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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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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이 1월 28일 자 <경향신문>의 정동칼럼에 게재된 “민주당만 빼고”를 지난 달 13일 공직선거법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두어 주 전에 발행된 사설私說에 늦은 시비를 거는 것이 우습다. 쓸데없는 짓이다. 공당에서 언론사와 기고자를 고발하는 것도, 반발이 일자 고발을 취소하고 사과하느라 허둥대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껏 문학과 사상과 예술을 억압했던 자들이 이제와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민주당을 비난하는 일임에랴. 언론중재위원회가 12일 해당 私說을 공직선거법 8조(언론기관의 공정보도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냈지만, 이 소동을 법위반과 정쟁으로 보는 시각이 불편하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

일부러 날을 잡아 “민주당만 빼고”를 정독한 느낌은 한마디로 자괴감이다. 아무리 연구교수라지만 어설픈 “아줌마 논법”에 수구신문의 글쓰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인 상황에서 왜 “민주당만 빼고” 찍으라는 것인지... 멀쩡한 신문사에서 음식으로 치면 맛을 논할 수준도 안되는 먹을거리를 상에 올린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소위 “기레기”로 표현되는 언론인의 수준 그대로는 아닌지. 공직선거법을 어겼는지 표현할 자유를 침해했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와 신문사의 기본과 상식에 관한 문제다.

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최악이나 차악이나 나쁜 것은 매한가지여서 어차피 선거가 끝나면 상전노릇을 할테니 차악을 편드는 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결론은 선거도 정치도 없애야 한다(혁명을 해서라도 판을 뒤집자)가 아니라 뜬금없이 여당을 찍지 말라니... 최선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국민이 매번 차악을 선택했다가 배신을 당했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에 최선(틀림없이 모든 공약을 그대로 집행하는 정당)이 존재했단 말인가? 순진무구한 노녀老女의 두서없는 푸념이자 무책임한 망발이다.

그런데 정말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한 것이 잘못일까? 2월 16일 SBS의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한 글쓴이는 수구세력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민주당에게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싹수라도 보이는 자들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나름의 합리성이자 아량일 터이다. 하지만 강자(기득권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너도 잘한 것이 없다며 죽도록 발길질을 해대는 어리석음이다. 강자의 포악함에는 으레 그러려니 눈과 귀를 닫은 채 약자의 잘못만 야박하게 따지고 난도질하는 자들이다. 최악을 치죄治罪하지도 않으면서 강자의 편에 서서 차악을 훈계하는 짓이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모세를 원망한 못난 군중의 정신줄이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잃은 것이다.

인간에게 차라리 차악이 최선이다

소정 선생님(1986: 140)은 “물론 못난 야당이 어진 야당만은 못하다. 그러나 야당이 여당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는 신통치 않더라도 야당이 살아 남아 주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부정을 하는 구성원이 있는 [구조적으로 선한] 야당이 부정을 안하는 구성원이 있는 포악한 [구조적으로 악한] 여당보다 낫다”(1991: 308). 신이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을, 윤리적으로 나쁘지만 구조적으로 힘없는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1991: 307). 요셉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형(카인)에게 맞아죽은 아벨과는 달리 살아남아 최소한도의 회개라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던 형들을 용서할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요셉을 낳을 수 있었다. 한 단계 진전이다.

소정 선생님(1991: 306)은 “신이 최대의 개인윤리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점이 멋이 있다. 신은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자이다”라고 풀어냈다. 최소한의 변화(회개)라도 있어야 다음에 좀더 나은 권력의 견제자가 등장하며,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1986: 140-141). 그러니까 지금 당장 최선이 아니라고 해서 최악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인간에게 최선은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계속 타락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또 후회하면서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차악이 차라리 최선이다. 그러니 최소한이라도 악행을 돌아보고 말귀라도 알아들으려는 차악이 얼마나 귀한가. 어쨋든 그 미약한 시작이 없다면 어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악의 성장을 지켜보라

민주당이 여당이니까 구조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는 민주당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던 수구세력이다. 애초부터 친일부역세력과 친미반공세력을 등에 업고 지금껏 해먹고 있는 구조악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민주당이 집권하긴 했지만 여전히 민주세력은 위태롭고 아쉽다. 적폐청산도 개혁도 시원스럽지 못하고 더디기만 하다. 수구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패악질과 “침대축구”로 버티는 한 무던히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세월호 7시간을 양보해서라도 탄핵을 취해야 했다. 누더기질로 복잡한 셈법이 되었다 해도, 가짜정당으로 무력화되었다 해도 선거법을 바꿔야 했다.

수구세력의 파상공세와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지지도는 견고하다.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굼뜨지만 야곱(열린우리당)에서 요셉으로 성장해가는 변화를 보여준다. 하늘(백성)은 어리석지 않다. “민주당만 빼고”야말로 이상에 집착하여 이성을 잃은 자들의 횡설수설이자 “죽쒀서 개주는 짓”이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어린 새싹을 닦달하고 뿌리채 뽑아버려서야 어디...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최소주의행정학> 5(2): 1.

지난 여름 오랜 만에 원주에 다녀왔다. 25년 전 군복무를 시작한 곳이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몇년 전에는 원주에서 횡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 차를 몰아보았다. 출퇴근 버스를 타고 묵계리에서 전투비행단을 거쳐 원주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하지만 주변이 워낙 몰라보게 바뀌어서 오랜 추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원주에 가서 추억을 잃다

이번에는 옛날처럼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외곽으로 옮긴 터미널에 내렸다. 원주역에서 시작되는 A도로와 B도로를 직접 걸어보았다. 지금은 각각 원일로와 평원로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원주기독병원 앞 길모퉁이에 들어서니 당시 워크맨으로 즐겨듣던 김태영의 “피카소에게”가 들리는 듯했다. 불이 났다던 중앙시장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시원한 배를 고명으로 얹어주던 남경막국수집과 밥그릇을 요란스레 두드리며 돼지삼겹살을 볶아주던 식당은 찾을 길이 없었다. 생전 처음 서울역에 내린 촌놈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낯설기만 한 풍경에 발걸음을 돌렸다. 세파에 밀려 기어이 어딘가로 옮겨갔으리... 눈과 코와 귀가 기억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

같은 시절 대학원을 다녔던 분과 점심을 같이 했다. 몇년 만에 낯선 동네에서 회포를 나누었다. 혁신도시에 공공기관이 자리잡은 이야기, 죄다 논밭이던 황골이 카페촌으로 환골탈태한 이야기, 공부하던 친구들이 사는 이야기, 애들 키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행정학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연구원에서 오래 근무하고 있는 분이어서 요즘 무엇이 학계의 관심사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분위기가 어떤지 귀동냥이라도 할까 싶었다.

내가 받은 첫번째 인상은 열성을 가지고 매진하는 학자들이나 연구원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행정문제를 치열하게 논의하고 의미있는 규칙성을 찾아내는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주어진 연구과제를 때맞추어 “밀어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얼마나 현실과 이론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수치로 표현된 성과목표를 달성해야 살아남는 판이다. 질보다는 양이라 했던가. 이른바 잘 팔리는 주제로 논문이나 연구과제를 많이 생산해 내는 자가 장땡이다. 한가롭게 이론을 따지고 방법론을 따지고 의미를 되새기는 자들은 진화를 거부한 종이다. 아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낙오자이다.

두번째 인상은 행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직사회와 공직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연구원에서 지방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의 정보를 조사하여 축적하고 있지만 막상 쓸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숫자로 적힌 통계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대개는 수박겉핥는 정보일 뿐이다. 공공기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다가 마지 못해 생색만 낸 측면도 있다. 하지만 행정학자가 어떤 정보가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는지, 어떤 정보가 유용한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리뭉실하게 자료를 달라는 경우가 더 많다. 행정학자라지만 관료들이 현장에서 실제 일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책과 논문의 언어로 말하고, 관료들은 행정 현실의 언어로 말한다. 몇년 전 고위 공무원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꼈던 괴리감이다. 그 간극이 커지면 서로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알맹이는 없고 변죽이나 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이 행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쓸만한 정보를 줄 까닭이 없다. 어차피 제대로 이해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할 위인들 아닌가? 후원이나 연구과제나 따내기 위해 굽실거리는 학자의 자존심이라니.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행정학

지난 해 만난 어느 선배는 한국에서 행정학이 독립학문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대형서점에서 행정학 서각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제는 아예 사라졌다고 했다. 대신 행정학 책은 정치학이나 법학 책시렁에 곁다리로 꽂혀있다고 했다. 아님 공무원 수험서 서가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체성 위기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를 들를 때마다 행정학 서각이 거의 그대로인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몇년 전 어느 행정학자가 한국 대학의 행정학과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며 우려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행정학은 행정고시에나 필요한 한 과목 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행정학의 정체성과 유용성을 따지고 행정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30년 전에 비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행정학과 수와 학생 수가 줄어든 만큼 심각해졌다. 아니 행정고시에서 차지하고 있는 행정학의 존재감에 정확히 비례한 학과의 위상이라 말해야 하나. 고시로 흥했으니 고시로 망하게 되는가... 행정고시에 기대어 도끼자루 썩는 줄을 알면서도 안일했던 업보業報다. 화려하게 껍데기를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학문의 기반을 다지고 쓸모를 넓히는데 게을렀던 업과業果다. 이젠 잘 팔리지 않는 행정학 교과서보다는 방법론같은 실용서적을 출간하는 것이 낫다는 권고를 나는 자괴감으로 들었다.

행정문제에 답을 주는 행정학이 되어야

과거에 비하면 행정학 논문이 질과 양에서 많이 향상되었다. 외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과제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수치로 표시된 행정학 성과물이 얼마나 행정현실에서 쓸모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행정현실을 이해하고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한낱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기업과 함께 경영문제를 풀어감으로써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경영학에서 배워야 한다. 고시와 학위를 위한 행정학이 아니라 실제 정부의 일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학이 되어야 한다. 선문답같은 훈수질이 아니라 행정문제를 진단하고 현실적인 답을 주는 행정학이어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의 수치와 시련. <최소주의행정학> 5(1): 1.

미국 트럼프 정부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50억 달러(6조 원)를 요구하였다. 지난 2월에 어렵게 합의된 9억 2천만 달러(1조 원)에 비하면 황당한 금액이다. 말이 증액이지 일방적인 협박이다. 외교력이 아닌 군사력을 앞세운 힘자랑이다. 정치인의 협상이 아닌 트럼프의 입에서 시작된 장사치의 후려치기다. 적나라한 강자의 폭력이다. 피로 맺었다는 한미동맹의 민낯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의 민낯

한미동맹은 1951년 군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반강제로 빼앗기고 1953년 휴전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출발했다. 북진통일을 자신하던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도망간 뒤,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까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이다. 이후 한국군은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안주했고 1994년에서야 겨우 평시작전권을 이양받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으려 했으나 수구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딫혀 아직까지 표류하고 있다. 특히 유재흥劉載興은 한국전쟁에서 2군단과 3군단을 말아먹음으로써 작전권을 상실케 한 장본인인데, 그런 그가 2004년 전시작전권 환수를 반대하고 나섰다.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수구 세력의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 장면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스스로 나라를 만들거나 지킬 생각도 의지도 없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강자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하려는 자들이다. 미군이 없으면 북한에게 당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붙잡아놔야 한다. 한미동맹이 없는 “그들의 대한민국”은 없다. 그러니 지소미아 파기도 철회하고 방위비 분담금도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 대통령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누가 감히 불경스럽게 패권자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한 미국에게 500억 달러를 준다 한들 무슨 대수인가? 트럼프가 수천 명의 공녀를 바치라 한들 무슨 상관인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갈 돈도 아니며 자신의 딸이 끌려갈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징용이나 성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겪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일중러를 따지지 않는다. 나라와 민생이 망하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친일·종미·반공 수구 세력에게 한미동맹은 생명줄이자 성역이다. 국가안보가 우려된다면서도 한미동맹이 튼튼한지를 걱정할 뿐, 국방비를 더 내고 군역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작전수행능력을 높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주한미군을 줄이거나 철수한다는 말만 나와도 까무라치는 정신줄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내야 한다며 거품을 무는 자들이다(대체 왜 미국이 이런 자들을 지켜줘야 하나?). 전시작전권을 포기한 지 70년인데도 아직 환수 준비가 안되었다고 정색하는 자들이다. 60만 대군과 최신 무기가 있다지만 스스로 작전을 세워 제대로 병력을 움직이고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몸뚱아리는 사지 멀쩡한 어른이지만 머리는 백일된 아기 수준인 것을... 작전능력이 없어서 작전권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권이 없으니 작전능력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없다. 한미동맹이 만병통치라는 미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와 자신감이 중요

지금까지 한미동맹은 나라를 지키는 마법이었다. 수구 세력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퍼트린 신화였다. 한국과 미국이 혈맹이라지만 수구 세력의 짝사랑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는 군사적으로, 심리적으로 식민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라 간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상식이자 철칙이다. 150년 전 미국은 우리와 전쟁(신미양요辛未洋擾)을 치른 적이었다. 미국이 계속 동맹으로 남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냉엄한 국제질서다. 이런 마당에 백성들이 마르고 닳도록 한미동맹에만 목을 매고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처럼 군다면 한심한 일이다. 이제는 그 허상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스스로를 옥죄는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병력이나 무기가 아니다. 최고 용병을 데려오고 첨단 전투기와 미사일을 들여온다고 나라를 지킬 수 없다. 백성이 주인으로서 스스로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적이 쳐들어왔다고 모두 도망친다면 천하무적 용병인들 목숨을 걸고 싸울 까닭이 있을까? 아무리 한미동맹이 강고하다 해도 결국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또한 쓸데없는 자학이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무역과 군사력에서 세계 7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시민들의 대일본 불매운동은 우리의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이다.

합리적 근거를 대면서 할 말을 하라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는 사실상 폭력 행사다. 하지만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안된다(2008: 68-69). 날선 말로 트럼프를 비난하거나 미대사관에 쳐들어가면 안된다. 이런 난동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이다. 아무리 억울하고 무섭다 해도 끝까지 참고 비폭력에 의지해야 한다. 보편성있는 원칙과 상식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할 말을 해야 한다. 강자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올바른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비폭력은 매를 맞으면서도 할 말을 하는 것이지 공포에 질려서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1991: 118). 트럼프의 도발에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내린다면 굴종이지 비폭력이 아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비굴한 것이 아니며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의 품격을 높인다(1991: 19; 2001: 149).

예컨대, 주한미군의 유지비가 많이 든다고 하니 제대로 원가를 따져본다. 분담금에 포함되지 않는 시설비, 전기료, 물세 등을 포함하여 계산서에 올린다. 미국이 누리는 편익도 하나하나 따져 수치로 보여준다.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현재 분담금도 과한 것임을 증명한다. 한미동맹이라는 약발이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이제 깨어있는 국민의 의지와 자신감으로 할 말을 하면 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한미동맹의 민낯. <최소주의행정학> 4(12): 1.

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달 14일 사임했다. 장관에 임명된 지 35일 만이다. 8월 9일 장관후보로 지명된 이후 수구세력들은 수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수구 야당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의혹공세에 집중하다가 9월 2일로 예정되었던 인사청문회를 무산시켰다. 조후보자는 당일 11시간 가까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여당과 야당은 우여곡절 끝에 6일 인사청문회를 열었고,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한 상태에서 문대통령은 9일 장관임명을 결정하였다. 이른바 “조국전쟁”이다.

“가족사기단”과 “가족인질극”

수구 야당은 반발하면서 조장관을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적법하게 임명된 장관을 장관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라고 우겼다. 제기된 의혹을 반복하여 물고 늘어지면서 국정감사는 “조국감사”가 되었다. 수구 언론도 조장관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고 검찰발 기사를 뿌려대고 있다. 검찰의 행보에 따라 국면이 요동치고 있다. 이젠 조장관 여식이 꼴지인 주제에 포르쉐를 타고 다녔고, 시험도 치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는 낭설은 벌써 고조선 시절의 얘기가 되었다. 약발이 다한 소재는 사실이든 아니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수구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파렴치한 “가족사기단”이라는 낙인이 판결문에 찍힌 느낌이다.

검찰은 조장관 식구들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까지 샅샅이 훑고 있다. 수구 세력의 고발에 따른 적법한 조사라고 했다. 인사청문회일정이 합의된 다음 날인 8월 27일 강제수사를 시작하여 정국을 흔들었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던 6일 밤에는 조장관 배우자를 조사없이 기소하였고, 16일부터는 여식女息과 자식子息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23일에는 11시간 동안 조장관 자택을 수색했다. 지금까지 백여 차례에 이르는 압수수색이 있었다. 수구 언론과 야당은 검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침내 조장관의 당질(9월 16일), 배우자(10월 24일), 동생(10월 31일)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이제 검찰의 칼날은 조장관을 향하고 있다.

이에 유시민씨는 유튜비 방송 <다스뵈이다>와 <알릴레오>에서 참전을 선언하면서 이 사건을 “가족인질극”이라고 규정했다.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조장관을 낙마시키기 위해 검찰이 조장관의 식구들을 잡아놓고 벌이는 인질극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털어도 조장관에게서 먼지가 나오지 않으니까 병약한 배우자를 앞세우고, 딸과 아들을 고졸로 만들겠다며 위협한다. 애초의 계산법으로는 검찰이 청와대에 불가 신호를 주면 문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고, 안되면 압수수색과 기소로 겁을 주면 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하고, 이것도 안되면 실력행사를 통해 대통령이 장관임명을 포기하도록 한다. 관련자를 구속기소하고 피의사실을 흘리면 여론을 흔들 수 있다. 지지율 하락을 이겨낼 장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문대통령과 조장관은 검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막힌 인간”들이었다. 웬만하면 다들 알아서 물러나고 자수하건만, 참으로 눈치도 요령도 없이 쇠심줄같이 질긴 자들아닌가. 그래서 사달이 난 것이다.

비록 장관이 사임을 했지만 검찰은 여기서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다. 사퇴하든 말든 목표는 조장관이기 때문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장관의 식구들이 “가족사기단”임을 증명해야 한다. 정경심씨를 구속한 뒤에도 수차례 불러야 하는 까닭이 있다. 사실보다 형식이다. 검찰 체면에 “모냥빠지는” 일은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4일 <뉴스공장>에 출연한 조민씨는 고졸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어머니가 검찰의 압박에 못이겨 자녀를 지키기 위해 허위자백을 할까봐 괴롭다고 했다. 현직 부장검사인 임은정씨는 조장관의 사임을 두고 “[검찰이]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라고 적었다. 하지만 가족인질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

검찰조사를 지켜보자면 의금부에서 무슨 대역죄인을 다루는 듯하다. 조장관 식구들이 저질렀다는 혐의는 진학(인턴쉽, 장학금, 논문저자),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문제다. 과연 최고 검사들이 달라붙어 두 달 넘게 조사할 사항인가? 학생이 인턴쉽을 하루 더하고 덜하고, 고등학생이 제 1저자가 되는지, 장학금이나 표창장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가 왜 이리 문제가 되는지, 또 왜 밝히기 어려운지. 컴퓨터를 잘 모른다는 정씨가 어떻게 포토샵으로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것인지. 대놓고 “스펙”을 권하는 그런 법제도를 만들어 활용해놓고 이제와서 전혀 몰랐던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 옳은 일인지. 수백 억이 왔다갔다 판에 기껏해봤자 30억도 안되는 돈을 가지고 기업을 주물렀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웅동학원의 “어르신”이 “애”로 취급하는 조장관이 이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인지. 불법을 저질렀다면 경중에 따라 벌을 받을 일이지만 검찰이 시퍼런 칼을 들고 밝히려는 혐의들은 초라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반면 세월호 침몰, 삼성의 경영권 승계, 신속처리안건 파동,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등에 대한 조사는 어찌하여 이리도 더디고 물러터진 것일까?

조장관에 대한 비난은 (1) 불법이나 탈법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이다. (2) 평소에 정의와 공정을 강조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던 사람이 뒤로는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게다가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의 몫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첫번째 비판은 과하지 않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불순하고 악랄하다. 붓다나 예수나 공자를 모셔와서 법무부장관을 시키자는 소린가? 언행일치를 못했다고 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수구세력의 일상화된 언행불일치는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진보세력에게는 가혹하게 도덕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합당한가? 또한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강자로 보고 비난하는 것은 착시錯視다. 정말 그랬다면 언론이든 야당이든 검찰이든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들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주물러 온 세력이 한순간에 해체되겠는가?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평등·공정·정의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수구세력의 교활한 계략에 놀아나는 순진함이다.

지난 8월 23일부터 서울대, 고대, 연대, 부산대에서 촛불집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불공정과 진상조사를 외쳤지만,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자신만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을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절한 불공정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대학가 집회는 그 자체로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다. 과학고, 외고, 자사고 학생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작 개혁되어야 할 적폐가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고 있으니... 주최자 논란도 있었지만 대학가 촛불집회가 500여명에 머물고 흥행에 실패한 까닭이다.

진영논리? 국론분열?

결국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적나라한 힘겨루기다. 친일반민족세력과 일반 백성의 가치 충돌이다. 조장관의 친구라는 진중권씨는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가지고 지금 미쳐버린 게 아닌가”라며 한탄했다. 참여연대의 김경율 회계사와 신문칼럼을 써온 서민 교수 역시 다들 진영논리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모두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강자의 힘에 당했던 피해의식이랄까, 도덕우월성에 대한 집착이랄까, 강박이랄까? 왜 그 가혹한 잣대를 조장관 식구들에게만 들이대는가? 자기 편에 가혹하고 남의 편에 관대한 것이 정의이고 진리인가? 옳든 그르든 무조건 권력자를 깎아내리고 비난해야 하는가? 어용御用을 피하고 지조를 지키는 일이니 멋져보이는가?

국론분열이라는 말도 음흉하다. 국론이 통일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수십, 수백만이 모인 검찰개혁 촛불집회와 천여 명이 모인 태극기집회를 찬반이 팽팽하다고 보는 자들의 궤변이라니... 어쨋든 나라가 시끄러우니 죄가 있든 없든 조국이 물러나고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어렵고, 돼지열병이 위험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지만, 어쨋든 결론은 조국사퇴다.

수구 야당은 장관후보로 지명되기 전부터 조장관을 벼르고 있었다. 조국을 주저앉히기 위해 조국이 사노맹이라고 헐뜯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평소 그가 “강남좌파”로서 사사건건 자신들을 (정의와 도덕성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또 가만놔뒀다가는 미래의 후환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시끄럽게 들쑤시고 다닌 것이다. 과도한 응징이다. 허망하게 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다. 나라가 어찌되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수구 야당도 언론도 검찰도 같은 편에 서서 적폐청산과 개혁을 흔들고 좌초시키고 있는 모양새다.

광화문에서는 수구 여당과 일부 기독교단이 주최하는 태극기집회가 벌어지고, 서초동과 여의도에서는 개싸움국민운동본부 주도로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수구 세력은 상대방이 사실을 외면하고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난하지만 자신의 진영논리는 말하지 않는다. 유시민씨는 진영이 나뉘어 서로 다투는 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본다. 단지 얼마나 정당하게 합리성으로 논리를 겨루는가를 따질 뿐이다.

사실 진영이 있다면 수구 기득권이지 나머지는 진영이랄 것도 없다. 지킬 것이 있으니 성을 쌓고 방책을 세워두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백성들은 그냥 순리와 상식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있다. 지킬 것이 없는 자들은 가진 자가 극도로 포악해질 때 서로 손을 잡고 떨쳐 일어날 뿐이다. 진영이 나뉘어져 있다면 그것은 가진 자가 포악하게 해먹었다는 증거다. 수구 세력들은 강고한 진영을 갖추고 있으면서 단결한 백성들을 진영논리라며 비난한다. 무조건 잇속을 지키자는 무논리가 생존과 정의를 쟁취하자는 논리를 비웃는 비열함이다. 끊임없이 의혹과 유언비어를 쏟아내어 백성을 이간질하는 자들의 음흉한 논리다.

“강남좌파”가 선택한 고난의 길

나는 조장관과 식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설명을 들어도 입학전형이든 사모펀드든 우회상장이든 와닿지 않는다. 만일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조장관은 애초에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두달 넘게 식구들이 무방비로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9월 2일 조후보자의 기자간담회를 대부분 지켜본 후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국은] 이른바 강남좌파라지만 충분히 현실을 치열하게 살았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여식의 진학이나 인턴이나 장학금 문제를 사과하긴 했지만 과한 비난이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놓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그런 수많은 일상의 조각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범죄사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검찰이 욕보겠다.”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법과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석 달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검찰수사는 이례적이며 지나치다. 수구 야당과 언론의 응원을 받으며 정예수사팀이 한 집안을 털었지만 정작 조장관에 대한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쯤되면 수사능력이 형편없었거나 애초부터 겨누었던 중대한 범죄사실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시민이나 김어준씨가 어렵지 않게 확인한 사실을 검찰이 아직도 뒤지고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검찰은 어떻게든 조장관을 넘어뜨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족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군가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공소권 없음”으로 깔끔하게 후퇴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매주 서초동과 여의도에 모여 촛불을 밝힌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다가는 자신도 조장관처럼 저렇게 대책없이 난도질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연민이자 분노다. 그래서 검찰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각성한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뜻은 자연인 “조국”을 좋아하고 그 배우자 정씨를 응원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려야 하는 기본권과 평범한 일상을 검찰의 횡포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그 마음이 하나 둘씩 모여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된 것이다.

의미있는 고난과 조국의 평화

수구세력은 왜 조국이 아니면 안되냐며 따진다. 쓸만한 인물이 그리도 없느냐고 힐난한다. 하지만 조국만 아니면 누구라도 괜찮다거나 왜 조국은 안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가족사기단”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사실은 검찰개혁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조국이 아니어도 누구든 사명감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속으로는 조국이 정말 개혁을 잘할 것같으니까, 그래서 나라가 잘 되는 끔찍한 결과가 나올까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주저앉히려는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문재인을 끌어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의미있는 고난을 통해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점이다(1991: 333; 2008: 101, 270). 박근혜 탄핵으로 강자의 폭력이 잠시 멈추었을뿐 백성들이 원하는 태평성대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개혁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조장관은 집안, 학력, 외모, 재산, 관운 등에서 “금수저”였지만 꽃길이 보장된 기득권편에 서지 않았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여 검찰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앞으로도 일가친척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의 자기희생으로 검찰개혁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정의와 인권이 세상의 원칙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曺國의 의미있는 고난이 祖國의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같이 읽기

  1.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2.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조국전쟁: 曺國의 고난과 祖國의 평화. <최소주의행정학> 4(11): 1-2.

조국 전 민정수석이 지난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결사반대를 공언하고 나선 기득권 세력들은 한 달 넘게 자진사퇴를 압박했다. 수구언론은 조국 후보자의 배우자, 여식, 동생 내외, 웅동학원 등에 대한 신상털기 기사를 쏟아냈다. 여식이 포르쉐를 탄다거나 특별전형으로 진학을 했다는 헛소문을 보도했고, 심지어 어느 수구채널은 조국 후보자가 자택 아파트 주자창에 주차했음을 뉴스속보로 보도했다. 융단폭격같은 의혹제기에도 납득할 만한 사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구야당은 여론전에 몰입하면서 인사청문회를 질질끌었지만 결국 소문만 요란한 잔치가 되어버렸다. 조장관이 임명되자 그들은 해임건의, 국정조사, 특검을 들고 나왔다. 의혹을 반복하고 단식을 벌이고 삭발削髮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사생결단이다. 급기야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국회의원이 법절차에 따라 임명된 장관을 장관으로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를 고집하고 있다. 비열한 막말과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정신병이고 과대망상이라고 했다. 정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넘어서서 인간이란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과거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칼자루를 쥔 윤석열 검찰

결국 칼자루는 검찰이 쥐게 되었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조장관 식구들을 검찰에 고발하였고, 검찰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수십 곳을 압수수색하였다. 소환도 없이 청문회 중에 조후보의 부인을 기소하였다. 윤석열 총장을 적임자라고 옹호하였던 여당은 검찰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반발했고, 청문회에서 윤총장을 강하게 몰아붙이던 야당은 이제 검찰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둘러싼 검찰청, 법무부, 청와대, 여야의 힘겨루기가 얽히고 섥힌 모양새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단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되었다. 정치문제를 정치로 풀지 못하고 스스로 모가지를 검찰의 칼날에 맡기는 어리석음이여...

윤석열 검찰총장의 인생은 굴곡졌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안희정과 감금원을 구속했고, 2008년 BBK 특검에 참여하여 이명박을 무혐의로 처리했고, 이명박 정권에서 특수통 검사로 경력을 쌓았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를 밀어붙이다가 좌천되어 절치부심하던 중 2016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했다. 2017년 초에는 박근혜와 이재용을 구속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에는 DAS의 이명박을 잡아넣고, 올해 초 사법농단의 주범 양승태를 구속하였다. 지난 7월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윤총장은 2013년 국정감사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의 수사외압을 폭로하면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수차례 이어진 좌천인사 불이익과 모욕을 감내했다. 그래서 정권의 휘둘림에도 굴하지 않고 엄정하게 수사하는 강골검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그를 파격으로 중용한 까닭이다.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

소정 선생님은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다”라고 적었다(2008: 481).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소는 무엇일까? 예컨대, “성욕, 연애, 가정, 일용할 양식, 노동할 권리, 평화스러운 공동체” 등은 살아가는 누구나가 갖기를 바라는 최소이다(1986: 95). 일용할 양식은 배불리 먹을 만한 수준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다. 화려한 옷이 아니라 흉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옷이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의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일자리다. 감옥에 갖힌 자에게는 추운 날 더운 물 한 모금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다(2008: 303).

한계인은 “최소의 것을 빼앗긴 자”이거나 “최소를 가질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이다(1986: 96). 외압에도 불구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검사의 최소한을 차마 저버리지 못한 윤검사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96쪽). 그래서 “[최소를] 빼앗은 자를 미움으로만으로 대하지 못하는 인간의 품위”를 가질 수 있다. “최소에의 흠모를 존중시하는 이는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하여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다(96쪽).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는 최소를 빼앗은 자의 이기심에 굴종하지 않으며, 빼앗은 자를 미워하면서도 똑같이 물질을 탐하는 인간의 타락도 거부한다(96쪽). “빼앗는 이의 모습을 도저히 그의 원래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품격에 대한 외경”을 갖는다(97쪽). 한계인과 최소주의자의 인간주의이다.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의 길

윤총장이 억울하게 최소를 빼앗겨 본 사람이라면, 그 한계 상황을 온몸으로 버텨낸 최소주의자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첫째, 법에서 정한 기준과 절차를 철저하게 따른다. 윗사람의 권한남용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둘째, 지독하게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한다. 사람이나 조직에 충성하지 않고 헌법과 국민만 바라본다. 국민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로 말한다. 정치와 여론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세째, 약자의 인권을 저버리지 않는다. 최소마저 박탈당했던 자는 수구세력의 집단 매질에 내몰린 조장관 식구들을 긍휼한다. 인간 본연의 품격을 거부하지 못한다.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 피의사실을 흘리지 않고 최소한의 사생활은 지켜준다. 극악무도한 피의자라도 누려야할 최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째, 엄정한 수사에 집중할 뿐 유불리나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 조장관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오면 수구야당은 윤총장을 비난하고 특검카드를 들이밀 것이고 그 반대면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청와대로 몰려갈 자들이다. 여당은 그 반대일 것이다. 칼자루를 쥔 자의 마음이 흔들리면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베이기 십상이다. 윤 총장의 선택이 한계 상황을 겪은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이길 바란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최소주의행정학> 4(10): 1.

조국 전 정무수석이 지난 달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수구 야당의 파상공세 속에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지금까지 관련기사가 무려 120여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황당한 수치다. 청문회를 앞두고 조후보자의 식구들과 관련된 압수수색이 전격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시시각각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고 입과 입을 거치면서 자가발전하고 있다. 애초에 제기된 조후보자 여식女息의 포르쉐나 특례입학이나 성적 문제는 벌써 갑오경장 시절 얘기가 되었다. 청문회 정국이 요동치고 점입가경이다.

고대생의 촛불집회가 불편하다

조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은 자신이 아닌 여식의 입학과 장학금 문제에 집중되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강남좌파”라는 조후보자의 언행이 다르다는 배신감이다. 특히 20대의 지지율이 흔들리면서 여당도 우려하고 있다. 지난 달 23일에는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촛불집회를 열어 항의했다. 부산대 학생들도 거들고 나섰다. 조후보자의 여식이 고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은 것이 입시부정이나 특혜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나는 촛불을 들고 고대 본관 앞을 도는 학생들의 행렬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미 3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과연 꼭 필요한 행동이었을까? 70-80년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선배들을 잇는 행동인가? 폭정에 시달리던 32년 전 고대 교수들이 목숨을 걸고 시국성명서를 낭독했던 그 자리 아닌가. 그 간절한 말이 사람들을 울려서 끝내는 6월 민주화운동으로 타오르게 했던 역사의 현장 아닌가.

소정의 최소주의에서 벗어난 촛불집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은 최소주의로 구현된다. “일단 그 날이 오면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행동”으로 “긴요한 최소행동”이다(1991: 25-26). 첫째, 정국이 극도로 무서울 때에 행동한다. 행동을 하면 힘센 자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대부분 몸을 사리는 상황이다. 둘째, 그래서 신중하게 행동방법을 결정한다. 참여자 간의 철저한 합의와 일반 시민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세째, 필연적으로 비폭력 방법을 취한다. 주먹이 아닌 말로 대응하되 지극히 옳은 말만 한다. 상대방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네째, 이말 저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않고 꼭 필요한 요구만 한다. 실존적 발언을 최소한으로 한다(1996: 56). 무섭지 않을 때는 아무나 나와서 인기를 끌 만한 발언을 난사하기 때문에 전투력이 분산된다. 마지막으로 행동을 통해 개인의 잇속을 차리지 않는다. 기분나빠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다칠 줄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뿐이다.

하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최소주의와 거리가 멀다. 첫째, 다칠까봐 몸을 움츠리는 무서운 때가 아니다. 집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거나 경찰에 잡혀갈 일이 없다. 오히려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주목받고 박수를 받을 일이다. 지난 달 29일 TBS <뉴스공장>에 출연한 유시민씨는 “근데 의사표현을 못하게 막고 있나요, 아니면 권력으로 이 문제제기를 틀어막고 있나요? 여론은 압도적으로 조국에게 불리하고, 언론은 대통령에게 비판적이고, 언론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기사들을 쏟아내서 조국을 공격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될 때, 이것을 비판하면 불이익이 우려될 때, 익명으로 신분을 감추고 투쟁을 하거나 마스크를 쓰거나 그러는 거지. 지금 조국 욕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해서 누가 불이익을 줘요?”라고 말했다.

둘째, 아무리 온라인 광장에서 논의되었다지만 신중한 행동이 아니다. 집회발의자, 합의과정, 대표성 모두 흠결이 있다. 사실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의혹과 비난 광풍에 휩쓸린 느낌이다. 더구나 민감한 고대 교우의 일을 어찌 그리 성급하게 말하는가. 의혹이 사실이 아니면 그 생채기를 다 어찌 하려는가? 학내 문제라며 외부인 개입을 배제했지만, 국민 다수에게 공감을 얻기 어려운 속내임을 암시할 뿐이다. 세째, 촛불시위라는 비폭력을 동원한 것은 맞지만 지극히 옳은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의혹이나 예단이지 직선제 개헌과 같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네째, 긴요한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학교당국이 살펴보겠다고 했고 검찰이 조사하고 있는 마당에 지레 평등·공정·정의가 사망했다고 단정하고, 자료공개, 진실규명, 입학취소, 지명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 홀로 선 조국을 난타질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숱가락을 얹는 인기영합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촛불집회로 얻으려는 대의가 보이지 않는다. 정의를 말하고 공정을 말했지만, 속내는 직접적인 자신의 잇속이다. 자신은 힘들게 공부해서 입학했는데, 부정하게 입학했다면 부당하다. 감히 고대에서... 한마디로 기분나쁘다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자격이 의심스러운 자가 기득권을 누리거나,.. 우리들의 자부심에 손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을 굳이 집단적으로 표출시킬 이유가 있나 싶어요?”라고 일갈했다. 학생들이 자문해야 할 대목이다. 어쩌면 SKY의 관점이 아닌 일반 청년의 시각에서 대학입시 제도에 대한 성찰과 개선을 말했다면 차라리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배부른 자의 밥투정이나 힘자랑

기득권의 부도덕과 특혜라고 비난했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또다른 기득권을 상징한다. 토익과 AP 만점자도 자질을 의심받는 범접할 수 없는 학교라는 것 아닌가. SKY의 힘자랑이다. 배불러 터진 자들의 밥투정이자 난동이다. 그냥 속상한 자들이 술집에 모여서 육두문자를 안주삼아 주사부릴 얘기 아닌가. 간절함이 없으니 감동도 없고 호응도 없다. 신중치 못한 행동이 의도찮게 수구세력의 필사항전을 편들고 대의를 호도하는 것은 아닌지...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최소주의행정학> 4(9): 1.

수년 전 병원에서 투석透析하시던 소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대뜸 일본 관료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좀 얼떨떨하다가, 일정한 체계를 잘 갖추어 일을 꼼꼼하게 수행하지만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일본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일본은 우리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짧게 말씀하셨다. 강의실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관료제를 비교하여 설명하신 것은 기억하지만 정확한 취지는 당시에 알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내 답변이 피상적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에 머물면서 이런 저런 일을 관찰하고 경험한 결과다.

원칙아닌 원칙, 위법아닌 위법

아베 총리의 사학비리 사건이 확산되고 진화되는 과정은 흥미로왔다. 아베 측근이 운영하는 모리토모森友 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넘겨주었고, 재무성 고위 공무원까지 동원하여 공문서를 조작했다. 끝내 모든 용의자가 불기소처분을 받자 검찰마저 “손타쿠忖度”라는 자조를 쏟아냈다. 원래는 타인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지만 조직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심기를 눈치껏 살펴 알아서 긴다는 소리다. 서구의 법질서를 받아들여 합리적이고 꼼꼼하게 일을 한다는 일본관료제의 민낯이다. 또 일제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전범기업이 배상하라는 한국대법원의 판결을 빌미로 아베 정권은 이달 초 주요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하였다. 얼마 전에는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종료한다고 선언했고 국민들은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맞서고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을 찔끔찔끔 허가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고작 이런 관료제였던가?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해야 하나...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원칙과 절차를 자세하게 적어놓고 그것을 철저하게 따르려고 한다. 체화된 습관을 넘어서 집착증이라 해도 될 정도다.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고 하던 대로 한다. 공공기관의 문서양식은 어렸을 적 기억을 소환한다. 은행에서 해외송금을 하려면 넉 장이 넘는 서류를 작성하고 반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한국에서는 신분증과 수결로 10분이면 끝낼 일을... 문서에 도장을 열심히 찍는 것이나 돈을 하나하나 세면서 계산하는 것이나 감동스러운 꼼꼼함이다. 지독하게 깨끗한 일본 화장실의 치밀함이라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일본 관료제는 어쩌면 막스베버의 이념형(ideal type)에 가깝다. 전문성을 갖춘 공무원이 법과 절차에 따라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원칙이 항상 원칙이 아니고 위법이 위법이 아니라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원칙 자체는 서구의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이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규칙을 정하더라도 언제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다. 원칙 자체를 모호하게 적어놓거나, 예외를 넓게 적어놓거나, 그도 아니면 대놓고 권력자의 재량사항으로 해놓는다. 어느 경우이든 권력자가 독한 맘을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미묘함을 남겨둔다. 구렁이 담넘어가듯 원칙과 위법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함이다. 애초부터 어기기 위해 원칙과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있다. 아베 정권이 재등장하면서 구석구석에 측근을 박아놓았는데, 이들의 막가파식 권위주의 행태에서 규칙같으나 규칙이 아닌, 불법같으면서도 불법이 아닌 “어정쩡한 치밀함”을 관찰한다.

좀더 심각한 상황에서는 원칙이나 규칙은 허수아비가 된다. 문서에 멀쩡하게 적혀있지만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벌거벗은 힘(naked power)이 야만스럽게 관료제를 쥐고 흔든다. 비유하자면, 필수과목에서 낙제를 받거나 논문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도 졸업을 시킨다. 윗사람이 결정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그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물론 원칙을 적용하자면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상부의 지시로 문서조작을 했다며 자살한 재무성 공무원의 억울함이 납득되는 대목이다. 권력자는 조직구성원의 협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가 아니라 식민지에 쳐들어온 점령군에 가깝다. 나는 이러한 황당하기 짝없는 폭력을 관료제에서 어떻게 소화하는지가 궁금했다.

권력남용에 대처하는 공직자의 선택

가장 쉬운 방법은 알아서 기는 것이다. “손타쿠”로 윗사람을 알아서 섬긴다. 나쁜 윗사람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찍어누르면 최대한 규정을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궁리한다. 억지로라도 꿰어 맞출 수 있는지 따진다. 예를 들면, 논문심사위원 모두가 부적격으로 결론을 내려도 다시 심사하도록 종용한다. 누가 봐도 불통이 당연한데도 명문 규정이 없으니 윗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랜다(의견이 엇갈린 경우에만 명문 규정이 있으니까). 상상력으로 해결이 안되면 문서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통계학과로 지원한 학생이 생뚱맞게 경제학과로 합격된다. 또 위원회같은 제 3의 기구를 통해 현상이나 사실을 바꿔치기한다. 심각한 폭력이나 부정행위도 위원회에서 무혐의로 발표한다.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어도 자신의 의견이 그러하다고 해명한다. 사실과 진실과 관계가 없는 자기최면이나 자기기만일 뿐이다.1)

두번째는 소극적으로 침묵하고 묵인한다. 담당자가 “손타쿠”를 몰라 분위기파악을 못하면 윗사람은 권력남용의 강도를 높인다. 담당자를 불러내서 집요하게 의지를 전달하는데, 대개는 여럿이 둘러싸고 몰아부친다. 이것 역시 약발이 서지 않으면 결단을 내린다. 아랫사람의 권한으로 행사해야 할 결정을 이렇게 결정하라고 지시한다. 아랫사람은 뒤늦게 알아서 기든지, 침묵하든지, 아니면 위험을 각오하고 내부고발을 하든지 해야 한다. 예컨대, 부서내규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도록 회의를 열어 결정하라고 한다. 물론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이다. 아랫사람은 회의를 열어 윗사람의 통보내용을 공개하고 자신들의 결정이 아님을 밝힌다. 하지만 만장일치로 합의된 안건으로 둔갑되어 윗사람에게 보내진다. 자신의 결정을 아랫사람의 합의로 포장하여 자신이 재가裁可하는 셈이다. 아랫사람의 침묵은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있으나 양심상 맨정신으로 따를 수는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다.

세번째는(내부고발이나 항거나 물리력 동원 등은 열외로 치자) 권력자가 전면에 등장하여 원하는 것을 강제하는 경우다. 물론 원칙과 규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관료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때 관료들은 원칙대로 처리하되 윗사람의 결심내용을 별도로 문서에 남겨둔다. 예컨대, 성적증명서에는 필수과목이 낙제라고 찍히지만, 내부문서로 정황을 기록해놓고 졸업장을 발급한다. 이런 행위를 지칭하는 고유한 어휘가 있댄다. 물론 이 경우에도 회의에서 권력자의 엄중한 의지임을 밝히고 “침묵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관행은 권력자의 폭력을 피하되, 원칙을 위반하는 자신을 보호하는 궁여지책이다. 권력남용과 원칙 사이에 마련해 둔 완충장치라지만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이다.

이러한 편법과 황당한 관행을 이해하면 아베 정부가 수출허가를 매번 받도록 하거나 절차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째,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허가를 내주는 것도 내주지 않는 것도 그때그때 유불리에 따라 신축성을 발휘한다.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에서 패는 것이 유리하면 패고 안패는 것이 유리하면 점잖게 대접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아베 정권이 상상력을 어디까지 발휘할 지, 원칙과 현실의 괴리를 어찌 정당화할 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변덕스런 자의성과 불확실성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세째,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결정이어서 책임을 따지기 어렵다. 권력자가 권한을 남용하여 강제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기가 쉽지 않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모두가 결정한 일이니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선비의 나라? 무사의 나라?

왜 이런 일들이 관료제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권력남용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벌거벗은 폭력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태도는 좀 특별하다. 집단주의에 순응한 탓인지 고개를 쳐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윗사람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외부에 폭로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당장 자기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대부분 앞에 나서지 않는다. 부당한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대부분 침묵한다. 학력, 소득, 지역, 성별과 관계없이 감정을 드러내거나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좋게 보면 불필요한 관심을 끊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세상일에 눈감는 것이다. 속으로는 정치인을 비난하더라도 막상 투표소에는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속말(本音, 혼네)과 겉말(建前, 다테마에)이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튀지 않으려는 속내는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고 “왕따”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속담을 체화한 듯하다.

이러한 습성은 일본의 사무라이(侍) 정신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무라이는 15-16세기 전국시대에 지방 영주(大名, 다이묘)를 주군으로 모시고 특권을 누려온 무사계급을 말한다. 주군에게는 절대 복종하지만, 칼을 차고 다니며 평민들을 자의로 지배했다. 권력을 쥐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듯이 서슴없이 패악질을 저질렀다. 마음대로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비위를 건드린 자들을 벨 수 있었다. 절대 복종을 강요받은 백성들은 살아남느냐 항거하다 죽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친절한 것은 사무라이의 폭력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약자의 지혜가 습관화된 결과일는지 모른다. 포악한 칼날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궁여지책이다.

소정 선생님은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명치유신 전까지 무인통치를 해왔다고 했다(1980: 383; 1991: 81). 한국의 국조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마늘과 쑥을 가져왔는데 일본의 국조는 복종심을 유발하는 칼, 활, 거울, 구슬을 가져왔으니,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정복인간征服人間의 차이다(1991: 77-78). 선비의 나라와 사무라이의 나라의 거리이며(2006: 266), 씨름과 스모가 다른 점이다(2011: 226). 전후 온건관료주의를 채택해온 일본이 한국과 중국의 관료제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죄를 뉘우치고 대안을 모색하기는 커녕 권력자의 온정주의에 순치되고 있다(1996: 31, 654). 말하자면 의미있는 반성과 저항과 수난을 겪지 않은 관료제가 권력남용에 속수무책으로 퇴화하고 있다.

사실과 신화, 역사와 종교

소정 선생님은 또 “일본만 해도 민회의 뿌리가 되는 교회가 드물고 귀신 모신 데가 많은 것이 흠”이라고 하셨다(2008: 454). 아마도 지진과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많고, 사무라이의 패악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일는지 모른다(1996: 289). 아직도 일본인 다수가 인간인 왕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2011: 167). 인간과 신이 동전의 양면이다. 종교가 개혁되지 않고 신의 권위에 눌린 백성이 스스로 “카미카제” 특공대로 나설 정도다(2011: 427).

일본이 신화와 종교에 집착한다면 한국은 사실과 역사에 죽고 산다(박헌명 2018). 일본인들은 신화를 만들고 종교처럼 믿는데 익숙해져 있다. 사실과 진실이 어떠한 것인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과 신화가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신화로 살아도 자연스러울 뿐더러 불편하지 않다. 반면 한국은 조국후보 검증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사소한 사실관계에도 목숨걸고 달려든다. 그래서 한국이 독도가 역사책에서 어찌 기술되어있는지, 옛날 지도에 어찌 표시되어있는지를 들이밀어도 신화에 심취해 있는 일본인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나쁜 권력자가 원하는 신화를 만들면 관료제든 시민들이든 순응하게 된다. 독도든 일제성노예든 무역전쟁이든 말하고 싶은 얘기를 창작한다. 힘을 숭상하는 자들은 권력남용을 따지지 않고 신화를 사실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심 동의하지 않아도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못본 체 한다. 정답은 정해진 것이니 어떻게 신화를 현실로 자연스럽게 이어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질문할 필요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할 뿐이다. 알아서 기든, 입닫고 침묵하든, 원칙을 위반한 사연을 깨알처럼 적든 같은 정신줄이다.

견디면서 힘을 키워야 한다

한일 무역갈등으로 양국 모두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베 정권의 꼼수와 잔머리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권력자의 결정에 꿰맞추려는 자기기만과 어거지를 버텨내야 한다. 서로 다른 문법과 논리로 겨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끝까지 정도를 걸으면서 참고 견뎌 내야 한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는 한 계속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보편성과 합리성으로 다투어야 한다. 특히 일본보다 다른 나라를 설득하여 협력을 얻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아베 정권보다는 양식있는 시민사회와 연대해야 한다.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사실을 말하고 용기있게 헛된 신화를 깰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사무라이의 패악질을 멈추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끝주

1) 전후 일본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일으키던 시절 어느 일본기업이 미국 제품을 복제하여 팔다가 기소되었다고 한다. 그 제품에는 “Made in U.S.A.”라고 새겨졌는데, 일본쪽에서는 U.S.A.가 미국이 아니라 “우사”라는 일본회사라고 우기고 재판부에 각종 문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아마도 “우사”의 모든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창작하였을 것이다. 십수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참고문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사무라이 관료제의 눈가리고 아웅. <최소주의행정학> 4(8): 1-2.

이달 초 일본 정부는 한국으로 수출되는 불화수소를 포함한 3개 품목에 대한 규제강화를 발표했다. 나아가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할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자유무역에 역행하는 조치이며 불공정한 경제보복이라고 보았다. 박근혜 정권에서 강행한 성노예피해자 문제에 대한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고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것에 대한 아베 정부의 분노와 응징이라는 것이다. 비상한 상황으로 규정한 문대통령은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여 경제체질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정치갈등으로 경제협력의 틀을 깨버린 이번 조치는 부당하며 양국 모두에게 큰 피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도전을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왔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로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 힘을 모아 이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자고 호소했다. 기업들은 해당 품목을 확보하고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들은 일본방문을 자제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혐한으로 치닫는 일본 정부와는 달리 차분하고 경우에 맞는 대응이다.

토착왜구와 식민사관의 잔재

하지만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수구세력들은 모든 것이 문재인 정권의 탓이라고 몰아붙였다. 권력서열 1위였던 최순실의 존재를 들켜 한순간에 정권을 빼앗긴 자들의 분노와 한이 묻어난다. 그들은 문정권이 좌파 이념에 매몰되어 이분법으로 국민을 갈라놓고 있다고 했다.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잔혹한 정치보복을 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여론을 왜곡시킨다고 했다. 야당과의 협치를 포기한 독재정권이라고도 했다. 최저임금인상과 같은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밀어붙여 경제를 도탄에 빠뜨렸고, 부질없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다가 한미일 관계만 파탄냈다고 했다. 성노예피해자 관련 합의를 파기하고 징용피해자 배상판결을 이끌어 아베 정권의 화를 돋구어 끝내 경제보복을 자초했다는 시각이다. 어느 수구신문은 일본어판에 “한국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나 “반일로 한국을 망쳐 일본을 돕는 매국 문재인 정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였다. 광복 70주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꿈처럼 살고 있는 자들이다.

나는 얼마 전 사람들과 한일 갈등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 어떤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덕을 봤는데 이제와서 딴 소리냐고 했다. 다른 이는 일본이 얼마나 부강한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대들고 있다고 혀를 찼다. 한국 정부가 국제공조를 추진하든 일본과 협상을 하든 결국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이다. 정치꾼이야 그렇다 쳐도 교육수준이나 소득수준이 상위급인 분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토착왜구”까지는 아니어도 부지불식 중에 식민사관에 젖어든 정신세계라는 생각이다. 일본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일본은 부자이고 선진국이고 우리는 아니다. 그러니 일본이 아니면 안된다. 알랑거리든 싹싹 빌든 우네부네 하든 무조건 일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감히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대들다니... 세상사는 이치를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아닌가. 힘센 자에게는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 주고 힘없는 자는 가혹하게 짓밟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이거늘...

그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삶의 지혜나 요령이라며 훈수한다. 하지만 자존自尊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심리상태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줄이며 양아치의 생존법이다. 강자에게 죽도록 매맞은 기억으로 몸서리치는 피해의식이다. 강자가 눈만 흘겨도 똥오줌싸고 까무라치는 수준이다. 이성과 양심이 아닌 힘의 논리에 충실한 셈법이다. 야만의 약육강식 그대로다. 일본에 특사를 보내라는 주장은 사실상 (어차피 항복해야 하니까) 조국 수석을 볼모로 보내고 아베에게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三跪九叩頭禮) 잘못했다고 싹싹 빌라는 충고다. 분기탱천한 아베는 더한 것도 요구할 기세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제3국 중재위원회로 가져가자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묵살하여 3권분립을 해체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자주성을 포기하자는 소리다. 어차피 바위에 계란치기인데 명분이 밥먹여주는가, 당장 살아 남아야 할 것 아니냐라는 식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서명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을사오적의 변과 다를 바 없다.

매맞으면서도 할 말은 하라

왜 겨뤄보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꼬리를 내려야 하나? 왜 트럼프나 아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되는가? 언제나 강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것이 양국의 우호인가? 트럼프의 요구대로 방위비 분담금을 올려주고 아베가 원하는 대로 대법원 판결을 뭉개고 투항하면 우리에게 평화는 오는가? 양아치는 단물을 쪽쪽 다 빨아먹을 때까지 코가 꿰인 먹잇감을 허투루 놔주는 법이 없다. 중요한 것은 힘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무서움을 극복하고 부당함에 맞설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아베 정권의 수출품목 규제강화는 난해한 경제문제와 남북문제와는 달리 옳고 그름이 명백하다. 애초부터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배상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 책임에 연결된 문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핵심은 보편적 인권 문제다. 정답은 자명하다. 다만 정답을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小丁 선생님은 강자에게 고통받는 약자는 폭력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1986: 294). 폭력을 휘두르는 정권은 자기가 정한 법도 지키지 못할만큼 허약하고 정당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민의 불복종 운동(비폭력투쟁)으로 붕괴가 된다(1986: 297). 하지만 여기서 비폭력은 강자가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자포자기로 매만 맞으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을지언정 할 말을 계속 하는 것이다(1991: 118). 상대방의 이성이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사실과 지극히 옳은 말만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감정을 자제하고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만을 해야 한다(1996: 56).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1980: 384). 약자가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최소한 인간으로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다(1991: 18; 2001: 149).

비폭력 투쟁과 불매운동

지금 문재인 정부와 국민의 대응은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 투쟁에 가깝다. 특히 경제 우위를 앞세워 대화를 거부하고 강공으로 일관하고 있는 아베 정권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차분하게 일반론과 원칙론으로 맞서고 있다. 국제무역 질서와 관행은 물론 상식으로 봐도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가 경제보복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있다. 일본의 도발과 협박과 무례에도 불구하고 문대통령은 감정을 흐트리지 않고 합당한 말만 하고 있다. 비폭력 투쟁이다. “오늘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한 겨레의 요구”라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낭독하는 듯하다. 갈등과 긴장을 노리는 아베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인 벽창호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음인지 지난 25일 일본 지식인 75명이 아베 정권에게 규제강화 조치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많은 시민들이 일본여행을 취소하거나 자제하고 있다. 일본제품을 팔거나 사지않는 운동이 번지고 있다. 하지만 불매운동은 일본인에 대한 혐오나 적대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23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권경화씨는 일본여행을 취소한 시민들에게 무료로 머리를 깎아준다고 했다. 일본 손님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일본 TBS의 질문에 당연히 깎아준다고 답했다고 했다. 우리의 불매운동이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아닌 보편적 인도주의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공명정대하게 하라”는 공약삼장에 충실한 운동이다.

지레 겁먹고 “쫄지” 말자

얼마 전 조국 민정수석이 그의 FaceBook에 적었다는 글이다. 그는 아베 정권의 궤변에 동조해 대법원과 정부를 매도하는 수구 정치인과 언론의 행태가 개탄스럽다고도 했다. 법을 공부한 그가 일제의 식민지배, 한일청구권협정,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등에 관한 의견을 적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혹자는 민정수석이라는 지위와 의사소통 방식에 비추어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자기정치에 열을 올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나대지 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어야 마땅한 그런 상식적인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현재 일본의 국력은 우리보다 낫다. 하지만 2019년은 모든 면에서 일본에 비교할 수 없었던 1919년과 크게 다르다. 일본은 국토가 우리의 3.6배나 넓고, 인구는 1억 3천 명(2.5배)이고 2019년 예산은 9천 2백억 달러(2.3배)에 이른다. 2017년 국내총생산은 4조 3천억 달러(3.1배), 2018년 수출은 7천 3백억 달러(1.2배), 수입은 7천 5백억 달러(1.4배)로 근접하고 있다. 일인당 GDP는 4만 달러대 3만 달러이지만 최근 경제성장률이 2-3%인 우리가 1% 미만인 일본을 따라잡고 있다. 하우머치닷넷이 발표한 GDP대비 국가부채율은 2017년 기준 우리가 40%인데 비해 일본은 무려 238%다. 세계 최대의 채무국의 민낯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전까지 한국의 왕조에 의지하고 살았던 약소국이었다. 20세기 한 때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던 일본이 지난 30년 내내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그동안 각종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을 시도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최근에는 제국주의 부활을 획책하는 극우세력들이 일본을 퇴화시키고 있다. 사실과 역사가 아닌 신화를 믿고 사는 왜구倭寇의 난동이다. 반면 대한민국은 과거 공주 우금치에서 2만 명의 동학군이 2백 명의 일본군에게 비참하게 무너졌던 조선이나 무기력하게 경술국치를 당한 대한제국이 더이상 아니다. 어엿한 OECD와 G20 회원국으로서 강대국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성장과 힘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깨어있는 촛불이 우리의 힘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촛불을 밝히는 국민이다. 백년 전 3.1 운동 이후, 4.19 혁명(1960),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 6월 항쟁(1987)를 거쳐 촛불혁명(2016)으로 진화한 국민이다. 왕조시절에도 나라의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왔다. 광화문 광장에 켜진 백만 촛불은 끈질긴 투쟁의 함성이자 우리의 자부심이다. 이는 사무라이 습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일본이 감히 꿈꾸지 못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다. 우리는 일본을 얕잡아봐서도 안되지만 막연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포기하고 학대해서도 안된다. 깨어있는 촛불 국민은 침착하고 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 백년 전 총칼 앞에서도 태극기를 들고 목청껏 만세를 외쳤던 그 마음, 3년 전 촛불을 들고 얼어붙은 광장을 밝혔던 그 마음이면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심을 성심껏 받들면 된다.

한쪽이 자신의 힘만 믿고 막무가내로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다면 다른 한쪽의 선택은 쉽다. 똑같이 감정을 폭발하고 발길질로 대응하면 이전투구가 될 뿐이다. 막나가는 폭력과는 정반대로 합리성과 보편성에 근거한 비폭력 투쟁을 벌여야 한다. 냉철한 자세로 진리를 말하면서 인내하고 견뎌내야 한다. 뱉은 말도 뒤집고 갈팡질팡하면서 행패를 부리는 정권은 나라 안팎에서 정당성을 잃는다. 대의大義가 아닌 잇속을 차리려는 자들이 끝도 없이 멋대로 굴기 때문이다. 앞다투어 욕심을 채우다가 수틀리면 서로 치고 박다가 스스로 망한다. 어차피 지금의 경제보복은 어느 한쪽이 사달이 나야 끝날 것 같은 상황이다. 따라서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절제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서로 단결하여 고통을 나누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배타적 감정이 아닌 인류애와 동포애로 서로 다독이며 버텨내야 한다. 2019년 경제독립 운동의 공약삼장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의 비폭력 투쟁. <최소주의행정학> 4(7): 1-2.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되었다. 신문과 방송마다 크든 작든 정권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를 내놓고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나 경제정책에 매겨진 점수는 가혹하다. 혹자는 F라거나 평가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 지난 1분기 실질국내총생산 성장률이 .3푼이나 떨어졌다며(-.3%) 호들갑이다. 경제가 “폭망”했다는 것이다. 어느 금융기관 간부는 최저임금인상으로 조만간 정권이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말 경제가 “폭망”했나?

지난 5월 3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4푼이 노동고용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29푼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복지정책은 51푼이 잘하고 있고(33푼이 부정평가), 45푼이 각각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을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인사정책은 26푼만이 잘한다고 했고(50푼이 부정평가), 경제정책은 겨우 23푼만이 긍정평가를 내렸다. 응답자의 62푼이 경제정책을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45푼이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잘한다고 보았고 46푼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외교와 남북관계 개선 (14-16푼)이 긍정평가를, 민생 문제 (44푼)가 부정평가를 주도했다.

이런 평가를 접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인사정책이나 경제정책이 그토록 형편없었단 말인가? 수구세력이 “인사참사”라면서 비난을 쏟아냈지만 아무리 못해도 이명박근혜 정권에 비할까? 성인군자가 왔어도 트집을 잡아 망신을 주었을 것이면서 청문보고서가 어쩌니 낙마 비율이 어쩌니 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

수구세력들이 경제가 “폭망”했다며 내세우는 거시경제지표를 몇가지 살펴보자(아래 그림 참조). 국가지표체계(index.go.kr)에서 얻은 실질국내총생산성장률은 현재 박근혜 정권의 연장선에 가깝다. 특별히 치솟은 것도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올해 1분기 성장율이 낮은 것도 지난 4분기 성장률이 높았던 탓이다. 경제성장률만 놓고 보면 수구세력이 그토록 “경포대”라고 비아냥거렸던 노무현 정권이 시장경제를 외쳤던 이명박근혜 정권보다 훨씬 나았다.

또 고용이 늘지 않았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업률은 김대중 정권 이래 3–4푼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고 하지만 “고용절벽”이라 할 수는 없다. 물론 노령인구의 일자리와 소득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는 사회경제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문재인 정권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경제성장률이 뚝 떨어지고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고 볼 수 없다. 세계 경제의 흐름에 따라 한국 경제가 어렵게 가고 있는 것은 맞지만 경제가 “폭망”했다고 선동하고 저주하는 것은 지나치다.

Economy Growth Rate

최저임금인상과 자영업 위기?

흔히들 최저임금인상으로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규모는 OECD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자영업자 비중은 2001년 전체(취업자 +자영업자)의 28.1푼이었는데, 2010년 23.5푼으로, 2018년에는 21.0푼으로 꾸준히 내려왔다. 1인 자영업자 비중은 압도적이어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72–73푼이었다(국민일보 2017. 10. 7). 1인 자영업자는 최저임금과 관계가 없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종업원을 둔) 자영업자는 2017년 기준으로 전체의 5.8푼(=21.3% X 27.4%)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인상 때문에 종업원을 둘 수 없을 지경이라면 문을 닫아야 한다. 시장 논리다. 경쟁력에 따라 자연스레 자영업 지형이 조정되어야 한다. 지금 자영업 문제는 최저임금인상보다는 경기둔화, 무분별 창업, 집세 등과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인상된 임금이 시행되기도 전에 수구세력들이 자영업 위기를 운운했던 것은 여론조작에 가깝다. 요컨대, “경제폭망”이나 “좌파독재”는 염치없는 정치구호이다.

경제는 시대정신이 아니다

실물경제와 민생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재인 정권이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은 아니다. 촛불혁명이 물었던 것은 “이게 나라냐?”였다. 입법, 사법, 행정부가 법에 따라 제대로 동작하도록 고치는 것이다. 특권과 반칙이 없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다. 국민이 번역기없이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함이다. 한마디로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경쟁력이 줄어들고, 실직자가 늘고, 빈부격자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정부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급한대로 최저임금을 올리고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다.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복지정책에 좋은 점수를 준 까닭이다. 하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성장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기간에 성장한 우리 경제는 규모도 크고 충분히 복잡해져 있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어느 전문가도 쉽게 답을 내지 못한다. 하물며 무역의존도가 높고 재벌의 갑질이 체질화된 경제임에랴.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지혜를 모아 경제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 인내심과 긴 호흡이 필요하다. 새로움이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서로 의지하여 아픔을 나누고 격려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마음만 급해서 이리저리 뛰고 있고, 수구세력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대기업은 뒷짐지고 굿이나 보고, 국민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입맛만 다시고 있다. 어차피 경제는 민간의 몫이다. 정부는 기업과 국민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제시해야 한다. 비정상을 바로잡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문재인 정부의 경제는 “폭망”했나? <최소주의행정학> 4(6): 2.

소정 선생님은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으로 진화하는 초월윤리를 정부관료제(행정개혁)에 적용하면서 “모든 나쁜 것은 官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民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1991: 42). 또한 악은 민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는 정권에서 나온다고 했다(2008: 268). 나는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부관료제가 제대로 설계되고 운영되지 않으면 백성들을 괴롭힐  뿐이지만, 그렇다손 쳐도 관료제(통치행정구조)가 모든 악의 씨앗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모든 좋은 것은 왜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일까?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다

여기서 民은 재야, 야당, 노조, 대학, 언론기관, 종교단체 등의 사회단체(시민사회)를 말하고 官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포함하여 통치자, 정권(여당), 정부관료제라 할 수 있다. 民은 나라의 주인이고 官은 민의 머슴이다. 정부 관료는 머슴처럼 주인의 일을 대신 해주고 녹을 받는 공복이다. 이런 존재의 차이를 생각했을 때 나랏일이 잘되고 못되고는 주인의 관심사지 애초부터  머슴(공복)의 관심사가 아니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民과 官의 좋은 행동은 무엇이고 나쁜 행동은 무엇일까? 좋은 시민사회는 자신이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관이 일을 잘하는지를 감시하고 필요한 조치를 요구한다. 그 반대는 주인이라는 생각없이 잇속을 위해 망언과 망동을 서슴치 않는다. 합리적인 압력과 저항이 민의 좋은 행동이라면 책임회피와 어리석은 난동은 민의 나쁜 행동이다. 좋은 정부관료제(통치자)는 민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공복임을 마음에 새겨 주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그 반대는 백성의 머슴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잇속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다. 주인을 섬기기는 커녕 합리적인 요구를 무시하고 비폭력 저항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한다.

民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요구를 하면 官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어 있다. 관이 민의 좋은 행동을 배운다고 했지만 사실은 민의 감시와 압력과 저항 때문에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은 애초부터 좋은 행동을 할 의지가 없다. 오직 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합당한 일을 시켜야 관이 나쁜 행동을 못하게 된다. 주인이 게으르고 어리석다면 머슴은 주인을 우습게 보고 머리꼭대기에 올라앉는다. 주인이 경우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하거나 패악질을 부리면 머슴들은 분수도 모르고 기고만장하여 주인의 상투들 틀어쥔다. 이런 상황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머슴이 있다면 정신이 멀쩡하지 않거나 어딘가가 고장난 공복이다. 이런 미련한 머슴을 보고 감동을 받고 정신을 차리는 주인은 거의 없다. 나라 일을 크게 망치고 자신까지 망친 뒤에야 스스로의 무책임과 어리석음을 후회할 뿐이다.

관의 나쁜 것을 민이 배운다

중요한 것은 民이 官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배운다는 점이다. 민의 나쁜 행동을 관이 배울 필요는 없다. 민이 주인이기를 포기하거나 난동을 피우면 관은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마음껏 해먹게 되어있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닌데 구태여 책임감을 가지고 법과 절차를 준수할 까닭이 있을까? 통치자가 권한을 남용하고 법 위에 군림하면 약육강식의 난장판이 된다. 폭정과 무질서는 백성을 옥죄고 약탈한다. 통치자의 욕심은 채울수록 갈증만 더해간다. 끝내는 정권의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법은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1986: 289).

대혼란에서 民은 공정한 법과 절차를 기대할 수 없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찍어누를 뿐만 아니라 강자끼리도 서로 더 해먹겠다고 이전투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백성들도 아비규환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서로 주먹질을 하면서 아귀다툼을 한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금품을 건넨다. 민이 관의 나쁜 행동을 배우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면 부지불식 중에 닮아가게 된다. 지금 우리의 비루함은 그런 친일냉전독재의 그림자는 아닐는지. 사회 구석구석에 “갑질”과 “왕따”가 제도화되어 있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빨갱이, 좌파독재라는 주술은 여전하다. 법과 합리성과 도덕과 양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모든 폐해는 결국 백성의 몫이다.

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주인이 어리석어 주인노릇을 못하면 머슴은 일은 안하고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서로 “코드가” 맞아서 과격함이 극에 달한다(2008: 578). 그런데 머슴은 스스로 잘못을 수정하고 퇴화를 멈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官의 못된 행동을 바로잡는 것은 어쨋든 민이다. 국민과 정부와의 관계에서 온기의 원천은 국민이다(2001: 42). 民의 비폭력 투쟁이다.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가 통치자를 향하여 악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해야 바로잡힌다”(2008: 65).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1991: 30).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호응을 얻어 잔치가 되고 널리 감동을 만들어 내면 官은 바뀔 수밖에 없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이기는 통치자는 없다. 전두환을 굴복시킨 6.10 항쟁 때와 마찬가지로 박근혜를 쫓아버린 촛불혁명 역시 주인임을 자각한 시민들의 감동어린 잔치였다.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세상의 주인은 민이다. 하지만 슬기롭고 부지런하고 용기있는 주인만이 주인노릇을 할 수 있고 주인대접을 받을 수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머슴(통치자나 관료제)의 언행을 지켜봐야 한다. 경우에 맞는 요구를 하되 시비를 철저히 가려서 못된 버릇을 고쳐가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국민의 합리적인 저항이 관을 바꾼다. <최소주의행정학> 4(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