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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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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벌써 두 해를 넘겼다. 인도에서 발생한 델타변종이 3차 유행을 이끌더니 남아프리카공화국발 오미크론(Omicron)이 4차 유행에 불을 질렀다. 모든 나라가 방역수준을 높이고 있다.

한국의 코로나 방역은 잘하고 있다

수구언론만 보면 한국의 코로나 방역은 완전 실패다. 참사다. 이미 5천만명이 다 죽어 나자빠진 듯하다. 이런 호들갑이 다 있을까?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를 폐쇄하지 않았다고 난리고, 방역마스크를 빼돌려 대란이 벌어졌다고 법석이다. 백신계획을 발표해도 계약이 늦었다고, 물량이 부족하다고 난리다. 막상 접종을 시작하니까 백신이 위험하다며 동네방네 나발을 분다. 방송에 나와 100% 안전한 백신을 내놓으라고 생떼다. 소망과는 달리 접종률이 급격하게 높아지니까 망연자실하더니 소아청소년들에게 접종하려니까 위험하다며 또다시 게거품을 문다. 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눈을 좀 밖으로 돌려보자.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12월 27일 현재 우리나라는 82%가 백신접종을 마친 가운데 지난 1주 동안 확진자가 4만명(매일 평균 6천명, 인구 만명당 8명)이 발생했다. 접종완료율이 60%인 미국은 118만명(만명당 35명), 접종률 69%의 영국은 53만명(만명당 78명), 72%인 프랑스는 48만명(만명당 75명), 70%인 독일은 20만명(만명당 23명), 74%인 이탤리는 26만명(만명당 42명)이 신규로 확진되었다. 최근 확진자수가 급격하게 떨어져 국민들마저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일본은 접종률이 78%(세계평균은 46%)다. 지금까지 COVID-19로 사망한 사람은 미국이 81만명(만명당 23명), 영국이 15만명(만명당 22명), 프랑스가 12만명(만명당 18명), 독일이 11만명(만명당 13명)이다. 일본은 1만 8천명(만명당 1.4명)이고 우리나라는 5천 3백명(만명당 1명)이다. 특히 백신을 개발하지 못했고 접종을 늦게 시작했지만, 세계 최고수준의 접종 속도와 완료율을 보여주고 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K-방역의 성과는 놀랍다.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위용이다.

도대체 K-방역이 폭망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위의 수치만 따진다면 당신은 어느 나라에 살고 싶은가? 오미크론 공포가 확산되자 PCR검사를 받으려는 행렬이 길어지고 있다. 혹한에 몇시간을 기다렸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배불러 터진 소리다. 한국처럼 물쓰듯 검사를 공짜로, 전투적으로 해주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네 시간이든 열 시간이든 기다려도 좋으니 나도 한번 검사를 받아봤으면 좋겠다.

코로나 방역은 공공보건을 생산하는 공역이다

이른바 K-방역은 정치가 아닌 과학(전문가)이 주도하고, 공격적으로 검사와 격리를 지속하고, 경제와 균형을 모색하고,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수출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였고, GPD성장률은 2년 연속 선방하고 있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의료진도 시민들도 지쳐가고 있다. 긴장감이 줄고 있다.

특히 백신접종 완료율이 8할이 넘었지만 아직도 접종을 꺼리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아청소년의 확진이 늘어나면서 백신접종을 권장하고 있지만 자녀들의 접종을 머뭇거리는 부모들이 있다. 백신패스를 도입하는 것을 무리지어 반대하기도 한다. 백신을 안맞았다고 식당에서 밥을 못먹고, 학원을 다니지 못한다니 말이 되냐며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확진이 되었을 경우 어떻게 식당과 학원에 책임을 질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백신을 안맞을 자유를 말하지만 백신을 접종받지 않은 손님을 받지 않을 업주의 자유에는 입을 닫는다. 백신을 맞지 않은 손님과 같은 공간에서 밥먹거나 공부하기를 꺼리는 접종완료자의 건강과 자유는 말하지 않는다. 이기주의자들이다. 나는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남들은 무조건 내 자유를 존중해야 하는 의무만이 있다는 “자유민주주의”다. “살인백신 강제접종”이라니... 군대나 학교에서 사망자가 생긴다고 해서 “살인국방 강제입대,” “살인교육 강제입학”이라 할 것인가? 천둥벌거숭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난동이다.

전염병은 서로 접촉을 피하는 것이 요체다. 많이 모이지 말고, 일정한 거리를 지키고, 마스크를 쓰고, 환기를 하고, 잘 씻어야 한다. PCR검사를 받고 백신을 접종받아야 한다. 확진자를 가려내고, 격리하고, 치료해야 한다. 이런 것이 방역이다. 일상이 어그러지고 불편하고 마음이 답답한 일이다. 공동체 구성원이 인내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방역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자연스레 무임승차 문제가 생긴다. 방역의 혜택은 공동체 전체가 누리고, 방역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을 배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방역조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공짜로 혜택을 보려는 단순한 얌체짓이 아니라 공공의 보건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자유를 빙자한 무책임하고 부주의한 행동으로 식구와 친구와 이웃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고약한 이기주의자의 심보다.

공역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하라

여야는 지난 1년 간 재난지원금을 주네 마네, 누구에게 얼마나 언제 주네, 재정건전성이 어쩌니 밀고 당겼다. 한마디로 방역조치로 생계가 어려워졌으니 구휼미를 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휼이 아니라 코로나 방역이라는 부역賦役에 협조한 최소한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다. 정부의 방역조치로 영업을 하지 못한 자영업자의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역公役에 대한 최소한의 몫을 지불하는 일이다. 임금이나 영업손실 그대로를 보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생존을 위해 방역조치를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은 최소한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기준은 수입이나 영업손실이 아니라 공역에 성실히 참여했는가이다. 방역에 적극 협조한 개인과 기업과 자영업자에게는 격려금과 혜택(예컨대, 영업시간 연장)으로 보답한다. 위반자에게는 부역을 거부하고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 책임을 벌금, 행정처분, 손해배상 등으로 철저히 물어야 한다. 또 코로나 장기화에 대비하여 K-방역을 생활화하고 산업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방역 인력을 육성하여 확충하고, 관련 기술(검사, 백신, 치료제 등)을 개발하고 고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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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2. 코로나 방역에 협조한 공역에 보답하라. <최소주의행정학> 7(1): 1.

국가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공방이 치열하다. 대장동 개발과 고발사주사건이 휩쓸더니, 윤석열씨 장모와 배우자의 불법과 탈법이 몰아치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재명씨 아들의 불법도박 의혹이 불거졌다. 이씨는 대국민 사과로 머리를 숙였다. 예측할 수 없는 난타전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양비론이 고개를 쳐든다. 선량의 이성과 상식이 힘을 잃어가는 듯하다.

후보의 지향과 문제해결방식

선거는 후보자의 역량이 그 자리에 마땅한지를 따지는 일이다. 후보 각자가 자신의 장점을 호소하겠지만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 개개인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후보가 내거는 공약으로 역량을 가늠해서는 안된다. 공항건설이나 감세를 공약했다고 표를 준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정치를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짓이다. 나라의 일(정책)은 당시의 맥락과 환경에 따라 바뀌고, 또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평가해야 하는 것은 후보자의 가치지향과 그가 어떤 일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답을 내놓는 방식이다. 사람이 아니라 시대가 원하는 가치지향과 문제해결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다.

후보자 식구들의 행적을 따지는 것도 후보의 가치지향과 일하는 방식을 알아내기 위함이다. 개인주의에 기반한 서구 사회와는 달리 왕조와 가족주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 사회에서는 지도자와 식구들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공직과 관계없는 사생활을 시시콜콜 까발릴 수는 없다. 다만 과거에 저지른 잘못를 캐내어 비난하기보다는 그 잘못을 어떻게 책임졌고 어떻게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허물을 고쳤다면 더 나무랄 까닭이 없다.

흙수저와 법조 엘리트의 차이

이재명씨와 윤석열씨의 선거운동을 보고 있자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수구세력이 지배하는 운동장이고, 정권재창출보다 정권교체 목소리가 더 큰 구도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정부가 아무리 잘해도 욕을 먹는 판이다. 백신이 늦으면 백신없어 죽는다고 나자빠지고, 백신이 들어오면 백신맞고 죽는다고 악다구니다. 임기말 지지율이 40%를 오가는 문대통령도 사정없이 물어뜯긴다. 이씨의 허물은 부풀려 까발려지고, 윤씨의 허물은 순화되고 슬그머니 가려진다. 여당 후보는 맨발로 칼날 위에 서 있고, 야당 후보는 가죽신으로 꽃길을 걷고 있다. 선거판이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데도 여당 후보가 수구세력의 파상공세에도 밀리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다.

이재명씨는 소년공 출신으로 비명문대를 졸업하고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지낸 흙수저다. 윤석열씨는 기득권 출신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검찰총장까지 역임한 정통 금수저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민주세력은 능력을 내세우고 수구세력이 오히려 정의와 도덕을 강조하는 이상한 선거다. 기자회견과 토론회에서 드러난 두 후보의 역량은 다른 차원에 있다. 이씨는 노무현씨가 돌아온 듯 맨주먹으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세상과 눈을 맞추고 진심으로 허물을 인정하고 고치려는 자세다. 윤씨는 주 120시간 노동을 비롯한 1일 1망언을 이어오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기득권의 인식을 드러냈다. 세상물정 모르고 아무렇게나 쏟아낸 말이 얼마나 사람들을 놀라고 허탈하고 힘들고 아프게 하는지... 어찌하여 매번 설화로 욕먹고 나서 취지랍시고 해명을 덧대는가... 과연 남의 말을 알아듣고 생각을 정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한건지... 말로 싸우는 토론을 두려워하면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민주주의가 아니라 왕조시절에 최적화된 자세다.

윤석열만의 공정과 상식

수구세력은 이씨가 전과4범이며 형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했다며 비난했다. 맥락을 뺀 악의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반면 윤씨는 기득권의 전유물같았던 일하는 능력 대신 공정과 상식을 내걸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며 기어이 정경심을 앞세워 조국을 발라냈고,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며 추미애씨를 치받았다. 정치중립과 공정한 법집행이라는 방패로 문정부를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정권이라고 찍어내렸다. 그 여세를 몰아 반문정서에 올라탔다. “낭만자객”의 서사는 이렇게 장엄했다.

하지만 윤씨의 공정과 상식은 허무한 구호가 되었다. 조국일가를 도륙할 때 휘둘렀던 칼날에 베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을 베풀지 않은 업보다. 윤씨는 추장관이 자신에게 내린 징계가 부당하다며 제기한 징계취소와 직무정지취소 소송에서 연패했다. 윤씨에 대한 징계가 정당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무패행진을 이어오던 장모 최씨는 추장관의 지휘권발동 이후 재판에서 연패하고 있다. 3백억원대 은행잔고를 위조한 남다른 배포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통력에 그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장모인가 성모 마리아인가?

배우자 김명신씨는 줄리 의혹에 이어 허위 학력과 이력으로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자신의 이름자와 같은 학력에 어찌 논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김병신”이면 과장인가? 한 획만 달라도 용납될 수 없는 사안 아닌가. 정경심씨는 표창장을 발행할 권한을 사실상 가졌고 위조할 이유가 없었지만, 김씨는 재직증명서를 발급할 권한이 없었고 위조해야만 하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가짜박사 최성해씨의 교육자 양심은 증거로 삼고, 김씨를 알지도 못한다는 게임산업협회장과 사무국장의 진술은 못들은 척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조민씨의 실력은 고대에 입학하고도 남았지만 김씨의 실력은 쇼핑포함 5일짜리 연수조차 학력으로 적어야만 돋보인다. 밤늦게까지 줄리하느라 이력을 꾸미느라 바빠서 공부를 하고 싶어도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김씨의 “Yuji”와 “姓明”은 최순실씨의 “공항장애”와 닮은꼴이다. 딱 그 수준이다. 그런데도 김씨는 기소는 커녕 압수수색이나 조사도 받지 않았다. 조국을 난도질한 서슬퍼런 법치와 정의는 대체로 어디로 갔단 말인가.

'니 죄를 니가 알렷다'

윤씨의 태도와 문제해결방식은 한마디로 “니 죄를 니가 알렷다”이다. 자신과 식구들은 잘못이 없고, 그래야만 하고, 여기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 천부의 특권이다. 법은 조국이나 일반 시민들이 지켜야 할 의무일 뿐이다. 직권남용이든 문서위조든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본이 안된 불경이다. 반역이다. 이것이 진리이고 자유민주주의다. 윤씨가 국민을 향해 삿대질하고 기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이유다. 떠밀려 사과하면서도 깨끗하게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이유다. 천민인 주제에 감히 성 안으로 들어온 이재명을 인정할 수 없다. 자신에게 시혜를 받아야 할 아랫것들과 어찌 말을 섞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가치지향이다.

하지만 세상은 윤씨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니 고치지 못한다. “에헴”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야당이 시끄러운 까닭이다. 그런데 조국이 정경심을 끌어안고 돌아오고 있다. 사모펀드 의혹은 이미 사라졌고, 검찰이 확보한 컴퓨터의 표창장 위조 증거력은 부정되었다. 그런데도 김건희는 방송에서 사과연애편지나 낭송하고, 정경심은 감옥에서 신음하고 있다. 윤씨가 자신이 파놓은 조국의 늪에 빠진 형국이다. 버둥거릴수록 숨통을 죄어올 것이다. 인과응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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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2. 후보의 가치지향과 문제해결방식을 보라. <최소주의행정학> 7(1): 2.

광주민주화 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권력을 찬탈簒奪했던 전두환이 11월 23일 죽었다. 살인마로 불렸던 그가 90년을 꼭 채웠으니 욕을 많이 먹은 값을 하나 보다. 피해자와 시민들은 전씨가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끝까지 사과하지 않고 죽은 것에 대해 분개했다. 정치권도 외면한 빈소에는 친족과 추종자들이 오갈 뿐이었다.

비폭력의 열매를 못거둔 김대중씨

전두환은 1995년 반란죄와 내란죄 수괴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1997년 김대중씨가 사면해줬다. 사람들은 전씨에게 진심어린 사과나 추징금을 먼저 받아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랬으면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는 궤변은 듣지 않았을 것을... 소정 선생님은 이렇게 적었다.

“김대중씨는 그에게 사형을 구형한 1980년 군사재판[정]에서 정치보복은 자기만으로 끝내자고 했다. 그는 쿠데타 정권자를 모두 용서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돕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비폭력적 조치가 과연 이 모든 이들의 회개를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음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비폭력 투쟁을 구세력을 향해 다시 해야 하는 과제와 현실정치 속에서 비폭력의 열매를 못거둔 민주화운동의 동지, 김대중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에 관한 이중적 과제를 안게 된다”(2001: 194).

소정 선생님은 이미 20년 전에 김대통령의 사면(비폭력)이 전두환의 회개(열매)를 이끌어내지 못했음을 안타까와 했다. 기독교에서 사랑과 용서는 회개를 선행조건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라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며, 아무리 타락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회개할 조그만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168쪽). 이런 맥락에서 전두환과 그 추종자들은 김대통령의 사랑과 용서가 무용지물일만큼 극악무도한 죄인이다. 애초부터 회개가능성이 전혀 없는 타락墮落의 끝장에 선 자들이다.

회개와 용서는 가해자의 몫이다

회개悔改란 무엇인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이다. 소정 선생님은 “회개하고 하늘 나라를 맞이하라는 것이지, 회개를 않고서 하늘 나라를 맞이하라는 말이 아니다. … 말만으로의 회개여서는 안되고, 변화된 행동이 뒤따르는 회개여야 한다”(171쪽)라고 했고, “회개한 마음을 미루어 밖으로 실천하는 회개여야 한다”(266쪽)라고 적었다. 말하자면 전두환은 회개를 하지 않고 날로 하늘 나라를 맞이하려 한 것이다. 사과한다는 말한마디도 없었고, 추징금 납부를 미루었고, 재판 참석도 미적거리다가 죽었다. 말이든 실천이든 그에게 회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소정 선생님은 “사람의 원모습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늘 회개하는 것이며, 이 회개를 철저하게 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회개의 목적은 사람을 원모습으로 생활을 시작하는 데 있지, 과거의 잘못을 징벌하는 데 있지 않다”(264쪽)고 했다. 사람의 원래 모습은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사람이 갖고 나온 천부天賦의 마음이며, 나쁜 정치의 영향과 구조 속에서 생겨난 악한 마음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마음이다(1991: 44).사람의 원모습에서 벗어난 언행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악행을 고쳐 원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다. 전두환은 천부의 마음을 잃고 포악한 살인마가 되어 날뛰었지만,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회개를 회피하고 외면함으로써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면 용서는 누가 하는가? 소정 선생님은 “용서할 자격이 있는 세력이 용서하고, 악을 저지른 자가 전과를 뉘우쳐야 한다” (2008: 148)고 했다. 예컨대, 정치정당성이 없는, 용서할 자격이 없는 (이명박) 정권이 용서를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본이 전과를 뉘우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셨다. 나는 잘못을 저지른 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개과천선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미 회개를 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다면 피해자의 용서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반대로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신이 용서한다면 누가 납득할 것인가? 말장난에 가까운 의미없는 일이다. 결국 용서는 피해자나 신이 아니라 가해자 스스로 하는 것이다. 오직 진심으로 참회懺悔를 했느냐를 물을 뿐이다. 전두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스스로에게 용서받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2001: 219)고 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나쁘기만 했다. 일가친척과 추종자들이 골백번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한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마지막까지 나약했던 살인마

소정 선생님은 “관용은 자신이 한 행동을 돌이켜 보아 자신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행위”(2001: 488)라고 하셨다. 하지만 전두환은 사람들을 단순히 섭섭하게 한 자가 아니라 40년 넘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자다. 추총자들은 망자에 대한 예의니 인간의 도리를 들먹였지만, 왜 80년 광주시민들에게는 그토록 가혹했단 말인가? 참회하기는 커녕 자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부당하다며 버럭하는 그의 모습에서 번뇌煩惱하는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외경畏敬조차 군홧발로 짓밟았으니 역사가 심판하지 않아도 대대손손 인면수심의 악귀로 불릴 것이다.

방송에서 본 전두환은 기세등등한 독재자가 아닌 나약한 골목대장이었다. 1995년 검찰소환에 반발하여 “골목성명”을 읽을 때도, 2019년 마지못해 광주지법에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당하게 자신을 역사에 비추려는 눈이 아니었다. 사실을 묻고 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눈이었다. 오금이 저릴만큼 무섭고 두려웠던 것일까? 필사적으로 현실에서 도망쳐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려는 자기최면이었다. 환각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마약쟁이의 몸부림이었다. 한때는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장군이었고,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해먹었던 자가 골목길에서 벌인 추태라니... 자신의 과오에 마주설 용기가 없으니 똘마니들이나 달고 다니며 세월을 묻은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참회하지 못한 살인마의 죽음이 노여웁다. 

인용: 박헌명. 2021. 회개와 용서는 스스로의 몫이다. <최소주의행정학> 6(12): 1.

지난 9월 13일 민주당 대통령선거 경선에 나섰던 정세균 후보가 사퇴했다. 지지율은 제자리 걸음인데 뽀족한 묘수가 보이지 않자 호남경선을 앞두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국회의원, 장관, 당대표, 국회의장에 이어 국무총리까지 두루 역임한 정후보여서 아쉬움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시대정신에 미치지 못함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깨끗하게 물러선 신사 정세균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정치신사 정세균의 선공후사

정씨는 기자회견에서 담백하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족한 저를 오랫동안 성원해주신 많은 분들께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평당원으로 돌아가 하나 되는 민주당,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백의종군하겠습니다. 나라와 국민과 당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겠습니다. 함께 뛰던 동료들께 응원을, 저를 돕던 동지들께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의 진심에는 미움과 원망이 없다. 이런 저런 가시돛힌 공방으로 마음이 상했을 법도 한데, 섭섭함은 가슴에 묻고 고마움과 감사만을 담았다. 나라와 국민과 당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두고두고 갚겠다고 했다. “나는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고 ...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고 적은(1991: 22) 소정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또 그의 뜻에는 사사로움이 없다. 민주당과 나라를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 사퇴한다 해서 그가 뒷주머니에 챙길 수 있는 이익이 없다. 그는 민주당의 성공과 승리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며, 백의종군하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를 깎아내리거나 특정 후보를 편들지 않았다. 다만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고 경쟁했던 동료를 응원했고, 도움을 준 동지들에게 감사했다(1996: 429). 한마디로 선공후사先公後私다.

선공후사를 뒤집은 이낙연의 사퇴

이낙연 후보는 지난 9월 8일 “민주당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버리고 정권재창출에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모든 것을 던져 정권 재창출을 이룸으로써 민주주의와 민주당, 대한민국과 호남, 서울 종로에 ... 진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사퇴는 뜬금없고 실망스럽다. 불쾌하다. 대의를 빙자하여 유권자를 우롱한 것이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이기적인 선택이다.

우선 사퇴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정말 정권 재창출이 간절하여 모든 것을 던질 각오였다면 이씨는 경선 전에 사퇴했어야 했다. 자신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면서 이재명씨에게 경기도 지사직을 내려놓으라고 계속해서 요구했다. 법과 당규와 합의사항도 아닌 일을 강요했다. 경우없는 짓이다. 이씨의 사퇴는 경선분위기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국면을 바꾸기 위해 띄운 승부수다. 궁여지책이다. 자기 주장의 일관성 부족을 채우고, 경쟁자에게 사퇴하도록 압박하기(내가 사퇴했으니 너도 사퇴해) 위한 술수다. 유리한 분위기였으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패다.

둘째, 종로구 국회의원이 왜 광주에 가서 사퇴를 발표한단 말인가? 본인 말대로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사람들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종로구민아닌가? 광주시민에게는 전혀 생뚱맞은 짓이고 서울시민에게는 그저 황당한 짓이다. 느닷없이 사퇴선언을 하기 전에 이씨는 먼저 종로구 유권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가장 먼저 광주시민에서 대선승리를 보고하겠다는 망발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대체 종로구민을 뭘로 보고...

세째, 누가 봐도 광주전남경선을 앞두고 고향에 가서 지역감정을 들쑤신 것이다. 16일 다시 광주를 찾은 이씨는 “광주에서 반전을 일으켜 결선 투표로 가는 드라마를 만들어 주십시오. ... 광주가 저에게 지지를 보내주지 않으면 제 역할은 여기서 끝납니다”라고 읍소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광주가 자신을 키웠으니, 광주가 책임지라는 소리다. 안그럼 당신이 키운 인물은 끝장난다는 협박이다. 의원직도 내놓았다며 동네사람 들으라는 듯 항아리에다 대고 울먹이는 신파극이다. 용돈을 안주면 죽어버리겠다며 숫가락을 내던지고 떼를 쓰는 못난 자식놈이다. 엉덩이에서 불이 나도록 후려패주고 싶다. 명색이 국회의원, 도지사, 국무총리까지 지낸 자가 대선승리도 아닌 고작 결선투표에 목을 맨단 말인가.

네째, 사심이 지나쳐 일을 그르쳤다. 말은 많지만 내가 아니면 절대 안된다는 것 아닌가. “저의 모든 것을 비웠다. 진정성을 받아달라”고 강변했지만, 그는 유권자와 당과 동지들과 보좌진을 비우고 자신의 욕심을 채워넣었다. 자신의 의정활동을 도왔던 보좌진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민주당은 내년 대선과 함께 어려운 보궐선거를 준비해야 한다. 결국 자신의 이득을 따진 것이지 손해를 무릅쓰는 최소주의자의 간절한 결단이 아니었다(1980: 363). 이씨는 “정권 재창출이라는 역사의 책임 앞에 제가 가진 가장 중요한 것을 던지기로 결심”했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직이 유권자에 대한 책임이 아닌 개인의 권리(재산)란 말인가? 아연실색이다.

찬물을 끼얹은 이낙연의 뒤끝

이씨는 광주에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도덕적이지 않아도 좋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민주당과 보수야당이 도덕성에서 공격과 방어가 역전되는 기막힌 현실도 괜찮습니까?”라며 호소했다. 불안한 후보가 아닌 안심되는 후보를 내놔야 한다며 에둘렀지만, 누가 들어도 경쟁자인 이재명씨를 헐뜯는 소리다. 추미애씨의 일침대로 수구세력의 의혹과 말법으로 아군을 공격한 셈이다. 10월 10일 경선결과가 발표된 직후 이씨는 이지사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잔치가 어수선해졌다. 무효표 계산을 핑계삼아 침묵을 지켰다. 경선 중에 이미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었다. 이씨는 극렬지지자들의 경선불복을 사흘동안이나 방치하다가 마지못해 당무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글을 남겼다. 지저분한 뒤끝 때문인지 여론조사에서 이지사는 경선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못먹는 밥에 재를 뿌렸으니 속이 시원한가? 이낙연씨에게 그가 내뱉은 언어로 묻는다. 그대는 “5.18영령 앞에 ...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며 희생하고 헌신하셨던 선배 당원들한테 부끄럽지” 않은가?

 

인용: 박헌명. 2021. 정세균의 사퇴와 이낙연의 사퇴. <최소주의행정학> 6(11): 1.

검찰이 수구야당에게 여권의 주요 인사들을 고발하도록 사주했다는 “고발사주” 사건이 사회를 흔들고 있다. 조국교수가 법무부장관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내비친 두 집단의 공조가 사실인 듯하다. 검찰의 국정농단이다. 전 검찰총장으로서 유력한 대선후보가 된 윤석열씨가 벼랑에 몰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수구세력의 되치기가 들어왔다. 조성은씨가 언론에 제보하는 과정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제보사주” 의혹이다. 제보사실을 반박할 수 없으니 조씨가 국정원장과 특수관계라느니, 고급차를 탄다느니 마구잡이로 던지고 있다. 제보자를 깎아내려 대중의 시선을 돌리려는 물타기다. 문제의 본질을 비틀어 은근슬쩍 핵심을 피해가는 교묘한 술책이다. 수구언론이 달려들어 확대재생산하자 어느새 “고발사주”가 “제보사주”로 뒤바뀌어 추석밥상에 올랐다.

“고발사주”에서 “제보사주”

군사정권이 물러간 지 30년이 지났지만 그때 그 시절의 언어공작은 여전하다. 국민들이 “부정선거”라며 비난하면 독재정권은 잽싸게 “선거부정”라는 말을 언론에 푼다(1991: 99). “부정선거”는 정권의 진퇴가 걸린 심각한 사안이지만, “선거부정”은 재판으로 해소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라는 느낌이다(2001: 198). 박정희씨가 “부정부패”로 위기에 몰리자 “서정쇄신”을 들고 나왔다. 쿠데타 정권의 수괴인 전두환씨는 생뚱맞게 “사회정화”를 한답시고 시민들을 삼청교육대에 몰아넣고 매질을 했다.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가정보원이 심리전단 소속 직원을 동원하여 문재인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달았다. 이른바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이다. 하지만 수구세력들은 민주당 인사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연약한 여성을 감금했다며 역공을 펼쳤다. 불법 공작을 수행한 국정원 요원은 순진무구한 여성이 되고, “댓글사건”은 “감금사건”이 되고, “관권선거”는 “인권침해” 사건으로 뒤바뀌었다. 이에 분개한 표창원 교수는 방송에 나와 “그게 무슨 감금이예요, 잠금이지”라고 일갈했다.

2018년 2월에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문재인 정권은 드라마처럼 북한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성공한 “평화올림픽”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에 수구세력은 “평양올림픽”이냐며 조롱했다. 눈꼴사나운 참에 나름대로 운을 맞춰 빨갱이칠을 했다. 잔치집에 가서 딴지를 놓고 흔들리는 집토끼를 잡아놓았으니 남는 장사였던 셈이다.

진리성의 언어공작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진리성(Ministry of Truth)은 빅브라더를 위해 밤새워 “진리”(날조되고 왜곡된 공작용 언어)를 만들어 내고, “진리”를 믿지 않는 자들을 잡아다가 패는 관청이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진리”의 자가발전소인 셈이다(1991: 90). 타락한 정치인, 법조인, 교수, 언론인, 종교인, 운동가들이 부역자로 동원된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이어졌던 음습함과 포악함이다. 민주정부가 권력기관을 해체하면서 청산해왔던 적폐다.

하지만 수구세력의 진리성이 아직도 건재함을 본능으로 느낀다. 파괴되지 않고 분산·이전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밤새 머리를 쥐어뜯으며 “진리”를 창조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옳든 그르든, 정적을 해치울 수 있는 꼼수를 개발하는 것이다. 중정과 안기부에서 꽃피웠던 음흉한 언어공작의 향기가 풍겨난다. 수구 정치인이든 검찰이든 언론이든 출처는 달라도 재료와 논리와 음조音調는 같다. 누가 써준 원고를 돌려가면서 반복해서 읽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단순한 잔머리가 아닌 영리함과 집요함이 있다.

정권을 빼앗겼지만 진리성 출신들은 실력도 있고 힘도 여전하다. 수구 언론의 기술은 녹슬지 않았고, 수구 웹포탈과 사회매체(Social media)의 파급력은 막강하다. 또한 흩어졌다가 일시에 모여 화력을 집중하는 조직력도 보여준다. 사실도 논리도 없는 낭설이라 해도 이들의 언어공작은 최소한 절반은 성공할 수 있다. 시시비비를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에 적의 예봉을 피하고 묻지마 지지자를 다독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보사주”에서 “개발특혜”

한동안 “제보사주”가 신문과 방송을 뒤덮더니, 이제는 부동산 “개발특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가 성남판교대장 도시개발사업에서 민간개발자에게 특혜를 주었다는 의혹이다. 이미 “고발사주” 물증이 나온 마당에 “제보사주”로는 국면을 전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이번에도 수구 언론이 이재명씨의 아들이 개발회사인 화천대유에 다녔다며 불을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이 수구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 진리성에서 발신한 “진리”를 수신했는지 주문처럼 외고 “떼창”으로 부르고 있다. 화천대유는 누구꺼냐, 하루만에 사업자가 선정되었다, 개발사업에 위험이 없었다, 자본금 5천만원으로 천배 수익이 났다, 성남시민이 받아야 할 뭉치돈이 소수 투자자들에게 배분되었다... 대법원의 판단이 이미 나왔지만 진리성 요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수구세력의 공세는 터무니가 없다. 이 사업은 애초에 토지주택공사가 공공개발로 추진했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이 밀어붙여 민간개발로 돌렸다. 이때 온갖 불법탈법으로 복마전이 되어 사업이 좌초되었다. 2010년 성남시장으로 당선된 이씨가 공공개발로 방향을 바꾸자 수구 정권과 도지사(남경필)와 시의회가 발목을 잡았다. 지방채 발행도 좌절되자 어쩔 수 없이 혼합형 공영개발로 돌린 것이다. 성남시가 사업성패와 관계없이 먼저 5천억원을 받고 나머지를 민간이 나누어 갖기로 한 사업이다. 우연히 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민간의 몫이 커졌지만, 그 반대였으면 그들의 몫이 쪼그라들었거나 손해를 보았을 수도 있었던 사업이다.

수구세력의 “진리”는 사실을 왜곡하고 날조하였다. “이재명 게이트”라 하지만 등장인물은 곽상도(아들), 원유철, 남욱, 최재형 등 수구세력 일색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 자본금 5천만원은 혹세무민이다. 삼성전자는 2020년 말 자본금 9천억인데, 21조 영업이익을 냈으니 23배 수익율인가? “진리”는 또한 논리도 일관성도 없다. 시장경제를 경전처럼 떠받들던 자들이, 민영개발에 그리 집착하던 자들이 이제와서 공공개발을 왜 안했느냐 따지고 있으니... 사유재산에 애닯던 자들이 민간회사가 폭리를 취했다며 투자자가 누구냐, 누가 수익배분을 설계했냐고 묻고 있으니... 그런 식이면 조선일보와 삼성전자의 투자자(방씨와 이씨 일가)와 수익배분은 왜 묻지 않는가? 수천 수만 배를 벌었다 한들 법을 지키고 꼬박꼬박 세금을 냈으면 그만 아닌가?

깨어있는 시민들을 속일 수 없다

수구세력의 공작은 카멜레온 같아서 “고발사주”에서 “제보사주”와 “개발특혜”로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다. 토건세력을 앞세운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밥그릇에 재를 뿌린 이재명이 저주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작은 복수가 아니라 비수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씨는 모든 택지개발을 공영화하겠다며 되치기를 했다. 역시 이재명이다. 수구세력은 그동안 정신없이 뿜어낸 말이 너무 많아 주워담기도 어렵고 반박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인과응보다. 아무리 교묘하고 화려한 언어공작이라 해도 사실과 진실을 오래 덮을 수는 없다. 깨어있는 시민들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1. 고발사주, 제보사주, 개발특혜? <최소주의행정학> 6(10): 2.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여야 후보들이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정적의 정견을 비판하기보다는 사생활이나 약점을 찾아 물고 뜯고 있다. 짜증만 돋우는 비열하고 추잡한 짓이다. 하지만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은 대선에 나선 정치초짜들의 황당한 언행이다. 철딱서니가 없는 것인지 순진한 과대망상인 것인지... 특히 9월 2일 뉴스버스에서 검찰이 수구야당에게 유시민, 최강욱, 황희석 등을 고발하도록 사주했다고 보도한 이후 여야 정치인들의 언행은 거칠다 못해 과격해졌다. 간절한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최소한의 말이 아니라 그때그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대로 배설하는 짓이다. 말폭력이다. 어떻하든 대중의 시선을 돌려 책임을 모면해보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기자회견은 화풀이 장소가 아니다

야당 초선의원인 윤희숙씨는 지난 8월 25일 기자회견을 열고 “친정아버님”의 농지 매입을 해명했다. 자신이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염치와 상식을 지키기 위해 의원직을 사퇴한다고 했다. 이게 뭐지? 혹자는 한국정치에 죽비를 때렸다느니, 그녀의 도덕기준이 너무 높아서라느니 거들었지만, 곧바로 쏟아진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망신만 당했다. 집을 두 채나 가진 임대인이면서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국민을 기망했던 그녀의 업보일까? 27일 다시 기자들 앞에 선 윤씨는 분노와 저주를 퍼부어댔다. “낄낄거리며 거짓 음해를 작당한 민주당 정치인들”은 “평생 공작정치나 일삼으며 입으로만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 모리배”라고 쏘아붙였다.

그녀의 핏발이 선 듯한 눈동자와 독기를 품은 목소리는 흡사 항일독립투사의 절규에 가까왔다.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왔건만 권력을 틀어쥔 친일파들에게 욕보임을 당하는 억울함이랄까. 하지만 현실은 서울에 사는 80대 노인이 법을 어기고 세종시에 3,300평 농지를 샀다는 것이다. 본인이 동의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한 부동산 투기아니던가? 도대체 윤씨는 왜, 누구에게 화를 내는 것일까? 의혹제기로 그 땅을 온전히 상속받을 수 있는 길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민주당이 원수라면 당사를 박차고 들어가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머리끄댕이를 잡을 일이었다. 방송을 보는 국민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화풀이를 한단 말인가.

지난 9월 8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윤석열씨가 쏟아낸 울분과 비난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뉴스버스 보도에 이은 각종 의혹제기에 격앙되었던 모양이다. 윤씨는 자신이 그렇게 무섭냐, 정치공작으로 자신을 제거하면 정권창출이 되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출처가 불분명한 괴문서를 가지고 여당이 벌떼처럼 떠든다며 비난했다. 모두들 제보자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서, 숨어서 폭탄(의혹)을 던지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라고 일갈했다. 적반하장으로 분기탱천憤氣撐天한 정치초짜의 유치함이다. 방송에 나와서 씩씩거리며 삿대질을 하며 증거를 대라니... 무엄하다. 그런 기개라면 “애들 풀어서” 민주당과 청와대를 뒤집어 놓았어야 했다. 왜 애꿎은 국민들에게 분풀이를 한단 말인가? 대놓고 공익제보자를 협박하는 짓이다. 유권자를 화나게 할 뿐이다. 정말 검찰이 야당에게 고발을 사주했다면, 본인이 몰랐다 해도 당시 검찰총장으로서 국민에게 사죄해야 할 일 아닌가.

사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는 자리다

같은 날 열린 김웅씨의 기자회견은 횡설수설에 가까왔다. 고발장을 썼다는 것인지 아닌지, 손준성씨에게 받아 수구야당에 전달했다는 것인지 아닌지 아리송하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6개월마다 휴대폰을 바꿔서 확인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협조할테니 조사기관에서 진실을 하루빨리 규명해달라고 했다. 또 자신에 대한 공작을 중단하라고 여당을 겨눴다.

잘 나가던 검사로 <검사내전>까지 펴냈다는 자의 변명이 궁색하다. 제보자는 아는데 동기라는 손씨는 모른다니... 대화방을 폭파했다더니 뇌세포를 골라서 폭파한 모양이다. 영혼없는 눈동자가 방황하듯 잔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국민을 바보로 아는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는 양아치의 비루함이다. 그가 당에 전달했다는 문서와 당에서 변호사에게 건넸다는 문서와 실제 변호사가 제출했다는 고발장이 오탈자까지 판박이라는데도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린 일에 연루되었다는 부끄러움과 책임감은 없다. 시원하게 귀싸대기를 올리고 싶은 충동을 부를 뿐이다. 이럴 양이면 뭐하러 기자회견을 예고했단 말인가?

지난 8월 4일 최재형씨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꼭두각시인 양 손짓은 어설프고 틀에 짜인 웅변은 식상했다. 벌써 승리한 듯 두 손을 불끈 들고 연단을 도는 “꼬마 로봇”의 모습에 빵 터졌다. 늙은 이승복이나 학도호국단장의 초상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무너져 간다고 했다. 문재인 정권을 텔레반이라 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질문에는 준비가 부족했다며 답을 미뤘다. 그럼 왜 대선에 나온 것일까? 7월 2일 대선 여정에 오른 윤희숙씨도 “국민의 삶을 망치는 텔레반으로부터 권력을 찾아오겠다”고 했다. 텔레반 정권에서 어떻게 해묵은 돌싱녀가 얼굴을 내밀고 기자회견을 할 수 있단 말인가? 6월 29일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씨도 자유민주주의와 헌법가치와 법치와 공정과 상식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문정권에서 감사원장, 국회의원, 검찰총장을 해먹은 이들은 텔레반의 부역자附逆者인가? 사람들을 잠시 멍하게 만드는 궤변이다.

기득권 엘리트의 과대망상이다

정치초짜 4인은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다.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판사와 검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로 철저하게 기득권으로 살아왔다. 자의식과 자기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지 못한다. 두 윤씨가 버럭 화를 내는 까닭이다. “(하찮은) 니들이 감히 나를 건드려?”하는 정신줄이다. 모든 것이 공작이고 음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만의 인식과 상식일 뿐이다. 그들이 보여준 설화와 기행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巧言令色鮮矣仁라 했던가. 말은 많지만 사실은 안개 속이다. 특권이 있을 뿐 책임이 없다. 진노震怒만 있을 뿐 백성을 향한 진심은 없다. 섬겨야 할 국민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을 호도糊塗하는 기자회견이 노여웁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1. 정치초짜 4인의 무엄한 기자회견. <최소주의행정학> 6(10): 1.

바야흐로 대통령선거철이다. 여야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각종 실언이 쏟아지고 있다. 찌르고 막는 자들의 사생결단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맞든 틀리든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잠결에 날벼락 맞은 황교익

지난 13일 이재명씨가 음식평론가 황교익씨를 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내정하자 여야 대선 후보들은 “보은인사”라며 비난했다. 그렇찮아도 이씨가 도지사직을 유지한 채 경선에 참여하는 것이 불공정이라며 시비를 걸던 터였다.

급기야 17일 이낙연 선거대책위원회 부대변인인 신경민씨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황씨는] 일본 도쿄나 오사카 관광공사에 맞을 분이 아닌가 생각이 되요. ... 일본음식에 대해서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한국음식은 거기에 아류다...”라고 말했다. 관광공사는 커녕 맛집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깎아내렸다. 다른 관계자는 “경기맛집공사”라느니 누가 더 낫겠다느니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이에 황교익씨는 이낙연 후보측이 “일베”의 친일 프레임으로 자신을 공격했다고 분개했다.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 보은인사가 아니라 법절차에 따라 공개모집에 참여해서 최종후보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친일 프레임을 반사한다면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이낙연씨는 일본 총리에나 어울린다고 일갈했다. “청문회 전까지 이낙연의 정치적 생명을 끊는데 집중하겠다”고 적었다.

스카이가 아닌 중앙대를 졸업한 죄인가?

나는 방송에 나온 황씨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 흥분할까 의아했다. 이해찬 전대표가 나서서 격앙된 황씨를 위로하고, 황씨가 후보를 사퇴하면서 공방은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혀를 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치권의 말폭탄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왜 애꿎은 일반시민(연예인에 가깝지만)에게 던진단 말인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셈이다. 황씨의 항거가 납득된다.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방송에 출연한 신경민씨는 남 얘기하듯 어물쩍 넘어갔다. 여당 전체에 폭탄을 던진 어리석음을 반성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정치인이든 언론인이든 누구도 신씨나 이낙연씨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송영길 대표도 황씨의 발언이 금도를 벗어났다고 말했지만 신씨의 발언은 문제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진보의 탈을 쓴 기득권의 힘자랑일까?

만일 신씨와 이낙연씨가 스카이를 졸업하거나 언론인을 거쳐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황씨와 이재명씨가 중앙대학교가 아닌 스카이를 졸업했다면 어땠을까? 첫째, 보은인사 얘기는 애초부터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정언관政言官계를 장악한 스카이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먹었기 때문이다. 음식평론이나 하는 “딴따라”가 무슨 사장이냐는 힐난은 핑계일 뿐이다(이런 식이면 “법나부랭이”들이 무슨 정치인이나 대통령이란 말인가). 둘째, 신씨와 이낙연씨는 “개비”들에게 처참하게 물어뜯겼을 것이다. 스카이 선후배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등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조리돌리고 얼굴에 “非”라고 낙인을 찍었을 것이다. 반상의 법도를 뒤집는 역적을 가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비개비”인 주제에 언감생심 개비의 밥그릇을 노렸다는 것이 황씨의 죽을 죄다.

욕설이라고 꼭 말폭력인가?

황씨의 발언 자체는 과한 것이 사실이다. 잠결에 날벼락을 맞은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짐승이라느니 정치생명을 끊겠다느니 하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신씨의 발언은 사실에 기초하지도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황씨의 인격과 호구糊口를 뭉개는 폭력이었다. 인간의 최소한을 부정한 셈이다. 어쩌면 황씨의 대응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일는지 모른다. 지금 상황은 강도가 칼을 들고 위협하다가 집주인에게 맞았는데, 경찰이 집주인을 살인미수라며 땅바닥에 패대기를 친 것이다. 알고 보니 강도와 기자와 경찰이 스카이인 상황이다. 그들은 황씨를 노리개로 쓰다 시궁창에 버린 것이다. 야만이다.

이재명씨가 형수에게 욕설을 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씨는 어머니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며, 위기를 모면하려다 벌어진 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이런 물리력과 욕설을 맥락없이 떼어 내어 비난하는 것은 비열하다. 하지만 설훈씨는 녹음을 들어보면 이씨의 인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실망스럽다. 설씨였으면 그런 상황에서 법을 따지고 품격을 따졌을까?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엄중하게 훈계질을 했을까? 설씨나 이낙연씨는 어머니가 죽든 말든 나는 절대로 욕설이나 주먹질을 안했다고 뿌듯해 할 것인가? 비폭력을 강조하신 함석헌 선생님도, 소정 선생님도 권력기관의 포악한 폭력질에 악다구니를 쓰셨다고 했다(2008: 401). 인간의 최소한을 지키기 위해 동원된 물리력과 욕설을 폭력이라 말할 수 없다.

비폭력은 법과 상식을 지키는 일이다

왜 이재명씨에게 지사직 사퇴를 요구하는가? 왜 양승조·최문순 지사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나? 국회의원은 왜 사퇴하지 않나? 지난 대선경선에 나섰던 홍준표·안희정 지사는 어떠한가? 성남시장이던 이재명에게는 왜 요구하지 않았나? 경남지사를 사퇴하고 욕먹은 김두관씨는 뭐란 말인가? 도대체 무슨 공정을 원하는가? 돈많으면 버리고, 잘생기면 망가뜨리고, 말잘하면 어눌해져야 하나?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대통령후보는 선거 90일 전까지 지사직을 그만둬야 한다. 이재명씨는 법대로 하면 된다. 원희룡씨가 제주지사를 사직한 것은 그의 맘이다. 하지만 “지사찬스”를 쓰지 말라고 이재명씨를 압박하는 것은 지나치다. 이씨에게 사퇴를 종용하는 평론가들도 마찬가지다. 말이 아니라 말폭력이다. 정말 후보가 공직을 유지하는 것이 불공정하다면 공직선거법을 비판하고 개정할 일이다. 선거와 관련한 불법행위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이다. 상식이다. 이재명씨를 둘러싼 시비에서 합당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냥 이재명이기 때문에 벌어진 말폭력이고 이전투구다. “비개비”여서 차별받는 서러움을 보여준다.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세력이 누군지를 똑똑히 보여준 패악질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1. 황교익은 무슨 죄를 지었나?. <최소주의행정학> 6(9): 1.

조국대전이 발발한 지 2년이 되었다. 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된 2019년 8월 9일부터 장관으로 임명된 9월 9일을 지나 스스로 “검찰개혁의 불쏘시개”가 되겠다며 사퇴한 10월 14일까지 개혁세력과 기득권세력이 각각 서초동과 광화문을 달궜다. 조국과 윤석열은 양진영의 기싸움을 상징한다. 지금 조씨는 수렁에 빠진 자신과 식구들을 지키는데 사활을 걸고 있고, 조씨를 짓밟고 우뚝 선 윤씨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통령이 되는 꿈을 꾸고 있다. 조국대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조국의 전쟁과 최소주의

서해맹산誓海盟山으로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운 조씨는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조폭 두목이 믿었던 행동대장에게 어이없이 난도질을 당한 느낌이랄까? 처자식은 물론이려니와 동생(조권)과 당질(조범동)과 주변 사람들(최강욱, 노환중 등)까지 처참하게 발렸다. “니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며 계속 쑤셔댔다. 유시민씨가 규정했던 몹쓸 가족인질극이다.

검찰은 100여 군데를 압수수색하고 수사와 재판을 질질 끌면서 권력형 범죄, 가족사기단, 파렴치라는 낙인을 찍었다. 수구 야당과 기자들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조씨 일가를 진창에 몰아놓고 마음껏 조졌다. 한 집안을 풍비박산風飛雹散낸 검찰과 수구세력의 기세에 지인들은 감히 조씨의 편에 서지 못했다. 양심을 거슬러 조씨를 외면하고 자기 목숨을 건사하기에도 바빴다. 조씨 식구들은 억울함과 미안함과 고립감으로 손발이 묶인 채 쏟아지는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아내야 했다. 지인을 원망하고 손가락질하는 자와 지인에게 버림받는 자 모두 인간성이 파괴되는 악랄한 짓이다. 수사가 아니라 인간 학대와 인격 학살이다.

이렇게 역적을 때려잡듯이 해서 기소한 정경심 교수의 혐의는 자녀입시, 사모펀드, 증거인멸에 관련한 15개였다. 조씨 자신은 자녀입시, 웅동학원, 딸장학금 등과 관련한 11개 혐의로 기소되었다. 말이 26개 혐의이지 사실 같은 사건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고 해서 늘린 숫자다. 정말 눈이 나쁜 황새의 사냥법인가? 검찰은 입시 당사자인 조씨의 자녀는 정작 기소하지 않았다. 비열한 압박이다. 또 “조국펀드”로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중범죄라며 열을 올렸지만, 그 바닥에서는 푼돈인 10억원으로 뭘 어쨋다는지 하품만 나온다. 권력형 범죄라더니 특수부 검사라는 자들이 인턴활동을 몇 시간 했는지, 학회에 참석했는지, 표창장이 위조되었는지를 따지고 앉아 있다. 설사 모든 혐의가 사실이라 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조국 교수가 사법개혁을 말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달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되지 않았다면 그의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은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까지 사표를 내지 않았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질로 끌려갔을 것이다. 또 조국이 아니어도 누구든 검찰을 건드리겠다는 자는 똑같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검찰개혁을 추진한 것 자체가 죄라는 소리다. 사모펀드니 인턴증명서니 표창장은 다 핑계고 구실이다. 이래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서초동과 여의도에 몰려가 촛불을 든 것이다. 누구도 조씨 일가처럼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해서는 안된다는 공포와 분노다. 국민이 원하는 개혁을 거부하는 검찰에 대한 주권자의 노여움이다.

조씨의 지난 2년은 고난 그 자체였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휘두르는 폭력을 참고 견디어 왔다. 그렇다고 대책없이 맞고만 있거나 꼼수나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자신과 식구들에게만 가혹한 검찰과 야당과 언론과 재판관에게 법과 상식과 사실과 논리로 대응해왔다. 외면받고 비난을 받는다 해도 꼭 해야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감정을 누르고 “하나하나 따박따박” 법절차를 진행했다. 최소주의 비폭력이다. 조국의 전쟁이 그만의 전쟁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정치와 검찰주의

윤석열씨는 박근혜 정권에서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을 수사하다 좌천되는 수난을 당했지만 검찰총장으로서 조씨 식구들이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주지 않았다. 최소주의자의 품격이 아니다. 후보자의 자택을 기습奇襲으로 압수수색한 8월 27일, 윤씨는 박상기 장관을 만나 조씨의 낙마를 요구했다고 한다. 장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임명권자에게 무력시위를 한 셈이다. 누가 뭐래도 자기 멋대로 찔러대는 낭만자객의 만용蠻勇이다. 장관도 대통령도 발 아래에 둔 자의 눈에 조후보자가 보였을 리 만무하다. 시퍼런 서슬은 스스로 참지 못하고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본인이 확신했던 사모펀드 혐의는 최근 대법원 판결로 허물어졌다. 윤씨의 칼베기는 성급했고, 난폭했고, 과했고, 허무했다.

반면에 윤씨는 검찰조직과 자기 식구들에게는 끔찍했다. 검찰의 칼날은 균형을 잃었다. “별장 성접대” 동영상을 보고도 두 차례나 김학의를 불기소 처분했던 자들이 김씨의 출국을 막은 절차를 문제삼았다. 한명숙 전총리 사건과 관련한 모해위증교사는 끝끝내 무혐의로 처분했다. 장관의 수사지휘도 위증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증언도 법공작에 묻혔다. 집요한 자기식구 감싸기가 눈물겹다. 윤씨는 자신에 대한 직무정지와 징계에 반발하여 집행정지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기술이다. 윤씨 배우자와 장모에 관련한 사건은 의혹만 남긴 채 진전되지 못했지만, 추미애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발동하자 6년 전에는 입건조차 되지 않았던 장모가 한달 전 징역 3년형을 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윤씨가 어떻게 검찰권력을 활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씨의 대권 도전은 오래된 권력욕의 정점으로 보인다. 그의 “보스기질”은 조국대전에서 확인한 반문수구세력의 지지를 계기로 야망이 되어 불타올랐다. 상관을 멋대로 치받을수록 박수를 받는 재미에 홀닥 빠진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었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을 일 아니던가. 무서운 세상이 아님을 깨달은 기회주의자들이 우후죽순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갈 곳 없는 수구들의 울분과 저주에 편승한 것이다.

윤씨는 법깡패들의 칼잡이로서 꽤 괜찮았는지는 몰라도 정치인으로서는 햇병아리다. 그는 문재인 정권이 국민을 약탈하는 독재라고 비난했다. 검찰총장이었던 자신은 약탈과 독재를 눈뜨고 보고만 있었단 소린가? 얼마 전 한국이 5년 만에 완전한 민주주의로 복귀했다는데, 무슨 뚱단지같은 소리인가? 윤씨는 지지자들에게 공정과 법치를 약속했다. 과연 조국 수사, 김학의 사건, 한총리 사건은 공정하고 정당한 법집행이었을까? 배우자와 장모에게 그토록 자비롭게 처리되었던 사건들은 정말 우연일까?

윤씨는 과격하거나 민심과 동떨어진 발언으로 설화를 자초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세금을 나눠줄거면 안걷어야, 다른 지역이었으면 민란, 주 120시간이라도 일하고, 이한열 앞에서 부마항쟁 등은 참담한 수준이다. 말할 필요가 없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이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난사하자 지지자들이 나자빠지고 있다. 좌충우돌하며 구세력들과 선문답을 섞더니 압수수색하듯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그의 정치 “지평선”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명박근혜를 꿰뚫는 수구기득권이라는 선언이다. 역사인식과 정치감이 가난한 낭만자객의 한계다. 그래서 조국을 바르고 청와대를 들이받은 것일까? 하지만 상처투성이 조국이 뚜벅뚜벅 돌아오고 있다. 윤씨는 다 잊었다지만 이제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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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1. 조국의 최소주의와 윤석열의 검찰주의. <최소주의행정학> 6(8): 2.

정부가 지난 달 24일 국무회의에서 제 2차 추가경정예산안을 확정했다. COVID-19와 관련한 재난지원금과 소상공인 보상금이 포함되었다. 이른바 “국민지원금”은 맞벌이와 1인가구를 포함하여 소득수준 8할 이하에게 1인당 25만원씩 지급하고, 저소득층에게 10만원을 추가로 지급한다. “소상공인희망복지금”은 방역 조치로 입은 피해에 대하여 최대 2천만 원을 지급하고, 앞으로 발생하는 손실을 보상한다. 늦었지만 결론을 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보편과 선별이 아니라 목적을 물어야 한다

나는 정치권이 보편이니 선별이니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못마땅하다. 목적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면 되는 일인데, 목적은 따지지 않고 방법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길어진 방역으로 지치고 배고픈 민생을 달래기보다는 정치득실을 따지며 이전투구하는 꼴이라니...

소상공인을 위한 지원과 보상은 그 자체로 선별이다. 누구를 소상공인으로 정의할 지, 방역 조치로 인한 손해를 어떻게 추정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다. 형평성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구청, 국세청,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이 객관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경기부양이 목적이면 신용카드, 현금, 상품권 별로 정부지원금의 효과를 철저하게 따져봐야 한다.

국민지원금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에게 지급”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대상을 정의할 것인가? 가구원수와 맞벌이가구를 고려하여 6월 건강보험료 본인부담금 합산액이 80 percentile 이하(고액자산가 제외)로 기준을 정했다. 예컨대, 5인 외벌이가구 지역가입자는 합산액이 42만 3백원 이하여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의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첫째, 경계에 있는 가구를 납득시키기 어렵다. 왜 79%는 되고 81%는 안되는가? 왜 7할이나 9할이 아니라 8할인가? 둘째, 코로나19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지 아닌지를 건강보험료로 결정할 수 있는가? 80% 이하는 나이, 직업, 지역에 상관없이 전부 어려움을 겪고, 그 이상은 어떤 경우든 어려움을 겪지 않는가? 아무렴 코로나19가 부자와 사장과 장관을 알아보겠는가? 모두에게 지급하지 않는 한 이런 논란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은 보편이냐 선별이냐가 아니다. 왜 정부가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는가? 재난을 당하여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말하자면 구휼미救恤米를 풀겠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부자에게는 구휼미를 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정부가 기준을 정했으니 군말 말고 줄이나 똑바로 서라. 관료주의의 완장질이다. 이런 발상이라면 기준을 더 낮춰야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이라면 사실상 빈민이니 대략 20%면 족할 것이다. 건강보험료를 40만원 넘게 내는 5인 가구가 굶어죽게 되었으니 구휼미를 달라면 말이 되는가?

구휼미가 아니라 정당한 사례금이다

먼저 재난의 성격을 따져보자. 자연재난은 화산, 지진, 산불, 폭풍, 해일, 홍수, 가뭄 등으로 발생하는 재해다. 사람은 자연재해를 막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포항지진처럼 인재人災에 가까운 경우도 있지만 자연재해는 잘잘못을 따질 수 없다. 다만 재난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구하고 일상을 회복시켜줄 것인가를 따질 뿐이다.

사회재난은 화재, 환경오염, 전염병 등으로 인한 피해를 말한다. 전염병은 인간의 지식 수준에 따라 통제불가능하기도 하다. 14세기 유럽을 휩쓸던 흑사병이 그러하다. 당시 인간은 흑사병의 원인도 속성도 몰랐기 때문에 미신과 주술에 매달리다 속절없이 1억명이 목숨을 잃었다. 왕조시절 역병이 발생하면 흔히 해당 지역을 폐쇄하고 집이며 사람이며 짐승을 모조리 불태워 없앴다. 접촉하면 전염되어 죽는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으니 궁여지책이었다. 귀신의 저주를 경외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임금을 책망할 뿐이었다.

하지만 인류는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19로 인한 폐렴의 원인과 증상과 속성을 단시간에 알게 되었다. 중국 안과의사 李文亮(Li Wenliang)의 살신성인 덕분이다. 코로나19가 전염되는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사람 간 접촉을 피하고, 마스크를 쓰고, 환기와 소독을 자주 하면 감염위험을 줄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백신을 생산하여 접종을 하고 있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19가 과거 페스트균과 달리 인간이 통제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구성원이 서로 접촉을 줄이고 개인위생에 철저할 때 가능하다는 점이다. 나의 부주의한 행동이 간접적으로(누구도 모르게) 많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성(externality)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들의 의식과 참여와 실천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른바 K-방역이 성공한 것은 지도자가 과학(의학)에 기반하여 판단을 내렸고, 해당 공무원과 의료진이 방역에 헌신했고, 국민들이 방역 조치에 비교적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자연재난과는 달리 코로나19 방역에서는 공과를 따질 수 있다. 급여를 받는 공무원과 의료진은 그렇다손 쳐도 방역에 적극 동참한 국민들의 공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영업시간을 줄이고, 손님 간 거리를 유지하고,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삼가고, 환기를 하고, 손소독을 철저히 하는 것 하나하나는 일상의 일이지만 가장 큰 방역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델타변이가 크게 유행하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를 위해 방역 조치를 따라준 국민 모두에게 사례謝禮해야 한다. 불쌍하니 굶어죽지 말라고 구휼미를 줄 것이 아니라 공로를 인정하고 포상해야 한다. 공동체의 주인 스스로 오랫동안 참고 견디어낸 것을 서로 위로하고 치하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정부가 시혜를 베푼다는 투의 “재난지원금”이나 “국민지원금”이 아니라 주권자의 당연한 몫인 “방역(협조)사례금”이나 “방역(실천)격려금”이 되어야 한다. 또한 정기적으로 지급해야 한다.

구태여 선별을 한다면 소득수준이 아니라 방역 조치를 잘 따랐는지를 따져야 한다. 영업시간을 어기거나, 집합금지나 개인거리를 지키지 않거나, 마스크를 쓰지 않는 등의 위반자를 가려내야 한다. 부자든 서민이든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인내하고 실천하는 시민 의식이 절실해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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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1. 재난지원금이 아니라 방역사례금이다. <최소주의행정학> 6(8): 1.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여권에서는 이재명, 이낙연, 추미애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야권에서는 검찰총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윤석열과 감사원장을 그만두고 15일 만에 제1야당에 들어간 최재형이 앞서고 있다. 터줏대감인 홍준표와 유승민은 쑥스럽게도 순위에서 밀려나 있다. 나는 등락하는 지지율보다도 고위직 공무원이 몸담았던 정부를 비난하고 대권에 나선 것이 신경쓰인다. 법규정이 아니라 직업공무원의 책무와 윤리와 처신을 말하고 싶다.

직업공무원의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은 정치중립을 위해 임기가 보장된 자리다. 윤석열과 최재형씨가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대선출마를 위해 (건강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직서를 던진 것은 무책임하다. 이들이 대선출마를 어느날 갑자기 결정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동안 윤씨와 최씨가 벌여온 정부와 여당 인사들에 대한 조사와 감사의 순수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정당한 직무수행이라기보다 출마용 실적쌓기였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정치중립을 염불念佛처럼 외던 검찰청과 감사원 구성원들은 난감하고 민망할 뿐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화두는 아무리 정치인의 수사라 해도 지나치다. 윤씨는 부패하고 무능한 문재인 정권이 권력을 사유화하여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상식과 공정과 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의 근간의 무너뜨렸다고 했다. 문정권을 독재와 전제로 낙인찍은 제1야당과 같은 문법이다. 최씨도 문정권이 헌법과 법률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헌법정신을 회복하고 법치주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문정권이 저지른 일탈과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황교안씨의 변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윤씨와 최씨의 언행은 모순이다. 정말 현정권이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국민을 약탈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은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바로 그 정권에서 사정기관을 책임졌던 자들이 이제 와서 남 얘기하듯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라며 물어뜯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먼저 검찰과 감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참회해야 할 일 아닌가?

멀쩡한 검찰총장이었으면 불법을 저지른 자라면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들였을 것이다. 헌법정신을 위반한 물증이 명백하다면 국회의 탄핵과는 별개로 즉시 청와대로 들이쳐서 대통령과 참모들을 오랏줄로 묶어왔을 것이다. 헌법이 무너지고 법치주의가 망가지고 있는데, 검찰총장이라는 자가 대통령의 눈치나 보고 장관들과 티격태격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설령 독재자가 검찰의 정당한 법집행을 군홧발로 진압한다 해도 일말의 후회도 없을 것이다. 오직 국민을 바라보는 “바보 칼잡이”였다면 말이다. 전두환의 군사반란에 맞섰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환과 특전사령관 정병주처럼 말이다. 하지만 윤씨는 소심한 “낭만 자객”이었다. 최씨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면 강도높은 감찰을 벌여 위법 행위를 낱낱이 파헤쳐야 했다.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서 김영삼씨와 대립한 이회창씨처럼 강제로 자리에서 쫓겨난다 해도 본연의 직무에 충실했야 했다. 하지만 최씨의 감사원이 시끄럽게 소동을 벌이면서까지 적발한 내용은 용두사미에 가까왔다.

더구나 해먹을 만큼 다 해먹고 나서 정략에 따라 약탈과 비정상을 운운하는 것은 속보이는 짓이다. 궁색한 변명이다. 윤씨와 최씨가 여당의 비난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청와대를 압수수색했고, 조국 전장관 식구들을 마음대로 발랐고, 탈원전 정책 감사도 밀어붙였다. 청와대든 국가정보원이든 훼방을 놓지도 않았고 거대 여당은 탄핵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물러터진 독재와 전제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이었으면 모가지가 수백 개라 한들 살아남지 못했을 일이다. 어디 감히 검찰총장이나 감사원장 따위가... 아마도 빨갱이나 반역자로 몰아 식구들까지 매장시켰을 것이다. 무서운 독재시절이 아님에 기회주의자들이 이리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윤씨와 최씨는 최소주의자가 아니다

윤씨와 최씨의 출마에 감동이 없는 이유가 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와 판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이 사회의 기득권을 상징하는 인생을 누린 사람이다. 독재정권에 맞서다 끌려가 매맞고 오욕을 당하거나 서민으로 살면서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억울했던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고문으로 몸서리치던, 저승문턱에서 오금이 저리던 추억이 없는 자들이다. 꽃길을 걸어온 자들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버틴 최소주의자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다. 벼랑 끝에 내몰려서 인간으로서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마지막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국 식구들을 난도질한 칼솜씨나 절차와 방법을 따져 정책 자체를 비틀어대는 법기술은 최소주의자의 품격과 거리가 멀다. 작심하고 휘두른 그 칼과 법날이 멀리 돌아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있음을 아는지...

그들에게는 기득권의 초상이 있을 뿐 애초부터 긍휼해야 할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적폐로 모는 것이 반헌법이고 불법이고 불공정이고 몰상식이고 비정상이다. 그동안 윤씨가 남긴 설화는 그의 인식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씨의 서민 행보는 흙묻은 오이를 입에 넣은 이회창씨의 억지스러움이다. 윤씨와 최씨가 현정권을 반헌법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정의와 상식과 정상을 말하는 것이 허무한 까닭이다. 지금껏 호의호식하고서 마치 정권의 핍박을 받은 것처럼 떠벌리고 마음에도 없는 “국민팔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권은 윤씨와 최씨가 임명권자를 배신했다고 비난했지만 틀린 얘기다. 사정기관은 의리가 아니라 불법탈법을 따질 뿐이다. 무작정 권력자를 때려잡으라는 칼도 아니다. 그들은 직무를 유기하고 권한을 남용하여 사리사욕(정치이익)을 채운 탐관오리였을 뿐이다. 주변의 부추김에 홀린 듯 끌려 나와서 엉겁결에 숨겨왔던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면 미련없이 링에서 내려올 자들이다. 모냥 빠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간절한 민심이 아니라 영웅의 이름을 구하는 족속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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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1. 공무원의 윤리와 윤석열·최재형의 처신. <최소주의행정학> 6(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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