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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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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월의 네째 금요일이다. 북한의 도발로 시작된 제 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피격 사건에서 생명을 잃은 장병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2016년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라고 한다. 윤석열씨는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 8회 기념식에 참석하여 희생자 55인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했다고 한다. 군대도 가지 않은 윤씨가 울먹였다고 한다. 박근혜씨의 대국민사과 눈물처럼 맥락이 없고 공감이 없다. 그냥 생뚱맞다는 생각이다.

대체 무엇을 잊지 않겠다는 것인가?

주요한 길목마다 “그대들의 이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혹은 “그대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등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수구세력들의 일사불란함이다. 야당이 내건 현수막은 찾아볼 수 없다. 기념일 자체가 정쟁의 산물이니 당연한 귀결이다. 안보위기에 처한 박근혜 정권이 내놓은 궁여지책아니던가. 애국을 빙자한 반공멸공이고, 안보를 빙자한 수구정권 수호아닌가. 누가 이런 쉬어터진 빨갱이 굿판에 장단을 맞출 것인가?

현수막에 적힌 문구를 보면서 혀를 찬다.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겠다가 아니라 처절한 패배를 잊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1999년 6월 7일부터 15일까지 도발한 북한군을 물리쳤던 제 1연평해전이 아닌, 피해가 많았던 제 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을 기억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적은 55용사를 보면 그 의도가 읽힌다. 제 2연평해전(6명),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47명),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피격(2명)이다. 천안함 사건을 끌어들여 매년 안보장사를 해먹겠다는 것이다. “북한군에게 이렇게 당했어요. 많이 아파요. 전 공산당이 싫어요. 때찌해주세요.” 딱 “이승복 어린이” 수준이다. 그런데 저항할 수 없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훈련 중인 초계함이 어뢰에 맞았다는 점에서(정부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더 한심하고 어이없는 일이다.

이순신은 잊고 원균을 기억하라?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군인의 책무다. 그래야 국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다. 서해수호를 했다는 용사들은 실제로 서해를 지키지 못했다. 국지전이었길래 망정이지 전면전이었으면 나라를 빼앗겼을 것이다. 한마디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패잔병들이다. 이들이 임무수행중 희생된 것 자체는 존중받아 마땅하며, 자초지종을 잘 따져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뼈아픈 교훈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한 영웅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일은 그저 황당할 뿐이다. 당장 제 1연평해전에서 승리한 장병들은 그럼 뭐가 되는가? 한산도대첩(1592년)과 명량해전(1597년)에서 승리한 이순신과 조선해군의 헌신과 희생은 당연한 것이고, 1597년 칠천량에서 140여척을 잃고 2만여명을 몰살시킨 원균의 참패는 나라를 지킨 헌신과 희생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1951년 5월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서 중국군에게 허무하게 궤멸당한 유재흥의 3군단을 국토수호의 상징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장병들은 호국영웅으로 길이길이 기억해야 하는가? 허면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와 그 때 희생되었던 장병들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수구세력의 기회주의와 안보팔이

공을 세우면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고 죄를 지으면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 상식이다. 서해수호의 날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패장인 최원일 함장이 최근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방송에 나섰다. 어뢰에 맞았든 암초에 부딪혔든 부하장병 수십 명을 수장시킨 지휘관의 책임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최대 치욕으로 기록된 현리전투의 패장 유재흥은 참형을 받기는 커녕 박정희 정권에서 국방부장관까지 해먹었다. 한국군 7사단과 2군단을 궤멸시켜 아군을 위기에 빠뜨리고, 3군단을 해체시켜 군작전권을 미군에 넘기게 한 장본인이 2004년에는 노무현씨의 군작전권 환수를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현충원이 웬말이냐.

수구세력의 정체성과 정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념도 뭐도 아닌 힘과 돈을 따라다니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유씨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과 맞섰고 미군정 시절 제주 4.3항쟁을 짓밟았음에도 승승장구했다. 미군을 등에 업고 친일세력을 앞세워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사출신인 윤석열씨가 검사들과 지인들을 요직에 앉힌 것도 마찬가지다. 최씨도 수구정권에서 북한군에게 피격을 받았기 때문에 안보장사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국민을 편갈라 줄세우는 빨갱이 타령에 적합한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신상필벌에 엄격한 정권이었다면, 만일 일본자위대에게 쥐어터졌다면 유씨든 최씨든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승리를 꿈꾸지 못하는 만년 패자의 정신줄

수구세력은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에게 포악한 모습이다. 스스로는 무엇을 할 수 없다거나 경쟁자를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과 무기력증이다. 일본이 강제로 쳐들어와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약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고초를 당했다는 식이다. 자학이다. 허니 일본에게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본의 수출규제조치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죄하기는 커녕 불매운동과 국산화라니... 하물며 미국의 요구에 감히 고개 빳빳이 들고 토를 다는 일임에랴.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강자의 그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일본 앞에 허리를 접고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목숨줄처럼 잡고 있는 까닭이다. 간이든 쓸개든 다 내어주고서라도 자신들이 호의호식하면 그만이다. 악착같이 약자를 쥐어짜서 조공으로 바친다. 국민들이 성노예로 끌려가거나 방사능에 오염된 수산물을 먹는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하여 299명이 익사당하고, 2022년 이태원에서 159명이 압사당했지만 무슨 대수인가? 강자가 원하는 안보장사에 들러리가 되어줄 패전 55용사만이 귀할 뿐이다. 감히 승리를 꿈꾸지도 못하는 만년 패자의 정신줄이다.

 

인용: 박헌명. 2023. 서해를 수호하지 못한 서해수호용사. <최소주의행정학> 8(3): 1.

어쩌다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한 네팔을 다녀왔다. 수도인 카트만두는 히말라야 산맥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다. 공해물질이 빠져나가지 못하는지 대기오염이 심하다. 북위 27도에 걸쳐 있고 해수면에서 1,300미터나 높은 곳에 앉아 있다. 2월 초인데 낮기온이 20도를 오르내린다.

과거 궁전이었다는 더르바르 광장을 둘러보았다. 사람과 개와 비둘기가 자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신과 왕의 위엄은 아기자기한 조형물에서나 찾아봐야 했다. 한때는 강성한 왕국을 건설했지만, 왕실은 스스로 신망을 잃고 2008년 쫓겨났다. 면적이나 인구가 서울의 1할인 카트만두인데, 도로며 다리며 건물이며 변변한 것이 거의 없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가로수가 하늘거린다.

각지고 구멍뚫린 전봇대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나브로 전봇대에 시선이 간다. 길거리에 박혀있는 많은 전봇대들. 아무리 찾아봐도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기울어져 있다. 위태롭다.

너무나 많은 전기줄이 전봇대를 휘감고 있다. 분배기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유선TV와 인터넷 선이 전기줄과 뒤섞여 있는 듯하다. 몇 개인지 세지도 못할 검은 줄들이 전봇대에 너저분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 야생 원숭이 무리들이 전선을 타고 재주를 부린다. 어떤 놈은 해먹에 누운 것처럼 전기줄 다발 위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다.

이러니 전봇대가 배겨날 재간이 없다. 앞뒤 좌우로 기울고 있다. 가로등이라도 서 있으면 전선이 슬쩍 손을 얹고 있다. 한마디로 전기줄이 전봇대에 걸려있는 것인지 전봇대가 전기줄에 매달려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기간 시설이 열악하여 전기줄을 수용하지 못하니 전봇대가 짊어져야 할 무게가 가중되는 듯하다.

콘크리트 전봇대를 자세히 살펴보니 원형 기둥이 아니었다. 단면이 직사각형이었다. 전봇대 절반은 사각형 구멍이 크게 뚫려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바람의 저항을 피하려 했던 모양이다. 각진 전봇대는 얼핏 봐도 튼튼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가린다. 원형 전봇대를 만드는 기술이 부족해서였을까? 콘크리트 표면은 쉽게 삭는지 부스러지고 있다. 쇠파이프 전봇대는 녹슬어 있고, 얇은 꼭대기는 금방이라도 휘어질 듯하다.

카트만두의 도로와 대중교통

카트만두의 차도는 좁고 굽어 있고 연결성이 부족하다. 옛날 사람이 오가고, 짐승들이 몰려 다니고, 마차가 지나던 길이 연상된다. 사람과 차와 오토바이가 뒤섞여 있으니 잠시만 방심해도 사고나기 십상이다. 차도와 보도는 안전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폭이 1미터가 안되는 인도가 허다하다. 진흙 위에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앉아 있으니 중앙선과 횡단보도를 알아보기 어렵다. 신호등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별 소용이 없다. 경찰관이 나와서 쉴새없이 손짓을 하고 있다. 눈치가 없으면 길건너는 일도 쉽지 않다. 10분이면 족할 거리를 한시간을 간다. 걷는 것이 더 빠를 것같다.

멀쩡하게 생긴 버스를 찾아보기 힘들다. 작고 오래된 버스들이 제각각인 색깔을 입고 다닌다. 공터에 마련된 터미널에서 버스들이 아무데서나 승객을 싣고 있다. 지정된 승차구역이 없으니 행선지를 어찌 구분하는지 궁금하다. 제대로 된 정류장을 찾기가 힘들다. 대중교통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어나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 많은 오토바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다.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평온하다. 불평보다는 웃음이다. 두려움이나 긴장보다는 여유로움이다. 젊은이와 아이들의 생동감이 이슬처럼 빛난다. 하지만 정부가 공공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역대 왕들은 시민들의 고단함을 덜어주는데 골몰하거나 후손들을 위한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한 것같지 않다. 여민동락을 하지 않은 것이다. 화려한 궁궐을 짓고 정교한 탑을 쌓기 전에 도시의 큰 그림을 그리고 기반시설을 확충했어야 했다.

시민들의 의식과 요구는 저 멀리에 가 있는데, 왕과 정부는 그 기대에 못미쳤다. 그 괴리를 채우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마침 지나다가 공사중인 고층 빌딩을 보았다. 첨단 유리벽으로 짓고 있는 철강건물은 굵은 통대나무를 끈으로(철사가 아닌) 묶은 안전구조물이 둘러싸고 있다. 어처구니 없는 이 부조화를 어찌해야 하나. 늘어나는 전기줄을 감당하지 못하고 위태롭게 서있는, 모나고 구멍뚫린 전봇대를 묘하게 닮았다.

윤석열의 전봇대는 안녕한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반세기 동안 폐허나 다름없는 터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몸부림쳤다. 이제 세계 어디에 내놔도 모범이 될 만한 기반구조를 만들어 냈고 문재인 정부에서 선진국 반열에 우뚝 섰다.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내고 있다. 하지만 낙후된 정치와 언론 지형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왕의 무관심과 게으름과 패악질이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도 갖추지 못한 정권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다. 국민의 열망을 떠받들어야 할 “정치 전봇대”가 중심을 잃고 기운다. 대책없이 친미탈중국을 외치다 균형을 잃고 탈탈 털리고 있다. 둥글고 강한 원형 기둥이 아니라 단면이 길쭉한 직사각형 말뚝을 박았다.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이리 저리 부딫히고 긁힌다. 비바람에 시달린다. 머리카락 다발처럼 얽히고 섥힌 당면과제를 모나고 삭은 작대기로 풀어낼 수 없다.

“정치 차도”는 진흙탕이고 안개 속이다. 세계는 전쟁같은 아귀다툼으로 우릴 옥죄오는데, 한가하게 편을 가르고 “애들 풀어서” 정적을 때려잡고 있다. 약속을 뒤집어도 변명은 커녕 적반하장이다. 이젠 누가 참인지 누가 옳은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꼭 해야 할 것도,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도 없는 무도한 세상이다. 중앙선과 차선이 없다. 국민이 다니는 인도는 좁아지고 정치 차도에 밀려나기 일쑤다. 바퀴가 빠지고 창문이 깨진 “정치 버스”는 국민의 요구를 실어나르지 못한다. 난방비와 전기료가 폭등해도 전정권 탓만 한다. 못난 불량 버스다.

“정치 신호등”은 있는 곳이 드물고, 있어봤자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제복입은 자가 나타나 제멋대로 호루라기를 불고 손짓을 할 뿐이다. 법과 양심良心은 밥과 앙심怏心으로 뒤바뀐지 오래다. 학생의 인턴활동은 반란죄인듯 압수수색으로 뒤지고 성인의 학력과 경력 위조는 눈감는다. 600만원 개인장학금은 뇌물이고, 50억원은 그냥 퇴직금일 뿐이다. "정치 신호등"은 권력자와 판검사 앞에서 언제나 파란불을 켠다. 그들이 타고 내리는 곳이 바로 정류장이다. 도로에 서 있는 표지판은 그들의 달리는 대로 속도와 방향을 자동으로 바꾼다. 과속이든 역주행이든 주차위반이든 그들에겐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이것이 모칠고 천박한 전봇대 정권의 상식이고 공정이고 정의다.

이런 상황에서 진리는 각자도생이다. 승용차든 트럭이든 오토바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치껏 먼저 내빼는 것이 최고다. 강호에 도가 사라지니 못하는 것이 없다.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에 너무 지친 나머지 깜빡 정신줄을 놓았던 것이다. 참지 못하고 너무 과격하게 나대다 망한 것이다. 묵묵히 잘 버텨주던 원형 전봇대를 흔들어 뽑아내고 근본없이 모나고 구멍이 숭숭 뚫린 말뚝을 박아넣었으니, 이 사달이다. 

 

인용: 박헌명. 2023. 네팔의 전봇대와 윤석열의 전봇대 <최소주의행정학> 8(2): 2.

지난해 말 “바이든이 쪽팔려”로 한바탕 곤욕困辱을 치른 윤석열씨가 “도어스테핑”을 전격 중단했다. 번번이 설화를 촉발했지만 나름 많이 즐겼을 놀이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쏟아내도 기자들이 토달지 않고 경전외듯 받아 적는 모습에서 느끼는 뿌듯함이랄까? 그 맛을 잊고 당장 MBC의 반란을 진압해야 하는 심정은 참으로 쓰리고 아렸을 것이다. “봤지? MBC 때문에 도어스테핑은 없는 거야? 알아서들 해.”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설친다더니 이제는 한동훈씨가 대신 도어스테핑의 짜릿한 맛을 즐기는 듯하다.

Doorstepping이 무엇인가?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도어스테핑은 주제어처럼 널리 사용되고 있다. 왜 지도자가 국민에게 굳이 생소한 외국어로 말하는가? 대체 도어스테핑이 무엇이란 말인가?

Doorstep은 명사로 출입문에 오르는 계단이나 문에 가까운 공간을 말한다. 동사로서 언론인이 취재 대상자의 집에 무작정 찾아가서 대상자가 말하고 싶지 않더라도 말을 거는(취재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자들이 대상자의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대상자가 나타나면 들이닥쳐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미는 짓이다. 당사자로서는 집에까지 쳐들어왔으니 예상치 못한 기습에 놀랄 수밖에 없다. 외통수처럼 피할 데도 없으니 대단히 난감하고 불쾌한 일이다. 말하자면 “깜짝 문간취재”라 할 수 있다. 조국씨와 그 식구들에 대한 기레기들의 막가파식 “뻗치기”에 꼭 맞는 표현이다.

Dogstep과 "Dogstepping"

Doorstep과 비슷하게 dogstep라는 말이 있다. 강아지가 높은 곳에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계단이다. 물론 강아지가 걷고 뛰는 모습(춤)을 묘사하는 말일 수도 있다. 동사형을 만든다면 “dogstepping”은 아마도 강아지(기레기)를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길들이는 행위 쯤으로 정의될 것이다. 지정한 장단에 맞춰 무조건반사로 춤추고 구르도록 훈련시킨다. 감히 주인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을 물어뜯지 못하도록 세뇌시키는 일이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도그스테핑이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doorstepping과는 전혀 다르다. 첫째, 장소가 윤씨의 집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집무실이다. 언제든 피할 수 있다. 둘째, 문앞 계단이나 문간이 아니라 미리 문답할 준비가 된 복도에서 일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세째, 따라서 윤씨가 깜짝 놀랄 일도 없고, 기자들이 하염없이 “뻗치기”를 할 일도 없다. 서로 출퇴근시간만 챙기면 된다. 네째, 기자들에게 질문을 미리 받는다고 하는데, 형식상 즉흥문답일 뿐 전혀 긴장감이 없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면 너무 박한가? 물론 마련된 답안을 윤씨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좌충우돌 돌발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다섯째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으로 주체와 객체가 뒤바뀌어 있다. 기자들이 윤씨를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윤씨가 어떤 말을 흘리면 기자들은 그저 주워먹을 뿐이다.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독이 묻었는지 아닌지는 관심 밖이다. 본인도 뜻도 모르고 기억도 못할 말 아닌가. 여섯째, 그러므로 윤씨가 도어스테핑의 범위와 형식과 절차 모두를 결정한다. 기자들은 선택지가 없다. 윤씨의 심사가 뒤틀리면 버럭질을 하거나 해당 기자를 콕 찍어내면 그만이다. 그의 “Yuji 민주주의” 언론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상적인 doorstepping이라면 지도자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객체가 되어야 한다. 항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가 국민 앞에 선 마음으로 명확하고 간결하게 답해야 한다. 일정한 장소를 정하거나 횟수와 시간을 조정할 수는 있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질문거리를 미리 받거나 불편한 질문이라며 화내지는 말아야 한다. 보도내용이 좀 틀리고 맘에 안든다고 고발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공직자)은 어떤 경우에도 신(국민)이 금지한 선악과(언론의 양심)를 따먹지 말아야 한다(1991: 89-91).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도그스테핑”(똥강아지 길들이기)에 가깝다. 주체인 윤씨가 정해진 시간에 나와 종을 치고 먹잇감을 뿌리면 객체인 기레기들이 꾸역꾸역 몰려와 정신없이 모이를 쫀다. 일단 허겁지겁 목구녕으로 넘기고 보는 게걸스러움은 똥인지 된장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럴 짬도 없다. 미운털이 박힌 오리들은 주둥이를 사정없이 걷어차고 순종할 때까지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중단되었으나 “도그스테핑”은 멈출 줄을 모른다.

윤씨의 도어스테핑은 “본인만 말할 자유”를 누리고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용두질인 셈이다. 애초부터 소통은 없었다. 게다가 내용이 없거나 틀리거나 비뚤어져 있다. 짧고 좁고 얇고 가볍다. 게으르고 무성의하다. 태도도 불량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는 커녕 만냥 빚을 덤으로 얹고 있다. 건성건성 멋대로가 화근이다.

못난이 열등생의 허장성세

윤씨와 그 측근들의 말은 종종 귀를 거슬리게 한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황당한 논리가 사람을 좌절시킨다. 동의없는 사진과 위패가 이차가해라니... 뜬금없이 영어를 섞는 말법은 차라리 고문이다. 대체 누구에게 말을 하는가? 영어를 모르면 국민도 아닌가? 조미료가 범벅된 음식을 씹는 불쾌함이다. 절로 구역질이 난다.

“문간취재”가 아니라 꼭 “도어스테핑”이어야 하나? “혼잡관리”가 아닌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고 하면 뭐가 있어 보이나? “가븐먼트 인게이지먼트”나 “레규레이션”이라고 “어그레시브하게” 내지르면 좀 유식하게 들리나? Government engagement가 정부규제면 civic engagement는 시민규제가 되는가? 유권자를 욕보이는 짓이다. 대개 삼류 못난이들이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체를 하려다 사고를 친다. 엉겁결에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꿰찬 열등생들의 허세랄까. 뭘 좀 아는 자는 요란스럽게 주접떨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벼는 여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다.

언젠가 가게에 꼬마를 데려온 어느 강남아줌마의 귀티나는 훈계가 생각난다. “디스(this)는 대인저(danger)야. 그니까 돈타치(don’t touch)에용. 오-케이(Okay)?” 도어스테핑이라... 딱 그 수준이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도어스테핑인가? 도그스테핑인가? <최소주의행정학> 8(2): 1.

MBC의<뉴스외전>(2022. 11. 10)에 출연한 유시민씨는 윤석열 정부의 6개월을 열역학 제2법칙으로 풀어냈다. 윤정권의 무지와 무능과 무책임으로 사회 전반에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했고, 10.29 참사는 그 귀결의 하나라는 것이다. 윤석열, 한덕수, 이상민 등 책임자들은 구차하게 자리에 눌러앉아 있고, 현장에서 참사를 수습한 경찰관과 소방관들은 악몽을 꾸듯 취조당하고 있다. 뇌가 작동하지 않아 손발이 움직이지 못한 것인데, 이제와서 사태를 직감한 뇌가 손발을 잘라내겠다며 성내고 있다. 경우없는 짓이다. 정적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칼춤을 추고 있는 정권이다. 유작가는 무지성이고 개념없는 정권이라고 비난했다.

박정희의 10.26과 윤석열의 10.29

소정은 1971년 서울대 부속병원 인턴의 집단농성을 해결하기 위해 보사부 주사가 아닌 문교장관과 국무총리가 나서는 것을 보고 박정희씨의 국가비상사태를 예감했다(1991: 339-340). 마땅히 주사가 할 일을 장관과 국무총리까지 연달아 나서야 하는 정권의 난맥상이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불법탈법을 가리지 않고 별별 짓을 다 저지른다. 사회의 합리성과 효율성은 곤두박질치고 상황은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다. 상식이 무너지고 민심이 이반離叛해도 권력욕은 기어코 극단적인 강경책으로 이어진다. 소정의 불길한 예감은 72년 10월 유신이었다. 헌정파괴 쿠데타 7년 만에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술먹다 심복 김재규의 총에 맞고 죽었다.

10.29 참사 직후 영정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에 매일 방문해서 무표정으로 참배하는 윤씨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참사 희생자가 아니라 구태여 사고 사망자라 부르고,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는 것을 패륜이라 매도하고, 참사를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며 설레발이다. 내외국인 158명이 희생되었는데도 구청장, 서울시장, 경찰청, 행정안전부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말로는 추모와 위로를 말하지만 실제는 슬픔과 분노를 차단하느라 용쓰고 있다. 뭘 모르면서 엉뚱한 일만 저지르고, 사고 수습은 고사하고 황당한 언행으로 짜증과 분노만 돋구고 있다. 대통령조차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모르면서 막 질러대고, 외눈박이 하수인들은 염불외듯 복창하고 있다. G20 만찬장에 늦게 나타나 멀뚱멀뚱 앉아 있다가 김명신씨에게 등떠밀려 나서는 윤씨의 난감함은 이 정권의 초상이다. 뭐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윤씨의 표정이다. 한마디로 답이 없다. 스스로도 실망하고 답답하겠지만 백성들은 환장할 지경이다.

반성없이 폭주하는 윤석열차

G20에 참석하면서 윤씨는 MBC기자를 전용기에 태우지 않았다. 악의적인 기사와 방송으로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했고 국익을 훼손했댄다. 탑승 거부는 헌법수호라는 대통령의 책무를 다하려는 조치라고 했다. 그토록 자랑했던 문간취재도 못하게 했다. “이 새끼들”과 “바이든”이 들리는 동영상이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뭐가 가짜 뉴스라는 것인지... 보도 하나가 한미를 이간질시키고 헌법을 허물어뜨렸다는 것인지... 한미동맹이 곧 국익이고, 윤씨가 헌법(국가)이란 말인지... 국세청은 MBC가 수백억원을 탈루했다며 청구서를 들이밀고, 여당은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불을 지폈다. 대답없는 윤씨의 뒤통수에 대고 질문하는 기자와 말다툼한 비서관, 기자가 버르장머리없이 슬리퍼를 신었다며 시비를 거는 여당 인사. 그냥 졸렬하고 유치찬란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는 없고 좀스럽고 지저분한 말폭력만 난무한다.

결국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정신줄이다. 자신은 언제나 정의롭고 공정한 존재이다. 어떠한 오류도 없는 진리 그 자체다. 폼나게 헛기침이나 하고 에험 하면 언론이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다 알아서 움직여 줘야 한다. 예기치 못하게 상황이 꼬이면 버럭 화를 내면 그만이다. 책임은 정적과 약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자 유족과 야당에게 해코지를 당한 장관 고교 후배를 위로한다. 김씨의 빈곤포르노에 조명이 있었네 없었네로 야당 의원을 겁박한다.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도 불순한 주동자들의 난동일 뿐이다. 손해배상과 업무개시명령으로 슬쩍 찔러본다.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자유와 특권을 부여받는 것처럼 파죽지세로 밀어붙인다. 일단 검사들을 풀어서 민의를 찍어누르다가 여의치 않으면 필시 눈을 뒤집어 까고 마구잡이로 망나니짓을 벌일 자들이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가 장검을 휘두르고, 전후좌우를 보지 않고 자동차를 몰고 폭주한다. 언제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上의 무지와 무능이 망가뜨린 관료제

10.29 참사는 관료제가 망가졌음을 보여준다. 전문성을 가진 관료가 역할에 따라 합당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법과 절차에 따라 문서로 공직을 수행하는 관료제가 아니다. 무지와 무능과 무책임으로 무장한 上이 똑같은 부류를 요직에 앉혔으니 관료제의 합리성은 숨쉴 곳이 없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上의 자의성과 확증편향에 관료제는 경직된다. 계서제(hierarchy)는 허울뿐이고 제왕의 폭정은 무질서도를 급격히 상승시킨다. 권한침해權限侵害와 몰상식은 일상이 된다. 모두 上의 입과 심기만 살피면서 처벌을 피할 궁리만 한다. 시위대를 막기도 힘겨우니 백성을 살필 이유도 여력도 없다. 영혼없는 복지부동이 최선이다. 소정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 나라의 행정조직체 내에서의 행동의 계속성을 단속시키는 유일의 이유는 권한침해에 있다. ... 합리주의 현상이 행정에서 발생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의 행정에 대한 극도의 간섭증, 엽관주의,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의 하급기관이나 하급자에 대한 권력남용,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서] 업무담당기관이 아닌 막료로서의 예산기관의 횡포 등에서 볼 수 있다”(1980: 6).

윤김씨를 등에 업은 하수인들은 동네방네 들쑤시면서 잇속을 챙기고 있다. 자유당 정권에서 완장차고 빨갱이를 때려잡던 기세다. 벌써 자기비대화가 상당히 진전되었다. 몫을 다투다 틀어져 차지철이 되고 김재규가 될 것이다. 자기분열이다. 10.29 참사는 시작이니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한남동일까, 청담동일까?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박정희의 10.26과 윤석열의 10.29. <최소주의행정학> 8(1): 1.

지난 달 29일 할로윈을 즐기기 위해 이태원에 방문했던 156명이 좁은 골목에서 뒤엉키면서 압사당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 사흘 동안 대통령 윤석열, 국무총리 한덕수, 행정안전부장관 이상민, 경찰청장 윤희근, 서울경찰청장 김광호, 서울시장 오세훈, 용산구청장 박희영 등의 발언을 들으면서 탄식했다. 또다시 무지하고 무책임한 자들이 앞길이 구만리같은 청춘들을 죽였다.

일반적으로 남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것은 점잖치 못하다. 유치한 말장난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들의 망언과 희언을 들으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참으로 비열하고, 한심하고, 이상하고, 희한하고, 철딱서니없는 자들이다. 참사 동영상을 보지도 못할만큼 참담한 마음인데, 처음엔 어이가 없다가 혀를 차다가 이제는 화가 치민다.

이상민과 윤희근의 주책바가지

이상민씨는 30일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던 것은 아니고 ...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에는 “경찰의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진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 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경찰을 지휘하고 통제하기 위해 경찰국이 필요하다던 자가 이제 와서 장관은 책임이 없다니 정신분열증인가? 조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입닥치고 있으라고? 그 발언 자체가 음흉한 정치질이다. 참사는 물론 그 조사까지도 따져봐야 한다.

주요 공직자와 경찰 지휘부는 주최자가 없어서, 관련 규정이 없어서 참사를 막지 못했다고 강변했다. 대통령실은 31일 “경찰은 집회나 시위와 같은 상황이 아니면 일반 국민을 통제할 법적, 제도적 권한은 없다”고 했다. 그럼 성탄절에는 왜 경찰이 설치고 다녔나? 예수나 산타클로스라도 강림했나? 윤희근씨도 1일 “주최자 없는 자발적 다중 운집 상황에 대한 경찰 또는 지자체 등의 권한·역할·책임에 대해 많은 의견과 논란이 있다”고 말했다. 다들 검사, 판사, 경찰 해먹기 위해 헌법·행정법을 마르고 닳도록 공부했던 자들 아닌가. 경찰警察 자체가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보호하고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인데 대체 뭔 소리를 하는가. 주최자가 없어서라고? 한 터럭의 염치도 없는 주책바가지다.

서울시장과 용산구청장의 궤변

오세훈씨는 정책탐방을 한답시고 21일부터 10일 일정으로 유럽을 돌고 있었다. 30일 급히 귀국한 오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현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얼버무렸다. 전자우편도 휴대폰도 끊고 휴가를 즐겼나? 실시간 확인은 커녕 사후 보고도 못받았단 말인가? 오씨는 1일 나타나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며 울먹이고 눈물까지 훔쳤다. 시장이 시민에게 사과하는데 무슨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가? 면피용 생쇼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사죄한다면서도 수사를 통해 책임소재가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조사해 봤자 자신의 형사책임은 없다는 소리다.

31일 조문에 나선 용산구청장 박희영씨의 망발은 더 주옥같다. “저희는 전략적인 준비를 다 해왔고요.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습니다 ... 이건 축제가 아닙니다. 축제면 행사의 내용이나 주최 측이 있는데 ... 그냥 할로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되겠죠.” 이게 과연 공직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공직이 무엇인지 자기 책임이 무엇인지 전혀 감(개념)이 없는 자 아닌가. 뒷배인 지역구 의원 권영세씨는 몸사리고 침묵중이다.

윤석열과 한덕수의 횡설수설

1일 등판한 윤석열씨는 무식의 나래를 펼쳤다. “드론 등 첨단 디지털 역량을 적극 활용해서 크라우드 매니지먼트 기술을 개발하고, 필요한 제도적 보완도 해야 ... 이번 대형 참사가 발생한 이면도로뿐만 아니라 군중이 운집하는 경기장, 공연장 등에 대해서도 확실한 인파 관리 안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지난 9월 태풍이 지나간 뒤 재난 대응 매뉴얼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한 것은 기억이나 하는지. 뭔 일만 터지만 되든 말든 습관적으로 하는 소리다.

같은 날 한덕수씨도 거들었다. 외신기자들에게 “이태원 참사는 이른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는 인파 사고의 관리 통제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줬다”며 “아직 인파 관리 또는 군중 관리라고 하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개발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했다. 누가 써줬는지 모르겠지만 윤씨와 한씨 모두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굳이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를 반복하는 모습은 궁색함 자체다. 참사를 말하는 자리에서 실실거리며 어설픈 영어로 농담을 던지는 여유라니... 총리는 영어로 말하고 통역은 한국어로 말하는 황당함이여... 이를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참사 책임자들은 하나같이 제도 탓을 하고 기술 탓을 했다. 법이 없고, 규정이 없고, 매뉴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휴가철이나 연말연시 해돋이에는 매년 참사가 반복되었어야 했다. 아니면 경찰과 소방서가 권한도 없으면서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소리다. 결론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댄 거짓말이다. 매뉴얼만 해도 너무 많아서 못찾을 지경이다. 드론이 없고, GIS가 없고, CCTV가 없어서 이런 참사가 난 것이 아니다. 당시 CCTV는 참사현장을 비추고 있었지만 담당자는 딴짓을 하고 있었다. 문정부에서 1조 5천억 예산을 쏟아부은 재난안전통신망은 제대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이런 데도 무슨 얼어죽을 기술 타령인가.

영정·위패 생략? 사고 사망자?

행정안전부는 30일 전국에 공문을 내려 ‘참사 희생자’가 아니라 ‘사고 사망자’라 하고, 분향소에 영정과 위패를 생략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날 인사혁신처는 근조글자가 없는 리본을 달라고 했다. 근조가 안보이게 뒤집어 달라는 소리다. 그런데 누가 이런 발상을 했는지 총리도 장관도 아는 이가 없다. 무당의 향기나 법사의 손길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초상집 가서 밤새도록 울어놓고 누가 죽었냐고 묻는 황당함이랄까. 얼마전 영국에서 조문을 못다해서 욕먹었던 한을 이제서야 풀어냈을 윤씨의 회한인가?

외신도 disaster라 하는데 왜 incident라 하는가? 그래서 누가 밀었나 조사하나? 사회재난대응정책관이라는 자는 2일 “이태원은 굉장히 유명한 관광지다 ... 그런 지명 뒤에 참사, 압사라는 용어를 쓰면 ... 굉장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켜” 그 지역 자영업자가 피해를 입는다고 했다. 그러니 ‘사고’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랜다. 업자에게는 이리도 애달프면서 황망하게 죽어간 청춘들에게는 왜 그리도 박할까? 북한 해안에서 변을 당한 공무원은 전직 대통령마저 겨냥할 만큼 국가안보에 중요한데, 서울 한복판에서 깔려죽은 156명은 공무원 한명 값도 못한단 말인가? 결국은 죽은 자도, 책임자도, 참사 그 자체도 잊으라는 소리다.

할로윈을 비웃는 '핼러윈'들

제도나 기술 문제가 아니다. 정치·행정 이론 문제가 아니다. 그냥 사람의 본성과 기본에 관한 문제다. 주요 책임자들의 마음에 백성과 주권자는 없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이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나 ‘도어스테핑’은 정권의 무지와 무능과 불통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있어 보이나? 이 정권 자체가 참사다. 멀쩡한 할로윈(Halloween)을 두고 근본없는 ‘핼러윈’이라니... Go to hell이다.

 

인용: 박헌명. 2022. 할로윈을 비웃는 '핼러윈'들의 주책바가지. <최소주의행정학> 7(12): 2.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지난 7월과 8월 제 23회 전국학생만화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카툰부문에서 <윤석열차>가 금상(경기도지사상)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를 후원했던 문화체육관광부는 정치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선정했다며 돌연 진흥원을 문책했다. 100억원 후원금이 달린 후원명칭 승인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카툰 자체가 주로 정치를 풍자하는 그림인데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문학과 예술과 담을 쌓은 수구세력

국정감사에서 야당은 정부가 표현할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따졌다. 최순실·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떠올린다고 했다. 여당은 영국 만평가의 작품을 표절했다며 <윤석열차>를 깎아내렸다. 전직 검사였던 어느 의원은 “한눈에 봐도 표절”이라고 단언했다. 나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탄식했다. 첫째, <윤석열차>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 시비를 건 자들이 학생 작가를 노리개 삼아 자신들을 위한 정치질을 하고 있다. 설령 작품에 부족한 점이 있다 해도 나잇값 못하는 자들의 난동이다. 둘째, 문체부가 후원금을 미끼삼아 문화예술에 대해 시시콜콜 걸고 넘어지는 것이 수상하다. 최순실 사태를 겪고서도 이런 짓을 저지를 관료가 있을까? 철딱서니없는 어른들의 일탈로 어린 작가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을 두려움과 무게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보수와는 달리 수구세력은 문학과 예술과 담을 쌓은 듯하다. 어쩌면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주체할 수 없는 권력과 돈으로 무엇이든 마음껏 누린 업보다. 배고픈 고통을 모르고, 배우고 싶은 갈망도 갖지 못하고, 핍박받는 설움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간절함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속박이 있을 때에만 자유가 빛나는 법이다. 피눈물을 떨구는 좌절과 희열과 감동이 없으니 그들에게 문학과 예술은 기껏해야 마약과 같은 허무일 뿐이다. 작가가 담아낸 뜻과 감성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낄 수 없는 불감증 환자들이다. 분별력이 없다. 노무현씨를 막말로 뭉개버린 <환생경제>가 딱 그들의 수준이다. 맥락없는 욕지거리를 남발하면서 서로 희희락락했던 그들이다. 정적을 비난한답시고 그린 것들은 대부분 보기에도 섬뜩하다. 괴수, 늑대, 총구, 서슬퍼런 칼날, 잘려나간 목, 시뻘건 피... 유치하다. <달의 몰락>을 문재인씨의 하야로 믿고 목이 터져라 불러대는 늙어빠진 천둥벌거숭이들이다.

<윤석열차>는 좋은 창작품이다

하도 말들이 많아서 <윤석열차>을 보았다. 작가의 의도는 폭주하는 기차에 명료하게 드러났다. 훌륭한 비유다. 토마스와 전혀 다른 열차의 얼굴(무슨 짓을 해도 미운 윤씨), 김명신씨를 닮은 여성(수많은 의혹에도 해맑게 나대는 김씨), 칼을 든 검사병정(검찰공화국), 열차가 무너뜨린 건물(여가부도 경제도 외교도 국방도 망하는), 그리고 열차의 폭주에 놀라 달아나는 식구들(하루하루 삶이 망가지는 국민). 만일 열차 앞에 이재명, 김정은, 시진핑, 푸틴을 그려넣었다면 수구세력들은 눈물나게 감동했을 것이다. 이 만평은 권력자를 실랄하게 비판하지만 추접하거나 흉측하지 않다. 그 나이 또래의 깨어있는 눈으로 본 것이다. 정상인이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만평이다.

영국 작가의 그림은 전혀 다른 동기와 의도를 보여준다. 열차를 둘러싼 인물들과 열차가 가는 방향은 Brexit와 선거를 둘러싼 구역질나는 정치질을 말한다. 반면 <윤석열차>는 검찰공화국의 폭주로 망가지는 민생과 권력자의 역겨운 안하무인을 고발하고 있다. “윤석열차” 문구 옆에 널부러진 구두 한 짝은 작가의 동기를 추측케 한다. <윤석열차>를 보고 화를 낸다면 나만 존귀한 존재라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자다. 자신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나머지는 받들어 모실 의무만 있다는 식이다. 표절을 운운한다면 어떡하든 권력자를 위무하려는 자다. 잇속에 눈이 멀어 양심을 외면한 자다. 그림이든 노래든 연극이든 예술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하다. 해당 작가가 밝혔듯이 <윤석열차>는 표절도 아니고 저작권 침해도 아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창작물이다.

왜 표현할 자유를 말하는가?

John Stuart Mill은 표현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세가지로 요약했다(Levmore & Nussbaum, 2010). 첫째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틀릴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과 우열을 견줌으로써 완전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윤석열차>는 이에 부합한다. 왜 정권에 대한 비판을 그리 고깝게 생각하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저주하는 만평은 괜찮고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을 비난하면 안되는가? 반성하지 않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수구세력의 본성이다. 문체부가 무리수를 감행한 까닭이다. 둘째, 개인의 자율성(automony)을 존중하는 것이다. 각자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윤석열차>를 그린 고등학생도 인간 고유의 자율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공익의 해치는 것도 음흉한 푸닥거리도 아닌 한 윤김씨가 싫어하든 화를 내든 상관없다. 세째, 민주주의에 필요한 공개 토론을 보장하는 것이다(democratic deliberation). 수구세력이 쌍심지를 켜고 <윤석열차>를 시비걸자 많은 시민들이 그 만평을 보고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숨은그림찾기하듯 자세하게 살펴보았으니 작가의 뜻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수구세력의 난동으로 화룡점정畫龍點睛이 된 셈이다. 허탈한 역설이다.

이쯤되면 윤씨가 툭하면 내뱉는 자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나는 자유라 읽고 너는 속박이라 쓴다. 나는 누려야 할 권리고 너는 피할 수 없는 의무다. 나는 힘을 가졌고 너는 갖지 못했다. 나는 이겼고 너는 졌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언제나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진리·정의·공정 그 자체이다. 윤씨의 자유는 그의 만능키다. 

참고문헌

  • Levmore, S.X., & Nussbaum, M.C.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2. <윤석열차>의 역설과 표현할 자유. <최소주의행정학> 7(11): 1.

지난 달 21일 뉴욕에서 열린 제 7차 Global Fund Replenishment Conference에 초대받은 윤석열씨가 어이없는 실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거의 모든 언론사가 해당 영상을 보도했고 그 파장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야당은 동맹국인 미국 대통령과 의회를 욕보였다고 비난했다. 연이은 외교참사라 했고,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사적 발언, 날리면, 말리믄, 동맹훼손?

대통령실은 보도가 나가고 서너시간 뒤에 “사적 발언”이라며, 지나가면서 한 말을 누가 어떻게 녹음했냐며 의구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자막 내용에는 토달지 않았다. 보도 후 15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난 홍보수석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며,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들어봐 달라고 호소했다. 배현진씨는 한술 더 떠 음성분석 결과라며 “날리면”이 아니라 “말리믄”이라고 했다. 윤씨는 뒤늦게 기자들에게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한다는 것은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했다. 왜곡 보도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윤씨가 “이 xx”라는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하자, 여당 의원들은 비속어도 욕설도 없었다며 MBC에 떼거리로 몰려갔다. 언론인 출신들이 더 설쳐댔다. 민주당과 MBC가 짜고 자막을 조작하여 가짜뉴스를 퍼뜨렸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대통령실은 MBC에 협박편지같은 것을 공문이랍시고 보내 거칠게 보도 경위를 따져물었다.

"바이든"도 "이 새끼"도 "쪽팔려"도 들린다

과연 이렇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할 일이었을까? 녹음된 음성이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아도 앞뒤 영상을 보면 누구나 자초지종을 알 만하다.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깨끗하게 사죄하면 될 일이었다. 경기침체에 먹고 사는 일도 바쁜 국민들이 무슨 듣기평가하는 것도 아니고 이따위 허접한 소리를 몇번씩 들어야 한단 말인가? 하도 말이 많아서 동영상 몇가지를 들어보니 분명해졌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안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떻하나”

이렇게 들리는데 어쩌란 말인가? 윤씨가 아니라고 하면 다르게 들려야 하나? 허구헌날 자유를 들먹이던데 바이든으로 들리는 내 귀의 자유는 없는가? 위 문장에서 바이든을 “날리면”이나 "말리믄”으로 바꾸면 말이 되나? 민의를 대변한다는 입법부를 “이 xx”로 말하면 괜찮은가? 조작이고 왜곡이라면 원래 발언한 것을 제시하고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발화자인 윤씨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직까지도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쪽팔린 건 윤석열씨 자신이다

나는 위와 같이 들었지만, 인간적으로는 윤씨를 이해해줄 수 있다. 영상을 보면 그럴 만한 정황을 알 수 있다. 그토록 한미혈맹을 강조했던 윤씨였지만 정작 바이든은 기계적으로 악수만 하고 지나쳤다. 박진씨를 앞세워 다시 바이든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겨우 48초 눈도장을 찍고 내려왔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 허탈하고 머쓱한 표정에 다 씌어 있다. 차마 분풀이는 못하겠고 일행들 앞에서 허세부리며 체면치레를 한다는 것이 좀 과했던 것이다.

“일을 뭐 이따위로 하냐, 이 새꺄. 이게 어떤 자리인데, 감히 니들이 날 물먹여? 겁대가리도 없이. 하여튼 기본이 안됐어, 기본이. 가오가 있지, 아우 쪽팔려”

아마도 윤씨는 위와 같이 분을 삭이고 싶었을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존심이 무참히 무너진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모멸감이다. 쪽팔린 것은 바이든이 아니라 바로 자신임을 윤씨는 알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모냥빠지는 것은 참지 못하는 낭만자객아닌가. 철석같이 믿었던 큰형님께 푸대접을 받고 나온 두목이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들 앞에서 “이런 빌어먹을” “등신같은 새끼” 등을 토해내는 영화속 장면이다. 그러니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본들 무슨 소용인가. 외신에서 “이 xx”를 idiots이나 bastards나 f***ers로 썼지만 윤씨에게 차이가 없다. 어차피 입에 달고 살았을테니 의식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국회라 했든 의회라 했든 윤씨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굳이 바이든을 욕보일 이유도 의도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자책할 뿐이다.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지도 않고 사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대통령의 참담한 마음을 몰라주고 눈치없이 일을 키운 MBC가 미울 뿐이다.

윤씨의 자기기만과 하수인들의 바보짓

하지만 공직자로서 윤씨는 최악의 상황을 자초했다. (1) 깜냥이 되지 못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선에서 이겼으니 자질과 품위도 정상급이라는 논리일까? 현실부적응이다. 이런 것은 누구나 본능으로 안다. 하물며 외교로 잔뼈가 굵은 바이든임에랴. 문재인씨와 윤씨의 근본적인 차이다. (2)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부인하고 화살을 다른 데로 돌렸다. 열등감인지 자기기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영상을 확인했으면 바로 사과했어야 했다. 외교문제 아닌가. (3) 초짜가 열심히 배우고 연습하지 않았다. 아직도 검사질에 훈계질이다. 평생 자유에 한이 맺혔는지 매사에 성의가 없고 제멋대로다. (4) 사람을 볼 줄도 쓸 줄도 모른다. 식구들이 온갖 의혹으로 시끄럽다. “공항장애”로 “컨펌”하는 최선생을 떠올린다. 실력이 아닌 연줄로 사람을 대충 데려오다 보니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멀쩡한 참모를 썼으면 대통령 멱살을 잡아서라도 대국민 사과를 시켰을 것이고, 거수경례라도 똑바로 하도록 수천 번을 연습시켰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일본 총리를 만나면 안된다며 막아섰을 것이다. 윤씨나 하수인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윤씨의 말 한마디에 “바이든”도 없고 “이 xx”도 없다며 게거품을 문 바보들이다. “바이든”으로 들린다는 자들은 MBC에 속아 한미동맹을 깨고 나라를 팔아먹는 반미매국노가 될 판이다. 검찰은 이심전심인지 MBC를 찔러보고 이재명씨를 만지작거린다. 감사원이 움직인다.

악한 정권의 자기비대화 증상이다. 무능하고 게으르고 천박하다. 잘못을 반성하고 수정할 용기도 없다. 세평은 품격이고 뭐고 꼴보기도 싫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외가 대통령 놀이를 원없이 한 셈이다. 자신을 삼키고 나라를 삼키기 전에 그만두기를 바란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2. 윤석열의 쪽팔림과 하수인의 바보짓. <최소주의행정학> 7(10): 1.

 

수구세력들의 아귀다툼이 점입가경이다. 지난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한 자들의 모습이 아니다. 대선 전부터 불거졌던 윤석열씨와 이준석씨의 갈등은 결국 배은망덕과 토사구팽으로 치닫고 있다.

윤씨 측에서 이씨가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당윤리위원회에 제소하고, 급기야 검찰에 고발했다. 위원회는 지난 8월 이씨에게 당원권 정지 6개월 처분을 내렸고,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이 전국위원회의 추인을 얻어 주호영씨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에 이씨는 법원에 비상대책위원회 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기어코 주위원장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윤씨 측은 보란듯이 추가징계를 추진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정진석씨를 새로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어떡하든 이씨를 제거하려는 윤심(명심)의 집요함은 멈출 줄을 모른다. 벼랑끝에 몰린 이씨는 또박또박 가처분신청을 날리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러한 이전투구는 정치인들의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다. 정당한 선거를 거쳐 권력을 잡은 집단아닌가. 초짜 대통령을 등에 업고 설치는 노회老獪 정치꾼들과 30대 여당 대표의 진흙탕 싸움이라니... 참으로 낯설고 씁쓸한 광경이다.

본질은 구세력의 자기비대화다

문득 소정小丁이 종종 언급한 자기확대 혹은 자기비대화(self-aggrandizement)가 생각난다(1991: 119).1) 이는 포악한 통치자 스스로 권력을 한없이 취하는 것을 말하는데(1996: 401), 부끄러워하는 마음(義)을 전제로 한 자기희생의 반대개념이다(405쪽). 그 자리에 부여된 권력으로는 안심하지 못하고 불안감과 열등감으로 더 많은 힘을 탐한다. 타는 갈증에 바닷물을 마시는 격으로 더 많은 힘을 손에 쥘수록 더 많은 불신과 불만이 쌓인다. 수치심이 없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아랫사람을 쥐어 짜고 끝임없이 의심하면서 모든 권력을 빨아들인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몸집이 불고 뼈가 휘고 살이 썩어 문드러져도 멈추지 못한다. 자기비대화는 국정를 말아먹고 충복마저 잡아먹고 급기야 스스로를 집어삼켜야만 끝이 난다.

악한 정부에서 볼 수 있는 “과다한 체제 경직화”도 마찬가지다(1996: 383-390). 포악한 통지자는 우선 자기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못하게 하고, 정치 경쟁자를 죽이고, 국민 일반이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케 하고, 정치정당성 확보(전시효과)를 노리고 “큰 일”만 내세우고, 급기야 외국에게 내정간섭을 당하게 된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타국이 죄없고 선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 악한 정권을 정벌하거나 악한 통치자가 효율성이 낮은 구질서(과도한 통치비용, 정경유착, 부패 등)의 경직성을 높인다(383쪽). 구세력(친일파, 군사독재자, 이에 빌붙어 기생하는 기회주의자)에게 구질서는 생명줄이어서 나라를 망치는 줄 알면서도 마약처럼 어찌할 수 없다. 개혁은 공허한 메아리다. 효율은 떨어지고 비용은 상승하여 국제경쟁력은 곤두박질친다.

악한 정부의 과도한 체제경직화

소정은 <論語> 子罕편을 인용하여 과도한 체제경직화를 설명했다. 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공자는 네 가지를 완전히 끊어버렸는데, 사사로운 뜻이 없고, 기필코 하겠다는 마음이 없고, 집착하지 않았고, 이기심이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구세력들은 일을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하고, 순리를 따지지 않아 친일·쿠데타·독재를 가리지 않고 기필코 일을 해야 한다며 달려들고, 그 일이 잘못되었어도 반성이나 개선없이 계속 고집하고, 드디어는 사사로운 자기들의 잇속(私利)을 챙긴다(1996: 391). 체면이고 뭐고 없이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해관계에만 몰입되어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1991: 120-121). 公이 아닌 私, 義가 아닌 利에 함몰된 나머지 거리낌없이 남의 몫까지 빼앗아 게걸스럽게 삼키는 자다.

기득권을 틀어쥔 구세력은 과도하게 체제를 경직시킨다. 자신의 뿌리가 된 체제를 관리할 능력도 없고, 개혁할 용기도 의지도 없다. 이들의 생리는 다음과 같다(1996: 392-398). (1) 경험이 많고 덕이 있는 이를 소홀히 여기고 아부하는 하수인만 데리고 일한다. 소신있고 전문성이 높은 자가 아닌 연줄이 닿은 자들을 중용한다. 소위 “윤핵관” 뿐만 아니라 형님·동생으로 지낸 검사들과 허접한 “유지”들이 완장차고 설쳐댄다. (2) 잘못을 고치라는 완곡한 말을 듣기는 좋아해도 실제 고치지 않는다. 국민을 바라보겠다고 했지만 거울만 들여다 보는지 반성도 없고 오류를 바로잡지도 않는다. (3) 자기네끼리 잘못을 숨겨주는 집단이기주의를 갖는다. 하수인들은 일상이 된 통치자의 허물을 덮느라 사실과 진실을 외면한다. 윤씨와 “유지”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4) 웃사람은 아랫사람을 못살게 굴고 자기들끼리도 재산 분배를 공정히 하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틀어져 대통령, 당대표, 원로, 당원이 서로 머리끄댕이를 잡고 흔든다. (5) 한번 관직을 떠난 후에도 끈질기게 이익이 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총리실이든 장관실이든 찢어진 낙하산을 타서라도 용하게 자리를 꿰찬다. 10년 전 장관이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구세력끼리는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6) 이러니 수구 기득권을 해체시키는 데 백 년이 걸린다.2) 소정이 자기비대화와 과도한 체제경직화를 불치병이라 부른 까닭이다(390쪽).

권력자의 자질이 문제다

깜냥이 안되는 자가 뜻밖에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범해 벌어진 사달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안되니 시도 때도 없이 자유타령이고 사주점괘질이다. 품격은 커녕 막말과 삿대질을 남발한다. 스스로 부족한 줄도 비판을 감내할 줄도 모른다. 정직하지도 반성하지도 고치지도 않는다. 부창부수夫唱婦隨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니 답이 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안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열심이다. 벌써 권력비대화와 체제경직화 막바지다. 

끝주

1) 자기확대는 self-enlargement 혹은 enlargement of self로 직역할 수 있지만 소정의 취지와 거리가 있다. Bertrand Russell에 따르면 이런 표현은 자신의 지식한계를 뛰어 넘어 다른 차원에 이르는 자기초월(intellectual self-transgression)이다.

2) <論語> 子路편은 如有王者 必世而後仁(천명을 받은 성군이 있다 해도 반드시 30년이 지난 후에 인정仁政이 이루어진다)라고 적고 있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2. 수구세력의 자기비대화와 체제경직화. <최소주의행정학> 7(9): 1.

정치꾼들이 내뱉는 말이 종종 세상을 어지럽힌다. 모호함으로 자신을 방어하면서 힘으로 정적을 찍어누른다.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피아를 갈라서 이득을 보겠다는 셈법이다. 대선을 전후한 윤석열씨의 “자유민주주의”와 안철수씨의 “과학방역”이 그러하다.

Liberal vs Illiberal Democracy

“자유민주주의”는 영어로 liberal democracy라고 한다. 자유주의(liberalism)가 개인의 권리와 정부(왕의 부당한 간섭)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이념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형태를 말하는 민주주의와의 궁합은 어색하다.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주의(progressivism)와 안정을 지향하는 보수주의(conservatism)의 연속선에서도 벗어나 있다. 사실 윤씨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별 상관이 없다. 자신의 잇속을 차리려는 기회주의자들의 속임수다. 그들의 이념은 정치지향이 아니라 사람을 홀리는 주문呪文이다.

그냥 “민주주의”면 그만이다. 일반 대중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시하고 그 결과(법이든 약속이든)에 따라 정치를 구현하는 제도다. 그 이름이 어찌 되었든 간에 민주주의 원리가 현실에서 구현되는가를 따져야 한다. 영국은 불문법으로도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왕국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기수라지만 정작 헌법에는 자유주의나 민주주의가 적혀있지 않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라오스는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 하지만 선거를 치른다고 다 민주주의인가?

윤씨나 수구세력이 굳이 “자유”를 붙이는 까닭은 북한의 “인민”과 차별화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강박감이다. 자유와 인민의 뜻과는 상관이 없다. “자유”를 들먹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근혜, 윤석열을 보라. 뿔달린 공산당을 때려잡는다며 멸공을 부르짖는 “이승복”들 아닌가. 그들의 “자유”가 저질렀던 것은 내 편이 아닌 자들은 골라내어, 사실과 관계없이 법의 이름으로 좌익종북으로 몰고, 기득권자의 약육강식을 공고화한 것이다. 이렇게 공민권이 박탈된 “빨갱이”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적敵이다. 천민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수구세력이 말하는 자유요, 법치요, 정의요, 공정이다. 이름과는 정반대로 “자유가 문드러진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다. 대중을 현혹하여 권력을 취한 뒤 내 편만 핧아주는 “유지誘舐 민주주의”다.

윤씨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보다는(사고가 나니까), 원칙과 일반론을 말한다. 헌법과 법률을 들먹인다.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야 하고 불법 파업은 엄단해야 한댄다. 누가 토를 달겠는가? 그 자체로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는 지도자의 말이 아니다. 범법자를 때려잡는 검사의 말이다. 지도자는 본인의 결단이 어떻게 헌법과 법률에 부합하는지 설명하고 책임져야 한다. 윤씨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다. 비판을 틀어막고 벌거벗은 힘으로 자기 맘대로 해먹겠다는 소리다. 문재인 정권은 모든 것이 반헌법이고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친헌법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고? 그렇게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심(윤심이 아니라)을 거스르는 검찰·경찰·감사원·국회·법원은 그 자체로 위헌이고 국기문란이고 쿠데타다. “유지민주주의” 헌법질서와 상식이 이런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껍데기를 방패삼아 마음껏 독재를 하겠다는 소리다. “자유시장경제”는 “계획경제”와 차별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그저 “시장”이 있을 뿐이다. 경제 주체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시장은 이미 시장이 아니다. 반대로 어떠한 제한도 없는 100%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도 아니다. 윤씨의 행보는 “자유시장경제”가 가진 자들만 맘껏 누리고 나머지는 노예처럼 살라는 뜻임을 암시한다.

“과학방역” 자체가 나쁜 정치다

한편 안철수씨는 문재인 정권을 “정치방역”이라고 공격하고 “과학방역”을 강조했다. 하지만 무엇이 정치방역이고 과학방역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모호함을 최대로 활용한 선동이다. 방역 자체가 과학인데 정치방역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과학에 근거하지 않은 방역은 미신이나 마녀사냥이다. 안씨는 26일 과학방역은 방역정책을 관료나 정치인이 아닌 전문가가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질병관리청장에게 방역정책에 관한 전권을 줘야 “과학방역”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의학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방역에 헌신한 정은경씨는 관료이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현재 질병관리청장으로 임명된, 안씨의 후배이자 집사람의 동기인 백경란씨는 전문가인가? 같은 대학의 의학박사인데도 문씨가 임명하면 돌팔이고 본인(윤씨)이 밀어넣으면 전문가인가? 문대통령은 항상 정씨가 이끄는 질병관리청의 전문성과 헌신을 존중했다. 2021년 초에는 그녀에게 백신에 관한 전권을 쥐고 전 부처를 지휘하라고 지시했고, 부처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또 <Time>이 정씨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00인으로 선정하도록 추천했다. 정씨의 입이 사실상 대통령의 입이었다. 대체 안씨는 어느 별에서 살다 왔길래 아직까지도 코흘리개 잠꼬대인가?

관료제와 정책과정에 대한 안씨의 이해수준은 처참하다. 방역과 같은 국가 중대사를 공직자(관료)가 아닌 민간인 전문가가 최종 결정하는 나라가 있는가? 그럼 반도체정책은 삼성전자 직원이 결정하고 부동산 정책은 유명한 공인중개사가 해야 하나? 그들이 정책을 책임지는가? 정부관료제가 무슨 비서실이나 매품팔이인가? 전문가라 해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 마련인데, 왜 관료인 백씨가 전권을 행사해야 하나? 전문가의 의견이 모아졌다 해도 지도자는 당연히 다른 영역에 미치는 효과를 고려해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자리에 따라 보는 시야와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책임은 정치인과 관료들의 몫이다. 이것은 정상적인 정치과정이자 정책과정이다. 권한위임이 아니라 지도자의 자질과 관료제의 합리성에 관한 문제다. 문정권의 “정치방역”은 순리이자 과학이지만 안씨의 “과학방역”은 방역이 아니라 나쁜 정치이다. 결과는 뻔하다. 근본없는 윤·안씨의 말장난에 쓴웃음을 짓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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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박헌명. 2022. "자유민주주의"와 "유지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7(7): 1.

얼마 전 가깝게 지내는 분에게 안부를 물었다. 자연스레 코로나 얘기로 흘렀다. 그 분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정책을 비난했다. 부도덕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했다며 분개했다. 방역은 물론 부동산, 경제, 외교까지 최악이라고 했다. 윤석열씨가 잘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른다 해도 문씨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빨갱이에 대한 증오를 초월하는 저주다. 놀란 나는 그 적개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과격한 백성이 홧김에 벌인 난동

최고 학위까지 받은 분이 사실관계에 무감각한 것은 충격이었다.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이 미국에서 백만명이 넘고, 작년 말 한국은 인구 만명당 사망자 수에서 OECD 최저치였고, 일본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사망자 2.4만명)이 일본(3.1만명)은 물론 다른 나라보다 사망자가 더 많다고 강변했다. 애초부터 중국유입을 차단했어야 했고, 통계치가 왜곡되었고, 백신을 제때 확보하지 못했다는 등 수구세력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김정숙씨가 전용기를 타고 외국을 제멋대로 드나들었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재주로 그 나라의 출입국 기록을 삭제했다는 것인지... 김씨의 의상이나 장신구에 관한 의혹도 마찬가지다. 이미 반증된 사실이 있고 사비로 샀다는데도 막무가내다. 사실이 어찌되었든 간에 문정권은 나빴고 또 나빠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자존심이고 교리인 것같다. 종편과 수구 유투버들의 우민화가 승리한 것인가.

이른바 친문과 친이라는 자들도 사실과 이성과 상식과 담쌓은 극단주의자들이라는 면에서 수구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과연 문재인씨는 “친문”의 언행에 동의할까? 이재명씨는 “친이”의 난동을 응원할까? 그 우매한 난사질을 즐기는 자들은 따로 있을터. 이재명 지지자라는 어느 지인은 문정권에 대해 극한 혐오를 보였다. 한 달새 코로나로 부모를 모두 잃은 그는 무지한 방역 때문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비분강개했다. “대깨문” 때문에 망했고 그들과는 이성적인 대화가 안된댄다. 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이다. 그 “반문”은 문정부의 사실을 말하던 나를 “대깨문”으로 몰아붙였다. 부모를 잃은 황망함은 이해할 수 있으나 나랏일과 뒤섞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외국에서 배울만큼 배운 사람 아닌가. 누가 적인지 망각한 채 서로 물어뜯고 치고 박다가 홧김에 일을 그르친 것이다. 죽쒀서 개준 셈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에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코로나 사태가 길었던 탓일까? 피로해졌고 예민해졌고 날카로와졌다. 과격한 말전쟁에 신물이 났다. 필요한 것은 시시비비가 아니라 짜증을 해소해 줄 희생양이었다. 정신줄을 놓은 것이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선거에서 패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적들이 써준 주문 그대로를 염불처럼 외고 있다. 친문반문, 586책임, 반미종북, 내로남불, 오기정치, 팬덤정치... 586 전부를 생매장하고 “폭망”을 인정하고 석고대죄를 한다고 해서 수구세력이 주술을 멈추겠는가? 그들이 노무현과 김대중을 칭송하는 까닭은 죽어서 더이상 무섭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노무현을 잃은 전철을 반복하고 있다. 나혼자 살겠다며 문재인이든 이재명이든 동지들의 목을 하나하나 먹이로 내어줄 태세다.

과격한 정치꾼이 벌이는 난정

정치권의 과격함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선거기간 내내 말실수와 말폭력으로 일관했던 윤씨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디로 튈 지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언행은 과격 그 자체다. 집무실을 옮긴답시고 느닷없이 국방부를 내쫓았고, 정부부처는 연쇄반응으로 몇달째 술렁이고 애꿎은 시민들은 교통혼란을 겪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과 방사포는 계속되는데, 공언했던 선제타격·원점타격은 깜깜 무소식이다. 다주택소유자 중과세는 징벌이고, 자택 시위는 “법에 따른 국민의 권리”라 했고, 배우자의 기행에 대해 “대통령을 처음 해봐서”라고 답했다. 이 공직자의 직함이 딱할 지경이다.

어쩌다 법무장관이 된 자 역시 과격하다. 보복수사는 물론 그 재판까지 다 해먹겠다는 자신감이다. 거침없는 배우자의 행보는 줄리와 유지 딱 그 수준이다. “내가 말을 뒤집든 뭘 하든, 니덜이 어쩔건데?” 이들에게 못할 일은 없다. 철딱서니없는 왕을 쥐락펴락하는 좌의정과 대왕대비의 품격이다. “윤핵관”들의 입도 거칠어졌다. 연이은 선거 패배로 자중지란에 빠진 야당도 과격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수구언론은 이런 말전쟁을 부추기고 정치혐오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들이 원한 판이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소정 선생님은 “과격한 정부는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그 과격함이 극에 달하게 된다”라고 적었다(2008: 578). 곰곰히 생각해 보라. 누가 방송과 신문에서 날선 칼을 휘두르고 있는지. 여야를 막론하고 그들이 바로 이 때다 싶어 날뛰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과격한 정치꾼과 과격한 백성이 어우러져 나라를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무자비한 폭정暴政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정亂政이다. 기준이 오락가락하고 고무줄 잣대로 들이대니 혼란을 피할 수 없다. 작두에 올라탄 무당의 칼춤에 사실과 이성과 상식이 쓰러지고 있다.

절박한 반부패·반분열·반과격 저항

하지만 참혹했던 일제를 버텨내고, 야만스런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를 무너뜨린 우리다. 충분히 좌절하고, 충분히 반성하고, 충분히 절박해져야 한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부패하지 말고, 분열하지 말고,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궤변과 막말을 쏟아내도 과격한 발언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 폭력의 대안이 폭력일 수 없기 때문이다(1986: 290). 매를 맞으면서도 담담하게 사실과 진실을 말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1991: 118). 적의 양심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말을 해야 한다(2008: 80). 끝까지 참고 감정이 아닌 이성과 상식에 매달려야 한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심정으로 동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동지의 허물이 아닌 자신의 미숙함을 고백해야 한다. “대깨문”이나 “수박”을 입에 담아서는 안된다. 말을 아껴야 한다. 비폭력 저항의 시작이다.

 

인용: 박헌명. 2022. 과격한 백성과 과격한 정치꾼의 난장판. <최소주의행정학> 7(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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