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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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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사생결단이다. 문재인 정부를 전체주의 독재로 낙인찍은 수구기득권 세력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LH공사 비리를 계기로 파상공세를 시작했다. 예민한 부동산 문제를 물고 늘어지면서 선거판을 휩쓸고 있다. 한 쪽에서는 보유세가 별것 아니라며 “영끌”이니 “패닉바잉”을 부추기면서 다른 쪽에서는 세금폭탄이라며 사회주의를 운운하는 자들이다. 어쩌면 이번 선거는 부동산에서 시작해서 부동산으로 끝날 것같다. 부동산으로 흥한 선거 부동산으로 망하는가.

공직 후보의 무책임한 말잔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오세훈씨는 부인이 소유했던 도곡동 토지에 대해 위치도 존재도 몰랐다고 했다. 수억대 토지보상을 받았으면서도 손해를 봤댄다. 이명박 정권에서 개발제한구역을 해제하고 보금자리주택지구를 지정한 것은 주택국장 전결사항이라 자신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전결 얘기를 듣자마자 실소가 나왔다. 행정절차상 전결사항이라 해도 시장이 몰랐다고 말하다니... 23만평이나 되는 택지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뒤얽힌 사안이 아닌가. 부서의 주요한 일은 사후에라도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설명하는 것은 상식이다. 국장이 시장의 권위를 빌어 일을 하지만 그 책임은 시장의 몫이다. 전결을 했든 안했든 시장이 꼼꼼하게 살펴야 하고 필요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전결사항을 정말 몰랐다면 한마디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상급자다. 어찌 그리 천연덕스럽게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지... 다 주택국장의 책임이니 나에게 묻지 말라는 소리인가?

땅의 위치도 존재도 몰랐다는 말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오씨는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에 당선된 뒤 도곡동 110번지와 106번지를 배우자의 재산으로 신고했다. 2005년 택지개발용역이 시작되기 직전 오씨가 백바지에 선글라스를 쓰고 와서 처가 식구들과 토지측량을 입회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토지를 측량한 팀장과 직접 말뚝을 박았다는 경작인이다. 그럼에도 오씨는 토지측량 보고서에 장인이 서명했으니 자신이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기억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며 어물쩍 뭉개고 있다. 누군가 자신이 압력을 가했다고 나서면 바로 후보를 사퇴한댄다. 땅으로 이익을 봤다면 정계를 은퇴한댄다. 자신의 양심문제에 웬 조건을 거는가. 자기관리와 자기책임에 게으른 사람이다.

부산시장 후보로 나선 박형준씨도 이명박 정권에서 4대강 사업을 반대한 사람들을 사찰한 국정원의 문서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문서에 청와대 홍보기획관의 요청사항이라고 적혀있고, 14건은 배포선에 민정수석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홍보기획관이었고 민정수석이었던 박씨는 불법사찰을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배포선에 넣으면 우편물처럼 가게 되어있다는 임태희 전비서실장의 발언이 무색해진다.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원세훈의 국정원이 제멋대로 문서를 생산해서 아무렇게나 배포했다는 것인가? 민정수석이면 보고를 받지 못했다 해도 입소문이 난 일을 잘 살펴서 잘못된 일을 바로잡았어야 했다.

배우자와 그 딸이 홍익대학교를 찾아가 울면서 미대입학을 청탁했고, 민정수석이던 박씨가 외압을 넣어 입시비리 검찰수사를 덮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박씨는 딸이 당시 런던예술대학을 다녔는데, 입학시험을 보지도 않았고 홍대 근처에도 안갔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실기시험 점수를 올려주었다고 고백한 김승연 전 미대교수를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고발하였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 쉽게 밝힐 수 있는 일을 논박하는 모습이 우습다. 홍대가 박씨 딸이 시험을 쳤는지를 밝히면 되는 일 아닌가? 진실을 알고 있는 학교나 검찰에서 침묵하고 있으니 난감하다.

엘시티 아파트와 동경 아파트

박씨 부인 명의로 된 해운대 엘시티 아파트도 공방중이다. 2005년 배우자의 아들과 딸이 하필 분양계약 첫날에 아래위층(17-18층) 분양권을 구했댄다. 자녀가 모친과 친분이 있던 중개인을 우연히 만났고 마침 분양권을 팔려는 사람을 만나서 복비도 주지 않고 계약서를 썼댄다. 참으로 기묘한 우연이고, 112평 아파트를 구입한 자녀의 재력이 놀랍다. 지난해 부인이 아들에게 웃돈 1억원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했는데, 1년만에 가격이 20억에서 35억으로 올랐댄다. 그런데 엘씨티에 18억원 조형물을 납품한 회사의 대표이사가 박씨의 아들이라고 한다. 부산의 복마전을 상징하는 엘시티처럼 박씨의 아파트 의혹은 쉽게 해소될 것같지 않다.

이에 수구야당은 부산시장 후보 김영춘씨가 서울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서울시장 후보 박영선씨의 남편이 동경에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며 군불을 지폈다. 박씨가 BBK로 이명박씨를 집요하게 몰아붙인 탓에 남편은 일본으로 사실상 쫓겨갔고, 지난 2월 아파트를 처분했다고 해명했다. 10억원정도의 20평 아파트란다. 과연 얼마나 많은 차액을 벌었을까? 디플레이션을 걱정하는 일본에서 가격상승을 노리고 아파트에 투자했다면 어리석다. 휴양지에서도 비싼 공과금을 버티지 못해 공짜로 부동산회사에 넘기는 판이다. 박씨 남편이 동경의 부동산 물정에 밝았다면, 큰 수익도 없이 번거로운 매매보다 임대를 선택했을 것이다. 게다가 동경에서 20평이면 평균치일 뿐 엘시티의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깨어있는 시민의 지혜와 실천이 필요하다

여론조사는 민주당 후보가 서울과 부산에서 야당 후보에게 두 자리수 차이로 밀리는 것으로 나왔다. 성난 민심의 반영이라지만 과하다. 대다수 방송과 신문은 수구세력에 기울어져 있다. LH공사를 비롯한 공무원의 부동산 투기 보도는 넘치지만 유력한 야당 후보에게 쏟아진 부동산 의혹은 가뭄에 콩나듯 하다. 후보 단일화와 상호 난타전을 전할 뿐 이성과 상식에 근거한 분석과 토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격다짐같은 “백날토론”을 할 뿐이다. 사실관계를 묻는 질문은 “네가티브”라고 깎아내린다. 수구기득권의 힘이 선거판을 움직이고 있다. 만일 오세훈이나 박형준이 조국이나 추미애였다면 벌써 3족이 난도질을 당했을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의 냉철한 판단과 굳건한 믿음과 불굴의 용기가 필요한 때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1. 부동산으로 흥한 선거 부동산으로 망하나. <최소주의행정학> 6(4): 1.

윤석열 검찰총장이 사직했다.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헙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오로지 국민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오랜 세월 쌓아올린 상식과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또박또박 사퇴의 변을 찍어내는 윤총장의 모습에 비장함이 서려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을 보호하는데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반독재 투사의 절규인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유력 후보의 사자후인가?

공무원인가? 정치인인가?

윤씨는 지난 2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꾸준히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우리 사회가 퇴보하고 헌법 가치가 부정되는 위기 상황”이라며, “[중대범죄수사청 설치는] 검찰을 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폐지하려는 시도다. 갖은 압력에도 검찰이 굽히지 않으니 칼을 빼앗고 쫓아내려 한다. 원칙대로 뚜벅뚜벅 길을 걸으니 아예 포크레인을 끌어와 길을 파내려 하는 격이다. 거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 공소유지 변호사들로 정부법무공단 같은 조직을 만들자는 것인데, ... 입법이 이뤄지면 치외법권의 영역은 확대될 것이다. 보통 시민들은 크게 위축되고 자유와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중수청 설치를 검찰 폐지로 보고 잔뜩 뿔이 난 자의 푸념으로 들린다.

“이 검찰을 지탱해온 헙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피해는 오로지 검사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검찰이 오랜 세월 쌓아올린 반칙과 특권이 무너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기 어렵습니다. ... 어떤 위치에 있든지 검찰지상주의와 검사의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어제는 대구고등검찰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금 진행중인 ...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이라고 하는 것은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으로서 헌법정신에 크게 위배되는 것이고 국가와 정부의 헌법상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진 대구시장이 꽃다발을 건네며 마중을 나왔고, 많은 지지자들이 윤씨를 연호했다. 공무원이 아닌 개선 장군이나 대선 후보에 걸맞는 위엄이었다.

문재인 정권에서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뒤 여권과 갈등을 빚다가 하차한 윤석열씨는 김영삼 정권에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지만 대쪽같은 행보로 좌충우돌하다 사표를 내던졌던 이회창씨에 비견된다. 윤씨와 이씨는 권력자에 맞서는 거침없는 행보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수구세력의 부름을 받고 대선 후보가 된 이씨처럼 윤씨도 지리멸렬支離滅裂인 수구야당의 대선 후보로 우뚝 서는 꿈을 꾸고 있는가? 시시비비와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 윤씨는 공무원에서 정치인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고 있다. 숨길 수 없는 욕망의 분출이다.

열혈 공무원 윤석열의 길

윤씨가 직분에 충실한 공무원이었다면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윤씨도 검사에 취임할 때 “나는 ...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라고 선서했을 것이다.

윤씨가 현재 상황을 헌법가치가 부정되고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정부가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고 인식했다면 그 결기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어야 했다. 조직이든 인맥이든 법기술이든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반란세력을 진압했을 것이다. 부하검사를 사방팔방 풀어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어 죄를 그리고 판을 짰을 것이다. 국회의원이든 장관이든 총리든 대통령이든 굴비엮듯이 끌고가서 물고를 냈을 것이다. 진압작전에 협조하지 않는 불순무리들은 경찰이든 법관이든 학자든 언론인이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잡기술을 걸어서라도 기어코 자빠뜨렸을 것이다. 한 나라의 총리를 파렴치한 범죄인으로 만든 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이 나라가 망하고 검찰이 무너지는 판에 못할 짓이 무엇인가? 나라가 곧 검찰이고 정의가 곧 검찰인데... 게다가 현재 검찰이 가진 권능과 기개는 군사반란 수괴인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력과 용맹에 못지 않다.

윤씨의 구국 운동이 설령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윗사람을 들이받고 꼬마 검사들을 달고 다니던 낭만 칼잡이 아닌가. 검찰공화국의 헌법이 무너지는 판에 두목인 총장이 모른체 하거나 도망갔다면 열혈 윤석열은 끝장났을 것이다. 식구들까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해도 멋있게 한 판 뜨고 칼을 맞는 것이 낫다.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불의와 범죄에 맞섰다는 자부심,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움으로써 국가에 봉사했다는 명예를 믿기 때문이다. 역사가 자신의 결백과 고뇌와 용기와 희생을 기록해주리라... 국민도 헌법도 검찰도 아닌 그냥 “자뻑”일 뿐이다.

공직자의 올바른 자세

윤씨는 결국 칼을 버리고 사직서를 던졌다. 민주주의 퇴보와 헌법 파괴는 수사일 뿐 사실은 검찰 수호를 명분으로 개인의 탐욕을 불사른 것이다. 정치권에게는 검찰을 건드리지 말라면서 스스로 정치질에 푹 빠진 정치 검찰의 민낯이다. 5년 만에 완전한 민주주의국으로 복귀한 마당에 무슨 헌법 타령인가. 중정과 안기부의 설계인지 윤씨의 항의성 사퇴는 모양새도 좋고 시기도 절묘했다.

윤씨가 올바른 공직자라면 임명권자와 입법부에 대하여 과격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정말 헌법상 책무를 저버렸다거나 갖은 압력을 넣어 검찰의 정치 중립을 훼손했다면 절차에 따라 부당함을 밝힌다. 여의치 않으면 법에 따라 수사하고 기소하면 된다. 국회에 의견을 전달하고 묵묵히 입법사항을 집행하면 된다. 진실만을 쫓는 공평한 검사라면 자신이 곧 진리가 아니라 언제든 실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임을 겸허하게 인정한다. 상급자와 뜻이 다르다면 조용히 물러날 뿐 날세워 비난하거나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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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1.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와 공직자의 자세. <최소주의행정학> 6(3): 1.

요즘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건에서 검사의 수사·기소와 판사의 판결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지난 21일 검찰은 김학의씨의 출국금지과정에 문제가 있다면서 법무부를 압수수색했다. 이른바 “별장 성접대”의 주인공인 김씨가 재수사를 앞둔 2019년 3월 인천공항을 통해 도망가려다가 들통난 사건이다. 당시 김씨 본인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던 일을 2년 가까이 묵혀두었다가 느닷없이 꺼내 대놓고 소동을 벌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럼 탈출하는 줄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었어야 했나? 그물망을 넓혀 범죄사실로 엮어낸다면 누가 덕을 보고 누가 다칠 것인가? 일반 시민의 출국금지절차에 흠이 있다 해도 이렇게 전방위로 뒤질것인가?

김학의, 최강욱, 정경심의 희비

지난 달 28일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가 업무방해로 1심에서 징역 8개월형을 받았다. 조국 전장관의 아들에게 허위 인턴증명서를 발급해 줬다는 혐의다. 검찰은 지난해 1월 23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지시로 피의자 조사도 없이 최대표를 기소했다. 10월 15일에는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 공표) 공소시효를 4시간 앞두고 또 불구속 기소했다. 같은 사안을 가지고 이리 걸고 저리 건 셈이다. 깡패의 보복이 이런 것이다.

1심 판사는 조장관의 아들이 체험활동을 했지만 9개월 간 16시간은 인턴활동으로 보기 어렵댄다. 따라서 인턴 증명서는 허위랜다. 술접대를 받은 금액을 96만원으로 계산한 검사의 꼼꼼함에 비견된다. 누가 16시간을 따져 인턴과 체험활동을 구분하는가? 어느 입시사정관이 인턴 증명서를 보고 당락을 결정하는가? 설령 증명서가 허위라 해도 징역 8개월이 합당한가? 최대표가 아닌 일반 시민이 똑같은 혐의를 받는다 해도 똑같이 기소하고 판결할 것인가?

조장관의 배우자인 정경심씨는 남편의 청문회가 열리는 동안 전격 기소되었다. 피의자 조사도 없었다. 출발점인 사모펀드에 관련된 죄는 어디 가고 자잘한 입시비리만 남았다. 검찰은 공소장대로 표창장 위조를 증명하지 못했지만 판사는 정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구속했다. 반면 검찰은 자녀입시비리와 관련되어 고발되었던 나경원씨의 고소·고발 13건을 불기소처분했다. 75억대 횡령·배임으로 기소된 홍문종씨는 징역4년을 받고도 구속되지 않았다. 탈탈 털린 정씨는 증거인멸 우려가 있고 체포동의안 부결로 버틴 홍씨는 도망갈 우려가 없댄다. 어찌하여 법의 칼날은 정씨에게는 그리도 야박하게 굴고 적폐청산을 반대한 나씨와 홍씨에게는 그리도 관대하단 말인가?

공소장과 판결문으로 말한다?

흔히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납득할 수 없으니 난감하다. 검사는 조사권과 기소권으로 흥정하고 판사는 재판권으로 기분내는 것은 아닐까? 국민의 검사임을 믿어달라지만 오해를 살만한 언행을 하지 않으면 된다.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달라고 말하지만 존중받을 만한 판결을 내리면 그만이다. 자신의 판단이 곧 진리가 아님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공정과 균형을 잃은 법적용은 그 자체로 흉기다.

김학의의 출국금지절차를 따지려고 법무부를 뒤엎었다면 생생한 성접대 동영상을 보고도 두 차례나 불기소한 검사들은 눈알이라도 뽑았어야 했다. 그 눈뜬 장님들에게 불기소라니 누가 불편부당이라 말할 것인가? 표창장을 위조했다며 조씨의 부인을 홀딱 발랐다면 수백억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윤총장의 처가는 쑥대밭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정씨가 4년이라면 86억 뇌물을 건네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후원한 이재용은 최소한 40년은 받았어야 했다. 2년 6개월이라니 터무니없다. 헐값에 죄를 끊어준 것이다. 유전무죄다.

국민의 상식이 헌법이다

검사는 정의를 실현하고 인권을 수호한다고 했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고 했다. 법은 시민의 상식을 표현한 것이고 양심은 그 상식을 느끼는 것이다. 법리라는 것도 그 상식을 뛰어넘을 수 없다. 검사와 판사의 결정에 의문을 갖는 것은 그들의 법적용이 국민의 상식과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또 그들의 양심이란 것이 국민의 정서와 다르다는 뜻이다. 제식구 감싸기와 전관예우는 그들만의 미풍양속이다. 정치중립과 독립성을 내팽개치고 법기술을 날세워 휘두르는 그들의 비양심이다. 이런 검사와 판사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부처님도 공자님도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

검찰과 법원의 자정自淨이 불가능하다면 불량품을 솎아내야 한다. 비상식 수사·기소·판결에 대하여 퇴임 후에도 권한에 비례하여 철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항상 감시하고 따지고 처벌해야 한다. 또 “영감”들의 직급을 낮추고 고위직은 선거나 공채로 임명했으면 한다. 그래봤자 국민의 머슴임을 뼈속 깊이 새기도록 해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1. 비상식 수사·기소·판결을 처벌하라. <최소주의행정학> 6(2): 2.

COVID-19가 온세상을 뒤덮고 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재앙이 지난 1년 동안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사람들과 어울려 마음껏 먹고 마시고 떠들 수 있었던 일상이 참으로 꿈결같다. “그 당연함”의 소중함이여...

한국은 한발 앞선 진단키트를 앞세워 공격적으로 COVID-19 방역에 나섰다. 세계의 주목을 끈 이른바 K-방역이다. 하지만 수구 야당과 언론에 비친 한국은 한마디로 최악이다. 독재 권력이 폭주하면서 방역은 물론 민생도 망했댄다. 백신확보에도 실패했으면서 1,200억원이나 들여 엉망진창인 K-방역을 홍보했댄다. 재난지원금을 뿌려 표를 매수한다며 악다구니다.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봉쇄하지 않았고 마스크를 빼돌려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는 억지와 날조가 아직도 반복된다. 수년간 맞아왔던 독감백신은 접종받은 사람이 죽었다며 게거품물고 나자빠지고, 초고속으로 개발되고 긴급사용이 승인·권고된 코로나 백신은 당장 맞아야 한다며 숨넘어갈 지경이다. 똥이든 된장이든 약이라면 달라는 대로 돈을 퍼주고 단숨에 목구녕으로 쑤셔넣을 기세다.

과연 K-방역은 망했나? 한국 정부가 정말 무능하고 무책임했나? 같은 통계치를 두고도 극과 극으로 치닫는 숫자놀음은 의미없다. 대신 한국과 일본의 자가격리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하여 답을 찾아보자.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입국하다

감염병 규제 때문에 한국에서 수 개월간 머물렀던 식구가 지난 달 중순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연말이 되고 COVID-19가 기승을 부리자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본비자를 받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소속 기관에서 발급받아야 하는 규정준수 서약서였다. 바뀐 외무성의 규정/지침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는지, 처음에는 발급해주지 않겠댄다. 대사관에 문의했더니 그냥 아무 데서나 구해서 내랜다. 황당하다. 다행히 기관이 입장을 바꿔 발급해 주겠댄다. 그런데 Line 앱을 사용할 수 있는 일본 스마트폰 번호가 있어야 한댄다. 급하게 중고 아이폰을 장만했다.

서약서 내용은 철저했다. 입국 전 14일부터 체온, 호흡, 피로 증상을 기록해야 했다. 출발 72시간 안에 진단검사를 해서 그 결과를 이민국에 제출해야 했다. 만일을 위해 의료보험(여행자보험)에 가입하랜다. 입국할 때 스마트폰에 Line 앱을 설치하고 14일간 건강상태를 보건소에 보고하랜다. 또 노동후생성의 코로나접촉확인 앱(COCOA)을 설치하고 현위치 정보를 기록하랜다. 입국시 감염검사를 받고 지정된 장소에 격리된댄다. 음성판정이 나오면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이나 택시로 이동하랜다. 격리기간 중 사무실에 나오거나 낯선이를 만날 수 없댄다. 해당 증상이 보이거나 양성으로 판정되면 보건소와 상담소에 위치/이동 정보를 제공하고 조사에 협조하랜다. 항상 마스크를 쓰고, 소독제로 손을 씻고, 외부인과의 접촉을 피하라고 강조했다.

체류자격확인서에 필요한 출생증명서와 증명사진은 다행히 전자파일로 제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달 반을 기다린 확인서 원본은 서약서와 함께 제출해야 했다. 수개월째 임시 중단·지연·재개로 불안한 우체국 EMS 대신 Fedex로 보냈지만, 그마저도 1주일 넘게 걸렸다. 어렵사리 마련한 서류는 여행사를 통해서만 제출할 수 있었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체온 기록과 진단검사 결과는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지가 왔다. 나리타공항에서 진단검사를 받고 입국하기까지 한 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식구는 공항에서 건강상태질문서를 제출하고 발열검사만 받았을 뿐, PCR 검사를 받지 않았고, 격리되지도 않았다. 모바일 앱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듣지 못했다. 적혀진 규정과 현실이 한참 달랐다.

일본에서 자가격리는 권고다

자가격리 규칙은 강했다. 14일 간 온 식구들이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학교도 유치원도 사무실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음식재료를 사러 나갈 수도 없다더니, 나중에는 한사람만 마스크 쓰고 다녀오랜다. 직원은 시청에서 연락이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가격리가 끝나기까지 단 한번도 시청에서 전화를 하거나 전자우편을 보내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모바일 앱을 어떻게 설치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같이 밥을 먹고, 방을 쓰고, 잠을 자도 되는지 안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 시청에 전화를 했더니, 식구가 도착한 줄도 몰랐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잘 모르는지 그냥 집에 머물러 있으라고만 했다.

쉽게 말해 자가격리는 그냥 본인이 알아서 집에 머무는 것이었다. 소속 단체나 공공 기관이 자가격리를 점검하고 관리하지 않았다. 본인이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는다는 얘기다. 격리대상자가 길거리에 돌아다닌다는 소리다. 실효성도 없는 일을 꼬치꼬치 적어놨지만 통제도 안(못)하면서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개인에게 조목조목 따지겠다는 것 아닌가? 관료들의 빨간띠질이다.

한국에서 자가격리는 의무다

한국의 입국절차와 자가격리 규정은 대체로 일본과 비슷하다. 외국인은 출발 72시간 내에 발급받은 음성확인서를 제출하고, 발열검사를 받은 후 14일간의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물론 스마트폰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서약서를 받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 자가격리는 의무사항이다. 입국한 외국인은 안전보호앱을 설치하고 매일 건강상태를 입력해야 한다. 아침 저녁으로 체온을 측정하여 보건소에 통지한다. 또 보건당국이 직접 전화를 하거나 방문하여 점검한다. 일본과는 달리 숙박시설(호텔)에 머물 수 없다. 격리 장소를 무단으로 벗어나면 손목안심밴드가 채워지거나 지정된 시설에 격리당한다. 자가격리가 끝나기 전에 PCR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

질병관리본부의 자가격리중 생활수칙은 매우 구체적이다. 독립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의복, 침구, 식기, 세면대,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식구 간 접촉을 최소화하되, 얼굴을 맞대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2미터 이상 거리를 둬야 한다. 외출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보건소에 먼저 연락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에 따라서는 소독제, 마스크, 체온계, 음식 등을 제공하기도 하고, 격리대상자가 사용한 쓰레기 치워주기도 한다.

그럼 동경에서 한번 살아보시라

일본의 자가격리는 권고사항이다. 개인의 선의에 맡기고 사후책임을 묻는다. 개인의 사생활과 자율성을 끔찍이도 존중하는 것인지, 공동체의식과 기술과 의지가 부족한 것인지... 한마디로 각자도생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앱을 설치하는 것에서부터 격리해제 진단검사까지 철저하게 통제된다.

최근 COVID-19의 전파 속도가 가파르다. 미국은 매일 20만명이 확진되고 있으며, 영국은 6 만명에 이른다. 일본은 매일 2만명 검사에서 4천명이 확진되고 있고, 한국은 10만명 검사에서 천명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의심이 들면 길을 가다가도 무료로 진단검사를 받을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일단 집에서 37.5도 이상으로 3-4일 앓아야 한다).

한국은 지나칠 만큼 과감하고 치밀하게 대처하고 있다. 많은 인력과 자원과 기술이 동원되는 일이다. 그 고역을 버텨내고 있는 공무원과 의료진의 사투가 눈물겹다. K-방역을 헐뜯고 정부의 노력을 폄훼하는 수구세력들이여. 그럼 백신을 확보하고 있다는 뉴욕, 런던, 동경에서 한번 폼나게 살아보시라.

인용하기: 박헌명. 2021. K-방역은 망했나? 자가격리 한일비교. <최소주의행정학> 6(1): 2.

지난 12월 23일 조국 전 장관 부인인 정경심씨가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재판부는 정씨가 뻔뻔하게 인턴확인서와 표창장을 위조하고도 사실을 부인했다며 혐의 대부분을 인정했다. 이튿날 법원은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처분 집행을 정지하라고 결정했고, 검찰은 나경원씨와 관련된 13건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지난 10일에는 김봉현씨로부터 술접대를 받은 검사들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96만 2천원이어서 백만원이 안된댄다. 숙성된 법기술로 빚어낸 알뜰하고 정교한 계산이다. 30일에는 끝간데 없는 막말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던 전광훈씨가 무죄로 풀려났다. 문대통령이 간첩이고 황교안 대표가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고 설파한 전씨다. 지난 10월 28일에는 전 법무부 차관인 김학의씨가 2심에서 성폭력이 아닌 금품수수로 법정구속되었다. 검찰은 김씨가 별장에서 성접대를 받는 동영상을 확보하고도 두 번씩이나 무혐의로 사건을 뭉갰다. 참으로 눈물겨운 “내 식구 감싸기”다. 반면 “드투킹 특검”이 인터넷상 불법 댓글 조작 사건으로 기소한 김경수 지사는 11월 6일 2심에서 닭갈비집 사장의 결정적인 증언에도 불구하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산 권력이다

나는 이런 사건의 사실관계를 소상히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몹시 불쾌하다. 노여움이 솟는다. 쓴웃음이 난다. 사건은 서로 다르지만 검사와 법관의 판단에는 일관된 맥락이 있다. 사법고시를 합격한 자와 그 편을 드는 자들의 포악함이다. 산 권력은 선출된 공직자(어공)가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돈을 쥐고, 몽둥이를 들고, 붓을 휘갈기고, 나발을 불고, 무당춤을 추는 자들이다. 그들의 돈은 이웃을 돕는 성금으로도 쓰이지만 불순한 자들을 짓밟는데 쓰인다. 몽둥이는 도둑을 잡을 때는 얌전하지만, 기어오르는 난동꾼을 두들겨 팰 때는 사나운 짐승이다. 진리를 쓰는 붓은 추상처럼 매섭지만 꺾인 붓은 화려한 요설로 사람을 해친다. 사실과 정의를 읊어대는 나발은 감동이 있지만 거짓과 왜곡을 불어댈 때는 귀청을 찢을 뿐이다. 서러운 자의 한을 풀어내는 무당춤은 칼날도 녹여내지만 신심이 들지 않은 춤은 애먼 사람을 잡을 뿐이다. 선량들을 흡혈하는 진정한 적폐들이다.

기득권을 움켜진 무리들이 그들이 만들었고 누려왔던 판을 지키기 위해 지금 용을 쓰고 있다. 한가하게 아랫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상전놀이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위기를 직감한 이들이 난폭해진 것이다. 그들만의 아성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무너뜨리려는 반란군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하는 절박감이 있다. 양심이고 체면이고 따질 때가 아니다.

그들의 신성불가침에 도전하는 역당逆黨들을 수구세력(정당이든 종교집단이든 시민단체든)이 마구잡이로 고발하면 경찰과 검찰이 성심을 다해 조사하여 기소한다. 먼지까지 탈탈 털거나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법정에 세운다. 수구 기레기들이 파리떼처럼 달라붙어 나발을 불어대며 바람을 잡는다. 말기술이 좋은 학자나 평론가가 거든다. 법관은 주문받은 대로, 법기술로 분칠된 대로, 나발이 부는 대로 망치질을 한다. 전주錢主가 이들을 끈끈하게 이어주고, 짝패들은 서로서로 품앗이를 한다. 사실이 어찌 되었는지, 논리가 어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 편이냐 아니냐를 물을 뿐이다. 설령 붓다나 공자가 살아온다 해도 패륜범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차별과 유전무죄는 그들이 설계한 세상의 순리이고 진리다. 재벌 3·5 법칙은 미덕이다. 노무현과 한명숙을 보내고 이건희와 이재용을 풀어준 까닭이다. 산 권력의 벌거벗은 힘이다.

검사 선서와 법관 선서가 민망하다

검사 선서라는 것이 있다. 새로 임용되는 검사에게 정의를 실현하고 인권을 수호하는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기 위함이란다. 참으로 민망하고 허망한 다짐이다.

“...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법관 선서도 있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했고, 법원공무원 규칙 69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차피 민망하기는 매한가지다. 

“...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기자들에게는 한국기자협회의 윤리강령이라는 것이 있다.

“기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를 가진 언론의 최일선 핵심존재로서 공정보도를 실천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왜 이런 선서나 윤리강령이 필요한 것일까? 풋내기 검사나 판사나 기자라 해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를 까닭이 있을까? 용기있는 검사라면 먼저 이승만과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칼을 겨눴어야 하고, 진실을 따라가는 검사였으면 억지로 간첩이나 범인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헌법과 법률에 충실한 법관이라면 윗사람의 뜻대로, 피아를 차별하여 널뛰지 말았어야 했다. 진실을 알리려는 기자라면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을 퍼뜨리지 말았어야 했다.

비양심적 정치질에 국민은 없다

이들 모두 국민을 들먹이면서 “공정”과 “공평”을 말하고 있다. 검사도 법관도 기자도 정치 중립과 독립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독재자의 눈 밖에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던 시절에나 맞는 얘기다. 검찰총장이 법무장관의 부하가 아니라며 대들고, 부장판사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고, 언론과 목사가 대통령을 헐뜯어도 아무 일 없는 호시절 아닌가. 그런데도 검찰과 국회와 경찰의 신뢰도는 바닥이고, 언론은 세계 꼴찌수준이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의 숙명이다.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고 비판한다는 자들이 실제 권력자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정치 중립을 방패삼아 국민이 염원하는 개혁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다. 자신들이 곧 정의이고 양심이니 절대로 건들지 말라는 것 아닌가. 비양심적 정치질이다. 여기에 섬겨야 할 국민도 봉사할 공익도 없다. 그들만의 국가와 헌법과 법치와 상식이 있을 뿐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1. 민망한 검사 선서와 법관 선서. <최소주의행정학> 6(1): 1.

정부관료제가 쓸데없는 규정이나 절차를 들먹이며 시민들을 골탕먹이곤 한다. 오랜 관행이라거나 전통이라는 이유로 고집을 피운다. 타성에 젖어 중복되고 지나친 규제에 막무가내로 집착한다. 상식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빨간띠(Red Tape)질이다. 관료가 다 해먹는 관료독재의 완장질이다. 못된 버르장머리다.

어떤 제도가 정착되면 사람의 자의성이 아니라 약속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효율성과 예측성이 높아지고 부패 가능성이 낮아진다. 하지만 그 제도가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관료제 곳곳에 때가 타고 기름이 낀다. 흐름은 느려지고 재량은 짓눌려 숨이 막힌다. 조직이 뻣뻣해지고 돌처럼 굳어진다. 이른바 석회화石灰化(calcification) 현상이다. 인간이 제도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라 제도에게 농락당하는 노예로 전락한다.

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

지난 8월 지인에게 중고 워크스테이션을 보냈다. Xeon Gold CPU 두 개와 256GB DDR4 램과 3,800개 CUDA 코아 그래픽카드가 장착된 시스템이다. 사진을 모아 3차원으로 만드는 그림합성(Rendering) 작업에 필요한 사양이다. 수치계산용으로도 탁월한 성능을 보였다. 큰 골판지 상자에 완충재를 넉넉히 넣어 포장을 한 뒤 우체국으로 가져갔다. 나이가 지긋한 직원이 나와 살펴보더니 무게와 최장 길이는 괜찮댄다. 그런데 나머지 둘래가 2m가 넘는다며 소포는 안되니 EMS로 보내야 한댄다. 다시 포장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20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고 그만 손을 털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그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느낌에 바로 달려갔다. 젊은 직원이 나와서 20만엔(220만원)이 넘는 물건은 수출로 간주된다고 했다. 수출대행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노직원이 실수로 빠뜨렸댄다. 나는 소포에 맞게 다시 포장을 해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이미 동경 국제우편물 사무소에 묶여 있댄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노직원은 미안한지 내게 선물용 수건을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출서류를 작성하기로 했다. 우체국에서 당분간 국제우편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에 조바심마저 들었다.

나는 우체국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다. 젊은 직원은 동경 사무소 직원과 통화를 하면서 매뉴얼과 서류를 번갈아 뒤적인다. 내게 추가로 작성해야 하는 서류를 들이민다. 또 한참을 통화를 하더니 내게로 와서 금요일에 사용한 신용카드를 달랜다. 휴대용 카드기계가 찍찍 영수증을 토해낸다. 이전 거래를 완전히 취소했다고 설명을 해준다. 다시 저리로 가서 통화하던 직원은 다가와서 신용카드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수출대행 수수료가 포함된 전체 요금을 결제하는 것이랜다. 다시 동경 직원과 통화를 하더니 내게 취소된 영수증, 새 영수증, 신용카드 영수증 등을 수북이 안겨준다. 정말 미안하다면서 같은 수건 하나를 건넨다. 시계를 보니 1시간이 좀 넘게 우체국에 머문 셈이다. 허탈하다. 한국이었으면 얼마나 걸렸을까?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 세관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쪽 직원을 통해 확인해 보니 내가 서류에 적은 물건의 가치가 왜 그리 비싸냐는 것이었다. 사양에 따라 컴퓨터 가격이 고무줄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직원에게 컴퓨터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우체국에서는 정확한 금액이 기억나지 않아 세금을 뺀 근사치를 적었다고 말했다. 직원은 고작 천엔(11,000원) 차이일 뿐이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다음부터는 서류에 물건 가치를 정확히 적으라는 세관직원의 훈계를 씁쓸하게 전달해 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비싼 물건을 터무니없이(세금이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낮은 가격으로 적는 일을 문제삼아야 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정직하게 적은 가격이건만 300만원에서 만원 틀렸다고 이리 트집을 잡는 것일까? 꼼꼼함이 지나친 것일까? 아니면 눈치껏 20만엔 아래로 적어야 하는데, 공연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자신을 귀찮게 했다는 핀잔일까? 알쏭달쏭하다. 며칠 뒤에 수출대행을 확인한 문서가 도착했으나 영 뒷끝이 개운찮다. 보름이 넘도록 EMS가 늦어지자 지인은 한국이었으면 당장 우체국에 찾아가 항의를 하고 배상을 요구했을 것이라며 흥분했다.

악한 조직에서 일하는 선한 사람

소정 선생님께서 초월윤리를 조직론에 적용하면서 조직(공식)과 사람(비공식)의 선악을 말씀하셨다(1991: 131-133). 나쁜 조직에서 일하는 착한 사람이 좋은 조직에서 일하는 나쁜 사람보다 훨씬 못하다. 나쁜 조직은 현실(고객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해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나게 한다. 좋은 일을 할 의지가 없거나 효율성과 효과성이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무리 선해도 그 결과가 선하기 어렵다.

내가 관찰한 우체국 직원은 실수를 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다. 고객을 친절하게 대했다. 수출서류를 빠뜨린 것도 이 동네에서 비싼 물건을 EMS로 보내는 일이 드물었던 탓이다. 하지만 우체국의 서류양식은 아직도 번잡하고 영수증은 길고 많았다. 한시간 넘게 통화를 하면서 신용카드 결제를 취소하고 다시 결제해야 했다. 낯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의 능력이 부족한 듯했다. 정보시스템 자체는 우수하나 이것을 활용하는 사람과 제도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인감도장과 서류양식에 매달려 있고, 화급을 다투는 전염병 통계를 팩스로 모으고 있다.

얼마 전 스가 총리가 디지탈청을 만들어 일본의 전자정부를 혁신하겠다고 밝혔다. 광인터넷으로는 선두권을 달리지만 전자정부는 10위 안에 들기도 버거운 일본이다. 하지만 전자정부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라도 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을 풀어낼 수 없다. 정보기술이 돌덩이처럼 굳어진 관료제의 머리와 팔다리를 쉽게 풀어낼 수 있다는 기대는 신기루다. 시민들이 관료제의 문제점을 자각해야 한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관료제를 깨울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결국은 기술이 아닌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지난至難한 일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부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 <최소주의행정학> 5(12): 1.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곤욕을 겪고 있다. 카투사로 복무하던 아들 서씨가 휴가 중에 무릎수술을 한 일을 두고 수구세력들이 일제히 “황제휴가”라며 매일 동네방네를 들쑤시고 있다. 서씨와 당직 사병이 통화를 했는지, 관련 서류가 왜 빠졌는지, 추장관이 국방부 민원실에 청탁을 했는지를 따지고 있다. 문제가 없다는 여당과 특혜라는 야당의 난타전에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미소를 머금고 공방을 부채질을 하고 있다. 작년 조국 사태와 같은 양상이다. 의혹이 의혹을 낳고 폭로가 폭로로 이어지는 사이 사실과 진실은 설 곳이 없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떨어지자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추장관과 문대통령을 압박하고 나섰다.

 

어리석은 분탕질에 혀를 차다

 

나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수구세력의 의혹에 손을 들어줘서가 아니다. 서씨 측의 해명이 말끔해서도 아니다. 몇 달째 지속된 COVID-19 사태로 전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사병의 병가가 대체 뭐길래 이러는가? 대학총장의 표창장이 대체 뭐길래 이 난리인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전 국민이 표창장을 어찌 위조하는지, 군대에서 어찌 병가를 연장하는지를 공부해야 하나? 오로지 자신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나라의 재물을 없애버리는 짓이다. 조국 사태에서 본 어리석은 분탕焚蕩질이다.

 

공익을 위해 폭로를 했다는 장교나 사병 모두 분수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고 있다. 서씨의 부대 배치와 통역병 선발에 관련한 청탁을 받았다던 당시 주한미군 한국군지원단장은 이번 일을 주도한 신원식 의원의 참모장이었음이 밝혀졌다. “제가 직접 추미애 남편 서 교수와 추미애 시어머니를 앉혀 놓고서 청탁을 하지 말라고 교육을 40분을 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신병교육 수료식에 참석한 모든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다. 정말 여당 대표의 청탁을 받았다면 사안이 엄중한 만큼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고, 정말 탈영이었으면 헌병에 통보하여 즉시 잡아들였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정의니 공정이니를 입에 담다니, 영관급이나 했다던 자의 언사가 이리도 가벼워서야 어디... 말똥 계급장이 아깝다. 당시 서씨가 미복귀한 사실을 보고받았고 서씨와 통화까지 했다는 당직 사병은 국회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일개 사병이 인사권을 가진 장교가 결정한 휴가가 맞냐 틀리냐를 따지겠다는 것 아닌가?

 

의혹제기가 아니라 정치공작이다

 

서씨는 입대 전에 한쪽 무릎을 수술했고, 입대 후에 다른 쪽 무릎이 아파서 휴가를 얻어 치료했고, 여의치 않아 병가를 더 얻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부대의 의견에 따라 개인 휴가를 사용했다. 이런 저런 말은 많지만 중요한 것은 (1) 정말 수술해야 할 정도로 아팠고, 정말 수술했는가와 (2) 부대장이 정당하게 승인을 했느냐이다. 서씨가 주장한 대로 수술한 사실을 병원과 검찰이 확인해줬고 해당 부대장도 병가를 승인을 해줬다고 했다. 여든 야든 이 두 가지에 이견이 없다. 그런데도 절차가 어떻고, 서류가 어떻고, 전화를 했네 안했네 그러고 자빠져 있으니 한심하다.

 

정말 문제를 삼을 만한 상황은 사병이 꾀병으로 휴가를 얻거나(실제 수술을 안했거나 허위 서류를 제출했거나), 부대장이 부당하게 휴가를 내주는(부모에게 뇌물을 받고 사병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다. 또한 긴급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서에도 불구하고 부대장이 정당한 이유없이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개 부대장들은 병가에 대해 관대한 편이지만 (정말 병사가 아픈 것일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가끔씩 역겨울 정도로 잔머리를 굴리는 사병이나 성질이 괴팍한 지휘관들을 보게 된다. 군대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한두 번씩은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서씨가 수술한 것이 맞고 인사권자가 병가를 승인했다면 더 따질 일은 없다. 나머지는(전화로 했든 전자우편으로 했든, 명령서가 언제 발급되었든) 곁가지일 뿐이다. 만일 부대장이 서씨의 병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부하 장병들의 비난은 물론 법적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역량이 COVID-19가 아닌 부질없는 이전투구에 소진되고 있다. 나라야 어찌 되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흔들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수구세력들의 결연함과 다급함이 느껴진다.

 

군대의 기강과 지휘관의 권위를 허무려는가?

 

음흉한 분탕질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지치게 한다. 침소봉대로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중요하고 사소한 것을 헷갈리게 한다. 군대에서 중요한 것은 계서제에 기반한 엄격한 지휘체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지휘관의 권위가 무너진 군은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권위주의에 찌든 적폐는 배격해야 하지만, 군지휘관의 지위를 흔들어서는 안된다. 노무현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그 자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기강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인사권을 가진 부대장이 결정한 사안을 정치꾼들이 옳으니 그르니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 자해행위다. 물증도 없이 황제휴가라고 몰아붙이면 병가를 승인한 지휘관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한때 장군노릇을 해봤다는 자가 책임자도 아닌 장교와 당직 사병을 앞세워 지휘관을 능욕하고 있으니... 앞으로 휴가는 당직 사병의 결재를 받으라는 소리인가? 권위도 재량도 부정된 부대장이 어찌 장병들을 이끈단 말인가.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지휘관의 공격 명령이 맞네 틀리네, 명령서가 있네 없네 미주알 고주알 따지고 있으니... 누가 국민의 군대를 허물고 있는가?

 

수구세력은 무슨 해명이나 조사결과가 나오든 불리한 내용이면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군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 법치나 공정은 장식품일 뿐이다. 조민을 부싯돌로 삼아 조국을 불쏘시개로 태웠듯이 서씨를 미끼삼아 추장관을 얽어매고 있다. 어떻게든 질질 끌면서 여론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꼴이나 즐기려는 고약한 심보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공작질에 두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어야 하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애처롭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황제휴가" 공작과 군지휘관의 권위. <최소주의행정학> 5(9): 1.

수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일본 소니 회장을 역임한 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과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천하를 호령했던 “소니왕조”가 어떻게 몰락해 왔는지를 경영자 시각에서 회고했다. 문득 난생 처음으로 소니 워크맨(Walkman)을 사서 산으로 들로 다녔던 90년대 중반을 떠올렸다. 오토리버스 기능에 흡족해 하면서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테이프가 닳도록 들었던 군대시절이다.

소니의 몰락은 앞선 일본 민주주의 때문?

연사는 소니가 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덩치가 커서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다고 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바꾸기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정서도 지적했다. 국제화를 위해 해외지사로 발령을 내면 직원들은 좋아하기는 커녕 좌천된 사람처럼 사표를 냈다고 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날 무렵 노신사는 불쑥 삼성과 LG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여서 소니가 각종 법규를 준수하느라 힘을 소진했지만, 한국은 민주주의가 허술해서 삼성과 LG가 법질서에 신경쓰지 않고 시장에만 집중했댄다. 정부 규제에 손발이 묶인 소니가 불법과 탈법을 넘나들며 활개치는 삼성과 LG와 경쟁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소니의 몰락을 이렇게 풀어낸 것이 흥미롭긴 했지만 솔직히 나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이명박근혜 시절이라지만 이런 소리를 들으니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이씨왕조"를 위한 삼성의 뒤집기

그런데 그 노신사의 말이 그저 터무니없는 낭설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되었다. 1996년 삼성 이건희씨가 아들 이재용씨에게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편법으로 증여했다는 사건부터 2016년 이건희씨의 성매수 사건과 최근 이부진 이재용 남매의 프로포폴 상습투약 사건까지 복기해 보면 공화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이씨왕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씨들에게 헌법과 법률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그들이 못할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감히 토달지 못한다는 “쩐”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삼성은 이씨들이 싸질러놓은 일이 무엇이든 묵묵히 뒷치닥거리하는 머슴이었다. 누가 봐도 불법이고 탈법이고 구역질나는 일을 합법으로 세탁하는 “뒤집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2005년 이상호 기자의 “삼성 X파일” 폭로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는 엉뚱하게도 제보자의 실형과 노회찬씨의 의원직 박탈로 막을 내렸다.

나는 2007년 삼성중공업 선박이 태안에서 일으킨 기름유출 사고를 보면서 삼성의 호도질과 무책임에 절망했다. 2016년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삼성 이씨왕조”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았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삼성전자에 지분이 없던 이재용이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무리하게 합병하였다. 에버랜드 토지가치가 높게 매겨지고 실체없는 제일모직 바이오사업부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가 회계기준을 바꾸어 자본잠식을 감추었고, 자회사인 바이오에피스에 대한 미국 바이오젠의 콜옵션을 숨겼다. 합병에 꼭 필요한 국민연금의 동의를 얻기 위해 박근혜의 탈을 쓴 최순실에게 말이며 돈을 건넸다. 또 대놓고 검찰의 조사를 방해하고 증거를 인멸했다. 2019년 삼바는 공장바닥에 회계에 관련된 서버와 랩탑을 숨겨 세상을 경악시켰다. 중정과 안기부의 패악질이 삼성의 미전실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삼성의 뒤집기는 약발이 여전하다. 지난 6월 26일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는 이재용에 대한 불기소와 수사중단을 결정했다. 이씨가 아니라면 벌써 수십 번은 구속되고 수십 년을 감옥에 있어야 할 죄가 아닌가.

이씨왕조의 죄악과 삼성장학생의 추억

소정 선생님은 <창세기>의 5대 설화를 통해 악은 (1) 언론 탄압(말을 못하게 한다), (2) 정치경쟁자 제거, (3) 일반 국민의 타락, (4) 전시효과를 노린 사업 추진, (5) 체제 비대화와 인접 국가의 정벌로 진전된다고 했다(1991: 87-103). 삼성왕조가 걷고 있는 그 길이다.

첫째, 이씨와 삼성을 비판하는 일이 힘들거나 위험하다. 삼성은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 언론인, 판사, 검사, 관료, 변호사 등을 관리해왔다. 삼성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양들의 침묵이다. 삼바수사가 한창일 때 검찰과 언론은 “조국때리기”로 국면을 바꾸었다. 이건희 성매수를 촬영한 죄만 묻고 이재용의 프로포폴 제보자만 구속하였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암약하는 “삼성장학생”들의 활약상이다. 둘째, 유독 실적과 1등에 집착해서 경쟁 기업이 남아나질 않는다. 갑질이든 뭐든 수단방법 안가리고 힘으로 경쟁자를 찍어 눌렀다. 규모의 경제를 넘어선 그냥 강자의 물량공세와 폭력이다. 소니 회장의 지적이 아픈 대목이다. 세째, 이씨들이 무슨 짓을 해도 일반 시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기사, 방송, 조사, 기소, 판결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며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한다. 힘의 논리를 날것 그대로 체득하여 누구든 약자에게 행패를 부린다. 네째, 임직원들이 작정을 하고 노조를 망가뜨리고 공장에서 병을 얻은 직원들을 십 수년 방치했음에도 세계 1위도 모자라 “초인류 경영”이라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주술을 퍼뜨린다. 바벨탑이다. 이씨들이 감옥에 있을 때 삼성의 주가가 오르는데도 나라와 경제를 위해 석방하고 사면해야 한댄다. 나라가 정말 그 지경이면 그 나라는 진작 망했어야 한다. 다섯째, 뒷치닥거리 비용이 커지고, 혁신은 시들고, 시장은 돌아선다. “삼성이 만들면 안산다.” 그동안 밟혀왔던 다른 기업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한마디로 권력이 금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 왕조와는 달리 총과 칼이 아니라 돈다발을 들이밀고 복종을 강제하고 있다.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호위무사의 기개일까? 상식과 양심을 팔아넘긴 비루한 인간의 궁상일까? 삼성장학생의 뒤집기가 사람들의 한숨이 되고 분노가 되고 저주가 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부르고 있다. 소니가 시장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삼성도 세상물정 모르고 짜릿한 뒤집기에만 취해있는 것은 아닌지. 깨어있는 시민들이 해일이 되어 밀려오고 있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소니왕조의 몰락과 삼성왕조의 위기. <최소주의행정학> 5(7): 1.

수년 전 병원에서 투석透析하시던 소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대뜸 일본 관료제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좀 얼떨떨하다가, 일정한 체계를 잘 갖추어 일을 꼼꼼하게 수행하지만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일본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일본은 우리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며 짧게 말씀하셨다. 강의실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관료제를 비교하여 설명하신 것은 기억하지만 정확한 취지는 당시에 알지 못했다. 최근에서야 내 답변이 피상적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본에 머물면서 이런 저런 일을 관찰하고 경험한 결과다.

원칙아닌 원칙, 위법아닌 위법

아베 총리의 사학비리 사건이 확산되고 진화되는 과정은 흥미로왔다. 아베 측근이 운영하는 모리토모森友 학원에 국유지를 헐값에 넘겨주었고, 재무성 고위 공무원까지 동원하여 공문서를 조작했다. 끝내 모든 용의자가 불기소처분을 받자 검찰마저 “손타쿠忖度”라는 자조를 쏟아냈다. 원래는 타인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린다는 뜻이지만 조직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심기를 눈치껏 살펴 알아서 긴다는 소리다. 서구의 법질서를 받아들여 합리적이고 꼼꼼하게 일을 한다는 일본관료제의 민낯이다. 또 일제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전범기업이 배상하라는 한국대법원의 판결을 빌미로 아베 정권은 이달 초 주요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하였다. 얼마 전에는 수출통제절차 간소화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시켰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종료한다고 선언했고 국민들은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맞서고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을 찔끔찔끔 허가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고작 이런 관료제였던가? 눈가리고 아웅이라고 해야 하나...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원칙과 절차를 자세하게 적어놓고 그것을 철저하게 따르려고 한다. 체화된 습관을 넘어서 집착증이라 해도 될 정도다.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고 하던 대로 한다. 공공기관의 문서양식은 어렸을 적 기억을 소환한다. 은행에서 해외송금을 하려면 넉 장이 넘는 서류를 작성하고 반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한국에서는 신분증과 수결로 10분이면 끝낼 일을... 문서에 도장을 열심히 찍는 것이나 돈을 하나하나 세면서 계산하는 것이나 감동스러운 꼼꼼함이다. 지독하게 깨끗한 일본 화장실의 치밀함이라고나 할까. 이런 점에서 일본 관료제는 어쩌면 막스베버의 이념형(ideal type)에 가깝다. 전문성을 갖춘 공무원이 법과 절차에 따라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원칙이 항상 원칙이 아니고 위법이 위법이 아니라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원칙 자체는 서구의 합리성을 구현하는 것이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규칙을 정하더라도 언제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다. 원칙 자체를 모호하게 적어놓거나, 예외를 넓게 적어놓거나, 그도 아니면 대놓고 권력자의 재량사항으로 해놓는다. 어느 경우이든 권력자가 독한 맘을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미묘함을 남겨둔다. 구렁이 담넘어가듯 원칙과 위법을 넘나드는 변화무쌍함이다. 애초부터 어기기 위해 원칙과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있다. 아베 정권이 재등장하면서 구석구석에 측근을 박아놓았는데, 이들의 막가파식 권위주의 행태에서 규칙같으나 규칙이 아닌, 불법같으면서도 불법이 아닌 “어정쩡한 치밀함”을 관찰한다.

좀더 심각한 상황에서는 원칙이나 규칙은 허수아비가 된다. 문서에 멀쩡하게 적혀있지만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한다. 벌거벗은 힘(naked power)이 야만스럽게 관료제를 쥐고 흔든다. 비유하자면, 필수과목에서 낙제를 받거나 논문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도 졸업을 시킨다. 윗사람이 결정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그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물론 원칙을 적용하자면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상부의 지시로 문서조작을 했다며 자살한 재무성 공무원의 억울함이 납득되는 대목이다. 권력자는 조직구성원의 협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가 아니라 식민지에 쳐들어온 점령군에 가깝다. 나는 이러한 황당하기 짝없는 폭력을 관료제에서 어떻게 소화하는지가 궁금했다.

권력남용에 대처하는 공직자의 선택

가장 쉬운 방법은 알아서 기는 것이다. “손타쿠”로 윗사람을 알아서 섬긴다. 나쁜 윗사람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찍어누르면 최대한 규정을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궁리한다. 억지로라도 꿰어 맞출 수 있는지 따진다. 예를 들면, 논문심사위원 모두가 부적격으로 결론을 내려도 다시 심사하도록 종용한다. 누가 봐도 불통이 당연한데도 명문 규정이 없으니 윗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랜다(의견이 엇갈린 경우에만 명문 규정이 있으니까). 상상력으로 해결이 안되면 문서를 조작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통계학과로 지원한 학생이 생뚱맞게 경제학과로 합격된다. 또 위원회같은 제 3의 기구를 통해 현상이나 사실을 바꿔치기한다. 심각한 폭력이나 부정행위도 위원회에서 무혐의로 발표한다. 명백한 증거가 제시되어도 자신의 의견이 그러하다고 해명한다. 사실과 진실과 관계가 없는 자기최면이나 자기기만일 뿐이다.1)

두번째는 소극적으로 침묵하고 묵인한다. 담당자가 “손타쿠”를 몰라 분위기파악을 못하면 윗사람은 권력남용의 강도를 높인다. 담당자를 불러내서 집요하게 의지를 전달하는데, 대개는 여럿이 둘러싸고 몰아부친다. 이것 역시 약발이 서지 않으면 결단을 내린다. 아랫사람의 권한으로 행사해야 할 결정을 이렇게 결정하라고 지시한다. 아랫사람은 뒤늦게 알아서 기든지, 침묵하든지, 아니면 위험을 각오하고 내부고발을 하든지 해야 한다. 예컨대, 부서내규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도록 회의를 열어 결정하라고 한다. 물론 상식에 맞지 않는 내용이다. 아랫사람은 회의를 열어 윗사람의 통보내용을 공개하고 자신들의 결정이 아님을 밝힌다. 하지만 만장일치로 합의된 안건으로 둔갑되어 윗사람에게 보내진다. 자신의 결정을 아랫사람의 합의로 포장하여 자신이 재가裁可하는 셈이다. 아랫사람의 침묵은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있으나 양심상 맨정신으로 따를 수는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다.

세번째는(내부고발이나 항거나 물리력 동원 등은 열외로 치자) 권력자가 전면에 등장하여 원하는 것을 강제하는 경우다. 물론 원칙과 규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관료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때 관료들은 원칙대로 처리하되 윗사람의 결심내용을 별도로 문서에 남겨둔다. 예컨대, 성적증명서에는 필수과목이 낙제라고 찍히지만, 내부문서로 정황을 기록해놓고 졸업장을 발급한다. 이런 행위를 지칭하는 고유한 어휘가 있댄다. 물론 이 경우에도 회의에서 권력자의 엄중한 의지임을 밝히고 “침묵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러한 관행은 권력자의 폭력을 피하되, 원칙을 위반하는 자신을 보호하는 궁여지책이다. 권력남용과 원칙 사이에 마련해 둔 완충장치라지만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이다.

이러한 편법과 황당한 관행을 이해하면 아베 정부가 수출허가를 매번 받도록 하거나 절차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째,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허가를 내주는 것도 내주지 않는 것도 그때그때 유불리에 따라 신축성을 발휘한다. 과거 중정이나 안기부에서 패는 것이 유리하면 패고 안패는 것이 유리하면 점잖게 대접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둘째, 아베 정권이 상상력을 어디까지 발휘할 지, 원칙과 현실의 괴리를 어찌 정당화할 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변덕스런 자의성과 불확실성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세째, 형식적으로는 폭력이 아닌 합의에 의한 결정이어서 책임을 따지기 어렵다. 권력자가 권한을 남용하여 강제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기가 쉽지 않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모두가 결정한 일이니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선비의 나라? 무사의 나라?

왜 이런 일들이 관료제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권력남용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벌거벗은 폭력에 대응하는 일본인의 태도는 좀 특별하다. 집단주의에 순응한 탓인지 고개를 쳐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윗사람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외부에 폭로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당장 자기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대부분 앞에 나서지 않는다. 부당한 것을 잘 알고 있더라도 대부분 침묵한다. 학력, 소득, 지역, 성별과 관계없이 감정을 드러내거나 말하는 것을 꺼려한다. 좋게 보면 불필요한 관심을 끊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세상일에 눈감는 것이다. 속으로는 정치인을 비난하더라도 막상 투표소에는 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속말(本音, 혼네)과 겉말(建前, 다테마에)이 다르다는 말이 나온다. 튀지 않으려는 속내는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고 “왕따”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속담을 체화한 듯하다.

이러한 습성은 일본의 사무라이(侍) 정신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무라이는 15-16세기 전국시대에 지방 영주(大名, 다이묘)를 주군으로 모시고 특권을 누려온 무사계급을 말한다. 주군에게는 절대 복종하지만, 칼을 차고 다니며 평민들을 자의로 지배했다. 권력을 쥐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듯이 서슴없이 패악질을 저질렀다. 마음대로 부녀자를 겁탈하거나 비위를 건드린 자들을 벨 수 있었다. 절대 복종을 강요받은 백성들은 살아남느냐 항거하다 죽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그토록 친절한 것은 사무라이의 폭력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약자의 지혜가 습관화된 결과일는지 모른다. 포악한 칼날을 일단 피하고 보자는 궁여지책이다.

소정 선생님은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명치유신 전까지 무인통치를 해왔다고 했다(1980: 383; 1991: 81). 한국의 국조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마늘과 쑥을 가져왔는데 일본의 국조는 복종심을 유발하는 칼, 활, 거울, 구슬을 가져왔으니,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정복인간征服人間의 차이다(1991: 77-78). 선비의 나라와 사무라이의 나라의 거리이며(2006: 266), 씨름과 스모가 다른 점이다(2011: 226). 전후 온건관료주의를 채택해온 일본이 한국과 중국의 관료제보다 나은 점이 있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죄를 뉘우치고 대안을 모색하기는 커녕 권력자의 온정주의에 순치되고 있다(1996: 31, 654). 말하자면 의미있는 반성과 저항과 수난을 겪지 않은 관료제가 권력남용에 속수무책으로 퇴화하고 있다.

사실과 신화, 역사와 종교

소정 선생님은 또 “일본만 해도 민회의 뿌리가 되는 교회가 드물고 귀신 모신 데가 많은 것이 흠”이라고 하셨다(2008: 454). 아마도 지진과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많고, 사무라이의 패악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자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일는지 모른다(1996: 289). 아직도 일본인 다수가 인간인 왕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2011: 167). 인간과 신이 동전의 양면이다. 종교가 개혁되지 않고 신의 권위에 눌린 백성이 스스로 “카미카제” 특공대로 나설 정도다(2011: 427).

일본이 신화와 종교에 집착한다면 한국은 사실과 역사에 죽고 산다(박헌명 2018). 일본인들은 신화를 만들고 종교처럼 믿는데 익숙해져 있다. 사실과 진실이 어떠한 것인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사실과 신화가 드렁칡처럼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신화로 살아도 자연스러울 뿐더러 불편하지 않다. 반면 한국은 조국후보 검증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사소한 사실관계에도 목숨걸고 달려든다. 그래서 한국이 독도가 역사책에서 어찌 기술되어있는지, 옛날 지도에 어찌 표시되어있는지를 들이밀어도 신화에 심취해 있는 일본인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 나쁜 권력자가 원하는 신화를 만들면 관료제든 시민들이든 순응하게 된다. 독도든 일제성노예든 무역전쟁이든 말하고 싶은 얘기를 창작한다. 힘을 숭상하는 자들은 권력남용을 따지지 않고 신화를 사실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심 동의하지 않아도 따돌림당하지 않기 위해 못본 체 한다. 정답은 정해진 것이니 어떻게 신화를 현실로 자연스럽게 이어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질문할 필요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을 할 뿐이다. 알아서 기든, 입닫고 침묵하든, 원칙을 위반한 사연을 깨알처럼 적든 같은 정신줄이다.

견디면서 힘을 키워야 한다

한일 무역갈등으로 양국 모두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베 정권의 꼼수와 잔머리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권력자의 결정에 꿰맞추려는 자기기만과 어거지를 버텨내야 한다. 서로 다른 문법과 논리로 겨루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끝까지 정도를 걸으면서 참고 견뎌 내야 한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는 한 계속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보편성과 합리성으로 다투어야 한다. 특히 일본보다 다른 나라를 설득하여 협력을 얻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아베 정권보다는 양식있는 시민사회와 연대해야 한다.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 사실을 말하고 용기있게 헛된 신화를 깰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사무라이의 패악질을 멈추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끝주

1) 전후 일본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일으키던 시절 어느 일본기업이 미국 제품을 복제하여 팔다가 기소되었다고 한다. 그 제품에는 “Made in U.S.A.”라고 새겨졌는데, 일본쪽에서는 U.S.A.가 미국이 아니라 “우사”라는 일본회사라고 우기고 재판부에 각종 문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아마도 “우사”의 모든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창작하였을 것이다. 십수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

참고문헌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사무라이 관료제의 눈가리고 아웅. <최소주의행정학> 4(8): 1-2.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되었다. 신문과 방송마다 크든 작든 정권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를 내놓고있다.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나 경제정책에 매겨진 점수는 가혹하다. 혹자는 F라거나 평가 자체를 아예 거부했다. 지난 1분기 실질국내총생산 성장률이 .3푼이나 떨어졌다며(-.3%) 호들갑이다. 경제가 “폭망”했다는 것이다. 어느 금융기관 간부는 최저임금인상으로 조만간 정권이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말 경제가 “폭망”했나?

지난 5월 3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54푼이 노동고용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29푼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복지정책은 51푼이 잘하고 있고(33푼이 부정평가), 45푼이 각각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을 좋게 평가했다. 하지만 인사정책은 26푼만이 잘한다고 했고(50푼이 부정평가), 경제정책은 겨우 23푼만이 긍정평가를 내렸다. 응답자의 62푼이 경제정책을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45푼이 대통령이 직무수행을 잘한다고 보았고 46푼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외교와 남북관계 개선 (14-16푼)이 긍정평가를, 민생 문제 (44푼)가 부정평가를 주도했다.

이런 평가를 접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인사정책이나 경제정책이 그토록 형편없었단 말인가? 수구세력이 “인사참사”라면서 비난을 쏟아냈지만 아무리 못해도 이명박근혜 정권에 비할까? 성인군자가 왔어도 트집을 잡아 망신을 주었을 것이면서 청문보고서가 어쩌니 낙마 비율이 어쩌니 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

수구세력들이 경제가 “폭망”했다며 내세우는 거시경제지표를 몇가지 살펴보자(아래 그림 참조). 국가지표체계(index.go.kr)에서 얻은 실질국내총생산성장률은 현재 박근혜 정권의 연장선에 가깝다. 특별히 치솟은 것도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올해 1분기 성장율이 낮은 것도 지난 4분기 성장률이 높았던 탓이다. 경제성장률만 놓고 보면 수구세력이 그토록 “경포대”라고 비아냥거렸던 노무현 정권이 시장경제를 외쳤던 이명박근혜 정권보다 훨씬 나았다.

또 고용이 늘지 않았다고 아우성이지만 실업률은 김대중 정권 이래 3–4푼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요즘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고 하지만 “고용절벽”이라 할 수는 없다. 물론 노령인구의 일자리와 소득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이는 사회경제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다. 문재인 정권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경제성장률이 뚝 떨어지고 실업자가 크게 늘어났다고 볼 수 없다. 세계 경제의 흐름에 따라 한국 경제가 어렵게 가고 있는 것은 맞지만 경제가 “폭망”했다고 선동하고 저주하는 것은 지나치다.

Economy Growth Rate

최저임금인상과 자영업 위기?

흔히들 최저임금인상으로 자영업자들이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규모는 OECD에서 상위권에 속한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자영업자 비중은 2001년 전체(취업자 +자영업자)의 28.1푼이었는데, 2010년 23.5푼으로, 2018년에는 21.0푼으로 꾸준히 내려왔다. 1인 자영업자 비중은 압도적이어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72–73푼이었다(국민일보 2017. 10. 7). 1인 자영업자는 최저임금과 관계가 없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종업원을 둔) 자영업자는 2017년 기준으로 전체의 5.8푼(=21.3% X 27.4%)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인상 때문에 종업원을 둘 수 없을 지경이라면 문을 닫아야 한다. 시장 논리다. 경쟁력에 따라 자연스레 자영업 지형이 조정되어야 한다. 지금 자영업 문제는 최저임금인상보다는 경기둔화, 무분별 창업, 집세 등과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인상된 임금이 시행되기도 전에 수구세력들이 자영업 위기를 운운했던 것은 여론조작에 가깝다. 요컨대, “경제폭망”이나 “좌파독재”는 염치없는 정치구호이다.

경제는 시대정신이 아니다

실물경제와 민생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재인 정권이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은 아니다. 촛불혁명이 물었던 것은 “이게 나라냐?”였다. 입법, 사법, 행정부가 법에 따라 제대로 동작하도록 고치는 것이다. 특권과 반칙이 없고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다. 국민이 번역기없이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함이다. 한마디로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경쟁력이 줄어들고, 실직자가 늘고, 빈부격자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정부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급한대로 최저임금을 올리고 일하는 시간을 조정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다.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복지정책에 좋은 점수를 준 까닭이다. 하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고 경제성장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기간에 성장한 우리 경제는 규모도 크고 충분히 복잡해져 있다. 경제학자를 포함한 어느 전문가도 쉽게 답을 내지 못한다. 하물며 무역의존도가 높고 재벌의 갑질이 체질화된 경제임에랴. 정부와 기업과 국민이 지혜를 모아 경제구조를 바꿔나가야 한다. 인내심과 긴 호흡이 필요하다. 새로움이 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서로 의지하여 아픔을 나누고 격려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마음만 급해서 이리저리 뛰고 있고, 수구세력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대기업은 뒷짐지고 굿이나 보고, 국민은 청와대만 바라보고 입맛만 다시고 있다. 어차피 경제는 민간의 몫이다. 정부는 기업과 국민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제시해야 한다. 비정상을 바로잡고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문재인 정부의 경제는 “폭망”했나? <최소주의행정학> 4(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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