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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본문

새로운 가치와 길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못골 2019. 4. 7. 21:23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지난 8월 5일부터 21일까지 여름올림픽이 열렸다. 흔히 올림픽을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祝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감흥은 예전만 못하다. 언제부터인가 연례행사인 것처럼 그냥 때가 되면 텔레비젼 앞에서 보는 둥 마는 둥 시간을 죽이곤 한다. 왜 똑같은 경기를 지상파 방송사에서 동시에 중계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우병우와 THAAD 사태를 잊고 박근혜를 더 이상 비난하지 말라는 뜻인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마냥 국민들 모두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텔레비젼 앞에 앉아 선수들 응원이나 하라는 뜻일까? 

왜 “죄송합니다”인가?

남자 10미터 공기권총 경기에서 5위를 차지한 진종오 선수가 기자회견을 “죄송합니다”로 대신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이 생각난다. 올림픽을 포함한 세계대회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정상을 지켜온 선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경기에서 진 다른 선수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준결승전 진출에 실패한 여자배구 선수들도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경기에서 부진했던 박정아 선수는 십자포화같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왜 그들은 죄송한 것일까? 왜 석고대죄를 하듯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소위 세계 랭킹에 비추어 선수들의 기대치를 매긴다. 성적이 기대치를 웃돌거나 금매달을 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다. 그 기대치에 못미치면 그 격차만큼 비난이 쏟아진다. 기대치가 금매달인 선수가 매달을 따지 못하면 반역을 도모한 죄인 취급을 받는다. 기대치와 경기 결과가 메달과 상관없는 선수들은 아예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필명 “ 

버락킴너의길을가라”는 지난 8월 10일 “금메달을 획득하면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아들, 딸로 호명되며 추앙받지만, 패배하는 순간 그들은 버려진 사생아(?)쯤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과 국민에 실망감을 안긴 죄인 그 극단적 위치를 오가야 하는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들...”이라고 적었다(http://www.ziksir.com/ziksir/view/3564). 

금메달 정신줄과 올림픽 헌장

결국은 메달이다. 그것도 금메달이다. 종합순위를 따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은메달이 많아도 금매달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든 금메달을 따고 볼 일이다. 공을 차든, 뜀박질을 하든, 헤엄을 치든, 철봉에 매달리든, 골프공을 치든 상관이 없다. 아마도 방귀뀌기나 눈알굴리기에서 일등을 해도 환호할 것이다. 하다못해 도둑질이나 성추행을 잘해서 금메달을 땄다 해도 환장들을 할 것이다. 이러니 출산율 최저, 자살율 최고, 입양아 수출 최고 등은 금메달만 받는다면 국가의 자랑으로 내세울 판이다. “금메달 정신줄”이다. 금메달병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금메달만 따면 그만이라는 것 아닌가.

현대 올림픽은 19세기 말 쿠베르탱(Coubertin)이 주창하여 시작되었다.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의 기본원칙(Fundamental Principles of Olympism)은 올림픽이 즐겁게 힘쓰는 것, 좋은 교육적 가치, 보편적인 기본 윤리원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존중을 추구한다고 했다(“Blending sport with culture and education, Olympism seeks to create a way of life based on the joy of effort, the educational value of good example, social responsibility and respect for universal fundamental ethical principles.”). 올림픽 정신은 상호 이해, 우정, 결속, 깨끗한 경기를 강조한다(“... in the Olympic spirit, which requires mutual understanding with a spirit of friendship, solidarity and fair play.”). 

과연 금메달 정신줄이 즐거운 마음으로 힘써 경기에 임하고 우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가? 선수들이 상호 결속을 다지고 깨끗한 경기를 하게끔 하는가? 경기에서 지거나 메달을 따지 못하면 국민들에게 석고대죄하듯 죄송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우정, 상호 이해, 결속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금메달을 목에 걸지 않고서는 영웅이 될 수 없고 박수를 받을 수 없는 정신줄에서 어떠한 교육적 가치와 윤리원칙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신체, 의지, 마음을 고양하고 균형있게 묶어내는 삶의 철학(“Olympism is a philosophy of life, exalting and combining in a balanced whole the qualities of body, will and mind.”)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행여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올림픽 표어가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금메달 정신줄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3S운동과 금메달 정신줄 

3S는 Sex, Screen, Sports를 말한다. 흔히 나쁜 정권이 일반 국민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권장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97). 백성들이 현실과 정치를 깨닫고 판단하지 못하게끔 관심을 돌리려는 공작이다. 매일매일 닥치는 일상과 이웃에 관심을 끊고 공공집회에는 걸음을 끊는다. 벗고 찍고 보는 일에 몰두하고, 영화관에 몰려가고, 경기장의 응원물결에 휩쓸린다. 카지노와 (화상) 경마장이 주택가까지 스며든다. 길거리와 인터넷에서 복권과 노름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백성들은 성실한 삶을 포기고 현실에서 도피하여 환상과 도박에 빠지게 된다. 바로 독재자가 원하는 상황이다.  

독재정권은 정치정당성이 없다는 열등감을 끝까지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치명적인 약점을 덮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만한 일을 찾는다. GNP를 올리는 경제사업을 추진하고 4대강사업같은 큰 토목사업을 일으킨다. 무언가 손에 잡히고 눈에 확 띄는 그런 “바벨탑”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또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드높인다면서 선전에 열을 올린다. 정권이 잘하고 있다고 백성들을 세뇌하려는 것이다. 이런 공작에는 스포츠 경기가 제격이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프로 야구, 축구, 씨름을 출범시키고, 88올림픽을 강행한 것이 대표사례이다. 

금메달 정신줄, 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는 3S의 한 축이다. (1) 체력은 국력이라면서 백성들을 동원한다. 시간에 맞춰 온 백성들을 줄세워 국민체조를 하도록 강요한다. (2) 경기 성적이 국가의 경쟁력이 된다. 올림픽 종합 순위가 민족의 우수성 순위이고 국력 순위가 된다(버락킴너의길을가라 2016). 올림픽 10위를 내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3) 따라서 경기를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일로 치환한다. 스포츠는 국가사업이 되고 소위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한다. 선수 개인의 영광이 국가의 영광으로 둔갑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박근혜 정권은 금메달 10개, 종합 10위를 목표로 내세웠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국가에서 예산을 지출하여 선수들을 훈련시킨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수확해오기를 기대한다.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고 국위를 선양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강조한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하거나 축전을 보낸다. 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의 힘을 과시했으니 얼마나 통치자가 흥이 났을 것인가?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영웅으로 추앙되고 온갖 혜택을 받는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와 김정은 정권은 다를 바 없다. 박정희, 김일성, 전두환, 노태우, 김정일 정권 모두 이런 금메달 정신줄로 백성들을 현혹해왔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민족과 국가는 사실 통치자 자신일 뿐이다. 우월성과 자긍심은 금메달이라는 마약이 그려낸 환영이다.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은 올림픽 헌장을 거스르고 있다. 올림픽 헌장 제 1장 6조 1항은  올림픽 경기가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이지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The Olympic Games are competitions between athletes in individual or team events and not between countries.”).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시상식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연주된다. 

금메달 정신줄의 정치경제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에서 올림픽의 기본원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구촌 축전이라지만 선수들은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 결과에 목맬 수 밖에 없다. 결과에 따라 영웅과 죄인이 결정되고, 특혜와 무관심이 갈리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따내면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주어지지만, 실패하면 아무 것도 손에 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포상금과 연금이 달린 문제이니 죽기 살기로 금메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깨끗한 경기가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한다. 비열한 반칙과 행위는 잠깐이고 금메달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선수라기보다는 금메달을 생산하는 기계에 가깝다. 인간이기보다는 금메달을 물어오는 사냥개에 가깝다. 자의든 타의든 사생활을 잊고 불타오르는 애국심과 사생결단할 각오로 금매달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고 지면 패장으로 목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면 인생은 무의미해지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금메달 정신줄을 가진 단체와 국가가 선수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금메달이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수를 선발하고 파격에 가까운 지원을 해준다.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원하는 음료수를 선택하여 빼먹는 식이다. 전투를 하듯이 훈련을 하고 전쟁을 하듯이 경기를 하도록 선수들을 다그친다. 군사작전을 전개하듯이 자세한 계획을 세워놓고 선수들을 닥달한다. 독재정권일수록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조바심을 가진다. 짧은 시일 내에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사냥해 온 선수들에게 넉넉한 보상을 던져주고, 금메달은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밤낮으로 울궈먹는다.    

금메달에 사로잡힌 백성들도 흥겨운 마음으로 축전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기고 지느냐에 몰두하기 때문에 경기 자체를 즐기기 어렵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라는 표현은 승패에 목을 건다는 뜻이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염원할 뿐이다. 이긴 쪽에서는 잔치집이 되고 진 쪽은 초상집이 되는 판이니 어찌 숨돌릴 짬이 있겠는가. 승리한 선수는 영웅이라 부르고 온갖 찬사를 쏟아낸다. 패배한 선수 죄인으로 낙인찍고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것은 경기 자체가 아닌 결과에 대한 평일 뿐이다. 박정아 선수에게 비난을 쏟아낸 사람들이 얼마나 배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몇 번이나 배구경기를 관람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금메달 정신줄에서는 전문가인지 문외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경기에서 이겼는지, 금메달을 땄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승패는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무관하다

경기에서 승패는 피할 수 없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은 일상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승패는 경기의 결과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기는 것이 옳고 지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승패가 선수들의 인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경기 그 자체다. 경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우정을 쌓고, 인격을 닦고, 또 체력을 다지는 것이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선수들의 실력만이 아니다. 그 날의 날씨 (비, 바람, 온도, 습도 등), 선수의 건강상태, 경기장과 장비 상태, 경기장 분위기, 심판의 판정 등이 영향을 미친다. 우연이라거나 운(random error)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대치라는 것은 평균 개념이다. 가장 높은 확률을 보이는 사건을 말한다. 세계랭킹 1위라면 그 선수가 금메달을 딸 확률이 가장 크다는 말이다. 확실히 금메달을 딴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경기는 예측할 수는 있어도 누가 이길 것인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패에 대한 지나친 환호와 비난은 무지와 천박 그 자체다.    

한편 인구수를 고려하면 한국의 성적은 놀랍다. 남한의 인구가 5천만명인데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1억2천만), 독일(8천만), 프랑스(7천만), 이탈리아(6천만)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4억명의 중국이 금메달 26개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천만명당 금메달 0.19개 (=26/140)인데, 한국은 1.8개 (=9/5)를 획득했으니 한국이 10배 더 잘 한 셈이다. 엇그제 월드컵 축구 예선경기에서 한국이 중국을 물리쳤다. 개개인의 축구능력분포가 두 나라 모두 같다고 치면 2천 5백만명 (남자축구니깐)에서 11명을 뽑고, 7억만명에서 11명을 뽑아서 경기를 벌인 결과가 “공한증”이었다. 하지만 이 결과가 조선족이 한족보다 낫다거나 한국이 중국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가끔씩은 안쓰럽게 생각한다. 현대 올림픽의 경기종목은 대개 서구에서 보편화된 것이고, 서구 사람들의 체격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체형과 체력으로 봐도 한국인은 서구인에 미치지 못한다. 애초부터 올림픽은 동양인에게는 불공정한 경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이 맘을 아프게 한다. 금메달만 쫓는 정권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감내하는 선수들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더 크고 빠르고 힘센 경쟁자를 이기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치고, 부딫히고, 넘어지고, 피흘리고, 이를 악무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기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경기는 이기고 지는 자를 가린다. 하지만 겨루는 행위 자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패에만 몰입한다면 슬픈 일이다. 하물며 승패로 선수들을 얽어매고 백성들을 호도하는 일임에랴... 겨루는 그 자체를 즐기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상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는 한 판 승부를 보고 싶지 않다. 사격이든 배구든 좋아하는 경기 그 자체를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선수들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경기에서 진 우리 선수들이 어깨를 떨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진종오도, 김잔디도, 김우진도 죄송할 필요가 없다. 김연경도 박정아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최선을 다해 재주를 겨루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좀 흉하게 내지르는 김연경의 괴성도, 양효진의 얌전한 오리궁뎅이도, 실수를 연발했다는 박정아의 서브리시브도 그저 예쁠 뿐이다. 이제 그만 국가라는 짐을 내려놓으라. 승패에 목을 매는 태극전사의 투혼은 잊으라. 그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즐겁게 마음껏 펼쳐라. 그런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고 싶다. 


원문: 박헌명. 2016.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최소주의 행정학> 1(8): 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