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6 11:30
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본문

민주주의로 가는 길

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못골 2019. 4. 11. 14:17
지난 5월 문재인씨가 제 19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청와대 위민관爲民館의 이름을 여민관與民館으로 되돌린다고 했다. 2004년 노무현씨가 청와대에 비서실 건물을 새로 짓고서 여민관으로 이름지었는데, 2008년 이명박씨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다수가 이명박씨의 “Anything But Rho”라는 구호로 추진된 “노무현 흔적 지우기”라고 생각했다. 임석규 (2017)는 여민이든 위민이든 뜻은 다 훌륭하니 문패를 갈아치우는 악순환을 피하고 그 뜻을 제대로 구현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러한 두리뭉실한 양비론이 몹시 불편하다. 과연 여민과 위민은 같은가?

<맹자>에 나오는 여민

여민관의 “與民”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로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긴다(與民同樂)”는 표현에 있다. 반면 위민관의 “爲民”은 고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렵다. 단지 백성을 위한다는 뜻으로 추정된다. 임석규 (2017)는 세종의 “위민정치”를 본받겠다는 명분으로 풀이했다. 혹자는 링컨의 말에 빗대어 여민은 by the people에 상통하고, 위민은 for the people에 해당한다고 풀었다 (http://boramaeavengers.tistory.com/266). 여민의 주체는 국민이고 위민의 주체는 정부(청와대와 관료들의 엘리트주의)라는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야 하나…

동양고전종합DB (http://db.cyberseodang.or.kr/)로 살펴보면, 여민은 <맹자>에서 분명한 출처를 찾을 수 있지만 위민은 그렇지 않다. 與民은 <맹자> 본문에서 총 일곱 번 나오는데 與民同樂과 不與民同樂으로 양혜왕장구하梁惠王章句下 에서 두 번 나온다. 나머지 다섯 번 모두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爲民은 <맹자>에 爲民父母 (백성의 부모가 되어)로 세 번, 爲民上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그리고 以爲民望 (백성들이 보고 따라하게 하시고)으로 총 다섯 번 나온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백성을 위하여”라는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논어論語>를 포함한 사서에서도 백성을 위한다는 爲民은 찾아볼 수 없다.

소정 선생님께서 아끼는 <맹자> 양혜왕장구하 4를 살펴보자. 不得而非其上者 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 亦非也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위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기지 않는 자도 잘못이다). 여기서 여민은 “與民同樂”의 일부로 “백성과 더불어”라는 뜻이다. 흔히 알려진 뜻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 위민은 “爲民上”의 일부로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爲가 “위한다”는 뜻이 아니라 “된다”(자격내지는 지위)는 뜻이다. 원문의 맥락을 반영한다면 “爲民館”이 아니라 “民上館”이 되었어야 했다. 爲가 아니라 民上이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풀이하면 백성의 위에 군림하는 자리이니 그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나라를 평안케하라는 뜻이다. 결국 爲民館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제멋대로 갖다 붙인 “막이름”이다.

<맹자>에 안나오는 위민

“위민사상”이라며 사람들이 흔히 언급하는 <맹자>의 문구는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14이다. 하지만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벼운 존재다)이라는 문장에서 民爲는 있지만 정작 爲民은 없다. 왜 그럴까? 당시는 왕조체제였으니 임금을 위한다는 爲君이란 표현은 있을까? 사서 중 <논어>에 爲君이 딱 두 번 등장한다. 하지만 임금답다와 군자가 되다라는 뜻이지 임금을 위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愛民처럼 어떤 일상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충”과 조선왕조에서 특히 강조한 “충성”이 다르듯이,  후대에 필요에 따라 덧칠되거나 조작된 어휘나 용법이 아닐까? 나라에 대한 충성과 군주에 대한 충성이 절대 가치로 등극하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이런 맥락에서 보면 위민과 여민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은 혈통이 분명한 진도개와 개처럼 생겼으나 종마저 헷갈리는 “듣보잡”을 견주는 일이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

국민과 더불어 한다는 뜻을 담은 여민관은 참여정부의 사상과 철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말 그대로 與民觀이다. 물론 틀린 말도 아니고 나쁜 뜻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명박씨는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을까? 노무현씨에 대한 열등의식(자신과는 달리 깨어있는 시민들의 진심어린 성원을 받는 것 못마땅하고 기분이 나빠서) 때문에 저지른 “무조건 반항”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정체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과 더불어 일을 해나간다는 “여민”은 왕조 정신줄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어떻게 임금과 백성이 겸상을 하고 “맞짱”을 뜰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인자한 임금이 어리석은 백성을 긍휼하여 성은을 베푸는 “위민”이 있을 뿐이다. 이명박씨의 爲民觀이다. 백성들은 본시 우매한 존재여서 분순분자들의 유언비어에 쉽게 속고 쉽게 흥분한다. 검은 돈을 받고 촛불을 들고 난동을 부리곤 한다. 철없는 애들까지 선동하여 거리에서 큰 어른인 대통령을 욕보이게 한다. 그러니 노무현이 틀려먹은 것이다. 이러한 이명박씨의 정신줄에서는 당연히 與民이 아닌 爲民이어야만 했다.

爲民觀이 역겨운 까닭

나는 “위민”이나 “애국”이라는 말에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위정자들이 나라를 위한다느니 백성을 위한다느니 하면서 세상을 속이고 자신들을 속였던가? 현대사에서 “애국”이라는 말을 누가 애용했던가? 완장차고 빨갱이를 잡는다고 설치던 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던 구차한 말이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권력을 남용하고 인권을 유린한 자들이 역겹게 내뱉은 말이다. 국민들이 우려하는 4대강 사업과 광물 외교를 벌일 때 넌더리 나게 듣던 소리다. 엽기 변태 행각으로 청와대에서 쫓겨난 박근혜씨를 구출하자며 태극기를 휘날리는 자들이 신물이 나도록 외치는 소리다.

하지만 그들의 “위민”에서 백성은 없었고, “애국”에서 나라는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이 있었다. “위민”의 대상은 온 국민이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는 “자기편”이었다. 국가정보원과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까지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소위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어 국민을 갈라놨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은 국민이 아니라 빨갱이고 종북좌파이고 노빠문빠였고, 꼭 그래야만 했다. 그래서 이창동의 <시>는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만큼 영화인들이 인정하는 빼어난 작품이었지만 이명박과 유인촌에게는 그냥 “빵점”이어야만 했다.   

“애국”의 대상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권이며 집단이지 대한민국이 아니다. 나라가 있다면 바로 그들 자신이다. 따라서 빨갱이와 종북좌파들이 세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는 죽어도 인정할 수 없다. 그들만의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스통을 굴리고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애국”하는 이유다. 우국충정이란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켜고 종북좌파를 만들고 뒷조사하고 집요하게 짓밟았다. 정예요원으로서 쪽팔림을 감수하면서 “가카”를 기쁘게 하는 감동스런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르는 대로 달려가서 빨갱이 타령을 하고 종북좌파라면서 핏대를 세웠다.

그들은 애국을 한답시고 완장차고 거드름을 부렸지만, 사실은 꽂감빼먹듯이 나랏돈을 빼내서 펑펑쓰는 재미가 솔솔했다. 여기 저기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애국한다는 자부심과 자기최면으로 꿋꿋하게 버텼지만 그냥 뒷돈을 받아 챙기는 일이었다. 대체 어디에 백성이 있고 어디에 국가가 있단 말인가? 위정자들이여, 제발이지 위민도 하지 말고 애국도 하지 말라. 백성을 못살게 굴고 나라를 욕보이고 거덜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묻지마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

새로 들어선 정권이 건물 이름을 자기 입맛대로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큰 흠이 없다면 전임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론절차를 거쳐 바꾸는 것이 상식이다. 건물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지만 시시비비를 가려서 말해야 한다. 애초에 이명박씨가 정당한 이유없이 위민관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문제였다. 당시에도 말이 많았을 정도로 합당하지 않았고 쓸데없이 의심만 샀던 짓이었다. 문재인씨가 여민관으로 되돌리는 것은 사필귀정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런데 어차피 전 정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매한가지라면서 이명박씨와 문재인씨의 결정을 싸잡아 악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의도했든 안했든 이런 양비론은 결국 악한 강자의 손을 들어준다. 즉, 이명박씨의 잘못은 덮은 채 문재인씨의 사필귀정을 “악순환”에 쓸쩍 끼워넣는다. “그 놈이 그 놈”이라며 한패거리로 묶어놓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대충 넘어가자고 유혹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튄 놈은 그 죄가 묽어지고 가려진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자는 너무 박하다거나 가혹하다고 몰린다. 튄 놈은 피해자가 되고 사필귀정은 가해자가 된다. 적폐청산이 갑자기 정치보복이 되어 본질을 호도한다. 결국 패악질은 교정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적폐들이다.
 
혹시나 이명박근혜 정권 때는 공연히 해코지 당할까봐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세월이 좋아지니까 (해코지 위험이 없어지니까) 이름을 되돌리는 것을 시비걸고 나선 것이라면 기회주의자들의 “묻지마 양비론”일 뿐이다. 멀쩡한 사람들을 몽롱하게 만들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헷갈리게 함으로써 악한 자들의 편에 서서 적폐를 만들어 왔던 논리다. 나는 이런 양비론의 비열함과 음흉함을 경계하고자 한다.

수구 패악질의 악순환

왜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거듭된 패악질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도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일까? 수구세력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는 사면증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 범죄와 부도덕과 비윤리에 완벽하게 면역이 된 인종들인가? 국가정보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령부가 국내정치에 개입한 증거가 드러났어도 눈깜짝하지 않고 외면하는 강골들 아닌가? 이들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인정하지 않다가 위기가 닥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진흙탕싸움을 벌여 물타기를 시도한다. 적폐청산이 이명박을 정조준한다며 슬쩍 노무현을 끌어들인다.

반면에 수구세력들은 자신이 핍박하는 멀쩡한 자들에게 언제나 가혹한 비난을 쏟아낸다. 흔히 빨갱이나 종북좌파라고 낙인찍힌 민주주의자들이다. 자칭 보수라는 자들은 사소한 일이라도 마치 큰 죄를 지은 양 침소봉대하고 정적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정보기관을 동원하여 약자의 꼬투리를 잡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한번 약점이 잡히면 수구세력의 잘못을 들추는 일을 멈추고 쥐죽은 듯이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털어서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던가. 수구세력은 보수이자 우파이며, 우익보수는 언제나 옳고 정당하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진보이자 좌파이며, 좌익진보는 그 자체로 잘못이라는 단순무식한 정신줄이다.

재미있는 것은 핍박받은 자들은 수구세력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너무 쉽게 인정하고 사과하고 물러선다. 마치 결벽증에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사소한 법적 도덕적 인간적 잘못까지 모두 떠안으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대신 짊어진 예수처럼 자책한다. 그것이 옳은 길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자부심마저 갖는다. 정확하게 사실을 밝히고 합당하게 책임을 따지는 일을 꺼려하고 부끄러워한다.

이런 형국에서 승자는 언제나 수구세력이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정적에게 떠넘기는 용기와 몰염치와 재주를 가지고 있다. 수구세력은 사실을 밝히는 일을 방해하고(은폐하고) 조작하는데 적극적인  반면, 정적들은 사실과 책임을 따지는 일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수구세력은 패악질을 저지를수록 승승장구하고, 반대세력들은 조그마한 실수에도 고개숙이고 물러난다. 수구세력은 서로 단결하여 패악질을 독려하는 반면, 반대세력들은 합당한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수구세력과 합세하여 더 가혹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피해자로 살면서 결벽증과 반성과 사과가 일상화되고 체질화된 사람들의 어리석음이다.

쫄지말고 적폐청산을 말하라

요컨대,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벌거벗은 힘에 기대어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자들을 몰아세우고, 그 반대편 사람들은 사실을 치열하게 따지고 패악질을 비판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우는 일을 낯설어 하고 꺼려 한다. 이런 얼개는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주물러 온 수구세력들의 힘에 눌린 착시효과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수구세력들은 현재 “정치보복”이라고 엄살을 피우면서 또다른 적폐라며 맞서고 있다. 벌건 대낮에 퍽치기당하지 않으려면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힘에 밀려 기득권 세력들에게 매를 맞고 비난을 받더라도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해야 한다 (이문영 1991: 118). 더도 덜도 말고 사실과 법과 상식과 양심에 근거한 옳은 말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노무현씨가 걸었던 길이다. 여민이나 위민이나 뜻이 다 훌륭한 것이 아니다. 노무현의 與民觀과 이명박의 爲民觀이 하늘과 땅처럼 멀어 보인다.

참고문헌

임석규. 2017. 여민관-위민관. <한겨레신문>. 2017. 5. 1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4642.html


원문: 박헌명. 2017. 노무현의 여민관과 이명박의 위민관. <최소주의행정학> 2(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