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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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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에 출석한 윤석열씨가 검찰총장은 법무부장관의 부하가 아니라고 말했다. 정무직 장관이 검찰의 상관이라면 검찰의 정치중립과 사법의 독립이 훼손된다고 했다. 추장관이 윤총장을 특정사건에서 배제시킨 것은 총장의 지휘권을 박탈한 것으로 검찰청법을 위반한 행위란다. 추장관의 지휘는 부당하고 비상식인 것이 확실하댄다. 뜬금없이 법무부와 검찰청은 법에 의해서만 관계되어 있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검찰총장이 법무부장관한테 할 수 있는 가장 점잖은 표현이 “중상모략”이면, 추장관은 윤총장의 부하인가? 대통령은 맞먹을만 한가? 대체 검찰총장이 무엇이란 말인가?

윤석열씨는 추미애씨의 부하다

부하部下 혹은 하관下官(subordinate)은 관료제의 직책상 자신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상사上司(supervisor) 나 상관上官(superior)은 부하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감독한다. 일상에서 상관이나 부하는 군대나 왈패 느낌을 주는 말이긴 하다. 윤총장은 검찰의 정치 중립성을 말하기 위해 장관의 부하가 아니라고 말했댄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할 능력이 빈약하거나 법리法理라는 말장난으로 혹세무민한 것이다. 김종민 의원의 지적대로 상사와 부하는 지휘·감독 관계를 말한다. 정부조직법 32조는 법무부장관은 검찰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장관 소속으로 검찰청을 둔다고 했다. 검찰청법 8조는 법무부장관이 검찰 사무의 최고 책임자라고 적고 있다.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 추장관의 수사지휘를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윤총장이 부하라는 뜻이다. 상식으로 봐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추미애 법무부장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부하임에 틀림없다.

윤총장은 검찰권은 국민에게 있다면서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적법하게 임명한 법무부장관의 지휘권은 얼버무렸다. 또 추장관의 검찰총장 지휘는 불법이고 부당하다면서도 (장관의 지휘는) 수용하고 말 것이 없댄다. 그저 법적으로 다투냐 마냐 하는 문제랜다. 그런데 자신이 장관과 법정에서 공박하면 법무·검찰이 혼란스러워지고 그 피해는 온전히 국민에게 돌아간댄다. 그러니 대의를 위해 쟁송을 피하는 것이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뜬구름잡는 소리인가? 수용하고 말 것이 없는데 뭐하러 법으로 다투는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뭐 이런 것인가? 치마두른 “어공”의 히스테리에도 대인의 풍모를 흐트리지 않는 “늘공”의 여유인가? 천하무적 검찰 권력으로 무장한 칼잡이 총수總帥의 기개인가? 얼치기 정치꾼의 허세인가?

장관의 지휘가 명백히 위법이라면 검찰총장은 장관에게 재고를 요청하거나, 법으로 다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나라를 뒤흔들만한 사안이라면 검찰총장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여 장관을 잡아들이고 그 장관을 비호하는 대통령을 조사해야 한다. 설령 권력자의 힘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체포에 실패하고 파직당하고 감옥에 끌려가도) 말이다. 그것이 검사다운 처신이며 밥값하는 일이다. 그럴 배짱이 없다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다. 위법이라고 믿으면서 항명할 용기가 없어 장관의 지휘를 수용하는 것도, 그래놓고 나서 수용하고 말고가 없다고 둘러대는 것은 직무유기나 구차한 변명이다. 검사는 커녕 조폭의 격에도 맞지 않는 양아치짓이다. 그 골목의 상도商道를 걷어차는 짓이다.

<맹자> 양혜왕장의 가르침

올바른 처신이라는 것은 그 시대, 그 사회, 그 자리(상황)에서 적절하다고 받아들일 만한 언행과 태도다. 내용과 형식 모두 적절해야 한다. 이러한 합당함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공公과 사私에 어울리는 처신이 따로 있으며 미국과 일본에 맞는 처신은 다를 수밖에 없다. 구태여 근본주의자의 교조敎條라거나 기회주의자의 방편方便일 뿐이라며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

관료제는 상급자(상관)와 하급자(하관)의 계서질서를 근간으로 한다. 책임과 관점(입장)과 선호가 다른 상하上下는 갈등할 수밖에 없다. 역할 자체가 애초부터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도록 설계되기도 한다. 상하가 모두 선하다면 갈등은 선하게 동작하고, 모두 악하다면 갈등은 크든 작든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크다. 전자의 경우는 문제가 없고 후자는 답이 없다. 올바른 처신은 상하의 이해관계와 견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중요하다. 누가 옳고 그른가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갈등을 받아들여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孟子>의 梁惠王章句下에서 실마리를 풀어보자.

不得而非其上子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子亦非也.

(웃사람이 베풀지 않아서) 아랫 사람이 즐거움을 얻지 못했다 하여 그 윗사람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고, 백성의 윗사람이 되어서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관료들이 최소한 하게 되어 있는 일을 한다면(딱히 위법한 행동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백성들의 일을 보살피지는 않는) 백성들은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그런 관료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아쉽고 화가 날 수도 있지만 욕설을 내뱉고 물리력을 동원해서는 안된다. 물론 공무원이 법에 나와 있는 것만 기계적으로 하는 것도 잘하는 짓은 아니다. 이 구절은 가진 자의 포악과 가지지 못한 자의 난동을 피하려는 소정의 최소주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공직자의 올바른 처신

하급자는 상급자의 명령을 평가하여(정당하다, 부당하다 등) 행동을 결정한다. 명령을 수용하거나, 비판하거나, 그만두거나, 항명할 수 있다. 물론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하관의 선택은 극히 제한되고 위험을 동반한다. 만일 상관의 명령이 합법이고 정당하다면 하관 대부분은 수용한다. Barnard (1968)와 Simon (1976)의 용어를 빌자면 아랫사람의 수용영역(zone of indifference or acceptance) 안에 들어가는 명령이기 때문에 의심을 품지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물론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여 내용을 조율할 수도 있다. 어떤 하관은 명령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불법이 아닌 이상 거부할 명분은 없다.

만일 자신의 양심이 상관의 정당한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수용영역에서 벗어난 명령이라고 확신한다면) 바로 자리를 내놓고 물러난다.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신념과 견해가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차하게 변명할 일도 없다. 자리를 떠난 뒤에도 상급자를 비난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언행으로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자중한다. 상급자에 대한 예의이다. 상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동네방네 떠벌려서는 안된다. 당당하게 항명할 배짱이 없으니 눈치나 살피다가 뒤에서 상사를 욕보이는 짓이다.

만일 상관의 명령이 절차와 내용에서 흠이 있다면, 우직한 하관은 부당한 명령을 비판하고 철회를 요구할 것이다. 이회창씨가 감사원장을 그만 둔 것처럼 명령을 거부하고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부당함을 호소할 수도 있다. 사안이 중대하다면 직업윤리에 충실한 하관은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준법투쟁을 하거나 법에 호소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상관을 굴복시킬 수도 있으나 어느 경우이든 불이익을 받을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상관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역拒逆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이행한다면 자리나 보전하거나 권력을 탐하는 하관이다. 공익은 커녕 자나 깨나 자기 혼자 먹고 살 걱정만 하는 자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명령을 하급자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상급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좋은 상관은 섯불리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하관을 불러다 놓고 다짜고짜 “까라면 까야지...”하면서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는다.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행동한다. 공익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뿐 개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관들이 집단으로 명령을 거역하고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함부로 소신을 접지 않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법과 절차를 설명하고, 엄정하고 절제된 지휘·감독권을 행사한다. 선한 상관은 평소부터 하관에게 모범을 보여 신뢰를 쌓는다(수용영역을 넓혀둔다). 권위는 기본적으로 자리에서 부여되지만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올라가거나 떨어진다.

법무부장관의 처신

추장관과 윤총장의 대립은 15년 전 천정배 법무부장관과 김종빈 검찰총장의 갈등과 비교된다. 천장관은 2005년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던 강정구 교수를 구속수사하지 말라고 김총장을 지휘하였다. 장관과 총장은 구속 여부에 대해 의견 교환을 했고, 장관이 법에 따라 수사지휘를 결정했다. 김총장은 수사지휘권 행사가 적법했고 수용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총장은 장관의 지휘 공문을 받은 다음 날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천장관의 지휘가 합법적이긴 하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공정한 수사와 재판에 필요한 검찰의 정치 중립성을 침해한다고 말했다. 장관의 부당한 수사지휘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은 검찰 내부의 신뢰를 잃었다고 했다. 부하 검사와 국민에게 부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사퇴했다는 얘기다.

천장관은 김총장의 의견(구속 수사)이 변치 않음을 확인한 뒤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 자신의 결정이 어째서 적법한지를 시시콜콜 따지거나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김총장이 사직서를 내고 언론을 통해 자신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내지 않고 맞대응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인 천장관의 모습이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도 적법한 수사지휘를 통하여 수사팀이 독립적으로 수사하여 그 결과만 윤총장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만 야당과 검사들과 설전을 벌이게 되면서 공직자의 처신이 아닌 정치인의 행보로 비춰졌다. 아들의 병가를 둘러싼 검찰조사와 국정조사가 맞물려 추장관으로서는 물러설 수도 침묵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수구세력의 의혹 제기와 고발이 무혐의 처분으로 끝나면서 추장관은 다시 옷깃을 여미었지만, 좀더 인내하고 자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부끄럽고 구린 데가 많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의도한 도발과 패악질에도 차분함과 단호함을 잃지 않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처신

김총장은 사퇴할 때까지 처신을 잘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장관과 본인이 각자의 소신을 펼친 결과이기 때문에 수사지휘를 수용했다고 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으나 윗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조용히 물러나 자중했어야 했다. 기자들에게 구구절절 사설을 늘어놓지 말았어야 했다. 한참 지난 뒤 점잖은 자리에서 담담하게 회고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처신은 한심하다. 조직을 이끄는 리더쉽과 공직자의 기본 자질이 있는지 의문이다. 장관의 수사지휘를 수용한다면서 수용하고 말 것이 없다느니 장관과 쟁송하느니 마느니를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아서 탈이었다. 수사지휘가 확실하게 부당하면 수용하지 말아야 하고(장관을 직권남용으로 체포하든지), 아니면 군소리 말고 따라야 했다. 정히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면 조용히 자리를 내놓고 떠나야 했다. 명색이 조직의 장이라는 자가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횡설수설해서야... 법적으로는 장관의 부하가 아닌데, 장관의 지휘를 수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궤변을 늘어놓아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으니... 대놓고 항명할 명분이나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검사물도 못먹어 본 “치마 나부랭이”의 지휘를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자니 검사라는 자존심이 울고... 뭐 이런 것 아닌가? 도대체 검사가 뭐길래 윤총장이 이러는 것일까?

권위주의 정권은 거의 대부분 검사출신을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했고, 수사지휘권은 발동되지 않았다. 검사동일체니 상명하복에 찌든 자들이니, 장관이 총장에게 전화해서 운을 띄우면 그만이었다. 형식상 지휘는 아니지만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것을 검사들은 본능처럼 알았다. 이견없이 선문답같은 덕담만 오가는 통화는 우아했다. 검사 선후배들은 윗분의 뜻을 헤아린 댓가로 “정치 중립”을 방패삼아 무소불위 검찰 권력을 지켜내고 검찰 정치를 마음껏 즐겼다. “정권의 시녀” “견찰” “검새” “떡검” “색검” “섹검”은 화려했던 그들의 추억이다.

결국은 검찰의 기득권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검찰공화국은 상수常數다. 이 나라를 이끄는 것은 검사 2천여 명이다. 그 어려운 사법고시를 패스한 전교 일등들 아닌가. 누가 감히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가. 어떠한 외부의 평가나 통제도 용납될 수 없다. 검사를 모욕하는 불경이자 반역이다. 검찰의 판단은 그 자체로 정의이자 진리다. 신성불가침이다. 이것이 검찰이 말하는 정치 중립이다. 추장관은 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지입은 사내가 아니기 때문에 들이받힌 것이다. 서울대 고대 출신 검사가 즐비한데 경희대 한양대 상관이 웬말인가? 하물며 학번도 없는 상고딩 주제에 치마 판사를 장관에 앉혀 검찰을 바꿔보겠다고 덤볐던 노무현은 얼마나 같잖았을까?

윤총장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조직에 충성한다고 말했다. 검사에 의한 검사를 위한 검사들만의 공화국을 사수하느라 용쓰고 있다. 정말 눈물겨운 모습이다. 권력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정의의 사도다. 하지만 정치를 하는 두목이라기보다는 주먹을 휘두르는 행동대장이다. 세상이 달라진 줄을 모르고 도끼질만 해대는 맹장猛將이다. 이제는 검찰 개혁에 공감하는 검사들이 많아졌다. 국민들은 작년 조국 대전을 통해 검찰이 어떻게 멀쩡한 시민을 때려잡는지 똑똑히 보았다. 이명박을 혐의없음으로 풀어주고 한명숙을 뇌물죄로 엮어 날려버린 검찰의 민낯이다. 깨어있는 시민은 이제 누가 적폐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윤석열 총장은 추미애 장관의 부하다. <최소주의행정학> 5(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