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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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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병원에서 투석透析하시던 소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대뜸 일본 관료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좀 얼떨떨하다가, 일정한 체계를 잘 갖추어 일을 꼼꼼하게 수행하지만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일본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일본은 우리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짧게 말씀하셨다. 강의실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관료제를 비교하여 설명하신 것은 기억하지만 정확한 취지는 당시에 알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내 답변이 피상적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에 머물면서 이런 저런 일을 관찰하고 경험한 결과다.

원칙아닌 원칙, 위법아닌 위법

아베 총리의 사학비리 사건이 확산되고 진화되는 과정은 흥미로왔다. 아베 측근이 운영하는 모리토모森友 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넘겨주었고, 재무성 고위 공무원까지 동원하여 공문서를 조작했다. 끝내 모든 용의자가 불기소처분을 받자 검찰마저 “손타쿠忖度”라는 자조를 쏟아냈다. 원래는 타인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지만 조직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심기를 눈치껏 살펴 알아서 긴다는 소리다. 서구의 법질서를 받아들여 합리적이고 꼼꼼하게 일을 한다는 일본관료제의 민낯이다. 또 일제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전범기업이 배상하라는 한국대법원의 판결을 빌미로 아베 정권은 이달 초 주요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하였다. 얼마 전에는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종료한다고 선언했고 국민들은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맞서고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을 찔끔찔끔 허가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고작 이런 관료제였던가?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해야 하나...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원칙과 절차를 자세하게 적어놓고 그것을 철저하게 따르려고 한다. 체화된 습관을 넘어서 집착증이라 해도 될 정도다.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고 하던 대로 한다. 공공기관의 문서양식은 어렸을 적 기억을 소환한다. 은행에서 해외송금을 하려면 넉 장이 넘는 서류를 작성하고 반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한국에서는 신분증과 수결로 10분이면 끝낼 일을... 문서에 도장을 열심히 찍는 것이나 돈을 하나하나 세면서 계산하는 것이나 감동스러운 꼼꼼함이다. 지독하게 깨끗한 일본 화장실의 치밀함이라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일본 관료제는 어쩌면 막스베버의 이념형(ideal type)에 가깝다. 전문성을 갖춘 공무원이 법과 절차에 따라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원칙이 항상 원칙이 아니고 위법이 위법이 아니라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원칙 자체는 서구의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이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규칙을 정하더라도 언제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다. 원칙 자체를 모호하게 적어놓거나, 예외를 넓게 적어놓거나, 그도 아니면 대놓고 권력자의 재량사항으로 해놓는다. 어느 경우이든 권력자가 독한 맘을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미묘함을 남겨둔다. 구렁이 담넘어가듯 원칙과 위법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함이다. 애초부터 어기기 위해 원칙과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있다. 아베 정권이 재등장하면서 구석구석에 측근을 박아놓았는데, 이들의 막가파식 권위주의 행태에서 규칙같으나 규칙이 아닌, 불법같으면서도 불법이 아닌 “어정쩡한 치밀함”을 관찰한다.

좀더 심각한 상황에서는 원칙이나 규칙은 허수아비가 된다. 문서에 멀쩡하게 적혀있지만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벌거벗은 힘(naked power)이 야만스럽게 관료제를 쥐고 흔든다. 비유하자면, 필수과목에서 낙제를 받거나 논문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도 졸업을 시킨다. 윗사람이 결정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그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물론 원칙을 적용하자면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상부의 지시로 문서조작을 했다며 자살한 재무성 공무원의 억울함이 납득되는 대목이다. 권력자는 조직구성원의 협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가 아니라 식민지에 쳐들어온 점령군에 가깝다. 나는 이러한 황당하기 짝없는 폭력을 관료제에서 어떻게 소화하는지가 궁금했다.

권력남용에 대처하는 공직자의 선택

가장 쉬운 방법은 알아서 기는 것이다. “손타쿠”로 윗사람을 알아서 섬긴다. 나쁜 윗사람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찍어누르면 최대한 규정을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궁리한다. 억지로라도 꿰어 맞출 수 있는지 따진다. 예를 들면, 논문심사위원 모두가 부적격으로 결론을 내려도 다시 심사하도록 종용한다. 누가 봐도 불통이 당연한데도 명문 규정이 없으니 윗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랜다(의견이 엇갈린 경우에만 명문 규정이 있으니까). 상상력으로 해결이 안되면 문서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통계학과로 지원한 학생이 생뚱맞게 경제학과로 합격된다. 또 위원회같은 제 3의 기구를 통해 현상이나 사실을 바꿔치기한다. 심각한 폭력이나 부정행위도 위원회에서 무혐의로 발표한다.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어도 자신의 의견이 그러하다고 해명한다. 사실과 진실과 관계가 없는 자기최면이나 자기기만일 뿐이다.1)

두번째는 소극적으로 침묵하고 묵인한다. 담당자가 “손타쿠”를 몰라 분위기파악을 못하면 윗사람은 권력남용의 강도를 높인다. 담당자를 불러내서 집요하게 의지를 전달하는데, 대개는 여럿이 둘러싸고 몰아부친다. 이것 역시 약발이 서지 않으면 결단을 내린다. 아랫사람의 권한으로 행사해야 할 결정을 이렇게 결정하라고 지시한다. 아랫사람은 뒤늦게 알아서 기든지, 침묵하든지, 아니면 위험을 각오하고 내부고발을 하든지 해야 한다. 예컨대, 부서내규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도록 회의를 열어 결정하라고 한다. 물론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이다. 아랫사람은 회의를 열어 윗사람의 통보내용을 공개하고 자신들의 결정이 아님을 밝힌다. 하지만 만장일치로 합의된 안건으로 둔갑되어 윗사람에게 보내진다. 자신의 결정을 아랫사람의 합의로 포장하여 자신이 재가裁可하는 셈이다. 아랫사람의 침묵은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있으나 양심상 맨정신으로 따를 수는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다.

세번째는(내부고발이나 항거나 물리력 동원 등은 열외로 치자) 권력자가 전면에 등장하여 원하는 것을 강제하는 경우다. 물론 원칙과 규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관료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때 관료들은 원칙대로 처리하되 윗사람의 결심내용을 별도로 문서에 남겨둔다. 예컨대, 성적증명서에는 필수과목이 낙제라고 찍히지만, 내부문서로 정황을 기록해놓고 졸업장을 발급한다. 이런 행위를 지칭하는 고유한 어휘가 있댄다. 물론 이 경우에도 회의에서 권력자의 엄중한 의지임을 밝히고 “침묵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관행은 권력자의 폭력을 피하되, 원칙을 위반하는 자신을 보호하는 궁여지책이다. 권력남용과 원칙 사이에 마련해 둔 완충장치라지만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이다.

이러한 편법과 황당한 관행을 이해하면 아베 정부가 수출허가를 매번 받도록 하거나 절차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째,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허가를 내주는 것도 내주지 않는 것도 그때그때 유불리에 따라 신축성을 발휘한다.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에서 패는 것이 유리하면 패고 안패는 것이 유리하면 점잖게 대접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아베 정권이 상상력을 어디까지 발휘할 지, 원칙과 현실의 괴리를 어찌 정당화할 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변덕스런 자의성과 불확실성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세째,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결정이어서 책임을 따지기 어렵다. 권력자가 권한을 남용하여 강제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기가 쉽지 않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모두가 결정한 일이니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선비의 나라? 무사의 나라?

왜 이런 일들이 관료제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권력남용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벌거벗은 폭력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태도는 좀 특별하다. 집단주의에 순응한 탓인지 고개를 쳐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윗사람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외부에 폭로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당장 자기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대부분 앞에 나서지 않는다. 부당한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대부분 침묵한다. 학력, 소득, 지역, 성별과 관계없이 감정을 드러내거나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좋게 보면 불필요한 관심을 끊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세상일에 눈감는 것이다. 속으로는 정치인을 비난하더라도 막상 투표소에는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속말(本音, 혼네)과 겉말(建前, 다테마에)이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튀지 않으려는 속내는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고 “왕따”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속담을 체화한 듯하다.

이러한 습성은 일본의 사무라이(侍) 정신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무라이는 15-16세기 전국시대에 지방 영주(大名, 다이묘)를 주군으로 모시고 특권을 누려온 무사계급을 말한다. 주군에게는 절대 복종하지만, 칼을 차고 다니며 평민들을 자의로 지배했다. 권력을 쥐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듯이 서슴없이 패악질을 저질렀다. 마음대로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비위를 건드린 자들을 벨 수 있었다. 절대 복종을 강요받은 백성들은 살아남느냐 항거하다 죽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친절한 것은 사무라이의 폭력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약자의 지혜가 습관화된 결과일는지 모른다. 포악한 칼날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궁여지책이다.

소정 선생님은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명치유신 전까지 무인통치를 해왔다고 했다(1980: 383; 1991: 81). 한국의 국조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마늘과 쑥을 가져왔는데 일본의 국조는 복종심을 유발하는 칼, 활, 거울, 구슬을 가져왔으니,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정복인간征服人間의 차이다(1991: 77-78). 선비의 나라와 사무라이의 나라의 거리이며(2006: 266), 씨름과 스모가 다른 점이다(2011: 226). 전후 온건관료주의를 채택해온 일본이 한국과 중국의 관료제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죄를 뉘우치고 대안을 모색하기는 커녕 권력자의 온정주의에 순치되고 있다(1996: 31, 654). 말하자면 의미있는 반성과 저항과 수난을 겪지 않은 관료제가 권력남용에 속수무책으로 퇴화하고 있다.

사실과 신화, 역사와 종교

소정 선생님은 또 “일본만 해도 민회의 뿌리가 되는 교회가 드물고 귀신 모신 데가 많은 것이 흠”이라고 하셨다(2008: 454). 아마도 지진과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많고, 사무라이의 패악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일는지 모른다(1996: 289). 아직도 일본인 다수가 인간인 왕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2011: 167). 인간과 신이 동전의 양면이다. 종교가 개혁되지 않고 신의 권위에 눌린 백성이 스스로 “카미카제” 특공대로 나설 정도다(2011: 427).

일본이 신화와 종교에 집착한다면 한국은 사실과 역사에 죽고 산다(박헌명 2018). 일본인들은 신화를 만들고 종교처럼 믿는데 익숙해져 있다. 사실과 진실이 어떠한 것인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과 신화가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신화로 살아도 자연스러울 뿐더러 불편하지 않다. 반면 한국은 조국후보 검증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사소한 사실관계에도 목숨걸고 달려든다. 그래서 한국이 독도가 역사책에서 어찌 기술되어있는지, 옛날 지도에 어찌 표시되어있는지를 들이밀어도 신화에 심취해 있는 일본인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나쁜 권력자가 원하는 신화를 만들면 관료제든 시민들이든 순응하게 된다. 독도든 일제성노예든 무역전쟁이든 말하고 싶은 얘기를 창작한다. 힘을 숭상하는 자들은 권력남용을 따지지 않고 신화를 사실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심 동의하지 않아도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못본 체 한다. 정답은 정해진 것이니 어떻게 신화를 현실로 자연스럽게 이어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질문할 필요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할 뿐이다. 알아서 기든, 입닫고 침묵하든, 원칙을 위반한 사연을 깨알처럼 적든 같은 정신줄이다.

견디면서 힘을 키워야 한다

한일 무역갈등으로 양국 모두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베 정권의 꼼수와 잔머리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권력자의 결정에 꿰맞추려는 자기기만과 어거지를 버텨내야 한다. 서로 다른 문법과 논리로 겨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끝까지 정도를 걸으면서 참고 견뎌 내야 한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는 한 계속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보편성과 합리성으로 다투어야 한다. 특히 일본보다 다른 나라를 설득하여 협력을 얻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아베 정권보다는 양식있는 시민사회와 연대해야 한다.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사실을 말하고 용기있게 헛된 신화를 깰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사무라이의 패악질을 멈추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끝주

1) 전후 일본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일으키던 시절 어느 일본기업이 미국 제품을 복제하여 팔다가 기소되었다고 한다. 그 제품에는 “Made in U.S.A.”라고 새겨졌는데, 일본쪽에서는 U.S.A.가 미국이 아니라 “우사”라는 일본회사라고 우기고 재판부에 각종 문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아마도 “우사”의 모든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창작하였을 것이다. 십수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참고문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사무라이 관료제의 눈가리고 아웅. <최소주의행정학> 4(8): 1-2.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되었다. 신문과 방송마다 크든 작든 정권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를 내놓고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나 경제정책에 매겨진 점수는 가혹하다. 혹자는 F라거나 평가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 지난 1분기 실질국내총생산 성장률이 .3푼이나 떨어졌다며(-.3%) 호들갑이다. 경제가 “폭망”했다는 것이다. 어느 금융기관 간부는 최저임금인상으로 조만간 정권이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말 경제가 “폭망”했나?

지난 5월 3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4푼이 노동고용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29푼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복지정책은 51푼이 잘하고 있고(33푼이 부정평가), 45푼이 각각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을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인사정책은 26푼만이 잘한다고 했고(50푼이 부정평가), 경제정책은 겨우 23푼만이 긍정평가를 내렸다. 응답자의 62푼이 경제정책을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45푼이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잘한다고 보았고 46푼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외교와 남북관계 개선 (14-16푼)이 긍정평가를, 민생 문제 (44푼)가 부정평가를 주도했다.

이런 평가를 접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인사정책이나 경제정책이 그토록 형편없었단 말인가? 수구세력이 “인사참사”라면서 비난을 쏟아냈지만 아무리 못해도 이명박근혜 정권에 비할까? 성인군자가 왔어도 트집을 잡아 망신을 주었을 것이면서 청문보고서가 어쩌니 낙마 비율이 어쩌니 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

수구세력들이 경제가 “폭망”했다며 내세우는 거시경제지표를 몇가지 살펴보자(아래 그림 참조). 국가지표체계(index.go.kr)에서 얻은 실질국내총생산성장률은 현재 박근혜 정권의 연장선에 가깝다. 특별히 치솟은 것도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올해 1분기 성장율이 낮은 것도 지난 4분기 성장률이 높았던 탓이다. 경제성장률만 놓고 보면 수구세력이 그토록 “경포대”라고 비아냥거렸던 노무현 정권이 시장경제를 외쳤던 이명박근혜 정권보다 훨씬 나았다.

또 고용이 늘지 않았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업률은 김대중 정권 이래 3–4푼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고 하지만 “고용절벽”이라 할 수는 없다. 물론 노령인구의 일자리와 소득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는 사회경제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문재인 정권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경제성장률이 뚝 떨어지고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고 볼 수 없다. 세계 경제의 흐름에 따라 한국 경제가 어렵게 가고 있는 것은 맞지만 경제가 “폭망”했다고 선동하고 저주하는 것은 지나치다.

Economy Growth Rate

최저임금인상과 자영업 위기?

흔히들 최저임금인상으로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규모는 OECD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자영업자 비중은 2001년 전체(취업자 +자영업자)의 28.1푼이었는데, 2010년 23.5푼으로, 2018년에는 21.0푼으로 꾸준히 내려왔다. 1인 자영업자 비중은 압도적이어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72–73푼이었다(국민일보 2017. 10. 7). 1인 자영업자는 최저임금과 관계가 없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종업원을 둔) 자영업자는 2017년 기준으로 전체의 5.8푼(=21.3% X 27.4%)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인상 때문에 종업원을 둘 수 없을 지경이라면 문을 닫아야 한다. 시장 논리다. 경쟁력에 따라 자연스레 자영업 지형이 조정되어야 한다. 지금 자영업 문제는 최저임금인상보다는 경기둔화, 무분별 창업, 집세 등과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인상된 임금이 시행되기도 전에 수구세력들이 자영업 위기를 운운했던 것은 여론조작에 가깝다. 요컨대, “경제폭망”이나 “좌파독재”는 염치없는 정치구호이다.

경제는 시대정신이 아니다

실물경제와 민생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재인 정권이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은 아니다. 촛불혁명이 물었던 것은 “이게 나라냐?”였다. 입법, 사법, 행정부가 법에 따라 제대로 동작하도록 고치는 것이다. 특권과 반칙이 없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다. 국민이 번역기없이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함이다. 한마디로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경쟁력이 줄어들고, 실직자가 늘고, 빈부격자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정부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급한대로 최저임금을 올리고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다.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복지정책에 좋은 점수를 준 까닭이다. 하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성장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기간에 성장한 우리 경제는 규모도 크고 충분히 복잡해져 있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어느 전문가도 쉽게 답을 내지 못한다. 하물며 무역의존도가 높고 재벌의 갑질이 체질화된 경제임에랴.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지혜를 모아 경제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 인내심과 긴 호흡이 필요하다. 새로움이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서로 의지하여 아픔을 나누고 격려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마음만 급해서 이리저리 뛰고 있고, 수구세력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대기업은 뒷짐지고 굿이나 보고, 국민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입맛만 다시고 있다. 어차피 경제는 민간의 몫이다. 정부는 기업과 국민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제시해야 한다. 비정상을 바로잡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문재인 정부의 경제는 “폭망”했나? <최소주의행정학> 4(6): 2.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25일부터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동이 당혹스럽다. 무기력했던 “식물국회”가 다시 야성이 넘치는 “동물국회”가 되었다. 제1야당 의원들이 떼거지로 의장실에 몰려가서 남의 당의 사임과 보임을 허락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여자 의원을 앞세워 육탄전을 벌였다. 새로 사법개혁특별위원으로 보임된 채이배씨를 6시간 동안 의원실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했다. 또 국회 의안과에 들이닥쳐 여야 4당이 법률안을 제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문을 잠그고 묶고 자물쇠로 채웠다. 팔을 걸고 드러눕거나 줄지어 앉거나 인간띠를 만들어 회의장을 가로막았다. 여기저기 몰려다니며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며 비장하게 애국가를 불렀고, “헌법수호”를 외쳤다. 급기야 질서유지권이 발효되고 33년 만에 경호권이 발동되었다. 오랜 기억 속에 있는 풍경이다.

박근혜의 국회선진화법이 발목을 잡다

보는 이들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은 돌아온 “동물국회”가 아니다. 난동을 벌인 자들이 70-80년대 민주화세력이 아니라 수구세력이라는 점이다. 일제식민지 이래로 친일, 반공, 학살, 냉전, 반란, 유신, 고문, 공작으로 기득권을 이어온 자들의 입에서 “헌법수호,” “독재타도,” “불법야합,” “날치기” 등이 쏟아져 나오는 황당함이다. 상전벽해라고 했던가? 쇠노루발을 들고 당직자 앞에 나선 “나빠루”는 “결사항전”이라며 기염을 토했다. 전투력으로 치면 20년 전 민주당보다 한 수 위다. 무서울 때 목숨을 걸고 산전수전을 겪은 절실함과 저어함이 없다. 그냥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 하룻강아지의 용맹일 뿐이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했던가.

민주당은 수구야당이 국회 폭력금지, 날치기 금지, 신속처리안건 지정 등을 규정한 국회법(일명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2년 새누리당이 19대 총선거에서 과반을 얻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만든 계략아니던가. 그런데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이 이제와서 “국회선진화법”을 스스로 어기고 있다. 여야 4당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는 일을 무력으로 훼방놓고 있다.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근혜씨가 만들었다는 “걸작”이 이제는 걸림돌이 되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만든 법조차 어긴다

수구야당이 벌여놓은 난장판은 단순한 국회법 위반이 아니다. 어쩌면 최악으로 치닫는 수구세력의 운명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이문영(1986)은 포악한 통치자는 정권유지를 위해 악법까지 동원하지만 무리수를 거듭하다가 끝내는 스스로 만든 (악)법조차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 끝간데 없이 해먹다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법에 의해서 처벌할 수 없게 되면, 집권자는 스스로 그 법을 버리고 새롭게 악법을 만든다. … 마침내 그것은 더욱 진전되어 집권자는 자신이 정한 악법을 집권자 자신이 지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340쪽).

“만일에 자신이 제정한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이 온다는 신호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은 정권 스스로가 만드는 상황이다. 법은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 피치자인 국민에게 주는 신호는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호이다” (289쪽).

소정 선생님은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통치자(집권자)와 통치자의 폭력에 신음하는 국민을 상정했다. 수구야당은 제왕적 대통령이 경찰과 검찰을 접수하고, 사법부와 헌법재판소와 언론을 장악하고, 이제는 입법부마저 노리고 있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강자의 엄살일 뿐이다. 촛불혁명으로 청와대 권력만 바뀌었을 뿐 입법, 사법, 행정, 언론, 재벌 권력은 그대로다. 삼성에 대한 검찰 조사와 언론 보도는 이 사회를 지배해온 얼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전히 기득권을 틀어쥔 수구세력은 적폐청산에 맞서 전방위에서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다. 패악질에 신음하는 것은 여전히 국민과 이성과 상식이다.

“폭력에 기반을 둔 정권은 강한 것이 아니라 허약하기 때문이다. … 자기가 정한 법도 안지키기 때문에 이른바 시민적 불복종 운동으로 지칭되는 비폭력투쟁으로 붕괴가 된다”(1986: 297).

수구야당이 스스로 만든 국회법조차 무시하고 달려든 것은 기득권 세력이 자체 분열하면서 급속하게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는 신호다. 적폐청산이 진행되면서 잇속으로 뭉쳐있던 지배 세력이 서로 등을 돌려 각자도생을 모색하고 있다. 저수지의 뚝이 금가고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를 직감한 수구세력이 제 분에 못이겨 “헐크”가 된 것이다. 뜬금없이 “빨갱이 투사”로 변신한 야수가 난장판을 벌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울부짖는 까닭이다. 난동과 괴성은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허약한 속내를 숨기려는 몸부림이다. 진심과 합리성이 빠져있으니 그 메아리가 오래 갈 수 없다.

비폭력 준법투쟁으로 난동을 진압하라

그동안 수구세력이 보여준 태도와 언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청와대와 여당의 발목을 잡고 흠집을 내려는 계책으로 읽힌다. 국민들이 “좌파연합”을 과반으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야당이 동의한 공수처장이 어떻게 야당을 탄압하나? 대체 박근혜씨를 왜 풀어줘야 하나? 이성과 상식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과대망상이다. 총선거에 사활을 건 수구 지도부의 부질없는 사술로 보인다.

여야 4당은 이럴 때일수록 더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괴물국회”도 이제 끝물이니 마지막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국민의 눈과 상식에 맞는 비폭력 준법투쟁으로 괴수의 발악을 진압해야 한다.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수구세력의 자해공갈에 말려들지 않도록 긴장하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시민사회도 냉철하게 잘잘못을 따지고 처절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때늦은 벚꽃이 서늘한 봄비에 맞아 화사하게 지는 날이다. 총선이 다가온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동물국회, 식물국회, 그리고 괴물국회. <최소주의행정학> 4(5): 1.

바야흐로 적폐세력의 반격이다. 문정권이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값이 올랐다느니 하는 날조기사가 날이 갈수록 극성이다. 특히 유투비(YouTube)를 통하여 배포되고 재생산되는 날조기사는 자정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위력을 더하고 있다. 급기야 김태우 특별감찰반원의 폭로는 어처구니없는 운영위원회로 이어졌고,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동영상은 여의도를 흔들고 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따지기도 전에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과 직권남용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어쨋든 문재인 정권이 한 짓은 이명박근혜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홀로 깨끗한 척 고상한 척 하면서 또 다른 적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수구냉전세력은 문재인 정권을 흔들어 대다가 여차하면 끌어내릴 꿈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열 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다지 않은가. 개헌이든 최저임금이든 사사건건 문정부의 정책기조에 시비를 걸고 나선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모두 개헌과 최저임금 인상을 공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에 제출된 청와대의 개헌안을 끝내 내팽개쳤고,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소득을 줄이고 경제를 망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을 비난하면서 뜬금없이 “출산주도성장”을 하자며 설레발이다. 쓸데없이 돈퍼준다고 반대할 때는 언제고... 수구세력의 패악질은 과거 노무현 정권시절을 연상시킨다. 그때는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몰아갔고 지금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멘스 남이 하면 불륜)로 주술을 걸고 있다.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보수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일 뿐이다


수구냉전세력은 스스로 보수라고 칭한다. 우파라고 한다. 그 반대편에 선 세력을 좌파나 진보라고 부른다. 아예 종북세력이나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정치판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학계에서도 이런 진보-보수와 좌파-우파 분류법은 일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갈라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보거나 영점조준이 되지 않은 총을 쏘는 느낌이다. 이 땅에서 큰 소리를 내고 살아온 수구냉전세력이 정말 보수이고 우파라 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보수주의(conservativism)는 전통, 문화, 가치에 중점을 두고 권위, 질서, 안정을 지향한다. 자유주의(liberalism)은 인권과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다. 진보주의(progressivism)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의 지향이다. 우파는 재산권과 시장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capitalism)를 추구하고 좌파는 공동체의 사회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socialism)에 친근하다. 이런 정치나 철학의 이념은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며, 그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기 어렵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이 땅의 보수는 이런 분류법으로 정의되기 어렵다. 교통방송(TBS)의 <장윤선의 이슈파이터>(2018. 6. 14)에 출연한 이해찬씨는 민주당과 수구세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이 진보 아닙니다. 민주당은 개혁세력이라고 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정강정책을 보면 유럽에 있는 진보당, 진보세력, 노동당이라든가 사민당, 거기보다 훨씬 정책이 보수적이잖아요. 자꾸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데, 우리당이 제가 보기에는 중도우파 정도 되는 겁니다… [현재] 보수는 보수가 아니고 수구세력이거든요. 말하자면 냉전체제하고 분단을 이용해서 내려온 수구세력아닙니까? 거기에다가 재벌들하고 유착되어있고…”


이해찬씨는 우리나라 정치세력의 지형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이 진보가 아니라 중도우파이고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수구세력이 보수가 아니라는 점이 의미가 있다. 내 생각으로는 민주당은 중도우파이지만 보수와 자유와 진보의 색채까지 넓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요구를 소화해내는 데 힘겨워하고 스스로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최근 정의당같은 진보정당이 선전하면서 민주당의 고민과 부담은 다소 줄고 있다.


이 땅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수구세력들은 우선 언제나 힘있는 편에 선다. 일본이 득세할 때는 친일파로 설치다가 이제는 미국이 시키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며 성조기를 휘날린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독도영유권, 미국산 쇠고기, 일제 성노예(sex slave), 미군 THAAD 배치를 어찌 처리했는지를 되돌아 보라. 둘째, 의리義理가 아니라 그때 그때의 이득利得을 쫓는다. 그들의 합리이고 원칙이고 진리이고 정의이고 이념이다. 한마디로 기회주의다. 세째, 책임과 의무와 도덕은 상대방의 몫일 뿐이어서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파면되었어도 반성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자신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지 상대방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내로남불”은 사실 이들의 전매특허다. 마지막으로 사실이 아닌 자신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재단한다. 목숨처럼 달고 살아온 자신의 약점 그대로를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고 저주를 퍼붓는다. “이분법”이나 “싸가지”나 “경포대”라고 진보세력을 비난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빨갱이칠하고, 품격없는 언행으로 지탄을 받고, 고문과 사찰로 인권을 유린하고, 시장을 어지럽혀 경제를 망친 자들이 바로 수구기회주의세력이었다.


수구기회주의자의 패악질에 대처하는 법 


이러한 기회주의자들의 난동에 도덕성과 합리성으로 대응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애초부터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힘과 이득을 노리고 벌이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이기 때문이다. 김태우씨의 폭로에 대해 청와대가 시시콜콜 해명한 일이 부질없는 까닭이다. 무슨 말을 하든 대화와 토론이 아닌 공연한 시비거리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똑같이 패악질로 대응하면 “그놈이 그놈”이라는 노림수에 걸려든다. 그래서 힘든 싸움이다. 따라서 냉철하게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사실에 근거하여 냉정하게 응수해야 한다. 절대 흥분하지 말고 진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정적이 아닌 국민을 바라봐야 한다. 오랫동안 진보세력을 짓눌렀던 피해의식과 도덕결벽증을 떨쳐내야 한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다가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말만 담담하게 말해야 한다. 결국 소정의 최소주의가 답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8. 보수의 탈을 쓴 기회주의자의 패악질. <최소주의행정학> 3(12): 1.





지난해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인쇄된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미셨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글이라며 읽어보라고 하셨다. 평소에 볼 수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박근혜 탄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던 아버지여서 의아했다. 


“도울 김용욱”이라고라?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게 뭐야?”라고 내뱉었다. 김용옥 선생의 문장은 고사하고 잘 봐줘도 까까머리 중학생 수준이었다. 두서없는 문단 구성과 유치한 단어 선택이 딱 그러했다. 논리도 없이 박근혜씨 탄핵을 비난하는 내용은 가관이었다. 아버지의 의도가 읽혔다. 봐라, 박근혜를 비난하고 문재인을 지지했던 도올마저 이렇게 돌아섰으니 참으로 고소하다... 나는 바로 “이거 도올 선생님 글이 아니예요”라면서 어디서 받아왔는지를 여쭈었다. 우물쭈물하시는 동안 나는 다시 글을 살펴봤다. 허탈했다. 누군가 작성한 것을 퍼나른 것인데, 작성자와 퍼나른 자가 “도울 김용욱”이라고 적었다. 순간 의도성이 다분한 선수들이 공작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기용 기자의 <한겨레신문> 기사(2016.12.31)를 참조하라.  


이런 날조질은 도메인 이름을 선점하거나 마치 오타를 한 것처럼 비슷한 도메인 이름을 만들어 분란을 일으키는 이름점거(Cybersquatting or typosquatting)와 구조가 같다. 예컨대, 고대와 관련없는 자가 korea.edu를 먼저 등록해놓고 흥정을 하거나  오탈자인 것처럼 kore.edu를 만들어 부주의한 방문자를 호도한다. 마치 실수를 한 것처럼 “도올”을 “도울”로 적어놓고 사람들이 도올 김용옥씨의 글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호린다. 유치하고 저열한 꼼수다. 적의 지지자의 입을 빌어 적을 치는 것이니, 지지자들의 사기를 꺾고 그들끼리 서로 다투게 만들고 끝내는 적을 무너뜨리는 전술이다. 꿩먹고 알먹고다. 전시에 사용되는 심리전으로서 흑색선전과 회색선전이다. 저열한 짓이지만 사려깊지 않은 대중을 낚는데 효과만점인 방법이다. 아버지께 이 글이 왜 엉터리인지를 설명하면서 나는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값이 올랐다?


또 하루는 외출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JTBC <뉴스룸>을 시청하고 있는 내게 한 마디 하신다. 마침 손석희씨가 문대통령에 관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다. “문재인은 사상이 수상해.” “손석희, 저 xx는 거짓말이나 하고...” 자다가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나는 황당했다. 어째서 문재인이 수상하다는 거냐는 내 말에 “너도 사상이 이상해”라고 답하신다. 목소리에 격해진 감정이 실려있다. 그러더니 드디어 “요즘 쌀값이 왜 오른 줄 아남? 문재인이 북한에 쌀을 다 퍼다 줬댜!”라고 폭발하신다.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처절한 울분과 적개심이 이런 것일까? 도대체 누가 저 팔순 늙은이를 저리 만들었을까? 평생 쌀값은 커녕 콩나물값이 얼마인지 모르고 사신 분이 아닌가.


날조기사가 만들어지고 퍼지는 구조


얼마 전부터 <한겨레신문>는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연재물을 통하여 날조기사捏造記事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는지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김완, 박준용, 변지민 기자(2018.9.27)는 극우 기독교 세력이 이끄는 “에스더 기도운동”의 인터넷 게시판이 날조기사의 공장이자 진원지라고 밝혔다. 대표인 이용희 등이 날조기사를 만들면 이른바 “미디어 선교사”들이 인터넷에 퍼트리는 “인터넷 사역”을 맡았다고 했다. 난민, 동성애, 북핵, 문재인, 박원순 등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추천을 눌렀다고 했다. 이 기자들(2018.9.28)은 “정규재TV”와 “신의 한수”와 같은 극우 유투비(youtube) 개인방송이 날조기사를 퍼트리고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버지께서 매일 전자우편으로 보내온 편지를 열심히 읽고 밤늦게까지 유투비를 보신 까닭을 이제는 알 듯하다. 언젠가 우연히 아버지의 우편함을 보았는데 하루에도 수십 개 편지가 보내져 왔고, 멋있는 그림이나 시나 격언으로 포장되어 있었고, 내용은 황당무계한 혐오, 저주, 분개로 일관되었다. 아버지께서 (아마도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유투비 방송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짜증날 정도로 집요하게 반복했다. 예컨대, 박근혜 탄핵이 부당한 20개 이유를 선언문 낭독하듯이 또박또박 읽어내렸다. 법과 논리와 무관하고 증거와 상식과 거리가 먼 황당한 격문에 가까왔다.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불경이나 성경 구절을 독송하는 식이다. 사실과 논증이 아니라 차라리 종교였다.  


이쯤 되면 누가 무슨 이유로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날조질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하다. 현 정권이 하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비난과 저주를 퍼붓고, 사사건건 걸고 넘어지는 세력이다. 적폐청산을 좌절시키고 정권을 망가뜨려 친일·독재·냉전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수구세력이다. 그 대상은 일반인 수준의 사리분별이 어려운 사람들이다. 쉽게 낚일 뿐만 아니라 일단 낚이면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박정희 신격화와 김일성 우상화와 같이 이들을 현혹하여 세뇌洗腦시킨 뒤, 포로나 노예처럼 붙잡아 놓고 통제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간첩들처럼 수많은 (젊은) 노인들이 똑같은 내용과 표현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주문을 외듯이 따라서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더가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을 찍으면 나라가 망하고 북한의 식민지가 된다”라고 지령을 내리면 마법에 걸린 어리석은 노예들은 어찌 할 것인가?


날조기사? 가짜뉴스?


날조기사는 흔히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부르지만 명백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날조기사나 가짜뉴스나 유언비어나 모두 사실이 아니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날조기사는 일상에서 자연스레 벌어질 수 있는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라 정적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물어뜯으려는 악의가 담겨있다. 의도가 불순하고 폭력성이 강하다.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웹마실꾼들을 유혹하기 위한 미끼로 가짜뉴스를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둘째, 사소한 오해가 아니라 사실과 거짓을 그럴듯하게 찢고 째고 붙여서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유언비어와 다르다. 작정을 하고 적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치밀하게 짜놓은 흉계다. 세째, 그냥 뜬소문이 아니라 기사 형식으로 작성되어 사람들을 홀린다. 기사의 권위와 공신력을 빌어 뭘 모르는 사람들을 속여먹는 파렴치짓이다. 네째, 자연스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조직적으로 전투를 하듯이 퍼뜨린다. 이런 면에서 전시에 벌어지는 심리전과 다를 바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의를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적이며 사회의 암종이다. 항간에 떠도는 뜬소문과는 달리 나쁜 의도와 흠융한 내용과 비열한 방법으로 정적을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날조기사의 폐해弊害는 유언비어나 가짜뉴스에 비할 수 없이 크다.  


날조기사를 어찌할 것인가?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역할에 주목한 수구세력은 노무현을 저주하면서도 노사모의 온라인 활동을 모방했다. 다만 노사모의 정치의식, 토론, 열정, 헌신을 가슴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인터넷 사용 기술만을 머리로 베낀 것이 비극이었다. 마음만 급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글쇠판(keyboard)만 두드리다 보니 사달이 난 것이다. “십알단” 사건이나 국정원·경찰·국방부(기무사령부와 사이버사령부)가 협력한 여론조작과 대선개입사건이 그것이다. 모두 기사날조질과 구조가 같다.


이후 팟캐스트(podcast)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수구세력은 날조질을 유투비로 이어갔다. 기본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유투비는 팟캐스트보다 이용하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유투비는 영상과 그림을 제공하고 팟캐스트는 라디오처럼 소리만 전달하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의 유투비 활동은 조직적이었고 현재 우세를 점하고 있다(한겨레신문, 2018. 9.28).


날조기사의 목표가 된 민주당은 여론을 조작하고 왜곡하고 위협한다고 했다. 날조질을 법으로 규제하겠다고 했다. 수구세력들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미국산 소고기수입 파동이나 촛불집회에서도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난무했다고 강변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날조기사를 규제하는 것은 “내로남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광우병 가능성을 보도하고 혹독한 대가를 치른 <PD수첩>은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고, 최순실의 존재와 이명박의 다스는 뜬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이 드러났다.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과 거짓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날조기사 문제를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 


정보통신사업자의 면책 여부


정부규제는 날조기사를 생산하는 것보다는 퍼뜨리는 과정에 집중된다. 유포과정에서 정보통신사업자(서비스제공자)의 역할과 책임을 어찌 정의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매체에 올려진 날조기사에 대한 사업자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으며, 사업자 스스로 검토하여 부적절한  내용물을 걸러내도록 할 수도 있다. 또한 부적절한 내용물을 사업자가 내리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사업자의 책임을 어떻게, 어느 정도로 물을 것이냐에 따라 규제 강도는 달라진다. 

첫번째 방법은 사업자에게 면책권(immunity policy)을 준다. 미국의 통신품위법(Communications Decency Act of 1996)에 따르면 통신사업자는 통신망에 올려진 정보내용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No provider or user of an interactive computer service shall be treated as the publisher or speaker of any information provided by another information content provider” (Section 230). 이 규정은 원래는 저작권(copyright)을 위반한 게시물을 사업자가 어찌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연장선에서 보면 서비스 제공자는 올려진 정보 내용이 남을 비방하거나 사생활을 침해하는 내용임을 알고서도 삭제하지 않았다 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Levmore and Nussbaum 2010: 24). 페이스북이나 유투비에 올려진 게시물은 사업자가 출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서비스 제공자가 알아서 정보 내용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미 구글(유투비)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부적절한 게시물을 걸러내고 있다. 하지만 날조기사를 포함한 유언비어와 저질 정보가 인터넷을 휩쓸면서 많은 사회문제를 초래하였다. 


세번째 방법은 피해자가 합당하게 항의하면 서비스 제공자가 해당 게시물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정책”(notice-and-takedown)이다. 미국의 Digital Milledium Copyright Act of 1998의 Section 512에 따르면 사업자는 저작권침해로 신고된 게시물을 신속하게 삭제하거나 접근불가 처리를 해야 한다. 이 조항 역시 저작권에 관한 것이지만 이 논리는 일반 게시물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44조에 사업자가 부적절한 게시물을 “끌어내리도록” 명시하고 있다.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침해를 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제44조의2). 사업자는 삭제·임시조치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즉시 삭제 신청인과 정보게재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물론 어떻게 신청인과 게재인의 갈등을 관리할 것인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조기사 문제는 이 규정을 제대로 적용하면 해결될 수 있다. 


날조기사와 표현의 자유


날조기사를 규제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Levmore and Nussbaum (2010)는 표현의 자유가 추구하는 가치를 진리 발견(discovery of truth), 자율성(autonomy), 민주 토론(democratic deliberation)으로 정리했다. Mill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틀릴 수 있는 존재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면 진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결정할 자율성을 가진 자유인으로서 다양한 의견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의 필수요소인 공개 논쟁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날조기사는 진리를 발견하는 노력이 아니라 진리를 흠집내고 땅에 묻는 일이다. 애초부터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남을 해코지하기 위해 사실을 위조했기 때문이다. 자율성을 발현한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탐했을 뿐이다.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또한 서로 간의 숙고와 토론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정적을 매도하고 저주하는 짓이다. 날조기사는 표현의 자유가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나 객관성을 가진 기관이 엄정하게 사실 확인을 하면 날조기사를 판별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대통령이 치매라는 허무맹랑한 낭설임에랴...


자율성에 기반한 민의가 여론


소정은 자율성을 가진 사회집단의 건전한 압력으로 행정기구가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1981: vii). 즉 정당, 노조, 대학, 시민단체 등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날조기사는 자율성이 있는 백성의 뜻이 아니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의 작전이다. 민의를 왜곡하고 훼손하는 흉계다. 민의 난동이다. 사회자본(social capital)이 아니라 사회부채(social debt)나 사회악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문제를 살펴서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참고문헌


Levmore, Saul, and Martha C. Nussabaum,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원문: 박헌명. 2018. ”도울 김용욱”과 날조기사 공작. <최소주의행정학> 3(10): 1-2.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촛불혁명 이후 지난 1년간 국정농단에 연루된 자들이 줄줄이 재판정에 섰다. 주역인 최순실 박근혜씨가 감옥에 끌려갔고, 다스 실소유주 논란의 당사자인 이명박씨도 뇌물수수, 조세포탈, 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구치소에 갖혔다. 두 전직 대통령이 각각 수인번호 503과 716을 달고 재판을 받고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서 출발한 문재인 정부는 완강한 저항과 냉소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과 한반도의 비핵화를 묵묵히 추진하였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를 이끌어냈고, 끈질기게 문재인씨가 중재한 북미정상회담은 우연히도 선거 전날 열리게 되었다. 문재인씨의 지지율이 7할을 상회하고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이 5할을 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일까? 이런 낯선 풍경은 이번 선거의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누가 감히 “인격검증”을 한단 말인가?

민주당이 압승할 것으로 예상되는 선거다. 얼마나 철저하게 국정농단 세력을 심판하느냐에 관심이 더 몰린다. 호사가好事家들의 술안주로 치면 드루킹과 한나라당/새누리당의 댓글조작이나 홍준표씨의 “아무말 잔치” 정도가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경기도지사 선거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의 남경필씨는 이재명씨가 수 년 전 친형과 형수에게 폭언을 했다며 통화음성파일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공직 후보의 인격을 검증하겠다고 했다. “인간성 말살”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이재명씨를 후보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에게는 후보를 당장 교체하라고 요구했다. 지나치다. 텔레비젼 토론에 나선 바른미래당의 김영환씨는 이재명씨가 권한을 남용하여 친형을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김부선씨와 밀회한 사실을 회유와 협박으로 은폐했다고 비난했다. 불륜은 아니지만 거짓말로 “여배우에 대한 인격살인”을 자행했으니 공직자 후보에서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이재명씨는 식구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심한 욕설을 했고, 김부선씨와 만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나머지는 각자의 주장이 있을 뿐이다. 어느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남경필씨와 김영환씨가 이씨의 사생활 문제를 “인격검증”이나 “국민의 알권리”라면서 공식자리에서 끄집어 내었다. 이씨의 지지율이 5할인 상황에서 남씨와 김씨가 선택한 궁여지책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먼저 “인격검증”이라는 말을 듣고 탄식한다. “사상검증”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누가 인격을 어떻게 검증한다는 것인가? 누가 “인격검증”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가? 욕설을 하고 폭력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짜고짜 인격파탄으로 몰아도 되는 것인가? 사람의 인격이란 것이 그리도 간단하고 쉽단 말인가? 남씨는 누군가가 해치려고 본인에게 달려들 때 인격을 생각해서 점잖게 공자왈 맹자왈 훈계를 할 셈인가? 그렇게 인격을 따지면서 어찌하여 이명박과 박근혜씨의 인격을 검증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것일까? 사상검증과 마찬가지로 인격검증도 가능하지 않다. 기껏해봤자 제멋대로 “관심법”으로 상대방을 빨갱이칠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인격검증”이라니... 참으로 유치하고 한심하다. 

“국민의 알권리”라굽쇼? 

음성파일에 나온 폭언은 이재명씨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한 사생활이다. 언행에 잘못이 있든 없든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한다. 사생활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며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수집된 정보가 어떻게 처리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는지까지 본인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Solove 2011). 따라서 이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음성파일을 정당의 웹집에 올려놓거나 유세현장에서 트는 것은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이다. 여배우와 밀회도 마찬가지다. 여배우 스스로 심심해서 만났고 비용도 본인이 다 내면서 즐겼다니 성추행도 성폭력도 아닌 셈이다. 박수받을 행동은 아니지만 사실이라 해도 공개된 자리에서 비난을 받거나 처벌을 받아야 할 사안도 아니다. 남씨와 김씨는 공직자 후보의 자질을 따진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씨의 사생활을 윤리와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어 모욕을 주고 있다. 특히 김씨는 밀회(불륜)를 기정사실화하고 자신이 감옥에 갈 각오라고 기염을 토했다. 공직 후보인지 여배우의 변호사인지...

또한 국민의 알권리라고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런 욕설을 듣고 싶단 말인가? 무슨 공공의 이익이 있단 말인가? 유세장을 오가는 청소년들까지 그런 험한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 자체로 말폭력이고 공해다. 남경필씨는 일단 국민이 들어보고 판단할 일이며 당이 공개여부를 결정한다고 했다. 비열하고 무책임하다. 후보로 인정을 안한다면서 토론회에서 말을 섞는 모순은 무어란 말인가? 왜 국민들이 어떤 후보가 누구에게 무슨 욕을 했는지, 후보의 친형이 어떻게 병원에 입원했는지, 후보가 누구와 즐기는지를 알아야 하는가? 호사가들은 그렇다 쳐도 어느 멀쩡한 유권자들이 알고 싶어하는가? 과연 방송토론회에서 이전투구할만한 내용인가? 방송에다 대고 질척거리는 추문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낯뜨겁고 구역질나는 것 아닌가? 시청자와 유권자를 능멸하는 짓이 아닌가? 
 
언젠가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해 군부대가 출동했다. 어느 일보 기자라는 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어느 병력이 언제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군사작전이니 알려줄 수 없다고 했더니 역시나 “국민의 알권리”라며 막무가내였다. 나는 어느 국민이 그런 작전을 알고 싶냐며 힐난했다. 국민은 작전이 아니라 인민군을 소탕했는지, 이젠 안전한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성인군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덜 나쁘고 덜 게으른 머슴을 고르는 일이다. 주권자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내용을 냉철하게 따져서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 방송토론회에서 사생활을 들춰내고 험악한 진실공방을 벌임으로써 유권자를 불쾌하고 혼란스럽게 한 자들을 한표로 응징해야 한다. 

참고문헌


Solove, Daniel J. 2011. Nothing to Hide. New Haven: Yale Univ. Press.


원문: 박헌명. 2018. 후보의 "인격검증"과 국민의 알권리. <최소주의행정학> 3(5): 1.


최근 여당의 유력한 공직 후보 몇몇이 성추행 의혹을 받고 공직에서 물러나거나 6월 지방선거 출마를 포기하였다.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의 지원을 받아 출장을 가고 정치후원금을 기부한 일 때문에 김기식씨가 얼마 전 금융감독원장을 그만두었다. 댓글을 조작했다는 “드루킹 사건”으로 경남지사 후보로 나섰던 김경수씨가 곤경에 처했다. 물론 공직자든 아니든 법을 위반했다면 누구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야당은 물만난 물고기마냥 지난 대통령선거까지 들먹이며 특검과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시절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 경찰까지 나서서 여론을 조작한 일과 마찬가지라며 총력을 다해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다가왔어도 요즘 방송과 신문은 “드루킹 사건”으로 도배되어 있다. “최순실 정권”의 국정 농단, 박근혜 대통령 탄핵, 대통령선거 참패 등으로 절체절명에 직면한 야당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누가 봐도 개헌을 저지하고 지방선거 판을 흔들어보려는 정치공세이다.

수구 언론은 여야의 정치공방을 치밀한 사실 확인과 분석 없이 스포츠 경기처럼 중계하고 있다. 이성과 상식에 근거하여 사안(미투운동이든 정치후원금이든 댓글조작이든)을 다루는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이든 아니든, 가해자든 아니든, 사생활이든 아니든 일단 이런 덫에 걸려든 사람은 무차별로 까발려지고 짓밟혔다. 이른바 “정치장사”와 “언론장사”에 불쏘시개가 되어 질겅질겅 씹히다가 단맛이 빠지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껌딱지 신세가 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유죄판결”을 받아 낙마한 김기식씨는 벌써 호사가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법을 위반했을 가능성이 있다던 김씨가 경찰이나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았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타버린 불쏘시개를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이 사회의 암종이 누구인지, 적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적폐보다는 개혁 세력을 돌아보라

최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사건은 민심을 등에 업고 적폐청산을 추진하고 있는 개혁 세력들을 돌아보게 한다. 벌써 짧은 승리에 취해 현재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동안 수구 세력의 무자비한 폭력에 짓눌린 피해의식이나 지나친 도덕 결벽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수구세력의 덫에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어차피 수구세력들은 무책임한 기회주의자였지 않은가. 일제시대 이래 힘센 세력(청나라, 러시아, 일본, 미국)에게 재빠르게 빌붙어서 백성의 피와 땀을 빨아먹었던 기회주의 세력 아닌가? 자신은 무슨 짓을 해도 애국이고 자신을 비판하면 무조건 매국이고 빨갱이라는 자들 아닌가?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회 구석구석은 아직도 그들의 손발 아래에 있다. 촛불집회와 박근혜 탄핵에 놀라 혼비백산했던 기득권 세력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호시탐탐 반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개혁이 지나는 길목마다 자갈길이고 가시밭길인 까닭이다. 그때 그때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재빠르게 변신해온 기회주의자들을 제압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래서 개혁이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이런 참혹한 현실을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굶주린 맹수처럼 어디라도 물어뜯는데 혈안이 된 수구 세력들에게 한치의 빈틈이라도 주지 않토록 조심해야 한다. 행여 억울하게 꼬투리를 잡혔다 해도 냉철하게 대응하고 차분하게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과연 의미있는 고난을 겪었는가

소정 선생님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자동으로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 뜻있는 고난을 겪으면서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것이라고 하였다(1986: 289; 1991: 333; 2008: 270). 자신의 임무수행에 충실하고 식솔들을 잘 살 수 있도록 근면하게 일한 니콜라이 로스토프(Rostov), 온순하고 선량하여 악한 정치 체제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는 마리아 볼곤스키(Bolkonsky),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귀족 신분이면서도 인생의 진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유를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피에르 베즈호프(Bezuhov)가 그들이다(2001: 172-174; 2008: 270). 혼란을 틈타 남을 속이거나 해쳐서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지금껏 누려온 부귀영화를 이어가기 위해 또다른 변신에 몰골하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참혹한 전쟁이 가하는 폭력을 참아내면서 봄이 올 때까지 욕심내거나 무리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이 모든 절제는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1991: 19).  

이런 의미에서 성폭력 혐의를 받고 충남지사직에서 물러난 안희정씨를 안타깝게 본다. 노무현 정부가 끝나면서 “폐족”으로 몰렸던 이른바 “친노”의 핵심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서거 당시 봉하마을의 생가 앞 논가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던 안씨를 보았다. 그랬던 그가 충남지사에 연거푸 당선되면서 승승장구했고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수행비서관이 안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며 방송에서 고발함으로써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강제로 벌인 일이 아니라 해도 처자를 둔 가장으로서, 사회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했던 지도자로서 용서받기 어렵다. 지난 10년간 극심한 부침을 경험하면서 안씨가 받았을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의미있는 고난”을 겪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소정 선생님은 “최소에의 흠모 속에 있는 이는 행복하다. 물질과 이기적인 특정인 같은 것에 매어 있지 않고 사람이 사람의 수준으로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최소의 것이 침범받았을 때에 본연의 인간이란 무엇일까를 더욱 생각하게 된다. ... 최소를 가질 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1986: 96). 과연 안씨는 폐족으로 몰린 한계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최소만을 생각하고 물질과 사람(여자)을 초월한 “사람의 수준”을 경험했을까?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했다면 어떻게 식구들과 주변을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최소마저 빼앗긴 자의 행복”을 망각하여 스스로를 망치고 동지를 배신했단 말인가? 소정 선생님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1986: 336),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고 했다(1986: 298; 1991: 198; 2008: 202). 안희정씨가 뼈아프게 귀담아들었어야 할 가르침이다.

지나친 피해의식과 도덕결벽

지난 3월 민병두씨는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당사자를 만나기는 했지만 노래방에서 신체접촉을 한 일은 없다면서 문제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정치를 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제 자신에게 항상 엄격했습니다. 제가 모르는 자그마한 잘못이라도 있다면 항상 의원직을 내려놓을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김태규, <한겨레신문>, 2018. 3.10).
 
청와대 대변인을 내려 놓고 충남도지사 선거에 나서려던 박수현씨도 “내연녀 설”과 사생활 의혹이 붉어지면서 꿈을 접었다. 지난 3월 초 공주시 민주당원 오영환씨는 페이스북에 “2014년 지방선거에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의 권력을 앞세워 내연녀를 공주시 기초의원 비례대표에 말도 않되는 이유를 들어 공천”했다며 박씨의 사퇴를 요구했다. 9일에는 박씨 전처와 함께 나와 박수현씨의 여자문제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특혜 공천도 내연 관계도 아니며 수년 전 아내가 가출했다고 반박했다. 내연녀로 지목된 한 공주시의원은 오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박수현씨는 민주당의 권고를 받아들여 14일 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을 보면 공직이나 공직후보 자리를 내려놓을 만한 일이 아니다. 미투(#MeToo)라지만 민병두씨를 언급한 여성의 절실함과 실익은 커보이지 않는다. 박수현씨의 경우는 사생활을 들추어 맞네 틀리네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민주당의 최고위원회에서 사퇴나 제명을 결정하지 않은 것은 의미하는 바가 있다. 만일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경쟁자를 끌어내린 것이라면 박씨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과거 선거에서 종종 벌어졌던 추악한 짓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진심이 아니다.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일로 상대방을 괴롭히는 전략이 현실 정치에서 효과만점이라는 점이다. 비방과 흑색선전으로 목표를 달성하기도 쉽고 설령 들통나도 처벌이 그다지 무겁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도덕 결벽증이다. 민병두씨가 자신에 대해 엄격한 것은 칭찬과 존경을 받을 일이지만 그 결벽이 지나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민씨는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입법기관의 구성원이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민주당과 박수현씨는 이성과 상식이 아니라 냉엄한 정치현실에 타협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수구세력들의 포악과 공작에 짓눌렸던 경험이 피해의식으로 굳어졌는지 모른다. 사소한 일에도 트집이 잡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반죽음이 되거나 불구가 되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일까? 지나친 피해의식이나 도덕 결벽은 수구 세력들에게 주는 “손 안대고 코푸는” 선물이다. 조폭이나 양아치들이 애용하는 비열한 수법이다. 무슨 짓을 해도 면죄를 받은 것처럼 완장을 차고 패악질을 서슴치 않는 기회주의자들아닌가?

따라서 개혁을 하려는 자들은 평소에 자신과 주변을 철저하게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수구세력에 대한 피해의식과 도덕 결벽도 극복해야 한다. 민병두씨와 같은 지나친 결벽증과 자존심은 기회주의자들이 반격할 빌미를 줄 뿐이다. 민주당은 피해의식을 떨쳐내고 자신감을 가지고 수구세력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법과 상식에 따라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고 합당하게 따질 것은 따지고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떳떳한 행동과 당당한 대응

네이버에서 정치 댓글을 조작한 “드루킹” 사건은 개혁 운동의 올바른 방향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른바 파워블로거로서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씨를 지지하는 온라인 활동을 했던 “드루킹”이 오사카 총영사 자리를 청탁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이후  문재인 정권을 비난하는 댓글의 공감수를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늘렸다가 검찰에 꼬리가 밟혔다. 그런데 김경수씨가 “드루킹”과 모바일 편지를 주고 받았고, 김씨의 보좌관이 “드루킹” 측의 돈을 받았다 돌려준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증폭되었다. 야당은 검찰과 경찰 조사를 믿을 수 없으니 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한다면서 몰아붙였으나 김경수씨는 떳떳하다며 경남지사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민주화 운동은 어긋난 原則을 바로 세우는 운동이지 이해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1991: 330).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며,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이다(1996: 620). “운동원 간에 이용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으며(1996: 621), 무서울 때에 최소 행동을 하고 나서 자신의 고유생활로 돌아갈지언정 개인의 이득을 바라거나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1991: 26; 1996: 56).  소정 선생님은 시국이 무섭지 않을 때는 최소한의 말이 아니라 과격한 발언이나 과다한 요구를 하기 마련이라고 했다(1991: 26; 1996: 673). 뒷전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나와서 인기위주의 무책임한 말잔치로 자리를 꿰어차고 잇속을 챙기곤 한다(1996: 623; 2008: 258, 582).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혁명의 주역이 아닌 기회주의자들이 엉뚱하게 열매를 따먹고 일을 그르친다.

“두루킹”은 무서울 때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최소한의 행동(꼭 필요한 정당한 요구)을 한 순수한 운동자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교만하게 개인의 이익을 과도하게 쫓다가 그만 탈이 난 것이다. 제사보다는 젯밥을 탐한 결과다. 소정 선생님은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2008: 615)고 했다. 바람직하지 않은 재야운동자들처럼 “드루킹”은 철저하게 비폭력을 내세우지 않았고(위법하게 부당한 말을 남발했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는 인기 위주의 말(댓글)을 하였고, 부당하게 정치 권력을 모색하다 망했다(1996: 673).  

이명박근혜를 당선시켜 호의호식했던 야당은 “드루킹” 사건을 김경수씨를 매개로 문재인씨의 바지자락이라도 잡아보려고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안희정, 박수현, 정봉주, 김기식 등으로 이어지는 재미보기에 푹 빠진 모양새다. 천막까지 세워서 특검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까지는 김경수씨가 불법행위를 공모하거나 지시한 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선거운동이나 댓글조작을 부탁한 것도 아니고, 인사청탁을 들어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선거꾼들을 좀 더 신중하게 대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병두씨와는 달리 수구세력의 파상 공세에 지레 겁먹고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대응하면서 선거에 나섰다. 소신껏 행동했으니 떳떳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노무현씨의 마지막 비서관이라지 않은가?   

"제왕적 야당"과 "황제 언론"의 과격

최근 수구 세력들이 보여준 언행은 지나치다. 방송법 개정에서 시작된 “제왕적 야당”의 몽니가 이어지면서 벌써 6월 개헌은 물건너갔고, 공직선거법이나 추가경정예산도 갈 길이 멀다. 미투나 김기식이나 김경수가 아니어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물고늘어질 기세다. 그러면서도 피감기관의 후원 내역을 전수조사하자는 데는 반대한다. 특검을 받으면 개헌이든 추경이든 전향적으로 검토해보겠다더니 민주당이 조건부 수용 의사를 내비치자 엉덩이를 빼고 있다. “황제 언론”도 개헌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서 흥미위주나 정파성에 매몰되어 있다. 성추행, 성폭력, 내연녀, 정치자금 땡처리, “드루킹” 댓글조작 등을 우려먹으면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정말 이런 문제가 뉴스의 첫꼭지가 될만큼 중대한 것일까? 철저한 검증과 치열한 분석과 생산적인 토론과 거리가 먼 “언론장사”다. 또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보의 논문을 왜곡하여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며 호들갑을 떤다.

결국은 이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 이번 선거에서 무엇이 옳은지 판단해야 한다.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나선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줘야 한다. 똑똑한 국민이라야 수구세력의 적폐와 장난질을 극복할 수 있다.


원문: 박헌명. 2018. 안희정, 민병두, 김경수의 선택. <최소주의행정학> 3(4): 1-3.


지난 1월 29일 현직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수년 전 법무부 검찰국장에게 성추행당한 사실을 고발했다. 3월 5일에는 안희정 충남지사의 정무비서 역시 <뉴스룸>에서 안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했다. 이른바 미투(#MeToo) 운동이다. 유명한 연극연출가, 시인, 배우, 가수, 정치인 등이 가해자로 지목되었고, 일부는 자리를 내놓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데뷰 25년 만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김생민씨가 10년 전 회식 중 제작진 두 명을 성추행한 사실이 최근 알려졌다. 본인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찾아 사과를 했지만 김씨는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출연중인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 해야 했고, 광고도 내려져 피해보상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과연 김씨의 성추행은 그가 이룬 모든 것을 허물어야 할만큼 용서받지 못할 중죄인가?  

최근 금융감독원장으로 임명된 김기식씨가 국회 정무위원 시절 피감기관인 한국거래소의 지원을 받아 2014년 3월우즈베키스탄에 출장을 다녀오고 2015년 5월에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지원으로 유럽에 갔다고 한다(김남일 엄지원, <한겨레신문>, 2018. 4.6). 일부 야당과 언론은 평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주도하면서 기업의 잘못된 관행에 날을 세웠던 김씨가 뇌물성 외유를 다녀왔다며 국회일정을 볼모삼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청와대가 임명을 취소하거나 본인 스스로 사퇴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과연 김씨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합당한가? 

“미투 공작”과 “사이비 미투”

팟캐스트 <다스뵈이다>를 진행하고 있는 김어준씨는 지난 3월 14회 방송에서 미투 운동을 공작으로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서, 미투 운동이 안희정, 정봉주 등 한쪽에 몰려 있고, 각하(이명박씨)가 점점 관심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미투 운동이 사회인식을 바꾸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효과를 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고 민감한 문제여서 공작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많다고 했다. 따라서 본질인 미투 운동이 사라지고 공작만 남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언론, 시민 사회에서 김씨가 진영논리에 빠져 미투 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피해자들을 두 번 죽였다며 비난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의 조기숙씨는 지난 3월 12일 FaceBook에 미투 운동이 사이비 미투(익명에 기대 증거나 논리도 없이 무차별로 공인의 성적 추문이나 사생활을 폭로하는 행위)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고 말했다. 위계나 위력 관계이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인정하거나, 폭로의 논리나 근거가 일관성이 있거나, 실명으로 폭로하거나, “한 사람이 반복적으로 경험하거나 2명 이상이 유사한 경험을 한 경우”를 미투 운동에 부합한다고 했다(조기숙, <오마이뉴스>, 2018.4.5). 그렇지 않으면 Me Too가 아니라 Me only라는 것이다. 이 글을 두고 “위계와 위력에 의한 상습적 성범행”만을  미투의 대상으로 한정했다며 여기저기서 날선 비난이 쏟아졌다. 

두 사람 모두 정당한 미투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투를 빙자한 공작이나 사이비 미투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보다는 그 과실을 따먹으려는 사람들처럼 미투보다는 그 기회를 통해 잇속만 차리려는 무리들이 있다. 가해가 불분명하거나 피해가 심각하지 않거나 절실함도 없고 뒷감당을 각오하지 않는 미투다. 조씨는 “우리 사회에 정작 미투가 필요한 곳은 지속적인 왜곡과 오보로 한 인간을 인격파탄으로 이끄는 일부 언론들이다”라고 적고, 언론이 신중하게 미투 사실을 확인하고, 인권을 보장하고, 책임있게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과 민의 과격한 난동

孟子는 梁惠王章句 下에서 “이러한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그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고 했다. 한쪽 끝에 법을 위반하여 백성(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를, 그 반대편에 선정을 베풀어 백성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우(라)를 상정하자. 그 사이에 법위반은 아니어도 백성을 불편하게 하는 경우(나)와 불편하게 하는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아닌 경우(다)를 놓아 보자. 위 구절은 (라) 수준이 아니라고 함부로 上을 비난해서도 안되지만(民의 亂動이니까), 上이 (라)를 지향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는 뜻이다. 

김생민씨의 경우 위계관계나 상습 행위가 아니다. 의도는 있으나 피해가 심각한 것도 아니다. 우연한 실수에 가까와 보인다. 미투에 해당하는 (가)가 아니다. 더구나 다른 가해자들과는 달리 김씨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다. 孔子는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過則勿憚改)”고 했고 “나는 아직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진심으로 자책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라고 탄식했다. 허물을 깨닫고 반성하고 고치려는 김씨에게 미투라는 이름으로 굴레를 씌우고 불도장을 찍는 짓은 집단 폭행이나 조리돌림이다.  

김기식 원장을 비난하는 일도 과격한 미투 운동과 비슷하다. 김씨의 행동은 (나)이거나 (다)에 해당한다. 만일 (가)였다면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이미 결딴이 났을 것이다. 일부 야당과 언론과 시민들이 사퇴를 종용하고 검찰에 고발한 것은 上이 (라) 수준이 안된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짓이다. 부당하고 과격한 요구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가)와 (나)도 밀어붙였으면서 문재인 정권에서는 (라)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패악질일 뿐이며 경우에 맞지 않다. 

이런 음흉한 정략에 넘어간 시민 사회는 노무현 정권을 난도질하다가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청와대도 여당도 벼랑끝에 몰린 일부 야당과 언론과 시민의 과격한 난동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수구세력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도덕적 결벽에 빠져 (라) 수준이 아님을 자책하지 말아야 한다. 김 원장도 스스로를 겸허히 돌아보되 부당한 겁박에 무릎꿇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미투 공작, 사이비 미투, 민의 과격. <최소주의행정학> 3(3): 1.

지난 2월 9일부터 25일까지 강원도 평창에서 제 23회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아대는 바람에 과연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전쟁위기설까지 퍼지는 와중에 선수파견을 유보하겠다는 나라도 있었다. 하지만 연초에 북한이 태도를 바꾸어 올림픽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겠다고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결국 9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남북 선수단은 한반도기를 내걸고 개막식에 들어섰다.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은 1승도 건지지 못했지만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내외신 모두 이번 동계 올림픽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문제를 놓고 일부 야당이 비난을 쏟아냈다. 이른바 판싸움(프레임 경쟁)를 시도한 것이다. 평창올림픽이 아니라 평양올림픽이라고 했다. 북한의 전략에 놀아나는 짓이고, 북한이 올림픽을 체제선전에 이용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짓이라고 했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인 나경원씨는 남북 단일팀을 구성한 일이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박탈하고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다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개막식이나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지 않고 애국가가 불리지 않는다는 가짜뉴스가 나돌기도 했다. 소위 “애국세력”들의 집단저항이라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대목이다. 이에 맞서 민주당과 소위 범여권은 평창올림픽이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화합으로 이끄는 평화올림픽이라고 반박했다. 

평양올림픽? 평화올림픽?


먼저 씁쓸한 느낌이 든다. 기껏 해봤자 동계 올림픽이 엉망으로 끝나기를 갈망하는 자들의 심술이다. 훤히 들여다 보이는 무리수임에도 평양올림픽이라고 우격다짐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북한에서 주최하는 것도 아니고 평양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작 자신은 동계올림픽을 유치해 놓고 나서 북한의 참여를 요청하지 않았던가? 어떻게든 정국을 바꾸어 선거에서 이득을 보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대사까지 훼방놓는 일은 곱게 봐줄 수 없다. 한마디로 나라가 망하든 말든 자신의 잇속만 차리면 된다는 정신줄 아닌가? 

다른 느낌은 긴장과 걱정이다. 이른바 촛불혁명 이후 구석에 몰린 수구세력들이 발악하는 것같다. 단순한 말싸움이나 선거전략이 아니라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가 즐기던 음흉한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소정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이런 공작을 설명하고 있다. 

“세상이 文民統治가 아니라 軍事統治에 알맞은 말을 쓴다. … 예를 들어 부정선거라는 차원 높은 말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면 관은 선거부정이라는 문제의 핵심을 피하는 말을 잽싸게 만들어 제도 언론을 통하여 푼다” (1991: 99).

“부정선거”는 정권의 정당성에 직결되는 문제지만 “선거부정”은 작은 문제로 받아들여진다(2001: 198). 나쁜 정권은 이렇게 위기가 닥치면 음흉한 수법으로 국면을 바꿔 위기를 모면한다. 박정희씨가 1970년대 “부정부패”로 위기에 몰렸을 때 뜬금없이 “서정쇄신”을 들고 나왔고, 전두환씨는 1980년대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어 정의사회를 구현한답시고 설치고 다녔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졌던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도 마찬가지다. 

“잠금”과 “감금” 사이 

12월 11일 국정원 요원이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문재인 후보를 비난하는 댓글을 올리다가 야당의원들에게 발각되었다. 야당은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한 관권선거라며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고, 국정원과 여당은 민주당원들이 여직원을 감금한 사건이라며 반발했다. 경찰은 13일에서야 여직원의 하드디스크를 임의제출 형식으로 받았고, 16일 밤 대선토론이 끝난 뒤 경찰은 서둘러 국정원이 불법행위를 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중간발표를 했다. 그리고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씨가 당선되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뿐만 아니라 국국기무사령부와 국군사이버사령부도 댓글 공작을 벌였음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이명박근혜의 입장에서는 관권선거로 몰려 대통령선거를 망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던 것이다. 야당이 관권선거로 비난하고 부정선거로 거세게 몰아붙이자 새누리당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연약한 여성을 오피스텔에 감금한 여성의 인권침해 문제로 몰아갔다. 대선토론에 나선 박근혜씨는 사건의 본질은 국정원 여직원의 인권침해라고 말하면서 댓글을 단 증거가 없었다고 말했다. 17일 JTBC에 출연한 새누리당 권영진씨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카메라가 번쩍거리는 상황에서 여직원이 문을 걸어닫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변했다. 그에게는 여직원을 미행한 사생활 침해만 보이고 국정원의 불법행위와 관권선거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같이 출연한 표창원씨는 이렇게 일갈했다.

“국가 공무원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문만 열어주면 되요. 안열여주고 잠그고 있어요. 그게 무슨 감금이에요, 잠금이지.”

관권선거와 부정선거가 인권침해 문제로 뒤바뀐 것이다. 사실확인을 거부하고 증거를 없애려는 “잠금”이 연약한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감금”이 된 것이다. 국정원, 기무사,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공작에 관한 최근 조사로 미루어 보면 당시 국민들은 벌건 대낮에 눈뜨고 날치기를 당한 것이다. 수구세력의 잔머리와 음흉함과 뻔뻔함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어쩌다 권영진 대구시장을 볼 때마다 선공후사를 내팽개치고 간사한 혀를 놀리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국민이 깨어있어야 한다

결국은 국민의 이성과 지혜와 양심에 달려있다. 요망한 말공작에 넘어가서 퍽치기를 당하지 않으려면 깨어있어야 한다. 남북 단일팀이 되면 선수들의 출전 기회가 박탈되고 공정한 경쟁이 안된다는 사술에 넘어가면 안된다. 이것이 평창올림픽→평양올림픽→평화올림픽으로 이어지는 판싸움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다.  


원문: 박헌명. 2018. 평창올림픽, 평양올림픽, 평화올림픽. <최소주의행정학> 3(2): 1.

청와대의 국민청원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구호는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지지한 청원에 대하여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가 답한다는 것이다. 이미 청소년보호법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폐지하고, 낙태죄를 폐지하고, 흉악범 조두순을 다시 재판하여 처벌하고, 권역외상센터의 중증외상분야를 지원하고, 술을 마시고 저지른 범죄을 깎아주는 “주취감형”을 없애달라는 요구에 답을 했다. 

국민청원의 빛과 그림자 

지난 9년 이명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애절한 요구를 외면하고 억압했던 벽창碧昌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규제를 덜컥 풀어준 것에 항의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소위 “명박산성”을 쌓아 물리쳤다. 세월호가 침몰하여 삼백여 명의 젊은 목숨이 수장되었는데도 대통령이 업무시간에 무얼했는지 밝히지 않았고 공무원들을 동원하여 집요하게 진상조사를 방해했다.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었을 때 박근혜씨는 “묵언수행” 중에 가끔씩 나와 기어코 민심에 불을 질렀다. 나라의 주인임에도 하찮은 머슴들에게 제대로 당한 민심의 원한과 회한이 깊었다. 그래서 청와대의 국민청원은 더욱 빛이 난다.  
  
하지만 국민청원이 장사가 잘 되는 만큼 씁쓸한 면도 있다. 그만큼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의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민의와 동떨어진 짓을 해왔다. 정부 관료제도 국민이 가려워하는 곳을 제대로 긁어주지 못했다. 법원 역시 권력자와 가진 자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반면 가진 것이 없거나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었던 모습이었다. 결국 국민청원은 그동안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국민청원의 흥행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상화폐규제를 실시하지 말고 나경원씨의 평창올림픽 의원직을 파면시켜달라는 청원이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시시콜콜한 일을 시비걸거나 심지어는 장관과 금융감독원장을 파면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청원은 공익과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타인과 사회전체에 얼마나 이로운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따질 뿐이다. 일부러 논란이 되거나 답하기 곤란한 청원을 하여 정쟁을 유발하려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정적에 대한 사상검증이나 낙인찍기라 할 수 있다. 무서울 때에는 절실함으로 서로 단결하여 촛불을 들었지만 폭정暴政과 난정亂政과 우정愚政이 사라진  뒤에는 긴장감을 잃고 너나할 것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과격한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은 아닌지...(1996: 673). 

의 포악과 하의 난동

소정 선생님은 관官의 폭력만 나쁜 것이 아니라 민民의 폭력 역시 나쁘다고 했다. “난동화하기 쉬운 민중과 포악하기 쉬운 기득권층”(1986: 101) 또는 “上의 포악과 下의 난동”이라고 표현했다(1996: 606). 民이든 官이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꼴을 보이는 짓이며, 서로 “벌거벗은 힘”을 행사하는 짓이다(1986: 81). 官의 권력남용과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행동이 부딫혀 서로 원색적으로 대결하는 일이다(1980: vii). 이렇게 양 극단의 벌거벗은 힘이 작정을 하고 충돌하게 되면, 어느 경우에도 민은 승자가 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소정 선생님의 명제를 살펴보자.

“모든 악의 근원은 정부의 과격”이다(2008: 589).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민에서 나왔다”(1991: 42). 그런데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 이런 명제에 따르면 官은 자기반성으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民의 건전한 압력을 통해서 官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1980: vii). 또한 官의 나쁜 행동을 배운 民은 “좋은 것”을 생산하지 못하고 (“나쁜 것”도 생산하여) 官의 나쁜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없다. 전자는 民의 “좋은 것”이 만드는 선순환이며 후자는 官의 “나쁜 것”이 만드는 악순환이다. 결국 열쇠는 民이 쥐고 있다. 그래서 주권재민인 것이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폭력은 특별히 난동이라 불렀는데(官의 폭력은 권력남용이나 포악),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이며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라고 했다(1986: 297). 함석헌과 이문영의 표현에 의하면 앞뒤 안가리고 돈이나 챙기려는 부패한 국민, 힘센 자에게 빌붙어먹으려고 분열하는 국민, 무작정 윗자리를 차지하려고만 하는 과격한 국민의 행동이다 (2008: 571-578). 따라서 바람직한 시민사회(언론, 대학, 종교단체, 노동조합 등의 사회단체)는 자율성(교만하지 않고 자제하고)과 책임성(감정과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에 근거하여 官이 납득할 만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 (1980: vii-viii).  

과격하지 않은 민의 품격

모든 민의가 공익을 위한 선은 아니다.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거나 정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언사도 있다. 투자한 돈이 아까워 가상화폐규제를 반대하거나 맘에 안든다고 해코지하는 것은 과격이다. 동성애, 사형제 등의 논란거리를 들이대고 찬반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어리석다. 새싹이 자라기도 전에 시험에 들게 하여 짓밟는 자해행위이다. 멀리 보고 참고 자제해야 한다. 또한 공연한 시비거리를 만들어 공직자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흉한 과격도 주의해야 한다. 뜬금없이 여성의 군복무를 요구하거나 자유민주주의(사실상 “완장찬 반공주의”)로 시비거는 것은 판(프레임)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러한 民의 과격은 스스로를 망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대통령은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속담을 초월해야 한다(2008: 578). 과격한 자식의 패악질에 휘둘리거나 넘어가서는 안된다. 공직자는 권한남용이란 유혹을 물리쳐야 할 뿐만 아니라 품격있는 민의는 받들되 과격과 난동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청와대의 국민청원과 과격한 국민. <최소주의행정학> 3(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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