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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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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10 무제한 토론 제도와 말이 아닌 말폭력

무제한 토론 제도와 말이 아닌 말폭력

2019. 3. 10. 21:19 | Posted by 최소주의 못골

테러 의심만으로도 국가정보원이 제멋대로 (법원의 영장없이 자의恣意로) 국민을 감청하고 금융계좌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한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 2016년 2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입법부에서는 여당과 야당이 이 법안에 합의를 보지 못하고 행정부에서는 박근혜씨가 법안처리가  늦어지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책상을 내리친 가운데 국회의장 정의화씨가 북한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발사 등을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고 규정하고 법안을 직권상정하였다. 이에 야당의원들이 반발하여 국회법 제 106조 2에 근거하여 시간 제한을 받지 않는 무제한 토론을 며칠째 진행하고 있다.

이 무제한 토론은 지난 수십 년 간 벌어진 법안 날치기와 이를 둘러싼 폭력을 막기 위해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다수당의 횡포를 소수당이 폭력이 아닌 말로 견제한다는 의미에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말할 자유(freedom of speech)를 보장하여 주먹질 대신에 말로 다투도록 한다는 점이다. 법안을 반대해야만 하는 애절함이 있으면 주먹이 아닌 말로 약자(소수당)의 원망을 풀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문영 (1980: 357; 1986: 290; 2001: 187)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때리지 말고 말로 합시다’라는 세간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Leiter (2010)는 John Stuart Mill의 논리를 빌어 말할 자유의 가치를 논구하였다. Mill에 의하면 인간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언제든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허용해야 하며, 우리가 진리 전체가 아닌 부분을 가지고 있는 한 다른 의견을 접해볼 필요가 있으며, 우리가 진리 전체를 가졌다고 믿는다면 그 만큼 자신있게 다른 의견 (설령 완전히 틀린 의견이라 하더라도)에 맞서야 한다 (Leiter 2010: 164). 요컨대, 말할 자유는 불완전한 인간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 무제한 토론은 이러한 명제에 부합하는 제도이다.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 (이문영 2001: 246).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야당의원들의 무제한 토론과 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다.

비폭력과 말

이문영 (1986: 290; 1991: 322; 1996: 404; 2001: 105)은 평소에 비폭력을 설명하면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임 역설하였다. 이문영 (1991)은 “때리는 것인 폭력의 반대는 매를 맞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지 맞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었다 (118쪽). 상대방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매를 맞으면서도 말을 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비폭력과 말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통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문영 1980: 6; 이문영 1991: 30, 118).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억압하고 때려서 일을 한다 (이문영 1986: 242). “때리지 않고 말로 하는 사회가 민주사회이다” (이문영 1991: 317). 말은 토론을 통해 약속(합의)을 이끌어내고 그것이 계약이 되고 법이 된다 (이문영 1980: 357). 비폭력은 (1) 약자를 일단 보호하고, (2) 약자를 성장시킨다 (이문영 1991:18-19). 어차피 약자는 약해서 강자에게 쓸 폭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먹쓰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이문영 2001: 148). 그렇지 않으면 약자는 더 센 폭력과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주먹이 아닌 머리를 쓰는 일이 바로 비폭력이고 말이다. 이 비폭력이 약자가 강자의 폭력을 극복하고 끝내는 평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무기이다 (이문영 1986: 297-298). 또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성질(도덕성)이기도 하다 (Park 2015: 292). 그러면 도대체 그 ‘말’이란 무엇인가?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은 너무나 옳고 지당至當해서 상대방조차도 그의 이성理性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6, 80, 491, 497). 상식과 규칙에 비추어 올바른 말이며 진리이다 (이문영 1986: 242; 이문영 1991: 351). 군더더기 없이 “말할 것만 말하는 것”이다 (이문영 1991: 18). 그래서 진리의 반대어는 비진리나 허위가 아니라 바로 폭력이며, 말의 반대어는 침묵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문영 2001: 187, 189). 또한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와 지켜야 할 최소에 관한 말이어야 하며 (이문영 2008: 150, 491), 말을 하되 말만을  해야 한다 (이문영 1996: 56). 비폭력은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이며 (이문영 2008: 65), 그 비폭력이 말이고 최소한의 발언이다 (이문영 1996: 56). 즉, 비폭력=말=진리=최소라고 할 수 있다. 소정 선생님의 최소주의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서 모두 ‘말’이 아니다. 이문영 (2001)은 예수의 비폭력 저항을 설명하면서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님을 상황은 보여준다” (246쪽)고 적었다. ‘말폭력’도 폭력이라는 뜻이다. 또 비폭력은 완전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이문영 2008: 59). 물리력을 행사하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언어, 감정, 심리 등과 같은 ‘불완전한 비폭력’도 폭력이다. 강자의 폭력에 약자가 어설픈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자의 폭력이 가혹할수록 약자는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완전한 비폭력에 의지해야 한다 (이문영 1986: 289, 298). 군더더기나 감정 발산을 피해야 한다. 꼭 필요한 실존 발언만을 최소로 해야 한다. (이문영 1996: 56).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목소리를 가다듬고 교과서를 읽듯이 개인 감정을 걷어내고 말해야 한다 (Park 2015: 290).

말이 아닌 ‘말폭력’

어쩌면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 많은 말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갑질’로 표현되는 불공정과 강자의 논리에 너무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말폭력에 내성耐性이 생겨서인지 이제는 어지간한 언사는 폭력으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점점 더 오감을 자극하도록 말폭력은 거칠어지고 흉포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공직자와 정치인이 즐겨쓰는 말법에서 두드러진다. 주먹질은 무대 뒤로 감춰지고 ‘말두겁’을 쓴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간의 합리성을 살리고 지혜를 모으려는 대화와 토론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당장 너를 짓밟아야만 내가 산다는 그런 정신줄에 사로잡혀 있다. 생사 기로에서 무슨 수를 쓰든 피난열차에 올라타야 하는 피난민 정신줄이다.

무제한 토론을 하는 중에 말을 못하게 하거나 훼방놓는 언사言辭는 폭행에 가까운 말이다. 테러방지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면서 윽박지르고, 반대편을 국가 안보와 안전을 내팽개친 무책임한 세력으로 매도罵倒하는 것은 말이 아닌 폭력이다. 상대방의 의견이 완전히 틀렸다 해도 당당하게 맞서라는 Mill의 지적을 무색케 하는 행위이다.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고 믿고 있다 해도 그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傲慢일 뿐이다. 무제한 토론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최소한의 실존 발언으로) 끝까지 상대방의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노여운 감정을 흘린다면 이것 역시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다.

좀 더 야만스런 말폭력도 종종 경험한다. 예컨대, “오세훈은 산소같은 후보이고 한명숙은 연탄가스 같은 후보”라고 말하고 “안상수는 1급수이고 송영길은 5급수”라고 외쳐댄다. 아마도 간단명료하게 의미전달을 하려는 선거전략일는지는 모르지만 밑도 끝도 없이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저주하는 짓이다. 말두겁을 쓴 파렴치한 폭력행위다.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빨갱이가 무엇인지, 어떤 근거로 빨갱이라고 주장하는지를 설명하지도 않고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며 빨갱이칠을 해놓고 돌팔매질을 할 뿐이다. 이쯤되면 대화니 토론이니 합리성이니를 따질 판이 아니다. 너가 죽어야만 내가 산다는 생존전쟁에서 패거리를 나누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할 뿐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연탄가스가 되고 5급수가 되어버린 상대방과 그 식구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참으로 천박하고 비열한 말폭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화는 커녕 최소한의 인간존엄성마저 해치는 짓이다. 이런 야만스러운 말폭력은 비단 피아간 경쟁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2월 10일 이승준 기자가 요약한 김종인씨의 기자간담회 발언을 보자. “안철수 대표가 말하는 공정성장론과 김 위원장이 말하는 포용적 성장론은 어떤 차이가 있나?”는 질문에 대해 김종인씨는 이렇게 답한다.

“안 대표의 공정성장론은 시장의 정의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정의만 갖고 경제문제 해결이 안된다. 시장정의, 사회정의 조화를 맞춰야 하는데, 그게 포용적 성장이다. 그 사람(안철수)은 경제를 몰라서 누가 용어를 가르쳐 주니까 공정성장 얘기를 하는 것이다. 내가 그 사람하고 많이 이야기해봐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이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샌더스라고 했다고 했다가, 자기가 스티브 잡스라고 했다가 왔다갔다, 그 사람이 정직하지를 않다. … 그럴 수도 있다. (안철수는) 시장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를 구분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의사하다가 백신 하나 개발했는데 경제를 잘 아나, 적당히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른바 배울 것 다 배우고 알 것 다 알 만한 사람의 언사로 믿기 어렵다. “경제를 몰라서 누가 용어를 가르쳐 주니까,” “…구분지을 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정직하지를 않다,” “의사하다가 백신 하나 개발했는데…” 등은 사실여부와는 별개로 말하는 자의 품격을 의심케 한다. 공당公黨의 우두머리의 입에서 나온 언사가 저자 거리의 거간꾼이나 건달의 말법을 닮아 있으니 말이다. 어찌 그리 쉽게 상대 정당의 수장을 깔아뭉개는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오랜 정적도 아니고 얼마전까지도 ‘멘토’(무슨 뜻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지는 모르겠으나)였다는 사람이 아닌가? 여당과 각을 세운다는 면에서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사람들은 김종인씨가 안철수씨에게 ‘직격탄’을 날렸다고 흔히 말한다. 얼마나 말폭력에 시달렸으면 이젠 말폭력으로도 부족해 말폭탄을 쐈다고 표현한단 말인가? 말 그대로 상대방 가슴팍에 ‘직격탄’ 을 박아넣어 말로 피와 살을 한방에 날려버리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치도 않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황당하다. 말폭력의 당사자와 희생자는 물론이려니와 방송과 신문에서조차 그 뜻을 깊이 생각치 않고 으레 그러려니 하고 있다.

왜 꼭 이렇게 남을 깎아내리고 짓밟아야 하는가? 의사는 경제를 알면 안되는가?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경제이론을 알아야 하는가? 경제학 박사는 쿠데타 세력을 편들고 여야를 왔다갔다 해도 되지만, 의사는 기업을 크게 일구었어도 경제를 말하거나 정치를 하면 안되는가? 얘기해 보면 사람을 그리 잘 안다는 사람이 어찌하여 그토록 허무하게 박근혜씨에게 버림을 받았단 말인가? 사실관계는 물론 논리도 품격도 없는 ‘말구정물’을 입에서 뿜어낼 뿐이다. 상대방만 구정물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구경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구역질나는 ‘말구정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워 침뱉기다. 생각없이 허공으로 날려버린 ‘직격탄’이 제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도망갈 틈도 없이 피아 구분없이 뼈는 산산조각나고 피와 살은 터지고 찢겨 사방에 흩어진다. 어이없는 자폭自爆이다. 이런 판에 대화, 토론, 약속, 합의, 합리성이 자리할 틈은 없다.

모두 폭행에 가까운 부적절한 언사이다. 지나치고 불필요한 얘기다. 최소주의에서 요구하는 실존적이고 간절한 말이 아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생각없이 내뱉어서 쓸데없는 불란만 자초하는 말폭력일 뿐이다. 말두겁을 쓴 폭력에는 사람은 없고 처절한 피아만 있다. 사실과 논리는 없고 매도와 저주만 있다. 약속은 없고 배신만 있다. 상식은 없고 광기만 있다. 원칙과 합리성은 없고 제멋대로만 남아 있다. 상대방의 이성이 차마 거부하지 못하는 그런 지당한 말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니 설령 지적한 것 모두가 맞다고 해도  상대방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그 말본새가 싫어서 원망과 적의만 품을 것이다. 결국 대화를 열고 토론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묻지마 말전쟁’을 시작하는 일이다. 명분도 실리도 없이 갈등과 대립을 증폭시키기만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자책하기를 후하게 하라

이렇게 ‘말폭격’을 해놓고 이성에 근거한 토론과 합의를 기대할 수 있을까? 더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솥밥을 먹었던 동지가 아니었던가?『 論語 』<衛靈公>편에 ‘스스로 책망하기를 후하게 하고, 타인을 적게 질책하면 원망이 멀어진다’(躬自厚而薄責於人則遠怨矣)고 했다. 이 문구를 인용하며 이문영 (1996: 429)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개인윤리이다. 남을 폄하하거나 남의 실수를 악용하여 그 위에 올라서기보다는 자신을 잘 갈고 다듬어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야만이 아닌 문명을 지향하는 한 상대방과 대화하고 토론하여 합의를 이끄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자기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적과도 대화를 해야 한다. 쓸데없는 ‘말전쟁’으로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먹질을 포기했으면 폭력과 같은 말을 피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가 있어야 한다. 서로를 상처내지 않으려는 최소 조건이자 비폭력이다. 인간의 자랑인 언어능력을 최대로 살려 사실에 근거한 논리로 말을 해야 한다. 적이 들어도 도저히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을 공손히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이 약속을 만들고 규칙과 법이 되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 특히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이런 비폭력과 말의 의미를 깨달았으면 한다. 이제 그만 끝 간데 없는 ‘말폭력’ 전쟁을 끝내고 서로의 지혜를 모으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화와 토론을 시작했으면 한다.

참고문헌

Leiter, Brian. 2010. Cleaning cyber-cesspools: Google and free speech In The Offensive Internet: Speech, Privacy, and Reputation, edited by Saul X. Levmore and Nussbaum, Martha Craven, 155-173.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무제한 토론 제도와 말이 아닌 말폭력. <최소주의행정학>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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