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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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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바이러스"와 과격한 발언

2022. 8. 26. 12:33 | Posted by 못골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15일 현재 인구 백만 명당 확진자수가 1만 6천 명이 넘었다. 미국과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로 우뚝섰다. 윤석열씨가 집권 100일만에 이뤄낸 “과학방역”의 위엄이다. 직무수행평가 24%라는 그 어렵다는 경지를 밟았다.

윤씨의 문자질과 "막말 바이러스"

코로나 못지 않게 “막말 바이러스”도 창궐하고 있다. 막말의 순도와 강도가 높아가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웬만한 비판은 이젠 식상할 뿐이다. 지난 달 말 윤석열씨가 여당 원내대표에게 “내부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며 보낸 문자질이 발각되었다. 자신의 대선과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준 여당 대표를 짓밟는 말이었다. 배은망덕이나 양두구육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윤씨는 음주운전과 논문표절 등의 의혹을 받고 있던 박순애씨를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 치켜세웠지만, 박씨는 5세입학사태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뜬금없이 독립운동을 자유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생뚱맞은 자유타령이다. “자유”에 한을 품고 죽은 처녀귀신이라도 씌인 것일까?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라던 김구를 비웃는 말이다. 최소임금 이하로도 일하고 싶은 자유에는 게거품을 물면서도 반지하에라도 살고 싶어하는 자유에는 침묵한다. 폭우로 침수피해가 난 것을 보고도 퇴근한 윤씨나 대통령이 있는 곳이 상황실이라고 둘러대는 비서실이나 오십보백보다. 김기춘씨는 대통령이 있는 곳이 집무실이라고 했던가. 한덕수씨는 윤씨의 아파트가 지하벙커 수준의 시설을 갖췄다며 한 술 더 떴다.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배설한다. 가관이다. 그럴 양이면 뭐하러 난리법석을 피우며 집무실을 옮기고 아파트 쇼핑하듯 공관을 들쑤시고 다녔단 말인가.

윤씨의 제멋대로 상식과 정의와 공정이 작두를 타고 춤추자 “막말 바이러스”가 널뛰고 있다. 사실상 폭력이다. 너 죽고 나 살자가 결국은 다 죽자로 끝난다. 당사자는 물론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화나게 한다. 상처를 헤집고 갈등을 부추기고 증오를 불지른다. 반드시 끝장을 봐야만 멈추는 보복의 악순환이다. 이런 막말 잔치에는 시시비비를 따져볼만한 터럭조차 없다. 그저 구역질나는 일이다.

박지현·박용진의 과격한 발언

대통령선거에서 간발의 차로 패한 민주당이 새 지도부를 선출하고 있다. “어대명”이니 “확대명”이니 친명이니 비명이니 반명이니 호사가들의 말잔치가 무성하다. 이재명씨가 7할이 넘는 지지를 골고루 받으며 당권을 거머쥐게 된 형국이다. 그런데 지난 5월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박지현씨는 당내 “내로남불”과 “팬덤정치”를 비판하면서 “국민의 신뢰 회복을 위해서라도 586 정치인의 용퇴를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필 적들의 언어로 스스로를 자학하는 어리석음이라니... 성폭력이든 뭐든 잘못한 일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밝혀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일이다. 대체 586은 무슨 죄를 지었으며, 국민 신뢰와 586 용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586을 전부 땅에 묻으면 신뢰를 얻고 선거에서 이긴단 말인가? 아마도 수구세력이 만세삼창을 부르며 반길 일이다. 정치인은 나이가 아니라 유권자의 선택에 따라 진퇴가 정해질 뿐이다. 양김씨의 청년정치를 말하지만 분수도 모른 채 스스로 김대중이 될 노력은 하지 않고 감나무 밑에서 입만 쩍 벌리고 있으니...

박씨는 한걸음 더 나가 이재명씨의 불출마를 주장하였다. 여당이 보복을 해올 것이기 때문에 민생이 실종되지 않을까 우려한댄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격미달인데도 비상대책위원장을 했으니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바득바득 우기고 나섰다. 경우에 맞지 않은 소리다. 설령 대선 패배가 이씨의 잘못이라 해도 출마여부는 이씨가 정하는 것이다. 박씨의 우려는 한심한 상상이다. 그럼 여당이 보복할 가치조차 없는 후보를 내세워야 하는가? 2할대 지지율로 힘겨운 경주를 하고 있는 박용진씨도 마찬가지다. 이씨의 사법리스크를 운운하며 말을 바꿨다느니 선민의식이 있다느니 말꼬투리를 잡기에 급급하다. 군부가 김대중씨를 싫어하니 자신이 단일후보가 되어야 한다던 김영삼씨의 궤변과 무엇이 다른가? 이낙연씨가 실패한 까닭이다. 과거의 군부와 현재의 검찰이 그렇게도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가? 그들이 싫어하면 지지율 7할 후보도 사지로 내몰고 동지도 뭐고 다 먹잇감으로 내놓을 참인가?

박지현씨도 박용진씨도 과격하다. 사람들이(적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로 경쟁자를 흔들어 자신의 잇속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박용진씨는 “한 계파가 꿩먹고 알먹고 국물까지 먹고 있다”며 이씨의 사당화를 우려했지만, 무기력과 질투심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노무현씨처럼 계파없이 당에 들어와 대선후보가 되고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씨에게 계파라니... 사당화는 저주에 가까운 상상이다. 두 박씨는 왜 자신이 김대중·노무현·이재명에 미치지 못하는지 냉철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들은 누구 덕을 보지 않았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모으는 뜻을 품었고, 치열하게 깨지면서도 버티고 지켰던 사람이다. 유권자는 잠깐 정신줄을 놓을 수는 있으나 결코 어리석지 않다. 귀신같이 깜냥을 알아본다.

최소한의 발언은 경우에 맞는 말이다

소정 선생님은 비폭력을 말씀하시면서 꼭 필요한 말을 최소한으로 하라고 했다. 무서울 때에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기에 사실이고 진실이어야 한다. 본능으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연한 논리로 진심을 담아 풀어내야 한다. 애증에 휘둘리지 말고 곁가지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반면 기회주의자들은 무서울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상황이 호전되면 기어 나와 대중이 좋아할 만한 말을 쏟아내고 다닌다. 인기를 노린 과격한 발언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진실이든 아니든 대중을 호릴 수 있는 말이면 된다. 앞뒤가 맞든 안맞든, 아군에게 불리하든 말든 그들은 가리지 않는다. 말에 논리가 있을지언정 진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잇속이 있을 뿐 동지에 대한 배려는 없다. 쓸데없이 말이 많다. 긴가민가 혼란스럽다. 이재명씨가 간절함을 담아 꼭 필요한 말만 담하게 해주길 바란다.

 

인용: 박헌명. 2022. "막말 바이러스"와 과격한 발언. <최소주의행정학> 7(8): 1.

네 자로 된 고사성어가 정치인의 입에 오르는 일은 흔하다. 양반의 품격과 학식은 사자성어로 완성된다고 믿는 것일까? 일부러 투박한 영국식 발음과 라틴어를 고집하는 미국인의 현학이랄까. 물론 꼭 맞는 비유여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열이면 아홉 이상은 돈주고 족보를 산 양반네들의 싸구려 에헴이다. 고개가 갸우뚱 하다가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다. 조미료가 듬뿍 든 음식을 털어넣은 듯 속이 거북하다. 도포 차림으로 공자왈 맹자왈만 하면 무얼 하는가. 사실도 아닌 일을 어설픈 비유로 힐난해놓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모습이라니. 귀여운 구석조차 없는 몹쓸 "아재개그"다. 적개심이 지나쳐 정신줄을 놓은 꼰대들의 작태다. 언어에 대한 테러다.

"추안무치"와 "주안무치"

지난 2일 야당의 원내대표인 주호영씨는 추장관 아들의 병가 의혹을 이어가면서 "한마디로 추안무치"라고 일갈했다. 제 딴에는 후안무치厚顔無恥에서 기가막힌 운율을 따냈다고 생각했을까? 주씨가 추앙하는 윤석열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사건 아닌가. 그래도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인가?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조차 속이려는 몸부림일까?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니 주안무치酒顔無恥 아닌가?

비유 수준을 기하학의 차원에 빗대어 보자. 점은 0차원으로 표현된다. 점을 이은 선은 1차원이고, 가로와 세로로 구성된 평면은 2차원이며, 높이가 더해진 입체는 3차원이다. 대상에 대한 설명은 0차원이라 할 수 있고, 단순 비교는 1차원("너는 나의 봄"), 공간과 시간 비교는 2차원("한국의 제갈량")이다. 말하고 듣는 멋은 3차원의 축이다. 강물처럼 자연스레 흐르고 숲처럼 아름다운 비유를 말한다.

"추안무치"는 0차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멋과 감동은 커녕 부실하기 짝없는 설명이다. 그냥 말장난이다. 철부지의 "너 시러" 수준이다. 중국 고사를 빌어오고 나름의 운율을 넣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어거지로 비틀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라를 돌보지 않아 빼앗긴 일과 병사가 병가를 얻은 것(설령 탈영이었다 해도)을 병치시킨대서야... 그저 비난과 저주를 담은 막말을 "아재개그"로 치장했을 뿐이다. 조국을 조롱하는 "조로남불"도 오십보 백보다. 전방위로 조장관의 삼족을 탈탈 털었지만 검찰은 아직도 그의 불법행위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이 어마어마하게 쏟아낸 "가족사기단" "조국펀드" "위장이혼" "표창장 위조"는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것은 최성해의 가짜 학위와 검찰개혁의 당위성 뿐이다.

<달의 몰락>과 자기기만

작년 수구세력이 김현철의 <달의 몰락>을 끌어들여 문대통령을 비난했다. 황교안씨와 나경원씨가 주도한 자유한국당의 장외집회에서 틀었다는 노래다. 설화舌禍에 휘말린 청와대 비서관 이름이 가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달의 영어발음인 문(Moon)을 엮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래가 무엇을 말하는지 황씨와 나씨는 알고는 있었을까? 멋과 미추美醜와는 담을 쌓은 자들이다. 자신에게 칭찬인지 저주인지 분간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들의 어리석음이여... 문재인이 실제 몰락하는 상상이라도 하는지, <달의 몰락>을 들으며(부르진 못하고) 낄낄대는 순진무구함이여... 자학개그다.

자신(수구세력)을 "처음 만났을 때도" "무참히 차버릴 때도" 자신이 짝사랑하는 그녀(국민)는 "탐스럽고 이쁜" 달(문재인)이 좋다는 것 아닌가. 자신과 "매일 만날 때에도" "완전히 끝난 후에도" 그녀는 오매불망 달을 사랑한다는 것 아닌가? 자신은 죽었다 깨나도 그녀에게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무참하게 채인다는 것 아닌가? 그녀의 일편단심에 상처받고 질투심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연적에게 고약한 주술을 걸고 있다. 제발이지 눈앞에서 사라지든가 죽어나 버려라. 아니 달이 정말로 몰락하는 환영이 보이고 이제 그녀는 내 것이라는 통쾌한 상상이다. 현실도피이자 자기기만이다.

과연 그 저주가 약발이 있었던 모양이다. 작년 "조국대전"이나 올해 "황제휴가"를 통해서 수구 기득권 세력이 사생결단으로 덤벼들었지만, "탐스럽고 이쁜" 달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으니 말이다. 아무리 파상공격으로 흔들어 대도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4할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있다.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계몽군주와 식자우환

지난 달 25일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기념 토론회에서 유시민 이사장이 김정은 위원장을 빗대어 "계몽군주"라고 표현했다. 시공간을 가로지른 그의 비유는 여러 가지 느낌을 담고 있다. 옛날처럼 해서는 살아남기 어렵겠지, 권력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겠지, 계속 그렇게 해주라(철부지 아이를 지긋이 타이르는 꼬드김이랄까), 그래도 왕은 왕이다 등... 수구세력들은 폭군을 칭송한 요설이라고 비난했다. 맥락도 빼고 배경 지식도 빼고 막무가내로 빨갱이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장취의 신공이다. 화자는 가벼운 비틀기로 멋을 냈는데 청자는 문자를 트집잡아 죽기살기로 달려들고 있으니...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거늘. 이런 식이면 양상군자梁上君子는 도둑을 고무·찬양한 발언인가? 유이사장은 (수구세력들에게) 너무 고급스러운 비유를 했다며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했다. 0차원도 버거운 자들이 어찌 3차원의 입체감을 알겠는가.

"추안무치"나 "조로남불"이나 수준 미달이다. 정신 건강을 해치는 말고문이다. 폭행에 가까운 말폭력이다. 이런 문화·예술 테러는 대개 수구 기득권 세력의 몫이다. 배운 게 없어서가 아니다. 간절하게 땀흘리고 피흘리고 눈물을 떨구고 기쁨을 나눠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을 예쁜 꽃으로 그려내고 멋진 가락으로 뽑아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오차의 <바위돌>을 금지시키고, 이창동의 <시>를 낙제시킨 자들이다. 그동안 완장을 차고 모든 것을 맘대로 주물러왔기에 자신의 특권(반칙)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이 낯설고 원망스럽다. 기가 막히다고 확신한 비유가 전혀 먹히지 않는 현실이 서럽고 화난다. 기득권 놀음에 빠져 스스로 퇴화된 줄도 몰랐던 것이다.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1991: 322)이 소음이 되고 악취가 되고 흉기가 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추안무치"와 <달의 몰락>과 계몽군주. <최소주의행정학> 5(10): 1.

지난 2월 야당대표가 된 황교안씨의 첫마디는 좌파정권의 폭정에 맞서 전투를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종북좌파들이 독재정권을 연장하는 꼴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경원씨도 지난 3월 원내대표 연설에서 대한민국이 좌파정권 3년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했다. “헌정농단” 정책에 집착하고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독재정권임을 수차례 언급했다. 또 해방후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고 주장하여 “토착왜구”라거나 “황나베”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정치인들의 입은 특히 4.3 보궐선거를 앞두고 더 거칠어졌다. 선거지원유세에 나선 오세훈씨는 노회찬이 돈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노회찬 정신을 깎아내렸다.


종북좌파의 독재정권이라고라?


정말 문재인 정권이 종북좌파인가? 수구세력들은 정적을 빨갱이라거나 사회주의라고 낙인찍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승만때부터 늘 해오던 짓이다. 현 정권이 국민들의 삶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북한을 떠받드는데만 혈안이 되었다고 비아냥 거렸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통째로 김정은의 손에 넘어간다고도 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지령을 받는 정권이었으면 공산화는 벌써 수천 번은 되었을 것이다. 친일파를 포함한 반민족세력들이 남김없이 색출되어 3족이 도륙당했을 것이다. 과연 문재인, 노무현, 김대중이 어리석고 무능한 종북좌파라서 나라를 넘기지 못한 것일까? 친일파가 누구인지 몰라서 살려둔 것일까? 좌파독재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지만 황씨나 나씨가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음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입나발이 터무니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수구세력들은 이 사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활하게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마냥 똑같은 빨갱이타령을 해댄다.


문재인 정권이 허구헌날 폭거를 저지르고 폭정을 일삼고 있는 독재체제인가? 정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처럼 포악했다면, 법도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토착왜구”들을 잡아다가 형틀에 매달아 물고物故를 냈을 것 아닌가? 북한에서 벌어졌던 숙청을 따라했다면, 그들을 인민재판에 줄줄이 세워 바로 총살했을 것 아닌가? 강자에게 달라붙어 호의호식을 해온 사람들은 폭정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해방 후 제주, 여수, 순천, 거창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빨갱이로 죽어갔는지 듣지 못한다. 수십 년이 지난 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이들의 말라버린 눈물을 보지 못한다. 그런 자들이 반성은 커녕 벌건 대낮에 나와서 헌정질서를 운운하고 독재와 폭정을 입에 담고 있으니… 과거 동족을 짐승처럼 사냥했던, 빨갱이란 불도장을 현란하게 휘둘렀던 폭력와 다를 바 없는 말폭력이다. 예나 지금이나 반칙과 흉계로 권력을 탐해온 자들의 더러운 주먹질이다.


수구세력의 끝간데 없는 말폭력에 상대 정치인들은 말포화로 맞대응한다. 예컨대, 민주평화당은 반민특위에 관한 나씨에 발언에 대해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정당, 매국정당, 5.18 광주시민들을 짓밟은 전두환의 후예, 국민학살 군사독재 옹호정당”이라고 비난했다. 정의당은 오씨의 발언을 “일베 등 극우세력들이 내뱉는 배설 수준의 인신공격,” “망언이 일상화된 자유한국당색에 푹 빠져 이성이 실종된 채 망언 대열에 합류한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이런 말폭력 대응은 갈등을 수습하고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지한 성찰도 없는 감정싸움에 휘말릴 뿐이고, “그 놈이 그 놈”이라는 수구세력의 음흉한 판짜기에 놀아날 뿐이다.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4월 4일자 손석희씨의 <앵커브리핑>은 고요하지만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수구세력의 말폭력에 어찌 대응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손씨는 비열한 오씨의 비난은 “차디찬 일갈”로 접어두고 노회찬에 대한 소회를 담담히 풀어갔다.


“노의원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 정치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노회찬과 같은 사람이었고 또한 ... 휴머니스트로서의 자연인 노회찬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파문에 파문을 낳은 오씨의 “거리낌없이 던져놓은” 그 말 때문에 역설적으로 손씨는 노회찬에 대한 규정과 재인식을 생각해 냈다고 했다. 노회찬은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즉, 노회찬은 돈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 노회찬에게 ...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손석희씨는 마무리를 하면서 두 번씩이나 10초 가량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도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도 마음이 무너져 목이 메었을 것이다. 노회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선 사람들까지도 급소를 찔린 듯 꼼짝도 못하고 전율에 떨었을 것이다. 이것이 소정의 비폭력이자 최소주의다.


너무나 옳고 공감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적의 이성마저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2008: 66, 89, 491, 497, 615). 수구기회주의 세력이 날조뉴스와 말폭력으로 패악질을 저지른다고 해서 똑같이 대응해서는 안된다. 폭력의 대안이 또다른 폭력일 수는 없다(1986: 290). 물론 포악한 수구세력의 주먹질에 지레 겁먹고 말도 못하고 무작정 얻어맞기만 해서도 안된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 매를 맞으면서도 끊임없이 사실과 진실을 말해야 한다(1991: 118). 다만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 되지 않게끔 조심해야 한다(1991: 322; 2001: 246). 감정을 절제하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1996: 56).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이다(1980: 384).


말폭력이 난무하는 요즘 진심이 담긴 탈상의 변이 오래 마음을 울리고 별처럼 빛나는 까닭이다. 우리에게 노회찬과 손석희가 귀한 까닭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수구세력의 말폭력과 손석희의 비폭력. <최소주의행정학> 4(3): 1.


선동렬 국가대표 야구감독이 11월 14일 전임감독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국가대표 야구선수단의 명예회복, 국가대표 야구 감독으로서의 자존심 회복,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영예 회복”을 위해서라고 했다. 선감독은 올해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선발과정에서 일부 선수에게 병역면제 특혜를 주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일부 야구팬들은 분노했고 비난을 쏟았냈다. 심지어는 야구대표팀이 은메달을 따길 바란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야구 대표팀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의혹과 비난은 잦아들지 않았다. 급기야 선감독은 지난 달 10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호통을 듣고 굴욕을 당했다. 23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정운찬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는 야구대표팀 전임감독이 필요하지 않으며, 선감독이 경기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텔레비젼으로 야구경기를 본 것은 불찰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런 사퇴선언에 놀란 야구위원회와 정총재는 선감독을 붙잡는다고 소동을 벌이고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과연 선동렬 감독은 그런 지탄을 받아 마땅한가?
 
선동렬은 영웅이고 전설이다
 
선감독은 지금까지 줄곧 야구인으로 살아왔고, 야구선수로서 야구감독으로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업적을 이뤄냈다. 그는 주요 대목마다 감동을 안겨준 영웅이었고 야구계의 전설이 되었다. 그에게 야구는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삶 자체였다. 선감독은 사퇴하는 것이 “야구에 대한 저의 절대적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고, 야구에 대한 열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병역 특례에 대한 시대적 비판에 둔감했습니다. 금메달 획득이라는 목표에 매달려 시대의 정서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공을 만지기 시작한 이래 저는 눈을 뜨자마자 야구를 생각했고, 밥 먹을 때도 야구를 생각했고, 잘 때도, 꿈속에서도 야구만을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선감독은 평생 한 우물만 팠고 끝내 일가를 이루었다. 뛰어난 그의 전문성과 업적은 선동렬을 영웅과 전설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즐거움을 얻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무등산 폭격기”와 “국보급 투수”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선감독의 재능과 헌신을 오래 기릴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제 성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실확인과 증거도 없이 선감독을 깎아내리느라 여념이 없다. 전문가의 권위를 허물고 영웅을 만신창이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차범근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축구대표팀에서 물러났을 때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왜 우리는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는 것일까? 영웅을 영웅으로 지키고 대접하지 못하는 것일까?  
 
전문성을 모르는 바보들의 난동
 
선감독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는 야구팬이나 선감독을 국정감사장에 불러내어 호통치는 정치인이나 눈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 아무말이나 둘러대는 총재나 무책임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각자 기분에 따라, 자신의 처지에서 유리한 “정치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손혜원씨나 정운찬씨가 야구팬이라 하더라도 야구전문가라 할 수 없다. 선감독 앞에서는 오묘한 야구의 맛을 구별하지 못하는 불감증환자거나 바보천치일 뿐이다. 기껏해봤자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격이다. 바보는 자신이 바보임을 모른다. 그래서 단순무식한 용맹스러움은 서슴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선감독의 재능과 경험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물증이 아닌 심증으로 선감독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다. 문자가 틀렸다며 다짜고짜 공자의 뺨을 후려치고 있다. 이 패악질은 바보들의 난동이다. 
 
이른바 “야구팬”임네 하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비단 야구 뿐인가? 어느 선수가 득점을 하면 환호성을 지르다가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 야유를 보내고 삿대질을 한다. 선수가 그것도 못치냐며 힐난하고 그런 쉬운 공도 못잡냐며 분개한다.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어야 한다거나, 이 대목에서 누구를 구원투수나 대타로 기용해야 한다며 감독의 무능을 한탄한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한 성깔하는 팬들은 술먹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보호그물에 오르기도 한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면 아예 웃통벗고 경기장에 난입하여 소동을 피우는 자들도 있다. 철없는 자들의 난동질이다. 텔레비젼으로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제갈량의 혜안”으로 훈수질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가 활동으로 야구 경기를 보는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경기를 즐길 수 있다. 각자 좋아하는 선수나 야구단이 있고, 좋아하는 야구 기량과 전략이 있다. 야구 규칙을 모른다고 해서 야구를 보지 말란 법도 없다. 맞든 틀리든 각자 즐겁게 야구를 보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선호와 의견과 기대와 다르다고 해서 선수에게 삿대질을 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경기 중에 실수를 했다고 해도 선수와 감독에게 돌팔매질하는 것은 과하다. 야구에 관한 한 야구 전문가와 맞먹으려 달려드는 짓은 무례하고 어리석다.
 
관중의 훈수질은 자기만족을 위한 훈수질에 그쳐야 한다. 야구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야구를 해봤고 오랫동안 야구를 봐왔다 해도 프로야구 선수나 감독의 전문성에 미치지 못한다. 선수출신으로 오랫동안 야구 해설을 해왔던 허구연씨도 감독으로서 처참한 성적에 고개를 떨궈야 했다. 하물며 야구를 눈으로 즐겨온 “야구광팬”임에랴… 한마디로 야구인들의 전문성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설령 자신의 생각과 달라서 동의하지 못한다 해도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전문성이 없는 전문가들의 시대
 
막스 베버(Max Weber)의 관료제는 전문화된 관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관료제가 합리화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업무를 잘 나누고(division of labor), 그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을 데려와서 맡기고, 전업으로 최대 능력을 발휘하도록 자리도 보장해주고 급료를 지불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이런 전문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같지 않다. 전문가가 되려면 그 전문분야에서 철저한 훈련 (thorough training in a field of specialization)이 필요하고, 자격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선감독으로 치면 피땀흘리며 기량을 연마해 왔고, 각종 경기에서 빼어난 성적을 냈으며, 감독으로서도 여러차레 우승을 일구었다. 그의 야구 전문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전문성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많이 아쉽다. 전문성에 걸맞는 가치(가격)를 부여하고 권위(존경)를 세워주는 일에 인색하다. 어쩌면 인격을 가진 자연인으로서 혹은 주권자로서 누구나 동등하다는 생각이 지나쳐 전문성도 똑같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내용으로서 전문성보다는 절차로서 자격요건을 충족시키는데 몰입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래 전부터 박사학위가 넘처나는 사회다. 운전면허증을 따듯이 박사학위를 따는 사회다. 학력과잉 사회다. 길거리에 치는 것이 박사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그 많은 박사 중에 과연 얼마나 학위에 걸맞는 전문성을 갖추었을까? 박사는 많은데 진짜 박사는 드물다는 자조가 있다. 엉터리 박사를 확인할 방법도 절차도 마땅찮긴 하나, 행여 악화가 양화를 쫓아내는 형국은 아닌지… 
 
요즘 방송에 여기 저기 출연하여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만가지 일에 대해 설명하고 해석하고 나름의 처방을 내놓곤 한다. 무슨 학위를 받았는지,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법이면 법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인다. 사회자가 무슨 질문을 던지면 자동판매기처럼 술술술 답을 풀어낸다. 질문받은 분야를 공부하지 않아서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그들의 박학다식에 놀라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수준이 대체로 일반 상식에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전문성이라기보다는 화려한 말재주나 자극적인 말장난으로 방송을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한 우물만 깊이 파고 드는 전문가(specialist)가 아니라, 멀쩡한 외모와 화술로 여기 저기 그럴 듯하게 긁어주는(무책임한 “훈수질”과 “정치질”에 능한) 일반인(generalist)일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대중은 전문성을 구별해내기 힘들다. 여론을 조작하고 탄압한 정부에서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힘들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그나마 낫다. 하지만 민주 정부에서는 아무나 말을 쏟아내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골라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작정을 하고 뉴스를 날조하여 퍼트리는 경우에는 진실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힘겨루기가 된다. 지금 촛불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쉽게 값싸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얘기만 골라듣는 경향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누군가 날조뉴스를 생산하면 수구세력들이 유투비(YouTube), 전자우편, 모바일 메신저(카카오톡) 등에서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다. 과거에 권력으로 여론을 찍어눌렀던 자들이 이번엔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면서 부르짖고 있다. 딱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우열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끝간데 없는 화력싸움만 벌이고 있다. 이 싸움은 대개 쪽수 많고 목소리 큰 무리가 이기게 되어 있다.  
 
무책임한 정치인들의 과대망상
 
모든 주권자들이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하고 각자의 인격이 차별없이 존중되는 것이 민주사회의 기본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에 차이가 있고 전문성에 차이가 있다. 누구나 각자의 영역에서 전문성을 쌓고 있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전문성을 서로 인정해줘야 한다. 선감독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자연인으로서, 주권자로서의 기본권리를 똑같이 누리고 있지만 야구라는 영역에서 선감독의 전문성은 독보적이다. 
 
그런데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전문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씨는 걸핏하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면서 일을 담당한 공무원의 전문성을 무시하곤 했다. 하다 못해 전봇대 하나 뽑는 일도 직접 챙긴 “이상사”였다. 박근혜씨도 일개 국장 하나 짜르라고 꼼꼼하게 지시하다가 망했다. 대통령이면 세상 만물을 다 아는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어떠한가? 기업의 총수는 어떠한가? 이들의 갑질은 전문성에 대한 몰이해로 시작해서 권한남용으로 끝난다.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우주의 이치를 깨우친 천재가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이 많다. 자신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면 먼저 공부를 하고 해당 전문가에 물어서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 한다. 손혜원씨가 야구팬이었다고는 하나 선감독이 정말 능력대로 선수를 선발했는지, 집에서 텔레비젼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적절한지, 야구우승이 어렵지 않다는 등의 발언을 쏟아낸 것은 한참 지나친 언행이다. 도대체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드는가? 야구 경기를 좀 봤다고 야구 전문가가 된 것인 양 기고만장인 것은 과대망상일 뿐이다. 국회의원이라는 힘으로(국정감사장에 불러다가 아무 말이나 다 쏟아낸다는 점에서) 선감독의 권한과 전문성을 깔아뭉개는 짓이다. 누군가가 손씨에게 그림이나 치던 환쟁이가 어디서 감히 정치를 한다며 나대냐고 한다며 뭐라 대꾸할 것인가?

이래서 과대망상 정치인의 “갑질”은 선감독에게 곤혹 그 자체다. 자신은 야구를 말하고 있는데, 병역면제 책임을 묻고 비난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치인은 호기롭게 병역면제를 따지는데 선감독은 아는 것이 야구라서 야구 얘기만 하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야구만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어찌하여 정치를 물어놓고 맞네 틀리네 따지고 자빠졌으니…  국정감사에서 손혜원씨가 선감독을 다그친 대목을 살펴보자. 
 
“저는 선감독께서 지금부터 하실 일 두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과를 하시든지 사퇴를 하시든지… 지금 이렇게 끝까지 버티고 우기시면 계속 2020년까지 가기 힘듭니다.” “지금 1,200만 야구 팬들이요… 지난 한달 동안 20프로가 관객이 줄었습니다. 선감독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수를 소신껏 뽑아서] 우승했단 얘기하지 마십시오. 그 우승이 그렇게 어려운 거라고 다들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혜원씨는 세상 일을 손바닥 내려다보듯 하는 권능과 재주를 가졌다고 생각했을까? 누가 손씨에게 국가대표 야구감독을 그만두게 할 권한을 주었는가? 동경올림픽까지 감독직을 보장받은 선감독 아닌가? 특혜사실을 확인하거나 증거를 내놓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선감독이 버티고 우긴다고 단정하는 “용맹스러움”은 무엇인가? 선감독 때문에 야구 관객이 2할이나 줄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말 다들 야구우승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차기 대표팀감독으로 손씨를 추천하고 있다(우승이 그리 만만하다는 “여장군”이면 차라리 메이저리그 감독으로 모셔갈 일이다) 실력대로 소신껏 선수를 뽑았다고 강변하는 선감독은 완전히 낙담하는 얼굴이다. 
 
심증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병역면제시비는 명백한 증거가 필요하다. 선감독의 명성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병역면제가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병역면제가 야구 밖에서 시작된 일인 이상 야구장 밖에서 물증을 찾아야 했다. 예컨대, 선감독이 선수나 구단에게 언제 어디서 금품을 받았다거나 선수의 능력이 형편없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병역면제 혜택은 9명이 받았는데, 비난은 나이가 많은 오지환과 박해민에게 몰려있다. 병역면제를 기대하면서 일부러 경찰청과 상무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성적만 봐도 국가대표가 될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선수는 아니었다. 김수민씨의 말대로 수치로 표현된 1등만을 뽑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감독은 무엇을 하는가? KBO에서는 선동렬감독에게 동경올림픽까지 전권을 줬다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선감독이 부여받은 권한과 전문성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일까? 과대망상으로 선감독을 몰아붙인 손혜원씨나 유치찬란한 김수민씨나 정당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소신껏 뽑았다는 주장을 털끝만큼도 반박할 수 없었다. 손씨의 엉뚱하고 황당한 헛발질을 적어본다. 
 
“연봉을 얼마나 받으세요?”(황당한 선감독)“그리고 판공비는요?”(어이없어 웃는 선감독)“감독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 근무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까지 계십니까?”(야구감독이 교대근무하나?)  
 
도대체 뭘 하자는 것인가? 감독에게 감독이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게 멀쩡한 정신줄인가? 같은 방식으로 손씨에게 물어보면 어찌할까? 국회의원이 하는 일이 뭡니까라고. 몇 시에 출근해서 몇 시에 퇴근하느냐고. 국민의 피와 땀을 세비로 몇 억씩이나 받아쳐먹고 출석은 제멋대로이고, 막말과 욕설을 쏟아내면서, 걸핏하면 국회를 파행으로 이끄는 이유가 뭐냐고. 판공비는 차지하더라도 특별활동비로 동료들 용돈을 챙겨주고 집에 가져가 생활비로 주는 이유는 뭐냐고. 
 
“정치야구인”의 기회주의 발언
 
정운찬 야구위원회 총재도 야구를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야구전문가는 아니다. 경제학자로서 강단에 섰다가 잠깐 정치를 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정이라면 전임감독이 좋은지 나쁜지, 텔레비젼으로 경기를 보는 것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입에 담지 않았어야 했다. 당장 쏟아지는 책임을 일단 회피하고 보겠다는 속내가 훤히 내비치는 발언을 삼가해야 했다. 
 
“선수선발은 원칙적으로 감독의 고유권한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간섭을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선수선발과정에서 여론이 여러가지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제가 선감독에게 알리고 선발과정에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했었더라면, 또 선감독이 이것을 받아들였더라면… 저는 … 지금도 선수선발은 감독이 전적으로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그냥 선수선발은 감독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손혜원씨가 달변으로 밀어붙이니까 강단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이다. 세종시 원안을 밀어붙이면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막상 수정안이 부결되자 입씻고 슬그머니 자리에 눌러앉아 원안대로 추진했던 자 아닌가? 정말 거덜날 것이라고 믿었다면 자리를 내놓는 것이 순리요 상식이다. 나라를 거덜낼 사업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이 직접 추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국정감사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기회주의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 저는 전임감독제[를] 찬성안합니다 …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야구인들의 오랜 요청으로 전임감독을 두게 되었는데, 국정감사에서 총재가 전임감독이 필요없다고 말하면 어찌 되는 것인가? 탱크처럼 밀고 들어오는 손혜원씨의 주장대로 전임감독제를 폐지하자는 것인가? 
 
또 손혜원씨가 선감독이 집에서 TV로 경기를 본다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정운찬씨는 “저는 선동렬 감독이 불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야구장에 안가고 선수들을 살펴보고 지도하려는 것은 마치 경제학자가 시장 등 경제현장을 가지 않고 경제지표 가지고서 경제 분석하고 예측하고 정책대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대단히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말이었다. 전임감독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총장하고 총리하다가 어느 날 총재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야구전문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표팀 감독이 경기장에 가서 선수를 봐야 하는지, 텔레비젼으로 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지는 잘 모른다. 내가 총재였다면 “나는 모른다. 전임감독이 판단할 문제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야구는 정치가 아니라 경기다
 
도대체 전권을 부여받은 감독이 선수를 뽑고 경기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 왜 토를 다는가? 특별히 일이 없는 한 감독의 전문성을 인정해 주고 그의 판단을 존중해 줘야 한다. 선감독이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야구도 모르는 일가친척을 선수로 뽑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감독은 결과에 책임을 질 뿐이다. 
 
야구는 높은 전문성이 필요하다. 동네 야구라면 몰라도 아무나 야구 선수를 하고 야구 감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성이 있든 없든 아무나 몰려와서 감놔라 대추놔라 한다면 난장판일 뿐이다. 맞든 틀리든 민의를 받드는 것이 정치라지만 야구는 정치가 아니다. 경기 중에 실수를 저지른 선수를 빼라고 관중이 소리치면 감독은 당장 불러들여야 하는가? IT강대국답게 야구팬들의 실시간 반응이나 투표로 선수를 쓰고 작전을 결정해야 하는가? 유력 정치인이 누가 잘한다고 하면 그 선수로 교체해야 하는가? “야구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가? 이럴 양이면 뭐하러 감독을 두는가? 그냥 전화나 잘 받는 똘똘한 대학생을 데려다가 주문을 받도록 할 일이다. 예산도 아끼고 효율성이 높다. 아니면 선수들의 성적을 모두 수치화하여 그 수치대로 선수를 기용하면 성에 차겠는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수치계산 결과에 따라 선수를 넣고 빼고 할 일이다. 그러면 경기에서 이기는가? 
 
그런데 경기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만인가? 이기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면 지는 것을 아예 없앨 일이다. 모두가 승자가 되도록 하면 된다. 굳이 많은 관중을 불러모아 야구, 축구, 농구 경기를 치러야 할 이유도 없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야구를 하고 그 경기를 지켜보는가?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하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구를 하는 즐거움과 보는 재미를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이기고 지는 것만을 따지는지도 모른다. 승패는 경기의 구성요소일 뿐인데, 이기는 것은 선이고 지는 것은 악으로 몰아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은 아닌지… 
 
선감독이 사퇴했으니 누가 그 뒤를 이을지 궁금해진다. 총재가 전임감독이 필요없다고 밝힌 마당에 대표팀 감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무슨 총알받이도 아니고 권한도 없이 책임만 짊어지는 자리아닌가? 가장 강력한 권한이 주어졌다던 전임감독도 비개비(비야구인)에게 속절없이 범죄자 취급을 당한 자리아닌가? 독배를 마시는 것 이상으로 비참하게 용도폐기될 줄을 뻔히 아는데 누가 나서겠는가? 인터넷에서는 벌써 대표팀 감독 하마평이 무성하다. 제일 설득력이 있는 것은 손혜원감독과 정운찬 코치다. 그들이 내뱉어 놓은 말에 따르면 어느 대회라도 어느 팀이 나오더라도 한국팀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아니겠는가.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일상이다.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와는 전혀 다르다. 지면 지는 것이고 이기면 이기는 것이다. 이기든 지든 어차피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난리들인가? 그냥 구미당기는 대로 경기 자체를 즐길 수는 없는가? 내가 응원하는 구단이나 선수가 아니라도 훌륭한 경기력에 박수쳐줄 수는 없는가? 철딱서니없는 일부 야구팬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다들 알만 한 사람들이 똑같이 어거지를 쓰고 난동을 부린대서야 어디… 하물며 야구의 전문성이 없으면서 정치와 경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임에랴. 
 
따지고 보면 병역면제도 정치인들이 그때그때 여론에 따라(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만들고 바꿔왔다. 박정희와 전두환을 포함한 역대 정권에서 병역면제 혜택을 선심쓰듯이 베풀어 왔다. 국위를 선양한 것은 선수뿐만이 아니라며 BTS에게도 면제 혜택을 주자고 나선 자들도 정치인들이었다. BTS팬들의 말처럼 정치인들이 끼어들어 일을 망치고 있다. 선감독을 불러다가 호통을 칠 것이 아니라 국회 스스로 병역면제를 정치도구로 남용해온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했어야 할 일이다. 이제와서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덮어씌운단 말인가. 
 
그래도 선동렬은 영웅이다
 
우리에게 스포츠 영웅은 무엇인가? 힘들고 고통스런 일상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희망을 준 사람들이다. 김일 선수는 레스링으로, 홍수환은 권투로 국민들을 울고 웃게 했다. 축구에서는 차범근이 있었고 야구에는 선동렬이 있었고 농구에서는 이충희가 있었다. 최근에는 월드컵 4강을 이룬 축구대표팀이 있고, 피겨스케이팅으로 전 세계에 감동을 준 김연아가 있었다. 그 시대의 스포츠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영웅의 특징은 전성기가 길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공을 잊고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느 왕은 큰 공을 세운 자에게 반역이 아니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문서를 내렸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영웅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명백히 사회를 해치는 중죄가 아니라면 선처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孔孟』「梁惠王」下 4장은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不得而非其上者非也)”이라고 적고 있다. 작은 것까지 시시콜콜 따지면서 그들의 공을 깎아내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어쩌면 영웅은 사회가 만들고 가꾸고 지켜주는 것이다. 사소한 일이나 분명하지 않은 일로 영웅을 끌어내려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사회는 영웅을 갖을 자격이 없다.

어쩌면 선동렬감독은 “정치”를 하지 못해서 그 곤욕을 치렀는지 모른다. 이른바 “올림픽 패러다임”에서 자의반 타의반 살아온 그였다. 야구밖에 모르는 전문가이자 외눈박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웅이 되었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즐겁게 했다. 선감독이 살아온 사회가 그랬다.  그런데 이제와서 “정치”를 왜 못했냐고 따지면 어쩌자는 것인가? 사퇴의 변이 아프게 느껴진다. 나는 선감독이 국정감사에서 사과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또다시 영웅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달변은 아니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소신있게 뽑았다고 말을 이어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봤다. 선감독의 전문성과 업적에 걸맞는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사는 난동꾼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명랑해전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선 이순신을 기억하고 추앙한다. 선조는 왕위를 지켰는지는 몰라도 두고 두고 욕을 먹고 있다. 어쩌면 충무공은 죽어서 돌아왔기 때문에 더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이름값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물러난 차범근감독도 사람들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난동꾼이 아무리 시끄럽게 설쳐도 사람들은 영웅을 함부로 끌어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선동렬 감독도 지금은 참담하게 떠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영웅으로 오래 남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Weber, Max. 1978. Economy and Society: A Outline of Interpretive Sociology. Trans. Ephraim Fischoff et al., ed. Guenther Roth and Claus Wittich.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Chapter 11 Bureaucracy (pp. 956-963).

 
원문: 박헌명. 2018. 전문가주의를 망치는 바보들의 난동. <최소주의행정학> 3(11): 1-4.

 

 

서울시가 2014년 제정된 <서울특별시 국어사용조례>에 따라 국어바르게쓰기위원회를 꾸려 행정용어 145개를 쉬운 우리말로 고쳤는데, 그 중에는 최근 고시된 성별, 장애 등 차별에 관련된 용어 13개가 포함되었다고 한다(연합뉴스, 2018.4.16). 예컨대, “정상인”은 “비장애인”으로, “조선족”은 “중국동포”로 쓰라고 권고했다. 아직도 많은 법률과 행정 용어와 표현이 한글의 말법과 글법과 거리가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본말 찌끄러기가 널부러져 있고 쓸데없이 영어 단어를 섞어쓰고 있는 현실에서 그 취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억지로 균형을 맞추려거나 일상의 말습관에 맞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에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학부형? 처녀작? 레이싱걸? 

예컨대, “학부형學父兄”은 학생의 아버지와 형이어서 여성이 빠져있다. 그래서 “학부모學父母”로 쓰라는 것이다. 이미 학부모는 널리 사용되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으나 여성이 빠져 있으니 학부형은 안된다는 발상 자체가 불편하다. 이런 식이면 형, 누나, 숙부, 숙모 등은 죽었다 깨나도 학생의 보호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인가? 단어에 여성이 들어있으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말습관을 성차별로 찍어누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다. 말이 학부형이지 어머니나 누나가 학교에 찾아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여성이 학부형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바꾼다면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라 하겠지만…

또 “편부偏父”나 “편모偏母”는 남자나 여자를 지칭하기 때문에 한쪽을 편들지 않는 “한부모”로 하겠다고 한다. 편부나 편모라고 것이 특정한 상황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남녀를 차별하는 말이라고 인식한 듯하다. 하지만 
우리의 말습관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한 마을”이 "같은 마을"이라는 뜻인 것처럼 “한부모”는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는 뜻으로 "한부모"를 운운하는 것은 엉터리 조어법이다. 마치 “먹을 거리”가 아니라 “먹거리”로 어법을 파괴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그러면 “볶을 거리”가 아니라 “볶거리”요 “씹을 거리”가 아니라 “씹거리”란 말인가?). 게다가 “홀아버지”와 “홀어머니”라는 우리말이 있는데, 웬 편부와 편모 타령인가? 굳이 단어를 만들자면 그냥 “홀부모”라고 하면 될 일이다. 

2006년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성차별하는 단어라며 예시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였다(이유진, 한겨레신문, 2006. 11.9). 대개는 여성입장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말습관을 무시하고 단어의 사전 의미에 집착한 결과 많은 비난을 받았다. 예컨대, “처녀작”이라 하면서 왜 “총각작”이라고는 안하는가? 그럼 “총각김치”에 대항하여 “처녀김치”도 만들어야 하나? “처녀귀신”에 더하여 “총각귀신”은 어떠한가? 왜 “스포츠우먼”이라고 하지 않고 “스포츠맨”이라고 하는가? 친가, 외가, 친정, 시댁 등에 시비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차이와 차별을 혼동하고 있다. “여자도 남자처럼 서서 일을 보고, 수영복도 한 조각만 입고, 군대가게 해주세요”라는 우스개소리로 들린다. 

“레이싱걸”은 한 술 더뜬다. 짧은 옷을 입고 멋있는 차 옆에 서 있는 성인 여성은 분명 소녀가 아닌데 왜 girl이라고 부르냐면서 “경주도우미”라고 하랜다. 그럼 팔순 할머니도 자신을 걸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 서구 문화는 어쩌란 말인가. 또 환갑 진갑이 넘어서도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치매환자로 몰아야 하나? 그래도 girl이 소녀라는 뜻임을 돌돌돌 외고 있는 것만 해도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하나… “경주도우미”라니... 스스로 앉고 움직이는데도 불편해하는 여성이 자동차 경주를 어떻게 돕는다고 도움이란 말인가. 발음을 해도 입에 잘 붙지도 않는다. 뜻으로 치면 차라리 “차들러리”가 더 낫지 않을까? 
   
미망인, 과부, 그리고 “故 OOO의 부인”

서울시와 한국여성개발원은 공통으로 “미망인” 대신에 “故OOO의 부인”을 사용하라고 권하고 있다. 미망인未亡人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나온 말인데, 사전 의미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다. 따라서 양성평등에 맞지 않기 때문에 “故 OOO의 부인”이라고 쓰라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은 또한 과부寡婦와 홀아비가 원래의 뜻이 바뀌어 비하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라고 권했다. 나는 이런 권고가 못마땅하다. 멀쩡한 어휘를 삐딱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대체 과부와 홀아비가 무슨 죄란 말인가? 

<춘추좌씨전> 노장공魯莊公  28년에 따르면 (http://db.cyberseodang.or.kr/) 초나라 文王이 죽은 후 동생인 자원子元이 형수인 식규息嬀를 유혹하기 위해 만무萬舞를 추자 문부인文夫人이 선왕(남편)은 그 춤으로 원수를 토벌하는 연습을 했는데, 지금 영륜令尹이 된 子元(시동생)은 그 춤을 연습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미망인(자신) 옆에서 추고 있다며 수상하게 여겼다(今令尹不尋諸仇讎 而於未亡人之側 不亦異乎). 부주附注에는 부인婦人이 과부가 되면 스스로 미망인이라 칭한다(婦人旣寡 自稱未亡人)고 적혀 있다. 애초에 남편을 잃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 
과부이고, 남이 아니라 과부 스스로가 오랜 관습에 빗대어 겸손하게 미망인이라고 칭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편 <孟子集註> 梁惠王章句 上 3의 集註는 “과인寡人은 제후가 스스로 칭하는 것인데, 덕이 적은 사람(寡人諸侯自稱 言寡德之人也)을 말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과부는 寡德之婦로서 “덕이 부족해서 남편을 먼저 보낸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말 그대로 겸양이고 점잖은 표현이며 남녀 차별과는 관계가 없다. 미망인과 마찬가지로 제후가 스스로를 과인이라 칭하는 것이지 남이 제후를 과인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하가 왕을 寡人이라 불렀다가는 당장 불경죄로 질질 끌려가서 볼기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寡婦는 고상한 뜻임에도 불구하고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나쁜 선입견을 주는 천박한 말이 되었다. 
정말로 덕이 부족해서 남편을 잡아먹은 여자로 해석해서였을까? 말의 참뜻과 맥락을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면 남편을 잃고 “다 내 책임이다. 내 죄다. 내가 죽어야지”라며 울부짖는 寡德之婦를 살인죄로 다스려 순장殉葬시켜야 하나? 또 우리는 “순직한 OOO씨의 미망인” 같은 표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未亡人은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지, 타인이 당사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다. 전우를 잃고 홀로 살아 돌아와 "나만 혼자 죽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자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만큼 슬픈데도 죽지 못하고 있는 심정"을 담은 말이다. 그런데 점잖게 예의를 차린다면서 어떻게 대놓고 “남편이 죽었는데도 아직까지 따라죽지 않다니... 얼른 죽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멱살을 잡히거나 귀싸대기 맞을 일이다. 이는 어법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을 차별하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좋은 약도 맞게 쓰지 않으면 독이 되는 것처럼 고운 말도 잘못쓰면 흉기가 된다.


마치 자기가 쓴 책을 남에게 주면서 상대방의 이름 뒤에 혜존惠存이라고 적어 “잘 간직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원래는 책을 받은 사람이 “귀한 책을 주신 것이 참으로 은혜로우니 잘 보존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책을 준 사람 이름 뒤에 적는 것인데, 일제시대를 지나면서 일본식 혜존이 정착되었다고 한다(이윤옥 2010). 김봉규라는 웹마실꾼의 의견이라고 한다. 책을 받은 사람 스스로가 그 고마움을 새겨서 잘 간수하겠다는 뜻으로 惠存이라고 적는 것이 아니라, 책을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에게 잘 보존하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부적절한가. 얼마나 명문장이길래, 얼마나 비싼 책이길래, 얼마나 권세가 높길래 책을 주면서 잘 간수하라고 이른단 말인가? 품위와 겸손과 거리가 먼 말이다. 과부 스스로가 미망인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미망인으로 부르는 것은 惠存을 잘못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말을 뒤바꾸는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도올의 목욕탕 민원해결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에서 권고하고 있는 “故 OOO의 부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하필 “故”를 붙여야 할까? 한국여성개발원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부인” 등으로 풀어써야 한다고 설명했다(이유진, 한겨레신문, 2006. 11.9). 남편을 먼저 보낸 것도 슬픈 일일 터인데, 왜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사살”하여 아픈 곳을 헤집어 놓는가? 당사자의 남편이 고인이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일 텐데, 굳이 죽은 남편 이름이 누구라고 매번 각인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자는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해야 하니 어느 한 순간도 개가할 생각을 품지 말라는 뜻일까? 이것이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가 추구하는 양성평등인가? 

수년 전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어느 방송에서 동네 목욕탕에 갔을 때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누군가가 선생님을 알아 보고는 벌거벗은 채로 고민거리를 털어놨다. 결혼을 앞둔 신부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청첩장에 “故 OOO씨의 장녀△△△”로 해야 할지 또 청첩인을 누구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도올 선생님의 답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가슴아픈 일인데 뭐하러 청첩장에 죽었다고 쓰냐면서 아버지의 딸인 것은 맞으니 그냥 “OOO씨의 장녀△△△”로 쓰고 청첩인은 살아있는 사람(어머니나 친척) 이름을 쓰면 된다고 했다. 

“故 OOO의 부인”도 마찬가지 경우다. 뭐하러 당사자를 부를 때마다 남편이 죽었다고 각인을 시키는가? 주인인 남편이 죽었으니 초나라의 子元이처럼 춤이라도 춰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속셈인가? 아님 남편이 살아있는 사람과 차별을 하여 깔보고 업신여기겠다는 심산인가? 이런 점에서 “故 OOO의 부인”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러면 “OOO의 부인”이면 괜찮을까? 

남편이 이미 세상에 없는데 뭐하러 남편 이름을 들먹거리는가? 그렇게 양성평등을 외치면서 “OOO의 부인”이라고 관계를 적으라고 권유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법이나 업무상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더구나 여기서 부인은 婦人(결혼한 여자)이 아니라 夫人(아내)이다.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남자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은 男便이지 “여자의 남자”가 아니다. 레이싱걸에 소녀는 없으니 girl을 써서는 안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女便”을 사용하라고 하지 않고(“女便네”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라고 싫어하면서) 아무개 남자의 여자라고 적으라고 권고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요컨대, 미망인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당사자를 맨정신으로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이다. 과덕지부라는 좋은 뜻을 망각하고 寡婦라고 색안경을 끼고 삐딱하게 보는 자들이 잘못이다. 과부나 미망인이나 모두 무죄다. 생각컨대 그냥 ◇◇◇씨나 ◇◇◇여사로 부르면 족하다. 필요하다면 설명을 붙이면 될 일이다. 또한 말의 참뜻을 이해하면 寡德之夫(지어미를 잃은 남편), 寡婦(지아비를 잃은 아내), 寡人(짝을 잃은 사람)이라 해도 괜찮을 것같다. 그동안 부당하게 과부를 천대하고 미망인을 오용한 잘못을 반성해야 한다. 
  
말법과 글법을 살펴 신중하게 

나는 한글을 아름답게 다듬고 풍성하게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먹거리”나 “안습”같은 말장난이나 언어파괴질은 바로잡아야 한다. 또한 일본어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며, 외국어를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일도 자제되어야 한다. 물론 각종 차별을 상징하거나 조장하는 어휘와 말법을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여성개발원과 서울시의 취지와 의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욕이 지나쳐 일을 그르쳐서는 안된다. 언제나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언어에 갖혀서는 안된다. 무조건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또다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차이와 차별을 구분해야 한다. 문자가 아닌 표현의 전후맥락을 살펴야 한다. 말법과 급법과 관행과 그 변화과정을 잘 살펴서 과격하지 않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 어차피 일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제안된 말법과 글법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성차별에 관련된 어휘는 차분하게 연구하고 토론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정부관료제에서 사용되는 단어, 문장, 양식에서 일본어 잔재를 하루 빨리 걷어내야 한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벌법과 특별위원회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좌절되면서 친일파와 일제 유산이 청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료제를 지배하였다. 일본식 한자를 한글로 읽거나 토씨만 갖다 붙인 수준이었다. 일본의 법률문장이나 서류양식을 거의 그대로 베껴왔다. “대통령”과 “헌법” 뿐만 아니라 “회람”(돌려보기), “시말서”(경위서) 등이 우리 일상에 넘쳐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옥스포드 영어사전 같이 제대로 된 한글사전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사전은 그 언어의 수준과 힘을 재는 척도라고 생각한다. 현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뜻풀이도 그러하고 용례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말 사전의 종류가 시계가 멈춘 듯 제한되어 있다. 서점에 가서 외국어사전과 한글 사전을 비교해 보라. 한글이 우수하다는 자랑이 무색할 지경이다. 이제 단순히 일본어 사전을 베낀 사전이 아니라 우리말의 느낌과 표현(광범한 용례를 포함한)을 충분히 담은 사전이 필요하다. 순한글, 관련어(thesaurus), 방언, 속담, 관용어 등에 관한 다양한 사전이 절실하다. 이오덕(2009)의 <우리글 바로쓰기>(서울: 한길사)와 이한섭(2014)의 <일본에서 온 우리말 사전>(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과 같은 역작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정부와 연구기관과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참고문헌

이윤옥. 2010. <사쿠라 훈민정음: 국어사전 속 숨은 일본말 찾기>. 인물과 사상사.


원문: 박헌명. 2018. 미망인? 과부? “故 OOO의 부인?” <최소주의행정학> 3(4): 3-4.


문재인씨가 지난 17일 대통령 취임 100일을 기념하여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했다. 설레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고, 또 흐뭇하기도 했다. 높은 지지율에 걸맞는 그런 회견을 해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조바심에 가까왔다.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진솔하게 말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다. 대화에 굶주리고 목말랐던 국민들의 마음이리라. 회견이 끝난 뒤 답답했던 속이 풀린 듯한 시원함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럼 이명박근혜가 문재인보다 잘했니?


문재인씨의 기자회견을 두고 역시 여야의 평이 갈렸다.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이념과 처지를 언급한 수준이다. 지도자가 레드라인을 밝힌 것이 적절하지 않았다느니, 원론 수준에 머물렀다느니, 시간이 부족했다느니 등은 점잖은 편이었다. ‘이명박근혜’를 배출했던 야당의 반응은 알맹이가 없는 억지 자화자찬이라느니,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느니, 여전히 ‘쇼통’이라며 깎아내렸다. 사실과 무관하게 기자회견이 반드시 잘못되어야 한다는 신앙에 가까운 소망이리라. 만일 똑같은 잣대로 이명박근혜의 기자회견을 평했다면 그들은 무어라 말했을까?  

지난 9년 동안 청와대는 대답없는 구중궁궐이었다. 박근혜씨는 취임 13개월만에 첫번째 기자회견(2014.1.6)을 가졌다. 대부분 대화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왔다. 일방적으로 국민들을 지시하고 가르치고 윽박지르고 야단쳤다. 국민들이 묻는 것을 가로막거나 모른 체 하거나 그저 침묵했다. 속이 찔리는 의혹 제기는 근거없는 유언비어, 괴담, 음모, 소설, 선동으로 매도하고 권력을 동원하여 찍어눌렀다.

2008년 ‘광우병 파동’때 이명박씨는 촛불시위를 내려다 보고 반성했다지만 뒤에서는 시위대를 보복하고 여론조작을 시도했다. 2010년 세종시가 원안대로 추진되면 나라가 거덜날 수 있다고 몰아붙였지만 공론과정도 없는 ‘노무현 흔적 지우기’로 끝나며 체면만 구겼다 (수정안이 부결된 후 반성도 없이 태연하게 나라를 거덜낸다던 원안을 추진했다). 2014년 300여명의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바다속으로 가라앉던 시간에 박근혜씨가 어찌 했는지 아직까지 속시원히 답하지 않았다. 2016년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사과랍시고 대국민담화를 세 번씩이나 했지만 매번 국민들을 불질러 광장의 촛불로 타오르게 했다. 국민이 알고 싶은 것에 답하지 않고 그들이 알리고 싶은 것만 여과없이 쏟아냈다.

상대방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條理있게 말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일인가? 과연 언어능력을 가진 인간이란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을까? 인간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한 세월이었다. 최소한 지도자는 유권자와 자유롭고 효과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국민과의 대화’와 ‘대통령과의 대화’

나는 문득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열렸던 ‘국민과의 대화’와 이명박 정부에서 두 차례 열렸던 ‘대통령과의 대화’ (2008.9.9과 2009.11.27)를 생각한다. 단순히 행사 제목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화자의 생각과 국민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저 ‘국민과의 대화’는 지도자가 유권자에게 다가가서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해소시켜주는 것으로 국민에게 방점이 있다. 1998년 1월 18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국민과의 대화’를 시작한 김대중씨는 독특한 해학과 구수한 말법으로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노무현씨는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2003.3.9), 언론인과의 대화(2007.6.17), 심지어는 TBS를 통해 일본 국민과의 대화(2003.6.8)까지 시도했을 만큼 듣고 말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두 대통령은 방식은 달랐지만 그 누구보다도 대중에게 말하고 글쓰는 일에 사명감과 열정과 재능을 보였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강원국 2014; 윤태영 2016). 두 사람은 탁월한 문장가였고 당대 최고의 문필가였다(강원국 2014). 민주주의와 지도자의 말하기에 대해 노무현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윤태영 2016: 5-7).  

“말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 지도자다. 그런데 말만 잘하고 일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 민주주의의 핵심은 설득의 정치이다. 그래서 ‘말’은 민주정치에서 필수적이다. ... 말은 한 사람이 지닌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빈곤하면 말도 빈곤하다. 결국 말은 지적 능력의 표현이다. ... 말을 잘하는 것과 말재주는 다른 것이다. 국가 지도자의 말은 말재주 수준이 아니고 사상의 표현이고 철학의 표현이다. 가치와 전략, 철학이 담긴 말을 쓸 줄 알아야 지도자가 되는 법이다.”

‘대통령과의 대화’는 국민들이 지도자를 초청하여 의견을 듣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불러다가 묻고 따지는 것이다. 2003년 일본 TBS에서 노무현씨를 초청하여 진행한 프로그램 제목은 ‘한국 노무현 대통령과의 솔직한 대화(韓國盧武鉉大統領 本音で直接對話)’였다. 취임 4주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화(2007.2.27)는 주요 신문사나 방송사가 아닌 인터넷신문협회가 마련하였고 정치평론가나 교수가 아닌 연예인 김미화씨가 진행하였다. 반면에 1988년 전두환 노태우를 5공화국 청문회에 불러내 내란, 학살, 비리 등을 추궁追窮한 일은 후자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청와대가 주체가 되어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였고, 지도자가  방송에 나와 대본대로 ‘연기’를 하였다. 질문지가 사전에 유출되었고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들 했다. 이명박근혜의 말하기, 시선, 표정은 그들이 뱉어내는 연설과 답변 내용을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 말해준다. 국민이나 민간 단체가 아니라 대통령(청와대)이 스스로 ‘대통령과의 대화’를 한 것이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이런 ‘대통령과의 대화’는 방점이 국민이 아닌 지도자에게 있다. 궁궐에 몰려가 임금을 알현謁見케 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백성을 불쌍하게 여겨 큰 맘먹고 존귀한 용안龍顔을 보여주는 성군의 풍모라고나 할까. ‘대통령과의 대화’는 사실상 ‘어쩌다 성은聖恩을 입어 임금을 알현하고 납작 엎드려서 어지御旨를 어성御聲으로 경청하는 일’에 불과했다.

바람직한 공화국의 지도자상

바람직한 국가지도자의 모습은 시대를 반영한다. 왕조에서 원하는 임금의 자질과 품격은 공화국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소위 성군聖君이라는 군주 이념형(ideal type)은 품성이 어질고 덕이 뛰어나며 학문을 닦아 국정을 잘 돌보는 왕이다. 나라의 주인이자 나라 그 자체인 군주가 소유물의 일부인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어야 한다. 맹자가 말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은 책임과 의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군주가 백성에게 베푸는 시혜施惠다. 하지만 공화국에서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지도자는 국민을 대신해서 국정을 이끌어갈 뿐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주인인 국민의 질문에 답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인군자聖人君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기본은 해줘야 한다. 그 기본은 헌법과 법률과 상식을 어기지 않고 유권자의 요구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업무시간에 ‘여성의 사생활’을 운운하는 것은 공화국에서 용납될 수 없다.  

대한민국이 공화국이 아니라 왕조였다면 아마도 노무현씨가 용상龍床에서 쫓겨날 확률이 제일 높았을 것이다. 수구언론이 그려낸 모습을 보면 (예컨대,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발언은 맥락없이 단장취의斷章取義한 왜곡보도다), 미천한 출신인데다가 언행에서 군주의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시민들은 그런 자연스럽고 사람냄새 풍기는 노무현식 말법에 환호했지만 왕조의 백성들은 쌍스럽고 천박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노무현씨를 탄핵소추했듯이 터무니없는 명분이라도 내세워 무조건 왕을 끌어내리려 작당을 했을 것이다. 노무현씨는 조선왕조로 치자면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도망간 아버지를 대신해서 왜군과 싸웠고 서자로서 왕위에 올라 전후복구에 힘쓰다가 북인과 함께 몰락한 광해군에 비견된다. 대통령 후보시절 천덕꾸러기로 당내외에서 따돌림을 받다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었고,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등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지만 수구세력의 파죽공세에 밀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했다.

두번째로 가능성이 큰 경우는 ‘환관정치’로 국정을 마비시키고 백성들을 위기에 몰아넣은 박근혜씨일 것이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괴駭怪한 짓을 벌이다 쫓겨난 연산군처럼 박씨도 끝까지 아빠의 바짓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최순실, 문고리 삼인방, 김기춘, 우병우 등과 함께 엽기 변태 행각을 벌이다가 탄핵을 당한 것이다. 이명박씨는 공과 사, 옳고 그름, 일의 선후를 분별하지 못하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 용산 철거민 참사, 세종시 수정안 파동, 4대강 사업 등을 벌여 나라를 파탄지경에 몰고 갔다. 조선왕조 최초로 서자출신의 왕이라는 열등감과 이순신에 대한 어리석은 의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백성을 사지에 몰아넣은 선조처럼, 이명박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감으로 ‘Anything But Rho’ (노무현만 아니면 뭐든 좋다)를 외치면서 삽질만 해댔다. 백성들이 따르는 이순신을 중용하고 국민들이 좋아하는 노무현에게 시비걸지 않는 일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마지막으로 김대중씨는 탁월한 정치력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했지만 자식문제로 고통을 겪은 영조에 비견된다.

아마도 대한민국이 분권과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동작한 공화국이었다면 박근혜씨가 제일 먼저 쫓겨났을 것이고 이명박씨가 그 뒤를 이었을 것이다. 공화국의 근간인 헌법과 법률을 제멋대로 흔들면서 민의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서 시작하여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고 세종시 건설에 딴죽을 치기 위해 이명박 정권이 얼마나 많은 꼼수를 부렸던가. 특히 박근혜씨는 최순실씨를 끌어들어 국정을 농단한 것이 결정적으로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렸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명박근혜 정권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정적을 탄압하고, 총선과 대선에 개입하였다. 그래서 9년 동안 공화국이 정상으로 동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백성의 입을 닫게 하고 백성의 요구에 답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기 말만을 쏟아내는 짓은 왕조에서라면 몰라도 공화국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머슴이 일을 하다가 실수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유권자를 업신여기고 국민의 명령을 듣지 않는 지도자는 당장 쫓아내야 한다.

수구 정당의 만성 부적응증

이명박근혜와 그들을 배출한 야당은 현재 공화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줄은 아직도 왕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나섰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마약같은 ‘빨갱이 놀음’을 끊지 못하는 자들은 아직도 박근혜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들에게 박근혜는 순진무구한 공주이자 반신반인半神半人인 박정희를 잇는 성군이고, 감히 임금을 모함하여 끌어내린 ‘종북좌빨’들은 척살해야 할 대역죄인이다.

박근혜씨 탄핵에 9할이 넘는 국민이 찬성을 했고 5푼 정도만 반대를 했다. 현재 여당의 평균 지지율이 5할이 넘는 가운데 8할의 국민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구세력은 탄핵이 잘못되었고, 적폐청산에 음모가 있고, 부동산 대책은 부질없고, 청와대가 ‘협치’를 걷어차고 ‘쇼’만 한다고 쏘아댔다. 여전히 다른 시대, 다른 별나라에 있는 정신줄이다. 그들의 주장이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돼지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 돼지인 것을 어쩌겠는가?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벌써 70년인데도, 바뀐 정치와 사회와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적응증이다.

‘국민과의 대화’가 좋은 까닭

문재인씨의 기자회견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부족했거나 아쉬운 대목도 있다. 문재인씨는 김대중씨보다 부드럽지 못했고, 노무현씨만큼 이성과 감성에 호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상도 발음에 눌변이지만 차분하고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난 9년 동안 목말라했던 갈증을 풀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유권자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지도자가 성실하게 답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갈망했지 않은가. 최소한 누가 무엇을 어느 순서로 질문할 것인지를 미리 짜지 않고, 누가 써준 대본이나 수첩을 뜻도 모른 채 주절주절 읽지 않은 것만 해도 큰 변화다. 군대라도 동원해서 세종시 건설을 막겠다는 식의 막말이 사라지고 ‘박근혜 번역기’를 돌리지 않고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해도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까?

이런 ‘국민과의 대화’가 민주주의와 민본주의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왕조 정신줄에서나 가능한 일방통행식 ‘대통령과의 대화’가 아니라서 좋다. 서로 눈을 맞추고 뜻을 나누는 대화라서 나는 참으로 좋다.  

참고문헌

강원국. 2014. <대통령의 글쓰기>. 서울: 메디치미디어.

아이엠피터. 2016. ‘거침없이 불통’ 박근혜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2016. 1. 13. http://theimpeter.com/31649/?ckattempt=1

윤태영. 2016. <대통령의 말하기>. 경기도: 위즈덤하우스.


원문: 박헌명. 2017. 국민과의 대화? 대통령과의 대화? <최소주의행정학> 2(8): 1-2.


공직자와 정치인의 부적절한 말법으로 사회의 공분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은 그 사람의 지식수준과 편견과 도덕성이 기대이하임을 민낯처럼 드러낸다. 화가 나기보다는 참담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여 백성들이 당면한 문제를 풀어야 할 공복公僕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서로 오해를 풀고 화합을 하기 위함인데 그런 말법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고 듣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기 때문이다. 공직자들이 적절하지 못한 말법을 사용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보다도 그 말하는 모냥새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임도 져야 한다. 비열하고 무책임한 공직자의 말법 두 가지를 살펴보자. 

2010년 1월 17일 이명박씨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세종시 수정안이 백년대계를 위한 고육책임을 넌지지 말하고, 같은날 정운찬씨는 세종시에 한 부처라도 옮겨 “행정부처가 분할되면 나라가 거덜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18일). 노무현씨의 세종시 계획안은 나라를 거덜낼 지도 모르는 흉악한 정책이고 세종시 수정안은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이라는 소리다. 사람마다 가치와 선호가 다르기 마련이나 국가 정책을 놓고 뜬금없이 낙인을 찍고 저주하는 것은 지나치다. 아무리 정치 수사라 해도 비열한 짓이다.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정말 세종시 계획안이 백년대계가 아니라 나라를 거덜내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선거때에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하지 말아야 했다. 원안추진이 어렵다면 불가피한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약속한 것을 뒤집는 것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참회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느닷없이 백년대계는 커녕 나라를 거덜낼지도 모르는 흉악한 짓거리로 몰아붙였다. 자신이 공약한 것을 저주하는 황당한 자기부정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소리다. 당선을 위해서라면 나라가 거덜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소리다.

정말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공직자라면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된다면 원안대로 추진하겠다고 답해서는 안된다. 수정안이 나라의 백년대계임을 확신한다면 대통령이든 총리든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백성들에게 엎드려 호소할 것이다. 이명박씨의 말대로 “정권에 도움이 안될지라도”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수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백성의 신뢰를 잃었으니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으나 다시 한번 냉철히 생각해줄 것을 읍소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씨도 정운찬씨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수정안이 부결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에 눌러앉아 원안을 추진하였다. 또다른 자기부정이다. 애초부터 수정안이 그들의 신념이나 국가의 백년대계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뜻이다. 국가나 백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이문영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선공후사先公後私와 정반대이다. 기껏 해봤자 ‘나는 노무현이 싫다’ 자신의 심사를 고백한 것일 뿐이다.  

박근혜씨도 마찬가지다. 강한 자의 권리만 있지 책임은 없다. 상대방이 어찌하든 자신의 입장을 반복하는 독백만 있지 상대방과 교감하는 진지한 대화는 없다. 2004년 4월 18일 밤에 한국방송공사에서 열린 특집 <국민대토론 : 17대국회 어떻게 풀 것인가?>에서 사회자가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전화인터뷰를 한 내용을 적어보자.

사회자: 헌재결정이 만일 탄핵안에 대해 기각 결정을 할 경우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나라당이 어떤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질것인가를 물었는데 여기에 대한 박대표의 입장은 어떠 하십니까?

박근혜: 헌재결정은 당연히 수용해야되고 저희는 일관되게 그런 주장을 해 왔습니다.

사회자: 아니 질문의 요지는요, 한나라당이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박근혜: 저희 입장은 수용하는 것이지요.

사회자: 단순히 수용하자는 것이 다입니까?

박근혜: 네!

모두들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김영삼씨의 “굶으면 학실히 죽는다”에 필적하는 사오정 말법이다. 잘 들리냐는 질문에 ‘잘 안보여요’라는 답변이다. 게다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날치기하여(합의가 아닌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어지럽혀 놓고, 헌재 결정을 그냥 수용한다니... 힘을 남용하여 사회 혼란과 분열을 초래해 놓고 책임은 모르쇠란 말인가. 어찌 그리 쉽게 “네!”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반성도 없을 뿐더라 책임이라는 개념조차 찾을 수 없다. 이게 공직자(당시는 공당의 우두머리)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허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수용하지 않고 기어이 어떻게든 끝장을 내보겠다는 심산이었나? 암살자나 반란군을 동원하지는 않을테니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는 소리인가? 온갖 패악질은 다 해놓고 자기편조차도 민망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구석에 몰리니까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리려는 양아치 수작이다. 그것도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것이 아니라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마치 큰 양보라도 하듯이 떠벌리면서 끝까지 허세를 부린다. 그러면서 정작 선거 때에는 “잘못했다” “살려달라” 애걸복걸하며 백성들에게 표를 구걸하는 기회주의자로 잽싸게 탈바꿈한다. 

이런 자들에게는 公은 없고 私만 있다. 이문영(1996: 311)은 논어「자로子路」편을 인용하며 “일은 國政이어야지 사사로운 집안일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정반대 길을 걷는 자들이다. 힘을 얻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공복이라는 생각이 혼미하거나 아예 그런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권한과 이득만 생각하지 책임과 백성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 체면이고 염치고 따지지 않는다. 私만 있고 利만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호주머니 돈으로 4대강 사업과 자원 외교를 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돈(백성의 세금)이기에 자기 돈처럼 뿌려대면서 생색을 내고 다닌 것이다. 부처이름을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예컨대, ‘미래’와 ‘창조’)를 넣어 바꾼 것도 公과 私 구분이 없는 정신줄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심하고 비열하고 무책임한 말법 그대로여서 한없이 부끄럽고 비참하다.




원문: 박헌명. 2016. 비열한 공직자의 말법과 선공후사. <최소주의행정학> 1(3): 1.

테러 의심만으로도 국가정보원이 제멋대로 (법원의 영장없이 자의恣意로) 국민을 감청하고 금융계좌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 2016년 2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입법부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이 법안에 합의를 보지 못하고 행정부에서는 박근혜씨가 법안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책상을 내리친 가운데 국회의장 정의화씨가 북한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발사 등을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고 규정하고 법안을 직권상정하였다. 이에 야당의원들이 반발하여 국회법 제 106조 2에 근거하여 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 무제한 토론을 며칠째 진행하고 있다.

이 무제한 토론은 지난 수십 년 간 벌어진 법안 날치기와 이를 둘러싼 폭력을 막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다수당의 횡포를 소수당이 폭력이 아닌 말로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를 보장하여 주먹질 대신에 말로 다투도록 한다는 점이다. 법안을 반대해야만 하는 애절함이 있으면 주먹이 아닌 말로 약자(소수당)의 원망을 풀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문영 (1980: 357; 1986: 290; 2001: 187)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때리지 말고 말로 합시다’라는 세간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Leiter (2010)는 John Stuart Mill의 논리를 빌어 말할 자유의 가치를 논구하였다. Mill에 의하면 인간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언제든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허용해야 하며, 우리가 진리 전체가 아닌 부분을 가지고 있는 한 다른 의견을 접해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진리 전체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 만큼 자신있게 다른 의견 (설령 완전히 틀린 의견이라 하더라도)에 맞서야 한다 (Leiter 2010: 164). 요컨대, 말할 자유는 불완전한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 무제한 토론은 이러한 명제에 부합하는 제도이다.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 (이문영 2001: 246).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야당의원들의 무제한 토론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다.

비폭력과 말

이문영 (1986: 290; 1991: 322; 1996: 404; 2001: 105)은 평소에 비폭력을 설명하면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임 역설하였다. 이문영 (1991)은 “때리는 것인 폭력의 반대는 매를 맞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지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118쪽). 상대방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매를 맞으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비폭력과 말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통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문영 1980: 6; 이문영 1991: 30, 118).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억압하고 때려서 일을 한다 (이문영 1986: 242). “때리지 않고 말로 하는 사회가 민주사회이다” (이문영 1991: 317). 말은 토론을 통해 약속(합의)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계약이 되고 법이 된다 (이문영 1980: 357). 비폭력은 (1) 약자를 일단 보호하고, (2) 약자를 성장시킨다 (이문영 1991:18-19). 어차피 약자는 약해서 강자에게 쓸 폭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먹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문영 2001: 148). 그렇지 않으면 약자는 더 센 폭력과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주먹이 아닌 머리를 쓰는 일이 바로 비폭력이고 말이다. 이 비폭력이 약자가 강자의 폭력을 극복하고 끝내는 평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무기이다 (이문영 1986: 297-298). 또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성질(도덕성)이기도 하다 (Park 2015: 292). 그러면 도대체 그 ‘말’이란 무엇인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은 너무나 옳고 지당至當해서 상대방조차도 그의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6, 80, 491, 497). 상식과 규칙에 비추어 올바른 말이며 진리이다 (이문영 1986: 242; 이문영 1991: 351). 군더더기 없이 “말할 것만 말하는 것”이다 (이문영 1991: 18). 그래서 진리의 반대어는 비진리나 허위가 아니라 바로 폭력이며, 말의 반대어는 침묵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문영 2001: 187, 189). 또한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와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말이어야 하며 (이문영 2008: 150, 491), 말을 하되 말만을  해야 한다 (이문영 1996: 56). 비폭력은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이며 (이문영 2008: 65), 그 비폭력이 말이고 최소한의 발언이다 (이문영 1996: 56). 즉, 비폭력=말=진리=최소라고 할 수 있다. 소정 선생님의 최소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모두 ‘말’이 아니다. 이문영 (2001)은 예수의 비폭력 저항을 설명하면서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님을 상황은 보여준다” (246쪽)고 적었다. ‘말폭력’도 폭력이라는 뜻이다. 또 비폭력은 완전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이문영 2008: 59).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언어, 감정, 심리 등과 같은 ‘불완전한 비폭력’도 폭력이다. 강자의 폭력에 약자가 어설픈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자의 폭력이 가혹할수록 약자는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완전한 비폭력에 의지해야 한다 (이문영 1986: 289, 298). 군더더기나 감정 발산을 피해야 한다. 꼭 필요한 실존 발언만을 최소로 해야 한다. (이문영 1996: 56).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목소리를 가다듬고 교과서를 읽듯이 개인 감정을 걷어내고 말해야 한다 (Park 2015: 290).

말이 아닌 ‘말폭력’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말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갑질’로 표현되는 불공정과 강자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말폭력에 내성耐性이 생겨서인지 이제는 어지간한 언사는 폭력으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점점 더 오감을 자극하도록 말폭력은 거칠어지고 흉포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공직자와 정치인이 즐겨쓰는 말법에서 두드러진다. 주먹질은 무대 뒤로 감춰지고 ‘말두겁’을 쓴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간의 합리성을 살리고 지혜를 모으려는 대화와 토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당장 너를 짓밟아야만 내가 산다는 그런 정신줄에 사로잡혀 있다. 생사 기로에서 무슨 수를 쓰든 피난열차에 올라타야 하는 피난민 정신줄이다.

무제한 토론을 하는 중에 말을 못하게 하거나 훼방놓는 언사言辭는 폭행에 가까운 말이다. 테러방지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면서 윽박지르고, 반대편을 국가 안보와 안전을 내팽개친 무책임한 세력으로 매도罵倒하는 것은 말이 아닌 폭력이다. 상대방의 의견이 완전히 틀렸다 해도 당당하게 맞서라는 Mill의 지적을 무색케 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고 믿고 있다 해도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傲慢일 뿐이다. 무제한 토론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최소한의 실존 발언으로) 끝까지 상대방의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노여운 감정을 흘린다면 이것 역시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다.

좀 더 야만스런 말폭력도 종종 경험한다. 예컨대, “오세훈은 산소같은 후보이고 한명숙은 연탄가스 같은 후보”라고 말하고 “안상수는 1급수이고 송영길은 5급수”라고 외쳐댄다. 아마도 간단명료하게 의미전달을 하려는 선거전략일는지는 모르지만 밑도 끝도 없이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저주하는 짓이다. 말두겁을 쓴 파렴치한 폭력행위다.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빨갱이가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빨갱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빨갱이칠을 해놓고 돌팔매질을 할 뿐이다. 이쯤되면 대화니 토론이니 합리성이니를 따질 판이 아니다.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산다는 생존전쟁에서 패거리를 나누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할 뿐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연탄가스가 되고 5급수가 되어버린 상대방과 그 식구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참으로 천박하고 비열한 말폭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화는 커녕 최소한의 인간존엄성마저 해치는 짓이다. 이런 야만스러운 말폭력은 비단 피아간 경쟁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2월 10일 이승준 기자가 요약한 김종인씨의 기자간담회 발언을 보자. “안철수 대표가 말하는 공정성장론과 김 위원장이 말하는 포용적 성장론은 어떤 차이가 있나?”는 질문에 대해 김종인씨는 이렇게 답한다.

“안 대표의 공정성장론은 시장의 정의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정의만 갖고 경제문제 해결이 안된다. 시장정의, 사회정의 조화를 맞춰야 하는데, 그게 포용적 성장이다. 그 사람(안철수)은 경제를 몰라서 누가 용어를 가르쳐 주니까 공정성장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하고 많이 이야기해봐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샌더스라고 했다고 했다가, 자기가 스티브 잡스라고 했다가 왔다갔다, 그 사람이 정직하지를 않다. … 그럴 수도 있다. (안철수는) 시장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를 구분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의사하다가 백신 하나 개발했는데 경제를 잘 아나, 적당히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른바 배울 것 다 배우고 알 것 다 알 만한 사람의 언사로 믿기 어렵다. “경제를 몰라서 누가 용어를 가르쳐 주니까,” “…구분지을 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정직하지를 않다,” “의사하다가 백신 하나 개발했는데…” 등은 사실여부와는 별개로 말하는 자의 품격을 의심케 한다. 공당公黨의 우두머리의 입에서 나온 언사가 저자 거리의 거간꾼이나 건달의 말법을 닮아 있으니 말이다. 어찌 그리 쉽게 상대 정당의 수장을 깔아뭉개는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오랜 정적도 아니고 얼마전까지도 ‘멘토’(무슨 뜻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지는 모르겠으나)였다는 사람이 아닌가? 여당과 각을 세운다는 면에서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은 김종인씨가 안철수씨에게 ‘직격탄’을 날렸다고 흔히 말한다. 얼마나 말폭력에 시달렸으면 이젠 말폭력으로도 부족해 말폭탄을 쐈다고 표현한단 말인가? 말 그대로 상대방 가슴팍에 ‘직격탄’ 을 박아넣어 말로 피와 살을 한방에 날려버리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치도 않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하다. 말폭력의 당사자와 희생자는 물론이려니와 방송과 신문에서조차 그 뜻을 깊이 생각치 않고 으레 그러려니 하고 있다.

왜 꼭 이렇게 남을 깎아내리고 짓밟아야 하는가? 의사는 경제를 알면 안되는가?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경제이론을 알아야 하는가? 경제학 박사는 쿠데타 세력을 편들고 여야를 왔다갔다 해도 되지만, 의사는 기업을 크게 일구었어도 경제를 말하거나 정치를 하면 안되는가? 얘기해 보면 사람을 그리 잘 안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그토록 허무하게 박근혜씨에게 버림을 받았단 말인가? 사실관계는 물론 논리도 품격도 없는 ‘말구정물’을 입에서 뿜어낼 뿐이다. 상대방만 구정물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구경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구역질나는 ‘말구정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워 침뱉기다. 생각없이 허공으로 날려버린 ‘직격탄’이 제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도망갈 틈도 없이 피아 구분없이 뼈는 산산조각나고 피와 살은 터지고 찢겨 사방에 흩어진다. 어이없는 자폭自爆이다. 이런 판에 대화, 토론, 약속, 합의, 합리성이 자리할 틈은 없다.

모두 폭행에 가까운 부적절한 언사이다. 지나치고 불필요한 얘기다. 최소주의에서 요구하는 실존적이고 간절한 말이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생각없이 내뱉어서 쓸데없는 불란만 자초하는 말폭력일 뿐이다. 말두겁을 쓴 폭력에는 사람은 없고 처절한 피아만 있다. 사실과 논리는 없고 매도와 저주만 있다. 약속은 없고 배신만 있다. 상식은 없고 광기만 있다. 원칙과 합리성은 없고 제멋대로만 남아 있다. 상대방의 이성이 차마 거부하지 못하는 그런 지당한 말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니 설령 지적한 것 모두가 맞다고 해도  상대방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 말본새가 싫어서 원망과 적의만 품을 것이다. 결국 대화를 열고 토론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묻지마 말전쟁’을 시작하는 일이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기만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라

이렇게 ‘말폭격’을 해놓고 이성에 근거한 토론과 합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솥밥을 먹었던 동지가 아니었던가?『 論語 』<衛靈公>편에 ‘스스로 책망하기를 후하게 하고, 타인을 적게 질책하면 원망이 멀어진다’(躬自厚而薄責於人則遠怨矣)고 했다. 이 문구를 인용하며 이문영 (1996: 429)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개인윤리이다. 남을 폄하하거나 남의 실수를 악용하여 그 위에 올라서기보다는 자신을 잘 갈고 다듬어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야만이 아닌 문명을 지향하는 한 상대방과 대화하고 토론하여 합의를 이끄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자기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적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말전쟁’으로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먹질을 포기했으면 폭력과 같은 말을 피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 서로를 상처내지 않으려는 최소 조건이자 비폭력이다. 인간의 자랑인 언어능력을 최대로 살려 사실에 근거한 논리로 말을 해야 한다. 적이 들어도 도저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공손히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이 약속을 만들고 규칙과 법이 되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 특히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이런 비폭력과 말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한다. 이제 그만 끝 간데 없는 ‘말폭력’ 전쟁을 끝내고 서로의 지혜를 모으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화와 토론을 시작했으면 한다.

참고문헌

Leiter, Brian. 2010. Cleaning cyber-cesspools: Google and free speech In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edited by Saul X. Levmore and Nussbaum, Martha Craven, 155-173.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무제한 토론 제도와 말이 아닌 말폭력. <최소주의행정학>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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