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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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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07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나는 이문영 선생님의 마지막 학부 지도학생이다. 1987년 봄 고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을 때 동기생이 65여명 되었는데, 가나다 순으로 학번을 매겼다. 절반을 나눠서 앞쪽에 있는 동기생들이 정년을 앞둔 선생님께 지도를 받도록 배정되었다. 그 앞쪽 절반의 거의 끝에 내 이름이 있었으니 마지막 지도학생이라 해도 과한 말은 아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고대스러운” 사제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많은 동기생들이 지도교수가 누군지도 모르거나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선생님 화갑기념 논문집 출간회에 가서 심부름을 하고, 동기생과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쌍문동 선생님 댁을 불쑥 방문하고, 현민 유진오 선생 빈소사건에 사용된 피켓을 만드는 일을 거들고, 다른 대학의 행정고시반 운영현황을 조사하여 선생님께 보고하고, <자전적 행정학> 원고를 타이핑해드린 것은 특별한 우연이자 행운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감성이 풍부한 촌티나는 학생이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많으나 제대로 표현할 줄을 몰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생각한 것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더욱 힘들어 했다. 하려는 말과 입으로 나온 말이 달라 종종 당혹스러워 했다. 생각은 많아서 터질 듯 쌓여만 가는데 마땅히 배설할 방법을 알지 못해 끙끙거렸다. 교과서에 있는 민주주의와 최루탄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현실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았다. 이러한 괴리에 화가 나고 그것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화가 났다. 시한폭탄처럼 위태위태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지독한 혼돈과 분노와 좌절 속에서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고대 교수들의 4.22 호헌 반대성명, 6.10 민주항쟁, 6.29선언이 이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재무행정>을 수강하면서 무언가 깨닫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복식부기라는 돈셈 원리에서, 처음 30만원 목돈을 만들기가 더 어렵다는 대목에서, 처음에 들어온 30만원짜리 사람을 들볶아 대면 나중에 30원짜리도 안되는 폐인이 되어 나간다는 말씀에서(이문영 1991:198) 나는 실마리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전체가 아닌 몇몇 파편을 주워듣고 기뻐했을 뿐이다. 사실 선생님 말씀은 대개가 어려웠다. 나름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뜬구름같은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고 다만 몇 마디라도 이해하려 애썼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여러 번 곱씹어 생각했고, 가끔씩 늦게나마 그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다.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꾸준함”이 귀하다 말씀해주시고,『論語』學而篇에 나오는 “巧言令色 鮮矣仁”을 설명해주셨을 때 나는 많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정년퇴임식을 마치고 불쑥 내게 오셔서는 “박헌명의 정년은 언제지?”라고 물으셨다. 꽃다발 고맙게 받았다, 꾸준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그리 뜬금없는 질문으로 대신하셨으리라. 내가 가장 아끼는 선생님의 말씀은 <자전적 행정학>(1991: 22)에 적으신 다음 문장이다. 

“나는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고--또 잊고도 있고--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기억하건대 그 책을 쓰시기 전에도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이 마치 내가 한 말인 듯 느끼고 있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다.1) 아마도 내가 문장으로 적지 않았다 해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이 마치 내 생각이나 글처럼 그렇게 느껴졌을는지 모른다. 아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뜻인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마침 그 비슷한 경험을 하고서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다”

어쩌면 위 문장은 그냥 어떤 사람의 평범한 소망처럼 들릴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그 속뜻을 알기 어렵고 별다른 감흥을 얻기도 어렵다. 선생님의 말씀이 늘 그러하듯이 그 독특한 맥락의 자락을 잡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먼저 첫번째 문구를 살펴보자. 왜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을까? 사소한 일을 가지고 일희일비하는 소인배가 아닌 대인배가 되기 위해서일까? 성인군자가 되어보기 위함일까? 아마도 정답은 내가 살기 위해서이다. 그 섭섭함을 마음에 담고 산다면 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섭섭함이 화가 되고 분노가 되어 궁극에는 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병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독재정권에게 참혹하게 당한 사람들이 대개는 오래 살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화병이었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추측하셨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런 화를 마음에 담고 산다면 어찌 멀쩡하게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임에랴...  

그런데 누가 섭섭하게 한 이일까? 생각컨대,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독재자와 그 떨거지들이 아니다. 섭섭하게 한 자들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될 나쁜 짓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섭섭하게 한 이는 먹고 살려다 보니 독재자의 지시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른 평범한 공무원일 것이다. 지독한 고문과 탄압에 시달린 나머지 독재자에게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억지로 협조하는 사람들이다. 더 가깝게는 민주화운동을 같이 했으면서도 기본 생각이 달라서 민주화 과실을 탐하여 일을 그르친 사람들일 것이다. 동지이기 때문에, 동지였기 때문에 섭섭하지만 그만큼 더 아픈 것이다. 

이렇게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분들의 처지를 인간적으로 긍휼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려야 할]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해서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문영 1986: 96). 또한 동지와의 합의를 중요시하고 동지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동지들과 같이 일하다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96: 429).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최소주의일 것이다. 섭섭하게는 했지만 백번을 양보해도 그들이 나름대로 최소한을 지켰기 때문이다. 최대를 하지 않았어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을 안하는 것보다 마땅히 안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쁘다(이문영 1996: 420). 즉, 무엇을 안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에 앞선다(404쪽). 조지훈 선생은 “사람은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이문영 1986: 329). 결국 나를 섭섭하게 한 이는 마땅히 안해야 할 짓은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서울 때에도 그 최소한을 버리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동아리에서 경험한 일을 떠올린다. 다수가 동아리의 목적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울려 노는 일(사교)에 몰두한다. 원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외면을 당하고 비난을 받는다. 모두가 나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났다. 애초부터 합의한 일을 하자는 요구를 다수와 학번으로 무시하고 핍박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연히 여자 동기생이 일을 담당한 임원으로서 내 일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애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더 열심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관심이라는 것도 최소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최소한 동배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눈꼽만치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참으로 어려울 때에 그런 동배조차 없었다면 나 자신이 너무 서글퍼졌을 것이다. 섭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애의 최소한이 고마왔다. 은연한 애정을 느꼈다. 이 땅의 많은 “알뜰한 당신”들이 그 애처럼 지켜야 할 최소를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이 나라가 이 정도라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그들이 보여준 최소에 감사한 것은 나를 번뇌에서 자유롭게 했고, 이성과 상식에 머물게 해서 지나친 선택(폭력)을 하지 않도록 했다. 

나는 선생님께서 적으신 “--또 잊고도 있고--”라는 표현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을 하셨나를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섭섭하게 한 이를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지였다면 더 섭섭하고 잊는 일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모두 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정말 그렇게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정말 “지켜야 할 최소를 지키려 하는 최소주의자였다”(이문영 2008: 150). 아마도 김석중 사모님께서는 섭섭하게 한 이를 차마 잊지 못하셔서, 그만큼 원망이 깊어서 마음에 병을 얻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석중은 ... 정권을 바로잡지도 못하면서 관직에 들어간 재야 동지들을 민주화 후에 강자에 붙어먹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해 왔다”(이문영 2008: 187).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이 문구는 앞 문구와 대조를 이룬다. 신세를 진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섭섭하게 한 이를 잊는 것보다 더 쉽다. 왜냐면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기억하는 것은 고통이 아닌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푼 것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사람의 기본 품성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울 때 신세를 진 이를 잊고 살거나 오히려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왜 구태여 이런 상식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을까? 

선생님에게 고맙게 한 이는 단순히 고마운 사람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시절에 利가 아닌 義로 이심전심이 된 사람들이다. 무서운 시절에 독재자의 감시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쌀을 보내주고 돈을 보태준 분들일 것이다(이문영 1991: 22). 그 도움 자체가 크지 않더라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박해를 무릅쓰고 손을 내밀어준 그 자체가 눈물나게 고마운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값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이문영 2008: 78). “한계상황에 사는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이문영 1986: 96). 최소의 것을 빼앗겨본 자는 꼭 필요한 최소를 내어준 고마움을 차마 잊을 수 없다. 또 다시 선생님의 최소주의다.2)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을 베풀어준 은혜를 최소한(갚지 못한다 해도) 잊지는 않겠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선생님께서 참담하고 혹독한 세월을 치열하게 참고 견디어오셨다는 뜻이다.   

나는 동아리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몰두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회원들은 이런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해 했다. 모여서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쏟아냈고, 급기야 나를 쫓아내려 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세상은 모두 나를 외면하고 배척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 얼마나 사람을 좌절하게 했던가. 공식모임에서 나는 마지막 발언을 마치고 모든 기운을 소진한 듯 자리에 앉았다. 어떤 미련도 기대도 갖지 않았다. 그때 평소에 과묵하던 선배 한 분이 걸어나와 차분한 어조로 발언을 하셨다. 그를 몰아세우기 전에 스스로 우리가 어떠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의 비판에 떳떳했는가, 성찰도 없이 대안도 없이 몰려다니며 사람 하나를 낙인찍어 쫓아내면 그만인가 그는 물었다. 냉정을 되찾아 모두가 반성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책임을 느낀다며 상임위원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이 최소한의 발언에 아무도 감히 토달지 못하였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과 최소주의와 자기희생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말이었음을 기억한다. 그후 나는 그 분을 나에게 고맙게 한 이로 알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그냥 고마운 이가 아니라 최소를 다투는 한계상황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진리를 살려냈으니 가슴에 사무치게 고마운 분이다. 

“고-마-워...”

나는 2013년 12월 말 고대병원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힘든 고비를 넘기신 직후였다. 아무 말씀도 없이 내 얘기를 힘겹게 들으셨다. 편히 쉬게 해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려는데, 물끄러미 지켜만 보시던 선생님께서 내게 숨을 내쉬듯이 말씀하셨다. “고-마-워...” 나는 마지막 말씀임을 직감했다. 해드린 것이 없어서 항상 송구한 제자를 기억해주신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간절한 느낌으로 들었고, 끝까지 잊지 않으려 애쓰시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 순간  정년퇴임식을 떠올리셨는지 모른다. 다른 선생님과는 달리 누구에게서도 꽃다발과 축하인사를 건네받지 못하셨다. 내 차례까지 올까 싶어 꽃다발을 안고 내심 초조했던 나는 얼마나 황망했던가.  

하지만 고맙게 한 이는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셨다. 가장 고뇌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내게 한줄기 빛처럼 의지가 되어 주셨다. 비폭력과 최소주의라는 가르침은 군대와 외국생활에서 위기에 처했던 나를 지켜주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의미없는 숫자놀음으로 강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해주셨다. 투석중인 상황에서도 이제 좋은 색시를 만나야 한다며 마음을 써주셨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색시를 데리고 가서 인사시켜드린 것이 내가 가장 잘 한 일이었던 것같다.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린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게 한 선생님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마지막까지 진솔하고 간절하셨던 바로 그 마음으로 말이다. 

끝주 


1) 중학교 국어선생님께서『論語』學而篇을 인용하시면서 曾子는 하루에 세 가지를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반성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단지 오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가를 반성한다고 답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답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와 맥락이 맞닿아 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남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최소한 폐가 되지는 않겠다는...

각주 2)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 (2008)를 읽고 감동한 전라도의 한 치과의사가 선생님의 치아를 치료해 드렸다고 한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그 여의사 일을 종종 말씀해 주셨다. 




원문: 박헌명.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최소주의행정학> 1(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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