 지칭한다.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매체에서 쓸만한 것을 건지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의 정보를 담은 공공데이타베이스를 공개하라고 다른 과녁으로 화살을 돌렸을는지 모른다.
저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공공데이터 포털은 다행히(?) 그냥 시늉내기에 머물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은밀한 정보도, 의미있는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자료도, 분석에 유용한 형태로 손질된 자료도 찾기 어렵다. 생색을 낼 뿐이다. 쉽게 말해 http://data.go.kr은 http://data.gov를 껍데기만 베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어찌 해서 그럴듯한 웹집을 만들기는 했는데, 수십 년 치 자료를 한꺼번에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해오던 자료축적 수준 그대로를 보여줄 뿐이다. 의미없는 국가단위 통계, 제공 주체에 따라 띄엄띄엄 올려진 자료... 자료를 사용하라고 공개한 것인지, 사용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소리인지 알쏭달쏭하다. 게다가 웹표준과 웹접근성(Web accessibility)과도 거리가 있어 한글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용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하다. 표준도 지키지 않고 여기 저기에 자바스크립(javascript)을 덕지덕지 발라놨으니 말이다. 설령 국가기밀을 수두룩하게 올려놓았다 해도 멀쩡한 외국인이 빼가기 힘든 상황이다. 전자정부 3.0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료보안에 각별히 심혈을 쏟은 것같다. 누가 되었든지 간에 쓸모있는 정보를 캐내기 어렵게 해놨으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야 할는지... 그러니 김교수는 안심하고 두 다리 쭉 뻗고 주무시기 바란다.
한편 개인정보는 자료수집부터 저장, 수정, 사용(접근, 전달, 분석 등), 폐기 전 과정에서 보호되어야 한다. “감출 게 없으면 상관없다”는 논리(nothing-to-hide argument)는 자료를 수집하는데만 시선을 돌림으로써 자료처리 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Solove 2011). 예컨대, 저자가 지적한 대로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는 위험할 것 같지 않은 자료 조각을 붙이면 “재식별”이 가능하다. Solove (2011)는 이런 과정을 aggregation이라고 불렀다.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식별정보를 지우거나 일부 자료만 공개하는 자료보안 기법은 빠르게 진화하는 자료 분석 기술에 무력하다.
마지막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그래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법에서 정한 방법과 절차에 따라 개인 정보가 수집되고 저장되고 수정(공개)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느냐가 중요하다. 개개인이 자신의 정보가 어찌 처리되는지 전 과정을 지켜보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개인 정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개인정보 문제에 관하여 국회와 사법부가 어떻게 행정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지를 따지는 문제이다.
행태주의와 거대주의는 왜?
저자는 미국의 빅데이터 유행은 행태주의 (behavioralism)와 거대주의 (gigantism)라는 두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다(123-128쪽). 특히 행태주의는 관찰가능한 자료를 계량방법으로 분석하는데, 객관성으로 측정된 행태 자료 간의 상관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행태주의의 근본정신이라고 주장했다(151쪽). 그런데 빅데이터가 밝혀내는 것이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니까 빅데이터는 행태주의 원리와 그 근본이 같다는 것이다(151쪽). 또한 빅데이터 사업자들은 계량분석을 위주로 한 행태주의 방법론을 이끌었던 통계소프트웨어 회사와 여론 조사 회사라고 했다(11쪽). 말하자면 행태주의 = 객관성있는 경험자료 = 계량분석 = 상관관계 = 빅데이터라는 연관성이다. 또한 거대주의는 언제나 큰 것이 좋다거나 끊임없이 탐욕을 멈추지 않는 자본주의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과 비판은 지나쳐 보인다. 행태주의나 계량분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근본을 잊고 엉터리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문제는 빅데이터가 아니다
사실 문제는 빅데이터가 아니다. 상식에 가까운 자료조차 챙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료를 만들지 않을 뿐더러 있던 자료도 치우고 지우고 고치는 세상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을 모른다고 하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세상이다. 청문회, 검찰 조사, 법원의 재판에서조차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사실과 진실과 이성과 상식을 빅데이터라는 미신과 허구와 환영으로 덮어버리려는 세상일는지 모른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하다가 엉겁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빅데이터를 끌어다가 뭐라도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거나 자기최면을 거는 것은 아닐까?
결국 빅데이터가 아니라 한 올, 한 조각이라도 멀쩡한 데이터가 아쉬운 세상이다. 당연히 있어야 하고 필요한 자료를 챙기는 것이 먼저다. 빅데이터를 논하기 전에 사회의 기본 정보를 알차게 축적하여 효율성있게 사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해야 한다. 자료를 모으고, 저장하고, 분석하고, 폐기하는 전 과정에서 개인정보가 보호될 수 있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컴퓨팅 파워를 자랑하는 21세기의 정보관리 제도가 500년을 버텨온 조선왕조의 체제보다도 못한대서야 어디...
그냥 기본기에나 충실하라
중요한 것은 한마디로 기본기라 할 수 있다. 빅데이터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일상의 정보를 제대로 구축하여, 알맞은 형식과 방법으로 필요한 때에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도 GSS와 CPS같은 자료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또한 거창하게 빅데이터 분석기술을 따지기 전에 컴퓨팅 파워를 늘리고 기본에 해당하는 자료분석 방법부터 철저하게 익혀야 한다.
저자는 과거를 기록한 자료를 통하여 미래를 예측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에 귀기울이지 말 것을 권한다. 물론 사람들의 감정이나 의견이 아닌 사람들의 행동이나 물리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타당하다. 정부가 나서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재난과 범죄를 예방하려 애쓰기보다는 법과 절차에 따라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주었으면 한다. 규정대로 건물과 구조물을 살피고 주민들의 요구에 성심성의껏 대응해 주는 정부가 되었으면 한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그래서 최대주의 행정이 아니라 최소주의 행정을 구현했으면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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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2016. <구조방정식 모형의 기본과 확장: Mplus 예제와 함께>. 서울: 학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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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dman, Matthew Scott. 2009. Blogs: The New Elite Media. In The Myth of Digital Democracy, 102-128,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Laney, Doug. 2001. 3D Data management: Controlling Data Volume, Velocity, and Variety. Application Delivery Strategies 949 (6 February).
Levmore, Saul, and Martha C. Nussabaum,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Solove, Daniel J. 2011. Nothing to Hide: The False Tradeoff Between Privacy and Security. New He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책읽기: 김동환의 <빅데이터는 거품이다>. <최소주의행정학> 2(2): 2-6.
윈스턴의 1984년과 윤석열의 2022년 (3) | 2022.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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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초월한 박근혜와 최순실의 엽기 행각이 사람들을 놀래키고, 분노케 하고, 좌절시키고, 분열시키고 있다. 뜬금없이 “창조”를 말했지만 비선과 비정상으로 꼼꼼하게 챙겨낸 변태 추문이었다. 현재로서는 그 추문의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기염氣焰을 토했지만 단지 그들만의 행복 시대였다. 밑도 끝도 없이 “미래”를 말했지만 박씨의 아버지가 총맞아 죽었던 유신 독재 시절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이성과 상식과 염치를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부 관료제를 멋대로 부려먹은 자들이다.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가 망가뜨린 자들이다. 공직사회를 제멋대로 흔들어 기강을 무너뜨린 자들이다. 어찌하여 관료제와 공직자들이 그리도 속절없이 휘둘렸단 말인가?
권한 침해와 행정의 합리주의 현상
이문영(1980)은 정부의 행정과정에서 “합리주의 현상”이 발생하거나 계속되지 못하는 것은 “권한 침해” 때문이라고 단언했다(6쪽). 권한 침해는 “아랫사람이 고유하게 갖는 권한을 윗사람이 부당하게 빼앗는 관행”을 말하는데(이문영 2001: 111), 권위주의나 관료주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컨대, “정치의 행정에 대한 극도의 간섭증, 엽관주의,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의 하급기관이나 하급자에 대한 권한 남용,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서] 업무담당기관이 아닌 … 예산기관의 횡포” 등이다(이문영 1980: 6).
권한 침해는 웨버(Max Weber)가 합리성을 가장 잘 갖춘 형태로 묘사한 관료제 이상형(ideal type bureaucracy)과 거리가 멀다. 업무가 기능에 따라 분명하게 나뉘어 지고, 자의성이 배제된 합당한 규칙에 따라 조직이 통제되고,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계약에 의해 자리에 임명되고, 업무 성과에 따라서 승진이 이루어지는 관료제의 특성을 해체한다. 단지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직책과 권한을 무시한다면 업무가 분화되지 않은 것이고, 합의된 규칙은 적용되지 않으며, 전문 지식은 인정되지 않고 (웃사람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허세를 부리면서 만능 전문가 행세를 하고), 성과가 아닌 위계질서에 의한 무조건 상명하복으로 승진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가 웃사람이 되느냐, 누가 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관료제가 좌우된다는 뜻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권한 침해는 정부 관료제를 넘어서 민간기업과 예술인에게까지 미친 엽기와 변태였다. 公과 私를 넘나든 이른바 “갑질”의 최고봉이었다. 공무원 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은 물론이고 최씨 존재를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시하고 보복을 가했다. 무자비한 폭력 그 자체였다. 이런 관료제에서 행정은 예측가능성과 연속성과 안정성을 가질 수가 없다. 언제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자리에서 쫓겨나갈 지 알 수 없다. 힘센 자들의 “갑질” 때문에 이성과 상식을 따라 일하기 어렵다. 공직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공직자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을 가진 관료가 아닌 그저 “네 네”하는 심부름꾼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 독재자 편에 줄설 것을 강요하는 관료제는 좋은 경험을 축적시키지 못하고 합리주의를 구현할 수 없게 된다.
합리주의는 행정이 가야할 길
그러면 왜 합리주의인가? 그것이 행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자 걸어가야 할 “제 길”이기 때문이다(이문영 1980: viii). 官의 권력 남용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난동을 불사하는 힘”이 부딪히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관의 정책과 민의 평화”가 호응하는 합리적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vii쪽). 官이 “옷을 입[은] 힘”을 행사하고 民이 자율성이 있는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백성의 정당한 의견과 요구를 정부가 존중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간 피를 보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vii쪽).
결국은 官의 권력 남용과 民의 난동은 모두 폭력인데, 이런 극단의 폭력이 난무하는 데서 합리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비폭력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통치자와 공무원이 권력 남용을 억제하고 백성들이 난동을 자제하는 것이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추고 합당한 말로 사실과 진리를 다투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그런데 官의 비폭력보다도 民의 비폭력이 훨씬 중요하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이문영 1990: 29).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29쪽). 주인이 부지런하고 모범을 보여야 머슴들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서 제대로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이문영 1991: 30).
물론 비폭력이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정부 관료제에서 합리주의나 합리성을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중간가치는 합리성 rationality이다”(1991: 118). 헤겔의 역사발전논리로 치자면 폭력은 정正(thesis), 비폭력은 반反(antithesis), 제 3의 가치인 합리성은 합合(synthesis)에 해당한다(이문영 1991: 30). 모순이 있는 상태를 부정하여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모순을 부정하는 反이 없이는 合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反을 내세운다(30쪽). 따라서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이문영의 초월윤리는 合인 합리성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反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30쪽).
공무원 이상형의 행동강령
이문영은 행정개혁은 (1) 인간계발을 위한 환경 조성 (권한 보장 작업), (2) 과학적 관리와 인간관계 향상, 그리고 (3) 적극적인 인간계발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이문영 1980: 4). 그런데 처음 두 단계에서 성공을 하는 것은 소극적인 행정조치일 뿐이어서 행정개혁을 완수完遂하기에는 부족하다(7쪽). 궁극적인 힘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데, “무엇에나 ‘네, 네’ 하는 사람이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좀더 독립적이며 자신을 갖고 있으며 근면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심히 탐색하는 사람”이 필요하다(7쪽). 이문영은 이러한 공무원 이상형이 따라야 할 행동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2001: 277, 465; 2008: 561).
(1) 공무원이 일을 하는‘방법’은 전문 지식(능률과 민주주의 이념 포함)을 매일매일 닦아서, 이 학문을 갖고서 조직 내에서는 상사를 존중하며 조직 밖에서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전문지식을 연마하지 않고 다만 상사에게 굴종하며 조직 밖의 국민들에게는 교만하는 것이 아니다.
(2) 공무원이 할‘일’이란 민주·복지국가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상사에게 상납하는 대가로‘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3) 공무원인‘사람’이란 전문 지식(능률과 민주주의 이념 포함) 앞에 서는 존귀한 존재이지,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존재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추문에서 우리가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 침해”나 과학적 관리 실패가 아니다. 물론 공사公私를 구분못하고 제멋대로 관료제를 휘젓은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 하지만 “공무원 이상형”에 가깝게 행동했던 공직자가 드물었다는 사실이 비수匕首가 되어 행정학의 가슴을 찌른다.
전문 지식을 닦아서 상사를 존중하고 국민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라, 공직자 대부분은 전문 지식을 내팽개치거나 악용하였고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 굴종하고 국민들에게는 교만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복지를 신장하고 정의를 실현한 것이 아니라 상사의 부당한 명령까지도 복종하는 대가로 이득을 챙겼다. 자율성을 가지고 전문성 앞에 당당하게 서는 공직자가 아니라 그저 상사와 조직에게 쓰여지고 버려지는 소모품이나 도구를 자처했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과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모습이 대조되는 이유다.
비루한 고위 공직자의 자화상
특별히 고등고시나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득의양양得意揚揚했던 고위 공직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비굴한 처신은 사람들을 참담하게 한다. 그들의 전문 지식이란 것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출세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을 뿐이다. 그들은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데에는 “염치불구”였고, 전문성에 걸맞는 사회 윤리와 책임은 나몰라라 했다. 공학도라면서 산소가스 이산화가스라는 박씨와 “심신이 회폐”한 “최선생님” 앞에만 서면 바짝 쪼그라들어 오금도 펴지 못하는 전문성이라니... 한때 하늘을 찔렀을 자존심과 자부심은 다 어디에 내팽개쳤단 말인가?
청문회에 나와서도 모른다거나 기억이 안난다거나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고위 공직자와 자칭 사회 지도층을 기억한다. 걸핏하면 나랏 일을 한다며, 혹은 공인이라며, 혹은 사회 발전에 기여해왔다며 온갖 공치사功致辭란 공치사는 다 늘어놓았던 자들 아닌가. 이런 자들의 비루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원문: 박헌명. 2017. 독재자의 권한 침해와 관료제의 합리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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