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남매와 저녁을 먹다
호텔에서 짐을 풀었을 때 2년 전에 졸업한 제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여자친구와 만달레이(Mandalay) 공항에 가서 한참을 기다렸는데 나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행여 부담을 줄까 저어하여 일절 방문소식을 알리지 않았는데 뜻밖이었다. 양곤에 잘 도착했다고 적었더니, 그는 호텔방으로 전화를 걸어서 극구 저녁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언제나 밝고 적극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학생이었다. 교정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알콩달콩 지내던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그는 정체가 심했다며 미안해 했다. 피부가 조금 까무잡잡해졌지만 여전히 건강해보였다. 근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는 여동생을 데려왔다. 침착하고 수더분하고 당차게 보였다. 식당에서 그는 어떻게 야채와 고기를 고르는지, 어떻게 남비에 담궜다가 어느 양념장에 찍어먹는지 조심스레 알려줬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오랜 만에 만난 오누이가 다정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그는 지금 진학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여자친구와 연말에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저녁을 마친 뒤 차이나타운에서 산책을 했다. 설날 행사로 떠들썩한 거리거리마다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던 여동생은 선물이라며 자스민차와 녹차를 사들고 돌아왔다. 은근한 마음이 전해진다. 새벽 일찍 출발을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안전운전을 신신당부했다. 어디 쯤인지는 몰라도 두세 시간 거리라고 했다. 다음 날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읽으며 나는 안심했다. 학교에 돌아와서 혹시나 해서 지도를 찾아봤다. 아뿔싸. 그는 양곤에서 700킬로 떨어진 만달레이 근처에 살고 있었다. 낙후된 도로 때문에 못해도 아홉 시간을 운전했을 그런 멀고 먼 거리였다.
쉐다곤탑에서 미얀마의 현실을 보다
현지 직원을 따라 양곤 시내 작은 언덕에 위치한 쉐다곤탑을 방문했다. 붓다의 머리카락 8개를 모신 신성한 곳이라고 했다. 호텔방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웅장하고 화려했다. 입구부터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긴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6-10세기 경에 지어진 이후 계속 탑을 높게 개축해왔는데, 18세기에 지진으로 무너진 탑 꼭대기를 99미터로 높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탑이 벽돌로 세워졌는데 수많은 금박을 붙여 마무리를 했다는 점이다. 멀리서도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대한 탑을 상상해 보라. 탑 꼭대기에는 귀한 보석을 박아놓고 망원경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금과 루비와 같은 보석이 많이 나는 나라에서나 할 수 있는 호사다.
탑은 긴 깔때기를 엎어놓은 형국인데, 가장자리에 다양한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서로 다른 부처상을 모셔놓았다. 사람들이 탑 주위로 거대한 원을 그리면서 성전을 둘러보게끔 해놓았다. 내 생일이라는 화요일 길목에 있는 부처상에 가서 소망을 담아 물을 서너 번 붓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탑 둘레를 거닐며 담소하거나, 바닥에 앉아 쉬거나, 혹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매년 많은 시민들이 기꺼이 시주를 하고, 많은 돈을 들여 이 탑을 갈고 닦고 꾸미고 있다고 했다. 어느 곳보다도 깨끗하고 단정하고 안전한 장소였다.
아마도 이 탑은 백여 개가 넘는 인종을 하나로 묶고 붓다의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만들었을 터이다. 그 오누이처럼 사람들의 품성이 밝고 착한 것은 이런 까닭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금탑에 현혹되어 지배자의 통치이념에 순종하거나 고통받는 차안此岸을 외면하고 피안彼岸를 꿈꾸는 것같아 안타깝다. 바벨이란 도시에 세워진 탑을 보고 신이 노여워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소정은 “탑을 세우느라 동원된 국민들은 시간과 자원을 통치체제에 박탈당하며, 이 광장에서 탑을 보고 이를 건설한 자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탑의 건설을 지휘한 통치자를 숭배케 된다”(1991: 99-100)라고 적었다. 마찬가지로 이 쉐다곤탑을 보면서 사람들이 주권자 자신이 흘린 피와 땀을 망각하고 지배자인 왕과 식민지 총독과 군인정권의 치적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천년 양곤의 도로와 건물은 몇몇 현대식 건물을 제외하고는 신민지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했다. 닥지닥지 붙어있는 조그마한 집과 가게들은 무너져 내릴까 위험해 보였다. 녹이 잔뜩 슨 철문으로 걸어 잠근 집과 아파트는 “우리”를 잊은 식민지배의 흔적이었다. 깨끗하고 안전한 곳은 쉐다곤탑이나 호텔 뿐인 것처럼 보였다. 도로 바닥은 고르지 못하고 요동치고 상하수도가 통하지 않아 냄새가 났다. 버스 위주의 대중교통은 부족하고 교통신호는 잘 지켜지지 않아 차행렬은 언제나 더뎠다. 어찌하여 쉐다곤탑에는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으면서 일상 생활을 개선하는데는 이리도 게으르단 말인가? 피안이 아닌 현실에서, 성지가 아닌 집과 거리에서 “쉐다곤탑”을 구현할 수는 없는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금덩어리 베개삼아 보석같은 세상을 꿈꾸며 행복하게 굶어죽을 것인가?
우리의 쉐다곤탑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도 어쩌면 서울 한복판에 “쉐다곤탑”을 세워놓고 멍하니 수구세력의 지배이념을 숭배하고 있는지로 모른다. 구한말 이래로 반공, 냉전, 반민족, 성장주의, 재벌주의 등이 우리 일상을 옥죄고 있다. 10대 교역국, 3만불시대면 뭐하나? 빨갱이면 사람도 아닌가? 북한과 잘 지내면 안되나? 한미동맹은 영구불변의 진리인가?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나? 최저임금을 올리면 기업과 경제가 망하나? 노조와 규제를 없애야 기업이 투자를 하나? 부자들이 종부세 더 내면 공산주의인가? 저 탑을 넘어야 답이 보인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미얀마 쉐다곤탑과 우리의 쉐다곤탑. <최소주의행정학> 4(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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