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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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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07 이문영의 비폭력과 현실적 이상주의

흔히 사람들은 이문영 선생님을 이상주의자라고 곡해한다. 선생님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행동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선생님께서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고집스레 추구해서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다. 또한 운동권 학생들과 그 태도와 주장이 같은, 혹은 그들을 배후조종하는 “운동권 교수”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열정이 같다는 뜻일 게다. 이러한 곡해는 선생님의 행정 철학과 사상을  이해하거나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만, 직접 원인이 된 것은 쿠데타 정권의 낙인찍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못된 정권은 폭력을 동원하거나 언론사를 사주하여 멀쩡한 (평범한) 사람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낙인찍곤 한다. 조기숙(2012)은 이런 것을 왕따현상이라고 불렀다.1) 선생님에 대한 낙인은 (학자가 아니라) 민주투사,  진보주의자, 이상주의자, 영웅심리로 괴팍한 짓을 골라서 하는 괴짜 등이며, 심지어는 급진 좌파와 공산주의자(빨갱이 교수)를 포함한다 (Park 2015: 285). 이러한 낙인찍기와 왕따질은 선생님을 일반인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아 사람들이 선생님의 진면목을 살펴 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허상만을 진짜인 것처럼 믿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이 정말 진보주의자인지, 괴짜인지, 공산주의자인지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그런 것으로 인식하도록 학습되었다. 선생님께서 스스로를 자본주의자, 중도우파, 명예혁명가, 한국청교도,  최소주의자, 유물론을 배격하는 유신론자로 평한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에 해당하는 회계와 재무를 공부하고 평생 예수를 섬겨 한 교회만을 꾸준하게 다니신 분이 어찌 공산주의자가 되고 빨갱이가 된단 말인가. 정권의 상징조작에 말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원치않는 왕따질(강화자와 방관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님에 관한 가장 흔한 곡해는 이상주의자인 것같다. 진보주의자, 공산주의자, 빨갱이 등은 전혀 터무니없다. 선생님은 과연 무지개를 쫓아 헤매던 소년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이상에만 몰두하였을까? 나는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를 정말 고통스럽게 이해하였다. 나름대로 소화하고 그 참뜻을 깨닫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는 선생님이 이상주의자가 아닌 “현실적 이상주의자”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생님의 행정 철학과 사상의 고갱이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학생증 검사를 참아야만 합니까?

1991년 봄학기에 나는 선생님의 <행정철학> 강의를 들었다. 고대 대학원 도서관 건물에 있는 낡은 강의실에서였다. 선생님의 <자전적 행정학> 원고를 중심으로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을 토론하고, 그 초월윤리를 조직, 인사, 정책, 재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따졌다.  

선생님의 강의가 있던 어느 날 나는 법대 후문으로 들어오면서 학생증 검사를 받아야 했다. 마침 그 날 대운동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경찰이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기 위하여 고대 학생증을 요구했다. 그 당시 경찰은 집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입구에서 학생증을 검사했고, 가끔씩 외부인을 적발하여 체포하기도 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의 불심검문 조항에 근거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모든 출입자를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학생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부당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남의 집 앞을 가로막고 서서 자신이 주인인지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식이니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힘들어 했다. 비폭력이 주먹이 아닌 말로 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비폭력이 “이래야 약자가 일단 보호”가 되고 “이제는 약자가 성장”을 하는지 (1991: 18-19) 마음으로 납득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절제[비폭력]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 (1991: 19)라고 말씀하셨지만 뜬 구름을 잡은 것처럼 공허했다. 답답한 마음이었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을 탓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학생증 요구는 울고 싶어하는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격이었다. 강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여느 때와는 달리 행동하기로 했다. 일이 어찌 될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무장을 한 채 후문을 막아선 전투경찰이 학생증을 요구할 때 나는 당신들이 무슨 권능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물었다. 내 학교를 들어가는데 왜 경찰의 확인을 받고 가야 하는가를 물었다. 학생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던 그 경찰은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질문이 이어지면서 짜증으로 바뀌었다. 심각해진다. 얼마 안있어 상급자로 보이는 (무장을 안한) 경찰이 와서 내게 한마디를 툭 던진다. 학생증을 안보여주면 연행을 해서 신분조회를 한댄다. 그 음흉한 속내가 훤히 보인다. 가관이다. 

폭력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법이 어찌 되어 있는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오직 “쪽수”가 많고 적은지, 물리력으로 이길 수 있는가, 얼마나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가를 묻는 상황이다. 경찰은 “쪽수”와 물리력에 자신이 있었고, 서로에게 피해가 덜 되는 쪽으로 선택상황을 몰고 갔다. 학생 대부분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반항은 그 시작은 장대했으나 그 끝은 비참했다. 강의는 이미 시작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학생증을 보여주고 뛰어와야 했다. 화가 치밀었다. 법과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현실(벌거벗은 권력)에 화가 났고, 어떤 대안도 없이 속수무책인 것이 화가 났다.    

강의실에 들어서서 땀을 훔치면서도 나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미처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한 채 선생님께 여쭈었다. 법대 후문에서 경찰이 학생증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부당함을 알고도 순순히 학생증을 보여줘야 하는가를 여쭈었다. 선생님의 비폭력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나아가 약자를 성장시키는지 알 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철모르는 학생은 흥분해서 질문을 했는데, 선생님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하셨다. 선생님의 답은 허망하리만치 간단하고 쉬웠다. 

선생님은 고대생이 학생증을 순순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학생증 검사가 부당하지 않느냐며 따지듯 여쭈었다. 선생님은 짧게 부당하다고 답하셨다. 그러면 말로 따진 것이 잘못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내가 말로 따졌다기보다는 흥분해서 항의를 한 것을 아셨던 것 같다. 잘잘못을 구분하시기보다는 학생증을 보여주고 오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반복하셨다. 나중에 선생님 말씀을 차분히 생각해 보니 이런 논리였다. 경찰에게 대들면 더 큰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말로 따진다지만 그 상황에서 따지는 것은 사실상 폭력에 가깝다. 경찰도 자기들이 하는 짓이 정당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항의를 하면 오히려 그들이 자극을 받아 또 다른 폭력을 동원할 것이다. 약자가 강자의 아픈 곳을 계속 찌르거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어찌 강자가 가만히 있겠는가. 어차피 정당성이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인가. 하물며 교수도 아닌 학생이 감정을 노골로 실어 따지고 들 경우임에랴... 전투경찰 상급자가 연행을 한다느니 하는 것이 바로 그 폭력이요 보복인 것이다.

너무나 차분하고 간단한 답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할 말을 잃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쓸데없이 경찰을 자극하여 긴장을 조성하는 것은 집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컨대, 고대생이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경찰이 더 열심히 학생증을 검사할 것이고 경찰 인원도 늘렬 것이다. 그러면 외부인이 학교 안으로 진입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반대로 순순히 학생증을 보여주면 경찰은 대충대충 검사를 할 것이고 (정당하지 않은 일을 위에서 시키니깐 마지못해 그냥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외부인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고 하셨다. 특별히 좀 바보같은 표정으로 학생증을 고분고분 보여주면 경찰이 “고대생 놈들이 생각보다 형편없군”하면서 검사를 설렁설렁 할 것이라고 빙그레 웃으며 덧붙이셨다. 

비폭력은 성숙하고 완전한 대응책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듯한 선생님의 답변에 씩씩거리며 대든 나는 마지막 주먹을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분기탱천하여 선생님께 항의를 하듯 질문을 해놓고 바로 한방에 나가떨어진 셈이다. 나는 속으로 처절한 외마디를 내질렀다. “이것이었나...” 선생님은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보다는 강자가 꼼짝없이 악을 계속 저지를 수 없게 하는 대응책을 찾는 것이 약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8: 59)고 적으셨다. “철저하고 엄격한 현실이해”를 강조했고 “현실인식”이 없는 이상추구는 패배주의를 만든다고 하셨다 (1986: 298). 

감정이 실린 말로 따진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폭력”이었고 사실상 난동에 가까왔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 (1986: 297). “비폭력이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함” (2001: 149)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현실에서 힘이 없는 자가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으로 강자에게 대항했다가는 더 센 폭력으로 보복을 당한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현실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이해하지 못한 풋내기 최소주의자의 난동은 이처럼 어이없고 참담한 패배를 자초했다. 한마디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몰랐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완전한 비폭력이 아닌 어설픈 비폭력으로 경찰의 비위를 건드려 낭패를 본 것을 오래 단련된 “감”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이래서 참는 것이, 그리고 철저하고 완전한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것임을 절절히 느꼈다.  
  
실용주의자의 현실적 이상주의

선생님의 비폭력은 이상이 아닌 현실에 근거한 실용주의였다.  일반 백성들이 겉멋이 아닌 실속을 챙기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과연 보수주의자이며, 최소주의자이며, 청교도인 선생님의 모습이다 (2008: 150, 264, 500).

선생님은 이상(이념)과 함께 현실(실현가능성)을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약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대안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비폭력을 말한다. 비폭력이란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두 가지 일을 하면서 비폭력의 길을 간다. ... 하나는 실현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을 한다. 둘은 올바른 이념[이상]에 헌신을 한다” (1986: 294). 선생님은 또 “운동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냥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 같은 것이 운동의 대정신인지도 모른다” (1986: 138) “여호와의 신은 이상주의자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이상주의자이어서 야곱이 최소한도로 불가피한 상황에서 회개하는 것을 뜻있게 본다” (1980: 370)라고 적었다. 선생님은 스스로 여호와처럼 현실적 이상주의를 지향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완상의 햇볕정책을 민주화라는 원칙(이상)에 선통일 요구라는 현실을 흡수한 현실적 이상주의라고 해석했다 (2008: 438).2) 

중요한 것은 현실인식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이상에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 말씀처럼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학생이 자신의 학교를 드나드는 것은 개인의 일이라면, 대중집회를 예정대로 여는 것은 이상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개인의 일에 관한 현실이 아닌 이상에 관한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했어야 했다. 

선생님은 불가능한 일을 대의와 명분만을 앞세워 추구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치열하게 현실을 계산하고 분석하는 분이셨다. 예컨대, 정년을 하면서 얼마를 손에 쥐고 있어야 말년을 걱정없이 보내는지부터 언제 어디서 누가 성명서를 발표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현실을 인식하셨다. 아직도 선생님을 이상주의자라고 폄하하는 분이 있다면 위에 적은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선생님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요 실용주의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끝주


1) “왕따는 단지 가해자가 피해자를 핍박한다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왕따가 성립하기 위해선 피해자를 중심으로 가해자, 조력자, 강화자, 방관자의 역할분담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피해자를 핍박하기 위해선 이를 격려하고 환호하는 조력자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가해자는 조력자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쾌감을 느낀다. 조력자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가해자보다 한 술 더 뜨는 강화자이다. 강화자는 평소엔 피해자처럼 약자로서 설움을 받다가 자신보다 더 약자가 왕따의 타겟이 되면 가해자보다 한 술 더 떠서 피해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다. 강화자의 ‘오버’는 강자로부터 당하지 않으려는 피해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받았던 설움을 자신보다 약자인 피해자에게 화풀이하는 보상심리 때문이기도 하다. ... 하지만 이것만으로 왕따는 완성되지 않는다. 왕따의 종결자는 부당한 왕따를 외면하고 방관하는 다수의 방관자들이다. 관중 중 한 명이라도 용기 있게 가해자의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나선다면 그리고 다른 방관자들의 관심과 동조를 얻어낸다면 왕따는 발생하지 않는다” (조기숙 2012).

2) “나는 민주화가 통일에 이를 수는 있어도 통일이 곧 민주화라는 논의는 통일을 빙자한 독재 정부의 출현을 불러온다고 지적했다. 나는 선통일론은 운동에서 기피해야 할 인기주의라고까지 극언을 했다” (2008: 391).

참고문헌


조기숙. 2012. 안철수 캠프, ‘노무현 왕따’ 현상 이해해야. 오마이뉴스. 2012. 9. 2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1941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이문영의 비폭력과 현실적 이상주의. <최소주의행정학> 1(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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