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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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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 법제사법위원장이 지난 6월 21일 열린 입법청무회에서 임성근(전 해병대 제1사단장)씨에게 일갈한다. “김성근 야신의 리더쉽은 게임에서 지면 감독에게 책임이 있다. 선수에게는 책임이 없다. ... 게임에서 져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감독이 물러나야 한다. 선수기용, 경기력 등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므로. ... 설령 부하들이 잘못을 했다 할지라도 다 내가 교육을 잘못하거나 지시를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부하들을 탓하지 마라. 징계하지 마라. 내가 책임지고 사표를 쓰겠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쉽 아닌가요?” 절대로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하들이 멋대로 수중수색을 했다고 횡설수설하는 임씨에 대한 훈계다.

리더쉽이란 대장다움이다

과연 리더쉽(leadership)이란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말하는 리더쉽인데, 막상 리더쉽을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장이든 관리자든, 직위가 높든 낮든 실제 집단을 이끄는 자가 대장(우두머리)이다. 흔히 리더쉽은 조직에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리더쉽은 우두머리가 마땅히 보여줘야 하는 태도와 언행을 말한다. 대장의 처신, 대장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대장을 비난하는 이유다. 혹자는 리더쉽을 각 분야의 우두머리가 해야 하는 기능(functions)이나 역할(leadership roles)로 보기도 하고, 리더의 행태(leadership behavior)나 리더쉽 유형(leadership style)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대장의 힘은 권위에서 나오고 대장의 재량행사로 발현된다. 대장은 자리(직위)에서 나오는 권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leadership)에서 나오는 권위를 적절하게 관리해야 한다. 늘 수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발휘하든 도덕성이나 인간성을 내세우든 자신의 명령을 조직구성원들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영역(zone of acceptance)을 넓혀놓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장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며, 특권이 아니라 조직을 이끄는데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박헌명 2016). 대장은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자원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그럴듯한 어느 하나를 결정하는 재량행위다. 그 결과는 다시 대장의 권위(수용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당장 어떤 탈법적인 명령을 밀어붙여 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대신 대장의 권위는 줄어든다. 누차례 대장다운 처신을 하지 못하면 권위가 바닥나(수용영역이 쪼그라들어 어떠한 명령도 받아들여지 않는다) 결국 대장노릇을 못하게 된다.

스스로 지휘관임을 포기한 임사단장

정위원장이 말한 리더쉽은 문제해결능력이 아니라 “대장다움”이다. 계서제(hierarchy)의 극단을 보이는 군대에서 상관의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어떤 명령이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1) 아랫사람이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2) 조직의 목적과 불일치하지 않아야 하고, (3) 자신의 이해관계와 부합해야 하고, (4)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따를 수 있어야 한다(Barnard 1968: 165). 안전대책도 없이 악천후로 유량이 늘고 유속이 빠른 강물에 들어가 수색하라는 것은 차라리 죽으라는 소리다. 임씨의 부하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고, 조직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은 명령이었고, 부하들의 이해관계와 부합하지 않은 명령이었고, 따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수용영역에 들어있지 않은 명령이었다.

임사단장은 별을 두 개나 단 지휘관이었지만, 전혀 “대장다움”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실상 부하들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던 지휘관이면 마땅히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지휘관은 정당한 명령을 명료하게 내려야 하고, 부하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하는지를 감독해야 한다. 어찌하여 그 많은 장병들이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사단장의 지시를 정반대로 알아들었다는 것인가? 이제와서 지시가 아닌 지도를 했을 뿐이라는 똥별의 비루함이여... 장교들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설령 임씨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나는 멀쩡한 지휘관이 아니었다는 자백일 뿐이다. 한마디로 “나는 잘못이 없다. 나를 탓하지 마라. 제멋대로 수중수색을 벌인 부하들을 징계하라” 아닌가? 작전통제권도 없는 자가 위험천만이라는 부하들의 건의를 묵살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밀고 자빠졌으니... 이등병만도 못한 처신이다. 통수권자부터 상관과 부하의 신뢰와 존중이 무너졌으니 군대의 기강이 무너진 것이다. 이런 오합지졸인 군대가 어찌 싸워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고통받는 박정훈과 이용민의 대장다움

반면에 해병대 박정훈 대령(전 조사단장)은 해병순직사건을 법에 따라 수사하고 경찰에 이첩하였다. 장관의 부당한 명령을 받고 망설이는 사령관에게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수사단과 해병대를 고려한 판단이었다. 대통령실과 장관실이 폭주하는 상황에서 소신있고 당당한 처신을 보여줬다. 박대령의 “대장다움”은 불이익을 감수한 자기희생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수중수색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상관의 지시를 이행했던 이용민 중령(전 7 포병대대장)은 지휘관으로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난폭하게 휩쓰는 강물에 부하를 떠밀어야만 했던 대대장의 참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한 임씨와는 달리 박대령과 이중령은 아랫사람에게 충실하였다. 부하를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 책임을 물었다. 자기희생은 “독재자에 의하여 피해를 본 사람을 보살피는 태도”다(1980: 363). 지금은 항명수괴와 과실치사라는 굴레를 쓰고 있지만 이들의 “대장다움”은 어떤 별보다 빛나고 있다.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희생자가 지켰던 규칙이 악한 세상을 구출하는 원칙으로 만인에게 인식”될 것이다(1996: 437-438). 

참고문헌

  • 박헌명. 2016.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 <최소주의 행정학> 1(4): 1-3.
  • Barnard, Chester, I. 1968. The Functions of Executiv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4. 박정훈 대령과 이용민 중령의 대장다움. <최소주의행정학> 9(8): 1.

인사관리(personnel administration)는 조직 구성원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고, 알맞은 부서에 배치하고, 훈련시키고, 일한 성과를 평가하고, 승진을 시키고, 상벌을 주는 일이다. 인사행정(public human resources management)은 정부에서 공무원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정부관료제는 민간기업보다 엄격하게 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며 정치영향력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사人事는 동서고금의 상사常事지만, 현대 인사제도의 근간인 능력주의(merit system)는 고작 150년 된 역사이다. 윤정권의 용인술을 보고 있노라면 200년 전 미국의 엽관제(spoils system)가 떠오른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괴력이다.

200년 전 도입된 잭슨의 엽관제도

미국은 독립전쟁(1775-1783)에서 승리한 뒤, 1789년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워싱턴은 공무원의 능력(competence)과 정치 중립(political neutrality)의 균형을 추구하였는데, 성실하고 공공의식이 있는 유망한 사람들을 임명하였다(Berman et al. 2020). 교육을 잘 받은 상류층이 공직을 맡는 이른바 귀족공직자(gentlemen)의 시대(1789-1829)였다. 당시 대부분이 유럽에서 밀려왔기 때문에 공직에 필요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드물었음이리라.

1829년 Andrew Jackson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직은 선거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돌아가는 전리품(spoils)이 되었다. 이른바 엽관제도(1829-1883)다. 잭슨은 연방공무원의 임기를 대통령 임기와 일치시켜 선거에서 승리한 대통령이 논공행상으로 새로 임명하는 것을 제안했다(Rosenbloom et al. 2009). 바로 오매불망 논공행상으로 한자리를 노리는 윤씨측의 숙원이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귀족이 아닌 대통령이 된 잭슨은 상류층 위주의 공직사회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갈아 엎었다. 재능과 전문성이 결여된 중하류층 지지자들로 공직을 물갈이했다. 또 보직순환(job rotation)으로 관료제의 변화를 모색했다.

하지만 경험, 지식, 능력이 처참한 자들이 자리를 꿰차게 되면서 행정부의 공직의식, 효율성, 합리성, 성과는 추락했다(Rosenbloom et al. 2009). 낙하산, 횡령, 뇌물, 공갈로 자리를 꿰찬 자들은 선거에만 몰입했다. 공공서비스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행정과 정치질이 뒤섞였고 “politcal assessments”라는 이름으로 나랏돈이 여당으로 흘러갔다. 승자독식은 죽기살기식의 선거전쟁와 자리쟁탈전이 되었다. 1881년에는 공직을 따내지 못한 자가 Garfield 대통령을 암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 우리가 보는, 보게 될 일들이다.

능력주의와 인사제도의 진화

미국은 1883년 Pendleton Act (Civil Service Act)를 도입하여 능력주의로 전환하였다. 신분이나 친분이 아니라 공개경쟁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채용했다. 공무원의 능력에 기반한 공직(tenure)을 보장하고 탈정치화를 지향했다. 공직자의 권위와 정당성은 정치 중립, 전문성, 기술 능력에서 나온다고 보았다(Rosenbloom et al. 2009). 또한 인사문제를 관장하는 공무원위원회(Civil Serivce Commission)를 출범시켰다. 공공서비스의 효율성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just causes”) 연방공무원을 당파를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하는 것을 금지하고, 내부고발자(whistleblowers)를 보호하였다(Llod-La Follettee Act of 1912). 이후 연방공무원의 정치활동을 엄격하게 금지시켰고(Hatch Act of 1939), 균등한 고용기회를 촉진하고, 그동안 소외되었던 집단을 우대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윤석열은 앤드류 잭슨의 재림인가?

잭슨은 이민자 집안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쟁에 휩쓸렸지만, 윤씨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학을 졸업했다. 흙수저와 금수저 모두 법학을 공부했으나 경력과는 별개로 자질은 신통치 않았다. 판사까지 했다는 자는 잘 읽지도 못했다고 전해지고, 사시 9수를 거친 자의 소양과 언변과 태도는 민망 그 자체다. 압박 속에 자란 탓인지 고집이 세고 호전적이었다. 잭슨은 수차례 총으로 결투를 벌였고, 윤씨는 거침없이 윗전을 치받았다. 이러한 수컷스러운 과격함은 어리석은 대중을 현혹했다. 잭슨은 노예와 토지투기로 치부했고 윤씨는 처가의 불법탈법에 눈감았다. 모두 배우자의 불륜이나 줄리 접대부 문제에는 과민반응했다.

툭하면 자유를 내세운 것도 비슷하다. 잭슨은 군대를 동원하여 인디언을 학살하고 토지를 빼앗고 생존자들을 피눈물나는 길(trail of tears)로 내몰았다. 농장에서 흑인 노예를 부리며 학대했다. 법과 인권과 윤리의 굴레를 벗겨준 그만의 자유를 누린 것이다. 윤씨는 정적을 빨갱이나 범죄자로 몰았고, 노조를 불법으로 낙인찍어 탄압했다. 괴담과 가짜뉴스를 퍼뜨려 선동하는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내 편이 아니면 자유는 커녕 공민권도 없다는 잭슨식 민주주의와 윤씨의 자유민주주의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궁하면 법과 절차를 거슬러 내달렸다. 잭슨의 열렬 지지자들은 과격한 중하류 계층이었고 대부분 정식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자였다(Rosenbloom et al. 2009). “바보들의 합창”에 취한 낭만자객들의 인기영합이다.

잭슨은 임기를 시작하면서 연방공무원의 1-2할을 해고하고(patronage dismissals), 승리에 기여한 지지자들에게 그 자리를 나눠 주었다(patronage appointments). 귀족들이 차지했던 공직을 주군에 대한 충성심(moral qualities)만으로 꿰어 찼으니 얼마나 감격했을 것인가.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언감생심 하루아침에 공직자가 되었으나 일을 할 줄 몰랐다. 정파에 휩쓸려 선거에만 몰입했다. 관료제는 사달이 났다. 무지한 자의 싸구려 자기확신이 낳은 참사였다.

그런데 윤씨가 기어코 그 길로 들어섰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는가? 문정권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을 빨갱이 사냥하듯 찍어낸다. 찔끔 남은 임기도 용납하지 못하는 품격의 빈곤함이여.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못하는 윤씨측이 알박기와 후안무치로 몰면, 수구 언론이 풍장을 치고, 검찰이 몸을 푸는 구도다. 공공서비스가 어찌 되든 말든 내 자리만 보고, 내 밥그릇만 챙길 뿐이다. 잭슨의 실정은 1835년 암살시도와 1837년 공황(panic)으로 이어졌다. 좌충우돌 윤씨의 폭주는 과연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 

참고문헌

  • Rosenbloom, David H., Kravchuk, Robert S., and Richard M. Clerkin. 2015. Public administration: Understanding management, politics, and law in the public sector. 8th ed. McGraw Hill.
  • Berman, Evan M., James S. Bowman, Jonathan P. West, and Montgomery R. Van Wart. 2020. Human resource management in public service: Paradoxes, processes, and problems. 6th ed. Sage & CQ Press.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앤드류 잭슨의 재림과 인사행정의 퇴화. <최소주의행정학> 8(5): 1.

전현희 국가인권위원장이 방송에 나와 윤정권의 사퇴압박을 고발했다. 검찰이 기소하여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도 마찬가지다. 이들과 같은 장관급 정무직으로 이석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작년 8월 사표를 냈다. 이명박정권이 부당하게 KBS에서 쫓아냈던 정연주 방송통신심의위원장도 위태로워 보인다. 지난 2-3월에는 문정인 세종재단(세종연구소) 이사장이 물러났고, 나승희 한국철도공사 사장과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은 해고되었다. 얼마전에는 정승일 한국전력사장이 자리를 내놓았다. 발표된 이유는 제각각이나, 그들이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얘기는 없다. 문재인정권에서 임명했다는 이유로, 윤정권과 정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내쫓긴 것(patronage dismissals)이다.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이유는?

2022년 현재 350여개의 공공기관(공기업, 준정부기관, 기타 기획재정부장관이 지정한 기관)이 있다. 대통령이 임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공공기관의 자리는 기관장, 이사, 감사 등 3,800개라고 한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부는 공공기관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하고(3조), 기관장은 법·정관 위반(22조), 직무태만(32조, 35조), 경영실적저조(48조), 비위행위(52조) 이외의 사유로 임기중 해임되지 않는다(25조).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까닭은 더 좋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자율 경영, 책임 경영, 합리 경영, 투명한 경영을 통해 공공기관의 대국민서비스를 증진하기 위함이다(1조). 능력있고 정직하고 성실한 자가 책임을 지고 일을 하고 그 결과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안정성을 부여한 것이다. 공공서비스는 정권의 향방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꾸준히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관장은 제멋대로 자리를 던지거나, 일은 안하고 정치에만 몰두하거나, 느닷없이 보궐선거에라도 출마하지 말라는 소리다. 그러니 일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거나, 무노동으로 월급이나 탐내거나, 출마할 사람을 기관장으로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임면권자의 맘에 안든다고 터무니없는 이유로 멀쩡한 기관장을 쫓아내지 말라는 소리다. 상식에 가까운 얘기다.

누가 알박기, 국기문란, 후안무치란 말인가?

그런데 여당인사와 수구언론에서 나오는 소리는 황당하다. 새정부 출범 후에도 문정부에서 임명한 기관장들이 알박기를 한댄다. 정치도의를 망각한 후안무치라느니 대선불복이자 국기문란이라고도 했다. 서울신문의 사설 “공공기관 틀어쥔 문정부 인사들 물러나라”(2023.5.16)는 반란수준이다. “전정권의 코드를 맞춘 자들이 아직도 자리를 꿰차고 있다니 이런 부조리극이 없다. 보통 심각한 인사파행이 아니다”라고 했다. 현재의 국정철학과 정책노선에 공감하지 못하는 기관장들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며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훈계했다. MB정권에서 장관 자리를 꿰찼던 유인촌씨가 생각난다.

당연한 내 몫이니 당장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끌어내리겠다는 협박이다. 정치꾼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밥그릇 타령이다. 역사와 법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다. 직업공무원제를 정착시키기까지 치렀던 값비싼 시행착오를 모르는 자들이다. 알면서도 법치주의를 외면하고 잇속대로 딴소리를 하는 자들의 어거지다. 간도 쓸개도 빼놓고 그저 공천을 받아내기 위한 처절한 몸무림이다. 논리도, 책임도, 양심도 없는 정치질이다.

기회주의 정치꾼들의 더러운 정치다

기관장의 임기를 보장하는 이유는 좋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지, 선거를 도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나눠 주기 위함이 아니다. 국민을 위한 것이지 정치꾼들을 위함이 아니다. 누가 기관장을 임명했는지, 기관장이 맘에 드는지 안드는지는 따질 까닭이 없다. 얼마나 일을 잘해서 공공서비스를 만족스럽게 제공했는가를 물을 뿐이다. 능력과 자질에 관한 문제다. 명백한 직무유기나 비위행위 증거를 내놓지도 않으면서 이것 저것 들춰보겠다거나 막말로 도발하는 짓은 수구 검찰과 언론를 믿고 벌이는 공갈이다.

공공서비스는 정권이 바뀐다 해서 근본이 달라질 수 없다. 윤정권에서는 원전만 사용하고 가스값은 시장價고 KTX는 우측통행하는가? 후쿠시마 오염수가 깨끗하다니 이제 수입해서 가정에 공급해야 하나? 학문과 문화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며 노래를 금지시키고, 대마초 가수라며 매장하고,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을 이창동씨의 <시>에 빵점을 주는 것는 만행이다. 사실과 가치, 공과 사를 구분못하는 자들의 유치찬란한 떼쓰기다.

기회주의 정치꾼들의 주장이 맞다면 공공기관운영법은 알박기, 대선불복, 국기문란, 부조리극, 인사파행, 정치도의를 저버린 후안무치를 제도화한 것이다. 그러니 법을 만든 여야 국회의원들을 반국가행위자로 죄다 잡아다가 물고物故를 내야 할 것이다. 당장 이런 중범죄자들을 방치하고 있는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부터 파면해야 한다. 그리고 법을 개정하여 정권 출범시 모든 공공기관장을 새로 임명하도록 해야 된다. 이렇게 되면 누가 이득을 보겠는가?

마음은 콩밭(선거)에 가 있는 자를 전리품(spoils)을 주듯 기관장으로 앉히면 공공서비스가 망가진다. 관료제가 정치판이 되어 합리성과 전문성을 잃는다. 완장찬 낙하산들이 공무원들을 줄세우고 정파검증을 할 것이다. 자리를 빼앗겼거나 꿰차지 못한 자들은 암살이라도 시도할 것이다. 200년 전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결국 국민이 손해다. 권력자와 정치꾼들만 이득을 본다. 이들은 정작 정권을 잃으면 직업공무원제와 정치탄압을 운운하며 자리에서 악착같이 버틸 것이다. 남이 하면 보은·코드 인사고 자기가 하면 공정·능력 인사다. 이미 검사출신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있다. 절대 낙하산 인사는 없다던 윤정권의 철학과 정책인가, 자가당착인가?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국민에 대한 도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철딱서니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무책임한 난동이 노여웁다.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3. 난도질당하는 공공기관장의 임기 보장. <최소주의행정학> 8(4): 1.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여권에서는 이재명, 이낙연, 추미애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야권에서는 검찰총장 자리를 박차고 나온 윤석열과 감사원장을 그만두고 15일 만에 제1야당에 들어간 최재형이 앞서고 있다. 터줏대감인 홍준표와 유승민은 쑥스럽게도 순위에서 밀려나 있다. 나는 등락하는 지지율보다도 고위직 공무원이 몸담았던 정부를 비난하고 대권에 나선 것이 신경쓰인다. 법규정이 아니라 직업공무원의 책무와 윤리와 처신을 말하고 싶다.

직업공무원의 올바른 처신이 아니다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은 정치중립을 위해 임기가 보장된 자리다. 윤석열과 최재형씨가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대선출마를 위해 (건강문제 때문이 아니라) 사직서를 던진 것은 무책임하다. 이들이 대선출마를 어느날 갑자기 결정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동안 윤씨와 최씨가 벌여온 정부와 여당 인사들에 대한 조사와 감사의 순수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정당한 직무수행이라기보다 출마용 실적쌓기였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정치중립을 염불念佛처럼 외던 검찰청과 감사원 구성원들은 난감하고 민망할 뿐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의 화두는 아무리 정치인의 수사라 해도 지나치다. 윤씨는 부패하고 무능한 문재인 정권이 권력을 사유화하여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상식과 공정과 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의 근간의 무너뜨렸다고 했다. 문정권을 독재와 전제로 낙인찍은 제1야당과 같은 문법이다. 최씨도 문정권이 헌법과 법률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헌법정신을 회복하고 법치주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다. 문정권이 저지른 일탈과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황교안씨의 변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윤씨와 최씨의 언행은 모순이다. 정말 현정권이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국민을 약탈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은 뭐하고 있었단 말인가. 바로 그 정권에서 사정기관을 책임졌던 자들이 이제 와서 남 얘기하듯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라며 물어뜯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먼저 검찰과 감찰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과 무책임을 참회해야 할 일 아닌가?

멀쩡한 검찰총장이었으면 불법을 저지른 자라면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들였을 것이다. 헌법정신을 위반한 물증이 명백하다면 국회의 탄핵과는 별개로 즉시 청와대로 들이쳐서 대통령과 참모들을 오랏줄로 묶어왔을 것이다. 헌법이 무너지고 법치주의가 망가지고 있는데, 검찰총장이라는 자가 대통령의 눈치나 보고 장관들과 티격태격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설령 독재자가 검찰의 정당한 법집행을 군홧발로 진압한다 해도 일말의 후회도 없을 것이다. 오직 국민을 바라보는 “바보 칼잡이”였다면 말이다. 전두환의 군사반란에 맞섰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환과 특전사령관 정병주처럼 말이다. 하지만 윤씨는 소심한 “낭만 자객”이었다. 최씨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면 강도높은 감찰을 벌여 위법 행위를 낱낱이 파헤쳐야 했다.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서 김영삼씨와 대립한 이회창씨처럼 강제로 자리에서 쫓겨난다 해도 본연의 직무에 충실했야 했다. 하지만 최씨의 감사원이 시끄럽게 소동을 벌이면서까지 적발한 내용은 용두사미에 가까왔다.

더구나 해먹을 만큼 다 해먹고 나서 정략에 따라 약탈과 비정상을 운운하는 것은 속보이는 짓이다. 궁색한 변명이다. 윤씨와 최씨가 여당의 비난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청와대를 압수수색했고, 조국 전장관 식구들을 마음대로 발랐고, 탈원전 정책 감사도 밀어붙였다. 청와대든 국가정보원이든 훼방을 놓지도 않았고 거대 여당은 탄핵으로 몰고 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물러터진 독재와 전제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이었으면 모가지가 수백 개라 한들 살아남지 못했을 일이다. 어디 감히 검찰총장이나 감사원장 따위가... 아마도 빨갱이나 반역자로 몰아 식구들까지 매장시켰을 것이다. 무서운 독재시절이 아님에 기회주의자들이 이리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윤씨와 최씨는 최소주의자가 아니다

윤씨와 최씨의 출마에 감동이 없는 이유가 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와 판사로 살아온 사람이다. 이 사회의 기득권을 상징하는 인생을 누린 사람이다. 독재정권에 맞서다 끌려가 매맞고 오욕을 당하거나 서민으로 살면서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억울했던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고문으로 몸서리치던, 저승문턱에서 오금이 저리던 추억이 없는 자들이다. 꽃길을 걸어온 자들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버틴 최소주의자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다. 벼랑 끝에 내몰려서 인간으로서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마지막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국 식구들을 난도질한 칼솜씨나 절차와 방법을 따져 정책 자체를 비틀어대는 법기술은 최소주의자의 품격과 거리가 멀다. 작심하고 휘두른 그 칼과 법날이 멀리 돌아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있음을 아는지...

그들에게는 기득권의 초상이 있을 뿐 애초부터 긍휼해야 할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적폐로 모는 것이 반헌법이고 불법이고 불공정이고 몰상식이고 비정상이다. 그동안 윤씨가 남긴 설화는 그의 인식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씨의 서민 행보는 흙묻은 오이를 입에 넣은 이회창씨의 억지스러움이다. 윤씨와 최씨가 현정권을 반헌법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정의와 상식과 정상을 말하는 것이 허무한 까닭이다. 지금껏 호의호식하고서 마치 정권의 핍박을 받은 것처럼 떠벌리고 마음에도 없는 “국민팔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권은 윤씨와 최씨가 임명권자를 배신했다고 비난했지만 틀린 얘기다. 사정기관은 의리가 아니라 불법탈법을 따질 뿐이다. 무작정 권력자를 때려잡으라는 칼도 아니다. 그들은 직무를 유기하고 권한을 남용하여 사리사욕(정치이익)을 채운 탐관오리였을 뿐이다. 주변의 부추김에 홀린 듯 끌려 나와서 엉겁결에 숨겨왔던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면 미련없이 링에서 내려올 자들이다. 모냥 빠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간절한 민심이 아니라 영웅의 이름을 구하는 족속의 숙명이다. 

같이 읽기

 

인용하기: 박헌명. 2021. 공무원의 윤리와 윤석열·최재형의 처신. <최소주의행정학> 6(7): 1.

국정감사에 출석한 윤석열씨가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라고 말했다. 정무직 장관이 검찰의 상관이라면 검찰의 정치중립과 사법의 독립이 훼손된다고 했다. 추장관이 윤총장을 특정사건에서 배제시킨 것은 총장의 지휘권을 박탈한 것으로 검찰청법을 위반한 행위란다. 추장관의 지휘는 부당하고 비상식인 것이 확실하댄다. 뜬금없이 법무부와 검찰청은 법에 의해서만 관계되어 있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한테 할 수 있는 가장 점잖은 표현이 “중상모략”이면, 추장관은 윤총장의 부하인가? 대통령은 맞먹을만 한가? 대체 검찰총장이 무엇이란 말인가?

윤석열씨는 추미애씨의 부하다

부하部下 혹은 하관下官(subordinate)은 관료제의 직책상 자신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상사上司(supervisor) 나 상관上官(superior)은 부하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감독한다. 일상에서 상관이나 부하는 군대나 왈패 느낌을 주는 말이긴 하다. 윤총장은 검찰의 정치 중립성을 말하기 위해 장관의 부하가 아니라고 말했댄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능력이 빈약하거나 법리法理라는 말장난으로 혹세무민한 것이다. 김종민 의원의 지적대로 상사와 부하는 지휘·감독 관계를 말한다. 정부조직법 32조는 법무부장관은 검찰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장관 소속으로 검찰청을 둔다고 했다. 검찰청법 8조는 법무부장관이 검찰 사무의 최고 책임자라고 적고 있다.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 추장관의 수사지휘를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윤총장이 부하라는 뜻이다. 상식으로 봐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부하임에 틀림없다.

윤총장은 검찰권은 국민에게 있다면서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적법하게 임명한 법무부장관의 지휘권은 얼버무렸다. 또 추장관의 검찰총장 지휘는 불법이고 부당하다면서도 (장관의 지휘는) 수용하고 말 것이 없댄다. 그저 법적으로 다투냐 마냐 하는 문제랜다. 그런데 자신이 장관과 법정에서 공박하면 법무·검찰이 혼란스러워지고 그 피해는 온전히 국민에게 돌아간댄다. 그러니 대의를 위해 쟁송을 피하는 것이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뜬구름잡는 소리인가? 수용하고 말 것이 없는데 뭐하러 법으로 다투는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뭐 이런 것인가? 치마두른 “어공”의 히스테리에도 대인의 풍모를 흐트리지 않는 “늘공”의 여유인가? 천하무적 검찰 권력으로 무장한 칼잡이 총수總帥의 기개인가? 얼치기 정치꾼의 허세인가?

장관의 지휘가 명백히 위법이라면 검찰총장은 장관에게 재고를 요청하거나, 법으로 다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나라를 뒤흔들만한 사안이라면 검찰총장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여 장관을 잡아들이고 그 장관을 비호하는 대통령을 조사해야 한다. 설령 권력자의 힘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체포에 실패하고 파직당하고 감옥에 끌려가도) 말이다. 그것이 검사다운 처신이며 밥값하는 일이다. 그럴 배짱이 없다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다. 위법이라고 믿으면서 항명할 용기가 없어 장관의 지휘를 수용하는 것도, 그래놓고 나서 수용하고 말고가 없다고 둘러대는 것은 직무유기나 구차한 변명이다. 검사는 커녕 조폭의 격에도 맞지 않는 양아치짓이다. 그 골목의 상도商道를 걷어차는 짓이다.

<맹자> 양혜왕장의 가르침

올바른 처신이라는 것은 그 시대, 그 사회, 그 자리(상황)에서 적절하다고 받아들일 만한 언행과 태도다. 내용과 형식 모두 적절해야 한다. 이러한 합당함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공公과 사私에 어울리는 처신이 따로 있으며 미국과 일본에 맞는 처신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구태여 근본주의자의 교조敎條라거나 기회주의자의 방편方便일 뿐이라며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관료제는 상급자(상관)와 하급자(하관)의 계서질서를 근간으로 한다. 책임과 관점(입장)과 선호가 다른 상하上下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역할 자체가 애초부터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도록 설계되기도 한다. 상하가 모두 선하다면 갈등은 선하게 동작하고, 모두 악하다면 갈등은 크든 작든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 전자의 경우는 문제가 없고 후자는 답이 없다. 올바른 처신은 상하의 이해관계와 견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중요하다.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갈등을 받아들여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孟子>의 梁惠王章句下에서 실마리를 풀어보자.

不得而非其上子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子亦非也.

(웃사람이 베풀지 않아서) 아랫 사람이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그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서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관료들이 최소한 하게 되어 있는 일을 한다면(딱히 위법한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백성들의 일을 보살피지는 않는) 백성들은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그런 관료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아쉽고 화가 날 수도 있지만 욕설을 내뱉고 물리력을 동원해서는 안된다. 물론 공무원이 법에 나와 있는 것만 기계적으로 하는 것도 잘하는 짓은 아니다. 이 구절은 가진 자의 포악과 가지지 못한 자의 난동을 피하려는 소정의 최소주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공직자의 올바른 처신

하급자는 상급자의 명령을 평가하여(정당하다, 부당하다 등) 행동을 결정한다. 명령을 수용하거나, 비판하거나, 그만두거나, 항명할 수 있다. 물론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하관의 선택은 극히 제한되고 위험을 동반한다. 만일 상관의 명령이 합법이고 정당하다면 하관 대부분은 수용한다. Barnard (1968)와 Simon (1976)의 용어를 빌자면 아랫사람의 수용영역(zone of indifference or acceptance) 안에 들어가는 명령이기 때문에 의심을 품지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물론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여 내용을 조율할 수도 있다. 어떤 하관은 명령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불법이 아닌 이상 거부할 명분은 없다.

만일 자신의 양심이 상관의 정당한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수용영역에서 벗어난 명령이라고 확신한다면) 바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난다.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신념과 견해가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차하게 변명할 일도 없다. 자리를 떠난 뒤에도 상급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언행으로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자중한다. 상급자에 대한 예의이다. 상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동네방네 떠벌려서는 안된다. 당당하게 항명할 배짱이 없으니 눈치나 살피다가 뒤에서 상사를 욕보이는 짓이다.

만일 상관의 명령이 절차와 내용에서 흠이 있다면, 우직한 하관은 부당한 명령을 비판하고 철회를 요구할 것이다. 이회창씨가 감사원장을 그만 둔 것처럼 명령을 거부하고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부당함을 호소할 수도 있다. 사안이 중대하다면 직업윤리에 충실한 하관은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준법투쟁을 하거나 법에 호소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상관을 굴복시킬 수도 있으나 어느 경우이든 불이익을 받을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상관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역拒逆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이행한다면 자리나 보전하거나 권력을 탐하는 하관이다. 공익은 커녕 자나 깨나 자기 혼자 먹고 살 걱정만 하는 자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명령을 하급자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상급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좋은 상관은 섯불리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관을 불러다 놓고 다짜고짜 “까라면 까야지...”하면서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는다.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행동한다. 공익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뿐 개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관들이 집단으로 명령을 거역하고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함부로 소신을 접지 않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법과 절차를 설명하고, 엄정하고 절제된 지휘·감독권을 행사한다. 선한 상관은 평소부터 하관에게 모범을 보여 신뢰를 쌓는다(수용영역을 넓혀둔다). 권위는 기본적으로 자리에서 부여되지만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올라가거나 떨어진다.

법무부장관의 처신

추장관과 윤총장의 대립은 15년 전 천정배 법무부장관과 김종빈 검찰총장의 갈등과 비교된다. 천장관은 2005년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던 강정구 교수를 구속수사하지 말라고 김총장을 지휘하였다. 장관과 총장은 구속 여부에 대해 의견 교환을 했고, 장관이 법에 따라 수사지휘를 결정했다. 김총장은 수사지휘권 행사가 적법했고 수용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총장은 장관의 지휘 공문을 받은 다음 날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천장관의 지휘가 합법적이긴 하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공정한 수사와 재판에 필요한 검찰의 정치 중립성을 침해한다고 말했다. 장관의 부당한 수사지휘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은 검찰 내부의 신뢰를 잃었다고 했다. 부하 검사와 국민에게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사퇴했다는 얘기다.

천장관은 김총장의 의견(구속 수사)이 변치 않음을 확인한 뒤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 자신의 결정이 어째서 적법한지를 시시콜콜 따지거나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김총장이 사직서를 내고 언론을 통해 자신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고 맞대응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천장관의 모습이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도 적법한 수사지휘를 통하여 수사팀이 독립적으로 수사하여 그 결과만 윤총장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만 야당과 검사들과 설전을 벌이게 되면서 공직자의 처신이 아닌 정치인의 행보로 비춰졌다. 아들의 병가를 둘러싼 검찰조사와 국정조사가 맞물려 추장관으로서는 물러설 수도 침묵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구세력의 의혹 제기와 고발이 무혐의 처분으로 끝나면서 추장관은 다시 옷깃을 여미었지만, 좀더 인내하고 자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끄럽고 구린 데가 많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의도한 도발과 패악질에도 차분함과 단호함을 잃지 않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처신

김총장은 사퇴할 때까지 처신을 잘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장관과 본인이 각자의 소신을 펼친 결과이기 때문에 수사지휘를 수용했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으나 윗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조용히 물러나 자중했어야 했다. 기자들에게 구구절절 사설을 늘어놓지 말았어야 했다. 한참 지난 뒤 점잖은 자리에서 담담하게 회고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처신은 한심하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쉽과 공직자의 기본 자질이 있는지 의문이다. 장관의 수사지휘를 수용한다면서 수용하고 말 것이 없다느니 장관과 쟁송하느니 마느니를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아서 탈이었다. 수사지휘가 확실하게 부당하면 수용하지 말아야 하고(장관을 직권남용으로 체포하든지), 아니면 군소리 말고 따라야 했다. 정히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면 조용히 자리를 내놓고 떠나야 했다. 명색이 조직의 장이라는 자가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횡설수설해서야... 법적으로는 장관의 부하가 아닌데, 장관의 지휘를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궤변을 늘어놓아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으니... 대놓고 항명할 명분이나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검사물도 못먹어 본 “치마 나부랭이”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자니 검사라는 자존심이 울고... 뭐 이런 것 아닌가? 도대체 검사가 뭐길래 윤총장이 이러는 것일까?

권위주의 정권은 거의 대부분 검사출신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했고, 수사지휘권은 발동되지 않았다. 검사동일체니 상명하복에 찌든 자들이니, 장관이 총장에게 전화해서 운을 띄우면 그만이었다. 형식상 지휘는 아니지만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것을 검사들은 본능처럼 알았다. 이견없이 선문답같은 덕담만 오가는 통화는 우아했다. 검사 선후배들은 윗분의 뜻을 헤아린 댓가로 “정치 중립”을 방패삼아 무소불위 검찰 권력을 지켜내고 검찰 정치를 마음껏 즐겼다. “정권의 시녀” “견찰” “검새” “떡검” “색검” “섹검”은 화려했던 그들의 추억이다.

결국은 검찰의 기득권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검찰공화국은 상수常數다. 이 나라를 이끄는 것은 검사 2천여 명이다. 그 어려운 사법고시를 패스한 전교 일등들 아닌가. 누가 감히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가. 어떠한 외부의 평가나 통제도 용납될 수 없다. 검사를 모욕하는 불경이자 반역이다. 검찰의 판단은 그 자체로 정의이자 진리다. 신성불가침이다. 이것이 검찰이 말하는 정치 중립이다. 추장관은 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지입은 사내가 아니기 때문에 들이받힌 것이다. 서울대 고대 출신 검사가 즐비한데 경희대 한양대 상관이 웬말인가? 하물며 학번도 없는 상고딩 주제에 치마 판사를 장관에 앉혀 검찰을 바꿔보겠다고 덤볐던 노무현은 얼마나 같잖았을까?

윤총장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고 말했다. 검사에 의한 검사를 위한 검사들만의 공화국을 사수하느라 용쓰고 있다. 정말 눈물겨운 모습이다. 권력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정의의 사도다. 하지만 정치를 하는 두목이라기보다는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대장이다. 세상이 달라진 줄을 모르고 도끼질만 해대는 맹장猛將이다. 이제는 검찰 개혁에 공감하는 검사들이 많아졌다. 국민들은 작년 조국 대전을 통해 검찰이 어떻게 멀쩡한 시민을 때려잡는지 똑똑히 보았다. 이명박을 혐의없음으로 풀어주고 한명숙을 뇌물죄로 엮어 날려버린 검찰의 민낯이다. 깨어있는 시민은 이제 누가 적폐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윤석열 총장은 추미애 장관의 부하다. <최소주의행정학> 5(11): 1-2.

주택시장이 시끄럽다. 정부가 수차례 대책을 발표해왔지만 아파트 가격이 치솟고 전세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며 아우성이다. 수구세력은 정부가 시장에 맞서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발라놓은 각종 정부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댄다. 내 돈으로 집을 사고 파는데 왜 정부가 시비를 거냐는 얘기다. 수구세력은 주택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으니 국토부 장관을 갈아치우라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주택시장은 왜 실패하는가?

왜 정부가 주택시장에 개입하는가? 경제학의 논리로 치면 시장실패다. 주택시장에서 공정한 주고 받기가 잘 안된다. 완전한 경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격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주택은 (1) 대부분 개인이 아닌 독과점 기업이 자재를 생산하고 집을 짓고(불완전 경쟁), (2) 일반 소비자는 품질과 가격이 적정한지 정확히 알기 어렵고(비대칭 정보), (3) 외부효과를 관리하기 어렵다. 요컨대, 주택은 시장이 실패하기 쉬운 재화다. 물론 정부가 개입한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정부는 어떻게 시장에 개입하는가?

첫째, 옛날과는 달리 요즘에는 개인이 아닌 주택(도시)공사나 건설 회사가 주로 집을 짓는다. 물론 개인이 설계와 시공 과정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지만 드문 경우다. 집을 짓는 기술과 자금과 법절차가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공급자인 기관(회사)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독과점을 형성하는 이들이 주택 공급량과 품질과 가격을 주도하게 되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맛보기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까닭이다. 이에 정부는 주택 공급에 관련한 인허가, 입찰담합, 분양가, 부실시공 등에 개입한다.

둘째, 일반 소비자는 정해진 선택지(입지, 상표, 크기, 디자인, 가격 등)에서 고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좋은 자재를 썼는지, 얼마나 마무리가 잘 되었는지, 제시된 가격이 적정한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건설사들은 원가공개와 후분양제를 꺼리기 마련이다. 원가를 낱낱이 공개하면 큰 이득을 취하기 어렵고, 집을 다 지은 후에 분양하게 되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고 품질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일반인은 관련 법규정이나 행정절차나 시장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언론이나 세무사나 중개사에게 의존하기 마련이다.

주택시장에서 독과점과 정보 비대칭성은 애초부터 강자와 약자가 구조화되어 있음을 뜻한다. 정치, 사법, 행정, 경제, 사회, 언론, 대학 등에서 가진 자들이 권력과 돈과 정보로 시장을 왜곡하고 약자들을 농락하기 쉬운 판이다. 주택 정책에 관련된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 등이 거의 언제나 재미를 보는 까닭이다. 아무나 몰려다니며 아파트를 쇼핑하고 어느날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주택시장의 생리(취약점)를 잘 알고 활용법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일반 소비자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이에 정부는 주택 품질에 관한 기준과 분쟁관리 절차를 마련하고, 아파트 가격과 전월세 가격 등을 정확히 알리고, 다운계약이나 가격담합이나 허위매물과 같은 교란행위를 억제한다. 기울어진 주택시장에서 정보 격차를 줄이고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조치다.

세째, 시장은 정당하지 않게 이익이나 불이익을 주는 외부성(externality)에 무기력하다. 주택 가격에는 주변 기반시설과 환경 조건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이익은 공짜로 누리고 손해는 절대로 안보려는 태도를 보인다. 주변에 도로나 공원이 생기면 하늘에서 떨어진 복(당연한 내 것)이라 여기고 공해를 배출하는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결사 반대한다. 시설주는 측정하기 어려운 피해와 불만을 외면한다. 특히 공공시설과 건물이 밀집해있는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당한 이익은 대개 가진 자들이 보고 부당한 비용(피해)은 대다수 시민이 나눠진다. 정부는 도시계획을 세우고, 각종 개발로 발생한 이익을 환수하고, 공해나 기피 시설에 대해 비용을 물려야 한다.

집은 소유가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다

집은 오래 사용되는 내구재(durable goods)로서 값이 비싸다. 가진 자들의 놀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중요한 것은 음식과 옷처럼 집은 생활필수품이다.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주거는 보장되어야 한다. 주거 비용이 지나치게 높으면 개인이나 사회나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다른 소비가 줄 수밖에 없고 경제활동이 위축된다. 또한 집은 가격탄력성이 적기 때문에 장기 공급계획이 필요하다.

현재 주택수가 가구수를 초월하여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고 있다. 공급보다는 주택 분배와 수요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집을 2천 채나 가지고 있거나, 10채 이상을 소유한 사람이 4만명이나 된다면 심각한 문제다. 하물며 소위 “갭 투자”로 남의 돈을 빌어다가 집투기를 하는 일임에랴... 집이 부를 축적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한 수백만 채를 짓는다 해도 아귀餓鬼같은 탐욕을 채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대출을 규제하고 세금(취득세, 보유세, 양도세 등)을 올리는 조치는 불가피하다.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지금의 “세금폭탄”은 아직도 약하다. 다주택자에게 무겁게 세금을 물려야 한다. 전기료와 물값을 올려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 수요를 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 심각한 상황에서는 일부일처제처럼 사실상 가구당 한 채로 제한할 수도 있다. 자본의 자유보다는 주거 안정(생존)이 더 중요하다.

주택 문제를 시장에 맡겨두라는 소리는 약육강식 논리이다. 지금까지 시장을 휘젓고, 그 아수라장에서 배를 불린 수구 기득권의 밥투정이다. “전세절벽”이나 “패닉바잉”이라며 선동하는 짓이다. 이제 집을 소유가 아닌 소비라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 자식에게 물려줄 금덩이가 아니라 일생 동안 사용하는 필수품이다. 쫓겨날 걱정없이 월세를 살면서 생산적인 일과 인간다운 생활에 집중하면 안되는가? 집값이 좀 내리고 전세가 없어지면 세상이 망하나? 대체 언제까지 “로또 분양권”과 투기질에 휘둘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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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부는 왜 주택시장에 개입하는가? <최소주의행정학> 5(8): 1.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다가오는 4월 총선거도 전염병 소식에 묻히고 있다. 소위 텔레그램 N번방과 박사방에서 벌어진 (미성년) 성착취 사건도 코로나19 사태를 덮기는 버거워 보인다.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올림픽도 아베 정권의 소망과는 달리 연기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 정부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앞다투어 우리나라의 검사도구를 수입하거나 차탄채로 검사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 이렇게 해외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 국내 언론에게는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다. 친일, 친미, 반공, 반란, 독재에 편들어 기득권을 틀어쥔 수구세력의 발악에 가까운 융단폭격이다. 헌법을 유린하고 민생을 파탄내고 안보를 무너뜨린 좌파독재가 코로나19 사태에 부실하게 대응했다며 대통령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마스크 비판인가? 공연한 트집인가?

지난 1월 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만해도 정부는 마스크보다는 손씻기와 기침 예절을 강조했다. 하지만 상황이 진전되면서 정부의 대응은 달라졌다. 이에 수구세력은 정부가 말바꾸기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고 비난했다. “갈지자 마스크 정책”이라고 했고, “오락가락”이라 했고, “희망고문”이라고 했다. 1월 29일 식약처에서 KF94나 KF99 마스크가 KF80보다 바람직하다고 했는데, 2월 4일 질병관리본부장이 면마스크는 완전히 보호하는데 제약이 있다고 했고, 2월 6일에는 보건복지부 차관이 전문 마스크는 의료진에게 권장된다(일반인에게는 보건용이나 방한용으로도 감염예방에 충분하다)고 했다. 3월 3일에는 식약처와 질병관리본부에서 보건용 마스크를 재사용해도 되고, 면마스크도 괜찮다고 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3월 6일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건강한 분들은 마스크를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했고, 8일에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공직사회가 면마스크를 쓰는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과연 어느 대목이 오락가락이란 말인가. 의료진은 등급이 우수한 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낫고 일반인은 면마스크로도 충분하다는 대의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마스크 수급 상황을 고려하여 사회구성원의 불안을 달래고 행동을 조정하기 위한 일상적인 정부의 대처가 아닌가. 언어의 모호성을 빌미로 얼렁뚱땅 비난을 쏟아내는 시비질이다. 차라리 사회불안과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길 갈망하는 주술이다. 물론 2월 3일 홍남기 부총리가 보건용 마스크는 매일 8백만 개가 생산되어 수급에 문제없다고 밝혔다가 수요 폭증으로 마스크가 신속하고 충분하게 제공되지 못하자 3월 3일 문대통령이 사과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정책수정을 말을 바꾸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하다. 한번 결정한 정책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수정되고 더 나은 대안으로 교체될 수 있는 가설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Wildavsky 2018: xlvii).

“마스크 사회주의”라고라?

정부는 2월 25일 수출비중을 국내생산량의 1할로 제한하고, 5할을 약국, 농협, 우체국을 통해 공급하겠다고 했고, 3월 5일에는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날을 정해 9일부터 매주 일인당 마스크 2매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수구세력은 공적 마스크 5부제를 “마스크 사회주의”라고 낙인찍었다.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생산자가 원하는 대로 판매하지 못하게 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구매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개입한 것이 문재인표 사회주의란다. 마스크 배급제를 실시하고 마스크 생산량을 늘리는 대만의 정책을 모범사례로 칭찬했던 그들이었다. 배급제를 안한다고 비난하더니, 배급제를 하니까 사회주의라고 욕하는 자들이다. 가격이 비싸든 말든 가진 돈으로 “자유”(사재기)를 누리려는 기득권자들이다. 그들의 억울하고 울화치미는 심통이 저주가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슨 이유를 대서든, 사실관계가 어찌 되었든 간에 문정권은 틀림없이 무능해야 하고 무책임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다.

이제 생활필수품이 된 마스크 수요가 하루 5천만 개이고 생산이 1천만 개라면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생활필수품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잘 따져 불필요한 마스크 수요를 줄여야 하고, 생산과 공급을 격려해야 한다. 하지만 1인당 매일 마스크 1매를 제공하는 것은 희망사항이지 정책목표가 아니다. 실현할 수 없는 일은 애초부터 정책 문제가 될 수 없다. 해답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No solution, no problem”)(Wildavsky 2018: xxxiii). 정책목표는 가용할 수 있는 자원(제약요소)의 범위 내에서 정해야 한다(p. xli). 따라서 정부가 마스크를 1인당 매일 1매씩 제공하지 못한다고 성급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희망고문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희망을 가졌단 말인가. 정책비판이 아닌 괜한 트집잡기이자 정치공세일 뿐이다. 하물며 마스크 5부제 자체를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임에랴.

줄서기 이론(queueing theory)에서 보면 선착순으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고객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장원리대로 지불할 능력(의사)에 따라 서비스나 재화를 제공할 수 있다. 고객들의 기회비용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우선 순위를 따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효용을 최대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의료진과 보건 담당자에게 먼저 더 많은 마스크를 제공하고, 환자, 노약자 등으로 순서를 정한다. 고객 개개인의 기회비용을 잘 모르고 형평성과 공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면 추첨을 하거나 일정 절차에 따라 배급하는 것이 좋다. 정부가 제약조건(자원)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의료진과 환자를 우선시하고, 마스크 5부제를 실시하고, 사재기를 경계하고, 생산을 독려한 것은 적절한 조치다. 정치 이념이나 종교와 관계없는 과학과 경제학이다. 상식에 가깝다. 

참고문헌

  • Wildavsky, Aaron. 2018. The Art and Craft of Policy Analysis. Palgrave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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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0. 마스크 공급 정책과 “마스크 사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5(4): 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 1월 초 중국에서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알려진 뒤 한국, 일본, 이란, 이탤리를 넘어서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3월 17일 현재 확진자는 중국이 8만명(사망자 3,226명), 이탤리가 2만 8천명(사망자 2,158명), 이란이 1만 5천명(사망자 853명), 스페인이 9천명(사망자 309명), 한국이 8천명(사망자 75명), 미국이 4천명(사망자 78명)이다. 이탤리, 이란, 스페인, 미국의 상승세가 무섭다.

처음에는 남의 나라 얘긴 줄 알았지만 1월 20일 국내에서도 감염자가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엉겁결에 재난 영화 속으로 떠밀려 들어온 것같은 황당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피부에 확 와닿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면서 감옥같은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고 있다. 특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을 집에서 근무하도록 했고, 가게와 식당은 사실상 문을 닫았고, 학교와 유치원은 개학을 연기하고 있다. 승객이 줄면서 버스가 멈추었고, 지하철과 택시도 한산해졌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늘길도 뱃길도 닫혔다. 세계대전이라도 터진 듯 “코로나 전선”은 점점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있다. 국경을 걸어 잠그고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사람들의 일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전문성, 투명성, 창의성

한국 정부는 다른 어느 정부보다도 신속하고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관리해왔다. 전문가집단인 질병관리본부(중앙방역대책본부)를 중심으로 감염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감염경로를 파악해왔다. 대통령이 정은경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국무총리가 행정지원을 이끄는 모습은 낯설다. 박근혜 정권에서 질병예방센터장이었던 정본부장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수습에 책임을 지고(권한을 쥐고 있던 장관과 고위 공무원 대신) 징계를 받았다. 당시 질병관리본부를 떠났던 다른 공무원과는 달리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그녀의 전문성과 성실함을 인사권자가 놓치지 않았으리라. 비록 상황이 많이 진전되어 현재 국가차원에서 재난을 관리하고 있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역할은 여전하다. 아직도 일부 교회 등에서 “영빨”을 믿고 기도 모임을 지속하거나 정파성에 매몰되어 무책임한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고 있으나, 정부는 전문성과 과학에 근거하여 냉철하게 재난에 대처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매일 신종바이러스 현황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를 시시각각 내보내고 있다. 두 달 넘게 매일 전염병 소식을 생방송(뉴스특보)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투명성은 재난 상황에서 기승氣勝을 떨치는 유언비어를 차단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마스크 300만장을 중국에 보냈다거나, 북한에 몰래 마스크를 보내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거나, 마스크 유통업체 대표가 영부인의 동창이어서 특혜를 받았다는 등의 날조기사가 등장했지만 약발이 오래가지 못했다. 보건용 마스크 공급에 관련된 과도한 비난과 선동(예컨대, “마스크 사회주의”)도 힘을 쓰지 못했다. 또한 사생활 침해라는 우려도 있지만 신용카드, 교통카드, CCTV 정보 등을 통한 확진자의 동선을 제공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자체 개발한 실시간 유전자 증폭 검사법(RT-PCR)은 바이러스감염 판별에 걸리는 시간을 하루에서 6시간으로 단축시켰다. 하루에 1만명을 검사하던 역량이 요즘에는 2만명까지 늘어난 까닭이다. 물론 의료관계자의 열정과 헌신이 이뤄낸 기적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진단도구를 받아가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또한 “차탄채로”(drive-through) 검사하는 방식은 환자가 머문 방을 소독할 시간을 벌고 환자간 감염을 막을 수 있는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운영법이다. 국내외의 호평을 받은 이 방식은 최근 미국에 역수출되었고(미국식 차탄채로 주문법이 한국식 진단법으로 진화되어), 영국과 독일을 비롯하여 반한정서가 불고 있는 일본에서도 도입되었다. 도시와 하늘길과 국경을 폐쇄하지 않고서도, 자국민은 물론이려니와 불법체류자들까지, 전국에서 사실상 무료로 감염여부를 빠르게 검사해주고 있다. 한국의 대응에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닮아가는 아베 정권

반면 일본의 상황은 한국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베 정권은 매우 정치적이고 느리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전문의료진이 아닌 정치권이 사태 수습을 주도하고 있고, 정부 대응이 투명하지 않다. 현재 일본에서 824명이 감염이 되었고 24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지만, 그 숫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 발생한 환자를 방치하였다가 700명이 넘게 감염되었고, 그 숫자를 통계치에서 빼려는 꼼수를 부렸고, 하선한 승객을 격리조치하지 않고 집으로 보냈다. 어떻게든 일단 감염자 수를 줄여보려는 아베 정권의 의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 언론과는 달리 일본 언론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덮는 듯 무뎌진 날을 내리고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다.

일본 정부는 여행을 자제하고 만일 감염이 의심되면 집밖으로 나가지 말고, 고열이 며칠 지속되면 전화하라고 권하고 있다. 좀 박하게 말하자면 각자 알아서 조심하고, 재수없이 감염되면 집에 칩거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라는 것이다. 비용은 둘째 치고 검사를 받고 싶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민들은 답답할 뿐이다. 정부 불신과 불안이 휴지까지 사재기한다.

이러한 아베 정권의 대응은 지난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를 지키려고 이리저리 틀어막고 꼼수를 부리다가 탈이 난 것이다. 올림픽을 개최하고 헌법을 뒤바꾸려는 욕심이 과하여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내팽개치고 있다. 수구군국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정신줄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 국면으로 몰고가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재난 앞에서 정부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추하게 되는 춘삼월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 <최소주의행정학> 5(3): 1.

 

지난 여름 오랜 만에 원주에 다녀왔다. 25년 전 군복무를 시작한 곳이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몇년 전에는 원주에서 횡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 차를 몰아보았다. 출퇴근 버스를 타고 묵계리에서 전투비행단을 거쳐 원주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하지만 주변이 워낙 몰라보게 바뀌어서 오랜 추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원주에 가서 추억을 잃다

이번에는 옛날처럼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외곽으로 옮긴 터미널에 내렸다. 원주역에서 시작되는 A도로와 B도로를 직접 걸어보았다. 지금은 각각 원일로와 평원로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원주기독병원 앞 길모퉁이에 들어서니 당시 워크맨으로 즐겨듣던 김태영의 “피카소에게”가 들리는 듯했다. 불이 났다던 중앙시장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시원한 배를 고명으로 얹어주던 남경막국수집과 밥그릇을 요란스레 두드리며 돼지삼겹살을 볶아주던 식당은 찾을 길이 없었다. 생전 처음 서울역에 내린 촌놈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낯설기만 한 풍경에 발걸음을 돌렸다. 세파에 밀려 기어이 어딘가로 옮겨갔으리... 눈과 코와 귀가 기억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

같은 시절 대학원을 다녔던 분과 점심을 같이 했다. 몇년 만에 낯선 동네에서 회포를 나누었다. 혁신도시에 공공기관이 자리잡은 이야기, 죄다 논밭이던 황골이 카페촌으로 환골탈태한 이야기, 공부하던 친구들이 사는 이야기, 애들 키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행정학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연구원에서 오래 근무하고 있는 분이어서 요즘 무엇이 학계의 관심사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분위기가 어떤지 귀동냥이라도 할까 싶었다.

내가 받은 첫번째 인상은 열성을 가지고 매진하는 학자들이나 연구원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행정문제를 치열하게 논의하고 의미있는 규칙성을 찾아내는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주어진 연구과제를 때맞추어 “밀어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얼마나 현실과 이론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수치로 표현된 성과목표를 달성해야 살아남는 판이다. 질보다는 양이라 했던가. 이른바 잘 팔리는 주제로 논문이나 연구과제를 많이 생산해 내는 자가 장땡이다. 한가롭게 이론을 따지고 방법론을 따지고 의미를 되새기는 자들은 진화를 거부한 종이다. 아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낙오자이다.

두번째 인상은 행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직사회와 공직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연구원에서 지방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의 정보를 조사하여 축적하고 있지만 막상 쓸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숫자로 적힌 통계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대개는 수박겉핥는 정보일 뿐이다. 공공기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다가 마지 못해 생색만 낸 측면도 있다. 하지만 행정학자가 어떤 정보가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는지, 어떤 정보가 유용한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리뭉실하게 자료를 달라는 경우가 더 많다. 행정학자라지만 관료들이 현장에서 실제 일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책과 논문의 언어로 말하고, 관료들은 행정 현실의 언어로 말한다. 몇년 전 고위 공무원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꼈던 괴리감이다. 그 간극이 커지면 서로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알맹이는 없고 변죽이나 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이 행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쓸만한 정보를 줄 까닭이 없다. 어차피 제대로 이해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할 위인들 아닌가? 후원이나 연구과제나 따내기 위해 굽실거리는 학자의 자존심이라니.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행정학

지난 해 만난 어느 선배는 한국에서 행정학이 독립학문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대형서점에서 행정학 서각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제는 아예 사라졌다고 했다. 대신 행정학 책은 정치학이나 법학 책시렁에 곁다리로 꽂혀있다고 했다. 아님 공무원 수험서 서가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체성 위기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를 들를 때마다 행정학 서각이 거의 그대로인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몇년 전 어느 행정학자가 한국 대학의 행정학과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며 우려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행정학은 행정고시에나 필요한 한 과목 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행정학의 정체성과 유용성을 따지고 행정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30년 전에 비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행정학과 수와 학생 수가 줄어든 만큼 심각해졌다. 아니 행정고시에서 차지하고 있는 행정학의 존재감에 정확히 비례한 학과의 위상이라 말해야 하나. 고시로 흥했으니 고시로 망하게 되는가... 행정고시에 기대어 도끼자루 썩는 줄을 알면서도 안일했던 업보業報다. 화려하게 껍데기를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학문의 기반을 다지고 쓸모를 넓히는데 게을렀던 업과業果다. 이젠 잘 팔리지 않는 행정학 교과서보다는 방법론같은 실용서적을 출간하는 것이 낫다는 권고를 나는 자괴감으로 들었다.

행정문제에 답을 주는 행정학이 되어야

과거에 비하면 행정학 논문이 질과 양에서 많이 향상되었다. 외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과제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수치로 표시된 행정학 성과물이 얼마나 행정현실에서 쓸모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행정현실을 이해하고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한낱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기업과 함께 경영문제를 풀어감으로써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경영학에서 배워야 한다. 고시와 학위를 위한 행정학이 아니라 실제 정부의 일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학이 되어야 한다. 선문답같은 훈수질이 아니라 행정문제를 진단하고 현실적인 답을 주는 행정학이어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의 수치와 시련. <최소주의행정학> 5(1): 1.

아파트 분양은 갑질이자 정치다

2019. 4. 14. 11:39 | Posted by 못골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을 의식주라고 한다. 왜 살 곳이 입을 것과 먹을 거리 다음에 오는 것일까? 아마도 긴 시간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 아파트집(apartment)은 흔히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고 한다. 부와 탐욕을 상징한다. 서울 강남의 웬만한 아파트집(흔히 “아파트”로 통용되는)은 25-30평형 기준으로 보통 15억원을 넘는다. 이런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기 위해 서민들은 허리를 졸라매고 수십 년 동안 월급을 모아야 한다. 강남 아파트 불패신화는 요즘 서울 전역으로 파고 들어 문재인 정부를 옥죄고 있다.

식구가 늘면서 지난 해부터 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산너머에 경관이 뛰어난 아파트 단지가 공공기관의 발주로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공성과 환경보호 문제로 벌써 몇 년 째 미뤄지다가 드디어 분양을 하게 되어 기대감이 폭발하였다. “로또”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첨만 되면 당장 억 대 프리미엄을 챙길 수 있다고 했다. 가까운 동무가 등떠밀 듯 분양신청을 권했다.

아파트집 분양신청이 처음인 나는 지어진 아파트를 사는 것이 아니라 조감도와 맛보기집(show house) 만 보고 결정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 분양 후 3년 뒤에나 지어질 집을 미리 돈을 주고 예매한다는 것이 떨떠름하다. 소비자들이 “제발 집 한 채만 줍쇼”라고 조아리면서 돈다발을 드리밀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정부와 공급자들은 분양원가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집을 지어 파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유리한 방식이다. 애초부터 “갑질” 냄새가 확 풍기는 일이다.

“선수”들에게만 친절한 분양공고

깨알같이 적힌 분양공고를 확대해서 읽으면서 나는 속이 불편했다. 일반 시민들이 읽고 이해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니가 알아서 이해해라”는 소리다. 닳고 닳은 “선수”들을 위한 주의사항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국민주택과 민영주택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같은 공공기관이 공급하는 아파트인데, 84m2보다 작다고 국민주택이고 크다고(97m2형) 민영주택이라니… 차라리 공급주체에 따라 공영주택과 민영주택으로 나눌 일이거늘… 또 전용면적이니 공용면적이니 공급면적이니 하는 소리는 “선수”가 아닌 사람들을 홀리는 숫자놀음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용어와 표현이 수두룩하다. 한 젊은이는 규정을 모르고 청약을 했는데도 당첨되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이번 분양에서 일반분양은 1순위와 2순위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63%를 차지하는 특별분양은 기관추천, 국가 유공자, 생애최초, 신혼, 다가구, 노부모 부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신청할 수 있었다. 각 유형 별로 자격 기준과 제출 서류가 달라서 어느 것이 본인에게 해당되는지, 어느 것이 유리한지 알기 어려웠다. 언론 보도를 참고하거나 귀동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웹집을 방문했지만 아파트집을 광고하는 문구, 조감도, 맛보기집을 찍은 사진 정도를 볼 수 있었다. 확대경이 없이는 볼 수 없는 분양공고 파일 그대로를 덩그러니 올려놓았을 뿐이다. 공급자가 원하는 내용을 멋있는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지 소비자가 궁금해할 만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단히 불친절한 웹집이었다.

문의사항을 물어보라는 전화번호가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통화량이 많아서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만 해댔다. 한참을 기다려도, 여러 번 통화를 시도해도 똑같은 소리였다. 분양에 관한 궁금증을 풀기는 커녕 인내심과 통신비만 허공에 날렸다. 생색용에 가까운 문의전화번호였다. “답답한 니가 참으세요”라고 배짱을 부리는 듯했다.

이미 언론에서는 청약광풍이 분다고 진단하고 아무리 못해도 경쟁률이 100대 1을 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일반공급 1순위 청약에만 15만 명이 몰려 평균 경쟁률이 240대 1이었으며, 특별공급은 평균 11대 1로 집계되었으며, 일반분양 최고 경쟁률은 540대 1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비자의 관심과 청약수요는 오래 전부터 예상되었지만 사업자는 소비자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게을러 터졌다. 그럴듯한 사진으로 치장한 웹집은 내용이 부실했고, 문의전화는 언제나 통화중이었다. 답답한 나머지 맛보기집에 직접 방문하여 직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분양초짜의 맛보기집 줄서기 

그렇찮아도 나는 아파트 분양이 대체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맛보기집이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하였다. 특별히 공공기관이 분양과정에서 어떻게 신청자를 대우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맛보기집(“모델하우스”)이 문을 여는 오전 10시에 맞추어 도착했다. 올해 유난스레 뜨거웠던 여름이 한껏 폭염을 뽐내던 날이었다. 터다지기를 마친 허허벌판에 세워진 맛보기집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맛보기집 뒤쪽은 벌써 차가 가득 들어 차 있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7시부터 와서 기다렸댄다. 사람들은 입구에서 줄을 서기 시작해서 맛보기집 뒤에 세워진 천막 안을 채웠고, 차츰 공터에 주차된 차 사이에 줄을 만들어 순대 모양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천막 안에 줄을 선 2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입이 딱 벌어질 만한 광경이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아 막 도착한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연일 맹위를 떨치던 폭염 속에 네댓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대부분이 노인들과 여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모자와 양산을 가져오기도 했고, 먹을 거리와 마실 거리를 챙겨오기도 했다. 식구들이 와서 교대로 줄을 지키기도 했다. 나처럼 대책없이 혼자서 전화기만 달랑 들고 온 초짜는 드물었다. 천막 안은 아쉬운대로 생수가 제공되고 냉방기가 돌아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매마르고 후끈 달아오른 맨땅에 무방비로 서 있었다. 노출된 팔다리와 목이 타버렸다. 젊은 아낙의 등에 업혀 온 젖먹이는 칭얼대다 지쳐 늘어졌다. 사업자는 급한대로 허름한 그늘막이라도 설치하고 구급차를 준비시켰어야 했다. 냉방기는 어렵다 해도 마실 물이라도 제공했어야 했다. 오죽했으면 누군가가 생수병을 사와 곱절 값에 팔았겠는가. 또 사람들이 인부들의 화장실을 물어 물어 찾아가게 할 일이 아니었다. 공공기관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을 외면하고 시민들을 이리 박대해서야 어디...

드디어 일부 사람들이 폭발했다. 서류를 제출하러 두번 째 맛보기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첨자와 예비당첨자만 모여서 첫번 째보다는 사람들은 적었지만 맛보기집 안에 들어가기까지 고역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당첨자보다 예비당첨자를 먼저 들여보내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잘못 배부된 번호표가 시비거리가 되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뒷번호를 받았다. 번호표는 받아들었지만 순서를 신뢰할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방문객과 안내원들이 대치하였다.

사람들은 해명과 개선을 요구했고 안내원들은 자신들이 지시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맞섰다. 분개한 사람들은 책임자를 나오라고 했고, 안내원은 책임자의 이름도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도 믿지 못하겠는지 다들 입구에 몰려들었고 순간 안내원들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이쯤되면 폭동이 일어나 난장판이 되고 끝내는 책임자 모가지가 죽창에 걸리는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다.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안내원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일용직이고 상사가 누구인지 어느 회사 소속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사업자는 신청인들과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권한도 없는 일용직을 동원하여 “집 한 채만 줍쇼”하는 거렁뱅이들을 상대하게 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완장채운 용역 직원과 신청인들이 언쟁하고 몸싸움하는 광경을 멀찍이서 즐기는 책임자의 품격이라고나 할까. 양쪽 모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서로에게 삿대질하는 사이에 책임자는 빠지고 그의 책임은 사라진다. 참으로 비열한 처사다.  

큰 고객, 작은 서버

대기줄 이론(queueing theory)에서 보면 소비자가 폭발하듯 도착했지만 시스템은 처리능력이 터무니없이 작았고 대기줄을 다루는데도 소홀했다. 안내원은 줄세우는 데만 몰두할 뿐이고 사람들의 불편과 안전은 뒷전이었다. 그 결과 대기 비용 대부분을 소비자가 고스란히 부담하였다.

먼저 잠재고객(calling population)은 무한대는 아니어도 충분히 많았다. 맛보기집에 사람들이 몰린 것 이상으로 분양신청을 했다. 고객이 도착하는 것은 포아송분포(Poisson distribution)를 따르지만, 평균도착수(λ)가 일정치 않고 최대치가 매우 컸다. 10시 전후해서 집중되었고 심지어는 7시부터 맛보기집 앞에서 기다린 사람들도 많았다.
 
장장 6시간을 폭염과 싸우면서 기다리다 맛보기집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도대체 몇 명이 상담을 하는지를 먼저 살폈다. 고작 6명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내가 받은 번호표는 321번이었는데, 상담신청은 이미 끝나버린 뒤였다. 서류를 제출하려고 다시 방문했을 때는 10-12명이 서류를 받고 있었다. 맛보기집 안에는 서버수(s)를 배로 늘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사업자는 상담사나 접수인을 늘리지 않았다. 평균서비스시간 (1/μ)은 분양유형별로 달랐다. 예컨대, 일반분양 서류접수는 3분이면 족했으나 노부모와 다자녀 특별분양은 15-20분이 걸렸다. 당연히 특별분양에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어야 했다. 

대기줄이 엉망이었다

맛보기집을 시스템으로 봤을 때 대기줄(queue)이 너무 짧았다. 시스템을 주차장까지 확대하더라도 일렬로 이어진 대기줄은 짧았다. 한마디로 대기줄 설계가 엉망이었다. 방문자들은 맛보기집 밖에서 줄을 섰고, 혼잡을 피하기 위해 입구에서 20명씩 새 줄에서 기다렸고, 상담을 받거나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다시 줄을 서야 했다.

고객은 몰려들고 서버수는 터무니없이 적고 대기줄이 너무 짧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입구에서 번호표를 선착순으로 정확하고 나누어 주었어야 했다. 엉터리 대기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뙤약볕에서 장시간 생고생을 한 셈이다. 맛보기집 안에서도 줄을 세우지 말고 유형에 따라 번호표를 나누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줄을 세우면서 어설프게 번호표를 나누어 주다 혼동과 분란만 초래했다. 또 맛보기집을 둘러보려는 단순 방문자와 상담을 받기 위에 찾아온 고객을 구분했어야 했다. 상담고객이 맛보기집에 오래 머물면서 방문자 역시 애꿎게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대기줄에서 기다리는 고객을 부르는 규칙(queue discipline)도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서류를 제출할 때 입구에 있는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고 분양유형에 따라 일련번호표를 주었다. 하지만 한 직원이 두 가지 유형의 서류를 받으면서 혼란이 생겼다. 일반분양과는 달리 번호를 부르지 않아 신청자의 순서를 알기 어려웠다. 또 서류제출시 당첨자보다 예비당첨자를 우선 들여보내 논란이 되었다. 5세 미만 아이를 데려온 방문객에게 우선권을 준 것은 고객의 안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만 하다.   

투기판, 사기판, 정치판이다

내가 관찰한 아파트집 분양은 갑질이다. 아파트를 짓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 제정신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파트에 그렇게 사람이 몰리고 돈이 몰리는 것을 맨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계약하러 온 어떤 이는 프리미엄만 벌써 1억 5천이고 몇 채씩 분양받은 사람도 있다고 떠벌렸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분양신청자들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말이다. 수많은 탈락자들이 “로또”에 당첨된 소수를 부러워하고 원망하는 그런 투기판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진 자들의 못된 짓을 배운 백성의 모습이다.
 
그런 투기 수요에 공급자는 아쉬울 것이 없다. 아파트집을 짓기도 전에 설계도도 없이 그럴듯한 조감도와 맛보기집으로 분양을 할 수 있다. 분양원가와 세세한 항목을 밝히지 않고 분양가를 책정한다. 소비자는 집의 정확한 모습과 품질을 판별할 수 없으며 가격이 적정한지를 따질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애초부터 시장실패는 불가피하다.  사전분양이 불완전한 계약이며 공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갑甲인 사업자는 친절하게 분양공고를 설명해주지 않았고, 을乙인 고객을 뙤약볕에 방치해 놓고 최소한의 그늘막이나 물도 제공하지 않았다. 책임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임시직원을 내세워 시민들의 궁금증과 분노를 짓눌렀다.

어쩌면 아파트 분양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축소판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그려진 그대로다. 신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 열차 끝에서 바둥대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고, 열차 앞에서는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른다. 뙤약볕이 불타는 곳에서 천막안으로, 다시 입구에서 맛보기집 안으로 전진하면서 냉방기와 생수가 제공되고 덧신과 안락의자가 추가된다. 인간대접을 받기 위해 치열하게 줄을 서고 번호표를 또 움켜쥔다. 약육강식의 전쟁이다.

흔히 아파트 분양은 시장 논리이며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 곡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득권자의 횡포에 가깝다. 아파트 가격을 떠받치는 세력이 버티는 한 강남에 수백만 채를 공급한다 해도 그 탐욕은 채울 길이 없다. 은행대출을 규제하고 세금을 강화해도 그들은 버티면서 반격을 도모한다. 규제가 약하면 실실 비웃고 강하면 세금폭탄이라며 대든다. 가진 자가 못가진 자들을 구석(주택분양)에 몰아넣고 경쟁과 불안을 부추겨 가격상승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은 가진 자들이 대부분을 갖게 되는 사기판이다. 돈이 없으면 아파트를 살 수도, 유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힘겨루기이자 돈겨루기다. 

아파트집 문제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토지, 증권시장, 이자율, 환율까지 얽히고 설킨 난제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피튀기는 몸싸움이다. 약육강식의 현실이다. 이래서 시장과 정부 모두 실패하기 쉽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그 어려움을 이해하고 참고 견디면서 길게 호흡했으면 한다.


원문: 박헌명. 2018. 아파트 분양은 갑질이자 정치다. <최소주의행정학> 3(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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