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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청와대의 국민청원과 과격한 국민 본문

반민주주의 증상

청와대의 국민청원과 과격한 국민

못골 2019. 4. 11. 14:21

청와대의 국민청원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구호는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국민이 지지한 청원에 대하여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가 답한다는 것이다. 이미 청소년보호법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폐지하고, 낙태죄를 폐지하고, 흉악범 조두순을 다시 재판하여 처벌하고, 권역외상센터의 중증외상분야를 지원하고, 술을 마시고 저지른 범죄을 깎아주는 “주취감형”을 없애달라는 요구에 답을 했다. 

국민청원의 빛과 그림자 

지난 9년 이명박근혜 정권은 국민의 애절한 요구를 외면하고 억압했던 벽창碧昌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규제를 덜컥 풀어준 것에 항의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소위 “명박산성”을 쌓아 물리쳤다. 세월호가 침몰하여 삼백여 명의 젊은 목숨이 수장되었는데도 대통령이 업무시간에 무얼했는지 밝히지 않았고 공무원들을 동원하여 집요하게 진상조사를 방해했다.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었을 때 박근혜씨는 “묵언수행” 중에 가끔씩 나와 기어코 민심에 불을 질렀다. 나라의 주인임에도 하찮은 머슴들에게 제대로 당한 민심의 원한과 회한이 깊었다. 그래서 청와대의 국민청원은 더욱 빛이 난다.  
  
하지만 국민청원이 장사가 잘 되는 만큼 씁쓸한 면도 있다. 그만큼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의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민의와 동떨어진 짓을 해왔다. 정부 관료제도 국민이 가려워하는 곳을 제대로 긁어주지 못했다. 법원 역시 권력자와 가진 자에게는 한없이 친절한 반면 가진 것이 없거나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모질었던 모습이었다. 결국 국민청원은 그동안 이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국민청원의 흥행을 지켜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까닭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상화폐규제를 실시하지 말고 나경원씨의 평창올림픽 의원직을 파면시켜달라는 청원이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시시콜콜한 일을 시비걸거나 심지어는 장관과 금융감독원장을 파면해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청원은 공익과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타인과 사회전체에 얼마나 이로운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따질 뿐이다. 일부러 논란이 되거나 답하기 곤란한 청원을 하여 정쟁을 유발하려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정적에 대한 사상검증이나 낙인찍기라 할 수 있다. 무서울 때에는 절실함으로 서로 단결하여 촛불을 들었지만 폭정暴政과 난정亂政과 우정愚政이 사라진  뒤에는 긴장감을 잃고 너나할 것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과격한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은 아닌지...(1996: 673). 

의 포악과 하의 난동

소정 선생님은 관官의 폭력만 나쁜 것이 아니라 민民의 폭력 역시 나쁘다고 했다. “난동화하기 쉬운 민중과 포악하기 쉬운 기득권층”(1986: 101) 또는 “上의 포악과 下의 난동”이라고 표현했다(1996: 606). 民이든 官이든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꼴을 보이는 짓이며, 서로 “벌거벗은 힘”을 행사하는 짓이다(1986: 81). 官의 권력남용과 난동을 불사하는 民의 무책임한 행동이 부딫혀 서로 원색적으로 대결하는 일이다(1980: vii). 이렇게 양 극단의 벌거벗은 힘이 작정을 하고 충돌하게 되면, 어느 경우에도 민은 승자가 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소정 선생님의 명제를 살펴보자.

“모든 악의 근원은 정부의 과격”이다(2008: 589). “모든 나쁜 것은 관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좋은 것은 민에서 나왔다”(1991: 42). 그런데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 이런 명제에 따르면 官은 자기반성으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民의 건전한 압력을 통해서 官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1980: vii). 또한 官의 나쁜 행동을 배운 民은 “좋은 것”을 생산하지 못하고 (“나쁜 것”도 생산하여) 官의 나쁜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없다. 전자는 民의 “좋은 것”이 만드는 선순환이며 후자는 官의 “나쁜 것”이 만드는 악순환이다. 결국 열쇠는 民이 쥐고 있다. 그래서 주권재민인 것이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폭력은 특별히 난동이라 불렀는데(官의 폭력은 권력남용이나 포악),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이며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라고 했다(1986: 297). 함석헌과 이문영의 표현에 의하면 앞뒤 안가리고 돈이나 챙기려는 부패한 국민, 힘센 자에게 빌붙어먹으려고 분열하는 국민, 무작정 윗자리를 차지하려고만 하는 과격한 국민의 행동이다 (2008: 571-578). 따라서 바람직한 시민사회(언론, 대학, 종교단체, 노동조합 등의 사회단체)는 자율성(교만하지 않고 자제하고)과 책임성(감정과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에 근거하여 官이 납득할 만한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한다 (1980: vii-viii).  

과격하지 않은 민의 품격

모든 민의가 공익을 위한 선은 아니다.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거나 정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언사도 있다. 투자한 돈이 아까워 가상화폐규제를 반대하거나 맘에 안든다고 해코지하는 것은 과격이다. 동성애, 사형제 등의 논란거리를 들이대고 찬반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은 순진하거나 어리석다. 새싹이 자라기도 전에 시험에 들게 하여 짓밟는 자해행위이다. 멀리 보고 참고 자제해야 한다. 또한 공연한 시비거리를 만들어 공직자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음흉한 과격도 주의해야 한다. 뜬금없이 여성의 군복무를 요구하거나 자유민주주의(사실상 “완장찬 반공주의”)로 시비거는 것은 판(프레임)을 바꾸거나 상대방의 실수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러한 民의 과격은 스스로를 망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대통령은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속담을 초월해야 한다(2008: 578). 과격한 자식의 패악질에 휘둘리거나 넘어가서는 안된다. 공직자는 권한남용이란 유혹을 물리쳐야 할 뿐만 아니라 품격있는 민의는 받들되 과격과 난동은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청와대의 국민청원과 과격한 국민. <최소주의행정학> 3(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