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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최소주의행정학

정부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 본문

반민주주의 증상

정부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

못골 2020. 12. 3. 16:51

정부관료제가 쓸데없는 규정이나 절차를 들먹이며 시민들을 골탕먹이곤 한다. 오랜 관행이라거나 전통이라는 이유로 고집을 피운다. 타성에 젖어 중복되고 지나친 규제에 막무가내로 집착한다. 상식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빨간띠(Red Tape)질이다. 관료가 다 해먹는 관료독재의 완장질이다. 못된 버르장머리다.

어떤 제도가 정착되면 사람의 자의성이 아니라 약속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효율성과 예측성이 높아지고 부패 가능성이 낮아진다. 하지만 그 제도가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 관료제 곳곳에 때가 타고 기름이 낀다. 흐름은 느려지고 재량은 짓눌려 숨이 막힌다. 조직이 뻣뻣해지고 돌처럼 굳어진다. 이른바 석회화石灰化(calcification) 현상이다. 인간이 제도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라 제도에게 농락당하는 노예로 전락한다.

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

지난 8월 지인에게 중고 워크스테이션을 보냈다. Xeon Gold CPU 두 개와 256GB DDR4 램과 3,800개 CUDA 코아 그래픽카드가 장착된 시스템이다. 사진을 모아 3차원으로 만드는 그림합성(Rendering) 작업에 필요한 사양이다. 수치계산용으로도 탁월한 성능을 보였다. 큰 골판지 상자에 완충재를 넉넉히 넣어 포장을 한 뒤 우체국으로 가져갔다. 나이가 지긋한 직원이 나와 살펴보더니 무게와 최장 길이는 괜찮댄다. 그런데 나머지 둘래가 2m가 넘는다며 소포는 안되니 EMS로 보내야 한댄다. 다시 포장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20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하고 그만 손을 털기로 했다.

월요일 아침 그 직원이 전화를 걸어왔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느낌에 바로 달려갔다. 젊은 직원이 나와서 20만엔(220만원)이 넘는 물건은 수출로 간주된다고 했다. 수출대행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노직원이 실수로 빠뜨렸댄다. 나는 소포에 맞게 다시 포장을 해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컴퓨터는 이미 동경 국제우편물 사무소에 묶여 있댄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노직원은 미안한지 내게 선물용 수건을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출서류를 작성하기로 했다. 우체국에서 당분간 국제우편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에 조바심마저 들었다.

나는 우체국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궁금했다. 젊은 직원은 동경 사무소 직원과 통화를 하면서 매뉴얼과 서류를 번갈아 뒤적인다. 내게 추가로 작성해야 하는 서류를 들이민다. 또 한참을 통화를 하더니 내게로 와서 금요일에 사용한 신용카드를 달랜다. 휴대용 카드기계가 찍찍 영수증을 토해낸다. 이전 거래를 완전히 취소했다고 설명을 해준다. 다시 저리로 가서 통화하던 직원은 다가와서 신용카드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수출대행 수수료가 포함된 전체 요금을 결제하는 것이랜다. 다시 동경 직원과 통화를 하더니 내게 취소된 영수증, 새 영수증, 신용카드 영수증 등을 수북이 안겨준다. 정말 미안하다면서 같은 수건 하나를 건넨다. 시계를 보니 1시간이 좀 넘게 우체국에 머문 셈이다. 허탈하다. 한국이었으면 얼마나 걸렸을까?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다음날 세관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쪽 직원을 통해 확인해 보니 내가 서류에 적은 물건의 가치가 왜 그리 비싸냐는 것이었다. 사양에 따라 컴퓨터 가격이 고무줄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는 직원에게 컴퓨터 영수증을 보여주면서, 우체국에서는 정확한 금액이 기억나지 않아 세금을 뺀 근사치를 적었다고 말했다. 직원은 고작 천엔(11,000원) 차이일 뿐이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다음부터는 서류에 물건 가치를 정확히 적으라는 세관직원의 훈계를 씁쓸하게 전달해 주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비싼 물건을 터무니없이(세금이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낮은 가격으로 적는 일을 문제삼아야 하지 않을까? 나름대로 정직하게 적은 가격이건만 300만원에서 만원 틀렸다고 이리 트집을 잡는 것일까? 꼼꼼함이 지나친 것일까? 아니면 눈치껏 20만엔 아래로 적어야 하는데, 공연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자신을 귀찮게 했다는 핀잔일까? 알쏭달쏭하다. 며칠 뒤에 수출대행을 확인한 문서가 도착했으나 영 뒷끝이 개운찮다. 보름이 넘도록 EMS가 늦어지자 지인은 한국이었으면 당장 우체국에 찾아가 항의를 하고 배상을 요구했을 것이라며 흥분했다.

악한 조직에서 일하는 선한 사람

소정 선생님께서 초월윤리를 조직론에 적용하면서 조직(공식)과 사람(비공식)의 선악을 말씀하셨다(1991: 131-133). 나쁜 조직에서 일하는 착한 사람이 좋은 조직에서 일하는 나쁜 사람보다 훨씬 못하다. 나쁜 조직은 현실(고객의 요구)에 적응하지 못해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나게 한다. 좋은 일을 할 의지가 없거나 효율성과 효과성이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무리 선해도 그 결과가 선하기 어렵다.

내가 관찰한 우체국 직원은 실수를 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다. 고객을 친절하게 대했다. 수출서류를 빠뜨린 것도 이 동네에서 비싼 물건을 EMS로 보내는 일이 드물었던 탓이다. 하지만 우체국의 서류양식은 아직도 번잡하고 영수증은 길고 많았다. 한시간 넘게 통화를 하면서 신용카드 결제를 취소하고 다시 결제해야 했다. 낯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의 능력이 부족한 듯했다. 정보시스템 자체는 우수하나 이것을 활용하는 사람과 제도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인감도장과 서류양식에 매달려 있고, 화급을 다투는 전염병 통계를 팩스로 모으고 있다.

얼마 전 스가 총리가 디지탈청을 만들어 일본의 전자정부를 혁신하겠다고 밝혔다. 광인터넷으로는 선두권을 달리지만 전자정부는 10위 안에 들기도 버거운 일본이다. 하지만 전자정부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첨단 기술이라도 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을 풀어낼 수 없다. 정보기술이 돌덩이처럼 굳어진 관료제의 머리와 팔다리를 쉽게 풀어낼 수 있다는 기대는 신기루다. 시민들이 관료제의 문제점을 자각해야 한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관료제를 깨울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결국은 기술이 아닌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지난至難한 일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부관료제의 석회화와 빨간띠질. <최소주의행정학> 5(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