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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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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요 추잡스런 변태 행각이라고 박근혜 최순실 스캔들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영 개운치가 않다. 정말 봉건시대에서도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문제를 심각하게 보지 않고 간과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행정학자가 대통령이 “비선실세”가 권한 옷을 입고, 회의를 열고, 정책을 만들고, 상벌을 내리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맞춤법도 “공항장애” 수준이고 말법도 “이그저”인 갑질 아줌마에게 연설문까지 “컨펌”을 받으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참으로 입에 담기조차 “거시기”한 일이다. 정부 관료제가 박근혜 최순실에게 완전히 털린 것이다. 농락籠絡을 당하고 강간을 당하고도 찍소리 못하고 따귀질을 당하고 발길질까지 당한 것이다. 배울 것 다 배우고 알 것 다 아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어찌하여 “이그저”에게 속절없이 농락당했을까?  

“아주 나쁜 사람” 노태강은 공직자의 좌절

박근혜씨는 2013년 8월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를 청와대로 불러 놓고 수첩을 꺼내 두 공직자를 지목하여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비난하면서 인사조치를 요구했다(김의겸·노형석 2016). 그 해 10월 노태강 체육국장은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으로, 진재수 체육정책과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무과장으로 각각 좌천되었고, 박근혜씨가 2016년 3월경 “이 사람 아직도 있어요?”라고 문제삼은 뒤 그 해 7월 두 사람 모두 공직을 떠났다(같은 기사).

대통령이 공무원을 지목하여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는 기사 제목을 보고(내용을 읽지 않고) 나는 어이없어 했다. 첫번째 이유는 공사公私 구분이 없는 천둥벌거숭이의 말법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씨를 겨냥한 “참 나쁜 대통령”과 마찬가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딱 그 수준이다. 둘째는 어디서 고자질을 듣고 와서 대뜸 나쁘다니까 자르라고 쏘아대는 품이 영락없이 푼수 소갈딱지다. 재 싫으니까 때찌해달라는 칭얼댐이다. 정말로 나쁜 사람인지 따져보고 나서 결정을 할 일 아닌가? 세째는 대통령이 체통없이 장·차관도 아닌 국·과장을 들먹이고 있다는 점이다. 군대로 치면 군통수권자가 “박상사”를 자청한 것이다. 낄 데 안낄 데 구분못하여 생뚱맞은 짓만 골라서 하는 고문관顧問官 그대로다.1)

그리고 지난 해 “이 사람이 아직도...” 그러길래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하면서 짜증을 내었다. 스토커마냥 국·과장의 일을 그리 집요하게 들먹이는 것이 수상했다. 이 때만 해도 청와대가 요구한 전시회를 거부하여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경질된 일과 관련된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애초부터 박근혜씨는 대통령이 아닌 "왕놀이"를 해왔기 때문에 제멋대로 인사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직업공무원제도가 어쩌구 국가공무원법이 어쩌구는 아예 기대도 안했다. 하지만 어찌하여 이런 고문관 짓을 계속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수많은 참모들을 거느리고 있을텐데 한 사람도 “박상사”를 제지하지 않았단 말인가? 대통령을 잘 모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박씨의 참모나 측근이라는 것이 쪽팔려서라도 그만 하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 법과 절차 문제라기보다는 사람의 기본 양식이나 품격에 관한 일이 아닌가? 삼성의 이재용씨가 업무보고를 공손하게 하지 않았다며 늙은 과장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본능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주변에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결국 노국장과 진과장은 지난 해 7월 공직에서 물러났다. 정권이 하라는 일을 거부하거나 대놓고 맞선 것이 아니라 일상 업무를 한 결과가 하필이면 “비선실세”가 원치 않은 쪽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는 무슨 일인지, 뭐가 문제인지, 노국장이 누구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사리분별을 못하는 간난이가 칼을 들고 휘두르른 셈이다. 유신독재를 밀어붙인 그의 아버지 박정희씨가 즐겨쓰던 방식대로 법으로 신분이 보장된 공직자에게 직장 동료와 조직을 볼모로 명예퇴직을 강요했다(김의겸·노형석 2016). 폭군과 독재에 맞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문영(2008)은 “나는 처음 해직되었다가 복직되기 전에 거친 여름과 한 학기와 겨울의 반을 한마디로 땅 속에 묻힌 암흑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흙을 파고 나를 묻고 꾹꾹 밟아 묻어버려 나는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였다. 어느 신문도 단 한 줄이라도 우리 두 사람의 해직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내 집에 찾아오던 사람들은 발길을 싹 끊었다”(260쪽)고 회고했다. 아마도 두 사람은 억울하고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구조악이냐? 개인악이냐?

그러면 “순실”시대의 미꾸라지들이 마음껏 정부 관료제를 휘젓고 다닐 때 일반 공직자들이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들이 처한 상황은 어떠했으며 어떤 보상체계에 직면해 있었을까? 직업공무원제도는 도대체 왜 작동을 멈춘 것일까? 공복公僕이라는 본문을 망각하고 미꾸라지들의 부역자 노릇을 했다며 비난을 퍼부을 것인가? 아님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냐며 한숨만 내쉴 것인가? 공무원의 의무와 책임은 다 어디를 갔단 말인가? 진정한 백성의 심부름꾼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나?

이문영(1991: 131-133)은 조직과 그 구성원 일반이 탈권력화를 지향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4가지 상황을 상정하였다. 조직과 인간의 지향을 윤리 차원에서 선善과 악惡 양극단으로 단순화하였다. 즉, Hodgkinson (1978)의 힘([naked] power), 권위, 영향력, 전문성,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 지도력, 최고 지도력(leadership as excellence)이라는 개념 순서를 이용하여, 조직과 구성원 일반의 지향이 힘 논리에 가까우면 악, 지도력에 가까우면 선이라고 구분하였다(이문영 1991: 104-106, 131-132). 예컨대, 국민의 요구에 순응하고, 상하 간 대화와 설득을 강조하고, 도덕성을 가진 지도력으로 갈수록 정부 조직과 공직자는 선에 가까와 진다. 이문영(1991)은 각각의 구도에 따라 개혁을 추구하는 공무원이 가져야 할 (초월)윤리가 어떠한 것인지를 논구했다.

먼저 탈권위주의 조직에서 구성원 일반 역시 탈권력을 지향하는 경우다. 이처럼 조직과 구성원 모두 선한 상황에서는 공무원은 그저 비폭력으로 스스로 퇴화하는 것을 경계하면 된다. 제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일상의 기본 활동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둘째, 만일 조직은 선한데 구성원 일반이 선하지 않으면 개혁성향을 가진 공무원은 개인윤리를 가져야 한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는 것에 더하여 효율적 합리적 관리(분업)와 인간 관계 향상을 추구해야 한다. 세 번째 상황은 조직은 날것 그대로의 힘을 휘두르고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는데 구성원 일반은 탈권력화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개혁을 지향하는 공무원은 전문성을 높이고 합의를 모색하는 노력에 더하여 사회윤리를 가져야 한다. 정부조직 밖(국민)의 요구에 대응하여 다원성과 형평성을 추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직과 구성원 일반 모두 권력화를 지향하면 개혁을 추구하는 공무원은 자기희생을 무릅쓸 수밖에 없다. 이런 이상형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상사와 조직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한다.  
 
이문영(1986)은 이른바 개인악個人惡보다 구조악構造惡이 더 나쁘다고 했다. “선한 집단에서 일하는 나쁜 사람보다는 악한 집단에서 일하는 의리있고 멋진 사나이가 더 나쁘다”(47쪽). 그래서 구조선-개인악보다 구조악-개인선이 훨씬 나쁜 구도라고 보았다(이문영 1991: 133). 그래서 흔히 우리가 구조선 속에 있는 개인악에는 가혹하지만 구조악 속에 있는 개인선에는 너그러운 면이 있다면서 개인선에 홀려 그 개인이 속해 있는 구조의 악을 못 보는 일을 경계했다(이문영 1986: 48-49). 그렇다면 “순실”시대의 공무원들은 어떤 구도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구조악과 개인악이란 올가미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법과 원칙과 절차에 따라 조직을 운영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해관계와 훈수와 감정에 따라 칼을 휘두른 결과다. 각종 미꾸라지들은 말을 듣지 않는 공무원들을 좌천시키고 군말없이 말을 따르는 자들을 중용했다.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초연금 공약을 파기한 것을 반대해 물러났고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소위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다 해임되었다. “왕의 여자”라 불리던 조윤선씨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여성가족부 장관과 청와대 정무수석을 거쳐 문화관광체육부 장관이 이르기까지 박근혜씨 밑에서 온갖 영화를 누렸다. 껄끄러운 자들은 무슨 수를 쓰든 찍어내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자리에 앉혀셔 서로 “해먹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든 것이다. 환관과 간신들로 둘러싸인 “사실상 절대왕정”이 들어서면서 관료제가 구조악이 된 것이다.  

그러면 공직자 일반은 어떠할까? 개인악에 가까울까? 개인선에 가까울까? 아마도 대다수는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면서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대놓고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하고 부당한 지시를 뭉개거나 질질 끌거나 마지못해 건성건성 했을 것이다. 물론 힘센 쪽에 붙어 부역질하면서 짧고 화려하게 불꽃을 태우려는 공무원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 비난 화살을 고슴도치 등짝처럼 맞아 산 송장이 된 문화체육광광부를 생각해 보자. 복지부동하면서도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집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무섭고 불쾌하고 창피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윗선”이 시키는 일을 거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장 좌천당하고 왕따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블랙리스트 사태가 정점을 치달을 때 조윤선씨에서 이실직고以實直告할 것을 권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심각한 개인악은 아니었을 것같다. 하지만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내부인의 호루라기 불기(whistle blowing)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개인선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공무원의 선서는 어디로 갔을까? 결국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은 개인윤리는 챙겼는지 모르지만 공직자로서 사회윤리를 갖고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일한 공직자들은 어떠할까?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랐다기보다는 힘 센 쪽에 붙어서 호의호식을 한 쪽에 가까왔다고 본다. 언감생심으로 자리를 꿰차고 앉았기 때문에 박근혜와 최순실씨에게 대가를 제공해야 했을 것이다. 군말없이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영혼이 맑은” 사람들로 뽑았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를 “주군”으로 부르고 그의 지시를 “하명”이라고 받았다는 김기춘씨에게는 판단이 있을 수 없다. 오직 맹종盲從이 있을 뿐이다. 민정수석이었으면서도 아는 것이 없다고 자신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자랑하는 우병우씨나 소위 문고리 3인방도 마찬가지다. 이런 음흉한 미꾸라지들이 뱀처럼 서로 몸을 비벼대면서 청와대에 똬리를 틀고 않아 관료사회를 농락하고, 증거를 없애고, 내부자 고발을 차단했던 것이다.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던 청와대 공무원이 검찰과 국회의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라. 구조악이 된 청와대에서 공직자 역시 개인악이었다. 이처럼 올가미에 걸린 상황에서 공무원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네 네”할 뿐이었다. 공직자의 자기희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묻는다. 관료제를 발기어 구조악을 구축해온 막장 미꾸라지들을 한탄해야 하나? 폭력을 휘두르는 권력에 몸던져 저항하지 못한 공무원을 탓해야 하나? 결국 우리는 헌법 제 1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공화국의 주인인 국민이 답이다.

끝주

1) 어느 장군이 예하 부대 내무반을 순시차 들렀는데 신입 이등병이 보고 너무 놀라서 엉겁결에 도망을 쳤다. 장군은 화를 내면서 당장 잡아오게 했고, 잡혀와 무릎꿇린 그 이등병에게 경례를 왜 안했냐면서 벼락치듯 소리를 내질렀다. 사색이 되어 부르르 떨면서 눈물 콧물을 빼는 모습에 해당 지휘관은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원사·상사들이 뒤에서 혀를 끌끌 찼다.

참고문헌

김의겸·노형석. 2016. “이 사람이 아직도 있어요?” 박대통령 한마디에 국·과장 강제 퇴직. <한겨레신문>. 2016. 10. 12.

Hodgkinson, Christopher. 1978. Towards a Philosophy of Administration. St. Martins Press.


원문: 박헌명. 2017. "순실"시대의 공직자들: 구조악과 개인악이란 올가미. <최소주의 행정학> 2(1): 2-3.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고 있다. 지난 가을부터 박근혜씨와 최순실씨, 그리고 그 부역자들이 나라를 뒤집어 놓았다. 민간인인 이른바 “비선실세”는 그렇다 쳐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비서실장, 민정수석, 정무수석, 국가안보실장, 경호실장, 의무실장, 비서관, 행정관, 심지어는 장관과 차관까지 공무원들이 줄줄이 연루되었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좀도둑이나 깡패집단이 청와대와 정부청사를 접수하고 나서 몇 년 간 마음껏 행세를 하고 난장판을 벌여놓은 셈이다. 곡간에 든 들쥐 무리처럼 말이다. 정말 이게 나라냐며 자조自嘲하는 까닭이다.

공직자의 의무와 윤리는 커녕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언급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다. 중범죄를 저지르고 국정을 농단壟斷했다기보다는 그저 엽기獵奇다. 날마다 새롭게 드러나는 이들의 변태變態 행각에 처음에는 충격을 받고 못미더워 하다가, 부끄럽고 화가 나다가, 이제는 짜증내는 것조차 지겨워 자포자기自暴自棄하고 있다. 이 소름끼치고 역겨운 추문醜聞의 끝이 출생비밀이 풀려 딸이 동생이 되고 조카가 딸이 되고 언니가 엄마가 되는 막장 드라마로 치닫는다 해도 이제는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喪失의 시대? 純失의 시대?

최씨가 사용한 태블릿 컴퓨터가 보도된 이후 미꾸라지들의 모습에서 일말의 양심이나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다. “박꾸라지”든 “최꾸라지”든 “법꾸라지”든 “우꾸라지”든 “얼꾸라지”든 “삼꾸라지”든 “롯꾸라지”든 뻔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레 혹은 짜증내듯이 혹은 억울하다는 투로 내뱉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분노를 넘어 절망하였다. 대국민 사과를 세 번씩이나 해놓고서도 약속한 검찰조사를 거부한 대통령, 탄핵요구안이 통과되어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정초에 느닷없이 “번개”로 기자들을 불러모아 변명을 늘어놓은 박근혜씨, 현직에 있으면서도 국회와 검찰의 출석요구를 회피하는 청와대 직원들, 출석요구서와 증인소환장을 받지 않기 위해 피해다니다 현상금이 걸린 전직 고위공직자... 그래도 한 때는 나랏 일을 한다며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닌 자들아닌가? 어찌하여 그 언동이 뒷골목 양아치 잡범보다도 못하단 말인가. 걸핏하면 애국과 법치와 민생을 들먹였던 자들이 이제는 자기만 살겠다고 나라를 내팽개치고 법을 우롱하고 백성을 외면하고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기는 커녕 사전에 문서를 파기하고 기계를 망가뜨리고 서로 입을 맞추어 죄를 모면할 궁리만 하고 있다.  

궁지에 몰려 키친 캐비넷(Kitchen Cabinet)이었다고 둘러댔지만 “이그저” 닭대가리들이 제멋대로 홰를 치다가 나라의 솥단지를 뒤엎은 치킨 캐비넷(Chicken Cabinet)이었을 뿐이다. 추잡스런 미꾸라지들의 눈에는 지금 피눈물을 흘리는 백성은 보이지 않는다. 한 올의 참회慙悔나 한 푼어치의 염치廉恥도 찾아볼 수 없다. 바야흐로 진실과 양심과 정의가 사라져 버린 시대다. 법과 이성과 상식을 상실한 시대다. 헌법과 국기國紀를 순전히 잃어버린 시대다. 민주주의 영혼을 “순실純失”한 시대다.  


박근혜가 한국 민주화의 정화?

요즘 대통령선거 후보들이 정권을 바꾸고 정치를 바꾸겠다고 앞다투어 말한다. 박근혜씨야말로 정권을 바꾸었고 정치를 바꾸었고 시대를 바꾸었다. 10년 민주정권에서 "무답정권"으로 바꾸어 진정한 “잃어버린 10년”을 구현했다. 어린 백성 수백이 수장되었는데도 대화가 없고 응답이 없으니 답없는 정부가 아니던가. 대궐 밖은 무정부 상태인 정부... 또한 공화정에서 절대왕정으로 바꾸었다. 청와대 말대로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민주시대에서 유신독재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법꾸라지”로 상징되는 온갖 구악을 21세기에 재현해 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동지 섣달 추위를 견디면서 타오른 촛불이 정권과 정치와 시대를 원래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리고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박근혜씨의 힘을 과소 평가했다. “선거 여왕”이라 추켜 세우기도 했지만 “수첩 공주”라며 “액면가” 밑으로 깎아내렸다. 하지만 이번 엽기 추문이 드러나고서야 비로소 그의 진정한 힘을 알게 되었다. 먼저, 두 달만에 천만명이나 되는 시민들을 길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했다. 단군이래 최초일 뿐더러 이 지구상 어디에서도 처음이라고들 했다. 둘째, 바보 노무현이 그토록 이루고 싶었던 영호남 지역통합을 해냈다. 더이상 전라도와 경상도를 따지지 않게 되었다. 오죽하면 박씨의 (정치) 고향인 대구와 구미에서도 촛불이 타올랐겠는가? 또한 진보와 보수, 남녀노소, 각계 각층이 손잡고 한마음이 되는 진정한 사회통합을 일궈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온 국민이 헌법 조문을 꿰고, 이 나라의 주인이 바로 자신임을 뼈에 사무치게 깨닫고, 비폭력 저항의 힘과 감동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철벽같았던 박정희 신화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아버지가 20여 년 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을 딸이 4년 만에 헌 집 벽털듯이 허문 격이다. 말하자면 산 박근혜가 죽은 박정희를 제대로 잡은 셈이다. 역설이다. 그 누가 이런 위대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러니 박근혜씨는 전무후무한 한국 민주화의 영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서 싸운 민주 투사와 열사를 뛰어 넘었으니, 진정한 민주화의 정화淨火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매일 매시각 각종 방송에서 박근혜 최순실 추문을 앞다투어 보도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늦은 반성과 회한이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도 아니고 각양각색의 미꾸라지들이 공직사회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을까? 한 패거리가 되어 대기업 돈을 “삥뜯고” 다닌 것을 어찌 몰랐단 말인가? 이 정권이 탄생할 때 국가정보원과 국방부가 대통령선거에 개입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무력했다. 공직자 검증이 연이어 참사로 끝나고 세월호 침몰로 수백 명이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어도 미꾸라지같은 머슴들을 꾸짖지 못하고 내쫓지 못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이 나라의 주인이 우리 자신임을 애써 외면했다. 청와대만 바라보는 신문과 방송을 멀리하면서 무력하게 야당을 탓하고 정치를 탓하고 세월을 한탄했을 뿐이다. 박씨와 최씨의 추문은 어쩌면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이 순간 김대중씨가 2009년 6·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에서 간곡하게 당부하신 말씀이 가슴팍을 찌른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강원국 2014: 170-171).

우리는 주인으로서 나라물을 흐리는 머슴들에게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양심을 속이고 시선을 딴 곳에 돌리고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미꾸라지들의 농간을 방관했다. 주인이면서 주인노릇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남 탓만 했다. 악의 편에 선 부역자였다.  

“나치는 처음에 공산주의자를 잡아갔다.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다음엔 노동자를 잡아가고, 신부를 잡아갔다. 역시 나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나치가 나까지 잡아가려 할 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강원국 2014: 287). 

2002년 10월 어느 교회에서 노무현씨가 말했던 내용이다. 나치에 저항했던 마르틴 니뮐러라는 목사가 한 말이라고 소개했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그 목사와 같은 것은 아닐까? 주권자가 되어 그동안 게으르고 어리석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후회하는 까닭이다. 이문영(2001)은 다음과 같이 서문에 적었다.  

“노예는 죽음을 무릅쓰고서야 자유인이 되며, 종교는 교권의 탄압을 떨치고 일어나서야 참 종교의 자리를 얻으며, 국가는 국민의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진정 민주국가로 태어날 수 있다”(16쪽).


다시 민주주의다

촛불집회는 어쩌면 이런 회한으로 타올랐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주인값을 못하여 스스로를 망치는 못난 주권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일는지 모른다. 촛불처럼 꺼지지 않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자신과 이웃을 살피겠다는 맹서盟誓일는지 모른다. 이젠 멍석말이를 해서라도 엽기 변태 미꾸라지들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제대로 고쳐놓겠다는 비장한 각오覺悟다. 광장을 밝힌 천만 촛불이 아름답고 장엄한 까닭이다. 이제 다시 민주주의다.  

참고문헌


강원국. 2016. <대통령의 글쓰기>. 서울: 메디치미디어.


원문: 박헌명. 2017. 영혼을 "순실"한 시대의 미꾸라지들. <최소주의 행정학> 2(1): 1-2.


이번 브라질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대표단이 준결승전 진출을 놓고 온두라스 대표단과 경기를 치렀다. 경기 후반에 온두라스 선수가 공을 차넣어 0대 1로 한국 축구단이 패했다. 그런데 골을 넣은 후 온두라스 선수들이 걸핏하면 축구장에 드러눕거나 경기 진행을 방해하여 비난을 받았다. 전력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던 온두라스에게 이리 허망하게 진 것에 대해 선수와 관중이 분노했다. 이른바 “침대축구”(grassrolling)에 대책없이 당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중동 국가와 치른 경기에서도 “침대축구”는 위력을 발휘했다. 온두라스와 중동 국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에서도, 심지어는 월드컵 경기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티가 안나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영리한 전략으로서 좀 덜 미운 “침대축구”였을 뿐이다. 하지만 갈수록 “침대축구”는 적나라하고 구역질나는 양상이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양아치짓이다. 경기 자체가 아니라 오직 이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이다. 정말 무조건 이겨야만 맛인가? 

축구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2002년 미국 유타주 Salt Lake City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가 안톤 오노 선수의 “헐리웃 액션”으로 금메달을 놓쳤다(축구에서 헐리웃 액션은 골치거리가 된지 오래다). 2014년 러시아 Sochi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심판진의 엉터리 판정으로 은메달을 받았다. 우리나라 선수만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 12개로 단번에 4위에 올라섰지만, 군부독재정권의 무리수와 치부만 드러낸 성적이었다. 특히 남자 복싱 라이트 미들급에 나서서 Roy Jones Jr. 선수를 꺽고 금메달을 차지한 박시헌 선수는 그 참혹한 부끄러움의 정점에 있다. 한국인이 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3-2 판정승 아니었던가. 전두환 정권이 했던 것처럼 푸틴 정권도 체제유지를 위해 주최국의 이점을 악용하여 김연아 선수에게 횡포를 부린 것이다. 다 오십보 백보다.  

탁구공을 치면서 운동하는 의미를 생각하다 

언젠가 가까운 후배의 제안으로 탁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체육학과 선수출신에게 몇 달 동안 “레슨”이라는 특별교육을 받았다면서 설레발이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후배의 실력은 과연 “레슨”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후배의 기술은 한마디로 이기는 요령 몇가지일 뿐이었다. 특히 상대방이 치지 못할 만한 곳에 공을 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대방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배는 그 요령조차 숙달하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그 얄팍한 꼼수에 넘어가지 않는 상대를 골랐다. 경기랄 것도 없는 “탁구공 치기”가 끝난 다음에 나는 왜 기본기부터 다지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상대방을 골탕먹이는 것 말고 상대방과 탁구를 즐기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물었다. 상대방이 받아 치기 좋게 공을 보내면 기본기도 단련이 되고 서로 주고 받기가 길게 이어지면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상대방이 치기 좋은 곳에 공을 맘대로 보낼 수 있다면 언제든 치기 어려운 곳에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 후배는 그런 사람됨과 운동의 기본을 교육받지 못하고, 그저 이기는 기법만 전수받은 셈이다. 이른바 “레슨”이라는 엉터리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그러면서 나는 운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운동을 하는지를 자문한다. 운동이라는 것은 묘하다. 하루하루 자신을 단련하여 기량이 늘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그런 희열이 있다. 우아한 발차기가 제대로 들어가고, 찬 공이 자로 잰 듯이 날아가 꽂히고, 곡예하듯 던진 공이 그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런 감흥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재주를 보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흥분하게 된다. 이심전심으로 감정이입이 된다. 텔레비젼에서 중계되는 격투기나 축구나 농구를 보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하물며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에 직접 나서서 생생한 긴장과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일임에랴... 땀을 흠뻑 흘린 후에 상대방과 동지의식을 느끼거나 더 친밀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정으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얘기다. 어쩌면 선조들도 활쏘기를 하면서 이런 느낌을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쏘기는 자기 자신과 겨룬다는 점에서 선수들이 몸으로 부대끼는 격투기나 축구와는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해서인지 어느 경기에서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거나 기량이 아닌 꼼수로 일관하는 선수들을 나는 남달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우리 선수들이 “침대축구”를 한대도 마찬가지다. 또한 판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심판진과 욕설을 쏟아내고, 술병을 던지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난동꾼도 곱게 보아주지 못한다. 모두 경기를 망친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승리감을 누릴 권리가 없는 자들이고 아예 경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경기를 즐길 만한 깜냥이 안되는 뒷골목 잡배들이다.  

축구 경기의 주인인 관중이다

“침대축구”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축구일까? 과연 잔디밭에 드러눕는 선수들이 문제일까? 심판이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객석에서 축구를 구경하는 관중들 탓일까? 그러면서 나는 답답하기만 한 정치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축구경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먼저 양쪽 선수들이 있고,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진이 있다. 방송으로 경기를 중계하고 해설하는 사람이 있다. 끝으로 경기를 보러 오거나 텔레비젼을 통해 시청하는 관중이 있다. 축구는 관중과 시청자들이 내는 돈(광고 포함)으로 운영이 된다. 양쪽 선수들이 기량을 닦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겨뤄야 한다. 심판진도 규칙을 합리적으로 적용하여 불편부당하게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해설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관중(시청자)은 그런 멋진 경기를 즐기면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결국 축구경기의 수요자는 관중이며, 축구경기는 그들을 위해 열려야 한다. 

그런데 선수들이 기량을 닦지 않고 잔재주로 일관하면 어떻게 될까? “동네축구”와 “뻥축구”와 “헛발질 축구”를 누가 즐기겠는가? 기량과 경험은 있으나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남용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침대축구”든 “헐리웃 액션”이든 선수들이 요령만 피운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심판의 눈을 속여 상대방을 걷어 차고, 팔꿈치로 찍고, 시비를 걸어 화나게 하고, 손으로 공을 잡고, 반칙을 당했다며 뒹구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실력이 부족한데도 안간힘을 쓰면서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은 그나마 애처로움이라도 있다. 재능을 다 가진 자가 쓸데없이 공을 돌려 시간을 끌거나 거짓으로 상대방과 심판진을 속이는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다. 하물며 돈을 받고 경기 결과를 조작하는 일임에랴...  

또 심판진이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 불공정하고 부당한 판정을 내리면 경기는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심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런 범위를 벗어난 판정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침대축구”는 심판의 의지로도 쉽게 줄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다고 드러누웠으니 바로 밖으로 내보내거나 경고를 주고, 추가시간에는 “침대축구”로 지연된 시간의 세 배를 더 주는 관행을 도입한다. 한편 쓸데없이 양쪽 선수를 자극하고, 물리력으로 경기를 방해하는 관중도 구역질나게 한다. 한번 잘 했다고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가 헛발질 한번에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순진함은 그나마 양반이다. 술에 취해 물건을 던지거나 경기장에 들어가는 부류는 경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두의 안전을 해치는 악당들이다.   

이 모두가 스포츠 자본주의나 상업화된 프로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이 꾸준히 기량을 연마하도록 격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경쟁을 통해 이기는 경기를 강요한다. 기량에 따라 선수의 품값이 매겨지고 승부에 따라 몸값이 정해지면서 놀이의 규칙(rules of a game)이 달라진 것이다. 축구가 관중을 위한 경기가 아니라 돈을 위한 경기가 된 것이다. 멋진 경기가 아니라 이기는 경기가 환영받는다. 관중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승리를 해서 돈을 챙기는 것이 “장땡”인 세상이 된 것이다. 각종 스포츠 관련 복권도 이런 돈잔치를 부추긴다. 갈수록 선수도, 심판도, 관중도 운동경기가 주는 참된 맛을 잊고 그저 돈을 바라볼 뿐이다.  

정치 경기의 주인은 백성이다

이런 면에서 축구 경기는 민주주의 정치 경기와 비슷하다. 경기장은 의회나 국회다. 양쪽 선수들은 말하자면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다. 백성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갈고 닦아 의회에서 경쟁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민다. 심판진은 대통령과 행정부에 해당한다. 당파성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따져 일을 추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정치를 논평하며 여론을 이끈다. 축구에서 관중이 있다면 정치에서는 백성이 있다. 그들이 대표들을 뽑아 의회로 보내고 세금을 내어 선수와 심판진을 먹여살린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정치 경기는 당연히 백성들을 위해서 치러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경험하는 정치 경기는 교과서에 적힌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일단 선수들의 기량이 편차가 큰 가운데 수준 미달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배경과 이해관계가 백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세금을 떼어먹고, 군복무를 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비율이 현저하게 높다. 전문 지식은 커녕 일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들도 적지 않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해서, 나름의 의견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리있게 말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 허구헌날 “뻥축구”에 “헛발질”이니 백성들이 볼 때도 그저 딱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개중에 말이나 좀 하는 부류들은 잔머리를 굴려 상대를 속이고 골려먹는 술수를 부린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 누명을 씌우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국면을 뒤바꾸고 “침대축구”(필리밥스터)로 의사진행을 방해한다. 기량이 준수하고 멀쩡한 의원도 이런 판에서는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당선이 급하고 공천이 포도청이니 센  놈 편에 줄을 대고 건달들 마냥 패거리질을 한다. 멋진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마음껏 펼칠 수가 없다.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합리성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머리끄댕이 잡고 아귀다툼을 하는 삼류 “동네축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정부 관료들은 정파를 떠나서 합리성에 따라 행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가 여당편을 들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경기는 망가지게 된다.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하든, 여당이 대통령의 등에 올라타 채찍질을 하든 정치 경기가 벌어지는 의회는 개판이 된다. 여당이 다수가 되면 행정부를 등에 업고 야당이 뭐라 하든 일당 독재를 강행할 것이고, 야당이 다수가 되면 여당과 행정부는 구석에 몰려 발버둥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멀쩡한 행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독재정권은 의원들을 줄세워 통제할 뿐만 아니라 관료들을 줄세워 “기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강요한다. 여당이 아무리 반칙을 해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고 야당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노란딱지와 빨간 딱지를 아끼지 않는다. 언론과 시민사회까지 겁박하고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심판의 판정에 의문을 제기하면 유언비어 유포나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또한 여당과 야당이 졸전을 거듭하면서 정부관료제를 견제하지 못하면 관료의 독재로 이어진다. 입법부는 입법부의 논리가 있고 행정부는 행정부 나름의 논리가 있는 법인데, 그 구분이 없이 승자가 독식을 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정치가 백성들의 위한 경기인 만큼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도 백성이다. 하지만 백성들도 정치 경기에 제 몫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아는 것이 없으면서 정치라는 말만 나오면 욕부터 내뱉으면서 미주알 고주알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면서 경기가 잘 안풀리면 터무니없이 선수를 힐난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다. 선수가 그렇게 쉬운 골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감독이 용병술이 없다며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으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은 공을 몰고가는 것도 골대 안으로 차넣는 것도 형편없으면서 선수값을 하라며 다그친다. 토론회든 공청회든 눈꼽만한 관심도 두지 않고 투표장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저주한다. 주인이, 주권자가 바로 자신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어리석음이자 누워 침뱉기다. 

또한 예산은 먼저 빼먹는 놈이 임자라며 공직자들에게 이런 저런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고,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임에 가서 정치인에게 밥과 술을 얻어 먹고 선물을 받는 것은 차라리 순진하다. 돈을 받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외치는 구호가 무슨 뜻인지는 관심사항이 아니다. 드물게는 용팔이 사건처럼 정치인의 하수인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깡통을 던지거나 운동장으로 내려가 난동을 부리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정치를 왜곡하고 망가뜨리는 자들이다. 나쁜 정치가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혐오를 가중시키고 정치판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경제라는 경기도 비슷하다. 경제라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자영업자다. 심판은 정부 (입법, 사법, 행정부) 혹은 시민사회이다. 경제를 지켜보면서 즐기는 관중은 소비자들이다. 하지만 “갑질”로 표현되는 대기업의 횡포는 경제라는 운동장이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프로 선수와 초등학교 선수들의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에서는 “침대축구”든 “헛리웃 엑션”이든 대기업의 전유물이다. 약육강식 논리 그대로다. 이런 불공정한 경기를 막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바다에 플랑크톤이 없으면 멸치도 없고 조기도 없는 것처럼(2008: 675), 중소기업이 없으면 대기업이 위태롭다. 그래서 정부와 대기업은 공생을 외치지만 그때 뿐이고 “갑질”은 쭉 계속된다.  

주인인 관중과 백성이 하기 나름이다

축구나 정치에서 추잡한 반칙, “침대축구,” “헐리웃 엑션”을 뿌리뽑으려면 관중과 백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경기의 주인이고 정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관중과 백성의 수준이 경기와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영악한 머슴을 제대로 부리려면 주인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행동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인값을 해야 한다. 

관중이 경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하듯이, 백성도 정치 결과에 상심하지 말고 정치 과정에 관심을 갖아야 한다. 공부하고 생각한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반칙왕을 퇴출시켜야 한다. 신중하게 토론을 지켜보고, 공청회에 참석하고, 투표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머슴들이 주인을 얕보지 않는다. 또한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후원금도 내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주인의 행동이 필요하다.



원문: 박헌명. 2016. "침대축구"를 보면서 정치 경기를 생각하다. <최소주의 행정학> 1(8): 3-4쪽

얼마 전에 딸아이의 여권을 신청하러 구청에 갔다가 어이없는 일을 경험했다. 사진과 여권신청서를 담당직원에게 건네주고 기다렸다. 직원이 신청서를 살펴보더니 영문 이름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에서 공문이 왔다면서 영문 이름에 빈칸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황당하다가 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직원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 어찌 그런 공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하여 정부가 영문 이름을 쓰는 것까지 간섭을 한단 말인가? 백성이 ‘누려야 할 최소한’을 빼앗긴 노여움이 고인다. 미처 분을 삭이기도 전에 거친 숨이 나온다. 정말 그런 지시가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름을 붙이라 말라 한다는 것인가, 이름자를 붙여도 발음하는데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지시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등을 토해냈다. 외국에 방문할 기회가 많은 외교부 직원들이 나라마다 이름을 쓰는 관습이 다른 것을 잘 알텐데 어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탄식했다. 혼자말로 구시렁거리는 독백이었지만, 사실상 담당 직원에 대한 항의이자 외교부에 대한 시위에 가까왔다.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담당직원은 다시 한번 외무부의 지시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럼 나같이 영문 이름을 떼어 쓴 사람은 어찌하느냐고 물으니, 이미 여권을 만든 사람은 현재 쓰고 있는 영문 이름 그대로 사용하면 된댄다. 새로 여권을 신청한 사람들만 붙여쓰게 한댄다. 당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이상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자신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위에서 결정한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래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가 항의를 계속하자 담당직원은 법률용어를 들먹이며 이의신청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말한다. 또 내용을 확인하고 절차를 알려달라고 당부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반응하자 담당직원은 조금은 당황한 표정이다. 직원이 그리 얘기하면 시민들 대개는 툴툴거리면서도 알았다면서 대충 넘어갔으리라… 직원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처럼 여기 저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무언가를 찾는다. 몇분이 지나도 문서를 찾지 못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아무렇치도 않은 듯 내게 한마디를 한다.

“그러시면 오늘은 (특별히) 영문 이름에 빈칸을 넣게 해주겠습니다.”

나는 이 말에 충격을 받는다. 외무부의 공문 얘기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담당직원의 말은 차라리 참담하기까지 하다. 딸아이의 영문이름을 고치지 않고 신청서를 접수시키기는 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노여움을 삭이지 못했다. 이게 멀쩡한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소리란 말인가… 외교부가 영문 이름을 띄어 쓰는 것을 금지한 것이 맞다면 일단 그 지시대로 시행하고 시민의 불만을 전달하여 잘못된 결정을 수정하는 것이 정상이다. 영문 이름에 빈 칸을 넣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애초부터 외교부의 공문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마치 특혜를 주듯 빈칸을 넣게 해주겠다고 말해서도 안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이 대목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할 때 민주당 조순형씨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노무현씨가 사과하면 소추안을 취소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발의하겠다고 했다. 한심한 말법이다. 소추안을 발의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면 사과를 하든 말든 발의해야 한다. 국회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과하면 되는 사소한 사안이라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사과’나 ‘탄핵’이 아니라 그냥 노무현이 싫은 것이다. 결국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개인의 화풀이를 한 셈이다.

만일 영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이라면 그 취지 그대로를 설명하고 시민들의 선택을 도와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마치 자신이 외교부의 지시를 무시할 권능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특별히 혜택을 베푸는 것저럼 말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다. 이른바 ‘완장찬’ 자들의 기고만장이다. 시민 위에서 군림하면서 자신의 지시대로 시민들을 이리저리 줄세우고 훈계하는 맛에 취한 자들의 전형이다. 법과 절차를 핑계대지만, 사실은 법과 절차를 제멋대로 적용하여 이득(권력욕)을 취하려 할 뿐이다. 침묵하는 다수에게 엄하고 귀찮게 따지는 사람들에게 약하게 굴어 소위 ‘떼법’을 자초한다. 떼법은 백성의 난동이 아니라 정부의 편파와 부당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 ‘완장질’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공복인 공직자가 섬겨야 하는 왕(주권자)임을 망각한 정신줄이다.

외교부의 여권업무 웹집(http://www.passport.go.kr/)에는 “영문이름은 붙여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함” “종전 여권의 띄어 쓴 영문이름은 계속 쓰는 것을 허용함”이라고 되어 있다. 예상대로 구청 담당직원은 외교부 지시를 빙자하여 영문 이름을 붙여써야 한다는 식으로 시민을 호도한 것이다. 본래 취지를 살려 백성 편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가감하여 백성의 기본권(이름을 결정하는 자유)을 제한한 것이다. 누군가 직원의 말에 따라 영문 이름을 붙여서 여권을 만든 다음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항의를 한다면 (일단 이름을 정하면 수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직원은 틀림없이 자신은 이름을 붙이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 것이다.

그런데 일선 공무원의 ‘완장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정부가 무슨 권능으로 이름 쓰는 것을 “허용”을 하고 말고 한단 말인가. 이런 표현이 과연 민주공화국에서 가당하기나 한가? 왜 백성들이 이름쓰는 것을 정부에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류가 아니라면 갑돌이든 을순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옷입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자는 것도, 숨쉬는 것도 정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인권에 관한 문제를 감히 정부에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는 것인가? 실제 내용과는 별개로 그 발상이 식민지를 경영하는 총독의 정신줄이다. 식민지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짐승처럼 노예처럼 찍어눌러 다뤄야 하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외교부의 권고는 물론 이해할 만한 구석도 있다. 이름을 영문으로 띄어 쓰면 미국에서 첫째 이름자를 그들의 관습대로 가운데 이름 (middle name)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돌림자가 영미권의 가운데 이름과는 그 의미와 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발상에 동의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줄은 그 자체로 해괴하고 천박하다.

한번 이리 물어보자. 미국에서 영문이름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으면 그만인가? 미국에서만 괜찮으면 중국에서든 독일에서든 브라질에서든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여권의 목적이 미국에 방문하는 것인가? 각 나라마다 이름을 쓰는 방식이 다르고 관습이 다른 것은 상식인데, 대한민국 백성이 미국식에 맞춰야 하는 소이연은 무엇인가? 명색이 대한민국 외교부가 나서서 자국 백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면서까지 미국식을 권고하고, ‘완장질’을 통해 사실상 강요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외교와 군사면에서 미국의 식민지임을 자인하고 자주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도대체 영문 이름을 붙여 써서 이 나라 백성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 두 자를 영문으로 떼어 쓰면 미국의 어느 기관은 두 자 모두를 첫째 이름(first name)으로 제대로 불러주기도 하지만, 다른 기관은 가운데 이름과 첫째 이름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지만 가운데 이름으로 인식한다 해도 약간의 혼동이 있을 뿐 실제 본인 확인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사실상 여권번호가 기본 인식정보이며, 성명과 생년월일은 참고사항이다. 비행기표에 이름자가 붙여나오지만 여권의 영문 이름을 떼어 쓸지, 이음표(-)를 쓸지와는 관계가 없다. 이름의 철자가 틀리지 않는 한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영문 이름을 붙여쓴다 해도 백성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다. 단지 가운데 이름으로 오인할 가능성과 혼동을 줄일 수 있다는 미국의 실익이 있을 뿐이다. 왜 대한민국 외교부는 백성의 실익이 아닌 미국의 실익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모든 나라가 미국식 이름 법과 관습을 따른다면 외교부의 권고는 나름대로 합리성과 실익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미국식은 모든 나라에서 인정하는 세계 표준이 아니다. 다 그 나라 나름의 방법과 관습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성이 한 자, 이름이 두 자가 대부분이지만, 성이 두 자인 사람도 있고 이름이 외자거나 석 자인 사람도 있다. 외국에서 성이 두 단어로 되어 있는 경우나 이름이 세 단어 이상인 경우도 적잖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아예 성명이 단어 하나로 되어 있다. 성과 이름을 구분하지 않아 성이 이름이고 이름이 성이다. 더 황당하게는 성명이 몇 단어로 되어 있는데, 역시 성과 이름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첫째 이름, 가운데 이름, 마지막 이름(family name)을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죄다 엉터리 이름이라며 힐난하며 근본없는 상놈이라며 돌팔매라도 던지려는가?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지 않는 독선주의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야박하게 굴고, 센놈에게는 간 쓸개를 다 내어주고 비굴하게 목숨줄을 구걸하는 사대주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행인을 데려와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크면 망치로 행인을 자르고, 작으면 행인을 늘려뜨리는 패악질을 했다. 그는 테세우스(Theseus)에게 잡혀서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침대에 맞춰져서 죽었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공직자들이 바로 프로크루스테스일는지 모른다. 영문 이름에 관한 지침을 결정한 자도, ‘완장질’로 시민을 호도한 일선 공무원도 그 정신줄은 매한가지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의적인 잣대를 백성들에게 들이대고 길네 짧네 하면서 훈계질만 할 뿐이다.

이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 는 주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국학술진흥재단에 신고해야 한다. 학생들이 외국에서 공부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없으면서 힘들게 박사학위과정을 마친 것을 신고하라 강요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이다. 또 신고를 안하면 벌금을 물고 국내 대학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해놓았다(지원서류로 신고필증을 제출하도록 함).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신고를 할 수가 없다. 오직 마이크로소프트 고객만 외국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소린가? 또한 지도교수의 성함을 제대로 입력할 수가 없다. 지도교수가 모두 한국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함에 들어있는 모든 빈칸을 삭제하여 붙여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대학 이름이든 전공이든 수백 개는 됨직한  펼쳐내림 메뉴에서 골라야 한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대학이나 전공은 입력할 수가 없다. 세계수준의 정보기술기관에서 수년간 일한 사람이 하루종일 용을 써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외국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이라니…

시스템 분석과 설계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의 폭력일 뿐이다. 어찌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서비스를 제한하고, 외국박사학위를 관리한다면서 외국인 지도교수 성함을 제대로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대학이나 전공 이름도 그냥 적도록 할 일이지 어찌하여 완전하지도 않은 그 긴 목록을 헤매도록 한단 말인가(이런 무모한 시도를 했다는 자체가 놀랍다). 결국 신정아같은 사람은 가짜 학위를 신고하고 교수가 되었는데, 멀쩡하게 학위를 받은 사람은 신고를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정부가 외국학위수여자를 관리한답시고 이런 제도를 만들었으나 가짜 학위를 분별해낼 능력도 없는 형편이니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질’을 할 수밖에 없다. 그저 관료들 머리에 든 것(마이크로소프트, 한국이름, 자신이 아는 대학과 전공이름이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확신하고)을 잣대랍시고 들이대고 있으니 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쓰지 않는다고 팔다리를 핏줄이 터지도록 당겨대고, 목록에 없는 전공을 공부한다고 얼굴을 찍어내고 있다. 이런 엉망인 시스템을 사용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멋드러진 웹집에 수여국별, 학교별, 전공별 학위를 보여줘 봤자 가짜와 진짜를 모르는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민주공화국은 백성의 돈으로 운영되며 백성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흔히 공복이라고 부르는 공직자는 주인을 섬기는 머슴이지, 주인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아 ‘완장질’을 하면서 세경이나 챙기는 건달이 아니다. 게으르고 주인을 우습게 보는 머슴의 말로는 멍석말이다. 주인의 자존과 고유함을 내팽개치고 누구든 힘센 자에게 맹종하는 사대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법과 상식에 기대지 않고 약자에게 혹독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재량 남용도 경계되어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억지로 백성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심을 다해 공직자 스스로를 백성에게 맞추어야 한다. 다양한 백성이 살고 있듯이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최소주의, 비폭력, 민주주의가 아닐까?


원문: 박헌명. 2016. 공직자의 완장질과 Procrustes의 침대.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