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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이문영 선생님의 최소주의 행정학, 비폭력, 협력형 민주주의를 밝히고 알리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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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란 무엇인가? 20여년 전 직위가 높은 윗사람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代價로 적어낸 반성문의 첫번째 문장이다. 많은 아랫사람들이 보는 데서 윗사람의 체면과 위신을 땅바닥에 패대기친 그 불경을 참회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떳떳한 마음으로 대의를 선택하기로 하고 나는 두번째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권위란 그 자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반성문을 읽어본 어느 상급자가 혀를 끌끌 찼다. 반성문을 가장한 훈계문에 당혹해하면서도 차마 나무라지 못하는 심경을 그의 낯빛에서 읽었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불경스런 반성문”을 적었을까? 

무관심영역? 수용영역?

이문영은『인간 종교 국가』(2001: 388)에서 “바너드(Chester I. Barnard)는 1938년에 저술한 Functions of the Executive에서 하급자의 무관심영역(zone of indifference)를 말했다. ...  위사람이 마구 눌러대면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지며(indifference), 윗사람의 명령을 받아들이는(acceptance) 영역이 한정된다는 말이다”라고 적었다. 이에 앞서 “윗사람이 아무리 설쳐도 아랫사람이 무관심하면 일이 안된다는 바너드의 말, ‘무관심영역’(zone of indifference)을 이어받아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 시몬이다. 바너드는 윗사람이 명령을 내려도 그 명령을 아랫사람이 실천할 수 없는 명령이거나 그 명령의 실천이 아랫사람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거나 그 명령이 조직의 목적과 어긋나면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진다고 보았다”(47쪽)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선생님은 “Indifference”를 문자그대로 무관심으로 해석해서 Barnard의 뜻을 조금 오해하신 것같다. 이 zone of indiference는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지는 영역이 아니라 윗사람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고 명령(의사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영역이다. 원문은 “[T]here exists a ‘zone of indifference’ in each individual within which orders are acceptable without conscious question of their authority” (Barnard 1968: 167) 로 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Simon (1997)은 zone of acceptance를 설명하면서 “... whenever [a subordinate] permits his behavior to be guided by the decision of a superior, without independently examining the merits of that decision” (10쪽)과 “an area of acceptance in behavior within which the subordinate is willing to accept the decisions made for him by his superior” (185쪽) 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수용영역은 명령의 적절성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을만큼 합당한 것이어서 아랫사람이 군소리없이 그냥 명령을 받아들이는 영역을 말한다. 어떤 명령이 그 영역 안에 있는 한 아랫사람은 의심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윗사람이 내리는 명령을 아랫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도를 순서에 따라 정렬하면, (1) 명백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명령, (2)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unquestionably acceptable)  명령, 그리고 (3) 그 중간선에 있어서 가까스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명령이 있다(Barnard 1968: 168-169). 두번째 부류가 바로 수용할 만한 범위(range) 안에 있는 명령인데, 아랫사람은 그 명령이 무엇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윗사람의 권위를 의심하거나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다)(169쪽).

그래서 Barnard의 zone of indifference (상관안하고 받아들이는 영역)은 Simon이 Administrative Behavior (1997)에서 표현한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1) 어차피 Barnard의 설명에도 acceptance가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인간 종교 국가』(2001)에 있는 표현은 “위사람이 마구 눌러대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명령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영역에서 벗어나게 되어 윗사람의 권위가 의심받게 된다는 말이다,” “윗사람이 아무리 설쳐도 아랫사람이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령을 내려야 일이 된다는 바너드의 말,” “... 그 명령이 조직의 목적과 어긋나면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을 벗어난 명령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받아들이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정도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위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1968)는 권위를 “the character of a communication (order) in a formal organization by virtue of which it is accepted by a contributor to or ‘member’ of the organization as governing the action he contributes” (163쪽)로 정의했다. 사람들(아랫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권위를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명령이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1) 아랫사람이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2) 조직의 목적과 불일치하지 않아야 하고, (3) 자신의 이해관계와 부합해야 하고, (4)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따를 수 있어야 한다(165쪽). 물론 권위는 개인의 주관이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객관이라는 관점에서 조직 내에서 의사전달 체계(channels of communication)를 통하여 공식성 “acting officially”을 가지고 행사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163, 172쪽). 

요컨대, Barnard는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명령과 지시가 아니라 아랫사람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Golembiewski and Kuhnert 1994: 1210-1211). 권위가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상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단지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명령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받아들였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Fry 1989: 168). Barnard는 위사람에 방점을 둔 기존의 권위와 다르게 아랫사람의 관점을 강조했는데, 그의 견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권위는 다듬고 가꾸는 것이다 

왜 나는 권위가 자리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는가? 당시 나는 Barnard (1968)과 Simon (1997)을 직접 읽지 못했다. 물론 강의시간에 zone of acceptance를 배웠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절실하게 그 의미를 느낀 것은 대학과 사회생활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부여된 책임을 생각하기보다는 권위를 내세우는 것일까? 일을 잘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일까? 자신이 권위에 합당한 능력(지식과 기술)을 가졌는지를 따지는데 게으르고,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데 부지런한 것일까? 일이 잘 되면 자기 공으로 돌리고 잘못되면 아랫사람 책임으로 돌리는 일을 어쩌면 그리도 잘하는 것일까? 결국은 명예롭지 못하게, 혹은 비참하게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면서 끝까지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 악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조직을 망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들인지를 생생하게 관찰하였다.   

Barnard (1968)는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 (authority of position)와 관리자의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 (authority of leadership)를 구분하고, 능력이 출중하지만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권위라기보다는 영향력(influence)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173-174쪽). 비록 이론 에서 두 권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라도 현실에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은 능력과 자리는 비례한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능력이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이렇게 평가와 상벌이 공정하면 조직 구성원들은 편안하게 일을 잘 할 것이고 조직의 성과는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능력이 쳐지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경우이다. 멋대로 조직의 유인체계를 조작하여 편을 가르고 내 편에게 부당한 혜택을 베풀어 조직을 흔든다. 자원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한 조직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조직을 망친다.

권위가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보다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권위가 계서제로 운영되는 공식 조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이상 권위는 물론 자리(직위)에서 시작된다. 일을 잘 하기 위해 책임을 나누어 지는데(분업) 그것이 그 자리다. 권위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고 권능 (법률상 능력) 을 주는 것이 아니다. 책임은 권위의 장식품이 아니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자리는 거기에 걸맞는 권능이 부여되고 권위는 높고 크다. 자리에서 시작된 권위(권능이라 하자)는 조직도표나 직무분석표에 나와있는 서류상의 권위이다. 실제 권위(자리와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의 총합)는 그 자리에 오른 자가 어찌 하느냐에 따라 서류상 권위보다 낮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높아지기도 한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지식, 기술, 도덕성, 체력, 언변, 글쓰는 능력 등을 어찌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실제 권위(의 크기)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권위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서류상의 권능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선 사람이 다듬고 가꾸고 개발해나가야 하는 능력이다.  

권위는 능력이자 자원이다 

권위의 본질은 조직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영향력이다. 또한 권위는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이나 장비와 같은 소비 자원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없어지는 그런 자원이 아니다. 잘 사용하면 늘지만 잘못 사용하면 줄어드는 그런 자원이다. 

Barnard (1968: 165, 167)가 지적한 대로 윗사람은 사려깊이 좌우를 살펴서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에 들어갈 만한 명령(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단순히 서류상 적힌 권능을 행사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권위는 크게 늘거나 줄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권능을 행사하여 사람들과 화합하고 조직의 일을 잘 해내간다면 권위는 늘어난다.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든 능력에서 나오든 권위든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경우다. 권위 점수는 쌓여갈 것이고 “권위 계좌”의 잔고는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그만큼 윗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진다. 반대로 적절하지 않은 권능을 행사한다면 권위는 줄어든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수행할 수 없는 명령,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이해관계를 해치는 명령 등은 수용영역에서 벗어난다. 이런 정당성 없는 명령을 강제하면 당장은 어떨는지 몰라도 알게 모르게 권위는 허물어진다. 권위 점수가 깎이고 계좌 잔고가 줄어든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도 쭈그러 든다. 윗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총알’이 없어진다.

평소에 권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윗사람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윗사람이 어쩌다가 정당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아랫사람의 허용영역은 이미 좁아져서 퇴짜맞기 십상이다. 아랫사람은 그 명령이 정당한지 의심부터 할 것이고, 수행한다 해도 성의를 다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잔고가 바닥난 윗사람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던 소년 얘기처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사람들이 더이상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소에 권위 점수를 많이 쌓아두고 잔고를 넉넉히 채워넣은 윗사람은 좀 더 쉽고 여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어지간 하면 아랫사람이 그 명령이 정당한지를 따지지 않고 성심성의껏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평소와는 다르게 덜 정당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수용영역이 넓고 벌어놓은 권위 잔고가 많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명령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윗사람이 자리와 능력에서 나온 권위를 모두 겸비한 경우 아랫사람은 수용영역 밖에 있는 명령조차도 따를 수도 있다 (Barnard 1968: 174). 물론 그만큼 윗사람의 권위 점수는 깎일 것이고 권위 잔고는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은 좁아질 것이다. 

누가 불경죄를 말하는가? 

우리는 사극에서 왕이나 양반을 능멸한 불경죄를 묻는 장면을 종종 본다. 왕의 권위를 세우고 반상 법도를 반듯하게 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고 아랫사람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멍석말이를 한다. 그런 장면 대부분은 윗사람이 떳떳하지 못한 경우다. 떳떳한 윗사람은 그 권위를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는다. 설령 자리에서 비롯된 권위가 부당하게 도전받았다 해도 그런 윗사람은 아량을 베풀고 꼭 필요한 경우에 정해진 절차를 온전히 따르는 방법으로 대응한다. 그러니 무거운 처벌을 내린다 해도 원망이 없고 억울함이 없다. 그 처벌조차 수용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옳으니 그르니 시비걸지 않는다. 정당하고 공정한 의사결정은 윗사람의 권위를 높일 뿐이다. 그런 윗사람은 스스로 권위니 불경죄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 자체로 권위를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대신 행여나 자신에게(자리가 아닌 관리자 능력과 처신에서) 부족한 것이 있었는지를 차분히 돌아보면서 반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관찰하는 윗사람은 그 반대이기 십상이다. 어느 자리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한 자리를 꿰어차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팔뚝에 찬 완장이 마치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표식인 것처럼 우쭐대고 골목길을 누비는 자들이다. 그 자리가 주는 책임은 망각하고 자리에서 나온 권능이 모두인 것으로 믿고 법대로 하자고 한다.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은 아무렇게나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아랫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받들어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천진난만한 윗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윗사람의 몫이지 아랫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까라면 까”를 입에 달고 다니는 자들이다. 

이런 기고만장들은 평소 말과 행실이 비루한 자들이다. 권능만 내세우면서 거드름을 피우다 일이 잘못 되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다. 자리가 주는 권능이 아무리 높아도 이런 태도와 처신은 그 사람의 실제 권위를 크게 깎아먹는다. 지식과 기술과 언변이 아무리 좋아도 권위 점수를 벌거나 잔고를 불릴 수 없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을 넓힐 수 없다.   

국회의 권위가 어쩌니 하면서 청문회에 출석한 참고인을 윽박지르는 장면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그렇게 권위를 따지는 사람치고 멀쩡한 윗사람인 경우는 극히 희박하다. 대부분은 부적절한 언행으로 쓸데없는 언쟁을 불러일으킨 뒤 그 책임을 참고인에게 떠넘긴다. 소위 “갑질”이다. 청와대에서 걸핏하면 국회를 비난하고 국민을 탓한다. 민주공화국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거나 입법권과 사법권이 국회와 법원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행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죄를 규정한다. 자신이 진리이고 정답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자기 중심으로 돌고, 또 그렇게 돌아야 한다는 정신줄이다. 한마디로 공화국에서 즐기는 “왕놀이”다.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그 어느 것도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순진무구이다. 자신이 앉아 있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비롯된 권능만 따지고 있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탓을 할 뿐이다. 지식이든 기술이든 깜냥이 안되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주어진 권능조차 무시하고 전지전능한 신처럼 세상을 굴림하려는 격이다.  

누가 권위를 허물었는가? 거울을 보라! 

모두 똑같은 정신줄이다. 권위가 아랫사람의 수용여부에 달려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앉아있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권위가 변화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 자리에 앉은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뼛속 깊이 깨닫는데 게으르고 권능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그 자리가 제공한 권능만 믿고 기고만장하여 무슨 의사결정(명령)이든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아랫사람은 무조건 그 의사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억압하고 탄압하여 아랫사람들의 신망을 잃을 자들이다. 권위 잔고는 0을 지나쳐 마이너스가 된다. 그래서 더 자신의 권위에 집착한다. 헛된 무리수를 반복하여 쉼없이 아랫사람을 못살게 들볶는 자들이다. 

과연 누가 그들의 권위를 허물었는가? 누가 그들의 권위 점수를 깎아먹고 잔고를 바닥내었는가? 그들의 명령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인가? 자신의 수용영역을 벗어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아랫사람인가? 못난 윗사람들은 흔히 그런 아랫사람들을 잡아다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며 호통을 친다. 하지만 그 “불경죄”는 기껏해봤자 자신의 책임을 피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권위를 훼손한 것은 아랫사람이 아니라 서류상 권위만 믿고 날뛴 윗사람 자신이다.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이 그 자리의 무게에 미치지 못해서 자리가 주는 권능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다 까먹은 까닭이다. 백성에게 신망을 잃은 왕의 권위가 어떠한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와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버린 이승만을 보라. 그런 못난 왕(혹은 왕노릇을 한)을 험하게 욕한다 한들 누가 백성을 탓할 것인가? 왕이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스스로 거울을 보라. 거기에 권위를 갉아먹은 암종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반성문에서 이런 내용을 적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비판을 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아서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면, 그런 권위는 내세울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만일 자신의 권위가 훼손되고 무너졌다면, 남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런 것이라고.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스스로 못난 짓을 한 결과라고. 그러니 남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봐 반성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얼마나 합당하고 정당한 의사결정을 했는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협조를 구했는지, 얼마나 평소에 언행을 조심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이다.

수용영역과『 맹자』의「양혜왕」4장 2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의 폭과 크기는 조직이 제공하는 대가가 조직구성원이 기여하는 노력과 희생보다 얼마나 큰 큰가에 달려있다 “... the degree to which the inducements exceed the burdens and sacrifices which determine the individuals’ adhesion to the organization” (Barnard 1968: 169). 또한 명령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강제력 “the sanctions wiich authority has availabel to enforce its commands”에 따라 결정된다 (Simon 1997: 10). 예컨대, 군대같은 조직은 강제력(처벌)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조직에 비해 수용영역이 더 넓다 (p.186).   

하지만 마피아나 야쿠자가 아니라면 일반 조직에서 권위라는 이름으로 아랫사람을 총칼로 겁박하고 주먹으로 때려서 일을 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군대에서도 군법과 규정에 따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무 명령이나 내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Simon (1997: 10)은 “... the superior does not seek to convince the subordinate, but only to obtain his acquiescence”라고 적었다. 설령 부하가 상급자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할 수 없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묵인(acquiescence)이다. 상급자가 평소에 올바르게 행동하여 권위를 충분히 벌어놓았다면 전시에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라는 명령도 부하들이 순응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80년 5월 게엄령이 선포된 광주에서 공수부대 지위관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고 지시한 것은 정당한 명령이 아니다. 어린 애들도 본능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명령이 아닌 장병들의 수용영역에서 한참을 벗어난 사실상 폭력이고 고문이다. 권위도 뭐도 아닌 그냥 살인마의 가혹한 강요일 뿐이다. 

어떤 자리에서 비롯된 권능과 강제력 같은 공식성 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개인 능력에 따라서 아랫사람이 인정하는 수용영역이 달라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서 나는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는『孔孟』「梁惠王」下 4장 2를 떠올리곤 한다. 이문영 선생님은 이 구절을『孔孟 』를 꿰뚫는 문장으로 보았다 (1996: 74, 293, 606; 2001: 70, 147). 나는 이 문장이 Barnard와 Simon의 수용영역과 맥락이 같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못얻었다는 것은 上이 제공하는 서비스(정치, 경제, 사회 등)가  民이 기대하는 최대치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民이 上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上이 民과 同樂하지 않는 것은 上의 최소치이고 同樂하는 것이 최대치이다. 그 최소치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民이 上을 비난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上이 최소한 이상을 해야 할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벗어나 극단에 이르면 民이 난동을 부리는 것이고, 上이 패도질을 하는 것이다. 이러니 양극단을 경계하는 선생님의 최소주의를 참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끝주


1) 『인간 종교 국가 』(2001)에 나오는 “행태론 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시몬과는 달리 왈도는 정치학을 공부한 행정학자로서...”(436쪽)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Herbert A. Simon (1916-2001)은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정치학은 물론 경제학, 인공지능, 심리학, 컴퓨터학 등으로 학문 지평을 넓힌 분으로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Barnard, Chester, I. 1968. The Functions of Executiv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Fry, Brian R. 1989. Chester Barnard: Organizations as Systems of Exchange. In Mastering Public Administration: From Max Weber to Dwight Waldo. 156-180. Chatham, NJ: Chatham House. 

Golembiewski, Robert T., and Karl W. Kuhnert. 1994. Barnard on Authority and Zone of Indifference: Toward Perspectives on the Decline of Managerialism.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Administration17(6): 1195-1238. 

Simon, Herbert A. 1997. Administrative Behavior, 4th ed. Free Press.



원문: 박헌명. 2016.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 <최소주의 행정학> 1(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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